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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라노 앨범·육성 秘話

정순태   |   2003-05-07 | hit 15300

필자가 중·고교를 다녔던 부산의 龍頭山공원 밑에도 「노라노 양재학원」이 있었다. 1963년 대학에 진학한다고 上京해 보니 西大門 일대에만 해도 두어 곳에 「노라노 양재학원」이란 간판이 붙어 있었다.

「노라노」가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의 이름이라고 짐작은 했지만, 그 이상은 몰랐다. 어이없게도 姓(성)은 「노」요, 이름이 「라노」 쯤인 것으로 잘못 알았다. 그런 게 아니라 먼저 붙은 「노라」가 이름이고 뒤의 「노」가 姓이란 사실은 곧 깨닫게 되지만, 그녀가 「노라노 양재학원」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고 그 경영자들이 「노라노」라는 이름을 무단 사용했다는 사실은 이번에 盧여사를 인터뷰하고 난 뒤에야 비로소 알게 되었다.

그야 아무튼 그런 상호 때문에 「노라노」는 소시적부터 필자의 머리 속에 한국 패션계를 대표하는 이름으로 깊게 각인된 것이었다. 그런 「노라노」를 다시 필자의 머리 속에서 출력하게 된 데는 이런 사연이 있다. 『月刊朝鮮이 우리 사회 원로들의 삶과 업적을 재조명하는 기획기사를 연재한다면서 왜 여성 원로는 한 분도 나오지 않느냐』는 한 독자의 이유 있는 지적을 받은 때문이었다.

그러면 누구를 먼저 선정할 것인가? 많은 여성 원로들의 이름들이 떠올랐지만, 그것이 오히려 헷갈리게 했다. 그래서 金炯國 미술팀장, 崔金順씨, 李相姬씨 등 동료들과 일부러 점심을 함께 하면서 『누가 좋겠느냐』고 물었다. 누군가가 『노라노가 좋다』고 운을 떼니까 다들 『좋겠다』고 동의했다.

『입센의 명작 「人形의 집」에서 「노라」는 인습의 굴레를 걷어차고 여성해방을 선언한 여성이 아니냐. 여성의 독립을 상징하는 이름 「노라」가 좋다. 노라노는 한국의 여성들에게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사람이 살아가는 데 필수적인 세 가지가 衣食住(의식주) 아닌가. 50여 년이나 「노라노의 집」이란 간판을 달고 옷 만드는 외길을 걸어온 匠人(장인) 노라노를 만나면 뭔가 배울 것이 있을 거다』






소유욕 없는 自由人

동료들은 필자에게 『인터뷰하는 날엔 옷을 잘 차려 입고 가라』는 유별난 응원까지 했다. 동료들에게는 노라노 여사와 인터뷰할 때 필요한 질문 문항을 세 개 이상씩 써달라고 부탁했다. 그리고는 「노라노의 집」에 전화를 넣었다. 부재중이서 직원에게 노라노 여사의 응답전화를 부탁했다.

그러나 응답전화가 없었다. 이틀 후 다시 전화를 넣었다. 수화기를 통해 들려오는 노라노 여사의 목소리는 높고, 말끝이 「죠」, 「거든요」 등등 봄날의 종달새 같은 서울말씨였다. 이것이 그냥 헤는 나이로 금년 76세 할머니의 목소리인가? 누가 노라노 여사인 체하는 것이 아닐까 하는 의심까지 날 정도였다. 어떻든 다음날 오전 9시30분 「노라노의 집」에서 만나자는 약속을 했다.

필자는 패션에 대해서 뿐만 아니라 서울 江南 지리에 관한 감각도 둔하다. 「노라노의 집」이 있다는 강남구 청담동 패션거리로 찾아갔지만, 거기가 거긴 것 같아 쉽게 찾지를 못했다. 휴대전화로 다시 물어본 끝에 겨우 「노라노의 집」 앞에 섰다.

「노라노의 집」은 지중해 연안 휴양지 별장 모습의 하얀색 4층 건물이다. 여직원 한 사람이 문 앞에 나와 기다리고 있다가 『月刊朝鮮 기자냐』고 물었다. 그렇다니까 3층으로 안내했다.

라운드 테이블을 사이에 두고 노라노 여사와 마주 앉았다. 검정색 재킷에 바지 차림인 노라노 여사는 연세가 무색할 만큼 활기찼다. 가슴 아래까지 늘어뜨린 펜던트에는 2차색의 기하학적 무늬가 은은하게 새겨져 우아했다.

엉겁결에 던진 필자의 첫마디는 『참, 곱습니다』였다. 『그렇게 보여요?』라고 받는 노라노 여사의 표정은 소녀처럼 밝았다. 165cm 전후의 키, 군살도 없어 아직도 날씬했다. 세월의 나이테만은 어쩔 수 없는 듯 목덜미를 스카프로 살짝 가렸지만, 화장하지 않은 얼굴은 해말갛다.

―건강하게 사시는 방법이 무엇입니까.

『뭐니뭐니 해도 욕망을 버리고 도전적으로 사는 겁니다』

―욕망이 없는 사람이 도전적일 수가 있겠습니까.

『돈을 벌겠다, 이름을 날리겠다고 욕심을 부리면 피곤해지기만 하죠. 아무도 안 믿겠지만, 나는 소유욕 같은 것 없어요. 소유욕 없으니까 백수건달이며 自由人이죠. 욕심 많은 사람들, 빨리 죽데요. 욕심이 바로 스트레스예요. 전 스트레스 없어요. 왕년에 자기의 인기나 능력이 최고였다는 자부심은 버려야 해요. 그러면 세계가 보입니다. 과거에 매달리면 안 보이죠. 분수 지키면 추락할 일도 없어요. 챌린지(도전), 그 자체에 의미를 두고 자기 일을 열심히 하면 그 결과와 상관없이 행복해지죠』


아령운동

―40代만 되어도 일자리에서 추방될까봐 전전긍긍하는 것이 오늘의 세태인데, 선생님처럼 오래오래 현역으로 일할 수 있는 비결은 무엇입니까.

『일과 사람, 그리고 옷을 유별나게 좋아하는 성격 때문이죠』

―까다로운 고객들을 만나면 피곤하지 않습니까.

『사람은 정도의 차이는 있지만, 누구나 장·단점을 갖고 있죠. 나는 그 사람의 단점이 아니라 장점하고만 사귀니까 피곤할 일이 없어요』

―자신의 일과 취미를 일치시킬 수만 있다면 행복하겠지만, 그것이 어디 쉽겠습니까.

『난 일생 손으로 일한 것뿐이어요. 고객이 원하는 옷을 즐겁게 만들어 줬고, 앞으로도 계속하는 거예요. 비즈니스를 하면서도 이런 생각만은 확고하죠. 「더 좋은 옷을 더 싸게 입히자」. 이것이 나의 원리원칙입니다. 난 젊어서는 하루 너덧 시간만 자고 일했고, 지금도 하루 9시간씩은 일하죠. 일을 겁내지 않고, 바빠도 바쁜 척 티를 내지 않죠. 하기야 밤샘 일을 밥먹 듯했던 옛 맞춤복 시대에 비하면 요즘은 놀고 먹는 셈이에요』

―그렇게 일하려면 체력이 뒷받침되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나, 원래 운동 좋아해요. 여고 시절엔 스케이트 선수로서 漢江대회에 출전하기도 했죠. 요즘도 아침에 맨손체조도 하고, 요가·지압도 하고, 자전거도 타고, 아령도 드는데, 모두 해서 45분쯤 걸려요. 일주일에 두세 번은 인근 도산공원에 가서 걸어요. 예순다섯까지 15년간 북한산에 갔고, 聞慶(문경) 새재도 참 좋아했어요. 요즘은 꼭대기에 오르면 허리가 아파서 등산은 안 하구요』

―아령 운동을 지금도 하시는 이유가 뭔데요.

『(자신의 팔뚝을 툭툭 두 번 치며) 여기 근육이 발달해야 슬리블리스(소매 없는 옷) 입을 수 있죠』

나이 76세의 어른과 만나 건강을 화두로 끄집어 낸 필자가 그 언저리에서 공교롭게도 기침을 몇 차례 하자 노라노 여사는 대번에 충고했다.

『담배 많이 피우죠? 나도 체인 스모커였는데, 기관지에 무리가 온다는 느낌을 받고 연한 담배를 파이프에 끼워서 피우면서 조금씩 개비 수를 줄여가다 예순에 딱 끊었어요. 鄭위원도 끊으세요, 담배만 끊으면 장수할 얼굴인데』

―어이구, 사주 관상도 보십니까.

『나, 우리 사회에서 가장 넓은 계층의 사람들과 상대해 온 사람 아녜요. 가난하고 불우한 여성들의 일손들을 모아 최상류층까지의 옷을 지어 왔으니까요. 사람 얼굴을 보면 대충 짐작해요. 그 공부도 좀 했거든요. 암튼(아무튼) 이따 가실 때 생년월일과 생시이나 적어 놓아요. 내가 오늘 밤에 잘 봐 놓을 테니까』


초대 방송국장과 초대 아나운서의 딸

우리 시대 最高 最古의 디자이너로 손꼽히는 노라노는 어떤 출생과 성장 배경을 지닌 인물일까?

노라노는 1928년 3월21일 서울 종로구 桂洞(계동)의 유복한 집안의 둘째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盧明子(노명자).

일본 구라마에(鞍前) 공과대학을 졸업한 아버지 盧昌成은 서울에서 처음 개국한 방송국에서 기자재의 조립 설치를 담당한 엔지니어였고, 8·15 광복 직전까지 한국어 방송 담당 부장으로 재직했다.

『일제 때, 鄭飛石(정비석)·白鐵(백철)·韓雲史(한운사)·毛允淑(모윤숙) 선생 등 문인들이 방송국에서 촉탁으로 일하며 가끔 우리 집에도 들렀어요. 나를 귀여워해 주시던 그 분들을 나는 「아저씨」, 「아주머니」라고 부르며 따라다녔죠』

노창성은 광복 후 초대 KBS 방송국장이 되어 일본인들이 물러난 자리에서 우리나라 사람들만의 기술로 방송이 나가게 하는 데 있어 절대적인 공로를 세웠다.

일본 東京女醫專 출신으로 약사였던 어머니 李玉慶은 한국인 최초의 아나운서로 활약, 온 장안에서 멋을 꽤 낸다는 신사들의 심금을 울렸던 新여성이었다.

『출근하는 우리 어머니를 뒤따라 팬들이 방송국으로 몰려와 극성을 부리는 바람에 스튜디오의 유리까지 부숴지는 일까지 벌어졌다는 거예요. 우리 어머니는 洋裝(양장) 新여성인데다 조선어와 일본어를 능숙하게 구사하고 성격도 활달하셨거든요. 우리 방송 사상 남녀 통틀어 첫 아나운서로서 절정의 인기를 누리셨죠. 우리 9남매를 거두는 일만으로도 너무 바빠 2년만 하고 그만두셨어요』

그녀의 어머니 李玉慶(고인) 여사의 한창 때 사진을 보니 과연 대단한 미인이었다.


취학 전부터 新劇에 몰입

『내가 덕수공립보통학교(지금의 덕수초등학교) 2학년 때(1935) 학부형회에 오시던 어머니의 모습이 생각나요. 어머니가 당시 유럽에서 유행하던 「로 웨이스트」에다 밑에 주름이 잡힌 원피스를 입고 양산을 들고 나타나셨는데, 전교생들이 구경하려고 교문 앞으로 몰려나갔죠』

盧明子는 문화적 세례를 일찌감치 받았다.

『저는 동양극장에서 新劇이란 신극, 흥행이란 흥행은 다 보고 자랐어요. 아버지의 직책 때문인지 극장 측에서 우리 가족에게는 항상 특별석을 배정해 주었거든요. 학교에 들어가기 전부터 벌써 외할머니를 따라 단골 관객이 되었는데, 슬픈 장면만 보면 자꾸 훌쩍훌쩍 울어서 가족들로부터 「고무신짝」이라는 별명을 얻었지요.

나는 崔承喜(최승희)의 무용에 완전히 넋을 잃었죠. 완전 나체의 최승희가 구슬로 겨우 몇 곳만 살짝 가리고 춤추는 모습은 정말로 환상적이었어요. 그녀처럼 미세한 손놀림 하나만으로 관객을 휘어잡는 무용의 천재는 아직도 만나보지 못했어요.

훗날 프랑스에 가서 리도 춤을 관람했는데, 그때 「최승희의 부채춤이 바로 저거다」라고 연상되었어요. 최승희의 작품들은 불문학자였던 그녀의 남편인 安漠(안막)의 구상에 따른 것이라고 생각되어요. 최승희 부부는 광복 직후 「사회주의 조국 건설」이란 선전·선동에 넘어가 월북했는데, 北에서 그 아까운 재능을 썩히고 말았어요. 歷史(역사)의 줄을 잘못 선 거죠』

이어지는 노라노 여사의 회상.

『우리나라 시스터즈의 元祖인 「저고리시스터즈」의 공연도 대단했죠. 「저고리시스터즈」는 조선악극단의 金海松씨가 조직하여 해외공연도 자주 했는데, 李蘭影(이난영), 張世貞(장세정), 劉貞姬(유정희), 홍청자, 서봉희씨가 그 황금멤버였어요. 난, 특히 피겨 스케이팅의 명수이기도 했던 팔등신 美人 유정희씨의 대단한 팬이었고요』

개화 가정에서 자란 盧明子는 초등학교 재학 때부터 튀는 소녀였다. 전교에서 양장을 한 여자 아이가 두어 명밖에 안 되던 시절, 盧明子는 그 중 하나였다.

『내가 정3품관의 부인인 외할머니와 그 외동딸인 어머니의 손재주를 내림으로 받았나 봐요. 초등학교 4학년 때 벌써 어머니의 헌 치마를 뜯어서 내 손으로 내 옷을 만들어 입었거든요. 그렇다고 내가 뭐 장래에 디자이너가 되겠다는 꿈 같은 것을 가졌던 건 아니에요』

盧明子는 학과는 물론 음악, 무용, 미술에도 재능을 보여 일찌감치 「팔방미인」이란 별명을 얻은데다 교내 글짓기 대회에서 1등을 하고, 육상·스케이트 선수로서 이름을 날리기도 했다.


夢陽의 딸 呂燕九와는 소꿉친구

―夢陽 呂運亨(몽양 여운형)의 딸로서 월북하여 북한의 고위직을 지냈고, 1991년 남북 여성토론회 북한 대표로 서울에 다녀갔던 呂燕九(여연구)가 어릴 때 소꿉친구라는 신문기사를 읽은 적이 있는데요.

『燕九와 나는 아래윗집에 살았어요. 일곱 살 무렵에 동무가 되어 내가 열일곱 살 때 우리 집이 이사를 가기 전까지 함께 놀았죠. 燕九네 4남매와 우리 9남매는 서로 엇비슷하게 나이가 맞아 또래 친구였어요. 소학교 5∼6학년 무렵에는 中日전쟁이 한창이어서 그랬던지 아이들도 곧잘 전쟁놀이를 했죠. 괄괄했던 燕九와 내가 대장 노릇을 하면서 남동생은 병정, 여동생은 간호사로 거느렸어요. 당시 조선중앙일보 사장이던 몽양 선생은 우리 아버지와 친구 사이였는데, 우리 아버지보다 더 멋쟁이였어요』

―기록에 따르면 夢陽은 만능 스포츠맨인데다 대단한 멋쟁이였더군요.

『어느 핸가 여름에 두 집 식구들이 함께 三淸洞 야외 수영장에 놀러갔는데, 그때 夢陽 선생의 차림이 아직도 눈에 선합니다. 헬멧에 사파리, 반바지, 스타킹, 구두까지 온통 하얗게 차려 입었어요. 언젠가 夢陽 선생은 당신 무릎에 날 앉히고 귀를 후벼 주시기도 했는데, 「내가 크면 이런 남자와 결혼해야지」라고 생각했어요』

―10여 년 전, 呂燕九가 북한 대표로 서울에 왔을 때 만나보셨어요?

『아뇨』

―왜요?

『서로 다른 길을 걸어와 다시 만나면 좋은 추억까지 망가뜨렸을 테니까요』

―그녀가 월북한 이유가 뭘까요?

『夢陽 선생이 해방정국의 와중에서 암살당하자 상심해서 北으로 넘어간 거죠. 원래 燕九는 공산주의 이념 같은 것에는 관심조차 없었어요. 암튼 그 집에 드나들던 젊은 좌익 학생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라고 생각되어요』

―수년 전에 한국일보 張明洙 사장이 방북해서 呂燕九를 만났더니 『明子 옷을 한 번 입어 보고 싶다』고 했다더군요.

『그런 燕九가 심장병으로 죽었다는 소식을 뒤늦게 전해 들었어요. 가슴이 찡했어요』

경기고녀에 진학한 盧明子양은 스케이트 선수로서 漢江에서 열린 빙상대회에 참가하여 이름을 날리기도 했지만, 어느덧 문학소녀가 되었다.

『여름방학 때, 대학에 다니던 친척 오빠가 시골집으로 내려가면서 우리 집에 많은 책을 맡겨 두었어요. 그래서 내가 이와나미분코(岩波文庫)나 철학서적들을 제대로 이해하지도 못하면서 닥치는 대로 읽다가 어느 결에 푹 빠졌죠. 당시 종로거리에는 야시장이 열려 헌 책을 많이 팔고 있었는데, 난 헌책방의 단골손님이었죠』

―소시적의 독서는 평생의 糧食(양식)이 되죠.

『여고시절의 독서가 후일에 歐美의 문화계·사교계에 출입하면서 내 상식으로도 그들과 대화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갖게 했어요. 이를테면 미국에서 에밀리 브론테의 原作을 영화화한 「폭풍의 언덕」을 보면서도 아, 저건 여고시절에 읽었던 「아라시노 오카」(の 岡)가 아니냐고 생각하니까 자신감이 생기더라구요. 오페라 「魔王」(마왕)을 보고 난 뒤에도 프랑스 사교계 사람들과 더불어 작곡가 슈베르트의 음악에 관해 대화할 수 있었거든요』

―일본인들이 일찌감치 번역 출판한 서양의 문학과 예술 서적에 단단히 신세를 진 셈이군요.

『참, 그 시절에 벌써 일본 사람들은 세계의 고전을 열심히 번역해서 싼 값으로 참 많이 발간했어요. 적어도 나는 그 책들의 혜택을 입었습니다. 이 점에 관한 한 나는 지금도 일본인들에 대해 고맙다는 마음을 지니고 있습니다』

―참, 여고시절에 만나 아직도 못 잊는 남학생은 없었습니까.

『아유, 그 시절에 그런 것 없어요. 경기고녀 4학년 때 경기고 학생이 발표한 글을 「못 썼다」고 비평한 게 탈이 되어 남학생들이 「건방진 여학생」을 잡으러 왔죠. 그때 마침 燕九네 집에 놀러 갔다가 「밖으로 나오라」는 말을 전해 듣고 나서는데, 燕九가 「明子가 맞으러 간다」고 호들갑을 떨데요. 마침 夢陽 선생이 그 말을 듣고 맨발로 뛰어나가 남학생들의 멱살을 잡아 끌고와서 내게 사과를 하게 했어요』




17세의 나이로 육군대위와 결혼

1943년 경기고녀 졸업을 앞둔 그녀에게 어머니는 자신처럼 일본에 유학 가서 약학을 공부할 것을 권했다.

『약학 공부는 내키지 않았지만, 일본에만 가면 문학이나 미술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라고 생각하고 준비했어요』

그러나 악화일로의 戰勢(전세)에 몰린 日帝는 조선 여학생의 일본 유학을 금지했다. 드디어 艇身隊(정신대)까지 모집하기 시작했다. 전국 방방곡곡에서 과년한 처녀를 둔 집안에서는 자칫 딸자식을 性노리개나 군수공장에 빼앗길세라 서둘러 혼인을 시키는 일에 골몰했다.

17세의 재원 明子에게는 여기저기서 혼담이 들어왔다. 드디어 신랑감은 사진으로만 본 24세의 명문가 청년으로 정해졌다. 신랑감 申應均은 1940년 일본 육군사관학교를 졸업하고, 포병 대위로서 포술훈련소의 교관으로 근무하고 있었다. 그는 후일 육군중장에까지 누진하고, 국방부 차관, 터키 大使 등을 역임한다.

신응균의 아버지는 일본 육사 25기 출신인 申泰英(신태영)이다. 신태영은 日帝 육군중좌로 예편했다가 태평양전쟁 말기에 再소집되어 海州기지 사령관으로 복무했다. 광복 후 그는 創軍期(창군기)의 육군참모총장을 거쳐 6·25 전쟁 때 申性模(신성모) 후임으로 국방부 장관을 역임한다.

『일본 유학의 꿈을 꾸어 오던 나는 일본에만 가면 그 가능성이 열릴 것이라고 생각했죠. 그래선지 사진만 보고도 그이에게 마음이 쏠렸던 것 같아요. 암튼(아무튼) 그이와 서울에서 결혼식을 올리고 기차를 타고 부산까지 내려가 거기서 釜關(부관)연락선을 타고 일본으로 건너갔어요. 만나는 사람 모두가 우릴 보고 왕족의 신혼여행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어요(당시 왕족의 자제들이 軍장교로 복무하는 경우가 많았다). 도쿄와 가까운 시즈오카(靜岡)의 고덴바(御殿場) 포술훈련소 장교사택에다 신혼살림을 차렸죠』


열아홉 살의 이혼녀

그러나 신응균 대위는 결혼 2주 만에 어린 신부를 남겨둔 채 오키나와 전선으로 전출되었다. 오키나와의 일본군은 상륙작전을 전개하는 미군의 大攻勢(대공세)에 玉碎(옥쇄)작전으로 저항하고 있었다. 그때 申대위는 백이면 백 살아올 가망성이 없는 것으로 보였다.

『그이의 본가에서도 유언장을 써놓고 출전한 아들이 살아 돌아오기는 어렵다고 본 것 같아요. 그래서인지, 시가 쪽에서 전사자 보상금 문제가 입에 오르더니 어느 날 갑자기 시아버지가 내게 「이혼을 하라」는 편지를 보낸 거예요. 시집과 친정에서 「하라」, 「안 된다」는 시비가 생겼어요. 보상금이 내게 돌아갈 것을 샘낸 것인지…, 암튼 그런 것에 신경을 곤두세울 만큼 어려운 시절이긴 했죠. 그래서 「내가 무슨 왔다갔다 하는 핸드백」이냐고 반항했어요』

―女權(여권)이 당당했던 친정집과 가부장적인 시집 사이에 벌어진 갈등이었군요. 그럼, 결혼 전의 꿈처럼 일본에서 문학 또는 미술 공부를 하실 생각은 없었습니까.

『이웃에서 가깝게 지내던 중좌 부인이 「너나 나나 과부 신세 틀림없다. 모녀처럼 의지해 함께 살자」고 하더군요. 그때 내가 그 부인의 말대로 일본에 남았더라면 디자이너로서는 더욱 성공했을지 모르죠』

그녀는 결혼 6개월 만에 혼자서 관부연락선 편으로 귀국했지만, 시가와 등을 지고 말았다. 죽은 줄만 알았던 남편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봄에 기적적으로 살아 돌아왔다. 오키나와 전선에서 소좌로 승진했던 그는 부대 궤멸 후 오키나와의 오지로 도피해 있다가 한국 출신은 수용하지 않는다는 美軍의 방침을 전해 듣고 은신지에서 나와 귀국했던 것이다.

신응균은 노라노의 新堂洞 친정집으로 찾아왔다. 그러나 때는 이미 늦어 있었다. 시댁으로부터 받은 정신적 고통으로 그녀의 마음은 굳어 있었다.

『그이를 따라 시가에 들어가면 내 장래가 뻔하지 않았겠어요? 이혼을 하고 나면 앞날이 미지수인데, 그래도 가능성은 있었던 거예요. 광복 다음해(1946) 여름에 나는 세상 사람의 비난 속에서 이혼이란 엄청난 일을 저지르고 독립을 선언했습니다. 여봐란듯 독립하여 시집 사람과 온 세상에 본때를 보이고 싶었던 겁니다. 그러나 친정에서는 쫓겨나게 되고 주위에는 도와줄 사람도 동정하는 사람도 없었어요. 독립하는 데 필요한 돈도 없었고, 물론 능력도 없었어요. 무엇인가 해 봐야겠다는 불타는 의지뿐이었습니다. 권투선수처럼 도전해 보기로 결심했습니다』

열아홉 살의 이혼녀 盧明子. 모두가 그녀를 외면해도 그녀에겐 뭔가 해낼 자신이 있었다.

『당시 여성이 시험을 쳐서 취업할 수 있는 곳은 美 군정청뿐이었고, 그곳에 취직하려면 영어회화와 영문 타이핑을 할 수 있어야 했어요. 3개월 동안 저는 영어회화책을 베고 자다시피 하며 열심히 공부했죠. 타이프는 현물을 빌려다가 실물 사이즈로 종이에 그대로 그린 다음 그 위에다 대고 연습을 했어요. 그 시절 타이프라이터는 미군부대 이외에서는 구경조차 할 수 없는 귀한 물건이었는데, 친척오빠가 미군부대에서 잠시 빌려 왔거든요』


「노라」라는 새 人生의 새 이름을 달고

―영어회화는 원래 잘 하는 편이었습니까.

『아니죠. 면접시험 때 시험관인 美軍 대위가 뭐라고 묻는데, 말이 빨라 통 못 알아 듣겠어요. 내가 너무 실망하는 표정을 지으니까 불쌍해서 합격시킨 것 같아요』

여고 때 읽은 입센의 소설 「人形의 집」의 여주인공 「노라」를 새 인생의 새 이름으로 달고 그녀는 다시 시작한다. 그녀는 美 군정청 외환은행의 행장비서로 취업했다.

『安國洞 외한은행장 사택에서는 주말이면 큰 디너 파티가 열렸어요. 저는 토요일 오후가 되면 그 사택에 파견되어 파티 준비를 도와야 했어요. 음식 마련, 테이블 세팅, 청소 감독까지 모든 일에 통역을 해야 했죠. 그러던 어느 날, 파티 준비를 막 끝내고 있으니까 美 군정청 재무부장님이 절 보고 「노라도 빨리 집에 가서 옷을 갈아입고 파티에 참석하라」는 거예요』

그녀도 파티의 손님으로 초청되면서 드레스가 필요하게 되었다. 이것이 그녀에게는 행운을 향한 길목이 되었다.

『난 어머니가 양장을 스스로 만들어 입는 것을 보면서 자랐거든요. 내가 일본에서 입던 기모노 옷감과 어머니의 치맛감으로 디너 드레스, 칵테일 드레스를 만들어 입었죠. 파티는 美 군정청 장관 사택을 돌아가며 열렸는데, 파티 때마다 나는 불려다녔어요. 美 군정청 재정부장의 부인이 한국인 3세였는데, 그 분이 「참 잘 차려 입는다」고 감탄하며 「어디서 맞춘 거냐」고 물어요. 「내가 직접 만든 것」이라니까 그 후 만나기만 하면 「디자이너가 되는 공부를 꼭 한번 해보라」고 권해요.

「디자이너」란 말, 그때 처음 알았어요. 여러 장관님들이 미국 대학 입학에 필요한 추천장을 써주셨고, 행장님이 한국 학생을 받아들일 회사를 주선해 주셨어요. 당시는 미국에 송금할 수 없는 때라 경제적으로 도와줄 수 있는 스폰서를 구해 주신 것이죠』

노라노 여사의 이어지는 회고.

『저에게 유학의 길을 열어 준 행장님을 훗날 다시 찾아가 뵙고 감사의 뜻을 표하니까 이렇게 말씀하시대요. 「너는 나에게 아무런 빚이 없다. 네가 발전하는 모습을 지켜보면서 난 충분히 행복했다. 그러나 너 자신이 빚이 있다고 생각한다면 그 빚을 다음 세대에 갚도록 해라」 저는 이 말씀을 평생 가슴에 새기고 나름대로 빚을 갚으려고 노력하는 삶을 살아왔어요』


自由人을 꿈꾸며 美國으로 유학

노라노는 광복 후 한국 여성으로는 두 번째로 미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고 한다. 첫 번째는 후일 「김자경 오페라단」을 이끈 金慈暻(김자경)씨였다.

『미국 가는 배편을 못 구해 쩔쩔 매고 있다가 우연히 김자경씨를 만났더니 「난 여객기 타고 내일 미국 간다. 여객기 다니는지 몰랐지, 넌 다음 편 비행기 타고 와」라고 일러 줬어요. 당시 편도 항공료가 1000달러였어요. 내겐 400달러밖에 없었는데, 어머니가 남에게 꾸어준 쌈짓돈 10만원을 되찾아 내 손에 꼭 쥐어 주시더군요. 그때 우리 돈 10만원을 환전하니 650달러쯤 되었어요』

自由人을 꿈꾸던 스물한 살의 노라노는 가능성의 땅 미국으로 건너갔다. 로스앤젤레스에 있는 「프랑크 왜건 테크니컬 칼리지」에서 디자인과 패턴 메이킹을 배웠다. 파트 타임으로 일하던 직장 「테벡 오브 캘리포니아」에서는 보조 디자이너로서 패션회사의 시스템과 실무를 빠른 속도로 흡수했다.

『미국에서는 벌써 모든 것이 분업이었죠. 나로선 한 분야만 배워서는 모든 걸 혼자 해야 하는 한국에 돌아와서는 일하기 어렵죠. 그래서 보스에게 간청하여 全 부서를 3개월씩 돌아가면서 실습하기로 했어요. 제품 포장에서부터 파워 미싱, 다림질 파트까지 옷 만드는 모든 과정을 배웠어요』

―대학 공부는 잘 하셨습니까.

『그래도 제가 한다는 경기고녀에서 이미 대수·기하를 열심히 배웠으니까 미국인 학생들보다 못할 게 하나도 없었죠. 디자인을 하려면 대수·기하가 필수적이거든요』

―데이트 할 시간도 없었겠네요.

『왜요? 한 번은 대학축제의 파트너로 초청받었어요. 그가 내 아파트까지 승용차를 2시간이나 몰고 와서는 시내 음식점으로 데려가 저녁을 먹이고 파티장으로 데려가겠대요. 제법 근사한 레스토랑에 갔는데, 난 제일 비싼 스테이크를 시켰죠. 아, 그런데 그는 「먼저 먹었다」면서 자기 음식은 주문을 하지 않는 거예요. 「그런가 보다」 하고 나만 맛있게 먹었죠.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주유소에서 아르바이트를 하는 어려운 고학생이라더군요. 암튼 그와 나는 레스토랑을 나와 파티장으로 달려갔는데, 파티시간이 30분밖에 남지 않아 열심히 춤만 췄죠. 그리고는 다시 2시간 동안 차를 몰아 내 집에 데려다 줬는데, 쫄쫄 굶은 그가 얼마나 배가 고팠겠어요. 하하하…』

―그 사람이 누군지 궁금합니다.

『한국 사람이 아니니까 누구라고 해도 모를 거예요. 그 시절엔 그런 騎士道(기사도) 정신을 가진 한국 남성은 별로 없었어요』

―우리 유학생들과는 만나지 않았습니까.

『만났죠. 시간을 낼 수 있는 토요일 오후에 곧잘 한국 유학생 10여 명을 내 아파트로 초대해서 저녁 한 끼를 대접했죠. 슈퍼마켓에 가서 고기 내장과 뼈다귀를 거의 공짜로 사다가 푹 끓여서 곰국을 만들고, 양념에 버무린 햄버거 고기를 半인치 정도의 두께로 오븐에 담아 불고기로 굽고, 잡채와 김을 올리면 유학생들이 그렇게 맛있게 먹을 수 없었어요.

어릴 때 요리 잘 하는 외할머니가 나를 끼고 사셨어요. 그 덕에 난 음식솜씨가 좀 있거든요. 좋은 직장에서 파트 타임 일을 했기 때문에 다른 유학생에 비하면 난 굉장한 부자였고요. 호호호. 난, 그 시절에 벌써 마이카를 몰고 다녔어요』

이어지는 그녀의 회고.

『1937년産이었니까 고물차지만 시보레였죠. 250달러에 사서 신나게 몰고 다니는데, 회사 사장님께서 「보험에 들었느냐」고 물어요. 그때 내가 보험이 뭔지 몰랐어요. 그랬더니 사장님이 기겁을 하며 「인생을 망치려고 그러냐」면서 얼른 보험에 가입시켜 주셨어요』


6·25 직전 귀국, 신당동에서 개업

유학한 지 딱 2년 후 디자이너가 되는 全과정을 마친 노라노는 『여기서도 성공할 수 있으니 귀국하지 말라』는 보스의 만류를 뿌리치고 귀국했다. 그러나 당시 국내에서 양장은 아직 낯선 것이었다. 1950년 초, 그녀는 서울 신당동 친정집 1층을 개조하여 「노라노의 꾸뜨리에(주문복집)」를 개업했다. 외국 외교관 부인, 미군 고급장교 부인들이 단골이었다.

『그때 우리나라의 1인당 GNP라 해봐야 고작 87달러였죠. 명동에서 옷 한 벌의 공임으로 1달러를 받는 데 비해 나는 10달러를 받았지만, 고객이 끊이지 않았어요. 아직도 잊을 수 없는 일이 많았죠. 미국인이 한 벌에 200달러나 되는 최고급 캐시미어 옷감을 가져와 래글런 슬리브 코트를 지어달라는데, 재단사가 벌벌 떨며 가위질을 못해요. 세 조각으로 잘라야 하는데 실패하면 옷감을 못 쓰게 되거든요. 내가 재단사를 밀어제치고 슥슥 가위질을 했어요. 우리 직업이 인명을 다루는 의사보다는 나아요. 실패하면 200달러 물어 주면 되는 것 아녜요. 호호호…』


연극·발레·오페라 등 무대의상 만들어

이어 문화계·예술계 사람들이 그녀가 디자인한 옷을 입기 시작했다. 노라노는 李海浪(이해랑)·金東園(김동원)·崔銀姬(최은희)·黃貞順(황정순) 등이 배우로 활약한 극단 「新協(신협)」의 전속 디자이너가 되었다. 연출 柳致眞(유치진), 무대장치 金貞桓(김정환: 당시 서울大 미대 교수)이었다. 신협은 「햄릿」을 공연했다.

『내게 「햄릿」은 열 번도 더 본 연극이죠. 난 정성을 다해 그 의상을 만들었어요. 「죽느냐, 사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로 시작되는 그 길고 무거운 독백을 숨 한 번 몰아쉬지 않고 연기하던 金東園씨의 「햄릿」은 연극 팬들을 열광케 했습니다』

―가난했던 그 시절, 의상비는 잘 줍디까.

『연극계는 의상 예산을 늘 가능한 한 최소액으로 줄였죠. 그러나 극단 예산이 없더라도 나로선 「가난한 王子」를 만들 수는 없잖아요. 내가 가지고 있던 「비로드(벨벳)」 옷감으로 햄릿의 의상을 만들었어요. 감색 「비로드」 겉저고리에 흰 타이즈, 누빈 천으로 안을 댄 망토를 입고 막이 내릴 때마다 굵은 땀방울이 뚝뚝 떨어지던 김동원씨의 얼굴, 순백의 조세트(속이 비치는 얇은 옷)로 몸을 휘감고 가련하게 몸부림치던 최은희씨(오필리아 役)의 모습이 아직도 눈에 선해요.

왕비로 扮(분)한 황정순씨가 호화로운 의상을 입고 매우 마음에 들었던가 봐요. 그 의상은 고심 끝에 미군부대에서 흘러나온 은색 포장지로 주름을 잡아 네크 라인을 장식한 거예요. 헌 은색 포장지가 왕비의 권위를 만든 거죠. 도시락을 싸와 먹던 시절에 황정순씨는 한동안 매일 아침 내게 와서 커피를 사주셨어요. 김동원씨는 무대에서 그 옷을 10년이나 입으셨죠』

―디자이너로서 노라 선생님의 역사는 예술계 인사들과 더불어 시작된 셈이군요.

『6·25 전쟁 직전, 발레 「人魚공주」의 의상도 만들었죠. 잇달아 陳壽芳(진수방)씨의 스페인 舞姬(무희) 의상, 金慈璟씨의 오페라 「나비부인」의 의상을 계속 만든 거예요』

―우리에게 생소한 외국의 의상을 어떻게 만드실 수 있었습니까.

『李海浪씨가 간디로 분한 연극이 있었죠. 내가 당시 한국에 와 있던 印度 대표에게 가서 「사리」 입는 법을 배웠어요. 공연이 계속되는 동안 매일 한 번씩 이해랑씨에게 가서 옷을 입혀드렸어요』


피란 시절 울면서 몰핀 구하러 다녀

그러다 6·25전쟁이 터졌다. 전쟁도 노라노의 열정을 막아설 수 없었다. 피란 수도 부산 광복동의 댄스홀 옆에다 「노라노의 집」을 열고 처음엔 주로 직업 댄서들의 드레스를 만들었다.

『피란 수도 부산의 광복동 거리를 지나다 서울에서 알던 흥행사를 우연히 만나 쇼의상을 주문받았습니다. 인민군이 내려오던 상황에서 의상을 만들 옷감이나 부자재가 있어야죠. 특히 쇼의상에 달아야 할 스팽글 종류를 구할 수조차 없었어요. 담뱃갑 속 은종이를 잘라 모아 스팽글 代用으로 썼죠. 불안한 피란 생활에서도 사람들은 음악과 춤을 즐겨 흥행은 성공했으나 代價를 받기 어려웠어요. 그러나 의상을 디자인할 수 있고 만들어 입힐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행복했어요』

노라노는 이어 백설희·나애심 등 인기가수의 무대의상을 만들었다. 이어 유창한 영어를 활용하여 미군을 위한 공연단의 의상을 도맡았다. 그리고 국군의 부상병을 보살피는 행렬에도 발벗고 나섰다.

『우리 軍 병원에서는 부상병들의 팔 다리를 막 자르는데, 몰핀(마취제)이 동이 났어요. 내가 미군 야전병원들을 엉엉 울면서 찾아다니며 몰핀을 구해 온 일이 생각납니다. 괴로워하는 부상병을 보면 내가 의사 공부를 안 한 것이 후회스럽더군요』

―혹시 그러던 무렵에 前남편 신응균 장군을 만난 적은 없었습니까.

(일본군 소좌 경력의 신응균은 광복 이듬해인 1946년 봄에 귀국, 진명여고 수학교사로 취업했다. 그러다 2년 후인 1948년에는 뜻밖에도 국군의 전신인 조선경비대 항공기지부대에 2등병으로 입대했다. 곧 육군 소위로 임관되긴 했지만, 그로선 파격적인 행보였다. 그러나 포병 엘리트였던 그는 1955년 육군중장이 되었다)

『그이는 마음이 참 여린 분이었어요. 진명여고 수학 교사 시절, 신당동 내 집을 찾아와서 「부모님이 신부감을 정해 놓고 새 장가를 들라 하시는데, 어떻게 하면 좋겠느냐」고 해요. 내게 쫓겨났어요』


연예계의 사랑을 독차지하던 시절

부산 피란살이를 거쳐 1952년 서울로 돌아온 노라노는 충무로에서 개점, 그녀의 전성시대를 열어간다. 장안의 거의 모든 가수, 연극배우, 영화배우들이 노라노의 옷을 입으려고 줄을 섰다. 가수 박단마, 영화배우 최은희·황정순·김지미·도금봉·조미령·엄앵란씨 등이 노라노의 옷을 사랑한 고객들이었다.

『막 환도했을 무렵, 김동원씨 주연의 「오델로」를 잊을 수 없어요. 오델로는 웅장하게 보여야 하는 역이죠. 오델로 장군의 케이프(소매 없는 겉옷)를 만들어야 하는데, 전쟁 때라 옷감이 없어요. 생각 끝에 미군 담요를 구해서 만들고, 겉에는 코트 안감을 붙여서 색깔을 냈죠.

김동원씨가 그 케이프를 걸치고 무대에 서면 무대가 꽉 찼어요. 아, 그런데 어느 회 공연에서 객석으로 들어가 무대를 쳐다 보니 케이프를 벗고 타이즈 바람으로 서 있는 거예요. 그건 오델로가 아니에요, 영락없는 김동원씨죠. 무대 뒤로 달려가 「꼭 케이프를 입으시라」고 권했어요. 나는 연극에서 의상이 얼마나 중요한 역할을 하는지 그때 배웠어요』

노라노는 당시 흥행계에서 가장 히트를 치던 林春鶯(임춘앵) 국악단의 의상도 만들게 되었다.

『新協의 연극 「銀粧刀(은장도)」의 연출을 맡은 유치진 선생이 「공주의 침실 의상을 섹시하게 디자인하라」고 주문하셨어요. 나로서는 처음으로 사극 의상을 맡게 되어 온 정열을 쏟아서 디자인했어요.

이걸 본 임춘앵 국악단에서 「우리 의상도 만들어 달라」고 해요. 임춘앵씨네 唱劇(창극)은 국도극장에서 공연되었는데, 악극단의 창고에 가보면 값비싼 비단과 뉴똥이 창고에 가득차 있었어요. 난 마음대로 골라 의상을 만들 수 있었죠. 그때 동대문시장·남대문시장 옷감 상점 아줌마들이 唱劇의 열렬한 팬들이라 옷감을 필로 선사하니 흥청거릴 수밖에요. 당시 明洞 국립국장에서 공연하던 新協 배우들의 의상은 겨우 인조견으로 만들었어요.

두 단체의 멤버들이 먹는 것도 대조적이었죠. 국악 쪽에서는 그릴에서 돈가스 같은 것을 배달시켰는데, 신협 쪽에서는 도시락을 싸들고 와서 먹었어요. 암튼 난 양쪽을 다 드나들면서 의상을 해주었는데, 순수예술을 하는 사람은 그때 어찌나 가난했던지…』

노라노는 은장도 이후 영화의상 쪽으로 넘어와 조미령 주연의 「왕자 호동」, 최은희의 「꿈」, 김지미의 「양귀비」 등의 의상을 만들었다.

―역사물에서 의상을 만들 경우 늘 문제가 되는 것이 考證(고증) 아닙니까.

『당시 영화계는 자금난에 허덕이면서도 「왕자 호동」이란 대작을 만들었죠. 그때 나는 「왕자 호동」에서 樂浪公主(낙랑공주) 역을 맡은 趙美鈴(조미령)씨의 옷을 디자인했는데, 考證이 안 됐다는 비판이 나왔어요. 하지만 漢四郡(한사군) 시절의 의상을 고증할 자료가 어딨어요? 나는 「옷을 꼭 그 시대의 것처럼 만들어야 한다면 왜 臺詞(대사)는 그 시대의 말로 하지 않느냐」면서 비판자들의 입을 틀어막았죠』


음악가 尹伊桑과 유럽 同行

1956년, 노라노는 파리 아카데미 줄리앙 예술학교에서 수학하기 위해 프랑스로 건너갔다. 6개월간의 연수였다고 한다.

『홍콩에 가서 1주일을 대기한 끝에 프랑스行 여객기를 탔죠. 승객들 중에 한국인이라고는 음악가 尹伊桑(윤이상)씨와 나, 둘뿐이었어요. 윤이상씨에게 「뭐 하러 가시느냐」 물으니 「음악 공부하러 간다」고 해요. 그리고는 「오페라 춘향전을 작곡하기 전까지는 귀국하지 않겠다」는 결심까지 털어놓더군요.

여객기가 중도에 바그다드와 이스탄불에 기항하고 해서 파리 공항까지 2박3일이 걸렸죠. 공항에서 파리 시내로 들어가 예약해 둔 그랑데 호텔에 들었는데, 예약을 해두지 않았던 尹선생은 멋 모르고 나를 따라와 그 비싼 고급호텔에 들더군요. 암튼 그동안 여행을 함께했으니 그 분으로부터 「커피 한 잔 하러 로비로 내려오라」는 구내 전화쯤은 올 줄 알았죠. 그런데 아무 소식이 없었어요』

―윤이상씨는 수년 전 별세했죠. 그 분과는 그때 그것으로 끝이었습니까.

『아니, 다음날 새벽 6시쯤 전화가 왔어요. 「盧여사, 이거 큰 일 났어요. 호텔 하루 숙박비가 내 한 달 생활비요. 나, 먼저 나갑니다」라는 말을 남기고 체크아웃해 버린 거예요』

―윤이상씨는 부산고등학교 음악 교사를 하다가 유학길에 올랐으니 돈 잘 버는 盧선생과는 형편이 달랐던 거죠. 그는 오페라 「춘향전」은 작곡하지 못했지만, 오페라 「심청전」은 발표했고, 작곡가로서 명성도 얻고…. 그런 그가 왜 金日成-金正日 父子 세습독재 정권에 붙었을까요.

『아마 어려웠던 시절에 그들의 도움을 받았겠죠. 돈 때문일 거예요. 예술가로서 참 훌륭한 분이었는데, 예절도 바르고…』

노라노는 파리에서 크리스챤 디올, 니나 리치, 지방시, 발렌시아 등 세계적 디자이너들의 컬렉션, 그리고 오페라, 발레, 연극, 미술전시회 등을 보고 유행의 거리 샹젤리제를 자주 걸었다.

『발렌시아의 세일에서 500달러나 주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맥시 라인의 타이트 스커트 투피스를 사 입고 하얀 모자와 장갑, 마스켓(대나무로 만든) 핸드백, 큼직한 선글라스, 흰 하이힐 차림으로 천천히 샹젤리제를 걷는데, 할아버지들까지 모자를 벗어 들고 인사를 건네는 거예요.

건널목에서 녹색 신호가 빨간 신호로 바뀌었는데도 나는 타이트 스커트 차림으로 아장아장 걷는 바람에 겨우 차도 한복판밖에 못 왔죠. 그때만 해도 파리엔 낭만이 있었어요. 자동차 운전자들이 모두 핸들을 놓은 손으로 턱까지 괸 채 신기한 듯이 쳐다봐요. 그러니 도로가 막혀 버렸죠. 교통순경이 호루라기를 불며 막 달려오더군요. 「어제도 그러던데, 다시 또 그러면 교통방해죄로 처벌하겠다」는 경고를 받기도 했죠. 호호호』


프랭크 시내트라가 바친 장미 두 송이

아름다움은 여성의 권력일까? 1956년 당시 노라노는 스물아홉의 한창 때였다.

―노라노 公主님의 「로마의 휴일」이었군요.

『프랭크 시내트라에게 장미 두 송이도 받았어요』

―그 얘기 재미있겠군요.

『마드리드의 한 카페에서 스페인 민속무용을 관람하고 호텔로 돌아가려고 대절 택시를 기다리고 있는데 시내트라가 다가와요. 시내트라가 꽃행상에게 장미 두 송이를 사더니만 내게 주면서 「어디서 왔느냐」고 묻는 거예요. 「한국에서 왔다」고 했죠. 시내트라는 로케하러 왔다고 하더군요. 그는 내가 앉은 옆 테이블에서 스페인 민속춤을 관람했거든요. 아니, 이 얘기만 하면 서양사람들은 배꼽을 잡고 웃으며 재미있어 하는데, 鄭위원은 재미없어요? 호호호』

―나중에 「마이 웨이(My Way)」를 열창하는 시내트라와 그 노래처럼 자기 길만을 걸어온 노라노 여사의 운명적이고 장엄한 만남인데, 감히 웃음이 나오겠습니까. 하하하.

『바르셀로나에 가서는 배를 타고 작곡가 쇼팽이 살던 유럽 최고의 휴양지 마요르카 섬에도 가보았죠. 그 섬에서 우리 애국가를 작곡한 安益泰(안익태)씨와 그 가족을 만나기도 했어요. 아 참, 이런 일도 있었죠. 프랑스로 가기 위해 피레네 산맥을 넘을 때 환전을 위해 국경 은행에 들러 여권을 보였더니 은행원들이 「한국 여자 구경한다」 면서 몰려나와 야단이었어요』

프랑스에서 돌아온 그녀는 新堂洞에서 明洞으로 옮겨 「노라노의 집」을 열었다. 이로부터 30여년 간 노라노의 明洞시대가 펼쳐진다.


1956년 한국 최초의 패션 쇼 열어

―어떤 기록에 따르면 한국 최초의 패션 쇼가 1957년에 열렸다고 되어 있습디다.

『유럽에서 돌아온 직후였죠. 1956년 반도호텔(지금의 롯데호텔)에서 첫 패션 쇼를 열었는데, 어떤 사진작가가 그걸 자꾸 1957년이라고 주장해요. 내가 한 일, 내 기억이 가장 정확한 거예요. 당시 상공장관 金一煥씨의 배려로 高麗毛織(고려모직)의 옷감 샘플들을 얻었는데, 촉감이 뻣뻣하고 무거웠으나 국산 옷감들로 첫 컬렉션의 작품을 만들었던 것이 큰 기쁨이었어요. 패션 쇼의 파이널 넘버로 당시 여우 주연상을 수상한 조미령씨에게 웨딩 드레스를 입혔었죠』

―문화계에선 파리를 제 집 드나들 듯하는 사람들이 많습디다.

『사람은 자기가 아는 만큼 보이죠. 그래서 공부하기 위해서였죠. 나는 그후로도 30년 동안 한 해도 빠지지 않고 파리에 다녀왔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어요. 최은희씨가 듀마 原作의 영화 「椿姬(춘희)」에 주인공으로 출연했는데, 사교계의 꽃 椿姬에겐 사치스런 의상을 입혀야 되지 않겠어요. 내가 니나 리치의 파리店에서 산 벨벳 모자, 팔목까지 올라오는 가죽 장갑 등을 빌려 주기도 했어요』

―미스 코리아의 샤프롱(Chaperon:사교계에 나가는 젊은 여성의 보호자)으로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도 참가하셨더군요.

『1957년 미스 코리아가 선발된 직후 한국일보 張基榮(장기영) 사장께서 저더러 좀 만나자고 해요. 한국일보사가 창사 초창기에 신문 홍보를 위해 매년 미스 코리아를 뽑아 그 다음 해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 참가시키는 프로젝트를 시작하고 있었거든요. 사장실에 갔더니 비자를 내주고 경비도 절반을 대줄 터이니 샤프롱 李매리 여사를 보조하여 미스 코리아를 데리고 유니버스 대회에 다녀오라고 부탁하셨어요.

대번에 내가 「사장님, 저 미국에서 공부하고 온 지 얼마 안 됩니다」라며 사양했어요. 미국 비자를 내 주는 것만 해도 상당한 혜택으로 알던 시절이어서 그런 조건이면 내가 「좋아라」 할 줄 생각하신 거죠. 한국일보 사옥을 빠져나오는데 업무부장이 뒤따라와 「사장님이 다시 보자고 하신다」고 해요. 다시 사장실에 들어가니까 張사장님이 「아까는 실례했다. 우리 社에서 盧여사를 정식 샤프롱으로 임명하고 모든 비용을 부담하기로 했다」고 말씀하셔요.

나는 당황해서 「감사합니다만, 저는 사장님의 호의를 받을 수 없습니다. 올해 미스 코리아로는 준비부족으로 아무 성과도 낼 수 없으니까요」라고 다시 사양했습니다. 張사장이 「다음 대회를 위해서라도 이번에 가 주어야 한다」고 요청하셔서 샤프롱이 된 거예요』

―미스 코리아라면 제겐 吳賢珠(오현주)라는 이름밖에 생각나지 않습니다. 그녀가 세계에 新生 한국을 알리는 데 큰 공헌을 했죠.

『1958년 미스 유니버스 대회를 리서치해 보니 요령이 생겨요. 지성적이면서 영어회화를 잘 하는 미인이어야 한다는 점을 깨달은 거예요. 그래서 1958년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가 열리기 전에 나는 吳賢珠양에게 참가를 간곡히 권유했죠』

―어떻게요.

『내 동생이 당시 이화여대에 재학중이던 오현주양과 잘 아는 사이라 우선 동생을 보내 「1958년 미스 코리아 선발대회에 나오라」고 설득했죠. 오현주양은 영어회화가 능숙하고 무용을 잘했던 대단한 재원이었어요. 吳양은 하나를 가르치면 셋을 해낼 만큼 재치도 있었어요. 문제는 국내 선발대회였죠. 그래서 내가 심사위원이던 백철·정비석·모윤숙씨 등을 찾아가 吳양의 국제 경쟁력을 미리 설명해 드렸어요』

―아, 그거 부당한 청탁 아닙니까.

『한국에서 통하는 미인이 아니라 세계 무대에서 통하는 미인이 뽑혀야 했던 거예요. 南美 등지의 늘씬한 혼혈 미인들이 나오는 대회에서 동양계 미인이 주목을 받는 게 그리 쉽진 않아요. 그런데도 작은 체구의 오현주는 미국인들의 마음을 사로잡았어요. 1959년 미국 롱비치에서 개최된 미스 유니버스 대회에서 인기상, 포토제닉상, 스피치상을 휩쓸었고, 15명이 뽑히는 최종 결선에까지 올랐습니다. 그렇다면 나의 선택이 옳았던 거죠』


미스 코리아 吳賢珠의 大활약

―최근엔 미스 코리아 대회가 性을 상품화한다는 일부의 비난도 있는데요.

『당시 한국이라면 전쟁을 치러 폐허화한 나라, 심지어는 어디 붙었는지 모르는 사람이 많았던 시절이었어요. 吳양과 저는 6·25전쟁으로 얼룩진 우리나라의 이미지를 개선하기 위해 혼신의 힘을 다 했습니다. 세계 각국의 미인들은 개회식에서 텔레비전 중계로 全미국의 많은 시청자가 지켜보는 가운데 자기 나라에서 가져온 선물을 롱비치 시장에게 증정하고, 시장이 주는 행운의 열쇠를 받게 되어 있었죠.

오현주는 남색의 선을 두른 장삼형의 玉色 양단 드레스에 빨간색 장구를 메고 두둥둥 두드리면서 무대 위로 올랐어요. 관중들이 장구소리에 놀라 일제히 시선이 집중됐을 때 미스 코리아는 장구를 벗어 시장에게 주고 행운의 열쇠를 받은 후 고개를 갸웃하더니 「나는 이렇게 큰 선물을 드렸는데, 이렇게 작은 걸 주세요?」라고 반문했어요. 이런 유머에 10만 관중은 그라운드가 떠나갈 듯한 박수 갈채를 보냈어요』

―그래서 吳양이 스피치賞을 받은 거군요.

『아니, 대회 참가 각국 미인들의 스피치 때 吳양은 「한국에서 전쟁이 일어나 찾아오시는 외국손님들을 제대로 대접해 드리지 못했지만, 이제는 많이 부흥되었으니 마음 편하게 한국문화를 만나러 오십시오」라고 했는데, 영어도 유창했고 의미도 있었거든요』

녹차 한 모금을 마신 노라노 여사의 말이 다시 계속된다.

『할리우드 영화사들이 오현주를 스카우트하려고 발벗고 나섰죠. 한 영화사가 「스지웡의 세계」란 영화에서 당시 인기 남우 윌리엄 홀덴을 상대할 여주인공 「스지웡」 役을 찾고 있었는데, 오현주가 적격이라며 출연 계약을 서두르는 거예요. 무용과 연기에 소질이 있으니까 빅 스타로 만들겠대요. 나보고는 매니저로 계약하재요. 오현주의 아버지와 오빠가 적극 반대하는 바람에 그만두게 되었죠』

―오현주씨의 부친이라면 당시 제1야당 민주당의 실력자 오위영(4·19 혁명 후 민주당 정권에서 무임소장관 역임)씨였는데, 왜 반대합디까.

『스지웡은 舞姬(무희)로서 우연히 만난 홀덴과 사랑하다가 헤어진 후 창녀가 되는 역할을 해야 하는데, 「良家의 딸로서 못할 짓」이라는 것이었죠』

―지금 오현주씨는 무엇을 하고 있습니까.

『연극계에서 연출 활동도 하다가 이젠 가정에서 알뜰하게 잘 살고 있죠. 지금도 참 친하게 지내고 있어요』

―그때 선생님께서는 오현주씨에게 「아리랑 드레스」를 만들어 입혔다죠. 그걸 「국적불명의 옷」이라고 비판한 사람들도 있었는데요.

『그걸 개량한복으로 알고 있는 사람들이 많은데, 그건 소매 없는 롱 드레스와 저고리를 본뜬 짧은 재킷으로 된 완전한 서양식 드레스예요. 미스 월드 대회에 나가는 미스 코리아를 위해 내가 디자인했어요. 그 후 「아리랑 드레스」는 아직 서구 야회복에 익숙지 않은 1950∼60년대의 우리나라 외교관 부인들이 파티 드레스로 많이 입었죠. 한복감으로 만든 데다 어딘지 분위기가 치마 저고리와 비슷하여 우리 여성들을 안심시켰던가 봐요』

―미스 유니버스 대회 이후 선생님은 더욱 有名勢를 타셨죠.

『1962년인가, 제8회 아시아태평양영화제가 서울에서 열렸는데, 참가했던 배우 열 명의 옷을 모두 내가 한잠도 못 자고 만들어줬죠. 아, 그랬더니 당대 최고의 육체파 배우 金惠貞씨가 화를 내며 찾아와서 「선생님, 내 돈은 돈이 아닙니까. 내 옷도 해 줘요, 예」라고 하더군요』


尹福姬의 미니 스커트와 펄시스터즈의 판탈롱

―선생님은 「1960년대의 유행 제조기」라고 합디다. 제가 대학 다닐 때인 1966년경 가수 尹福姬(윤복희)가 超미니 스커트를 입고 바람을 일으켰는데, 아찔하더군요. 선생님께서 입힌 옷이라면서요? 그 이후 미니 스커트가 붐을 일으키자, 경찰관들이 거리에서 미니 스커트 입은 여성을 만나기만 하면 무릎 위 몇 센티인가를 자로 재며 단속하는 진풍경까지 벌어졌죠.

『원래 서양인들은 여자의 벗은 가슴을 보면 놀라고, 우리나라에선 여자의 벗은 발을 보면 놀랐죠. 그러나 1964년에 주디 간라이히(영국 디자이너)의 톱리스 수영복이 나오고, 1965년에는 쿠라즈(프랑스 디자이너)의 미니 스커트가 세계적으로 유행했죠. 우리나라만 朴대통령이 학교 훈육주임처럼 엄해서 세계 패션의 물결을 타지 못하고 있었던 거죠. 암튼 윤복희씨가 미니 스커트를 입고 「나를 사랑한다는 그 말씀이 진정인가요. 어서요, 빨리요, 안아 주세요」라고 노래했으니 우리나라에선 가히 혁명적이었죠』

―그 진원지인 노라 선생님에 대한 비난은 없었습니까.

『한 번은 TV의 「여류명사 초청 연말 특집」 생방송에 나갔는데, 男裝(남장) 여성 국회의원이던 金玉仙씨가 「盧여사, 한국 여성들의 다리가 미운데, 미니 입혀도 됩니까」라고 시비를 걸데요. 즉각 나는 「아니, 얼굴이 밉다면 조선왕조 때처럼 여성들이(쓰개치마로) 얼굴을 가리고 다녀야 합니까」라고 되받았죠. 섬유제품 수출국인 우리나라는 어떻게든 패션을 발전시켜야 부가가치를 높일 수 있는 거예요』

―그 무렵 우리나라에 본격적인 TV시대가 전개됩니다. 그에 따라 패션의 바람도 제법 세차게 불게 되죠.

『아직 여유가 없었던 연예인들에게 내가 처음으로 의상 협찬을 시작했죠. 전향희·윤여정·윤소정·서우림·여운계·사미자씨 등을 협찬했어요. 반면 인기 절정의 윤복희씨는 수표를 한 뼘만큼이나 갖고 다니면서 결제를 해주었고요』

―펄시스터즈의 판탈롱 스타일도 센세이셔널했죠.

『내가 얼마나 애써서 만들어 주었는데…. 「펄」은 유별나게 의상에 돈을 많이 들였죠. 지금 가수들도 그렇게 잘 입고 나오는 사람 없어요. 판탈롱을 펄럭이며 펄이 부른 「님아」, 「첫사랑」, 「커피 한 잔」이 잇달아 빅 히트를 쳤죠』


『내 직업 통해 농촌 도울 수만 있다면…』

―선생님은 1966년 국내 최초로 기성복 패션 쇼를 개최하고 미우만백화점(지금의 미도파 백화점)에다 기성복 코너를 개점하셨다더군요.

『선진국에서는 1957년 무렵부터 기성복 산업과 영 패션의 힘을 무시할 수 없게 됩니다. 1960년 디올店의 생 로랑을 선두로 심플리시티(단순성) 시대가 시작되고요. 특히 미국의 기성복 산업은 방대한 젊은 소비층을 파고들어 세계 시장을 지배하게 되었죠. 나는 미국 유학 시절부터 기성복시대의 도래에 대비한 디자이너 양성교육을 받았기 때문에 새로운 변화에 민감할 수 있었거든요』

1970년대에 들어 노라노 여사는 한국에 기성복 시대를 열기 위해 사이즈 데이터 조사작업을 하러 하와이에 갔다. 거기서 그녀는 쇼룸을 열고 패션 쇼를 열었다. 패션 쇼는 현지 신문 일요판의 1면 전면을 차지해 보도될 만큼 성황을 이뤘다. 그 일로 노라노 여사는 미스 하와이 선발대회 심사위원이 되었고, 후일에 하와이대학 동서문화센터의 「한국문화사 특강」 강사로 초빙되는 계기가 되었다. 이어 노라노 여사는 한국 사상 최초로 고급기성복을 미국에 수출하게 된다. 그 과정에 대해 노라노 여사는 다음과 같이 회고한다.

『1970년 대 초반, KOTRA(대한무역진흥공사)의 간부 한 분이 찾아오셨어요. 한국 견직물로 옷을 만들어 프랑스에서 열리고 있는 프레타 포르테 전시회에 출품할 수 있도록 도와달라고 하셔요. 당시 우리 농촌은 빈곤했고 누에고치를 키우는 일은 겨울 농한기 농민들에게 큰 도움이 되는 부업이었죠. 우리나라는 일본에 絹絲(견사)를 수출했는데, 일본에서는 쿼터로 수입 제한을 하고 있었고요. 그래서 코트라에서는 우리나라도 이탈리아처럼 실크로 옷을 만들어 부가가치를 높여 팔겠다는 구상을 했던 겁니다. 저는 저의 직업을 통해서 농촌을 도울 수 있다는 사실이 기뻐서 조건 없이 실크 컬렉션을 준비하여 1972년에 출품했어요』


뉴욕 타임스도 놀란 노라노의 실크 컬렉션

노라노 여사는 『그것이 저의 인생에서 가장 큰 행운이었고 디자이너로서 가장 큰 영광을 안겨 준 사건』이라고 말했다.

『파리 코트라 관장님이 「우리 부스 앞을 지나가던 뉴욕의 삭스 피프스 애버뉴 백화점의 바이어가 내 옷을 보고 들어와서 무조건 70벌을 주문하고 갔다」는 소식을 전해 주는 거예요. 나가자 마자 히트를 친거죠. 바이어의 오더가 잇따르는 등 난리가 났어요』

노라노 자신도 놀랐지만 뉴욕 언론도 놀랐다. 뉴욕 타임스에는 「패션이 앞으로 어디에서 오는지 아무도 모른다」(You’ll never know where fashion comes from)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다.

『뉴욕 타임스의 의류 담당 기자가 삭스백화점 5층 부티크 코너에서 눈에 띄는 실크 드레스 하나를 발견했대요. 「노라노(NORA NOH)」라는 그에게 낯선 브랜드가 적혀 있는 거죠. 드레스 솔기에 붙어 있는 「메이드 인 코리아」를 보고는 당장에 담당 바이어에게 달려가 이렇게 물었대요. 「한국에서도 드레스를 만들 수 있나요?」 삭스 바이어가 「파리의 의류박람회에서 사입한 것으로 고객의 반응이 좋다」고 설명했대요. 내가 만든 100달러짜리 드레스와 등진 모습으로 500달러짜리 이탈리아 유명 메이커의 드레스를 걸어 비교 전시했는데, 그런 기사가 보도된 거예요. 그랬는데, 생산지만 보지 않으면 두 제품의 차이가 없다는 겁니다』

한국잠사회는 1974년 뉴욕 5번가의 플라자 호텔에서 노라노의 컬렉션으로 바이어 쇼를 열었다. 「시카고 타임스」는 노라노의 옷을 「절제된 멋」(Under well controlled elegance)이라고 평가했다.

드디어 1978년, 노라노는 뉴욕 7번가에 상설 매장 「노라노 쇼 룸」을 내고 동생 부부와 함께 홍보물 제작, 판매원 모집 등으로 분주했다. 미국 유학 때의 꿈을 30년 만에 이룬 것이었다.

『당장 아이메기니 백화점에서 700벌 등 미국 전국에서 주문이 밀려들었어요. 내 실크 드레스들이 메이시 백화점의 윈도 디스플레이 15개 전체를 휘감았죠. 캐나다에선 우리 물건 가져가면서 오히려 「고맙다」고 했어요. 로스앤젤레스 백화점에선 진열하는 사이에 아홉 벌이나 팔려 나갔고요. 그로부터 1990년까지 매월 5000 벌을 생산, 수출했습니다』


세계 패션계를 리드한 두 가지 업적

―그런 성공의 요인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첫째는 30년간 끊임없이 파리에 들락거리며 업투데이트 패션을 접촉하고 있었던 것, 또 한 가지는 미국에서 공부할 적에 고급 기성복의 대량 생산에 대비한 훈련을 받았다는 것을 들 수 있겠죠』

―노라노 선생님의 해외여행은 「로마의 휴일」이 아니었군요.

『제가 해외여행을 하도 많이 해서 마일리지가 50만 마일에 달했다니까 지긋지긋하게 돌아다닌 겁니다. 호호호』

1980년대 10년에 걸쳐 노라노 여사는 미국 패션계에서 많은 히트작을 내어 뉴욕 7번가에서 이름이 알려졌고, 홍콩 같은 데서는 노라노 디자인이 수없이 카피되기도 했다.

『미국 전국 일류 백화점 쇼윈도에 걸린 내 디자인을 쳐다볼 때 먼 과거에 알던 애인을 보듯이 쑥스럽고 무안하고 야릇한 기분이 들기도 했어요. 단순하게 우리나라 농촌 부업을 돕겠다는 일념으로 뛰어든 실크 옷 수출이 생각지도 않게 저를 국제적인 디자이너로 마음껏 꽃 피울 수 있게 한 겁니다』

―대량생산 체제로 들어갔겠군요.

『1980년대라면 나의 50代였습니다. 50代에 수출업에 종사하고부터는 매일 밤 12시까지 일했습니다. 1982년 경기도 安山에 직영 실크 프린트 공장을 세웠어요』

―프린트가 뭡니까.

『실크에다 명화 같은 것을 프린트해서 바르는 거죠. 나는 申師任堂(신사임당)의 수묵화, 그리고 미로, 마티스 등의 명화에서 프린트 모티브를 얻었어요. 이건 내가 세계에서 제일 먼저 시도한 나의 오리지널이에요. 세계의 다른 디자이너들에게 카피를 당할 만큼 인기를 끌었어요. 내가 세계 패션계에 기여한 것은 이밖에 한 가지 더 있죠. 원피스 뒤쪽 허리선에 고무줄을 1인치 끼워넣어 신축성을 준 거예요. 입으면 편하고 활동적이거든요. 이런 업적이 세계로 퍼졌는데도 국내에선 이걸 이해하는 기자가 없더라구요. 하기야 혼자 만족하면 되는 거지만…』


생산기지를 中國으로 옮겨야 했던 이유

뉴욕 패션가를 풍미했던 노라노 여사에게도 먹구름이 닥쳤다.

『1988년 서울 올림픽 개최 이후 노동자들의 불만이 한꺼번에 터져나와 노사분규가 일어나고, 갑작스런 인건비 상승으로 의류 수출에 큰 타격을 받게 되었어요. 인건비가 한꺼번에 30%, 35% 막 올라가고, 뭐 빼고 뭐 빼고 하니 옷장사로 남는 것 없고, 한 시즌 못하면 그냥 가는 거죠. 결국 안산공장 문을 닫을 수밖에 없었어요』

1990년, 노라노 여사는 생산거점을 중국으로 옮기기 위해 짐을 쌌다. 국내엔 서울 청담동에 「노라노의 집」을 새로 지어 토털 패션의 매장으로 활용했다.

『홍콩에 「노라노 홍콩」을 설립하고, 이어 浙江省(절강성) 紹興(소흥)에다 韓中 합작으로 공장을 세웠죠. 月 생산 5000벌에 매출액 1000만 달러를 이룰 정도로 발전했어요. 이제는 이 공장을 廣東省(광동성) 深♥(심천)으로 이전하여 우리 자본만으로 가동하고 있죠』

―중국어를 아십니까.

『몰라도 별 지장 없죠. 봉쓰(박아라), 짜이까이(뜯어라), OK―이렇게 세 마디만 해도 통하더군요. 호호호』

노라노 여사는 영어, 프랑스어, 일어에 매우 능통하다. 그렇게 된 과정이 궁금했다.

『일본어야 일제 때 교육을 받았으니까 문법이 정확할 수밖에 없죠. 영어는 미국 유학시절 매일 밤 포켓북 한 권씩을 읽었어요. 외국어 배우는 데 소설 읽기보다 더 좋은 방법이 없어요. 프랑스어는 30년간 매년 파리에 갔고 또 직업상 패션 책을 애독하니까 자연히 몸에 붙었죠』

―그동안 돈도 많이 버셨죠.

『그렇지만 가진 것은 없어요. 1997년의 IMF 외환위기 이후 수출부진, 이자부담 급증에다 억울한 추징금까지 얻어맞고 구조조정을 했죠. 퇴직자들에게 퇴직금도 상당히 지급했어요』

구조조정을 하면서 그녀는 「노라노의 집」 1층을 레스토랑에, 2층을 성형외과에 임대했다. 현재 3층만 매장이며, 4층은 노라노 여사의 살림집이다. 한창 때는 지하 1층에서부터 3층까지가 모두 매장이었다.


패션 파괴 시대

―선생님께서 살아오면서 느끼신 현대 패션의 물줄기를 돌린 세계적 匠人(장인)은 누구라고 보십니까.

『세 분의 업적을 지적할 수 있겠네요. 첫째, 코코 샤넬은 여성을 코르셋으로부터 해방시켰고, 둘째 조르지오 아르마니는 기동성이 필요한 직장여성을 위해 신사복을 여성복화하여 팬츠 슈트(Pants Suite)를 정장으로 안착시켰으며, 셋째 프라다는 옷감 素材(소재)의 혁명을 이루었다고 생각해요』

―지금 패션의 경향은 어떤가요.

『1995년을 고비로 패션이 유행하던 시대는 끝났다고 봅니다. 지금은 나이 不問, 계절 不問, 가격 不問으로 아무 것에도 구애받지 않으려는 경향이에요. 입거나 벗는 것 자기 마음대로 하는 거죠. 歐美의 의류 회사들은 날로 대형화하고 재능 있는 디자이너들은 자본가에 의해 지배되고 있습니다. 과거 반세기 동안 국가적인 파인 아트(예술)로 인정받아 오던 프랑스 패션도 그 독자적인 위치를 세계화 추세에서 지켜낼 수 있을지 의문이에요. 지금 그 주도권은 뉴욕으로 가고 있습니다』

―가격 不問이라고 하셨는데, 우리 월급쟁이 부인들은 선생님의 옷은 입을 엄두도 내지 못합니다. 선생님의 고객들은 누구입니까.

『아무래도 전문직업 여성들이 많죠』

―세계 패션의 미래는 앞으로 어떻게 변화할까요.

『앞으로 당분간 의류업자들의 대형화와 세계화, 그리고 新素材 개발은 더 치열해지고, 디자이너의 개념도 달라질 거예요. 그러나 원리원칙을 지키며 인내하고 기다리면 모든 것이 그러 하듯이 어느 날 패션이 제자리로 돌아올 것을 믿어요. 나는 우리 삶에 있어 옷이란 입기 쉽고 엘리건트해야 하며, 그것은 또 간결하게 만들어야 한다는 신념으로 살아왔어요. 「절제된 멋」 이것이 내가 평생 추구해 온 거예요』


『배우는 배우답게 주부는 주부답게 입어야』

―옷이란 무엇입니까.

『자기의 표현이죠. 거기에 인격, 성격, 그리고 사회적 위치가 담기는 겁니다. 방송 앵커가 쇼걸과 같이 입거나 가정주부가 배우같이 입어서는 안 되죠. 배우는 배우답고, 앵커는 앵커답고, 주부는 주부답고, 회사원은 회사원다워야죠』

―패션 디자이너에 대한 일반 사람들의 시각은 어떻습디까.

『글쎄요. 아니, 이런 일이 있었어요. 얼마 전에 목욕탕에서 넘어져 10바늘을 꿰맨 뒤통수에 반창고를 붙이고 다녔는데, 누가 날더러 꽤 진지하게 「그거 패션이냐」고 묻는 거예요. 호호호』

―독신 여성이기 때문에 겪었던 어려움은 없었습니까.

『주로 여성 고객을 위해 여성 직원들과 힘을 합쳐 일해 왔기 때문에 남성 동료들 사이에서 일해야 하는 다른 여성들보다 신경소모가 적었다고 할 수 있죠』

―선생님의 삶과 일을 붙들어준 분은 누구라고 생각하십니까.

『나의 어머니와 형제들이라고 생각합니다. 나는 9남매의 둘째 딸로서 아버지가 돌아가실 때 스물여섯의 나이로 대가족의 家長 노릇을 해야 했어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여러 형제들을 키우고 교육한다는 것이 경제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쉽지 않았지요. 그러나 나는 그 부담이 나의 직업정신을 지탱시키는 기둥임을 깨닫게 되었어요. 이제는 형제들 모두가 저마다의 일에 열중하고 있다는 데 보람을 느끼고 있지요』

―그런 성취 후에 어떤 마음의 변화라 할까, 허무감 같은 게 다가오지 않습디까.

『사람은 원래 약한 동물이니까 어딘가 의지하고 싶죠. 나는 5년 전 세례명을 받고 가톨릭 교인이 되었습니다. 매주 일요일이면 꼭 「사제의 집」에 가서 금년 87세의 박기훈 신부님에게 45분간 강론을 듣고 미사를 드리고 있습니다. 신부님은 「겸손한 사람은 하늘 위로 가고 불손한 사람은 땅 밑으로 떨어진다」고 말씀하십니다』

―선생님의 일생에서 가장 행복했던 일은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내 나이 일흔에 미국 로드 아일랜드에 있는 브라운 대학의 초청을 받아 「女性의 專門職」이라는 주제로 특강을 한 것입니다. 강연 후 질의응답 시간도 가졌는데, 가장 기억에 남는 한 교수님의 질문은 「그 시대에 패션 일을 시작하면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을 것인데, 어떻게 극복했는지 알고 싶다」는 것이었습니다.

나는 산 넘고 물 건너 온 나의 과거를 요약한 뒤 「오늘날까지 남의 비판에 개의치 않고 오로지 나 자신의 엄격한 반성과 신념으로 지탱해 왔을 뿐」이라고 답변했습니다. 그 대학 부총장님과 교수님들은 「미국에서도 50년간 전문직을 지켜 온 여성은 유례가 없다」며 나의 匠人정신을 평가해 주었어요. 브라운 대학 특강에 이어 바로 이웃 레즐리女大에서도 갑자기 초청하여 강연했는데, 「호수에 돌을 던지고 갔다」는 센세이셔널한 평을 받았죠. 미국 학자들은 實務를 하는 사람의 얘기를 좋아하나봐요. 나의 50년을 평가해 주셔서 기뻤습니다. 하나님께서 열심히 일해 온 나를 위로하기 위해 그런 기회를 안배하신 것으로 믿습니다』


前남편 申應均과 이승에서의 마지막 2년

―혼자 사시려면 이성친구도 있어야 하지 않습니까.

『나는 독신여성이라고 해서 사랑까지 하지 말아야 한다고 주장하지는 않습니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선 독신남성이 드물기 때문에 사랑할 수 있는 대상, 혹은 음악회에 함께 가거나 저녁을 같이 먹을 수 있는 대상이 찾기 어렵겠죠』

―신응균 장군께선 별세하셨죠.

『喪配(상배)를 하고 혼자 지내다가 5년 전에 돌아가셨죠. 별세 2년 전부터 친구로 한 달에 한 번씩 만나 제일 좋아하는 걸로 점심을 사 드렸죠. 그이는 「한평생 멀리서나 가까이서나 지켜보았는데 당신은 내 마음의 고향이다」는 거예요. 사실, 나도 평생 친구처럼 보살펴 주려는 그 분을 의식했기 때문에 필요 이상으로 조심하고 살아왔죠』

―참으로 기막힌 사연이군요.

『그이가 별세하기 직전에 「지금 내 모습을 노라에게 보이기 싫다」고 했지만, 내가 굳이 병문안하러 갔어요. 그때 그이가 「저 세상에 가서 다시 합치자」고 해요. 나는 「이승에서 평행선을 그어온 우리가 저승에 가서 다시 만나면 그때 곰곰이 생각해 보겠다」고 대답했어요. 군인, 大使 시절 그이의 부하들을 만나 보면 「맺고 끊는 것이 분명한 분」이라고 하는데 내가 보기에는 참 마음이 여리고 착하기만 한 분이었어요』

이 대목에서 여태 그렇게 명랑하던 노라노 여사의 눈가엔 갑자기 눈물이 비쳤다. 화제를 돌릴 수밖에 없었다.

―선생님의 일은 멋을 창조하여 널리 전파하는 일이라고 생각됩니다. 멋있게 보이려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나도 가끔 멋이란 무엇일까 하는 화두를 갖고 곰곰이 생각해 보죠. 내가 내린 정의는 「약간의 여유가 멋이다」라는 겁니다. 인간적으로나 물질적으로 너무 여유가 지나친 것, 너무 여유가 없는 데서는 멋을 지니기 어렵죠. 약간의 여유, 사치하지 않으면서도 옹색하지도 않은, 잘 절제된 마음의 여유 속에서만 멋을 낼 수 있다고 생각해요』

―저도 멋 좀 나게 구체적으로 가르쳐 주세요(웃음).

『와이셔츠 하나를 입더라도 칼라를 세워 보고, 소매를 슬쩍 걷어 올려 보는 여유, 이게 바로 멋이죠. 똑같은 진바지를 입는데도 마음의 여유가 있는 여성들은 스카프를 허리에 묶어 약간 흘러내리게 한다든가 손수건을 뒷주머니에 살짝 꽂아 볼 수 있겠죠. 이런 노력 자체가 여유이며 멋인 겁니다』

그녀는 『한국 남성도 멋쟁이로 만들고 싶다』고 말했다. 한국 디자이너 1세대인 노라노 여사는 요즘 노라노 3世인 鄭錦羅씨의 남성복 데뷔展을 열심히 지원하고 있다. 정금라씨는 가족으로는 조카며느리지만, 다자이너 계보로선 3世에 해당된다고 한다. 노라노 여사는 『지금 청담동 갤러리아 백화점 패션관 4층에서 노라노 3世가 브랜드(I. santi) 론칭(개점)을 하고 있으니까 꼭 한번 들러보세요』라고 부탁했다.

―인생에서 성공이란 무엇일까요.

『지내고 보니 돈도 영광도 명예도 뜬 구름 위에 얹혀 빨리 지나가 버리는 것으로 느껴집니다. 70代 중반을 넘어선 저의 인생에서 가장 힘들었던 것은 원리원칙을 지키려는 노력이었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우리나라 환경에서 이것은 힘들고 외로운 싸움이었습니다. 이제 저는 하나님께 「저는 모르겠습니다. 하나님, 알아서 하세요」 하고 맡겨버리고 평화로운 마음으로 삽니다. 인생의 진실한 성공은 정직하게 열심히 그리고 너른 마음으로 살아가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필자는 노라노 여사와 닷새 동안 무려 20시간에 걸쳐 「노라노의 집」에서 인터뷰 했다. 인터뷰 시간이 이렇게 오래 걸린 것은 필자가 패션을 잘 이해하지 못한 까닭도 있었지만, 盧여사가 단어 하나의 선택에도 신경을 곤두세울 만큼 꼼꼼했기 때문이다. 인터뷰 중간에 점심도 두 번이나 함께 먹었는데, 실례의 말이지만 그녀는 상당한 대식가이며 훈련병처럼 빨리 먹었다. 바쁘게 일하던 시절에 그러던 것이 어느덧 습관화했다는 것이다. 이렇듯 대범하면서도 꼼꼼함, 이것이 우리 시대의 匠人 노라노를 탄생케 한 비결인 것으로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