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著者와의 對話 - 「전투감각」의 徐慶錫 장군

정순태   |   2003-03-03 | hit 11193

徐慶錫(서경석) 예비역 육군중장은 近接戰鬪(근접전투)의 영웅이다. 그는 1967년부터 1969년까지 27개월간 파월 맹호부대의 소대장과 중대장으로 복무하면서 武名(무명)을 날렸다. 월맹군과 베트콩은 그의 목에다 거액의 현상금을 내 걸었으며, 나중에 대통령이 된 盧泰愚(노태우) 중령 등 그의 직속상관들은 그를 「월남전 제1의 싸움꾼」이라고 치켜세웠다.

그는 충무무공훈장과 화랑무공훈장을 받고 귀국하여 그후 보병 25사단의 대대장, 특전사 참모장, 5공수여단장, 17사단장, 6군단장, 3군부사령관 등 육군의 주요 보직을 두루 역임한 뒤 작년 5월에 예편했다. 이런 徐장군이 다시 한번 화제의 인물로 떠오르고 있다. 그가 10년 전에 저술한 「전투감각」(Feel for Combat)이 영어로 번역되어 최근 美 보병학교와 참모대학의 참고교재로 선정되었기 때문이다. 외국군 장교의 저서가 미군 교육기관의 참고교재로 선정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필자는 동료 기자의 소개로 우연히 「전투감각」(376페이지, 샘터)을 손에 잡은 후 눈길 한번 다른 곳에 팔지 않고 단번에 읽어 내렸다. 매우 사실적이고 또한 솔직한 글이었다. 이 책에서는 전술학 등 군사 교범보다 훨씬 쉽고 재미있게 전쟁의 본질과 전투기술을 습득할 수 있다. 현대의 경영학이나 비즈니스 기법이 군사학으로부터 많은 부분을 도입했던 만큼 「전투감각」은 일반독자들에 대해서도 一讀(일독)을 권하고 싶은 책이다.

내친 김에 필자는 徐장군의 또 다른 저서인 「戰場 감각」도 구해서 역시 단번에 독파했다. 「전투감각」이 소대장, 중대장용이라면 「전장감각」은 대대장, 연대장용이다. 두 책은 일반 독자들에겐 별로 알려지지 않았지만, 우리 육군 내부에서는 중판을 거듭할 만큼 관심을 모은 스테디 셀러다. 필자는 文名(문명)까지 날리고 있는 徐慶錫 장군을 서울 도곡동에 있는 그의 사무실에서 9월28일~9월30일에 걸쳐 10여 시간 인터뷰했다.


實戰 경험 없는 후배들 위해 저술


―「전투감각」을 저술한 동기는 무엇입니까.

『제가 실전을 통해 터득한 전투기술을 전투경험이 없는 후배들에게 가르쳐 주기 위해 썼습니다. 이제 우리 육군에는 實戰(실전)을 경험한 군인이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전문 문필가도 아니면서 매우 재미있는 책을 쓰셨습니다. 누구의 도움을 받으신 것, 아닙니까.

『소대장과 중대장 시절의 일기, 메모 등을 가지고 나름대로는 열심히 썼는데, 3년이 걸렸습니다. 원래 저는 글재주가 없어요. 실은 중학교 미술교사를 지냈던 집사람이 저의 거친 원고를 다듬느라고 엄청 고생했습니다. 글 잘못 썼다고 집사람에게 구박도 많이 받았어요』

「전투감각」은 1991년 6월에 초판이 발행된 책으로 이미 「육군 필독서 20」의 하나로 선정된 바 있다. 이 책이 어떻게 스테디 셀러가 되었는지가 궁금했다.

『처음에 自費(자비)로 3000권을 찍었는데, 후배들이 연대장이나 사단장으로 나간다고 인사를 하러 오거나 하면 「예하 소대장과 중대장에게 나눠 줘라」며 그냥 몇 십 권씩, 심지어 한 번에 100여 권을 선물로 주었습니다. 그런데 후배들이 자꾸 달라고 해서 그후 20여 차례에 걸쳐 1000부도 찍고 2000부도 찍었습니다. 육사, 제3사관학교, 보병학교의 구내 서점에도 내놓았는데(정가가 1만원인데도), 책값을 3000원 정도만 받도록 했습니다. 책은 수만 권 나갔지만, 공짜로 나눠준 것이 많아 오히려 제가 작은 아파트 하나 값은 날린 셈입니다』

―「전투감각」은 한국군 장교가 쓴 군사 관련 서적으로서 최초로 영역본으로 발간되어 화제가 되고 있습니다. 누가 영역본 발간을 주도했습니까.

『韓美聯合司(한미연합사)의 直前 참모장 랜돌프 하우스 중장이 이만저만한 책이 있다는 얘기를 어디선가 듣고 카투사에게 영역을 시켜 자기가 먼저 읽어 보고는 미국의 軍 교육기관에 소개하여 영역본이 나오게 되었습니다. 하우스 장군 자신도 근접전투의 경험이 많은 분입니다. 그의 집무실에 가서 보니까 전투 중에 적병의 총알을 맞아 구멍이 뻥 뚫린 자신의 철모를 신주단지처럼 모셔놓고 있습디다』

―「전투감각」의 중심 테마는 근접전투의 요령입니다. 전투를 하려면 그에 앞서 자기 부하의 능력부터 잘 파악하고 있어야 할 터인데, 어떤 성격의 병사가 근접전투를 잘합니까.

『평소 완력이나 뽐내고 설치는 녀석들은 적을 보면 먼저 겁을 집어먹는 경우가 많습니다. 얌전하고 묵묵한 성격을 지닌 사람이 전투를 잘합니다』


공포의 실체


―누구나 전투를 앞두고는 공포를 느끼지 않습니까.

『그렇지요. 戰場 제1의 敵은 적군의 총칼이 아니라 스스로가 느끼는 공포감입니다. 공포는 전술교리를 마비시키고 작전계획을 無用之物(무용지물)로 만들어 버립니다. 프러시아의 전쟁 이론가 클라우제비츠도 그의 저서에서 「공포는 기본적인 전력을 약화시키는 중요한 요인」이라고 지적했습니다. 공포심은 공격時보다 방어時, 주간전투時보다 야간전투時에 더 심하게 나타납니다. 한밤중에 참호 안에 가만히 앉아 있다가 보면 별별 상상을 다 하다가 지레 겁을 먹게 되지요. 앉아 있더라도 목이라도 계속 움직이면서 마음을 단단하게 먹으면 근육이 수축되거나 몸이 굳어져버리는 무섬증을 방지할 수 있습니다』

―전쟁 중엔 전투쇼크 환자가 대량으로 발생하지요.

『1973년 아랍-이스라엘 전쟁 중 전투능력이 우수하다는 이스라엘 軍에서도 전투쇼크 환자와 일반환자의 비율이 30대 100인 것으로 집계되었습니다. 이스라엘 軍은 이후 사단급 의무대대에 정신진료팀을 편성하여 전투쇼크 환자를 24~72시간 관리 치료하는 체제를 갖추어 1982년 對레바논 전쟁에서는 상당한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전투정신병 증상이 만연했던 이유는 무엇입니까.

『사회생활을 하다 갑자기 동원된 예비군, 비교적 편안한 병영생활을 하던 병사들이 별안간 인간살상의 참혹한 전투에 투입되면 공포에 시달리고 거기에 정신적, 육체적 피로가 누적되면 그런 증세가 나타나는 겁니다』

―남의 얘기가 아니군요.

『지금 전선을 지키는 우리 장병들에겐 실전 경험이 없습니다. 사방 1km에 100여 문의 重砲(중포)를 사격하는 敵의 전술과 치열한 진지전, 근접전투를 강요하는 우리의 전투방법을 생각할 때 初戰(초전)에 많은 전투정신병 환자가 발생할 수 있습니다. 적개심이 강하고 전투경험도 있는 이스라엘軍이 그러했던 만큼 우리 軍에서는 미리 특별한 대비책을 강구해야 합니다』


「먼저 쏘고 첫발을 명중시켜라」


―전투를 앞두고 병사들의 공포심을 어떻게 제거시킵니까.

『호를 파고 들어가 거총을 하고 있으면 머리는 철모에 의해 보호를 받고 가슴부분도 호 앞에 쌓아 놓은 모래주머니에 의해 안전합니다. 호 바깥으로는 눈만 노출되는 셈입니다. 야간이나 주간이나 사람의 눈 크기의 표적을 걸어놓고 뛰면서 사격해 보세요. 1개 소대 병력이 이 한 곳에 사격을 해도 명중시키지 못합니다. 攻者(공자)는 노출되어 있는 반면 防者(방자)는 참호에 의해 거의 완벽하게 보호를 받을 수 있는 겁니다. 전장에서 군인은 시간만 나면 호를 파야 합니다』

―인간을 표적으로 삼아 사격해야 하는 데 대해 갈등을 느끼지는 않습니까.

『인간이 인간을 쏘아 쓰러뜨린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처음엔 누구나 겁도 나고 저항감도 느낍니다. 그러나 적을 죽이지 않으면 자기가 죽어야 하는 것이 전장의 생리 아닙니까. 전투에서 머리를 들고 조준 사격을 해서 한 번만 적을 쓰러뜨리고 나면 그후엔 자신감이 생겨 제대로 싸울 수 있습니다』

―월남전에서 戰果(전과)를 많이 올려 「한국군 제1의 싸움꾼」이란 별호를 얻으셨는데 , 그 비결은 무엇이었습니까.

『사전 준비를 착실하게 하면 전투는 그만큼 수월해져요. 전장에서 당황하는 것은 예측하지 못한 상황이 발생했기 때문입니다. 소대장이나 중대장은 평소에 戰史를 많이 읽고 생각과 걱정을 많이 하여 예측 못한 상황이 벌어지지 않도록 노력해야 합니다. 예컨대 야간전투를 하려면 평소 實戰과 똑같은 야간전투훈련을 해 놓아야 자신 있게 싸울 수 있습니다. 병사들에게는 「먼저 쏘고 첫발에 명중시켜라」고 가르쳐야 합니다』

―현재 우리 육군은 155마일에 이르는 全 전선에서 북한군의 공격과 침투에 대비하여 호를 파 놓고 매복을 하고 있습니다. 매복전투에서 이기는 제1의 요령은 무엇입니까.

『적을 至近(지근)거리까지 유인한 다음 누르고(크레모아 격발), 던지고(수류탄 투척), 쏘라(소총 사격)를 동시에 실시해야 합니다. 군사교범에서는 적을 잡을 때 크레모아 격발, 수류탄 투척, 소총 사격 순으로 하도록 기술되어 있는데, 이것은 잘못된 것입니다. 병사 3인이 역할을 분담하여 동시에 누르고 던지고 쏘아야 됩니다. 왜냐하면 크레모아가 터지면 살아 남은 적은 전력을 다해 도주합니다.

곧이어 수류탄을 던지더라도 터지기까지 5초에서 10초 사이에 적은 이미 몸을 숨기거나 수십m나 도망을 가버립니다. 용감한 적이라면 수류탄 투척으로 맞서거나 총을 쏘며 저항을 합니다. 그래서 매복전투는 성패가 순식간에 판가름난다고 해서 「5초 전투」라고 하는 것입니다. 세 가지를 한꺼번에 결행해야만 5초 전투에서 이길 수 있습니다』

―전투시 병사들의 조준사격 기피가 소대장, 중대장들의 최대 고민거리가 아닙니까. 30여년 전 제가 전방 GOP 소대장을 하면서 자주 목격한 일이지만, 무장간첩 야간침투 등의 실제상황에서 병사들이 사격을 하는 것을 보면 총알이 거의 하늘 높이 올라가 버립디다.

『겁을 집어먹은 병사들이 고개를 쳐박고 사격을 하니까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겁니다. 미군의 조사에 따르면 제2차 세계대전 중 가장 치열한 교전을 했던 보병중대의 경우에도 병력의 15~25%만 제대로 사격하는 것으로 나타났습니다.

초급 장교는 전투가 벌어지면 누가 조준사격을 하고 누가 못하는지를 살펴야 합니다. 또 전투가 끝나면 정확한 사격을 했던 병사를 우선 진급시키고, 조준사격을 하지 못한 하사관은 도태시켜야 합니다. 사격을 하지 않은 병사는 공용화기 사수나 조수로 再배치하여 팀에 의한 전투를 강요하면 명예심과 책임감 때문에 열심히 싸우는 경우도 있습니다』


行者僧 거친 ROTC 3기생의 선두주자


―소대나 중대 공격을 하다가 적의 사격을 먼저 받으면 어떻게 해야 합니까.

『대열을 갖춰 전진하던 부대가 적의 사격을 받으면 모든 부대원들이 주변의 지형지물을 이용하여 은폐나 엄폐를 해버립니다. 그러면 부대는 개개인으로 뿔뿔이 흩어져 일시에 단결력이 사라져 버립니다. 부대가 다시 전투의지를 회복하고 전진하기 위해서는 부대원들을 再규합시키는 과정이 필수적입니다. 이런 때는 지휘관이 과감하게 일어서서 「나를 따르라! 우리는 전진한다」라고 외쳐야 합니다』

「싸움꾼」으로 소문난 徐장군은 육군사관학교나 간부후보생 출신 장교가 아니다. 의외로 그는 일반적으로 군인으로선 좀 부드럽다거나 기합 적게 들어간 장교로 평가받는 ROTC(학훈단) 출신이다. 그의 군번은 65-02522. 이 숫자는 1965년도에 소위 계급장을 단 ROTC 3기생 2700여 명 가운데 최하위권인 2522等(등)으로 임관되었음을 나타낸다. 徐장군의 경우에서 보듯 야전군인으로서의 성공 여부는 군사학의 성적순으로 결정되는 것은 결코 아닌 것 같다.

―ROTC 출신 장교들의 대부분은 의무 복무기간이 끝나면 예편을 합니다. 徐장군께서 장기복무를 결심하게 된 동기가 무엇입니까.

『전방 GOP 소대장을 해보니 군대가 좋더라구요. 소위 때 장기복무를 신청해 버렸습니다』

―그렇다면 처음부터 육사에 가실 걸 그랬어요.

『고등학교(서울 중앙고) 다닐 때는 수산대학이나 해양대학에 진학하려고 했습니다. 큰 바다로 나가는 것이 꿈이었지요』

―입시에 낙방을 하셨습니까.

『바다로 나가는 것에 대해 웬일인지 선친이 반대하셨어요. 홧김에 대학 입학시험을 보지도 않고 지리산 쌍계사(경남 하동군 화계면)로 들어가서 머리를 깎고 行者僧(행자승) 노릇을 7개월쯤 했습니다. 부모님께는 절에 공부하러 간다고 했지만, 실은 가출이었어요』

―하필 쌍계사까지 내려가셨습니까.

『알고 지내던 고향(경기도 포천) 선배 둘이 쌍계사로 출가를 했거든요』

―行者 생활은 하실 만 하던가요.

『나무 하고 밥 하고 반찬 만들고 방에 불 때는 일을 신물이 나도록 했습니다. 그리고 千手經(천수경)과 般若心經(반야심경)을 매일 얼마씩 외워야 했습니다』


불경 암송으로 위기 탈출


―나무 하러 높은 산에 오르고, 밥 짓고 하는 일들은 야전 군인으로서 생존에 필요한 것이니까, 그런 수련을 미리 해버린 셈이군요. 다만 불경 암송과 군인과는 緣(연)이 좀 먼 것 같습니다.

『제가 17사단장을 맡고 있던 金泳三(김영삼) 대통령 시절의 얘기입니다. 좀 유별난 기독교 신자인 대대장 하나가 부대 안에 있던 불상을 훼손하여 뒷산에 내다버린 사건을 일으켜 직속상관인 제가 불교계로부터 엄청난 항의를 받고 혼이 났습니다. 그때 제가 스님들 앞에서 천수경과 반야심경을 기억나는 대로 마구 외었더니 스님들의 심기가 좀 풀리는 것 같았습니다. 불경을 암송할 수 있었기 때문에 위기를 넘기고 중장까지 진급할 수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고려대학교 사학과로 진학하신 데는 특별한 이유가 있었습니까.

『중학교 국어교사였던 선친께서 권합디다. 제가 좋아하는 과목이기도 했고 가출을 속죄하는 의미에서 아버님 말씀에 따라 입학했습니다. 그때는 장래에 역사 선생을 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습니다』

―對프랑스 전쟁의 승패를 결정한 「비엔디엔푸 전투의 영웅」이며 월맹군의 국방상으로서 對美전쟁에서 승리한 보 구엔 지압 장군도 역사 교사 출신이 아닙니까. 대학 시절, 장군님의 성적은 어땠습니까.

『그때는 가정교사를 하면서 학교에 다니던 형편이라 공부할 시간이 별로 없었습니다. 소위 임관 직전에 군번을 정하기 위해 치르는 군사학 시험 성적도 최하위권이었습니다』

―파월 지원은 언제 하셨습니까.

『전방 소대장 근무 1년을 마치고 연대 인사장교를 거쳐 연대 작전장교를 맡았는데, 당시 소위 계급으로는 파월 전투부대의 소대장이 될 수가 없었습니다. 1967년 5월 중위로 진급하자마자 월남 근무를 지원했습니다』


국가가 처한 상황 모르고 傭兵 운운


―그렇게 전쟁터에 가고 싶던가요.

『월남에 가라니까 너무 흥분해서 잠이 안 오더라구요. 기왕에 군대 생활을 하기로 한 몸, 전투를 해야 남들이 알아 주고 진급도 잘 될 것 아닙니까. (파월장병 교육훈련장이 있던) 오음리에 가서 2週 교육을 받은 다음 부산부두에서 수송선을 타고 1주일간 항해를 해서 월남에 상륙했습니다. 날아갈 듯 기분이 좋았습니다. 당시 아버님의 교사 월급이 적어 우리 집안 형편이 별로였는데, 제가 월남에 가는 바람에 어려움이 확 풀렸거든요. 제가 번 돈으로 저의 동생 넷 모두가 대학 공부를 할 수 있었으니까요』

―당시 중위 월급이라 해 봐야 1만원 정도 아니었습니까.

『월남에 가기 직전에 1년치 봉급을 한꺼번에 선불로 지급해 줍디다. 뿐만 아니라 월남 현지에서는 전투수당으로 매월 150달러를 받았습니다. 그거, 당시엔 큰돈이었습니다. 돈이 아까워 월남에서 미제 전투복 한 벌, 양담배 한 갑 사지 않았습니다. 한 달에 5달러 정도만 쓰고 나머지 모두를 부모님께 송금을 했습니다. 이 돈들이 차곡차곡 쌓여 여동생 둘, 남동생 둘의 등록금으로 쓰였습니다. 제가 송금한 돈으로 대학을 다닌 동생이 고려대학 공과대학 교수가 된 것을 지금도 저는 매우 자랑스럽게 생각하고 있습니다』

―파월 국군을 傭兵(용병)이라고 폄하하는 최근 우리 사회 일각의 주장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월남전에서 제일 덕을 본 나라는 우리 한국입니다. 우리가 참전했기 때문에 미국은 우리에게 市場(시장)을 개방했습니다. 세계 최대의 미국시장이 한국상품에 대해 우호적이었기 때문에 우리의 輸出立國(수출입국)이 성공했습니다. 월남 항만이나 도로 공사에 우리 건설업체들이 대거 진출함으로써 처음으로 해외건설의 기술을 축적, 1973년 석유쇼크 때 中東 산유국의 오일달러를 벌어들여 국가적 위기를 극복했습니다. 월남전 당시에 우리가 참전하지 않았다면 미국은 주한미군이라도 빼내 월남으로 보낼 수밖에 없었습니다. 월남파병에 의한 미국의 장비와 무기 지원으로 국군의 전투력은 오히려 증강되었습니다. 예컨대 소총만 하더라도 제2차 세계대전 때의 M1에서 최신예 M16으로 교체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더구나 1965~1973년의 8년간 월남전 참전을 통해 延 32만명의 국군이 실전 경험을 축적했습니다. 파월 국군이 실시한 대대급 이상 작전만 해도 1200회를 웃돌았습니다. 나는 6·25 때 우리를 도와준 미군과 어깨를 나란히 하여 적과 싸우는 것에 긍지를 가졌습니다. 우리 군의 월남파병을 傭兵 운운하는 것은 당시 우리가 처한 국가상황이 뭔지, 국가이익이 뭔지, 역사가 뭔지, 공산주의가 뭔지 모르는 사람의 한가한 얘기입니다』

―열대의 풍토엔 적응이 잘 됩디까.

『작전을 나가면 C레이션(전투비상식량)을 하루 정량인 3박스가 아니라 5~6박스나 먹어 치웠습니다. 국내에 있을 때보다 훨씬 잘 먹으니까 체력이 더욱 좋아지고 풍토병에도 걸리지 않습디다』

―부하들 중에 혹시 枯葉劑(고엽제) 피해자는 없었습니까.

『작전 중 고엽제가 빗물에 씻겨 내려가 오염된 냇물을 떠 마시고 귀국 후에 발병한 옛 부하가 한 사람 있습니다. 저로선 지휘 책임을 느끼지 않을 수 없는 일입니다』

―부임 초기에 전투 경험이 없는 소대장으로서 어려운 점은 없었습니까.

『제가 맹호부대 소대장으로 부임하니까 선임하사가 소대장 대리근무를 하고 있더군요. 선임하사는 저보다 여덟 살 많은 34세의 고참 중사로서 소대장인 저에게 「님」자도 붙이지 않았고, 소대원들도 선임하사를 더 따르더군요. 소대장으로서 체면이 영 말이 아니었습니다』

―그런 선임하사를 어떻게 다뤘습니까.

『당시 소대장은 소대원들의 부모님들에게 「아드님을 잘 데리고 있다」는 내용의 편지를 보내게 되어 있었습니다. 선임하사의 집에는 국민학교에 다니던 두 딸 앞으로 편지를 쓰고 연필이나 지우개 같은 학용품을 좀 부쳤습니다. 그랬더니 답장이 오고 하여 아이들과 정이 꽤 들었어요.

그런데 부임 초의 3개월간 전투가 벌어지기만 하면 선임하사는 내가 앞장서서 뛰어나가지 못하도록 붙들고 심지어는 무전기를 들거나 지도도 보지 못하도록 해요. 처음에는 선임하사를 오해했는데 사정을 알고 보니 신임 소대장이 설치면 적 저격수의 표적이 된다는 걱정 때문에 그렇게 했다는 겁니다. 선임하사의 성격이 좀 투박하긴 했지만, 소대장의 생명을 지키려는 정성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

어린 두 딸로부터 「아버지, 소대장님을 잘 지켜 드리세요」라는 신신당부의 편지를 받기도 했다고 나중에 털어놓더군요. 그로부터 서로 신뢰하게 되었고 그러니까 소대의 단결력이 굳세어졌습니다. 우리 소대는 싸우기만 하면 이겼습니다』


감명받은 대대장의 用人術


―직속상관으로서는 누가 가장 기억에 남습니까.

『소대장 시절의 대대장님으로부터 큰 교훈을 받았습니다. 파월된 지 4개월쯤 되던 어느 날 갑자기 김영규 대대장님이 중대장님과 대대 정보장교를 대동하고 저의 소대 벙커로 찾아오셔서 저의 침상에 걸터 앉더니 나더러 앞에 앉으라고 하세요.

그리고는 지도 한 장을 꺼내 내 앞에 펴 놓고는 대대본부 뒤쪽의 푸캇山을 가리키며 「저 지역에 敵情(적정)이 활발한 것 같아 앞으로 사단 또는 연대 규모의 작전을 하려고 한다. 그러나 확인되지 않은 첩보를 갖고 대부대 작전을 전개할 수 없으니 徐중위가 먼저 침투해 들어가 敵情을 확인해 오라」고 명령하십디다.

대대장님이 직접 찾아오셔서 내게 임무를 주시는 것도 황송한데, 다음 말씀에 나는 더욱 감격하고 말았습니다.

「며칠을 두고 곰곰이 생각해 봤고, 책상 위의 직위표 사진을 보면서 누가 이 임무를 잘 해낼 수 있을는지 소대장 개개인을 비교해 보았는데, 역시 徐중위가 제일 적임자라고 판단되어 이렇게 찾아 왔네」

목숨을 걸어야 할 어려운 임무였지만, 저는 대단히 영광스럽게 생각했습니다. 부하를 死地(사지)로 보내는 지휘관의 진지한 자세에 저는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그후 저도 부하들에게 어려운 임무를 부여할 때마다 소대장 시절의 대대장님을 본받으려고 노력을 했습니다』

―그런데 야간침투작전에서 목표지점을 어떻게 찾아가셨습니까.

『대원 12명을 거느리고 밤 9시에 중대기지를 조용히 빠져나와 산 속으로 접어드니 예상했던 대로 방향유지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앞장세운 통로개척조 2명의 유도에 따라 구간전진을 하다 보니 속도는 느렸지만 다음날 새벽에 가야 할 지점에 거의 도착했던 것 같았습니다. 대략 7시간 정도 능선을 따라 이동했는데도 불구하고 적과 전혀 접촉이 없었어요. 매우 운이 좋았던 셈입니다. 여명 무렵에 마침 계곡을 내려다 볼 수 있는 평평한 풀밭을 발견했습니다. 이곳을 주간 감시지역으로 정하기로 결심했습니다. 큰 나무 아래에 기대앉아 다리를 쭉 편 채 철모를 우측에 벗어 놓고는 그 위에 소총을 비스듬히 눕혀 놓았지요. 통로개척조로서 나보다 먼저 이곳에 도착한 대원 2명에게 내가 앉은 자리에서 20m 정도 떨어진 지점에서 경계를 서게 하고 다른 대원들은 쉬게 했습니다.

말이 야간침투지 지형도 모르는 적 점령 지역에의 잠입은 도박인 것입니다. 적과 만나면 큰일 난다는 걱정 때문에 짐이 무겁다거나 다리가 아프다는 생각도 없이 정신없이 기어올랐습니다. 플래시를 켤 수 없어 머리 속에다 익혀둔 지도에 따라 이동을 했는데, 제대로 왔는지 정확히 알 수 없었습니다. 날이 밝으면 지도상의 내 위치부터 찾아내야 할 판이었지요』


다가오는 그림자


―敵情(적정)은 발견하셨습니까.

『어찌나 배가 고프고 고달펐는지 꼼짝도 하기 싫습디다. 우선 C레이션 박스에서 닭고기 깡통 한 개를 꺼내서 뚜껑을 따고 플라스틱 스푼으로 몇 숟갈 집어먹었습니다. 땅거미가 가시면서 물체가 비교적 선명하게 보이기 시작했는데, 사람 하나가 다가왔습니다. 거리는 불과 20m. 적이라 생각하니 온몸이 일순간 돌처럼 굳어지더군요. 그 놈은 아무 눈치도 채지 못하고 계속 내 쪽으로 걸어왔습니다. 좁은 홀태바지 국방색 군복을 입고 머리칼이 흐트러져 텁수룩했습니다. 월맹군이라고 판단, 총을 잡으려는 순간, 그 놈도 앉아 있는 나를 발견하고는 놀라 그 자리에서 꼼짝하지도 못해요. 순간 「땅」 하는 한 발의 총소리가 나면서 그가 쓰러졌습니다. 내 우측에 있던 경계병이 적의 좌측 가슴을 조준 사격, 심장을 꿰뚫어 버린 것입니다』

―총소리를 냈으니 적에게 위치를 노출시킨 것 아닙니까.

『빨리 현장에서 이탈해야지요. 대원들에게 「야! 너희들 날 따라와」라고 외치며 뛰기 시작했습니다. 왼손에는 탄띠와 배낭을, 오른손에는 소총을 들고 적이 나타난 방향으로 달리니까 대원들이 뒤따라 옵디다. 산 위쪽으로 뛰면 속도가 느려 이탈이 어렵기 때문에 평지 쪽으로 방향을 잡은 것입니다. 뛰어가면서 흘끗 보니 숲속에 교묘히 위장된 움막이 여기저기에 흩어져 있습디다. 이거야말로 완전히 남의 집 안방으로 뛰어든 꼴이었습니다. 총성을 듣고 잠결에 엉금엉금 기어나오는 적이 보였습니다. 움막에다 대고 연발로 마구 쏴 댔어요. 적이 쓰러지는 것을 보고도 어찌나 다급했던지 확인할 생각조차 못하고 달렸습니다』

―대원들의 인명피해는 없었습니까.

『산중턱의 계곡까지 내려온 다음에야 대원들의 머릿수를 세어보았습니다. 다행히 12명 전원이 무사히 나를 따라왔습디다. 다시 도주를 했습니다. 우리 대대의 105밀리 포 사정거리 내에 들어와서야 겨우 안도를 했습니다. 적의 추격에 대비, 좌우측의 의심나는 지점으로 포탄을 유도하니 한두 발씩 날아와 터져 계곡을 진동시킵디다. 대원들의 사기가 충천하고 소대장에 대한 신뢰가 두터워지는 것이 눈에 역력하게 보였습니다』

―어려운 임무를 완수하셨군요.

『경계병에게 사살당한 적은 생포해야 했고, 움막집에서 보초도 세우지 않고 잠든 적들에 대해서도 침착하게 공격했더라면 세상을 깜짝 놀라게 할 만한 큰 전과를 올렸을 것인데 그러지 못해 실은 아쉬움이 컸습니다. 다만 군복을 입은 적들의 존재를 확인함으로써 월맹 정규군이 분지를 중심으로 전술적으로 배치되어 있다는 사실이 판명되었습니다. 그후 푸캇山의 월맹 정규군 1개 대대는 무장헬기의 지원을 받은 우리 1연대 2대대 6중대의 공격으로 풍비박산이 되었습니다』

―상관들로부터 칭찬을 받았겠군요.

『상관들로부터는 「徐중위, 싸움 참 잘한다」고 인정을 받긴 했지만, 소대원들에게는 내심 부끄러웠습니다. 接敵離脫(접적이탈)을 할 때 왼손에는 배낭, 오른손에는 소총을 들고 뛰면서 철모를 미처 쓰지 못하고 두고 온 것입니다. 다른 대원들은 전부 철모를 썼는데 소대장인 나만 못 썼으니 민망한 꼴이 되었습니다』


위험한 일에 기회 있다


그는 소대원들로부터 「베트콩이 설치한 부비트랩이나 지뢰가 어디쯤 매설되어 있고, 어디 가면 敵 저격수의 총알이 날아온다는 것을 귀신같이 눈치채는 소대장」이라는 평판을 들을 무렵, 소대장 근무를 마쳤다.

『그동안 고생했다고 연대 원호장교를 맡으라고 해요. PX(군부대 매점)나 위문품 등을 관리하는 이른바 「물 좋은」 대위급 보직인데, 저의 기질에는 전혀 맞지 않는 겁니다. 대위로 진급하기만 하면 소총중대장 보직을 받으려고 연대 인사장교와 상의를 했습니다. 인사장교는 「중대장으로 나가려면 직속상관이 될 대대장의 OK가 필요하다」면서 「대대장들을 만나 미리 부탁을 해두라」고 가르쳐 줘요. 그러나 ROTC 출신 장교를 중대장으로 받겠다는 대대장들이 아무도 없었습니다. 드디어 在求대대에 중대장 자리가 하나 난다는 정보를 듣고 대대장님을 찾아갔습니다. 당시 재구대대의 대대장님이 나중에 6共 대통령이 되신 盧泰愚 중령이었습니다. 저는 마구 떼를 썼습니다.

「우리 육군에는 ROTC 출신 초급장교가 압도적으로 많은데, 파월 부대에는 ROTC 출신 소총중대장이 한 사람도 없습니다. 왜 육사 출신만 중대장을 할 수 있습니까. 최정예 재구대대에서 먼저 ROTC 출신인 저를 중대장으로 불러 주십시오. 저는 소총중대장으로서 싸우고 싶습니다」

대대장님은 내 말을 가만히 듣고만 계시더군요. 재구대대는 부하들을 살리기 위해 자기 몸으로 수류탄을 덮친 故 강재구 소령의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명명된 부대로서 그 중대장직은 당시 육사 출신 대위들 중에서도 선두그룹만이 차지하던 엘리트 보직이었어요. 그러나 그때 나는 재구대대의 중대장이 될 것이라는 어떤 자기 확신에 차 있었습니다. 그때나 지금이나 나는 낙관주의자입니다.

1969년 4월1일부로 임시대위 승진과 동시에 재구대대의 중대장으로 부임하라는 명령을 받고 작전 중인 대대본부로 헬기를 타고 날아갔습니다. 간절한 소원이 이뤄진 것입니다. 사람은 하고 싶은 일을 해야 잘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런 기회가 오면 떼를 써서라도 붙잡아야 할 것입니다. 가만 생각해보면 저는 재구부대의 소총중대장이 됨으로써 「싸움꾼」으로 소문이 나고 그래서 그후 육군중장에까지 진급했다고 생각합니다』

「싸움꾼」은 원래 모험을 좋아한다. 세계적으로 유명한 「싸움꾼」으론 제2차 세계대전 당시 영국 수상을 지낸 윈스턴 처칠卿이 손꼽힌다. 처칠은 센드허스트 육군사관학교에 3修 만에 겨우 입학했다. 그는 이어 1895년 쿠바 반란 진압작전, 소위 임관 후 1898년 수단 원정 등 위험한 싸움터를 자청해서 참전했다. 1899년에는 南아프리카 보어전쟁에 참여하여 포로가 되었다가 탈출하여 국민적 영웅이 되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다다넬스 상륙작전의 실패에 책임을 지고 海軍相(해군상)의 직위에서 물러나 육군 소령으로 자원입대한 뒤 대대장, 연대장으로 戰功(전공)을 세웠다. 「싸움꾼」에게는 전투에 대한 회의, 인간적인 갈등 같은 것은 없는 것일까?


꿈에 나타나는 여자 베트콩의 悲運


―전투 중 심한 인간적 고뇌를 느껴본 적이 있으십니까.

『중대장 시절에 정찰을 나갔다가 젊은 여자 베트콩을 쏘아 하복부에 총상을 입히고 포로로 잡았습니다. 심한 출혈을 했지만, 적 지역 안이라 헬리콥터를 불러 후송할 수도 없었습니다. 지혈제가 없어 소화제와 비타민을 섞어 먹이고 내 참호 뒤편에 눕혀 놓았는데, 그녀가 호주머니에서 사진 한 장을 꺼내 보이며 살려 달라고 사정을 합디다. 어린 두 딸과 함께 찍은 사진이었습니다. 살려 주고는 싶었지만 풀어 주면 베트콩에게 우리 위치가 대번에 폭로됩니다. 20시간쯤 붙들어 두었는데, 결국 과다출혈로 죽고 말았습니다. 몹시 우울했습니다』

―戰場의 생리가 그러한데 어쩌겠습니까.

『오랜 세월이 지나고 난 후에도 가끔 그녀가 내 꿈 속에 나타나서 가위에 눌리곤 했습니다. 이렇게 심적 고통에 시달리다가 월남과 에티오피아의 난민들을 위해 구호사업을 벌여온 이윤구 목사님에게 저의 고민을 호소했더니 「빨리 회개하라」면서 속죄 차원에서 제가 도움을 주어야 할 월남 소녀 둘을 선정해 주십디다. 그래서 5년 전부터 부모 없는 두 자매에게 매월 2만원씩 4만원을 송금해 주고 있습니다. 그후부터는 악몽이 사라졌습니다』

1969년 7월12일, AP통신은 맹호부대 1연대 11중대(중대장 서경석 대위)가 월맹군과 육박전을 포함한 8시간의 치열한 전투 끝에 그 중 38명을 죽이고 4명을 생포했다는 기사를 타전했다. 다음 내용의 AP통신 기사는 국내 일간지에 전재되었다.

<주월 한국군 대변인은 월맹군이 10일 새벽 맹호 제1연대 11중대에 공격을 개시한 후 7, 8명씩 분대 단위로 분산, 한국군 방어망을 뚫으려고 시도했으며 그 중 1개조는 중대지휘본부 10m 거리까지 접근했으나 총개머리판과 태권도를 구사한 한국군에 의해 격퇴되었다고 말했다. 특히 부대 지휘소 부근에서의 육박전에서는 중대장과 포병장교, 통신병, 행정병까지 직접 월맹군과 접전했었다. 이 전투는 거의 8시간 만에 끝났으며 한국군은 전사 1명 이외엔 가벼운 피해를 입었을 뿐이다>

―당시 국내 신문을 찾아보니까 「徐慶錫 대위에 충무무공훈장--퀴논 북방에서 백병전으로 수훈 세워」라는 컷 제목이 눈에 확 띕디다. 백병전을 어떻게 하셨길래 무시무시한 싸움꾼으로 소문이 나게 되었습니까.

『적병이 도망을 가길래 어깨에 거총을 하고 방아쇠를 당겼으나 「찰칵」 소리만 나고 실탄이 나가지 않았습니다. 소총에 끼워진 탄창의 총알을 전투 중 다 사용한 겁니다. 나는 도망가는 적 둘을 추격했어요. 앞서 뛰는 녀석은 무전병이 쏴서 쓰러뜨렸습니다. 내가 두 발짝 차이로 적을 쫓아갔으므로 뒤에 오던 무전병이 다시 적을 쏘려니까 내 등이 조군구로 왔다갔다 해서 방아쇠를 당길 수가 없었습니다.

논길을 따라 도망가던 적이 아랫논으로 뛰어내렸습니다. 그 순간 나는 소총을 거꾸로 잡고 개머리판으로 적의 머리통을 내리쳤습니다. 「탁」 하면서 M16 소총의 개머리판이 부러져 멜빵 끝에 달랑 매달린 채로 튕겨나갔습니다. 뒤통수를 맞은 적은 논바닥에 철퍼덕 나가 자빠졌습니다』


대검을 내리꽂으니…


―그때 기분이 어떻습디까.

『대검을 뽑아 벌렁 자빠진 적 위에 올라 타고 이마, 목, 명치를 있는 힘을 다해 찔렀습니다. 고통스런 표정으로 부르르 몸을 떨며 나를 노려보던 모습을 아직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평소 야구를 좋아하는데, 방망이를 휘둘러 야구공을 멀리 날려보낼 때의 기분이었습니다. 뒤따라 오던 무전병은 너무 흥분한 나머지 대대에 상황보고를 하면서 「우리 중대장님이 이겼습니다」라고 몇 번이나 고래고래 고함을 지릅디다.

이날 전투로 우리 중대에서 1명이 전사했는데, 전사자는 적의 집중사격을 받은 화기소대의 선임하사였습니다. 그런데 다리에 총상을 입고 드러누워 있던 포로가 나를 찾는다기에 가 보았더니 유창한 영어로 「제네바협정을 아느냐」고 물어요. 그의 영어 실력에 놀라 대답을 제대로 하지 못하고 고개만 끄덕거렸습니다.

그랬더니 자기는 장교인데, 제네바협정을 지키도록 중대원들에게 명령하라고 요구하는 거예요. 그러나 그의 사격지시로 상반신에 총알 여덟 발을 맞고 쓰러져 판초 우의에 둘둘 말려 있는 선임하사의 시신을 보니 참을 수 없는 분노가 울컥 치밀어 오르더라구요. 나는 주절거리는 敵 장교의 입에다 정글화의 뒤꿈치를 쑤셔 넣고는 몇 바퀴 비틀어 버렸습니다』

―그날 戰果는 어땠습니까.

『포로 4명, 사살 38명, 이외에 소총과 장비, 문서 등 상당량의 전리품을 노획했습니다. 그 가운데는 군용 더플백에 월남돈과 달러가 가득 든 돈자루 두 개도 있었습니다. 우리 중대에게 얻어맞은 월맹군 1개 대대가 먹고 살 군자금이었습니다. 월맹군은 현지에서 지역주민들을 이용하여 물자를 조달했거든요』


큰 戰果 올리고도 軍法會議에 설 뻔


―그 많은 돈을 어떻게 처리했습니까.

『軍 규정에는 전부 상급부대에 반납하도록 되어 있지만, 그게 어디 그렇게 됩니까. 현장에서 공을 세운 중대원들에게 큰 주먹으로 두 주먹씩 나눠 주었습니다. 그래도 돈자루 하나가 남았어요. 중대로 가져와 위원회를 만들어 그 결정에 따라 돈을 사용키로 했는데, 대부분 중대원 사기 고양을 위해 썼습니다』

다음날 중대기지로 날아온 맹호부대의 부사단장이 徐慶錫 대위의 목에다 충무무공훈장을 걸어 주었다. 11중대의 소대장, 배속된 포병 관측장교, 그리고 하사관과 병사 10여 명도 훈장과 표창을 받았다.

『우리 중대의 습격 작전은 중대 단위 독립작전으로 처음 있었던 일이며, 최초의 야간공격전투를 했다는 기록을 남겼습니다. 그래서 처음에는 제가 을지무공훈장과 미국 은성훈장, 월남 최고훈장을 받도록 상신되었으나 문제가 생겨 미국 은성훈장과 월남 최고훈장이 취소되었고, 을지무공훈장도 충무무공훈장으로 한 단계 격하되어 버렸습니다』

―무슨 사고가 있었습니까.

『선임하사가 전사한 화기소대의 병사들이 나도 모르는 가운데 포로들에게 잔인한 짓을 저질렀습니다. 제가 군법회의에 회부될 판이었는데, 戰功 때문인지 재판에 서는 불운만은 면할 수 있었습니다. 순박하고 착하기만 했던 내 부하들이 몸서리치는 전투를 치른 후에는 他 부대 사람들에게 대들어 싸움질을 하는 등 거칠어지더군요. 잔인하고 고약한 중대로 소문이 나서 때로는 손해도 보았지만 득을 보기도 했습니다』

―득이라면 어떤 것인데요.

『적들이 우리 중대에게 겁을 내 감히 건드리지 못했어요. 대신 적들은 내 목에 큰 현상금을 걸었다고 하더군요』


主敵을 잘못 선택한 비극


―월남전에서 연합군은 거의 모든 전투에서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불구하고 월남을 송두리째 적에게 넘겨 주고 말았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월남전은 분명히 월맹군의 월남에 대한 침략전쟁이었습니다. 그러나 월맹뿐 아니라 모든 공산국가들은 월남전쟁을 월남국민들이 현 체제를 부정하고 스스로 봉기한 內戰이라고 선전하면서 미국의 참전은 내정간섭이라고 비난했지요. 이로 인해 세계의 여론은 미국의 월남전쟁 수행을 정의롭고 가치 있는 것으로 보지 않게 되었습니다.

국내 여론이 나빠지고 反戰사상이 팽배해지자 미군은 침략의 소스인 월맹을 가만 놔두고 곁다리에 불과한 베트콩을 쫓는 군사행동에만 몰두했습니다. 전쟁기간 중 美 공군이 월맹의 주요 항만 등에 대해 폭격은 했으나 이것 또한 지속적이거나 적 의지를 파괴하는 수준이 되지 못했습니다. 특히 지상군이 17도선을 넘어 월맹본토를 공격한 일이 한 번도 없었어요. 이는 敵 주력의 격멸이나 전쟁지도부의 무력화를 포기한 것이나 다름이 없는 것이었습니다』

―월맹의 대통령 호치민이나 國防相 보 구엔 지압은 전투에서는 계속 지면서 워싱턴을 향한 정치전쟁에서 승리한 셈이군요.

『월맹군과 베트콩의 舊政(구정)공세는 군사적으론 실패하고 정치적으로 성공한 전형적 사례입니다. 또 베트콩 5~6명이 기습전으로 막강한 미군의 부대를 진지 안에 꽁꽁 묶어 놓는가 하면 그 중 가장 약한 곳 하나를 골라 병력 집중에 의해 시범적으로 묵사발을 만들어 버림으로써 정치적 효과를 극대화했습니다. 바로 소수가 다수를 견제하여 이기는 전형적인 毛澤東(모택동)게릴라 전술이었습니다』

―美 행정부는 중공군의 개입을 겁냈다면서요.

『중공은 1964년 10월에 핵실험을 하고 나서 한국전쟁의 예를 들면서 월남전에 참전하겠다고 위협을 했거든요. 미군은 한국전쟁 이후 중공군의 인해전술에 공포를 느끼고 있었습니다』

―미국이 월남전에서 패배한 것은 TV 때문이란 얘기의 근거는 무엇입니까.

『미국 행정부가 가장 무서워 했던 것은 소련이나 중공 및 월맹이 아니라 자국의 여론이었습니다. 당시 美 국내 여론은 대부분 TV가 만들었습니다. TV는 거짓말쟁이 중에서 그럴 듯한 거짓말쟁이입니다. 어느 한 부분에 초점을 맞춰 그럴 듯하게 설명하면 호소력이 실제 이상으로 강렬해집니다. 전쟁 자체가 살생이고 파괴 그 자체 아닙니까. 美 공군의 폭격으로 네이팜탄의 불길을 뒤집어 쓰고 울부짖는 어린 소녀의 모습이 미국의 가정에서 저녁을 먹고 거실에 모여 앉아 있는 시간대에 TV화면에 방영되었습니다. 미국 시민들로 하여금 自國 군대의 잔인성에 대해 혐오감을 느끼게 한 것이지요. 미국이 월남에서 손을 떼고 월남의 공산화를 방관할 수밖에 없었던 것은 TV 카메라 때문이었습니다. 결과적으로 TV가 이적행위를 했던 것입니다. 설상가상으로 미국의 정신나간 대학교수, 주교, 목사, 수녀 등의 종교인과 지식인, 월남전 참전을 기피한 학생들로 구성된 反戰단체들은 미국의 월남 지원을 종료시킴으로써 세계평화를 달성하자는 악명 높은 호소문인 「목사의 편지」를 널리 유포시켰습니다. 미국의 힘의 중심인 여론은 자기 정부가 아닌 적의 원격조종에 넘어가고 말았습니다』


『우리 국군, 잘합니다』


―이제 미국은 동맹국이 침략을 당하더라도 지상전에는 참전하기 어렵게 되었습니다. 남북 頂上회담에도 불구하고 북한의 군사적 압력은 여전한 지금, 우리의 안보는 과연 걱정이 없는 것입니까.

『우리 국군, 잘합니다. 인민군과 싸우면 이깁니다』

―근거가 무엇입니까.

『우선 우리 장병들이 인민군에 비해 머리통 하나 정도 큽니다. 인민군은 융통성이나 자발성이 없습니다. 지휘관의 자질면에서도 우리 국군이 우수합니다. 저쪽 지휘관은 부패하고 나이도 너무 많습니다. 군수지원 등 전투지속능력에서도 우리가 압도적으로 우세합니다. 인민군의 장비와 무기는 이미 낡았습니다』

―칭기즈칸 시대의 몽골군은 그들보다 덩치가 훨씬 큰 아랍연합군과 유럽 제후연합군을 격파했습니다. 북한의 전쟁지도부는 國運을 걸고 전쟁을 수행한 경험을 지녔지만, 국군의 작전지휘권은 6·25 이후 유엔군 사령관에게 이양되었습니다. 나라의 존망을 걸고 전쟁도 불사한다는 의지면에서 우리 쪽이 어떤지 아직 검증된 바 없는 것입니다. 특히 金大中 대통령이 「이제 전쟁은 없다」고 선언한 것은 국가원수로서 非전략적인 言行입니다. 우리 경제가 北에 비해 압도적 우위에 있다고 하지만, 인류의 전쟁사를 보면 거지군대가 부자군대에게 승리한 경우가 훨씬 많았습니다. 스파르타는 그들보다 경제력이 10배 이상인 아테네와 싸워 이겼습니다.

『그래도 먹는 것을 해결하지 못하는 체제가 오래 갈 수는 없습니다. 북한이 진정으로 변하지 않으면 결국은 이미 망한 다른 공산국가의 전철을 밟지 않겠습니까』


훈센 캄보디아 首相의 부탁


徐장군은 예편 후 주한 캄보디아 명예총영사를 맡고 있다. 그래서 그의 도곡동 사무실에는 「주한 캄보디아 총영사관」이란 간판이 붙어 있다.

―주한 캄보디아 명예총영사를 맡게 된 까닭이 궁금하군요.

『작년 9월에 캄보디아를 방문, 훈센 수상을 만났더니 「프놈펜(캄보디아 수도)에는 한국대사관이 들어와 있는데, 우리는 돈이 없어 서울에 대사관을 설치하지 못하고 있다」며 명예총영사를 맡아달라고 간곡하게 요청을 하더군요. 갑작스런 제의라 「외교 일은 잘 모르니까 생각을 좀 해보겠습니다」라고만 대답하고 귀국, 은사와 선후배들과 상의해 보았더니 모두들 「우리나라를 위해서라도 해야 할 일」이라고 해서 금년 7월부터 총영사관을 열게 되었습니다』

―徐장군님께 훈센 총리가 그런 제의를 요청한 배경이 무엇입니까.

『제가 작년에 캄보디아에 낙하산 50개를 보냈는데, 그것이 인연이 되었습니다』

―낙하산이라니요.

『5공수여단장 시절의 옛 부하가 예편을 한 뒤 8년 전부터 캄보디아에 들어가 육군 수뇌부, 공정부대, 경호실, 헌병 등에게 태권도를 가르치고 있어요. 그런데 그 친구가 잠시 귀국, 저를 찾아와 「캄보디아軍이 보유한 낙하산이 겨우 12개인데, 그것도 모두 헌것이라서 사고를 내고 말았다고 해요. 즉, 캄보디아軍 소령 한 사람이 수송기에서 점프를 했는데 고물 낙하산이 펴지지 않는 바람에 추락사를 했다는 겁니다. 제가 낙하산을 많이 타 본 사람이라 그런지 가슴이 찡하더라구요. 그래서 주위의 여러분들에게 도움을 받아 새 낙하산 50개와 부속품 등을 구입해서 캄보디아軍에 기증을 했습니다. 그런 인연으로 캄보디아軍 창설기념일에 초청을 받았는데, 제가 보낸 낙하산으로 낙하시범을 보이더라구요. 그런데 또 수상 경호부대에서 제게 검열과 사열을 좀 해달라는 거예요. 5시간에 걸쳐 근무체제, 경계요령 등을 내 방식대로 깐깐하게 지도해 주었습니다. 훈센 수상이 매우 고맙게 생각하셨던 것 같습니다』

―총영사관을 개설하자면 경비도 만만찮을 텐데요.

『사무실 운영비 등으로 월 200만원쯤 들어갑니다. 제가 나라로부터 과분한 대접을 받아 육군 중장에까지 올랐던 사람이니까 이런 정도의 일이라면 국익을 위해서라도 기꺼이 봉사해야 된다고 생각합니다』

―母校에 객원교수로 출강하신다는데, 어떤 강좌를 맡으셨습니까.

『금년 3월부터 고려대 조치원 캠퍼스에서 매주 한 번 강의합니다. 강의 제목은 1학기 때는 「전쟁과 국가」였고, 2학기에는 「지도자론」입니다. 객원교수로서 받는 보수를 총영사관 운영비로 쓰고 있는 셈입니다』

―장군의 강의에 학생들의 반응은 어떻습니까.

『1학기에 308명이 수강신청을 했는데, 2학기엔 조금 늘어 358명이 수강을 하고 있습니다』

―軍에서 연설을 많이 하셨을 터이니 강의가 별로 어색하지는 않으시겠습니다.

『웬걸요. 상당히 스트레스를 받고 있습니다. 교안을 작성해 놓고 반드시 가족들 앞에서 연습을 거듭한 후에야 출강을 합니다. 첫 강의에 출강하기 전에는 이런 연습강의를 스무 번이나 했습니다』

―가족이 몇이십니까.

『구순이 넘은 어머님과 집사람, 그리고 딸 하나뿐입니다』

―단촐하시군요.

『서른두 살에 결혼해서 딸 하나가 태어나자 일찌감치 정관수술을 해버렸습니다』

―특별한 까닭이 있으셨습니까.

『그 시절의 중요 국가시책 중 하나가 산아제한 아니었습니까. 아이를 더 두면 군인으로서 부담이 될 것 같아 그렇게 했습니다. 사실 저는 우리나라가 이만큼 사는 나라가 될 줄 몰랐고, 저 자신이 육군중장까지 출세할지는 더더구나 몰랐습니다(웃음)』

徐장군은 1942년생으로 금년 59세. 군복은 벗었지만, 새로운 일의 현장에서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분투하고 있다. 인터뷰 도중 답변 자료를 찾기 위해 양복 차림인데도 불구하고 사무실 바닥에 서슴없이 주저앉아 서류더미를 뒤지는 그의 열정에서 영락없는 야전군인의 모습을 발견했다. 170cm 전후의 키에 아직 빈틈없이 단단한 몸집이다. 35년의 세월, 軍門에서 대군을 호령한 武人(무인)답게 목소리도 크고 거침이 없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