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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戰場감각」의 경고

정순태   |   2003-03-03 | hit 1689

월남의 패망 원인이 함께 싸우던 미군과 한국군의 철수로 인한 힘의 열세로 불가피했다는 견해가 있다. 그러나 당시 월남의 병력과 장비는 동남아 최고 수준이었다. 월남은 국가통수기구의 전쟁지도능력 부족, 정부와 군부의 무능과 부패 및 빈번한 정책 변경, 그리고 軍의 士氣 저하로 인해 패망했다.

1975년 월남군은 110만명의 막강한 전투력을 갖고 있었으면서도 싸움다운 싸움을 한 번도 해보지 못하고 자멸하고 말았다. 전쟁 지도부의 능력 부족과 예기치 못한 피난민의 홍수사태로 상상을 초월한 대혼란이 야기되어 국가적 마비가 초래되었기 때문이다.

1973년 미군이 월남에서 마지막으로 철수한 후 월남군과 월맹군(편집자注-당시 17도선 이남의 월남국토엔 베트콩 게릴라 이외에도 14만명의 월맹정규군이 내려와 작전중이었다)은 휴전협정에 조인했으나 쌍방간의 전투는 계속되었다. 1975년 3월, 마침내 월맹군이 20개 사단으로 총공세를 가해 중부 고원지대의 국도가 차단되고 남부의 군사요충지인 반 메 투옷 市 등이 함락되었다.

이에 티우 대통령은 국토 전체를 방어할 수 없다는 판단 아래 제1군단이 배치된 북부지역과 제2군단이 배치된 중부 고원지대의 국토를 포기하고 제1군단과 제2군단을 경제번영지대인 사이공 일대(제3군단 주둔)와 메콩강 델타지역(제4군단 주두)으로 이동시켜 방어를 강화하려고 했으며, 특히 제2군단장인 캄란 소장에게 반 메 투옷 市를 탈환할 것을 명했다.

대혼란은 제2군단의 이동간에 일어났다. 군사기밀을 지킨다는 이유로 부대이동에 대한 사전홍보를 하지 않았는데, 이것이 유언비어를 창궐시켜 패닉현상이 초래되고 말았다.

제2군단이 남하하자 피난민 대열이 도로를 메워버렸다. 갑자기 이동명령을 받은 부대의 장병들은 가족과 친지들을 찾아 데리고 가려고 하여 개인행동도 서슴지 않았다. 다른 민간인들도 공산군의 학살을 피해 결사적으로 기동부대의 후미에 따라 붙었다.

3월15일부터 피난민들이 본격적으로 쏟아져 나와 승용차, 트럭, 자전거의 대열이 10여 마일이나 장사진을 쳐 움직이지 못했다. 드디어 3월18일 밤부터 적은 무자비한 공격을 가했다. 그 바람에 월남군 제2군단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월남 군부와 국민들에게는 악몽이었다. 모든 국도와 항만은 사이공을 향하는 피난민 대열로 붐벼 부대의 이동은 불가능했다. 해상으로의 부대기동과 보급품 추진을 맡아 온 항만 역시 피난민들에 의해 점령을 당했다. 수도 사이공에서도 反정부 폭동과 軍에 대한 불신감으로 대혼란이 일어났다. 티우 대통령은 제2군단의 패주에 대한 책임을 지고 전격 사임했다.

월남군 최고의 정예부대로서 북부지역에 주둔 중이던 제1군단과 공수사단, 해병대도 월맹군과 전투를 하기 위해 부대를 이동시키다가 주민들이 피난을 가려고 도로로 쏟아져 나오는 바람에 軍民이 엉켜버렸다. 제1군단도 제2군단처럼 월맹군의 전면공세를 받고 무너졌다. 제1군단과 제2군단의 궤멸로 월남군은 병력의 50% 이상을 상실하고 패망했다.

한반도의 좁은 국토와 제한된 도로망, 치솟은 빌딩 숲과 도로를 메워버린 차량의 물결은 장차전에서 무엇을 예고하고 있는가? 사람과 차량의 대홍수 속에서 우리 軍은 작전 기동을 성공적으로 할 수 있을 것인가? 월남 최후의 비극을 우리는 얼마나 기억하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