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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卷頭 특별 인터뷰] 韓國史新論의 著者 李基白 선생이 말하는 韓國史의 大勢와 正統

정순태   |   2003-03-06 | hit 3226

「韓國史新論(한국사신론)」은 우리 지식인 사회에 가장 큰 영향력을 행사해 온 한국사 개설서다. 1967년에 초판이 발행된 「韓國史新論」은 植民史觀(식민사관)과 唯物史觀(유물사관)을 배격하고, 우리 민족사를 支配勢力(지배세력)의 끊임없는 확대에 의해 사람의 자유와 평등을 신장시켜 온 발전의 역사로 자리매김하는 時代區分論을 제시했다.

서강大 사학과 洪承基(홍승기) 교수는 「韓國史新論」에 대해 『지난 한 세기에 걸쳐서 한국 근대역사학이 이룩해 온 업적을 대표하는 저서』라고 평가했다. 이 책은 그동안 대표적인 韓國通史가 되어 일본, 미국, 중국 등 세계 7개국에서 번역 출판되었다.

「韓國史新論」의 저자는 「광복 후에 등장한 韓國史 연구 제1세대」로서 主전공분야인 新羅史, 高麗史에 관해서도 정력적으로 저서와 논문을 발표한 李基白(이기백) 선생이다. 그는 작년 5월 학기 도중에 돌연 이화여대의 석좌교수직을 떠났다. 지병의 악화 때문이었다. 기자는 세 차례(9월22일, 9월24일, 10월6일)에 걸쳐 그의 집(서울 강남구 역삼2동 개나리아파트)으로 찾아가 모두 아홉 시간 동안 그와 인터뷰했다.


―왜 학기 중에 갑자기 강의를 그만두셨습니까.

『작년 4월까지는 1주일에 2시간씩 출강했어요. 그런데 오랫동안 치료를 맡아온 金丁龍(前 서울의대 교수) 선생이 「무리하면 큰일 난다」 면서 「좀 쉬라」고 해요. 간에 암이 생겼대요』

―자각증상은 언제부터 느끼셨습니까.

『벌써 20여년 전부터 좀 좋지 않았는데, 그게 어느 새 간경변이 되고, 다시 암이 된 것입니다』

깔끔한 한복 차림으로 앉은뱅이 탁자 앞에 정좌한 李선생은 자신의 건강에 대한 질문에 담담하게 대답했다. 이런 모습에서 객관화에 익숙한 역사학자의 체질을 물씬 느낄 수 있었다. 오랜 지병에도 불구하고 금년 78세의 나이가 믿어지지 않을 만큼 그의 얼굴은 소년처럼 맑았다.

『겉으로 보기엔 멀쩡하죠. (검사)수치는 별로지만, 느낌으론 더 나빠지지는 않은 것 같아요. 책도 읽을 만해요. 그런데 글을 쓰면 꼭 나빠져요』

―글 쓰는 일이 어디 예사 노동입니까. 과제가 많으세요.

『그 동안 이럭저럭 초를 잡아 둔 것이 책 만들면 세 권쯤 될 것 같아요. 그걸 손질해야 하는데…』

李基白 선생은 「新羅정치사회사연구」, 「韓國고대정치사회사연구」, 「新羅사상사연구」, 「韓國古代史論」, 「高麗兵制史연구」 「高麗귀족사회의 形成」 등 主전공 분야의 저서를 포함하여 모두 19권의 책을 쓴 多作의 학자다. 번역서도 두 권이나 된다. 1987년 9월부터 책임편집을 맡아 발간하기 시작한 「韓國史市民講座」가 현재 제29집에 이르고 있다. 그는 학자로서 이미 많은 일을 했다. 그러나 그것은 어디까지나 제3者의 생각일 뿐 그 자신은 아직도 해야 할 일이 있는 것 같다.

『학자가 공부를 안 하면 죽은 거와 무슨 차이가 있겠어요. 어차피 죽을 바에는 공부를 하다가 죽는 게 나을 듯 싶습니다』

東國大 사학과 李基東 교수는 『李基白 선생은 연구에서 누구보다 實證性과 객관성을 강조하면서도 강한 민족성을 느끼게 하는 학자』라면서 『이것은 李선생의 성장배경과 관련이 있는 것 같다』고 말한다. 그 연배의 한국인이 대개 그렇듯 그도 사연이 많은 삶을 살아온 인물이다.


「퀴리夫人 傳記」를 탐독한 소년


李基白은 1924년 10월 평안북도 定州郡 葛山面에서 李贊甲(이찬갑)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는 3·1 독립운동 때 민족대표 33人 중 한 분인 南岡 李昇薰(남강 이승훈)이 그의 향리에다 세운 五山보통학교(초등학교 6년 과정)와 五山고보(중학교 5년 과정)를 졸업했다.

李基白은 『소년시절에 「퀴리夫人 전기」를 읽고 큰 감명을 받았다』고 말했다. 그 이유는 『러시아의 압제 밑에서 신음하던 폴란드 사람들의 처지가 당시 한국의 비참한 현실을 연상시켰기 때문이었다』고 한다. 그러면 그의 성장환경은 어떤가?

『집안의 1년 농사 소출이 50섬 정도였으니까 빠듯했지요. 그런데 선친이 집안일을 일절 돌보지 않고 국내외로 떠돌아다녀 형편이 점점 어려워졌습니다. 월사금을 못 낼 정도였어요. 보통학교 다닐 때 어머니에게 「연필 한 자루 사 달라」고 울고불고 하던 기억이 나요』

―선친께서는 무슨 일을 하셨습니까.

『아버지는 소비조합운동이나 無교회운동 같은 데 관심이 깊었습니다. 그래서 어머니(金敬義)가 집에다 (오산학교 학생들을) 하숙시켜서 생계를 꾸려가셨죠. 집은 동네에서 제일 컸어요』

오산학교 출신으로 서울 西大門 피어선 신학교에서 목사 수업을 하다 중도에서 그만둔 그의 아버지 李贊甲은 「聖書朝鮮」의 기고자로서 金敎臣, 咸錫憲, 宋斗用 등과 함께 우리나라 초창기 無교회운동에 참여한 인물이었다. 광복 후 월남한 李贊甲은 덴마크의 국민고등학교를 본뜬 「풀무학원」을 충남 洪城에 세웠다.

―그런데도 선생님은 당시 선망의 대상이던 東京 유학생이 되셨습니다. 학비는 어떻게 마련하셨습니까.

『제가 세 살 때 별세한 할아버지가 생전에 아직 열매도 맺지 않은 사과나무 과수원을 사 놓으셨습니다. 저의 장래 학비 마련을 위해서 그러셨대요. 제가 고보에 다닐 무렵에는 아버지가 과수원 일을 열심히 하셨어요. 과수원과 농토를 묶어 「五山농장」이란 이름을 붙이시대요. 사과나무가 200그루쯤 되었어요.

定州는 황주, 진남포 다음가는 우리나라 사과의 명산지였죠. 그 무렵 과수원이 어찌나 잘 되었던지 아버지가 목돈을 좀 쥐셨어요. 수확한 사과를 그냥 두면 썩으니까 저장창고를 만들어서 갈무리하여 봄까지 출하했지요』

李基白은 1941년 봄 오산학교를 졸업하고 와세다(早稻田) 고등학원을 거쳐 1942년 가을 와세다 대학 문학부 사학과에 입학했다.

―식민지 청년이라면 법과나 의과 공부를 해야 취업하기 쉬웠을 터인데, 하필이면 사학과로 진학하셨습니까.

『아버지는 「우리말이 귀하다」면서 우리말로 씌어진 책이면 시집이건 소설이건 역사책이건 닥치는 대로 사 놓으셔서 집안에 읽을거리가 많았습니다. 그래서 申采浩(신채호) 선생의 「朝鮮史硏究草」(조선사연구초)를 열심히 읽었는데, 어려워 잘 이해가 되지 않았어요. 그러나 그 책 속에 실린 「朝鮮歷史上 一千年來 第一大事件」이란 논문만은 감동깊게 읽었지요. 또 咸錫憲 선생이 「聖書朝鮮」에 연재한 「聖書的 입장에서 본 조선역사」로부터도 역시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특히 死六臣이나 林慶業(임경업)에 대한 서술이 깊은 인상을 남겨 주었습니다』

그의 아버지 李贊甲은 늘 덴마크를 재건시킨 그룬티비그가 했다는 『그 나라의 말과 역사가 아니고는 그 민족을 깨우칠 수 없다』는 말을 되풀이해서 아들들에게 들려 주었다고 한다. 그 점에서 李贊甲은 韓國史學의 권위인 그의 장남 李基白, 韓國語學의 권위인 그의 3남 李基文을 통해 그의 꿈을 실현한 셈이다. 李基白의 동생인 李基文 서울대 명예교수는 1984년 『고구려어·백제어·신라어의 3國語는 扶餘韓祖語(부여한조어)에서 分化된 方言』이라는 학설을 세운 바 있다.

―당시 오산학교에는 咸錫憲 선생이 교사로 재직하고 있었지요.

『선친과 咸錫憲 선생은 친교가 깊었습니다. 제가 고보에 들어간 뒤에는 아버지를 따라 咸錫憲 선생이 주관하던 일요예배에 참석했습니다. 봄 가을에 열린 山上集會에도 늘 따라다녔지요. 어느 산엔가 갔을 때 咸선생이 그 산 밑을 가리키며 「저기가 洪景來(홍경래)가 반란을 준비하던 多福洞」이라고 일러 줍디다.

제가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해야겠다고 결심한 것은 이런 환경과도 관련이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저도 학창시절에 咸錫憲 선생의 강연을 들은 적이 있지만 「聖書」나 「뜻」으로 역사를 보면 과연 제대로 볼 수 있겠습니까. 咸錫憲 선생처럼 역사를 종교적 또는 도덕적으로 풀이하고, 申采浩 선생처럼 인류사를 나와 남의 투쟁으로 인식한다면 학문의 보편성을 훼손할 우려가 있지 않을까요.

『당시는 나라를 잃었을 때였습니다. 그 시절 역사학자에게는 우리 민족을 격동시키고 우리 민족에 희망을 제시해야 할 강한 의무가 있었습니다』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인 南岡 李昇薰


李基白은 대학을 졸업한 뒤에 『원하기만 하면 중학교 교사가 될 수 있었다』 고 한다. 五山학교의 설립자인 南岡 李昇薰(남강 이승훈)이 바로 李基白의 종고조부였기 때문이다. 이런 가문적 배경 때문에 식민지시대임에도 불구하고 그가 한국사상사를 전공하기로 결심했던 것 같다.

南岡은 매우 독특한 개성의 선각자였다. 南岡에 대해 원로 역사학자 閔泳珪(민영규·前 연세대 교수)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현대인」이라고 평가한 바 있다. 그 이유는 이렇다.

『閔泳珪 선생에 의하면 신분이 낮으면 가짜 족보라도 만들어 놓고 양반인 척했던 시절에 南岡만은 스스로를 「상놈」이라고 드러내 놓고 사셨기 때문이래요』

―오산학교를 세우고 운영을 하려면 큰돈이 있어야 했을 터인데, 南岡은 어떻게 돈을 벌었습니까.

『소년시절의 南岡은 鍮器(유기)회사의 사환으로 들어가 허드렛일을 했다고 하더군요. 매우 성실하게 일하니까 주인이 수금하는 일까지 맡겼고, 드디어는 「물건을 외상으로 대 줄 터이니 네 자신의 장사를 해 봐라」하며 권했다고 합니다. 그래서 南岡은 유기그릇을 파는 등짐장수가 되어 평안도, 황해도 일대로 떠돌아다녔다고 해요.

부잣집이 많았던 황해도 安岳, 載寧에서 수지를 맞추고, 드디어 독립가게를 차렸고, 이어 유기공장도 세우고 평양으로까지 진출하게 되었지요. 돈이 모이니까 국제무역업에까지 진출했다고 합디다. 오산학교를 세울 때는 금광 발굴로 거부가 된 崔昌學씨의 돈도 좀 끌어 썼던 것으로 알아요』

―南岡은 驪州李氏(여주이씨)인데, 어떻게 그 집안이 평안도에 살게 되었지요.

『우리 집안은 원래 경기도 驪州가 本貫으로 되어 있는데, 조상 중 한 분이 죄를 짓고 평안도로 귀양을 갔다가 정착했다고 합니다만, 정확히는 모르겠습니다. 어떻든 우리 집엔 족보 같은 것이 없어요』

―先代 때의 집안 형편은 어떠했답디까.

『저의 고조부는 하급군인의 아들로서 유산도 받지 못해 아주 가난했던 모양이에요. 그 때문에 동생인 南岡을 일찌감치 남의 집에 맡겼답니다』

―南岡이 바로 가문을 일으킨 분이군요.

『南岡은 10년 만에 큰 부자가 되어 형(李基白의 고조부)을 위해 동네 한 가운데다 큰 집을 지어 주었다고 해요. 그래서 저의 生家를 마을에선 「가운데집」으로 불렀습니다. 南岡은 저의 조부를 후계자로 삼으려 했던 모양입니다만, 당신보다 일찍 세상을 떠나자 대성통곡했다고 합니다』


파란만장했던 선각자의 삶


南岡의 삶은 파란만장했다.

『淸日戰爭으로 파산을 당한 후 南岡은 채권자인 鐵山의 거부 吳씨를 찾아가 장부를 내놓고 빚진 돈을 얼마였는데, 이미 갚은 돈은 얼마이고, 못 갚은 돈은 또 얼마라고 계산을 명확히 했대요. 그러니까 吳부자가 南岡의 신용과 포부에 감동하여 빚 문서를 찢어버리고 다시 자본을 빌려 주었다고 해요』

南岡은 유기공장을 재건하는 한편 서울, 인천 등지를 내왕하는 도매상을 시작, 일약 국내 굴지의 大실업가로 성장했다. 이 무렵 南岡은 關西 지방의 자산가를 연결, 큰 민족자본을 만들어 침투해 오는 외국자본을 막아야 한다는 이른바 關西資門論을 주장했다. 이어 이탈리아 사람과 함께 국제무역회사를 차려 세계 무대로 진출하려 했으나 1904년 러일전쟁 때문에 투자가 빗나가 두 번째로 파산하고 한동안 향리에 칩거했다.

―사업가 출신인 南岡이 하필이면 교육사업에 투신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南岡은 엽전 萬兩을 싣고 釜山으로 가던 그의 배가 日本 領事館 선박과 충돌하여 침몰하는 바람에 큰 손해를 보았다고 해요. 日本 領事館을 상대로 손해배상 소송을 걸었는데, 시일만 끈 나머지 큰 타격을 받았다고 합니다. 南岡은 이런 일을 계기로 민족운동에 눈을 떴던 것 같아요. 특히 1907년 島山 安昌浩(도산 안창호)의 연설 「교육진흥론」을 듣고 크게 분발했다고 합니다』

1907년 南岡은 상투를 자르고 禁酒와 斷煙(단연)을 실천에 옮겼으며, 민족교육을 위한 講明義塾(강명의숙)을 열었다. 곧 이어 新民會 발기에 참여하고, 다시 재단을 만들어 五山학교를 세웠다. 1910년에는 평양에 馬山磁器會社(마산자기회사)를 세워 사장에 취임했다. 이 시기에 南岡은 기독교에 입교하여 기독교 정신의 실현을 오산학교의 교육목표로 설정했다.

南岡은 1911년 5월 항일운동인 安岳사건으로 제주도에 유배되었다가 이 해 9월에는 「105인 사건」에 연루되어 서울로 압송되어 4년2개월 동안 옥고를 치렀다. 105인사건은 데라우치 총독 암살을 기도하고 있다는 구실을 내세워 新民會 관련 애국지사 105명을 투옥시킨 일이다.

3·1 독립운동 때는 독립선언서에 서명하여 체포되어 3년 징역을 선고받았다. 1924년에는 東亞日報 사장에 취임하여 물산장려운동과 民立대학 설립을 추진했다. 李基白이 나이 일곱으로 오산보통학교에 입학하던 1930년, 南岡은 67세의 나이로 별세했다. 南岡의 민족정신과 독실한 믿음은 李基白에게 큰 영향을 끼쳤다고 한다.


東京 유학 시절의 은사들


李基白은 한국사상사를 전공하기로 결심하고 와세다(早稻田) 대학에 입학했다. 太平洋戰爭이 막바지로 치닫던 시절과 맞물린 그의 東京유학은 어떤 모습이었을까.

―와세다 대학 사학과에 한국사 강의가 개설되어 있었습니까.

『韓國史 강의는 없었어요. 東洋史를 전공했습니다』

―강의내용은 어땠습니까.

『학부 강의는 사학개론, 동양사개설, 동양철학사, 동양미술사 등이었어요. 아이즈(會津八一) 교수는 慶州 석굴암의 기원을 멀리 그리스의 조각으로까지 거슬러 올라가는 세계사적 시각으로 설명하더군요. 야나기(柳宗悅)씨의 특별초청강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는 우리나라 민예품을 수집 전시한 民藝館을 열고 있었습니다. 그곳을 견학했을 때 韓國美의 우수성을 예찬하던 그의 말이 감동적이었습니다. 쓰다(津田左右吉) 선생이 이끄는 동양사상연구회의 발표회에도 늘 참석했습니다. 그가 쓴 「中國思想과 日本」이나 「道家사상과 그 展開」 등을 열심히 읽었습니다』

―쓰다는 日帝의 대륙 침략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한 滿鐵(만철) 연구진의 일원으로 복무한 경력도 있지 않습니까. 「中國思想과 日本」 등의 내용을 보면 道敎를 하나의 保身術 또는 處世學으로 낮춰 보는 등 中國의 사상과 문화를 너무 괄시했던 것 아닙니까.

『쓰다 선생은 大東亞共榮圈을 앞세우는 日本 정부의 공식방침에 반하여 中國을 대단히 부정적으로 보아 대학으로부터 추방되었기 때문에 당시 학생들로부터 대단한 존경을 받았는데, 그런 일면이 있다는 것을 저도 알고 있었습니다』

―당시 학계에서 추방된 양심적인 日本 학자들도 적지 않았죠.

『야나이하라(矢內原忠雄) 선생과의 만남을 잊을 수 없군요. 선생은 日本에서 無교회주의를 제창한 우치무라(內村鑑三)의 제자로서 東京大學 경제학부에서 식민정책 강의를 담당하고 있다가 1937년에 대학에서 축출되었습니다. 日本의 中國 침략이 시작된 직후에 「中央公論」에 「국가의 理想」이라는 글을 쓴 것이 문제가 되었어요. 중국 침략에 대한 비판의 뜻을 담고 있다는 혐의를 받았던 것입니다.

저는 와세다 대학에 입학이 결정된 뒤에 아버지의 소개편지를 가지고 선생을 찾아가 뵙고 지도를 부탁드렸습니다. 그 뒤 일요일마다 선생의 성서강의에 참석했고, 선생의 집에서 토요일 오후에 열렸던 「土曜학교」에도 출석이 허락되었습니다. 거기서 선생의 저서인 「植民 및 식민정책」를 교재로 한 강의와 단테의 「神曲」에 대한 강의를 들었습니다』


답사여행 끝에 李丙燾 댁 방문


―답사여행 같은 것도 다니셨습니까.

『東京에 유학하던 친구 셋과 함께 갔던 여행을 잊을 수 없군요. 1942년 봄에 1주일 동안 진주-하동-여수를 거쳐 논산-부여-계룡산-공주로 돌아다녔습니다. 여행은 걷기 위주의 강행군이었죠.

새벽에 일찍 일어나 별을 보며 걷다가 주막에서 해장국으로 아침을 때우고, 그리고는 또 걷고 해서 밤늦게야 주막집에서 자곤 했습니다. 그리고는 서울로 올라왔는데, 그때 동행했던 사학도 金世翊이란 친구가 안내하여 처음으로 李丙燾 선생을 뵈었습니다.

―당시 李丙燾 선생은 어떻게 지내십디까.

『그때 선생님은 「震檀學報」의 간행 때문에 先代로부터 물려받은 桂洞의 큰 집을 줄여 城北洞 집에 계셨습니다. 서재에 요를 깔고 추위를 견디시면서 책을 읽고 있다가 우리를 맞아 주었죠. 제가 우리나라 역사를 공부해 보고 싶다는 말씀을 드렸더니 「집은 넉넉한가」라고 물으십디다』

李基白은 와세다 대학을 2학년 재학중에 귀향하고 말았다. 太平洋戰爭이 막바지에 이르자 日帝는 대학생에 대한 징병연기의 특혜를 철폐했기 때문이다. 한국 대학생들에게도 입대를 강요했다.

『사학과 강의를 듣는 학생은 일본인 여학생 두 명과 나, 이렇게 세 명뿐이었어요. 수업이 제대로 되지 않았죠. 1944년 봄에 징병검사를 받는다는 이유를 내세워 짐을 꾸려가지고 집으로 돌아왔죠』

긴박한 정세 속이었지만 귀국 후 李基白의 생활은 오히려 여유가 있었다.

『그 해 여름에는 서울로 올라와 아버지 친구가 경영하는 고아원에서 일을 거들며 서울 일대의 碑峰, 北漢山城, 阿且山城, 風納土城, 二聖山城, 南漢山城 등지를 찾아다녔어요. 이런 고적에 대한 李丙燾 선생의 논문이 震檀學報에 실려 있어서 길잡이가 되었습니다. 선생님도 댁으로 몇 차례 찾아가 뵈었지요. 가을에는 평양 근교의 大花宮(고려 仁宗 때 妙淸이 평양에 건설한 왕궁) 터도 답사했고, 원산을 거쳐 단풍이 한창인 금강산에도 올랐죠. 또 초겨울에는 慶州 일원을 두루 돌아다녔습니다』

―그 때 慶州의 모습은 어떻습디까.

『목이 없는 부처님 石像이 길가에 수없이 널려 있던 시절이었죠』

그 해 겨울에 李基白은 한문학자로서 오산학교 은사이기도 했던 朴基璿(박기선) 선생으로부터 한문을 배우기 시작했다. 大學, 中庸, 論語를 배우고 詩經을 읽으려 했던 1945년 5월 李基白도 징집영장을 받았다.


蘇聯軍에 붙잡혀 포로수용소 생할


『6월20일에 입대하여 8·15 광복이 되었으니까 日帝시대 군대생활은 2개월밖에 하지 않은 셈이죠』

―어디서 복무하셨지요.

『關東軍의 新兵으로 흥안령산맥 기슭에 주둔한 한 부대에 배치되었습니다. 그 무렵엔 關東軍의 主力이 대거 남방전선으로 이동하여 滿洲의 일본군은 텅 비다시피했죠. 약 한 달 가량 훈련을 받았는데, 탈영하는 친구들이 있었어요. 그러니 회유책으로 한국인 장교를 배치해서 훈련을 시켰어요. 그 이가 日本 육사 졸업생인 崔周鍾 견습사관이었지요.

하루는 저를 불러서 「李형, 蘇聯軍이 쳐들어올 텐데, 그러면 내응해서 일본군과 싸워야 합니다」라고 합디다. 그의 대담성에 놀랐습니다. 崔周鍾씨는 나중에 우리 국군에 입대하여 장군에 오르고, 5·16 혁명 후에는 최고위원으로 활동한 분인데, 당시 이등병인 저에게 깍듯하게 존댓말을 쓰던 것이 인상적이었습니다』

―그래서 싸우기는 했습니까.

『웬걸요. 소련군이 남하하자 부대를 따라 기차편으로 철수하다가 蘇聯軍에게 공격당해 포로가 되었지요』

―포로 생활이 힘들지는 않던가요.

『처음에 白城子라는 곳에 있던 포로수용소에 있었는데, 여기선 좀 힘들었습니다. 蘇聯軍이 滿洲의 곡식을 대거 수거하여 화차로 그들의 본국으로 실어날랐는데, 우리들은 기차역에서 곡물을 싣는 노동을 해야 했습니다. 화찻간에다 취사용 가마솥을 걸어 놓기도 했지요. 이후 포로들은 다시 치치하르로 옮겨졌는데, 거기선 사역을 시키지 않아 몸은 편했습니다. 이 때 일본 군대에서 사용하던 中國語 교본을 구해 열심히 공부를 했습니다』

―포로 생활 중에도 꿈이 있으셨군요.

『귀국하면 北京으로 유학할 생각이었거든요』

―귀환하지 못할까봐 걱정은 하지 않았습니까.

『무척 걱정들을 했지요. 포로가 된 關東軍 병사들은 일본인 이외에 한국인, 중국인, 몽골인 출신으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그 중에서 한국인 포로들이 수용소 생활을 가장 잘해 내더군요. 한국인들은 포로수용소 막사에 보온장치를 하는 등 적극적이었던 반면 패전 前에는 그렇게도 청결을 강조하던 日本人들은 세수도 하지 않는 등 매우 소극적이었어요.

우등민족과 열등민족으로 가르던 日帝의 상용수법이 허구였음을 드러낸 적나라한 현장이었죠. 희망이 있느냐, 없느냐에 따라 사람의 행동과 의식은 현격한 차이가 있게 마련입니다. 당시 한국인 포로들에겐 장차 풀려날 것이라는 희망이 있었죠. 치치하르의 한국 교민회장이었던 申肅씨라는 분이 소련 極東軍을 상대로 한국인 석방운동도 벌였다고 해요.

그런 분위기 속에서 저의 선친도 치치하르까지 면회하러 오셨죠. 한국인 포로들은 5개월 만에 석방되어 귀국할 수 있었습니다. 일본인 포로들은 그후 오랫동안 시베리아에서 유형을 살았지요』


서울大 사학과 3학년으로 편입


1946년 1월 압록강을 건너 귀향한 李基白은 두 달 동안 고향에 머물다가 38선을 넘어 서울로 왔다. 당초 계획했던 北京 유학은 중국의 國共內戰의 격화로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李丙燾 선생을 찾아뵙고 상의를 드렸더니, 봄 학기 입학시험은 이미 끝났으니 가을에 시험을 치도록 하라고 했어요. 그래서 그 해 가을에 서울大 사학과 3학년으로 편입학하게 되었습니다』

―그때 어떤 강의를 들었습니까.

『李丙燾 선생의 韓國思想史와 「宋史」 高麗傳 강독, 孫晉泰 선생의 「三國志」 東夷傳을 중심으로 한 古代史연습 등이었습니다. 金庠基(김상기) 선생과 金聖七 선생은 중국사를 가르쳤고, 趙義卨(조의설) 선생이 西洋史를 강의하셨지요. 李相栢(이상백) 선생은 사회학과 교수였습니다만, 그의 조선시대사 연구는 우리 사학도들에게 깊은 영향을 주었습니다』

―사학과 동기생들은 어떤 분들입니까.

『서울大 교수를 지낸 韓♥劤(한우근·故人)과 孫寶基(손보기), 서울고 교사로 재직 중 6·25 때 좌익에게 피살된 鄭泰旼(정태민), 서울大 졸업 직후에 「역사과학연구소」 설립을 주도했던 李洵馥(이순복) 그리고 나, 이렇게 다섯 명이었습니다』

그러다 國大案 반대운동이 일어났다. 좌익의 선동 등에 의해 과거의 京城帝大와 전문학교를 합쳐 국립서울대학교로 만들려는 美 군정의 조치에 대한 반발이었다. 그 때문에 1947년 봄학기는 거의 휴강이었다.

『그래서 저는 京城女商(지금의 서울여상)에 강사로 취업해버렸죠』

―졸업은 어떻게 하셨습니까.

『졸업논문을 내라고 해서 제출하니까 1947년 여름에 졸업장을 줍디다. 어떻든 졸업은 했으나 내 공부에는 별 진전이 없었습니다. 그 뒤 배재중학, 용산중학을 거치면서 고달픈 교사생활을 하다 보니 공부할 겨를이 더욱 없었어요』

1948년 定州에서 살던 李基白의 할머니, 아버지, 어머니, 동생 등 일가족 모두가 金日成의 토지 무상몰수 등에 견디지 못하고 38선을 넘어왔다. 그러다 6·25전쟁(1950)을 만났다.


9·28 수복 후 입대, 陸士 교수로 근무


―피난살이는 어떻게 하셨죠.

『6·25전쟁 발발 직후 한강을 건너지 못해 인민군 치하의 서울에서 숨어 살았어요. 무슨 강연회에 참석하면 소위 「의용군」으로 나가지 않아도 된다고 해서 얼굴을 내밀기도 했으나 후에는 집에도 못 있고 이모님 댁에 은신하고 있었지요』

―육군에 입대하여 대위로 예편하셨더군요.

『9·28 서울 수복 후 국군에 입대했습니다. 중위 계급장을 달고 처음 배치된 곳은 육군본부의 편찬위원회였는데, 뒤에 부산 동래중학(지금의 동래고교)에 자리잡은 육군종합학교의 편찬과로 바뀌었어요. 그곳에서 했던 일은 美軍 야전교범(FM) 같은 것을 우리말로 번역하는 것이었죠. 高柄翊(고병익·前 서울대 총장)씨, 정명환(前 서울대 교수, 불문학자)씨를 만나 알게 되었지요』

1952년 부산 피난살이 때 李基白은 崔燕順씨와 결혼했다. 崔여사는 요즘 경기도 용인시에 있는 감리교 목양교회의 장로로 활동하고 있다.

『중매결혼입니다. 용산중학교 동료교사가 초등학교 교사를 하던 친척을 소개한 겁니다. 아내는 광복 때까지는 간도에서 살았던 함경도 출신입니다. 신접살림은 용산중학 가건물 근방의 산 중턱에 판잣집을 새로 짓고 차렸습니다』

그러다가 그는 鎭海에서 개교한 4년제 육군사관학교의 교수로 배속되었다.

『육사의 國史 교수진에는 金龍德씨가 먼저 부임해 있어서 여러 가지로 도움을 받았어요』

―정규 육사 1기생들인 全斗煥(전두환), 盧泰愚(노태우) 두 前 대통령도 선생님의 제자이겠군요.

『1기생에 대한 국사 강의는 金龍德씨가 맡았으니까 내가 직접 가르친 적은 없습니다. 2기생은 제가 가르쳤습니다』

―기억에 남는 제자는 누굽니까.

『朴俊炳(박준병) 장군이지요. 朴俊炳 생도는 육사를 졸업한 후 서울大 문리대 사학과로 학사편입을 했었죠』

―초창기 육사에선 國史를 중시했던 모양이죠.

『역사를 좋아하는 풍조가 있었습니다. 4년제 육사 1기생 중에서 1등으로 졸업하고 나중에 과기처 장관을 지낸 金聖鎭 장군도 서울大 사학과로 학사편입을 했습니다』

李基白 선생은 1956년 2월에 대위로 예편했다. 입대 5년여 만이었다. 그러나 좀처럼 취직이 되지 않아 한동안 고생을 했다.

『서울大 동기생 韓♥劤씨의 소개로 홍익대에 강사로 나간 이후 단국大 등 여기저기서 시간강사를 했는데, 야간강의까지 합쳐서 일주일에 30시간 이상 강의를 맡은 적도 있었습니다. 서울工大 교양국사의 시간강사로 출강하기도 했습니다. 살아가기 어려운 시절이었지요. 그즈음 李弘植 선생 명의의 중·고등학교 국사 교과서를 집필해서 쪼들리는 생활에서 적잖은 도움을 받기도 했습니다』

그는 떠돌이 강사생활을 거쳐 1958년 이화여대 사학과 조교수로 채용되었다. 연세大에 재직중이던 趙義卨 선생의 추천에 의해서였다고 한다.

―선생님의 첫 한국사 개설서인 「國史新論」은 이화여대 재직 중에 썼던 것입니까.

『교과서 집필이 한 계기가 되어서 개설서를 쓰게 되었죠. 저의 첫 개설서인 「國史新論」이 출판된 것은 이화대에 재직 중이던 1961년이었어요. 그러나 자신이 없어서 감히 序文을 못 쓰고 後記에 「금전에 대한 유혹」을 뿌리치지 못하고 쓰게 되었음을 솔직하게 고백했지요』

―그런데 「韓國史新論」을 다시 쓰게 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이유가 좀 있었어요. 무엇보다 「國史新論」이 내 마음에 들지 않았습니다. 특히 당시 학계의 통설에 따라 서술한 時代區分에 대해 저자인 내 스스로가 불만이었습니다. 그러던 중 미국 하버드大 와그너 교수로부터 「國史新論을 영어로 번역하고 싶으니 (미국으로) 좀 들어왔으면 좋겠다」는 제의가 들어왔어요.

나는 國史新論을 대폭 수정하려고 마음을 먹고 있던 터여서 「수정한 다음 영역하면 어떻겠느냐」고 하니까 그쪽에서 「좋다」는 거예요. 그래서 1966년 초에 미국으로 건너가 1년간 하버드大 옌칭(燕京)연구소의 연구교수로 있으면서 수정작업을 했습니다. 옌칭연구소는 한국사 관련 사료와 자료를 국내보다 훨씬 더 풍부하게 갖추고 있었어요. 그런 수정의 결과로 「韓國史新論」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빼어난 역사인식과 방법론이 어우러져 나온 傑作」


―東國大 사학과 李基東 교수는 『韓國史新論은 李基白 선생의 分身』이라고 말하던데, 그 특징은 무엇입니까.

『내것다운 개설서가 될 수 있도록 노력을 했습니다. 당시 개설서라면 時代區分에 있어 古代·中世·近代의 3분법을 당연한 것같이 채택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야만 韓國史를 世界史에 동참시키는 것으로 믿었거든요. 나도 처음에는 남에게 뒤질세라 「世界史의 기본법칙」이니 하는 책을 열심히 읽었고, 또 많은 자극을 받았어요.

그러나 나는 끝내 어느 일정한 公式에 의존해서 우리 역사를 이해하려는 데 찬성할 수 없었습니다. 역사는 다원적인 방식에 의해 얼마든지 새롭게 이해할 수 있다고 생각했어요. 정치·경제·사회·문화 등의 모든 역사적 현상이 하나의 굵은 끈으로 묶여 있는 일정한 시대를 일정한 각도에서 볼 수 있는 관점이 필요하다고 느낀 것입니다.

저는 특히 역사의 주인공인 인간을 중시해야 한다는 생각에서 사회적 지배세력의 변천과정에 기준을 두고 韓國史의 큰 흐름을 파악하려고 한 것입니다. 또 낡은 시대의 잔재들보다는 다음 시대의 새 요소들의 성장 과정을 중시하는 입장을 취했죠』

서강大 洪承基 교수는 「韓國史新論」에 대해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보편주의적 史觀에 입각하여 쓰여진 개설서다. 그러나 그것은 단순한 개설에 머물러 있지 않다. 이 책에서는 더 나아가 역사적 사실들이 분야별로 체계화되어 있을 뿐만 아니라 특별한 主導勢力을 연결고리로 삼아서 서로 밀접하게 이어져 있기도 하다. 그렇게 파악된 분야별 사실들은 다시 앞뒤 시대의 그것들과도 연관지워져 이해되고 있다. 이 책은 그의 빼어난 역사인식과 방법론, 진리를 소중하게 여기는 남다른 자세, 구체적이고 논리적인 서술이 한데 어우러져 나온 傑作이다』

韓國史에 대한 李基白의 시대구분은 다음과 같은 순서로 정리되어 있다.

<원시공동사회-城邑국가와 聯盟王國-중앙집권적 귀족국가의 발전-전제왕권의 성립-豪族의 시대-門閥귀족의 사회-武人정권-신흥 士大夫의 등장-兩班사회의 성립-士林세력의 등장-廣作농민과 都賈(도고)상인의 등장-中人層의 대두와 농민의 반란-開化세력의 성장-민족국가의 胎動과 帝國主義의 침략-민족운동의 발전-민주주의의 성장>

―선생님의 時代區分에 대해선 비판도 많았죠.

『많았습니다. 그런데 나의 時代區分을 비판하려면, 그 時代區分의 어디가 사실과 어긋난다는 점을 구체적으로 지적해 주었으면 좋겠습니다.

막연히 世界史的 관점이 아니라든가, 어느 公式과 일치하지 않는다든가 하는 관념적이고 추상적인 지적만으로는 나는 내 관점을 바꿀 생각이 조금도 없으며, 그래서는 안 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학문이 그 생명으로 삼고 있는 진리를 배반하는 것이 되기 때문입니다』


러시아 학자의 비판


―「韓國史新論」은 여러 나라 말로 번역 출판되었지요.

『日本, 美國, 臺灣, 中國, 말레이시아, 아르헨티나(스페인語), 러시아에서 각각 현지어로 번역 출판되었습니다』

―외국 학자들의 평가는 어떻습디까.

『작년에 러시아어版이 발행되었는데, 러시아의 동방학연구소의 韓·蒙 과장인 유리 바닌 교수가 최근 서평을 발표했더군요. 그 분의 서평을 보니까 아직도 唯物論的 史觀에서 벗어나지 못했더군요. 그래서 아직 발표는 하지 않았지만 「바닌 교수의 「韓國史新論」 書評에 답함」이라는 원고를 최근에 썼습니다』

李基白 선생은 매우 치밀한 학자다. 기자와의 인터뷰 중에도 미심쩍은 부분이 있으면 몇 번이나 서재에 들어가서 관련 자료를 갖고 나와 펴놓고 답변했다. 李선생은 한글로 번역된 바닌 교수의 書評을 보여 주었다. 대충 훑어보니까 「韓國史新論」의 時代區分에 대한 비판이 主流를 이루고 있었다. 장문의 書評 가운데 다음과 같은 대목이 눈에 띄었다.

<通史的 기준으로 판단할 때 韓國이 현대사회로 넘어오는 과도기에 과연 어떤 사회가 성립했는가? 통일신라, 고려, 조선과 같은 세 국가가 과연 어떤 고유의 성격을 띠며 서로 교체되었는가? 저자(李基白)가 주장하는 (토지의 국유, 관료와 군인의 복무 代價로 祿邑과 祿俸을 지급, 신분제도 등과 같은) 특징들로 비추어보면, (당시의) 한국은 (고유한 특색을 지닌) 封建國家이며, 다른 국가와 비슷한 封建秩序의 태동, 발전, 쇠퇴 단계를 거쳤다>

이렇게 바닌 교수는 「韓國史新論」의 時代區分에서 封建社會를 설정하지 않은 데 대해 비판했다. 이에 대한 李基白 선생의 반론은 어떤가?

『바닌 교수의 지적과는 달리 한국에는 封建社會가 없었다는 것이 저의 생각입니다. 그 근거는 통일신라-고려-조선왕조 시대의 한국에는 封建領主가 없었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封建이 없는 봉건사회는 있을 수 없는 겁니다. 封建制度는 국왕이 봉건영주에게 領地를 주어 그 통치에 全權을 행사하도록 하는 대신, 봉건영주는 국왕의 필요에 따라 병력 동원 등의 의무를 지는 국가조직입니다』


韓國史를 唯物史觀의 公式에 꿰맞춰서는 안 되는 까닭


―국내 학자들 중에도 「封建領主는 없었지만, 토지소유주의 농토를 경작하는 농민이 農奴의 지위에 있었기 때문에 封建社會라고 할 수 있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적지 않습니다.

『그렇다면 그런 시대는 차라리 農奴사회 또는 農奴制사회라고 불러야 정확한 겁니다. 「原始共同體사회-노예제사회-봉건제사회-자본주의사회로 時代區分을 해 온 것이 지금까지의 관습이니까 이를 굳이 고칠 필요가 없다」는 학자도 있습니다. 그러나 나는 이를 명확히 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고 생각합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唯物史觀을 주장하는 사람들이 우리 역사를 그런 公式에 꿰맞추려고 하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참으로 답답한 일입니다. 만일 韓國史의 전개과정에 억지로 封建社會를 집어넣으려고 하면 그것은 아시아적 封建社會라고 부를 수밖에 없는데, 그것은 결국 한국역사가 非전형적, 非정상적 혹은 변태적인 사회를 거쳐온 것으로 비하되는 것입니다. 이것은 결국 유럽 優越主義的 산물이며, 世界史的 관점에서 나온 것이 아니에요. 한국역사상의 사회도 정상적인 인간이 살아온 정상적인 사회였지, 非정상적인 인간이 살아온 非정상적인 사회가 아닌 것입니다』

―「韓國史新論」에서는 독특하게도 支配勢力을 기준으로 한 時代區分을 했습니다. 그런 견해에 대한 반론은 없었습니까.

『있었습니다. 그러나 우선, 저는 支配勢力을 기준으로 한 時代區分만이 유일한 것이라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다만 이 방법이 한국사의 발전을 광범하게 이해할 수 있게 하는 데 매우 유용하다고 생각했을 뿐입니다』

―선생님이 구사하신 「支配勢力」이란 용어 자체에 대해서도 논란이 있었습니다만, 그 정확한 의미는 무엇입니까.

『제가 말하는 「支配勢力」은 支配階級을 의미하는 것이 아닙니다. 그렇게 오해하는 것이 싫어서 1990년에 낸 新修版 「韓國史新論」에서는 괄호를 치고 「主導勢力」이라고 附記했습니다. 支配勢力은 말 그대로 정치·경제·사회·문화를 주도적으로 이끈 세력을 말하는 겁니다. 구체적으로 말하면 新石器시대의 原始共同體사회의 지배세력은 氏族社會의 구성원 전체이며, 近代에는 민중이 支配勢力으로 등장했습니다.

물론 古代국가가 형성된 이후 근대 이전까지의 긴 세월 동안에는 귀족이 支配勢力으로 존재해 왔습니다. 그런 身分制사회의 지배세력이 귀족이었다고 해서 「韓國史新論」에서 귀족에 대해서만 서술하지는 않았습니다. 여러 중간계층이라든가 농민·노비 등에 대해서도 支配勢力과의 관련 하에 서술했습니다. 그래야만 사회의 全體像이 명확하게 드러나게 됩니다』

―KBS TV는 北韓 지역의 문화유산 답사 프로그램을 방영하면서 소위 檀君陵(단군릉)도 소개할 것이라고 예고하고 있습니다. 北韓 당국은 평양시 강동군 강동읍 대박산 동남쪽 사면에 위치한 고구려 양식의 半지하 돌칸 흙무덤, 즉 石室墳(석실분)이 틀림없는 檀君(단군) 무덤이며, 거기서 발견된 남녀 각 1개체 분의 뼈가 檀君과 그 부인의 유해이며 檀君의 유해를 측정한 결과 1994년 현재 5011년 전의 것이라고 주장했습니다. 그렇다면 檀君이 기원 전 31세기에 古朝鮮을 세웠다는 얘기가 아닙니까.

『성립될 수 없는 얘기지요. 국가가 형성되려면 적어도 靑銅器(청동기)시대가 되어야 합니다. 우리나라의 靑銅器시대는 최고로 올려잡아도 기원 전 1200년경부터 시작된 것입니다. 古朝鮮의 영역에서 발견되는 비파형 銅劍이 그 시대의 것입니다. 그 전에는 新石器시대인데, 세계 어떤 민족도 新石器시대에 국가를 형성한 사례가 없습니다』

―왜 新石器시대엔 국가가 형성될 수 없습니까.

『新石器시대의 주거지인 서울 강동구 암사동 유적지에 한 번 가 보세요. 움집들로 이뤄진 聚落(취락)의 규모가 아주 작습니다. 그때는 돌칼이나 돌화살촉을 사용하던 시댑니다. 靑銅器시대가 되어야 날카로운 청동기 무기가 등장하여 씨족 간, 부족 간에 정복전쟁이 일어나 국가가 형성됩니다』

―「三國遺事」에는 檀君과 중국 古代의 堯(요) 임금이 동시대 인물인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南韓에서도 광복 후 1960년대 초반까지는 이것을 근거로 하여 檀君이 古朝鮮을 세운 연도를 기원 전 2333년으로 삼지 않았습니까. 그 계산대로라면 서기 2001년은 檀紀로는 4334년이 됩니다. 그런데 北韓에선 檀紀를 오히려 700년 쯤 더 올려 잡았어요. 북한의 주장에 따르면 「檀君 뼈」의 나이는 6개월에 걸쳐 ESR(전자상자성공명연대)측정법으로 수십 번 측정한 결과 5011년 전으로 얻어졌다고 하는데, 그런 발표를 믿을 수 있습니까.

『ESR측정법은 대략 10만년 이전의 舊石器시대 유적과 유물에 대해 응용되고 있으며, 5000년 전 정도의 「나이 어린 뼈」를 試料(시료)로 한 분석에서는 정확한 연대측정을 기대할 수 없는 방식입니다.

서울대 고고미술사학과 李鮮馥(이선복) 교수는 5000년 전 정도의 뼈라면 탄소연대측정법을 통한 측정이 보다 정확한 결과를 기대할 수 있을 터인데, 북한측에서 굳이 ESR측정법을 사용했다는 것에 대해 의문을 표시하고 있습니다.

즉, 탄소연대측정에서 고구려시대 정도의 「어린 뼈」가 나왔기 때문에 아직 개발단계에 있어서 측정결과의 조작을 상대적으로 쉽게 할 수 있는 ESR측정법을 내세운 것이 아닌가 의심하는 것입니다』


神話 속에서 민족적 자존심 찾는 시대는 지나갔다


―北韓 당국은 「檀君陵」 안에서 金銅冠(금동관)의 파편이 발견되었다고 발표했습니다.

『그 주장은 기원 전 3000년 무렵 평양 일대에서 靑銅器를 만들었을 뿐만 아니라 도금술이라는 놀라운 기술을 갖고 있었다는 얘깁니다. 만약 그것이 사실이라면 한반도에서는 黃河유역에서 靑銅器를 만들기 시작한 때보다 1000년 이전에 이미 고도의 청동금속문명이 등장했음을 의미하며, 그야말로 세계문화사를 새로 써야 하는 大발견인 것입니다. 李鮮馥 교수는 그것이 사실일 가능성은 없다면서 그 金銅冠은 서기 500년 무렵의 고구려式 금동관으로 추정하고 있습니다』

―檀君신화는 어떻게 보아야 할까요.

『天帝의 아들인 桓雄(환웅)이 곰에서 여자로 변한 熊女(웅녀)와 결혼하여 檀君을 낳았다는 기록은 역사가 아니라 神話의 세계입니다. 神話는 神話대로 그것이 창조된 이유가 있게 마련이므로, 그 이유가 무엇이었는지를 찾아내는 것이 역사가의 임무입니다.

神話 속에서 민족적인 자존심을 찾아야만 했던 시대는 지나간 지 이미 오랩니다. 또 역사가 오래여야 자랑스런 민족이 되는 것만도 아니고, 고유한 神話를 정신적인 왕좌에 모셔야만 민족을 위하는 의식이 높아지는 것도 아닙니다.

그러나 檀君神話를 문자 그대로 믿지 않는다고 해서 檀君朝鮮의 존재를 부정해서는 안 됩니다. 고대국가의 건국에는 으레 그런 神異한 신화로 물들어 있습니다. 檀君朝鮮을 부정하는 것은 그리스나 로마의 건국신화를 문자 그대로 믿을 수 없다고 하여 그리스나 로마의 건국을 부정하는 것과 같은 억지입니다』


古朝鮮의 건국연대는 기원 전 10세기경


―그러면 선생님께서는 古朝鮮의 건국연대를 언제로 판단하십니까.

『靑銅器시대 이후여야 하므로 기원 전 10세기경으로 볼 수밖에 없습니다』

―선생님의 얘기를 들으면 在野 민족사학계에서 발끈하겠습니다.

『우리 선조들이 新石器시대에 국가를 세웠다고 강변하는 것은 아이가 태어나자마자 뛰어다니고, 학교에도 가고, 장가도 들었다는 얘기와 마찬가집니다. 그런 주장을 하면 세계의 웃음거리가 되죠. 그것은 우리나라를 학문적 미개국으로 만드는 것입니다』

―中國의 黃河유역, 印度의 인더스강 유역, 이라크의 메소포타미아, 이집트의 나일강 유역 등 세계 4大 문명발상지의 靑銅器시대는 우리보다 좀 빨랐지요.

『印度 문명의 기원지로서 현재는 파키스탄 영토가 된 모헨조다로 遺跡를 답사한 적이 있습니다만, 거기선 기원 전 2500년경에 이미 靑銅器문화를 개화시켰습니다. 메소포타미아의 靑銅器문화도 비슷한 시기에 전개되었지요. 문명의 시기가 빨랐다는 게 무슨 민족적 훈장은 아닙니다.

오늘날 印度, 中國, 이라크, 이집트는 모두 후진사회가 되었습니다. 그런데도 北韓에서는 대동강 유역을 세계 5大 문명발상지의 하나라고 주장하고 있습니다』

―北韓이 그런 주장을 들고 나오는 이유는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平壤을 民族史의 중심으로 설정하기 위한 전략의 일환이라고 봅니다. 그들은 民族史의 정통성을 檀君朝鮮-고구려-발해-고려-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에다 설정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민족사의 정통성은 지리적 위치에 의해서 결정되는 게 아닙니다. 우리 민족사가 전개해온 올바른 방향과 일치하는 정치를 하는가, 하지 않는가에 의해 결정되는 것입니다』

―黃長燁씨는 「南北대결의 핵심은 민족사에 있어서의 正統性을 놓고 벌이는 타협 불가능한 권력투쟁」이라고 말한 바 있습니다. 그러면 누가 민족사의 正統이고, 누가 민족사의 異端입니까.

『독재국가는 韓國史에서의 正統性을 주장할 자격이 없습니다. 그리고 그 독재를 뒷받침해 주고 있는 이른바 「주체사학」은 韓國史學을 타락시키고 있습니다』

―北韓의 「朝鮮全史」나 「朝鮮通史」에서는 고구려가 우리 역사상 中世 봉건시대를 열고 이끌어간 나라, 즉 삼국시대의 主役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또한 4세기에 들어서면서 본격화하는 고구려의 남진정책은 삼국통일을 위한 통일의지의 표현이라 되어 있는 반면, 백제나 신라의 북진정책은 反통일적인 것으로 기술되어 있습니다.

『고구려, 백제, 신라의 3國 중에서 고구려가 선진국임은 분명합니다. 그러나 이 사실이 고구려가 당연히 3國을 통일할 자격이 있는 나라요, 백제와 신라는 당연히 고구려에 병합되어야 할 나라로 규정하는 것은 잘못입니다. 메소포타미아나 이집트가 선진국가였다고 해서, 세계가 당연히 그들에 의해서 통일되어야 한다고 규정하는 것이 잘못인 거나 마찬가지입니다.

고구려는 독재정치에 의해서 국가가 분열되었기 때문에 패망할 수밖에 없는 처지에 있었습니다. 백제 또한 그러했습니다. 이에 반해 신라는 약간의 시련이 있기는 했지만, 국내의 단결이 굳건해서 통일의 기반이 어느 나라보다도 강했습니다』


통일은 민족의 理想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어야만 의미


―우리 사회 일각에서도 新羅가 唐과 동맹한 것을 反민족적 事大主義라고 비난하는 데 대해선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그건 문제가 있는 시각입니다. 3·1운동을 事大主義라고 규정한 日帝 어용학자의 억지 주장과 마찬가지인 겁니다. 신라는 고구려와 동맹하기를 원했지만, 고구려가 거절했기 때문에 생존을 위해 唐과 동맹을 했던 것입니다.

설마 新羅더러 비록 망하더라도 가만 있어야 하는 게 옳다고 주장할 사람은 없겠지요. 더욱이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뒤에 신라는 唐과 치열한 전쟁을 하여 唐을 축출하는 데 성공했습니다. 신라는 독립정신이 강한 나라였습니다』

―그런데 金大中 대통령이 지난 10월1일 국군의 날 기념사에서 金日成의 6·25 남침을 신라의 삼국통일, 고려의 후삼국통일에 이은 세 번째의 「통일 시도」라고 발언한 바 있습니다. 이런 역사관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통일은 민족의 理想을 실현할 수 있는 것이어야 의미가 있는 게 아니겠습니까. 민족의 理想은 자유와 평등의 실현입니다. 북한에서는 6·25 전쟁을 「조국해방전쟁」이라고 부르며 그것이 무력 통일의 시도임을 공공연히 드러내고 있습니다.

그런데 실제에 있어서 그것은 대한민국에 대한 침략전쟁이었습니다. 우리 민족사의 최대 비극이었던 6·25 전쟁의 책임을 묻는 것이 대한민국 대통령에게 부과된 임무라고 봅니다』

―「三國遺事」에는 檀君朝鮮은 첫 임금 檀君王儉(단군왕검)과 마지막 임금 否王과 準王만 기록되어 있을 뿐 그 중간의 임금에 대한 기록이 없습니다. 왜, 一然은 기록을 누락시켰을까요. 바로 이 점 때문에 檀君朝鮮의 실상에 대해 의문을 갖고 있는 학자들이 많은 것 아닙니까.

『檀君과 否王·準王 사이에 어떤 어떤 임금이 있었다고 하는 기록이 전혀 없는 것은 아닙니다. 그것은 在野 민족사학계에서 곧잘 인용하는 揆園史話(규원사화)나 桓檀古記(환단고기)와 같은 책이지요.

거기엔 고조선 47대 왕의 이름이 쓰여져 있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20세기에 들어와 만들어진 僞書(위서)로 봅니다』


古代史에 대한 日本人들의 劣等感


―日本의 국수주의 학자들은 任那日本府(임나일본부)라는 식민기관을 설치하여 한반도의 南部를 경영했다는 說을 주장하고 있습니다. 「새 역사교과서 만드는 모임」의 회장 니시오 간지(西尾幹二) 교수는 1998년 그런 내용 등을 담은 「國民의 歷史」를 써서 일본 국내의 베스트셀러를 만들었고, 금년 들어서는 「國民의 歷史」를 母本으로 하는 중학교 역사교과서가 일본 文部省의 검정을 통과함으로써 韓·日 양국 간에 교과서 파동이 일어났습니다. 선생님께서는 「任那日本府說」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우선 任那日本府라는 용어 자체가 허구입니다. 왜냐하면 그들이 任那日本府가 설치되었다는 주장하는 당시에는 일본열도엔 「日本」이란 나라가 없었습니다. 그때 나라 이름은 倭(왜)였지요. 당시의 倭는 선진 鐵器문명을 갖고 있던 한반도를 식민지로 삼을 만한 힘이 없었습니다. 日本이란 국명이 역사에 등장한 시기는 7세기 말엽이었어요』

―「三國史記」를 보면 신라 초기에 倭의 침략을 받았다는 기사가 자주 나옵니다. 그렇다면 그 倭의 실체는 무엇입니까.

『그것은 對馬島 또는 규슈(九州) 지역의 倭라고 봅니다. 그들이 伽倻와 연합하여 게릴라式으로 신라의 변경을 칠 수는 있는 겁니다』

―가야의 시조 金首露王(김수로왕)의 탄생 신화와 倭의 始祖 니니기 탄생 신화는 거의 비슷합니다. 그런 점에서 양자 간에는 親緣性 또는 혈연적 고리가 있는 것 아닙니까.

『일본 天皇家의 발상지인 규슈에는 우리 고대의 유물들이 많이 발굴되었습니다. 우리나라에서 발견되는 것과 모양이 같은 고인돌도 널리 분포되어 있어요. 그런 고인돌이 있다는 것은 한반도에 살던 사람들이 선진문명을 가지고 그곳으로 건너갔다는 얘기입니다』

―日帝 때 金海金氏의 족보가 禁書가 되었다고 합니다. 왜냐하면 金首露王과 許皇后 사이에 아들이 여럿 있었는데, 한 사람은 駕洛國의 후계왕이 되고, 또 한 사람은 許황후의 희망에 따라 金海許氏의 시조가 되었으며, 나머지 아들들은 구름을 타고 동쪽으로 날아갔다는 전설을 실었기 때문입니다. 구름을 타고 동쪽으로 날아갔다는 것은 伽倻의 유력자들이 한반도 남해안에서 규슈로 흐르는 구로시오(黑潮)를 타고 규슈로 건너갔다는 사실의 古代式 표현법이거든요. 그런데도 日本 국수주의 학자들이 韓日關係史를 왜곡하는 이유가 무엇입니까.

『그들의 古代史에 대한 열등감 때문이 아니겠습니까』

―최근 日本의 한 고고학자가 일본 곳곳을 파헤치기만 하면 세계 最古級의 舊石器유물을 발굴하여 의심을 받다오다가 결국에는 조작의 꼬리가 잡혀 망신을 당한 일이 있었죠. 그는 자신의 호주머니에서 미리 준비한 舊石器시대 유물을 꺼내어 슬그머니 파묻다가 TV카메라에 포착되었거든요.

『역사는 사실을 기초로 쓰여져야 합니다. 이것을 무시한 日本의 왜곡 역사교과서는 비판받아 마땅합니다』


「주체사학」과는 절충할 수 없다


―금년 초에 역사교과서 파동이 일어나자 우리 정부에선 부랴부랴 교육부 차관을 책임자로 하는 대책반을 설치했습니다. 그 대책반의 회의자료를 보니까 南北韓이 日本의 역사왜곡에 대응하기 위해 韓日關係史를 공동 연구하겠다는 대목이 있던데, 그것이 가능한 일입니까.

『서강大 鄭杜熙(정두희) 교수가 쓴 「하나의 역사 두 개의 역사학」이라는 책이 있습니다. 같은 한국사를 서술하는데, 남쪽의 역사학이 있고, 북쪽의 역사학이 따로 있다는 내용입니다. 北韓의 주체사학은 학문이라고 말할 수 있는 성격의 것이 아니므로 우리 歷史學과 절충할 수가 없습니다』

―民族史에 있어서 삼국통일의 의미는 무엇입니까.

『우리나라 역사의 시초부터 이미 민족이 형성되어 있었고, 또 그것이 하나의 국가로 형상화되고 있었다는 낡은 사고방식이 아직도 잔존해 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객관적인 역사적 진실과는 너무나 거리가 멉니다.

처음에는 滿洲와 한반도에 걸쳐서 수없이 많은 씨족공동체가 산재해 있었고, 靑銅器시대에는 각기 독립된 수백 개의 城邑國家 혹은 部族國家들이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그것이 정복과 동맹의 과정을 거치면서 고구려, 백제, 신라로 통합 정리되어 삼국시대가 된 것입니다. 그러다 신라의 통일에 의해 민족의 틀이 거의 완성된 것입니다』

―新羅의 삼국통일은 민족의 再통일이 아니라 최초의 통일이라는 말씀이군요. 그런데 선생님의 「韓國史新論」에서는 統一新羅와 渤海가 병립하는 南北朝時代를 설정해 두었더군요.

『우리 역사에서 渤海는 여러 각도에서 다른 견해가 있을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高句麗 유민인 大祚榮(대조영)이 세웠고, 大祚榮의 후계자인 渤海 武王 스스로가 고구려의 後身임을 밝혔으니까 南北朝를 인정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渤海를 우리 민족사에서 統一新羅와 대등한 위치로 놓은 것은 어색하지 않습니까. 渤海 멸망 후 高麗로 넘어온 渤海 유민은 10만명 정도로 추산될 따름이거든요.


발해는 民族史의 支流


『渤海는 소수의 고구려 유민이 다수의 靺鞨族(말갈족)을 통치했던 나라입니다. 만약 말갈족이 현재 독립국가를 이루고 있다면 그들에게 渤海史는 이민족의 지배를 받던 시기의 靺鞨史로 서술될 것입니다. 반면에 우리로서는 高句麗 유민이 통치했던 만큼 渤海를 당연히 韓國史에 포함시켜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統一新羅가 우리 민족사에서 大勢를 차지했고, 발해는 支流라고 할 수 있습니다』

―高句麗의 附庸(부용)민족이었던 말갈은 원래 肅愼(숙신)이란 종족으로서 고려 때는 女眞族, 조선왕조 때는 滿洲族으로 불렸습니다. 女眞族이 세운 金나라는 北宋을 멸망시키고 中國대륙의 절반을 차지했고, 滿洲族이 세운 淸나라는 중국대륙의 전부를 차지하여 300년 간 통치했습니다. 中國에서는 金나라와 淸나라를 정통왕조로 취급하고 있는데, 말갈의 後身이 세운 이런 征服王朝(정복왕조)들을 우리 역사에선 어떻게 취급해야 합니까.

『金나라를 세운 阿骨打(아골타)가 羅末麗初에 황해도 지방에서 살다가 滿洲로 이주한 金씨의 후예라는 기록이 있습니다. 「金史世紀」에는 阿骨打의 7대 조인 函普(함보)가 金나라의 始祖로 되어 있고, 「滿洲源流考」에는 函普(함보)가 新羅宗姓인 金氏이므로 국호를 金으로 했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그렇다고 金나라나 淸나라를 우리 민족사와 연결시키는 것은 무리라고 생각합니다』

―우리 史學界에선 民族主義史學, 社會經濟史學, 實證史學으로 나눠져 치열하게 대립해 왔습니다. 먼저 民族主義史學의 공헌은 무엇입니까.

『민족주의史學의 의의는 무엇보다 민족의 역사적 발견에 있습니다. 민족주의 사학자들은 日帝下에서 우리 민족의 자각, 민족의 독립운동을 사상적으로 뒷받침해 주는 공헌을 했습니다』

―그 문제점은 어떤 것들입니까.

『문제는 그들의 민족관념이 지나치게 고유성을 강조한 데 있습니다. 특히 민족주의 사학의 선구자 申采浩 선생은 역사를 我(아)와 非我(비아)의 투쟁으로 보았는데, 오늘날 그것을 비판없이 추종할 경우 우리 민족을 세계로부터 고립시키는 결과를 불러올 우려가 있습니다. 민족주의 사학의 결점은 또한 역사적인 발전에 대한 관념이 결여되어 있다는 데 있을 것입니다. 민족주의 사학에서 가지고 있던 역사의 시간적 인식은 민족의식의 强弱과 투쟁의 勝敗에 있었을 뿐이었습니다. 또한 객관적인 타당성보다는 주관적인 신념을 중요시하는 경향도 두드러졌습니다』

―社會經濟史學은 어떻습니까.

『社會經濟史學은 세계사적인 발전과정에 비추어서 한국사의 체계화를 시도했다는 점에서 이미 日帝시대부터 우리 사회 일각에서조차 높이 평가되었습니다. 그러나 그 폐해도 컸습니다.

社會經濟史學의 대표적 존재로 공인되다시피한 인물은 「朝鮮社會經濟史」(1933)의 저자인 白南雲 前 연희전문 교수입니다. 그는 植民史觀과 민족주의사관, 즉 그가 말한 특수사관을 비판하고, 그 대신 받아들인 것이 一元論的 역사발전법칙, 곧 唯物史觀의 公式이었습니다.

그는 이 公式을 한국사에 그대로 적용했습니다. 그의 체계는 구체적 연구에 입각한 歸納的(귀납적) 결론이 아니었습니다. 이러한 방식이 학계 일각에서 높이 평가되어 온 데서 韓國史學은 심각한 상처를 입었습니다. 오늘의 韓國史學이 겪고 있는 고민의 하나가 이런 데서 싹텄던 것입니다』


實證史學은 史觀이 뚜렷하지 못하다는 비판받아


―그러면 實證史學은 어떻습니까.

『實證史學은 가정된 법칙이나 公式을 일방적으로 적용하는 것을 역사연구에 있어 과학적 방법이 아니라고 봅니다. 현재의 韓國史學이 일정한 학문적 수준을 어떻게든 유지해 가고 있다면, 그것은 일제시대에 「震檀學報」(진단학보)가 보여 준 수준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보아도 좋을 것입니다.

그러나 實證은 역사학의 기초조건이기는 하지만, 그것이 곧 역사 자체일 수 없다는 것도 自明한 일입니다. 그럼에도 實證史家들은 개개의 사실 위에서 일반적인 의미를 구체화하는 작업에 거의 의욕을 보이지 않았습니다. 史觀이 뚜렷하지 못한 역사학은 학문이기를 그만두고 취미로 전락해버리고 맙니다. 현대 한국사학이 혼미해진 원인의 하나가 이러한 유산을 물려받은 데 있는 것입니다』

―實證史學이라면 李丙燾 선생이 이끌던 震檀學會를 연상하게 되는데, 그것은 어떤 성격의 학회였습니까.

『震檀學會가 조직된 것은 1934년의 일이었습니다. 발기인 중에는 李允宰·文一平 등 민족주의 사학자들과 사회경제사에 관심을 가졌던 朴文圭·金台俊 등도 끼어 있었어요. 또 진단학보에는 都宥浩·韓興洙·金錫亨·朴時亨 등 唯物史觀 계열 학자들의 논문까지 실렸습니다. 진단학보에서 논문을 선정하는 기준은 작성자의 史觀보다 그 눈문의 학문적 수준이었습니다.

―金錫亨·朴時亨이라면 북한의 대표적 역사 이데올로그(理論陣)가 되지 않았습니까. 그들은 북한의 소위 「檀君陵 발굴 학술보고집」에도 글을 실었더군요. 특히 金錫亨의 「주체 방법론을 지침으로 하여 단군조선 력사를 체계화하는 데서 나서는 몇 가지 문제」라는 글의 서두를 인용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위대한 수령 김일성 동지와 우리 당과 인민의 위대한 령도자 김정일 장군님의 현명한 령도에 의하여 신화로만 전해 오던 단군이 실재한 인물로 밝혀짐으로써 우리나라의 고대력사를 새롭게 체계화할 수 있는 휘황한 길이 열려지게 되었다>

이런 글을 쓴 사람을 과연 역사학자라고 할 수 있습니까.

『慶山의 부잣집 아들로서 京城帝大 법문학부 사학과를 졸업한 金錫亨은 1947년 월북 당시 신진 학자였지요. 金錫亨과 朴時亨은 김일성대학교 교수로 취임했는데, 1960년대 이후 북한 역사학계를 대표하는 최고 원로가 되었죠. 이 두 사람은 학문적 업적을 남긴 학자라고 생각합니다만, 북한의 경직된 체제 속에서 살아남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던 일이었을 것으로 추측됩니다. 정치가 학자를 타락시킨 본보기 같은 것 아니겠습니까』


金日成-金正日의 북한은 朝鮮王朝보다 후퇴한 체제


―6·25를 전후하여 적지 않은 남쪽의 역사학자들이 사회주의 국가 건설에 참여하겠다고 월북했는데, 당시로는 사회주의의 虛像이 드러나지 않았던 만큼 결국은 줄을 잘못 선 것 아닙니까.

『金日成·金正日의 북한은 민족사 차원에서 보면 크게 퇴보한 체제입니다. 북한의 근·현대사는 金日成·金正日 개인 집안의 역사입니다. 「朝鮮王朝實錄」이나 「承政院日記」를 보면 임금에 대한 신하의 言路가 놀랄 정도로 트여 있었습니다.

東獨이 붕괴되기 전의 일입니다만, 韓國史를 전공하는 괴텔 교수가 한국에 온 적이 있습니다. 한림대학에서 만났는데, 그의 말로는 북한은 사회주의국가가 아니라고 하더군요. 북한은 조선왕조보다도 더 전제적이라고 해야겠지요.

金日成·金正日이 교시한 「주체적 입장과 방법론」을 역사연구에서 일관되게 견지하여야 할 유일한 지침으로 삼는 이른바 「주체사관」은 이미 학문의 세계가 아니라 정치적 도구입니다』

―북한의 「朝鮮全史」를 보면 金日成의 증조부 金膺禹(김응우)가 대동강을 침범한 미국의 무장상선을 「불배 공격」으로 침몰시켰고, 3·1 독립운동의 중심은 평양이고, 그 주역이 金日成의 아버지 김형직으로 되어 있습니다. 이렇게 조작한 것을 역사책이라고 할 수 있습니까.

『사실의 참 모습을 밝히는 작업은 다른 말로 바꾸어 표현하면 진리의 탐구입니다. 그러므로 학문의 목표는 진리의 탐구에 있다고 할 수 있습니다. 진리는, 당연한 일이지만, 거짓이 아닌 것입니다』

이같이 李基白은 「진리」라는 말을 즐겨 쓴다. 서강大 사학과 洪承基 교수는 李基白을 「보편주의적 관점에서 진실의 세계를 바라보는 역사가」라 평가하면서 『그에게 있어서는 진실과 거짓을 가려내는 일이 학문의 임무로서 가장 중시되고 있다』고 말했다.

―선생님의 학문세계에 큰 영향을 준 분은 누구입니까.

『李丙燾 선생으로부터는 역사적 사실을 구체적으로 연구하는 방법에 관한 가르침을 받았고, 孫晉泰 선생으로부터는 역사의 큰 흐름을 이해하는 데 대한 가르침을 받았습니다』

―孫晉泰 선생은 6·25 전쟁 때 납북되었지요.

『孫선생은 광복 후 新민족주의 사관을 제창했고, 우리나라 초대 내각에서 문교부 차관으로 활동했는데, 6·25 전쟁 때 漢江을 건너지 못해 북한으로 끌려갔어요. 그곳에서 그들의 눈 밖에 난 것인지, 박물관 수위로 강등되어 고생을 했다는 얘기가 전해지고 있습니다』

―李丙燾 선생은 왜 민족주의사학과 사회경제사학의 양쪽으로부터 협공을 받았다고 생각하십니까.

『日帝 때 朝鮮史編修會(조선사편수회) 참여, 李完用의 친척이란 점이 李丙燾 선생에 대한 비난의 줄거리였습니다. 광복 후 李丙燾 선생과 그 문하생이 한국사학계를 주도한 데 대한 묘한 반발심리도 있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면 李基白 史觀은 무엇입니까.

『학문이란 것은 전통이 중요한데, 그것을 계승하려 하지 않고 파괴하려고만 해요. 民族主義史觀, 唯物史觀, 實證史學에서 좋은 점은 취하고, 나쁜 점은 버려야 하는데, 자기 비위에 안 맞으면 무조건 배격해 버리는 풍토는 고쳐야 합니다. 역사는 여러 각도에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저는 역사란 보편성을 띤 여러 법칙에 의해 발전해 나가는 것으로 보고 있으므로, 多元的 普遍主義 發展史觀이라고나 해야 할는지요. 저 자신도 어떻게 표현해야 할는지 고민하고 있습니다』

―여러 史觀의 장점을 會通하는 것이 선생님의 史觀이라 할 수 있겠군요. 한국사의 발전 방향은 어떤 모습입니까.

『統一新羅 이후 우리 역사는 支配勢力의 저변이 점차 확대되어 오는 경향을 나타냈습니다. 신라 말기에 이르면 중앙에서는 六頭品이, 지방에서는 豪族의 세력이 등장하더니 , 드디어는 이들이 신라의 金氏王族 중심의 骨品制를 무너뜨리고 高麗를 건설한 것입니다. 그런 점에서 저는 후삼국시대를 亂世라기보다는 매우 역동적인 시기라고 말합니다』

―高麗는 어떤 사회였습니까.

『高麗는 왕족뿐만 아니라 6두품과 호족 출신의 문벌귀족을 중심으로 한 귀족사회였습니다. 이렇게 지배세력이 수적으로 증가함에 따라 科擧와 같은 관리등용시험을 필요로 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文臣 중심으로 짜여 있던 고려사회의 지배세력은 武人정권 시대에 武臣으로까지 확대되었습니다. 특히 고려 후기에는 鄕吏 출신의 士大夫 세력의 진출이 눈에 띄게 됩니다』

―신흥 士大夫 세력이 대두한 朝鮮왕조는 그런 의미에서 대단한 역사발전이겠군요.

『그렇습니다. 조선은 士大夫 중심의 兩班사회였지요. 따라서 高麗시대와는 비교할 수 없을 만큼 支配勢力의 수적 증가를 보였습니다. 士林派가 등장하면서 이런 大勢는 더욱 굳어졌습니다. 朝鮮朝 말기에 이르면 兩班의 신분적 특권은 점점 무너지고 중인, 서리, 상공업자의 사회적 참여가 증대됩니다.

西洋의 새로운 지식에 흥미를 갖고 開港 정책을 이끌어낸 것도 이들입니다. 한편 농민층도 점점 성장하여 이들이 東學운동의 중심이 되었습니다. 3·1 운동과 같은 거족적인 운동도 이러한 기반 위에서 가능했던 것입니다』


대한민국은 출발부터 역사발전 이룩


―오늘의 한국은 어떻게 보아야 합니까.

『먼저 한 가지 사례를 들겠습니다. 초기에 서울대학교 총장을 역임하신 분의 부친은 노비였습니다. 이렇게 身分制가 부정되고 온 국민의 사회 참여가 보장되었다는 점에서 오늘의 한국은 출발부터 대단한 역사의 발전을 이룩한 것입니다. 자유와 평등에 입각한 사회정의가 보장되는 민주국가의 건설이야말로 민족사적 이상입니다. 이런 의미에서 한국사의 大勢를 이해한다는 것은 무엇보다 중요한 일인 것입니다』

인터뷰를 마친 후 李선생은 필자에게 점심을 사겠다면서 외출을 위해 한복을 벗고 양복으로 갈아입었다. 그 사이 필자는 李基白 선생의 서재를 둘러보았다. 40여 평짜리 집의 방마다 역사 관련 책과 자료가 쌓여 있었다. 앉은뱅이 책상 위에 놓인 원고지들은 그가 집필을 계속해 오고 있다는 흔적이었다. 그가 중학교에 입학하던 해에 그의 선친이 구입했다는 茶山 丁若鏞의 「與猶堂全書」(여유당전서)도 눈에 띄었다.

그러면 李선생이 평생 모은 책들은 장차 누구에게 갈 것인가? 이런 생각을 하고 있는데, 李선생 스스로가 먼저 말을 끄집어 냈다. 『둘째(아들)가 東洋史를 하니까 필요한 건 그에게 넘기고…』라며 말끝을 흐렸다. 李선생의 장남 仁星(49세)씨는 서울大 불문과 교수, 차남 仁哲(45세)씨는 서강大에 강사로 출강하고 있다.

인터뷰 도중 李선생은 습관적으로 「휴」 하고 한숨을 짓는 바람에 오랜 시간의 대화가 원로학자의 건강에 무리를 주는 것은 아닐까 하여 내심 걱정스러웠다. 그러나 그건 杞憂(기우)였다. 음식점으로 동행하면서 보니 짙은 회색 양복 차림의 그는 의외로 옷맵시가 있었고, 자세도 꼿꼿했다. 늦은 점심이어서인지, 매우 왕성한 식욕을 보이기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