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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淳台의 國寶紀行(5) - 國寶 제224호 景福宮 慶會樓

정순태   |   2003-03-07 | hit 1547

朝鮮王朝의 正宮인 景福宮(경복궁) 안에 있는 많은 殿閣(전각)들 중 國寶는 勤政殿(근정전)과 慶會樓(경회루), 둘뿐이다. 勤政殿은 景福宮의 正殿인 만큼 먼저 답사할 생각이었지만, 현재 보수공사중이어서 다음 기회로 미룰 수밖에 없었다. 慶會樓는 景福宮에서 勤政殿 다음 가는 큰 건물이며, 다락집 건물로는 국내에서 가장 크다. 朝鮮王朝의 임금이 신하들이나 외국 사신들과 공식적인 큰 연회를 할 때 사용했던 누각이다.

한국은행 발행 1만원권 지폐 뒷면에는 慶會樓의 모습이 그려져 있다. 이 그림을 통해서도 慶會樓의 구조만은 대충 짐작할 수 있다. 네모난 연못의 동쪽 물 속에 큰 섬을 만들어 네모난 基壇(기단)을 쌓았다. 그 基壇 위에 48개의 돌기둥을 세워 거대한 누각의 무게를 지탱하게 했다. 정면 7칸, 측면 5칸, 중층(2층)누각 팔작지붕(여덟 八字 모양의 지붕) 翼工(익공: 첨차 위에 얹혀 있는 장여 밖에 걸쳐져 기와지붕의 무게를 받아내는 짧게 아로새긴 나무) 집이다.

基壇 자체는 사방이 물에 둘러싸인 형상인데, 누각에 접근할 수 있도록 동쪽에 세 개의 다리를 설치했다. 基壇 둘레에는 돌로 난간을 세웠는데, 난간에는 꽃잎 모양의 장식이 새겨져 있고, 네 귀퉁이 난간에는 짐승 모양을 조각해 놓았다.

연못에는 작은 섬 두 개가 더 만들어졌는데, 여기엔 송림이 우거져 있다. 넓은 연못은 慶會樓의 웅장한 모습과 함께 두 섬의 나무들을 비추어 仙境을 이룬다.

慶會樓의 예술성은 현장에서 보지 않으면 느끼기 어렵다. 비가 부슬부슬 내리는 날이면 더욱 좋다. 慶會樓 연못 건너편 서쪽 벤치에 앉아 북악산, 북한산, 인왕산의 능선과 어우러진 慶會樓의 지붕을 바라보면 우리나라 목조건물의 白眉(백미)를 감상할 수 있다.

북쪽으로 솟은 北岳에 대비하여 용마루는 수평선을 이루는데, 처마는 서쪽의 평탄한 仁王山(인왕산)의 능선에 대비하여 뾰족하게 처리되었다. 雲雨(운우)에 뒤덮힌 인왕산은 조선 중기의 大화가 겸재 鄭(정선)이 그린 「仁王霽色圖」(인왕제색도:국보 제216호)의 바위산 그대로이고, 北漢山 연봉은 꿈길 같은 실루엣을 이루고 있다. 그 품 속에 안긴 慶會樓는 매우 아늑하다. 自然과 人工의 절묘한 조화다.


太宗이 짓고 大院君이 重建


慶會樓은 太祖 때 景福宮을 창건하면서 함께 세웠는데, 그 규모가 작았다. 습한 자리에 연못을 만들고 연못가에 다락집을 짓는 정도였다. 慶會樓의 규모를 크게 확대한 것은 太宗 때였다. 따라서 慶會樓의 실질적 창건자는 太宗이다. 太宗은 공조판서 朴子淸(박자청)에게 명하여 못 속에 섬을 만들고, 그 섬에 큰 다락집을 지으라고 했다.

당시의 능력으로 상당히 어려운 일이었다. 반대하는 신하들이 많았지만, 太宗의 비호를 받은 朴子淸이 일을 해냈다. 네모 반듯한 섬을 長大石으로 護岸(호안)하여 누각을 세우고, 돌다리 셋을 가설하여 뭍과 연결시켰다. 朴子淸은 한미한 신분으로 입신하여 太宗을 도와 都城 건설에 功을 세워 판서의 반열에 오른 立志傳的 기술관료였다.

太宗 12년 5월18일에 새 누각이 완성되자 慶會樓라 명명되었다. 그러나 臺諫(대간)에서는 朴子淸의 「방자함」을 들어 그를 귀양 보내라고 들고 일어났다. 太宗은 『나라 사람들이 朴子淸을 미워하는 것은 토목의 役事(역사) 때문』이라며 듣지 않았다. 이어 世子 讓寧大君(양녕대군)에 명하여 慶會樓의 편액을 크게 썼다.

慶會樓는 世宗, 成宗 때도 개수되었다. 成宗 때는 48개의 돌기둥에 龍을 새겼다.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 때 景福宮의 다른 殿閣과 함께 소실된 후 오랫동안 방치되었다. 宣祖, 光海君, 顯宗, 英祖 등 역대 임금이 재건할 뜻이 있었으나 신하들의 반대로 복구가 이뤄지지 못했다. 신하들의 반대 이유는 백성들의 부담이 커진다는 것이었다. 그래서 거의 250년 동안 잡초가 무성한 폐허가 되었다.

慶會樓는 고종 4년(1869) 興宣大院君(흥선대원군)에 의해 景福宮 중건 공사의 일환으로 복구되었다. 이때 연못 속에 작은 섬을 두 개 더 만들었지만, 옛날처럼 돌기둥에 龍을 조각하는 장엄은 베풀지 못했다. 慶會樓 난간과 돌다리 기둥에는 여러 형상의 짐승들이 조각되어 있다. 연못 둘레에는 石蓮池(석연지) 蓮花臺(연화대) 등의 석조물과 이무기 형상을 새긴 石漏槽(석루조)를 배치했다.

慶會樓의 돌기둥은 매우 장엄하다. 가장자리는 네모난 돌기둥이고 안쪽에는 둥근 기둥이다. 높이는 15.5척이다. 돌기둥이 받치는 다락 아랫면에는 우물반자(우물井 字 모양의 사방연속 무늬가 배치된 천장)가 현란하게 펼쳐져 있다. 돌기둥 사이에 다락으로 올라가는 층층다리 두 틀이 설치되었다. 올라가면 다락의 마루다.

마루는 3단으로 되어 있다. 가장자리의 툇간이 가장 낮고, 그 안쪽이 조금 높고, 중앙부가 가장 높다. 중앙부는 임금이 좌정하는 곳이다. 다락의 중앙 고주칸에는 문짝을 달았다. 열고 닫을 수 있도록 한 것이다. 전체의 넓이는 280여평이다.


폭군 燕山君의 自作詩


世宗實錄 즉위년(1418) 9월9일 기사를 보면 왕은 慶會樓로 나가 兀良哈(올량합) 등 女眞(여진) 사신 일행 60여명을 접견하고 술을 하사했다.

世宗 때 慶會樓 일대는 計時機器 및 천문기기가 집중 배치된 첨단과학의 중심부였다. 남쪽에는 報漏閣(보루각), 서북쪽엔 簡儀臺(간의대), 서쪽에는 觀象監(관상감), 북쪽에는 欽敬閣(흠경각)이 있었다. 世宗은 또한 慶會樓에 올라 衛士(위사)들의 騎射(기사)와 火砲(화포) 발사를 관람하기도 했다.

이렇게 사용되던 慶會樓가 端宗(단종)이 世祖에게 왕위를 찬탈당하는 비극의 현장이 되기도 했다. 世祖實錄 1년 6월11일 기사는 다음과 같다.

<成三問(성삼문)이 尙瑞司(상서사)로 나아가서 大寶(대보:옥쇄)를 내다가 환관 田均(전균)으로 하여금 慶會樓 아래로 받들고 가서 바치게 하였다. 魯山君(노산군: 폐위당한 후 端宗의 칭호)이 世祖(세조:당시의 首陽大君)를 부르니, 世祖가 달려 들어가고, 承旨와 史官이 그 뒤를 따랐다. 魯山君이 일어나 서니 世祖가 엎드려 울면서 굳게 사양하였다. 魯山君이 손으로 大寶를 잡아 世祖에게 전해 주니, 世祖가 더 사양하지 못하고 이를 받고는 오히려 엎드려 있으니 魯山君이 부액해 나가게 했다>

위의 기사야말로 편파적인 역사 기록의 전형이다. 쿠데타를 일으켜 金宗瑞(김종서) 등 重臣들을 도륙하고 政權과 軍權을 한 손에 장악한 首陽大君은 끝내는 端宗을 양육한 惠嬪 梁氏(혜빈 양씨)까지 귀양보냄으로써 端宗의 퇴위를 강박했다. 端宗에게 옥새를 빼앗은 首陽大君은 각본대로 곧장 익선관과 곤룡포 차림으로 勤政殿에서 즉위했다.

慶會樓가 가장 흥청거렸던 때는 燕山君(연산군) 때였다. 다음은 燕山君日記 12년 3월17일의 기사이다.

<慶會樓 못가에 萬歲山(만세산)을 만들고 산 위에 月宮(월궁)을 짓고 채색 천을 오려 꽃을 만들었는데, 백화가 산중에 난만하여 그 사이가 기괴만장이었다. 그리고 龍舟(용주)를 만들어 못 가운데 우뚝 솟게 했다. 樓 아래로는 붉은 비단 장막을 치고서 興淸(흥청)·運平(운평) 3000여인을 모아 노니 笙簧(생황)과 노랫소리가 비등했다>

이에 燕山君이 자작시를 읊었다.

<씩씩한 기운 어린 仙峯(선봉)은 푸른 하늘에 치솟았고, 신비한 거북과 신령스런 학은 때 맞추어 조화되었도다. 뭇 영걸은 향연에 감동되어 충성스런 마음이 흡족하고, 외로운 귀신은 幽囚(유수)가 되어 오장육부가 타도다. 안개 어린 누각의 단장한 자태 龍架(용가)가 우뚝하고, 구름사다리의 鳳樓(봉루)는 아득하도다. 머물러 완상하려 함은 백성을 수고롭게 하는 일이 아니라 우리나라가 영원히 잘 살도록 하기 위함이로다>

「노세 노세 젊어서 놀아」 판을 벌이면서 그런 행위도 나라를 위해서라는 명분만은 세우려 했던 심사가 매우 흥미롭다. 燕山君은 놀이를 위해 백성들의 私船(사선)을 빼앗아 慶會樓에 끌어들이는 등의 惡政으로 결국 中宗反正으로 왕위에서 쫓겨났다. 그는 38세의 젊은 나이로 강화도 귀양지에서 죽었다. 이것이 바로 그 유명한 白樂天의 「長恨歌」 중의 한 구절인 樂盡悲來(낙진비래: 즐거움이 다하면 슬픔이 다가옴)의 朝鮮王朝版이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