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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터뷰] 재벌개혁 戰線의 젊은 돌격대장 朴相熙

정순태   |   2003-03-13 | hit 1691

세상 사람들은 그를 「재벌 개혁의 戰士(전사)」라고 부른다. 혹은 「2000년대를 중소기업의 시대로 끌고 가려는 아이디어맨」이라고도 말한다. 국내 2백70만개 중소기업을 대표하는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의 朴相熙(박상희) 회장은 할 말은 하는 사람이다. 그의 말을 듣기 전에 아직 젊지만 다이내믹한 그의 인생 역정을 잠시 더듬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그는 1951년, 지금은 대구광역시에 편입된 경북 달성군 구지면 낙동강변의 농가에서 3남1녀의 막내 아들로 태어났다. 어려운 가정 형편 때문에 겨우겨우 명문 대구상고를 졸업하고, 열아홉 살에 국민은행에 입사했다. 근 10년간 말단 행원으로 근무하면서 일을 잘한다고 해서 「부지점장」이라는 별호까지 얻었다. 高卒(고졸) 학력의 핸디캡을 극복하기 위해 건국대학교 행정학과 야간부를 졸업했지만, 보수적 은행 조직에서 엘리트 코스로 진입하기는 어려웠다.

1978년, 28세 나이의 그는 사업가의 뜻을 세우고 은행원 퇴직금 1천만원과 은행 융자금으로 서울 영등포역 부근 문래동에다 철강 도소매업체 「대진철강」을 창업했다. 직원 2명에 불과한 영세기업이었지만, 철저한 신용 관리와 외형 확대 등의 공격적 경영으로 창업 1년 만에 1억원의 흑자를 냈다.

이어 1980년, 광화문에다 사무실 한 칸을 마련하여 전화기 1대, 텔렉스 1대를 들여놓고 역시 남녀 직원 2명의 소규모 무역회사를 차리고 「미주실업」이라는 간판을 내걸었다. 건설붐이 일 것으로 예상하고 건설 기계장비와 원자재 수입에 주력했는데 타이밍이 맞았다. 창업 4년 만에 그는 두 개 사업체에서 연간 매출 2백억원을 올렸다.


43세에 최연소 회장으로 출발


그의 꿈은 제조업 진출이었다. 드디어 경기도 김포 지역의 철근 공장을 인수하여 대진철강의 상호를 미주철강으로 바꾸고, 스틸 거푸집 개발에 도전했다. 선진국 제품을 카피하여 국내 최초로 개발에는 성공했지만, 목재 거푸집보다 4~5배나 비싼 스틸 거푸집을 사겠다고 선뜻 나서는 건설업체가 없었다. 그는 「때가 올 것」이라며 끈질기게 기다렸다. 목재 거푸집은 시공 후 자국이 남아 미장 공정을 다시 해야 하기 때문에 인건비가 상승하기 때문에 스틸 거푸집의 수요가 급증할 것으로 믿었다. 개발 5년 만에 국내 건설 현장에서 목재 커푸집은 거의 1백% 스틸로 대체되었다. 그는 여기서 큰 돈을 벌었다.

그는 다시 기술력이 뛰어났으나 부도에 직면한 동방제강을 인수하여 미주제강으로 이름을 고쳤다. 미주제강은 전량 독일과 미국 등에서 수입하던 엘리베이터 레일의 국산화에 성공하여 1992년부터 국내 독점 생산자가 되었을 뿐만 아니라 일본 등 7개국 시장에서 세계 정상급 메이커로 인정받았다. 1994년 수출의 날에는 1천만 달러 수출탑을 수상했는데, 미주그룹의 수출 주력상품이 바로 최첨단 엘리베이터 레일이었다.

창업 16년 만에 그는 철강 제품, 자동차 부품 메이커와 건설회사를 포함한 7개 계열사를 거느리며 연매출 3천억원을 올리는 중견 기업인으로서 명성을 얻었다. 1995년 2월, 그는 만 43세라는 최연소의 나이로 2백70만 중소기업을 대표하는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 회장으로 선출되었다. 그리고 3년 후인 1998년 2월, 그는 중소기업 사상 처음으로 기협 회장에 再選(재선)되었다. 두 번의 경선에서 그는 모두 80%의 절대적 지지율을 기록했다.

이렇게 성공가도를 달려온 그도 미주그룹의 사업 확장기가 IMF(국제통화기금) 사태와 맞물려 한때 피가 마르는 자금난의 고통을 겪었다. 그러나 바다 매립용 파이프 제작에서 세계 제1의 기술을 보유하고 있는 등의 기업 내용과 성장 전망, 그리고 『朴相熙를 죽여서는 중소기업의 미래가 없다』는 격려와 지원에 힘입어 위기를 극복했다. 그는 첨단 지식산업에의 영역 확대를 향한 대야망을 갖고 뉴 밀레니엄의 스타트 라인에 섰다.


『재벌 개혁하면 중소기업 저절로 삽니다』


―朴 회장께서 「재벌 개혁의 戰士」로 불리게 된 까닭은 무엇입니까?

『제가 企協(기협) 회장으로 들어와 5년간 일관되게 주장해 온 것이 재벌 개혁입니다. 저는 열아홉 살 때 말단 은행원으로 일하면서부터, 이어 스물여덟 살 이후 기업을 하면서 많은 중소기업들이 억울하게 부도상황에 몰리는 것을 보아왔습니다. 중소기업이 어려운 것은 자본, 기술, 인력, 판로, 그리고 중소기업 관련 인프라가 취약한 데도 문제가 있지만, 가장 큰 문제는 재벌이 빚어내는 폐해입니다. 金泳三(김영삼) 대통령 시절, 재벌의 폐해를 아무리 강조해도 경제 정책을 결정하는 소위 리더그룹에 내 말이 먹혀들지 않았습니다』

―金大中 정부는 달라지지 않았습니까?

『金大中 대통령은 취임 1개월 후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경영자 3백명을 청와대에 초청하여 점심을 주는 자리에서 제게 「朴회장, 뭘 봐주면 좋겠느냐?」라고 묻습디다. 공개적 자리였지만, 저는 「중소기업에 여러 가지 문제가 있지만, 재벌 개혁 없는 중소기업 정책은 공염불입니다. 재벌 개혁만 해주시면 중소기업은 저절로 삽니다」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재벌의 폐해는 무엇입니까?

『재벌들은 금융기관으로부터의 자금 차입, 사업 인허가, 각종 규제의 과정에서 政經(정경)유착을 통해 그 목표를 달성해 왔습니다. 중소기업의 고충 가운데 하나는 판매지요. 여기에 대기업과 중소기업의 역할 분담이 있어야 하는데, 대기업이 싹쓸이를 하여 공정한 경쟁이 안됩니다. 선단식 경영으로 재벌의 업종 침해도 심합니다. 정부에서 중소기업 지원 정책을 쓴다 하더라도 실효가 없었어요. 중소기업을 위해 자금을 푼다고 했지만 대기업, 특히 5대 재벌의 자금 수요가 많아서 중소기업으로는 돈이 흘러오지 않았습니다. 금융 자원의 독식이었습니다』

―요즘은 자금 사정이 많이 좋아졌다던데요?

『지금은 재벌에 대한 구조조정을 하니까 중소기업 쪽으로 자금이 오고 있지요. 최근 금리의 하향 안정세 속에 금융비용이 경감되고 차입 여건도 완화되면서 업종에 따라 중소제조업의 자금 사정이 호전되고 있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金宇中(김우중) 전 全經聯(전경련) 회장의 대기업 至上論(지상론)과 朴회장의 중소기업 주도론이 맞부딪쳐 큰 논쟁이 되지 않았습니까?

『저는 5대 재벌, 그중에서도 大宇(대우)의 개혁을 제일 먼저 주장했습니다. IMF 외환위기 직후부터 大宇 문제가 상당히 심각했거든요. 그런데도 공개적으로 그런 소리를 한 사람은 없습디다. 이 나라 관료, 정치인, 학자, 언론인의 상당수가 5대 재벌과 얽혀 있거든요. 나중에 우리 경제에 미칠 파장에 대비해서 미리 대책을 세워놓아야 했습니다. 경제 5단체장의 청와대 회동 같은 곳에서 두어 번 金宇中 회장과 싸웠습니다. 누군지 지적하지는 않겠지만, 대통령을 자꾸 속이는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제가 「金회장은 大宇를 대변하는 거요, 이 나라 재벌을 대변하는 거요, 분명히 해주었으면 좋겠습니다」라고 대들었지요』


『아무도 말을 못했어요』


朴회장은 『할 말은 한다』면서 재벌 해체와 관련한 비화를 털어놓는다.

『金泳三 정부 시절의 얘기입니다만 韓寶(한보), 起亞(기아)를 빨리 구조조정 해야 했는데도 아무도 말을 못해요. 제가 韓寶를 빨리 부도 처리하라고 건의했습니다. 그때 롯데호텔 일식집에서 金賢哲(김현철)씨를 만나 「아버지께 빨리 전하라」고 말하면서 韓寶를 부도내야 할 이유를 설명했습니다.

첫째, 경쟁회사인 인천제강, 동국철강, 강원산업에 비해 韓寶는 1대 1.8로 설비비가 많이 들었기 때문에 부도가 날 것이 뻔하다. 둘째, 시중에 당신과 대통령이 韓寶와 관련되었다는 루머가 무성하다. 셋째, 만약에 韓寶를 지원해서 살아날 가능성이 있다면 오히려 밀어줄 필요가 있겠지만, 韓寶는 金泳三 대통령의 임기가 끝나는 바로 다음날에 부도가 날 것이다. 그러니까 미리 터뜨리는 것이 대통령이나 당신에게 유리하다.

이런 얘기를 했더니 金賢哲씨가 바로 청와대에 들어가 보고한 것 같아요. 당시 경제수석이던 李錫采(이석채)씨가 전화를 걸어와 제가 金賢哲씨에게 했던 얘기를 되물어보던데, 바로 이튿날부터 韓寶의 당좌를 막지 않습디다』

―YS와는 그런 인간적 통로를 열 수 있는 특별한 인연이 있습니까?

『全斗煥(전두환) 대통령 시절인 1985년, 직선제 개헌 문제로 탄압받던 金泳三 야당 총재와 남산 외교구락부에서 만나 점심을 먹고 나오는 저를 검은 차 두 대가 따라다녔던 일도 있었습니다. 제가 소싯적부터 全斗煥 대통령의 가족들과 좀 알고 지내온 관계도 있고 해서 그런 얼어붙은 정국 속에서도 별로 거리낌 없는 언동을 했습니다.

이건 金泳三 대통령 임기 말 때의 얘기인데요, IMF 사태가 터지고 보름 후의 일입니다. 「오전 10시에 차 한잔 하자」는 겁니다. 웬일인가 하고 청와대로 들어갔더니 金대통령이 「나는 잘하려고 했는데, 중소기업도 도와주려고 했는데, 어찌 이리 됐노. 어찌하면 되겠노」 하고 하소연을 합디다.

제가 金대통령을 수행한 경제인의 한 사람으로 멕시코를 방문하여 세디오 대통령을 만난 적이 있습니다. 멕시코라면 우리보다 몇 년 먼저 IMF 사태를 겪은 나라가 아닙니까. 그때 세디오 대통령은 IMF 사태 극복 방안을 질문한 저에게 「외환위기가 오면 환율과 금리 변동에 대한 정부의 처방이 핵심이다. 특히 수입 관련 기업에 환차손이 많이 나기 때문에 정부 재정으로 보전했다. IMF에선 高(고)금리 정책을 권유하지만, 어떻게든 저금리 정책으로 가야 한다」라고 답변합디다. 이런 세디오 대통령의 말씀을 전하면서 金대통령에게 「起亞, 韓寶 때문에 고생하셨지만, 다음 정부는 大宇 때문에 난리가 날 겁니다. 大宇가 안 터진 것을 다행으로 아십시오」라고 말했습니다. 저는 그때 이미 大宇를 위험하다고 느끼고 있었습니다』

―우리나라의 내로라하는 경제 전문가들이 왜 IMF 외환위기를 사전에 경고하지 않았을까요?

『金泳三 대통령은 임기 초부터 세계화 얘기를 자꾸 하면서 우리 기업의 해외 투자를 대견하게 생각했던 것 같았습니다. 그때 국내 언론의 논조도 마찬가지였어요. 그래서 제가 「밖에 공장 많이 짓는 것이 세계화가 아닙니다. 해외 투자, 이거 굉장히 위험합니다」라고 고언했습니다. 들은 사람도 많고 어딘가 녹취록도 있을 겁니다.

당시 통화신용 정책이 실패한 이유는 금융의 전산화가 제대로 되어 있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유동성 관리를 할 수 없습니다. 물론 우리나라 외환 관리에도 허점이 많았습니다. 제가 당시 금융개혁위원이었으니까 내용을 좀 압니다만, 해외 차입에 대한 관리가 안되었으니까 이것이 나중에 큰 禍(화)를 불러일으킬 것으로 보았습니다. 사람들은 해외 직접투자를 위해 외국에서 빌린 돈은 실패하더라도 외국에서 털면 그만이라고 생각합디다. 그러나 우리는 국가 신인도 추락 때문에 해외부실을 외국에서 털지 못해요.

大宇 문제 말예요. 그걸 IMF 사태 초기에 정리했으면 지금 비용의 3분의 1로 수습되었을 것입니다. 이런 것 관리들은 알았겠지만, 말을 못하더라고요. 金宇中 리스트가 있답니다. 어떤 공직자, 어떤 정치인에게 어떻게 했는지 모두 전산에 입력되어 있다는 얘기지요. 그러니까 심지어 내로라하는 S대학 S교수, J교수, Y대학 S교수 등도 大宇가 부도 내기 1개월 전 大宇를 살리자는 시론을 썼습니다. 지식인이 이게 뭡니까? 金宇中 회장은 세계 경영을 PR한다고 지식인들을 傳貰(전세) 비행기에 태우고 다녔습니다. 그래서 총대를 매었는지도 모릅니다』


『金大中 대통령, 중소기업 살린 영웅 될 겁니다』


―지금 재벌 개혁은 잘되고 있다고 보십니까?

『오랫동안 쌓여온 나쁜 관행들이 일부 제도의 수정이나 정부의 독려로 쉽게 변화되기는 어려워요. 재벌 개혁에서 유상 증자 등에 힘입은 재무구조의 개선과 상호 지급보증의 해소는 성공적이나 정경유착, 기업 지배구조의 투명성, 경영에 대한 투명성, 탈법적인 상속과 증여, 불공정 거래 관행 등의 개혁 분야는 아직 부진해요. 그러나 분명히 좋은 방향으로 가고 있어요. 이것은 중소기업에게 수십조원을 풀어주는 것보다 효과가 있는 겁니다.

재벌 개혁을 하니까 30대 재벌은 은행에서 돈 꿀 일이 없어졌어요. 證市(증시)에서 직접금융, 즉 이자 안내는 돈을 조달할 수 있거든요. 이제 은행은 중소기업에 돈을 꾸어줄 수밖에 없어요. 그러면 중소기업의 가장 큰 애로인 자금난이 해결되는 겁니다. 2000년 하반기부터는 중소기업이 우리 경제를 이끌어갈 겁니다. 金大中 대통령은 중소기업을 살린 영웅이 될 가능성이 높아요』

―金大中 대통령은 企協(기협)의 건의를 잘 들어줍니까?

『金大中 대통령은 후보 시절에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를 방문하여 제게 이런 말씀을 합디다. 「朴회장, 朴회장은 나하고 비슷해. 내가 목포상고를 나와 가지고 스물입곱 살 때 해운회사를 차렸는데, 朴회장도 대구상고 졸업하고 스물여덟 살 때 사업을 시작했으니 비슷한 거 아니야」라고 말하십디다. 건의를 하면 잘 들어주십니다.

얼마 전에 필리핀 방문 때 대통령을 수행했습니다. 마닐라에서 필리핀의 경제 4단체장이 오찬회를 베풀었는데, 金대통령이 즉흥 연설을 하고 질문을 받았습니다. 어느 기업인이 「한국과의 합작 사업에 관심이 있는데, 누구와 협의해야 할지, 교섭 창구가 명확하지 않다」고 말했습니다. 金대통령은 즉석에서 「여기 한국의 중소기업을 대표하는 朴相熙 회장이 와 있는데, 아이디어가 많고 중소기업을 잘 리드하니까 이 사람과 상의하면 잘될 것이다」라고 답변하십디다』


『하위 기술직 부패가 더욱 커지고 있어요』


―집권자와 가까운 거리에서 있으면 기막힌 모습도 눈에 잘 띄죠?

『제가 중소기업인의 자격으로 1983년 全斗煥 대통령을 모시고 미얀마와 인도를 다녀왔습니다. 그때 저의 나이 서른세 살이었는데, 우리나라 재벌이란 재벌들은 거의 모두가 싱가포르 등 중간 기착지에까지 몰려나와 로비를 하는 겁니다. 저는 재벌들의 행태를 내 눈으로 직접 본 사람입니다. 한때 「한국의 아이아코카」라는 명성을 누린 사람은 全敬煥(전경환)씨와 골프장에 가면 그의 공이나 주워주는 볼보이 역할도 서슴지 않았습니다. 경영인으로서 자세가 기본적으로 안되어 있었습니다.

제철소를 짓다가 엄청난 부도를 낸 某 재벌 오너는 제가 처음부터 우습게 보았습니다. 그는 힘있는 사람과 만나면 으레 돈 보따리 들고 가서 모든 것을 돈으로 해결하려 합디다. 全敬煥씨가 새마을 회장 할 때 회장실로 찾아간 장관들은 모두 「차렷」 자세입디다. 나는 좀 삐딱한 성격이어서 일부러 다리를 꼬고 합석했습니다.

열심히 하는 사람이 잘 되어야지, 이것이 보장되지 않으면 설사 소득 2만 달러 시대가 와도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재벌들이 정부 재산 불하할 때 다 먹어버리지, 官(관) 공사 발주할 때 다 차지하지, 완전히 갈라 먹기 식이에요. 내가 보기에 대부분의 재벌들은 힘센 사람에게 돈 바치고 이권 얻는 것 이외에는 경쟁력이 없더라구요. 그런 행태로 돈을 벌어가지고 마치 경영을 잘해 큰 부자가 된 것으로 꾸며 왔어요. 따지고 보면 재벌은 국민 세금과 官治(관치)금융으로 컸는데, 그 뿌리는 부정부패입니다.

이제부터 대통령을 만나면 부정부패 얘기를 드리려고 합니다. 제가 전국에 12개 공장과 15군데의 공사현장을 갖고 있으면서 매일 결재를 하는 사람이니까 부정부패라면 제일 잘 아는 사람 아닙니까? 이 나라의 하위 기술직 중심의 부패는 더욱 커지고 있습니다. 제가 經實聯(경실련) 이석용 사무총장과 형 아우 하는 사이인데, 가끔 만나면 「우리 서로 자리를 바꾸자」고 말합니다. 부정부패 척결하는 데 경실련과 중소기업 중앙회가 공조하자는 얘기입니다. 부정부패를 해결해야 나라가 바로 섭니다』


『중소기업 전담 은행이 뜹니다』


―민간단체가 정부 예산의 지원에 의존하면 제 목소리를 못내게 되죠?

『企協중앙회에 임직원 4백명이 있고 企協 회장의 산하에는 업종별 협동조합 이사장 7백50명이 있습니다. 제가 회장으로 들어왔을 때 기협은 선거 때 집권당 선거운동을 해주고 지원금이나 높여 달라고 하는 관변 단체로 전락해 있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취임하던 날 「앞으로 정부 예산은 가능한 한 안받겠다」고 했습니다.

이제 企協에 대한 정부 예산 지원은 자체 수익금의 10분의 1인 30억원 정도입니다. 정부에서 상근 부회장으로 정보기관 고위직 출신을 추천했지만, 받지 않겠다고 거절했습니다.

그 대신에 서울부시장을 퇴임하고 쉬고 있던 분을 상근 부회장으로 영입했습니다. 앞으로 서울시 등 지방자치단체와 업무 협조에 역할을 할 것으로 판단하여 모신 것입니다』

―아침에 여기를 찾아오다가 조개껍질 같은 모양의 「중소기업여의도종합전시관」을 보았는데, 朴회장의 작품(실적)이라더군요.

『바로 그 자리에 야외 안보전시장이 있었습니다. 고물이 된 구식 전투기 같은 것을 몇 개 진열해 놓았는데, 누가 눈길을 주기라도 했겠습니까? 제가 崔秉烈(최병렬) 서울시장을 찾아가서 「전쟁박물관을 짓고 있는데, 저런 것 두어서 뭘합니까. 중소기업 제품 상설 전시장을 만들어 판매도 하고 외국 바이어들도 이용하도록 합시다」고 건의했습니다. 그분, 참 대단하데요. 즉석에서 「정말 좋은 아이디어요. 다 부숴진 비행기를 나둬봐야 뭐하겠소」라며 「당장 시작하소」라는 거예요. 그래서 1만평을 얻어 중소기업 제품 전시장을 지은 것입니다.

(企協 회장실 창 밖으로 보이는 전시장을 가리키며) 저거요, 대단히 요긴하게 사용되고 있습니다. 우리나라가요, 얼마나 웃기는 나라인가 하면 金泳三 정부 말기에 ASEM(아시아-유럽정상회의) 회의장을 짓는다고 삼성동 코엑스(COEX) 건물을 헐어버리는 바람에 IMF 사태 이후 한 2년간 상품전시회 할 데가 없었어요. 그래서 여기저기서 여의도 전시장을 빌려 달라고 줄을 서서 貸館料(대관료) 수익도 만만찮았어요. 이제는 부산, 대구, 광주에 중소기업 제품 상설 전시관을 세우는 일을 추진하고 있습니다』

―企協에서 직영하는 파이낸스사는 사고를 내지 않았습니까?

『중소기업인들의 소원이 자체 금융기관을 갖는 것이었습니다. 金泳三 대통령 시절 제가 30대 기업에 대해 중소기업 전담 어음할인 기관을 하나 만들겠다고 출자를 요청하여 마련한 돈 3백억원으로 企協 파이낸스를 설립했습니다. 企協 파이낸스는 중소기업이 가져오는 어음만 할인해주지, 수신 업무는 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 사회적 말썽을 일으켰던 파이낸스사들과 업무 성격도 다르고 매우 건전하게 운영되고 있습니다』

―중소기업인들이 집단적으로 이동통신 주식에 투자해서 큰 돈을 벌었다는 얘기를 들었습니다.

『제가 企協 회장으로 취임하자마자, 정부 불하 또는 인허가 사업에 적극 참여하기로 방침을 정했습니다. 이동통신 018에 대한 정부의 사업자 선정 때 企協은 2만개 중소기업이 참여한 콘소시엄을 만들어 경쟁에 뛰어들었습니다. 업자 선정를 위한 査定(사정)에서 중소기업 콘소시엄이 제일 점수를 많이 얻어 1등을 했습니다.

그런데 당시 정통부장관 李錫采씨가 선정 기준을 바꿔 한솔이 1등이 되도록 만들었습니다. 이것, 앞으로 소송을 걸어 되찾을 계획입니다. 李錫采 장관은 「중소기업이 어찌 이런 사업을 하겠느냐」라고 말합디다. 우리는 콘소시엄도 잘 조직했고, 미국 퀄컴사와 제휴해서 기술 부문도 앞서는 등 모든 부문에서 1등이었지요. 기준을 바꾸는 바람에 떨어지고 나니 이거, 대단히 억울해서 청와대로 몰려가서 데모를 하려고 했습니다.

그러니까 정부가 수습 차원에서 한통프리텔(016)의 주식을 좀 팔겠다고 해요. 그래서 2만개 중소기업이 1천5백억원을 만들어 액면 5천원짜리 주식을 매입했습니다. 그것이 오늘 시세로 16배인 주당 8만원으로 올랐으니까 2만명이 1억원씩 골고루 벌었습니다. 그때 企協도 자체적으로 016 주식 58만 주를 샀는데, 그것이 지금 시세로 5백억원이 되었습니다』

다시 이어지는 朴회장의 말이다.

『그걸 매각하여 企協의 자립에 필요한 발전 기금으로 쓰려고 합니다. 이거 대외적으로 처음 털어놓는 얘기입니다만, 실은 企協이 2000년 상반기중에 은행 하나를 만들려고 해요. 국민은행이 소유하고 있는 부국상호신용금고를 인수하여 중소기업 전담 은행으로 전환하는 겁니다. 인수 자금은 한통프리텔 주식 매각과 중소기업들의 공동 출자로 마련할 계획입니다.

전국 7백50개 지방 중소기업협동조합을 중심으로 지점망도 갖출 겁니다. 조달 금리만 조건을 같이해주면 시중은행과 당당하게 경쟁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2백70만 중소기업이란 고객을 갖고 있으니까 강해요. 같은 값이면 우리 은행과 거래하려고 하지 않겠습니까』


『왜 정부에서 지원받으려 하나?』


―企協에서 밴처캐피탈사도 설립할 계획인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일본의 「소프트방크」처럼 벤처기업에 대한 투자를 관리할 持株(지주)회사 형태의 밴처캐피탈사를 2000년 초에 신설할 예정입니다. 자본금 5백억원 규모로서 설립자금은 企協중앙회가 독자적으로 운영 중인 중소기업 공제기금에서 충당됩니다』

企協중앙회의 이와 같은 은행 진출과 밴처투자 사업은 정부가 중소기업 제품 판매를 지원해 왔던 단체 수의계약 제도가 2001년 이후 사실상 없어지게 됨에 따라 중소기업에 대한 지원 정책의 체계가 변화되는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원래 조합 운동은 돈과 연결시켜야 강력해지는 것 아닙니까?

『저는 처음부터 경영 마인드로 企協을 운영하려고 했습니다. 그래서 저의 취임 제 一聲(일성)은 「중소기업협동조합중앙회라는 간판 자체가 엄청난 돈덩이인데 왜 정부한테 지원받으려고 하느냐」였습니다. 각종 정부 불하 사업에 企協 중심의 콘소시엄을 만들면 얼마나 경쟁에서 유리한데요』

―요즘 같은 환경 속에서 중소기업을 하기 어렵다면 언제 중소기업을 하겠습니까? 倒産(도산)하는 기업이 많다지만, 그 10배의 기업이 창업하고 있는데, 이것은 기업 환경이 좋아졌다는 얘기 아닙니까? 이제는 중소기업이 정부에 대해 자꾸 내놓으라고 손을 내밀지 말고 신기술 개발 등을 통해 자생력과 경쟁력을 키워야 할 것 아닙니까? 대만에서도 중소기업은 대기업에 비해 담보력이 약하니까 2~3% 포인트 높은 금리로 은행 돈을 쓰지 않습니까?

『기업이 정부에게 자꾸 도와달라고 하는 시대는 WTO(국제무역기구) 체제하에선 어렵습니다. 다만 정부는 중소기업들이 역할을 할 수 있는 큰 틀만 깔아놓으면 됩니다. 금리가 하향 안정세에 있다지만, 아직도 우리 금리는 선진국이나 주요 경쟁국에 비해 3배나 높습니다』


『차라리 중소기업 콘소시엄에 맡겨달라 』


―지금 정부의 자동차산업 정책은 어디로 가고 있습니까, 자동차부품 제조 중소 업체들이 아우성을 치고 있는데요?

『자동차 빅딜이 잘못된 것은 다 아는 일이 아닙니까? 저는 자동차 빅딜에서 누군가가 대통령을 속였다고 생각합니다. 빅딜을 전경련 주도로 하는 바람에 金宇中 회장의 구상대로 되어가다가 大宇의 침몰로 문제가 생긴 겁니다. 저는 처음부터 생각이 달랐습니다. 국내 자동차 산업은 現代, 大宇, 三星 3社 체제로 그냥 놔두면 그중 하나가 곧 탈락할 수밖에 없었다고 예상했습니다. 그렇게 되면 자연히 국내 2社 체제로 가는 겁니다.

그런데 지금은 現代와 GM 체제로 가고 있거든요. 자동차산업이 이렇게 가면 국내 자동차산업의 기반이 붕괴될 우려가 있습니다. 왜냐하면 부품을 생산하는 중소 협력업체들이 쓰러질 것이기 때문입니다. GM은 처음엔 협력업체들을 살린다고 하겠지요. 그러나 GM은 극동에 이미 부품센터를 다 갖고 있어요. 또한 GM에게는 GM 시리즈가 있는데 무엇이 아쉬워서 대우 모델을 개발하려고 새로 돈을 쓰겠습니까? 흉내만 내다가 말겠지요. 결국 우리 협력업체는 서서히 죽게 되어 있습니다. 대통령께 이런 얘기는 아무도 하지 않습니다.

얼마 전 부산-창원 기업인 간담회에서 저는 정덕구 산업자원부장관에게 자동차산업은 국내 2社 체제로 가야 하는 당위성을 대통령에게 보고하라고 요구했습니다. 그것이 三星이 됐든 LG가 됐든 상관없습니다. 국내 5대 재벌이 부채비율을 2백% 이하로 조정하는 등의 개혁 원칙 때문에 참여할 수가 없다면 차라리 그걸 중소기업 콘소시엄에게 맡기면 됩니다. 그러면 企協 중심의 콘소시엄이 大宇, 雙龍, 三星자동차를 모두 인수하여 우리 협력업체들을 살릴 수 있습니다』

―중소기업 콘소시엄에서 자본집약적인 자동차산업을 인수할 만한 여력이 있겠습니까?

『외국 기업에 맡기는 것보다는 우리 콘소시엄이 하는 것이 자동차 산업을 살리는 길입니다. 지금까지 우리나라 산업정책은 전경련, 즉 재벌이 하자는 대로 갔던 거예요. 대통령의 균형 감각이 매우 중요한데, 대통령 주변에는 그런 균형을 잡아주는 사람이 없었습니다. 전경련, 무역협회, 상공회의소, 경총 등 모두가 재벌 단체였고, 중소기업중앙회조차 관변 단체였기 때문에 균형이 깨진 것입니다.

저는 경제 5단체장 회의 같은 데서 항상 1對 4의 처지에 있지만, 대통령의 균형 감각을 유지시키기 위해 나름의 노력을 해왔습니다. 그래서 청와대 모임에서 「그게 무슨 빅딜이냐, 금융정책은 이렇게 가야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습니다. IMF 사태가 한창 진행중이던 무렵, 청와대 회의에서 전경련측은 「종합상사를 지원하기 위해 수출금융을 풀자」고 주장했는데, 저는 「무슨 소리냐? 지금 돈 주면 안된다」고 반격했습니다.

여기서 브레이크를 걸지 않았다면 재벌측의 수출 지원 논리에 밀려버려 구조조정도 유야무야되었을 겁니다. 생각해보십시오. 경제 위기의 주범은 종합상사와 건설회사였습니다. 쉽게 말하면 종합상사는 돈을 먹는 블랙홀인 겁니다. 구조조정 하느라고 달러가 모자라는 형편에서 거기다 돈을 집어넣었다면 우리 산업의 뿌리인 중소기업이 모두 말라 죽었을 것입니다』

―재벌에 문제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거의 다수 국민들은 재벌이 제공하는 상품 및 서비스를 선호하고 있습니다. 그래도 1960년대 이후 재벌 주도의 경제가 오늘날 우리나라를 세계 10대 무역국의 반열에 올려 놓으면서 이만큼이라도 우리 국민들을 먹여살리지 않았습니까?

『우리나라 재벌이라 하더라도 세계적인 수준에서 보면 아직 중소기업에 불과하다는 측면도 있고, 세계적인 대기업과 경쟁하기 위해 그룹 차원에서 후원하고, 위험 분산을 위해 업종 다각화로 나간 데 대해 일부 이해할 수 있는 대목도 있습니다』

―문제는 총매출 및 총 자산 규모로 볼 때 우리 경제의 50% 이상을 점하는 재벌 중심 경제 이후의 우리 경제 모습에 대한 청사진이 제시되지 않아 많은 경제 주체들이 정부의 재벌 개혁에 대해 일말의 불안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 아니겠습니까?

『우리 경제가 과거의 非(비)효율성을 개선하고 국제 경쟁에서 살아남기 위해 요구되는 패러다임은 시장경제가 실질적으로 작동하도록 하는 것 이외에는 현실적 대안이 없습니다.

더구나 21세기 지식기반 경제사회는 물적 자본이 경쟁력의 핵심 요소로 작용했던 20세기 산업화 시대와는 달리 지식·정보와 같은 소프트한 경영자원, 창의력, 혁신력 등이 중요한 경쟁 요소로 떠오르고 있습니다. 이런 변화에는 유연성, 기민성, 역동성을 생태적 특질로 갖고 있는 중소기업이 대응할 수밖에 없습니다. 선진국들이 21세기를 「중소기업의 시대」로 규정하고 있는 것도 바로 이와 같은 이유 때문입니다』

―우리나라는 종속이론의 영향과 국민감정 때문에 외국인의 직접투자를 꺼려 끝내 IMF의 경제관리 시대를 만났고, 대만은 외국인 직접투자를 환영했기 때문에 세계 1~2위의 외환보유고를 자랑하고 「중소기업의 천국」이 되었습니다. 외국인 직접투자 기업은 자본과 기술을 갖고 들어와 노동력만 이용하면서 시장까지 스스로 개척하니까 우리와는 달리 대만은 환란을 만날 턱이 없었지요. 그러나 대만은 우리나라처럼 갖고 싶은 전략 업종을 키우지 못했다는 평가를 받고 있습니다. 우리 대기업의 스케일은 언젠가 대만을 앞지를 수 있는 힘이 아닐까요?

『3년 전에 李登輝(이등휘) 총통을 만났더니 이런 말을 합디다. 「우리(대만)가 10대 품목에서는 한국에 밀리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거다. 우리는 그런 건 사서(수입해서) 쓰는 것이 유리하다고 생각했다」 저는 그분의 생각에 동감했습니다.

중화학공업을 국내 재벌에 맡겨 독과점을 가져오고, 그 원자재를 쓰는 중소기업의 경쟁력만 나빠진 겁니다. 국산품 애용을 강조하다 보면 산업의 질이 보장되지 않습니다』


『중소기업인들 공부 안한다』


―그렇다고 한다면 朴正熙 대통령의 재벌 위주 불균형 성장 정책이 애당초 잘못된 것입니까?

『朴正熙 대통령까지는 잘했습니다. 다만 그후 집권자들이 빨리 개방 체제로 몰고 가야 했는데, 그러지 못했습니다. 金泳三 정부 들어 재벌 개혁에 손을 댔지만, 즉흥적이고 전략적으로도 안이했습니다. 金大中 정부가 십자가를 둘러멘 것이지요』

―맨날 중소기업이 어렵다는 얘기만 들어왔는데, 이제 유망한 중소기업이나 「뜨는 상품」에 대한 자랑을 좀 해주십시오.

『정보통신 관련 기업이 급성장하고 있습니다. 제조업 부문에서는 참존화장품, 로만손시계, 양지원공구(절삭공구), 그리고 헬밋, 모자, 가스라이터 메이커 등이 대표적이지요. 커봤자 몇천만 달러를 수출하는 수준이지만, 그래도 세계적 경쟁력을 갖고 있습니다.

소비자의 새로운 욕구를 충족시킬 수 있는 것은 중소기업입니다. 요즘은 과거에 생각하지도 않던 업종이 자꾸 생깁니다. 특히 인터넷 관련 산업은 무궁무진해요. 이럴 때 순발력 있게 대응할 수 있는 것이 중소기업이거든요. 정부가 각종 규제를 풀어주고 물류비와 통신비 절감, 세제 보완 등의 인프라를 정비하고, 대기업에 비해 불이익만 안 받도록 해준다면 우리나라 산업을 중소기업이 주도하는 시대가 앞당겨집니다. 중소기업을 통해서만 시장경제를 꽃피울 수 있습니다.

변화의 속도는 엄청나게 빨라요. 저는 다른 경제단체는 늙은 단체라고 생각합니다. 企協에는 우후죽순처럼 새로운 산하 단체가 생겨나고 있습니다. 벤처기업협회, 여성벤처협회, 여성경제인협회, 중견기업 모임, 소기업 모임 등 엄청나게 많아요. 이런 모임을 조직화하면 정부, 정계, 언론계에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중소기업 중심 경제구조로 가려면 중소기업의 역할에 믿음을 주어야 하지 않겠습니까?

『우리 중소기업인들은 포스트 재벌 시대에 대비한 공부를 안하는 것 같습니다. 인터넷에 들아가면 전부 영어인데, 컴퓨터하는 사장이 드물어요. 그러나 신세대 기업인들은 달라요. 저는 우리 중소기업인들의 눈을 뜨게 하려고 세계중소기업인대회(ISBC)를 서울로 유치했습니다. 이것은 세계 중소기업인의 올림픽이자 그랜드 포럼입니다. 2000년 10월에 4일간 삼성동 COEX에서 개최되는 ISBC는 각국의 중소기업인 3천명과 국내 중소기업인 3천명이 참가하여 지구촌이 돌아가는 상황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는 교육의 장으로 만들 계획입니다.

또한 IMF 외환위기를 극복한 한국 중소기업의 발전상과 디지털 시대의 미래를 과시할 것입니다. 여기엔 소프트방크의 황제 손정의 회장 같은 세계적 벤처기업인들도 많이 초청했습니다. 한국 중소기업의 네트워킹 강화와 세계 시장 진출의 커다란 계기가 될 겁니다』

인터뷰 도중 朴相熙 회장에게 『한국노총 조직원들이 전경련 회장실을 점거했다』는 내용이 적힌 첩보 쪽지가 전달되었다. 노조 전임자에 대한 무노동 무임금 원칙의 합의사항을 고치려는 정계의 움직임에 경제단체들이 반발하여 정치위원회를 구성하여 노조 편향의 정치인에 대한 낙선 운동과 아울러 기업을 옹호하는 사람들을 정계로 진출시키기로 했다는 보도가 나가자 노조측에서 역공세를 펼친 셈이다.


『노조와의 싸움은 중소기업이 맡아야』


―경제계가 정치 세력화하겠다는 것은 돈과 권력을 다 갖겠다는 발상이 아닙니까?

『어제 아침 全經聯에서 경제단체 상근 부회장들이 모여 차 한잔 하자는 연락을 받고 우리 상근 부회장은 영문도 모르고 나갔는데, 비슷한 얘기가 있었다고 합니다. 그게 어디 사전조율 없이 차 한잔 하면서 다룰 문제입니까? 노조 전임자에 대한 무노동 무임금 원칙의 적용은 옳은 얘기지만, 그렇다고 정치위원회 구성 운운의 발상은 그만큼 全經聯이 시대의 변화에 둔감하다는 얘깁니다.

그래도 企協은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에게도 할 말을 합니다. 노조 지도부는 「우리가 재벌들하고 싸우는 것이지, 중소기업에 대해서는 피해를 안 준다」고 말합니다. 그러나 노조가 파업을 하면 그 피해는 결국 중소기업들이 둘러씁니다. 대기업들은 피해를 보전하기 위해 하청 단가를 낮추거나 어음 결제일을 늦춰버립니다. 민주노총 주도로 서울지하철 파업이 일어났을 때 저는 파업을 계속하면 중소기업체 사람들을 동원하여 민주노총과 싸우겠다고 선언했습니다』

朴회장의 말은 거침없이 이어진다.

『두 달 전 청와대에서 대통령을 모시고 비서실장, 경제수석, 노동수석과 함께 차 한잔 했는데, 勞政(노정)합의를 했다는 겁니다. 제가 노동수석에게 「좀 물어봅시다. 勞政합의란 도대체 뭐요? 대통령께서는 임기중에 시장경제를 하겠다고 하셨는데, 어떻게 정부와 노조가 바로 계약을 합니까? 그런 합의를 하면 그 피해가 누구에게 돌아갑니까?」라고 항의했습니다.

대통령께서 「經總(경총) 회장과 상의했느냐」고 묻습디다. 經總 회장은 「상의 안했습니다」라고 대답합디다. 왜 우리나라의 유니온(노조)이 강하냐? 그건 이 나라 재벌의 재산 형성 과정이 국민들에게 인정받지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협상 결과를 대기업이 부담하느냐? 아니지 않습니까 .

우리 경제단체에는 일본 經團連(경단련) 회장과 같은 리더가 없습니다. 이제까지 전경련 회장이 경단련 회장의 역할을 자임해 왔는데, 이미 지도력을 잃었습니다. 노사협상에서 사용자 대표가 되는 經總 회장은 企協 회장이 맡아야 합니다. 근로자 69%의 일터가 중소기업 아닙니까? 중소기업을 내세워야 노조에 말발이 서는 겁니다. 金泳三 대통령 시절에도 지금의 노사정위원회 비슷한 노사협의체가 있었으나 企協은 사실상 배제된 채 운영되었어요. 그래서 사용자측은 한국노총과 민주노총에게 계속 끌려다니기만 했어요. 이것이 우리 경제가 고비용 저효율 구조로 가는 화를 부른 겁니다』


『워낙 노조가 강해요』


―그래도 IMF 사태 이후 노조가 자제한 모습을 보이지 않았습니까?

『아직도 우리 노동시장은 유연성이 너무 없어요. IMF 위기가 왔기 때문에 그동안 노조가 들고 일어날 명분이 없어 체면을 차린 것이지, 노조의 지위가 약화된 것은 아닙니다. 노조 전임자에 대한 무노동 무임금 원칙 적용과 노조의 정치 참여 허용은 노사정 협상 과정에서 바터한 거예요. 그런데 2년간의 유예기간이 지나도 노조 전임자에게 관행상 임금을 주지 않을 수 없을 겁니다. 워낙 노조가 강해요. 정부 의사를 결정하는 관료 집단이 우리나라 산업정책을 대기업의 창구인 전경련 하고만 얘기하면 되는 걸로 알고 일해 오다가 이 모양이 된 겁니다』

―企協의 정보화 추진 실적과 프로그램은 어떻습니까?

『企協중앙회가 전자상거래에 제일 먼저 나섰거든요. 삼보컴퓨터, 두루넷, 企協중앙회가 전자상거래 합작회사를 설립한 겁니다. 앞으로 엄청난 회사가 될 거예요. 남대문시장, 동대문시장, 대구서문시장을 통합하는 개념입니다.

일본 소프트방크 하나의 미래 가치는 우리나라 전체 기업의 가치를 웃돕니다. 이런 일을 정부는 못합니다. 그렇다면 민간이 주도해야 하는데, 전경련이 하겠습니까? 아닙니다. 역시 가장 많은 고객을 가진 企協중앙회가 해야지요. 우리도 소프트방크의 황제 손정의 같은 사람을 만들 겁니다』


남북 합작 캐릭터 산업의 가능성


―朴회장께서는 南北 교류협력 사업에도 관심이 많다고 합디다.

『우리 한민족은 굉장히 머리가 좋아요. 1998년 1월에 평양에 가서 보니 만화영화나 그래픽 디자인 수준이 거의 우리를 따라와요. 北韓의 민족경제연합회장과 그 산하의 금강산무역, 삼천리무역, 광명성무역 대표 등 10명과 만난 자리에서 「북의 기술이 대단하다. 동족으로서 자부심을 느낀다. 캐릭터 상품을 남북 공동으로 개발하면 세계 시장에서 성공할 것이다」라고 했더니 굉장히 좋아해요. 월트디즈니사가 만든 캐릭터 상품 하나가 우리나라 전체 자동차메이커보다 더 많은 수익을 올리고 있지 않아요? 北韓과 공예, 완구 등 임가공 업종을 중심으로 경제교류를 활성화해 나가기로 합의했습니다』

―朴회장께는 선물을 요구하지 않습디까?

『당신들이 남한 대기업들에게 비료 달라 뭐 달라고 하는데, 우리 중소기업들에게는 달라고 하지 마라. 시장경제하에서 중소기업은 北의 노동자인 셈인데, 중소기업에게 요구하면 되겠느냐. 금강산 관광사업 저런 것도 중소기업하고 해야 좋다. 남의 중소기업 몇천개가 북에 들어오면 진정한 남북 經協(경협)이 된다. 北에는 전력이나 물류 등의 인프라가 되어 있지 않아서 대기업은 여기에 와도 할 일이 없다. 진정한 의미의 남북 경협과 민족 화해를 위해서는 개미군단 중소기업을 끌어들여야 한다. 이런 말을 했습니다. 사실 우리의 유휴시설을 북한에 이전하면 남북 모두에게 득이 됩니다.

지금 중소기업에서 인력난 때문에 企協중앙회가 창구가 되어 연간 5만명의 외국인 근로자를 국내로 데리고 들어옵니다. 그렇다면 북한 인력을 끌어오는 것이 유리합니다. 외국인 근로자, 앞으로 보통 큰 사회문제가 아닙니다. 공식적으로 현재 25만명의 외국인 근로자가 취업하고 있다지만, 실제로는 50만명이 될 겁니다. 연애도 해서 아이도 태어납니다. 외국인 근로자가 월 1백만원씩 번다면 國富(국부)의 유출도 상당합니다. 그렇다면 동족간에 제휴하는 것이 통일 환경의 조성에도 도움이 됩니다』

朴相熙 企協회장은 현재 연간 매출액 4천억원에 육박하는 미주그룹 회장인 만큼 그 현장을 보기 위해 企協중앙회 인근 미주빌딩으로 옮겨 인터뷰를 계속했다. 우선 미주그룹의 20분짜리 홍보용 비디오를 시청했다. 이천공장 3만5천 평, 순천공장 2만5천 평 등 12개 공장의 부지가 모두 1만 평 이상으로 신예 기계 설비를 장치하고 있다.

―미주가 기업개선작업(워크아웃)에 들어갔던 이유가 무엇입니까?

『저는 창업 초기부터 당시의 첨단산업이었던 철강 제품 등의 제조업에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러다가 4년 전에 영역 확대를 위해 승부를 걸었지요. 포항제철이 마침 바다 매립용 파이프 제조 공장을 불하하게 되었는데 그 기술이 세계 제일이었기 때문에 인수하기로 결심했습니다. 당시 정계 실세가 지원했던 K공업과 입찰 경쟁을 벌였어요. 5백억원의 대출을 받아 K공업보다 40억원을 더 쓰고 차지했습니다. 이런 과정을 거쳐 순천공장이 1997년 6월에 정상조업에 들어갔는데, 그로부터 6개월도 안돼 IMF 금융위기가 터져버렸어요. 차입금의 이자가 10~12%에서 25~30%로 급등했고, 원자재 도입에서도 환율의 2배 폭등으로 1백억원의 환차손이 발생했습니다.

기업을 살리려고 워크아웃 신청을 했습니다. 가치있는 회사의 일시적 자금 흐름의 문제를 해결해주기 위해 이자를 일시 감면해주고 부채를 은행의 출자로 전환해 주는 워크아웃 때문에 미주는 이제 이자를 꼬박꼬박 물면서 활력을 되찾았습니다』


10여 건의 訟事


―그런 판에 무슨 訟事에 그렇게 많이 얽혀들었습니까?

『企協 중앙회 회장 선거에서 낙선한 사람의 지지그룹이 투서조를 만들어 사정기관에 陰害(음해)를 하고 루머를 퍼뜨렸기 때문입니다. 우선 그들은 「朴相熙가 곧 망한다」 「국민의 정부가 손을 볼 제1호다」라는 유언비어를 만들어 대출선을 봉쇄함으로써 미주그룹의 부도를 유도하려 했습니다. 부도가 나면 企協중앙회장 자리를 내놓아야 합니다. 기업 경영에 전념해도 부도 막기에 정신이 없었는데, 이런 음해까지 받으니 피오줌이 나옵디다.

저는 골프장과 헬스클럽의 회원권까지 팔아서 회사에 넣었습니다. 「朴相熙가 기업 경영을 위해 몸을 던졌구나」 하는 소리라도 들어야겠다고 생각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위기 상황에서 산업은행 총재가 「朴相熙가 부도를 내게 해서는 중소기업의 내일이 없다」면서 50억원을 대출해 주도록 결단을 내려 위기를 넘겼습니다.

저를 중상모략 하고 있는 그룹은 이어서 朴相熙가 로비자금을 누구에게 주었다느니, 企協중앙회 돈을 미주그룹에 끌어다 쓰는 부정을 저질렀다느니 하는 내용의 투서를 서울지검, 부산지검 등에다 냈습니다. 10여 건에 달하는 투서 모두가 무혐의 처리되거나 혐의가 입증되지 않았고, 한 건만 소송 계류중입니다. 저의 사건은 모두 투서가 발단이 되어 검찰이 수사에 나섰다는데, 검찰 내부에서 企協 내부의 정치적 갈등 부분까지 좌지우지할 필요가 없다는 의견이 만만찮은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새로운 밀레니엄의 원년엔 朴회장께서 하시는 일이 모두 잘 되기를 기원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이 인터뷰는 1999년 12월 4일과 6일 양일간 5시간에 걸쳐 진행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