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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인제 연구 - 당돌한 권력의지와 잦은 路線 변경 사이의 인간상

정순태   |   2003-03-16 | hit 2058

正初 場勢 주도한 合縱


2002년 정초의 政治場勢(정치장세)는 민주당 李仁濟(이인제) 상임고문이 주도했다. 새해 아침부터 李고문은 金泳三(김영삼)·全斗煥(전두환)·盧泰愚(노태우) 前 대통령의 집을 차례로 순방하면서 단독면담을 했다. 자민련 金鍾泌(김종필) 총재의 靑丘洞(청구동) 집에도 갔다. 이런 몸짓은 2002년 大選 고지를 合縱(합종)으로 돌파하려는 策略(책략)으로 풀이되었다.

李고문은 한때의 「정치적 아버지」 YS(金泳三씨)에게 90도로 허리를 꺾어 새해인사를 올렸다. YS의 얼굴이 활짝 펴졌다. YS는 주위를 물리치고 李고문과 둘이서만 20분 간 密談(밀담)을 나눴다.

李고문의 레토릭이 가장 화려하면서도 닭살이 오를 정도로 간지럽게 펼쳐진 곳은 靑丘洞에서였다.

『오늘 청년처럼 보이십니다. 부산에 가셨다 올라오시면 바둑 한판 하면서 총재님의 경륜과 사상의 깊은 뜻을 배우겠습니다』

山戰水戰(산전수전)을 다 겪은 JP도 반가운 몸짓으로 반응할 수밖에 없다. 대번에 『그럽시다』고 화답했다.

지난 16代 총선 때만 해도 李仁濟 민주당 선대위원장은 忠淸圈의 헤게모니를 다투면서 JP를 『서산에 지는 해』라고 비아냥거렸다. 그러나 이번에는 180도 달랐다.

작년 1월1일 아침, 李仁濟씨는 上道洞(상도동)에 가서 보도진이 지켜보는 가운데 YS에게 남들은 하지 않는 「五體投地(오체투지)」의 큰절을 올렸다. 당시 현장에는 崔秉烈(최병렬) 한나라당 부총재, 金槿泰 민주당 최고위원 등이 먼저 와 있었다. 이 장면은 TV카메라에 찍혔다. 世人의 입초시에 오르는 것쯤은 무시한 李仁濟의 「모험」이었다.

그때 李仁濟씨의 큰절은 YS와의 관계개선에 즉효약이 되었다. 그 직전까지만 해도 李仁濟씨에 대한 上道洞의 禁足令(금족령)이 풀렸느니 아니니 하며 說往說來(설왕설래)하던 상황이었다. 1997년 경선 결과에 불복하고 大選에 출마한데다 낙선 9개월 후에는 「DJ의 품」에 안겨버린 李仁濟씨에 대한 YS의 분노가 아직 가시지 않았던 시점이었던 것이다.

금년 1월1일, 한나라당 李會昌 총재는 「大勢論의 中心」답게 가회동 자택에 坐定(좌정)해 있으면서 사람들을 맞았다. 언론은 「李총재의 집에 1000여 명의 세배객이 몰려 발 디딜 틈이 없었다」고 전했다.


速力行馬에 뒤늦은 응수


그런 李총재도 눈 도장을 찍으려 몰려든 群像(군상)의 巧言令色(교언영색)에 취해 있을 수만은 없었던 듯했다. 反 李會昌 연합전선의 형성―이런 合縱을 겨냥한 李고문의 速力行馬(속력행마)가 탄력을 받고 있었다.

DJ가 총재직을 버린 후 민주당은 「국민선거인단 도입」 등 새로운 정치실험으로 기세를 올리고 있었다. 그 바람에 앞장선 것이 李고문이다. 李고문의 지지도가 상승세를 타고 李총재에 대해 한 자리수 또는 오차범위 내에까지 육박하고 있었다.

드디어 李총재도 1월3일부터 金泳三, 全斗煥, 盧泰愚 前 대통령의 집들을 순방했다. 李仁濟 고문에게 先手를 빼앗긴 李會昌 스타일의 뒤늦은 응수였다.

李총재는 YS와 70분 동안 단독면담을 가졌다. 李고문의 20분보다 훨씬 길었다는 얘기다. 문제는 대화의 내용이다. YS-李會昌 회동 후 上道洞 측의 반응은 적대적이진 않았지만, 우호적이지도 않았다. YS가 李총재의 不可遠不可近(불가원불가근) 대접 정도로는 만족하지 않는다는 뜻이다.

2000년 총선에서 참패를 했던 JP에게 원내교섭단체만 만들어 주었어도 李총재는 16代 국회 院구성 때부터 집권 민주당을 제압하고 정국의 주도권을 장악할 수 있었다. YS도 李총재에게 그렇게 하라고 訓手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李총재는 끝내 JP를 끌어안지 않았다. 總選民意(총선민의)를 왜곡할 수 없다는 「이회창 流의 원칙」 때문이었다.

만약 李仁濟 고문이 李총재의 입장이었다면 어땠을까? 필자의 예단이긴 하지만, 대번에 JP를 끌어안았을 것이다. 그런 맥락에서 李총재가 「원칙(Principle)의 정치인」이라면 李仁濟 고문은 「절충(Compromise)의 정치인」이라고 할 수 있다.

여기서 두 리더십의 愚劣을 거론할 생각은 없다. 다만 原則(원칙)과 折衝(절충)은 둘 다 重視(중시)되는 지도자의 德目이다. 연말 大選에서 어떤 리더십이 국민적 컨센서스를 이뤄 국민의 선택을 받을지 아직은 속단할 수 없다. 오늘의 시대적 상황을 진단하는 시각과 대처방식은 대체로 다음 두 가지로 대별할 수 있다.

1)청와대의 입(대변인)과 司正首席(사정수석), 부패방지위원장(내정자)까지 무슨 「게이트」에 연루되고 끼리끼리 해먹는 편중인사, 그리고 대통령의 포퓰리즘에 의해 온 나라가 표류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제야말로 「原則의 리더십」이 나와야 할 것 아닌가?

2)온 나라가 지역 간, 계층 간, 이해집단 간의 갈등에 의해 골이 더욱 깊어진 나머지 이제는 조각이 날 위기에 처해 있다. 그렇다면 이같은 갈등부터 치유·봉합할 「折衝의 리더십」이 필요하지 않는가?

금년 정초에 실시된 각종 여론조사에서도 李會昌 총재는 李仁濟 고문에 대해 여전히 앞서갔다. 한국갤럽·조선일보의 여론조사 결과는 45.4% 對 34.8%, 중앙일보 조사는 53.0% 對 40.4%, R&R·동아일보 조사는 35.4% 對 33.1% 등이었다. 2.3∼12.6% 포인트 차이였다.

1997년 大選에서는 李會昌 후보가 1000만 표, 李仁濟 후보가 500만 표를 얻었다. 그때 李仁濟 후보는 匹馬單騎(필마단기)로 나섰다. 이번에는 다르다. 당내 경선만 통과하면 집권당의 자금과 조직, 경우에 따라서는 공권력까지 업고 싸우게 된다.

10% 포인트 전후의 차이라면 TV정책토론 같은 것을 통해 얼마든지 역전시킬 수 있다. 더구나 TV토론이라면 李고문이 長技로 자처하는 분야다. 다만 修辭(수사)에 비해 내용이 부족하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말도 쉽게 바꾼다. 1997년 경선에 불복하고 출마를 선언할 때 그의 話頭 중 하나는 「3金 청산」이었다. 그러나 3金에 대한 그의 현재 입장은 「3金의 업적을 창조적으로 계승한다」는 것이다. 일관성이 없으면 말의 신뢰성이 떨어지게 마련이다.

李仁濟 고문은 아직 넘어야 할 고비가 수두룩하다. 1997년 그의 경선 불복에 대한 해명은 역시 만만찮은 대목이다. 1998년 9월, 大選 낙선 후 9개월 만에 DJ의 민주당에 합류한 정치적 變身(변신)을 설명하기는 더욱 어려울 것이다. 그의 變身에 대해 지난 大選에서 그에게 표를 준 사람들 중 다수는 『속았다』고 외치고 있다.

더욱이 李고문은 자신의 정치적 立地를 위해 DJ의 失政에 대해 아무런 견제도 하지 않았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최근 李고문도 湖南 편중 人事와 청와대 참모진의 부정부패에 대해 한 마디 하기는 했지만, 거기엔 전혀 「그의 體重(체중)」이 실려 있지 않았다. 아직은 DJ와 맞서기보다는 섬기는 것이 유리하다는 計算書(계산서)가 나온 데 따른 현실주의적 스탠스라고 할 수는 있다.


『너라고 왜 대통령이 될 수 없겠니』


李會昌씨와 李仁濟씨는 충청도를 고향으로 삼는 全州李氏, 서울大 법대를 졸업한 판사 출신, 그리고 둘 모두 키가 작고 YS의 後期 문하생이라는 공통점도 지니고 있지만, 그 정치적 성향은 가장 대조적이라고 할 수 있다. 李會昌씨와는 반대로 李仁濟씨는 「短縮 키(단축 Key)」를 쳐서 현재의 위상에 오른 인물이다. 단계를 뛰어넘어 수직상승해 왔다는 뜻이다. 물론 그도 인생 굽이굽이에서 장애물을 만났다. 그러나 그는 우회하지 않고 돌파했다. 용맹과 야망의 典型이다.

지난 1월4일 오후, 필자는 여의도 正友빌딩 509호로 찾아갔다. 130여 평쯤 되는 사무실은 마치 남대문시장처럼 사람들로 붐볐다. 여기에 집권 민주당의 「主流」로 회자되는 李仁濟 계보의 경선과 大選의 캠프가 들어서 있다. 記者 출신으로 이제는 李仁濟 고문의 막료로 활동중인 한용상, 윤재걸, 김윤수씨 등의 얼굴도 보였다.

이날 필자는 李仁濟 고문과 면담 약속을 했던 동료 趙南俊 편집위원과 동행했다. 趙위원이 인터뷰할 동안 필자는 李고문을 나름대로 진득하게 관찰할 수 있었다. 李고문의 출생과 성장 배경 등은 月刊朝鮮 이번 호의 趙위원 글에서 상세히 소개하고 있는 만큼 여기서는 몇 가지 일화만 간단히 짚고 넘어간다.

李仁濟 고문은 대대로 농투성이였던 소농의 집안에서 4남2녀의 셋째로 태어났다. 초등학교 6년 간 반장과 수석을 했고, 논산중학교에 수석으로 합격했다니까 수재라고 할 만하다.

당시는 수석합격자라고 해서 장학금을 주던 시절이 아니었다. 李仁濟군은 월사금을 제대로 낼 수 없었다. 中1 때의 담임은 영어를 가르치던 여교사 徐椿錫(서춘석) 선생이었다. 徐교사는 李仁濟 학생에게 등사판을 긁고(原紙에 글을 쓰고) 검정색 잉크가 묻은 롤러를 밀어 유인물을 찍어내는 일을 맡겨 학비 일부를 벌도록 배려했다.

李仁濟군은 공부만 잘한 학생이 아니라 「똑」소리가 나는 야무진 소년이었다. 그런 소년에게 徐교사는 『너라고 왜 대통령이 될 수 없겠느냐』며 격려했다. 소년의 가슴에 처음으로 「야망의 불」을 지른 사람이 바로 徐교사였던 셈이다.

李仁濟 소년은 학교 도서실에 있는 문학전집이라면 거의 통독했다. 특히 칭기즈칸傳, 나폴레옹傳, 플루타크 영웅傳 같은 책을 탐독했다. 지금도 그는 몽골軍의 기마전술 등에 관심이 깊은 칭기즈칸의 숭배자다. 中3 때는 전교 학생회장에 뽑혔는데, 논산여중 학생회장 金銀淑양(李仁濟 고문의 부인)과의 러브스토리는 그때 벌써 인동에 소문이 쫙 났다고 한다.

당시 論山 일대에서 공부 잘하는 학생은 지방명문 강경상고에 진학하여 졸업 후에 은행원이 되는 것이었다. 그러나 李仁濟는 서울의 명문 景福高로 진학(1965년)했다. 집안 형편이 나아졌기 때문에 유학을 할 수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맏형 德濟(덕재)씨가 서울 마포 공덕동에 양복점을 차리는 바람에 더부살이를 할 수 있었던 것이다. 당시 맏형의 신혼 단칸방에는 李仁濟군이 함께 거처했기 때문에 큰 형수가 3년 뒤에야 첫아이를 보았다고 한다.


『장차 큰일 낼 아이』


경향 각지의 수재들이 모이는 景福高 시절, 李仁濟 학생은 크게 두각을 나타내지는 못했다. 그래도 교내 웅변대회에서는 得意(득의)의 사자후를 토해내 1등을 했다. 그런 李仁濟군에 대해 高3 담임 차경수씨(나중에 서울大 사대 교수 역임)는『장차 큰일 낼 아이』라고 말한 적이 있다고 한다.

학업 성적은 高3 때 바짝 따라붙어 서울大 법대에 합격할 정도였다. 68학번의 대학생활은 전태일 焚身自殺(분신자살)과 3선개헌 반대운동 등으로 데모를 밥먹듯 하던 시기였다. 李仁濟군도 공부보다 데모와 서클활동에 열중했다. 그가 가입한 「사회법학회」라는 서클에서는 지금 정계의 유명 인물들로 성장한 李信範(이신범) 前 의원, 민주당 사무총장 이협 의원, 최기선 인천시장, 장기표씨 등이 모두 한가락씩 하고 있었다. 「전태일 전기」를 썼던 故 趙英來(조영래) 변호사가 법대 선배로서 영향력을 발휘하기도 했다. 다음은 李仁濟 고문의 회고.

『나도 두 번 중앙정보부에 끌려가 1주일씩 조사를 받고 경찰서에도 숱하게 다녔지만 (수사관에게) 얻어터지지는 않았습니다. 재학시의 학생운동은 순수한 동기로 참여한 것이었으니까 감옥에 갈 이유가 없었던 거죠. 우리 세대 이후의 일부 운동권처럼 (대한민국의) 체제를 부정하는 따위는 나의 신조가 아니었습니다. 사회법칙에 의해 단계를 밟아 우리 사회를 발전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갖고 있었거든요』

그는 사법시험에 합격하지 못한 채 1972년 2월 대학을 졸업했다. 다시 李고문의 회고.

『4학년 2학기 때 (사법)시험을 쳤는데 민법 하나에서만 科落(과락)을 하고 다른 과목은 괜찮았습니다. 시험에 합격하고 軍에 가려고 했죠. 그땐 사법시험을 본다고 하면 (軍징집) 연기가 잘 될 때입니다. 그런데 술 마시고, 책 읽고, 친구 만나고 하니까 점수가 더 안 나왔어요. 먼저 군대 갔다 온 후 진로를 다시 생각해 봐야겠다는 판단에서 1976년 2월 입대했습니다』

법대 졸업 후 4년 간 계속된 李仁濟의 白手시절과 「소피아 고시원」은 떼놓을 수 없다. 「소피아」라면 「지혜」를 의미하는 그리스語. 「소피아 고시원」이라면 뭔가 그럴 듯해 보이지만 실은 하숙하기 어려운 가난한 학생들이 공부하고 닭장 같은 3층 침대에서 잠도 자고 식권으로 식사도 해결하는 독서실이었다. 다음은 그 시절부터 李고문의 心友가 된 方暎俊 교수(現 성심여대 사대 학장)와의 문답(李고문과의 인터뷰 이틀 뒤 方교수와 만났다).


『얻어 먹어도 큰소리 치고 얻어 먹었다』


―李仁濟씨를 처음 만났을 때 어떤 인상을 받았습니까.

『저는 李고문보다 세 살 위로 성균관大 행정학과 졸업 후 군대에 다녀왔는데…, 처음엔 그가 건방지게 보였습니다. 고시 지망생이라는데 공부도 열심히 하지 않더군요. 당시 바둑 1급, 당구 200점에다 고스톱도 하고 탁구도 잘 쳤는데, 그런 팔방미인이 차분하게 앉아 공부만 했겠습니까.

함께 어울리다 보니 그는 엘리트 기질이라고는 전혀 없는 촌사람 기질 그대로였습니다. 고시원 옥상에 올라가 살짝 라면도 끓여 먹고 천하대세와 인생을 논하기도 했는데, 어느덧 그는 우리들의 中心에 있었습니다』

―그때 李仁濟씨의 주머니 사정은 어땠습니까.

『부산 출신으로 경희大 법대를 나온 김홍경씨(현재 서울 오류동에서 식당 경영)가 나이가 제일 위고 주머니 사정이 비교적 좋아 밥을 제일 많이 샀죠. 李仁濟씨는 얻어먹더라도 비굴하지 않고 큰소리 치면서 얻어먹었습니다』

―빈털털이 李仁濟씨가 무슨 돈으로 고스톱을 쳤습니까.

『첫 판에 못 먹으면 가리(외상)였죠. 그래도 그를 탓하는 사람은 없었습니다. 돈을 따면 호쾌하게 막걸리라도 샀습니다. 당시 지방에서 초등학교 교사로 재직하던 金銀淑씨가 봉급을 타면 상경해 우리들에게 거창하게 한턱을 냈습니다』

―거창한 한턱이라뇨.

『돼지갈비에다 소주까지 곁들인 성찬을 베풀었으니까 우리들에겐 그녀가 천사였죠』

입영열차를 타기 사흘 전 李仁濟군과 金銀淑양은 서울대 법대 앞 이화예식장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다시 李고문의 말.

『中3 때부터 줄기차게 사귀어 왔으니까 다른 선택이 없었죠. 군대 갔다 오면 너무 늦지 않습니까. 그렇다고 軍복무 중에 짧은 머리로 (휴가) 나와서 결혼식 올릴 수도 없고…』

28세의 늦은 나이로 입대한 李仁濟는 보병 제30사단 90연대에서 30개월 간 복무하고 병장으로 만기제대했다. 부인 金銀淑씨는 軍에서 풀려나온 남편이 믿는 구석이 있어 팔방미인의 노릇을 계속할까 두려워 아예 초등학교 교사직을 그만두었다. 李仁濟 부부가 背水陣(배수진)을 친 셈이다. 그와 同鄕인 언론인 J씨는 『원래 가진 것이 없었던 李仁濟는 이제는 더 이상 잃을 것이 없다는 배짱과 용기로 살아온 사람』이라고 말했다.


판사 생활에 답답함 느껴


李仁濟씨는 집중력이 있었다. 軍에서 제대한 지 7개월 만인 1979년, 그는 사법고시(제21회)에 합격했다.

사법연수원 시절에 新군부의 쿠데타인 5·17 사태가 일어났다. 이때 계엄당국에 의해 수배중이던 법대 시절의 동지 李信範씨가 李仁濟씨를 가만히 찾아와 숨겨달라고 했다.

李信範씨는 李仁濟씨의 知己인 方暎俊씨의 경기도 의왕 집에서 은신하다가 체포되었다. 李信範씨와 方暎俊씨는 잡혀가서도 둘 사이를 엮어 준 李仁濟의 존재를 끝내 수사관들에게 불지 않았다. 李仁濟씨는 아무 탈 없이 1981년 사법연수원을 수료했다(제11기).

李仁濟씨는 대전지법 판사가 되었다. 대전이 그의 첫 근무지로 결정된 것은 고향 부근으로 가고 싶다는 그의 희망 때문이었다고 한다. 남자가 출세하고서도 고향에 가지 않으면 비단 옷을 입고 밤길을 걷는 것과 마찬가지라고 했던가….

그러나 李仁濟 판사는 곧 그의 직업에 「답답함」을 느꼈다. 왜 그랬을까? 그는 대학 동기들보다 6∼7년 늦게 임관되었다. 그의 대학 3년 후배이며 소피아 고시원에서 함께 생활했던 黃昇淵(황승연) 판사가 그의 직속상관이었다. 黃판사는 법대 4학년 재학중에 벌써 사법시험에 합격했다.

李仁濟는 「보스 기질이 넘치는 초임 판사」였다. 그는 그때까지 총각이었던 학교후배이며 직속상관인 黃판사를 그의 집으로 끌어들여 숙식하게 했다. 명절 때는 대전지법 수위와 사환들에게 「마치 지원장처럼」 선물을 돌렸다. 그는 「골치 아픈 판사」로 찍히기도 했다. 영장 기각률이 70%에 이를 정도로 「소신 있는 법 해석」을 했기 때문이었다.

그는 1983년 말 판사 생활을 2년 만에 끝내고 서울 서소문에서 변호사 개업을 했다. 그는 노동자의 産災(산재), 해고사건 관련 변호에서 이름을 얻었다. 변호사 사무실은 번창하고 돈도 잘 벌렸다. 그는 사람을 잘 사귀고, 人德을 누리는 사람이다. 예컨대 변호사 개업 당시 그를 돕던 한대삼 변호사는 현재 「李仁濟를 지지하는 변호사 모임」을 주도하고 있다.


白手시절의 친구와 軍 복무 시절 상관들의 도움


1985년 2·12 총선 직후 그는 民推協(민추협)의 이사가 되었고, 1987년 9월에는 金泳三 통일민주당 총재가 운영하던 민족문제연구소의 이사가 되었다. 정계진출을 위해 워밍 업을 한 셈이다.

그의 정계진출의 변은 『변호사로서 어려운 처지에 놓인 한 명을 상대하기보다는 더 많은 사람들을 위해 일할 수 있는 기회를 갖기 위해서』였다. 당시 그를 YS에게 처음 소개한 인물은 YS의 비서실장이었던 金德龍(김덕룡)씨였다. 현재 한나라당 대통령후보 경선에 나서고 있는 金德龍 의원은 그의 경복고 선배다.

그러나 李仁濟의 정치적 자질을 평가하면서 앞길을 닦아 주려고 애썼던 이는 현재 신병으로 정계에서 은퇴한 上道洞系의 맹장 崔炯佑(최형우)씨였다. YS가 李仁濟씨에게 정치적 프로젝트 하나를 맡겼는데, YS를 대신해 李仁濟씨로부터 결과보고를 받은 崔炯佑씨가 대번에 그 솜씨에 반해 버렸기 때문이라고 한다.

1988년 4·26(13代) 총선에서 李仁濟는 고향 論山에서 출마하려고 했지만, 거기엔 이미 다른 공천 내정자가 버티고 있었다. 그는 연고가 별로 없는 경기도 안양甲구에서 통일민주당 공천으로 출마하게 되었다. 안양은 그의 청년시절 인근 청계산 밑에 있던 「학의 집」이라는 곳에 잠시 머물며 사법시험 준비를 했던 인연이 있었을 따름이었다.

그의 주위에선 『이제 겨우 먹고 살 만한데 자칫 잘못하면 알거지가 된다』면서 출마를 말렸다. 그러나 李仁濟씨는 일을 저지르고야 마는 성격이다. 대번에 관악산 밑 비산동(지금의 관양동)의 40여 평짜리 현대아파트를 전세 내어 거기다 베이스 캠프를 치고 선거판에 뛰어들었다.

갑자기 그의 주변에는 온갖 사람들이 몰려들었다. 白手시절 독서실에서 함께 공부했던 친구들, 軍복무 시절의 상관들과 전우들이 달려와 李仁濟 후보를 도왔다. 李고문은 이렇게 말했다.

『그들이 안양으로 모여들기 시작하더니 불덩이처럼 뛰면서 돈까지 거둬 주었습니다. 우린 강철조직입니다』

그때부터 李仁濟씨의 幕賓(막빈)이 된 方暎俊 교수의 말.

『그때 벌써 그의 대중연설이 빛을 발하더군요. 선거운동도 특이했어요. 예를 들면 그 바쁜 선거운동 기간에 일부러 어린이 놀이터를 찾아다니며 표도 없는 어린이들과 어울리는 일에 몰두합디다. 놀라운 것은 아이들의 부모들이 그의 확실한 지지자가 되었다는 사실입니다』

통일민주당 지도부에선 「捨石」(사석) 정도로 생각했던 李仁濟가 뜻밖에도 대승, 「살아서」 올라왔다. 39세의 나이에 금배지를 달았으니까 「李仁濟의 短縮 키」가 훌륭하게 작동한 셈이다.


5共청문회에서 스타로 부상


「5共청문회」는 온 국민의 시선을 모은 정치 축제였다. 우리 정치사상 처음으로 TV를 통해 실황중계된 청문회는 정치인의 능력을 저울질하는 경연장이기도 했다.

5共청문회에서 DJ의 平民黨은 죽을 쑤었다. 平民黨 부총재였던 S의원의 경우 증인으로 출두한 全斗煥 前 대통령을 「악마」라고 호통을 친 다음에 실체적 진실을 밝혀 내려는 노력은 하지 않은 채 「웅변」으로 증인을 꾸짖기만 했다. S의원은 청문회가 무언지 모르는 국회의원으로 점찍혀 그후 그의 정치행로는 불운했다.

반면 YS의 통일민주당이 청문회 정국을 주도했다. 그 주역이 김광일, 노무현, 李仁濟 의원이었다. 세 초선의원은 모두 변호사 출신이니까 그들의 「전공과목」에서 유감 없이 능력을 발휘한 셈이다. 「스타 셋」에 대한 평가는 보는 사람들에 따라 다르겠지만, 체계적이고 논리정연한 질문으로 핵심을 찔렀던 이가 李仁濟 의원이었다.

청문회가 열리기 전에는 집권 민정당과 제1야당인 平民黨이 정치판을 주도했다. 제2야당 통일민주당 총재였던 YS는 정치의 중심에서 소외되어 있었다. YS로선 견디기 어려웠던 이런 구도가 「청문회 스타들」에 의해 일거에 해소되었다.

YS의 李仁濟·김광일 사랑은 대단했다. 원내 진입 이태 만에 李仁濟는 「小壯(소장) 정치인의 꽃」이라는 대변인으로 발탁되었다. 그러나 李仁濟의 대변인 시절은 3개월 만에 짧게 끝났다. 왜 단명했을까? 다음은 당시 통일민주당을 출입했던 윤창중 기자(현재 문화일보 논설위원)의 말.

『출입기자들과의 不調和(부조화) 때문에 李仁濟 대변인이 중도 하차당한 것이죠. 기사를 찾는 기자들에게 통 큰 얘기만 하는 대변인은 별 쓸모가 없었던 것입니다. 기자란 원래 정치가십 하나를 쓰려 해도 미주알 고주알 미세적으로 접근할 수밖에 없지 않습니까.

그런데 李仁濟 대변인은 회의 내용 같은 것을 일일이 풀이해 주는 미세적 부분에 취약했어요. 통일민주당에 대한 비판적인 기사가 나가도 李仁濟 대변인은 별로 대수롭게 생각하지 않더군요. 당연히 출입기자들에게는 불만이었지요. 그런데도 「대담한 李仁濟」가 大成할 것이라고 내다보았던 기자들도 적지 않았습니다』


「나는 中道에서 조금 右쪽이다」


1990년 3黨 합당 당시 李仁濟 의원은 김광일, 노무현 의원 등과 함께 黨內서클 정민회의 주력이었다. 김광일, 노무현 의원은 「3黨 야합」에 반대, YS를 따라가지 않았다. 김광일 의원은 鄭周永 후보의 大選 캠프에 가담했다가 YS 정부 때 대통령비서실장으로 복귀했다.

반면 李仁濟 의원은 처음부터 YS의 합당노선을 추종했다. YS는 그에게 「정치적 아버지」였다. 배짱과 담력, 한 번 먹어도 크게 먹는다―이런 점에서 두 사람은 주파수가 꼭 맞아 떨어지는 관계라고들 했다.

1992년 14代 총선에서 그는 재선의원이 되었다. 이어 1993년 2월 金泳三 정부 출범과 함께 최연소 노동부 장관으로 입각했다. 그때가 45세였으니까 「少年장관」이라 할 만하다. 그는 산업현장을 「발로 뛰어다니는 장관」으로 호가 났다. 재임시절의 업적으로는 「고용보험제」 도입과 「新인력정책」 등이 손꼽힌다.

그러나 재임 10개월 만에 「無노동 부분 임금 발언 파동」의 여진 속에서 노동부 장관직에서 물러났다. 산업계에서 李仁濟 장관의 정책노선을 급진적이라고 반발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그의 이념적 성향은 무엇인가? 다음은 최근 홈페이지에 올린 李고문 자신의 주장이다.

<李仁濟의 정체성을 두고 보수냐, 진보냐 하는 질문을 자주 받곤 한다. 그러나 우리나라에서는 그런 질문 자체가 성립하기 어렵다. …우리는 산업사회도 민주주의도 없었다. 민주화와 산업화가 급속히 몰아치면서 격렬한 소용돌이를 겪고 있다.

지금은 권위주의에서 민주주의로, 관치경제에서 시장경제로, 냉전에서 화해로 급격히 변하고 있다. 계속해서 舊질서에서 新질서로 나아가고 있다. 성숙되고 정형화된 질서 자체가 없다. …굳이 통속적 상식으로 말하라면 나는 중도에서 조금 右쪽이다>

1995년엔 민자당 당무위원으로 올랐다. 그의 야망은 집권당 당무위원에 그치지 않았다. 그는 초대 민선 경기도지사 자리를 겨냥했다. 경합자는 민정계인 임사빈 의원이었다. 경기도의 지구당위원장들은 대부분 민정계였다. 더욱이 林의원은 일찍이 경기도지사를 지냈던 만큼 녹록치 않는 상대였다.

결국 黨內 경선에서는 아슬아슬하게 승리했지만 본선에서는 대승했다(임사빈 후보는 민자당을 탈당, 무소속으로 출마).

그러나 경기도지사 시절의 그보다 더 바람을 일으킨 것은 부인 金銀淑씨였다. 그녀는 「경기도의 힐러리」로 회자되었다. 金여사는 원래 치맛자락을 걷어붙이고 뛰는 여성이다. 그녀의 사회활동은 그냥 폼으로 하는 것이 아니었다. 1주일에 2~3일씩 어린이집 같은 곳에서 가서 한두 시간씩 봉사했다.

주위에서는 경기도지사 시절 李仁濟씨가 「많이 컸다」고 말한다. 종합적 행정에 눈을 떴다고도 했다. 刮目相對(괄목상대)가 되었다는 얘기다. 그는 1주일에 한 번씩 각계 전문가나 학자를 초빙하여 과외공부를 했다. 과목은 예컨대 통계숫자를 어떻게 보아야 하는가, 교통체계는 어떻게 정비해야 하는가 등이었다.


연설 통해 판세 뒤집을 수 있다는 자신감


1997년 2월, S일보 정치부 Y부장은 신한국당을 출입하는 부하기자로부터 『李仁濟 지사도 대권을 꿈꾼다』는 보고를 받았다. 李仁濟에 대한 여론조사 지지율이 5∼6%에 달했던 그 해 4월 어느 날, Y부장은 李仁濟 지사를 만났다. 다음은 Y부장이 기억하고 있는 당시 李仁濟씨의 말.

『(여론조사 지지율이) 두 자리(10%대)만 되면 경선과정에서 (대의원들을 상대로 한) 연설을 통해 (판세를) 뒤집을 수 있다』

李仁濟씨는 자신만만했다. 그는 신한국당의 主流였던 民主系의 「점지」를 받으려고 애썼다. 그때 民主系는 분열되어 있었다. 일찍이 YS가 「놀랄 만큼 젊은 후계자」라는 애드벌룬을 띄운 바 있었지만, 李仁濟 후보는 역시 「너무 새까만 후배」였다. 民主系에선 金德龍 후보를 지지하기도 하고, 李壽成 후보에게 기웃거리기도 하고, 李會昌 후보에게 줄을 서기도 했다. 7월 중순 여론조사에서 李會昌의 지지율은 40%를 기록, 본선 라이벌인 金大中의 25%를 압도하기도 했다.

李仁濟 후보의 善戰은 인상적이었다. 7월21일 신한국당 경선의 2차 결선투표에서 李會昌 후보는 6922표(60%)를 얻어 4622표(40%)를 득표한 李仁濟 후보를 누르고 당선됐다. 1차투표에서 李會昌 후보는 4955표를 얻어 1위를 차지했으나 과반수 득표에 실패, 2차 투표에 들어갔던 것이다.

1차 투표에서 李仁濟 후보는 1774표(14.7%)를 얻어 3위 李漢東(이한동) 후보를 여덟 표 차이로 누르고 결선투표에 진출했다. 그러나 전날 「4人연대」에 합의한 李漢東, 金德龍, 李壽成 후보의 지지표가 2차 투표에서 단결하지 못한 바람에 李仁濟 후보는 뒤집기에 실패했다.

결선 투표가 끝난 뒤 李仁濟는 『경선 결과에 깨끗하게 승복하고 大選에서 黨人(당인)으로서 최선을 다하겠다』고 말했다.

경선 불복-. 그것은 정치인 李仁濟에겐 앞으로도 그의 成敗에 불문하고 그림자처럼 쫓아다닐 멍에가 될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것이 자신의 흠으로 판단하지는 않는 것 같다. 다음은 李고문의 말.

『55%에 이르던 (李會昌 후보의) 지지율이 10%대로 떨어져 그것이 3개월 동안 지속되었다면 국민의 선고가 이미 내려진 것입니다. 그런데도 (대통령선거에 낙선한 李會昌 후보가) 나에게 책임을 뒤집어씌우는 것은 비열한 일입니다』

1997년 12·18 大選에서 그는 500만 표를 얻었다. 다음은 필자의 질문에 대한 李고문의 답변.

―500만 표의 의미를 무엇이라고 생각하십니까.

『500만 표는 버스 한 대 타고 돌아다니며 얻은 표입니다. 그것은 제가 얻을 수 있었던 표의 맥시멈(최대치)이 아니라 미니멈(최소치)이었습니다. 제가 국민신당을 창당(1997년 11월4일)하던 무렵, (여론조사에서 나에 대한 지지율이) 거의 1등으로 올라섰습니다. (金大中 후보 측과 李會昌 후보 측에서) 국민신당은 「YS의 위장신당」이고 (창당과정에서) 청와대로부터 200억원을 지원받았다고 모략했습니다. (양측의 협공에 의해) 워낙 얻어터지다 보니 (정치자금이) 1원 한 장 안 들어어와요. 1주일 사이에 (나에 대한) 지지율이 절반으로 떨어졌습니다. TV(정책)토론에 세 번 나갔는데, 그때마다 5%(포인트)씩 올랐습니다. 정상적으로 했으면 제가 당선되었을 것입니다』

―자금 사정은 어땠습니까.

『(후보홍보용) TV광고를 찍었지만, 한 번도 돌리지(방영하지) 못했습니다. TV(에 방영 되는) 후보 연설은 세 번밖에 못 했습니다. 연설하기 전에 돈을 예치해 놓고 10% 이상 득표만 하면 (선거 후에) 되돌려받게 되어 있었는데도 예탁금이 없어 TV연설을 세 번밖에 못 했습니다』

―돈은 얼마나 쓰셨습니까.

『50억원을 지원받았는데 (부족해서) 50억원의 빚을 졌습니다. 이만섭 (당시 국민신당) 총재가 선거 후에 빚을 갚느라고 애를 썼습니다』

그의 말대로라면 100억원으로 大選을 치렀다는 것이다. 선거기간 중 李仁濟 후보가 돈을 아껴 쓰는 모습을 보이기는 했다. 예컨대 수도권에서 이동할 때 李仁濟 후보는 수행원 몇 명과 함께 전철을 이용하기도 했다. 다음은 부산의 유력지 국제신문 성현철 기자(현재 정치부장)의 회고.

『李仁濟씨가 경선불복과 大選후보 선언을 하고 나서 얼마 후의 일입니다. 부산에 온 그가 만나자고 해서 나가 보니 그는 콜택시를 대절해서 빡빡한 일정을 소화하고 있습디다. 이런 것이 李仁濟씨의 경쟁력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100억원 선거비용으로 500만 표를 얻었다는 李고문의 말은 非현실적이다. 다시 李고문과의 문답.

―兆(조) 단위의 자금을 쏟아붓는 대통령 선거판에서 100억원을 쓰고 500만 표를 얻었다고 한다면 설득력이 있겠습니까.

『이번에 大選 후보로 나서면 공개적으로 자금을 모금하고, 예산을 세워놓고 지출해 선거비용의 투명성을 증명할 생각입니다』


「제2의 정치적 아버지」와 「湖南정권의 볼모」


李仁濟 고문은 『개혁은 이념이 아니라 과학』이라며 『TV 토론이 벌어지면 국가미래에 관해 설득력 있게 비전과 목표를 제시할 자신이 있다』고 밝힌 바 있다. 李仁濟 캠프의 참모들도 『경기지사, 노동부장관, 판사 등 3부 경험을 두루 거치며 국가경영 능력을 검증받았다』고 李고문의 본선 경쟁력을 강조한다.

李고문은 『경선에서 후보로 선출되면 한 두 달 안에 지지율에서 李會昌 총재를 앞지를 자신이 있다』고 장담하고 있다. 그는 『대통령이 국무총리의 뒷전에 물러서서 국정현안에 초연한 듯한 자세를 취해선 곤란하다』며 자신이 집권하면 『총리제를 폐지하고 4년 중임 정·부통령제로 개헌을 추진하겠다』라며 역동적인 리더십을 강조하고 있다.

그는 「反이인제 정서」가 퍼져 있는 對영남지역 선거전략에 관한 어느 네티즌의 질문에 대해서도 다음과 같은 자신감을 피력했다.

『상황은 자꾸 변하는 것입니다. 지난 大選을 거치면서 「李仁濟 찍으면 金大中 된다」는 악선전에 휘말려 지지도가 하락하였습니다. 이번 金大中 대통령의 총재직 사퇴를 계기로 우리 黨이 기존의 색깔과 이미지를 벗고 새로운 모습으로 다시 태어나면 모든 것이 달라질 것입니다』

李仁濟 진영에서는 『민주당 의원 118명 중 40여 명의 지지를 확보한 상태』라고 주장한 바 있다. 당내 최대의 계보다. 언론에서도 어느덧 李仁濟 고문을 「主流」라고 지칭하고 있다. 대통령후보 경선 전당대회 개최 일자도 主流의 뜻대로 오는 4월20일로 결정되었다.

李仁濟 고문이 경선·본선 과정에서 세대교체의 뒷바람을 받게 된다면, 민주당이 혁신에 성공하여 젊은 정당으로 탈바꿈한다면 李會昌·한나라당의 지지기반인 지역구도·이념구도를 약화시킬 수도 있을 것이다. 각종 여론조사의 20代와 30代 지지율에서 李仁濟는 모두 强勢다.

작년 12월 月刊朝鮮과 오픈소사이어티 조사에 따르면 20代 지지율은 44.2% 對 35.0%, 30代 지지율은 42.9% 對 36.3%로 李仁濟가 李會昌을 이겼다. 李고문은 그러나 「DJ의 볼모」란 앞바람을 안고 뛰어야 할 운명이다. 李고문은 실제적으로 東橋洞 조직에 업혀 있다. 東橋洞의 주인은 DJ다. 黨內 경선에 中立을 지키겠다는 DJ의 말을 믿는 사람은 별로 없다.

DJ는 李仁濟의 본선 경쟁력이 의심된다는 이유로 언제든 代案(대안)의 인물을 선택할 수 있는 카드를 쥐고 있다. 그러니까 李고문은 DJ에게 계속 충성해야 생존할 수 있다. DJ와 호남표의 지원 없이는 본선은 물론 경선의 경쟁력조차 위태롭기 때문이다. 月刊朝鮮과 오픈소사이어티가 실시한 같은 여론조사의 湖南 지지율에서 李仁濟는 72.3%를 기록, 7.2%의 李會昌을 압도했다(무응답은 20.5%). 이런 차원에서 李仁濟씨는 「호남의 볼모」다.

DJ정권은 스스로의 부패 때문에 사상 최악의 레임덕을 맞을 공산이 크다. 불분명했던 DJ의 對北觀(대북관)과 철학도 역사적 심판대에 오를 것 같다. 적어도 겉으로는 DJ를 「제2의 정치적 아버지」로 섬겨야 하며 (그리하여 YS와 DJ를 동시에 「정치적 아버지」로 모신다는 것은 우선 이념적으로 설명이 되지 않는다) 「湖南정권의 再창출」을 거부할 수 없는 李仁濟씨가 앞으로의 大選街道에서 어떤 궤적을 그려갈 것인지 주목거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