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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두주자 李會昌, 好機 속 위기

정순태   |   2003-03-17 | hit 1916

好機 속 위기의 李會昌


한나라당 李會昌(이회창) 총재가 好機 속 위기다. 그의 大選街道(대선가도)에 역풍과 순풍이 격렬하게 교차되는 상황이다. 이런 조짐은 지난 12월 초순부터 갑자기 두드러졌다.

12월 5∼6일, KBS와 TN소프레스(여론조사기관)가 실시한 여론조사의 李會昌 총재와 민주당의 선두주자인 李仁濟(이인제) 고문의 1 대 1 가상대결에서 李고문은 0.7%포인트 차이로 李총재에게 바짝 다가섰다. 李會昌 대 李仁濟의 지지율은 37.6% 대 36.9%였다.

12월7일 국민일보와 월드리서치가 실시한 여론조사(보도된 날은 12월10일)에서는 李총재가 李고문을 무려 17%포인트 격차로 앞섰다. 李會昌 대 李仁濟의 지지율은 51.9% 대 34.9%였다

이런 가운데 12월11일 실시된 중앙일보의 여론조사 결과는 李會昌 총재와 李仁濟 고문의 兩者대결에서 李총재가 9.1%포인트 앞서는 것으로 나타났다. 가상대결의 지지율은 李會昌 총재 49.5%, 이인제 고문 40.4%였다.

지난 12월12~13일에 月刊朝鮮이 金杏씨의 「오픈 소사이어티」에 의뢰해 실시한 조사 결과는 이러했다(괄호 안은 지난 10월8~9일 조사치).

▲李會昌 45.3%(43.1%):李仁濟 36.4%(29.2%) ▲李會昌 48%:盧武鉉 34.7% ▲李會昌 49.2%:鄭東泳 32.6% ▲李會昌 56.3%:韓和甲 24.2%

두 달 전에 비해 李會昌-李仁濟 지지율 격차는 13.9% 포인트에서 8.9% 포인트로 5%나 좁혀졌다. 李총재의 지지율이 떨어졌다기보다는 李仁濟 의원 측의 지지율이 많이 오른 때문이다.

KBS의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뚜렷한 현상은 종래의 李會昌 지지자들이 「무응답층」으로 돌아섰다는 점이었다. 영남권과 수도권에서는 「제3의 정치세력」의 등장을 바라는 여론이 강했다.

중앙일보의 여론조사에서도 李會昌 총재의 역할 수행에 대해 매우 회의적이었다. 13.9%만이 「잘하고 있다」고 응답했고, 「잘못하고 있다」는 응답이 35.3%였다. 도대체 그 사이에 무슨 일이 벌어졌기에 이런 역풍이 불어오는가?

10·25 재보선 참패 이후 민주당 내부에선 심각한 자기비판과 더불어 대통령 후보 쟁취를 노린 주자들의 레이스가 치열한 양상으로 개막되었다. 金大中 대통령은 「경선 중립」을 선언하면서 민주당 총재직을 버렸다. 아직은 정치9단 DJ의 의중을 속단할 수는 없다.

아무튼 DJ가 한 발 뒤로 빠지니까 反DJ의 대표주자 李會昌의 존재가치가 약화된 것이다. 그 동안 영남지역의 反DJ 정서에 업혀 왔던 李총재로서는 불안하다. 12월11일 중앙일보 여론조사를 보면 영남은 여전히 李총재의 아성으로 나타나기는 했다. 李會昌-李仁濟 양자대결에서의 지지율은 대구·경북 73.9% 대 23.7%, 부산·경남(65.5% 대 24.1%)였다. 그러나 「영남후보」가 나서는 3者구도로 짜여질 경우 李총재의 大選가도는 험난해질 수밖에 없다.

李총재는 DJ를 「帝王的 대통령」이라고 비판해 왔다. 李총재도 어느덧 「帝王的 야당총재」라는 비판을 받고 있다. 그는 너무 많은 政敵을 만들어 왔다. 그들의 10면포위와 집중포화로 李총재에 대한 신비감은 약화되고 약점만 부각되고 있다. 『속 좁고, 싸움만 하고, 代案이 없다』는 따위다.

한나라당 내부에서도 『총재가 너무 안이했다』는 비판이 나돌고 있다. 10·25 재보선 압승에 도취되어 방향감을 상실했다는 뜻이다. 李총재가 승세를 타고 계속 金大中 정권의 부정부패 등 失政을 계속 추궁해야 할 판에 「겸손한 야당」을 강조했던 것은 사실이다. 너무 점잖을 빼다가 표적을 놓친 셈이다.

지난 大選에서 李會昌 후보는 IMF 사태를 초래한 YS정부의 失政에 대한 연대책임으로부터 피해갈 수 없었다. 그것을 金大中 후보가 집요하게 추궁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李총재는 그런 뼈아픈 경험을 反面敎師(반면교사)로 삼지 못했다.

고지를 점령하자마자 추격에 들어가야 하는 것은 보병전술의 기본이다. 그래야만 戰果(전과)의 확대가 가능하다. 그런데도 李총재는 10·25 재보선 승리 후 금쪽 같은 시기를 효율적으로 관리하지 못했다. 무려 40일간 청주·대구·울산 등의 지방행사와 러시아·핀란드 방문 등 우선순위가 떨어지는 일들에 주력했던 것이다.

러시아 방문 때는 李會昌 총재-푸틴 대통령 회담을 추진했으나 불발에 그쳤다. 당내 외교통인 鄭在文 의원이 선발대로 모스크바로 날아가 회담을 교섭했지만, 크레믈린宮 측은 난색을 표명했다. 『크레믈린宮에서는 외국 야당 당수를 접견하지 않는 것이 관례』라고 했다. 李총재가 푸틴을 서울에서 이미 한 번 만났는데, 모스크바까지 가서 만나지 못하랴―이런 막연한 기대가 무산되었던 것이다. 李총재는 두마(러시아 의회) 의장과 만났지만, 국민의 관심을 끌기에는 함량미달이었다.


JP의 격분

李총재의 외국 방문중 국내에서는 교원 정년연장안과 愼承男(신승남) 검찰총장 탄핵소추안이 여-야 간의 핫이슈가 되고 있었다. 교원 정년연장안의 국회통과는 한나라·자민련 정책공조의 첫 추진목표였고, 愼承男 검찰총장 탄핵안은 大選을 앞두고 검찰의 정치적 중립성 여부를 결정하는 기세싸움이었다.

수행기자들도 李총재의 방문외교 취재에는 열의가 없었다. 그 보다는 국내 이슈들에 대한 李총재의 코멘트를 졸랐다. 李총재는 교원 정년 1년 환원과 검찰총장 탄핵소추에 대한 발언 수위를 높여 갔다. 『대통령이 다 된 것처럼 행세한다』는 말이 떠돌았다. 민주당 韓光玉 대표는 『야당 총재가 외국에 나가 있으면 외교를 해야 한다』고 맞받았다.

李총재는 귀국 후에야 교원 정년연장에 대한 국민 여론이 부정적임을 감지했다. 결국 한나라당은 自民聯이 더 적극성을 보였던 교원 정년연장안를 포기했다.

한나라-자민련 정책공조는 파열음을 내기 시작했다. 姜昌熙 의원의 한나라당 大田 중구 지구당 개편대회로 감정의 골이 깊어졌다. 「李會昌 대통령」이란 연호를 받으며 깃발을 꽂는 李총재의 行步로 「홈그라운드」의 상실의 위기에 몰린 JP의 심기가 잔뜩 틀어진 것 같다. 自民聯은 愼承男 검찰총장 탄핵소추안에 대한 국회 표결에서 民主黨 편에 섬으로써 한나라당에 보복했다.

李총재는 12월8일 한나라당 의원총회에서 『기교나 변술을 부리는 데 누가 JP를 당할 것이냐』라며 JP의 정치적 곡예에 분개했다. 12월10일 기독교 방송과의 인터뷰에서는 李총재의 對JP 비난이 한 걸음 더 나아갔다. 『(愼承男 검찰총장) 탄핵안에 대해 말을 바꾼 것은 공당으로서 있을 수 없는 일』이라면서 『우리 黨의 大田집회 때문에 그랬다면 소아병적인 것』이라고 직격탄을 날렸다.

JP가 발끈했다. 李총재를 가리켜 『거짓말을 밥 먹듯이 하고 신의가 뭔지도 모르는 사람은 대통령이 될 수 없다』고 원색적인 공격을 날렸다.


너무 일찍 선두로 나서 집중공세의 표적돼

競馬(경마)에 출전하는 말들은 그 走行(주행) 특성에 따라 先行馬(선행마)와 追入馬(추입마)로 대별된다. 先行馬는 초반 레이스를 주도한다. 先行馬가 끝까지 선두를 지키며 결승선에 골인한다면 家産(가산)까지 탕진하는 경마 마니아들까지 양산되지는 않을 것이다.

경마를 미치도록 재미있게 하는 것은 뒷심이 센 追入馬 때문이다. 追入馬는 중반 레이스까지는 중간 그룹에서 달리다 마지막 코너에서 선두그룹에 끼어들어 혼전을 벌이다가 최후의 直線走路(직선주로)에 접어들면 어느덧 앞선 말을 하나 둘 뒤로 제치고 총알같이 날아가 결승라인에 코를 들이박아 버린다.

물론 경마장에서 先行馬가 시종일관 발군의 질주로 우승하는 경우도 없지는 않다. 그러나 追入馬의 승률이 先行馬의 그것보다 훨씬 높다. 先行馬는 심한 견제를 받게 마련이다. 2002년 大選 레이스는 어떤 모습으로 전개되어 결승선에 도달할까.

大選을 1년 앞둔 현재까지 거론된 주자들 가운데 한나라당 李會昌 총재는 여전히 최강세다. 여론조사에서 그 누구를 李會昌 총재의 「對抗馬(대항마)」로 내세워도 李총재는 전승을 기록해 왔다.

현재 집권 민주당은 DJ 이후의 후보와 당권을 놓고 치열한 권력투쟁이 진행되고 있다. 정계의 용어로는 場이 섰다. 場이 선 곳으로 국민들의 눈길이 쏠리게 마련이다.

특히 민주당의 대통령후보 경선 방식이 상당한 바람을 예고하고 있다. 전국 16개 시·도에서 당원은 물론 일반국민까지 참여하는 미국식 프라이머리(예비선거)를 도입하려는 것이다. 경선레이스가 극적인 요소를 갖출수록 그 승리자는 빛이 나게 마련이다.

반면 한나라당은 사실상 無風(무풍)지대와 다름 없었다. 李총재는 오랫동안 2002년 大選의 常數(상수)였다. 이런 모습은 李총재에게도 마이너스다. 드디어 12월11일, 朴槿惠(박근혜) 부총재가 처음으로 한나라당 경선후보 출마를 선언했다. 李총재 측에선 일단 『환영한다』는 반응을 보였다. 경선의 모양을 갖추려면 도전자가 나서야 하는 것이다.

朴槿惠씨라면 선거유세장에서 청중을 가장 많이 모으는 인물이다. 12월11일 중앙일보의 여론조사에서도 이런 인기도를 반영하듯 상당한 강세로 나타났다. 李仁濟 고문과 朴槿惠 부총재의 가상 兩者 대결에서 朴부총재가 39·7%의 지지율로 선전했다. 李고문(49·8%)에 10·1% 포인트밖에 뒤지지 않았다.

그런 朴부총재가 『이제 3金이 문제가 아니라 1인 보스체제가 문제』라며 『黨이 변해야 국민의 지지를 받는다』고 말했다. 민주당처럼 경선의 룰을 바꾸라는 얘기다. 한나라당 경선에서는 朴槿惠씨 이외에도 1∼2명의 더 가세하여 李총재에게 도전할 것으로 예상되고 있다.

현재의 당내 판도에서 朴槿惠씨 등의 도전이 위력적일 수는 없다. 李총재의 黨 지배력이 거의 절대적이기 때문이다. 결과가 뻔한 게임에 場이 설 턱이 없다. 그렇게 된다면 이슈를 先占당한 한나라당 후보의 본선 경쟁력이 떨어질 가능성이 있다.

한나라당으로서도 뭔가 대응책이 필요해졌다. 그 방안의 하나로 「대통령 당선 후 大權과 黨權의 분리 문제」가 검토되고 있다. 이것은 「후보와 당권 분리」를 추진하고 있는 민주당의 추진 방향에 비해 개혁성이 떨어진다. 그 타당성이야 어떻든 「3金 이후의 시대정신」은 권력의 분할 쪽으로 움직이고 있다.


한나라당內 잠재적 라이벌들

李총재가 落馬(낙마)할 경우 경쟁력 있는 代案의 인물로는 朴槿惠 부총재, 崔秉烈 부총재, 洪思德 의원 등이 손꼽힌다. 朴槿惠씨는 선친(朴正熙 前 대통령)의 후광을 업고 大權行步를 해오긴 했지만, 아직도 공개적인 검증 절차를 거치지 않았다. 이번 경선 출마 선언조차도 『차차기 포석을 위한 파워 테스트와 고지 선점의 측면이 없지 않다』는 평가를 받기도 한다.

崔秉烈씨는 李총재의 지원으로 지난 부총재 경선에서 1위를 했지만, 어느 사이에 「李총재의 부담스런 존재」가 되어 있다. 李會昌 캠프에서는 「대권·당권 분리 주장의 원조」를 崔부총재로 지목하고 있다.

그는 PK 출신으로 서울시장을 맡아 행정솜씨를 보였고, 16代 총선 때 「新정치1번지」 서울 강남甲에서 선출된 4選의원이다. 한나라당 사무국 직원들에게도 인기가 있는 편이다. 崔부총재는 『지금은 李총재를 중심으로 단결하여 정권을 되찾아 야 할 때』라는 입장을 밝히고 있기는 하다.

對국민 인지도에서 朴槿惠 의원에 버금가는 洪思德 의원은 차기 서울시장을 겨냥하고 있어 李총재에게 도전할 생각은 없는 것으로 전해진다. 姜在涉 의원도 「TK(대구·경북)의 희망」으로 손꼽히지만, 차차기를 선언한 상태다.

金德龍 의원과 李富榮 부총재는 非주류 노선을 걸으면서, 민주당의 鄭大哲·鄭東泳·김근태 고문과 함께 「정당의 1인지배 반대」를 위한 모임을 갖는 등 李총재에 대해 매우 껄끄러운 몸짓을 보이고 있지만, 李총재 주변에선 의외로 관대한 반응을 보였다. 그것이 신당 창당의 전주곡이 아닌가 하는 일부 관측에 대해서도 실현성에 의문을 표시했다. 金德龍 의원이나 재야 출신의 李富榮 의원이 설사 탈당해도 세력화하기는 어려운 상황이다. 경선 출마문제에 대해 金德龍 의원은 『오는 2월에 밝히겠다』, 李富榮 부총재는 『고민중』이라는 반응을 보였다.


『당직자가 곧 實勢』

李會昌 리더십의 요체는 무엇인가. 다음은 SBS TV 8시뉴스 앵커 출신으로 한나라당 대변인을 지낸 孟亨奎(맹형규) 의원의 말.

『李會昌 리더십은 독특하다. 개인적 캐릭터에 의해서가 아니라 시스템으로 조직을 움직인다. 나도 당직을 맡았을 때 총재와 가까웠지만, 당직에서 떨어지니 그만이더라. 총재는 黨 공식기구를 통해 일하게 하고 나름대로 때가 되면 사람을 바꾼다. (당내에) 계파가 없으니까 바꿔도 「왜 우리 계파는 배제하는가」 하는 말이 없다』

한나라당 출입기자들은 李총재의 용인술을 「물레방아式 인사」라고 표현하고 있다. 돌아가면서 당직을 맡겨 능력과 역할을 살핀다는 뜻이다. 그러면 李총재를 가까이에서 관찰하는 사람들의 李會昌 觀은 어떨까? 다음은 총재실과 바로 마주 보는 방에서 일하는 한나라당 총재 언론특보 양휘부씨와의 문답.

―총재를 자주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측근 아닌가.

『남들은 우리 같은 사람을 측근이라 하지만, 실제로 측근은 없다. 이것이 총재의 장점이자 약점이다』

―李총재가 자신과의 학연을 중시한다는데.

『총재가 (자신의 모교인) 경기高-서울大법대 출신이 아니면 인정해 주지 않는다는 말은 모략이다. 우리 黨에선 당직자가 곧 實勢(실세)다. 하순봉(진주高-서울사대) 부총재, 김기배(경기高-고려大) 사무총장, 이재오(영양高-중앙大) 원내총무, 김만제(경북高-美 덴버大) 정책위의장 등이 총재와 학연으로 얽혀 있는 것 아니지 않는가』

―劉승민 여의도연구소장이 총재의 연설문 작성을 전담하고 정책보좌뿐만 아니라 정치보좌까지 관여한다는 얘기가 나돌고 있다 .

『그렇지 않다. 연설문은 10명쯤의 스태프들이 검토한 뒤 초안을 만들어 총재에게 올린다. 여의도연구소는 黨의 공식기구다』

―16代 총선을 앞두고 金潤煥·李基澤씨 등 중진들을 한꺼번에 공천에서 배제했다. 李총재는 왜 사방에 적을 만드는가.

『그렇게 해서 완벽한 지배체제가 가능해진 것이다. DJ의 파상공세 속에서 지배체제를 확립해 두지 않았다면 우리 黨이 분열되었을 것이다』

―JP에게 원내교섭단체를 만들어 주지 않은 것에 대해 당내에서도 「실책」이라는 지적이 있었다는데. 어떤 논의과정이 있었는가.

『崔秉烈 부총재 등이 건의했지만, 李총재가 거절했다. 3金 청산이란 자기 원칙에 맞지 않았기 때문이다. 총재는 자신의 원칙에 충실하다』


『한 박자 늦어도 분명한 결단 내려』

―李총재는 판사 시절의 습관에 따라 요즘도 보고서 같은 것을 보따리에 싸 갖고 집에 가서 꼼꼼하게 검토하는가. 그 때문에 빠른 대응하지 못하고 결심이 한 박자 늦다는데.

『그렇지만 분명하게 결정을 해준다』

―李총재의 노선은 보수인가, 진보인가.

『李총재의 스탠스는 진보냐, 보수냐의 관점에서 볼 것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그런데 속박당하는 것을 싫어한다. 실용주의에 입각한 합리주의자다. 李총재는 현실에 바탕을 둔 판단을 제일 잘 내리는 분이라고 본다』

―李洪九·李壽成·李會昌씨는 모두 金泳三 대통령 시절에 총리를 역임하고 정계에 들어왔다. 세 분 중 李총재만(정치적으로) 살아남은 까닭은 무엇이라고 보는가.

『돌파력과 권력의지가 강렬했던 것도 그 이유 중 일부라고 생각한다』

다음은 한나라당 총재보좌역 권영진씨와의 문답.

― 李총재를 만난 많은 의원들은 「총재가 무엇 때문에 만나자고 했는지 모르겠다』는 말들을 한다. 왜 그런가.

『총재는 자기를 도와 주면 어떤 당직을 주겠다는 등의 거래를 하지 않는다. 대화상대에게 총재 자신의 구상이나 비전을 설명하면서 그 속에 당신의 역할이 있을 수 있다는 열린 선택지만 제시한다. 3金의 거래형 리더십과 전혀 다른 선택형 리더십이다. 李會昌 총재는 못 지킬 약속 같은 것은 아예 하지 않는 만큼 신의를 잃어버리지 않는다』

―그 대신에 李총재의 「떡」이 적은 것 아닌가. 李총재는 인정이 없다고들 한다.

『총재의 리워드(보답)가 적은 것은 아니다. 예컨대 尹汝雋(윤여준) 黃祐呂(황우려) 高興吉(고흥길) 李元昌(이원창) 의원 등은 가장 짧은 기간에 역할을 하고 원내로 들어가지 않았는가. 총재가 은혜를 모른다는 소문은 말도 안 된다. 다만 「고맙다」고 말하는 등의 잔정 표현에 익숙하지 않을 뿐이다』

―李총재는 정치적 언어구사에 서툴다는 평을 받고 있다. YS는 DJ의 對北 저자세 교섭을 빗대 金正日은 「회장」, 金大中 대통령은 「전무」라는 간단한 표현으로 李총재의 역할을 대신하지 않았는가.

『우리 총재가 제시한 「相生의 정치」는 이제 金大中 대통령도 따라 하는 시대적 話頭가 되지 않았는가』

다음은 오랫동안 李會昌 총재의 수행비서를 지낸 金友錫 총재실 차장과의 문답.

―李총재의 얼굴을 보면 마치 武林의 高手 같다.

『지난 러시아, 핀란드 방문 때 젊은 수행기자들은 입술이 부르트고 감기에 걸린 사람도 있었는데, 총재는 10분도 빼기 어려운 빡빡한 일정을 잘 소화했다. 평소에는 아침 6시 전에 기상하고 조찬 모임이 있으면 7시 쯤 집을 나선다. 정계에 나서기 전에는 러닝도 하고 등산도 했다. 아침 식단을 보면 반찬은 서너 가지, 멸치졸임이 고정 메뉴이고 小食을 한다』

―왜 총재는 가회동 집으로 기자들이 찾아오는 것을 싫어하는가.

『최근에는 2∼3개월에 한 번씩 출입기자 15명쯤 초청해 대화를 한다. 가회동 집은 거실과 안방이 딱 붙어 있어 손님 맞기에 편안하지 못한 구조다』

―李총재의 재산은 어느 정도인가.

『2000년 12월31일 현재, 총재 부부의 재산은 11억원으로 등록되었다』

―군대 안 간 대신 소록도 나환자촌에서 자원봉사를 했던 李총재의 장남 正淵(정연)씨는 왜 일찍 돌아왔는가.

『애당초 기간을 정해 놓고 들어간 것은 아닌데, 6개월 남짓 일했다. 그런데도 「낚시만 했다」는 루머가 있어 현지에 가서 알아보니 「성실하게 봉사했다」고 하더라』

―경기高 출신들로 이뤄진 100人 위원회, 부국팀 등 李총재의 사조직이 가동되고 있고, 부국산악회도 뜨고 있다는 소문이 나돌고 있다.

『지난 大選에서 낙선하고 마땅한 거처가 없었을 때 李총재(당시 명예총재)가 잠시 정동에다 사무실을 내고 여기에 윤여준·이원창씨 등이 드나든 적은 있다. 그러나 李총재가 총재로 복귀한 뒤 사조직 사람들에게 총재특보, 보좌역 등의 직책을 주어 공조직으로 불러들였다. 총재는 철저하게 제도와 시스템에 의해 黨을 움직인다』


원칙의 사나이

YS 집권 시절에 대통령비서실장을 지낸 朴寬用 의원에게 李會昌 총재의 장점을 꼽아 줄 것을 요청했다. 다음은 朴의원의 말.

『돈에 깨끗하고 머리가 좋다. 내 계보, 내 사람을 챙기지 않는다. 원칙을 지키며 치밀하고 계획적이다. 지역감정 극복에 제일 나은 인물이다. 정경유착을 하지 않을 사람이다』

다른 한나라당 의원들도 대체로 朴의원의 말에 동의했다. 그러면 정치지도자로서 李총재의 단점은 무엇일까? 역시 朴의원의 답변.

『하늘에서 내려다 보아야 하는데, 아래로부터 위로 쳐다 본다. 그러다 보니 숲을 보지 못할 우려가 있다』

각종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李총재의 단점은 첫째가 「독선적이다」, 둘째가 「차갑다」라는 것이다. 취재과정에서 접촉한 한나라당 출입기자들도 『대중정치인으로서 李총재의 인상이 온후하지 않다』는 점에 대해서는 별로 이견이 없었다. 『이것이 李 총재의 지지도가 한나라당에 대한 지지도 보다 낮은 이유가 아니겠느냐』고 말하기도 했다.

朴寬用 의원은 『李총재의 장점은 그의 단점을 덮고도 남는다. 문제는 李會昌 리더십이 시대적 요구에 부합하느냐는 점이다』라고 말했다.

다음은 S대학교 행정학과 P교수의 말.

『광복 이후 우리 지도자들의 리더십은 부정적 측면도 있었지만, 대체로 시대적 요청에 조응했다. 그것을 부정한다면 한국의 경제성장와 민주화를 설명할 수 없다. 李承晩(이승만) 대통령은 독립운동으로 형성된 막강한 카리스마로 나라의 방향을 잡았다. 朴正熙 대통령은 힘의 논리로 밀어붙인 경제개발로 가난을 추방했다. 金泳三-金大中 대통령의 집권기간에 대해 「잃어버린 10년」이라는 평가도 없지는 않지만, 민주화에 공헌한 지도자의 집권은 역사의 대세였다. 이제는 법과 제도로써 흐트러진 사회 질서를 바로잡을 시기가 되었다고 본다』

한나라당 崔秉烈씨 총재는 李총재를 한마디로 「맨 오브 프린시펄」(원칙의 남자)이라고 표현했다. 李會昌의 원칙주의가 시대정신의 主流를 이룰 수 있을 것인가. 아직은 미지수다.


뽀뽀하는 대쪽

한나라당 출입기자들 가운데 가장 젊은 사람은 세계일보의 곽민영씨다. 곽기자는 1976년에 태어난 신세대 여성이다. 그는 李會昌 총재가 빠르게 변신하고 있다고 말했다.

『제가 처음 한나라당을 출입하던 5개월 전만 해도 李총재는 의외로 부끄럼을 타는 남자로 보였어요. 民生현장을 살핀다고 재래시장에 가서도 남의 가게에 선뜻 들어가지 못하고 가게 앞에서 만난 상인들과 어정쩡하게 악수를 하는 정도였죠. 이제는 크게 달라졌어요. 가게 안으로 쓱 들어가 그 안에서 마주친 아이의 뺨에다 뽀뽀까지 하더군요』

李총재가 부드러워졌음은 이 기사의 취재과정에서도 확인되었다. 지난 10월31일 충북중소기업지원센터 2층 강당에서 열린 李총재와 지방대학생들과의 간담회 석상. 노타이 와이셔츠 차림의 李총재를 중심으로 충북지방 대학생 대표들 30명이 둘러앉은 모습은 화기애애했으나 주제가 지방大 청년실업문제였던 만큼 대화의 내용이 마냥 부드러울 수 없었다.

어느 대학생은 『李총재는 우리처럼 취업 때문에 고민해 본 적이 있느냐』고 물었다. 유복한 가정에서 태어나 일류대학 재학 중에 고등고시에 합격하여 20代에 벌써 「영감님」이라는 존칭을 받은 李총재가 지방大 출신 취업희망자에 대해서는 기업에서 원서도 받아 주지 않는 오늘의 비참한 현실을 피부로 느끼기나 하겠느냐는 얘기인 셈이다.

李총재는 순발력이 있었다. 그의 답변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나도 학창시절에 신문배달을 했다. 부산 피난시절에는 우체국의 말단 노무직으로 취업하였는데, 도시락을 싸올 수 없는 박봉이어서 점심시간에 혼자 나가서 수돗물로 배를 채웠다. 오늘의 청년실업 문제는 우리 기성세대의 잘못이다. 취업전선에서 지방大 출신이 수도권 대학 출신에 비해 푸대접을 받지 않도록 제도보완에 노력하겠다. 여러분들도 수도권 대학 출신에 비해 능력이 떨어지지 않도록 피나는 노력을 해야 한다』

李총재는 답변 중 구체적 숫자가 막히면 『어젯밤에 외었는데 벌써 잊었다』고 말하는 등 재치를 부렸다. 머리는 노랗게 물들이고 귀고리를 단 데다 최근 유행에 따라 양말을 신지 않고 구두를 신은 남자 대졸예정자는 『총재님을 만나러 급하게 나오느라고 양말을 신지 못했다』고 양해를 구하면서도 좀 거북한 질문을 거듭했다. 그 학생이 만약 취업을 위한 인터뷰 때라면 그런 차림을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어른들의 눈으로는 밉상이었다.

李총재는 구두 위로 맨살이 드러난 그 학생을 흘끔 보고도 『미남인데』라며 눙쳤다. 그리고는 온갖 숫자를 동원해가며 성의껏 답변했다. 이어 그 학생에게 『취업원서를 몇 군데 넣었느냐』고 묻고 『두 군데』라고 하자 『열 군데라도 넣어보라』고 격려했다.

李총재의 숙제는 「좀 더 부드럽게」인 것 같다. 한나라당 총재실 입구에는 깃 없는 라운드티를 입고 활짝 웃는 모습의 李총재 사진이 걸려 있다. 그의 애창곡은 「만남」, 「동행」이었는데, 여기에 「친구여」도 추가되었다. 모두 부드러운 가요다.


로마제국의 哲人황제를 존경

인간 李會昌은 농담 같은 것에 익숙지 않는 「경건한 사람」이다. 『존경하는 인물이 누구냐』는 질문에, 李총재는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고 답변한 적이 있다.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라면 로마의 전성기에 등장한 5賢帝(현제) 가운데 한 사람으로 哲人君主(철인군주)다.

이것은 대중정치인을 지향하는 사람으로선 별로 플러스가 되는 답변이 아님은 물론이다. 정치인에게 존경하는 인물을 물으면 대개의 경우 무난하게(?) 한국 역사상의 위인들 중 한 사람을 고른다. 예컨대 朴正熙 대통령이 가장 존경한 인물은 李舜臣 장군이었고, 대통령 후보 시절의 YS와 DJ는 모두 『金九 선생』이라는 똑같은 대답을 했다.

李총재는 고교시절부터 아우렐리우스 황제에게 기운 사람이다. 왜냐하면 그가 가장 감명깊게 읽었다는 책도 마르쿠스 아우렐리우스가 쓴 「명상록」과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이 저술한 「로마제국쇠망사」이다.

李會昌이란 인물을 탐구하기 위해선 마르쿠스 황제부터 이해할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번 취재과정에서 먼지를 뽀얗게 뒤집어쓴 채 책장 속에서 잠들어 있던 「명상록」과 「로마제국쇠망사」를 다시 끄집어내어 정독할 수밖에 없었다.

마르쿠스 황제는 『철학자가 지배하든지, 지배자가 철학을 하든지 해야만 나라가 번영한다』는 플라톤의 말을 신봉했다. 명문가 출신인 그는 열 살 때부터 스토아 철학의 교양을 쌓기 시작하여 경건하고 검소한 생활로 일관했다. 로마제국의 코스모폴리타니즘, 세계종교, 세계법 등의 사상적 모태는 스토아 철학에서 연원하고 있음을 잘 알려진 사실이다.

마르쿠스의 신체는 원래 허약했으나 단련을 통해 복싱과 레슬링 등 스포츠에도 뛰어났다. 李총재도 소시적에 샌드백을 쳤다. 마르쿠스는 19세에 재정관, 20세에 집정관으로 임명되었고, 25세 때는 안토니우스 피우스 황제의 딸과 결혼했다. 황제 즉위 후 마르쿠스는 스토아 철학에 바탕을 두고 스스로에는 엄격하면서도 로마의 번영에 지성을 다했다. 「로마제국쇠망사」에서는 마르쿠스를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마르쿠스의 미덕은 소박, 근면하다는 데 있었다. (중략) 그는 자기 자신에 엄격하고 다른 사람의 과오에 관대했으며, 모든 국민들에게 정의와 자애를 베풀었다>

그럼에도 마르쿠스는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고뇌했다. 李총재도 『대쪽이 갈대로 변했다』는 비난에 고민하지 않을까?


고교 시절의 희망은 역사연구가

필자도 李총재처럼 고교시절에 「명상록」을 읽기는 했다. 너무 고답적이고 교훈적인 것이어서 그때는 전혀 재미를 느끼지 못했다. 그러나 다시 읽은 「명상록」은 역시 명상을 하면서 밑줄도 치고 읽어야 하는 명저였다. 마르쿠스는 1800년 전의 사람이다. 그럼에도 그의 말은 현대인에게 전혀 생경하지 않다. 수사학의 솜씨도 탁월하다.

그러나 세상에는 완전한 사람은 없다. 마르쿠스의 아내는 수많은 情夫를 둔 로마 제일의 바람둥이였다. 아내의 음행을 몰랐던 사람은 마르쿠스 자신뿐이었다고 한다. 「명상록」에서 그는 『성실하고 부드럽고 검소한 아내를 내려 주신 神에게 감사한다』고 쓰고 있다.

마르쿠스 황제의 최대 실책은 후계자를 잘못 선택했다는 점이었다. 그는 5賢帝 중 유일하게 자기 아들 콤모두스에게 황제의 자리를 넘겨 준 인물이다. 콤모두스는 잔혹하고 어리석고 의심많고, 男色에 빠진 최악의 황제였다. 최근 국내에서 개봉된 영화 「글래디에이터(검투사)」에서 폭군으로 등장하는 황제가 바로 콤모두스다.

李총재는 고교시절에 역사연구가가 되겠다는 희망을 가졌던 사람이다. 그런 그가 왜 서울大 법대로 진학했는지 그 까닭을 밝힌 바 없다. 법조인이었던 아버지 李弘圭옹의 영향 때문인 것 같다.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李총재의 부인 韓仁玉 여사는 『사춘기 때 아버님(李弘圭옹)이 음해 모략당하신 일 때문에 그렇게 모든 일을 소홀히 생각하지 않는 것 같다』고 말했었다.

李총재의 自傳的(자전적) 수필집 「아름다운 원칙」에 따르면 舊制 경기중학교 4학년(현재의 고교 1년) 때 검사였던 아버지가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수갑을 차고 검찰수사관들에 의해 연행되었다. 청렴 강직했던 아버지가 청주지검 검사로 있을 때 미군 구호물자를 횡령한 현직 충북도지사를 상부의 명령을 거부하고 구속한 데 대한 정치적 보복을 당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대단한 충격이었다.

아버지가 구속당한 후 두 달 후에 6·25 전쟁이 일어났다. 부산으로 피난갔던 李會昌 학생은 아버지의 친구인 부산체신청장에게 도움을 청해 5급(지금의 9급) 20호봉의 말단 노무직으로 취업해 일가족의 생활비를 벌어야 했다.

그는 취업 때문에 부산 구덕산 기슭에 임시로 개설된 경기고교에 다닐 수도 없었다. 아버지가 곧 검찰의 공소취소로 석방되고 검사로 복직하면서 李會昌의 소년家長 역할은 짧게 끝났지만, 그에겐 법과 正義라는 문제가 심각한 화두로 다가왔음직도 했다.

경기고교에 복교한 李會昌 학생은 변론부장을 맡는 등 적극적인 고교생활을 마치고 부산 피난지 서울大 법대에 진학했다. 대학 4학년 때는 고등고시 사법과(제8회)에 합격하고 졸업 후 공군에 입대하여 3년간 법무관으로 복무하고 대위로 예편했다. 예편 후에는 인천지원 판사를 잠시 거쳐 서울지법 판사로 근무했다. 그 시절의 동료 판사가 지금은 정치노선을 달리하고 있는 李漢東(이한동) 국무총리다.

두 사람은 버스요금까지 탁탁 털어 술을 마시고 서울 남산 기슭 회현동에 있던 李會昌 판사의 집에까지 걸어가서 맥주로 입가심까지 했던 사이였다. 그 시절의 인연으로 지금도 사적으로 만나면 서로 말을 놓는다. 李총재의 주량은 의외로 세다고 한다.


少數意見의 진실

李총재는 판사로서 엘리트 코스를 걸었다. 1965년 서울고법 판사, 1970년 영등포지원 지원장, 1971년 서울민사지방법원 부장판사, 1976년 서울고법 부장판사, 1980년 법원행정처 기획조정실장을 거쳐 1981년 대법원 판사(지금의 대법관)으로 발탁되었다.

全斗煥(전두환) 정권의 강권통치가 시퍼렇던 시절에 李會昌 대법원판사는 소수의견을 서슴지 않고 내어 「소신 있는 법관」으로서 법조계의 인망을 모았다. 그 중 하나가 박세경 변호사 사건이었다. 1980년 5월1일 DJ의 동교동 집에서 불법집회를 가진 혐의로 체포된 박세경 변호사는 군법회의에서 징역 2년에 집행유예 3년을 선고받았다.

고등군법회의에서 항소심이 진행중이던 이듬해 1월 계엄이 해제되었고, 그는 일반법원에서 재판해 줄 것을 요청했으나 기각되었다. 『대통령이 필요하다고 인정될 때 군법회의 재판권을 1개월에 한하여 연기할 수 있다』는 舊계엄법이 그 근거였다.

李會昌 판사는 군법회의 재판권 연장에 관한 舊계엄법 규정이 위헌이라는 의견을 냈으나, 판사들 사이에 의견이 엇갈려 박세경 사건이 대법원 전원합의체로 넘어갔다. 결과는 상고 기각 결정이었다.

그때의 다수의견은 『계엄 후 사회질서가 정상을 되찾았다고 해도 일반법원이 미처 기능 회복을 하지 못하면 일시적으로 군법회의 재판권을 인정할 필요성이 있다』는 것이었다. 李會昌 판사는 『계엄법이 해제된 시기에 민간인을 군법회의에서 재판하는 것은 명백한 기본권 침해』라고 강하게 반발했다.

그런 소수의견을 많이 냈기 때문에 그는 「소수의견자」와 「대쪽」이라는 별명을 얻게 되었다. 소신을 지킨 그는 예상대로 대법원 판사를 연임하지 못하고 1986년 4월 법원을 떠나 변호사의 길을 걸었다.

6共 출범으로 민주화가 진전된 1988년 7월, 그는 대법원 대법관으로 다시 컴백하여 중앙선거관리위원장도 겸임했다. 1989년 東海市 국회의원 再선거가 치러졌다. 盧泰愚(노태우) 정권에 대한 중간평가의 성격이 짙었던 선거였다. 온천마다 「선심관광」을 온 유권자들이 들끓었고, 입당원서와 맞바꾼 돈봉투가 공공연히 오갔다.

李會昌 중앙선거관리위원장은 투표일 1주일 전 후보 전원을 불법선거 혐의로 고발했다. 우리나라 선거사상 처음 있는 일이었다. 각 黨 총재에게는 경고장을 발송했다. 그런데도 선거가 끝난 후 각 黨 총재들은 고발당한 후보들을 불러 선전했다고 격려했다. 李會昌 위원장은 분노했다. 盧泰愚 대통령에게 짤막한 사퇴이유서를 내고 위원장직을 그만두었다.


『감사원은 대통령으로부터 독립된 지위』

1993년 2월 초순 金泳三 대통령당선자가 점심을 먹자고 남산 하얏트 호텔 음식점으로 李會昌 대법관을 초청했다. YS와는 초면이었다. 특유의 친화력으로 반갑게 인사말을 건넨 YS는 단도직입적으로 본론을 끄집어냈다.

『李대법관께서 감사원을 맡아 주십시오』

그때까지 李會昌씨의 꿈은 대법원장이었던 것 같다. 그는 망설였다.

『이틀만 생각할 시간을 주십시오』

이틀 후 그는 YS에게 서면으로 수락의 뜻을 전달했다. 다음은 감사원장 취임사에서 밝힌 그의 소신이다.

『감사원은 직무상 대통령으로부터도 독립한 지위에 있다. 그러므로 어느 누구의 부당한 간섭도 받지 않을 것이다』

그의 첫 行步는 더욱 놀라웠다. 청와대를 시작으로 감사원의 「성역 없는 감사」가 벌어졌다. 다음의 감사대상은 국방부의 율곡사업이었다. 1970년대 초부터 1990년까지 엄청난 돈을 들여 추진되어 왔던 대규모 전력증강사업, 즉 율곡사업은 그 동안 갖가지 풍문과 의혹의 대상이었으면서도 「軍 기밀」이라는 이유로 감사대상에서 철저히 빠져버린 성역이었다.

盧泰愚 前 대통령도 조사대상으로 삼았다. 전직 대통령의 「통치행위」를 감사대상으로 삼을 수 있는냐는 논란도 있었다. 정치권 일부에선 「감사원이 적과 동지도 가리지 못하고 칼날만 휘둘러 댄다」, 「정치보복이다」고 저항했다. 다음은 당시 감사원에 재직했던 한 중간간부의 말.

『그때 우리는 李會昌 원장을 중심으로 참으로 열심히 일했습니다. 李원장은 치밀했습니다. 조사대상이 전직 고관이나 장성들이어서 그랬던지, 매우 세밀한 지시까지 하더군요. 예컨대 「가능한 한 야간조사는 삼가고 조사대상자는 반드시 감사원의 차량으로 모셔오되 조사실은 어둠침침하게 만들지 말고 밝게 하라」는 등이었습니다』

李會昌 원장 시절의 감사원은 자존심과 자긍심이 대단했다. 李원장은 조직 장악에 독특한 수법을 구사했다. 이어지는 당시 중간간부의 회고담.

『결재를 받으러 원장실에 들어가면 李원장은 반드시 자리에서 일어나 부하를 맞았습니다. 두터운 결재서류를 올려도 대번에 핵심을 잡아내더군요. 매우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어 신명이 났습니다. 그리고 李원장이 뭔가 더 큰 일을 하려고 하는 게 아니냐는 느낌이 들더군요』

재직 10개월 만에 李會昌 감사원장은 국무총리로 자리를 옮겼다. 대통령제 아래의 총리는 법적으로 보장된 자기 권한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현실이었다. 그러나 李총리는 달랐다. 『그 직책이 요구하는 최고의 성과를 만들어 낸다』는 것이 그의 소신이었다. 법적으로 보장된 총리의 권한을 행사하려고 했던 것이다. 그것이 金泳三 대통령의 「통치권」과 충돌, 그가 「127일 총리」로 단명하는 불씨가 되었다. 다음은 『金泳三 회고록』의 관련 부분.

<李會昌씨는 총리 취임 이후 국무총리의 「법적 권한」을 주장하며 대통령의 지휘를 받기를 꺼려하더니 급기야 北核(북핵) 및 외교적 문제 등 대통령의 업무까지 자신이 지휘하겠다며 언론에 공개한 것이다>


YS에 의해 해임되면 인기 상승

1994년 4월22일 총리직에서 물러난 李會昌씨는 6년 만에 변호사 사무실로 돌아갔다. 그러나 그는 이미 정치적 거물로 성장해 있었다. 지방자치단체장선거가 다가오고 있던 무렵이었다. 관심의 초점은 서울시장 후보였다. 그에게는 여야 모두로부터 서울시장 후보로 나서달라는 교섭이 들어 왔다. 특히 「꼬마」 민주당의 이부영씨 등은 李會昌 변호사의 집에서 진을 치고 출마를 조르기까지 했다.

다음은 李총재의 경기高-서울大 법대 후배로서 일찌감치 李會昌 진영에 참여한 陳永 변호사의 말.

『우리 후배들은 李會昌 선배가 대법원장을 맡았으면 법원이 바뀔 것이라고 기대했는데, 다른 분이 되더군요. 그러다 1995년 3, 4월 무렵부터 서울시장 후보로 떠오르자 정치권에서 李선배를 가만 놓아주질 않더군요. 저도 서울시장 후보를 받으라고 건의했어요』

李會昌 변호사는 서울시장 선거에 출마하라는 여야의 권유를 모두 거절했다. 서울시장 선거의 결과는 여당의 참패로 끝났다. 곧이어 1996년의 4·11(15代) 총선이 다가오고 있었다. 집권당인 신한국당의 고전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金泳三 대통령은 李會昌 변호사에게 선거대책위원장으로서 신한국당에 참여해 달라고 요청했다. 그는 1996년 1월 신한국당의 선거대책위원회 의장으로서 정계에 입문했다. 李會昌씨가 핀치에 구원투수로 등판했다기 보다는 YS가 李會昌씨의 명망을 다시 산 셈이었다.

15代 총선 결과는 서울에서 이기는 등 신한국당의 승리였다. 그는 신한국당 전국구으로 원내에 진입했다. 그때부터 李會昌 대권론이 솔솔 흘러나왔다.

1997년 3월 신한국당 大選후보 경선을 3개월 앞두고 그는 신한국당 대표위원으로 올랐다. 이는 YS가 그의 후계자로 李會昌씨를 선택했다는 의미였다. 大選후보 경선은 사실상 사후승인절차에 불과했다.

그러나 그 직후 놀라운 상황이 전개되었다. 李會昌 후보의 여론조사 지지율이 55%에서 12%로 곤두박질쳤다. 아들의 병역문제가 불거져 나온 때문이었다. 당내에선 非공식적이긴 했지만, 후보교체 문제까지 심각하게 거론되기도 했다. 이런 상황에서 경선에서 2위를 한 李仁濟씨가 大選 출마를 위해 탈당했다.

李會昌씨의 인기는 좀처럼 회복되지 않았다. 여론조사에서 나타난 지지순위는 金大中-李仁濟-李會昌의 순이었다.


초조함이 부른 自充手?

金泳三 대통령과 李會昌 후보의 협조관계도 덜컹거렸다. 9월1일, 보수성향의 표심을 의식한 李會昌 후보는 『全斗煥·盧泰愚 前 대통령의 사면을 추진하겠다』고 발표했다. 이로써 「추석 前 사면」은 기정사실화되어 신문에 대서특필되었다. 발끈한 YS는 청와대 대변인을 불러 『사면은 대통령의 고유권한이다』는 성명을 발표토록 했다. 그리고는 9월2일 심야에 지방 행사에서 귀경한 李會昌 후보를 불러 크게 화를 냈다.

朴世直 위원장의 경북 구미지구당 행사장에서 YS 모습의 인형이 단상에 올려져 몰매를 맞고 짓밟혔다. IMF 금융위기를 불러온 金泳三 대통령과 李會昌 후보를 차별화하려는 선거전략이었겠지만, 그것은 나중에 李會昌 캠프의 실책으로 지목되었다.

이로써 YS와 李會昌 후보는 결정적으로 등을 돌리게 되었으며, YS의 홈그라운드인 PK(부산·경남) 표심에도 심대한 영향을 주었다. 최근 한 종교모임에서도 YS는 『배신한 李會昌씨는 대통령이 돼서는 안 된다』고 극언했다.

선거 결과, 李會昌 후보는 1000만 표를 얻어 당선자 DJ에게 39만 표차로 패배했다. 李仁濟 후보는 PK 지역에서의 선전 등을 바탕으로 500만 표를 얻었다.

그러나 1000만 표의 위력은 컸다. 명예총재로서 당권에서 소외되었던 그는 1998년 한나라당 전당대회에서 다시 총재로 롤백했다. 그러나 李총재는 그를 총재로 옹립한 金潤煥(김윤환)씨의 섭정을 받아야 할 형국이었다. 한나라당은 여러 계파의 병립으로 分權체제로 흐르고 있었다.


총선연대의 낙천운동 이용

李총재가 확실하게 당권을 장악했던 시기는 16代 총선을 앞두고 단행된 2·18공천이었다. 2·18공천에서 李총재는 金潤煥·李基澤씨 등 당 중진들을 대거 탈락시켰다. 그들은 모두 李총재의 당권을 위협할 만한 계파 보스 또는 잠재적 라이벌들이었다. 때마침 총선연대가 그들에 대한 낙천·낙선운동을 벌이고 있었다. 金大中 대통령도 총선연대의 불법활동을 고무했다. 李총재는 그런 바람을 이용하는 데 기민했다.

李총재에게 恨(한)을 품은 사람들은 민국당을 급조했다. 趙淳·李壽成·金潤煥·李基澤·辛相佑씨 등이 그들이다.

그들은 YS가 손을 들어 주기를 바라며 상도동으로 몰려갔다. 야당총재 시절 YS의 초대 비서실장을 지낸 辛相佑씨가 교섭창구였다. YS의 태도는 불투명했다. 투표일 사흘 전에 「남북 頂上회담 개최 합의」라는 北風이 거세게 불었다. 여론조사기관은 민주당의 승리를 예고했다.

그러나 4·13총선 결과는 한나라당의 승리였다. DJ에 대한 견제심리의 작동이었다. 한나라당은 133석을 차지하여 원내 제1당이 되었다. 민국당은 기대하던 영남에서 전패하고 강원도 지역구에서 1석, 전국구에서 1석을 건짐으로써 미니정당으로 전락했다.

한나라당은 원내 과반수 의석에서 4석이 부족했지만, 합종책을 구사하면 정치판을 주도할 수 있었다. 캐스팅 보트는 국회교섭단체의 정족수(20석)에 미달한 자민련(16석)이 쥐게 되었다.

YS는 상도동을 찾아온 李총재에게 JP 와 손을 잡을 것을 권유했다고 한다. 자민련이 교섭단체를 만들 수 있도록 국회법 개정에 협조해 주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李총재는 YS의 권유를 듣지 않았다. 이런 틈에 민주당은 자민련- 민국당-무소속 의원까지 끌어들인 연합세력으로 과반수를 이뤄 16代 국회의 院구성에서부터 한나라당을 패배시켰다. 다음은 두 달 전에 李會昌 총재와 단독으로 만난 J기자가 전하는 李총재의 말.

『내가 만난 사람들 중 열에 여덟, 아홉은 JP를 끌어안으라고 한다.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DJP 공동정권의 문제를 목격하지 않았느냐. 나는 집권을 위해 편법을 쓰지 않는다. 자민련과 정책공조는 할 수 있지만 국민들이 만들어 준 의석의 의미는 왜곡시킬 수 없다』

6·15 남북공동선언 이후 정국의 주도권은 金大中 대통령에게 넘어갔다. 金大中 정부는 對北 低자세 정책에 비판적인 조선·중앙·동아일보를 길들이기 위해 세무사찰을 강행했다. 다음은 李총재의 리더십에 비판적인 한나라당 B의원의 말.

『만약 YS나 DJ가 야당 총재였다면 언론사 길들이기는 어림도 없었을 겁니다. 그때 당내에서 李총재에게 언론 탄압 중지를 요구하는 단식투쟁을 건의하는 사람들이 있었어요. 그러나 李총재는 반응이 없었어요. 그런 상황에서 朴鍾雄(박종웅) 의원이 지도부와 상의도 하지 않고 단독으로 단식투쟁을 들어갔던 겁니다. 총재로선 야성과 강한 리더십을 보일 기회를 놓친 거죠』

李총재가 정국의 주도권을 되찾은 것은 10·25 재보선 이후였다.


李會昌 사람들

李會昌 총재는 好·不好가 뚜렷한 사람이다. 그는 한번 신임한 사람의 말은 끝까지 믿는다는 평을 받고 있다. 뒤집어 말하면 한번 눈밖으로 벗어난 사람들과의 관계는 쉽게 복원되기 어렵다는 얘기다. 그럼으로써 그는 부하들에 대해 지속적인 충성을 강하게 요구하는 메시지를 보내고 있는지도 모른다. 李총재가 명석하다는 데 대해 부정적인 사람은 별로 없다.

그래서 그런지 그는 智謀型(지모형) 참모보다는 충직한 행동파를 선호한다. 梁正圭 부총재, 河舜鳳 의원, 金杞培(김기배) 사무총장은 그런 3인방으로 회자된다. 이들 3인방은 李총재가 낙선 후 총재로 롤백할 때 최전선에서 활약한 인물들이다.

李총재는 농담에 서툴다. 총재가 농담을 하지 않으니까 당직자들도 총재에게 좀처럼 농담을 걸지 못한다. 유머감각이 무시되는 조직은 빡빡하게 마련이다. 그런 분위기 속에서 윤활유 역할을 감당하는 사람이 權哲賢(권철현) 대변인으로 손꼽힌다. 경남高 재학중 전국체전의 복싱 밴텀급 우승자인 權의원을 대변인으로 발탁, 그의 지척에 둔 것에서 李총재가 든든함을 느끼고 있는지도 모른다.

李총재의 심복으로는 지목되고 있는 인물은 尹汝雋 의원이다. 尹의원은 서상목 前의원과 함께 1996년 李총재의 정계진입 때 「李會昌 사람」으로 따라 입당한 인물이다. 둘은 모두 李총재의 경기고 후배들이다. 서상목 前 의원은 이회창 후보의 낙선 후 이른바 稅風에 휩싸여 고초를 치른 후 학계로 U턴했지만, 尹의원은 여전히 「李會昌 비선조직의 핵심」으로 뛰고 있다. 그는 전국 비선조직에서 올라오는 각종 비밀문건을 종합·확인·요약하여 李총재만 보는 비밀보고서를 올리는 일의 중심에 있다고 한다.

李총재는 직접 정치자금에 손대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현실정치의 세계에서 『법정 지원자금만으로 선거를 치렀다』는 말을 액면 그대로 믿는 사람은 없다. 그렇다면 누군가가 李총재를 대신할 수밖에 없다. 당연히 그런 일엔 적든 크든 리스크가 따른다.

한나라당에선 지난 16代 총선에서 공천헌금을 받은 일이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공천을 받은 사람이 사후에 중앙당에 「특별당비」를 낸 경우는 있다고 인정한다. 尹의원의 추천을 통해 원내로 진입한 정치인들도 더러 있다.


韓仁玉 여사가 최강의 참모

지난 大選자금과 관련한 稅風(세풍) 때문에 李會晟(이회성)씨가 구속되었을 때 세간에서는 『형(李총재)을 대신해 동생(회성씨)이 감옥에 간 것』이라는 말이 나돌았다. 경제학 박사인 會晟씨는 형에게 「사람」을 소개하여 人材풀을 만들고 경제정책 등을 조언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李총재의 가장 강력한 협력자는 누가 뭐래도 부인 韓仁玉 여사다. 지난 16代 총선 때 한나라당의 각 지역구 총선 출마자들 사이에선 『총재가 오는 것보다 韓여사가 오는 것이 낫다』는 말까지 나돌았다. 부산여중·경기여고·서울大 사대 출신인 韓여사는 부산·경남 지방의 지지확대에 적극적이다. 특히 전국 곳곳에서 개최는 불교계의 대소 행사에는 거의 빠짐없이 참석하고 있다. 韓여사는 李총재의 「불교계 담당」이다.

「李會昌 이미지 메이커」로서 韓여사의 역할은 대단하다. 후덕한 인상의 韓여사에 의해 李총재의 「차가운 인상」이 중화되는 셈이다. 月刊朝鮮과의 인터뷰에서 韓여사는 李총재의 성격을 『인간적으로 자기를 안으로 볶으면서 사는 분』이라고 했다. 매우 절묘한 표현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인간 李會昌의 내면이 드러난다. 李會昌도 보통사람처럼 고민하고 자책하는 사람으로 표현한 것이다.

동창회에서 韓여사를 만난 50代 주부는 『韓여사의 옷이 얼핏 수수하게 보이지만 값비싼 것』이라고 말했다. 李총재도 최근 여성중앙이 선정한 베스트 드레서 제2위(제1위는 민주당 정동영 고문)로 랭크되었다. 다년간 李총재의 수행비서를 지낸 K씨에게 청렴 이미지의 李총재에게 다소간 흠이 되지 않겠느냐고 물었다. 다음은 非공개를 요구한 K씨의 답변(비공개를 할 필요가 없다는 기자의 판단으로 공개).

『1997년 大選을 앞두고 李會昌 후보 부처와 趙淳 총재 부처가 포토라인에 서야 하는 일정이 잡히자 韓여사가 「뭘 입고 나가야 하느냐」면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부랴부랴 H의원의 부인(뉴스 앵커 출신)의 옷을 빌려 입고 행사에 나갔습니다.

李총재도 양복 두 벌로 지난 大選을 치렀습니다. 유세장에서 집으로 돌아오면 입었던 바지에 물을 뿌려 걸어놓았다가 다음 날 아침에 입고 나갔지요. 요즘은 옷가지가 좀 많아졌지만, 바탕이 검소해서 사치와는 거리가 멉니다. 두 분이 워낙 깔끔해서 옷차림이 좀 돋보이는 것 같아요』

李총재가 당선되면 韓여사는 우리 정치사에서 가장 영향력이 큰 퍼스트 레이디가 될 것이라고 말하는 사람들도 있다. 韓여사를 통하면 일이 쉽게 풀리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韓여사는 여의도 부국빌딩 11층 사무실에 나가 외부 사람들을 만나는 등 행동반경이 넓다.

부국빌딩 11층은 외부엔 李총재의 사조직인 부국팀의 본거지로 소문났지만, 요즘은 李총재 후원회 사무실로 쓰이고 있다. 李총재는 시나브로 이곳에 있는 그의 방에 들러 독서를 하거나 「외부로는 얼굴이 알려지지 않아야 좋을 사람들」을 만나고 있다.

李총재의 정계 진입 때부터 참모역을 해 온 陳永 변호사는 『YS의 민주산악회나 DJ의 연청과 같은 대중동원용 사조직은 없고 기획팀 성격의 사조직은 두 개쯤 된다』고 말했다. 『부국산악회가 결성되고 있다』는 주장에 대해서도 총재실 김우석 차장은 『李총재 주변에서 일하는 사람들의 소규모 모임에 불과하다』고 밝혔다.


『법의 지배를 정착시키겠다』

싱가포르를 아시아에서 제일 잘 사는 나라로 만들고 수상직에서 스스로 물러나 다음 정부의 代父가 된 李光耀(이광요)에게 어느 외신기자가 『지도자로서 가장 중요한 요소가 무엇이냐』라고 물었다. 그는 『비전』이라고 짧게 답변했다. 『비전은 지도자의 상품이며 권력은 지도자의 화폐』라는 말이 있다. 지도자의 기본 사명은 국민에게 희망과 꿈을 지속시키는 것이다. 그래서 문학적 소양이 풍부했던 나폴레옹은 『지도자는 희망의 상인』이라고 갈파했다.

李會昌 총재와 인터뷰했던 많은 기자들은 『인터뷰 도중에는 재미가 없었지만, 귀사해서 녹음 테이프를 틀어 글로 옮겨보면 李총재의 말이 바로 문장이더라』는 등의 소감을 밝힌다. 그만큼 논리적이며 군더더기가 없다는 뜻이다.

李총재는 그의 비전으로 희망의 상인이 될 수 있는가? 李총재는 지난 7월19일 仁川 경영포럼에서 「우리 경제가 사는 길」이라는 제목으로 연설했는데, 다음은 그 결론 부분이다.

<아무리 겉으로 좋은 정책이라도 무원칙하면 국민과 기업·노동자의 신뢰를 얻을 수 없고, 신뢰받지 못하는 정책은 아무런 소용이 없습니다. 원칙과 신뢰는 「법의 지배」가 확고하게 자리잡은 바탕 위에서 비로소 설 수가 있습니다.

법의 가치는 정의의 실현입니다. 정의로운 법의 정신과 人治가 아닌 法治의 의미를 이해하고 존중하는 사회가 되어야만 공정한 경쟁과 신뢰에 터잡은 시장경제가 자리잡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경제를 위해서도 우리는 법의 지배를 반드시 정착시킬 것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