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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이 간다(5)

정순태   |   2016-09-12 | hit 5385

고구려 멸망 후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의 총사령관(都護&#8231 도호)으로서 평양에 주둔하면서 신라에 압력을 가했던 薛仁貴(설인귀)는 왜 돌연 한반도에서 종적을 감추었던 것일까? 669년 9월, 吐藩(토번: 지금의 티베트)이 실크로드(天山南路)를 급습했기 때문이다. 평양에 주둔 중이던 설인귀는 급거 병력을 이끌고 西域(서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토번은 현재 靑海省(청해성)에 위치한 白州 등 18개 州를 점령했다. 실크로드의 허리를 끊어 버린 토번의 전격작전이었다. 唐으로서는 반격전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반격전의 결과는 참담했다.

670년 7월, 설인귀와 郭大封(곽대봉)이 지휘한 당군은 靑海湖(청해호) 남방 大非川 전투에서 전멸했다. 이때 설인귀는 혼비백산해 자신의 몸만 겨우 빠져나왔다. 이 전투 직후에는 安西都護府(안서도호부) 휘하 4鎭이 토번에 함락되었다. 安西4鎭이라면 지금 신강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쿠차·카슈가르·호탄·카라샤르에 있던 오아시스路)의 군사거점도시였다. 당의 서역 방면 총사령부인 안서도호부는 西州(서주: 지금의 투르판)로 물러났다.

唐의 서역 경영에 있어 최대의 적수는 吐藩(토번)이었다. 토번은 662년부터 西돌궐의 일부인 弓月(궁월)과 손을 잡고, 唐軍에 도전해 왔다.

670년 3~4월, 신라의 압록강 도강 작전과 봉황성 전투는 안동도호부의 主力이 서역으로 대거 이동한 상황에서 그 虛(허)를 찔렀던 선제공격이었다.

670년은 파란만장했던 한 해였다. 5월, 唐은 좌감문대장군 高侃(고간)을 東州道行軍摠官(동주도행군총관: 한반도 방면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6월, 고구려부흥군은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점령하고, 唐의 관리와 부역자들을 처형했다. 그 직후, 고간이 지휘한 기병 1만과 이근행(부총관)이 지휘한 거란·말갈병 3만의 공격을 받은 고구려부흥군은 평양성에서 퇴각했다.

문무대왕은 보장왕의 서자 高安勝(고안승)이 이끌고 남하하던 고구려 유민들을 金馬渚(금마저: 지금의 전북 익산시)로 집단 이주시켜 당의 괴뢰였던 웅진도독부를 견제했다.

그때 웅진도독부는 백제 유민들을 포섭해 對신라戰의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문무대왕은 대아찬(관등 제5위) 金儒敦(김유돈)을 웅진도독부에 급파해 화의를 요청하는 유화전술을 구사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백제 故土 강점작전에 들어갔다.

7월, 신라군은 唐軍과의 전면전에 대비해 교두보로 활용할 수 있는 주요 거점에 대한 일제 공세에 나섰다. 3개 방면에서 전개된 이 전격작전에서 신라군은 82개의 大小 성곽을 점령함으로써 백제 고토 남부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확보했다. 또 그 주민들을 대거 內地(내지: 신라 영토)로 이주시켰다. 병력과 노동력 확보를 위한 徙民(사민)정책이었다.

8월1일, 문무대왕은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 高安勝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군량미 2000섬과 비단 등을 지원했다. 문무대왕은 고안승이 일본과 교류하는 것도 직·간접으로 지원했다.

문무왕 11년(671)은 백제 고토 강점작전이 마무리되던 해였다. 1월, 신라군은 웅진도독부의 治所(치소)인 공주 남쪽 근교에서 唐軍과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幢主(당주: 부대장) 金夫果(김부과)가 전사했다. 이때 신라의 국경을 침범한 말갈군과의 전투에서 적병 3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6월, 金竹旨(김죽지)는 웅진도독부의 병량공급처인 부여 근교 加林城(가림성: 임천면 성흥산성) 주위 耕地(경지)를 불태웠다. 이때 唐軍과 石城(부여∼논산 사이에 위치함)에서 싸워 적군 5300 명의 머리를 베고, 백제 장군 2명과 唐의 果毅(과의: 고급장교) 6명을 사로잡았다.

문무대왕은 웅진도독부의 통치지역을 점령해 所夫里州(소부리주)를 설치하고, 그 治所(치소)를 부여에 두고 백제 고토에 대한 통치력을 확산시켰다.

7월26일, 문무대왕은, 西域(서역)에서 한반도 전선으로 복귀한 唐의 행군총관 薛仁貴(설인귀)로부터 신라의 反唐(반당) 군사활동을 힐책하는 편지를 받았다.

설인귀라면 645년 唐태종의 안시성 공격 때부터 참전했고, 668년 고구려 멸망 직후에는 안동도호를 역임한 歷戰(역전)의 인물이었다. 唐의 체제하에서 안동도호라면 唐고종이 문무왕에게 내렸던 계림대도독보다 상위의 관직이다. 도호부는 휘하에 3∼5개의 도독부를 관할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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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武大王에게 보낸 薛仁貴의 협박장

이 장문의 편지는 『행군총관 설인귀는 삼가 신라왕에게 글을 보냅니다. 본인은 육로 만리와 해로 삼천리를 지나 이 땅에 왔습니다』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西域 戰線(서역 전선)으로부터 한반도 戰線으로 복귀해 왔음을 밝힌 것이었다.

그는 “신라가 은혜를 저버리고 군비를 강화해 백제의 故土를 강점한 것”에 대해 항의했다. 이어 그는 당에 대한 신라의 저항능력을 다음과 같이 輕視(경시)했다.

&lt왕은 지금 평안한 국가의 기반을 버리고, 원칙을 지키는 정책을 싫어하며, 멀리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가까이는 부친(태종무열왕)의 말씀을 어기며, 天時(천시)를 업신여기고, 이웃나라와 우호를 깨트리면서, 한 궁벽한 작은 땅(신라)에서 집집마다 군사를 징발하고, 해마다 전쟁을 일으켜, 젊은 과부가 곡식을 나르고, 어린 아이로 하여금 밭일을 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나라를 지키자니 의지할 곳이 없고, 싸움을 걸면 대항할 능력이 없게 되었습니다.&gt

아이러니하게도 적장 薛仁貴는 그의 편지를 통해 ‘젊은 과부와 어린 아이’까지 동원되는 擧國一致(거국일치)의 단합으로 세계 최강의 당제국과 정면대결도 불사하는 신라국가의 처절한 모습을 그대로 후세에 전하고 있다. ‘젊은 과부’라면 전사한 병사의 아내, ‘어린 아이’라면 전사한 병사의 아들이 아니겠는가? 이어 그는 문무왕의 고구려부흥군 지원과 高安勝(고안승)에 대한 고구려왕으로의 책봉에 대해서도 힐책하고 있다.&nbsp&nbsp

&lt고구려의 安勝은 아직도 나이가 어리며, 패망 후의 마을과 성읍에는 주민이 반이나 줄어서, 자신의 거취에 스스로 의심을 품고 있으므로 왕의 직위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본인 설인귀의 樓船(누선: 대형 병선)은 돛을 펴고 깃발을 달아 북쪽 해안을 순시하면서도, 예전에 받은 신라의 고통을 불쌍히 여겨 차마 병사를 풀지 않았는데, 왕은 도리어 外援(외원)을 구하며 나에게 대적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gt&nbsp

설인귀의 편지는 사뭇 위협적이다. 唐의 압도적인 軍勢(군세)를 들먹이며 신라의 복종을 요구했다.

&lt고간 장군이 거느린 漢(族)의 騎兵(기병), 이근행이 거느린 藩兵(번병), 吳· 楚(오&#8231 초)의 용감한 水軍과 幽州(유주)· 幷州(병주)의 惡少(輩)들이 사방에 운집하여, 兵船(병선)이 열지어 내려가고, 험한 곳에 의지하여 진지를 쌓고, 그들이 貴國(귀국)의 땅을 개간하여 밭을 갈게 된다면, 이는 왕에게 치유할 수 없는 病痛(병통)이 될 것입니다.&gt&nbsp

설인귀의 편지는 항복을 권유하는 문구로 매듭짓는다.

&lt왕은 마음이 밝고 풍신이 준수하니, 겸손한 자세로 원칙으로 돌아가 大唐(대당)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때에 따라 血食(혈식: 나라를 보존함)을 받을 것이요, 왕통이 바뀌지 않고 이어질 것이니, 이러한 행운을 선택하고, 복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왕의 계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삼엄한 軍陣(군진) 사이로 사절이 내왕하니, 왕의 휘하에 있는 승려 임윤편지를 맡겨 몇 가지 본인의 의견을 말씀드립니다.&gt&nbsp

필자는, 문무왕의 反唐 행위를 ‘배신행위’로 규정한 한 일본 학자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사실, 설인귀의 편지를 얼핏 보면 羅唐同盟(나당동맹) 균열의 歸責事由(귀책사유)가 마치 신라에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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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戰 외교문서의 白眉 「答薛仁貴書」

‘648년 비밀협약’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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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문무왕의 답장, 즉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는 외교적 레토릭만 제외하면 우리 역사상 최고의 名文(명문)이며, 實用的(실용적) 외교문서이다. 그 내용은 唐의 과욕을 비판하고 신라의 정당성을 만천하에 천명하면서 사실상의 對唐 선전포고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것은 羅唐 분쟁의 핵심요인을 집약하고 있다. 全文은 &lt&lt삼국사기&gt&gt 문무왕 11년(671) 조에 기록되어 있다.

「답설인귀서」는 신라의 이찬(관등 제2위) 김춘추와 唐태종 李世民이 여&#8231 제를 멸망시킨 다음에 시행하기로 약속했던 「648년 비밀협약의 공개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전쟁의 명분이 신라 측에 있음을 만천하에 당당하게 밝힌 것이다.

&lt先王(선왕: 김춘추)께서 貞觀 22년(648) 入朝(입조)하여, 태종 文皇帝(문황제: 이세민)의 은혜로운 조칙을 직접 받았으니, 그 조칙에는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매번 침해를 받아 편안한 날이 없음을 가련히 여긴 것이다. 산천도 토지도 내가 탐하는 바 아니며, 재물도 자녀도 모두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땅과 백제의 토지는 전부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토록 하려 한다」고 하면서 계획을 지시하고, 군사동원 기일을 정해 주었습니다.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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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설인귀서」는 당시 수퍼파워를 상대로 한 문건이었던 만큼 그 언사는 부드럽지만, 사실 규명과 국가이익에 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찾아볼 수 없다.

문무대왕은 羅唐전쟁의 원인을 唐이 고구려와 백제 故地(고지)에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를 설치해 직할 영토로 삼고, 신라까지 병합하려는 데 있음을 명확하게 밝혔다. 이어 백제·고구려 정벌전에서 신라군의 공적이 당군에 못지않음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답설인귀서」는 10여년간 羅&#8231 唐&#8228 麗&#8231 濟&#8231 倭 등 동아시아 5개국 사이에 있었던 주요 역사적 사실을 실로 차분하게 年代別(연대별)로 요약한 準외교문서의 성격이 짙은데, 다음은 그 골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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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과 뼈는 중국에서 났지만, 피와 살은 모두 신라의 것이다』

1) 660년 백제 평정 때 唐의 水軍이 겨우 白江(백강: 금강) 어귀에 들어올 즈음 신라 육군은 백제의 대부대를 격파했다.

&lt김유신의 황산벌 전투 승리 등 백제의 평정은 신라군의 절대적 공로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한 것임.&gt.

2) 661년, 웅진성과 사비성의 唐軍이 백제부흥군에게 포위당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내(문무대왕)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4面의 적을 한꺼번에 격파하고 군량을 지원해 주었다. 웅진도독 劉仁願(유인원) 이하 1만 당병이 4년 동안 신라의 것으로 먹고 입었으니, 가죽과 뼈는 중국에서 났지만, 피와 살은 모두 신라의 것이다.

&lt당병에 대한 신라의 軍需(군수)지원과 고충을 밝힌 것임&gt

3) 662년 1월, 兩河道摠管(양하도총관) 김유신이 적진을 돌파하며 北上해 평양성을 공략하던 소정방의 唐軍에게 군량을 공급했다. 혹한 속에서 궤멸의 위기에 빠졌던 唐軍을 신라가 구원했다.

&lt對고구려 작전에서 항상 兵站線(병참선) 유지가 최대 약점이었던 唐軍에게 신라가 군량을 지원함으로써 당군의 겨울철 작전을 가능하게 했음&gt

4) 663년, 왜선 1000척이 白江口(백강구: 지금의 아산만)에서 머물러 있었으며, 백제부흥군의 정예 기병이 강가에서 왜선을 엄호했는데, 신라의 정예 기병부대가 선봉이 되어 먼저 적 진지를 격파하니 周留城(주류성)은 힘을 잃고 마침내 항복했다.

&lt662~663년, 왜국은 백제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3차례에 걸쳐 3만2000명의 왜군을 파견했는데, 제3차 파병 때인 663년 9월 왜국의 함대 400척(병력 1만명)은 백강구 전투에서 劉仁軌(유인궤)가 지휘한 唐 수군에 전멸당했다. 이때 문무왕은 김유신 등 28명의 장수를 거느리고 친정해 豆陵尹城(청양군 칠갑산)과 백제부흥군의 본진인 주류성을 점령하는 등 수륙 양면 작전을 성공시킴.&gt

5) 664년 8월, 就利山(취리산: 금강 북안)에 祭壇(제단)을 쌓아 놓고, 勅使(칙사) 유인원과 마주하여 문무왕과 부여융이 피를 입에 머금으면서 山河(산하)를 두고 맹약을 하게 했다.

&lt이는 계림주대도독인 문무왕과 웅진도독인 부여융이 동등한 자격으로 會盟(회맹)할 것을 강요한 것으로 4년 전 사비성 함락 때 부여융을 말 앞에 끓어앉힌 바 있는 문무왕으로서는, 심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아직도 對고구려전이 진행 중인 상황이었던 만큼 唐의 會盟(회맹) 요구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음을 공개함.&gt

6) 668년 평양성 포위전에서 신라의 金文潁(김문영) 부대가 선봉에 나서 淵南建(연남건)의 大陣(대진)을 격파하니 평양성의 기세가 꺾였다. 이어 신라의 정예 기병 500이 먼저 공격해 평양성 성문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런데도 唐은 「신라엔 아무런 공로가 없다」고 주장했다.

&lt唐은 평양에 설인귀가 지휘하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고구려 故土에 9개 도독부 42주 100현으로 나눠 직할지로 삼는 등 전리품을 독식했음. 이는 평양 이남 고구려 고토를 신라에게 배분한다는 648년 비밀협약을 위반한 것임&gt

7) 卑列城(비열성: 함경남도 안변)은 본래(진흥왕 때) 신라의 땅이었는데, 唐은 안동도호부 관할 하에 두었다.

8) 668년, 백제(웅진도독부)는 앞서 회맹한 곳(취리산)에서 경계 표시를 바꾸어 田地(전지)를 침탈했으며, 우리의 노비를 달래고 백성들을 유혹해 데려가 숨겨 놓고는 우리가 여러 번 찾아도 끝까지 돌려보내지 않았다.

9) 「唐이 배를 수리하면서 밖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신라를 공격하려는 것이다」라는 소문이 들려오니 백성들은 놀라고 두려워하고 있다.

10) 웅진도독부가 백제의 여자를 漢城도독 朴都儒(박도유)에게 시집 보내고, 그와 음모하여 신라의 兵器(병기)를 훔쳐서 한 州의 땅을 습격하려고 했으나, 다행히 사전에 발각되어 즉시 박도유를 참수하였기에 음모가 성공하지 못했다.

&lt신라가 박도유 이외에도 중앙군단인 대당총관 金眞珠(김진주), 남천주총관 金眞欽(김진흠) 등 친당파 장수들를 나랏일에 소홀하다는 명목으로 주살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 장군들에 대한 唐의 회유공작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gt

11) 670년 당에 사신으로 갔던 金欽純(김흠순)이 귀국해 말하기를 『장차 경계를 확정할 것인데, 백제의 옛 땅을 조사하여 웅진도독부에 돌려줄 것』이라고 했다. 3~4년 사이에 주었던 땅을 다시 빼앗으니, 신라 백성들은 『지금 백제(웅진도독부)의 정황을 보면 스스로 별도의 한 국가를 세우고 있는 것이니, 100년 후에는 우리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 의해 멸망당할 것』이라고 실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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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은 설인귀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공정한 戰後처리, 즉 「648년 협약」을 唐이 준수하지 않는다면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대내외에 선언한 것이다. 설인귀라면 645년 요동성&#8228·안시성 전투부터 나당전쟁이 끝나는 시기(676년)까지 31년간 중 1년간을 제외하고 계속 극동에서 작전을 해 온 인물인 만큼 그런 그에게 문무왕이 사실과 다른 언급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문서는 삼국통일전쟁에서 신라의 역할을 가감 없이 파악할 수 있는 결정적인 문건이다.

필자는, 신라가 외세에 기대어 삼국통일을 했다고 주장하는 어설픈 논객이나 羅唐전쟁의 開戰 원인을 신라의 배신행위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일부 학자에게 「답설인귀서」를 제대로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하는 역사관은 일제의 식민사관이나 김일성 주의의 음흉한 독수에 휘둘린 바보짓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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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참 차단 위한 해상작전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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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년의 시점에서 문무왕은 고구려부흥군을 배후에서 지원하고, 신라군의 주력을 백제 고토 점령작전에 투입했다. 671년 7월,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안시성이 당의 장수 高侃(고간)에 의해 함락되었다. 당군의 남하 속도는 빨랐다. 9월, 고간이 4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해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은 뒤 帶方(대방: 황해도)으로 침범했다.

문무대왕은 당군의 약점이 병참에 있다는 사실을 파악해 함대를 동원한 봉쇄작전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671년 10월, 신라 수군은 예성강 어귀로 진입하던 당의 보급선을 습격해 70여 척을 노획했다.

격침된 당의 보급선도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때 당의 兵船郎將 鉗耳大侯(병선낭장 겸이대후), 내주사마 王禮本(왕예본), 열주장사 王益(왕익) 등을 비롯한 당의 수군 100여 명을 생포했기 때문이다. 겨울이 시작된 시점에서 한반도로 침입한 당군의 병참선이 단절되었다. 이후 약 10개월간 당군의 南下작전은 중지되었다.

11월, 웅진도독부에 파견된 唐의 관원과 백제 유민 2000여 명이 47척의 선박에 분승해 왜국으로 탈출했다.

672년 1월, 문무대왕은 웅진도독부를 완전히 축출하기 위해 대대적인 포위 섬멸작전을 전개했다. 사비성 외곽의 古省城(고성성)을 함락시키고, 加林城(가림성)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이 해 8월, 평양성에 주둔하던 唐의 동주도행군총관 고간과 말갈 장수 이근행은 본격적인 공세에 나서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馬邑城(마읍성: 평양성 서쪽)을 함락시켰다. 승기를 잡은 고간-이근행 軍은 이어 황주→대방→白水城으로 진격했다. 당군에 의해 포위된 白水城은 예성강 하구의 白川(배천)이다.

이때 신라군은 당군의 후방을 급습함으로써 상황이 반전되었다. 백수성에서 농성하던 고구려부흥군이 성문을 열고 나와 당군을 들이치면서 되려 앞뒤에서 당군을 포위하는 형세로 급변했던 것이다. 신라군과 고구려부흥군은 이 전투에서 당군 수천 명을 살상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

백수성에서 패한 고간의 당군은 石門(석문: 황해도 서흥)으로 후퇴하여 戰列(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승세를 탄 신라군은 당군을 추격했다. 672년 8월, 당의 장수 고간이 이끄는 정예기병은 신라군에 대한 통렬한 반격작전을 전개했다. 이 석문전투에서 신라군의 중앙군단이 대패했다. 대아찬 曉川(효천), 사찬 義文(의문)· 山世(산세), 아찬 能申(능신)· 豆善(두선), 일길찬 安那含(안나함)· 良臣(양신) 등이 전사했다. 고간의 誘引計(유인계)에 걸려 신라 중앙군의 주력이 궤멸적 타격을 입은 것이다. 開戰 이래 최대의 위기였다.

나당전쟁은 서역전선의 상황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던 것 같다. 왜냐하면 석문석투 패전 직전인 672년 4월, 토번의 사절이 長安에 도착하여 당고종과 측천무후를 접견하면서 모종의 협상을 했다. 당-토번의 평화협상, 아니면 휴전협상으로 당나라가 對신라 전선에 국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동년 12월, 당군은 고구려부흥군이 지키고 잇던 백수산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이를 지원하려고 출전한 신라군마저 격파했다.

672년 石門 전투에서 대패한 후 신라의 持久전략

石門의 敗報(패보)를 접한 문무왕은 즉시 중신회의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다. 이때 78세의 太大角干(태대각간) 김유신은 “唐의 흉계를 예측하기 어려우므로 장병들을 모두 동원해 山城戰(산성전)을 전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시 南韓 지역에는 800개의 城이 있었다. 침략군에게 소모전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전을 피하고 戰略遲久(전략지구)로 대응하며, 정세의 변동을 기다려야 한다는 김유신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신라는 강남의 漢山州(한산주: 경기도 광주)에 晝長城(주장성: 南漢山城)을 축조해 강북의 北漢山城과 함께 한강 계선의 중요 방어진지로 삼았다.

신라의 和戰 양면책은 교묘했다. 672년 9월 문무왕은 唐고종에게 『臣(신)은 죽을 죄를 짓고, 삼가 말씀 올립니다』로 시작되는 上表文을 올렸다. 사죄사 급찬 金原川(김원천)과 내마 金邊山(김변산)은 포로로 잡혀 있던 내주사마 왕예본, 열주장사 왕익을 비롯한 당의 장병 170명을 데리고 가 唐에 인도했다. 또한 신라에 대한 적대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금, 은, 동, 針(바늘), 牛黃, 布 등을 예물로 보냈다.

신라의 저자세 외교는 唐 조정의 분위기를 일시 호전시키기는 했지만, 신라의 지원을 받은 고구려부흥군과 당군의 전투현장에서는 오히려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673년 5월, 당군은 고구려부흥군에 대해 대공세를 전개했다.

673년 9월, 당군은 임진강의 중류인 瓠蘆河(호로하) 남안의 七重城(칠중성: 파주시 積城面)과 왕봉하(경기도 고양)까지 남하해 고구려부흥군과 대접전을 전개했다. 고구려부흥군이 패퇴하자 드디어 신라군이 당군과 정면충돌한다.

임진강 계선 전투의 결과는 이후 東아시아 세계의 질서를 만들어 낸 결전이었다. 필자는 임진강 전투의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경주를 출발하여 밤길을 도와 북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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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6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 사적 제158호로 대왕암이라고도 한다.

&#8226 문무왕 수중릉의 안쪽. 사방으로 트인 십자형 좁은 수로를 통해 못 속으로 흘러 들어온 바닷물이 서쪽으로 난 수로를 통해 다시 바다로 빠져나간다. 못 속 바닥에는 길이 3m가량의 편평한 돌이 깔려 있다.

&#8226 利見臺. 대왕암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신문왕이 신라의 국보인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8226 국보 제112호 감은사 터의 3층 쌍탑. 통일신라시대의 걸작으로서 장중하면서도 상승감을 느끼게 한다.

&#8226 국보 제25호 태종무열왕릉비. 용머리 돌과 거북등 받침만 남아 있고, 碑身(비신)은 멸실되었다. 머리를 치켜들고 네 발로 힘껏 땅을 밀치는 모습은 삼국통일기 신라의 약동하는 사회상을 드러내고 있다.

&#8226 안압지. 문무왕 14년(674)에 축조된 인공호수로 못가에 임해전을 지어 東宮과 영빈관으로 삼았다.

&#8226 태종무열왕릉의 발치에 있는 金仁問의 묘. 김인문은 前後 20여 년간 唐에 머물면서 신라의 국가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8226 괘릉의 石人像. 흔히. 왼쪽은 武人像, 오른쪽은 文人像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文人像’의 뒷면을 보면 그도 갑옷을 입은 것이 뚜렷하다.

&#8226 괘릉.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무덤 중 가장 화려하다.

&#8226 괘릉을 지키는 돌사자. 돌사자는 웃고 있다.

&#8226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문무왕의 능비. 이 능비에는 신라김씨가 흉노의 후예임을 밝히고 있다.

&#8226 김인문의 묘비(국립경주박물관 전시).

&#8226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壬申誓記石. 신라화랑의 맹세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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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武王은 吐藩의 西域 공격을 틈타

수퍼파워 唐을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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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는 唐의 海上 兵站線을 차단한

海軍 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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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代의 수퍼파워 唐(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신라는 强小國의 역사적 모델이었다.

신라는 海路를 이용한 兵站線을 차단해 唐 지상군의 南下를 저지했고, 西域에서 唐과 실크로드의 헤게머니를 다툰 吐藩(토번: 티베트)의 힘을 절묘한 타이밍에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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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津江은 韓民族을 지켜낸 방파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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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전지 七重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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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江(한강) 하구를 끼고 自由路(자유로)를 달리면 왼쪽으로 「통일전망대」가 올라앉은 鰲頭山(오두산)이 보인다. 오두산의 서쪽은 한강과 臨津江(임진강)이 合水되는 역이다. 자유로를 계속 달려 汶山IC(파주시 문산읍 堂洞里)에서 37번 국도로 빠져나와 東進(동진하면 임진강의 결정적 순간과 同行(동행)할 수 있다.

오늘날의 남북 대치 현장인 임진강 유역은 1300여 년 전에는 羅唐(나당)전쟁의 決戰場(결전장)이며, 韓民族(한민족)을 지켜 오늘에 이르게 한 방파제였다. 그때 임진강에서 唐軍(당군)을 막지 못했다면 韓民族은 지금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로 전락해 있을지도 모른다.

37번 국도를 東進하면 임진강 南岸에 임진왜란 때(1592년 4월30일) 피난하던 宣祖(선조)의 도하지점인 花石亭(화석정)이 보이고, 화석정에서 8km쯤 東進하면 도로변에 西人의 본거지였던 坡山書院(파산서원)이 보인다. 파산서원은 西人의 영수였던 牛溪 成渾(우계 성혼)이 나라 지키는 일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朱子學(주자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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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서원에서 다시 6km쯤 더 나아가면 이제는 3~4층 건물이 즐비한 積城面 馬智里(적성면 마지리)이다. 馬智里에서 고개 하나를 넘어 37번국도에 들면 「七重城(칠중성)」의 위치를 표시하는 안내판 하나가 보인다. 여기서 좁은 진입로를 따라 조금 들어가면 重城山(중성산) 자락에 자리 잡은 積城鄕校(적성향교)가 보인다.

중성산 위에는 나당전쟁 시기의 격전장이며, 주인이 자주 바뀐 七重城이 자리 잡고 있다. &lt&lt三國史記&gt&gt(삼국사기) 문무왕 15년(675) 2월 조에는 『劉仁軌(유인궤: 唐將)가 우리 군사를 칠중성에서 격파했다』고 되어 있고, 같은 해 9월 조에는 『唐兵(당병)이 거란·말갈병과 함께 칠중성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승용차를 적성향교 앞마당에 세워 놓고 농토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좀 걷다가 중성산 기슭에 붙으면 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중성산 정상부에는 현재 軍의 예비진지가 들어서 있다.

중성산은 표고 149m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오르면, 왜 그때 칠중성을 彼我(피아)가 모두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前方의 임진강과 후방의 감악산을 모두 관측할 수 있는 지점인 것이다. 감악산은 파주 지역의 제1봉이다. 임진강은 北方勢(북방세)가 한반도의 中心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전략적 요충이다.

칠중성에서 굽어보면 임진강 中流(중류)의 물길이 크게 彎曲(만곡)을 이뤄 마치 호리병(瓠蘆· 호로&#8231 표주박) 두 개를 나란히 진열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이런 모습 때문에 임진강 중류의 옛 이름이 「瓠蘆河(호로하)」라고 불렸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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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부흥군의 요새 호로고루와 임진강 渡涉이 가능한 고랑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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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중성은 소규모 山城이지만, 바로 이웃에 위치한 六溪土城(육계토성)과 연계해 임진강을 도하하는 적군을 쉽게 관측·저지할 수 있는 요충이다. 칠중성과 육계토성은 임진강 北岸의 瓠蘆古壘(호로고루)와 마주 보고 있다.

육계토성 부근에 걸린 飛龍大橋(비룡대교)를 건너가면 연천군 白鶴面(백학면)이고, 백학면에서 임진강 北岸의 지방도로를 따라 西行하면 곧 고구려부흥군이 南下하던 唐軍과 격전을 벌였던 호로고루에 도달한다.

이곳은 南北(남북) 분단 전에만 해도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호루고루은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支流(지류)가 흐르면서 형성된 현무암 절벽 위에 축조된 고구려의 平地城(평지성)인데, 비교적 보존이 잘된 서쪽 성벽의 높이가 약 10m이다.

호로고루성에서 하류 방면으로 조금 西進하면 高浪浦(고랑포)이다. 고랑포는 철책선(GOP) 지역이어서 민간통제선이 북상한 이후에도 낚시꾼이나 가끔 찾는 쓸쓸한 곳이지만,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상선이 거슬러 올라왔던 임진강 水運(수운)의 중심 나루였다.

고랑포 동쪽에는 임진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도섭(걸어서 강을 건넘) 지점이 많다. 1968년 1월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휴전선을 뚫은 북한 124군 소속 게릴라부대(김신조 일당 31명)도 고랑포에서 걸어서 임진강을 건너 청와대 외곽 자하문까지 침투했다.

2006년 10월, 필자는 고랑포 지역의 철책선을 지키는 장병들을 위문하러 간 김에 고랑포대대 제3중대 막사에서 1박을 하면서 특히 임진강 북안과 임진강 지류 砂尾川(사미천) 일대를 답사했다.

칠중성→임진강→고랑포→사미천을 잇는 통로는 문무왕 2년(662) 1월 金庾信(김유신)이,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다 군량이 떨어져 전멸의 위기에 빠진 蘇定方(소정방)의 唐軍을 구원하기 위해 北上했던 기동로이다.

이때 김유신은 김인문·김양도 등 신라의 여덟 장수와 함께 군량미를 수레에 실은 수송부대를 이끌고 사미천변을 따라 북상하면서 상류의 白峙鎭(백치진)의 고구려 수비군을 돌파하고 토산→신계→수안을 거쳐 대동강 남안 中和에서 소정방 軍과의 연결에 성공했다. 아사 직전의 唐軍을 구원한 김유신 부대는 귀로에 고랑포에서 추격군을 역습해 고구려 장수 阿達兮(아달혜)를 사로잡고 적병 1만 명의 목을 베는 戰果(전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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육상전 최후의 決戰場 買肖城(매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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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랑포 지역을 둘러본 필자는 임진강 위에 걸린 飛龍橋(비룡교)를 건너 다시 적성면 마지리로 내려왔다. 마지리에서 323번 지방도로를 타고 4km쯤 남하하면 감악산 계곡(적성면 雪馬里)에 「英연방軍 전적비」가 보인다. 이곳은 설마리 전투 때(1951.4.22.∼4.25) 유엔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英연방 제29여단이 중공군 3개사단(제187&#8231 제188&#8231 제189사단)의 공격을 3일간 저지시킨 현장이다.

이때 여단의 前方에 추진되어 있던 글로스터대대는 중공군에게 포위된 채 탄약과 식량도 공급받지 못하는 악조건 하에서 병력의 90%를 상실하면서도 진지를 사흘간 고수했다. 설마리 전투에서 영연방 제29여단은 여단 전체가 많은 병력을 잃었지만, 전방의 글로스터 대대의 희생으로 동두천 지역으로 돌파하려는 중공군을 견제함으로써 차기 방어선(델타線) 구축과 서울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감악산은 표고 675m이지만, 파주 일대에서 가장 높고 몸피도 굵은 산이다. 감악산 정상에 올라가면 임진강 남안과 북안에 위치한 칠중성&#8231 호로고루성이 내려다보이고, 동북쪽으로는 임진강의 支流(지류)인 한탄강이 보인다.

지금 감악산 계곡은 유원지로 변해 곳곳에 음식점과 산장에다 가요주점까지 들어서 있다. 334번 지방도로로 달려 감악산 계곡을 빠져나오면 연천군 신산리이고, 이곳에 飛龍師團(비룡사단) 본부가 주둔해 있다. 적은 핵무기까지 개발해 「서울 불바다」 운운하는 협박을 일삼고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최전선 接敵(접적)지역마저 긴장감이 사라져 버렸다.

동두천市에 진입해 3번 국도를 타고 북상하다가 경원선의 보산역 앞에서 군사문제연구소 연구원 권승진씨를 픽업해, 함께 買肖城(매소성)을 향해 출발했다. 매소성은 漢灘江(한탄강) 유원지에서 우회전해 포천 가는 322번 지방도로로 접어들면 왼쪽에 보이는 야산(연천군 靑山面 大田里)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지도에는 「大田里山城(대전리산성)」으로 표기되어 있다.

매소성은 地利(지리)를 살려 쌓은 요새이다. 북동쪽에서 흘러내리는 한탄강이 매소성 앞에서 급격히 꺾어져 임진강 본류로 합수된다. 한탄강 너머에는 은대리성과 전곡리土城을 껴안은 全谷邑(전곡읍)이 펼쳐져 있고, 서북쪽 멀리로는 開城의 鎭山(진산)인 송악산이 육안으로 보인다. 20여 년 전 이곳에 올라왔을 때 전곡읍은 허허벌판이었는데, 이제는 연천군 제1의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다.

&lt&lt삼국사기&gt&gt 문무왕 15년 9월29일조에는 『李謹行(이근행)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주둔하자, 우리 군사가 그들을 격퇴시키고, 戰馬(전마) 3만380필과 많은 병기를 획득했다』고 쓰여 있다. 이후 唐軍은 신라군에 대한 지상전을 포기한다.

신라가 당시의 수퍼파워 唐에 開戰(개전)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던 大義名分(대의명분)에 대해선 文武大王이 당의 극동방면군 사령관에게 보낸 서한인 「答설인귀書」를 통해 이미 설명했다. 이제는 開戰 이후의 전투상황과 羅唐전쟁의 승패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당시의 국제상황을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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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당을 先制공격할 수 있었던 국제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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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패망 후 唐(당)은 평양에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故土(고토)는 물론 그때까지의 동맹국 신라까지 병합하려는 움직임을 노골화함에 따라 新羅의 문무왕은 對唐(대당) 선제공격을 결심했다. 그것이 670년 4월에 전개된 압록강 북방의 요새 鳳凰城(봉황성) 공격이었다. 이때 공격군의 지휘관은 신라의 사찬(관등 제8위) 薛烏儒(설오유)와 고구려부흥군의 태대형(관등 제1위) 高延武(고연무)였다. 연합군의 병력은 신라군·고구려부흥군 각각 1만 명이었다.

신라-고구려 연합군은 압록강을 건너 670년 4월4일 봉황성에서 이근행 휘하의 말갈군에 승리한 직후 唐軍 주력이 반격을 개시하려 하자 바로 압록강을 건너 南下했다. 그렇다면 신라가 唐에 선제공격을 감행할 수 있게 했던 국제적 상황의 변화는 무엇이었을까?

문무왕은 669년 9월의 唐-吐藩(토번: 티베트) 전쟁 발발 정보를 일찌감치 입수했던 것 같다. 당시 唐의 수도 長安(장안)에는 문무대왕의 동생 金仁問이 당의 벼슬을 받고 常駐(상주)하고 있었으며, 김유신의 동생 金欽純(김흠순)과 중국어에 능통한 파진찬 金良圖(김양도)가 謝罪使(사죄사)란 명목으로 파견되어 있었다. 사죄사는 신라의 백제 故土 잠식에 대해 唐고종이 분노하자, 그간의 경위와 입장을 설명하기 위한 외교사절이었지만, 唐고종은 김흠순과 김양도를 감옥에 가두는 폭거를 자행했다.

그렇다면 唐고종이 외교사절까지 투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의 기록은 누락되었지만, 김흠순과 김양도는 당연히 실크로드의 헤게머니를 둘러싸고 전개된 唐-토번 전쟁 추이를 주시하며 당군의 이동상황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을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국가안보에 관한 한 僧俗(승속)이 따로 놀지 않았다. 그 상징적 인물이 義相(의상) 스님이다. &lt&lt삼국사기&gt&gt에 따르면 이때 長安 남쪽 불교의 성지였던 終南山(종남산)의 至相寺(지상사)에서 華嚴學(화엄학)을 공부하던 義相(의상) 스님이 갑자기 귀국해 문무대왕만났던 것이다.

義相은 唐의 감옥에 갇힌 김흠순·김양도 등과 접촉해 서역을 향한 唐軍의 병력 이동상황을 청취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의상 스님은 中國華嚴宗(중국화엄종)의 제3祖(조)에 오르는 전후의 시기에 개인적 출세를 포기하고, 급거 귀국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安東都護府의 최고사령관(都護)이었던 薛仁貴(설인귀)는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평양으로부터 靑海(청해) 방면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무려 1만3000리나 되는 머나먼 행군거리였다. 靑海湖(청해호)는 바다가 아니라 지금의 靑海省의 省都(성도)인 西寧(서녕·씨닝) 서쪽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이다.

당시 세계의 메인 트렁크(Main trunk&#8231 主 교역로)였던 실크로드는 섬서성(장안)→감숙성 또는 청해성을 西進해 新疆(신강)위구르自治區 중심부에 위치한 타클라마칸 사막 주위의 오아시스 도시를 거쳐 東로마제국까지 연결되었다. 따라서 靑海는 실크로드의 「허리」 부분으로서 이곳이 막히면 唐으로선 東西무역의 이익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唐고종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설인귀를 부랴부랴 靑海까지 이동시켰다는 것은 설인귀가 唐의 최정예부대를 거느린 제1급 장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설인귀의 唐軍은 670년 8월 大非川(대비천: 靑海湖 남쪽) 전투에서 토번군에게 전멸당했다. 최고지휘관인 설인귀만 겨우 빠져나와 도주했던 참패였다.

그 결과 서역, 즉 지금의 신강위구르自治區에 있던 唐의 安西4鎭이 모두 토번군에게 떨어졌다. 신강위구르自治區라면 우리나라 광역시의 西區나 東區의 규모가 아니라 한반도 면적의 6배에 달하는 광활한 사막(南部)과 초원(北部)지대이다. 필자는 2003년 신강의 南部지역을 답사했는데, 여객기·전세버스·기차를 번갈아 타고 타클라마칸 사막 주위 오아시스 도시를 한 바퀴 도는 데만 13일간이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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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도독부의 패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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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10년(670) 5월, 唐고종은 左監門(좌감문)대장군 高侃(고간)을 東州道(동주도)행군총관, 말갈의 장수 李槿行(이근행)을 부총관으로 삼아 4만 병력을 또다시 한반도로 투입했다. 6월 고간과 이근행의 唐軍은, 일시 평양의 安東도호부를 점령했던 고구려부흥군을 밀어내고, 황해도로 남하했다.

이때까지 임진강 이북 지역의 전투는 고구려부흥군이 담당하고, 신라군은 백제 故土 점령작전에 집중했다. 6월, 文武王은 당군에게 쫓기던 고구려 유민들을 金馬渚(금마저: 전북 익산)에다 집단 이주시키고, 8월에는 보장왕의 庶子인 高安勝(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해 公州의 웅진도독부를 견제했다.

그러면서도 대아찬(관등 제5위) 金儒敦(김유돈)을 웅진도독부에 급파해 和議(화의)를 제의했다. 和戰(화전) 양면책의 구사는 문무왕의 常用수법이었다.

7월, 신라는 백제 故土의 82개 城을 점령함으로써 지금의 호남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유민들을 대거 신라 內地(내지)로 이시켰다. 백제 유민에 대한 徙民(사민)정책은 웅진도독부가 백제 유민들을 선동해 對신라戰에 동원하려는 기도를 분쇄하려는 의도였다.

671년 7월, 문무왕은 서역戰線에서 한반도로 막 복귀한 唐의 행군총관 설인귀로부터 항의 서한을 받고 이를 반박한 「答설인귀書」를 보냈음은 앞에서 썼다. 唐고종은 669년 8월의 大非川 전투의 패장인 설인귀를 유배하려 했다가 功(공)을 세워 명예회복을 하라며 한반도 전선에 再투입했던 것이다.

671년 9월,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安市城(안시성)이 고간이 지휘한 당군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다. 그러나 10월, 신라의 水軍은 예성강 어귀로 진입하던 唐의 보급선을 습격하여 70여 척을 노획했다. 이로써 당군은 海路에 의한 병참선 확보에 실패했다. 예성강 전투의 패전으로 兵站線(병참선)을 유지할 수 없었던 당 지상군은 이후 약 1년간 南下할 수 없었다. 文武王으로서는 신라군을 재정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문무왕은 당군의 主力이 고구려부흥군과 전투를 전개하던 사이에 백제 故土를 지배하던 당의 직할 통치기관인 웅진도독부를 완전히 축출하고, 長槍幢(장창당) 등 對기병부대를 창설해 전투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10월, 웅진성에 파견되어 있던 唐의 관원과 백제 유민 2000여 명이 47척의 선박에 분승해 왜국으로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신라의 공세 때문에 웅진도독부가 더 버티기 어렵다는 전망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어 672년 2월, 신라군은 대대적인 포위 섬멸작전을 전개해 웅진도독부를 사실상 소멸시켰다.

이에 당도 결전을 벌일 의도를 노골화했다. 672년 7월에 東州道행군총관 고간이 漢人(한인) 기병 1만 명, 李槿行이 말갈·거란병 3만 명을 이끌고 평양에 再진입했다. 이때 고간-이근행 軍은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평양 근교 韓始城(한시성)과 馬邑城(마읍성)을 쳐서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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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군, 石門 전투에서 大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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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2년 8월, 당군은 南下하여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白水城(백수성: 황해도 白川&#8231 배천)을 포위 공격했다. 이때 신라군이 당군의 배후를 급습해 전황이 급반전되었다. 신라군과 고구려부흥군은 앞뒤에서 당군을 협격해 수천 명을 살상하고 수많은 전리품도 획득했다.

고간이 지휘했던 당군은 황해도 서흥으로 퇴각해 石門 들판에 진을 쳤는데, 신라군은 勝勢(승세)를 믿고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步騎(보기) 합동작전에 능숙한 당군의 유인작전에 빠져 신라군은 開戰 이래 최대의 참패를 당했다. 신라군이 적을 가볍게 본 결과이기도 했다. 다음은 석문전투의 패전상황을 기록한 &lt&lt삼국사기&gt&gt 김유신傳(전)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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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당군이 石門의 들판에 진을 치자 (문무)왕은 장군 義福(의복)·春長(장춘)을 보내 방어하게 하여 帶方(대방) 들판에 진을 쳤다. 이때 長槍幢(장창당)만은 별도로 진을 치고 있다가 당병 3000여 명과 싸워 그들을 잡아서 대장군의 진영에 보냈다. 이에 여러 幢(당: 부대)들이 함께 말하기를 「長槍營(장창영)은 홀로 있다가 공을 세웠으니 반드시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도 한데 모여서 헛되이 수고만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마침내 각자 군대를 분산시켰다. 당병이 말갈과 함께 우리 군사가 아직 陣(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서 공격하여 오자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장군 曉天(효천)·義文(의문) 등이 여기서 죽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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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 베는 아이나 소 먹이는 아이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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緖戰(서전)에서 신라군은 장창당의 선전으로 당군 3000 을 포획했던 것이다. 장창당은 장창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고슴도치 모습의 밀집대형을 이뤄 敵(적) 기병의 돌격에 대처하는 신라의 新設(신설) 보병부대였다.

신라군의 다른 부대들은 서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창당에 대해 시기심이 생겨 병력의 集中原則(집중원칙)을 무시하고, 병력을 분산 배치시키려다 미처 진을 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당군의 급습을 받고 궤멸적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때 신라군의 장군급 10여 명이 전사했다.

672년 石門 전투의 패배 이후 신라군은 공세에서 守勢(수세)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사세가 급박해지자 문무왕은 唐고종에게 사죄사를 급파했다. 그때 문무왕의 表文(표문)은 『만일 용서를 내려 머리와 허리를 베지 않는 은혜를 베푸신다면, 제가 죽어야 할 날이 오히려 태어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 唐조정에 엄청난 진상품을 보내고, 유력 인사들에게도 뇌물을 뿌렸다.

이때 신라는 漢山州(한산주: 경기도 廣州)의 晝長城(주장성: 남한산성)을 축조해 江北의 北漢山城(북한산성)과 함께 한강 계선의 중요 방어기지로 삼았다. 당군이 임진강을 돌파하고 한강을 넘어올 것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673년 5월, 고간과 이근행이 지휘하는 당군은 임진강의 요지인 호로하(임진강 중류)에서 고구려부흥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대거 남하했다.

673월 7월, 太大角干(태대각간)의 지위에 있던 김유신이 79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만년의 김유신은 野戰(야전)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內政과 외교의 방향을 잡았던 전략가로서 활약했다. 그의 죽음은 신라의 위기였다. &lt&lt삼국사기&gt&gt의 史論(사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김유신을 평가했다. 史論이란 “史臣은 논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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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신라(태종무열왕과 문무왕)가 김유신을 대우한 것을 보면 친근히 하여 간격을 두지 않았고, 임무를 맡길 때도 의심치 않았으니, 그의 계책이 실행되고 그의 말은 채용되어 …능히 功名(공명)으로써 일생을 마칠 수 있었다. (中略) 유신에 대한 온 나라 사람들의 칭송이 지금(고려시대)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士大夫(사대부)가 그를 아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거니와 꼴 베는 아이나 소 먹이는 아이에 이르기까지 능히 그를 알고 있으니…&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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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은 자신과 김유신의 사이를 「물고기와 물」로 비유해 왔던 만큼 김유신의 죽음으로 상실감이 컸을 것이다. 1년 전 石門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의 대책회의에서 김유신은 정세변동을 기다리며 堅壁(견벽: 튼튼한 성곽)에 의지한 방어전을 건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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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의 敵병참선 차단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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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은 673년 8월 沙熱山城(사열산성)을 증축하고, 9월에는 國原城(국원성: 충주), 北兄山城(북형산성: 경주), 召文城(소문성: 의성), 耳山城(이산성: 고령), 主岑城(주잠성)·萬興寺山城(만흥사산성: 거창), 骨爭峴城(골쟁현성) 등을 축조하고 走壤城(주양성: 춘천 鳳山)을 요새화함으로써 적의 예상 공격로 상의 방어진지를 대폭 증강했다. 13개 성의 신축 또는 증축은 결사항전을 다짐하는 문무왕의 의지 표명이었다.

적과 내통하는 무리에 대한 대왕의 처리는 이번에도 냉엄했다. 唐에 붙으려 했던 아찬 金大吐(김대토)를 처형하고, 그 一家를 모두 賤人(천인)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적국에 국가기밀을 누설하던 「내부의 적들」에 대한 무서운 경고였다.

적이 임진강 계선까지 밀고 내려온 상황에서 신라군과 고구려부흥군은 고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 만약 적의 수륙군이 합세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상황은 더욱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문무왕의 신라는 海路(해로)를 통해 침공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적의군을 견제·소탕하기 위해 새로운 방어 전략을 수립했다. 673년 9월, 戰船(전선) 100척으로 편성된 신라의 함대가 대아찬(관위 제5위) 金徹川(김철천)의 지휘로 서해에 진출해 적의 해군 활동을 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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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수륙 연합작전에 의해 적의 兵站線(병참선)을 차단함으로써 신라군은 호로하와 王逢河(왕봉하: 한강 하류) 등지에서 배고픈 당병과 싸워 9전9승했다. 이때 신라군은 적 2000 명의 목을 베었는데, 이밖에도 호로하와 왕봉하에 빠져 죽은 적병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兵站線(병참선&#8231 Lines of communication)이란 작전부대와 그 작전 기지를 연결하고, 또 그 노선(통로)에 연해서 보급품과 군사 부대가 이동하는 모든 도로, 철도, 수로, 항로 들을 말한다.

673년 겨울, 당군은 예성강 중하류 지역에 위치한 牛岑城(우잠성: 황해도 금천) 등을 공파했다. 우잠성을 지키던 고구려부흥군은 병력의 열세와 무기·병량의 부족으로 패퇴했다. 말갈·거란군은 강원도 금강군 현리의 大楊城(대양성)과 강화도 對岸(대안)까지 진격해 童子城(동자성: 경기도 김포시 通津邑 문수산성) 등을 함락시켰다. 고구려부흥군의 패전으로 開戰 이래 처음으로 한강 계선이 일부 돌파되었던 것이다.

당군은 이때 신라군이 지키던 임진강 南岸의 七重城(칠중성: 경기도 파주군 적성)을 공격했지만, 패전하고 북으로 퇴각했다. 이로써 신라는 당군의 673년 겨울 공세를 저지하고 임진강 계선은 확보할 수 있었지만, 이 시기에 고구려부흥군은 거의 소멸했다. 석문전투(672년 4월)이후 당군의 공격은 673년 겨울까지 계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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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4년 1월, 唐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취소하면서, 문무왕의 동생인 金仁問(김인문)을 신라국왕으로 명한다는 조서를 반포하고, 劉仁軌(유인궤)를 鷄林道(계림도)대총관, 衛尉卿 李弼(위위경 이필)과 右領軍대장군 이근행을 副총관으로 삼아 김인문의 귀국을 호위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그 시점의 唐은 신라와 대규모 전투를 벌일 형편이 아니었다.

673년 12월, 토번의 배후조종을 받은 궁월 등 天山산맥의 西돌걸의 여러 유목부족들이 天山北路(스텝路&#8231 草原의 길)를 봉쇄하려 들자, 唐고종은 소정방 등 여러 장수들을 파견해 대대적 군사작전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이로써 羅唐전쟁은 그로부터 약 14개월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신라로서는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천금 같은 시간을 얻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문무왕은 백제 유민들로 구성된 「白衿誓幢(백금서당)」을 편성했다. 백금서당의 병력은 670년 신라군이 백제 故土의 82개 성을 점령하면서 신라 內地로 이사시켰던 백제 유민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당군의 주력이 왜 천산북로로 이동했던 것일까? 670년 토번에게 天山南路(오아시스의 길)의 경영권을 상실한 당은 그 대안으로 천산산맥 북쪽으로 우회하는 스탭路(草原의 길)를 이용했는데, 이 길마저 위협당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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말갈군으로부터 戰馬 3만380 필 탈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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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상황이 반전된다. 675년 1월, 토번의 사절단이 長安에 들어가 唐과 토번 간에 일시 평화무드가 감돌았다. 이로써 서역 방면의 긴장이 일시 완화되자, 당은 즉시 한반도 작전을 재개했다. 675년 2월, 유인궤의 당군은 임진강 남안의 칠중성을 함락시켰다. 이어 칠중성을 전진기지로 삼아 이근행의 말갈군은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 남안의 買肖城(매소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금세 토번과 당이 다시 긴장관계로 돌아섰다. 675년 2월, 唐고종은 칠중성을 막 점령한 유인궤를 서역 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본국으로 소환하고, 그 이후 이근행이 安東진무대사로서 지휘권을 행사하게 했다. 말갈군과 거란군을 主力으로 삼은 당군이 남하하자 신라는 9軍을 출동시켜 방어전을 벌였다.

675년 9월, 설인귀의 수군은 宿衛학생인 風訓(풍훈)을 향도로 삼아 임진강 하구로 침입했다. 風訓은 兵部令 재임 중 「근무에 태만하다」는 이유로 문무왕에 의해 숙청된 金眞珠(김진주)의 아들로서 唐에 유학 중이었다.

이때 金文訓(김문훈)이 지휘하는 신라 수군이 임진강 하구 泉城(천성: 교하읍 오두산성) 앞바다에서 설인귀의 수군을 강타했다. 이때 신라 수군은 적선 40여 척을 노획하고, 적병 1400명을 살상하는 승전을 거두었다. 설인귀는 戰馬 1000 필을 내버려 둔 채 포위망을 빠져 도주했다. 唐의 水陸(수륙) 연결작전이 이번에도 실패했던 것이다.

675년 9월29일, 신라 9군은 이근행이 지휘하던 말갈군단 20만 명과 매소성에서 대치했다. 설인귀의 임진강 하구의 泉城 전투 패배로 병참선을 유지할 수 없었던 이근행 軍은 전면 퇴각을 서둘렀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戰馬 3만380 필과 많은 무기·장비를 노획했다. 보급이 끊긴 이근행의 말갈군단은 퇴각하면서 약탈전을 감행했다. 다음은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lt&lt삼국사기&gt&gt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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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말갈이 阿達城(아달성)에 들어와 약탈하자 성주 素那(소나)가 전세를 역전시켰으나, 전사했다. 당군이 거란 및 말갈 군사와 함께 칠중성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小守(소수: 지방무관직) 儒冬(유동)이 전사했다. 말갈이 또 赤木城(적목성)을 포위 공격하자 현령 脫起(탈기)가 백성들을 이끌고 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백성들과 함께 전사했다. 당군이 또한 石峴城을 포위 점령하려 하자 현령 仙伯(선백)과 悉毛(실모) 등이 힘써 싸우다가 전사했다. 우리 군사가 당군과 크고 작은 열여덟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6047 명의 머리를 베고, 200 필의 전마를 얻었다&gt

신라는 强小國(강소국)의 모델이라고 할 만하다. 신라의 武官들에게 敵前後退(적진후퇴)는 최대의 수치였다. 한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는 위와 같은 신라 사람들의 희생정신에 의해 성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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