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唐軍 사령관 薛仁貴의 협박 편지

鄭淳台(작가)   |   2016-09-12 | hit 12735

고구려 멸망 후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의 총사령관(都護&#8231 도호)으로서 평양에 주둔하면서 신라에 압력을 가했던 薛仁貴(설인귀)는 왜 돌연 한반도에서 종적을 감추었던 것일까? 669년 9월, 吐藩(토번: 지금의 티베트)이 실크로드(天山南路)를 급습했기 때문이다. 평양에 주둔 중이던 설인귀는 급거 병력을 이끌고 西域(서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토번은 현재 靑海省(청해성)에 위치한 白州 등 18개 州를 점령했다. 실크로드의 허리를 끊어 버린 토번의 전격작전이었다. 唐으로서는 반격전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반격전의 결과는 참담했다.


670년 7월, 설인귀와 郭大封(곽대봉)이 지휘한 당군은 靑海湖(청해호) 남방 大非川 전투에서 전멸했다. 이때 설인귀는 혼비백산해 자신의 몸만 겨우 빠져나왔다. 이 전투 직후에는 安西都護府(안서도호부) 휘하 4鎭이 토번에 함락되었다. 安西4鎭이라면 지금 신강위구르 자치구에 있는 쿠차·카슈가르·호탄·카라샤르에 있던 오아시스路)의 군사거점도시였다. 당의 서역 방면 총사령부인 안서도호부는 西州(서주: 지금의 투르판)로 물러났다.


唐의 서역 경영에 있어 최대의 적수는 吐藩(토번)이었다. 토번은 662년부터 西돌궐의 일부인 弓月(궁월)과 손을 잡고, 唐軍에 도전해 왔다.


670년 3~4월, 신라의 압록강 도강 작전과 봉황성 전투는 안동도호부의 主力이 서역으로 대거 이동한 상황에서 그 虛(허)를 찔렀던 선제공격이었다.


670년은 파란만장했던 한 해였다. 5월, 唐은 좌감문대장군 高侃(고간)을 東州道行軍摠官(동주도행군총관: 한반도 방면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6월, 고구려부흥군은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점령하고, 唐의 관리와 부역자들을 처형했다. 그 직후, 고간이 지휘한 기병 1만과 이근행(부총관)이 지휘한 거란·말갈병 3만의 공격을 받은 고구려부흥군은 평양성에서 퇴각했다.


문무대왕은 보장왕의 서자 高安勝(고안승)이 이끌고 남하하던 고구려 유민들을 金馬渚(금마저: 지금의 전북 익산시)로 집단 이주시켜 당의 괴뢰였던 웅진도독부를 견제했다.


그때 웅진도독부는 백제 유민들을 포섭해 對신라戰의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문무대왕은 대아찬(관등 제5위) 金儒敦(김유돈)을 웅진도독부에 급파해 화의를 요청하는 유화전술을 구사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백제 故土 강점작전에 들어갔다.


7월, 신라군은 唐軍과의 전면전에 대비해 교두보로 활용할 수 있는 주요 거점에 대한 일제 공세에 나섰다. 3개 방면에서 전개된 이 전격작전에서 신라군은 82개의 大小 성곽을 점령함으로써 백제 고토 남부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확보했다. 또 그 주민들을 대거 內地(내지: 신라 영토)로 이주시켰다. 병력과 노동력 확보를 위한 徙民(사민)정책이었다.


8월1일, 문무대왕은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 高安勝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군량미 2000섬과 비단 등을 지원했다. 문무대왕은 고안승이 일본과 교류하는 것도 직·간접으로 지원했다.


문무왕 11년(671)은 백제 고토 강점작전이 마무리되던 해였다. 1월, 신라군은 웅진도독부의 治所(치소)인 공주 남쪽 근교에서 唐軍과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幢主(당주: 부대장) 金夫果(김부과)가 전사했다. 이때 신라의 국경을 침범한 말갈군과의 전투에서 적병 3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6월, 金竹旨(김죽지)는 웅진도독부의 병량공급처인 부여 근교 加林城(가림성: 임천면 성흥산성) 주위 耕地(경지)를 불태웠다. 이때 唐軍과 石城(부여∼논산 사이에 위치함)에서 싸워 적군 5300 명의 머리를 베고, 백제 장군 2명과 唐의 果毅(과의: 고급장교) 6명을 사로잡았다.


문무대왕은 웅진도독부의 통치지역을 점령해 所夫里州(소부리주)를 설치하고, 그 治所(치소)를 부여에 두고 백제 고토에 대한 통치력을 확산시켰다.


7월26일, 문무대왕은, 西域(서역)에서 한반도 전선으로 복귀한 唐의 행군총관 薛仁貴(설인귀)로부터 신라의 反唐(반당) 군사활동을 힐책하는 편지를 받았다.


설인귀라면 645년 唐태종의 안시성 공격 때부터 참전했고, 668년 고구려 멸망 직후에는 안동도호를 역임한 歷戰(역전)의 인물이었다. 唐의 체제하에서 안동도호라면 唐고종이 문무왕에게 내렸던 계림대도독보다 상위의 관직이다. 도호부는 휘하에 3∼5개의 도독부를 관할했기 때문이다.


&nbsp


文武大王에게 보낸 薛仁貴의 협박장



이 장문의 편지는 『행군총관 설인귀는 삼가 신라왕에게 글을 보냅니다. 본인은 육로 만리와 해로 삼천리를 지나 이 땅에 왔습니다』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西域 戰線(서역 전선)으로부터 한반도 戰線으로 복귀해 왔음을 밝힌 것이었다.


그는 “신라가 은혜를 저버리고 군비를 강화해 백제의 故土를 강점한 것”에 대해 항의했다. 이어 그는 당에 대한 신라의 저항능력을 다음과 같이 輕視(경시)했다.



&lt왕은 지금 평안한 국가의 기반을 버리고, 원칙을 지키는 정책을 싫어하며, 멀리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가까이는 부친(태종무열왕)의 말씀을 어기며, 天時(천시)를 업신여기고, 이웃나라와 우호를 깨트리면서, 한 궁벽한 작은 땅(신라)에서 집집마다 군사를 징발하고, 해마다 전쟁을 일으켜, 젊은 과부가 곡식을 나르고, 어린 아이로 하여금 밭일을 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나라를 지키자니 의지할 곳이 없고, 싸움을 걸면 대항할 능력이 없게 되었습니다.&gt



아이러니하게도 적장 薛仁貴는 그의 편지를 통해 ‘젊은 과부와 어린 아이’까지 동원되는 擧國一致(거국일치)의 단합으로 세계 최강의 당제국과 정면대결도 불사하는 신라국가의 처절한 모습을 그대로 후세에 전하고 있다. ‘젊은 과부’라면 전사한 병사의 아내, ‘어린 아이’라면 전사한 병사의 아들이 아니겠는가? 이어 그는 문무왕의 고구려부흥군 지원과 高安勝(고안승)에 대한 고구려왕으로의 책봉에 대해서도 힐책하고 있다.&nbsp&nbsp


&lt고구려의 安勝은 아직도 나이가 어리며, 패망 후의 마을과 성읍에는 주민이 반이나 줄어서, 자신의 거취에 스스로 의심을 품고 있으므로 왕의 직위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본인 설인귀의 樓船(누선: 대형 병선)은 돛을 펴고 깃발을 달아 북쪽 해안을 순시하면서도, 예전에 받은 신라의 고통을 불쌍히 여겨 차마 병사를 풀지 않았는데, 왕은 도리어 外援(외원)을 구하며 나에게 대적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gt&nbsp


설인귀의 편지는 사뭇 위협적이다. 唐의 압도적인 軍勢(군세)를 들먹이며 신라의 복종을 요구했다.


&lt고간 장군이 거느린 漢(族)의 騎兵(기병), 이근행이 거느린 藩兵(번병), 吳· 楚(오&#8231 초)의 용감한 水軍과 幽州(유주)· 幷州(병주)의 惡少(輩)들이 사방에 운집하여, 兵船(병선)이 열지어 내려가고, 험한 곳에 의지하여 진지를 쌓고, 그들이 貴國(귀국)의 땅을 개간하여 밭을 갈게 된다면, 이는 왕에게 치유할 수 없는 病痛(병통)이 될 것입니다.&gt&nbsp


설인귀의 편지는 항복을 권유하는 문구로 매듭짓는다.


&lt왕은 마음이 밝고 풍신이 준수하니, 겸손한 자세로 원칙으로 돌아가 大唐(대당)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때에 따라 血食(혈식: 나라를 보존함)을 받을 것이요, 왕통이 바뀌지 않고 이어질 것이니, 이러한 행운을 선택하고, 복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왕의 계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삼엄한 軍陣(군진) 사이로 사절이 내왕하니, 왕의 휘하에 있는 승려 임윤편지를 맡겨 몇 가지 본인의 의견을 말씀드립니다.&gt&nbsp


필자는, 문무왕의 反唐 행위를 ‘배신행위’로 규정한 한 일본 학자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사실, 설인귀의 편지를 얼핏 보면 羅唐同盟(나당동맹) 균열의 歸責事由(귀책사유)가 마치 신라에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