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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名文으로 唐의 협박에 답하다!

정순태(작가)   |   2016-09-15 | hit 7632

<p class='바탕글'><span>開戰 외교문서의 白眉 「答薛仁貴書」 </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648년 비밀</span><span>협약</span><span lang='EN-US'>’ 공개</span>  <o:p></o:p></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바탕'>이에 대한 문무왕의 답장, 즉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는 외교적 레토릭만 제외하면 우리 역사상 최고의 名文(명문)이며, 實用的(실용적) 외교문서이다. 그 내용은 唐의 과욕을 비판하고 신라의 정당성을 만천하에 천명하면서 사실상의 對唐 선전포고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것은 羅唐 분쟁의 핵심요인을 집약하고 있다. 全文은 <<삼국사기>> 문무왕 11년(671) 조에 기록되어 있다.</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바탕'>「답설인귀서」는 신라의 이찬(관등 제2위) 김춘추와 唐태종 李世民이 여‧ 제를 멸망시킨 다음에</span><span lang='EN-US'> 시행하기로 약속했던 「648년 비밀</span><span>협약</span><span>의 공개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전쟁의 명분이 신라 측에 있음을 만천하에 당당하게</span><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밝힌 것이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先王(선왕: 김춘추)께서 貞觀 22년(648) 入朝(입조)하여, 태종 文皇帝(문황제: 이세민)의 은혜로운 조칙을 직접 받았으니, 그 조칙에는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매번 침해를 받아 편안한 날이 없음을 가련히 여긴 것이다. 산천도 토지도 내가 탐하는 바 아니며, 재물도 자녀도 모두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땅과 백제의 토지는 전부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토록 하려 한다」고 하면서 계획을 지시하고, 군사동원 기일을 정해 주었습니다. ></span>  <o:p></o:p></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바탕'>「답설인귀서」는 당시 수퍼파워를 상대로 한 문건이었던 만큼 그 언사는 부드럽지만, 사실 규명과 국가이익에 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찾아볼 수 없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바탕'>문무대왕은 羅唐전쟁의 원인을 唐이 고구려와 백제 故地(고지)에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를 </span><span>설치해 직할 영토로 삼고, 신라까지 병합하려는 데 있음을 명확하게 밝혔다. 이어 백제·고구려 정벌전에서 신라군의 공적이 당군에 못지않음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답설인귀서」는 10여년간 羅‧ 唐․ 麗‧ 濟</span><span>‧ 倭 등 동아시아 5개국 </span><span>사이에 있었던 주요 역사적 사실을 실로 차분하게 年代別(연대별)로 요약한 準외교문서의 성격이 짙은데, 다음은 그 골자이다. </span>  <o:p></o:p></p><p class='바탕글'><span>『가죽과 뼈는 중국에서 났지만, 피와 살은 모두 신라의 것이다』</span><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1) 660년 백제 평정 때 唐의 水軍이 겨우 白江(백강: 금강) 어귀에 들어올 즈음 신라 육군은 백제의 대부대를 격파했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김유신의 황산벌 전투 승리 등 백제의 평정은 신라군의 절대적 공로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한 것임.>.</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2) 661년, 웅진성과 사비성의 唐軍이 백제부흥군에게 포위당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내(문무대왕)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4面의 적을 한꺼번에 격파하고 군량을 지원해 주었다. 웅진도독 劉仁願(유인원) 이하 1만 당병이 4년 동안 신라의 것으로 먹고 입었으니, 가죽과 뼈는 중국에서 났지만, 피와 살은 모두 신라의 것이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당병에 대한 신라의 軍需(군수)지원과 고충을 밝힌 것</span><span>임> </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3) 662년 1월, 兩河道摠管(양하도총관) 김유신이 적진을 돌파하며 北上해 평양성을 공략하던 소정방의 唐軍에게 군량을 공급했다. 혹한 속에서 궤멸의 위기에 빠졌던 唐軍을 신라가 구원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對고구려 작전에서 항상 兵站線(병참선) 유지가 최대 약점이었던 唐軍에게 신라가 군량을 지원함으로써 </span><span>당군의</span><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겨울철 작전을 가능하게 했음> </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4) 663년, 왜선 1000척이 白江口(백강구: 지금의 아산만)에서 머물러 있었으며, 백제부흥군의 정예 기병이 강가에서 왜선을 엄호했는데, 신라의 정예 기병부대가 선봉이 되어 먼저 적 진지를 격파하니 周留城(주류성)은 힘을 잃고 마침내 항복했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662~663년, 왜국은 백제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3차례에 걸쳐 3만2000명의 왜군을 파견했는데, 제3차 파병 때인 663년 9월 왜국의 함대 400척(병력 1만명)은 백강구 전투에서 劉仁軌(유인궤)가 지휘한 唐 수군에 전멸당했다. 이때 문무왕은 김유신 등 28명의 장수를 거느리고 친정해 豆陵尹城(청양군 칠갑산)과 </span><span>백제부흥군의 본진인 </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주류성을 점령하는 등 수륙 양면 작전을 성공시킴.></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5) 664년 8월, 就利山(취리산: 금강 북안)에 祭壇(제단)을 쌓아 놓고, 勅使(칙사) 유인원과 마주하여 문무왕과 부여융이 피를 입에 머금으면서 山河(산하)를 두고 맹약을 하게 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이는 계림주대도독인 문무왕과 웅진도독인 부여융이 동등한 자격으로 會盟(회맹)할 것을 강요한 것으로 4년 전 사비성 함락 때 부여융을 말 앞에 끓어앉힌 바 있는 문무왕으로서는, 심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아직도 對고구려전이 진행 중인 상황이었던 만큼 唐의 會盟(회맹) </span><span>요구</span><span style='font-family: 바탕'>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음을 공개</span><span>함.</span><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6) 668년 평양성 포위전에서 신라의 金文潁(김문영) 부대가 선봉에 나서 淵南建(연남건)의 大陣(대진)을 격파하니 평양성의 기세가 꺾였다. 이어 신라의 정예 기병 500이 먼저 공격해 평양성 성문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런데도 唐은 「신라엔 아무런 공로가 없다」고 주장했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唐은 평양에 설인귀가 지휘하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고구려 故土에 9개 도독부 42주 100현으로 나눠 직할지로 삼는 등 전리품을 독식했음. 이는 평양 이남 고구려 고토를 신라에게 배분한다는 648년 비밀협약을 위반한 것임></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7) 卑列城(비열성: 함경남도 안변)은 본래(진흥왕 때) 신라의 땅이었는데, 唐은 안동도호부 관할 하에 두었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8) 668년, 백제(웅진도독부)는 앞서 회맹한 곳(취리산)에서 경계 표시를 바꾸어 田地(전지)를 침탈했으며, 우리의 노비를 달래고 백성들을 유혹해 데려가 숨겨 놓고는 우리가 여러 번 찾아도 끝까지 돌려보내지 않았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9) 「唐이 배를 수리하면서 밖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신라를 공격하려는 것이다」라는 소문이 들려오니 백성들은 놀라고 두려워하고 있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10) 웅진도독부가 백제의 여자를 漢城도독 朴都儒(박도유)에게 시집 보내고, 그와 음모하여 신라의 兵器(병기)를 훔쳐서 한 州의 땅을 습격하려고 했으나, 다행히 사전에 발각되어 즉시 박도유를 참수하였기에 음모가 성공하지 못했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신라가 박도유 이외에도 중앙군단인 대당총관 金眞珠(김진주), 남천주총관 金眞欽(김진흠) 등 친당파 장수들를 나랏일에 소홀하다는 명목으로 주살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 장군들에 대한 唐의 회유공작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span></p><p class='바탕글'><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11) 670년 당에 사신으로 갔던 金欽純(김흠순)이 귀국해 말하기를 『장차 경계를 확정할 것인데, 백제의 옛 땅을 조사하여 웅진도독부에 돌려줄 것』이라고 했다. 3~4년 사이에 주었던 땅을 다시 빼앗으니, 신라 백성들은 『지금 백제(웅진도독부)의 정황을 보면 스스로 별도의 한 국가를 세우고 있는 것이니, 100년 후에는 우리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 의해 멸망당할 것』이라고 실망하고 있다.</span>  <o:p></o:p></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바탕'>문무대왕은 설인귀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공정한 戰後처리, 즉 「648년 협약」을 唐이 준수하지 않는다면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대내외에 선언한 것이다. 설인귀라면 645년 요동성․·안시성 전투</span><span>부터 나당전쟁이 끝나는 시기(676년)까지 31년간 중</span><span lang='EN-US' style='mso-fareast-font-family: 바탕'> 1년간을 제외하고 계속 극동에서 작전을 해 온 인물인 만큼 그런 그에게 문무왕이 사실과 다른 언급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문서는 삼국통일전쟁에서 신라의 역할을 가감 없이 파악할 수 있는 결정적인 문건이다. </span></p><p class='바탕글'><span style='font-family: 바탕'>필자는, 신라가 외세에 기대어 삼국통일을 했다고 주장하는 어설픈 논객이나 羅唐전쟁의 開戰 원인을 신라의 배신행위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일부 학자에게 「답설인귀서」를 제대로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하는 역사관은 일제의 식민사관이나 김일성 주의의 음흉한 독수에 휘둘린 바보짓으로 보인다. </span></p><p class='바탕글'>  </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