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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조상은 흉노’라는 문무왕 碑文의 수수께끼

鄭淳台(작가)   |   2016-09-16 | hit 14131

新羅金氏의 조상은 흉노(?)&nbsp


경주시 仁旺洞(인왕동)의 7번 국도변에 경주국립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수년 전 내가 갔을 때 국립경주박물관의 입장료는 1000원이었다. 구경거리에 비해 이처럼 값싼 곳은 세상에 없다.


박물관 경내 미술관의 역사자료실에 들어가면 현관에 文武王陵碑(문무왕릉비)의 파편이 전시되어 있다. 碑文(비문) 전체의 내용은 碑 자체에 破失(파실)된 부분이 많아 파악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 신라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업적 등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문무왕의 장례 사실, 碑銘(비명) 등이 새겨져 있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신라김씨의 出自(출자)를 밝히는 앞면 5행의 구절이다.&nbsp&nbsp


&lt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枝가 英異(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31226侯(투후) 祭天之胤(제천지륜)이 7代를 전하여 …하였다.&gt


그러면 투후(&#31226侯)란 누구인가? 투후는 漢武帝(한무제)의 총신 金日&#30974(김일제: BC 134~86)다. 기원전(BC) 121년 늦은 가을, 漢武帝는 &#38669去炳(곽거병)을 驃騎將軍(표기장군)으로 삼아 흉노를 쳤는데, 이때 흉노 休屠王(휴저왕)의 열네 살의 아들 김일제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동생이 포로가 되었다. 휴저왕이라면 흉노 선우 휘하 24인의 王將(왕장) 중 1인이다.


처음 김일제는 養馬奴(양마노)로 전락했으나 말[馬]마니아인 한무제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馬監(마감)으로 발탁되었는데,「莽何羅(망하라)의 난」 때 한무제를 구한 공로로 駙馬都尉(부마도위)로 출세했다. 한무제의 측근으로서 숙직 중에 副재상이었던 망하라는 비수를 들고 한무제의 침실로 뛰어드는 순간, 김일제는 “망하라 모반!”이라고 외치며 온몸으로 막아섰다는 것이다.


한무제의 임종 때(기원전 87년 2월), 부마도위 김일제는 奉車都尉(봉거도위) &#38669光(곽광: 곽거병의 동생), 太僕(태복) 上官傑(상관걸)과 더불어 어린 후계자 昭帝(소제)를 보필하라는 유언을 받든 3人의 託孤之臣(탁고지신) 중 1인이 되었다. 그러나 김일제는 그 후 1년 만인 기원전 86년에 죽었는데, 병사 직전에 투후로 봉해졌다. 김일제의 후손은 그 후 7대에 걸쳐 투후의 영예를 누렸다. 투후는 지금 산동성 &#31226縣(투현)을 食邑(식읍)으로 받았던 爵位(작위)이다.


그런 김일제의 후손들이지만, 그들은 漢나라를 찬탈한 외척 王莽(왕망)의 新나라 창업에 협조적이었던 것 같다. 왕망의 新은 15년 만에 멸망하고, 내란에 휩싸인 중국을 평정한 인물이 漢황실의 후예인 光武帝 劉秀(광무제 유수)였다. 중국사에서는 광무제가 부활시킨 한왕조를 後漢(후한)이라고 부른다.


이런 왕조 교체기에 김일제의 후손들은 왕망 정권에 붙었다는 이유로 주살을 당했거나 피의 숙청을 피해 유랑민이 되었다. 문무대왕 능비문의 내용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풍비박산한 김일제의 후손들 중 일파인 金閼智(김알지)의 무리가 기원 후 65년 한반도 동남방인 서라벌로 흘러내려왔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신라김씨의 먼 조상은 바로 흉노이다.


필자는 신라 김씨의 出自(출자)를 확인하기 위해 중국의 內몽골과 감숙성 등지를 답사했는데, 그 내용은 뒤에서 상술할 것이다.


문무대왕의 능비문 옆에는 壬申誓記石(임신서기석)도 전시되어 있다. 높이 불과 34cm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냇돌에는 삼국통일 시기 신라화랑의 의식구조와 수련내용이 새겨져 있다.&nbsp


&lt임신년 6월16일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쓴다. 하늘 앞에 맹세하여 지금으로부터 忠道(충도)를 몸소 실행하여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맹세를 어기면 하늘로부터 큰 벌을 받을 것임을 다짐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출전해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또 1년 전 辛未年(신미년)에 詩(시: 詩經)·尙書(상서)·禮記(예기)·春秋傳(춘추전: 春秋左氏傳)을 3년 동안 습득하기로 맹세했다.&gt&nbsp


위의 壬申年(임신년)은 진흥왕 13년(552), 진평왕 34년(612), 문무왕 12년(672) 등으로 추정된다. 경주의 냇가에서 우연히 발견된 임신서기석은, 신라화랑은 무예뿐만 아니라 학문 연마에도 힘썼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화랑 출신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삼국통일시기의 신라군은 최정예 戰士(전사) 집단이 될 수 있었다.


미술관을 둘러보고 안압지관으로 갔다. 이곳에는 안압지에서 출토된 3만여 점의 유물 중 대표적인 것을 전시하고 있다. 필자가 주목했던 것은 14面&#20307 주사위였다. 그것에는 「술 석 잔 거푸 마시기」, 「팔짱 끼고 술 마시기」 등의 한자문구가 적혀 있다. 그것이 오늘날의 ‘폭탄주’와 ‘러브샷’이 된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