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大王, 국제정세의 변화를 포착, 唐을 치다!

鄭淳台(작가)   |   2016-09-19 | hit 11108

신라가 당을 先制공격할 수 있었던 국제정세&nbsp


고구려의 패망 후 唐(당)은 평양에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故土(고토)는 물론 그때까지의 동맹국 신라까지 병합하려는 움직임을 노골화함에 따라 新羅의 문무대왕은 對唐(대당) 선제공격을 결심했다. 그것이 670년 4월에 전개된 압록강 북방의 요새 鳳凰城(봉황성) 공격이었다. 이때 공격군의 지휘관은 신라의 사찬(관등 제8위) 薛烏儒(설오유)와 고구려부흥군의 태대형(관등 제1위) 高延武(고연무)였다. 연합군의 병력은 신라군·고구려 부흥군 각각 1만 명이었다.


신라-고구려 연합군은 압록강을 건너 670년 4월4일 봉황성에서 이근행 휘하의 말갈군에 승리한 직후 唐軍 주력이 반격을 개시하려 하자 바로 압록강을 건너 南下했다. 그렇다면 신라가 唐에 선제공격을 감행할 수 있게 했던 국제적 상황의 변화는 무엇이었을까?


문무대왕은 669년 9월의 唐-吐藩(토번: 티베트) 전쟁 발발 정보를 일찌감치 입수했던 것 같다. 당시 唐의 수도 長安(장안)에는 문무대왕의 동생 金仁問이 당의 벼슬을 받고 常駐(상주)하고 있었으며, 김유신의 동생 金欽純(김흠순)과 중국어에 능통한 파진찬 金良圖(김양도)가 謝罪使(사죄사)란 명목으로 파견되어 있었다. 사죄사는 신라의 백제 故土 잠식에 대해 唐고종이 분노하자, 그간의 경위와 입장을 설명하기 위한 외교사절이었지만, 唐고종은 김흠순과 김양도를 감옥에 가두는 폭거를 자행했다.


그렇다면 唐고종이 외교사절까지 투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의 기록은 누락되었지만, 김흠순과 김양도는 당연히 실크로드의 헤게머니를 둘러싸고 전개된 唐-토번 전쟁 추이를 주시하며 唐軍의 이동상황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을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국가안보에 관한 한 僧俗(승속)이 따로 놀지 않았다. 그 상징적 인물이 義相(의상) 스님이다. &lt&lt삼국사기&gt&gt에 따르면 이때 長安 남쪽 불교의 성지였던 終南山(종남산)의 至相寺(지상사)에서 華嚴學(화엄학)을 공부하던 義相(의상) 스님이 갑자기 귀국해 문무대왕을 만났던 것이다.


義相은 唐의 감옥에 갇힌 김흠순·김양도 등과 접촉해 서역을 향한 唐軍의 병력 이동상황을 청취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의상 스님은 中國華嚴宗(중국화엄종)의 제3祖(조)에 오르는 전후의 시기에 개인적 출세를 포기하고, 급거 귀국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安東都護府의 최고사령관(都護)이었던 薛仁貴(설인귀)는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평양으로부터 靑海(청해) 방면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무려 1만3000리나 되는 머나먼 행군거리였다. 靑海湖(청해호)는 바다가 아니라 지금의 靑海省의 省都(성도)인 西寧(서녕·씨닝) 서쪽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이다.


당시 세계의 메인 트렁크(Main trunk&#8231 主 교역로)였던 실크로드는 섬서성(장안)→감숙성 또는 청해성을 西進해 新疆(신강)위구르自治區 중심부에 위치한 타클라마칸 사막 주위의 오아시스 도시를 거쳐 東로마제국까지 연결되었다. 따라서 靑海는 실크로드의 「허리」 부분으로서 이곳이 막히면 唐으로선 東西무역의 이익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唐고종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설인귀를 부랴부랴 靑海까지 이동시켰다는 것은 설인귀가 唐의 최정예부대를 거느린 제1급 장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설인귀의 唐軍은 670년 8월 大非川(대비천: 靑海湖 남쪽) 전투에서 토번군에게 전멸당했다. 최고지휘관인 설인귀만 겨우 빠져나와 도주했던 참패였다.


그 결과 서역, 즉 지금의 신강위구르自治區에 있던 唐의 安西4鎭이 모두 토번군에게 떨어졌다. 신강위구르自治區라면 우리나라 광역시의 西區나 東區의 규모가 아니라 한반도 면적의 6배에 달하는 광활한 사막(南部)과 초원(北部)지대이다. 필자는 2003년 신강의 南部지역을 답사했는데, 여객기·전세버스·기차를 번갈아 타고 타클라마칸 사막 주위 오아시스 도시를 한 바퀴 도는 데만 13일간이나 걸렸다.&nbsp&nbsp


웅진도독부의 패망&nbsp


문무왕 10년(670) 5월, 唐고종은 左監門(좌감문)대장군 高侃(고간)을 東州道(동주도)행군총관, 말갈의 장수 李槿行(이근행)을 부총관으로 삼아 4만 병력을 또다시 한반도로 투입했다. 6월 고간과 이근행의 唐軍은, 일시 평양의 安東도호부를 점령했던 고구려부흥군을 밀어내고, 황해도로 남하했다.


이때까지 임진강 이북 지역의 전투는 고구려부흥군이 담당하고, 신라군은 백제 故土 점령작전에 집중했다. 6월, 文武大王은 당군에게 쫓기던 고구려 유민들을 金馬渚(금마저: 전북 익산)에다 집단 이주시키고, 8월에는 보장왕의 庶子인 高安勝(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해 公州의 웅진도독부를 견제했다.


그러면서도 대아찬(관등 제5위) 金儒敦(김유돈)을 웅진도독부에 급파해 和議(화의)를 제의했다. 和戰(화전) 양면책의 구사는 문무대왕의 常用수법이었다.


이 해 7월, 신라는 백제 故土의 82개 城을 점령함으로써 지금의 호남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유민들을 대거 신라 內地(내지)로 이주시켰다. 백제 유민에 대한 徙民(사민)정책은 웅진도독부가 백제 유민들을 선동해 對신라戰에 동원하려는 기도를 분쇄하려는 의도였다.


671년 7월, 문무대왕은 서역戰線에서 한반도로 막 복귀한 唐의 행군총관 설인귀로부터 항의 서한을 받고 이를 반박한 「答설인귀書」를 보냈음은 앞에서 썼다. 唐고종은 669년 8월의 大非川 전투의 패장인 설인귀를 유배하려 했다가 功(공)을 세워 명예회복을 하라며 한반도 전선에 再투입했던 것이다.
671년 9월,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安市城(안시성)이 고간이 지휘한 당군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다. 그러나 10월, 신라의 水軍은 예성강 어귀로 진입하던 唐의 보급선을 습격하여 70여 척을 노획했다. 이로써 당군은 海路에 의한 병참선 확보에 실패했다. 예성강 전투의 패전으로 兵站線(병참선)을 유지할 수 없었던 당 지상군은 이후 약 1년간 南下할 수 없었다. 文武大王으로서는 신라군을 재정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문무대왕은 당군의 主力이 고구려부흥군과 전투를 전개하던 사이에 백제 故土를 지배하던 당의 직할 통치기관인 웅진도독부를 완전히 축출하고, 長槍幢(장창당) 등 對기병부대를 창설해 전투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그 해 10월, 웅진성에 파견되어 있던 唐의 관원과 백제 유민 2000여 명이 47척의 선박에 분승해 왜국으로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신라의 공세 때문에 웅진도독부가 더 버티기 어렵다는 전망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어 672년 2월, 신라군은 대대적인 포위 섬멸작전을 전개해 웅진도독부를 사실상 소멸시켰다.


이에 당도 결전을 벌일 의도를 노골화했다. 672년 7월에 東州道행군총관 고간이 漢人(한인) 기병 1만 명, 李槿行이 말갈·거란병 3만 명을 이끌고 평양에 再진입했다. 이때 고간-이근행 軍은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평양 근교 韓始城(한시성)과 馬邑城(마읍성)을 쳐서 빼앗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