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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는 의외로 해군 强國이었다

정순태(작가)   |   2016-09-29 | hit 9751

22회 海戰에서 全勝&nbsp


676년 토번의 내분을 이용하여 당 고종이 총공세를 가하려고 했을 때 羅唐전쟁은 휴전상태로 들어갔다. 이근행의 말갈군단이 서역으로 이동하여 청해의 對토번전에 투입되어 한반도 전선에 지상군을 투입할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그 대신 당 고종은 설인귀의 함대를 한반도에 투입했다..


676년 11월, 薛仁貴(설인귀)의 唐 水軍(당 수군)은 서해안을 우회하여 금강 어귀로 진입하려고 시도했다. 사찬 金施得(김시득)이 지휘한 신라 수군이 설인귀가 지휘한&nbsp당의 수군을 금강 하구의 伎伐浦(기벌포: 충남 서천군 장항읍) 앞바다에서 포착했다. 신라 수군은 첫 전투에서 패했으나, 이어 전개된 22회의 大小 전투에서 전승을 거두고 唐 수군 4000여 명을 살상했다.


기벌포 해전의 승리는 신라 수군 작전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왜 이런 평가가 가능한 것인가?


22회의 해전은 그것이 해상기동전이었음을 의미한다. 종래의 해전은 接舷戰(접현전) 위주로 전개되었다. 접현전은 피아의 함선이 뱃전을 마주대어 싸우다 상대의 뱃전에 뛰어올라가 칼과 창으로 결판을 내는 방식이었던 만큼 대개 한두 차례의 접전만 벌려도 승패가 판가름 났기 때문이다.


기벌포 해전 당시, 신라 해군은 千步弩(천보노) 등 새로운 공격용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弩(노)는 短兵武器(단병무기)가 아니라 長兵武器(장병무기)로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전투할 때 위력을 발휘했다. 2016년 올림픽의 양궁에서 한국팀과 선수가 금메달을 싹쓸이하는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신라의 弩(노)는 羅唐전쟁 開戰(개전) 직전에 이미 唐고종이 부러워했을 만큼 우수한 무기였다. &lt&lt삼국사기&gt&gt 문무왕 9년(669) 겨울 條(조)에 따르면 唐고종은 신라 弩의 기술자인 仇珍川(구진천)을 詔書(조서)로써 唐에 불러들여 弩 제조의 노하우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구진천은 끝내 그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다.&nbsp


&lt唐의 사신이 와서 詔書(조서)를 전하고, 弩(노)의 기술자인 사찬 구진천을 데리고 갔다. 황제(唐고종)가 弩를 만들고 나서 화살을 쏘아 보니 30步밖에 나가지 않았다. 황제가 『너희 나라 弩는 1000步를 나간다고 들었는데, 지금 만든 것은 겨우 30步밖에 나가지 않으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고 물었다.


구진천은 『목재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라의 목재로 만든다면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목재를 요구하였으므로 대나마 福漢(복한)을 파견하여 목재를 바쳤다. 황제가 즉시 弩를 개조하게 하였는데, 개조한 후에 쏘아 보니 60步밖에 나가지 않았다.… 황제는 그가 고의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重罪(중죄)를 준다고 위협해 보았으나 그는 끝까지 그의 재능을 모두 발휘하지 않았다.&gt&nbsp


신라가 海戰에 강했던 배경&nbsp


古代 중국은 전통적으로 육군국이었지, 해군국은 아니었다. 양자강 등에서 水戰을 벌이기는 했지만, 海戰의 경험은 거의 없었다.


반면 신라는 오랜 세월 倭(왜)와의 전투를 통해 해전 경험이 풍부했다. 「삼국사기」 유례이사금 6년(289) 여름 5월 조에는 『왜병이 온다는 정보를 듣고 선박과 병기를 수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助賁尼師今(조분니사금) 3년 가을 7월 조에는『이찬 于老(우로)가 왜인과 沙島(사도)에서 싸우는데,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질러 왜선을 불태우니 적들이 물에 빠져 모두 죽었다』는 기사도 보인다.


신라는 이후에도 292년·297년·346년·364년·394년·405년·407년·500년에 海路(해로)로 침입한 왜군과 싸웠다. 신라와 倭가 자주 싸운 것은 신라가 가야 여러 나라를 무력으로 잠식해 들어가자 규슈(九州) 지역에 산재해 있던 가야系 왜의 小國들이 신라에 적대감을 가지고 신라를 공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라는 일찍부터 해군을 창설·육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는 소지왕 15년(493) 臨海鎭(임해진)과 長嶺鎭(장령진)을 설치하고 해군기지를 보강했다. 신라의 선박 건조 기술은 同시대 최고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 古墳(고분)에서 발굴된 배 모양의 5~6세기 토기가 이런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신라의 함선은 바다에서 풍파를 만나도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뱃머리(이물)와 꼬리(고물)를 비교적 높게 만든 構造船(구조선)이었다. 船首(선수)도 파도를 헤치는 데 알맞게 예리하다. 오른쪽 끝에 있는 돌출부는 전투시 적선에 기어오르기 위한 사다리로 보인다. 유럽 선박들의 발달사를 보더라도 신라의 함선과 유사한 船型의 배들은 14세기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신라는 의외로 海軍 강국이었다. 소지마립간 22년(500) 봄3월, 왜적들이 長峯鎭(장봉진)에 침입했다가 쫓겨간 후 160여 년간 다시는 한반도 해역에 나타나지 못했다.


신라 수군은 기벌포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압록강 이남에서의 당군의 작전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병참선 유지가 어려운 상황에서 對신라戰 강행은 唐으로서도 모험이었던 것이다.


기벌포 전투 패전 후 당군은 더 이상 한반도에 침공군을 투입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평화가 도래한 것은 아니었다. 對토번 전쟁이 好轉되면 언제든 한반도를 다시 침략하겠다는 것이 唐고종의 의지였다. 신라로서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긴장의 시대가 그 이후 무려 60년간이나 계속된다.


唐은 676년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겼던 安東도호부를 677년 2월에는 新城(신성: 지금의 무순)으로 더욱 후퇴시켰다. 唐고종은 고구려의 보장왕 高藏(고장)을 요동도독에 임명하고, 다시 조선왕으로 책봉했다. 웅진도독 扶餘隆(부여융)도 帶方王(대방왕)으로 책봉되었다. 전통적인 以夷制夷(이이제이), 즉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하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高藏(고장)은 오히려 反唐투쟁을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37019州(공주: 사천성 &#37019崍縣&#8231 공래현)로 유배되었고, 요동에 再이주되었던 고구려 유민 2만8000여 호도 또다시 감숙성과 하북성 등지로 분산 이주당했다. 帶方王(대방왕) 부여융은 신라의 공격을 받을 것이 뻔했던 만큼 감히 한반도로 들어오지 못했다.


678년, 신라는 船府(선부)를 설치해 종래 兵部의 大監(대감)과 弟監(제감) 등이 관장하던 水軍&#8231 造船(조선) 업무를 전담시켰다. 船府의 설치는 신라의 水軍 발전을 위한 획기적 조치였다. 신라가 삼국통일로 이전보다 3배나 되는 영토를 장악하게 되고, 국토의 3면에 바다를 낀 해양국이 되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