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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 고종에게 신라 再侵을 반대한 신하가 있었다

鄭淳台(작가)   |   2016-10-01 | hit 5723

"新羅는 비록 자주 불순하지만, 일찍이 변방을 침범하지 않았다."&nbsp

676년의 기벌포 전투는 승리했지만, 당시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羅唐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만일, 토번이 패망한다면 唐이 이끄는 말갈군단은 또다시 신라로 말머리를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와 토번은 물론 군사동맹을 맺은 바 없었지만, 수퍼파워 唐을 東·西 양쪽에서 끼고 견제·협공했다는 점에서 손발이 척척 맞았던 셈이다. 677년 5월, 토번은 扶州(부주)의 臨下鎭(임하진)을 공격했다.

그런데도 신라를 먹으려는 唐고종의 집념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토번에 대한 정벌이 시급했기 때문에 신라에 대한 再侵은 결국 불발로 끝났다. 다음은 &lt&lt資治通鑑&gt&gt(자치통감) 의봉 3년(678) 9월 條의 기사이다.

&lt高宗이 장차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토벌하고자 했다. 병으로 집에 누워 있던 시중 張文瓘(장문관)이 입궐하여 高宗에게 간했다.

『지금은 토번이 침구하니 바야흐로 군대를 일으켜 서쪽을 토벌해야 합니다. 신라는 비록 자주 불순하지만, 일찍이 변방을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또 東征(동정)을 한다면, 臣(신)은 그 폐가 공사 간에 심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에 唐고종은 (對신라戰을) 중지했다. 癸亥(계해)에 장문관이 죽었다. 丙寅(병인)에 李敬玄의 장병 18만이 靑海에서 토번의 論欽陵과 싸우다 패했다.&gt

678년 9월, 左衛대장 劉審禮(유심례)가 토번에 대해 대규모 반격을 시도했지만, 오히려 토번군의 포로가 되는 참패를 당했다. 토번은 이후에도 唐의 변경을 계속 기습했다. 680년에는 토번이 사천 서북부 지역의 전략적 요새인 安戎(안융)을 점령했다.

679년 10월, 唐과 토번은 文成公主의 노력으로 일시 화해했다. 문성공주는 641년 당태종의 황녀(사실은 당태종의 사촌인 李道宗의 딸)로서 토번의 승첸칸포에 시집 간 여성이다,

&lt&lt자치통감&gt&gt 의봉 4년(679) 10월 조에는 『文成公主(문성공주)가 대신 論塞調(논새조)를 파견하여 만첸칸포(승첸칸포의 후계 칸포)가 죽은 것을 고하고 화친을 청하자, 황제(唐고종)가 낭장 宋令文(송영문)을 토번에 장례사절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토번 측의 기록에 따르면 만첸칸포는 676년 겨울에 병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토번에서는 왕이나 고위 귀족이 죽으면 가매장했다가 3년 후에 장례를 치르는 것 같다. 왜냐하면 680년에 사망한 文成公主도 3년 후인 683년에 장례가 거행되었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