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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로 東아시아 세계의 平和체제가 완성되다

정순태(작가)   |   2016-10-04 | hit 8110

토번의 영웅 論欽陵


676년 만첸칸포의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치토슨(器弩悉弄)은 나이가 어려 국정은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論欽陵(논흠릉)이 맡았다. 이때 토번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심각한 내분을 겪었다. 다음은 《冊府元龜(책부원귀)》의 관련 기사이다.


&lt儀鳳 원년(676) 칸포가 죽었다. 그때, 嫡子(적자) 치토슨은 大臣 麴殺若(국살약)과 함께 羊同(토번의 부용국)에서 兵馬(병마)를 징발하고 있었다. 만첸칸포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즉각 귀국하여 칸포가 되었다. 그때 나이가 여덟 살이었다. 그의 동생은 여섯 살로서 論欽陵(논흠릉)의 부대에 있었다. 欽陵이 강성하여 치토슨의 동생을 받들어 칸포로 삼으려 했지만, 마침내 欽陵이 大義에 따라 殺若과 協心(협심)함으로써 치토슨의 왕위가 비로소 확정되었다&gt


국살약은 만첸칸포의 사망 당시에는 그의 외손(혹은 생질)인 치토슨을 데리고 西部 티베트高原에 위치한 羊同(양동)에 나가 있다가 만첸칸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羊同의 군사를 거느리고 급거 귀국했다. 그때 논흠릉은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라사(拉薩)로부터 5000리(1907km) 북방의 靑海 지역에서 유인궤·이근행 등의 당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唐고종은 토번의 왕위계승의 결과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裵行儉(배행검)에게 명하여 토번 내부의 분열공작을 전개했다. 그때 치토슨과 국살약은 羊同의 군대를 데리고 수도인 라사로 먼저 입성했다.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던 당시 토번의 내분을 조금 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羊同은 승첸칸포 재위時에는 토번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승첸칸포는 그의 여동생을 羊同의 王 리그미에게 시집을 보내고서야 평화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승첸칸포는 기회를 노렸다. 664년, 羊同의 왕비가 된 승첸칸포의 여동생은 남편 리그미가 屬國(속국)인 숨파에 순시하러 간다는 정보를 그녀의 오빠 승첸칸포에 알렸다. 승첸칸포는 길목에 복병을 깔아 리그미 王을 격살했다. 이로써 승첸칸포는 티베트고원을 통일할 수 있었다.


토번은 羊同을 힘으로 굴복시키기는 했으나 직할 통치는 하지 못했던 듯하다. 토번의 「年代記(연대기)」에 따르면 만첸칸포의 사망 직후인 676년 연말과 677년 정초에 이르는 시점에 羊同은 논흠릉이 이끄는 토번군에 의해 가혹하게 토벌되었다. 국살약에게 협조한 羊同은 논흠릉에게 기분나쁜 존재였을 것이다.


만첸칸포가 사망하기 이전에 이미 왕비 로(沒祿)씨와 그녀의 친정오빠 국살약을 중심으로 하는 파벌은 權臣 논흠릉의 정권장악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왕비 로氏는 국살약과 짜고 對唐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논흠릉과 사전협의도 없이 羊同의 군사까지 동원해 그녀의 소생인 치토슨을 후계왕으로 즉위시켰던 것이다.


이때 논흠릉은 중대한 정치적 양보를 했다. 唐과 전쟁을 하는 상황에서 내부 권력투쟁을 벌인다면 실크로드의 이권을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나라가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논흠릉은 치토슨을 후계 칸포로 받들기로 하는 한편 토번의 병권을 계속 장악해 對唐戰을 줄기차게 전개했던 것이다.


679년, 문성공주의 노력으로 당과 토번은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681년 당은 東돌궐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690년 7월, 측천무후는 자신을 彌勒佛(미륵불)로 자칭했다. 동년 9월에는 당의 국호를 폐지하고, 武씨 왕조인 周(주)를 창업했다. 무측천은 중국역사상 前無後無(전무후무)한 女帝(여제)가 되었다. 그런데 《삼국사기》 신문왕 12년(692) 조에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 어려운 기사가 있다.


&lt唐中宗(당중종)이 사신을 보내 구두로 다음과 같은 칙령을 전했다. “우리 太宗 文皇帝(태종 문황제: 李世敏)는 신성한 공덕이 천고에 뛰어났으니, 붕어하는 날 廟號(묘호)를 太宗이라 하였다. 그런데 너희 나라 先王 김춘추에게도 동일한 묘호를 쓴 것은 매우 참람된 일이니, 조속히 칭호를 고쳐야 한다.” &gt



692년이라면 무측천이 周를 창업하고 즉위한 지 3년째이다. 따라서 위의 ‘唐中宗’은 ‘周則天’(주측천)이라고 해야 옳다. 신문왕으로서는 양자택일을 강요당한 셈이었다.


하나는 태종무열왕의 추존명을 고치고, 당에 굴욕외교를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에 결사항쟁을 준비하면서 그것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이에 대한 신문왕의 답변이다.


&lt“우리나라 先王 김춘추의 시호가 우연히 聖祖(성조)의 묘호와 서로 같게 되었는데, 칙령으로 이를 고치라 하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선왕 김춘추도 어진 덕이 있었으며, 더구나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그의 功業(공업)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


신문왕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太宗’이란 묘호가 중국의 전유물이 아니다는 원칙에서 한걸음도 양보하지 않았다. 서영교 교수는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lt전자를 택하면 신라 내부의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다. 선덕여왕 폐위를 결정한 和白의 권위를 무력으로 뒤엎고 정권을 장악한 후 신라사회를 통일전쟁이란 국제전에 끌어들인 태종무열왕 김춘추, 그의 추존명의 개칭은 中代왕권의 존재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아가 이는 통일전쟁에서 왕의 이름으로 사라져 간 자들의 희생을 덧없는 것으로 만들어, 살아 있는 자들의 충성을 감퇴시킨다.


후자를 택하자면 세계 최강의 당과 일전을 불사하는 부담이 따른다. 신문왕은 자신의 왕국을 무력으로 파괴할 수도 있는 唐제국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당에 굴복하여 中代왕실의 창건자 太宗의 칭호를 개칭하고서는 진골사회 내부에서 무열왕계의 카리스마 상실로 이어질 것이 확실했다.&gt



東아시아 세계의 平和체제 완성


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도 船府(선부) 신설, 誓幢(서당: 군단)의 증설, 騎兵(기병)의 증강 등 대규모 군비확장을 계속했다. 특히 690년에는 騎兵(기병)을 말에서 끌어내리는 갈구리가 主力 무기인 皆知戟幢(개지극당)을 신설했다. 세계제국으로 건재했던 唐은 언제든 대내외 정세가 호전되면 다시 신라와의 전쟁을 감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양국 간 국력의 차이가 현저했던 만큼 전쟁 재발에 대한 우려는 신라의 몫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무왕은 왜국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이었다. &lt&lt日本書紀&gt&gt와 &lt&lt속일본기&gt&gt에 의하면 668년부터 700년까지 신라는 25회에 걸쳐 왜국에 사신을 파견했다. 사절단의 대표도 대아찬(관등 제5위) 이상의 진골왕족이나 고위급이 많았다. 심지어 675년 2월에는 왕자 金忠元(김충원)을 사절로 보내기도 했다.


679년 토번의 유력한 동맹인 西돌궐의 여러 부족이 당군에게 격파되어 그 可汗(가한)이 사로잡히고, 토번도 만첸칸포가 죽은 후 태후와 권신 논흠릉 사이의 암투가 지속되는 내분상태에 있었다. 이때 신라를 재침하려던 唐고종의 야망이 시중 張文瓘(장문관)의 만류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문무왕으로서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10월부터 본격화된 신라의 對일본 평화공세는 위와 같은 西域정세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당전쟁 승리 이후에도 노심초사(勞心焦思)하던 문무왕은 681년 7월1일 죽고, 그의 아들 神文王(신문왕)이 즉위했다. 신문왕도 9誓幢(서당)을 완성하는 등 군비확장에 힘썼다.


683년 12월, 唐고종이 죽었다. 이후 22년간 武則天(무측천) 중국의 절대권력을 장악했다.


698년, 고구려유민과 말갈족을 이끈 大祚榮(대조영)이 고구려의 故土 만주에 渤海(발해)를 세웠다. 732년 발해군이 요동반도의 요충 登州(등주)를 선제공격해 등주자사 韋俊(위준)을 죽였다. 733년 발해&#8231 당 간의 전쟁이 확대되자 唐은 신라에 접근했다. 성덕왕은 당현종의 요청에 따라 발해의 남부국경으로 신라군을 진군시켰지만, 폭설 때문에 회군했다.


성덕왕 34년(735)에 唐玄宗은 신라가 영유하고 있던 평양 이남의 땅을 공식적으로 인정하했다.


737년 발해 무왕의 둘째 왕자인 大欽茂(대흠무)가 문왕으로 즉위한 것을 계기로 당과의 관계가 개선되었다. 이후 東아시아 세계는 장기적 평화체제로 진입했다.






(박스)&nbsp


吐藩의 西域 경영


唐의 西域 경영에 있어 최대의 라이벌은 吐藩(토번)이었다. 전설상 “하늘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온 天孫”이라는 네치첸 칸포가 창업한 토번은 6세기 후반 중앙아시아 티베트 남부에 거점을 두고 대두, 「승첸」칸포(王)에 이르러 티베트를 통일했다.


승첸칸포는 唐태종에게 공주를 아내로 맞겠다고 청했는데, 唐태종은 처음엔 거절했으나 변경을 강타한 토번군의 침공을 받고 화의가 이뤄져 641년 文成公主(문성공주)가 황족인 江夏王 李道宗(강하왕 이도종)의 호위를 받으며 토번의 수도 라사로 가서 승첸칸포와 결혼했다. 李道宗이라면 당태종과 4촌간으로 문성공주의 親父(친부)이다.


승첸칸포가 죽은 후 토번은 靑海 지역의 吐谷渾(토욕혼)의 귀속을 둘러싸고 唐과 싸워 점차 전쟁의 규모를 확대시켰다. 662년, 토번은 西돌궐의 일부인 弓月(궁월)과 손을 잡고 토욕혼을 멸망시킨 후 본격적으로 西域(서역: 지금의 新疆위구르自治區)에 진출해 호탄(和田)을 공격하고, 670년에는 쿠차, 카슈가르, 호탄, 카라샤르 등 唐의 安西4鎭을 모두 함락시켰다. 이에 安西都護府는 지금의 투루판인 西州(서주)로 물러났다.


675년, 唐은 安西4鎭을 탈환했지만, 토번은 곧 西돌궐의 阿史那都支(아사나도지) 등과 함께 또다시 安西도호부와 4鎭을 함락시켰다. 이후에도 안서4진은 당과 토번이 번갈아 가며 차지했다.


679년, 唐은 長安에 망명해 있던 사산朝 페르시아의 왕자 페로스(사실은 그의 아들 나르세스)를 고국에 돌려보낸다고 사칭하고 호위병을 가장한 원정군을 보내 무방비 상태의 阿史那都支를 포획했다. 이때 당군은 스이아브(碎葉) 등 4鎭을 회복해 스이아브城을 중국식으로 축성했다. 687년에도 토번이 서역을 제압했지만, 또다시 王孝傑(왕효걸)의 당군이 토번군을 무찌르고 스이아브를 포함한 4鎭을 탈환했다.


7세기 후반은 唐과 토번의 서역 쟁탈전이 일진일퇴를 반복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8세기 전반은 唐玄宗의 중흥기로서 唐의 세력이 서역에서 優位(우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8세기 중반, 토번은 「安史의 亂」으로 혼란에 빠진 唐을 누르고 서역의 실크로드( 오아시스路)를 모두 장악했으며, 唐代宗 원년(763)에는 唐의 수도 長安을 일시 점령하는 등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때의 「長安 점령 기념비」가 현재 라사의 포탈라宮 앞에 보존되어 있다.


토번은 군사국가조직과 기마부대의 기동력을 활용해 大帝國을 지향했다. 790년에는 서역과 天山 북쪽 스텝路[草原의 길]까지 일시 지배했다. 그러나 같은 무렵부터 성행한 불교사상의 영향으로 821년 唐나라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 후 불교에 의한 理想(이상)국가의 실현을 꿈꾸었으나 帝國 운영과의 모순이 확대되어 846년 멸망했다.


토번의 故地인 티베트는 현재 中國의 1개 省으로 취급되는 西藏自治區(서장자치구)로 되어 있어 토번의 후예들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열망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고 티베트의 종교지도자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입국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았다. 金大中 대통령은 야당지도자 시절에 달라이라마를 초청했지만, 그의 집권기에 달라이라마의 한국방문이 실현되지 않았다.&nbsp&nb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