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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번의 공세를 7년간 막아낸 백제부흥군 출신 흑치상지

정순태(작가)   |   2016-10-26 | hit 7984

백제 출신 장수 흑치상지(630~689)는 서역 전선에서 토번의 공세를 7년 동안 막아냈다. 여기서 흑치상지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백제 패망 당시 관등 제2위인 달솔(達率)이었으며, 풍달군장(風達郡將)이란 직책에 있었다. 백제 멸망 후 맨 처음 백제 부흥의 깃발을 들었던 그는 임존성(任存城: 충남 홍성군 대흥면)을 거점으로 복신(福信)·도침(道琛) 등과 함께 백제부흥군을 이끌었다.


그러던 그가 663년 9월의 백촌강 전투를 전후하여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에게 항복한 후 스스로 당군을 이끌고, 백제부흥군의 마지막 거점 임존성(任存城)을 제 손으로 함락시켰다.


그렇다면 그가 왜 당에 투항했을까? 이는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하던 지도층 간의 내분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복신에 의해 도침이 살해되고, 복신은 왜국이 책봉한 괴뢰 왕 부여풍(扶餘豊)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신과 가까웠던 흑치상지는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 같다.


당의 부도(副都)인 낙양 북망산(北邙山)에서 발견된 흑치상지의 묘비명(墓碑銘)에 따르면, 당 고종이 사신을 보내 흑치상지를 회유하자 흑치상지는 부장인 사타상여(沙&#21522相如)와 함께 당장 유인궤(劉仁軌)에게 투항해 664년부터 8년간 웅진도독 부여융을 보좌했다.


웅진도독부가 신라군의 공세에 의해 한반도에서 쫓겨남에 따라 672년 당에 들어간 흑치상지는 양주자사(洋州刺史) 등으로 복무하다가, 678년 하원도(河源道)대총관 이경현(李敬玄)과 공부상서로서 수군대사(水軍大使)였던 유심례(劉審禮)를 따라 토번 공략에 참여했다. 이때 유심례의 선봉부대가 패전해 토번군의 포로가 되자, 이경현의 본대는 전의(戰意)를 상실하고 궤멸의 위기에 빠졌다.


이런 혼란 속에 흑치상지는 활로를 찾기 위해 밤중에 500명 규모의 결사대를 이끌고, 토번 진영을 급습했다. 불의의 급습을 받은 토번군은 추장 발지설(跋地設)이 놀라 자기 부대를 버리고 도주하는 등의 혼란을 빚었다.


이런 틈을 타, 이경현의 잔존 부대는 가까스로 선주(&#37167州: 지금의 청해성 樂都縣)로 퇴각할 수 있었다. 당 고종은 흑치상지의 전공을 높이 평가해, 그를 좌무위장군으로 발탁하고, 금 500량과 비단 500필을 상으로 내렸다.


이듬해(679년), 토번군이 또 청해지역을 침입했다. 이경현은 황하(黃河)의 지류인 황천(湟川: 지금의 황수)에 진을 치고 있는 토번군 3만과 싸웠으나 또 패전했다.


그러나 흑치상지는 정예 기병 3000기를 이끌고 토번 진영에 대한 득의(得意)의 야습을 감행해 2000명을 베고, 수만 마리의 양과 말을 노획했다. 전세를 호전(好轉)시킨 흑치상지는 이경현을 대신하여 하원도경략대사가 되었으며, 베 400필의 은상을 받았다. 당대(唐代)의 하원(河源)은 지금의 청해성 성도(省都)인 서녕(西寧)이다. 하원도경략대사는 청해 방면 총사령관인 셈이다.


흑치상지는 서녕(西寧)의 건설자였다. 토번군을 막으려면 병력을 증강시켜야 했고, 병력을 증강시키려면 병참로의 안전이 긴요했다. 흑치상지가 서녕 일대에 봉수대 70여개소를 축조했던 까닭이다. 또 서녕을 꿰뚫고 흐르는 황수(湟水) 유역에 둔전(屯田) 방식으로 5000 경(頃)의 농토를 개간하여, 해마다 1백만 곡(斛)의 곡물을 거두어들였다. 1경은 100무, 1무는 100보 (1보=1.5m) 평방이다. 1곡은 10말(斗)이다.


681년, 토번의 찬파(贊婆)가 다시 침입해 청해에 진영을 설치했다. 흑치상지는 기병 1만기를 거느리고 급습, 토번군 진영을 파괴했다. 양곡 창고를 불태우고, 양과 말 등을 무수히 노획했다. 흑치상지는 서녕 일대를 요새화 했다.


684년, 그는 좌응양위대장군 연연도부대총관에 임명되어 청해를 떠났다. 연연도(燕然道)는 지금의 外몽골 방면이다. 그가 청해를 지키고 있던 7년 동안, 토번은 그를 두려워해 감히 청해 지역을 약탈하는 일이 없었다. 같은 해(684), 다시 승진해 좌무위대장군과 검교좌우림군이 되었다. 좌우림군은 장안 주둔 북아금군(北衙禁軍)을 다스리는 요직이었다. 이는 684년 이경업(李敬業)의 모반을 평정한 데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