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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자 때문에 무덤이 훼손당한 이적(李勣)

정순태(작가)   |   2016-11-04 | hit 9008

683년 12월, 당고종이 병사하고, 중종(中宗)이 즉위했으나 곧 여릉왕으로 강등되고, 이어 즉위한 예종은 모든 정사를 어머니인 무측천에 맡기고 뒷전에 물러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적(李勣, 당시 사망)의 손자 이경업(李慶業)이 모반했다. 그는 무측천에 의해 유주사마(柳州司馬)로 좌천되자, 長江 하류 양주(揚州)에서 거병했다.


당의 실질적 통치자 무측천에 의해 강등되거나 관직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이 반란대열에 가담했다. 무측천은 이경업으로부터 국성(國姓)인 李씨를 박탈해 이후 그는 본래의 성인 서(徐)씨로 되돌아가 이후 서경업이라 불리게 되었다.


서경업의 조부인 이적(李勣)의 본디 이름은 서세적(徐世勣)이었다. 그는 17살 때 이미 군도(群盜)의 두목인 적양(翟襄)의 부장이 되었다. 그런데 명문 출신 이밀(李密)이 양현감(楊玄感: 隋나라의 고구려 침략시 병참사령관)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양현감이 패사(敗死)하자, 쫓기는 처지에서 적양에게 투신했다.


이밀은 수·당의 황실처럼 서위(西魏) 이래 최고의 武人귀족인 8주국(八柱國) 가문 출신이며, 양현감은 수나라의 개국 1등공신 양소(楊素)의 아들이다. 양현감은 수양제의 고구려 2차 원정 때(613년 6월) 후방에서 병참을 총괄하다가 반란을 일으켜 수군(隋軍)의 회군을 불가피하게 만든 인물이었다. 양현감의 반란은 그 이후 중국 각지에서 잇달아 일어난 대반란의 신호탄이 되었다.


명문 출신 이밀은 곧 세리(稅吏) 출신인 적양을 제2인자로 밀어내고 자신이 군도(群盜) 집단의 주인이 되었고, 나이 20세의 서세적을 휘하의 우무후대장군으로 승진시켰다. 이밀은 정국(鄭國) 황제를 자칭하던 군벌 왕세충(王世充)이 웅거하던 낙양(洛陽) 공략에 집착했다가 패해, 당시 막 長安을 점거했던 당고조 이연(李淵)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때 이밀은 부장인 서세적을 하북(河北)의 여양(黎陽)에 남겨놓아 후일을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서세적은 이밀을 따라 당에 투항했던 위징(魏徵, 580~642)의 권유로 당에 귀순했다. 당태종 李世民(이세민)은 서세적에게 국성인 李씨를 내리고, 이세적(李世勣)은 당태종 李世敏(이세민)의 이름자 ‘世’를 기휘(忌諱)해 이적이라 칭했다.


이적은 당태종 때(630년) 이정(李靖)과 함께 당시 草原(초원)의 최강국인 東돌궐을 쳐서 힐리가한(詰利可汗)을 사로잡는 엄청난 전공(戰功)을 세웠다. 東동궐이라면 617년 太原留守 李淵(태원유수 이연: 후일의 당고조)이 太原(태원)에서 거병했을 때 騎兵(기병) 3000기를 지원했던 유목기마민족의 나라다. 626년 8월, 당태종 이세민은 아버지인 당고조를 퇴위시키고 즉위하자말자 東돌궐의 침략을 받았다. 이때 당태종은 長安의 府庫(부고)를 털어 東돌궐의 힐리가한에게 조공을 바쳤다.


이적은 645년 당태종의 1차 고구려 원정에 참전했다. 당태종 이세민은 649년 죽기 전에 이적을 첩주(疊州)도독으로 좌천시키면서, 후계자인 당고종 李治(이치)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이적은 才智(재지)가 남아도는 남자다. 그러나 너는 아직 그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이적을 첩주도독으로 날려버릴 것이다. 만약 이적이 꾸물대며 부임을 주저하면 그것을 이유로 죽여 버려! 그러나 그가 첩주에 부임하면 내가 죽고 나서 즉시 불러올려 복야(僕射: 재상)에 앉혀라!”


사령을 받은 이적은 눈치 빠르게 즉각 첩주로 내려갔다. 첩주는 당시 토번과의 접경지대인 궁벽한 시골로서 지금의 사천성 서부의 질부(迭部) 부근이다. 당고종이 즉위한 649년에 이적은 즉각 長安으로 불려가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652년, 당태종의 後宮(후궁, 才人)이었던 무조(武照)가 궁중에 다시 들어가 당고종의 소의(昭儀)가 되었다. 그때 무조의 나이 28세, 고종 李治보다 5세나 많은 ‘年上의 여인’이었다. 당고종은 3년 후인 655년 名門 출신 왕(王)황후를 폐하고, 무(武)소의를 황후로 삼으려 했다.


탁고지신(託孤之臣)들인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저수량(&#35098遂良)이 이를 반대해 당고종은 궁지에 몰렸다. 이때 이적이 “이것은 폐하의 가정문제”라고 아부해, 당고종과 무측천의 신임을 얻었다.


무측천의 시대에 이적은 조정에 들면 재상, 조정을 나서면 대총관(大摠管)이었다. 그는 당군의 주장(主將)으로서 668년 9월 평양성을 함락시켜 보장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그런 그도 사후(死後)에 그의 손자 때문에 그의 무덤이 무측천에 의해 파헤쳐졌다. 그러나 부관참시(剖棺斬屍·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벰)를 당했는지의 여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서경업의 반란은 무측천의 찬탈에 의해 당조(唐朝)의 멸망이 예견되는 시기에 발생해,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강등당한 사람들의 결집해 일으킨 거병이었다. 서경업 진영에 가담한 시인(詩人)인 낙빈왕(駱賓王)은 측천무후를 격렬하게 규탄하는 유명한 격문을 역사에 남겼다. 즉, “한줌의 흙이 마르지 않았는데, 6척의 고아는 어디에다 맡기랴!”라는 구절은 무측천도 읽고 신음했다는 명(名)문구로 회자되었다.


여기서 ‘한 줌의 흙’이란 무측천의 남편인 고종의 능묘의 흙이고, ‘6척의 고아’란 무측천에 의해 폐위된 중종(中宗)을 가리킨다. 무측천은 낙빈왕을 중앙 근무로부터 지방 말직으로 강등시킨 고관들에 대해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없다고 매우 꾸짖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낙빈왕은 낙빈의 왕이 아니라, 성(姓)이 낙빈이요, 이름이 왕(王)이다.


그러나 서경업의 전략은 조부를 닮지 못해 매우 졸렬했다. 곧바로 북진하여 낙양(洛陽)이나 장안을 공략하지 않고, 오히려 뒷걸음을 쳐 옛 남조(南朝) 정권의 수도였던 강남의 남경(南京)으로 들어가 근거지를 지키려는 모습을 보였다. 무측천은 이효일(李孝逸)을 주장(主將)으로 한 대군을 파견해 반란을 진압했는데, 이때 흑치상지는 강남도행군대총관으로서 그 진압작전에 참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