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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태민의 묘비가 빚어낸 논란

정순태(작가)   |   2016-11-24 | hit 18894

경기도 용인의 야산에 소재한 최순실 씨의 亡父(망부) 묘비에 새겨진 ‘隨城崔公太敏’(수성최공태민)이란 본향과 이름, 그리고 출생연도를 둘러싸고 묘한 논란이 빚어지고 있다. 수성 최씨 종친회 측은 묘비에 새겨진 본향의 漢字가 자신들 가문에서 쓰는 것과 다르다고 밝히고 있다.


종친회에 따르면 자신들은 ‘수나라 隋’를 쓰는 데 반해 최태민의 비석에서는 ‘따를 隨’라는 한자를 사용했다는 것이다. 더욱이 隨城 최씨는 최태민의 경우 이외엔 사용례가 발견되지 않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이로 인해 최태민 일가가 ‘짝퉁 본관’으로 명문가 행세를 한 게 아니냐는 관측도 나돈다. 그러나 ‘수나라 隋’와 ‘따를 隨’ 사이엔 묘한 역사적 사실이 내재해 있다.


6세기 후반 북중국에서 군림한 鮮卑族(선비족)의 정복왕조인 後周(후주)의 마지막 황제 靜帝(정제)는 외척인 楊堅(양견)에게 581년&nbsp나라를 빼앗겼다. 양견이 국호를 ‘수’라고 정한 이유는 그가 즉위 전에 세습했던 작위가 隨國公(수국공)이었기 때문이다. 창업자의 연고지를 제국의 이름으로 삼았던 사례는 중국사에서 더러 등장한다. 예컨대 618년 隋의 天下를 대신해 唐(당)제국을 창건한 唐高祖 李淵(당고조 이연)의 경우에도 즉위 전 세습 작위가 唐國公(당국공)이었다.&nbsp


그런데 隨라는 地名(지명)의 문자에는 ‘&#36790’(착)이라는 획이 들어가 있다. &#36790은 “달아난다”는 의미이다. 달아난다면 短命(단명) 왕조로 끝난다는 것인 만큼 양견은 &#36790을 제거해 隋라는 새 글자를 만들어 국호로 삼았다.&nbsp&nbsp&nbsp


그런 隋文帝 楊堅(수문제 양견)은 589년 양자강 이남의 陳(진)을 멸망시켜 350여년 만에 중국역사상의 통일왕조를 이룩했지만, 604년 병석에서 그의 차남 楊廣(양광)에게 어이없이 암살당하고 말았다. 수문제를 이은 隋煬帝(수양제) 양광은 3차에 걸친 고구려 원정의 실패와 무리한 대토목공사를 벌여 백성들의 원한을 샀던 끝에 그의 경호대장 宇文化及(우문화급)에게 살해당해 수제국은 37년 만에 망했다(서기 618년).


한국에서 隋城(수성)은 경기도 水原(수원)의 옛 이름 중 하나라고 한다. 수성 최씨는 신라 경순왕 김부의 13세손인 최영규(본래 성명은 김영규)를 시조로 모시고 있다. 수성 최씨, 즉 오늘날의 수원 최씨 중 유명인으로는 최태원 SK그룹회장 등이 손꼽힌다.


황해도 출신으로 월남했다는 최태민은 무슨 까닭인지 생전에 여섯 번이나 이름을 바꾸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또 그는 생전에 1912년생이라 자처했으나 그의 묘비에는 생년월일이 1918년 음력 11월5일로 되어 있다. 수성 최씨 종친회 측은 족보에 최태민이 등재되어 있지 않고, 일곱 번째 이름인 ‘태민’이나 그의 첫 이름이라는 ‘도원’이라는 이름자 중에 隋城 최씨의 行列字(항렬자)가 들어가 있지 않다고 밝혔다. 그렇다면 생전의 최태민은 끊임없이 자신의 과거를 지우거나 숨기며 살아가야 했던 인간이었는지 모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