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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秘話 추적] 5·17 직후 高建 정무수석의 행방 묘연

정순태   |   2002-11-18 | hit 1916

『정치, 내무, 국방 등 주요 업무를 관장하는 대통령 정무수석비서관으로서 국가의 비상시기였던 1980년 5·17 당시 대통령의 눈과 귀, 그리고 머리가 되어야 할 상황인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직무를 유기하고 20일간이나 행방을 감췄다는 것은 고위공직자으로서는 물론, 인간적으로도 용서받기 어려운 배신행위이다』(申斗淳)

5·17 당시 청와대 정무수석은 高建(고건)씨였다. 崔圭夏 대통령 시절 청와대비서실에 재직했던 인사들의 다수는 그때 高建씨의 행동에 대해 아직도 용납하지 않고 있다. 「지난 22년간 참아 왔다」는 그들이 高建씨에 대해 위와 같은 직격탄을 날리게 된 까닭은 月刊朝鮮 9월호에 보도된 인터뷰 기사 「행정의 達人(달인) 高建 前 서울시장」 중 일부 내용 때문이었다.

인터뷰 기사에서 月刊朝鮮의 질문 중 하나는 『1980년 5·17 때 정무수석비서관으로서 한동안 출근하지 않았는데, 공직자로서 무책임한 행동이 아니었느냐는 말이 있습니다. 당시의 사정을 설명해 주십시오』였다. 답변을 통해 高建씨는 『그 당시 저의 행적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분이 몇 분 있다는 것을 알고 있다』면서 『그러나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럼이 없다』고 자신의 입장을 방어했다.

高建씨의 인터뷰 기사에 대해 가장 먼저 「사실과 다르다」면서 月刊朝鮮에 이의를 제기해 온 사람은 崔圭夏(최규하) 대통령 시절 의전비서관을 지냈던 申斗淳(신두순)씨였다. 申斗淳씨는 崔圭夏씨가 국무총리를 지낼 때부터 그 비서관이었으며, 대통령 퇴임 후 국정자문회 의장을 역임할 때(1981~1987)도 그 비서실장을 맡은 바 있는 「崔圭夏 사람」 중 핵심인물이라 할 수 있다.

申斗淳씨는 月刊朝鮮과의 전화통화에서 『月刊朝鮮의 인터기사 내용과는 달리 당시 高建 정무수석이 사표도 내지 않고 행방을 감췄다』고 했다. 高建씨라면 광복 이후 한국 관료사회가 배출해 낸 정상급 행정가 중 한 사람이며, 이미 국무총리와 民選 서울시장을 거친 만큼 앞으로 그가 앉을 자리는 꼭 한 자리밖에 남지 않았다고 할 만큼 위신이 높다. 현실 정치의 상황에 따라 어느 날 아침 갑자기 유력 정당의 대통령 후보로 옹립된다고 해도 크게 놀랄 일이 아닐 만큼 정치적 비중도 가진 인물인 것이다.


「陽地만을 指向하면서 의리를 저버린 사람」

「전환시대의 앞서가는 행정가」, 「대한민국에서 가장 官運(관운)이 좋은 사람」으로 손꼽히는 그는 官界 최고의 엘리트 코스를 걸어왔다. 일찍이 명문 경기高와 서울大 정치학과를 졸업하고, 고시 행정과에 합격(1961)했다. 내무부 새마을담당관을 지내면서 재능을 보여 朴正熙 대통령의 사랑을 듬뿍 받으며 불과 37세에 전남도지사가 되었고, 1979년 1월에는 대통령 정무제2수석비서관으로 발탁되었다. 그해 10·26 사태 후 朴正熙 대통령을 승계한 崔圭夏 대통령은 정무제1수석(정치담당)과 정무제2수석(행정담당)을 통합해 그 자리에 高建씨를 앉혔다.

그러나 그는 崔圭夏 대통령을 사실상 下野시킨 全斗煥 대통령 밑에서도 교통부 장관, 농수산부 장관, 국회의원, 내무부 장관을 지냈으며, 盧泰愚 대통령 밑에서는 서울시장으로 임명되었다. 또한 金泳三 대통령 시절에는 3년간 명지大 총장을 역임한 데 이어 국무총리로 발탁되었으며, 金大中 대통령 시대에 들어와서는 집권여당에 입당하여 서울시장 후보로 공천을 받고 당선되어 민선 서울시장직을 4년간 역임하고 지난 6월29일 퇴임했다.

이렇게 朴正熙-崔圭夏-全斗煥-盧泰愚-金泳三-金大中 시대를 통틀어 요직만을 역임한 高建씨의 경력은 그 누구도 쉽게 흉내낼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런 高建씨에게 처음으로 「陽地를 지향하기 위해 의리를 저버린 사람」이라는 是非가 대두된 것이다.


申斗淳 당시 비서관과의 문답

필자는 지난 10월10일 오후 경기도 군포시 山本아파트단지에 있는 申斗淳씨의 자택을 방문했다. 이어 金相榮(김상영), 鄭東烈(정동렬), 鄭基鈺(정기옥), 崔興洵(최흥순), 李在遠(이재원)씨 등 崔圭夏 대통령 시절 수석비서관 및 비서관들과 직접 만나거나 전화로 접촉했다. 당시의 대통령비서실장 崔侊洙(최광수)씨는 신병치료차 日本을 방문 중이어서 만날 수가 없었다. 다음은 필자와 申斗淳씨 간의 문답.

─崔圭夏 대통령은 역대 대통령 중 재임기간이 가장 짧았습니다. 재임기간이 고작 8개월이었지요. 그래서 전직 대통령을 논하는 자리에서 崔圭夏 대통령은 이름 석 자가 빠지는 「잊혀진 대통령」이 되기도 합니다. 新군부의 압력에 밀려 막중한 대통령 자리를 너무 싶게 내주었다는 비판을 받기도 합니다.

『잘 알다시피 朴正熙 대통령이 중앙정보부장 金載圭(김재규)에게 시해되는 10·26 사태가 발발함으로써 崔圭夏 국무총리가 대통령권한代行에 올랐습니다. 1개월간 권한代行을 담임한 데 이어 그 해 12월6일 崔圭夏 후보는 통일주체국민회의에서 전임 대통령의 잔여 임기를 채우지 않고 새로운 헌법을 만들어 그 헌법에 따른 정부를 구성한다는 공약을 하고 제10대 대통령에 당선되었지요. 이른바 「위기관리정부」의 출범이었습니다. 崔圭夏 대통령의 下野는 나라의 보다 심각한 파국을 막았다는 측면도 없지 않을 것입니다』

유신헌법에서 대통령의 1기 임기는 6년이었다. 朴正熙 대통령은 1978년 12월 제8대(유신 제2기) 대통령에 취임했으므로 그의 사망 당시 잔여임기는 약 5년이었다.

─이른바 「체육관 선거」에서 당선된 崔圭夏 대통령은 차기 직선 대통령에 대한 야망이 없었습니까.

『崔圭夏 대통령은 첫 국무회의를 소집하여 국회의 건의에 따라 대통령긴급조치 제9호를 해제했습니다. 이로써 在野인사들이 정치적 복권을 하게 되고, 이른바 「서울의 봄」이 전개되었습니다. 드디어 金鍾泌, 金泳三, 金大中의 3金 대권 레이스가 치열하게 전개되었지요. 崔圭夏 대통령은 「난 심판이지 선수가 아니다」라는 자세를 끝까지 견지했습니다. 그런 가운데 급진좌파와 학생들의 격렬한 시위가 잇달았습니다』

─그것은 崔圭夏 정부가 제시한 정치일정이 너무 느슨했기 때문이 아닙니까.

『당시 대통령께서는 국민 대다수의 의견을 수렴한 헌법개정안을 마련하고 이에 의해 빠른 시일내에 민주적이며 공정한 선거를 통해 수립되는 새로운 정부에 정권을 이양할 것을 분명히 했습니다. 또한 학생들의 시위 자제를 촉구하는 한편 각계의 지도층에게도 질서유지와 정치발전에 협조를 당부하면서 국회와의 개헌안 협의, 절충 등 정치일정을 충실히 진행시켜 나가고 있었습니다』

─국회 헌법특위에선 제3공화국 헌법으로 돌아가는 헌법개정에 합의하고 있었는데, 崔圭夏 정부에서 이원집정부제 개헌을 검토하는가 하면 정치일정을 1년6개월 정도로 잡으니까 정치권과 운동권에서 반발하여 정치일정이 더욱 혼미해진 것 아닙니까.

『그 시기에 정부의 헌법개정심의위원회는 당초 5월 중에 전국 각 도청소재지에서 각계각층이 참여하는 공청회를 가질 계획이었으나, 당시 주요도시의 치안상태나 학원사태로 보아 공청회가 질서 있게 진행되기는 어렵다는 판단 아래 계획을 취소했던 것입니다. 朴正熙 대통령 유고時처럼 권력의 진공상태가 빚어내는 국가위기에 효율적으로 대처하는 방안으로서 二元집정부제를 검토해 본 것이 정치권의 의심을 사기는 했습니다. 그러나 정부로서도 새롭게 국가의 백년대계를 만드는 데 있어 정부가 국회의 헌법안만을 아무런 검토 없이 받는다는 것은 정부의 개헌발의권을 포기하는 것이 됩니다. 그렇게 되면 무책임한 정부가 될 수도 있는 것입니다』

─1960년 4월혁명 후 들어선 許政(허정) 과도정부가 내각제로 헌법을 개정하고 총선거를 실시하여 새(민주당) 정권을 출범시키는 데 불과 4개월밖에 소요되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崔圭夏 대통령께서 1년6개월이 좀 느슨하다면 再검토하라고 지시한 바 있었습니다. 이런 지침을 받아 정무수석비서실에서 건의서를 작성한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中東순방이 불가피했던 까닭

당시 崔圭夏 정부는 시위의 농도가 위험수위를 넘나들고 있다고 판단한 것 같다. 軍部內에서도 시국관에 혼란이 조성되고 있었다. 강·온 양론의 충돌위기 상황이 민감한 파장을 빚고 있었다. 그런데도 崔圭夏 대통령은 中東순방에 나섰다. 왜 그랬을까.

『이른바 視界(시계) 제로(0) 먹구름이 「서울의 봄」을 뒤덮고 있을 때,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세계 경제의 뿌리를 위협하는 2차 中東 오일 쇼크가 밀어닥쳤습니다. 원유는 배럴당 12달러에서 며칠 사이에 35달러로 치솟았어요. 대통령으로선 결단을 내려야 했습니다. 그런데 당초 朴正熙 대통령의 사우디 아라비아 방문이 1979년 12월로 예정되어 있어서 양국간에 구체적 협의가 진행되었으나 10·26 사건으로 일단 중단된 바 있었습니다. 그 후 사우디 국왕이 신임 한국 대통령의 공식방문을 환영한다는 입장을 표명했습니다. 崔圭夏 대통령으로서는 국내 정치일정도 중요하지만, 바깥일이 더 급하게 되었습니다. 原油 생산국들의 일방적인 原油 가격 인상으로 유가가 단시일內 2·5배로 급등하고 설상가상으로 이란 사태가 겹쳐 그 폭등한 가격으로도 原油의 물량 확보가 매우 어려운 상황에 빠졌기 때문이었습니다.

당시 원유의 국내 재고량이 별로 없었던 우리나라로서는 유가의 폭등과 더불어 原油 수요량의 확보가 어려워짐으로써 경제의 급격한 후퇴와 민생에의 위협, 그리고 안보상의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는 상황에서 사우디 왕국과 쿠웨이트 왕국의 방문이 불가피했습니다.

대통령께서는 中東순방에 오르시기 직전에 金鍾泌 공화당 총재와 金泳三 신민당 총재에게 전화 통화로 中東 2개국 방문의 불가피성을 설명하고 당신의 부재 중 정국안정에 협조해 줄 것을 당부하기도 했습니다. 또한 대통령비서실장의 국내 잔류를 명하고 대통령 부재 중 비서실의 근무기강과 내각에 대한 업무협조에 만전을 기할 것을 지시한 바도 있었습니다』


崔圭夏 대통령 시절 청와대 비서진의 反論

月刊朝鮮 9월호에 실린 高建씨의 회고에 대해 당시 대통령비서실에서 근무했던 인사들은 조목조목 반론을 제기하고 있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高建씨의 회고=석유외교차 中東순방 길에 나선 崔圭夏 대통령의 귀국일정에 맞춰 정무수석으로서 건의서를 작성했습니다. 과도기간을 단축해서 정치일정을 투명하게 밝힐 것과 계엄령의 시한을 명시하고 개각을 한다는 내용이죠.〉

▲당시 정무비서관 李在遠씨(現 건양大 교수)=당시 대통령 국빈방문 기간 중 국내 주요 업무는 관례에 따라 정무수석비서실에서 일일상황(DI)을 公電(오피셜 텔리그램)으로 보고하였기 때문에 이 시기에 정무비서관실에서는 국내 문제에 관한 한 소상히 파악하고 있었고, 각계 의견을 수렴한 정치일정 관련 보고서를 작성했습니다.

▲당시 의전비서관 申斗淳씨=崔侊洙(최광수) 비서실장은 정치일정과 관련하여 崔圭夏 대통령의 지시로 공화당 金鍾泌 총재와 신민당 金泳三 총재를 각각 사저로 방문하여 의견을 교환한 바 있는데, 두 분은 정치일정을 단축하는 것을 희망했습니다. 특히 金泳三 총재가 3개월內에 완료할 것을 주장하는 바, 崔侊洙 비서실장은 정치권의 이같은 정치일정 단축을 공론화하는 문서를 작성토록 정무수석에게 지시했으며, 따라서 당시 작성한 「보고서」는 정무수석이 독단으로 추진한 보고서가 아닌 것으로 압니다. 특히 「개각」이란 수석비서관이 공식문서로 건의할 사항의 범주를 넘는 행위로서 정치일정 등에 관한 보고서 작성時 개각에 대한 언급은 없었던 것으로 기억하고 있다.

▲당시 의전수석비서관 鄭東烈씨(現 레고코리아 고문)=高建씨는 그동안 언론으로부터 「5·17 당시 어떻게 된 거냐」는 질문을 받으면 대충 우물우물 답변하고 넘어갔는데, 月刊朝鮮 9월호가 보도한 高建씨의 인터뷰 기사를 보니까 그가 뭔가 작심하고 말한 것 같았습니다. 22년이란 세월이 지나갔으니까 高建씨가 가만히 있었으면 우리도 구태여 그 문제를 새삼 거론할 생각은 없었습니다. 그러나 이제 판단해 보니 역사는 역시 진실하게 기록되어야 하겠습디다. 우리가 고생할 때 高建씨는 全斗煥 정권에 협조하여 장관을 세 번이나 역임했습니다.


「사표나 私信을 받은 적 없다」

〈高建씨의 회고=5월16일 崔侊洙 비서실장을 통해 이러한 건의를 한 후 하회를 기다리고 있었죠. 잠시 시위가 수그러들었던 5월17일 토요일 오후, 청량리에 사시던 부모님 댁에 잠깐 가 있었는데, 당시 중앙일보 청와대 출입기자였던 成炳旭(성병욱)씨가 전화를 걸어왔어요. 청와대 지시로 軍이 이화여대를 덮쳐 전국의 대학생 대표를 연행해 갔다는 것입니다. 부리나케 청와대로 돌아와 보니 별을 단 지프차들이 나가는 모습이 보였어요. 비서실장이 수석비서관들을 불러모아 「군부가 건의해 비상계엄을 전국으로 확대한다」고 해요. 완전히 군정으로 가는 길이었어요. 그러니까 정무수석인 내가 전혀 모르는 내용이었고, 내가 건의한 것과는 전혀 반대방향이었어요.〉

▲李在遠씨의 증언=5월17일(토요일) 오후 2시30분경 퇴근길에 중앙청 테니스장에 들렀는데, 거기서 라디오 방송을 통해 뉴스를 들었습니다. 軍이 이화여대 강당에 집결한 각 대학의 학생회 간부 회의장을 기습하여 학생들이 도피하였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즉각(오후 3시경) 청와대로 복귀, 마침 자리에 있던 高建 정무수석에게 그 뉴스의 내용, 그리고 장성 출신으로서 金鍾泌 총재 특보였던 張榮淳(작고) 의원의 정세분석을 전했습니다.

동향 선배인 張의원과는 평소 정보를 교환하던 사이였는데, 그분은 그날 아침 국방부에서 열린 軍 주요 지휘관회의를 주목해야 한다고 귀띔해 줍디다. 그래서 그런지 그 날, 景福宮 뒤뜰에 주둔했던 軍부대의 동향도 좀 특이했습니다. 평소와는 달리 군인들이 중앙청의 동문인 迎秋門(영추문)을 지키면서 거총까지 합디다. 정무수석께 이런 특이상황을 보고했습니다.

〈高建씨의 회고=비상계엄확대를 위한 국무회의에 배석하라는 지시가 떨어졌어요. 나는 이때 평생 처음으로 가슴속에서 치밀어오르는 뜨거운 불 덩어리를 느꼈습니다. 나는 그 비상계엄 확대조치가 바로 군정을 의미한다고 판단했고, 군정은 절대로 찬성할 수 없었기 때문에 국무회의 배석을 거부하고 곧바로 사표를 써서 私信과 함께 비서실장에게 전하도록 부속실장(비서실장 보좌관을 뜻함)에게 주고, 장위동 집에 칩거했습니다.〉

▲당시 비서실장 보좌관 金相榮씨(現 전자신문 회장)의 반론=20여 년이 지난 지금에도 그 당시의 기억이 생생한데, 高建 수석을 만났거나 私信이나 사표는커녕 종이 쪽지 한 장 받은 것이 없으며, 국무회의에는 누가 배석을 지시하지 않아도 정무소관으로 수석이나 담당 비서관이 당연히 배석하게 되는 것입니다. 또한 비서실장실에는 비서실장 보좌관 외에 행정보조 서기관, 수행비서관, 여직원 한 명이 근무하고 있었는데, 실장실 근무자 누구도 정무수석으로부터 그런 중요한 문건을 받고 비서실장에게 보고를 태만히 할 수 없습니다.

▲申斗淳씨=비서실장도 정무수석의 私信과 사표를 누구로부터도 전달받은 사실이 없었기 때문에 정무수석의 거취에 대해 대통령께 사실을 확인해 드리지 못했습니다. 첨언하면 대통령비서실의 수석비서관은 대통령을 뵙고 보고를 드림에 있어 어떠한 제약을 받는 바 없이 자유로이 출입이 가능한 위치임에도 의로운 행동을 보이는 거취와 관련된 인사상의 주요 문건들을 비서실장의 보좌관에 맡긴다는 것은 상식에도 맞지 않는 말입니다.


「그분이 뭔가 착각한 것 같다」

▲당시 본관 의전비서관 鄭基鈺씨(現 외교안보연구원 대사)=(1998년 駐싱가포르 대사 재임時 서울시장 자격으로 방문한 高建 시장이 대사관저 만찬회에서 1980년 회고하는 가운데 『바로 여기 계신 鄭基鈺 대사에게 사표를 주었다』고 술회했다고 하는 데에 대한 확인 요청에 대한 답변) 1980년 당시, 제가 高建 수석으로부터 사표를 받은 사실이 없었지만, 만찬장의 분위기상 듣기만 했습니다. 사표 수리와 같은 일은 당시 저의 업무와는 전혀 무관한 일이었습니다. 그분(高建씨)께서 뭔가 착각하신 것 같습니다.

▲당시 정무비서관 李在遠씨=5월18일(일요일) 오전 8시30분경 출근하여 정무수석실에 가보니 백형완 사무관이 『수석께서 어젯밤 췌장 결석 수술을 받으셨다』 면서 『연락은 안 된다』고 말했습니다. 그분이 평소 담석 증세가 있어 약을 먹어 왔기에 그것이 도져서 그런가 하고 상상해 보기도 했지만, 특별한 사전 언질도 없이 갑작스럽게 『췌장 수술을 했다』고 전하는 보좌관의 말이 믿어지지 않았습니다. 오전 10시경 정무비서실의 안치순(故人), 최규장 비서관 등 4~5명과 함께 高建 수석의 자택을 방문했으나 가족들은 없고 가정부가 나와서 『아무도 안 계시고 나는 모르는 일』이라고만 대답하여 아무런 확인을 하지 못하고 청와대로 돌아왔습니다.

5월19일(월요일) 오전에는 광주에서 격렬한 시위로 행정기관이 기능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정무비서실의 기능이 수석 不在로 어렵게 되자 李元洪(이원홍) 민정수석비서관이 정무·민정비서실의 업무를 일괄 지휘한다는 命이 내려왔습니다. 이같은 민정수석의 일괄 지휘는 6월9일 金昶植(김창식) 신임 정무수석이 임명될 때까지 계속되었습니다.

▲당시 의전수석 鄭東烈씨=高建씨가 『평생 처음으로 가슴속에서 치밀어 오르는 뜨거운 불 덩어리를 참지 못하고 사표를 던졌다』고 하는데, 당시 대통령비서실에서 함께 근무한 수석비서관의 한 사람으로서 납득하기 어려운 발언입니다. 그렇게 全斗煥 군사정권에 반대했던 분(高建씨)이 全斗煥 대통령 밑에서 교통부 장관, 농수산부 장관, 내무부 장관을 역임했습니다. 高建씨는 췌장 수술을 받은 사실도 없다고 합디다.

▲당시 의전비서관 申斗淳씨=당시 정치, 내무, 국방 등 주요 업무를 관장한 주무수석으로서 그 직무를 유기했다는 것은 윤리 도덕적으로 납득하기 어려운 행위이며, 그로부터 22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高建씨는 적어도 그 부분에 대해서만은 근신하는 것이 도리라고 생각합니다.

〈高建씨의 회고=칩거 중인데 정부에서 대학동기인 徐錫俊(당시 총리실 행정조정실장)을 보내 사표 번의를 종용해 왔어요. 거절했습니다. 국무회의 결과는 물어봤습니다. 金玉吉(김옥길) 문교부 장관과 李漢彬(이한빈) 부총리만 질문이 있었고, 아무런 반대가 없었다고 전했습니다.〉

▲당시 의전비서관 申斗淳씨=비서실장실에서는 5월27일 새벽 계엄군의 光州 진입으로 사태가 일단 진정되자 무단결근하는 정무수석의 행방을 찾았다고 합디다. 崔侊洙 비서실장은 여러 경로를 통해 高建 수석에게 복귀할 것을 종용했는데, 너무 시간이 많이 흘러버리자 나중에는 高建씨가 쑥스러워서도 복귀하기가 어려울 것으로 판단했던 것으로 압니다.


「과거에 대해 솔직해야 할 것」

〈高建씨의 회고=다음엔 崔대통령께서 연락을 해 오셨어요. 청와대에 들어갔더니 번의하고 나와서 도와 달라고 하십디다. 『각하, 저는 할 일이 없습니다. 사표를 수리해 주십시오』 그래도 아무 말씀이 없어요. 그래서 타협안으로 정부 산하 국토개발연구원의 고문으로 가게 된 것입니다.〉

▲당시 의전비서관 申斗淳씨=토요일이었던 6월7일 오후 2시 高建 정무수석을 접견하였을 적에 대통령께서는 이미 金昶植 총무처 차관을 정무수석비서관으로 내정한 상태였습니다. 金昶植 정무수석에게는 6월9일 오전 9시에 임명장이 수여되었습니다. 高建씨는 대통령과 만나 보직문제를 놓고 「타협」 운운했는데, 그것은 기상천외의 발상이라고 생각합니다.

〈月刊朝鮮의 질문:『서울대병원에 입원했다는 말은 뭡니까』에 대한 高建씨의 답변=집으로 전화가 오면 『병원에 입원했다고 해라』고 했거든요. 그 당시 저의 행적에 대해 오해하고 있는 분이 몇 분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늘을 향해 한 점 부끄럼이 없습니다만, 일부러 찾아다니며 해명할 수도 없고….〉

▲당시 의전비서관 申斗淳씨=이는 해명이 아니라 괴변이지요. 국가의 祿(녹)을 받고 고위직을 역임한 분인 만큼 다른 뜻이 있는지 알 수 없으나 지위가 높은 분일수록 겸손하고 솔직해야지 거짓을 사실인 양 호도해서는 안 됩니다.


高建씨의 해명

지난 10월12일 밤 9시 高建씨의 동숭동 자택으로 사실 확인을 위해 전화를 넣었다.

─月刊朝鮮 9월호에 실린 高建 前 서울시장님의 인터뷰 기사 중 일부에 대해 사실과 다르다는 항의가 들어왔습니다.

『어느 부분에 대해서입니까』

─1980년 5·17 당시, 정무수석(高建씨)의 사표를 접수한 비서실 관계자가 없다고들 하는데, 그것을 누구에게 제출하셨습니까. 또 당시 정무수석으로서 시국에 대한 건의서를 내셨다 했는데, 그 내용에 관해서도 이의가 제기되었습니다.

『누가 그런 말을 합디까』

─申斗淳씨 등 崔圭夏 대통령 시절에 청와대 비서관으로 근무하던 여러분들입니다.

『그런 말들을 한 사람들과 당시 청와대 출입기자를 데리고 오시오. 한번 확인해봅시다. 언제든지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