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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기행(13) - 경북 영주市 浮石寺

정순태   |   2003-02-10 | hit 8037

韓·中·日 3國에서 海東華嚴(해동화엄)의 開祖인 義相(의상) 스님만큼 四部大衆(사부대중)의 사랑을 듬뿍 받아온 승려는 없다. 義相은 대자연과 절묘하게 어우러진 「太白山 浮石寺」(태백산 부석사)의 창건주이며, 7세기 東아시아 최고의 철학자·교육자·시인이었다.

통일신라 전성기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한 그의 華嚴思想(화엄사상)은 오늘의 정보화사회에서도 새로운 가치 창출의 패러다임으로 재인식되고 있다.

특히 중국인 꾸냥 善妙(선묘: 셴미야오)와 얽힌 그의 플라토닉 러브는 영원한 진리탐구자의 참된 본보기로 회자된다.

중국 宋나라 때의 승려 贊寧(찬녕)이 지은 「宋高僧傳」(송고승전)과 三國遺事(삼국유사)에서는 義相 스님을 「實踐行者(실천행자)의 모범」으로 기록하고 있다. 일본에서는 義相 스님의 一代記를 두루마리 그림으로 그린 국제적 로맨스 「華嚴緣起繪卷」(화엄연기회권)을 國寶로 숭앙하고 있다.

無종교의 필자가 義相 스님을 1300여년의 時空(시공)을 넘어 사랑하게 된 것은 그가 지은 百花道場發願文(백화도량발원문) 때문이었다. 그것은 기독교의 主祈禱文(주기도문)보다 더욱 구구절절한 偈頌(게송:佛家의 詩)으로, 종교인 義相의 맑은 심성이 너무나 잘 나타나 있다. 스님은 東海의 포효하는 파도 속에 얼굴을 파묻고 大慈大悲(대자대비)의 관음보살에게 다음과 같이 간구한다.

<나의 全心全靈(전심전령)이 당신의 마음속에 살아 있고, 당신 또한 내 마음속에 항상 같이 있어서 떠날 줄 없게 하여 주소서. (중략) 이 몸이 가루가 되고 모진 業報(업보)가 이 몸으로 더불어 다하게 될 때 千手千眼(천수천안) 당신의 자비로운 손길이 이 몸을 건져내어 당신 곁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서울서 2시간30분 거리로 다가선 浮石寺

필자는 이미 1995년 5월, 열흘간의 일정으로 義相 스님의 자취를 좇아 국내의 洛山寺(낙산사)·浮石寺(부석사)는 물론 중국 西安 남방의 終南山 至相寺(종남산 지상사)와 일본 京都(교토) 西北方 도가노山의 高山寺를 다녀온 바 있다. 그때 필자의 마음을 단단히 붙들어매었던 것은 단연 浮石寺였다. 浮石寺 無量壽殿(무량수전) 앞뜰에 서서 가만히 눈을 뜨면 발 아래로 펼쳐지는 山海萬里(산해만리). 그것이야말로 바로 大華嚴의 장엄한 世界였다.

당시 필자는 취재일정에 쫓긴 나머지 浮石寺를 꼼꼼히 관찰하지 못했는데, 이번 國寶기행으로 그 恨을 풀게 되었다. 답사 전날 밤, 필자는 명절을 하루 앞둔 소년시절처럼 가슴이 설레어 기어히 잠을 설치고 말았다.

2002년 12월29일 일요일 아침 7시 정각, 李五峰 사진부장이 필자의 집 앞으로 승용차를 몰고 왔다. 東서울IC(인터체인지)를 통해 중부고속국도를 남하하다가 호법IC(경기도 이천)에서 길을 바꿔 영동고속국도를 東進하면 여주IC-문막IC 다음에 만종분기점(강원도 원주시 호저면 만종리)을 만난다. 만종분기점이 최근에 개통된 중앙고속국도로 접어드는 IC다.

필자에게 중앙고속국도는 初行길이다. 原州 치악산국립공원의 남쪽 기슭과 월악산국립공원의 동쪽 자락을 스쳐가기 때문에 터널이 많다. 충북 단양군과 경북 영주시 豊基邑(풍기읍)을 이어주는 竹嶺(죽령)터널은 길이 5.6km로 국내 최장이다. 죽령터널을 빠져나오면 금세 장수터널. 장수터널을 벗어나면 바로 풍기IC다.

풍기IC를 빠져나와 소백산의 남쪽 자락과 나란히 뻗은 931번 지방도를 따라 50리를 달리면 바로 浮石寺 들머리길을 만나게 된다. 소백산은 동서로 유별나게 길다. 최고봉인 비로봉(1439m)을 중심으로 도솔봉·연화봉·국망봉·신선봉·형제봉 등 1400m 전후의 봉우리들이 병풍처럼 펼쳐져 있다. 진흥왕 이전에 新羅의 자연국경을 이룬 산맥이다.

이런 봉우리들이 북풍을 막아 주는 덕에 소백산 남쪽의 榮州(영주) 일대는 한겨울이지만, 봄날처럼 포근하다. 중도에 우리나라 최초의 賜額書院(사액서원)으로서 국보 1점과 보물 2점을 소장한 紹修書院(소수서원:영주시 順興面)이 있지만, 일단 지나쳤다. 길 좌우가 온통 사과밭과 인삼밭이다. 이 일대는 「꿀사과」의 명산지인데다 우리나라 최초의 인삼 재배지역이다. 부석면 소천리에서 좌회전하면 부석사 진입로에 접어들게 된다.


極樂에 이르는 행복한 巡禮

오전 9시30분 부석사 매표소 앞에서 영주시 문화관광과의 학예사 宋俊泰씨가 필자 일행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차요금 4000원, 입장료 1200원. 매표소를 지나면 一柱門(일주문)―세운 지 몇 년 되지 않아 아직 단청의 때깔을 벗지 못해 울긋불긋하다. 一柱門에는 위·아래로 「海東華嚴宗刹」(해동화엄종찰) 「太白山浮石寺」라 쓰인 현판 두 개가 걸려 있다.

浮石寺의 가람배치는 경사가 비교적 심한 자리에 이룩된 丘陵形(구릉형)이다. 층층의 석축을 쌓고, 여러 층대 위에 반듯한 터를 닦아 그 층단마다 堂宇(당우), 즉 건물을 배치했다.

부석사는 의상의 淨土(정토)신앙이 집약되어 있는 곳이다. 淨土는 불교의 이상향, 즉 극락의 세계를 말한다. 그러니까 부석사의 가람배치는 극락으로 오르는 행복한 순례의 길이다.

浮石寺는 3단으로 구획되었다. 山門에서 無量壽殿까지의 3단 구획은 상·중·하, 세 부류의 중생을 상징하고 있다. 그 셋을 다시 세 단계로 나눠 九品往生(구품왕생)이라 하는데, 이는 西方淨土의 현세적 구현이다. 義相은 浮石寺 창건을 통해 佛國土를 바로 눈앞에 전개하려고 했던 것이다.

一柱門을 지나 좀 걷다 보면 길 우측에 돌로 만든 幢竿支柱(당간지주:보물 제225호)가 서 있다. 당간지주는 절에서 행사가 벌어질 때 각종 깃발을 다는 구조물로서, 시쳇말로 하면 게양대다. 거기서 좀 더 오르면 天王門을 만난다. 天王門을 지나 높다란 석축계단을 오르면 널따란 빈터에 쌍탑이 동·서쪽에 마주 서 있다.

쌍탑을 지나면 바로 「鳳凰山浮石寺」(봉황산부석사)란 현판이 높직이 걸려 있는 梵鍾樓(범종루)를 만난다. 부석사가 터를 잡은 鳳凰山은 태백산맥과 소백산맥의 분기지점, 즉 兩白之間(양백지간)이다. 梵鍾樓는 앞에서 보면 팔작지붕이고, 다락 밑을 통해 석축계단을 오른 다음에 뒤돌아보면 맛배지붕이다.

팔작지붕은 지붕의 네 귀에 추녀를 설치하고 지붕 위까지 박공(마루머리나 합각머리에 붙인 두꺼운 널)이 달려 용마루 부분이 삼각형의 벽을 이루는데, 거대한 여덟 八자와 같은 모습이다. 맞배지붕은 건물의 앞뒤에서만 지붕면이 보이고, 용마루와 내림마루로만 구성되어 있는데, 마치 책을 엎어놓은 것처럼 단순한 형태다.

이런 2중구조의 특이한 지붕의 누각을 지은 까닭은 무엇일까? 宋俊泰 학예사는 『아래쪽에서 팔작지붕을 우러러보면 장엄미가 돋보이게 되고, 위쪽에서 맛배지붕을 내려다보면 소박한 느낌 때문에 주위경관에 자연스럽게 녹아들게 된다』고 설명했다. 慶州 佛國寺(불국사)의 가람배치가 人工美의 극치라고 한다면 浮石寺의 그것은 自然美의 극치다.


오묘한 華嚴의 세계 펼치는 가람배치

架構(가구) 구조는 덤벙주추 위에 지름 67cm의 육중한 기둥을 세우고, 다시 본기둥을 세워 앞면 갓기둥(邊柱) 위에 衝樑(충량)을 걸었다. 龍(용)의 모양을 조각하여 경쾌함과 위엄을 갖추었다. 정면 3칸, 측면 5칸(6.78m×10.6m)으로 조선 후기에 지은 것이다. 범종루는 그 마루 밑이 순례자의 통로다. 마룻장에 뚫린 네모진 구멍 밑에 놓인 석축계단을 통해 오르내리게 되어 있다.

樓 위에는 梵鍾과 法鼓(법고)를 두었다. 큰 종과 큰 북의 쓰임새는 뻔하다. 또한 큼직한 木魚(목어) 한 마리까지 걸려 있는데, 그건 왜일까? 물고기는 잠을 잘 때도 눈을 감지 않는다고 한다. 그러니까 木魚는 불법에 귀의하려는 四部大衆을 향해 「항상 깨어 있어라」는 강한 메시지를 던지고 있는 것이다.

범종루 다락 밑의 석축계단을 오르면 넓은 마당이 펼쳐 있다. 범종루를 빠져나와 시선을 북동쪽으로 30도 가량 돌리면 「安養樓」(안양루)라는 현판이 걸린 누각이 보인다. 대한민국 초기의 名筆 중 한 분인 李承晩(이승만) 초대 대통령의 친필이다.

불교에서 安養은 바로 極樂이다. 그렇다면 안양루의 석축계단만 올라서면 바로 극락세계다. 안양루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다포집, 팔작지붕으로 범종루처럼 조선후기의 건물이다.

안양루 좌우에는 우람하게 큰 바윗돌로 쌓은 巨石臺(거석대)가 버티고 있다. 옛사람들이 부석사를 지으면서 얼마나 공을 들였는지 한눈에 알아볼 수 있다. 엄청나게 큰 돌을 다듬지 않고 원래 모양 그대로 조성한 「막 쌓기」 또는 「허튼 쌓기」의 수법이 구사되었다. 안양루는 巨石臺에 걸쳐 세워져 있는데, 마루 밑을 지나 석축계단으로 오르면 무량수전의 앞뜰에 이르게 된다.

天王門에서 無量壽殿까지 석축계단의 수는 모두 108개. 108번뇌를 벗어나면 드디어 극락에 이르게 됨을 의미하는 것 같다. 비교적 가파른 길을 올라왔지만, 조금도 피로하지 않다. 높은 석축계단과 평평한 석단, 그리고 주변 경관의 조화―이것이 浮石寺 가람배치의 오묘함이다. 누마루 벽에는 四溟大師(사명대사)의 안양루 重修記(중수기)와 방랑시인 김삿갓의 詩가 걸려 있다.


銅錢으로 얻어맞는 국보 제17호 石燈

안양루의 석축계단을 오름에 따라 하늘로 향한 공간이 점차 넓게 트이면서 石燈(석등) 하나가 점점 클로즈업된다. 바로 국보 제17호 無量壽殿 앞 石燈이다. 신라시대의 석등 중 가장 미려한 걸작품으로 손꼽힌다. 석축계단에서 보기엔 석등은 무량수전 앞뜰의 약간 서쪽으로 치우쳐 배치되었다. 이것도 대칭의 딱딱함과 지루함을 회피한 절묘한 안배다.

그렇다면 순례객의 발길은 어느 쪽으로 갈까? 宋俊泰 학예사는 『사람들이 서쪽의 좁은 길보다 동쪽의 넓은 길을 돌아 석등에 접근하더라』고 말한다. 과연 그럴까 하여 순례객들의 動線(동선)을 유심히 관찰해 보니 역시 그러했다.

석등은 8각 기본형에 충실한 작품으로, 각 部材의 비례가 조화를 이뤄 단아하다. 4장의 판석으로 짜인 地臺石(지대석) 윗면에 2단의 기단받침이 새겨져 있으며, 그 위에 네모꼴 基壇石(기단석)을 올렸다. 기단석 측면에는 2구씩의 眼象(안상)이 조각되어 있으며, 그 위에 3단 蓮花臺(연화대) 받침의 下臺石(하대석)이 8각 평면으로 새겨 있다.

下臺石 위에는 가늘고 긴 8각 기둥 모양의 竿石(간석)을 올렸으며, 그 위에 역시 8각형의 上臺石(상대석)이 놓여 있다. 상대석에는 8葉 仰蓮花(앙련화) 무늬가 새겨 있다.

그 위의 火舍石(화사석)은 역시 8각으로 4면에 火窓(화창)이 열려 있으며, 나머지 벽면 네 곳에는 각각 1구씩의 보살상이 돋을새김되어 있다. 보살상들은 立像 2구와 坐像 2구인데, 제각기 독특한 結印(결인)을 하고 있으며, 天衣 또한 다채롭다. 火窓은 원래 문을 달았던 듯 낮은 턱을 만들고, 上下左右에는 쇠못 구멍이 남아 있다.

화사석 위에 올린 屋蓋石(옥개석:지붕돌) 역시 삿갓 모양의 8각으로 끝 부분이 약간 위쪽으로 反轉(반전)되어 있다. 밑면에는 3단의 옥개받침과 꽤 넓은 홈을 팠으며, 8엽 연꽃 무늬로 장엄했다. 그 위에 2단의 받침돌이 있으며 맨 꼭대기에 寶珠(보주)를 올렸다.

높이 2.97m. 화강석으로 이렇게 격조 높은 작품을 빚어낸 신라인들의 예술성에 절로 감탄사가 튀어나온다. 석등 앞에는 拜禮石(배례석)이 놓여 있다.

일단의 관광객들이 석등의 옥개석을 향해 동전을 던지고 있다. 옥개석 위에는 100원짜리, 500원짜리 동전이 제법 쌓여 있다. 잘못 겨냥된 동전은 火舍石에 돋을새김된 보살상 등에 부딪쳐 땅바닥에 떨어지기도 했다. 기념사진을 찍는다고 흙발로 배례석 위에 오르는 사람들도 있었다.


木造건물 중 最高의 예술품 無量壽殿

한국 木造건물 중 최고 예술품은 뭐니뭐니 해도 국보 제18호 無量壽殿이다. 無量壽殿은 아미타불을 모시는 佛殿이다. 無量壽가 바로 아미타불의 漢字표기다. 아미타불은 모든 중생을 제도하려는 大願(대원)을 품은 西方淨土(서방정토)의 부처다. 그래서 「아미타불」이라고만 열심히 외쳐도 사후에 정토, 즉 극락에 태어난다고 한다. 이 堂宇의 정면에 높직하게 걸린 현판 「無量壽殿」은 한국역사상 최고의 예술적 군주였던 高麗 恭愍王(고려 공민왕)의 친필이다.

무량수전은 수년 전까지만 해도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목조건물로 교과서에까지 실려 있었다. 그러나 경북 안동의 鳳停寺 極樂殿(봉정사 극락전:국보 제15호)의 墨書銘(묵서명:고려 공민왕 17년, 즉 1368년에 重修)이 발견됨으로써 무량수전(고려 우왕 21년, 즉 1376년에 重修)은 두번째로 오래된 목조건물로 수정되었다. 그러나 봉정사 극락전은 그 예술성에서 무량수전에 까마득하게 미치지 못한다. 무량수전은 高麗 木造예술의 극치다.

月臺(월대)는 화강석으로 地臺石·面石·갑석을 정연하게 갖추고, 정면 세 군데에 아담한 돌계단을 두었다. 건물의 평면구성은 정면 5칸(10.6m), 측면 3칸(6.78m)으로 건평은 65.4평이다.

거의 다듬지 않은 주춧돌 위에 알맞은 배흘림(엔타시스)기둥을 세웠다. 배흘림은 기둥의 중간 부분이 약간 부르도록 한 건축양식이다. 그리스, 로마, 르네상스 건축의 외벽면에도 이런 엔타시스(entasis) 기법이 애용되고 있다.

배흘림기둥의 머리 바로 위에는 栱包(공포)가 버티고 있다. 여러 나무쪽들을 짜맞춘 구조물인 공포는 마치 수탉의 벼슬처럼 보여 화려함을 과시하고 있지만, 실은 지붕의 하중을 원활하게 기둥에 전달하는 역할을 감당한다. 이런 공포가 기둥머리 위에만 있으면 柱心包(주심포) 건물, 기둥머리뿐만 아니라 기둥머리와 기둥머리 사이에도 배치되면 多包式(다포식) 건물이라고 한다.

무량수전은 소박한 柱心包 건물이다. 공포의 짜임새도 간단하고 실용적으로 結構(결구)되어 古風을 더한다. 팔작지붕은 몸체와 옥개의 비례가 조화있게 처리되어 거대한 규모에 비해 안정감이 있다.

건물 앞면의 柱間 꾸밈새는 격자 문양의 문과 창을 내고, 중간 어간과 그 좌우 夾間(협간)에 分閤門(분합문)을 달아 출입하도록 했고, 맨 오른쪽과 맨 왼쪽 칸에는 窓을 달았다.


배흘림기둥의 列柱 속 獨尊 - 국보 제45호 塑造여래좌상

무량수전의 내부는 서방을 등지고 동향하고 있는 아미타불을 장엄하는 구조다. 옥내 架構는 현저한 배흘림의 列柱(열주) 위에 소첨과 대첨을 놓고, 항아리 모양의 대들보를 얹어 내부 主공간을 구성하고, 이 主공간 4면으로 툇보를 내달아 副공간을 만들었다.

대들보와 툇보 위에는 쭉쭉 뻗은 水平直材를 알맞게 가구시켜 장중하면서도 동적인 느낌을 주도록 조화시켰으며, 특히 高柱로부터 종도리에 이르는 架構材(가구재)는 하나하나가 主尊(주존)을 중심으로 左右均齊(좌우균제)를 이루고 있어 主尊 專有(전유)의 공간을 더욱 그윽하게 한다.

무량수전에 홀로 좌정한 塑造如來坐像(소조여래좌상)이 바로 국보 제45호다. 塑造라는 말은 흙으로 빚었다는 얘기다. 소조불상으로선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 되고 크며, 그 표면은 두텁게 蓋金(개금)되어 있다.

불단 위에 跏趺坐(가부좌)한 이 소조여래좌상에 대해 異論이 많다. 降魔觸地(항마촉지)의 手印을 하고 있는 만큼 석가여래라고 주장하는가 하면, 혹은 浮石寺가 화엄종찰인 만큼 華嚴經의 主佛인 비로자나불이라고 맞받기도 한다. 그러나 이 佛殿(불전)의 이름이 무량수전인 만큼 누가 뭐래도 아미타불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 더욱이 挾侍佛(협시불)도 없이 獨尊(독존)으로 봉안되어 있는 만큼 서방정토의 교주, 즉 아미타불인 것이 확실하다.

나발(소라 껍데기 같은 부처의 머리털)의 머리 위엔 육계(상투)가 큼직하고, 풍만한 얼굴은 正眼正視(정안정시)하고 있다. 두터운 입술에서 고려 불상의 특징이 보이며, 두 귀는 거의 어깨선까지 닿아 있고, 목에는 三道(세 줄기 주름)가 완연하다.

오른쪽 어깨 부위가 벗긴 法衣는 전면에 평판을 걸친 것처럼 평행선을 그리며 흘러내리고, 두 무릎의 옷 무늬는 평행선으로 바깥쪽을 향해 흐른다. 몸체는 얼굴에 비해 갸름한 편이며, 팔뚝은 부드럽고 굵은 편이다. 불상 높이 2.78m, 무릎 너비 2.06m.

등 뒤에는 木造 光背(광배)가 따로 마련되었고, 身光과 頭光을 圓圈(원권)으로 구별하여 유려한 寶相花紋(보상화문)을 조각했다. 光背 높이 3.8m.

臺座(대좌)는 앞면이 폭 2.37m, 측면이 2m, 높이 1.05m. 土石을 혼용한 須彌壇(수미단)의 원형이 남아 있고, 그 바닥에 신라 때의 綠釉(녹유)벽돌이 깔려 있다고 한다. 다만 불상의 무릎 이하는 뒤에 설치한 木造 불단이 놓여 그 안을 들여다볼 수 없다.


발 아래로 펼쳐지는 大華嚴의 世界

무량수전 내부 架構와 불상을 관찰하고 중앙의 석축계단 앞에 서니 범종루의 용마루가 화살표 마냥 악센트가 되어 시선을 은근히 유도한다. 그 「화살표」 너머로 이름 모를 소백산맥의 連峰이 重重無碍(중중무애)로 펼쳐져 한눈 안으로 빨려든다.

아! 이것이야말로 大華嚴의 합창이다. 華嚴의 세계는 자아관념의 울타리를 훨씬 뛰어넘은 경지다. 華嚴經은 자기가 자기를 아는 것을 넘어 세계를 알게 하고, 나아가 세계가 세계를 알게 하는 가르침이다. 하나가 곧 전체이고, 전체가 곧 하나인 것이다. 화엄의 스케일은 이렇게 무한대인 동시에 티끌 하나 속에 모든 것을 품을 만큼 그윽하다.

무량수전의 동쪽 약간 높은 지대에 석탑 하나가 서 있다. 탑이라면 원래 법당 앞에 세우는 것이 통례인데 왜 그럴까? 자연히 발길이 그리로 향하게 된다. 바로 보물 제249호 浮石寺 3층석탑이다. 이것 역시 무량수전의 東向한 아미타불좌상처럼 특이한 배치다.

3층석탑은 통일신라시대의 일반형 양식이다. 塔身部(탑신부) 各部의 비례에서 좀 둔중한 느낌을 주지만, 건실한 遞減(체감)으로 장중하다. 재료는 화강석, 높이 5.26m.

3층석탑을 보고 나면 그 동북쪽으로 뚫린 산길로 눈길이 간다. 산길의 바닥에는 막돌을 깔아 은근히 순례자의 호기심을 자극하고 있다. 바로 義相 스님의 초상을 모신 祖師堂(조사당)으로 가는 길이다.


더 이상 추가하거나 생략할 것 없는 국보 제19호 祖師堂의 경쟁력

국보 제19호 浮石寺 조사당은 3층석탑에서 걸어서 10분 정도 걸리는 높직한 언덕 위에 자리잡고 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일까? 무량수전 앞에 섰을 때는 한겨울의 칼바람이 뼈 속까지 스며드는 듯했는데, 조사당 앞에 서니 바람 한 점을 느끼지 못할 만큼 포근했다.

어디 그뿐인가. 눈앞에 펼쳐진 소백산맥 봉우리들의 실루엣이 바로 눈높이로 다가온다. 분명히 조사당은 무량수전보다 훨씬 높은 곳에 위치하고 있는데도 불구하고 그렇다. 무량수전 앞에 서면 소백산맥의 봉우리들이 분명히 발 아래로 보였는데, 이것은 또 무슨 조화일까? 아무래도 무량수전의 아미타불보다 낮게 보이려 했던 義相 스님의 겸손함을 반영한 것만 같다.

조사당은 매우 작고 간결한 건물이다. 정면 3칸, 측면 1칸의 맛배지붕, 柱心包 집이다. 고려 말기의 건축양식이 잘 나타나 있다. 1916년 무량수전과 함께 조사당을 수리할 때 「宣光七年丁巳五月初三日立柱」라는 墨書銘(묵서명)이 발견되었다. 이로써 고려 禑王 3년(1377)에 건축되었음이 밝혀졌다.

조사당 건물은 돌을 마구 쌓아올린 기단 위에 오똑하니 앉아 있다. 안팎 모양이 모두 소박하다. 우리나라 柱心包 건물의 과도적 양식과 기법을 살필 수 있는 귀중한 문화재다.

기둥의 배흘림은 고려 때의 다른 건물에 비해 약화되고, 기둥머리에는 柱頭(주두)를 얹기 전에 헛첨차를 끼워 ♥包를 받쳐 주도록 했다. 架構는 좌우 완전 대칭의 五樑家로서, 기둥머리에 단면 方形의 昌枋(창방)을 끼우고 헛첨차로부터 공포를 짜고 대들보를 그 위에 얹어 야트막하고 알뜰한 내부 공간을 만들었다.

건물 앞면의 복판칸에 출입문이 있고, 그 좌우칸에 光窓(광창)을 달았으며, 처마는 앞면이 겹처마이고, 뒷면은 홋처마다.

모든 部材의 結構가 간소화되어 있고, 조각 등의 꾸밈도 없다. 더 이상 추가하거나 생략할 것 없는 조사당―이것이야말로 600여 년의 세월을 거치고도 「내로라」고 자랑할 수 있는 경쟁력이며 意匠(의장)효과인 것 같다.

조사당 내부 중앙에는 義相 스님의 석고상을 모셨는데, 6·25 전란 이후에 만든 것으로 일본 국보 「화엄연기회권」에 묘사된 義相 스님의 모습과 비교하면 서글픈 마음이 들 정도로 치졸하다. 이 밖에도 浮石寺를 거쳐간 西山大師, 順義大師, 琯楹大師(관영대사)의 영정도 모셨는데, 차라리 보지 않는 것이 좋을 만큼 수준 미달이다. 오늘날의 대∼한민국에는 大미술가가 즐비한데, 왜 여태 이런 졸작을 걸어두어야 하는지 의문이다.


最古의 채색화-국보 46호 祖師堂 벽화

원래, 조사당 내부 입구 좌우에 고려 말기에 그려진 벽화가 있었는데, 왜정 때 무량수전으로 옮겨져 내부 서쪽 벽면을 장엄하다가 마모가 심해 이제는 다시 경판각 안에 넣어 보수중이다. 현재 무량수전 안에 걸려 있는 조사당 벽화는 그 사진이다.

국보 제46호 조사당 벽화는 義相 스님을 수호하는 護法善神(호법선신)으로 배치했던 것이다. 四天王과 梵天(범천)·帝釋(제석)을 모두 6폭으로 나누어 그린 이 벽화는 원래 조사당 내부 문쪽에 배치되었다고 전해지는데, 어떤 상태로 있었는지 失傳(실전)되어 지금으로선 알 수가 없다.

이것은 고분 벽화를 제외하면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채색그림의 하나이며, 最古의 불교 벽화인 만큼 우리 회화사 연구에 있어 귀중한 자료다. 벽면을 떼어 옮기는 과정에서 손상을 입었음인지 금이 가는 등 많이 헐어 있고, 채색도 적잖이 벗겨진 상태다. 그럼에도 그 원형만은 그런대로 유지하고 있는 것을 다행한 일이라고 해야 할까.

조사당 처마 밑에는 나지막한 灌木(관목) 한 그루가 서 있다. 義相 스님이 자신의 지팡이를 꽂으며 『이 나무의 榮枯(영고)를 보아 내 生死를 징험하라』는 말을 남긴 것으로 전해진다.

처마 밑에 심어진 지팡이는 신비스럽게도 싹이 돋고 가지가 자라 해마다 꽃이 피고 있다. 절에서는 禪扉花(선비화)라 부르는데, 원래 깊은 산속에서 자생하는 골담초라고 한다. 조선조 明宗 때 이곳 고을의 군수를 지낸 李退溪(이퇴계) 선생은 그것이 자못 신기하여 다음과 같은 글을 남겼다.

「…지팡이 머리에 조계수가 흘러 하늘과 땅의 비와 이슬의 은혜를 입지 않았네(杖頭自有曹溪水, 不借乾坤雨露恩)」

조선조의 인문지리학자 李重煥은 그의 「擇里志」(택리지)에서 다음과 같이 기막힌 사연을 기록해 두고 있다.

<光海君(광해군) 때 경상감사 鄭造(정조)가 이 절에 와서 『(이 나무가) 仙人의 지팡이였다고 하니 내 지팡이도 한번 만들어 봐야겠다』면서 이 나무를 잘라 갔는데, 훗날 그는 역모 혐의로 처형되었다. 잘린 선비화는 곧 두 줄기로 뻗어나 다시 그만큼 자라 났다>

현재 선비화는 관광객들의 손길을 막으려고 그 주위에 금속제 울을 쳐놓고 있다. 이 바람에 조사당의 古風이 크게 훼손되고 있다.


四部大衆의 심금 울린 국제적 러브 스토리

浮石寺에 가면 善妙龍(선묘룡)이 化한 浮石, 善妙閣(선묘각), 善妙井(선묘정) 등 善妙설화와 얽힌 유물들을 곳곳에서 만난다. 선묘는 義相 스님을 외사랑했던 중국 山東지역의 처녀다. 義相과 선묘의 사랑이야말로 韓·中·日 3국 四部大衆의 심금을 울린 국제적 러브 스토리다. 이 러브 스토리의 전말을 이해하기 위해서도, 나아가 영화롭기 이를 데 없는 8세기 전후의 신라미술을 뒷받침한 海東화엄종의 사유세계를 알기 위해서도 義相 스님의 발자취를 좇지 않을 수 없다.

義相은 신라 진평왕 47년(625)에 서라벌(지금의 경주)에서 진골귀족 金韓信의 아들로 태어났다. 속명은 金日之. 19세 때(664년) 皇福寺(황복사)에서 머리를 깎고 출가했다. 향토사학가들은 국보 37호 구황리 3층석탑이 있는 경주시 狼山(낭산) 기슭을 황복사의 옛터로 점찍고 있다.

義相은 8년 선배 元曉(원효)와 함께 고구려의 망명승 報德(보덕)으로부터 열반경과 유마경을 배웠다. 義相은 나이 27세 때(651) 역시 원효와 함께 唐나라 유학을 계획하고 서라벌을 떠나 당시 고구려의 판도였던 요동까지 갔다. 거기서 두 스님은 고구려의 국경수비대에 간첩용의자로 붙들렸다가 수십 일 만에 풀려나는 곤욕을 치렀다. 첫 渡唐(도당)유학 시도가 실패했던 것이다.

이후부터 전개되는 스토리는 중국의 「宋高僧傳」과 일본의 「華嚴緣起繪卷」에 각각 글과 그림으로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元曉와 義相은 10년 후인 661년 재차 渡唐유학길에 오른다. 두 스님은 배편을 얻기 위해 唐州界(당주계), 즉 지금의 경기도 남양 부근까지 동행했다. 그러던 어느 날, 산중에서 큰비를 만나고 날이 저물었다.

두 스님은 어둠 속을 더듬어 조그마한 움막에 들어 밤을 지내게 되었다. 잠을 자다 목이 말랐던 원효는 잠결에 바가지에 담긴 물을 달게 마셨다. 그러나 날이 샌 뒤 살펴보니 움막은 무너진 무덤이었고, 바가지는 해골이었다. 이튿날도 비가 계속 내려 어느 빈집에 들었는데, 원효는 귀신이 나올 것만 같아 잠을 이룰 수 없었다.

「전날 밤은 무덤 속에서 해골에 담긴 물을 마시면서도 단잠을 잤는데, 이 밤은 왜 이럴까?」

드디어 원효 스님은 「모든 것이 마음먹기 나름」이라는 唯心(유심)의 이치를 깨달았다. 원효 스님은 渡唐유학을 포기하고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반면 義相 스님은 不退轉(불퇴전)의 결의로 渡唐유학의 初志(초지)를 관철한다. 그는 당나라 사신의 배에 편승하여 중국 山東반도에 상륙했다. 義相 스님이 편승한 당나라 배는 남양만에서 해안을 따라 북상하는 연안항로를 항해한 다음 황해도 장산곶 앞바다에서 뱃머리를 90도로 꺾어 항해직선항로를 통해 산동반도 登州(등주:지금의 烟臺)에 입항했던 듯하다.

등주항에 상륙한 義相은 어느 부유한 불교도의 집에 한동안 유숙하게 되었다. 먼 나라에서 공부하러 온 스님은 융숭한 대접을 받았다. 그 집의 딸이 바로 아름다운 꾸냥 善妙였다.

어느덧 義相 스님을 연모한 善妙는 그에게 사랑의 고백한다. 그러나 義相은 美人의 고백이나 육탄공세에 허물어지는 승려가 아니었다. 여자의 애절한 프러포즈를 박절하게 거절했을 경우 남자는 오뉴월에도 서릿발 같은 원한을 사게 마련이다. 그러면 義相은 어떻게 善妙를 다독거렸을까? 두 남녀는 대충 다음과 같은 말을 주고받았다.

『善妙 아가씨, 우리 둘이 肉慾(육욕)을 불태워 보았자 그것이 몇 년이나 가겠습니까? 佛法에 귀의, 往生極樂(왕생극락)하여 永劫(영겁)을 함께 삽시다』

善妙가 설득당하고 말았다.

『世世生生 스님에 歸命(귀명)하여 大乘(대승)을 익히고 스님의 大事가 성취되도록 이 한 몸을 다 바치겠습니다』


中國華嚴의 제3祖 둘러싼 是非

義相과 善妙의 인연은 10년 후, 전편보다 더욱 진한 후편으로 이어지게 된다. 그러나 이때의 義相 스님은 長安(지금의 西安) 남쪽 중국불교의 聖地인 終南山 至相寺로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직행한다.

「三國遺事」에는 義相과 중국화엄 제2조 智嚴(지엄)의 첫 만남이 매우 인상적으로 기록되어 있다. 先夢(선몽)의 계시를 받은 지엄은 제자를 맞을 때의 慣例(관례)를 깨고 몸소 절문 앞에까지 나가 기다리고 있었다. 그가 간밤에 꾼 꿈의 내용은 『커다란 나무 한 그루가 海東에서 생겨나더니 그 가지와 잎이 널리 퍼져나와 온 중국을 덮었다』는 것이다.

스승은 첫눈에 제자가 이미 화엄의 妙旨(묘지)에 통하고 있음을 알아보았다. 지엄은 「孔目章」 「華嚴經搜玄記」(화엄경수현기) 등을 저술, 화엄학의 기초를 다진 當代의 고승이었다. 義相은 지엄 밑에서 7년 동안 공부한 뒤 졸업논문에 해당하는 「華嚴一乘法界圖」(화엄일승법계도)를 지어 스승을 기쁘게 했다. 「宋고승전」 義相傳에서는 이를 두고 「靑出於藍」(청출어람)이라고 표현했다.

화엄일승법계도는 방대한 화엄경을 불과 210자의 偈頌(게송)으로 요약해 놓은 핵심적 해설서이자 槃詩(반시:佛家의 詩)다.

지엄은 668년 10월27일에 입적했는데, 義相은 그 3년 후인 671년에 귀국했다. 그렇다면 그 사이 3년 동안 義相은 중국에서 무엇을 했을까? 정신문화연구원 金知見(김지견:불교철학) 교수는 그때 義相 스님은 중국화엄의 제3조였다고 주장한다.

『제가 北京대학, 東京대학 등의 불교학자들이 모인 세미나에서 중국화엄의 제3조는 法藏(법장) 스님이 아니라 義相이라고 발표했는데,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했습니다』

어떻든 똑같은 문제를 놓고 필자와 西安 西北大學 역사지리학과 교수인 李健超 선생이 8년 전 폐허화한 지상사 앞뜰에서 논쟁을 벌였던 기억이 아직도 새롭다. 지엄은 입적하기 직전에 義相에게는 義持, 法藏에게는 文持라는 법호를 내렸다.

법장은 則天武后(측천무후)의 존숭을 받아 중국화엄을 크게 번창시킨 名僧이다. 측천무후는 지아비인 唐高宗의 사후에 황제를 세 번 제 마음대로 갈아치우다가 끝내는 중국역사상 唯一無二하게 女帝의 자리에 올라 철권을 휘둘렀던 파워 우먼이다.

후일의 얘기지만, 義相은 당나라를 떠나온 지 20여 년의 세월이 흘러 나이 칠순일 무렵, 법장이 보낸 「寄海東書」(기해동서)라는 편지를 받는다. 이 서한의 문면을 보면 선배 義相을 모시는 후배 법장의 자세가 너무나 깍듯하다. 법장은 그가 지은 「華嚴五敎章」(화엄오교장) 등 6종의 저서를 동봉했는데, 그 교정을 간청하고 있다. 「奇海東書」는 지금 일본 天理大學에서 소장하고 있다.

여기서 앞으로 되돌아가 義相 스님이 왜 갑자기 귀국하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宋高僧傳」에서 義相의 귀국 목적을 「傳法」이라고 했지만, 三國遺事의 기록은 좀 다르다. 義相 스님은 對唐 외교를 위해 入唐해 있던 金庾信(김유신)의 동생 欽純(흠순)으로부터 唐軍의 신라침공계획을 입수, 이를 본국에 알리기 위해 文武王 10년(670)에 급거 귀국했던 것이다.

당은 660년 백제 멸망 후 지금의 公州에 熊津都督府(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668년 고구려 멸망 후엔 평양에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직할식민지로 삼은 데 이어 신라까지 먹으려 했던 것이다. 이때의 정세에 대해 三國史記는 『당나라가 배를 수리하면서 밖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신라를 정벌하려는 것』이라고 기록하고 있다.


善妙 아가씨의 誓願

이런 급박한 상황 때문인지 義相 스님은 長安에서 육로로 登州에 가서 거기서 귀국선을 수배하면서도 善妙를 만나지 않았다. 뒤늦게 義相 스님의 소식을 전해들은 善妙는 옷상자 하나를 옆에 끼고 선창으로 달려갔다. 옷상자 속에는 10년 동안 님을 기다리며 한뜸한뜸 정성을 들여 지은 長衫(장삼)이며 袈裟(가사)가 담겨 있었다. 그러나 義相 스님이 탄 배는 이미 수평선 가까이에서 가물거리고 있었다. 드디어 善妙는 자신의 목숨을 건 發願(발원)을 감행했다.

『이 몸이 龍이 되어, 스님이 타신 배를 호위하렵니다』

善妙는 검푸른 물결 속으로 몸을 날렸다. 善妙의 悲願(비원)은 이루어졌다. 龍으로 변한 善妙는 님이 탄 배를 옹위하여 萬里滄波(만리창파)를 무사히 건너게 했다. 그러나 善妙의 역할은 단지 여기서 끝나는 것이 아니다.

귀국 후 義相 스님은 번잡한 王京 서라벌을 등지고 멀리 강원도 양양에 낙산사를 짓고 관음보살을 친견하기 위해 포효하는 東海의 거센 물결에 얼굴을 파묻고 간절히 기도했다. 그 기도문이 바로 百花道場發願文(백화도량발원문)인데, 거기엔 이런 구절도 있다.

<옛날에 당신(관음보살)이 아미타불 앞에 무릎을 꿇었듯이 이 몸은 당신 앞에 무릎을 꿇고 生生世世의 歸命을 맹세하옵니다>

「生生世世의 歸命」은 전날에 어린 善妙가 義相 앞에 무릎을 꿇고 懇求(간구)하던 바로 그 말이다. 그렇다면 관음보살을 향한 義相의 플라토닉 러브는 善妙에게 배운 것이 아닐까.

三國史記 문무왕 16년(676) 봄 2월 條에는 『高僧 義相이 왕의 뜻을 받들어 浮石寺를 창건했다』고 쓰여 있다. 676년이라면 나-당 8년전쟁에서 신라가 압승하고 있던 시기였다. 한 해 전인 675년 9월에는 陸戰의 결전이었던 買肖城(매소성:경기도 연천군) 전투에서 신라군이 李謹行(이근행)이 지휘한 20만 唐軍을 물리쳤고, 676년 11월에는 신라의 水軍이 당의 水軍과 금강 하구에서 결전을 벌여 역시 20전 20승을 했던 것이다.


無量壽殿 앞뜰에 묻혀 있는 石龍

「宋高僧傳」에 따르면 善妙는 義相이 浮石寺를 세울 때도 「스님의 大事가 성취하도록 돕겠다」던 그녀의 언약을 지켰다.

義相이 화엄의 진리를 설파할 장소를 찾아 지금의 浮石寺 자리에 도착했을 때 이곳을 先占한 집단 500여 명이 義相 스님을 공격했다. 위기의 순간, 善妙龍은 큰 바위로 변해 무리들 위로 치솟아 위협을 가함으로써 그들을 복속시켰다. 그런 공덕으로 창건할 수 있었다고 해서 절 이름이 浮石寺로 된 것이다. 또한 義相을 「浮石尊者」(부석존자)로, 해동화엄종을 「浮石宗」으로 일컫기도 한다.

지금도 무량수전의 바로 서쪽에 커다란 「浮石」이 놓여 있다. 30여 명은 둘러앉을 만한 반석이다. 李重煥은 「擇里志」에 이렇게 썼다.

「큰 바윗돌 위에 또 하나의 바위가 집처럼 덮여 있다. 언뜻 보면 아랫돌과 맞닿아 붙은 듯하나, 자세히 살피면 아랫돌과 맞닿지 않고 약간의 틈이 있어 노끈을 넣어 당기면 걸림이 없이 드나들어, 비로소 그것이 『뜬 돌』임을 알 수 있다」

필자 일행과 동행했던 宋俊泰 학예사는 『얼마 전, 李重煥이 시도했던 대로 노끈을 넣어 당겨보니까 실제론 어딘가에 걸려 빠져나오지 않더라』고 말했다.

무량수전 뒤편에는 조그마한 善妙閣(선묘각)이 세워져 있다. 그 안에 善妙의 畵像(화상)을 안치했는데, 최근의 작품이다. 善妙의 모습은 일본의 국보 「화엄연기회권」을 모사한 것 같다. 복스러운 뺨과 넉넉한 턱을 가질 만큼 풍만한 편이다. 그것이 당시 東아시아적 美人의 이상형이라고 할 수 있다. 예컨대 唐玄宗의 애인으로서 중국역사상 4대 미인의 하나로 꼽히는 楊貴妃(양귀비)의 畵像(화상)을 보면 바로 통통한 뺨에 이중턱이다.

범종루 동북편에는 옛 우물 하나가 있는데, 바로 善妙井이다. 善妙龍이 깃든 곳이라 전해지는 이 우물은 4방 한 칸 넓이로, 반듯하게 다듬은 石材로 축조되었다. 浮石寺 창건 당시의 遺構(유구)라고 한다.

浮石寺에는 善妙龍이라고 일컫는 石龍도 있다. 좀 황당하게 들리는 善妙龍 설화의 근거가 될 만한 실증이라고 할 수 있다. 원로 불교학자 閔泳珪(연세대 명예교수) 선생은 1952년 10월 浮石寺를 답사하면서 당시의 老주지스님으로부터 다음과 같은 증언을 들었다고 밝혔다.

<이때(1952년)부터 30수년 전, 경내의 몇몇 건물과 축대가 크게 개수되고 법당 앞뜰도 상당한 깊이로 開掘(개굴)되었을 때, 거대한 石物의 일부가 땅속 깊이 드러나 보였는데, 용의 비늘(鱗)인 듯한 조각의 細部로 역력히 알아볼 수 있었다>

宋俊泰 학예사는 이렇게 말했다.

『무량수전의 아미타불 臺座(대좌) 밑에서 용의 頭部가 시작되어 S자형으로 동체가 꿈틀거리며 앞마당의 석등 밑에 꼬리가 끝나기까지 13여m에 달하는 龍을 조각한 石物이 묻혀 있다는 寺傳(사전)이 있다. 수년 전, 무량수전 앞마당에 義相의 華嚴一乘法界圖를 새기는 공사를 하면서 일부러 좀 깊이 파보니 과연 龍의 비늘을 새긴 듯한 石物이 발견되었다. 이 공사는 無量壽殿 앞마당을 시멘트로 덮는 데 대해 여론이 크게 악화되어 부랴부랴 흙으로 메우는 바람에 그 이상은 확인하지 못했다』


日本에서 明神으로 추앙받게 된 배경

선묘설화는 우리나라에서보다 일본에 더욱 유명하다. 京都의 고찰 高山寺에서는 신라의 명승인 원효와 의상을 「明神」으로 받들고 있다. 일본의 국보 「화엄연기회권」은 모두 여섯 권인데, 네 권은 의상과 선묘의 설화, 두 권은 원효와 의상의 행적을 그린 것이다. 이 회권은 현재 京都박물관에 소장하고 있고, 高山寺에는 模寫本(모사본)만 남아 있다.

高山寺에서 「화엄연기회권」을 그린 것은 일본화엄의 祖宗인 明惠(묘에:1173∼1232) 스님이 의상 스님을 깊이 존숭했기 때문이다. 「일본 최고의 淸純無私(청순무사)한 불제자」 明惠가 의상을 明神으로 추앙했던 이유가 무엇일까?

13세기 초의 일본은 京都의 조정과 가마쿠라 幕府(막부)가 충돌, 한번 대회전이 벌어졌다고 하면 수만 명의 무사와 병사가 전사하는 난세였다. 그에 따라 전쟁 미망인의 수도 급격히 늘어났다. 性比(성비)가 무너진 사회에서 不邪淫戒(불사음계)가 지켜질 리가 없었다. 明惠 스님은 이런 사회적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當代 일본 최고의 高山寺派(고산사파) 畵僧(화승)들에게 「宋高僧傳」의 義相傳에 근거하여 「화엄연기회권」을 그리게 했던 것이다.

또한 明惠 스님은 1219년 承九(승구)의 亂(난) 후에 高山寺 아래쪽에 善妙尼寺(선묘니사)를 지어 전쟁미망인들을 대거 교화구제했다고 한다. 선묘니사는 이곳 高雄소학교 근처에 있었으나 지금은 철거되었다.


『하나가 곧 전체, 전체가 곧 하나』

의상 스님이 지은 法性偈(법성게)는 오늘날 전국 2000여 개 절에서, 그리고 모든 승려들이 매일 독송하고 있다. 법성게는 7言 30句로서 「法」으로 시작해서 「佛」로 끝나는 모두 210字의 게송이다. 한자음을 우리 식 그대로 읽지만, 그 소리효과(만트라)는 게송의 뜻만큼이나 중요하다. 그 핵심 구절 다음과 같다.


하나 가운데 전체, 전체 가운데 하나(一中一切多中一)

하나가 곧 전체, 전체가 곧 하나(一卽一切多卽一)

하나의 티끌 속에 온 누리가 포함되고(一微塵中含十方)

모든 티끌이 또한 그러하네(一切塵中亦如是)


법성게의 「하나가 곧 전체, 전체가 곧 하나」라는 대목 등을 둘러싸고 학계 일부에서는 통일신라의 專制王政(전제왕정)을 이론적으로 뒷받침했던 사상이라고 주장했고, 다른 일부에서는 이에 대한 반론이 전개되기도 했다. 이런 논란에 대해 동국대 鄭柄朝(불교철학)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하나」를 개체적 인격으로 상정하고, 「전체」를 국가로 환원시키면 여기에는 개인과 국가 사이의 윤리의식이 나타난다. 개인이 없으면 국가가 있을 수 없다. 국가 또한 개별적 국민들의 집합을 전제로 한다. 이 둘은 상호의존적 관계일 뿐, 결코 어느 한쪽의 優位(우위)를 논증할 수 없다』

이어지는 鄭교수의 해석.

『국민들에게 국가적 목표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해 주고, 국가와 국왕에게는 겸손의 미덕을 심어 준다. 결국 의상의 시구 속에는 형이상학과 함께 실천윤리의 의도가 담겨 있다. 신라 화랑들이 국가를 위해 목숨을 바칠 수 있었고, 통일 전야의 신라 군주들이 철저한 지기헌신에 매진할 수 있었던 철학적 토대가 마련되고 있는 것이다』

의상 스님의 행적을 보면 현세적 권력을 멀리한 승려였다. 의상은 문무왕이 주려는 논밭과 노비를 딱 부러지게 사양했다. 몸에 걸친 의복, 물병, 그리고 농사짓는 발우, 그는 이 세 가지 이외엔 아무것도 지니지 않았다.

이렇게 불법에는 높낮이가 없다는 高下一味(고하일미)의 평등사상이 義相의 사회의식에서 핵심을 이룬다. 다음은 三國史記 문무왕 21년 條의 기록이다.

<왕은 王城를 새롭게 하고자 승려 義相에게 물으니 대답하기를, 『비록 草野茅屋(초야모옥)에 있을지라도 正道를 행하면 福業(복업)이 장구할 것이나, 만약 그렇지 못하면 아무리 수고롭게 城을 쌓더라도 이익이 없을 것입니다』라고 했다. 왕은 이내 役事(역사)를 중지시켰다>


우리 민족의「교장선생님」

의상의 정치사상은 종교인 본연의 자세를 지키면서 위로는 능히 임금을 설득하고, 아래로는 불쌍한 백성을 어루만졌다는 점에서 탁월하다. 그때 만약 대규모 축성공사를 강행했다면 백제·고구려의 망국민이나 신라의 하층민이 동원될 수밖에 없었다. 義相은 오랜 전란에 지친 사회적 약자의 눈물을 닦아 주었던 것이다.

웬만한 재가신도들도 거의 다 암송하는 이 법성게를 독특한 圖印(도인)으로 타이포그래피(typography)한 것이 「華嚴一乘法界圖」다. 타이포그래피는 글자를 부려 이미지를 전하는 예술이다.

법계도는 네 개의 기하학적 소용돌이가 교묘하게 얽혀 하나의 圖像(도상)을 이루고 있다. 一然은 三國遺事에서 이렇게 義相을 평가했다.

<그는 또 法界圖書印(법계도서인)과 아울러 略疏(약소)를 지어 一乘의 중요한 가르침을 다 포괄했다. 이 글은 오랜 세월을 두고 귀감이 되어 왔으며, 모두들 앞다퉈 진중하게 여겼다. 그 밖에 다른 저술은 없지만, 한 솥의 국맛을 보려면 한 점 고기로도 넉넉한 것이다>

의상 스님은 우리 민족의 교장선생님이라고 할 수 있다. 그의 문하생 3000명이 소백산 錐洞(추동)에서 강의를 들었다고 기록될 정도로 많은 제자들을 두었다. 그 가운데 表訓(표훈)·智通·圓融(원융)·眞定 등 10大 제자는 10大德, 혹은 亞聖(아성)으로 칭송받고 있다.

고려 초기에는 均如(균여)가 義相의 화엄학을 이어갔다. 그러나 조선왕조 들어 극심한 排佛(배불)정책에 의해 그 학맥이 한동안 단절되었다. 오늘날에 이르러 불교 曹溪宗(조계종)의 승가대학에서는 이수과정 중 마지막 교과에서 義相의 화엄학을 가르치고 있다.

필자 일행은 義相 스님의 숨결을 깊숙이 느끼기 위해 浮石寺에 사흘 동안 하루 한 번씩 올라가 답사했다. 의상 스님은 모든 모순과 갈등을 圓融觀(원융관)으로 조화시켜 새 질서를 정립하는 지도원리를 이미 1300여 년 전에 제시했다.

여기서 표기상의 혼란을 피하기 위해 꼭 첨언해 둘 것이 있다. 의상의 한자 표기가 「義相」과 「義湘」, 두 가지로 되어 있기 때문이다. 三國遺事와 宋高僧傳에는 「義湘」으로 되어 있다. 그러나 三國史記와 均如가 지은 一乘法界圖圓通記에는 「義相」으로 되어 있다. 더욱이 의상의 직계 제자인 道身(도신)이 지은 道身章에도 「相」을 쓰고 있다. 그렇다면 「義相」이 옳은 것 같다.

이번 취재기간(12월29∼31일) 중에는 영주시 순흥면에 있는 紹修書院(소수서원)과 영주시 이산면 석포리에 있는 黑石寺(흑석사) 등지도 각각 두 번씩 답사했다. 국보 제111호 晦軒影幀(회헌영정)과 국보 제282호 木造아미타불좌상 및 腹藏遺物(복장유물)을 소장한 곳이다. 또한 竹嶺을 넘어 국보 제198호 丹陽 신라 赤城碑(적성비)도 취재했다. 나머지 세 국보에 관한 답사기는 다음 호에 싣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