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鄭淳台의 국보 기행(7)

정순태   |   2003-02-27 | hit 2029

경주의 積石木槨墳은 스키타이와 흉노의 墓制


경부고속도로 慶州(경주) 톨게이트를 벗어나 서라벌 大路로 접어들면 곧 蘿井橋(나정교), 나정교를 건넌 다음 五陵(오릉)을 끼고 좌회전하면 경주시청에 이르는 金城路(금성로)로 접어들게 된다. 금성로에서 경주 중심가 쪽으로 북진하면 바로 눈앞에 크고 작은 古墳(고분)들이 펼쳐져 있다. 이 古墳群이 바로 4∼6세기의 麻立干(마립간: 당시의 王號) 시대에 축조된 新羅(신라) 특유의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 돌무지 덧널무덤)들이다.

여기가 바로 우리나라에서 국보급 유물이 가장 많이 출토된 皇南洞(황남동)의 大陵園(대릉원) 지구다. 大陵園에는 제155호 고분, 제98호 雙墳(쌍분), 味鄒王陵(미추왕릉) 등 大小 20여 基의 고분이 밀집되어 있다. 필자는 우리 역사상 최고 최대의 출토품들이 쏟아져 나온 제155호 고분을 답사하기 위해 2월26일 오전 9시 정각 대릉원 정문 앞에 섰다. 승용차 주차요금 2000원, 입장료 1500원. 평일(화요일) 오전의 대릉원은 매우 아늑했다. 제155호 고분은 대릉원의 정문에서 가장 멀고, 후문에서는 가장 가까운 서쪽 끝에 위치해 있다.

제155호 고분은 天馬塚(천마총)이라고 불린다. 그 이유는 1973년 발굴 당시 副葬品(부장품: 껴묻거리) 가운데 障泥(장니: 말다래)가 출토되었는데, 이 말다래에 하늘을 나는 말이 그려져 있었기 때문이다. 말다래는 말이 질주할 때 튀어오르게 마련인 진흙 같은 것이 말의 배나 허벅지에 묻지 않도록 차단하는 馬具다. 天馬塚의 말다래는 자작나무 껍질을 여러 장 겹쳐서 만든 것이다.

天馬塚은 신라의 고분 가운데 유일하게 내부구조와 유물의 출토상황을 그대로 복원하여 발굴 당시의 모습을 일반에게 공개하고 있다. 천마총 안에 들어가 보면 積石木槨墳이 어떤 것인지 대번에 이해할 수 있는데, 그 축조양식은 다음과 같다.

먼저 땅을 잘 고른 다음 바닥 위에 진흙을 깔고 진흙층 위에 다시 냇돌(川石)을 깔았다. 그리고 냇돌층 위에 다시 木槨(목곽: 통나무집)을 설치했다. 목곽 내부에는 副葬品을 넣은 櫃(궤)와 시신을 넣은 관을 수직이 되게 안치했다.

이런 과정을 거쳐 목곽 위를 냇돌로 쌓아 덮었으며, 냇돌층은 다시 진흙층으로 발라 다졌다. 마지막으로는 그 위에 흙을 쌓아 봉분을 했다. 이런 봉분 때문에 積石木槨墳이 외형적으로는 圓形土墳(원형토분)으로 보이는 것이다.

天馬塚으로부터 출토된 유물은 무려 1만1526점에 달했다. 封土(봉토)의 정상부에 매장되어 있던 馬具類(마구류) 등은 너무 심하게 썩어 출토품 숫자에 포함시키지 않았다. 출토품 리스트를 보면 고구려나 백제, 그리고 중국의 고분 출토품과는 사뭇 다르다. 예컨대 靑銅(청동)거울이나 墓地銘(묘지명) 같은 것은 全無한 반면 금관, 가락지, 팔찌, 귀고리, 목걸이 등 호화찬란한 金製 장신구가 수두룩하고, 철제 무기, 武具와 工具도 많다.

天馬塚의 내부 벽면엔 이곳에서 발굴된 국보급 유물의 모조품들을 진열해 두었다. 진품은 모두 국립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국보 제188호 天馬塚 금관의 위용


金冠은 발굴되기만 하면 모두 國寶로 대접받는다. 세계적으로도 신라금관만 한 수준의 왕관을 찾아볼 수 없는데다 매우 독창적이기 때문이다. 특히 天馬塚 금관은 지금까지 출토된 금관 가운데 가장 크고 화려한 것이다. 다른 금관에 비해 금판도 두껍다. 금관의 높이는 32.5㎝, 테두리(다이아뎀)의 직경은 20㎝.

금관의 앞면에 4段으로 된 「出」字 모양의 장식(直角樹枝形立飾)이 세 개, 뒷면에는 사슴뿔 모양의 장식(鹿角樹枝形立飾) 두 개가 세워져 있다. 그리고 出字 모양의 立飾(입식)에는 曲玉이 13개씩, 사슴뿔 모양의 立飾에는 曲玉이 5개씩 달려 있다. 금관의 테 앞쪽으로는 2개의 垂飾(수식)이 늘어져 있고, 많은 曲玉과 금제의 樹葉(수엽)이 달려 있는 立飾의 꼭대기는 寶珠形(보주형)이다.

그러면 天馬塚 금관을 썼던 사람은 누구였을까? 고고학계에서는 신라 21대 임금인 炤知王(소지왕: 재위 479∼500년) 또는 22대 임금인 智證王(지증왕: 재위 500∼514년)일 것으로 추정한다. 왜냐하면 立飾의 段數(단수)는 북방 기마민족인 스키타이와 흉노 집단에서는 셔먼(제사장)의 제너레이션을 뜻하는 것이었는데, 麻立干 시대의 신라에서는 그것이 어느 王系의 초대 임금인지, 2·3·4代를 계속해서 등극한 임금인지를 나타내는 표식이 되었기 때문이다. 소지왕과 지증왕은 모두 奈勿王(내물왕) 이후 4代에 걸쳐 계속 등극한 가계의 임금들이다(내물왕계표 참조).

그런데 고고학자 金秉模씨(한국전통문화학교 총장)는 한 발 더 나아가 天馬塚의 금관을 썼던 임금은 지증왕이라고 단정한다. 그에 따르면 소지왕의 금관에는 曲玉이 달려 있을 수 없다. 曲玉은 「생명의 열매」를 뜻하는데, 소지왕의 경우 왕통을 계승할 아들을 두지 못했다. 그런 만큼 소지왕의 무덤은 4단짜리 立飾이긴 하되 曲玉이 하나도 달려 있지 않은 금관이 출토된 金鈴塚(금령총)이라는 것이다.

그렇다면 천마총의 墓主(묘주: 피장자)는 지증왕일 수밖에 없다. 이제는 天馬塚의 주인공 지증왕이 도대체 어떤 임금이었는지를 알아볼 차례다.

三國史記에는 「지증왕은 몸집이 몹시 크고 담력이 남보다 뛰어났다」고 기록되어 있다. 三國遺事의 기록은 더욱 노골적이어서 「지증왕은 陰莖(음경)의 길이가 1자5치가 되어 배필을 얻기 어려웠다」고 되어 있다. 당시 1척은 약 20㎝이었으니까 陽物(양물)의 길이가 자그마치 30㎝에 달할 만큼 위풍당당했다는 얘기다. 지증왕은 陽物뿐만 아니라 治績(치적)으로도 王中王이었다.

지증마립간은 내물왕의 증손이다. 서기 500년 초겨울에 소지왕이 죽었는데, 그에게 아들이 없어 지증은 王弟로서 64세에 왕위에 올랐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斯羅(사라), 斯盧(사로) 등으로 불리던 국호가 新羅로 확정된 시기는 지증왕 4년(503년)이었다. 新羅라는 국호에는 德業(덕업)을 一新하고 사방을 網羅(망라)하겠다는 國策(국책)의 방향이 담겨 있었다. 이때 임금의 존호도 麻立干에서 大王으로 바뀌었다. 울릉도가 신라에 항복한 것도 지증왕 13년(512년)의 일이다.


金細工의 압권, 국보 제189호 천마총 金帽


金帽(금모)는 정교하게 만들어진 금제 冠帽로서 內冠(내관)이라고도 한다. 그것은 金細工(금세공) 솜씨의 압권이다. 이 內冠 위에 金冠을 썼던 것으로 보인다.

천마총 金帽는 T자 모양, 마름모꼴, 山 모양, 당초 무늬로 전면을 透刻(투각)한 금판 여러 장을 잘 마름하여 연결했다. 상하로 연결하는 부분의 가장자리는 금테를 두르고 이를 금실로 엮어서 꼭대기를 弧形(호형: 활 모양)으로 만들었다. 꼭대기 부분과 맨 아랫부분에도 넓은 금테를 대어 보강했다.

투각된 금판의 여백에는 직선 또는 곡선으로 오톨도톨 튀어나게 했고, 맨 밑부분에 댄 넓적한 금판에는 못 구멍이 여러 개 뚫려 있다. 높이와 폭이 모두 19㎝. 天馬塚 현장에 전시되어 있는 것은 모조품이고, 실물은 국립 경주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天馬塚에서는 금관, 금모와 함께 鳥翼形冠飾(조익형관식)도 출토되었는데, 폭 59㎝의 크기로서 큰 새가 날개를 활짝 편 것처럼 생겼다.

신라 무덤에서 金製 새 날개가 출토된 것은 天馬塚이 유일하다. 이것은 신라인에게 神鳥(신조) 사상이 있었음을 말해 주는 증거이다. 神鳥 사상은 사람이 죽더라도 그 육신과 영혼을 흰 새가 하늘나라로 데려가 준다는 믿음인 것이다.

신라왕족의 조상인 북방 기마민족들 사이에는 死者의 肉身을 새가 뜯어먹게 함으로써 하늘로 올려보낸다는 鳥葬(조장) 풍속이 있었다. 또한 古代 한국인들은 북쪽에서 날아오는 새들이 吉凶禍福(길흉화복)에 큰 영향을 미친다고 생각했기 때문에 솟대(蘇塗) 위에 새 모형을 올려 놓기도 했다. 이런 사상은 알타이 문화권인 몽골, 바이칼湖 부근 지역, 야쿠트族 거주 지역에서 공통적으로 유행했다.


국보 제190호 金製 허리띠 및 腰佩


신라의 麻立干들은 의식 때 허리에 순금으로 된 허리띠(♥帶: 과대)를 차고 그 아래에 각종 패물이 주렁주렁 달린 장식줄(腰佩: 요패)을 달았다.

天馬塚에서 발견된 허리띠는 透刻(투각: 옆으로 뚫어지게 새기는 조각의 한 방법) 무늬가 있는 4각형 금판 44개를 연결했는데, 주변에 9개 구멍이 있어 가죽에 고정시키게 되어 있다. 이 밑에는 안으로 돌기가 있는 透刻 하트형(心葉形) 수식을 경첩으로 연결하였고, 끝에는 버클(具: 교구)을 달았다.

腰佩는 열세 줄로서 모두 타원형 금판과 그 사이에 사각형 금판을 교대로 연결했고, 끝에는 숫돌, 칼, 고리구슬, 물고기 등의 장식을 달았다. 이와 같은 요패의 장식이 무엇을 상징하는지에 대한 定說은 없으나 고고학자 金秉模 교수에 따르면 금관의 수지형 입식은 신라金씨의 토템, 녹각형 입식은 왕비족의 토템, 요패의 장식들은 신라에 복속한 부족들의 토템이다.


국보 제207호 天馬圖 障泥


제155호 고분이 天馬塚으로 명명된 것은 障泥(장니: 말다래)에 그려진 天馬圖 때문인 것은 앞에서 이미 썼다. 직사각형의 자작나무(白樺樹: 백화수) 껍질에 그려진 천마도는 白色의 天馬를 가운데 두고 그 사방을 忍冬唐草文(인동당초문)으로 테를 두른 구도다.

白馬는 갈기와 꼬리를 곧추세워 하늘을 훨훨 나는데, 입에서는 혀를 내밀며 瑞氣(서기)를 내뿜는 듯한 모습이다. 특히 천마의 네 발은 구름과 같이 圖形化(도형화)되어 이승과 저승을 오가는 神獸(신수)임을 강조하고 있다.

그래서인지 天馬圖를 보고 있으면 신라인의 말에 대한 존경, 사랑뿐만 아니라 신라인의 말(馬) 토템 사상의 실상을 느낄 수 있다. 신라金씨의 정신적 고향인 알타이 지역에선 白馬를 숭배했다. 알타이 지역에 들어선 지금의 카자흐스탄은 백마(카자흐)와 스탄(나라)의 합성어이다.

三國遺事에 따르면 신라의 시조 赫居世(혁거세)는 白馬가 놓고 간 알에서 태어났다. 그리고 그 白馬는 흰 구름을 헤치고 하늘로 날아갔다. 즉 天馬야말로 최고통치자의 탄생에 媒介者(매개자) 역할을 하고 있는 것이다.

이 자작나무 껍질의 말다래는 우리나라에선 최초의 것이다. 자작나무 껍질 細工(세공)은 시베리아로부터 南러시아에 이르는 지역의 전통적 기술이다. 중요한 것은 스텝(초원) 지역 사람들에게 神樹(신수)로 숭배되는 자작나무가 신라에 들어와 騎馬의 말다래로 만들어졌다는 점이다. 이것이야말로 신라인과 북방 스텝 지역과의 깊은 인연을 말해 주는 것이다.

자작나무 껍질에 묘사된 天馬와 忍冬唐草文을 세밀하게 관찰하면 의외의 현상이 드러난다. 우선 天馬塚의 그림에는 天馬(페가수스)라면 으레 달고 있는 날개가 없다. 날개 대신에 앞다리 사이의 가슴 아래와 앞다리 뒤 복부, 뒷다리 뒤의 복부, 뒷다리의 중간 부분, 背後(배후)에 고사리 모양의 圓弧(원호)를 그린 구름 무늬가 묘사되어 있다. 아마도 이것은 질주하는 말의 다리 밑에서 하늘로 올라가는 흙먼지의 소용돌이를 표현한 것으로 보인다.

또한 입으로부터는 기염을 토하고 갈기와 꽁무니의 긴 털은 질주하는 말의 속도감을 표현하려는 듯 뒤쪽으로 기세 좋게 휩쓸려 있다. 특히 白馬의 목, 다리, 몸체에는 초승달 모습의 얼룩무늬가 리얼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런 표현은 민족적인 意匠(의장)심리가 반영된 것으로 보이는데, 원래 스키타이를 비롯한 북방 기마민족의 대표적인 문양이다.

신라왕족은 금관을 쓰고 하얀 天馬를 탔다. 天馬塚에 가면 신라인의 의식세계과 문화현상을 엿볼 수 있다. 신라는 그 특유의 국제성·융통성·창조성으로 우리 민족사상 최초의 통일을 완성하여 최고의 전성기를 실현한 나라였다. ●



◈麻立干 시대의 왕족 무덤 大陵園

大陵園은 경주 황남동에 밀집해 있는 大小 20여 基의 고분을 보호하기 위해 조성한 史蹟公園(사적공원)이다. 그 규모는 직경 10m 미만에서 120m까지, 높이 1m 미만에서 25m에 이르기까지 다양하다. 외형상으로는 圓形土墳 또는 瓢形墳(표형분:표주박 모습의 무덤)이라고 불리는 부부 合葬(합장)의 雙墳(쌍분)이지만, 내부구조는 모두 적석목곽분이다.

적석목곽분은 평지 위에 나무 관과 껴묻거리(副葬品) 상자를 놓고 그 바깥에 나무로 짠 덧널(木槨)을 설치한 다음 돌덩이를 쌓고 흙으로 덮은 스키타이·흉노의 墓制(묘제)다.

경내에 위치한 대표적 고분은 味鄒王陵(미추왕릉)과 제98호 雙墳(皇南大塚:황남대총), 그리고 本文에서 다루고 있는 天馬塚(제155호 고분)이다.

味鄒王(재위 262∼284년)은 신라金씨의 始祖인 閼智(알지)의 7세손으로 신라의 첫번째 金씨왕이 되어 22년 간 재위했다. 천마총과 황남대총은 발굴조사 결과 적석목곽분 중에서도 가장 특색 있는 내부구조를 보여 주었을 뿐만 아니라 금관 등 각종 금제 장신구와 무기, 마구 등 호화찬란한 유물이 출토되어 신라문화의 우수성과 국제성을 세계에 과시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