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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淳台의 역사 산책]「海神 장보고」의 작가 崔仁浩와의 對談

정순태   |   2003-03-03 | hit 9196

鄭淳台 崔선생의 신문연재소설 「海神 張保皐」(해신 장보고)가 최근 세 권의 장편으로 묶여 출판되었더군요. 원래, 저는 우리 역사상 최고의 世界人 장보고에 관심이 많은 사람이지만, 신문연재소설이라면 매일매일 감질난 분량을 챙겨야 하니까 읽지 않았죠. 그런데 며칠 전의 月刊朝鮮 편집회의에서 『최인호의 「海神 장보고」는 전공학자 수준의 역사해석을 종횡무진 구사한 역작』이란 평가가 나왔습니다. 저는 바로 그 다음날(토요일), 동네 책방에서 「海神」 1∼3권을 한꺼번에 사서 계속 읽기 시작하여 오늘(월요일) 새벽에야 일독을 마쳤습니다. 손에서 놓을 수 없을 만큼 흥미진진하더군요. 국내외에 걸친 입체적인 답사와 취재, 동서고금의 사료 동원, 그리고 화려한 스토리 전개에 깊은 감명을 받았습니다. 崔선생은 언제부터 장보고의 팬이 되셨습니까.

崔仁浩 작가로서 장보고에 관심을 갖기 시작한 것은 7~8년쯤 됩니다. 작가가 역사인물을 소설화할 때도 왜 하필이면 이 시대에 이 사람이 필요한가를 먼저 생각합니다. 20세기를 이데올로기 시대라고 한다면 21세기는 세계화 시대인 만큼 세계인으로서 비전을 가졌던 사람을 재조명할 필요가 있는 거죠. 그가 과연 누구냐? 장보고가 저의 레이더망에 딱 걸려들더라구요.

鄭淳台 다작을 하시는 崔선생으로선 작품구상 기간이 의외로 길었던 셈이군요.

崔仁浩 실은 곡절이 좀 있었죠. 장보고가 비록 매력적인 인물이기는 하지만, 처음에 제가 뭔가 좀 오해했습니다. 우리 「三國史記」(삼국사기)나 「三國遺事」(삼국유사)를 보면 장보고가 자기 딸을 왕비로 들이려다가 실패하자 반역을 꾀한 것으로 되어 있지 않습니까. 그렇다면 그도 역사에서 무수하게 명멸해간 「그 잘난 사람들」과 마찬가지로 권력욕의 化身(화신)이 아니었겠느냐, 그렇다면 굳이 저까지 붓끝을 휘두를 필요가 어디 있겠느냐고 망설였던 거죠. 영화감독도 주연 여배우한테 사랑을 느껴야 좋은 작품이 나오는 것 아닙니까. 그러다 3년 전, 唐(당)나라 때의 大시인 杜牧(두목)의 「樊川文集」(번천문집), 일본 天台宗(천태종)의 제3조인 엔닌(圓仁)의 「入唐求法巡禮行記」(입당구법순례행기)를 읽고서야 鄭선생이 지적하신 것처럼 장보고야말로 우리 역사상 최초의 世界人이라는 느낌이 강하게 다가왔습니다.


장보고는 월드와이드 영웅

鄭淳台 장보고를 세계인으로 처음 주목한 것은 그와 同 시대를 살았던 杜牧과 엔닌이죠. 두목이 그의 「번천문집」에서 장보고를 영웅으로 기록했는데, 그것이 중국의 正史 「新唐書」(신당서)에 거의 그대로 전재되었었죠. 우리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의 장보고에 관한 기록의 前半部(전반부)는 「신당서」를 베낀 것입니다. 또한 엔닌이 세계 3대 여행기 중 하나로 꼽히는 그의 「입당구법순례행기」(이하 순례행기로 줄임)에 장보고의 월드와이드 스케일을 사실적으로 기록했는데, 그것이 일본의 정사인 「日本後記」(일본후기), 「續日本記」(속일본기), 「續日本後記」(속일본후기)에 인용되었던 거든요. 한국의 역사인물 중 동양 3국의 正史에 두루 기록된 인물은 장보고가 유일한 존재겠어요. 駐日 미국 대사를 지낸 하버드 대학의 석학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도 그의 「엔닌의 일기」(1955)에서 장보고를 「해상상업제국의 군주」라고 평가했죠.

崔仁浩 중국의 大운하 지대와 일본의 엔라쿠지(延曆寺)와 미테라(三井寺) 등지를 답사해 보니까 장보고는 로컬 영웅이 아니라 월드와이드 영웅입디다. 그가 국내용 영웅이었다면 역사에 이미 파묻혔을 겁니다. 그가 세계인이었기 때문에 우리나라에서보다 중국과 일본에서 그를 끊임없이 부활시킨 거예요. 또 한 가지, 역사기록은 으레 승자의 편인데, 장보고는 패자였죠.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패자부활전을 통해 역사에 환생했거든요. 저는 이 사람 참 유니크하고 매력 있다, 오늘날 사람들에게 미래지향적 선각자로서 보여주기에 충분하다고 느꼈죠.

鄭淳台 하나의 역사인물은 학문적 연구에 이어 소설화 작업이 뒤따라야 그에 대한 역사적 평가와 해석이 완결된다고 생각합니다. 崔선생은 오늘을 사는 우리들에게 世界人 장보고의 전도사가 되신 것입니다.

崔仁浩 제가 「海神」을 연재하면서 활자매체만으로는 상상력에 한계가 있다고 생각해 KBS를 찾아가서 다큐멘터리로 한번 만들어 보자고 제안을 했습니다. 처음 그쪽 반응은 시큰둥하데요. 장보고라면 뻔한 인물 아니냐는 거죠. 이렇게 사람들은 장보고에 대해 많이 아는 것처럼 생각하지만, 실은 잘 모릅니다. 우여곡절을 거쳐 KBS-TV 신년특집 다큐멘터리 5부작이 제작되었습니다. 그럼에도 아직도 뭔가 미진해요. 일찍이 장보고의 행적을 좇아 국내외를 두루 답사한 저널리스트와 소설가가 오늘 모처럼 만난 김에 장보고에 관련한 역사의 死角地帶(사각지대)를 탐험해 보면 어떨까요.


명확하지 않은 인생역정

鄭淳台 깐깐한 학자를 모시지 않은 자리인 만큼 우리 동갑생끼리 간 큰 소리를 좀 해도 괜찮다는 말씀이죠(웃음)? 장보고는 출생 연도, 출생지, 성명부터 명확하지 않고, 심지어 사망 연도에 대해서도 양론이 있습니다. 저는 장보고가 서기 790년 전후에 태어난 것으로 판단하고 있는데, 崔선생은 「海神 장보고」(이하 「海神」으로 표기)에서 확정하지는 않았지만, 788년으로 해야 앞뒤 얘기가 맞아떨어지도록 쓰셨습디다. 출생지도, 나중에 그가 軍鎭(군진)을 전남 莞島(완도)에 설치했던 점으로 미뤄, 그곳을 그의 고향으로 잡는 데는 거의 모든 연구자의 의견이 일치하고 있지만, 史書(사서)에는 그냥 海島人(해도인: 섬사람)으로 되어 있어 불명확합니다. 그의 성명에 대해서도 史書마다 기술이 좀 다르죠. 삼국사기엔 弓福(궁복) 일명 張保皐, 삼국유사엔 宮巴(궁파), 신당서엔 張保皐, 속일본후기에는 張寶高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崔仁浩 福과 巴는 사내아이의 이름에 붙이는 접미어죠. 그러니까 궁복이나 궁파는 모두 「활(궁) 잘 쏘는 아이」를 의미하는 우리 吏讀式(이두식) 표기입니다. 그의 출신이 「미천했다」 하니까 애초에 성씨 같은 것은 없었을 거예요. 唐나라에 가서 姓이 필요하니까 활 弓 변에 길 長 자를 붙여 창씨를 한 것 같습니다. 保皐도 따지고 보면 福을 소리나는 대로 풀어서 표기한 거죠. 일본 사람들이 張寶高라고 표기한 것은 동북아 해역의 질서를 바로잡고 거대한 財富(재부)를 쌓은 인물에 대한 존경의 뜻이 내포되어 있다고 생각합니다.

鄭淳台 李基白 선생은 「국사신론」에서 장보고의 출신 신분에 대해 「호족 출신인 것 같다」고 쓰셨는데, 다수說은 당시 농민보다 더 신분이 낮았던 섬사람이었죠. 삼국사기를 보면 「헌덕왕 8년(816) 정월, 흉년과 기근으로 당의 浙江(절강) 동쪽으로 건너가 식량을 구하는 자가 170명이나 되었다」는 등의 기사가 눈에 띕니다. 더욱이 신라 下代에 들면 골품제로 장래가 꽉 막힌 청년들이 당시로선 세계 최선진국인 당에 이민을 가는 경우가 많아집니다.

崔仁浩 816년이라면 신라인 180명이 일본에 건너간 기록(日本紀略 弘仁 16년 條)도 있습니다. 신라版 이민 러시가 이뤄진 셈이죠.


신분상승을 위해 唐나라로 밀항

鄭淳台 장보고도 그의 나이 20세 무렵인 810년 고향 후배 鄭年(정년)과 함께 당에 건너갔습니다. 「海神」에서 崔선생은 장보고가 그때 신라인들을 노예로 붙잡아 가는 해적선을 타고 간 것으로 그려져 있습디다. 왜 그랬습니까. 자칫하면 오해를 불러일으킬 수도 있는데….

崔仁浩 그건 나중에 장보고가 해적 소탕을 자임하게 되는 휴머니즘의 배경을 설명하기 위해 미리 설정한 작가의 공간입니다. 장보고가 遣唐船(견당선)에 편승할 만한 신분도 아니었고, 출입국 절차를 받아 중국에 건너갔던 것으로 보이지 않거든요. 밀항선을 타고 불법이민을 했다고 봅니다. 어쩌면 해적들이 경영하는 노예선에 승선하여 뱃일을 하면서 바다를 건너 밀항에 성공했는지 모르죠. 그렇다면 그때 노예들의 참상을 목격하고 의분을 느끼지 않았겠습니까.

鄭淳台 장보고와 정년은 唐에서 軍에 입대하여 둘 모두 武靈軍 小將(무령군 소장)으로 출세했습니다. 무령군이라면 徐州(서주)의 牙軍(아군), 즉 主力軍입니다. 小將은 지금의 연대장 정도라고 할까요. 섬마을 출신 청년이 당나라의 고급장교가 되었으니 대단한 출세죠.

崔仁浩 小將이라면 병사 1000명을 지휘했던 副將級(부장급)이죠. 장보고와 정년은 상상할 수도 없는 전공을 세워 이방인으로서는 최고계급까지 오른 용사로 봅니다. 杜牧이 장보고를 당나라의 郭子儀(곽자의)와 대등한 인물로 보았으니까요. 곽자의라면 755년 일어난 安祿山(안록산)의 반란을 진압한 당대 최고의 영웅입니다.

鄭淳台 장보고와 정년은 안록산의 반란을 평정한 지 60여년 후에 일어난 李師道(이사도)의 반란을 진압하는 데 戰功(전공)을 세워 신분의 수직상승이 가능해졌던 거죠. 이사도라면 지금의 山東반도에 웅거한 소왕국적 군벌 平盧淄靑(평로치청)의 절도사였어요. 그의 조부가 고구려의 유민 출신 李正己(이정기)로서 안록산의 반란군을 무찌른 전공으로 藩鎭(번진)의 절도사가 되었죠. 李正己 일가는 그에 이어 아들 李納(이납), 장손 李師高(이사고)와 次孫(차손) 이사도, 이렇게 4代에 걸쳐 55년간 산동반도를 통치했습니다.

崔仁浩 산동반도라면 그곳의 닭울음 소리가 바다 건너 한반도에 들린다는 우스개가 있을 만큼 우리와 역사적으로 밀접한 관계죠.


고구려 유민 출신 李正己 일가와의 전투

鄭淳台 이정기 일가의 통치에 앞서 渤海(발해)의 제2대 왕 大武藝(대무예)가 732년 登州(등주: 산동반도)에 상륙하여 그곳 刺史(자사)를 죽이고 한동안 발해의 강역으로 삼았어요.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 이듬해인 성덕왕 32년(733), 唐 현종이 신라에 원병을 요청, 신라군이 발해의 남부지방을 공략하는 등 제2전선을 형성했으나 폭설을 만나 사망자가 절반이 넘는 바람에 아무런 성과도 없이 회군했죠.

崔仁浩 전성기의 이정기 일가는 10만 명의 군대를 거느리고 15개州를 점거, 중앙정부로 가야 할 貢賦(공부: 세금)까지 독식했죠. 814년 이사도는 河南部에 10여 개의 진지를 구축하고, 江淮(강회)의 재부가 쌓여 있는 河陰倉(하음창)을 불살라버리는 등 唐에 선제공격을 감행합니다.

鄭淳台 하음창은 唐 조정이 평로치청 등 反唐 번진들을 토벌하기 위해 150간의 창고를 짓고, 각종 군수물자를 보관했던 창고로서 비축된 쌀만 200만 석이 달했다고 기록되어 있죠.

崔仁浩 어디 그뿐입니까. 자객을 長安으로 밀파하여 唐의 재상 武元衡(무원형)을 암살하여 唐 조정의 간담을 서늘하게 했습니다. 양자강과 회수 지역의 곡창지대와 京師(경사: 수도권) 지역인 장안·낙양을 연결하는 대운하의 요충을 점령했어요. 남북의 물자수송이 막힌 唐 조정은 李씨 일가를 驕藩(교번), 즉 교만한 지방군벌로 규정하여 818년부터 본격적인 토벌에 나섰던 거죠. 819년 토벌군에 몰린 이사도가 부하에게 피살됨으로써 반란이 진압되었습니다.

鄭淳台 崔선생의 「海神」에서는 이정기 일가를, 신라의 백성들을 납치하여 唐에서 매매함으로써 재부를 쌓은 부정적인 인물로 묘사했더군요. 평로치청이 발해 등과 말(馬) 무역을 한 사실은 있었지만, 노예무역에 치부했다는 기록은 없습니다. 장보고를 미화하기 위해 李正己 일가를 악당으로 만든 것 아닙니까.

崔仁浩 당시 토벌군의 선봉은 장보고가 속해 있던 무령군이었습니다. 장보고가 동족인 이사도를 공격하는 것에 대해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서는 그런 작가적 공간을 설정할 수밖에 없더군요. 이사도를 휴머니스트 장보고와 대칭되는 악역으로 만든 겁니다. 장보고가 해적선에 편승하여 당나라로 밀항하면서 노예무역의 참상을 목격했고, 그 후 이정기 일가가 노예무역의 배후라는 것을 알고 분개했다고 해야 갈등관계가 되지 않겠습니까. 소설에선 이런 갈등관계가 필요하죠.

鄭淳台 당시 山東 일대가 노예무역의 중심지 가운데 하나였던 만큼 그곳을 통치한 이정기 일가에게 그런 혐의가 전혀 없었다고 단정할 수야 없겠죠. 그러나 심증은 가지만 물증은 없는 것입니다.

崔仁浩 이정기 일가의 영화가 사라지고 고구려계가 몰락함으로써 중국 동해안 일대에 거주하던 신라 교민과 고구려·백제 유민의 통합이 이뤄진 거죠. 그 중심인물이 장보고입니다.

鄭淳台 이정기 일가에게 고구려系라는 의식의 강도가 어느 정도였는지는 알 수 없지만, 그들이 물론 親신라적이지는 않았을 겁니다. 그러니까 당나라에서 장보고와 이사도가 피 터지는 전투를 했다고 해서 오늘날의 민족주의적 잣대로 「동족끼리 그럴 수 있느냐」는 논리는 성립될 수 없겠죠. 우리 민족의 형성은 삼국통일 이후의 일이니까요.

崔仁浩 그런 맥락에서 장보고와 이사도의 싸움은 중국땅에서 벌어진 신라와 고구려의 리턴매치인 셈이군요.

鄭淳台 이사도 반란의 진압 당시, 杜牧은 장보고의 나이를 30세로, 정년의 나이를 장보고의 10세 연하로 기록했습니다. 나이 불과 20세인 정년이 장보고와 동격인 무령군 소장이 되었다는 점은 좀 이상하죠. 崔선생의 「海神」에서는 정년의 나이가 장보고보다 두 살 아래로 쓰셨는데, 오히려 설득력이 있는 것 같아요.

崔仁浩 두목은 장보고-정년의 관계를, 안록산의 난을 평정한 두 영웅이며, 10년 정도의 나이 차이를 가진 郭子儀-李光弼(이광필)의 관계에 억지로 대입시킨 거죠. 그것은 시인 특유의 비유법 또는 과장법이라고 생각해요. 두목은 이런 과장법을 그의 詩에서도 구사하고 있습니다. 예컨대 그의 대표작 중 하나인 遣懷(견회: 회포를 풀다)라는 詩에 「10년의 오랜 세월 한 번 깨니/ 한갓 揚州(양주)의 꿈이었을 뿐/靑樓(청루)에 薄情(박정)한 사람이란/이름만 남았구나」라는 구절이 있거든요. 두목은 양주 자사의 서기로서 양주에 머물었던 햇수가 실제로는 2년인데, 그의 詩에선 10년으로 되어 있어요.

鄭淳台 두목이 사랑했던 양주라면 대운하의 요지로서 당시 南海무역과 北海무역이 교차하던 중국 제1의 국제무역항이었어요. 거기서 두목은 전후 두 차례 3년간 거주했죠.

崔仁浩 바로 양주에서 두목은 시중에 파다하게 퍼진 장보고의 영웅담을 처음 듣게 되거든요.


熱血 우국詩人의 영웅 待望論

鄭淳台 이사도의 반란이 진압된 것은 819년. 그때 두목의 나이는 17세, 장보고보다 13세 연하였습니다. 두 사람이 직접 만난 적은 없었죠. 두목은 대략 839년까지의 장보고의 행적을 취재한 것 같아요. 왜냐 하면 「번천문집」에 841년에 발생한 장보고의 피살 사건에 관해서는 언급하지 않았거든요. 839년이라면 장보고가 신라로 귀국한 지 11년 후입니다. 그렇다면 그가 왜 당나라를 이미 떠난 이방인 장보고를 그토록 예찬했을까요.

崔仁浩 이사도의 반란이 진압된 후에도 다른 번진들의 크고 작은 반란이 계속되었고, 당나라의 중흥주이던 憲宗(헌종)도 환관에게 독살되는 등 天下大亂(천하대란)의 시대가 전개되었죠. 저는 열혈 憂國(우국) 詩人인 두목이 장보고와 같은 영웅을 待望(대망)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鄭淳台 杜牧은 장보고와 정년에 대해 「말을 타고 창을 쓰는 데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기록했습니다. 장보고와 정년은 槍騎兵(창기병) 부대 발군의 지휘관이었다는 얘기죠. 杜牧의 평가로 장보고의 위상이 드높아졌다고 할 수 있죠.

崔仁浩 오늘날 우리도 捲土重來(권토중래)란 용어를 쓰잖아요. 천하영웅 項羽(항우)가 흙먼지를 말아 일으키며 다시 쳐들어온다는 뜻이죠. 두목의 詩 「題烏江亭」(제오강정)에서 나오는 것인데, 오늘날 두목의 詩는 몰라도 이 말은 유명한 고사성어가 되었습니다.

鄭淳台 두목이라면 조선시대 최고의 천재 여류詩人 許蘭雪軒(허난설헌)이 800년의 時空(시공)을 초월하여 사모했던 미남 詩人이죠. 허난설헌은 「홍길동전」의 저자이며 조선 중기의 혁명적 사상가요 기린아였던 許筠(허균)의 바로 위 누나입니다.


在唐시절에 이미 신라인 사회 조직화

崔仁浩 두목은 대단한 명문가 출신이죠. 위·촉·오가 천하를 다투는 三國志를 보면 曹操(조조)의 손자인 明帝 曹睿(조예)의 사후에 司馬懿(사마의)가 쿠데타를 일으켜 위나라의 실권을 장악하고, 그의 손자 司馬炎(사마염)이 晉을 새로 창업했잖아요. 이어 晉의 명장 杜預(두예)가 吳나라 수도를 함락시킴으로써 晉의 통일천하가 이뤄집니다. 두목은 바로 두예의 후손이죠. 두목의 조부 杜宇(두우) 역시 漢(한)의 사마천 이래 제일의 역사가로 존경받는, 역사서 「通典」(통전)의 작가죠.

鄭淳台 崔선생은 「海神」에서 이사도의 반란이 진압된 후 장보고가 곧 군복을 벗고 제대했던 반면 정년은 한동안 계속 복무한 것으로 쓰셨습니다. 그 이유는 무엇입니까.

崔仁浩 장보고가 824년 韓·中·日語에 능통한 신라 승려(李信蕙)를 在唐 신라인 사회로 불러들였다는 사실이 엔닌의 「순례행기」에 쓰여 있습니다. 李信惠(이신혜)는 일본 규슈의 大宰府(대재부: 지금의 후쿠오카)에 파견되어 무역업무를 수행하던 인물이었죠. 그런 이신혜를 在唐 신라인 사회로 불러들였다고 한다면 그 시기의 장보고가 군인일 리는 없습니다. 또한 이사도의 반란 진압 후 唐의 중앙정부는 매년 군인의 수를 8%씩 줄였습니다. 그래서 장보고는 822년쯤에 제대하고 在唐 신라인 사회의 네트워크를 조직하면서 그 지도자로 활약했던 것으로 판단했습니다. 그런 경험이 없었다면 나중에 장보고가 군진인 동시에 국제무역조직인 淸海鎭(청해진)을 설치 운영하기 어려웠을 것이라고 봅니다. 저는 장보고의 願刹(원찰)인 赤山法華院(적산법화원)도 청해진 설치 이전에 지은 것으로 생각합니다.

鄭淳台 역사의 누락 부분을 崔선생의 추리력으로 멋있게 채우네요(웃음). 장보고는 興德王(흥덕왕) 3년, 서기로는 828년에 귀국합니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흥덕왕을 만난 그는 신라 백성들을 노예로 납치해 가는 중국 해적을 소탕하겠다고 상주하고 군사 1만을 얻어 청해진을 진수하는 것으로 되어 있지만, 사실은 1만 명의 민병을 모집할 수 있는 라이선스(면허장)를 받은 거죠. 왜냐하면 당시 신라 중앙정부는 군사 1만 명을 선뜻 내줄 만한 형편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보다 50년 전에 왕권경쟁에 패배한 金周元의 아들인 金憲昌(김헌창)의 반란이 일어났을 때도 정부군이 아니라 진골귀족들의 사병들이 동원되었거든요. 태종 무열왕(金春秋)系가 계속 전제왕권을 장악했던 신라 中代가 혜공왕의 피살로 종말을 고하고, 下代에 들면 왕권은 약화되고 眞骨(진골) 연합세력이 실권을 잡았죠.

崔仁浩 흥덕대왕은 그런 진골귀족들을 견제하기 위해 국내 정치에 연고가 없는 장보고를 중용한 거죠. 흥덕대왕은 신라 下代의 중흥주, 굉장히 빼어난 임금이에요. 신라가 중흥할 수 있는 길은 바다를 지배하여 해외무역을 진흥하는 것이란 사실을 일찌감치 내다본 것입니다. 깨진 채로 발견된 흥덕대왕 비문의 파편에 「貿易之人間」(무역지인간)이란 글자가 새겨져 있잖아요. 현대 용어인 줄만 알았는데, 그때 벌써 「貿易」이란 용어가 사용되었더군요. 깜짝 놀랐어요.


興德王과 張保皐의 富國强兵策 일치

鄭淳台 흥덕왕은 장보고를 기용하여 국방 강화, 內政 안정, 무역 진흥의 세 마리 토끼를 잡은 영특한 임금이죠.

崔仁浩 흥덕왕과 장보고의 부국강병정책이 일치한 거죠.

鄭淳台 흥덕왕은 장보고를 청해진 大使(대사)로 임명했죠. 그런데 그때까지 신라엔 大使란 관직이 없었습니다. 그것은 唐의 절도사 정도의 벼슬이 아니겠습니까.

崔仁浩 그렇죠. 장보고는 이사도의 반란을 평정하면서 절도사의 역할로부터 아이디어를 얻은 것 같습니다. 이정기 일가의 4대에 걸친 벼슬은 평로치청 절도사 겸 해운압 신라·발해 兩藩使(양번사)였지요. 산동반도 일대를 방어하는 절도사인 동시에 對신라·발해의 무역 책임자라는 것이죠.

鄭淳台 崔선생은 「海神」에서 지금의 완도 본도에 근접한 무인도 將島(장도)를 청해진의 본영으로 묘사했는데, 제가 보기엔 전진기지가 아니었던가 합니다. 장도는 4만 평이 채 되지 않는 새끼섬 아닙니까. 최근 장도에서 우물의 유구가 하나 발견되기는 했다지만, 그것으론 부족하죠. 군사 1만 명의 주력은 완도 본도의 長佐里(장좌리)를 중심으로 하여 죽청리, 대야리 일대에 걸쳐 넓게 포진하고 있었을 겁니다. 청해진은 인구 7만 이상의 국제항이었을 것입니다. 왜냐하면 청해진 군사가 1만 명이었다니까 그것을 뒷받치는 인구라면 전략적 차원에서 적어도 7배는 되어야만 하거든요. 완도 본도에는 오늘날 수백만t의 물을 담수할 수 있는 댐 두 개가 건설되어 있을 정도로 용수가 풍부하고 너른 들도 펼쳐져 있으니까 당시로는 국제도시의 조건을 두루 갖춘 곳입니다.

崔仁浩 청해진은 당시 세계무역을 양분했던 北海무역의 허브港이었죠. 외국 상인도 많이 찾아왔을 겁니다. 술집이나 상점도 즐비해 흥청거렸을 거예요.

鄭淳台 그렇다면 총수인 장보고는 장좌리 象皇山(산황산) 기슭의 깊숙이 은폐된 어느 곳에 본영을 설치했겠죠.

崔仁浩 장도가 청해진의 전진기지였을 것이라는 견해에 동의합니다. 장좌리 마을에서 180m 떨어진 장도는 썰물 때 바닷물이 빠져나가 하루에 두 번씩 걸어서도 들어갈 수 있는 섬이니까 바닷길을 감시하고 출입국 통제하는 데 있어서 절묘한 요새가 되는 거죠.

鄭淳台 미국인 학자(우르시너스 대학 교수 휴 클라크)는 청해진 일대를 답사하고 『장보고는 천재』라고 말했습니다. 특히 장도 부근 해역은 해류와 조류가 갑자기 역류하여 물정을 모르는 외국 선박은 상당히 조심해야 접근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겁니다. 제가 장도에 가 보니까 版築土城(판축토성) 위에다 石城까지 둘렀더군요. 어디 그뿐입니까. 장보고 때 설치한 목책의 밑둥이 아직도 남아 있어요. 탄소연대 측정조사 결과, 1200년 전쯤에 설치한 것으로 밝혀졌거든요. 이렇게 장도는 4중의 방벽을 치고 있었던 겁니다.


라이샤워, 장보고는 租借地의 總督

崔仁浩 청해진은 韓·中·日을 연결하는 항로의 중심이었죠. 여기서 장보고는 동양 3국의 북해무역을 장악한 겁니다. 청해진은 오늘날의 홍콩이나 싱가포르 같은 국제 무역항이었죠.

鄭淳台 당시, 북해무역은 주로 세 개의 항로에 의해 이뤄졌어요. 청해진에서 서해안을 따라 북상하다가 황해도 장산곶 앞바다에서 선수를 90도 꺾어 최단거리로 산동반도로 들어가는 황해 직선 항로, 청해진 남방의 제주도 근해에서 東中國海를 건너 중국의 영파 혹은 양자강을 경유하여 揚州(양주)로 들어가는 東中國海 斜斷(사단)항로, 그리고 서해안-압록강 하구-요동반도 연해-산동반도로 이어지는 전통의 老鐵山水路(노철산수로)가 이용되었죠. 압록강 하구는 발해의 세력권이었고, 지금도 험한 東中國海는 범선시대의 항로로서는 위험했으니까 항해 직선항로가 主力항로였을 거예요.

崔仁浩 제가 장보고에게 매력을 느낀 것은 그가 바다의 해적을 소탕한 것에 그치지 않고, 동양 3국의 삼각무역으로 대성했다는 점입니다. 그는 중국의 동해안과 대운하의 요소요소에 신라인들의 집단거주지인 新羅坊(신라방)을 설치하고, 신라인의 행정기관인 新羅所(신라소)를 설치했습니다. 에드윈 라이샤워 교수는 신라방을 「콜로니」(조차지), 장보고를 「커미셔너」(총독)라고 표현했습니다.

鄭淳台 唐은 오늘날의 미국에 비견되는 중국 역사상 예외적으로 개방적인 세계 제국이었죠. 이런 상황을 활용하여 對唐 무역에 종사한 신라 下代의 軍鎭 또는 豪族(호족)들은 청해진의 장보고뿐만 아니었죠. 예성강 하구의 作帝建(작제건: 고려 태조 왕건의 조부), 康州(강주: 지금의 진주)의 王逢規(왕봉규) 등도 對唐무역에 종사했던 바다 상인이었죠. 穴口鎭(혈구진: 지금의 강화도), 唐城鎭(당성진: 지금의 경기도 남양), 浿江鎭(패강진: 지금의 平山) 등에 설치된 군진들도 중국과 활발하게 교역했습니다만, 그 주역들이 역사의 기록에서 누락되어 버린 겁니다. 이렇게 신라는 국책으로 당시 세계 제1의 선진국이었던 당과 밀월관계를 이루면서 번영했습니다.

崔仁浩 장보고 시절 신라의 수출품은 다양했죠. 견직물·마포·금·은·인삼·약재·모피류·공예품, 黃漆(황칠) 등이었고, 唐으로부터 주요 수입품은 약재·공예품·서적 등이었죠. 이슬람 상인을 통해 지금 지중해 동부 연안에서 생산되는 沈香(침향), 페르시아 산 카펫, 인도네시아 산 玳瑁(대모: 거북의 등)도 들여 왔어요. 흥덕왕은 사치품, 진기품에 대해 수입금지 조치를 단행한 기록도 있죠. 예컨대 진골귀족일지라도 마차에 대모로 만든 손잡이를 사용할 수 없다는 금령을 내렸어요.

鄭淳台 장보고 商團(상단)이 일본으로 싣고 간 舶來品(박래품)의 인기가 대단했죠. 일본 측에서는 박래품에 대한 값을 금·은·牛角(우각) 등으로 결제했는데, 不等價(부등가) 교환에 의한 무역역조현상이 뚜렷했어요. 일본 조정에서도 귀족사회의 사치풍조에 제동을 걸었으나 효과가 없었거든요. 견당사나 상단을 조직해서 박래품을 수입하자면 바닷길이 위험할 뿐만 아니라 더 큰 비용이 들었던 거예요. 귀족사회의 욕구를 충족시키려면 장보고 선단에 의존하는 수밖에 없었던 거죠.


신라인의 진취적 해외활동의 배경

崔仁浩 장보고는 해외로 진출한 신라인들을 네트워크로 묶었다는 점이 중요하죠. 중국 교역요지에 30여 개의 新羅坊(신라방)·新羅所(신라소)를 설치했고, 일본의 對外창구인 大宰府에도 지사를 운영했습니다. 그것이 엔닌의 순례행기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잖아요. 신라인들은 중국 물류의 핵심지역에서 운송업, 조선업, 제조업, 야금업, 상업에 종사했죠.

鄭淳台 신라의 쌍돛대 범선의 길이는 35m 정도로 그리 크진 않았지만, 황파에 견딜 만큼 매우 단단했다고 「순례행기」에 적혀 있습니다. 확실히 당시 신라인들은 바다 지향적이었고, 해운력·해군력에서 탁월했습니다. 그게 하루 아침에 그리된 건 아닙니다. 신라는 백제·고구려의 멸망 후 唐과의 8년 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삼국통일을 이룩할 수 있었는데, 그 최후의 결전이 기벌포(금강 하구) 해전이었습니다. 기벌포에서 모두 23회의 해전이 벌어졌는데, 신라는 1회전에서만 지고, 2회전에서 23회전까지 모두 이겼습니다. 삼국통일을 완수한 文武王은 바다의 중요성에 일찌감치 착안하여 兵部(병부: 국방부)와 거의 동격인 船府(선부: 해군+해운)를 육성했어요. 우리나라 해군력·해운력은 고려 태조 때까지 막강했다고 생각합니다. 태조 王建(왕건)은 해로를 통해 羅州(나주)를 경영하여 후백제의 견훤을 남북에서 입체적으로 압박함으로써 후삼국통일을 이룩하지 않았습니까.

崔仁浩 百濟(백제)라는 국호는 원래 百家濟海(백가제해)에서 따온 거죠. 우리나라의 다도해는 조류, 해류, 해풍 등이 유별나게 착잡한 해역이 아닙니까. 여기서 단련된 뱃사람들이니까 경쟁력이 있었거든요. 그런 인적 자원을 장보고가 조직적으로 활용한 겁니다.

鄭淳台 신라인들은 해외지향적이었습니다. 일본인 古미술사가 요시미즈 츠네오(由水常雄)씨는 재작년에 「로마문화의 왕국-신라」라는 역작을 발표했죠. 月刊朝鮮 2002년 3월호에 그것과 관련한 국내 전문학자들의 좌담이 실려 있습니다만…. 6세기 전후의 古墳群(고분군)인 慶州 大陵苑(대릉원)의 천마총과 황남대총 등에서 발굴된 로만글라스(로마세계의 유리 그릇), 오이노코에(포도주병), 호화무비의 象嵌(상감) 玉 목걸이, 흑해 연안 트라키아 왕국의 황금보검 등 당대 세계 제일의 名品을 보면 지중해와 흑해 연안 등 서방세계와 신라의 교류가 적나라하게 밝혀지고 있습니다. 다만 그때 신라의 主무역로는 海路가 아니라 陸路인 스텝로드(초원길)와 실크로드(비단길)였죠.


동시통역사 양성 메커니즘 운영

崔仁浩 장보고 시절, 중국을 둘러싼 국제무역은 대운하의 중심지 揚州를 경계로 하여 南海무역과 北海무역으로 대별할 수 있죠. 남해무역은 이슬람 상인, 북해무역은 장보고가 장악했습니다.

鄭淳台 당시 일본 사람들은 원양 항해에 서툴러 바다를 겁냈죠. 엔닌이 탔던 일본의 견당선은 난파 상태로 揚州에 겨우 상륙했죠. 그래서 엔닌이 귀국시에는 중국 楚州(초주)에서 아예 金珍(김진)이 선주였던 신라 선박 9척을 빌리고 신라 선원 60명을 고용했던 사실이 「순례행기」에 적혀 있어요. 당시 일본인들은 바다에 대해 포비아, 즉 일종의 공포증을 가졌던 것 같아요. 일본 견당사의 副使(부사)가 출국 직전에 원양 항해가 겁나 도망쳤다가 붙잡혀 귀양을 갔던 사실도 「순례행기」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崔仁浩 장보고 휘하엔 譯語(역어: 통역)부대가 있었습니다. 적어도 韓·中·日 3국어의 동시통역관을 양성하는 메커니즘도 있었다고 봅니다. 「순례행기」의 기록에 따르면 장보고 휘하의 승려 道玄(도현) 등이 大宰府에 주재하면서 일본 견당사에게 통역, 용선, 선원, 통신 제공 등 각종 서비스를 제공했어요. 장보고는 쓰시마(對馬島)에 譯語학교까지도 설치 운영했습니다.


軍産複合體制의 완성

鄭淳台 장보고는 淸海鎭이란 軍鎭의 명칭에 값할 만큼 바다의 해적을 깨끗이 쓸고, 아시아 최강의 무역조직을 형성했습니다. 청해진은, 당시가 모험항해 시대이니까 해상무역은 벤처(모험)산업이었고, 양주·福建·廣州 등지에서 이슬람 상인들과도 교역했으니까 오늘날의 종합무역상사와 비견될 수 있겠습니다. 또한 중국과 일본에 지사를 설치했던 만큼 세계 최초의 다국적기업을 운영했던 셈이죠. 그뿐입니까. 신라청자를 생산하여 중국과 일본 등지에 수출했으니까 첨단산업을 일으킨 겁니다.

崔仁浩 金文經(김문경: 元老 동양사학자) 선생님과 함께 중국 대운하 지역과 일본 후쿠오카를 답사했는데, 신라청자가 대규모로 발굴되었던 사실을 확인했습니다. 세라믹(도자기) 연구가들에 의하면 고려청자 이전에 신라청자가 생산되었다는 겁니다. 장보고 종합상사가 사양화한 越州窯(월주요)의 중국 도공들을 스카우트하여 청해진으로 데려온 것이죠.

鄭淳台 그 메이커의 위치가 바로 지금의 강진군 大口面의 옛 도요지죠. 완도에서 연륙교를 거쳐 강진만을 애둘러 가려면 거기까지 200리 길이지만, 뱃길로는 지근거리예요. 제가 8년 전에 大口窯(대구요)를 답사했습니다만, 그 일대 곳곳에 신라청자의 파편이 나뒹굴고 있었습니다. 최근, 연구자들은 우리나라의 청자가 처음 제작된 시기를 10세기에서 9세기로 1세기를 앞당기고 있죠.

崔仁浩 830년대의 10년간이 장보고의 전성시대였죠. 일본 최고의 求法僧(구법승) 엔닌이 唐으로 건너간 때가 838년이었습니다. 그때 엔닌은 大宰府를 통괄 지휘하는 지쿠첸(筑前) 태수가 장보고에게 보내는 소개장을 휴대하고 갔습니다만, 승선했던 배가 난파되는 바람에 소개장을 분실해 버렸습니다. 그래서 양주에 도착한 직후, 장보고에게 보내는 편지를 썼는데, 그 문면을 보면 그가 얼마나 世界人 장보고를 존경했는지 알 수 있습니다.

鄭淳台 잘 나가던 장보고가 838년부터 새로운 국면을 맞이했습니다. 신라의 왕위계승 전쟁에 휘말려 버리거든요. 崔선생께서는 그것을 「장미전쟁」, 즉 피의 전쟁이라고 멋지게 표현하셨더군요.

崔仁浩 아, 「장미전쟁」이란 절묘한 용어는 李基東(동국대 교수) 선생의 논문에서 차용한 겁니다.

鄭淳台 장미전쟁의 피크는 역시 신라의 임금이 한 해 동안에 세 번이나 바뀐 839년이라고 해야겠죠. 핏물이 내를 이루며 흘렀던 운명의 839년으로 향하는 과정을 崔선생께서 좀 짚어 주시죠.

崔仁浩 신라 下代 중흥의 英主 흥덕왕이 소생도 없이 836년에 병사하면 上大等(상대등: 수상 겸 귀족회의 의장)이며 흥덕왕의 4촌 동생인 金均貞(김균정)이 일단 후계합니다. 그러나 김균정의 조카인 金悌隆(김재륭)을 옹립한 시중(오늘날의 청와대 비서실장 겸 총무처 장관)이며 흥덕왕의 막내동생 金忠恭의 아들인 金明이 쿠데타를 일으켜 김균정을 죽이지요. 허수아비 왕 김제륭이 즉위하니 그가 바로 僖康王(희강왕)입니다.

鄭淳台 진골 귀족들의 혼전이었던 만큼 누가 왕위에 오른다고 해도 국가 또는 진골귀족 전체의 대표자일 수 없었고, 그를 추대한 일파의 대표자였던 셈이죠. 유력한 진골들은 자기 휘하에 門客(문객)과 私兵(사병)을 양성하고, 유민을 모집하여 무장을 시켰습니다. 왕위는 무장력의 優劣(우열)로 결정되는 판이었죠.

崔仁浩 김균정이 살해된 후 위기에 몰린 그의 아들 金祐徵(김우징)이 청해진으로 도망쳐 장보고에게 의탁하거든요. 김우징을 뒤따라 역시 김균정의 측근 진골귀족이던 金陽(김양), 金禮徵(김예징) 등도 청해진으로 망명했어요.

鄭淳台 장미전쟁이 클라이맥스로 질주하군요.

崔仁浩 그런 상황에서 실권자 金明의 압박을 받던 희강왕이 끝내 목을 매 자결을 해 버립니다. 이어 金明이 왕위에 오르니 그가 곧 閔哀王(민애왕)입니다. 김우징으로서는 아버지를 죽인 원수인 민애왕을 칠 수 있는 대의명분을 얻은 거죠. 바로 이 시기에, 무령군 소장으로서 용맹을 날리던 정년도 무령군에서 제대하여 회하 하류의 連水鄕(연수향)에서 춥고 배가 고플 만큼 어렵게 지내다가 귀국, 청해진의 장보고 휘하로 들어옵니다만….

鄭淳台 장보고가 정년을 용납한 사실은 杜牧에 의해 장보고의 품성을 나타내는 하나의 사례로 거론되는 만큼 다시 거론하기로 하고 말머리를 돌려 장미전쟁의 본론으로 들어가기로 하죠.


淸海鎭 군사가 막강했던 까닭

崔仁浩 찬스를 잡은 김우징은 민애왕을 치기 위해 장보고에게 군사 5000명을 빌려 平東軍(평동군)을 일으킵니다. 평동군의 최고지휘관은 金陽이 맡았죠. 평동군은 지금의 光州와 南原에서 정부군을 무찌르고 大邱로 진군하여 金昕(김흔)이 지휘하는 정부군 10만 명을 격파하고 서라벌로 진격합니다.

鄭淳台 삼국사기에도 그렇게 기록되어 있습니다만, 10만의 정부군이 왜 5000의 평동군에게 지고 말았을까요.

崔仁浩 민애왕이 임금을 시해하고 즉위했으니까 명분에서 밀린데다 청해진의 군대가 막강했기 때문이겠죠. 특히 장보고는 경제력이 있었던 만큼 말을 많이 사들여 부대를 騎兵化(기병화)했던 것 같습니다. 어떻든 서라벌에 입성한 평동군은 離宮(이궁)으로 도피한 민애왕을 찾아내 죽여 버렸죠. 이어 김우징이 즉위하니 그가 神武王(신무왕)입니다.

鄭淳台 군인이며 기업인인 장보고가 음모의 정치판에 깊숙이 빠져들게 되었군요.

崔仁浩 신무왕은 청해진 망명 시절에 장보고의 딸을 次妃(차비)로 맞을 것을 언약하고 청해진 군사를 빌릴 수 있었죠. 쿠데타에 성공한 신무왕은 장보고에게 일단 感義軍使(감의군사)라는 칭호와 食邑(식읍: 봉토) 2000호를 내립니다만, 즉위 3개월 만에 병사해 버립니다. 신무왕의 아들 金慶膺(김경응)이 즉위하니 그가 文聖王(문성왕)이죠. 문성왕은 父王이 지키지 못한 혼약을 이행해야 했거든요.

鄭淳台 北方 기마민족의 피가 흐르는 신라 왕실의 婚風(혼풍)은 유교적 관점으로는 좀 해괴했죠. 아버지의 정혼자를 아들이 아버지 대신 취해야 했으니까요.

崔仁浩 삼국사기의 기록을 보면 문성왕은 즉위 직후 장보고에게 鎭海將軍(진해장군)이라 칭호를 내립니다. 이어 평동장군이었던 이찬(신라 17관등 중 제2위) 金陽의 딸을 왕비로 들였습니다. 장보고로선 당연히 그의 딸을 次妃로 맞을 것이라고 기대했겠죠. 처음엔 문성왕도 장보고와 혼약을 지키려고 했습니다. 그러나 조정 신하들이 『궁복은 海島人인데, 그의 딸을 어떻게 왕실의 배필로 정할 수 있겠습니까』라며 반대했거든요. 결국 문성왕도 신하들의 말에 따르고 말았죠.


文聖王代의 실세 金陽과 갈등관계

鄭淳台 진골귀족들의 시각으로는 당연히 그랬겠죠. 그래서 삼국사기에 장보고가 왕을 원망하면서 「據鎭叛」(거진반: 청해진에 웅거하여 반란을 일으켰다)의 석자만 적혀 있는데, 사실이 과연 그랬을까요. 장보고의 행적을 보면 실행 프로그램이나 實兵(실병) 동원 등의 액션이 전혀 없었거든요.

崔仁浩 어떻든 중앙정부의 핵심세력들은 장보고의 마음이 상했을 터이니 겁났던 거죠. 전면전을 벌이자니 예기치 못한 후환이 두려우니까 武州(무주: 광주) 출신 칼잡이 閻長(염장)을 장보고에게 위장 귀순시켜 청해진版(판) 10·26 사태를 일으킵니다. 자객 활용이 정적 제거에 가장 경제적인 방식이죠. 그런 내막을 모르고 천성적으로 장사를 좋아하는 장보고가 술자리를 베풀어 환대하면서 대취하니까 기회를 엿보던 염장이 장보고의 장검을 뺏어 그의 목을 쳐버린 것입니다.

鄭淳台 그러니까 조선조의 실학자 安鼎福(안정복)은 그의 「東史綱目」(동사강목)에서 「盜殺」(도살)이라고 비난했던 것 아닙니까. 그건 그러한데, 崔선생의 「海神」에서는 염장의 배후인물로 金陽을 지목했더군요. 그럴 법한 추리지만, 역사 기록엔 없는 부분입니다. 삼국사기 김양傳에는 그가 태종 무열왕 9대손으로서 무예도 출중하고, 흥무왕代에 武州도독 등으로 재직하면서 선정을 베푼 인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문성왕代에는 시중-병부령-상대등을 역임한 實勢(실세)였던 만큼 배후인물로 심증은 가지만, 물증이 없습니다.

崔仁浩 김양은 무주 도독 재임 시절부터 염장과 매우 가까운 사이로 판단됩니다. 왜냐 하면 김양이 평동장군으로서 민애왕을 칠 때 그의 副將 중 염장이 서열 제1위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장보고 휘하의 제1의 武將인 정년은 副將 서열 제3위이더군요. 나중에 김양이 죽자 신라 조정에서 삼국통일 元勳(원훈)인 金庾信(김유신)에 준하는 장례를 치러 주지 않습니까. 김양은 정권투쟁의 승자, 장보고는 패자였으니까 史書에 승자 金陽의 허물은 감춰진 채 그에게 유리하게 기록된 거죠.


만약 장보고의 쿠데타가 성공했다면…

鄭淳台 저도 그럴 것 같다고 생각은 하고 있습니다. 다만 역사인물에 대한 평가는 조심스러워야 할 것 같습니다. 예컨대 「海神」에서는 희강왕 시절의 최고실력자였던 金明이 원로대신 金大濂(김대렴)을 연회석상에서 포박하여 참수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김대렴이라면 흥무왕 때 견당사로 갔다가 귀국時 茶(차)나무의 종자를 갖고 와 왕명을 받고 지리산 쌍계사 일대를 시배지로 삼은 우리나라 차 문화의 원조이며 名臣입니다.

崔仁浩 제가 희강왕代의 金明과 문성왕代의 金陽을 악역으로 삼다가 보니 그렇게 묘사된 것입니다. 소설에서는 원래 갈등관계를 만들잖아요.

鄭淳台 역사에서 가정법은 부질없는 일이겠지만, 만약 장보고의 반란이 성공했다면 그 후 역사의 진전은 어떻게 됐을까요.

崔仁浩 만약 쿠데타에 성공했다면 새로운 張씨 왕조를 창업했겠죠. 그 후 활발한 해양진출에 의해 한민족의 약소화·왜소화라는 비극은 빚어지지 않을 것입니다.

鄭淳台 그러나 역사는 어느 날 갑자기 몇 단계를 도약할 수는 없는 거죠.

崔仁浩 진골귀족들이 저희들끼리는 피나는 정권쟁탈전을 벌였지만, 장보고라는 제3의 세력이 대두하자 연합해서 꺾어 버린 겁니다. 당시의 신라 백성들도 장보고를 적극 지원한 흔적도 없어요.

鄭淳台 그런 의식이 가장 잘 드러나는 대목이 장보고의 목을 친 염장이 청해진 사람들 앞에서 문성왕이 내린 교서를 한번 읽으니까 모두가 무릎을 꿇고 승복했다는 점입니다. 염장은 장보고의 수급을 들고 제 발로 서라벌로 가서 아찬(신라 17관등 중 제6위)의 관등을 받아 출세했습니다. 이걸 보면 청해진 사람들의 의식조차 왕의 권위를 인정했던 겁니다.

崔仁浩 당시의 신라인이 18세기 말 프랑스 부르봉 왕조의 앙상레짐(舊제도)을 타도했던 파리 시민들 정도로 정치적·사회적 의식이 성장해 있었을 리가 만무하죠.

鄭淳台 그런데 장보고의 義弟인 정년의 장보고 死後 행로가 역사 기록에서 누락되었습니다. 「海神」에선 정년이 복수를 위해 자객으로 전전하면서 세 번이나 암살의 배후인물인 김양을 습격했지만 실패하고 끝내 자결했던 것으로 그리셨던데요.

崔仁浩 저도 정년의 그 후 행로에 대해 고민을 많이 했죠. 그가 장보고의 은혜를 입었으면 당연히 자신의 몸을 던져 복수를 해야 한다고 생각했거든요.

鄭淳台 여기서 장보고와 정년의 관계를 추적한 두목의 「번천문집」 중 관련 기록을 다시 거론해야 하겠군요. 「번천문집」에는 장보고와 정년이 둘 다 『말 타고 창을 쓰는 데는 당과 신라에서 대적할 자가 없었다』고 평가하면서도 무예에서는 정년이 조금 낫고, 나이는 장보고가 위여서 형으로 불리기는 했지만, 서로 티격태격거린 것으로 기록되어 있습니다.

崔仁浩 특히 정년은 잠수해서 물 밑에서 50리나 가는 괴력을 지닌 인물이라고 기록되어 있죠. 저는 장보고는 智將(지장)이며, 정년은 勇將(용장)이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在唐 시절의 장보고와 정년의 사이가 안록산 반란 평정의 두 주역 곽자의와 이광필의 관계처럼 나빴는지는 의문입니다. 한 부대에서 복무했던 곽자의와 이광필은 국란이 일어나기 전까지 한자리에 앉아 밥을 먹으면서 대화 한 마디도 않고 서로 눈을 흘기던 사이였거든요.

鄭淳台 장보고는 귀국해서 大成했던 시기인 839년 무렵, 정년은 제대 후 飢寒(기한)에 떨어야 했습니다. 정년이 連水鄕(연수향)의 수비책임자로 재직하던 과거의 동료 馮元規(풍원규)를 찾아가 중국에서 굶어 죽느니 귀국해서 장보고의 막하로 가고 싶다는 뜻을 밝혔죠. 이에 풍원규는 장보고에게 가면 맞아 죽을 것이라는 조언을 합니다. 그러자 정년은 『굶어 죽는 것보다 고국에서 맞아 죽는 것이 오히려 쾌하다』고 말하면서 장보고보다 11년 후에 귀국했습니다. 청해진에 들어간 정년은 과거의 감정 따위는 불문에 부친 장보고의 환대를 받았습니다.

崔仁浩 저는 장보고와 정년이 원래 그렇게 나쁜 사이였다고 생각지는 않습니다. 두목이, 평소 험악한 사이였던 郭子儀와 李光弼이 안록산의 난이 발발하자 곽자의가 병력의 절반을 이광필에게 나눠 줘 동쪽으로 진격하게 했던 사실과 민애왕을 타도할 때 장보고가 청해진의 병력 중 절반인 5000명을 정년에게 주어 서라벌로 진격시킨 사실을 비교하면서 곽자의와 장보고 둘 다 大人이라는 詩人다운 결론으로 끌고간 거죠.


『엔닌과 엔친이 섬긴 新羅明神은 장보고』

鄭淳台 「海神」을 읽으면서 가장 흥미진진했던 대목은 역시 도입부였습니다. 도입부에서 崔선생은 일본 武士의 원조 格인 미나모토 요시미쓰(源義光)와 일본 天台宗의 제3조 엔닌, 제5조 엔친(圓珍)이 섬긴 新羅大明神(신라대명신)이 바로 장보고였다는 것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어떤 근거에서 그렇게 보십니까.

崔仁浩 일본 규슈 하카다(博多) 지방의 大宰府에 관한 기록이라든지, 엔닌의 유언에 따라 그 제자들이 교토 히에이산(比睿山)에 세운 赤山禪院(적산선원)의 新羅大明神, 오쓰(大津) 미테라(三井寺)의 新羅大明神에 관한 기록을 살펴보면 그 明神이 장보고임을 대번에 알 수 있습니다.

鄭淳台 미나모토 요시미쓰라면 13세기에 가마쿠라(鎌倉)막부를 열어 일본 최초의 武家(무가)정권을 세운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의 조상이며, 16세기 일본 전국시대를 풍미한 병법가 다케다 신켄(武田神玄)의 시조입니다. 그런 요시미쓰가 新羅明神을 섬겨 그 앞에서 성인식을 갖고 그의 이름까지 신라사부로(新羅三郞)라고 개명했다는 것은 꽤 알려진 사실입니다. 다만 「신라대명신=장보고」라는 崔선생의 주장은 상당히 충격적이었습니다.

崔仁浩 在唐 9년 동안 장보고 휘하의 신라인들에게 크게 도움받은 엔닌이 교토의 엔라쿠지(延曆寺)에다 赤山禪院을 짓고 장보고의 현신을 신라대명신으로 받들었고, 역시 渡唐 유학승인 엔친도 귀국 도중 배가 난파되어 사망 직전에 갑자기 신라명신이라 자처하며 출현한 한 노인에 의해 구원받고 귀국했습니다. 귀국 후 엔친은 비와고(琵琶湖) 동쪽 오쓰 소재 미테라의 초대 주지로 주석하면서 그가 바다에서 만난 수염이 하얀 노인의 모습을 구술하여 신라명신像을 만들게 했죠.

鄭淳台 「海神」에서 그것이 바로 장보고라고 주장하셨더군요. 저는 미테라의 신라명신像이 일본 국보라는 사실을 듣고는 있었지만, 그 실제 모습은 崔선생이 촬영 공개한 사진을 통해 처음 보았습니다. 그렇다면 엔라쿠지에서 섬긴 신라대명신과 미테라의 신라명신像이 어떻게 해서 장보고라고 확신하십니까.

崔仁浩 저와 동행했던 金文經 선생의 연구 결과가 그렇고, 저도 100% 확신했습니다. 엔닌과 엔친은 일본 천태종의 고승이지만, 엔닌은 山門派(산문파), 엔친은 寺門派(사문파)의 개산조로서 라이벌 관계였죠. 엔친이 먼저 신라명신像을 만들어 숭앙하자, 엔닌도 뒤질세라 적산선원을 짓고 신라대명신을 섬긴 겁니다. 적산선원이라면 중국 산동성 榮成(영성)에 있는 장보고의 원찰인 赤山法華院(적산법화원)과 이름이 같지 않습니까. 엔닌은 9년의 재당 기간 중 전후 3년간 적산법화원에서 숙식을 했습니다. 큰 은혜를 입은 거죠. 엔라쿠지에 적산선원이 있었다는 사실은 그 사적기를 통해 金文經 교수님과 함께 확인했습니다. 또한 미테라 측은 본당 지하실 보물창고에 깊숙이 보존되어 있는 신라명신像을 외국인에게는 처음으로 김문경 교수님과 저에게 공개하여 촬영했죠. 우리가 특종을 한 셈이지요.

鄭淳台 崔선생이 다녀오신 교토의 고잔지(高山寺)를 저도 답사한 적이 있는데, 거기선 신라의 명승들인 元曉(원효)와 義相(의상)을 明神으로 받들고 있습니다.

崔仁浩 일본 사람은 유별난 汎神論者(범신론자)들인 것 같아요. 전사자들도 神으로 神社에 모시고, 살아 있는 천황도 現人神으로 받들지 않습니까.


일본 불교의 巫俗性 탈피에 공헌

鄭淳台 일본 天台宗의 개조는 사이초(最澄)이며, 산악불교로서 적산법화원처럼 法華經(법화경) 지상주의라는 특성을 갖고 있죠. 당시 간무(桓武) 천황은 나라(奈良) 시대 후반에 이르러 정치세력과 유착했던 불교교단의 부패를 개혁하려고 했죠. 그런 정책에 의해 사이초, 구카이(空海) 등의 새로운 불교사상가의 출현을 재촉하게 되었던 겁니다. 문제는 그때까지 일본 불교는 정통불교가 아니라 토속신앙과 결부되어 있었죠. 엔닌과 엔친은 장보고 휘하 신라인들의 보호를 받으며 唐에서 각각 가져간 수백 점의 불경, 만다라, 탱화 등을 수집해서 귀국했는데, 이것이 일본 불교의 무속성 탈피에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원래 일본 천태종의 본산은 교토 히에이산(比叡山)의 엔라쿠지인데, 엔친이 오쓰의 온조지(園城寺: 후에 三井寺로 개명)에서 寺門派를 열어 개조되어 산문파의 개조인 엔닌과 대립하게 되거든요. 다만 엔닌과 엔친, 둘 다 장보고와 깊은 인연을 지녔다는 공통점이 있죠.

崔仁浩 엔닌이 불경 등을 수집할 무렵에 唐에서는 불교를 대대적으로 탄압했던 會昌法亂(회창법란)이 일어났습니다. 이런 시기에 양주의 신라 상인 張泳(장영)이 엔닌을 위해 불경 등의 구입을 주선해 주고 보관도 해줍니다.

鄭淳台 회창법란이 일어났던 唐 武宗 시절, 불경은 바로 불온서적으로 그런 것을 소지하면 목이 달아났죠.

崔仁浩 장영은 신라의 숯장수와 나무장수로 위장하며 활동한 엔닌이 그의 밀입국 사실로 적발 구금되자 중국 관헌에게 뇌물까지 뿌려 엔닌을 구출해 주었죠. 엔닌의 귀국연도가 847년이었니까 장보고는 이미 6년 전에 암살당했지만, 그의 옛 부하들이 이렇게 황제의 禁令(금령)을 어기면서까지 엔닌을 보호해 주었습니다. 「순례행기」에는 회창법란의 시기에도 장보고의 원찰 적산법화원에선 승려 40명, 신도 250명이 참석했던 법회가 열렸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적산법화원은 연간 쌀 500섬 소출의 농토를 가진 큰 절이었죠. 이런 모습이 在唐 신라인들이 집단주거지를 갖고 상당히 자유스럽게 행동했다는 증거가 되는 겁니다.

鄭淳台 재미있는 것은 그렇게 在唐 신라인 사회와 깊게 접촉한 엔닌도 장보고가 암살된 지 6년이 지났지만, 그런 정보를 모르고 신라 연안을 거쳐 일본으로 귀국했어요.

崔仁浩 장보고가 피살된 후 청해진은 암살자 염장이 지휘합니다. 「續일본후기」에 따르면 염장은 그의 부하 李少貞(이소정)을 대재부에 파견하여 장보고 시절에 일본에 운송되어 보관 중이던 화물과 일본으로 망명한 장보고의 옛 부하들을 인도해달라는 교섭을 벌입니다. 그러나 대재부는 이같은 염장의 요청을 거부해 버립니다. 장보고는 일본인에겐 「아직도 그대는 내 사랑」이었던 겁니다.

鄭淳台 청해진은 장보고가 피살된 지 10년 만인 851년에 해체되고 맙니다. 청해진 사람들은 대거 碧骨郡(벽골군: 지금의 김제시)로 옮겨져 농군이 되었습니다. 지금도 김제의 만경평야 일대에선 농사일에 서툰 사람을 「물잣놈」(水尺者)이라고 핀잔을 주는데, 그것은 청해진 사람의 슬픈 移住史(이주사)에서 기원한 말이라더군요.


장보고 휘하의 인물들은 다 어디로 갔나

鄭淳台 장보고의 義弟 정년은 어디로 갔을까요. 장보고 피살 후 정년의 행적은 역사기록에서 누락되어 있습니다.

崔仁浩 그것이 작가로서 저를 가장 고민하게 했던 대목 중 하나입니다. 그래서 염장이 장보고를 암살했을 당시 정년은 청해진 밖, 예컨대 산동반도나 서라벌쯤에 출장을 갔던 것으로 설정해야 했죠. 만약 정년이 암살현장에 있었다고 한다면 정년도 청해진의 다른 사람들처럼 염장에게 무릎을 꿇고 승복했다고 볼 수밖에 없잖아요. 「海神」에선 정년이 암살의 배후인 김양에게 복수하려고 세 번이나 습격했으나 끝내 성공하지 못하고 자결했던 것으로 썼습니다만, 아무래도 뭔가 미흡하다고 생각합니다. 再版(재판)에선 그 대목 등을 좀더 명확하게 하기 위해 40페이지쯤 보완할 생각입니다.

鄭淳台 정년의 복수에 관한 「海神」의 묘사는 司馬遷(사마천)의 「史記」 자객열전의 한 대목을 방불케 합디다. 여자는 자기를 사랑해 주는 사람을 위해 화장을 하고, 선비는 자기를 알아주는 사람을 위해 죽는 것 아니겠습니까. 어떻든 전성시대 장보고 휘하에서 활약하던 신라구당소 押衙(압아: 지방 수비관) 張泳, 楚州(초주) 신라방 총관 薛詮(설전), 신라역어 劉愼言(유언신), 양주의 大상인 王靖(왕정), 청해진 병마사 崔暈(최훈), 일본 대재부에 파견되었던 승려 道玄과 李信惠, 엔닌에게 귀국선을 제공했던 楚州의 선주 金珍(김진), 그리고 청해진의 副將級 인물들인 駱金(낙금), 張建榮(장건영), 李順行(이순행) 등은 모두 역사기록에서 행방불명된 인물들입니다.

崔仁浩 컨트롤 타워가 쓰러져 버렸으니 국내외의 핵심인물들은 중국이나 일본에 망명했고, 세월이 흐르면서 현지화해 버렸겠죠. 장보고의 몰락은 중국이나 일본에 진출한 신라인들을 조직화하던 유능한 CEO(최고경영자)의 제거를 의미하는 것이죠. 고려왕조·조선왕조 1000년 동안에는 원양 항해를 포기하고 강이나 연안에만 항해하며 지방의 물산을 중앙으로 옮기는 漕運(조운)에만 매달립니다.

鄭淳台 그 결과, 船底(선저)가 강바닥에 닿더라도 손상이 없도록 平底船(평저선)만 만듭니다. 큰 바다의 물결을 헤쳐 가려면 선저가 뾰족하여 복원력이 있는 선박이라야만 합니다. 또한 왜구의 침입을 겁내 섬을 비우는 空島化(공도화) 정책이나 해안지방의 주민들을 내륙으로 옮기는 疏開(소개)정책에 매달립니다. 심지어는 외적이 침략할 때 기동력을 감소시키려는 목적에서 도로폭도 좁게 만들었어요. 조선시대의 간선도로인 제1대로에서 제5대로의 폭이 불과 8자, 2.5m에 불과합니다. 참으로 퇴영적인 국방정책이었죠. 그러니 경제발전의 핵심인 물류가 원활했겠습니까.


큰 바다로 나가야 번영

崔仁浩 8·15 광복 이후 남북이 분단되고, 중국과 소련 등 사회주의권과 국교가 40여 년간 단절되어 대륙으로 향한 통로가 막히는 바람에 우리는 바다로 나갈 수밖에 없었죠. 대한민국은 사실상의 섬나라가 되고 말았어요. 그것이 오히려 찬스가 되었어요. 한국은 살아남기 위해 바다로 나가 해양 선진국인 미국·일본과 교류함으로써 오늘날 10大 무역국의 하나가 된 겁니다. 바닷길은 번영과 문화의 고속도로임이 증명된 것입니다.

鄭淳台 한국 상선대의 선복량은 1990年代 중반에 이미 1000만t을 상회, 지배선복량 기준으로 세계 7∼8위의 해운 강국되었고, 조선산업은 1993년 수주량에서 처음으로 일본을 앞지르고 그 후 일본과 엎치락 뒤치락하다가 드디어 세계 제1위가 되었습니다.

崔仁浩 『바다를 지배하는 자가 세계를 지배한다』는 말이 있지 않습니까. 1200년 전에 장보고는 우리 민족이 지향해야 할 방향을 제시했습니다.

鄭淳台 태평양 시대는 이미 도래했습니다. 삼성전자의 진대제 사장에 따르면 산업기술에서 일본은 한국을 여전히 앞서 가고, 중국은 한국을 3∼4년 후에 추월할 기세로 바짝 추격하고 있다고 합니다. 세계화와 무한경쟁의 시대를 맞아 오늘날의 우리가 世界人 장보고에 배울 바가 참으로 많다고 생각합니다. 오랜 시간 좋은 말씀해 주신 崔선생께 감사드립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