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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억과 風雲의 사진첩 공개] 美人과 巨人들 - 金鍾泌 앨범

정순태   |   2003-02-18 | hit 2421

JP의 인생역정이 바로 우리 現代史

自民聯 마포당사 앞에는 「JP(注-金鍾泌씨의 약칭)와 함께 정권 창출」 등의 문구가 적혀 있다. 「내각책임제추진위원회」라는 간판도 붙어 있다. 오늘의 정황으로 보면 아무래도 虛張聲勢(허장성세)로밖에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사람의 내일 일이야 누가 감히 단정할 수 있겠는가.

그야 아무튼 JP라면 한국 현대사에서 명멸한 숱한 인물들 가운데 官運(관운)이 제일 좋은 사람이라고 표현해도 전혀 어색하지 않다. 그는 1961년 서른다섯의 나이로 「나는 새도 떨어뜨린다」던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5·16 혁명 정부에선 實力랭킹 제2위의 자리였다. 그로부터 오랜 세월, 浮沈(부침)은 있었지만, 그는 집권당의 의장, 국무총리 등 제2인자의 자리를 역임하면서 포스트 朴正熙 시대의 유력한 인물로 손꼽혔다.

더욱이 JP는 1997년 大選에서 DJP연합을 성공시킴으로써 金大中 정부에서는 제2위의 持分(지분)을 장악했다. 40년간에 걸친 그의 政治歷程을 단순화하면 시작과 끝, 모두가 제2인자였다. 그가 못 해 본 자리라곤 대통령직밖에 없다. 그렇다면 그가 바로 대한민국의 현대사다.


JP 아버지는 金庾信 장군의 공적비 세우고, JP 자신은 階伯 장군 동상을 건립


金鍾泌은 1926년 1월7일 충남 부여군 규암면 외산리에서 金相培(김상배)-李貞薰(이정훈) 부부 사이의 아들 7형제 중 다섯 번째로 태어났다. 선친은 일본인이 세운 측량학교를 나와 측량기사로 활동하다가 규암면장과 부여면장을 살았다.

『선친의 품성이 얼마나 엄격했는가 하면, 14년간 면사무소에 내왕하면서 그 앞에서 좌판을 벌여놓고 뭘 파는 여인들이 부여에서 일등 가는 신사 지나간다고 숙덕거려도 곁눈질 한 번 하지 않았다는 거여. 무서운 성격이라고 해서 별명이 일본말로 「카미나리(천둥)」였어』

―선친께서 면장 하실 때 金庾信(김유신) 장군 공적비를 세우셨다면서요. 아직도 남아 있습니까.

『그 자리가 아파트 부지에 포함되는 바람에 다른 곳으로 옮겼어』

부여라면 백제의 王都(왕도). 그런 곳에 백제를 멸망시킨 金庾信의 공적비를 세운 까닭은 무엇일까. 金庾信은 駕洛國(가락국) 왕가의 후예로 金海 金氏가 조상으로 모시는 인물이다. JP는 김해 김씨다. 그런데 1970년대 초반 부여 중심가에는 백제 최후의 명장 階伯(계백)의 동상이 등장했다. 사실상의 건립주는 당시 국무총리로 재직하던 JP였다. 아버지(金相培)와 아들(JP)이 역할분담을 했던 셈이다.


JP 修辭學의 기초는 중학시절에 읽은 세계문학전집


JP는 일곱 살 때 부여심상소학교에 입학했다. 밤에는 서당에 다니며 한문과 서예를 익혔다. 당시 조선아이들이 다니던 초등학교는 보통학교, 일본아이들의 초등학교는 尋常(심상)소학교라고 했다. 조숙하여 6학년 때 기쿠치캉(菊池寬)의 「제2의 키스」를 읽다가 형에게 들켜 혼이 난 일도 있다고 한다. 소학교 시절부터 木刀(목도)를 잡았는데 지금은 검도 6단이다.

열세 살 때 公州중학으로 유학, 기숙사 생활을 했다. 그는 당시 하루에 소설 한 권씩을 읽어냈다. 소년용으로 만든 디스레일리, 비스마르크, 나폴레옹, 칸트 등 위인들의 전기가 감명 깊었다고 한다.

『중학 2학년 때 세계문학전집(일본어판) 한 질을 독파했지. 읽다가 끝나지 않으면 수업에 안 나가. 그럴 때면 담임선생은 내가 안 보이는 데서는 「이놈이 또 소설 읽느라고 안 나오지」 라고 벼르더래. 그런데 정작 날 만나서는 나무라지도 않아. 그때 기숙사는 밤 10시면 소등이지. 그러면 나 혼자 골방에 들어가 나쇼날 건전지 두 개를 양쪽에 세워놓고 밤새워 책 읽었어』

지금도 JP는 세계명작의 주요 구절 등을 일본어로 좔좔 욀 정도다. 기억에 오래 남는 소시적 독서의 덕인 것 같다. 老정객 JP의 독서량은 아직도 대단하다. 그는 집에만 가면 서재를 중심으로 하는 생활을 한다. 밤 11시에 귀가하여 새벽 3~4시까지 독서하는 일이 예사다. 침대에 누워서도 책을 들어야 잠이 오는 체질이다.

그림, 만돌린, 풍금, 검도, 승마--중학교 시절에 벌써 그는 팔방미인으로 동기생과 선후배 간에 이름을 날렸다. 반장도 하고 지금의 학생회장格인 중대장도 했다.

『유도보다는 검도가 내 성미에 맞아. 어려서부터 검객 소설을 워낙 많이 읽어서 그런지…. 아침 5시에 일어나 한 시간 동안 검도 연습을 한 뒤 6시부터는 馬舍에 가서 한 시간 동안 말을 돌보거나 타거나 했거든. 학교에 말 네 마리가 있었는데, 나는 愛馬部員(애마부원)이었어. 교련이나 사열할 때 교장이나 배속장교가 타던 말이여』

1944년 3월에 金鍾泌은 공주중학 4년을 졸업하고 일본으로 건너가 중앙대학 예과에 입학했다. 그러나 곧 귀국했다. 태평양전쟁의 막바지. 日帝가 조선인 유학생들도 강제로 입대시키고 있어 아버지가 귀국을 종용했기 때문이었다.

귀국 직후 金鍾泌은 대전사범학교 강습과를 수료하고 보령군(최근 보령시로 승격) 천북면 河滿里(하만리)에 있는 천북보통학교로 발령을 받았다.

당시 천북보통학교로 가려면 보령의 교통 중심지인 광천 기차역에서 내려 30리 길을 걸어서 들어가야만 했다. 초임교사가 왜 하필이면 그런 벽지학교로 발령을 받았을까.


敎生 JP의 심술과 반항

『(대전사범학교 재학 때) 大田동광국민학교로 교생 실습을 갔다가 말썽을 일으켜 유배를 당한 셈이야. 교생 실습 중 마침 아버지 환갑날이 되어 잠시 말미를 얻어 고향 집에 다녀오게 되었어. 고향집을 나서려하니 어머니가 곶감을 서너 접(1접=100개)을 싸 주셔. 단것이 몹시 아쉬울 때였거든. 하숙집 주인에게 한 접 주고, 한 접은 내가 먹기로 했지. 나머지 한 접은 교장 주려고 싸 가지고 교장 사택으로 갔지. 가시무라 교장은 좀 고약한 사람이야. 걸핏하면 한국인을 후테이센징(不逞鮮人)이라고 얕보았어.

교장 사택 앞에서 「가네무라(JP의 創氏名) 교생 왔습니다」라고 소리쳐도 안에서 반응이 없어. 부엌에서 칼로 도마를 톡톡 치는 소리가 나는데도 말여. 한참 있으니까 국민학교 6학년 다니는 딸아이가 나와 「아버지 경성(서울) 갔는데 내일 아침에 돌아온다」고 해. 그래서 「가네무라 교생이 곶감 놓아두고 갔다고 전해 달라」면서 돌아서는데, 「곶감」 소리를 들은 교장 부인이 앞치마에 손을 닦으며 뛰어나와 「코레 코레 마마(이거 이거 감사해요)」라며 호들갑이야. 갑자기 그런 꼴이 뵈기 싫어지더라구. 그래서 곶감을 도로 둘러메고 그냥 나와버렸지』

―아이구, 심술을 부리셨네.

『얘기가 거기서 끝나는 게 아녀. 다음날 학교 갔더니 교장이 날 불러. 자기 마누라를 모욕했다면서 끝내는 주먹으로 나를 쳐. 내가 한창 땐데 그가 날 당할 수 있나. 의자를 집어드니까 교사들이 몰려나와 뜯어 말리더만. 교장이 헌병대로 연락하니까 헌병 실은 오토바이가 학교로 오고 야단이여. 헌병대에 갇히고 말았지. 며칠 후 헌병보가 「조사를 해보니 아버지가 부여의 유지이던데 너는 왜 그렇게 못된 짓을 하냐」고 해. 다시 며칠 후 헌병 대위가 불러서 또 조사를 하더구먼. 그래서 「곶감」 얘기를 꺼냈더니 헌병 대위의 말이 걸작이야. 「그런 경우라면 나도 그렇게 했을 것」이라는 거여』

―그래서 풀려나신 거구먼요.

『헌병대 유치장에 갇혀 열흘쯤 되니 열이 40도를 웃도는 거야. 발진티푸스라더군. 그때 그거 걸리면 약이 없어 죽는 거여. 물자 부족한 태평양전쟁 말기 아닌가. 법정전염병이라고 해서 대전도립병원에 격리수용을 당했는데, 거기 들어온 환자 20여 명 중 나하고 또 한 사람, 둘만 살아난 거야』

JP는 벽지인 천북국민학교 4학년 담임을 하다가 8·15 광복을 맞이했다. 곧 대전사범학교 부속 국민학교 교사로 직장을 옮겼다. 그러나 JP의 꿈은 컸다. 공부를 더 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밑바닥에서부터 다시 기어오르고 싶었다』


광복 이듬해인 1946년, 그는 서울大 사범대학에 응시해 합격했다. 그러나 학교는 국립대학교 제도(國大案)를 반대하는 좌익 학생들 때문에 등록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좌익 학생들이 철조망을 치고 야구방망이를 들고 지키고 있었는데, 난 얻어맞으면서 거기를 뚫고 들어가 등록을 했거든. 좌·우익 학생들 간에 패싸움도 벌어졌고. 여기, 이 사진 좀 봐. 나 같은 우익 학생은 이렇게 학교에서 정한 교복을 입고 사각모자까지 쓰고 등교했단 말여. 그런데 좌익은 잠바(점퍼) 차림에 머리도 잘 안 깎고 다니면서 그런 게 진보주의인 것처럼 생각했지. 그러니 교복을 입으면 우익, 안 입으면 좌익이었거든』

JP의 인생행로 가운데 쉽게 이해 가지 않는 대목이 서울大 사대에 다니던 그가 어느 날 갑자기 軍門에, 그것도 장교도 아닌 사병으로 뛰어든 대목이다. 그때는 병역의무 제도가 시행되기 전이었다.

『아버지 덕에 대학까지 다니며 으스댔으니 이제는 밑바닥에서부터 한번 기어올라 보아야겠다는 생각이 들더군. 아버지가 돌아가시기 전에 (아들들에게) 돈을 좀 나눠 주셨어. 나는 그 돈으로 닷도산 자동차를 사서 그때 대학생들 중엔 유일하게 자가용 몰고 학교에 다녔지』

JP의 아버지는 그의 대학 2학년 때 별세했다. 일제 시대 면장을 산 것 때문에 좌익들에게 끌려가서 고난을 받았으며, 그때의 충격으로 병석에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할아버지로부터 3000석을 물려 받았던 아버지의 별세 후 재산정리를 하니 남은 것이 별로 없었다고 한다.

『3학년이 끝날 무렵인데 학교를 다녀오다가 파고다공원 앞에서 군인들이 책상을 놓고 지원병을 모집한다는 거야. 모병관에게 「아무나 들어갈 수 있냐」고 물으니까 「그렇다」는 거야. 그 자리에서 입대원서를 썼거든. 다음날 용산역으로 나오래서 가니까 화물기차에 싣고 온양으로 가더구먼. 거기에 13연대가 있었거든. 그런데 신병들에게 강냉이밥을 주는데, 나는 먹기만 하면 설사야. 총도 주지 않고 맨날 앞으로 가, 좌향좌, 우향우, 차렷만 시켜. 열흘쯤 됐나. 거기 있다간 도저히 사람이 안 될 것 같더라구. 임달순이라는 동료와 함께 불침번을 서다가 「도망가자」 고 꾀었어. 그는 해주에서 교사를 하다가 소련 점령군의 행패에 못 견뎌 내려온 사람이야. 그런데 이 친구가 자기는 못 하겠다는 거야. 이북에서 넘어와 아는 사람이 하나도 없는데 탈영하면 굶어 죽는다는 것이지. 그에게 밥 먹여 줄 곳은 군대밖에 없다는 거야. 두 시간 동안만 신고하지 말아달라고 부탁해 놓고 혼자 도망쳐 버렸어』


脫營 후의 패배감과 自虐


그는 하룻밤을 꼬박 새우며 걸어서 이른 새벽 천안에 도착했다. 그곳에는 철도청 직원으로 근무하는 전영민이란 친구가 살고 있었다. 공주중학 동기동창이었다. 그는 바로 2주일 전 장가를 들어 신혼살림을 차려 놓고 있었다. JP는 영민이가 장가드는 데 중매쟁이 비슷한 역할을 했다고 한다.

처음 전영민은 탈영병 JP를 알아보지 못했다. 시커먼 작업복을 입고 나타난 JP를 보고 「무슨 도깨비로 알았던지」 대문을 도로 닫아 걸더라고 한다.

『영민아 임마, 나야 나』

그제서야 친구가 JP를 알아볼 만큼 도망병의 몰골은 초췌했다.

『더 묻지 말고 빨리 밥 좀 줘』

친구는 신부를 깨워 밥상을 차리게 했다.

『그 밥, 아직도 잊지 못해. 그 밥 속에 신부의 분 냄새가 나더구먼』

JP는 친구의 도움으로 옷을 갈아입고 서울집으로 귀환했다. 그러나 유쾌할 수 없었다. 시내를 돌아다니다가도 군인들만 보면 가슴이 덜컹 내려앉기도 했다. 저들은 저렇게 견디는데 난 왜 그랬을까----심한 자학으로 가슴앓이를 했다.

그러던 어느 날 기분전환을 위해 을지로 4가 을지극장으로 영화 「위대한 왕자」를 보러갔다. 예수 그리스도의 일대기를 영화화한 것이었다. 그러나 자막도 화면도 JP의 눈에는 들어오지 않았다. 무연하기만 했다.

그러다 2층 관람석을 흘끗 쳐다 보니 군인 70~80명이 단체관람을 하고 있었다. 화랑담배를 나눠 피우고 있는 모습들이 여간 정겹지 않았다. 당시만 해도 영화관람을 하면서 담배도 피우던 시절이었다.

『도대체 대학까지 다녔다는 내가 저 애들보다 나은 게 뭔가』

짙은 패배감에 휩싸였다. 그래서 JP는 2층으로 뛰어올라갔다. 사병들은 육사 생도들의 교육을 돕는 교도대 소속이었다. 인솔장교 기세훈 중위를 만났다. 13연대에 입대했다가 열흘 만에 도망한 탈영병임을 털어 놓고 데려가 달라고 부탁했다. 그러나 일본 예비사관학교 출신인 기세훈 중위의 생각은 달랐다.

『그런 곳엔 당신 같은 사람이 갈 곳이 아냐. 탈영한 것이 잘한 거다. 대학 졸업하고 교사가 되는 것도 애국하는 길 아니냐』

그래도 JP는 매달렸다.

『再입대를 못 하면 저는 타락하고 말 것 같습니다』

결국 기세훈 중위의 허락을 얻었다. JP는 교도대 사병들과 함께 GMC 트럭을 타고 태릉의 육군사관학교 경내 교도대로 들어갔다. 중대장은 崔澤元(최택원) 중위였다.


똑똑한 행정병 金鍾泌 2등중사, 사관생도로 입교


며칠 후 崔澤元 중대장이 신병들을 모아 놓고 『「무엇 때문에 군대에 지망했는가」라는 제목으로 글을 쓰라』고 지시했다. 그리고 나서 사흘 후 JP 는 중대장에게 불려갔다.

『너 같은 놈이 왜 여기에 끼어 있는지 모르겠다』

『……』

『다시 묻는다. 이유가 뭔가?』

『고생을 드을(덜)해서 사람 좀 되려고 입대했습니다』

『작문, 매우 훌륭했다. 오늘부터 중대본부 일보계(서무계)를 담당하도록』

후일담이지만 崔澤元은 5·16 후 JP의 추천으로 총무처 차관에 기용되었다.

대번에 金鍾泌은 「글 잘 짓고 붓글씨도 잘 쓰는 사병」으로 이름이 났다. 그러자 곧 사관학교 행정처로 스카우트 되었다. 朴律善 대령(행정처장)은 『똑똑한 놈 하나 와 있다고 해서 불렀다』면서 『행정을 보라』고 했다. 그 다음날 JP는 2등중사(지금의 병장)로 특진했다.

朴대령은 『군인이 될 바에야 장교로 복무하는 것이 바람직하다』면서 JP에게 사관학교 입학시험에 응하도록 권유했다. 국군장교가 부족했던 시절이었다. 朴대령의 추천으로 시험을 치르고 합격하여 육사 제8기생으로 입대했다. 1948년 1월20일의 일이었다.

육사 8기생은 4개월간 단기교육을 받고 소위로 임관되었다. JP는 1260명의 동기생 중 6등이었다. 학과 성적은 수석권이었으나 6등으로 밀려난 사연이 재미있다.

『학과시험에 이어 면접시험을 보았는데, 심사위원장이 나중에 국방장관을 역임한 朴炳權(박병권) 대령이야. 그이는 내 중학 선배인데, 축구를 함께 하면서 맨날 나더러 명태를 방망이로 쳐서 고추장과 함께 가지고 오라고 심부름을 시켰거든. 그런 선배가 윗자리에 근엄하게 좌정해 있으니까 나도 모르게 명태 생각이 나서 웃음이 나와. 아, 그러니까 朴선배가 「장교 될 자가 히히덕거린다」고 꾸짖더구먼. 그 바람에 면접성적이 좀 깎인 거여』

8기 졸업생 중 2등부터 30등까지는 육본 정보국에 보직되었다. 당시 정보국장인 白善燁(백선엽) 대령에 의해 스카우트 된 것이다. JP는 소위 임관한 지 한 달 반 만에 동기생 열 명과 함께 중위로 진급했다.

―1등 졸업생은 어디로 보직되었죠?

『육사 교장 金弘壹(김홍일) 장군이 그의 부관으로 쓰겠다고 데려갔지. 그 친구는 6·25가 발발한 그 날 새벽에 육사생도들을 데리고 의정부 남방으로 나가 인민군과 싸우다 전사했어…』


문관 朴正熙와 운명적인 만남


金鍾泌은 정보국 전투정보과로 배속되었다. 白善燁(백선엽: 후일 한국군 최초로 대장 진급. 육군참모총장 역임) 국장은 일동의 신고를 받고 몇 가지 당부를 하고 나서, 『이곳엔 너희들이 앞으로 모시고 일할 분이 한 분 와 계시다. 가서 인사 드리고 와라』 하고 옆방을 가리켰다.

옆방에는 계급장 없는 군복을 입은 한 깡마른 사나이가 그들을 맞이했다.

『나, 朴正熙요』

당시 朴正熙는 여순반란사건 이후의 숙군과정에서 남로당 관련 사실이 밝혀져 형장으로 끌려가기 직전에 白善燁 등의 구원으로 무기징역으로 감형을 받았다. 이어 그는 국군內의 남로당 조직을 폭로하고 풀려 나와 전투정보과의 文官으로 재직하고 있었던 것이다.

육본 정보국은 1949년 12월28일 종합적정보고서를 작성, 참모총장을 경유하여 국방장관과 美 고문단장에게 제출했다. 실무진은 朴正熙-金鍾泌 팀이었다.

『종합적정보고서에서는 인민군이 1950년 3~6월 어간에 쳐들어온다고 예상했어. 내 생각으론 4월 이전에 남침할 것 같았지. 왜냐면 3월에 전단을 열어야 춥기 전에 (전쟁이) 끝난다고 판단했거든. 그런데 중공군에 들어가 있던 사람들을 북한 인민군으로 편입시키는 작업이 수송과 편성에서 차질을 빚었거든. 그래서 공격개시일이 6월로 연기된 거야』

1950년 6월25일 새벽에 전쟁이 터졌다. 朴正熙 문관은 수원에서 소령으로 복직했다. 7월14일 朴소령은 육본 전투정보과장으로 임명되었다. 인천상륙작전으로 전쟁의 국면이 반전된 그 해 9월15일 朴正熙는 중령으로 진급했고, 10월25일 대전에 주둔해 있던 9사단 참모장으로 임명되었다.


JP의 결혼식에 황소 한 마리를 부조한 朴正熙 중령

金鍾泌 대위는 朴正熙 중령의 조카딸 朴榮玉(박영옥)과 1952년 2월15일 대구 중앙교회에서 결혼식을 올렸다. 지금도 JP는 감리교 신자다.

『마침 그때 朴正熙 대통령은 9사단 참모장으로서 강원도 진부리에서 인민군 14사단과 전투하고 계실 때였어. 결혼식 며칠 전 GMC 트럭 하나가 왔는데 황소 한 마리가 실려 있더라구. 朴대통령이 결혼선물로 보낸 거야. 편지도 동봉했는데 「귀여운 조카딸 결혼식에 꼭 가 있어야 되는데 귀관도 알다시피 전투 중이라… 피로연할 때 필요할 것이라 생각해서 황소 한 마리 보낸다」고 쓰여 있더라구. 한 사흘 동안 잘 먹었어』

朴榮玉은 朴正熙의 중형인 相熙(상희)씨의 딸이다. 사회주의 운동을 하던 相熙씨는 1948년 10·1 대구폭동 때 도주하다가 경찰관들의 총격을 받고 사망했다. 金鍾泌-朴榮玉 커플의 만남도 우연이 아니었다.

당시 육본 정보과의 숙소는 대구 영남여관에 자리잡고 있었다. 비번으로 쉬고 있는데, 묘령의 처녀가 金鍾泌 대위를 찾아왔다. 그 처녀는 대구 신명여고를 졸업하고 초등학교 교사로 근무하던 朴榮玉양의 친구였다. 그녀는 朴榮玉이 말라리아에 걸려 신음하고 있다고 전했다.

그때는 현풍에서 쏜 인민군의 박격포탄이 날아와 대구역을 때리던 절박한 시기였다. 어떻게 알고 찾아왔냐니까 朴正熙 중령이 전방으로 전출하기에 앞서 『무슨 급한 일이 생기면 金鍾泌 대위를 찾아가라』는 말을 일러두었다고 했다.

JP가 朴鐘圭(박종규: 대통령 경호실장 역임) 일등중사와 함께 朴榮玉양의 숙소로 가보니 朴양은 고열에 들떠 사경을 헤매고 있었다. 朴鐘圭에게 의사를 수배하여 불러오게 한 다음 JP는 朴양에게 키니네를 먹이고 목침대 위에 1인용 모기장을 치고 눕혀 주었다.

다행히 朴양은 곧 회복이 되었다. 며칠 후 朴양은 고맙다는 인사를 하기 위해 친구 서넛과 함께 JP의 비번날을 골라 영남여관을 방문했다.

『(朴양 일행을) 대접한다고 레이션 박스를 펴놓고 잠시 밖에 나갔다 돌아오니 깡통 하나 남아 있지 않았어. 가만 보니 귀한 것이라고 모두들 하나씩 챙겨 호주머니 속에 감췄더구먼』

어떻든 둘은 서로 좋아하는 사이가 되었다. 朴正熙가 눈치를 채고 하루는 JP를 연병장으로 불러내어 은근히 말했다.

『그 아이를 데려가면 어때?』

『본인의 의사가 그렇다면 좋습니다』

그래서 둘은 곧 약혼했다.

아직 전쟁이 한창이던 1951년 金鍾泌 대위는 미국의 보병학교인 포트베닝으로 유학을 갔다. 장차 대대장·연대장 요원이 될 정예장교 150명을 뽑아 교육을 시킨다는 프로그램이었다. 수송선을 타고 2주일간 항해해서 미국에 상륙, 수개월간 교육을 받았다. 그해 8월 귀국 후에는 한동안 이곳저곳에 불려다니며 유학실황을 강연했다. 이어 6사단 19연대에 배속되어 전방에서 전투를 했다.


JP가 집권하지 못한 까닭

JP는 파란만장한 인생을 살아 온 사람이다. 그 가운데 최대의 고비가 1960년 4·19 혁명 전후 중령으로서 整軍(정군)운동을 벌이다 구속되고, 이어 강제예편된 뒤 朴正熙 소장을 최고지도자로 옹립하고 1961년 5·16혁명을 일으킨 대목이다.

5·16 혁명 주체였던 金龍泰(김용태:공화당 원내총무 역임)씨는 『5·16 거사 시나리오는 사실상 JP의 머리에서 나왔다』고 회고한 적이 있다. JP가 軍 내부에서 명망이 높던 朴正熙를 최고지도자로 업고 사실상 쿠데타를 주도했다는 뜻이다.

5·16 쿠데타의 성공으로 JP는 군사 정부의 실력 제2위인 중앙정보부장이 되었다. 그때 나이 35세. 이후 대체로 승승장구했지만, 1969년 3선개헌 때 모든 공직에서 사퇴하는가 하면, 1980년에는 新군부에 의해 구금되고 정치활동을 규제당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1987년 新민주공화당의 대통령 후보로 정계에 컴백했고, 특히 1997년 大選 때는 DJP 연합을 이뤄 승리함으로써 DJP 공동정권에서 제2위의 持分(지분)을 누렸다.

JP는 대통령직만 빼놓고는 다 해본 인물이다. 그러나 JP는 그의 라이벌이었던 YS나 DJ와는 달리 그의 시대를 열기 어려운 형편이다. 그것은 결정적인 고비에서 결단하지 못한 그의 우유부단함 때문이라는 지적도 있다. 그것은 그가 너무나 모양이나 人情을 중시하는 스타일리스트여서 그런지 모른다.




◆ 5·16 직후 즐기던 승마를 그만둔 까닭

5·16 후에 (朴대통령과 나는) 기마경찰대의 말을 좀 많이 탔다. 馬舍는 美 대사관 건물 뒤편에 있었다. 하루는 (기마경찰관이 馬舍에서) 대통령이 탈 말을 끌고 오는데, 景福宮(경복궁) 모퉁이 길에서 말이 무엇에 놀랐는지 미쳐 날뛰었다. 흥분한 말은 끝내 경복궁 담과 전봇대 사이의 좁은 공간에 끼어들어 복부 파열상을 입고 그 자리에서 죽었다. 朴대통령은 『괴이한 일이다. 이건 하늘이 내게 말을 타지 말라고 일러주는 것이다』라며 승마를 그만두셨다. 나도 뒤따라 그렇게 했다.


◆ 바둑 6급 피스톨 朴이 2급 JP에 대해 白을 잡았던 사연

한번은 朴대통령이 관전하시는 가운데 경호실장 朴鐘圭와 내가 바둑을 뒀어. 그 친구, 내게 두서너 점은 깔아야 하는데, 꼭 白을 잡겠다는 거여. 『니가 어떻게 白을 잡나』 하고 물었더니 『제가 경호원들과 바둑을 두면서 항상 白만 잡아서 이제 黑을 쥐면 제 말(흑말)을 제가 잡아먹을 거니 白을 쥘 수밖에 없으니 용서하라』고 해. (朴대통령의 관전 소감은 어떠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朴대통령은 『그거 별로 재미없어 보이네』라고 하셨어. 원래 바둑을 안 두시는 분이야.


◆바둑 지고 매일 술 사는 봉

1960년대 공화당의장 시절, 퇴근시간에 출입기자실에 들르면 기자들이 기자단 대표와 술 사기 바둑 두라고 구슬러. 그때 기자실 대표선수가 나중에 국회부의장을 역임한 최영철 동아일보 기자였지. 『얼마나 두냐』고 물으니 『당의장만큼은 둔다』는 거야. 그 후 崔기자와 자주 두었는데, 그때마다 꼭 한두 집씩 지는 거야. 그는 강한 1급 실력이었어.


◆八方美人 JP … 당구 600점

삼각지 육본에서 중령으로 근무하던 시절, 당구 600점을 쳤어. 강상욱(육사 9기, 5·16 후 군정 때 최고위원)은 2000점, 최고 고수였지. 퇴근하고 치고 있으면 예리(JP의 장녀)가 당구장에까지 찾아와서 집에 손님 와 있다고 알려. 난 『곧 갈게』 하고 계속 치고 있으면 집사람까지 당구장에 와. 그런데 그럴 때마다 승부에 져서 꼭 내가 돈을 치러. 그러면 집사람이 『지는 것 맨날 무엇 때문에 치나』라고 핀잔을 주기도 했지.


◆ 蔣介石 총통의 환대와 宋美齡 여사의 傾國之色

1961년 쌍십절 하루 전에 총통 관저인 士林臺로 蔣介石(장개석) 총통을 예방했어. 蔣총통 부처는 내게 만찬을 주셨어. (宋美齡 여사가 어떤 분이더냐는 기자의 질문에) 그때 宋여사는 60代의 나이인데도 피부가 뽀얀 미인이었지. 젊은 시절 傾國之色(경국지색)이라는 찬사를 받은 분이 아니던가.

당시 宋여사의 방 앞에는 사나운 셰퍼드가 한 마리 앉아 있었어. 蔣총통은 『나도 무서워서 저 방엔 잘 안 간다』고 조크를 해 宋여사와 나는 박장대소를 했어.

1977년에는 蔣介石 총통을 승계한 장남 蔣經國(장경국) 총통도 나를 초청했어. 내가 남쪽 高興(카오슝)에 간다니까 총통 전용機인 보잉 707 中正號(중정호)를 타라고 내주었어(中正은 장개석의 아호). 그리고는 『아버지가 사다놓고 한 번도 못 탄 전용기다. 당신 태워 주려고 사신 것 같다』고 했지.


◆그레이스 켈리 王妃의 脚線美

(모나코 방문 때 만난 王妃 그레이스 켈리가 어떻더냐는 기자의 질문에 답함) 모나코 국왕 레이니에公의 초청으로 1973년 5월 모나코 왕궁에 초대되었지. 나는 여자의 美를 다리에서 찾는데, 왕년의 名여우답게 기막히게 예쁘더구먼. 그러나 서양 여자들의 손은 미워. 그래서 장갑을 끼는 것 같아. 美人薄命(미인박명)일까, 그레이스 켈리 王妃도 자동차 사고로 죽었어.


◆대처 英國수상의 멋내기… 東洋에서 美男이 온다고 해서

1979년 6월에 런던에 갔지. 왜 대처 수상을 만났느냐 하면 英國 보수당의 小壯의원들이 북한을 승인하여 교류를 하자고 나선다는 말을 들었기 때문이었어. 그래서 『서두르지 말고 좀 기다려 달라』고 설득하러 간 거여. 그랬더니 대처 수상이 『내가 수상으로 있는 한 절대로 그런 일이 없을 테니 안심하라』고 말하더구먼. (사진을 보니 대처 수상이 유달리 멋을 부린 느낌이라는 기자의 코멘트에 대해) 대처 수상에게 『오늘 화장 잘 하신 것 같다』고 말씀드렸더니 『오늘 東洋에서 미남이 온다고 해서 화장 좀 했다』고 받아넘기더구먼. 전형적인 영국형 미인이야. 나중에 알고 보니 대처 수상의 다우닝街 10번지(영국 수상 관저) 입주 이후 내가 최초로 정식초청을 받은 사람이라는 거야.


◆총리 시절에 팬텀 1개 대대 공짜로 얻어

월남戰 막바지에 미국은 한국에 주둔하고 있는 美 공군 F5A 2개 대대를 월남에 먼저 보내는 데 동의하면 성능이 우수한 팬텀 전투기 1개 대대를 한국에 배치하겠다고 제의했어. 나는 팬텀 1개 대대의 1번機가 먼저 大邱기지에 착륙해야 F5A 전투기 2개 대대의 1번機가 水原기지에서 이륙할 수 있다고 강력히 버텼지. 그 바람에 F5A 2개 대대의 월남 이동이 지연되었고, 그러는 사이에 월남이 패망했다. 한국으로서는 팬텀기 1개 대대를 공짜로 얻은 결과가 되었지.

美製 군함용 하푼 미사일을 도입하려고 교섭했는데, 美 정부가 불응했어. 내가 프랑스를 방문, 미테랑 대통령을 만나 엑조제 미사일 한 발을 들여왔지. 그랬더니 미국이 놀라서 대번에 하푼 미사일을 팔겠다고 나서더구먼. 나는 미국과 그런 「바둑」을 두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