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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

정순태   |   2016-08-22 | hit 71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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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을 꺾고 민족사 최초의 통일을 이룩한


문무대왕에게 배울 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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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武大王의 삼국통일을 깎아내리는 것은


植民史觀이나 김일성주의에 물든 바보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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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고구려를 獨食(독식)한 唐(당)은 신라까지 병합하려 했다. 이런 민족사적 위기에 문무대왕이 唐의 침략군 장수에게 보낸 「答薛仁貴書&#8228 답설인귀서」는 왜 신라국가가 자신의 存亡(존망)을 걸고 當代(당대)의 수퍼파워와 싸워야 하는지를 국내외에 천명한 開戰(개전) 문서이다. 아직도 신라가 外勢(외세)에 기대어 삼국통일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答薛仁貴書」를 한번 제대로 읽어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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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 東아시아 세계를 뒤흔든 역사의 격동 속에서 최대의 수혜자는 신라였다. 이것을 추동한 힘은 신라 3金 의 인간적 신뢰를 바탕한 팀 파워였다. 인류사에서 가장 뛰어난 3인의 협력이 한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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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성과 결단의 君主 문무대왕이 통일전쟁과 나당 7년전쟁을 지휘했다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만약 문무왕의 용기와 지혜가 없었다면 백제&#8228 고구려에 이어 신라까지 먹성 좋은 중국에게 먹혀 한반도에 당3군이 설치될 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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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8212왜 문무대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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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의 대왕암에서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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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세기의 수퍼파워 唐帝國(당제국)을 꺾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文武大王(문무대왕)은 작지만 강한 나라의 역사적 모델을 제시했다. 문무대왕이 增强(증강)시킨 신라 수군은 海路(해로)를 통한 唐의 兵站線(병참선)을 틀어막아 당 지상군의 南下(남하)를 저지했다.&nbsp西域(서역)에서 당시 세계 최대 교역로인 실크로드의&nbsp지배권을 놓고 전개된 吐藩(토번)의 對唐攻勢(대당공세)를 절묘한 타이밍에 활용해 한반도의 戰勢(전세)를 역전시켰다. 이때 대왕이 구사한 전략은 1만5000리 떨어진 중국대륙의 東&#8231 西端(동&#8231 서단)에서 同時(동시)에 唐帝國(당제국)을 끼고 치는 2對 1 전략이었다. 어떠한 강국도 혼자서는 2正面전쟁에서 이기기 어렵다.


왜 羅唐(나당) 7년 전쟁이 불가피했던 것일까? 신라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제국은 648년의 비밀협정을 어기고 그 故土(고토)를 獨食(독식)했을 뿐만 아니라&nbsp대왕을, 평양에 주둔한 당의&nbsp安東都護(안동도호)의 節制(절제)를 받는 鷄林州大都督(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했다. 이것은 신라까지 먹으려 했던 당의&nbsp예비동작이었다. 이런 민족사적 위기에 당면한 문무대왕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결단은 21세기의 우리에게 남북통일을 위한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그때 대왕이 唐의 극동방면군사령관에게 보낸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는 弱者(약자)인 신라가 왜 자신의 存亡(존망)을 걸고 當代(당대) 최강과 싸워야 하는지를 국내외에 闡明(천명)한 감동적인 開戰文書(개전문서)였다.


아직도 신라가 外勢(외세)에 기대어 삼국통일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문무대왕의 이 개전문서를 제대로 읽어보아야 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한사코 깎아내리는 것은 단언컨대 日帝(일제)의 植民史觀(식민사관) 혹은 수준 미달의 김일성주의에 오염된 바보짓이다.


그렇다면 대왕과의 時空(시공)을 뛰어넘는 대화는 어디서 가능할 것인가? 역시,東海(동해)로 가서&nbsp문무대왕의 水中陵(수중릉)부터 답사해야 할 것 같다. 필자는 문무대왕의 수중릉이 마주 보이는 慶州市 陽北面 奉吉里(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해변에 서서 우리 민족의 결정적 순간을 생각했다. 나당 7년 전쟁이 끝난 후에도 대왕은 唐-倭(당-왜) 연합에 의한 침략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겉으로는 주변국에 화해의 몸짓을 계속 보내면서도 안으로는 침략전쟁에 철저하게 대비했던 문무대왕의 국가안보 전략.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에 깔고 대왕의 수중릉 앞에 서면 그것은 처절하리 만큼 장엄하다. 대왕릉 쪽 동해바다에서 200m 거리의 奉吉里(봉길리) 해안으로 끊임없이 밀려오는 물결의 대행렬…. 그것은 21세기의 우리들에게 나라 지키기에 身命(신명)을 걸라는 대왕의 至上命令(지상명령)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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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海龍이 되고 싶다”



봉길리 해안에서 육지 쪽으로 2km 거리인 感恩寺趾(감은사지)에 들러 한국 최대의 3층 쌍탑을 관찰했다. 문무대왕이 착공하고, 그의 장남인 神文王(신문왕)이 완공한 感恩寺(감은사)는 이제 그 遺構(유구)만 남아있지만, 감은사의 동&#8231 서 3층석탑(국보 제112호)은 1300여년의 風雨(풍우)에도 꿋꿋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서, 지금은 품격 높은 신라예술을 대표한다.
감은사에 가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海龍(해룡)이 되기를 맹세했던 문무대왕의 나라 사랑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대왕의 化身(화신)인 해룡이 감은사에 드나들 수 있게 바다와 연결된 通路(통로)가 20년 前 감은사 本堂(본당)의 遺構調査(유구조사)에서 확인되었는데, 필자도 그때 그것을 현장에서 확인했다. 현재, 그 유구는 다시 땅속에 파묻혀 있다. 신라 당시엔 감은사 山門(산문: 절의 바깥문)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4번 국도를 타고 경주시내로 들어와 신라의 都城(도성)인 半月城(반월성) 기슭에 자리 잡은 경주국립박물관에 입장했다. 박물관의 현관에는 문무대왕의 陵碑(능비)가 전시되어 있다. 파손이 심한 陵碑文(능비문)이지만, 거기서 新羅金氏(신라김씨)가 어디서 경주로 흘러들어와 어떤 과정을 거쳐 신라국왕이 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문무대왕 陵碑(능비) 곁에는 壬申誓記石(임신서기석)도 전시되어 있다. 높이 불과 34cm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냇돌에는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인 신라 花郞(화랑)의 의식구조와 수련 내용이 알뜰하게 새겨져 있다. 신라 화랑이야말로 臨戰無退(임전무퇴)를 온몸으로 실천하며 삼국통일과 韓民族(한민족) 형성을 위한 祭壇(제단)에 피를 뿌린 용사들이었다.



&lt 壬申年(임신년) 6월15일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한다. 지금으로부터 忠道(충도)를 몸소 실행하여 과실이 없기를 하늘에 맹세한다. (中略)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출전해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또 1년 전 辛未年(신미년)에는 詩(시), 尙書(상서), 禮記(예기), 春秋傳(춘추전)을 3년 동안 습득하기로 맹세했다.&gt&nbsp&nbsp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군대에 안 간 장관&#8231 국회의원이 수두룩한가 하면, 그런 주제에 대통령을 노리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 하지 못한 사람은 입장료 1000 원인 경주국립박물관에 가서 임신서기석을 한번 우러러 보고 난 후에 그들의 向後(향후) 거취를 결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 역사상 最長(최장) 기간의 亂世(난세)를 극복하고 韓民族(한민족)을 성립시킨 결단과 지혜의 인물이라면 바로 문무대왕이다. 문무왕 16년(676), 대왕은 唐軍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민족사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나당전쟁 승리 후에도 大王은 민생의 안정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다음은 그의 유언 중 한 대목이다.


&lt 兵器(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고, 백성들로 하여금 天壽(천수)를 다하도록 하였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백성들은 제 집을 편안히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없어졌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gt&nbsp&nbsp


위의 대목은 문무대왕의 自負心(자부심)의 발로라 해도 좋다. 그의 죽음 후에 정해진 文武大王이라는 廟號(묘호)도 그냥 그렇게 부여된 것이 아니다. 대왕은 馬上(마상)에서 세계제국 唐과의 전쟁을 지도해 삼국통일을 완수했기 때문에 ‘武’ 자를, 신라국가의 律令(율령)완성과 船府(선부) 신설 등 각종 제도 개혁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文’자를 받은 것이다.&nbsp&nbsp


임진강을 韓民族의 방파제로 활용한 대왕&nbsp


경주 답사 일정을 끝낸 필자는 밤을 도와 臨津江(임진강)으로 北上(북상)했다. 임진강은 韓民族(한민족)을 지켜낸 방파제였다. 임진강과 그 유역을 水陸(수륙) 양면의 요새로 활용한 君主(군주)가 문무대왕이었다. 漢江(한강) 하류를 끼고 自由路(자유로)를 달리다 恭陵川(공릉천)의 河口(하구)에 걸린 松村大橋(송촌대교)를 지나면 자라머리[鰲頭&#8231 오두]처럼 생겼다고 鰲頭山(오두산)이라 불리는 군사적 요충이 눈에 들어온다. 나당전쟁 당시엔 泉城(천성)이라고 불린 오두산의 부근에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난다고 해서 예로부터 이곳을 交河(교하)라고 불렀다. 나당 전쟁 중 唐의 함대는 군량과 무기를 싣고 交河 바로 북쪽 임진강 河口(하구)로 진입하려 했다. 임진강 중류의 七重城(칠중성)과 임진강의 支流(지류)인 한탄강 연안의 買肖城(매소성) 등으로 南下한 唐 지상군과 兵站線(병참선) 연결을 거듭 시도했던 것이다. 나당전쟁 때 칠중성과 매소성은 양군 간 쟁탈의 요충이었다.


그러나 공릉천 河口에 포진해 있던 신라 함대는 唐 함대의 임진강 진입을 한사코 틀어막았다. 요즘엔 평화전망대가 세워져 있는 오두산은 군사용어로 말하면 瞰制高地(감제고지)이다. 감제(Command &amp Domination)란 상대적으로 높은 지점으로부터의 관측에 의한 통제를 말한다.


오두산성은 392년 10월 고구려의 광개토왕에게 攻破(공파)당한 백제의 關彌城(관미성)이었다. 그 터엔 3국 쟁탈전의 역사를 증명하려는 듯 백제, 고구려, 신라의 토기가 계속 발굴되고 있다. 현재, 오두산 정상엔 임진강 북쪽의 山河(산하)가 내려다보이는 통일전망대가 들어서 있다. 오늘날 남북 대치의 현장인 임진강 1300 여년 前에는 나당의 결전장이었다. 필자는 임진강 하구의 伴鷗亭(반구정)과 臨津閣(임진각), 중류의 高浪浦(고랑포), 沙尾川(사미천), 瓠蘆古壘(호로고루), 七重城(칠중성), 국군 필승사단의 태풍OP(Observation Post&#8231 관측소), 그리고 임진강 지류인 한탄강 南岸의 買肖城(매소성) 등지를 답사했다.


특히, 매소성은 나당전쟁 중 지상군의 決戰場(결전장)이었다.&nbsp태풍OP(264고지) 바로 북쪽인 임진강 상류에는 水攻(수공)이 가능한 북한의 황강댐이 축조되어 있어, 장마철만 되면 우리를 잔득 긴장시키고 있다.


675년 9월29일, 신라군은 靺鞨族(말갈족)을 主力으로 했던 당군 20만과 매소성에서 대치했다. 그러나 李謹行(이근행)이 지휘한 말갈군단은 설인귀 함대의 泉城(천성) 전투 패배로 軍糧(군량) 등을 보급받지 못해 전면 퇴각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매소성 전투에서 이근행 군단은 戰馬(전마) 3만여 필과 많은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다. 매소성 전투 직후 이근행의 군단은 한반도를 떠나 토번군과 싸우기 위해 1만3000리 서쪽의 靑海(청해) 전선으로 급히 이동했다.


이근행은 나당 7년 전쟁 기간에 신라군과 가장 많은 전투를 벌인 敵將이다. 왜 전마를 3만여 필이나 버리고 퇴각했을까? 말은 사람의 12배를 먹는다. 말갈족&#8231 거란족 등 기마민족 병사는 원정 때 1인당 3필 정도의 戰馬(전마)를 데리고 다닌다. 따라서 군량이 떨어진 이근행 군단에게 말(馬)은 큰 골칫거리였을 터이다. 매소성 전투가 지상전의 결전이라면 해전의 결전은 기벌포 전투였다. 문무왕 16년(676) 11월, 설인귀의 함대가 서해안을 우회하여 금강 하구로 진입하려다가 伎伐浦(기벌포: 지금은 충남 서천군 장항읍) 앞바다에 포진해 있던 신라 함대와 격돌했다. 사찬 金施得(김시득)이 지휘한 신라 함대는 첫 교전에서는 패배했으나, 이어 전개된 22회의 大小 해전에서 全勝(전승)했다.


필자는 기벌포 해전의 현장인 금강 하구 長項(장항) 앞바다를 답사한 다음 금강 북안을 따라 東進(동진)해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 백제 패망 후 웅진도독부가 설치되었던 공주, 백제부흥군의 근거지 周留城(주류성: 충남 홍성군 長谷面)과 任存城(임존성: 홍성군 大興面)을 답사했다.&nbsp&nbsp


“신라는 자주 불순하지만 일찍이 우리 변방을 침범하지는 않았다.”&nbsp



676년 기벌포 전투 이후 나당전쟁이 재발하지는 않았지만, 당은 틈만 나면 신라를 다시 공략하려고 시도했다. 예컨대 678년 西域(서역)에서 당&#8231 토번의 실크로드 쟁탈전이 잠시 소강상태를 이루자, 당고종은 신라를 재침하려고 했다. 이때 시중 張文瓘(장문관)은 중병을 앓고 있었으면서도&nbsp당고종에게 나아가 신라와의 전쟁을 확대시키지 말라고 건의했다. 다음은 &lt&lt資治通鑑&#8231 자치통감&gt&gt 의봉 3년(678) 9월 條의 기사이다.



&lt 고종이 장차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토벌하고자 했다. 병으로 집에 누워 있던 侍中(시중) 장문관이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했다.
“지금 토번이 侵寇(침구)하니 바야흐로 군대를 일으켜 서쪽을 토벌해야 합니다. 신라는 비록 자주 불순하지만, 일찍이 변방을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또 東征(동정)을 한다면 그 폐해가 공사간에 심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에 고종은 (對신라전을) 중지했다. &gt&nbsp


문무대왕은 토번의 서역 공격을 틈 타 수퍼파워 唐을 꺾었다. 위에서 말한 靑海(청해)는 ‘푸른 바다’가 아니라 제주도 면적 2.5배 크기의 內陸 鹽水湖(내륙 염수호)인 청해호가 있는 지금의 靑海省(청해성)을 말한다. 청해호는 太古(태고)의 지각변동에 의해 바다가 육지가 되면서 염수호가 되었다. 나당 7년 전쟁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이것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 토번&#8231 당의 전쟁, 특히 청해의 大非川(대비천) 전투의 현장을 답사하지 않을 수 없다. 대비천이 위치한 청해성의 共和縣(공화현)은 티베트의 라사(拉薩)∼청해성의 省都 시닝(西寧)를 잇는 214번 국가간선도로가 지나고 있는데, 이 도로는 감숙성의 성도 蘭州(난주)를 거쳐 唐제국의 수도였던 長安(장안: 지금의 西安)으로 이어진다. 또 공화현에서는 감숙성의 허리인 기련산맥을 넘어 河西走廊(하서주랑)의 요충인 張掖(장액), 그리고 청해성 西部지역인 차이담 盆地(분지)를 거쳐 新疆(신강)의 오아시스路와 연결된다.



2010년 4월9일, 필자 일행 5명은 西寧(서녕&#8231 시닝)공항에 착륙했다. 청해성의 省都(성도)인 서녕은 원래 백제부흥군 출신 장수 黑齒常之(흑치상지)가 건설한 군사도시다. 湟水(황수)라는 강을 따라 형성된 서녕은 시가지도 누렇고, 하늘도 누렇고, 산도 누렇고, 강물도 누렇다. 거리엔 이곳의 옛 주인인 티베트族과 흰 사각모자를 쓴 위구르族이 눈에 많이 띄였다.&nbsp


나&#8231 당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 大非川 전투.


나당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靑海湖(청해호) 남쪽에서 당&#8231 토번 간에 전개된 670년 8월의 大非川(대비천) 전투였다. 대비천은 安東都護(안동도호: 극동방면군 총사령관)였던 설인귀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1만3000여 리를 이동, 청해호 남쪽에서 토번군과 싸워 전멸당한 현장인 것이다. 설인귀는 대번에 斬首(참수)를 당할 만한 패장이었지만, 그가 일찍이 홍수의 위기에서 당고종과 측천무후의 생명을 구한 공이 있었다. 더욱이 설인귀와 同鄕(동향: 山西省)인 측천무후의 비호를 받았기 때문에 그가 계속 기용된 것으로 보인다.


669년, 신라 문무왕은 설인귀 군단이 평양을 떠나 靑海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했던 듯하다. 670년 4월, 신라 사찬(관등 제8위) 薛烏儒(설오유)와 신라에 망명했던 고구려의 태대형(관등 제1위) 高延武(고연무)가 각각 병력 1만 명씩 모두 2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도하해 鳳凰城(지역)으로 진출, 말갈군을 공격해 대승했다. 이것이 나당 7년 전쟁의 緖戰(서전)이었다.


2010년 4월10일, 필자 일행은 청해호 남쪽의 대비천을 답사했다. 중국인에게는 치욕의 현장이었던 대비천은 이제 沙珠玉河(사주옥하)라는 예쁜 이름으로 바뀌어져 있다. 우리 일행은 청해호 연안의 서남단 黑馬河(흑마하)를 거쳐 상피산(4451m)을 넘어 靑海南山(청해남산)의 남쪽 기슭에 펼쳐진 대비천 전투 현장을 둘러보고 자정 무렵에야 서녕 호텔로 되돌아왔다.


신라김씨의 原籍(원적)을 찾는 답사


청해성까지 깊숙히 들어간 우리 일행이 당&#8231 토번 전쟁 중 쟁탈의 요지였던 甘肅省(감숙성)의 실크로드 구간인 河西走廊(하서주랑)과 문무대왕의 능비문에서 그의 先祖(선조)라고 밝힌 金日&#30974(김일제)의 고향인 武威(무위)를 답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0년 4월11일 오전 9시, 필자 일행은 지프를 타고 서녕을 출발, 청해성과 감숙성의 경계지대인 峨堡鎭(아보진)에 이르러 점심을 먹으려 했으나, 길가의 식당 모두가 영업을 하지 않았다. 폭설이 휘날려 모두 문을 닫았던 것이다. 폭설 視界(시계)가 매우 불량한 가운데 겁도 없이 해발 4000m의 祁連山脈(기련산맥)을 넘어 張掖(장액)에 도착했다. 장액의 唐代(당대) 이름은 甘州(감주)다. 장액과 223km 상거한 酒泉(주천)의 唐代 명칭이 肅州(숙주), 두 곳의 머리글자를 따서 甘肅省(감숙성)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4월22일은 폭설이 내린 다음날이라서 그런지 쾌청이었다. 우리 일행은 지프를 타고 장액에서 酒泉을 거쳐 明代(명대) 만리장성의 서쪽 끝인 嘉&#23786關(가욕관)을 향해 河西走廊(하서주랑)을 신나게 달렸다. 왼편에는 눈부시게 하얀 눈을 봉우리에 이고 있는 기련산맥, 오른쪽으로는 바딘지린(巴丹吉林) 사막이 펼쳐져 있다. 구름은 기련산맥의 허리에 걸려 있었는데, 하서주랑은 그곳보다 高度(고도)가 오히려 높다. 말을 타고 이 하서주랑을 달리면 雲上人(운상인), 바로 ‘구름 위의 사람’이 된다. 신라 화랑들이 왜 雲上人을 그렇게 憧憬(동경)했는지, 그 까닭을 알 것만 같았다. 문무대왕의 능비문의 기록이 맞다면, 그 선조의 原籍(원적)은 감숙성인 것이다.


慶州(경주) 대릉원의 天馬&#20898(천마총)에서 발굴된 말다래(障泥: 국보 제207호)에도 구름 위를 달리는 天馬를 그려놓았다. 말다래는 말이 달릴 때 진흙이 말의 허벅지와 배에 튀는 것을 막는 馬具(마구)로서 천마총의 말다래는 북방의 한랭한 삼림지대에 自生(자생)하는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다. 천마총의 주인은 우리 역사인물 陽物(양물)이 가장 컸다는 智證麻立干(지증마립간)으로 추정된다. &lt&lt삼국유사&gt&gt는 지증마립간의 陰莖(음경)의 길이가 1척5촌이라고 전하고, 그가 반려자(왕비)를 찾는 스토리를 인간 냄새 물씬하게 기술하고 있다. 당시의 1척은 약 20cm, 1척5촌이라면 30cm인 것이다.


麻立干(마립간)은 17대 奈勿王(내물왕: 재위356∼402))으로부터 21대 智證王 4년(503)까지 사용된 신라의 王號(왕호)이다. 大陵園(대릉원)은 마립간 시대의 왕, 왕비, 왕족 무덤이다. 그래서 천마총에 가면 우리 古代史(고대사)의 暗號(암호)가 풀린다. 경주 대릉원의 무덤은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8231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적석목곽분은 스키타이族, 匈奴族(흉노족) 등 기마민족의 무덤양식이다. 스키타이族이라면 기원전 6세기∼기원전 3세기 黑海(흑해) 연안에서 번영했던 유목기마민족의 元祖(원조)이다. 흉노족은 기원전 3세기∼5세기 몽골 및 중국 북부,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활동한 유목기마민족으로서 전성기에는 아시아대륙의 패권국으로 군림했다.


감숙성의 서쪽 끝인 敦煌(돈황)은 동서교류의 보물창고인 莫古窟(막고굴)로 유명하지만, 필자가 2004년 타클라마칸 사막의 天山南路(천산남로: 실크로드의 오아시스路 구간)를 답사할 때 이미 들렀던 곳이어서 가욕관에서 오던 길로 뒤돌아서 河西走廊(하서주랑)을 東進(동진)하기로 했다. 가욕관 동쪽 21km에 酒泉(주천)이 있다. 주천은 스무 살의 소년장수 藿去病(곽거병)이 BC 121년 여름 흉노족을 쳐부수고 나서 이곳 호수가에서 戰勝(전승) 파티를 했다. 이때 곽거병이 가진 슬이라고는 漢武帝(한무제)로부터 하사받은 단 한 병뿐이었는데, 그것을 물이 솟아오르는 구멍에 부은 다음, 술+물을 섞은 ‘칵테일’한 잔씩을 병사들과 나눠 마셨다고 해서 이후 이곳이 酒泉(주천)이라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주천에서 장액까지는 223km. 장액에서 김일제의 고향인 武威(무위)까지는 212km. 필자 일행은 그 중도의 山丹(산단)에서 기련산맥 기슭 쪽으로 진입해 50여km 정도 길을 헤맨 끝에 김일제와 그의 어머니가 곽거병에게 사로잡히고, 그의 아버지 休屠王(휴저왕)이 피살된 焉支山(언지산)을 찾아갔다.


언지산은 흉노의 24 王將(왕장) 중 1人인 渾邪王(혼야왕)의 근거지였다. 혼야왕과 휴저왕은 漢軍(한군)에게 거듭 패전해 흉노의 大선우인 伊稚斯(이치사)가 그 책임을 묻기 위해 소환명령을 내리자 목이 달아날 것을 겁내, 가만히 漢武帝(한무제)에게 急使(급사)를 날려 항복을 청했다.


한무제는 BC 121년 늦가을, 혼야왕과 휴저왕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해 곽거병을 급파했다. 곽거병의 기마군단이 언지산으로 시시각각 접근해오자, 휴저왕은 최종단계에서 항복을 망설였다. 이에 혼야왕은 휴저왕을 살해하고 그의 무리를 빼앗았다.


언지산에 들이닥친 곽거병의 기마군단은 그때까지도 항복을 거부하는 흉노병 8000 명을 참살하고, 귀순자 4만여 명을 데리고 長安(장안)으로 개선했다. 귀순자 4만 명 중에는 김일제와 그의 어머니와 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필자 일행은 언지산에 이어 김일제의 고향인 감숙성 武威(무위)에서 휴저왕의 居城(거성)인 休屠城(휴저성)과 그 백성들이 유목하던 休屠澤(휴저택) 등지를 둘러보았다. 무위의 중심가에는 무위의 역사인물들의 略歷(약력)을 새긴 步板(보판)이 죽 깔려 있는데, 그 제1번의 인물이 金日&#30974(김일제)이다.


장안에 끌려온 김일제는 처음엔 養馬奴(양마노)로 전락했으나, 곧 말(馬) 마니아인 漢武帝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馬監(마감)으로 출세했고, 副宰相(부재상) 망하라가 한무제를 암살하기 위해 비수를 들고 황제의 침실로 뛰어들려 하던 순간, “망하라 모반!”이라 외치며 몸으로 막아섰다. 이런 활약으로 그는 한무제 임종 때 어린 昭帝(소제)를 보필할 3인의 託孤之臣(탁고지신) 중 1인이 되었고, 그 후 &#31226侯(투후)라는 작위도 받았다.


그러나 투후의 후손들이 훗날 前漢(전한)을 찬탈한 王莽(왕망)의 新나라 창업에 협조했기 때문에 光武帝(광무제)의 後漢(후한)이 섰을 때 그 다수가 피의 숙청을 당했다. 살아남은 김일제의 후손들은 해외로 도주했는데, 그때 그들이 소지했던 왕망시대의 화폐가 한반도 남부, 제주도, 일본 규슈 등지에서 발굴되었다. 김일제 후손들의 망명과 연결시킬 수 있는 증거물이다. 문무대왕의 陵碑文(능비문)에서 신라김씨가 투후의 후손임을 明記(명기)해 놓았음은 뒤의 본문에서 재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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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 쟁탈전의 현장에 찍어놓은


慧超와 高仙芝의 세계사적 足跡










2004년 6월, 필자는 新疆(신강) 위구르自治區의 남부인 타클라마칸 사막의 오아시스路을 12박13일간 답사했다. 淸(청)의 乾隆帝(건륭제) 때 중국에 편입된 신강은 現중국의 영토 중 6분의1에 달하며, 그 남부의 오아시스路는 古代로부터 동서교역의 메인 루트였다. 사하라 사막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타클라마칸 사막을 한 바퀴 돌고 ‘세계의 지붕’ 파미르 高原(고원)에 오른 한국인이라면 누구나 깊은 감명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오아시스路는 韓民族史上(한민족사상) 文&#8231 武 양 분야에서 최초의 世界人으로 손꼽히는 慧超(해초)와 高仙芝(고선지)가 세계사적 족적을 남긴 길이기 때문이다. 그뿐만 아니다.


토번은 670년 7월 청해의 大非川 전투에서 설인귀의 10만 당군을 전멸시킨 후 671년 실크로드의 핵심구간인 오아시스路를 차지하기 위해 쿠차(龜玆)에 설치된 唐의 安西都護府(안서도호부)와 그 예하의 호탄(和田) 등 4鎭을 공격했다. 토번이 당과 실크로드의 利權(이권)을 놓고 피투성이의 전투를 벌이던 시기는 나당 7년 전쟁의 시기와 겹친다. 唐제국은 極東(극동)과 西域(서역)의 2正面에서 전쟁을 감행하는 무리를 범해 결국 신라와 토번에 패전했던 것이다.&nbsp&nbsp


통일신라의 求法僧(구법승) 혜초는 세계 문명교류의 선구자였다. 그에 앞서 海路(해로)로 印度(인도)에 상륙 육로로 돌아온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더욱이 중앙아시아의 서쪽 끝까지 다녀와 그 견문을 여행기에 기록했다. 그의 여행기 &lt&lt往五天竺國傳&#8231 왕오천축국전&gt&gt은 8세기의 인도와 중앙아시아에 관해 가장 정확하게 기술된 名著(명저)로 평가되고 있다.


고구려 유민의 아들인 高仙芝(고선지)는 당의 西域(서역)방면군 총사령관인 安西都護(안서도호)로 출세했다. 쿠차에 소재한 安西都護府에 주둔하면서 당제국의 西域 방면군을 총 지휘했던 그는 파미르 高原을 넘어 중앙아시아 72개국을 복속시켰다.&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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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한 義相스님과


唐나라의 譯經사업을 주도했던 신라 승려 圓測




나당전쟁에서 문무대왕의 적수는 唐高宗 李治(당고종 이치)와 그의 아내인 則天武后(측천무후)였다. 필자는 당제국의 수도이며, 실크로드의 시발역이자 종착역이었던 長安(장안), 지금의 陝西省(섬서성)의 省都(성도) 西安을 여러 차례 답사했다.


나당전쟁 시기에 문무대왕의 스승이었던 義相(의상)은 亂世(난세)의 중생을 구제한 海東華嚴(해동화엄)의 선구자일 뿐만 아니라 7세기 東아시아 최고의 철학자&#8228 교육자&#8228 시인이었다. 통일신라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한 그의 海東華嚴(해동화엄) 사상은 21세기 남북통일을 이룩하고 정보화 사회를 성숙시키는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再인식되고 있다.


1995년 6월, 필자는 당나라 때 불교의 성지였던 西安(서안) 남쪽 終南山(종남산)을 찾아갔다. 답사의 목적은 아름다운 꾸냥 善妙(선묘)와의 국제적인 플라토닉 러브를 통해 영원한 진리탐구자의 참된 모델을 제시한 의상 스님의 행적과 그가 설파한 보편진리의 현대적 의미를 다시 음미하기 위해서였다.


그곳에는 의상 스님이 10년 修道(수도)했던 중국화엄의 본산인 至相寺(지상사)가 있다. 또 종남산 기슭에 위치한 중국의 중점보호문물 제1호 興敎寺(흥교사)에는 玄&#22872法師(현장법사)가 인도에서 가져온 梵語(범어&#8228 산스크리트語)의 불경을 漢文(한문)으로 번역하는 데 있어 제1의 공로자인 신라의 학승 圓測(원측)의 부도탑이 현장法師의 부도탑 바로 옆에 우뚝 서있다. 신라 문무대왕 시대의 승려들은 이렇게 東아시아의 학계를 리드했다.


승려로서 의상의 엄정한 행적을 그린 두루마리그림 華嚴緣起會圈(화엄연기회권)을 그렸던 곳이 일본 京都(교토)의 高山寺(고산사)이다. 일본 국보로 지정된 화염연기회권은 현재 京都(교토)박물관이 소장하고 있다. 그 회권은 모두 6권. 4권은 의상과 선묘의 설화를 그림으로 표현했고, 나머지 2 권은 원효(元曉)와 의상의 행적을 담은 것이다.


고산사에서는 원효와 의상의 인물화를 모셔놓고 明神(명신)으로 받들고 있다. 중국 종남산에서 일본 고산사까지의 답사기, 그리고 의상철학에 관한 불교석학들과 필자의 좌담은 뒤의 본문에 실을 것이다. 의상철학은 21세기 정보화사회 최고의 패러다임이며, 남북통일의 가장 합리적인 解法(해법)으로 재인식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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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공격용 핵무기는 제거하지 못하면서


남한의 방어용 무기를 반대하는 중국의 내정간섭



지금, 대한민국은 타협 불가능한 적과 대치하고 있다. 북한의 독재정권은 시나브로“서울 불바다”를 외치면서 핵실험을 거듭해 왔다. 2016년 7월에는 사정거리 600km 정도의 미사일을 동해 쪽으로 시험 발사하면서 射角(사각)만 조정하면 울산과 부산을 초토화할 수 있다고 위협했다.


이런 상황에서 한국이 동맹국인 미국의 사드(高高度미사일방어체계)라는 방어 무기를 한국에 배치하려고 하자, 중국&#8228 러시아&#8228 북한이 한통속이 되어 맹렬히 반발하고 나섰다. 그러나 사드 배치는 무장 강도의 침입을 방비하기 위해 자기 집에다 이웃집의 방패 하나를 빌려놓는 셈으로, 그것은 명백한 정당방위이다.


제 아무리 국제정치가 국가이익에 좌우된다지만, 북한의 공격용 핵무기를 제거하지 못하는 상황에서 방어용 무기의 配備(배비)를 비난하는 것은 正義(정의)도 아니다. 특히 사드를 둘러싼 북한의 對南 비난은 賊反荷杖(적반하장)의 극치이다. 중국의 외교담당자의 언행도 외교의 범위를 넘어선 것이었다. 왜 그런 과잉반응이 거침없이 나오는 것일까?


한국의 對중국수출액은 전체 수출액의 25%에 달한다. 여기에 우리나라의 對홍콩 수출액까지 합치면 그것은 무려 30%로 오른다. 중국은 바로 이것을 지렛대로 삼아 한국을 마구 옥죄고 있는 것이다. 제아무리 무역흑자가 중요해도 국가안보문제에서는 한 걸음도 물러설 수 없다.


중국의 반응은 그렇다 치고, 국제무역에서 중국의존도를 이렇게 높인 우리 역대 정부의 對中 정책도 분명히 사려가 부족했다. 지금이라도 수출다변화에 총력을 기울여야 한다. 화장품이 덜 팔리고 요우커(중국인 관광객)가 줄어들 것이라는 협박은 G2 답지 못한 언행들이다.


중화인민공화국은 건국된 지 1년도 안 되어 대한민국을 침략했던 나라이다. 중국은 북한의 6.25 남침에 협력해 국공내전(國共內戰)에서 실전경험을 쌓은 조선족 출신 중공군 4만 명을 북한에 투입했다. 이들은 압록강을 도강, 군복만 북한 것으로 바꿔 입고 6.25 남침의 제1선 부대가 되었다. 그렇다면 그들의 상투어인 抗美援朝(항미원조), 즉 “미국에 대항해 조선을 도왔다”는 슬로건은 새빨간 거짓말이다.


중국에는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밝히는 진정한 언론도 없다. 공산당 1당 독재국가인 중국의 모든 신문은 중앙지&#8231 지방지 가릴 것 없이 모두 공산당 기관지다. 중공은 6.25 남침전쟁 기간 중 延(연) 300만의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했다. 그 결과가 인류역사상 가장 거짓말 잘하고, 정적을 고사기관총을 난사해 죽일 만큼 난폭하며, 가장 가난하고 어두운 폭압정권을 오늘에 이르기까지 살아남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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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은 중국에 시장경제를 가르친 ‘교사’다



문제는 1992년 한&#8228 중 국교수립 당시 이런 중국의 역사적 책임에 대한 一言半句(일언반구)의 언급이 없었다는 점이다. 이런 외교적 실패가 부른 중국의 傲慢無禮(오만무례)함을 보고, 필자는 文武大王이 唐제국의 극동방면군사령관에게 보낸 開戰文書(개전문서)인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를 다시 생각했다.


그것은“당신들의 뼈와 거죽은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피와 살은 신라의 것이다”라는 선언이었다. 웅진도독부에 주둔한 당병 1만 명이 4년간 신라가 제공한 옷을 입고 식량을 먹었던 사실을 빗댄 것이었다. 문무대왕은 이렇게 해야 할 말을 했던 군주였다.


대한민국도 한중수교 이후 돈을 번 것은 사실이지만, 중국의 시장경제 전환과 공업생산력 향상에 한국인의 힘을 보탠 것은 엄연한 사실이다. 한국보다 20년 앞서 중국과 수교한 일본은 시장경제의 룰을 무시하던 중국의 모습에 놀라 중국에 진출해 있던 일본기업들을 거의 다 컴백시다. 이런 중국에게 시장경제와 제품 선진화의 노하우를 가르쳐 준 이웃은 누가 뭐래도 한국인들이었다.


문무대왕은 中華(중화) 이데올로기에 물든 중국을 다루는 데 絶頂(절정)의 능력을 발휘했다. 통일을 향한 결단이 우리 민족사의 그 어느 시기보다 필요한 시점에서 지금 우리는 문무대왕의 지혜와 용기를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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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에게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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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好戰(호전) 집단은 앞으로 3단계 전략을 구사하려 할 것이다. 우선, 핵무기를 탑재한 미사일을 미국을 향해 겨냥함으로써 전쟁을 꺼리는 미국 여론을 움직여 한반도에 대한 미국의 개입을 봉쇄하려 할 것이다. 이어, 대한민국에 대해서는 계속 핵 공갈로 국론분열을 조장하면서 종북세력에 의한 내란을 기도할 것이다. 최후의 시나리오는 민족문제를 해결해야 한다는 구실로 남침을 감행하는 것이다.


문무대왕은 對唐전쟁을 앞두고 兵部令(병부령 국방장관)을 지낸 大幢摠管(대당총관: 수도군단사령관) 金眞珠(김진주), 南川州摠管(남천주총관) 金眞欽(김진흠) 등 친당파 장군에 대한 피의 숙청을 감행했다.


신라는 반역자를 끝까지 추적하여 가차없이 처단했다. 백제의 사비성이 함락된 직후, 반역자 黔日(검일)과 毛尺(모척)을 색출해 四肢(사지)를 찢어 강에다 버렸다. 왕조시대의 혹독한 형벌임에 틀림없지만, 이적행위의 재발 방지를 위한 본때였다. 검일은 大耶城(대야성: 지금의 합천)이 백제군에게 함락될 때(642년 8월) 모척과 공모하여 군량창고에 불을 지르는 등의 內應(내응)을 했다.


통일신라의 국가정책이 물론 盡善盡美(진선진미)한 것은 아니었다. 통일 후 수도를 漢江(한강) 이북 쯤으로 北上시켜 대륙의 정세변화에 민감하게 대처하지 못했던 守舊的(수구적) 태도, 眞骨(진골)이 아니면 將軍(장군)이 될 수 없었던 骨品制(골품제)의 온존 등이 신라의 대표적 실책이었다. 북방 영토의 개척에 소극적이었고, 人才 풀을 스스로 좁혔던 것이다.


현재, 한국의 정치는 국가적 결심이 어려운 與小野大(여소야대)의 상황에 처해 있다. 그것은 2016년 4.13 총선을 앞두고 집권당의 實勢(실세)란 사람들이 親朴(친박)&#8231 非朴이니 眞朴(진박)&#8231 脫朴(탈박)이라는 眞骨(진골) 논쟁을 주도해 국민들을 실망시킨 결과였다. 21세기의 남북통일을 지향하고 있는 우리가 문무대왕에게 배워야 할 바 실로 많지만, 신라 후기사회의 암적 요소까지 답습하려는 기도는 용서받을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문무대왕은 강대국의 눈치나 살피고 복종하는‘웰빙국가’의 군주이기를 단호히 거부했다. 최근, 중국은 한국의 사드 도입 문제와 관련, 한국인의 자존심을 긁는 행위를 서슴지 않고 있다. 북한의 핵을 탑재한 미사일은 공격용 무기이고, 그것을 막으려는 사드는 방어용 무기이다. 북한의 핵미사일이 제거되면 사드도 불필요한 것이다.


북핵을 막는 방어무기라면 사드보다 더 강력한 것을 들여 놓는다 하더라도 그것은 주권국가의 당연한 선택이며 自救策(자구책)이다. 사드 도입을 반대하는 중국의 보복으로 인해 설사 우리 상품수출과 관광수입이 줄어들어도 그것은 우리의 안보의 위기보다 더 치명적인 것이 아니다. 중국의 보복은 지레 염려해서 그들의 心氣(심기)까지 살피는 겁쟁이가 되어서는 대한민국의 장래가 없다. 중국의 中華主義(중화주의)를 어떻게 다루어야할지, 우리는 문무대왕에게 배워야 한다.


북핵에 대한 아무런 방비책 제시도 없이 사드를 반대하는 일부 정치인의 선동, 그리고 사드가 필요하지만 우리 지역에 와서는 안 된다는 이기주의의 횡행은 참으로 개탄스러운 일이다. 그것은 앞으로 계속 북한 독재정권의 핵 공갈에 떨고 지내도 괜찮다는 얘기에 다름 아니다.


심지어 과거 정권에서 장관과 청와대 비서관을 지낸 사람들이 중국의 공산당기관지의 論調(논조)에 영합해‘사드 반대’의 인터뷰를 하거나 寄稿(기고)를 했다. 그것이 바로 국가에 대한 반역행위가 될 수도 있다.


우리 민족사의 가장 결정적 순간인 나당전쟁의 승전과 그것에 의해 이룩된 삼국통일에 대한 정확한 이해가 없는 한 우리나라의 안보를 비롯하여 정치&#8228 경제, 사회&#8228 문화의 문제, 그 어느 것 하나도 해결하기 어렵다. 우리가 문무대왕으로부터 배워야 하는 까닭이다.



2016년 8월


저자 鄭 淳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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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과의 역사적 대화 위해


동해의 대왕암에서 몰려오는 물결 앞에 서다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의 수중릉(水中陵)&nbsp


문무왕과 시공(時空)을 뛰어넘는 대화는 어디에 가면 가능할 것인가? 역시 奉吉里(봉길리: 경주시 陽北面) 앞바다에 위치한 그의 수중릉(水中陵)부터 찾아가야 할 것 같다. 일부 연구자들은 그곳을 그의 뼈가 뿌려진 산골처(散骨處)라고 주장하는데, 그래도 좋다. 어떻든 그곳은 우리 민족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大王에게 경의를 표할 수 있는 역사의 현장이다. 고뇌했던 민족사 최고 영웅과 이 땅에 살고 있는 오늘의 인간들 사이에 血脈(혈맥)의 마디마디를 이어주는 민족 정체성(正體性)의 현장이기도 하다.
필자는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陽北面 奉吉里) 해변에서 동해 바다와 마주섰다. 포효하는 파도의 물결이 계속 밀려왔다 포말을 일으키며 하얗게 부숴진다. 해변 모래사장에서 200m 거리의 바다 가운데에 그리 크지 않는 자연 바위가 보이는데, 그곳이 바로 문무왕의 수중릉이다. 1996년의 답사 때만 해도 봉길리 해수욕장에서 뱃삯을 지불하고 모터보트를 타면 주변 해역을 한 바퀴 빙 돈 뒤에 대왕암에 下船(하선)할 수 있었다.


대왕암은 멀리서 보면 바위섬이지만, 막상 그곳에 올라가 보면 바닷물이 드나드는 작은 못의 둘레에 자연 암석이 감싸고 있는 모습이다. 못의 바닥에는 길이 3m 가량의 편평한 돌이 얹혀 있다. 사방이 열십자(十) 형으로 트인 좁은 수로(水路), 그 동쪽 수로를 통해 흘러들어온 동해의 바닷물이 서쪽 수로의 턱을 슬쩍 넘어서 다시 바다로 빠져나간다. 그날, 대왕암 바깥에서는 파도가 제법 거세게 쳤지만, 대왕암 안쪽의 바닷물은 의외로 잔잔했다.


혹시, 못 속의 편평한 바위 밑에 유골함을 안치했던 흔적이라도 남아 있지나 않을까? 필자는 바닷물 속에 얼굴을 파묻고 바위 밑바닥 주변을 샅샅이 살폈지만, 그런 것이 들어갈 만한 人工(인공) 구조물을 발견하지 못했다.


문무왕은 나당전쟁에 승리해 삼국통일을 완수한 우리 민족사의 대영웅이다. 그렇다면 그의 후계자는 왜 대왕의 능을 번듯하게 지어 모시지 않고, 하필이면 동해구(東海口)의 바위 속에다 장사를 지냈던 것일까? 역사의 기록(三國史記)에 따르면 수중릉에 문무왕의 유골을 모신 것은 그의 유언에 따른 것이었다. 문무왕의 유언은 참으로 산뜻하다.&nbsp&nbsp


&lt세월이 가면 산과 계곡도 변하고, 세대 또한 흐름에 따라 변하는 것이니, 오왕(吳王: 孫權&#8231 손권)의 北山 무덤에서 어찌 향로의 광채를 볼 수 있을 것이며, 위주(魏主: 曹操&#8231 조조)의 西陵(서릉)은 동작( 銅雀)이란 이름만 들릴 뿐이로다. 옛날에 만기(萬機)를 총람하던 영웅도 마지막에는 한 무더기의 흙이 되어, 나무꾼과 목동들이 그 위에서 노래하고, 여우와 토끼는 그 옆에 굴을 팔 것이다. 그러므로 헛되이 재물을 낭비하는 것은 사서(史書)의 비방거리가 될 것이요, 헛되이 사람을 수고롭게 하더라도 혼백을 구제할 수 없을 것이다.&gt&nbsp


이렇게 문무왕은 합리적이고 겸허했다. 그는 매머드급(級) 무덤을 짓기 위해 백성들을 노역으로 모는 것이 후세의 비판거리이며, 무덤 주인공인 자신을 위해서도 부질없는 일임을 일찌감치 깨달았던 것이다. 이런 實用主義(실용주의) 노선이 아니었다면, 삼국통일의 완수는 불가능했고, 지금 한민족(韓民族)은 중국의 50여개 소수민족 중 하나로 전락해 있을지도 모른다.&nbsp&nbsp


한국사 최대의 역사발전&nbsp


삼국통일은 한국사 최대의 역사 발전이었다. 우선, 사람의 해골로 산야가 뒤덮혔던 300년의 난세를 치세(治世)로 바꿔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켰다. 삼국통일로 坐食者(좌식자), 즉 놀고 먹던 사람이 최소한 30% 이상 격감했기 때문이다.


사서(史書)에 다르면 고구려에는 좌식자의 수가 인구의 3분의 1을 차지했다. 좌식자는 거의 전문전사(專門戰士)들이었다. 고구려의 전성기 영토는 백제+ 신라보다 5배 넓었지만, 당시의 첨단산업인 쌀 생산량은 한반도 남부지역의 10분의 1에도 미치지 못했을 것이다. 이것은 후세(조선왕조 영조 시기)의 지리지인《擇里志》(택리지) 등을 참고한 필자의 추정이다, 다음은 이어지는 문무왕의 유언으로 간소한 장례를 거듭 당부했다.&nbsp&nbsp


&lt 이러한 일을 조용히 생각하면 마음 아프기 그지없으니, 이는 내가 즐기는 바 아니다. 숨을 거두면 바깥 뜰 창고 앞(庫門外庭)에서 나의 시신을 불교의 법식에 따라 화장하라. 상복의 경중(輕重)은 본래의 규정이 있으니 그대로 하되, 장례의 절차는 철저히 검소하게 해야 할 것이다.&gt


문무왕은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라고 지시한 우리 역사상 최초의 君主(군주)이다. 그의 유언에 따라 그의 시신은 화장되어 그 유골이 동해바다의 자연바위 안에 안치되었던 것이다.


임종의 자리에서도 당-왜 연합을 경계한 문무대왕



&lt&lt三國遺事&#8231 삼국유사&gt&gt에 인용된 감은사사중기(感恩寺寺中記)에 의하면 문무왕은 왜병의 침입을 막기 위해 대왕암 건너편 해안에 감은사(感恩寺)를 창건했으나, 완공을 보지 못하고 별세했고, 죽어서는 동해의 해룡(海龍)이 되었다고 한다. 세계제국 당과의 7년전쟁에서 승리한 문무왕―그런 그가 사후(死後)에 호국룡(護國龍)이 되어 왜적을 막겠다고 서원(誓願)했다. 그럴 만큼 신라에게 왜국은 겁나는 존재였을까?


이 점에 대해선 뒤에서 상술(詳述)할 것이지만, 당시의 수퍼파워 唐과 사생결단의 전쟁을 벌였고, 문무왕의 임종 시점(681년)까지 나&#8231 당 간의 긴장관계가 해소되지 않았던 신라의 입장에서는 배후의 일본이 엄청 겁나는 존재였다. 비록 당군이 압록강 以北의 요동(676년)→무순 지역으로 철수하기는 했지만, 당시 급변하던 西域(서역)의 정세에 따라서는 언제든 한반도에 대한 再침략의 가능성이 있었다.


전쟁 재개의 결정권은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신라가 아니라 아직도 東아시아 최강국인 당이 보유한 상황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만약 당과 일본이 제휴한다면 신라에는 치명적일 수밖에 없었다. 병력상의 절대 우위에다 공성전(攻城戰)에 능숙한 당군, 기마전에 숙달된 말갈군&#8231 거란군, 그리고 배후에서 침략군의 병참 지원이 가능한 일본군이 연합한다면 신라는 단 몇 달도 견뎌낼 수 없었을 터였다.



나당전쟁 전후(前後)의 신라-왜국 관계를 추적하면 문무대왕은 당-왜 동맹을 깨기 위해 혼신의 외교력을 기울였다. 겉으로는 왜국에 친선의 메시지를 계속 던지면서도, 속으로는 당-왜 연합의 침략에 대비하는 국가전략―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에 깔고 문무대왕의 수중릉을 마주 대하면 그것은 사무치리 만큼 장엄하다. 그는 피맺히게 고뇌했던 인간이었다.


한국역사상 그처럼 파란만장한 亂世(난세)를 극복한 인물은 아무도 없다. 그의 유언 첫머리는 다음과 같이 시작된다.&nbsp&nbsp


&lt과인은 어지러운 때에 태어난 운명이어서 자주 전쟁과 마주했다. 서쪽을 치고, 북쪽을 정벌하여 강토를 평정하였으며, 반란자를 토벌하고, 화해를 원하는 자와 손을 잡아, 원근(遠近)을 안정시켰다. 위로는 선조의 유훈(遺訓)을 받들고, 아래로는 부자(父子)의 원수를 갚았으며, 전쟁 중에 죽은 자와 산 자에게 공평하게 상을 베풀었고, 안팎으로 고르게 관작을 주었다. &gt


676년 11월, 문무왕은 당군을 한반도에서 완전히 몰아내고, 민족사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이후 5년간 그는 당의 재침에 대비하는 한편으로 민생의 안정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이어지는 문무왕의 유언이다.&nbsp


&lt 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어서, 백성들로 하여금 천수(天壽)를 다하도록 하였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백성들은 제 집을 편안히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없어졌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 가히 선조에게 부끄러울 것이 없었고 백성들에게도 짐진 것이 없었다고 할 것이다.&gt&nbsp


문무왕은 재위 21년 만인 681년 7월1일, 56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훨씬 후세인 조선왕조 임금의 평균 수명이 44세였던 만큼 문무왕이 단명(短命)했다고 할 수는 없지만, 역시 삼국통일을 완수하는 데 一身(일신)의 에너지를 남김없이 소진한 탓이라고 해도 좋다.&nbsp&nbsp


&lt 내가 풍상을 겪어 드디어 병이 생겼고, 정사(政事)에 힘이 들어 더욱 병이 중하게 되었다. 운명이 다하면 이름만 남는 것은 고금(古今)에 동일하니, 홀연 죽음의 어두운 길로 되돌아감에 무슨 여한이 있으랴! 태자는 일찍부터 덕을 쌓았고, 오랫동안 동궁(東宮)의 자리에 있었으니, 위로는 여러 재상으로부터 아래로는 낮은 관리에 이르기까지, 죽은 자를 보내는 의리를 잊지 말고, 산 자를 섬기는 예를 잊지 말라. 종묘의 주인 자리는 잠시라도 비워서는 안 될 것이니, 태자는 내 관 앞에서 왕위를 계승하라!&gt&nbsp


그의 죽음 후에 정해진 文武大王(문무왕)이라는 시호(諡號)는 그냥 부여된 것이 아니었다. 그는 마상(馬上)에서 백제와 고구려를 멸했고, 세계제국 당과의 7년 전쟁에서 이겼기 때문에 ‘武 ’라는 글자를, 신라국가의 각종 제도 개혁 및 민생 개선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文’이란 字를 받았던 것이다. 그의 유언은 다음 구절로 끝을 맺는다.&nbsp&nbsp


&lt 변경의 성과 요새 및 州(주)&#8231 郡(군)의 과세 중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지 않는 것은 잘 살펴서 모두 폐지할 것이오, 법령과 격식(格式)에 불편한 것이 있으면 즉시 바꾸어서 알릴 것이며, 원근에 선포하여 이 뜻을 알게 하라. 태자는 왕이 되어 이를 시행하라! &gt&nbsp


봉길리 바로 북쪽 감포(甘浦) 해안 언덕 위에 세워져 있는 利見臺(이견대)로 올라갔다. 이견대에서 동해 바람을 맞받으면 오장육부가 시원해진다. 이곳은 문무왕의 화신인 해룡을 앞바다에서 보았다는 설화가 전해지는 곳이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682년 5월, 신문왕(神文王)은 이곳에서 해룡으로 화한 선친(先親) 문무대왕으로부터 만파식적(萬波息笛)을 만들 대나무를 얻었다. 만파식적이라 불리는 피리는, 그것을 불기만 하면 천하가 화평해진다 하여, 신라 국보로 삼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문무대왕은 죽어서도 편히 눈을 감지 못하고, 나라를 지키는 해룡이 되려고 간절히 서원(誓願)했던 인물이다.&nbsp&nbsp


감은사의 쌍탑은 오후 3시쯤에 더욱 빛난다&nbsp&nbsp


이견대를 출발해 서쪽 1.5km 거리의 감은사지(感恩寺址)에 일부러 오후 3시에 도착했다. 이 시각이면 감은사지의 쌍탑이 햇볕을 정면으로 받아 그 위용이 더욱 돋보이기 때문이다. 역시 감은사지 3층 석탑은 삼국통일을 이룩해 낸 신라인의 힘을 발산하고 있었다. 감은사 터의 동&#8231 서 3층 석탑은 우리 국보 제112호이다. 통일신라시대의 걸작으로서 장중하면서도 상승감을 느끼게 한다. 감은사는 신문왕(神文王)이 부왕(父王)인 문무대왕의 뜻을 이어 완공했던 절이다. 처음, 이곳에 절을 세우려 했던 창건주는 문무대왕이었다. 불력(佛力)으로 나라를 지키겠다는 뜻에서 절 이름을 진국사(鎭國寺)라고 정했다. 그러나 대왕은 절이 완공되기 전에 죽었다.



생전에 문무대왕은 지의법사(智義法師)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해룡이 되겠다”고 서원(誓願)했다. 그래서 금당(金堂) 아래에 용혈(龍穴)을 파서 해룡으로 환생한 문무왕이 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세심한 구조를 했다. 1996년, 필자는 보수공사 중인 감은사 금당(金堂) 바닥 아래에 높이 1 m의 석조(石造) 통로가 뚜렷하게 남아 있는 것을 확인했다. 이는 감은사의 山門 바로 밑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고 하는 《삼국유사》의 기록과 맞춰보면 그 의미가 심장하다. 과연, 석조 통로로 해룡이 드나들었지는 신심(信心) 차원의 문제인 만큼 필자로서는 거론할 영역이 아니다. 감은사는 황룡사&#8231 사천왕사와 함께 호국사찰로 명맥을 이어왔으나, 임진왜란을 전후(前後)한 시기에 폐사(廢寺)된 것으로 추정되고 있다.


두 탑은 같은 구조와 규모이다. 제일 윗부분인 찰주(擦柱)의 높이까지 합하면, 국내에 현존하는 석탑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신라 석탑 중에서 비교적 초기 형태지만, 조형미는 최고 수준이다. 높이는 각각 13.4m이며, 화강석으로 되어 있다. 상&#8231 하 2층으로 형성된 기단(基壇) 위에 세워진 3층 석탑이다. 1959년 서쪽 3층 석탑이 해체 복원되면서 왕이 타는 수레 모습의 보련형(寶輦形) 사리함이 발견되었다. 감은사는 일당쌍탑(一堂雙塔)의 가람으로서 남북 회랑(回廊)의 길이보다 동서 회랑의 길이가 길게 구조된 점과 동서의 회랑을 연결하는 익랑(翼廊: 문의 좌우편에 잇대 지은 행랑)을 둔 점이 특이하다. 동&#8231 서탑의 중앙부 후면에는 정면 5칸, 측면 3칸의 금당(金堂) 터가 있다.&nbsp&nbsp





김유신이 기획했던 政略결혼과 김법민의 탄생&nbsp


그렇다면 민족사상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룬 문무대왕 金法敏(김법민)은 누구인가? 그의 아버지는, 荒淫無道(황음무도)하다고 해서 578년 왕위에서 쫓겨난 眞智王(진지왕)의 손자 金春秋(김춘추)다. 어머니는 532년 신라에 의해 멸망당한 금관가야 최후의 왕 仇衡(구형)의 손자인 金舒玄(김서현)의 막내딸이자 金庾信(김유신)의 누이인 文姬(문희)이다. 다음은 &lt&lt삼국사기&gt&gt 문무왕 즉위연도(661)에 실린 그의 출생과 관련한 유명한 스토리이다.



&lt언니(&#23453姬&#8228 보희)의 꿈에 西元山(서원산) 정상에 앉아 오줌을 누니 그 오줌이 국내에 가득 찼었다. 깨고 나서 아우(文姬&#8228 문희)에게 꿈 얘기를 하니 아우는 농담으로 말하기를, “내가 언니의 꿈을 사고 싶다”고 하고, 그 값으로 비단 치마를 주었다.


며칠이 지난 뒤 庾信(유신)은 春秋公(춘추공)과 함께 공을 차다가 춘추의 옷고름을 밟아 떨어뜨렸다. 유신이 말하기를, “내 집이 다행히 근처에 있으니 가서 옷고름을 달자” 하고 함께 집으로 와서 술상을 베풀고, 조용히 보희를 불러 바늘과 실을 가지고 와 꿰매게 하였다.
그의 맏누이는 일이 있어 나오지 못하고, 그 아우(문희)가 나와 옷고름을 다는데, 그녀의 수수한 단장과 가벼운 옷맵시는 사람을 환히 비추었다. 춘추가 기뻐하면서 이내 청혼하여 대례를 갖추었는데, 곧 태기가 있어 사내아이를 낳았다. 이가 바로 법민이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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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lt&lt삼국사기&gt&gt의 인용문에서 김춘추와 김문희의 혼외정사 이후 신분상의 차이에도 불구하고 결혼에 이르는 과정은 생략되어 있다. 이에 대한 의문 해소는 신라 당시의 기록인 金大問의 &lt&lt花郞世紀&#8231 화랑세기&gt&gt에 의존할 수밖에 없다. 김춘추의 조부는 荒淫無道(황음무도)하다고 하여 재위 3년만에 폐위된 신라 제25대 임금인 眞智王(진지왕)이다. 김춘추의 生父(생부)는 진지왕의 장남으로 早死(조사)한 이찬(관등 제2위) 金龍樹(김용수)이고, 養父(양부)는 용수의 동생인 龍春(용춘)이다.


김문희는 신라에게 패망당한 금관가야 최후의 임금인 仇衡(구형)의 증손녀이다. 문희의 조부는 554년 관산성(충북 옥천군) 전투에서 백제 聖王(성왕)을 전사시킨 新州(신주)의 軍主(군주)였던 金武力(김무력)이다. 김무력의 아들이 蘇判(소판: 관등 제3위) 김서현이다. 김서현은 신라 왕족인 萬明(만명)과 눈이 맞아 변경(지금의 충북 진천군)으로 사랑의 도피행을 감행했었다. 만명은 肅訖宗(숙흘종: 법흥왕의 동생인 立宗 갈문왕)의 딸이다. 葛文王(갈문왕)은 왕의 동생 등에게 붙여준 존호였다.


아무튼 김법민의 아버지 김춘추는 폐위당한 임금의 손자, 어머니 김문희는 신라에게 패망당한 금관가야 구형王의 후예였다. 김법민의 父系(부계)나 母系(모계)가 그러했던 만큼 김춘추-김법민 父子의 등극은 꿈도 꿀 수 없는 형편이었다.


필사본 「花郞世紀(화랑세기)」에 따르면 김유신은 15世 風月主(풍월주), 김춘추는 18世 풍월주다. 풍월주는 요즘 육군사관학교의 「대표화랑」쯤에 해당하지만, 그들에 대한 신라사회의 기대와 聲望(성망)은 대단했다.


김춘추-김문희 정략결혼의 기획자는 망국의 후예로서 신분상승의 비원(悲願)을 품은 가야김씨 庾信(유신)이었다. 그는 8세 연하(年下)의 신라김씨 춘추(春秋)를 유인해 그의 여동생 문희와 婚外情事(혼외정사)의 분위기를 만들었음은 앞에서 썼다. 유신의 첫째 여동생 寶姬(보희)는 달거리 중이어서, 바느질을 사양했다. 이때 둘째 여동생 文姬가 앞으로 나아가 춘추를 모시고 바느질을 하게 되었다. 유신은 일부러 그 자리를 피했다. 그러고 나서 몇 달 지나 문희의 배가 불러왔다.


&lt&lt화랑세기&gt&gt에 따르면 당시 춘추에게는 이미 寶羅(보라)라는 미색(美色)의 정실부인이 있었다. 보라는 「프리섹스의 化身」이었던 美室(미실)의 손녀였다. 美室은 일찍이 제5世 풍월주 金斯多含(김사다함)의 연인이었고, 그가 전사한 후에는 진흥왕· 진지왕· 진평왕과 雲雨(운우)의 情을 나누면서, 화랑 조직을 움직인 배후의 실력자였다.


더욱이 김춘추와 보라궁주 사이에는 이미 古陀炤(고타소)라는 딸이 있었다. 춘추는 보라궁주를 사랑했기 때문에 감히 文姬를 받아들이지 못하고 숨기고 있었다. 김유신은 결혼동맹을 성사시키기 위한 최후의 이벤트를 감행했다. 김유신은 그의 집 뜰에 땔감을 잔득 쌓아 놓고 “처녀가 애를 뱄다”고 외고 펴면서 짐짓 文姬를 불사르려고 했다. 이때 김춘추는 선덕공주(善德公主)를 따라 남산에서 노닐고 있었다. 선덕공주가 연기 나는 곳을 보고 그 까닭을 물으니 좌우 신하들이 자초지종을 고해 바쳤다. 선덕공주가 김춘추에게 말했다.


『당신이 상관된 일인데, 어찌 가서 구하지 않소!』


김춘추는 곧장 南山에서 내려와 문희를 구하고, 혼례 올릴 것을 사당에 고했다. 그 얼마 뒤 보라宮主는 아이를 낳다가 죽고, 문희는 뒤를 이어서 정실부인이 되었다. 이처럼 김법민은 철저한 정략결혼의 산물이었다.


&lt&lt삼국사기&gt&gt에 따르면 문무대왕의 비는 慈儀王后(자의왕후)인데, 파친찬 金善品(김선품)의 장녀이다. 필사본 &lt&lt화랑세기&gt&gt에 따르면 선품은 신라 화랑의 대표인 풍월주(21世) 출신이다. 필사본 &lt&lt화랑세기&gt&gt는 그에 관해 다음과 같이 평했다.


&lt용모가 매우 잘 생겼고, 언행이 지극히 아름다웠으며, 문장을 좋아하고, 仙道(선도)와 佛道(불도)에 통달하였으니, 진실로 上等(상등) 골품의 인물이었다.&gt


그는 선덕여왕 10년(641)에 사신의 명을 받들어 당나라에 갔다가 병을 얻어 돌아와 36세의 나이로 早死(조사)했다. 태종무열왕이 마음 아파하고 아찬(관등 제6위)의 벼슬을 내려 주었다. 그의 딸 자의가 문무대왕의 왕후가 되자 파진찬(관등 제4위)으로 추증되었다. 선품공의 차녀는 體元(체원: 20世 풍월주 역임)에게 시집가서 아들 吳起(28世 풍월주)를 낳았고, 그의 3녀 夜明(야명)문무대왕을 섬겨 宮主(궁주: 왕의 소실)가 되었다.&nbsp&nbsp


金法敏(김법민)은 구중궁궐(九重宮闕)에서 자란 인물이 아니었다. 그의 나이 27세에 아버지 김춘추(태종무열왕)의 즉위로 인해 갑자기 왕자가 되었기 때문이다. 궁중에서 자란 태자나 왕자는 미식(美食)과 미색(美色)으로 흐믈흐믈해지게 마련이다. 운동 부족에 의해 야성(野性)을 지니기도 어렵다. 세계제국 唐나라와 싸워야 했던 결단과 투쟁의 시기에 野性(야성)을 지닌 문무대왕이 재위(在位)했다는 것이야말로 신라의 축복이며, 우리 민족 형성의 결정적 플러스 요인으로 작용했다.



&lt&lt삼국사기&gt&gt에 따르면 김법민은 본디 영특하고 총명하여 지략이 많았다. 그는 23세의 약관에 역사의 전면(前面)에 등장한다. &lt&lt삼국사기&gt&gt 진덕여왕 4년(650) 6월 조에는 『왕은 비단에 五言詩(오언시)인 太平頌(태평송)을 써서, 이를 春秋(춘추)의 아들 法敏(법민)으로 하여금 唐 황제에게 바치도록 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태평송은 겉보기에 아부의 극치이다.&nbsp


&lt위대한 大唐 王業을 열었으니/ 드높은 황제의 앞길 번창하여라/ 전쟁을 끝내 천하를 평정하고/……/ 빛나고 밝은 조화 사계절과 어울리고/ 해와 달과 五星이 만방에 도는구나/……/ 三皇과 五帝의 덕이 하나가 되어 大唐을 밝게 비추리로다.&gt



650년이라면 唐고종 즉위 다음 해인 永徽(영휘) 원년이다. 그렇다면 태평송에 대한 唐고종의 반응은 어떠했을까. &lt&lt삼국사기&gt&gt는 『高宗이 이 글을 아름답게 여기고, 법민에게 大府卿(대부경)을 제수하여 돌려 보냈다』고 기록하고 있다.






























3면&nbsp포위 공격받은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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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여왕이 당의 고종에게 바친&nbsp태평송을 음미하면 신라의 고뇌를 느낄 수 있다. 신라의 저자세 외교(外交)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왜국이란 3面의 적에 대처해야 했다. 이런 국가존망의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된 원인에 대해 약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광개토왕 이래 신라는 고구려를 섬겨 백제, 가야, 왜국의 3面 포위공격에서 살아남았다. 427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압록강 北岸의 국내성에서 대동강변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놓고 남진정책을 감행하자, 신라는 백제와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어 고구려의 침략에 맞섰다.


그러나 백제는 475년 고구려군의 침략을 받아 수도 漢城(한성)을 빼앗기고, 개로왕은 사로잡혀가 지금의 워커힐 뒷산(아차산)에서 참수(斬首)되었다. 신라는 이때 원병 1만 명을 파견했지만, 漢城(한성: 풍납토성+몽촌토성)이 이미 攻破(공파)당한 후였다. 이때 개로왕의 동생 文周(문주)는 지금의 공주로 남하해 웅진백제 시대를 열었다. 이후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더욱 굳어진다.


드디어 551년 고구려에서 내분이 일어난 기회를 이용해 백제-신라 연합군은 고구려군을 한강유역에서 몰아냈다. 백제는 자신의 옛 수도권인 한강 하류지역의 6郡(군)을 탈환했고, 신라는 죽령과 조령을 넘어 주로 산악지대인 한강 상류(남한강) 지역의 10郡을 차지했다.


그러나 고대국가의 속성상 강 하나의 유역을 나눠 가지는 동맹체제가 지속될 리 만무했다. 553년 7월, 신라는 기습공격을 걸어 백제가 회복한 한강 하류지역까지 차지하고, 新州(신주)를 설치했다. 신주의 軍主에는 김유신의 조부인 金武力이 임명되었다.


백제는 신라의 배신에 보복해야 했다. 백제 聖王(성왕)은 3만 명의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결성해 신라 영토의 허리를 누르기 위해 管山城(관산성: 지금의 충북 옥천)에 진주시켰다. 554년 7월의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비롯한 3만 병이 전멸하고, 오직 왕자 餘昌(여창: 후일의 위덕왕)만이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신라군의 포위망에서 빠져나와 수도 사비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562년 1월, 신라는 가야연맹제국의 마지막 맹주 대가야까지 먹었다. 이제 신라는 한반도에서 가장 기름진 낙동강· 한강 유역을 차지해 농업생산력이 급증하고, 당시 東아시아 세계의 중심이었던 唐과 직통할 수 있는 南陽灣(남양만)의 黨項城(당항성: 경기도 화성시)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신라국가에게는 미증유의 위기를 불러왔다. 신라는 백제· 고구려· 왜국에게 공동의 적이 되었다. 어떤 국가도 3面 공격에는 견딜 수 없다. 640년, 백제 무왕에 이어 의자왕이 즉위했다.


642년 7월, 의자왕은 신라 국경지역의 40여 성을 점령했다. 8월에는 고구려와 백제 연합군이 신라를 침공해 서해안의 당항성을 함락 직전까지 몰고 갔다. 특히 백제군 1만여 명은 신라 수도권의 요새 大耶城(대야성: 경남 합천)을 함락시켰다. 이때 대야성 城主이며 김춘추의 사위인 品釋(품석)과 고타소(김춘추의 딸) 부부가 자결했다.


642년 대외정세도 급박하게 돌아갔다. 642년 10월, 고구려의 동부대인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과 대신 100여명을 살해하고 보장왕을 즉위시켰다. 그 자신은 절대권력자인 대막리지가 되었다. 이보다 1개월 전인 9월, 당은 변경을 침입한 西돌궐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同盟을 찾아나선 金春秋&#8212 648년 羅·唐 비밀협약&nbsp


김춘추는 신라에 대한 3면 포위를 풀기 위해 자신의 신명을 걸었다. 642년 11월, 김춘추는 고구려로 들어가 對백제 군사동맹을 제의했다. 그러나 쿠데타로 막 집권한 淵蓋蘇文(연개소문)은 신라가 점령한 竹嶺(죽령) 이북의 땅을 반환할 것을 逆제의함으로써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때 김춘추는 고구려에 억류되어 목숨까지 위험한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이어 647년, 김춘추는 宿敵(숙적) 왜국으로 건너가 對백제 견제외교를 전개했다. &lt&lt日本書紀&#8231 일본서기&gt&gt에는 이때 김춘추의 모습에 대해 『용모가 출중하고 담소를 잘했다(美姿顔善談笑)』라고 기록되어 있다. 회담의 결과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왜국은 그들 선조가 일본열도로 건너가기 전에 살았던 가야諸國(제국)을 병합했던 신라에 대해 우호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라는 동맹국이 필요했다. 648년, 김춘추는 唐에 건너가 唐태종을 만났다. 이때 唐태종은 김춘추에게 『내가 두 나라(고구려·백제)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는 모두 신라에 주어 길이 편안토록 하려 한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이른바 「648년 밀약」이다. 이후 東아시아 세계는 고구려-백제-왜국의 南北동맹과 신라-당의 東西동맹으로 니눠져 대립했다. 결과론이지만, 남북동맹은 동서동맹에 비해 느슨했다.


654년, 진덕여왕이 병사하고 후사가 없자 和白(화백) 회의는 처음엔 上大等(상대등: 귀족회의 의장) 金閼川(김알천)을 밀었지만, 백제·고구려의 공세를 자신의 실력으로 막아 온 김유신의 위엄에 눌려, 김춘추를 만장일치로 후계왕으로 추대했다. 김춘추-김유신 동맹의 승리였다.


김춘추의 등극 후 장남 金法敏(김법민)은 곧 태자가 되었고, 병부령(지금의 국방부 장관)을 겸임했다. 660년 7월, 당의 신구도행군총관 蘇定方(소정방)이 백제를 치기 위해 13만 대군을 이끌고, 남양만으로 들어오자 태자 김법민은 전함 100여 척을 이끌고 덕적도에서 당군을 접응(接應)했다. 7월13일, 羅唐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자 태자 김법민은 의자왕의 왕자 扶餘隆(부여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어 말했다.


『예전에 네 아비가 내 누나(고타소)를 죽여 옥중에 파묻어, 나는 이 일로 20년 동안 가슴이 아팠는데, 오늘은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구나!』


김법민으로서는 백제 왕가에 대한 해묵은 私怨(사원)을 통쾌하게 풀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승자의 태도는 결코 전략적이지는 않았다. 7월18일, 熊津城(웅진성: 지금의 공주)으로 도주했다가 사비성으로 되돌아와 항복한 의자왕도 치욕적인 모욕을 당했다.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의 전승축하연에 불려나가 勝將(승장)들의 술잔을 채워서 올려야 했다. 승자의 오만이 저지른 두 사건은 백제부흥군 봉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nbsp&nbsp


천하대란의 馬上에서 즉위한 문무왕



661년 6월, 金馬郡(금마군 지금의 익산)에서 백제부흥군을 진압하던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돌연 사망했다. &lt&lt삼국사기&gt&gt 태종무열왕 8년(661) 조에 따르면 “6월에 大官寺(대관사)의 우물물이 피가 되고,, 金馬郡(금마군)의 땅에서 피가 흘러 너비가 5보나 되었다. 왕이 돌아가시니…” 라고 되어 있다.


“우물물이 피가 되고 땅에서 피가 흘러…”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에 따라 견해가 분분하다. 혹자는 “태종무열왕이 백제무흥군과 싸우다 전사한 사실을 표현한 것”이라 하지만, 필자는 위인의 죽음을 예고하는 하나의 레토릭(修辭&#8231 수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아무튼 태종무열왕이 재위 8년 만에 죽고, 태자 김법민이 신라 30대 국왕으로 승계했지만, 문무대왕 김법민이 당면한 대내외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문무왕 원년(661) 6월, 당고종의 곁에서 宿衛(숙위)를 하던 문무대왕의 동생 金仁問(김인문)이 귀국해 대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


“당 황제가 이미 소정방을 보내어 35道의 수&#8228 육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고, 드디어 (문무)왕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응원하라고 하니 비록 喪中(상중)이라 할지라도 황제의 勅命(칙명)을 어기기는 어렵습니다.”&nbsp


문무대왕은 그해(661) 가을 7월, 김유신을 대장군, 仁問 眞珠(진주) 欽突(흠돌)을 大幢將軍(대당장군)으로 삼고, 품일 충상 의복을 상주총관, 진흠 중신 자간을 하주총관으로 삼는(…… ) 등 북벌군을 일으켰다. 신라는 기로에 처하게 되었다. 내친 김에 신라까지 먹으려는 唐의 속셈이 이미 드러났고, 백제부흥군의 저항이 치열했으며, 고구려와 왜국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662년 9월, 왜국에 체류하던 의자왕의 아들 扶餘豊(부여풍)이 백제부흥군의 지도자 福信(복신)의 요청에 의해 귀국하여 백제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왜왕 덴지(天智)는 장군 사이노 무라지(狹井連)와 에치노 다쿠쓰(朴市田內津)에게 병력 5000 명과 선박 170여 척을 주어 부여풍을 호위하도록 했다. 화살 10만 개 등 전쟁물자도 지원했다.


부여풍은 周留城(주류성: 충남 홍성군 대흥면 鶴城&#8231 학성)을 백제부흥군의 지휘본부로 삼고, 福信(복심)· 道琛(도침)과 왜장들을 이끌고 항전태세를 갖추었다. 백제부흥군은 한때 200 성을 탈환할 만큼 맹위를 떨쳤다. 웅진도독부가 공주-부여 일원만 겨우 장악하고 나머지 백제 고토가 모두 백제부흥군의 수중에 떨어졌던 것이다.


663년 왜군은2만7천은 3회에 걸쳐 규슈를 거쳐 한반도에 상륙했다. 이때 문무대왕은 김유신 등 28명의 장수를 거느리고 豆陵尹城(두릉윤성 청양군 定山面)과 백제부흥군의 지휘본부인 주류성을 攻破(공파)했다. 나당 연합군은 수륙으로 병진해 白村江(백촌강)에서 백제부흥군-왜 연합군&#51019 제압했다. 백촌강 전투에 대해 중국사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 군은 왜와 4회 싸워 모두 이겼다. 전투에서 왜의 전선 400척을 불태웠다. 연기는 하늘을 덮고, 바닷물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663년 9월의 白村江 전투로 백제부흥군이 패망하자, 당고종은 백제의 옛 영토를 지배하는 식민기관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에게 당의 괴뢰인 웅진도독 부여융과의 會盟(회맹)을 강요했다. 문무왕은 아직 對고구려전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던 만큼 당 측의 무리한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665년 8월, 문무왕은 웅진도독 부여융과 함께 금강&nbsp부근 就利山(취리산)에 제단을 쌓고, 당의 장수 劉仁軌(유인궤)가 작성한 서명문에 따라 양측의 화해를 서약했다.



연개소문 세 아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멸망한 고구려&nbsp


666년 5월,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병사하고, 그의 맏아들 淵男生(연남생)이 막리지가 되어 아버지의 독재 권력을 승계했다. 그러나 남생은 두 아우인 男建(남건)&#8231 男産(남산)과 권력다툼 끝에 패해 당나라로 도망쳤다. 이 해 겨울, 당고종은 李勣(이적)과 薛仁貴(설인귀) 등을 보내 고구려 치게 했다. 고구려는 회복불능의 내분에 빠졌다. 문무왕 6년(666) 12월, 연개소문의 동생 淵淨土(연정토)가 심복부하 24 명, 12개 읍성의 소속민 등 3543 명을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했다.


667년 겨울, 이적의 부대가 먼저 新城(신성)을 함락시키자, 압록강 북쪽의 고구려의 성 16곳도 잇달아 함락되었다. 이때 당에 망명했던 연남생이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당군에 붙어, 오히려 조국을 쳐부수는 데 앞장섰다. 668년 봄, 唐將 이적의 부대가 扶餘城(부여성)을 함락시킨 뒤, 그 근처 40여 성으로부터 항복받고, 남건이 보낸 군사 5만 중 3만을 죽이고 대행성을 함락시켰다. 압록강 이북 지역의 戰力이 사실상 소멸되었다.


당장 이적은 다른 방면으로 고구려에 침입한 당군까지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鴨綠柵(압록책: 의주에 설치했던 방어용 울타리)에서 고구려군을 쳐부수고, 잇따라 辱夷城(욕이성 청천강 북안)도 함락시켰다. 668년 6월27일, 문무대왕은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북상했다. 이때 고령의 김유신은 풍병을 앓아 출전하지 않고, 수도 서라벌을 지켰다. 당군의 南下와 신라군의 北上에 의해 그해 9월21일 나-당 양군은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포위했다.


나-당연합군이 평양을 포위한 지 한 달 남짓해서 보장왕은 男産(남산: 연개소문의 제3자)에게 수령 98 명과 함께 성 바깥으로 나가서, 이적에게 항복하게 했다. 그러나, 막리지 남건만은 항복하지 않고, 항쟁을 계속했지만, 번번이 패배했다.


이때, 남건으로부터 군사에 관한 일을 위임받은 信誠(신성)이라는 승려가 몰래 적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주고, 급히 적군을 맞아들이자, 남건은 칼로 자결하려다 실패하고 당군에게 사로잡혔다. 668년 겨울, 당의 장수 이적은 항복한 보장왕을 비롯해서 남건&#8231 남산, 그리고 신료와 백성 등 20만 명을 데리고 당나라로 개선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28왕 700여년 만에 멸망했다. 당고종은 보장왕을 비롯해 고구려 유민들을 모두 사면했지만, 남건만은 워낙 미움을 샀기 때문에 黔州(검주: 사천성)라는 곳으로 유배당했다.


그리고 평양에는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어 안동도호 설인귀가 고구려 고토를 다스리게 하고, 그 밑에 새로이 편성된 9도독부, 42州, 100 縣(현)에서는 옛 고구려의 장수로서 당군에 협조한 적이 있는 자들이 중국인과 함께 백성을 다스리게 되었다.


668년 11월5일, 문무대왕은 사로잡힌 고구려 사람 7000 명을 데리고 서라벌로 돌아왔다. 다음해(669년) 2월, 문무대왕은 群臣(군신)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nbsp&nbsp


&lt지난날 신라는 두 나라에 가로막혀 북쪽(고구려)에서 치고, 서쪽(백제)에서 침범하여 잠시도 편한 세월이 없었다. 전사들의 白骨(백골)은 原野(원야)에서 쌓여 있고, 몸과 머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중략) 이제, 두 적국이 평정되고 사방이 편안하니 싸움에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주었고, 전사한 영혼들에게는 冥資(명자: 벼슬)을 추증하였다. &gt


이상까지는 당연한 論功行賞(논공행상)의 시행이라 할 수 있다. 이어지는 교서의 내용이 문무왕의 범상치 않은 통치력을 증명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문무대왕의 지시는 명확했다.&nbsp


&lt다만, 저 감옥 속에는 이러한 은혜를 입지 못하고, 칼을 쓴 고통은 새 세상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이 일을 생각할 때 침식이 편치 않으니 국내의 죄수들을 특사하여 총장 2년(669) 2월21일 새벽 이전에 五逆(오역: 임금&#8231 부모&#8231 조부모를 죽인 죄)을 범한 자 이하로 현재 감옥에 갇혀 있는 자는 죄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풀어주고, 이전의 대사령 이후에 죄를 범하여 관직을 삭탈당한 자도 모두 복직케 하라. 도적질한 자는 석방하되 배상할 재물이 없는 자는 한도액까지 배상하게 하지 말 것이며, 가난하여 남의 곡식을 빌려 먹은 자로서 작황이 좋지 않은 곳에 사는 자는 본곡과 이자를 갚지 않아도 되게 할 것이며, 만약 작황이 좋은 곳에 사는 자는 금년 추수기에 원금만 반환하게 하고 이자는 받지 말 것이다. 이러한 사항을 이 달 30일 안으로 해당 관청이 집행하라 하였다.&gt&nbsp&nbsp


21세기의 북한 정권은 집단농장에서 쌀을 훔친 농민들을 공개 처형했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공개처형장에는 어린이들까지 강제동원해 사형 장면을 보여 준다고 한다.





















문무대왕-신문왕 父子가 창건한 感恩寺&nbsp


利見臺(이견대)에서 내려와 感恩寺(감은사) 터로 갔다. 문무왕은 東海口(동해구)에 절을 지어 부처님의 힘으로 왜구를 격퇴시키려 절의 이름을 「鎭國寺(진국사)」라고 지었으나, 절을 완공하기 전에 위독하게 되었다. 그는 승려 智義法師(지의법사)에게 『죽은 후 나라를 지키는 용이 되겠다』고 말했다. 神文王(신문왕)이 父王(부왕)의 뜻을 받들어 662년 절을 완공하고 感恩寺(감은사)라고 명명했다.


감은사 터의 금당의 하부구조를 보면 절묘하다. 龍穴(용혈)을 파서 해룡이 된 문무대왕이 海流(해류)를 타고 출입할 수 있도록 구조되어 있다. 절터에는 국보 제112호인 동·서 3층석탑 2기가 남아 있다. 탑의 제일 윗부분인 擦柱(찰주)의 높이까지 합하면 국내의 현존하는 석탑 가운데 가장 큰 것이다.


감은사 터의 동·서 3층석탑은 오 3시경 햇빛을 받을 때가 가장 아름답다. 필자도 그 시각에 맞춰 감은사 터에 도착했지만, 마침 西塔(서탑)이 보수중이었고, 날씨도 갑자기 기울어졌다.


감은사를 뒤로 하고 50리 大鐘川(대종천)을 따라 이어진 929번 지방도로와 4번국도를 따라 경주시내를 향해 출발했다. 大鐘川이란 이름에도 문무대왕과 관련한 설화가 전해지고 있다.


고려 高宗 25년(1238), 몽골의 침략으로 황룡사의 9층탑을 비롯한 많은 문화재가 불타 버렸다. 이때 황룡사에는 성덕대왕신종의 4배가 넘는 무게 약 100t의 큰 종이 있었는데, 몽골군들이 이 종을 탐내어 그들의 본국으로 약탈해가려고 했다. 뱃길을 이용하는 것이 가장 효과적 운송수단이었던 만큼 토함산 너머에 있는 바다를 이용하기로 했다.


그러나 문무대왕의 화신(化身)인 해룡은 몽골군의 약탈을 그냥 내버려 두지 않았다. 갑자기 폭풍우가 일어나 종을 실은 배가 침몰되면서 종도 바다 속에 가라앉았다. 이후 「종이 실려 가던 하천」이라 해서 大鐘川(대종천)이라는 이름이 붙었다고 한다.


여기서 경주시내로 갈 때 옛날 같으면 꾸불꾸불 추령고갯길을 넘어야 했지만, 이제는 추령터널이 뚫려 길이 훨씬 쉬워졌다. 깊은 계곡 위에 놓인 추령교 부근은 『추령고개 못지않다』는 감탄을 연발할 만큼 절경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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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對唐戰을 도운 吐藩의 역할



경주시내에 들어와 우선 국립경주박물관 건너편에 위치한 臨海殿址(임해전지)를 찾아갔다. 필자에겐 臨海殿이라는 이름보다 「기러기와 오리가 노니는 연못」이라는 뜻의 雁鴨池(안압지)라는 이름이 더욱 친숙하다.


안압지는 문무왕 때 조성한 연못이다. &lt&lt三國史記&gt&gt 문무왕 14년(674) 2월 條에는 『대궐에 못을 파고 산을 만들어 화초를 심었으며, 珍寄(진기)한 새와 짐승들을 길렀다』는 기록이 있다. 문무왕 14년이라면 아직 羅唐전쟁이 끝나지도 않았는데, 半月城(반월성) 부근에 인공호수를 조성할 여유가 있었을까?


이 점에 관해 뒤에서 상세히 쓸 것이지만, 674년은 唐과 당시 西域(서역)의 강자 吐藩(토번: 티베트) 사이에 지금의 靑海省(청해성)과 新疆(신강)위구르자치구의 실크로드(오아시스路)에 대한 패권을 다투는 전쟁이 재발했던 시점이다. 이 때문에 한반도의 임진강 계선에서 신라군과 결전을 벌이던 唐軍이 서역 전선으로 대거 이동해 羅唐전쟁은 일시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아무튼 토번과 唐의 전쟁은 羅唐전쟁에서 신라가 승리하는 데 결정적인 外生變數(외생변수)가 되었다. 이 시대의 수퍼파워 唐제국도 東西의 2正面 전쟁을 감행하기는 어려웠다. 羅唐전쟁은 그 후 675년 9월29일 買肖城(매소성) 전투와 676년 11월 伎伐浦(기벌포) 해전에서 결판이 나지만, 이에 이르는 과정은 뒤에서 상술할 것이다.


안압지 답사 중이던 오후 5시경, 갑자기 하늘이 어두워지고 「우르릉 쾅쾅」 천둥번개가 치더니만, 「후두둑 후두둑」 굵은 비가 쏟아졌다. 장대비야 두려울 바 없는 것이지만, 뜸을 두고 거듭되는 천둥번개는 사뭇 위협적이었다. 복원된 임해전 처마 밑에 들어가 그 위세를 잠시 피했다.


안압지는 문무왕 때 축조하고 못가의 임해전 등 부속건물 등은 통일신라시대 여러 왕들이 세워 태자가 거처하는 동궁(東宮)으로 삼았다. 나라의 경사스러운 날이나 귀한 손님을 맞을 때 연회를 베풀었던 곳이기도 하다. 931년, 서라벌을 예방한 고려 태조 王建(왕건)도 임해전에서 신라의 마지막 임금 敬順王(경순왕)에게 따뜻한 접대를 받았다.


현재의 모습은 1975년부터 2년간 실시된 발굴조사 결과로 복원한 것이다. 이곳에서는 신라시대 상류사회의 생활유물이 다량 출토되어 이웃 국립경주박물관에서 전시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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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 신라 내부의 골육상잔 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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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두웠던 하늘이 좀 밝아지고, 빗발도 가늘어졌다. 그러나 박물관에 입장하기엔 너무 늦은 시각이었다. 안압지를 나와 西川을 건너 선도산 자락에 있는 문무왕의 동생 金仁問(김인문)의 묘를 찾아갔다. 필자가 굳이 김인문의 묘를 찾아간 까닭이 있다. 羅唐전쟁 시기, 김인문은 唐나라에서 머물면서 「전쟁외교」라는 난제를 수행했다.


드디어 唐은 문무대왕과 김인문 형제의 골육상잔을 유도하는 毒手(독수)를 휘둘렀다. 674년, 唐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삭탈하고 김인문을 신라국왕으로 올려 귀국하게 하면서, 劉仁軌(유인궤)를 계림도대총관, 李弼(이필)과 李謹行(이근행)을 부대총관으로 삼아 신라를 공격하게 했다.


김인문의 인물됨에 대해 &lt&lt삼국사기&gt&gt는 『유가·장자·노자·불교 서적을 섭렵하고 활쏘기·말타기에 능숙하며, 식견과 도량이 넓어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고 묘사했다. 이런 김인문이 唐의 농간에 넘어갈 리 없었다. 그는 형의 왕위를 넘보지 않았다.


사후에 김인문의 시신은 신라로 옮겨져 태종무열왕릉의 발치에 묻혔다. 태종무열왕의 능비는 비신이 망실된 채 이수(용머리돌)와 귀부(거북 모양의 받침돌)만 남아 있다. 이수에 쓰인 「太宗武烈王陵碑(태종무열왕릉비)」라는 篆書體(전서체)의 일곱 글자는 김인문의 글씨다. 대단한 명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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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피와 살은 신라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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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시대를 열겠다”는 문무왕의 의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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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문호 관광단지內의 모텔에서 하룻밤을 묵은 필자는 5월29일 오전 8시, 문무왕의 투구가 묻혀 있었다는 무장사 터를 찾아 나섰다. 보문관광단지 식당촌 뒤로 난 산길과 덕동호 갓길을 따라 15리쯤 달리면 임곡동(岩谷洞) 왕산마을이 나온다. 왕산마을 길가에 「무장사→2km」라는 간단한 표지판 하나가 길갓집 담벼락에 달랑 붙어 있다. 왕산마을에서 비포장 좁은 길을 따라가니 이제는 길도 끊겼다.


상수도보호구역이다. 실개천 건너 조금 헤매다 보니 탑 꼭대기 부분만 언뜻 보였다. 다가가 보니 보물 제126호 「무장사 터 3층석탑」이다. 羅唐전쟁에서 승리해 삼국통일을 완수한 문무왕이 이런 심산유곡에 투구를 묻었다면 「이제, 평화의 시대를 열겠다」는 의지의 표명이 아니었겠는가.


무장사 터를 뒤로 하고 불국사 앞을 지나 7번국도(경주∼울산)변에 있는 掛陵(괘릉)에 들렀다. 괘릉은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가장 화려한 무덤이다. 오랫동안 이곳은 문무대왕 무덤이라고 추정되었다. 이만한 왕릉이라면 업적이 가장 큰 임금의 무덤일 것이 그 근거였다. 그 후 한때 흥덕왕의 무덤이라고 했다가 요즘에는 원성왕의 무덤 등으로 추정되기도 한다.


괘릉의 봉분을 둘러싼 護石(호석)에 돋을새김(陽刻)된 십이지신상, 각각 다른 포즈를 취하며 사방을 경계하고 있는 네 마리의 돌사자는 통일신라시대의 예술적 수준을 대표할 만하다. 그러나 필자가 굳이 괘릉을 찾은 까닭은 따로 있었다. 왕릉 앞에 서 있는 네 구의 石人像(석인상)을 다시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연구자들은 흔히 네 구의 석인상을 文人像(문인상) 2구와 武人像(무인상) 2구로 구분한다. 그런데 ‘文人像’을 보면 칼을 움켜쥔 손은 넓은 옷소매에 가려 보이지 않지만, 칼이 그의 가랑이 사이에 세워져 있는 것은 분명하다. 더욱이, 이른바 ‘‘文人像’의 등 뒤를 살펴보면 그가 입은 것은 분명히 갑옷이다. 신라는 어디까지나 武人 중심 사회였다. 그렇다면 ‘文人像’이라는 표현은 좀 어색하다.


‘武人像’은 희안하게도 꼬부랑 칼을 손에 쥔 西域人(서역인)의 모습이다. 눈이 깊숙하고, 코가 우뚝하며 곱슬머리다. 이는 통일신라가 唐나라뿐만 아니라 서역과도 활발한 교류를 하고 있음을 표현한 것이다. 필자가 서역을 여행하면서 만난 藏族(장족&#8231 티베트족)의 얼굴과 몸매가 무인상과 거의 일치한다.


그렇다면 이 석인상을 어떻게 부르는 것이 좋을까? 이 석인상은 50여 개국 使臣(사신)의 石像(석상)을 배치한 唐고종과 측천무후의 합장무덤인 乾陵(건릉)의 신라판이 아닌가 생각된다. 즉, 무덤 앞의 석인상들은 신라에 입국한 외국 사신들의 모습을 표현한 것으로 보는 것이 오히려 합리적이지 않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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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金氏의 조상은 흉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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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시 仁旺洞(인왕동)의 7번 국도변에 경주국립박물관이 자리잡고 있다. 국립경주박물관의 입장료는 1000원이다. 구경거리에 비해 이처럼 값싼 곳은 세상에 없다.


박물관 경내 미술관의 역사자료실에 들어가면 현관에 文武王陵碑(문무왕릉비)의 파편이 전시되어 있다. 碑文(비문) 전체의 내용은 碑 자체에 破失(파실)된 부분이 많아 파악하기 어렵지만,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에 대한 찬미, 신라김씨의 내력, 태종무열왕과 문무왕의 업적 등이 적혀 있고, 뒷면에는 문무왕의 장례 사실, 碑銘(비명) 등이 새겨져 있다.


특히 주목되는 부분은 신라김씨의 出自(출자)를 밝히는 앞면 5행의 구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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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그 신령스러운 근원은 멀리서부터 내려와 … 창성한 터전을 이었고, 높이 세워져 바야흐로 융성하니, 이로부터 ?枝가 英異(영이)함을 담아낼 수 있었다. &#31226侯(투후) 祭天之胤(제천지륜)이 7代를 전하여 …하였다.&gt


그러면 투후(&#31226侯)란 누구인가? 투후는 漢武帝(한무제)의 총신 金日&#30974(김일제: BC 134~86)다. 기원전(BC) 121년 늦은 가을, 한무제(漢武帝)는 곽거병(&#38669去炳)을 표기장군(驃騎將軍)으로 삼아 흉노를 쳤는데, 이때 흉노 휴저왕(休屠王)의 열네 살의 아들 김일제 그리고 그의 어머니와 동생이 포로가 되었다. 휴저왕이라면 흉노 선우 휘하 24인의 王將(왕장) 중 1인이다.


처음 김일제는 養馬奴(양마노)로 전락했으나 말(馬)마니아인 한무제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마감(馬監)으로 발탁되었는데,「莽何羅(망하라)의 난」 때 한무제를 구한 공로로 부마도위(駙馬都尉)로 출세했다. 한무제의 측근으로서 숙직 중에 副재상이었던 망하라는 비수를 들고 한무제의 침실로 뛰어드는 순간, 김일제는 “망하라 모반!”이라고 외치며 온몸으로 막아섰다는 것이다.


한무제의 임종 때(기원전 87년 2월), 부마도위 김일제는 봉거도위(奉車都尉) 곽광(&#38669光: 곽거병의 동생), 태복(太僕) 上官傑(상관걸)과 더불어 어린 후계자 소제(昭帝)를 보필하라는 유언을 받든 3人의 託孤之臣(탁고지신) 중 1인이 되었다. 그러나 김일제는 그 후 1년 만인 기원전 86년에 죽었는데, 병사 직전에 투후로 봉해졌다. 김일제의 후손은 그 후 7대에 걸쳐 투후의 영예를 누렸다. 투후는 지금 산동성 투현(&#31226縣)을 식읍(食邑)으로 받았던 작위(爵位)이다.


그런 김일제의 후손들이지만, 그들은 漢나라를 찬탈한 외척 王莽(왕망)의 新나라 창업에 협조적이었던 것 같다. 왕망의 新은 15년 만에 멸망하고, 내란에 휩싸인 중국을 평정한 인물이 漢황실의 후예인 광무제 유수(光武帝 劉秀)였다. 중국사에서는 광무제가 부활시킨 한왕조를 後漢(후한)이라고 부른다.


이런 왕조 교체기에 김일제의 후손들은 왕망 정권에 붙었다는 이유로 주살을 당했거나 피의 숙청을 피해 유랑민이 되었다. 문무대왕 능비문의 내용을 부정하지 않는다면, 풍비박산한 김일제의 후손들 중 일파인 김알지(金閼智)의 무리가 기원 후 65년 한반도 동남방인 서라벌로 흘러내려왔다는 얘기이다. 그렇다면 신라김씨의 먼 조상은 바로 흉노이다.


필자는 신라 김씨의 출자(出自)를 확인하기 위해 중국의 內몽골과 감숙성 등지를 답사했는데, 그 내용은 뒤에서 상술할 것이다.


무대왕의 능비문 옆에는 壬申誓記石(임신서기석)도 전시되어 있다. 높이 불과 34cm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냇돌에는 삼국통일 시기 신라화랑의 의식구조와 수련내용이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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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임신년 6월16일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하여 쓴다. 하늘 앞에 맹세하여 지금으로부터 忠道(충도)를 몸소 실행하여 과실이 없기를 맹세한다. 만약 맹세를 어기면 하늘로부터 큰 벌을 받을 것임을 다짐한다.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출전해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또 1년 전 辛未年(신미년)에 詩(시: 詩經)·尙書(상서)·禮記(예기)·春秋傳(춘추전: 春秋左氏傳)을 3년 동안 습득하기로 맹세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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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壬申年(임신년)은 진흥왕 13년(552), 진평왕 34년(612), 문무왕 12년(672) 등으로 추정된다. 경주의 냇가에서 우연히 발견된 임신서기석은, 신라화랑은 무예뿐만 아니라 학문 연마에도 힘썼음을 알 수 있다. 이런 화랑 출신들이 「노블레스 오블리주」를 실천했던 삼국통일시기의 신라군은 최정예 戰士(전사) 집단이 될 수 있었다.


미술관을 둘러보고 안압지관으로 갔다. 이곳에는 안압지에서 출토된 3만여 점의 유물 중 대표적인 것을 전시하고 있다. 필자가 주목했던 것은 14面&#20307 주사위였다. 그것에는 「술 석 잔 거푸 마시기」, 「팔짱 끼고 술 마시기」 등의 한자문구가 적혀 있다. 그것이 오늘날의 ‘폭탄주’와 ‘러브샷’이 된 게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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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武大王의 무력시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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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경주국립박물관의 고고학관과 옥외전시장을 돌아보고 五陵(오릉) 앞 홍륜사지에 잠시 들렀다. 홍륜사지에는 원래 靈廟寺(영묘사)가 들어서 있었다.


&lt&lt삼국사기&gt&gt를 보면 문무대왕은 674년 9월 영묘사 앞 광장에서 거행된 대대적인 열병식에 임석했다. 여기서 아찬(관등 제6위) 薛秀眞(설수진)은 六陣兵法(육진병법) 시범을 실시했다. 그 직전, 唐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취소하고 계림도대총관 劉仁軌(유인궤)를 총사령관으로 정벌군을 충돌시켰는데, 육진병법의 시범은 그것에 대한 무력시위를 겸한 군사연습이었다.


육진병법은 唐의 兵法家 李靖(이정)이 對돌궐戰에서 실행한 六花陳法(육화진법)의 신라판이었을 것으로 짐작된다. 왜냐하면 唐은 對신라전에서 漢兵(한병) 이외에 기마전에 능숙한 말갈· 거란병을 대거 투입했던 만큼 신라 전쟁지도부로서도 육화진법이 유용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lt&lt삼국사기&gt&gt 문무왕 10년(670)조는 羅唐 7년전쟁의 개전(開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lt3월, 사찬 薛烏儒(설오유)가 고구려의 태대형 高延武(고연무)와 함께 각각 정병 1만 명을 거느리고, 압록강을 건너 屋骨(옥골)에 이르니 말갈 군사가 먼저 皆敦壤(개돈양)에 와서 기다리고 있었다. 여름 4월4일, 말갈 군사와 싸워 우리 군사가 크게 이겼는데, 목 벤 수가 이루 다 셀 수 없었다. 당군이 계속 몰려오자 우리 군사는 물러나 白城(백성)을 지켰다.&gt



위의 인용문은 羅唐 7년전쟁에서 先攻(선공)을 가한 것은 신라군이었음을 나타낸 기록이다. 고연무는 고구려부흥군의 지도자였다. 작전지역인 압록강 북방 옥골· 개돈양은 지금의 요녕성 丹東-鳳凰城(단동-봉황산) 지역이다. 이때 신라·고구려 연합군에게 대패한 말갈의 장수는 李謹行(이근행)이었다.


그렇다면 신라군이 압록강을 건너 만주의 요충지 鳳凰城(봉황성)을 강타한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開戰 2개월 전인 그해 1월, 신라의 파진찬(관등 제4위) 金良圖(김양도)가 唐나라 감옥에서 옥사했다. 唐고종은 신라의 사신인 각간 金欽純(김흠순)과 김양도를 감옥에 가두었다가 흠순의 귀국은 허락하고, 양도는 계속 억류했다. 흠순과 양도가 사신으로 간 이유는 신라가 백제의 故土(고토)와 유민을 차지했다고 해서 唐고종이 불같이 노했기 때문이었다.


경주국립박물관에서 남쪽 1km 거리의 狼山(낭산) 서남쪽 기슭에는 四天王寺址(사천왕사지)가 있다. 사천왕사는 문무대왕의 호국의지가 깃든 가람이었지만, 지금은 폐허화한 모습이다. 일제 강점기에 강당 터의 일부가 잘리면서 동해남부선의 기차철로가 놓여졌다. 그래서 사천왕사터는 지금도 철로에 의해 두 동강으로 절단된 채 풀 속에 묻혀 있다.


사천왕사는 당나라 침략군을 부처님의 힘으로 물리치기 위해 세운 절이다. &lt&lt삼국유사&gt&gt에 따르면 문무왕 14년(674), 당나라가 대병을 일으켜 쳐들어오자 문무대왕은 급히 절을 짓고, 月明(월명) 스님을 우두머리로 삼아 文豆婁(문두루) 비법을 쓰니, 바람과 물결이 일어 당나라 배가 모두 침몰했다는 것이다. 위의 기록은 信心(신심)의 문제이므로 문외한인 필자로서는 무어라 토를 달 수 없다. 문두루 비법도 무엇인지 설명하기 어렵다.


사천왕사가 쌍탑 가람의 형식을 갖추었음은 절터의 주춧돌로 짐작할 수 있다. 절터에 남아 있는 유물은 머리가 잘린 거북돌(龜趺&#8231 귀부) 2기와 당간지주 하나가 있다. 거북돌은 절의 동남쪽 보리밭 사이에 있다. 그 사실적인 조각 수법, 그리고 등에 새겨진 무늬의 陰刻(음각)이 빼어난 작품이다. 그 중 서쪽 거북돌은 현재 경주국립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는 文武大王陵碑(문무대왕릉비)를 세웠던 것으로 추정된다.



安東都護 薛仁貴 부대의 西域 戰線 이동,


大非川 전투에서 토번군에게 전멸당해



















그런 唐고종이었지만, 흠순은 김유신의 친아우였던 만큼 가볍게 처리하기 어려웠다. 왜냐하면 그 아버지인 唐태종이 흠순의 형 김유신에 대해 平壤郡公(평양군공)이라는 관작과 식읍 3000호를 내릴 만큼 우대했기 때문이다. 흠순 자신도 당시 신라조정에서 김유신·김인문에 이어 랭킹 3위의 고위직자였다.


그러면 김양도는 누구일까? 김양도는 대표화랑인 風月主(제22世)를 거친 엘리트로서 특히 중국어에 능통했다. 그런 양도는 정보장교로서 入唐(입당) 후 첩보활동을 전개했을 것이다.




















김양도는 당시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의 총사령관(都護&#8231 도호)으로서 평양에 주둔하면서 신라에 압력을 가했던 薛仁貴(설인귀)의 갑작스런 병력이동 상황을 탐문했던 것 같다.


그렇다면 설인귀가 왜 돌연 한반도에서 종적을 감추었던 것일까? 669년 9월, 吐藩(토번: 지금의 티베트)이 실크로드(天山南路)를 급습했기 때문이다. 평양에 주둔 중이던 설인귀는 급거 병력을 이끌고 西域(서역)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토번은 현재 靑海省(청해성)에 위치한 白州 등 18개 州를 점령했다. 실크로드의 허리를 끊어 버린 토번의 전격작전이었다. 唐으로서는 반격전을 서두르지 않을 수 없었다. 그러나 반격전의 결과는 참담했다.


670년 7월, 설인귀와 郭大封(곽대봉)이 지휘한 당군은 靑海湖(청해호) 남방 大非川 전투에서 전멸했다. 이때 설인귀는 혼비백산해 자신의 몸만 겨우 빠져나왔다. 이 전투 직후에는 安西都護府(안서도호부) 휘하 4鎭이 토번에 함락되었다. 安西4鎭이라면 지금 신강위구르자치구에 있는 쿠차·카슈가르·호탄·카라샤르에 있던 오아시스路)의 군사거점도시였다. 당의 서역 방면 총사령부인 안서도호부는 西州(서주: 지금의 투르판)로 물러났다.


唐의 서역 경영에 있어 최대의 적수는 吐藩(토번)이었다. 토번은 662년부터 西돌궐의 일부인 弓月(궁월)과 손을 잡고, 唐軍에 도전해 왔다.


670년 3~4월, 신라의 압록강 도강 작전과 봉황성 전투는 안동도호부의 主力이 서역으로 대거 이동한 상황에서 그 虛(허)를 찔렀던 선제공격이었다.


670년은 파란만장했던 한 해였다. 5월, 唐은 좌감문대장군 高侃(고간)을 東州道行軍摠官(동주도행군총관: 한반도 방면 총사령관)으로 임명했다.


6월, 고구려부흥군은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점령하고, 唐의 관리와 부역자들을 처형했다. 그 직후, 고간이 지휘한 기병 1만과 이근행(부총관)이 지휘한 거란·말갈병 3만의 공격을 받은 고구려부흥군은 평양성에서 퇴각했다.


문무대왕은 보장왕의 서자 高安勝(고안승)이 이끌고 남하하던 고구려 유민들을 金馬渚(금마저: 지금의 전북 익산시)로 집단 이주시켜 당의 괴뢰였던 웅진도독부를 견제했다.


그때 웅진도독부는 백제 유민들을 포섭해 對신라戰의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문무대왕은 대아찬(관등 제5위) 金儒敦(김유돈)을 웅진도독부에 급파해 화의를 요청하는 유화전술을 구사하면서 실질적으로는 백제 故土 강점작전에 들어갔다.


7월, 신라군은 唐軍과의 전면전에 대비해 교두보로 활용할 수 있는 주요 거점에 대한 일제 공세에 나섰다. 3개 방면에서 전개된 이 전격작전에서 신라군은 82개의 大小 성곽을 점령함으로써 백제 고토 남부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완전히 확보했다. 또 그 주민들을 대거 內地(내지: 신라 영토)로 이주시켰다. 병력과 노동력 확보를 위한 徙民(사민)정책이었다.


8월1일, 문무대왕은 고구려 유민의 지도자 高安勝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하고, 군량미 2000섬과 비단 등을 지원했다. 문무대왕은 고안승이 일본과 교류하는 것도 직·간접으로 지원했다.


문무왕 11년(671)은 백제 고토 강점작전이 마무리되던 해였다. 1월, 신라군은 웅진도독부의 治所(치소)인 공주 남쪽 근교에서 唐軍과 접전을 벌였다. 이 전투에서 幢主(당주: 부대장) 金夫果(김부과)가 전사했다. 이때 신라의 국경을 침범한 말갈군과의 전투에서 적병 300여 명의 목을 베었다.


6월, 金竹旨(김죽지)는 웅진도독부의 병량공급처인 부여 근교 加林城(가림성: 임천면 성흥산성) 주위 耕地(경지)를 불태웠다. 이때 唐軍과 石城(부여∼논산 사이에 위치함)에서 싸워 적군 5300 명의 머리를 베고, 백제 장군 2명과 唐의 果毅(과의: 고급장교) 6명을 사로잡았다.


문무대왕은 웅진도독부의 통치지역을 점령해 所夫里州(소부리주)를 설치하고, 그 治所(치소)를 부여에 두고 백제 고토에 대한 통치력을 확산시켰다.


7월26일, 문무대왕은, 西域(서역)에서 한반도 전선으로 복귀한 唐의 행군총관 薛仁貴(설인귀)로부터 신라의 反唐(반당) 군사활동을 힐책하는 편지를 받았다.


설인귀라면 645년 唐태종의 안시성 공격 때부터 참전했고, 668년 고구려 멸망 직후에는 안동도호를 역임한 歷戰(역전)의 인물이었다. 唐의 체제하에서 안동도호라면 唐고종이 문무왕에게 내렸던 계림대도독보다 상위의 관직이다. 도호부는 휘하에 3∼5개의 도독부를 관할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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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武大王에게 보낸 薛仁貴의 협박장



이 장문의 편지는 『행군총관 설인귀는 삼가 신라왕에게 글을 보냅니다. 본인은 육로 만리와 해로 삼천리를 지나 이 땅에 왔습니다』로부터 시작된다. 그가 西域 戰線(서역 전선)으로부터 한반도 戰線으로 복귀해 왔음을 밝힌 것이었다.


그는 “신라가 은혜를 저버리고 군비를 강화해 백제의 故土를 강점한 것”에 대해 항의했다. 이어 그는 당에 대한 신라의 저항능력을 다음과 같이 輕視(경시)했다.



&lt왕은 지금 평안한 국가의 기반을 버리고, 원칙을 지키는 정책을 싫어하며, 멀리는 황제의 명령을 어기고, 가까이는 부친(태종무열왕)의 말씀을 어기며, 天時(천시)를 업신여기고, 이웃나라와 우호를 깨트리면서, 한 궁벽한 작은 땅(신라)에서 집집마다 군사를 징발하고, 해마다 전쟁을 일으켜, 젊은 과부가 곡식을 나르고, 어린 아이로 하여금 밭일을 하게 하고 있습니다. 이에 나라를 지키자니 의지할 곳이 없고, 싸움을 걸면 대항할 능력이 없게 되었습니다.&gt



아이러니하게도 적장 薛仁貴는 그의 편지를 통해 ‘젊은 과부와 어린 아이’까지 동원되는 擧國一致(거국일치)의 단합으로 세계 최강의 당제국과 정면대결도 불사하는 신라국가의 처절한 모습을 그대로 후세에 전하고 있다. ‘젊은 과부’라면 전사한 병사의 아내, ‘어린 아이’라면 전사한 병사의 아들이 아니겠는가? 이어 그는 문무왕의 고구려부흥군 지원과 高安勝(고안승)에 대한 고구려왕으로의 책봉에 대해서도 힐책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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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고구려의 安勝은 아직도 나이가 어리며, 패망 후의 마을과 성읍에는 주민이 반이나 줄어서, 자신의 거취에 스스로 의심을 품고 있으므로 왕의 직위를 감당할 수 없습니다. 본인 설인귀의 樓船(누선: 대형 병선)은 돛을 펴고 깃발을 달아 북쪽 해안을 순시하면서도, 예전에 받은 신라의 고통을 불쌍히 여겨 차마 병사를 풀지 않았는데, 왕은 도리어 外援(외원)을 구하며 나에게 대적하니 어찌 잘못이 아니겠습니까!&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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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인귀의 편지는 사뭇 위협적이다. 唐의 압도적인 軍勢(군세)를 들먹이며 신라의 복종을 요구했다.


&lt고간 장군이 거느린 漢(族)의 騎兵(기병), 이근행이 거느린 藩兵(번병), 吳· 楚(오&#8231 초)의 용감한 水軍과 幽州(유주)· 幷州(병주)의 惡少(輩)들이 사방에 운집하여, 兵船(병선)이 열지어 내려가고, 험한 곳에 의지하여 진지를 쌓고, 그들이 貴國(귀국)의 땅을 개간하여 밭을 갈게 된다면, 이는 왕에게 치유할 수 없는 病痛(병통)이 될 것입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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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인귀의 편지는 항복을 권유하는 문구로 매듭짓는다.


&lt왕은 마음이 밝고 풍신이 준수하니, 겸손한 자세로 원칙으로 돌아가 大唐(대당)에 순종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때에 따라 血食(혈식: 나라를 보존함)을 받을 것이요, 왕통이 바뀌지 않고 이어질 것이니, 이러한 행운을 선택하고, 복을 받아들이는 것이 바로 왕의 계책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삼엄한 軍陣(군진) 사이로 사절이 내왕하니, 왕의 휘하에 있는 승려 임윤편지를 맡겨 몇 가지 본인의 의견을 말씀드립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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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문무왕의 反唐 행위를 ‘배신행위’로 규정한 한 일본 학자의 제국주의적 이데올로기의 논문을 읽은 적이 있다. 사실, 설인귀의 편지를 얼핏 보면 羅唐同盟(나당동맹) 균열의 歸責事由(귀책사유)가 마치 신라에 있는 것처럼 오해할 수도 있다.















開戰 외교문서의 白眉 「答薛仁貴書」


‘648년 비밀협약’ 공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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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대한 문무왕의 답장, 즉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는 외교적 레토릭만 제외하면 우리 역사상 최고의 名文(명문)이며, 實用的(실용적) 외교문서이다. 그 내용은 唐의 과욕을 비판하고 신라의 정당성을 만천하에 천명하면서 사실상의 對唐 선전포고를 감행했던 것이다. 그것은 羅唐 분쟁의 핵심요인을 집약하고 있다. 全文은 &lt&lt삼국사기&gt&gt 문무왕 11년(671) 조에 기록되어 있다.


「답설인귀서」는 신라의 이찬(관등 제2위) 김춘추와 唐태종 李世民이 여&#8231 제를 멸망시킨 다음에 시행하기로 약속했던 「648년 비밀협약의 공개로부터 시작된다. 이는 전쟁의 명분이 신라 측에 있음을 만천하에 당당하게 밝힌 것이다.



&lt先王(선왕: 김춘추)께서 貞觀 22년(648) 入朝(입조)하여, 태종 文皇帝(문황제: 이세민)의 은혜로운 조칙을 직접 받았으니, 그 조칙에는 「내가 지금 고구려를 치려는 것은 다른 까닭이 아니라, 신라가 두 나라 사이에 끼어 매번 침해를 받아 편안한 날이 없음을 가련히 여긴 것이다. 산천도 토지도 내가 탐하는 바 아니며, 재물도 자녀도 모두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내가 두 나라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의 땅과 백제의 토지는 전부 너희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토록 하려 한다」고 하면서 계획을 지시하고, 군사동원 기일을 정해 주었습니다.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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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설인귀서」는 당시 수퍼파워를 상대로 한 문건이었던 만큼 그 언사는 부드럽지만, 사실 규명과 국가이익에 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찾아볼 수 없다.


문무대왕은 羅唐전쟁의 원인을 唐이 고구려와 백제 故地(고지)에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를 설치해 직할 영토로 삼고, 신라까지 병합하려는 데 있음을 명확하게 밝혔다. 이어 백제·고구려 정벌전에서 신라군의 공적이 당군에 못지않음을 구체적으로 적시했다. 「답설인귀서」는 10여년간 羅&#8231 唐&#8228 麗&#8231 濟&#8231 倭 등 동아시아 5개국 사이에 있었던 주요 역사적 사실을 실로 차분하게 年代別(연대별)로 요약한 準외교문서의 성격이 짙은데, 다음은 그 골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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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죽과 뼈는 중국에서 났지만, 피와 살은 모두 신라의 것이다』



1) 660년 백제 평정 때 唐의 水軍이 겨우 白江(백강: 금강) 어귀에 들어올 즈음 신라 육군은 백제의 대부대를 격파했다.


&lt김유신의 황산벌 전투 승리 등 백제의 평정은 신라군의 절대적 공로에 의한 것이라고 강조한 것임.&gt.


2) 661년, 웅진성과 사비성의 唐軍이 백제부흥군에게 포위당해 위급한 상황에 처했을 때 내(문무대왕)가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가서 4面의 적을 한꺼번에 격파하고 군량을 지원해 주었다. 웅진도독 劉仁願(유인원) 이하 1만 당병이 4년 동안 신라의 것으로 먹고 입었으니, 가죽과 뼈는 중국에서 났지만, 피와 살은 모두 신라의 것이다.


&lt당병에 대한 신라의 軍需(군수)지원과 고충을 밝힌 것임&gt


3) 662년 1월, 兩河道摠管(양하도총관) 김유신이 적진을 돌파하며 北上해 평양성을 공략하던 소정방의 唐軍에게 군량을 공급했다. 혹한 속에서 궤멸의 위기에 빠졌던 唐軍을 신라가 구원했다.


&lt對고구려 작전에서 항상 兵站線(병참선) 유지가 최대 약점이었던 唐軍에게 신라가 군량을 지원함으로써 당군의 겨울철 작전을 가능하게 했음&gt


4) 663년, 왜선 1000척이 白江口(백강구: 지금의 아산만)에서 머물러 있었으며, 백제부흥군의 정예 기병이 강가에서 왜선을 엄호했는데, 신라의 정예 기병부대가 선봉이 되어 먼저 적 진지를 격파하니 周留城(주류성)은 힘을 잃고 마침내 항복했다.


&lt662~663년, 왜국은 백제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3차례에 걸쳐 3만2000명의 왜군을 파견했는데, 제3차 파병 때인 663년 9월 왜국의 함대 400척(병력 1만명)은 백강구 전투에서 劉仁軌(유인궤)가 지휘한 唐 수군에 전멸당했다. 이때 문무왕은 김유신 등 28명의 장수를 거느리고 친정해 豆陵尹城(청양군 칠갑산)과 백제부흥군의 본진인 주류성을 점령하는 등 수륙 양면 작전을 성공시킴.&gt


5) 664년 8월, 就利山(취리산: 금강 북안)에 祭壇(제단)을 쌓아 놓고, 勅使(칙사) 유인원과 마주하여 문무왕과 부여융이 피를 입에 머금으면서 山河(산하)를 두고 맹약을 하게 했다.


&lt이는 계림주대도독인 문무왕과 웅진도독인 부여융이 동등한 자격으로 會盟(회맹)할 것을 강요한 것으로 4년 전 사비성 함락 때 부여융을 말 앞에 끓어앉힌 바 있는 문무왕으로서는, 심히 자존심이 상하는 일이었지만, 아직도 對고구려전이 진행 중인 상황이었던 만큼 唐의 會盟(회맹) 요구를 수락할 수밖에 없었음을 공개함.&gt


6) 668년 평양성 포위전에서 신라의 金文潁(김문영) 부대가 선봉에 나서 淵南建(연남건)의 大陣(대진)을 격파하니 평양성의 기세가 꺾였다. 이어 신라의 정예 기병 500이 먼저 공격해 평양성 성문을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런데도 唐은 「신라엔 아무런 공로가 없다」고 주장했다.


&lt唐은 평양에 설인귀가 지휘하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고구려 故土에 9개 도독부 42주 100현으로 나눠 직할지로 삼는 등 전리품을 독식했음. 이는 평양 이남 고구려 고토를 신라에게 배분한다는 648년 비밀협약을 위반한 것임&gt


7) 卑列城(비열성: 함경남도 안변)은 본래(진흥왕 때) 신라의 땅이었는데, 唐은 안동도호부 관할 하에 두었다.


8) 668년, 백제(웅진도독부)는 앞서 회맹한 곳(취리산)에서 경계 표시를 바꾸어 田地(전지)를 침탈했으며, 우리의 노비를 달래고 백성들을 유혹해 데려가 숨겨 놓고는 우리가 여러 번 찾아도 끝까지 돌려보내지 않았다.


9) 「唐이 배를 수리하면서 밖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말하지만, 사실은 신라를 공격하려는 것이다」라는 소문이 들려오니 백성들은 놀라고 두려워하고 있다.


10) 웅진도독부가 백제의 여자를 漢城도독 朴都儒(박도유)에게 시집 보내고, 그와 음모하여 신라의 兵器(병기)를 훔쳐서 한 州의 땅을 습격하려고 했으나, 다행히 사전에 발각되어 즉시 박도유를 참수하였기에 음모가 성공하지 못했다.


&lt신라가 박도유 이외에도 중앙군단인 대당총관 金眞珠(김진주), 남천주총관 金眞欽(김진흠) 등 친당파 장수들를 나랏일에 소홀하다는 명목으로 주살했던 점으로 미루어 보아 신라 장군들에 대한 唐의 회유공작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gt


11) 670년 당에 사신으로 갔던 金欽純(김흠순)이 귀국해 말하기를 『장차 경계를 확정할 것인데, 백제의 옛 땅을 조사하여 웅진도독부에 돌려줄 것』이라고 했다. 3~4년 사이에 주었던 땅을 다시 빼앗으니, 신라 백성들은 『지금 백제(웅진도독부)의 정황을 보면 스스로 별도의 한 국가를 세우고 있는 것이니, 100년 후에는 우리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 의해 멸망당할 것』이라고 실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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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은 설인귀에게 보낸 서한을 통해 공정한 戰後처리, 즉 「648년 협약」을 唐이 준수하지 않는다면 전쟁을 할 수밖에 없다는 강경한 입장을 대내외에 선언한 것이다. 설인귀라면 645년 요동성&#8228·안시성 전투부터 나당전쟁이 끝나는 시기(676년)까지 31년간 중 1년간을 제외하고 계속 극동에서 작전을 해 온 인물인 만큼 그런 그에게 문무왕이 사실과 다른 언급은 할 수 없었을 것이다. 이 문서는 삼국통일전쟁에서 신라의 역할을 가감 없이 파악할 수 있는 결정적인 문건이다.


필자는, 신라가 외세에 기대어 삼국통일을 했다고 주장하는 어설픈 논객이나 羅唐전쟁의 開戰 원인을 신라의 배신행위라고 주장하는 일본의 일부 학자에게 「답설인귀서」를 제대로 읽어 보라고 권하고 싶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하는 역사관은 일제의 식민사관이나 김일성 주의의 음흉한 독수에 휘둘린 바보짓으로 보인다.


























병참 차단 위한 해상작전 전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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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1년의 시점에서 문무왕은 고구려부흥군을 배후에서 지원하고, 신라군의 주력을 백제 고토 점령작전에 투입했다. 671년 7월,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안시성이 당의 장수 高侃(고간)에 의해 함락되었다. 당군의 남하 속도는 빨랐다. 9월, 고간이 4만 명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해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은 뒤 帶方(대방: 황해도)으로 침범했다.


문무대왕은 당군의 약점이 병참에 있다는 사실을 파악해 함대를 동원한 봉쇄작전을 강화하기 시작했다. 671년 10월, 신라 수군은 예성강 어귀로 진입하던 당의 보급선을 습격해 70여 척을 노획했다.


격침된 당의 보급선도 많았던 것으로 추정된다. 왜냐하면 이때 당의 兵船郎將 鉗耳大侯(병선낭장 겸이대후), 내주사마 王禮本(왕예본), 열주장사 王益(왕익) 등을 비롯한 당의 수군 100여 명을 생포했기 때문이다. 겨울이 시작된 시점에서 한반도로 침입한 당군의 병참선이 단절되었다. 이후 약 10개월간 당군의 南下작전은 중지되었다.


11월, 웅진도독부에 파견된 唐의 관원과 백제 유민 2000여 명이 47척의 선박에 분승해 왜국으로 탈출했다.












































672년 1월, 문무대왕은 웅진도독부를 완전히 축출하기 위해 대대적인 포위 섬멸작전을 전개했다. 사비성 외곽의 古省城(고성성)을 함락시키고, 加林城(가림성)에 대한 공세를 강화했다.


이 해 8월, 평양성에 주둔하던 唐의 동주도행군총관 고간과 말갈 장수 이근행은 본격적인 공세에 나서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馬邑城(마읍성: 평양성 서쪽)을 함락시켰다. 승기를 잡은 고간-이근행 軍은 이어 황주→대방→白水城으로 진격했다. 당군에 의해 포위된 白水城은 예성강 하구의 白川(배천)이다.


이때 신라군은 당군의 후방을 급습함으로써 상황이 반전되었다. 백수성에서 농성하던 고구려부흥군이 성문을 열고 나와 당군을 들이치면서 되려 앞뒤에서 당군을 포위하는 형세로 급변했던 것이다. 신라군과 고구려부흥군은 이 전투에서 당군 수천 명을 살상하고, 수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


백수성에서 패한 고간의 당군은 石門(석문: 황해도 서흥)으로 후퇴하여 戰列(전열)을 재정비하고 있었다. 승세를 탄 신라군은 당군을 추격했다. 672년 8월, 당의 장수 고간이 이끄는 정예기병은 신라군에 대한 통렬한 반격작전을 전개했다. 이 석문전투에서 신라군의 중앙군단이 대패했다. 대아찬 曉川(효천), 사찬 義文(의문)· 山世(산세), 아찬 能申(능신)· 豆善(두선), 일길찬 安那含(안나함)· 良臣(양신) 등이 전사했다. 고간의 誘引計(유인계)에 걸려 신라 중앙군의 주력이 궤멸적 타격을 입은 것이다. 開戰 이래 최대의 위기였다.


나당전쟁은 서역전선의 상황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던 것 같다. 왜냐하면 석문석투 패전 직전인 672년 4월, 토번의 사절이 長安에 도착하여 당고종과 측천무후를 접견하면서 모종의 협상을 했다. 당-토번의 평화협상, 아니면 휴전협상으로 당나라가 對신라 전선에 국력을 집중시킬 수 있는 상황이 전개되었던 것이다.


동년 12월, 당군은 고구려부흥군이 지키고 잇던 백수산을 공격해 함락시키고, 이를 지원하려고 출전한 신라군마저 격파했다.



672년 石門 전투에서 대패한 후 신라의 持久전략



石門의 敗報(패보)를 접한 문무왕은 즉시 중신회의를 소집해 대책을 논의했다. 이때 78세의 太大角干(태대각간) 김유신은 “唐의 흉계를 예측하기 어려우므로 장병들을 모두 동원해 山城戰(산성전)을 전개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당시 南韓 지역에는 800개의 城이 있었다. 침략군에게 소모전을 강요하고 있었던 것이다.


결전을 피하고 戰略遲久(전략지구)로 대응하며, 정세의 변동을 기다려야 한다는 김유신의 판단은 정확한 것이었다. 신라는 강남의 漢山州(한산주: 경기도 광주)에 晝長城(주장성: 南漢山城)을 축조해 강북의 北漢山城과 함께 한강 계선의 중요 방어진지로 삼았다.


신라의 和戰 양면책은 교묘했다. 672년 9월 문무왕은 唐고종에게 『臣(신)은 죽을 죄를 짓고, 삼가 말씀 올립니다』로 시작되는 上表文을 올렸다. 사죄사 급찬 金原川(김원천)과 내마 金邊山(김변산)은 포로로 잡혀 있던 내주사마 왕예본, 열주장사 왕익을 비롯한 당의 장병 170명을 데리고 가 唐에 인도했다. 또한 신라에 대한 적대감을 누그러뜨리기 위해 금, 은, 동, 針(바늘), 牛黃, 布 등을 예물로 보냈다.


신라의 저자세 외교는 唐 조정의 분위기를 일시 호전시키기는 했지만, 신라의 지원을 받은 고구려부흥군과 당군의 전투현장에서는 오히려 긴장이 고조되고 있었다. 673년 5월, 당군은 고구려부흥군에 대해 대공세를 전개했다.


673년 9월, 당군은 임진강의 중류인 瓠蘆河(호로하) 남안의 七重城(칠중성: 파주시 積城面)과 왕봉하(경기도 고양)까지 남하해 고구려부흥군과 대접전을 전개했다. 고구려부흥군이 패퇴하자 드디어 신라군이 당군과 정면충돌한다.



임진강 계선 전투의 결과는 이후 東아시아 세계의 질서를 만들어 낸 결전이었다. 필자는 임진강 전투의 현장을 답사하기 위해 경주를 출발하여 밤길을 도와 북상했다.


漢江(한강) 하구를 끼고 自由路(자유로)를 달리면 왼쪽으로 「통일전망대」가 올라앉은 鰲頭山(오두산)이 보인다. 오두산의 서쪽은 한강과 臨津江(임진강)이 合水되는 역이다. 자유로를 계속 달려 汶山IC(파주시 문산읍 堂洞里)에서 37번 국도로 빠져나와 東進(동진하면 임진강의 결정적 순간과 同行(동행)할 수 있다.


오늘날의 남북 대치 현장인 임진강 유역은 1300여 년 전에는 羅唐(나당)전쟁의 決戰場(결전장)이며, 韓民族(한민족)을 지켜 오늘에 이르게 한 방파제였다. 그때 임진강에서 唐軍(당군)을 막지 못했다면 韓民族은 지금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로 전락해 있을지도 모른다.


37번 국도를 東進하면 임진강 南岸에 임진왜란 때(1592년 4월30일) 피난하던 宣祖(선조)의 도하지점인 花石亭(화석정)이 보이고, 화석정에서 8km쯤 東進하면 도로변에 西人의 본거지였던 坡山書院(파산서원)이 보인다. 파산서원은 西人의 영수였던 牛溪 成渾(우계 성혼)이 나라 지키는 일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朱子學(주자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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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서원에서 다시 6km쯤 더 나아가면 이제는 3~4층 건물이 즐비한 積城面 馬智里(적성면 마지리)이다. 馬智里에서 고개 하나를 넘어 37번국도에 들면 「七重城(칠중성)」의 위치를 표시하는 안내판 하나가 보인다. 여기서 좁은 진입로를 따라 조금 들어가면 重城山(중성산) 자락에 자리 잡은 積城鄕校(적성향교)가 보인다.


중성산 위에는 나당전쟁 시기의 격전장이며, 주인이 자주 바뀐 七重城이 자리 잡고 있다. &lt&lt三國史記&gt&gt(삼국사기) 문무왕 15년(675) 2월 조에는 『劉仁軌(유인궤: 唐將)가 우리 군사를 칠중성에서 격파했다』고 되어 있고, 같은 해 9월 조에는 『唐兵(당병)이 거란·말갈병과 함께 칠중성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승용차를 적성향교 앞마당에 세워 놓고 농토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좀 걷다가 중성산 기슭에 붙으면 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중성산 정상부에는 현재 軍의 예비진지가 들어서 있다.


중성산은 표고 149m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오르면, 왜 그때 칠중성을 彼我(피아)가 모두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前方의 임진강과 후방의 감악산을 모두 관측할 수 있는 지점인 것이다. 감악산은 파주 지역의 제1봉이다. 임진강은 北方勢(북방세)가 한반도의 中心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전략적 요충이다.


칠중성에서 굽어보면 임진강 中流(중류)의 물길이 크게 彎曲(만곡)을 이뤄 마치 호리병(瓠蘆· 호로&#8231 표주박) 두 개를 나란히 진열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이런 모습 때문에 임진강 중류의 옛 이름이 「瓠蘆河(호로하)」라고 불렸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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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부흥군의 요새 호로고루와 임진강 渡涉이 가능한 고랑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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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중성은 소규모 山城이지만, 바로 이웃에 위치한 六溪土城(육계토성)과 연계해 임진강을 도하하는 적군을 쉽게 관측·저지할 수 있는 요충이다. 칠중성과 육계토성은 임진강 北岸의 瓠蘆古壘(호로고루)와 마주 보고 있다.


육계토성 부근에 걸린 飛龍大橋(비룡대교)를 건너가면 연천군 白鶴面(백학면)이고, 백학면에서 임진강 北岸의 지방도로를 따라 西行하면 곧 고구려부흥군이 南下하던 唐軍과 격전을 벌였던 호로고루에 도달한다.


이곳은 南北(남북) 분단 전에만 해도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호루고루은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支流(지류)가 흐르면서 형성된 현무암 절벽 위에 축조된 고구려의 平地城(평지성)인데, 비교적 보존이 잘된 서쪽 성벽의 높이가 약 10m이다.


호로고루성에서 하류 방면으로 조금 西進하면 高浪浦(고랑포)이다. 고랑포는 철책선(GOP) 지역이어서 민간통제선이 북상한 이후에도 낚시꾼이나 가끔 찾는 쓸쓸한 곳이지만,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상선이 거슬러 올라왔던 임진강 水運(수운)의 중심 나루였다.


고랑포 동쪽에는 임진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도섭(걸어서 강을 건넘) 지점이 많다. 1968년 1월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휴전선을 뚫은 북한 124군 소속 게릴라부대(김신조 일당 31명)도 고랑포에서 걸어서 임진강을 건너 청와대 외곽 자하문까지 침투했다.


2006년 10월, 필자는 고랑포 지역의 철책선을 지키는 장병들을 위문하러 간 김에 고랑포대대 제3중대 막사에서 1박을 하면서 특히 임진강 북안과 임진강 지류 砂尾川(사미천) 일대를 답사했다.


칠중성→임진강→고랑포→사미천을 잇는 통로는 문무왕 2년(662) 1월 金庾信(김유신)이,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다 군량이 떨어져 전멸의 위기에 빠진 蘇定方(소정방)의 唐軍을 구원하기 위해 北上했던 기동로이다.


이때 김유신은 김인문·김양도 등 신라의 여덟 장수와 함께 군량미를 수레에 실은 수송부대를 이끌고 사미천변을 따라 북상하면서 상류의 白峙鎭(백치진)의 고구려 수비군을 돌파하고 토산→신계→수안을 거쳐 대동강 남안 中和에서 소정방 軍과의 연결에 성공했다. 아사 직전의 唐軍을 구원한 김유신 부대는 귀로에 고랑포에서 추격군을 역습해 고구려 장수 阿達兮(아달혜)를 사로잡고 적병 1만 명의 목을 베는 戰果(전과)를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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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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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6 경북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앞바다에 있는 신라 문무왕의 수중릉. 사적 제158호로 대왕암이라고도 한다.


&#8226 문무왕 수중릉의 안쪽. 사방으로 트인 십자형 좁은 수로를 통해 못 속으로 흘러 들어온 바닷물이 서쪽으로 난 수로를 통해 다시 바다로 빠져나간다. 못 속 바닥에는 길이 3m가량의 편평한 돌이 깔려 있다.


&#8226 利見臺. 대왕암이 내려다보이는 이곳에서 신문왕이 신라의 국보인 만파식적을 얻었다는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8226 국보 제112호 감은사 터의 3층 쌍탑. 통일신라시대의 걸작으로서 장중하면서도 상승감을 느끼게 한다.


&#8226 국보 제25호 태종무열왕릉비. 용머리 돌과 거북등 받침만 남아 있고, 碑身(비신)은 멸실되었다. 머리를 치켜들고 네 발로 힘껏 땅을 밀치는 모습은 삼국통일기 신라의 약동하는 사회상을 드러내고 있다.


&#8226 안압지. 문무왕 14년(674)에 축조된 인공호수로 못가에 임해전을 지어 東宮과 영빈관으로 삼았다.


&#8226 태종무열왕릉의 발치에 있는 金仁問의 묘. 김인문은 前後 20여 년간 唐에 머물면서 신라의 국가이익을 지키기 위해 노력했다.


&#8226 괘릉의 石人像. 흔히. 왼쪽은 武人像, 오른쪽은 文人像이라고 불린다. 그러나 ‘文人像’의 뒷면을 보면 그도 갑옷을 입은 것이 뚜렷하다.


&#8226 괘릉. 통일신라시대에 조성된 무덤 중 가장 화려하다.


&#8226 괘릉을 지키는 돌사자. 돌사자는 웃고 있다.


&#8226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문무왕의 능비. 이 능비에는 신라김씨가 흉노의 후예임을 밝히고 있다.


&#8226 김인문의 묘비(국립경주박물관 전시).


&#8226 국립경주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壬申誓記石. 신라화랑의 맹세가 새겨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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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武王은 吐藩의 西域 공격을 틈타


수퍼파워 唐을 꺾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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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는 唐의 海上 兵站線을 차단한


海軍 강국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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當代의 수퍼파워 唐(당)과의 전쟁에서 승리한 신라는 强小國의 역사적 모델이었다.


신라는 海路를 이용한 兵站線을 차단해 唐 지상군의 南下를 저지했고, 西域에서 唐과 실크로드의 헤게머니를 다툰 吐藩(토번: 티베트)의 힘을 절묘한 타이밍에 이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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臨津江은 韓民族을 지켜낸 방파제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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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전지 七重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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漢江(한강) 하구를 끼고 自由路(자유로)를 달리면 왼쪽으로 「통일전망대」가 올라앉은 鰲頭山(오두산)이 보인다. 오두산의 서쪽은 한강과 臨津江(임진강)이 合水되는 역이다. 자유로를 계속 달려 汶山IC(파주시 문산읍 堂洞里)에서 37번 국도로 빠져나와 東進(동진하면 임진강의 결정적 순간과 同行(동행)할 수 있다.


오늘날의 남북 대치 현장인 임진강 유역은 1300여 년 전에는 羅唐(나당)전쟁의 決戰場(결전장)이며, 韓民族(한민족)을 지켜 오늘에 이르게 한 방파제였다. 그때 임진강에서 唐軍(당군)을 막지 못했다면 韓民族은 지금 중국의 소수민족 중 하나로 전락해 있을지도 모른다.


37번 국도를 東進하면 임진강 南岸에 임진왜란 때(1592년 4월30일) 피난하던 宣祖(선조)의 도하지점인 花石亭(화석정)이 보이고, 화석정에서 8km쯤 東進하면 도로변에 西人의 본거지였던 坡山書院(파산서원)이 보인다. 파산서원은 西人의 영수였던 牛溪 成渾(우계 성혼)이 나라 지키는 일에는 별 도움이 되지 않았던 朱子學(주자학)을 제자들에게 가르치던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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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산서원에서 다시 6km쯤 더 나아가면 이제는 3~4층 건물이 즐비한 積城面 馬智里(적성면 마지리)이다. 馬智里에서 고개 하나를 넘어 37번국도에 들면 「七重城(칠중성)」의 위치를 표시하는 안내판 하나가 보인다. 여기서 좁은 진입로를 따라 조금 들어가면 重城山(중성산) 자락에 자리 잡은 積城鄕校(적성향교)가 보인다.


중성산 위에는 나당전쟁 시기의 격전장이며, 주인이 자주 바뀐 七重城이 자리 잡고 있다. &lt&lt三國史記&gt&gt(삼국사기) 문무왕 15년(675) 2월 조에는 『劉仁軌(유인궤: 唐將)가 우리 군사를 칠중성에서 격파했다』고 되어 있고, 같은 해 9월 조에는 『唐兵(당병)이 거란·말갈병과 함께 칠중성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고 돌아갔다』고 기록되어 있다.


승용차를 적성향교 앞마당에 세워 놓고 농토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좀 걷다가 중성산 기슭에 붙으면 꽤 가파른 오르막길을 올라야 한다. 중성산 정상부에는 현재 軍의 예비진지가 들어서 있다.


중성산은 표고 149m에 불과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곳에 오르면, 왜 그때 칠중성을 彼我(피아)가 모두 중시했는지를 알 수 있다. 前方의 임진강과 후방의 감악산을 모두 관측할 수 있는 지점인 것이다. 감악산은 파주 지역의 제1봉이다. 임진강은 北方勢(북방세)가 한반도의 中心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전략적 요충이다.


칠중성에서 굽어보면 임진강 中流(중류)의 물길이 크게 彎曲(만곡)을 이뤄 마치 호리병(瓠蘆· 호로&#8231 표주박) 두 개를 나란히 진열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이런 모습 때문에 임진강 중류의 옛 이름이 「瓠蘆河(호로하)」라고 불렸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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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부흥군의 요새 호로고루와 임진강 渡涉이 가능한 고랑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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칠중성은 소규모 山城이지만, 바로 이웃에 위치한 六溪土城(육계토성)과 연계해 임진강을 도하하는 적군을 쉽게 관측·저지할 수 있는 요충이다. 칠중성과 육계토성은 임진강 北岸의 瓠蘆古壘(호로고루)와 마주 보고 있다.


육계토성 부근에 걸린 飛龍大橋(비룡대교)를 건너가면 연천군 白鶴面(백학면)이고, 백학면에서 임진강 北岸의 지방도로를 따라 西行하면 곧 고구려부흥군이 南下하던 唐軍과 격전을 벌였던 호로고루에 도달한다.


이곳은 南北(남북) 분단 전에만 해도 개성과 서울을 연결하는 중요한 길목이었다. 호루고루은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支流(지류)가 흐르면서 형성된 현무암 절벽 위에 축조된 고구려의 平地城(평지성)인데, 비교적 보존이 잘된 서쪽 성벽의 높이가 약 10m이다.


호로고루성에서 하류 방면으로 조금 西進하면 高浪浦(고랑포)이다. 고랑포는 철책선(GOP) 지역이어서 민간통제선이 북상한 이후에도 낚시꾼이나 가끔 찾는 쓸쓸한 곳이지만,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상선이 거슬러 올라왔던 임진강 水運(수운)의 중심 나루였다.


고랑포 동쪽에는 임진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도섭(걸어서 강을 건넘) 지점이 많다. 1968년 1월 청와대를 습격하기 위해 휴전선을 뚫은 북한 124군 소속 게릴라부대(김신조 일당 31명)도 고랑포에서 걸어서 임진강을 건너 청와대 외곽 자하문까지 침투했다.


2006년 10월, 필자는 고랑포 지역의 철책선을 지키는 장병들을 위문하러 간 김에 고랑포대대 제3중대 막사에서 1박을 하면서 특히 임진강 북안과 임진강 지류 砂尾川(사미천) 일대를 답사했다.


칠중성→임진강→고랑포→사미천을 잇는 통로는 문무왕 2년(662) 1월 金庾信(김유신)이, 평양성을 포위 공격하다 군량이 떨어져 전멸의 위기에 빠진 蘇定方(소정방)의 唐軍을 구원하기 위해 北上했던 기동로이다.


이때 김유신은 김인문·김양도 등 신라의 여덟 장수와 함께 군량미를 수레에 실은 수송부대를 이끌고 사미천변을 따라 북상하면서 상류의 白峙鎭(백치진)의 고구려 수비군을 돌파하고 토산→신계→수안을 거쳐 대동강 남안 中和에서 소정방 軍과의 연결에 성공했다. 아사 직전의 唐軍을 구원한 김유신 부대는 귀로에 고랑포에서 추격군을 역습해 고구려 장수 阿達兮(아달혜)를 사로잡고 적병 1만 명의 목을 베는 戰果(전과)를 거두었다.













































육상전 최후의 決戰場 買肖城(매소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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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랑포 지역을 둘러본 필자는 임진강 위에 걸린 飛龍橋(비룡교)를 건너 다시 적성면 마지리로 내려왔다. 마지리에서 323번 지방도로를 타고 4km쯤 남하하면 감악산 계곡(적성면 雪馬里)에 「英연방軍 전적비」가 보인다. 이곳은 설마리 전투 때(1951.4.22.∼4.25) 유엔군으로 6.25전쟁에 참전한 英연방 제29여단이 중공군 3개사단(제187&#8231 제188&#8231 제189사단)의 공격을 3일간 저지시킨 현장이다.


이때 여단의 前方에 추진되어 있던 글로스터대대는 중공군에게 포위된 채 탄약과 식량도 공급받지 못하는 악조건 하에서 병력의 90%를 상실하면서도 진지를 사흘간 고수했다. 설마리 전투에서 영연방 제29여단은 여단 전체가 많은 병력을 잃었지만, 전방의 글로스터 대대의 희생으로 동두천 지역으로 돌파하려는 중공군을 견제함으로써 차기 방어선(델타線) 구축과 서울 고수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감악산은 표고 675m이지만, 파주 일대에서 가장 높고 몸피도 굵은 산이다. 감악산 정상에 올라가면 임진강 남안과 북안에 위치한 칠중성&#8231 호로고루성이 내려다보이고, 동북쪽으로는 임진강의 支流(지류)인 한탄강이 보인다.


지금 감악산 계곡은 유원지로 변해 곳곳에 음식점과 산장에다 가요주점까지 들어서 있다. 334번 지방도로로 달려 감악산 계곡을 빠져나오면 연천군 신산리이고, 이곳에 飛龍師團(비룡사단) 본부가 주둔해 있다. 적은 핵무기까지 개발해 「서울 불바다」 운운하는 협박을 일삼고 있는데, 언제부터인가 최전선 接敵(접적)지역마저 긴장감이 사라져 버렸다.



동두천市에 진입해 3번 국도를 타고 북상하다가 경원선의 보산역 앞에서 군사문제연구소 연구원 권승진씨를 픽업해, 함께 買肖城(매소성)을 향해 출발했다. 매소성은 漢灘江(한탄강) 유원지에서 우회전해 포천 가는 322번 지방도로로 접어들면 왼쪽에 보이는 야산(연천군 靑山面 大田里) 위에 자리 잡고 있다. 지도에는 「大田里山城(대전리산성)」으로 표기되어 있다.


매소성은 地利(지리)를 살려 쌓은 요새이다. 북동쪽에서 흘러내리는 한탄강이 매소성 앞에서 급격히 꺾어져 임진강 본류로 합수된다. 한탄강 너머에는 은대리성과 전곡리土城을 껴안은 全谷邑(전곡읍)이 펼쳐져 있고, 서북쪽 멀리로는 開城의 鎭山(진산)인 송악산이 육안으로 보인다. 20여 년 전 이곳에 올라왔을 때 전곡읍은 허허벌판이었는데, 이제는 연천군 제1의 시가지를 형성하고 있다.


&lt&lt삼국사기&gt&gt 문무왕 15년 9월29일조에는 『李謹行(이근행)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주둔하자, 우리 군사가 그들을 격퇴시키고, 戰馬(전마) 3만380필과 많은 병기를 획득했다』고 쓰여 있다. 이후 唐軍은 신라군에 대한 지상전을 포기한다.


신라가 당시의 수퍼파워 唐에 開戰(개전)을 선포할 수밖에 없었던 大義名分(대의명분)에 대해선 文武大王이 당의 극동방면군 사령관에게 보낸 서한인 「答설인귀書」를 통해 이미 설명했다. 이제는 開戰 이후의 전투상황과 羅唐전쟁의 승패에 결정적 영향을 끼친 당시의 국제상황을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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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당을 先制공격할 수 있었던 국제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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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의 패망 후 唐(당)은 평양에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를 설치하여, 고구려와 백제의 故土(고토)는 물론 그때까지의 동맹국 신라까지 병합하려는 움직임을 노골화함에 따라 新羅의 문무왕은 對唐(대당) 선제공격을 결심했다. 그것이 670년 4월에 전개된 압록강 북방의 요새 鳳凰城(봉황성) 공격이었다. 이때 공격군의 지휘관은 신라의 사찬(관등 제8위) 薛烏儒(설오유)와 고구려부흥군의 태대형(관등 제1위) 高延武(고연무)였다. 연합군의 병력은 신라군·고구려부흥군 각각 1만 명이었다.


신라-고구려 연합군은 압록강을 건너 670년 4월4일 봉황성에서 이근행 휘하의 말갈군에 승리한 직후 唐軍 주력이 반격을 개시하려 하자 바로 압록강을 건너 南下했다. 그렇다면 신라가 唐에 선제공격을 감행할 수 있게 했던 국제적 상황의 변화는 무엇이었을까?


문무왕은 669년 9월의 唐-吐藩(토번: 티베트) 전쟁 발발 정보를 일찌감치 입수했던 것 같다. 당시 唐의 수도 長安(장안)에는 문무대왕의 동생 金仁問이 당의 벼슬을 받고 常駐(상주)하고 있었으며, 김유신의 동생 金欽純(김흠순)과 중국어에 능통한 파진찬 金良圖(김양도)가 謝罪使(사죄사)란 명목으로 파견되어 있었다. 사죄사는 신라의 백제 故土 잠식에 대해 唐고종이 분노하자, 그간의 경위와 입장을 설명하기 위한 외교사절이었지만, 唐고종은 김흠순과 김양도를 감옥에 가두는 폭거를 자행했다.


그렇다면 唐고종이 외교사절까지 투옥시킨 이유는 무엇일까? 역사의 기록은 누락되었지만, 김흠순과 김양도는 당연히 실크로드의 헤게머니를 둘러싸고 전개된 唐-토번 전쟁 추이를 주시하며 당군의 이동상황 등에 대한 정보를 수집했을 것이다.


신라 사람들은 국가안보에 관한 한 僧俗(승속)이 따로 놀지 않았다. 그 상징적 인물이 義相(의상) 스님이다. &lt&lt삼국사기&gt&gt에 따르면 이때 長安 남쪽 불교의 성지였던 終南山(종남산)의 至相寺(지상사)에서 華嚴學(화엄학)을 공부하던 義相(의상) 스님이 갑자기 귀국해 문무대왕만났던 것이다.


義相은 唐의 감옥에 갇힌 김흠순·김양도 등과 접촉해 서역을 향한 唐軍의 병력 이동상황을 청취했는지 모른다. 왜냐하면 의상 스님은 中國華嚴宗(중국화엄종)의 제3祖(조)에 오르는 전후의 시기에 개인적 출세를 포기하고, 급거 귀국했기 때문이다.


이 무렵 安東都護府의 최고사령관(都護)이었던 薛仁貴(설인귀)는 휘하의 병력을 이끌고 평양으로부터 靑海(청해) 방면으로 이동하고 있었다. 한반도에서 무려 1만3000리나 되는 머나먼 행군거리였다. 靑海湖(청해호)는 바다가 아니라 지금의 靑海省의 省都(성도)인 西寧(서녕·씨닝) 서쪽에 위치한 거대한 호수이다.


당시 세계의 메인 트렁크(Main trunk&#8231 主 교역로)였던 실크로드는 섬서성(장안)→감숙성 또는 청해성을 西進해 新疆(신강)위구르自治區 중심부에 위치한 타클라마칸 사막 주위의 오아시스 도시를 거쳐 東로마제국까지 연결되었다. 따라서 靑海는 실크로드의 「허리」 부분으로서 이곳이 막히면 唐으로선 東西무역의 이익을 상실할 수밖에 없었다.


唐고종이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설인귀를 부랴부랴 靑海까지 이동시켰다는 것은 설인귀가 唐의 최정예부대를 거느린 제1급 장수였음을 의미한다. 그러나 설인귀의 唐軍은 670년 8월 大非川(대비천: 靑海湖 남쪽) 전투에서 토번군에게 전멸당했다. 최고지휘관인 설인귀만 겨우 빠져나와 도주했던 참패였다.


그 결과 서역, 즉 지금의 신강위구르自治區에 있던 唐의 安西4鎭이 모두 토번군에게 떨어졌다. 신강위구르自治區라면 우리나라 광역시의 西區나 東區의 규모가 아니라 한반도 면적의 6배에 달하는 광활한 사막(南部)과 초원(北部)지대이다. 필자는 2003년 신강의 南部지역을 답사했는데, 여객기·전세버스·기차를 번갈아 타고 타클라마칸 사막 주위 오아시스 도시를 한 바퀴 도는 데만 13일간이나 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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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도독부의 패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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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10년(670) 5월, 唐고종은 左監門(좌감문)대장군 高侃(고간)을 東州道(동주도)행군총관, 말갈의 장수 李槿行(이근행)을 부총관으로 삼아 4만 병력을 또다시 한반도로 투입했다. 6월 고간과 이근행의 唐軍은, 일시 평양의 安東도호부를 점령했던 고구려부흥군을 밀어내고, 황해도로 남하했다.


이때까지 임진강 이북 지역의 전투는 고구려부흥군이 담당하고, 신라군은 백제 故土 점령작전에 집중했다. 6월, 文武王은 당군에게 쫓기던 고구려 유민들을 金馬渚(금마저: 전북 익산)에다 집단 이주시키고, 8월에는 보장왕의 庶子인 高安勝(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해 公州의 웅진도독부를 견제했다.


그러면서도 대아찬(관등 제5위) 金儒敦(김유돈)을 웅진도독부에 급파해 和議(화의)를 제의했다. 和戰(화전) 양면책의 구사는 문무왕의 常用수법이었다.


7월, 신라는 백제 故土의 82개 城을 점령함으로써 지금의 호남지역을 완전히 장악하고, 유민들을 대거 신라 內地(내지)로 이시켰다. 백제 유민에 대한 徙民(사민)정책은 웅진도독부가 백제 유민들을 선동해 對신라戰에 동원하려는 기도를 분쇄하려는 의도였다.


671년 7월, 문무왕은 서역戰線에서 한반도로 막 복귀한 唐의 행군총관 설인귀로부터 항의 서한을 받고 이를 반박한 「答설인귀書」를 보냈음은 앞에서 썼다. 唐고종은 669년 8월의 大非川 전투의 패장인 설인귀를 유배하려 했다가 功(공)을 세워 명예회복을 하라며 한반도 전선에 再투입했던 것이다.


671년 9월,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安市城(안시성)이 고간이 지휘한 당군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다. 그러나 10월, 신라의 水軍은 예성강 어귀로 진입하던 唐의 보급선을 습격하여 70여 척을 노획했다. 이로써 당군은 海路에 의한 병참선 확보에 실패했다. 예성강 전투의 패전으로 兵站線(병참선)을 유지할 수 없었던 당 지상군은 이후 약 1년간 南下할 수 없었다. 文武王으로서는 신라군을 재정비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를 얻었다.


문무왕은 당군의 主力이 고구려부흥군과 전투를 전개하던 사이에 백제 故土를 지배하던 당의 직할 통치기관인 웅진도독부를 완전히 축출하고, 長槍幢(장창당) 등 對기병부대를 창설해 전투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10월, 웅진성에 파견되어 있던 唐의 관원과 백제 유민 2000여 명이 47척의 선박에 분승해 왜국으로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이는 신라의 공세 때문에 웅진도독부가 더 버티기 어렵다는 전망 때문이었던 것 같다. 이어 672년 2월, 신라군은 대대적인 포위 섬멸작전을 전개해 웅진도독부를 사실상 소멸시켰다.


이에 당도 결전을 벌일 의도를 노골화했다. 672년 7월에 東州道행군총관 고간이 漢人(한인) 기병 1만 명, 李槿行이 말갈·거란병 3만 명을 이끌고 평양에 再진입했다. 이때 고간-이근행 軍은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평양 근교 韓始城(한시성)과 馬邑城(마읍성)을 쳐서 빼앗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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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군, 石門 전투에서 大敗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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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2년 8월, 당군은 南下하여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白水城(백수성: 황해도 白川&#8231 배천)을 포위 공격했다. 이때 신라군이 당군의 배후를 급습해 전황이 급반전되었다. 신라군과 고구려부흥군은 앞뒤에서 당군을 협격해 수천 명을 살상하고 수많은 전리품도 획득했다.


고간이 지휘했던 당군은 황해도 서흥으로 퇴각해 石門 들판에 진을 쳤는데, 신라군은 勝勢(승세)를 믿고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步騎(보기) 합동작전에 능숙한 당군의 유인작전에 빠져 신라군은 開戰 이래 최대의 참패를 당했다. 신라군이 적을 가볍게 본 결과이기도 했다. 다음은 석문전투의 패전상황을 기록한 &lt&lt삼국사기&gt&gt 김유신傳(전)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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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당군이 石門의 들판에 진을 치자 (문무)왕은 장군 義福(의복)·春長(장춘)을 보내 방어하게 하여 帶方(대방) 들판에 진을 쳤다. 이때 長槍幢(장창당)만은 별도로 진을 치고 있다가 당병 3000여 명과 싸워 그들을 잡아서 대장군의 진영에 보냈다. 이에 여러 幢(당: 부대)들이 함께 말하기를 「長槍營(장창영)은 홀로 있다가 공을 세웠으니 반드시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도 한데 모여서 헛되이 수고만 할 필요가 없다」고 하면서 마침내 각자 군대를 분산시켰다. 당병이 말갈과 함께 우리 군사가 아직 陣(진)을 치지 못한 틈을 타서 공격하여 오자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장군 曉天(효천)·義文(의문) 등이 여기서 죽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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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꼴 베는 아이나 소 먹이는 아이에 이르기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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緖戰(서전)에서 신라군은 장창당의 선전으로 당군 3000 을 포획했던 것이다. 장창당은 장창으로 무장한 병사들이 고슴도치 모습의 밀집대형을 이뤄 敵(적) 기병의 돌격에 대처하는 신라의 新設(신설) 보병부대였다.


신라군의 다른 부대들은 서전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운 장창당에 대해 시기심이 생겨 병력의 集中原則(집중원칙)을 무시하고, 병력을 분산 배치시키려다 미처 진을 치지도 못하는 상황에서 당군의 급습을 받고 궤멸적 타격을 받았던 것이다. 이때 신라군의 장군급 10여 명이 전사했다.


672년 石門 전투의 패배 이후 신라군은 공세에서 守勢(수세)로 전환할 수밖에 없었다. 사세가 급박해지자 문무왕은 唐고종에게 사죄사를 급파했다. 그때 문무왕의 表文(표문)은 『만일 용서를 내려 머리와 허리를 베지 않는 은혜를 베푸신다면, 제가 죽어야 할 날이 오히려 태어나는 날이 될 것입니다…』라는 내용이었다. 唐조정에 엄청난 진상품을 보내고, 유력 인사들에게도 뇌물을 뿌렸다.


이때 신라는 漢山州(한산주: 경기도 廣州)의 晝長城(주장성: 남한산성)을 축조해 江北의 北漢山城(북한산성)과 함께 한강 계선의 중요 방어기지로 삼았다. 당군이 임진강을 돌파하고 한강을 넘어올 것에 대한 대비책이었다.


673년 5월, 고간과 이근행이 지휘하는 당군은 임진강의 요지인 호로하(임진강 중류)에서 고구려부흥군의 저항을 물리치고 대거 남하했다.


673월 7월, 太大角干(태대각간)의 지위에 있던 김유신이 79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만년의 김유신은 野戰(야전)에 나서지는 않았으나 內政과 외교의 방향을 잡았던 전략가로서 활약했다. 그의 죽음은 신라의 위기였다. &lt&lt삼국사기&gt&gt의 史論(사론)에서는 다음과 같이 김유신을 평가했다. 史論이란 “史臣은 논한다”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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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신라(태종무열왕과 문무왕)가 김유신을 대우한 것을 보면 친근히 하여 간격을 두지 않았고, 임무를 맡길 때도 의심치 않았으니, 그의 계책이 실행되고 그의 말은 채용되어 …능히 功名(공명)으로써 일생을 마칠 수 있었다. (中略) 유신에 대한 온 나라 사람들의 칭송이 지금(고려시대)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士大夫(사대부)가 그를 아는 것은 그럴 수 있는 일이거니와 꼴 베는 아이나 소 먹이는 아이에 이르기까지 능히 그를 알고 있으니…&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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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은 자신과 김유신의 사이를 「물고기와 물」로 비유해 왔던 만큼 김유신의 죽음으로 상실감이 컸을 것이다. 1년 전 石門 전투에서 패배한 직후의 대책회의에서 김유신은 정세변동을 기다리며 堅壁(견벽: 튼튼한 성곽)에 의지한 방어전을 건의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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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의 敵병참선 차단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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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은 673년 8월 沙熱山城(사열산성)을 증축하고, 9월에는 國原城(국원성: 충주), 北兄山城(북형산성: 경주), 召文城(소문성: 의성), 耳山城(이산성: 고령), 主岑城(주잠성)·萬興寺山城(만흥사산성: 거창), 骨爭峴城(골쟁현성) 등을 축조하고 走壤城(주양성: 춘천 鳳山)을 요새화함으로써 적의 예상 공격로 상의 방어진지를 대폭 증강했다. 13개 성의 신축 또는 증축은 결사항전을 다짐하는 문무왕의 의지 표명이었다.


적과 내통하는 무리에 대한 대왕의 처리는 이번에도 냉엄했다. 唐에 붙으려 했던 아찬 金大吐(김대토)를 처형하고, 그 一家를 모두 賤人(천인)으로 만들었다. 이것은 적국에 국가기밀을 누설하던 「내부의 적들」에 대한 무서운 경고였다.


적이 임진강 계선까지 밀고 내려온 상황에서 신라군과 고구려부흥군은 고전을 거듭하고 있었다. 이때 만약 적의 수륙군이 합세하는 것을 허용한다면 상황은 더욱 불리해질 수밖에 없었다.


문무왕의 신라는 海路(해로)를 통해 침공 기회를 노리고 있던 적의군을 견제·소탕하기 위해 새로운 방어 전략을 수립했다. 673년 9월, 戰船(전선) 100척으로 편성된 신라의 함대가 대아찬(관위 제5위) 金徹川(김철천)의 지휘로 서해에 진출해 적의 해군 활동을 저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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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수륙 연합작전에 의해 적의 兵站線(병참선)을 차단함으로써 신라군은 호로하와 王逢河(왕봉하: 한강 하류) 등지에서 배고픈 당병과 싸워 9전9승했다. 이때 신라군은 적 2000 명의 목을 베었는데, 이밖에도 호로하와 왕봉하에 빠져 죽은 적병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다. 兵站線(병참선&#8231 Lines of communication)이란 작전부대와 그 작전 기지를 연결하고, 또 그 노선(통로)에 연해서 보급품과 군사 부대가 이동하는 모든 도로, 철도, 수로, 항로 들을 말한다.


673년 겨울, 당군은 예성강 중하류 지역에 위치한 牛岑城(우잠성: 황해도 금천) 등을 공파했다. 우잠성을 지키던 고구려부흥군은 병력의 열세와 무기·병량의 부족으로 패퇴했다. 말갈·거란군은 강원도 금강군 현리의 大楊城(대양성)과 강화도 對岸(대안)까지 진격해 童子城(동자성: 경기도 김포시 通津邑 문수산성) 등을 함락시켰다. 고구려부흥군의 패전으로 開戰 이래 처음으로 한강 계선이 일부 돌파되었던 것이다.


당군은 이때 신라군이 지키던 임진강 南岸의 七重城(칠중성: 경기도 파주군 적성)을 공격했지만, 패전하고 북으로 퇴각했다. 이로써 신라는 당군의 673년 겨울 공세를 저지하고 임진강 계선은 확보할 수 있었지만, 이 시기에 고구려부흥군은 거의 소멸했다. 석문전투(672년 4월)이후 당군의 공격은 673년 겨울까지 계속되었다.


































674년 1월, 唐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취소하면서, 문무왕의 동생인 金仁問(김인문)을 신라국왕으로 명한다는 조서를 반포하고, 劉仁軌(유인궤)를 鷄林道(계림도)대총관, 衛尉卿 李弼(위위경 이필)과 右領軍대장군 이근행을 副총관으로 삼아 김인문의 귀국을 호위하도록 명했다. 그러나 그 시점의 唐은 신라와 대규모 전투를 벌일 형편이 아니었다.


673년 12월, 토번의 배후조종을 받은 궁월 등 天山산맥 주변&nbsp西돌걸의 여러 유목부족들이 天山北路(스텝路&#8231 草原의 길)를 봉쇄하려 들자, 唐고종은 소정방 등 여러 장수들을 파견해 대대적 군사작전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唐은 신라 전선에서 공세를 유지하기 어렵게 되었다. 이로써 羅唐전쟁은 그로부터 약 14개월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신라로서는 전열을 재정비할 수 있는 천금 같은 시간을 얻었던 것이다.


이 시기에 문무왕은 백제 유민들로 구성된 「白衿誓幢(백금서당)」을 편성했다. 백금서당의 병력은 670년 신라군이 백제 故土의 82개 성을 점령하면서 신라 內地로 이사시켰던 백제 유민들인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당군의 주력이 왜 천산북로로 이동했던 것일까? 670년 토번에 天山南路(오아시스의 길)의 경영권을 상실한 당은 그 대안으로 천산산맥 북쪽으로 우회하는 스탭路(草原의 길)를 이용했는데, 이 길마저 위협당했기 때문이다.&nbsp&nbsp


말갈군으로부터 戰馬 3만380 필 탈취&nbsp&nbsp


그러나 상황이 반전된다. 675년 1월, 토번의 사절단이 長安에 들어가 唐과 토번 간에 일시 평화무드가 감돌았다. 이로써 서역 방면의 긴장이 일시 완화되자, 당은 즉시 한반도 작전을 재개했다. 675년 2월, 유인궤의 당군은 임진강 남안의 칠중성을 함락시켰다. 이어 칠중성을 전진기지로 삼아 이근행의 말갈군은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 남안의 買肖城(매소성)을 점령했다.


그러나 금세 토번과 당이 다시 긴장관계로 돌아섰다. 675년 2월, 唐고종은 칠중성을 막 점령한 유인궤를 서역 전선에 투입하기 위해 본국으로 소환하고, 그 이후 이근행이 安東진무대사로서 지휘권을 행사하게 했다. 말갈군과 거란군을 主力으로 삼은 당군이 남하하자 신라는 9軍을 출동시켜 방어전을 벌였다.


675년 9월, 설인귀의 水軍은 宿衛학생인 風訓(풍훈)을 향도로 삼아 임진강 하구로 침입했다. 風訓은 兵部令 재임 중 「근무에 태만하다」는 이유로 문무왕에 의해 숙청된 金眞珠(김진주)의 아들로서 唐에 유학 중이었다.


이때 金文訓(김문훈)이 지휘하는 신라 수군이 임진강 하구 泉城(천성: 교하읍 오두산성) 앞바다에서 설인귀의 수군을 강타했다. 이때 신라 수군은 적선 40여 척을 노획하고, 적병 1400명을 살상하는 승전을 거두었다. 설인귀는 戰馬 1000 필을 내버려 둔 채 포위망을 빠져 도주했다. 唐의 水陸(수륙) 연결작전이 이번에도 실패했던 것이다.


675년 9월29일, 신라 9군은 이근행이 지휘하던 말갈군단 20만 명과 매소성에서 대치했다. 설인귀의 임진강 하구의 泉城 전투 패배로 병참선을 유지할 수 없었던 이근행 軍은 전면 퇴각을 서둘렀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戰馬 3만380 필과 많은 무기·장비를 노획했다. 보급이 끊긴 이근행의 말갈군단은 퇴각하면서 약탈전을 감행했다. 다음은 당시의 상황을 전하는 &lt&lt삼국사기&gt&gt의 기록이다.&nbsp


&lt말갈이 阿達城(아달성)에 들어와 약탈하자 성주 素那(소나)가 전세를 역전시켰으나, 전사했다. 당군이 거란 및 말갈 군사와 함께 칠중성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小守(소수: 지방무관직) 儒冬(유동)이 전사했다. 말갈이 또 赤木城(적목성)을 포위 공격하자 현령 脫起(탈기)가 백성들을 이끌고 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백성들과 함께 전사했다. 당군이 또한 石峴城을 포위 점령하려 하자 현령 仙伯(선백)과 悉毛(실모) 등이 힘써 싸우다가 전사했다. 우리 군사가 당군과 크고 작은 열여덟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6047 명의 머리를 베고, 200 필의 전마를 얻었다.&gt


신라는 强小國(강소국)의 모델이라고 할 만하다. 신라의 武官들에게 敵前後退(적진후퇴)는 최대의 수치였다. 한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는 위와 같은 신라 사람들의 희생정신에 의해 성립되었다.


말갈족 출신 적장 李謹行&nbsp


매소성 전투 직후 이근행의 말갈군은 한반도를 떠나 西域(서역) 전선으로 급히 이동했다. 그는 羅唐전쟁 기간에 신라군과 가장 많은 전투를 벌인 적장이었다. &lt&lt舊唐書&gt&gt(구당서) 말갈傳에는 이근행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lt突地稽(돌지계)의 아들 근행은 외모가 빼어나고 무력이 남달랐다. 麟德(인덕: 664~666) 연간에 營州都督(영주도독)으로 부임했는데, 그 부락의 집이 수천이고 재력으로써 변방의 영웅이 되니 夷人(이인: 동쪽 오랑캐)이 모두 그를 두려했다. 우령군대장군에 累拜(누배)되어 積石道經略大使(적석도경략대사)에 임명되었다. 토번의 論欽陵(논흠릉) 등이 무리 10만을 거느리고 湟中(황중)에 쳐들어오자 이근행은 병사들에게 나무를 하도록 하면서 전혀 대비하지 않았다. 적이 도착한 것을 듣고, 드디어 旗(기)를 세우고 북을 치며 陣門(진문)을 열고 그들을 기다렸다. 토번군이 복병이 있을까 의심하여, 감히 진군하지 못하였다. 上元 3년(676) 또 토번의 수만 무리를 靑海에서 무찌르니 황제(唐高宗)가 璽書(새서)를 내려 그 노고를 격려해 주었다.&gt&nbsp


이근행의 아비 돌지계는 원래 營州(영주)에 자리 잡은 속말말갈 가운데 한 분파의 추장이었다. 돌지계는 일찍이 隋(수)나라에 항복했지만, 속말말갈은 원래 고구려의 附庸(부용)세력이었다.


속말말갈은 고구려가 隋(수)나라의 遼西(요서)지역을 선제공격했을 때 동원된 ‘말갈 기병 1만’이 바로 그들이다. 이근행은 충성의 공적으로 唐고종으로부터 國姓(국성: 李氏)을 받았다. 그와 靑海(청해)에서 싸운 논흠릉은 토번의 병권을 잡았던 인물로 뒤에서 詳論(상론)할 것이다.


676년 윤3월, 토번이 당에 대한 대규모 공세를 감행하는 시기에 이근행은 靑海 전선에 나타났다. 靑海에서 이근행은 劉仁軌(유인궤)와 합동작전을 벌였다. &lt&lt舊唐書&gt&gt 토번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lt上元 3년(676) 토번이 선주·廓州(곽주) 등 여러 州를 노략질하고, 人吏(인리)를 약탈하고 죽였다. 高宗이 尙書左僕射(상서좌복야) 유인궤에게 명하여 조하군 鎭守(진수)로 가서 이를 막게 했다. 儀鳳 3년(678) 중서령 李敬玄(이경현)에게 명하여 선주도독을 겸하게 하고, 그곳에 가서 劉仁軌를 대신해 조하진을 지키게 했다. &gt


676년 윤4월, 토번은 감숙성의 선주·곽주·하주·방주를 침공했다. 유인궤는 후임자인 이경현이 부임해 올 때까지 2년간 토번군의 대공세를 막았던 것이다. 이때 적석도경략대사 이근행은 전공이 혁혁하여 燕國公(연국공)으로 책봉되었다.&nbsp


22회 海戰에서 全勝&nbsp


676년 토번의 내분을 이용하여 당고종이 총공세를 가하려고 했을 때 나당전쟁은 휴전상태로 들어갔다. 이근행의 말갈군단이 서역으로 이동하여 청해의 對토번전에 투입되어 한반도 전선에 지상군을 투입할 여력이 없었던 것 같다. 그 대신 당고종은 설인귀의 함대를 한반도에 투입했다..


676년 11월, 薛仁貴(설인귀)의 唐 水軍(당 수군)은 서해안을 우회하여 금강 어귀로 진입하려고 시도했다. 사찬 金施得(김시득)이 지휘한 신라 수군이 설인귀가 지휘한 설인귀의 수군을 금강 하구의 伎伐浦(기벌포: 충남 서천군 장항읍) 앞바다에서 포착했다. 신라 수군은 첫 전투에서 패했으나, 이어 전개된 22회의 大小 전투에서 전승을 거두고 唐 수군 4000여 명을 살상했다.


기벌포 해전의 승리는 신라 수군 작전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렇다면 왜 이런 평가가 가능한 것인가?


22회의 해전은 그것이 해상기동전이었음을 의미한다. 종래의 해전은 接舷戰(접현전) 위주로 전개되었다. 접현전은 피아의 함선이 뱃전을 마주대어 싸우다 상대의 뱃전에 뛰어올라가 칼과 창으로 결판을 내는 방식이었던 만큼 대개 한두 차례의 접전만 벌려도 승패가 판가름 났기 때문이다.


기벌포 해전 당시, 신라 해군은 千步弩(천보노) 등 새로운 공격용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弩(노)는 短兵武器(단병무기)가 아니라 長兵武器(장병무기)로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전투할 때 위력을 발휘했다. 2016년 올림픽의 양궁에서 한국팀과 선수가 금메달을 싹쓸이하는 것도 결코 우연한 일은 아닌 것 같다.


신라의 弩(노)는 羅唐전쟁 開戰(개전) 직전에 이미 唐고종이 부러워했을 만큼 우수한 무기였다. &lt&lt삼국사기&gt&gt 문무왕 9년(669) 겨울 條(조)에 따르면 唐고종은 신라 弩의 기술자인 仇珍川(구진천)을 詔書(조서)로써 唐에 불러들여 弩 제조의 노하우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구진천은 끝내 그 비밀을 누설하지 않았다.&nbsp


&lt唐의 사신이 와서 詔書(조서)를 전하고, 弩(노)의 기술자인 사찬 구진천을 데리고 갔다. 황제(唐고종)가 弩를 만들고 나서 화살을 쏘아 보니 30步밖에 나가지 않았다. 황제가 『너희 나라 弩는 1000步를 나간다고 들었는데, 지금 만든 것은 겨우 30步밖에 나가지 않으니 그 이유가 무엇인가』고 물었다.


구진천은 『목재가 좋지 않기 때문입니다. 만약 신라의 목재로 만든다면 그렇게 만들 수 있을 것입니다』라고 대답했다.


황제가 사신을 보내어 목재를 요구하였으므로 대나마 福漢(복한)을 파견하여 목재를 바쳤다. 황제가 즉시 弩를 개조하게 하였는데, 개조한 후에 쏘아 보니 60步밖에 나가지 않았다.… 황제는 그가 고의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하여 重罪(중죄)를 준다고 위협해 보았으나 그는 끝까지 그의 재능을 모두 발휘하지 않았다.&gt&nbsp


신라가 海戰에 강했던 배경&nbsp


古代 중국은 전통적으로 육군국이었지, 해군국은 아니었다. 양자강 등에서 水戰을 벌이기는 했지만, 海戰의 경험은 거의 없었다.


반면 신라는 오랜 세월 倭(왜)와의 전투를 통해 해전 경험이 풍부했다. 「삼국사기」 유례이사금 6년(289) 여름 5월 조에는 『왜병이 온다는 정보를 듣고 선박과 병기를 수리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助賁尼師今(조분니사금) 3년 가을 7월 조에는『이찬 于老(우로)가 왜인과 沙島(사도)에서 싸우는데,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질러 왜선을 불태우니 적들이 물에 빠져 모두 죽었다』는 기사도 보인다.


신라는 이후에도 292년·297년·346년·364년·394년·405년·407년·500년에 海路(해로)로 침입한 왜군과 싸웠다. 신라와 倭가 자주 싸운 것은 신라가 가야 여러 나라를 무력으로 잠식해 들어가자 규슈(九州) 지역에 산재해 있던 가야系 왜의 小國들이 신라에 적대감을 가지고 신라를 공격했기 때문으로 보인다.


따라서 신라는 일찍부터 해군을 창설·육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는 소지왕 15년(493) 臨海鎭(임해진)과 長嶺鎭(장령진)을 설치하고 해군기지를 보강했다. 신라의 선박 건조 기술은 同시대 최고 수준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 古墳(고분)에서 발굴된 배 모양의 5~6세기 토기가 이런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신라의 함선은 바다에서 풍파를 만나도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뱃머리(이물)와 꼬리(고물)를 비교적 높게 만든 構造船(구조선)이었다. 船首(선수)도 파도를 헤치는 데 알맞게 예리하다. 오른쪽 끝에 있는 돌출부는 전투시 적선에 기어오르기 위한 사다리로 보인다. 유럽 선박들의 발달사를 보더라도 신라의 함선과 유사한 선형의 배들은 14세기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신라는 의외로 海軍 강국이었다. 소지마립간 22년(500) 봄3월, 왜적들이 長峯鎭(장봉진)에 침입했다가 쫓겨간 후 160여 년간 다시는 한반도 해역에 나타나지 못했다.


신라 수군은 기벌포 해전에서 승리함으로써 압록강 이남에서의 당군의 작전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병참선 유지가 어려운 상황에서 對신라戰 강행은 唐으로서도 모험이었던 것이다.


기벌포 전투 패전 후 당군은 더 이상 한반도에 침공군을 투입하지는 않았다. 그렇다고 평화가 도래한 것은 아니었다. 對토번 전쟁이 호전되면 언제든 한반도를 다시 침략하겠다는 것이 唐고종의 의지였다. 신라로서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긴장의 시대가 그 이후 무려 60년간이나 계속된다.


唐은 676년 평양에서 요동으로 옮겼던 安東도호부를 677년 2월에는 新城(신성: 지금의 무순)으로 더욱 후퇴시켰다. 唐고종은 고구려의 보장왕 高藏(고장)을 요동도독에 임명하고, 다시 조선왕으로 책봉했다. 웅진도독 扶餘隆(부여융)도 帶方王(대방왕)으로 책봉되었다. 전통적인 以夷制夷(이이제이), 즉 오랑캐로써 오랑캐를 제압하는 정책이었다.


그러나 高藏(고장)은 오히려 反唐투쟁을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37019州(공주: 사천성 &#37019崍縣&#8231 공래현)로 유배되었고, 요동에 再이주되었던 고구려 유민 2만8000여 호도 또다시 감숙성과 하북성 등지로 분산 이주당했다. 帶方王(대방왕) 부여융은 신라의 공격을 받을 것이 뻔했던 만큼 감히 한반도로 들어오지 못했다.


678년, 신라는 船府(선부)를 설치해 종래 兵部의 大監(대감)과 弟監(제감) 등이 관장하던 水軍&#8231 造船(조선) 업무를 전담시켰다. 船府의 설치는 신라의 水軍 발전을 위한 획기적 조치였다. 신라가 삼국통일로 이전보다 3배나 되는 영토를 장악하게 되고, 국토의 3면에 바다를 낀 해양국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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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羅는 비록 자주 불순하지만, 일찍이 변방을 침범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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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년의 기벌포 전투는 승리했지만, 당시 사람들의 시각으로는 나당전쟁이 끝난 것이 아니었다, 만일, 토번이 패망한다면 당이 이끄는 말갈군단은 또다시 신라로 말머리를 돌릴 수 있었던 것이다.


신라와 토번은 물론 군사동맹을 맺은 바 없었지만, 수퍼파워 唐을 東·西 양쪽에서 끼고 견제·협공했다는 점에서 손발이 척척 맞았던 셈이다. 677년 5월, 토번은 扶州(부주)의 臨下鎭(임하진)을 공격했다.


그런데도 신라를 먹으려는 唐고종의 집념은 변함이 없었다. 하지만 토번에 대한 정벌이 시급했기 때문에 신라에 대한 재침은 결국 불발로 끝났다. 다음은 &lt&lt資治通鑑&gt&gt(자치통감) 의봉 3년(678) 9월 條의 기사이다.



&lt高宗이 장차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토벌하고자 했다. 병으로 집에 누워 있던 시중 張文瓘(장문관)이 입궐하여 高宗에게 간했다.


『지금은 토번이 침구하니 바야흐로 군대를 일으켜 서쪽을 토벌해야 합니다. 신라는 비록 자주 불순하지만, 일찍이 변방을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또 東征(동정)을 한다면, 臣(신)은 그 폐가 공사 간에 심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에 唐고종은 (對신라戰을) 중지했다. 癸亥(계해)에 장문관이 죽었다. 丙寅(병인)에 李敬玄의 장병 18만이 靑海에서 토번의 論欽陵과 싸우다 패했다.&gt



678년 9월, 左衛대장 劉審禮(유심례)가 토번에 대해 대규모 반격을 시도했지만, 오히려 토번군의 포로가 되는 참패를 당했다. 토번은 이후에도 唐의 변경을 계속 기습했다. 680년에는 토번이 사천 서북부 지역의 전략적 요새인 安戎(안융)을 점령했다.


679년 10월, 唐과 토번은 文成公主의 노력으로 일시 화해했다. 문성공주는 641년 당태종의 황녀(사실은 당태종의 사촌인 李道宗의 딸)로서 토번의 승첸칸포에 시집 간 여성이다,


&lt&lt자치통감&gt&gt 의봉 4년(679) 10월 조에는 『文成公主(문성공주)가 대신 論塞調(논새조)를 파견하여 만첸칸포(승첸칸포의 후계 칸포)가 죽은 것을 고하고 화친을 청하자, 황제(唐고종)가 낭장 宋令文(송영문)을 토번에 장례사절로 보냈다』고 기록되어 있다.


토번 측의 기록에 따르면 만첸칸포는 676년 겨울에 병사한 것으로 되어 있다. 토번에서는 왕이나 고위귀족이 죽으면 가매장했다가 3년 후에 장례를 치르는 것 같다. 왜냐하면 680년에 사망한 文成公主도 3년 후인 683년에 장례가 거행되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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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번의 영웅 論欽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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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년 만첸칸포의 왕위를 계승한 그의 아들 치토슨(器弩悉弄)은 나이가 어려 국정은 병권을 장악하고 있던 論欽陵(논흠릉)이 맡았다. 이때 토번은 왕위계승을 둘러싼 심각한 내분을 겪었다. 다음은 &lt&lt冊府元龜&gt&gt(책부원귀)의 관련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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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儀鳳 원년(676) 칸포가 죽었다. 그때, 嫡子(적자) 치토슨은 大臣 麴殺若(국살약)과 함께 羊同(토번의 부용국)에서 兵馬(병마)를 징발하고 있었다. 만첸칸포가 죽었다는 말을 듣고 즉각 귀국하여 칸포가 되었다. 그때 나이가 여덟 살이었다. 그의 동생은 여섯 살로서 論欽陵(논흠릉)의 부대에 있었다. 欽陵이 강성하여 치토슨의 동생을 받들어 칸포로 삼으려 했지만, 마침내 欽陵이 大義에 따라 殺若과 協心(협심)함으로써 치토슨의 왕위가 비로소 확정되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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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살약은 만첸칸포의 사망 당시에는 그의 외손(혹은 생질)인 치토슨을 데리고 西部 티베트高原에 위치한 羊同(양동)에 나가 있다가 만첸칸포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 羊同의 군사를 거느리고 급거 귀국했다. 그때 논흠릉은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라사(拉薩)로부터 5000리(1907km) 북방의 靑海 지역에서 유인궤·이근행 등의 당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이고 있었다.



唐고종은 토번의 왕위계승의 결과가 불확실한 상황에서 裵行儉(배행검)에게 명하여 토번 내부의 분열공작을 전개했다. 그때 치토슨과 국살약은 羊同의 군대를 데리고 수도인 라사로 먼저 입성했다. 복잡한 양상을 띠고 있었던 당시 토번의 내분을 조금 짚어 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羊同은 승첸칸포 재위時에는 토번의 강력한 라이벌이었다. 승첸칸포는 그의 여동생을 羊同의 王 리그미에게 시집을 보내고서야 평화관계를 유지할 수 있었다.


승첸칸포는 기회를 노렸다. 664년, 羊同의 왕비가 된 승첸칸포의 여동생은 남편 리그미가 屬國(속국)인 숨파에 순시하러 간다는 정보를 그녀의 오빠 승첸칸포에 알렸다. 승첸칸포는 길목에 복병을 깔아 리그미 王을 격살했다. 이로써 승첸칸포는 티베트고원을 통일할 수 있었다.


토번은 羊同을 힘으로 굴복시키기는 했으나 직할 통치는 하지 못했던 듯하다. 토번의 「年代記(연대기)」에 따르면 만첸칸포의 사망 직후인 676년 연말과 677년 정초에 이르는 시점에 羊同은 논흠릉이 이끄는 토번군에 의해 가혹하게 토벌되었다. 국살약에게 협조한 羊同은 논흠릉에게 기분나쁜 존재였을 것이다.


만첸칸포가 사망하기 이전에 이미 왕비 로(沒祿)씨와 그녀의 친정오빠 국살약을 중심으로 하는 파벌은 權臣 논흠릉의 정권장악을 반대하는 입장이었다. 왕비 로氏는 국살약과 짜고 對唐전쟁에 몰두하고 있는 논흠릉과 사전협의도 없이 羊同의 군사까지 동원해 그녀의 소생인 치토슨을 후계왕으로 즉위시켰던 것이다.


이때 논흠릉은 중대한 정치적 양보를 했다. 唐과 전쟁을 하는 상황에서 내부 권력투쟁을 벌인다면 실크로드의 이권을 포기해야 할 뿐만 아니라 나라가 멸망할 것이기 때문이었다. 논흠릉은 치토슨을 후계 칸포로 받들기로 하는 한편 토번의 병권을 계속 장악해 對唐戰을 줄기차게 전개했던 것이다.


679년, 문성공주의 노력으로 당과 토번은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이런 상황에서 681년 당은 東돌궐의 반란을 진압할 수 있었다.


690년 7월, 측천무후는 자신을 彌勒佛(미륵불)로 자칭했다. 동년 9월에는 당의 국호를 폐지하고, 武씨 왕조인 周(주)를 창업했다. 무측천은 중국역사상 前無後無(전무후무)한 女帝(여제)가 되었다. 그런데 &lt&lt삼국사기&gt&gt신문왕 12년(692) 조에는 다음과 같이 이해하기 어려운 기사가 있다.


&lt唐中宗(당중종)이 사신을 보내 구두로 다음과 같은 칙령을 전했다. “우리 太宗 文皇帝(태종 문황제: 李世敏)는 신성한 공덕이 천고에 뛰어났으니, 붕어하는 날 廟號(묘호)를 太宗이라 하였다. 그런데 너희 나라 先王 김춘추에게도 동일한 묘호를 쓴 것은 매우 참람된 일이니, 조속히 칭호를 고쳐야 한다.” &gt



692년이라면 무측천이 周를 창업하고 즉위한 지 3년째이다. 따라서 위의 ‘唐中宗’은 ‘周則天’(주측천)이라고 해야 옳다. 신문왕으로서는 양자택일을 강요당한 셈이었다.


하나는 태종무열왕의 추존명을 고치고, 당에 굴욕외교를 하는 것이었고, 다른 하나는 당에 결사항쟁을 준비하면서 그것을 고수하는 것이었다. 다음은 이에 대한 신문왕의 답변이다.


&lt“우리나라 先王 김춘추의 시호가 우연히 聖祖(성조)의 묘호와 서로 같게 되었는데, 칙령으로 이를 고치라 하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건대, 선왕 김춘추도 어진 덕이 있었으며, 더구나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을 얻어 한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을 통일하였으니, 그의 功業(공업)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


신문왕의 말은 부드러웠지만, ‘太宗’이란 묘호가 중국의 전유물이 아니다는 원칙에서 한걸음도 양보하지 않았다. 서영교 교수는 그 배경을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lt전자를 택하면 신라 내부의 정치적 부담이 너무 컸다. 선덕여왕 폐위를 결정한 和白의 권위를 무력으로 뒤엎고 정권을 장악한 후 신라사회를 통일전쟁이란 국제전에 끌어들인 태종무열왕 김춘추, 그의 추존명의 개칭은 中代왕권의 존재 의미를 부정하는 것이나 다름없었다. 나아가 이는 통일전쟁에서 왕의 이름으로 사라져 간 자들의 희생을 덧없는 것으로 만들어, 살아 있는 자들의 충성을 감퇴시킨다.


후자를 택하자면 세계 최강의 당과 일전을 불사하는 부담이 따른다. 신문왕은 자신의 왕국을 무력으로 파괴할 수도 있는 唐제국의 요구를 거절할 수도 없다. 그렇다고 해서 당에 굴복하여 中代왕실의 창건자 太宗의 칭호를 개칭하고서는 진골사회 내부에서 무열왕계의 카리스마 상실로 이어질 것이 확실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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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아시아 세계의 平和체제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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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이후에도 船府(선부) 신설, 誓幢(서당: 군단)의 증설, 騎兵(기병)의 증강 등 대규모 군비확장을 계속했다. 특히 690년에는 騎兵(기병)을 말에서 끌어내리는 갈구리가 主力 무기인 皆知戟幢(개지극당)을 신설했다. 세계제국으로 건재했던 唐은 언제든 대내외 정세가 호전되면 다시 신라와의 전쟁을 감행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양국 간 국력의 차이가 현저했던 만큼 전쟁 재발에 대한 우려는 신라의 몫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문무왕은 왜국과의 관계개선에 적극적이었다. &lt&lt日本書紀&gt&gt와 &lt&lt속일본기&gt&gt에 의하면 668년부터 700년까지 신라는 25회에 걸쳐 왜국에 사신을 파견했다. 사절단의 대표도 대아찬(관등 제5위) 이상의 진골왕족이나 고위급이 많았다. 심지어 675년 2월에는 왕자 金忠元(김충원)을 사절로 보내기도 했다.


679년 토번의 유력한 동맹인 西돌궐의 여러 부족이 당군에게 격파되어 그 可汗(가한)이 사로잡히고, 토번도 만첸칸포가 죽은 후 태후와 권신 논흠릉 사이의 암투가 지속되는 내분상태에 있었다. 이때 신라를 재침하려던 唐고종의 야망이 시중 張文瓘(장문관)의 만류로 이루어지지 못했지만, 문무왕으로서는 위기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었다. 그해 10월부터 본격화된 신라의 對일본 평화공세는 위와 같은 西域정세와 무관하지 않았던 것이다.


나당전쟁 승리 이후에도 노심초사(勞心焦思)하던 문무왕은 681년 7월1일 죽고, 그의 아들 神文王(신문왕)이 즉위했다. 신문왕도 9誓幢(서당)을 완성하는 등 군비확장에 힘썼다.


683년 12월, 唐고종이 죽었다. 이후 22년간 武則天(무측천) 중국의 절대권력을 장악했다.


698년, 고구려유민과 말갈족을 이끈 大祚榮(대조영)이 고구려의 故土 만주에 渤海(발해)를 세웠다. 732년 발해군이 요동반도의 요충 登州(등주)를 선제공격해 등주자사 韋俊(위준)을 죽였다. 733년 발해&#8231 당 간의 전쟁이 확대되자 唐은 신라에 접근했다. 성덕왕은 당현종의 요청에 따라 발해의 남부국경으로 신라군을 진군시켰지만, 폭설 때문에 회군했다.


성덕왕 34년(735)에 唐玄宗은 신라가 영유하고 있던 평양 이남의 땅을 공식적으로 인정하했다.


737년 발해 무왕의 둘째 왕자인 大欽茂(대흠무)가 문왕으로 즉위한 것을 계기로 당과의 관계가 개선되었다. 이후 東아시아 세계는 장기적 평화체제로 진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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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OX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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吐藩의 西域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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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의 西域 경영에 있어 최대의 라이벌은 吐藩(토번)이었다. 전설상 “하늘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온 天孫”이라는 네치첸 칸포가 창업한 토번은 6세기 후반 중앙아시아 티베트 남부에 거점을 두고 대두, 「승첸」칸포(王)에 이르러 티베트를 통일했다.


승첸칸포는 唐태종에게 공주를 아내로 맞겠다고 청했는데, 唐태종은 처음엔 거절했으나 변경을 강타한 토번군의 침공을 받고 화의가 이뤄져 641년 文成公主(문성공주)가 황족인 江夏王 李道宗(강하왕 이도종)의 호위를 받으며 토번의 수도 라사로 가서 승첸칸포와 결혼했다. 李道宗이라면 당태종과 4촌간으로 문성공주의 親父(친부)이다.


승첸칸포가 죽은 후 토번은 靑海 지역의 吐谷渾(토욕혼)의 귀속을 둘러싸고 唐과 싸워 점차 전쟁의 규모를 확대시켰다. 662년, 토번은 西돌궐의 일부인 弓月(궁월)과 손을 잡고 토욕혼을 멸망시킨 후 본격적으로 西域(서역: 지금의 新疆위구르自治區)에 진출해 호탄(和田)을 공격하고, 670년에는 쿠차, 카슈가르, 호탄, 카라샤르 등 唐의 安西4鎭을 모두 함락시켰다. 이에 安西都護府는 지금의 투루판인 西州(서주)로 물러났다.


675년, 唐은 安西4鎭을 탈환했지만, 토번은 곧 西돌궐의 阿史那都支(아사나도지) 등과 함께 또다시 安西도호부와 4鎭을 함락시켰다. 이후에도 안서4진은 당과 토번이 번갈아 가며 차지했다.


679년, 唐은 長安에 망명해 있던 사산朝 페르시아의 왕자 페로스(사실은 그의 아들 나르세스)를 고국에 돌려보낸다고 사칭하고 호위병을 가장한 원정군을 보내 무방비 상태의 阿史那都支를 포획했다. 이때 당군은 스이아브(碎葉) 등 4鎭을 회복해 스이아브城을 중국식으로 축성했다. 687년에도 토번이 서역을 제압했지만, 또다시 王孝傑(왕효걸)의 당군이 토번군을 무찌르고 스이아브를 포함한 4鎭을 탈환했다.


7세기 후반은 唐과 토번의 서역 쟁탈전이 일진일퇴를 반복하던 시기였다. 그러나 8세기 전반은 唐玄宗의 중흥기로서 唐의 세력이 서역에서 優位(우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8세기 중반, 토번은 「安史의 亂」으로 혼란에 빠진 唐을 누르고 서역의 실크로드( 오아시스路)를 모두 장악했으며, 唐代宗 원년(763)에는 唐의 수도 長安을 일시 점령하는 등 최고의 황금기를 구가했다. 그때의 「長安 점령 기념비」가 현재 라사의 포탈라宮 앞에 보존되어 있다.


토번은 군사국가조직과 기마부대의 기동력을 활용해 大帝國을 지향했다. 790년에는 서역과 天山 북쪽 스텝路[草原의 길]까지 일시 지배했다. 그러나 같은 무렵부터 성행한 불교사상의 영향으로 821년 唐나라와 평화조약을 맺었다. 그 후 불교에 의한 理想(이상)국가의 실현을 꿈꾸었으나 帝國 운영과의 모순이 확대되어 846년 멸망했다.


토번의 故地인 티베트는 현재 中國의 1개 省으로 취급되는 西藏自治區(서장자치구)로 되어 있어 토번의 후예들은 중국으로부터의 독립을 열망하고 있다. 한국 정부는 중국의 눈치를 보느라고 티베트의 종교지도자 제14대 달라이 라마의 입국비자를 발급해 주지 않았다. 金大中 대통령은 야당지도자 시절에 달라이라마를 초청했지만, 그의 집권기에 달라이라마의 한국방문이 실현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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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제14대 달라이 라마와의 會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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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의 소원은 티베트에서


불교를 공부할 수 있는 자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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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8월, 필자는 印度佛敎(인도불교)가 존속하고 있는 인도의 북부 ‘잠무 앤 카슈미르’州를 여행하던 도중, 인도의 다람살라에서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제14대 달라이라마와의 접견”이 허락되었다는 급보를 받고 州都 레(Leh)에서 지프를 타고 출발, 2박3일간 표고 5000m의 고개 3개를 넘으면서 다람살라에 도착했다.


제14대 달라이라마의 제자인 麗水(여수) 석천사 주지 眞玉(진옥) 스님이 회견을 주선했다. 회견은 8월4일부터 6일까지 사흘간 다람살라市의 남갈寺院(사원)에서 개최된 ‘달라이 라마의 한국 佛子(불자)를 위한 법회’가 시작되기 전 20분간씩 세 번에 걸쳐 진행되었다. 회견기는 &lt&lt월간조선&gt&gt 2008년 9월호에 실렸는데, 여기서는 ‘한국과 티베트의 특별한 인연’과 관련한 대목을 중심으로 그 일부를 발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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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14대 달라이라마는 미소를 머금고 접견실에 나타났다. 그의 온화한 미소는 오늘날 티베트가 처한 정치적 險路(험로)를 잠시 잊을 정도였다. 달라이 라마는 “우리가 원하는 것은 티베트에서 불교를 공부할 수 있게 하는 진정한 自治(자치)”라고 말문을 열었다.



“티베트에서 寺院(사원)은 불교문화의 寶庫(보고)이며, 배움의 場(장)입니다. 그러나 중화인민공화국의 점령(1950년 10월) 이래 티베트 사원과 승려가 심각한 수준으로 격감되엇습니다. 간신히 존속하는 사원에 티베트인이 불교를 공부하기 위해 입학하는 것조차 엄격히 규제되고 있습니다. 종교의 자유를 요구하면 ‘분열주의자’로 지목되고 있는 실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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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12티베트인들은 중국으로부터 완전 독립해야 한다는 견해와 ‘진정한 자치’라면 받겠다는 견해로 나눠져 있습니다. 聖下(성하)의 견해는 무엇입니까?


“이대로 두면 티베트 불교는 단절됩니다. 진정한 의미의 자치가 필요합니다. 티베트에는 나란다大學(대학)의 불교학 전통, 티베트語로 완역된 불경 등 보존해야 할 분교문화 유산이 많습니다. 물론 티베트인들 중에도 나와 다른 생각을 가진 이들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나는 그들에게 ”입 다물어!“라고 말할 권리가 없습니다. 사람은 누구든 비난할 수 있는 권리를 가지고 있거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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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 다람살라의 상주인구 20만의 대부분은 제14대 달라이 라마를 따라 망명한 티베트인들과 그 후손들이다. 다람살라 거리에는 티베트의 완전 독립‘을 주장하는 플래카드를 게시해 놓고 있는 티베트인이 필자의 눈에 띄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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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12한국은 티베트에 세 가지 역사적 채무를 지고 있습니다.


첫째, 신라의 문무대왕은, 티베트와 당나라가 실크로드 쟁탈전을 벌이는 기회를 포착하여, 나당전쟁에 승리해 한국사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했습니다.


둘째, 조선왕조의 세종대왕은 15세기에 한글을 창제하면서 몽골문자를 참고로 했는데, 몽골문자는 티베트의 승려로서 쿠빌라이 칸의 帝師(제사)였던 팍파가 티베트 文字를 기초해 만든 것입니다.


셋째, 1950년 10월에 중공군이 한국과 티베트를 거의 동시에 침략했는데, 그 결과 남북통일을 목전에 둔 한국은 중공군 개입으로 영토의 절반을 잃었고, 티베트는 주권을 빼앗겼습니다.



“한국은 티베트보다 200년 앞서 부처님의 제자가 된


선배의 나라입니다“



“티베트와 한국의 관계사는 깊은 것입니다. 나는 圓測(원측) 대사가 華嚴經(화엄경)을 한문으로 번역한 사실은 알았습니다만, 그 분이 당나라에 유학한 신라의 고승이었지는 처음엔 몰랐습니다. 한국과 티베트의 인연이 21세기에 다시 이어져 法會(법회)를 함께 하게 된 것을 기쁘게 생각합니다.


한국은 티베트보다 200여년이나 앞서 부처님의 제자가 된 선배의 나라입니다. 티베트는 나란다大學에서 꽃피운 불교 유산을 풍부하게 보존하고 있는 만큼 서로의 교류를 더욱 심화시켜 나가면 좋을 것입니다.


나는 8.15 광복 이후 한국인이 달성한 민주화와 경제발전에 깊은 감명을 받고 있습니다. 또 내가 (1959년 중국 관헌을 감시를 피해) 인도에 망명했을 때 갖고 온 藏經(장경) 가운데 한국에 없는 것을 서울의 동국대에 기증한 바 있습니다.“


渡唐(도당)유학승인 원측은 唯識學(유식학)의 새 지평을 연 최고 지식인으로서 삼국통일전쟁 시기와 나당전쟁 시기에 東아시아 3국(신라&#8231 당&#8231 왜국)의 정신세계를 리드했던 인물인 만큼 이 접견기 바로 뒤에서 재론할 것이다.


―聖下(성하)의 한국 방문을 바라는 한국인들이 많은데, 그것이 성사되지 않은 까닭이 무엇입니까.


“오래 전부터 추진해 왔지만, 여러 가지 이유로 이뤄지지 못했습니다. 만약 한국에 가게 된다면 내가 어디서건 강조했던 善行(선행)과 和合(화합0에 대해 말하고 싶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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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는 말을 부드럽게 하는 지도자라고 느꼈다. “한국 정부가 중국 정부의 압력을 받고 나의 한국 방문을 막은 것”이라는 따위의 非외교적 言表(언표)를 회피하면서, 답변이 곤란한 질문에 대해서는 웃음으로 넘기기도 했다.


―중국에 영토를 빼앗긴 만주, 내몽골, 위구르, 티베트 등이 조직체를 구성해 공동의 문제를 중국과 협상할 용의는 없으십니까?


“그런 협의체를 1959년에 이미 구성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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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9시에 시작되는 달라이 라마의 강연 때문에 인터뷰는 세 번 모두 미진한 느낌 속에서 끝났다. 오후 늦게라도 인터뷰를 할 수 있는 기회를 타진했지만, 베석한 眞玉 스님은 “尊者(존자)께서는 오후 5시 이후에는 사람을 만나지 않는 다”면서 이렇게 설명했다.


“달라이 라마께서는 매일 4시간씩 명상을 하십니다. 명상의 목표 중 하나가 집착을 버리는 것이며, 집착을 버리면 실용적인 생각을 가질 수 있다”고 말씀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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달라이 라마는 오전에 2시간30분간, 오후에 2시간30분간 등 하루에 5시간씩 연 사흘에 걸쳐 500여 명의 한국 불자들에게 說法(설법)을 했다. 법회에 참석한 불자들 중에는 여름방학을 이용해 인도를 여행하다가 달라이 라마의 강론을 듣기 위해 다람살라에 온 한국 대학생들도 적지 않았다.


미국&#8231 독일&#8231 영국&#8231 프랑스 등 서구의 불자와 인도&#8231 일본&#8231 대만&#8231 싱가포르 등 아시아권의 불자는 대강당 바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서 영어로 동시통역되는 강론을 들었다. 상당한 체력 소모를 동반될 강론을 달라이 라마는 지친 기색 없이 울림이 강한 바리톤의 음성으로 이어갔다. 달라이 라마의 강론 내용은 지면 관계상 여기서는 생략한다.



중국의 譯經사업을 주도하면서 東아시아의 정신계를


리드한 신라의 학승 圓測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필자와의 회견 중에 신라의 학승인 圓測(원측)의 학문을 높이 평가했다. 바로 그 원측의 유골을 모신 부도탑을, 필자는 1995년 5월 西安의 남쪽 교외인 長安縣 小陵原(장안현 소릉원)에서 우연히 목격했었다.


당시, 필자는 중국불교의 聖地(성지)로서 신라의 명승 義相(의상)이 10년간 求道(구도)했던 終南山(종남산)을 답사하러 가던 도중에 장안현을 지나치다가 우연히‘전국보호유물단위 제1호’라고 쓰인 현판에 끌려 興敎寺(흥교사)라는 이름의 사찰을 둘러보았다.


흥교사의 뜰에는 3基의 사리탑이 우뚝 서 있다. 가운데의 것이 &lt&lt大唐西域記&gt&gt(대당서역기)의 저자로 유명한 승려 玄&#22872(현장: 602∼664)의 사리탑이고, 그 좌우에는 현장의 두 제자인 圓測(원측: 613∼696)과 窺基(규기: 632∼682)의 사리탑이다.


불교도가 아닌 일반인에게 현장은 손오공&#8231 저팔개&#8231 사오정을 데리고 인도에 불경을 구하러가면서 겪은 갖가지 모험담을 픽션화한 &lt&lt西遊記&gt&gt(서유기)를 통해 더 유명해진 고승이다. 그렇다면 “中國唯識學(중국유식학)의 지평을 연 인물”로 평가받는 신라의 학승 원측은 누구이며, 왜 거기에 뼈(사리)를 묻었던 것인가.


원측의 속명은 金文雅(김문아). 신라 왕족이다. 원측 스님이 언제 渡唐(도당)했는지는 확실치 않다. 다만 열다섯 살인 627년에 고승을 찾아 수학했다는 기록이 있는 것으로 보아 이때쯤 중국으로 건너간 것으로 보인다.


645년, 현장이 인도에서 많은 경전을 가지고 귀국하자 중국 불교계의 분위기가 크게 바뀐다. 현장이 &lt유가론&gt과 &lt성유식론&gt으로 대표되는 唯識(유식)의 새로운 경전을 번역&#8231 소개할 때 원측은 그 누구보다 빠르게 이들 사상을 이해하고 수용했다. 그가 역경사업에 참여했던 것은 산스크리트語 등 6개 국어에 통달했던 데다 오랫동안 익힌 유식의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석가모니의 母語(모어)는 팔리語이다. 팔리語는 산스크리트語의 한 갈래이자 방언이다. 석가모니의 말씀을 기록한 경전은 원래 팔리語로 쓰여졌고, 석가모니 涅槃(열반) 후 산스크리트語로 되어 번역되었다. 필자로서는 원측이 팔리어까지 습득했는지는 알 수 없다. 현재, 한국에서도 팔리어를 배울 수 있다. 봉선사의‘산스크리트 편집실’이라는 카페에서 부정기적으로 무료강좌가 열린다고 한다.


宋나라의 贊寧(찬녕)이 지은 &lt&lt宋高僧傳&gt&gt(송고승전)에서는 다음의 재미있는 일화가 전하고 있다.


&lt 현장이 그의 애제자인 窺基(규기)에게 전수하는 유식론과 유가론을 강의할 때, 원측은 문지기에게 뇌물을 주고 마루 밑에서 盜講(도강)을 해 규기보다 먼저 새 論書(논서)를 이해하고, 자신이 이미 익혔던 섭론을 바탕으로 새로운 유식을 전개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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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의 직계 제자인 규기는 자기보다 뛰어난 원측을 질투했다고 한다. 이는 중국에 전해진 부처님의 법이 동쪽 신라로 가는 것을 두려워한 때문이란 풀이도 있다. 東아시아의 당시는 불교경전의 정신계 장악도가 비상하게 높았던 시기였다. 특히 삼국통일과 나당 7년 전쟁을 승전으로 추동한 신라에 있어 불교는 정신적 支柱(지주)였다.


원측이 현장의 번역서인 &lt반야심경&gt에 오류를 발견&#8231 지적하자, 규기 일파가 강하게 반발했다. 신변의 위협을 느낀 원측은 終南山(종남산)에 암자를 짓고 8년 동안 칩거했다. 그때가 나당전쟁이 벌어졌던 시기였다.


나당전쟁이 끝난 후 원측은 불교를 깊이 신봉하는 당나라의 최고 권력자인 측천무후의 지원을 받아 후학들에게 유식학을 강의했다. 문무대왕의 장남인 신문왕이 여러 차례 원측의 귀국을 요청했으나 측천무후가 이를 허락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아무튼 원측과 관련한 일화는 삼국통일과 나당전쟁 前後(전후) 시기에 있어 신라의 학문 수준도 일류였음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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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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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6 七重城에서 바라본 임진강 중류. 한반도의 중앙부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지였다.


&#8226 고랑포대대 OP에서 대대장 하영재 중령(왼쪽)과 필자.


&#8226 당나라 무사상.


&#8226 고구려 부흥군이 唐軍과 싸웠던 호로고루城의 서쪽 성벽(높이 10m).


&#8226 고랑포. 일제시대까지만 해도 상선이 임진강 하구로부터 이곳까지 거슬러 올라왔다.


&#8226 임진강 중류의 단애. 임진강은 한반도의 中心지역을 지키는 민족의 방파제였다.


&#8226 토번의 융성기를 이끌었던 송첸칸포.


&#8226 고랑포대대 작전참모 金소령(오른쪽)과 호로고루城 답사.


&#8226 唐나라 기마무사木俑. 신라는 唐 기병군단에 맞서 장창당을 조직했다.


&#8226 羅唐 전쟁시기의 신라군 무기(국립경주박물관 소장)


화살촉: 8~10세기, 길이 11.8~19.8cm


투구: 7~8세기, 높이 20.5cm


삽날·자귀·작살·다지창: 8~9세기,


길이 29.0(왼쪽)


창: 7~8세기, 길이 60.5cm


재갈: 7~8세기, 길이 34cm


발걸이: 7~8세기, 높이 31.0(오른쪽)


&#8226 675년 9월, 이근행이 지휘한 당군 20만 명을 격파해 戰馬 3만380필을 획득한 매소성 전투의 현장(연천군 청산면 대전리). 현재 우리 국군의 진지가 축조되어 있다.


&#8226 당나라 기마 인물상.


&#8226 隊商을 묘사한 唐三彩. 唐과 西域 간의 교류를 보여 준다.


&#8226 唐나라 문성공주 일행을 맞이하는 송첸칸포.


&#8226 쿠차의 거리에서 판매되고 있는 「남」이라는 이름의 빵. 방석 모양의 「남」은 쿠차에 唐나라의 安西都護府가 설치되었을 당시 군인들의 휴대용 식량으로 처음 만들어졌다고 한다.


&#8226 羅唐 전쟁당시 당나라 집권자였던 고종과 측천무후.


&#8226 서역인들을 묘사한 唐三彩. 唐과 西域 간의 교류를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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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 7년 전쟁&#8212開戰의 원인과 명분



수퍼파워 당에 대한 신라의 선제공격은 불가피했다



문무왕 10년(670) 3월, 신라의 사찬(관등 제8위) 설오유(薛烏儒)와 신라에 망명 중이던 고구려의 태대형(고구려 관등 제1위) 고연무(高延武)는 각각 정병 1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도하해 북진했다. 이어 (670년) 4월4일, 신라-고구려 연합군은 지금의 요녕성 봉황성(鳳凰城) 지역인 개돈양(皆敦壤)에서 당군에 소속된 말갈군과 싸워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당군의 主力이 계속 집결하자, 신라-고구려 연합군은 결전을 피해 일단 압록강 남안의 거점으로 물러났다.


이렇게 당에 대해 먼저 전단(戰端)을 연 것은 뜻밖에도 약소국인 신라였다. 그렇다면 개전(開戰)의 원인과 명분은 무엇일까?


우선, 개전 3개월 전인 670년 1월, 당고종 李治(이치)는 억류 중이던 각간(신라 관등 제1위) 김흠순(金欽純)을 석방해 그의 귀국을 허락했으나, 파진찬(신라 관등 제4위) 김양도(金良圖)는 계속 억류한 끝에 옥사(獄死)시키는 도발을 감행했다.


김유신의 아우 김흠순과 중국에 능통한 진골 김양도는 669년 5월에‘당고종의 분노’를 달래기 위해 신라의 사신으로서 당나라에 들어갔다. 당고종이 웅진도독부 관할의 백제 고토(故土)와 유민들을 “신라가 제 마음대로 빼앗았다”고 해서 격노했기 때문이었다.


따지고 보면, 잘못은 당나라에 있었고, 분노해야 할 쪽은 오히려 신라였다. 648년 2월, 신라 재상 김춘추(金春秋: 후일의 태종무열왕)와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은 백제&#8228 고구려 평정 에 따른 戰後(전후)처리 문제에 관해 사전 협의한 바 있었다.


이때 당태종은 당에겐 영토적 야심이 없음을 거듭 밝혔다. 이로써 전후(戰後) 처리문제에 관한 ‘648년의 비밀협약’이 성립되었다. 《삼국사기》신라본기 문무왕 11년(671) 조의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에 의하면 신라 재상 김춘추에게 당태종 李世民은 다음과 같이 약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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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산천도 토지도 내가 탐하는 바 아니며, 재물도 자녀도 내가 이미 가지고 있는 것들이다. 내가 두 나라(백제와 고구려)를 평정하면, 평양 以南과 백제의 토지는 전부 신라에게 주어 길이 편안토록 하려 한다”라고 하면서 계획을 지시하고, 군사동원의 기일을 정하여 주었다.&gt



이런 ‘648년 협약’을 일방적으로 파기한 것은 당 측이었다. 당은 660년 백제 멸망 후 백제 옛 땅인 공주에 웅진(熊津)도독부를 설치했고. 668년 고구려 멸망 후에는 평양에 안동(安東)도호부를 설치해 고구려&#8231 백제의 고토(故土)뿐만 아니라 신라까지 먹으려는 의도를 노골적으로 드러냈다.


그렇다고 신라가 당시의 수퍼파워 당에 대해 아무런 승산도 없이 무작정 도전한 것은 아니었다. 669년 9월, 서역(西域)에서 토번(吐藩)이 안서(安西)4鎭을 공격하자, 평양에 주둔하고 있던 안동도호(安東都護) 설인귀(薛仁貴)가 나파도(羅娑道)행군대총관으로 임명돼 청해(靑海) 지구로 이동하고 있었던 것이다. 설인귀 군단은 1만3000리를 이동해 670년 4월에야 중국 최대의 내륙 염수호(鹽水湖)가 소재한 청해(靑海) 지구에 도착했다.


설인귀가 靑海(청해)방면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을 때,극동전선에 배치되어 있던 그의 휘하 병력 중 상당수도 청해로 이동했을 것이다. 신라 수뇌부가 이런 유리한 정세변동을 모를 리가 없었다. 당시 신라는 당의 수도 장안(長安)에 외교관&#8228 숙위(宿衛: 황제경호원) &#8228 유학승 등을 파견해 놓고 있어, 당 조정의 움직임을 꿰뚫어 보고 있었다. 이와 관련한 유학승 의상(義相)의‘돌연 귀국’은 뒤에서 거론할 것이다.











‘648년 협약’ 짓밟은 배신행위의 사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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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68년 9월, 고구려 보장왕(寶藏王)이 연남산(淵男産)을 당군 진영에 보내 항복했다. 곧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설인귀(薛仁貴)가 안동도호(安東都護)로 임명되었다. 당은 백제 멸망 후인 660년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했고, 663년에는 신라 문무왕을 계림대도독으로 임명했었다.


도독부는 도호부의 통제를 받는 下位기관이다. 안동도호 설인귀가 계림대도독인 신라 문무왕과 웅진도독인 扶餘隆(부여융)을 부하로 두고 통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라 재상 김춘추(金春秋: 태종무열왕)와 당태종 이세민(李世民) 사이에 성립된 648년 비밀협약을 당 측이 일방적으로 짓밟은 배신행위였다. 648년 비밀협약의 내용은 고구려&#8228 백제의 멸망 후에 백제 故土 전역과 평양 以南의 고구려 땅을 신라가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당은 진작부터 신라를 포위하려는 외교 공작을 전개했다. 665년 7월, 당 조정은 공식사신과 백제 유민으로 구성된 250여 명의 대규모 사절단을 왜국에 특파해 사실상 국교를 재개했다. 당나라는 왜국과 국교를 재개하면서 신라에 사전양해를 구한 바 없었다. 신라는 657년 이래 왜와 단교(斷交)했던 상태였다.


전후(戰後) 처리문제를 둘러싼 당의 배신을 신라는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다. 당은 664년 10월 부여융(扶餘隆)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한 데 이어 665년 8월 錦江(금강) 북안 취리산(就利山)에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당의 장수 유인궤(劉仁軌)가 작성한 서약문에 따라 문무왕과 부여융 간의 회맹을 하도록 강요했다. 이는 戰勝國의 국왕과, 敗戰國의 왕자로서 이미 당의 괴뢰가 된 부여융을 동격(同格)에 놓고 화해를 서약하게 했던 것으로 문무왕에게는 매우 굴욕적이었다.


그럼에도 신라는 對 고구려 전쟁이 진행 중이었던 만큼 아직은 신중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이 임박한 상황에서 당의 다음 공격목표가 신라라고 판단했던 문무대왕으로서는 대당(對唐) 개전에 대비한 주변외교를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무대왕이 고구려에 출정해 있던 668년 9월, 서라벌을 지키고 있던 대각간 김유신(金庾信)은 국왕을 대리해 왜국에 사신을 파견했다.


당시, 왜국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왜국은 당과 신라의 일본 열도 보복 공격을 잔뜩 겁내고 있었다. 왜국은 백제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한반도에 3만2000명의 왜병을 파병해 나&#8231 당연합군에 맞섰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투입된 왜군은 663년 9월 백촌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궤멸당했는데, 신라&#8231 당과는 아직 단교(斷交) 상태였다.


백촌강 패전에 쇼크를 받은 왜국의 최고 실력자(왕자로서 국왕대리인 나카노오에(中大兄: 후일의 왜왕 天智)는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는 데 디딤돌이 되는 쓰시마(對馬島&#8228 대마도)와 이키(壹岐)섬, 왜국 조정의 규슈지방 대행(代行)기관인 다이자이후(大宰府: 대재부), 그리고, 수도권인 오사카만(灣)에 이르는 세토內海(내해) 주변 요지에 백제식(百濟式) 산성을 축조하고 방인(防人: 경계병)을 배치해 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왜국의 여왕 사이메이(齊明)가 병사(病死)했던 661년 7월부터 칭제(稱帝)라는 직위로 국왕을 대리했던 中大兄은 667년 琵琶湖(비파호) 서안의 近江大津(근강대진: 오미노오쓰)로 천도하고, 다음해인 668년에 즉위했다. 그가 텐치(天智) 왜왕(대왕&#8231 오키미)이다. 일본의 史書 등에서는 천도의 이유에 대해 개혁에 반대하는 수구세력이 많은 아스카(飛鳥)를 버렸던 것이라 설명했다.


그러나 필자의 현지답사로는 나당연합군의 추격을 회피하기 위한 천도로 보였다. 새 도읍인 오쓰(大津)는 일본 제1의 호수인 비파호(琵琶湖) 연안에 위치해 설령 나당연합군이 거기까지 쳐들어오더라도 비파호를 이용해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기에 매우 용이한 지형이다.&nbsp&nbsp


고구려 패망의 날이 다가오자, 왜국은 나당연합군의 일본열도 공격을 겁내고 있었다. 한편 신라는 당-왜국 동맹을 맺어 신라를 앞뒤에서 공격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신라와 왜국은 서로가 상대를 겁내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가운데 신라의 개전(開戰)에 대비한 외교에 의해 왜국은 신라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하고, 문무왕과 김유신에게 각각 선박 1척씩을 증정했다. 물론 빈 배를 주었을 리는 없다. 귀한 물자 등이 적재되어 있었다고 해도 좋다. 그 해(668년) 11월, 왜국은 신라에 답례 사절을 파견했다. 657년 이래 단절되었던 신라-왜국 간의 국교가 10여년 만에 회복되었던 것이다.



669년 4월에 이미 토번의 평화사절이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당고종과 측천무후를 만나 모종의 협상을 진행시켰다. 토번은 청해 일대에 위치한 당의 우호국인 토욕혼(土谷渾)을 병합한 데 대한 당의 반격을 무마하기 위한 위장 평화공세였다.


이 해 5월, 당은 2만8000여 호의 고구려 유민을 자국 영토 내로 강제 이주시켰다. 669년 9월, 토번이 실크로드를 공격하자, 안동도호 설인귀(薛仁貴)가 병력을 이끌고 청해로 이동하고 있었다. 문무대왕의 신라는 물론 이런 정보를 손금을 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신라는 백제 고토(故土)에 대한 공세를 전개하는 한편으로 김흠순(金欽純)과 김양도(金良圖)를 당 조정에 파견해 백제 고토를 잠식해 온 신라의 입장을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당고종은 발끈하여 신라 사신 2인을 감금했다. 이듬해(671년) 1월에 김흠순은 석방되었으나, 김양도는 옥사했다. 김흠순은 당에서도 명성이 높은 김유신(金庾信)의 친동생으로서 신라의 대표화랑인 19세(世) 풍월주(風月主) 출신이며, 김양도는 중국말에 능통한 외교통으로 22世 풍월주를 지냈다.


국가 위기상황에서 신라의 승속(僧俗)은 따로 놀지 않았다.&#10218삼국유사&#10219에는 도당(渡唐) 유학승 의상(義相)의 귀국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하고 있다.



&lt 본국의 승상 김흠순과 김양도 등이 당에 가서 옥에 갇혔고, 당고종은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동정(東征)을 하려 하였다. 이에 흠순 등이 몰래 의상에게 사람을 보내 신라에 앞서 가도록 권유함으로써 咸亨(함형) 원년에 환국하여 조정에 그 사정을 알렸다. &gt



咸亨(함형)은 당고종 在位 시기(649년 5월∼683년 12월)에 사용된 무려 14개의 연호 중 일곱 번째로서 670∼673년에 걸쳐 사용된 연호이다. 함형 원년이라면 신라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해당된다.


의상(義相)이라면 중국 화엄종(華嚴宗)의 3조(祖)에 오른 최고의 종교인&#8231 교육자&#8231 시인이었으며, 신라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의 해동화엄(海東華嚴)사상은 오늘날에도 최첨단 정보사회를 열어가는 선진 패러다임으로 재인식되고 있다. 또한 그는 국제적 러브 스토리인 ‘善妙(선묘)설화’를 통해 진리 탐구자의 참된 모델로서, 한&#8231 중&#8231 일 3국에 회자될 뿐만 아니라, 난세의 중생 구제를 위한 한국 철학의 위대한 선구자로 숭앙되고 있다. 의상 철학에 관한 전공 학자들과 필자의 좌담은 뒤에 실을 것이다. 그는 조국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사랑도 지위도 남김없이 버리고” 귀국해 문무대왕과 만나 당군의 침공계획을 직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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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의 결단&#8212 봉황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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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년 4월, 신라-고구려 연합군이 압록강을 건너 200리 북쪽 봉황성(鳳凰城) 일대에서 당의 용병인 말갈군을 대파했음은 앞에서 다. 신라군의 봉황성 공격은 설인귀 부대의 청해 전선(戰線) 이동 완료 시기와 거의 일치했다. 그로부터 3개월 후인 670년 8월, 설인귀가 지휘하는 당군 10여만은 청해호(靑海湖) 남쪽 대비천(大非川)에서 토번군과 싸워 전멸했다.



필자는 1997년 6월에 연암 박지원(燕巖 朴趾源)이 쓴 &#10218열하일기&#10219의 현장을 답사하면서 나당전쟁의 첫 전투현장인 요동의 名山 봉황성(鳳凰城) 일대를 둘러보았다. 연암이 압록강 도하(渡河) 전에 머물렀던 의주(義州)에는 들어갈 수가 없어, 단동(丹東)에서 중국인 선두(船頭)가 모는 소형 쾌속 모터보트를 빌려 타고, 위화도(威化島)와 금동도 사이의 북한 수역을 뚫고 의주 포구 30m 앞에까지 다가가, 연암이 강 건너편의 구련성(九連城)을 바라보았다는 삼각산(三角山) 통군정(統軍亭)의 위치를 확인했다.


때 마침, 강가에 있던 열 살 남짓한 북한 소년 하나가 우리를 향해 돌팔매질을 했는데, 돌맹이 하나가 뱃전에‘쿵 쾅!’ 떨어졌다. 선두는 화들짝 놀라 뱃머리를 돌려 뺑소니를 쳤다.


단동의 압록대교 밑 선착장으로 되돌아가 모터보트에서 내린 다음에, 필자와 권태균 사진기자(故人)는 대절 지프를 타고 의주의 對岸(대안)으로서 ‘압록강 도강촌(渡江村)’인 상첨자를 찾아갔다. 때마침(1997년 6월9일), 이곳에서 중국인민해방군의 공병부대가 의주 쪽을 향해 부교(浮橋)를 가설하는 훈련을 하고 있었다. 6.25 때 중공군의 개입이 생각나 여엉 찜찜했다.


상첨자를 출발해 구련성(九連城)→온천마을인 五龍背(오룡배)→옛 고려책문(高麗柵門)을 북상하는 80여km의 길을 달려 평지에 돌출한 鳳凰山(봉황산)에 도착했다.


燕巖(연암)은 봉황산을 가리켜 “돌로 깎아 세운 듯 평지에 우뚝 솟아서 마치 손바닥 위에 손바닥을 세운 듯하여 아름답기는 하나 그 기세는 한양(漢陽)의 북한산이나 도봉산만 못하다”고 평했다.


670년 4월4일, 신라군과 고구려부흥군이 봉황성까지 북진한 것은 당군의 허실을 탐지하려 했던 신라군의威力偵察(위력정찰)이었던 듯하다. 위력정찰이란 적의 배치 및 병력을 발견, 그 강도를 탐색하며, 기타 정보를 획득하기 위해 실시하는 공격을 말한다. 당군의 주력이 출현하자, 신-고구려 연합군은 결전을 피해 압록강을 건너 남하했던 것이다.


의주→봉황성→요양→심양→錦州(금주)→長城(장성)의 동쪽 끝 산해관(山海關)에 이르는 요서주랑(遼西走廊)은 한-중 관계사에서 매우 중요한 길이다. 봉황성에서 40리를 달려 마고령을 넘고 10리를 더 북상하면 당고종 당시 한반도 침략의 집결지가 설치되었던 설유참(薛劉站)이란 기지촌에 이른다.


당의 안동도호 설인귀(薛仁貴)와 웅진도독 유인원(劉仁願)이 668년에 한반도로 진공하기 직전에 주둔했다고 해서 그 머리글자를 따서 설유참이란 지명이 생겨났다고 한다. 더욱이 설유참은 6.25전쟁 때 중공군의 대부대들이 압록강 도하를 위해 대기했던 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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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방정책에 몰두하다가 실크로드 상실



670년 5월, 당은 좌감문위대장군 고간(高侃)을 동주도행군총관으로, 말갈 장수 이근행(李謹行)을 부총관으로 임명해 한반도에 투입하려 했다. 당군의 압록강 渡河(도하)에 앞선 같은 해 6월, 고구려부흥군은 평양의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에 소속된 당의 관인(官人)들과 부역분자를 처형했다. 그러나 곧 고간&#8228 이근행 군단의 공격을 받은 고구려 부흥군은 평양성에서 퇴각했다.


동년 5월, 문무왕은 고구려 유민들 중 일부를 금마저(金馬渚: 전북 익산)로 이주시키고, 8월1일부로 보장왕의 서자 고안승(高安勝)을 고구려 국왕으로 책봉했다. 고구려부흥군은 백제부흥군이 왜국에 의존했던 것과는 달리 문무왕의 지원을 적극 요청했다.


670년 8월, 설인귀가 지휘하던 10만의 당군과 논흠릉(論欽陵)이 지휘하는 토번군이 청해호(靑海湖) 남쪽 대비천(大非川)에서 결전을 벌였다. 당군이 참패한 가운데 설인귀는 몸만 빠져 나왔다. 그 결과, 당은 토번에게 서역의 안서4진(安西四鎭)을 모두 빼았겼다. 당시의 안서4진은 지금의 신강위구르자치구 남부에 위치한 실크로드 핵심구간의 오아시스 도시인 쿠차(龜玆&#8231 구자), 야르칸드(焉耆&#8231 언기), 호탄(于&#38352&#8228 우전), 카슈가르(疏勒&#8231 소륵)를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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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鎭을 총괄하는 안서도호부는 당시 쿠차에 설치되어 있었다. 토번에게 실크로드의 천산남로(오아시스路) 헤게머니를 상실한 唐은 그 대안(代案)으로 천산북로(天山北路: 초원의 길)를 개척했지만, 이것마저 북방 기마민족국가들에게 위협당해 교역로의 안정적 유지에 실패했다.


이로써 당은 630년 東돌궐의 힐리가한(&#38945利可汗)을 생포란 후에 차지한 東아시아 패권국의 지위를 40년 만에 상실했다. 당제국은 동방정책에 몰두하다가 당시 세계의 메인 트렁크(主교역로)인 실크로드의 주도권을 빼앗겼던 것이다. 필자는 실크로드의 오아시스路를 일주하면서 안서4진을 모두 답사했다. (자세한 내용은 필자의 실크로드 답사기인&#10218월간조선&#10219 2004년 9월호 “대지는 불타고 있었다!”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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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의 청해 현장답사


대비천전투가 우리 민족의 운명을 갈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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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를 답사해야 했던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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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청해성(靑海省) 동북부에 위치한 청해호(靑海湖)의 면적은 제주도의 2.5배이다. 청해호 남쪽을 흐르다가 모래 땅속으로 사라져버리는 대비천(大非川) 유역은 나당전쟁의 승패, 즉 그 후 한국사에 엄청난 임팩트(충격)를 가한 결정적 현장이다.


서기 670년 8월, 나파도행군대총관 설인귀가 거느린 10만 대군이 바로 청해호 남쪽 대비천 전투에서 논흠릉(論欽陵)이 거느린 토번(土蕃: 티베트)군에게 전멸당했다. 보급부대 등 후방 지원부대의 전사자와 민간인 포로 등을 합치면 당 측의 인명손실은 모두 50만 명에 달했다고 한다.


대비천 전투에서 승세를 탄 토번군은 기련산맥(祁連山脈)을 넘어 하서주랑(河西走廊), 즉 실크로드로 이어지는 감숙성의 하서4진(河西四鎭)도 수시로 위협했다. 하서주로의 서단인 돈황(敦煌)은 안서도호부 예하 안서4진(安西四鎭)과 바로 연결된다. 이로써 토번은 당시 세계의 主교통로(main-trunk)를 지배하게 되었다.


청해호 남쪽 대비천 전선에 투입되기 직전, 설인귀는 安東都護(안동도호)였다. 그것은 당나라의 직제(職制)대로라면 고구려&#8228 백제의 고토(故土)뿐만 아니라 신라까지 지배하는 극동방면군 총사령관이었다. 당고종은 문무왕을 안동도호 예하의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임명했던 것이다. 요컨대 설인귀는 신라까지 먹으려 했던 당의 동방정책을 현지에서 지휘했던 것이다.


나당 전쟁과 토번&#8231 당 전쟁은 극동과 서역에서 동시에 전개되었다. 당이 고구려&#8228 백제 정벌에 국력을 기울이는 기간에 토번은 국내 체제 정비에 이어 洋同(양동)&#8231 토욕혼(土谷渾) 등 주변의 라이벌 국가를 정복하여 서역의 최강자로 급부상했다.



당나라는 이적(李勣)&#8231 소정방(蘇定方)&#8231 설인귀(薛仁貴)&#8231 유인궤(劉仁軌)&#8228 고간(高侃)&#8231 이근행(李謹行)&#8228 설필하력(契苾何力) 등 대총관&#8231 대장군급(級) 장수들을 전황에 따라 극동 전선과 서역 전선에 번갈아 투입했다. 백제부흥군 출신 흑치상지(黑齒常之)도 청해 전선에서 토번과 싸워 무명(武名)을 날리며 대총관(대장군)의 반열에 올랐다.


두 전선 사이의 거리는 무려 1만5000리. 비행기나 자동차가 없었던 시절에 대병력이 이런 東&#8228 西 두 전선을 오가도록하며 승리를 기대했던 것은 당 수뇌부의 오만이었다. 어떠한 강국도 이런 2정면(二正面) 전쟁은 무리다. 신라와 토번의 협공을 받은 당은 두 전역(戰域)에서 모두 패전, 마침내 세계제국(世界帝國)의 지위에서 추락했던 것이다.


당&#8231 토번 전쟁은 669년 9월 토번이 천산남로(天山南路)의 안서4진(安西4鎭)을 급습함으로써 개시되었다. 천산남로는 당이 관할하던 지금의 신강(新疆)위구르자치구의 南半部(남반부)인 타클라마칸 사막 주위의 오아시스 北道(북도)와 南道(남도)를 말한다. 말이 自治區(자치구)이지 신강은 한반도 면적의 6배이다. 토번의 안서4진 점령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세히 거론하겠지만, 세계제국 당에게 실크로드는 死活的(사활적) 이해(利害)가 걸린 교통로였다.



664년 이후 약 40년간 당의 실질적인 최고 통치자는 측천무후(則天武后)였다. 그녀의 남편 당고종 이치(李治)는 원래 심지가 약한 데다 간질(癎疾)로 인해 정사를 감당할 수 없어, 통수권이 흔들릴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측천무후는 한반도에 투입한 설인귀&#8231 유인궤&#8231 이근행 등의 장수들을 1만5000리 떨어진 청해 지역으로 이동시키는 병법상의 잘못을 범했다. 그녀는 문사(文史)에는 능통했지만, 아무래도 전략적 안목은 부족했던 것 같다.


669년 연말에 평양을 출발했던 설인귀가 청해 전선에 도착한 것은 670년 4월이었다. 설인귀는 비록 대비천에서 참패해 한때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유배를 갔지만, 곧 현역에 북귀해 다시 한반도에 투입되었다. 그는 645년 당 태종의 고구려 침략 때부터 자원 종군한 이래 거듭 전공을 세워 대총관의 반열에 올랐던 입지전적(立志傳的) 인물이었다.



신라와 토번은 일찍이 군사동맹을 맺은 바 없었지만, 세계 역사상 그 어떤 동맹보다 효과적으로 동&#8231 서에서 당을 끼고 쳤다. 토번의 대두(擡頭)라는 국제정세의 판을 정확히 읽고, 당에 선제공격을 가한 문무대왕의 결단력과 불굴의 의지에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다.


문무대왕의 결단과 지혜가 없었다면 한민족(韓民族)도 현재 중국의 지배하에 들어가 있는 50여개 소수민족 중 하나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중국과 육접(陸接)한 민족들은 거의 대부분 국민국가 건설에 실패했고, 그 예외적 존재라면 한국과 베트남 정도이다. 대당(對唐) 전쟁에서 신라의 승리는 自尊(자존)의 한민족사(韓民族史)와 직결되는 제1보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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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녕은 백제부흥군 출신 흑치상지(黑齒常之)가 건설한 군사도시



2010년 4월9일, 필자 일행 5명이 탑승한 CA 여객기는 베이징(北京) 공항을 이륙한 지 2시간30분만에 서녕(西寧&#8228 시닝) 공항에 착륙했다. 해발 2600m의 분지에 형성된 서녕은 靑海省(청해성)의 성도(省都)로만 기억될 곳이 아니다. 서녕에는 현재 조선족 거주자가 없지만, 서녕을 중국 서부의 관방(關防) 도시로 맨 처음 건설한 인물은 백제부흥군 출신의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이다.


당의 장수 劉仁軌(유인궤)의 설득으로 투항한 그는 663년 11월 당군을 이끌고 그가 투항 전에 지켰던 백제부흥군의 마지막 거점인 임존성(任存城: 홍성군)을 攻破(공파)했다. 임존성의 방어를 마지막까지 지휘했 지수신(遲受信)은 고구려로 망명했다. 흑치상지의 파란만장한 행적에 대해서는 뒤에서 재론할 것이다.



평화시기의 서녕은 중국과 티베트의 차(茶)&#8228 말(馬)의 교역시장으로 발전했다. 현재 시내 인구만 200만 명인 서녕은 황하(黃河)의 지류인 황수(湟水)를 따라 가로로 길게 형성되어 있다. 하늘도 누렇고, 사방을 꽉 둘러싼 산도 누렇고, 강물도 누렇다. 날씨는 차고, 황사를 풀풀 날리는 바람도 거세다.


여성들은 대부분 분홍색 혹은 흰색 천으로 얼굴을 가리고, 멋쟁이 아가씨는 선글라스에 마스크를 착용하고 있었다. 맨 얼굴의 소년&#8228 소녀들의 뺨은 강렬한 햇볕을 받아 사과 홍옥(紅玉)처럼 빨갛게 익어 있었고, 요람 속의 아기들은 뜻밖에도 서양인처럼 피부가 희다.


서녕은 티베트족(藏族&#8228 장족), 위구르족(回族), 몽골족, 만주족(滿洲族), 土族(토족) 등 35개 소수민족이 漢族(한족)과 함께 사는 인종 전시장이었다. 티베트族은 골격이 크고, 다리가 길며, 이목구비(耳目口鼻)가 뚜렷하다. 만주족은 청대(淸代)에 이곳에 주둔한 팔기병(八旗兵)의 후손이라고 한다.



육체파 문성공주가 토번 왕에게 시집갔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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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월10일 아침 8시, 필자 일행 5명은 대형 지프를 타고 서녕 호텔을 출발해 청해호(靑海湖)와 대비천(大非川) 답사에 나섰다. 서녕 서쪽 200km의 일월산(日月山&#8228 4617m) 고갯길에 이르렀다. 641년 당나라 문성공주(文成公主)가 토번의 승첸 칸포에게 시집 가다가 쉬어간 곳이라 전해진다. 칸포는 토번 군주(君主: 왕)에 대한 호칭이다. 당시, 당과 토번의 국경선은 이곳 일월(日月)고개였다. &lt&lt사진―토번의 승첸 칸포&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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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고개, 즉 당시의 당번고도(唐蕃古道)에는 문성공주의 석상(石像)이 세워져 있다. 문성공주는 당-토번 관계사에서 매우 중요한 존재였다. 당삼채(唐三彩)나 무덤벽화의 미인상(美人像) 등을 보면 당대(唐代)엔 육덕(肉德)이 풍성한 글래머를 미인으로 쳤는데, 석상의 모습도 바로 그러하다. 문성공주가 승첸 칸포에게 시집을 가게 된 역사적 배경은 다음과 같다.


&lt&lt 茶馬古道인 일월고개에 세워진 문성공주의 석상. 필자 촬영 &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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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0년, 토번의 국왕인 승첸 칸포는 당태종에게 공주를 달라고 요청했다. 당태종은 처음엔 거절했다. 그러나 송첸 칸포는 당시 청해호 서안(西岸)에 위치한 토욕혼(土谷渾)의 국왕에게 당의 공주를 시집보낸 전례를 들먹이며, 당태종에게 재차 압력을 가했다.


당태종으로서도 승첸 칸포의 요구를 끝내 무시할 수 없었다. 고구려 정복을 기도하고 있었던 만큼 토번의 환심을 얻어 서쪽 변경을 안정시킬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문성공주를 시집 보낸 바로 그해인 641년, 당태종은 고구려에 직방낭중(職方郎中) 진대덕(陳大德)을 사신으로 파견해 고구려 관리들에게 거액의 뇌물을 뿌리며, 고구려의 지형과 군비(軍備) 등을 정탐하게 했다. 직방은 병부(兵部) 산하 정보기관이며, 낭중은 그 책임자이다.


당으로서 641년은 매우 의미있는 한 해였다. 당시 몽골 서북방의 유목(遊牧)강국 설연타(薛延陀)가 당의 장수 이적(李勣)에게 궤멸당했기 때문이다.



문성공주는 실은 당태종의 4촌인 강하왕 이도종(江夏王 李道宗)의 딸이다. 이도종은 자신의 친딸인 문성공주를 호위해 토번의 수도 라사를 다녀왔다.


그로부터 4년 후인 645년에 이도종은 당태종의 고구려 친정(親征)에 副대총관으로 참전했다. 이도종의 부대는 신성(新城: 무순)을 포위한 데 이어 4월26일 개모성(盖牟城)을 공파하여, 고구려인 2만 명을 포로로 잡고, 10만 섬의 곡식을 빼앗았다.


그해 6월20일, 당군은 결전장이었던 안시성(安市城) 교외에 도착하여 포위태세를 갖추었다. 고연수(高延壽)&#8228 고혜진(高惠眞)이 고구려-말갈 군 15만 명을 이끌고 안시성을 구원하러 달려왔지만, 안시성 근교에서 대패하고 당군에 투항했다.


이어 8월10일, 당태종은 안시성 공략에 나서 60여 일간 연인원 50만 명을 동원하여 안시성을 내려다보며 공격할 수 있는 토산(土山)을 쌓았다. 토산 축조의 책임자가 바로 이도종이었다.


그러나 힘들여 축조한 토산의 기초가 약했던 탓인지, 갑자기 무너져 성벽에 와 닿자, 고구려군 100여 명이 재빨리 달려가 토산을 먼저 점령해 되레 당군을 공격하는 바람에 당태종이 패전했다. 더욱이 당태종은 고구려군이 쏜 화살에 맞아 한쪽 눈까지 잃고, 음력 10월 초의 찬 바람과 궂은 비 속에서 회군했다


문성공주의 출가(出嫁)로 당-토번의 우호관계가 시작된 지 3년 후인 644년, 승첸 칸포는 자신의 여동생을 티베트 고원(高原)의 라이벌 양동(羊同) 국왕 리그미에게 시집 보내 고정간첩으로 활용했다. 여동생을 통해 羊同 국왕의 지방순시 일정과 동선(動線)을 탐지한 승첸 칸포는 매복작전으로 리그미 王을 격살했다. 이렇게, 토번-당의 화해로 득을 본 것은 오로지 승첸 칸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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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호 속에 설치된 중국의 어뢰(魚雷)발사실험기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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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월고개를 넘어 109번 국도에 접어들어 40km쯤 서진(西進)하면 멀리 짙푸른 청해호가 보인다. 湖面(호면)이 해발 3106m, 백두산보다 높다. 면적 4456㎢로 제주도의 2.5배에 달한다. 평균수심은 25m. 서녕 서쪽 300km에 위치해 있다.


청해호는 중국 최대의 염수호(鹽水湖)이다. 함염량(含鹽量)은 약 50억 톤으로 추산된다고 한다.


방파제로 나가 사납게 몰려와 하얗게 흩어지는 파도와 마주섰다. 섹스피어의 비극 &lt&lt오셀로&gt&gt의 주인공이나 된 것처럼 파도를 향해 포효(咆哮)해 보았다. 영하의 기온과 거센 바람 때문에 유선(遊船)들은 호변에 꽁꽁 묶여 있었다.


바다와 같이 드넓은 호수 위로 물새가 떼를 지어 나른다. 청해호의 물을 손바닥 한 웅큼 떠서 입안에 넣어 보았더니, 어렵쇼! 이건 바닷물처럼 짜다. 육지로 둘러싸인 이곳이 염수호라니? 알고 보니, 太古 때의 지각변동으로 바다가 육지로 변하면서 염호수가 되었다는 것이다.


&lt&lt 사진&#8212바다를 방불케하는 청해호. 필자 촬영 &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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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파제 앞 500m 호상(湖上)에‘중국어뢰발사시험기지’의 구조물이 보인다. 마침 우리 해군 천안함의 폭침으로 북한 해군이 보유한 어뢰의 유래가 심각하게 거론되는 상황에서 청해호의 어뢰기지는 한국인에게는 주목의 대상이 될 수밖에 없었다. 북한에 현금을 퍼줘 김일성-김정일-김정은으로 이어지는 호전집단이 핵과 미사일 개발뿐만 아니라 어뢰 및 그 부품을 수입하는 자금을 퍼준 한국 좌파정권의 이적(利敵)행위는 참으로 두고두고 통탄할 일이다.


&lt&lt사진--청해호 속의 중국어뢰발사실험기지. 필자 촬영 &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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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해호 남서단 흑마하진(黑馬河鎭)에서 남진하여 109번 국도를 100여리 달려 해발고도 3817m인 상피산(&#35152皮山)고개를 넘었다. 흑마하진에서 지방도로를 따라 50리쯤 북상하면 토욕혼의 왕도(王都)였던 복사성(伏俟城) 폐허에 이르게 되지만, 날이 어둡기 전에 대비천 전투의 현장 답사를 끝내야 했던 만큼 시간이 촉박해 복사성 답사는 다음 기회로 미루었다. 청해에 주둔했던 소정방(蘇定方)의 부대가 백제&#8231 고구려 전선에 투입된 사이(660∼662년)에 토욕혼은 토번에게 병합되었다.


&lt&lt사진--해발 3817m 상피산 고갯길. 필자 촬영&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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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피산 고개를 넘어 대수교향(大水僑鄕)이란 마을에서 좌회전하여 좁은 지방도로를 따라 동진(東進)했다. 한동안 취락은 물론 인적조차 끊어졌다. 길옆으로 전봇대가 길게 이어진 초원의 길+ 모래길을 100여리 달렸다. 전봇대 행렬이 계속되고 있는 만큼 그 너머 어딘가에 마을이 들어서 있을 것이라고 믿었다.


중국인에겐 치욕의 현장인 대비천은 이제는 사주옥하(沙珠玉河)란 예쁜 이름으로 바꿔져 있다. 대비천 지역은 청해남산(靑海南山)이란 산맥에 의해 청해호와 격절(隔絶)되어 있어 이렇게 수십km를 애둘러온 것이다. 상피산과 청해남산 등지에서 흘러내리는 눈 녹은 물이 흘러와 이곳 초원을 적신다고 하지만, 마침 3개월 이상 계속된 가뭄으로 강바닥은 바싹 말라 있었다. 목이 따가웠다. 황사를 한 바가지 쯤 마신 듯했다.


이름도 불길한 절길(切吉)이란 마을에 이르렀다. 끊길 절(切), 길할 길(吉)―마을 이름이 심상찮다. 설인귀의 대군이 무수하게 전사해 이런 끔직한 이름이 붙었던 것이 아닌지 모르겠다. 그곳 20리 동북쪽에서 대비천의 제법 세찬 물줄기와 만났다. 바지가랑이를 동동 걷어올린 다음에 체면 불구하고 뛰어 들어가 물장구를 쳤다. 앗! 봄인데, 온몸이 오싹할 정도로 물이 차다.


대비천 일대는 수십만 병력이 會戰(회전)을 벌일 만큼 넓은 초원지대였지만, 이제는 급속히 사막화가 진행되고 있다. 설인귀가 어디다 본영을 설치했을까? 필자는 지도를 살피다가 낭랑(浪&#23247)이란 곳을 주목했다. 마을 한복판으로 대비천이 흐르고 있기 때문이다. 초원에서 設營(설영)할 때 제1의 고려 사항은 급수선(給水先)의 확보였을 터이다.


중국의 오지에는 도로안내판이 없다. 서녕에서 만난 현지의 가이드인 미스 유(劉)는 낭랑에서 청해의 유명사찰 천복록사(千卜&#24404寺)로 빠져 공화현(共和縣)에 이르는 지름길을 안다고 자신만만해 했다. 그러나 그녀는 결국 그 지름길을 찾아내지 못했다.


우리는 길을 헤매다 강바닥이 바짝 말라버린 대비천의 강물이 땅속으로 스며들었을 河口(하구) 쯤에 이르렀다. 이름 모를 3거리에서 이리 갈까, 저리 갈까, 아니면 돌아갈까 망설이다가 아차! 길을 잘못 들었다. 필자는 낭랑 가는 길을 접어들었다고 생각했지만, 끝내 낭랑에 이르지 못했다.


좁은 길을 달려 당격목(塘格木)이란 마을을 지나 조십달(操什達)이라는 곳에 이르러서야 티베트의 랏사와 서녕을 연결하는 213번 국도를 만났다. 여기서 공화현까지는 51km. 이미 해가 기울어 낭랑을 찾아 되돌아갈 시간은 없었다. 공화현이라면 청해성의 차이담분지, 감숙성의 장액 등과도 연결되는 교통 요지이다.


어쨌든 213번 국도만 타면 출발점이었던 서녕까지 돌아간다. 필자는 가이드 유(劉)양에게 “낭랑도 찾지 못하고 200여나 길을 헤맸죠?”라며 은근히 핀잔을 주었다. 그러나 그녀는 당당했다.



“대비천이란 오지에 가자는 고객은 라오스(老師: 선생)들 이외엔 이제껏 아무도 없었어요. 대비천 일대에서 길을 좀 헤맸긴 했지만, 우리가 헤맨 청해남산(靑海南山) 남쪽의 초원과 모래땅이 바로 대비천 전투 현장이 아니겠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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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긴 그렇긴 했다. 그녀의 야무진 말처럼 우리는 대비천 유역을 구석구석 둘러본 셈이었다. 필자는 그녀의 당찬 언어 습관과 매우 탄력적인 몸매와 찢어진 눈매, 보통남자를 압도하는 완력, 劉(유)씨라는 성(姓) 등으로 미루어 흉노의 후예일 것이라고 지레 억단(臆斷)했다. 흉노는 전한(前漢) 이래의 중국 왕조에 항복 또는 귀부(歸附)할 때 으레 “흉노 선우에게 시집 간 한(漢)나라 공주의 후예”라며 漢왕조의 國姓(국성)인 유(劉)씨를 자처했다. 미스 劉는 그 후예가 아닐까?


213번 국도의 공화(共和)∼황원(湟源) 구간은, 중국여행에서 흔히 경험하는 바처럼 도로 보수공사 중이어서 길이 막혀 있었다. 우리를 태운 지프는 우회하여 대체도로인 日月山의 험한 고갯길을 굽이굽이 오르내려야 했다. 서녕 호텔로 돌아온 시각은 자정 무렵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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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의 ‘答薛仁貴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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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인귀가 먼저 협박장 보내



670년 7월, 당의 웅진도독부가 백제 유민을 조종해 신라의 ‘대당(對唐) 적대 정책’을 분쇄할 계획을 세웠다는 정보를 입수한 문무왕은 대아찬(관등 제5위) 金儒敦(김유돈)을 웅진도독부에 급파하여 화의를 요청했다. 웅진도독부 측이 이를 거부하자, 문무왕은 백제 고토를 강점하기 위한 작전을 개시, 즉각 대소 82개 성을 점령했다. 이로써 신라는 백제 고토 중 남부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했다.


671년 6월, 金竹旨(김죽지)가 지휘하는 신라군이 사비성 근교의 加林城(가림성: 부여군 林川面) 일대 들판의 농작물을 짓밟아, 당군에 대한 兵糧(병량) 공격을 감행했다. 이때 출동한 당군과 석성(石城: 부여와 논산 중간에 위치) 일대에서 접전을 벌려, 5300여 명을 살상하고, 백제 장수 2명과 당군 고급장교 6명을 생포했다.


문무왕 10년(670) 6월, 웅진도독부를 견제하기 위해 고구려유민들을 金馬渚(금마저: 전북 익산시)로 집단 이주시켰다. 671년 8월, 문무대왕은 고구려 보장왕의 庶子(서자)로서 고구려부흥군을 지도하던 高安勝(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했다.


그때, 군량미 2000석과 비단 등도 지원했다. 문무왕은 671년 1월 고안승이 일본과 교류하는 것을 직&#8231 간접적으로 지원했다. 고안승의 고구려는 683년까지 9회에 걸쳐 일본에 사신을 파견했다.


문무왕 11년(671) 가을 7월26일, 당의 계림도(鷄林道) 총관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항의 서신을 보냈다. 그 서신의 골자는 신라가 반당(反唐) 활동을 위해 군비를 증강하고, 전년(670년 8월1일)에 고구려부흥운동의 핵심 인물인 고안승(高安勝)을 지원하는 문무대왕을 힐책하고, 당군의 압도적인 군세를 들먹이면서, 신라의 복종을 요구하는 서한이었다. 그 중 한 문구만 얼핏 보아도 공갈&#8231 협박임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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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고간(高侃)장군이 거느린 한족(漢族) 기병이나 이근행(李謹行)이 거느린 번병(蕃兵: 말갈&#8231 거란병), 오&#8231 초(吳&#8231 楚: 장강 지역)의 거친 뱃사람, 유&#8231 병주(幽&#8231 幷州: 北중국)의 악소(惡少: 비행청년)들이 사방에서 운집하여, 병선을 열 지어 내려가, 험한 곳에 의지하여 진지를 쌓고, 그들이 귀국의 땅을 갈게 한다면, 이것은 왕에게 치유될 수 없는 고질병이 될 것입니다….&gt



설인귀는 청해호 남쪽 대비천(大非川) 전투 패배로 문책을 당해, 잠시 서인(庶人)으로 강등되어 변방인 상주(象州)로 유배를 갔지만, 측천무후로부터 사면을 받고 계림도총관(鷄林道摠管)으로 복직해 한반도 전선에 再투입되었다. 사면의 이유는 전공(戰功)을 세워 명예를 회복하라는 것이었다. 그의 직책은 대총관(大摠管)에서 총관으로 1단계 강등되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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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의 골자



설인귀의 항의서한에 대해 문무왕은 즉각 당 측의 심한 욕심을 비판하고 신라의 정당성을 만천하에 천명(闡明)하는 답장을 보냈다. 이것이 역사적 개전(開戰) 문건으로 회자되는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이다. 외교적 레토릭(修辭&#8231 수사)을 제외한 답서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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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고구려&#8231 백제를 멸망시킨 뒤의 영토 분할 약정, 즉 당태종 이세민이 648년 입당(入唐)한 신라 재상 김춘추(후일의 태종무열왕)에게 평양 이남의 고구려 토지와 백제 전역을 신라에게 주겠다고 한 약속을 당 측이 지키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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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660년 백제 평정 때 당의 수군 함대가 겨우 白江(백강: 지금의 금강) 하구에 진입할 즈음, 신라의 김유신 軍은 이미 백제 명장 계백(階伯)의 결사대를 격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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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사비성의 당군이 백제부흥군에게 포위당하여 위급한 상황에 빠졌을 때 문무왕 자신이 몸소 군사를 거느리고 달려가서 네 방면의 적을 한꺼번에 격파하고, 당군에게 군량을 보급했다. 웅진도독 劉仁願(유인원) 이하 1만의 당병이 비록 중국에서 태어났지만, 4년 동안 신라의 식량을 먹고 신라의 의복을 입었으니, 그 피와 살은 모두 신라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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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663년, 왜선 1000척이 白江口(백강구)에 머물러 있었으며, 백제부흥군의 기병이 해안에서 왜선들을 응원하고 있었는데, 신라의 정예 기병들이 선봉이 되어 먼저 해안의 적진을 격파하니 주류성(周留城: 백제부흥군의 사령부)은 힘을 잃고 마침내 항복하였다.



5) 백제의 남쪽 지방이 평정되자, 군사를 돌려 북방을 치는데 임존성(任存城: 洪城郡 大興面) 한 곳만 항복하지 않았다. 이에 두(나&#8231 당) 군대가 협력하여 그 성을 공격하였으나, 杜大夫(두대부)가 “칙령에 의하면 백제를 평정한 후에 모두가 함께 맹약(盟約)의 의식을 하게 되어 있는데, 현재 임존성 하나가 비록 항복하지 않고 있기는 하지만, 모두 모여 맹약을 해야 한다”고 말하였다.


신라는 칙령대로라면 완전한 평정이 이루어지지 않아 맹약의 의식을 할 수 없다는 입장이었다. 신라는 또한 백제(웅진도독부)의 모든 행동이 간사하여 향후의 행동 변화를 예측할 수 없으니, 지금 비록 함께 모여 맹약을 하더라도, 뒤에 가서 후회할 일이 생길 것이 염려되므로 맹약을 하지 않겠다고 황제(당고종)에게 주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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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668년, 평양성 공위전(攻圍戰)에서 신라의 김문영(金文潁) 부대가 선봉에 서서 연남건(淵南建)의 대진(大陣)을 격파하니, 평양성의 기세가 꺾였다. 이어 평양성 공격 때 신라의 정예 기병 500기가 먼저 성문을 깨고 들어가 마침내 격파하는 전공을 세웠다. 그런데도 논공행상에서 당 측이 전공을 독점하려는 의도에서 “신라엔 아무런 공이 없다”고 말하고 있다.


7) 비열성(卑列城 : 함남 안변)은 본래(진흥왕 때) 신라 땅이었는데, 당은 이 땅을 다시 고구려(안동도호부)에 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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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 668년, 백제(웅진도독부)는 앞서 모여 맹약했던 취리산(就利山)에서 경계를 옮기고, 경계표시를 바꾸어 전지(田地)를 침탈하였으며, 우리의 노비를 달래고, 백성들을 유혹하여 데려가 숨겨놓고는 우리가 여러 번 찾아도 끝까지 돌려보내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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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당나라가 배를 수리하면서 밖으로는 왜국을 정벌한다고 하지만, 사실은 신라를 공격하려는 것이다”라는 소문이 들려오니, 백성들은 놀라고 두려워하면서 불안하게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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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또 웅진도독부가 백제의 미녀를 漢城(한성)도독 박도유(朴都儒)에게 시집을 보내고, 그와 음모하여 신라의 병기(兵器)를 훔쳐 한 주(州)의 땅을 습격하려 했으나, 다행히 사전에 발각되어 즉시 박도유를 참수하였기에 음모가 성공하지 못했다.(신라가 박도유 이외에도 서라벌 주둔 수도군단인 대당(大幢)의 총관 김진주(金眞珠), 남천주 총관 김진흠(金眞欽) 등 친당파를 나랏일에 소홀하다는 명목으로 주살했던 점으로 미루어보아, 신라의 장군들에 대한 당의 회유공작이 광범위하게 진행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11) 670년 7월, 당에 갔던 사신 김흠순(金欽純: 김유신의 동생)이 귀국하여 말하기를 “장차 경계를 확정할 것인데, 지도로 백제의 옛 땅을 조사하여, 백제(웅진도독부)에 돌려줄 것”이라고 하였다. 황하(黃河)가 마르지 않았고, 태산(泰山)이 아직 닳지 않았거늘, 3∼4년 사이에 주었다가 다시 빼앗으니, 신라 백성들이 “지금 백제(웅진도독부)의 정황을 보면 스스로 별도의 한 국가를 세우고 있는 것인 바, 백년 후에는 우리 자손들이 반드시 그들에 의해 멸망당할 것”이라고 실망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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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 백제(웅진도독부)는 거짓으로 “신라가 반역한다”라고 상주(上奏)했다. 신라는 당 조정의 후원을 잃고, 백제(웅진도독부)에 참소당해 질책만 당했다. 사정이 이러함에도 당은 신라에 사신을 보내어 근본적인 사유를 물은 적이 없다.



13) 고구려와 백제가 평정되기 전에는 사냥개처럼 부리더니, 사냥감이 사라진 지금에 이르러서는 되려 (신라가) 삶겨서 먹히려는 박해를 당하고 있다. 간악한 백제(웅진도독부)는 雍齒(옹치)처럼 상을 받고, 당나라에 희생당한 신라는 정공(丁公)의 죽음을 당하게 되었다. &lt 옹치는 한고조 劉邦(유방)으로부터 가장 미움을 받았던 상습적 배신자였으나, 중국의 천하 통일 후 論功行賞(논공행상)을 앞두고 여러 신하 사이에 번지고 있던 불평불만의 무마책의 하나로 남보다 먼저 제후(諸侯)로 봉해졌고, 烏江(오강)에서 項羽(항우)를 격살한 정공은 오히려 한고조에게 처형을 당했다.&gt



14) 670년 고구려(유민)가 모반하여 (평양에 있던) 당나라 관리를 모두 죽였다. 신라는 바로 군사를 출동시키고자, 먼저 웅진(도독부)에 알리기를 “고구려(유민)가 반란을 일으켰으므로 토벌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모두 황제의 신하이니, 반드시 함께 흉적을 토벌함이 이치에 맞을 것이다. 군사의 출동은 상호 협의해야 할 문제이니, 청컨대 관인(官人)을 이곳에 파견에서 함께 토벌을 해보자”고 했다.


백제(웅진도독부)의 사마(司馬: 벼슬)가 신라에 와서 의논하는 중에 말하기를 “군사를 동원한 뒤에 서로가 의심할 수 있으니, 응당 신라와 백제(웅진도독부)의 관인을 상호 인질로 교환하는 것이 좋겠다”라고 하였다. 이에 따라 김유돈(金儒敦) 등을 웅진도독부로 파견하여, 인질 교환 등의 문제를 의논하게 하였다. 백제(웅진도독부)는 인질 교환에 찬성하기는 하였으나, 성 안에서는 여전히 병마를 모아 성 아래에 있다가 밤이 되면 나와서 공격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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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의 식민사관이나 김일성주의에 놀아나는 바보짓



&lt 答薛仁貴書&#8231 답설인귀서&gt 는 개전 외교 문서의 백미(白眉)이다. 위의 ‘답설인귀서’의 원문에서 연도 표시는 당고종의 연호(年號)를 사용했지만, 이를 모두 서기(西紀)로 고쳤다. 왜냐하면 당 고종은 재위 34년간 무려 14개나 되는 연호를 변덕스럽게 바꾸어 이를 일일이 설명하기가 매우 번잡하기 때문이다 그야 어떻든 이 글에서 신라는 당이 제 아무리 강국이라 할지라도 싸우지 않을 수 없는 사유를 조목조목 밝히고 있다.


특히 문무대왕은 설인귀에게 백제와 고구려의 평정에서 신라군이 전공을 세운 구체적인 사례까지 들이댔는데, 공정한 전후(戰後)처리, 즉 점령지 분할 약정을 이행하지 않겠다면, 전쟁이 불가피하다는 강경 입장을 대내외(對內外)에 선언했던 것이다.


이때 설인귀의 나이 58세. 설인귀라면 31세의 나이로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645년)에 자원 참전한 이래, 靑海 등지에서 복무했던 수년간을 제외하면 거의 25년간 계속 당의 극동 작전에 참가했던 장수였던 만큼 그를 상대로 문무왕이 팩트(사실)와 다른 거짓을 들이댈 수 없었을 터이다.



그렇다면 이 문서는 삼국통일 전쟁에서 신라의 실질적인 역할을 가감(加減) 없이 파악할 수 있는 역사적 문건이다. 필자는, 신라가 외세(外勢)에 기대어 삼국 통일을 했다고 생각하는 어리석은 사람들이나 나당전쟁의 開戰(개전) 원인을 신라의 배신행위라고 주장하는 이케우치(池內宏) 등 日帝(일제) 학자들의 언설(言說)에 넘어간 사람들에게 &lt 답설인귀서 &gt를 제대로 음미해보라고 권하고 싶다.


신라는 영토 분쟁과 자주권의 침해를 근본적으로 해결하기 위해 수퍼파워 당과의 전쟁을 결심했던 것이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폄하하는 것은 제국주의자들이 쳐놓은 또 하나의 식민사관(植民史觀)의 덫에 스스로 걸리려고 덤벼드는 바보짓이다.



일본의 정사(正史)라는&#10218日本書紀&#8231 일본서기&#10219를 보면 삼국은 모두 천황에게 조공을 바친 나라라고 폄하하고, 특히 신라에 대해선 적대적 표현이 가득하다. 720년에 발간된 이 역사책을 쓴 사람이 누구인지부터 주목해야 한다. 바로 태안만려(太安萬侶) 등 백제 지식인으로서 왜국에 망명한 사람들이거나 그들의 후손들이다. 그들은 조국 백제를 멸한 신라가 증오스러웠을 것이고, 또한 망명처인 왜국에 잘 보이기 위해서라도 수백년 간 왜의 가상적국이었던 신라를 저주&#8231 모략할 필요가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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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답설인귀서 &gt는 격문이 아니라 외교문서이다. 당과의 정면대결을 선언할 수도, 굴종할 수도 없는 조건에서 어떻게 하면 가장 작게 굽히면서 가장 많은 것을 얻을까 하는 계산에 계산을 거듭하면서 만들어낸 글이다. 너무 굽히면 당은 신라 지도부를 얕잡아볼 것이고, 너무 버티면 當代(당대) 최강국이 체면을 걸고 달려들 것이다. 신라가 死活(사활)을 걸어야 할 균형점은 어딘가? 문무왕은 고뇌했다.


&lt답설인귀서&gt, 그 언사가 부드러웠다. 하지만, 사실 규명과 국가이익에 관해서는 한 치의 양보도 없었다. 이 방대한 서한의 전문(全文)을 《삼국사기》에 전재한 김부식(金富軾)의 안목도 평가하지 않을 수 없다.


만약 이 문서가 기록되지 않았다면 통일신라의 역사적 평가는 크게 훼손당할 뻔했다. &#10218구당서&#8231 舊唐書&#10219&#8231 &#10218신당서&#8231 新唐書&#10219&#8231 &#10218자치통감&#8231 資治通鑑&#10219 등 중국 측 사서는 삼국 통일에 있어 신라 역할을 무시하는 중화(中華) 이데올로기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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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장으로 삼국통일에 기여한 초일류 지식인 강수(强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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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답설인귀서 &gt는 對唐 전쟁에 대한 신라의 정당성을 역사 앞에 명명백백하게 증명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그 기초자는 우리 민족사에서 결코 가볍게 다룰 수 없는 인물이다. 다만 그가 누구인지에 관한 명시적(明示的)인 기록은 없다. 다만, &#10218삼국사기&#10219 46권의 열전을 보면 그가 바로 강수(强首)라는 이름의 대문장가임을 대번에 짐작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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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문무왕이 말하기를 “강수가 문장을 짓는 일을 스스로 맡아서, 편지로써 중국 및 고구려&#8231 백제에 (신라의)의사를 잘 전할 수 있었기 때문에 공업(功業)을 이룰 수 있었다. 우리 先王(태종무열왕)이 당에 請兵(청병)하여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이 비록 무공(武功)이기는 하지만, 문장의 도움이 있었으니, 강수의 공을 어찌 소홀히 하겠는가? ”라고 하고, 그에게 사찬(관등 제8위)의 지위를 주고, 해마다 조(租: 세곡) 200석의 봉록을 주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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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을 보면 외교문서 작성에 관한 한 강수는 무열왕과 문무왕의 양대에 걸쳐 독보적 존재임을 알 수 있다. 다만, 그의 공로에 비해 그의 관등이 제8위인 사찬(沙&#28236)에 그쳤다는 것이 다소 의외이지만, 신라가 무인(武人) 중심의 사회였다는 점을 감안하면 이해될 수도 있는 대목이다.


더구나 강수는 그 출신성분이 김유신처럼 신라에게 멸망당한 금관가야의 후예이다. 그렇다면 삼국통일기의 신라에 있어 최고의 공훈을 세운 문신(강수)도 무신(김유신)의 경우처럼 가야 출신이었다.


이것은 신라가 비록 엄격한 골품제(骨品制) 사회이기는 했으나, 고구려와 백제에 비해서는 인재를 널리 구해 국가 목적에 활용했다고 볼 수밖에 없다. 고대(古代) 로마가 세계제국을 이룰 수 있었던 배경은 시민권 부여에 있어서 이민족에게 비교적 관용적이었기 때문이다. 당이 약 40년 간(630∼670) 세계제국으로 군림했던 것도 역시 이민족 출신 무관을 유별나게 많이 기용했기 때문이었다. 문무왕대의 인재 등용 모습과 지식인의 행태를 엿보기 위해서라도 강수의 인생행로를 살펴볼 가치가 있다.



강수는 중원경(中原京: 지금의 충주)에서 나마(관등 제11위) 석체(昔諦)의 아들로 태어났다. 중원경은 가야의 유민을 대거 이주시킨 고을로서, 신라 5소경(小京) 중 하나였다. 강수의 아버지가 신라 중앙 관등 제11위인 나마를 받았다는 것은 그의 가계(家系)가 옛 가야의 지식층이었을 가능성을 높게 한다. 그 시절에 문사철(文史哲)을 연마했다면 아마도 가야귀족 출신이었을 것이다.


강수는 태어날 때부터 뒤통수의 뼈가 크게 불거진 모습, 시쳇말로 하면 짱구였다. 그는 성장하면서 스스로 글을 깨치고 문사(文史: 문학과 사학)에 통달하는 천재성을 보였다. 그의 아버지가 어린 아들을 시험해보기 위해 “너는 불도(佛道)를 배우겠느냐, 유도(儒道)를 배우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강수가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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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교는 세상 밖의 종교라고 합디다. 저는 세속에 사는 사람인데, 불도를 배워서 무얼 하겠습니까? 유가의 도를 배우고 싶습니다.”



형이상학적인 불교보다 현실적인 유교를 선택했던 셈이다. 강수는 스승으로부터 효경(孝經), 곡례(曲禮), 이아(爾雅), 문선(文選)을 배웠다. 배운 것이 비록 적었으나, 깨달은 바는 고원(高遠)했다.


東아시아 세계에서 유학은 바로 치자(治者)의 학문, 즉 정치학이다. 마침내 그는 벼슬길에 나아가 當代(당대)의 걸출한 관료가 되었다. &#10218삼국사기&#10219 강수 전(傳)의 다음 기록은 그가 마치 21세기의 감각으로 살았던 듯한 착각을 느끼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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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강수가 일찍이 부곡(釜谷)의 대장장이 딸과 야합(野合)했다. 나이 20세가 되자 부모가 고을의 처녀들 가운데 예쁘고 행실이 바른 규수를 중매하여 그의 아내로 맺어주려 했다. 그러나 강수는 사양했다.


아버지가 질책하기를, “너는 세상에 이름이 나서 나라에서 모르는 사람이 없는데, 비천한 여자를 배필로 삼는다면 또한 수치스러운 일이 아니냐?”라고 했다.


강수가 두 번 절하고 말하기를, “가난하고 천한 것이 부끄러운 것이 아니라, 도(道)를 배우고도 실행하지 않는 것이 정말 부끄러운 것입니다. 옛 사람이 이르기를 조강지처(糟糠之妻)는 쫓아내지 아니하고, 가난할 때의 친구는 잊어서는 안 된다고 했으니, 천한 아내라고 해서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라고 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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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존경을 받은 학자관료



태종무열왕의 즉위 초에 당의 사신이 와서 조서(詔書)를 전달했는데, 난해한 부분이 있어서 조정 전체가 난감해 했다. 漢文(한문) 문장은 원래 전고(典故: 典禮와 故事)에 밝지 않으면 뜻이 통하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중국의 군주(君主)들은 흔히 난해한 글을 보내 주변국들에게 골탕을 먹였다. 드디어 태종무열왕이 한 소장(小壯)학자를 불러 물었는데, 그는 조서를 한 번 보고 물 흐르듯 풀이했다.


태종무열왕이 놀라고 기뻐하며 서로 만남이 늦은 것을 한탄하고, 그의 성명을 물었다. 그가 “신은 본래 임나가량(任那加良: 김해) 사람이며 이름은 자두(字頭)입니다”라고 아뢰었다. 왕이 말하기를,“경의 머리뼈를 보니 강수(强首)라고 부를 만하다. ”라고 하였다. “강한 머리”라는 닉네임이 그 후 그의 본명처럼 불리게 된 까닭이다.



태종무열왕이 당고종의 조서에 답하는 표(表)를 짓게 했는데, 그 문장이 세련되고 뜻이 깊었다. 이후 무열왕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임생(任生), 즉 임씨 성을 가진 선비라고 존중했다. 강수는 일찍이 재물에 구애되지 않아 가난했지만, 泰然自若(태연자약)했다. 문무왕이 관계기관에 명하여 조(租: 세곡) 100섬[石]을 해마다 지급하도록 했다. 그의 연봉이 당초의 100섬에서 200섬으로 100% 올랐던 것이다.



신라의 통일 대업이 외교에 힘입은 바 컸던 만큼 강수의 공로는 전쟁터에서 분투했던 무장에 비해 결코 가볍지 않다. 더욱이 그는 매우 청렴한 테크노크라트였다. 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하는 데 공헌한 가야 출신 인물은 무관 김유신과 문관 강수뿐만 아니다. 그런 인물로는 가야금의 명인 우륵(于勒)도 결코 빼놓을 수 없다.


우륵도 강수처럼 가야 출신의 집단 거주지인 중원경에서 살았다. 우륵은 진흥왕 때 신라에 귀순하여 제자들에게 가야금, 노래, 춤을 가르쳐 신라의 예술 수준을 한 단계 끌어올렸다. 古代 사회의 전투 준비 행위에서 가무음곡(歌舞音曲)의 거행은 戰士(전사)들의 충성심과 용기를 북돋우는 데 필수적인 의식(Ritual)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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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의 시대정신을 이끈 義相


&#8212신라에선 僧俗이 따로 놀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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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남산 至相寺와 교토의 高山寺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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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삼국통일의 시대정신을 창출한 인물이 의상(義相) 스님이다. 1995년 5월, 필자는 의상 스님이 10년간 수도했던 중국 서안(西安)의 종남산 至相寺(지상사), 그를 明神(명신)으로 높이 받드는 일본 교토(京都)의 고산사(高山寺)를 답사했다. 그가 국내에서 창건한 낙산사(洛山寺)와 부석사(浮石寺) 등은 필자가 비교적 자주 찾아가는 곳이다.


종남산(終南山) 지상사에서 10년을 수도한 의상스님은 670년 중국 화엄종의 3조(祖)라는 절정의 명예도 버리고 급히 귀국했다. 그것은 신라를 침공하려는 당의 움직임을 본국에 알려 대비케 하려는 일념에서였다. &#10218삼국유사&#10219권2 奇異 문무왕 법민 조(條)는 그때의 정황을 다음과 같이 전한다.



&lt 당고종이 김인문(金仁問) 등을 불러 꾸짖기를,“너희가 우리 군사를 청하여 고구려를 멸하고도 오히려 (우리를) 해치는 것은 무엇 때문인가?”라며 옥에 가두고 군사 50만 명을 훈련시켜 설방(薛邦)을 장수로 삼아 신라를 정벌하려 하였다. 이때, 당나라에 들어가 수련하고 있던 의상대사가 김인문을 찾아가 보니, 김인문이 사실을 말하므로, 신라에 돌아와 (문무)왕에게 보고하였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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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김인문은 문무왕의 아우이며 신라의 대각간으로서, 입당(入唐)하여 숙위(宿衛), 즉 황제 경호 업무에 복무하고 있었다. 따라서 위의 기록에서 감옥에 힌 인물은 김인문이 아니라 金欽純(김흠순)이며, 신라를 정벌하려는 당의 장수 薛邦(설방)’은 설인귀(薛仁貴)의 본명인 薛禮(설례)의 오기(誤記)인 것으로 보인다.


의상 스님이 감옥으로 찾아가 만난 사람은 &#10218삼국사기&#10219에 의하면 김유신의 아우로서 사신으로 입당했던 대각간 김흠순이다. 의상은 김인문&#8231 김흠순 2인 모두로부터 당나라의 신라 침공 계획을 듣고 급히 귀국을 했던 것 같다. 김인문&#8228 김흠순의 관등인 대각간은 신라 관등 제1위인 角干(각간)+ 大 이다. 참고로 김유신의 관등은 각간+ 大+ 太=太大(크고 또 큰) 각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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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학들과의 좌담: 왜 의상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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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은 중국화엄종의 3祖



의상이 수도했던 중국 지상사와 의상을 명신(明神)으로 받드는 일본 고산사 등지를 답사하고 귀국한 직후인 1995년 6월 필자는 정신문화연구원의 김지견(金知見: 故人) 교수, 원광대의 정순일(鄭舜日) 교수와 함께 “왜 의상 철학인가?”라는 주제를 놓고 정담(鼎談)을 했다. 다음은 중앙일보사 발간 시사월간지 &lt WIN &gt에 실린 정담(鼎談)기사의 일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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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태(사회): 중국 화엄의 2祖(조) 지엄(智嚴)의 입적(入寂)이 668년 10월27일, 의상의 귀국년도는 670년(문무왕 10년)입니다. 그 사이 2년 동안 의상은 중국에서 무었을 했다고 보십니까.



김지견: 최근 중국에서 화엄종의 初祖(초조)를 杜順(두순), 2조를 지엄, 3조를 법장(法藏)으로 잡고 있지만, 사실이 아닙니다. 제가 베이징(北京)대학&#8231 도쿄(東京)대학 등의 불교학자들이 모인 세미나에서 중국화엄의 제3조는 의상이라고 발표했는데, 아무도 반론을 제기하지 못합디다.


무엇보다 분명한 것은 지엄이 입적할 때까지 법장은 지상사에 출입하던 거사(居士: 속인으로 법명을 가진 남자)로서 출가승(出家僧)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그 무렵의 법장에게는 내연(內緣) 관계의 여자까지 있었습니다. 그런 그가 갑자기 지엄의 후계자로 추정하는 것은 억지입니다. 더욱이 법장은 의상의 18년 年下(연하)로 까마득한 후배죠.


지엄이 생전에 어린 법장의 재주를 아낀 것은 사실입니다. 그것은 지엄이 의상에게 義持(의지), 법장에게 文持(문지)라는 법호를 내린 것을 보면 알 수 있습니다. 의지란 화엄의 뜻에 통달했다는 뜻이고, 文持란 문장에 능하다는 얘기죠. 두 분간의 격이 다른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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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일: 당나라를 떠나온 지 20여년이 흘러 나이 칠순 무렵의 의상은 법장이 보낸 寄海東書(기해동서)라는 편지를 받습니다. 이 편지의 文面(문면)을 보면 의상을 대선배로 모시는 법장의 자세가 뚜렷하게 나타납니다. 법장은 華嚴五敎章(화엄오교장) 등 6종의 불서를 의상에게 보냈는데, 교정을 간구하는 언사가 지극히 공손하면서도 名文(명문)입니다.



정순태: 지엄&#8231 의상&#8231 법장이 관계가 그러한데, 왜 중국화엄에선 의상을 3祖로 공식 인정하지 않는 것입니까.


김지견: 중국인의 중화사상 때문이죠. 사실, 지엄은 현세의 권력과는 거리를 둔 분입니다. 그런데 법장을 달라요. 당시의 최고권력자 측천무후와 야합, 중국화엄을 정권 안보에 복무하게 하는 등 변질시킵니다. 따라서 지엄의 법맥을 계승한 분은 의상일 수밖에 없는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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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필자 注 &gt 당시 당나라의 실질적인 통치자 측천무후는 기묘한 방법으로 법장의 인물됨을 테스트했다는 얘기도 전해져 오고 있다. 어느 날, 법장은 측천무후에게 불려가 요즘말로 ‘증기탕’으로 보내졌다는 것이다. 그곳에는 궁녀들이 ‘마사지 걸’처럼 법장의 몸 구석구석을 씻어 주었지만, 법장의 남성은 커지지 않고 前과 同이었다고 한다. 그래서 법장은 ‘갑종합격’을 받고 그 후 측천무후를 위해 복무했다는 것이다. 후일 당을 찬탈하는 측천무후는 당 황실이 신봉했던 도교(道敎)를 깎아내고, 그녀가 신봉하는 불교를 올리는 정책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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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국의 위기상황에서 느낀 강렬한 민족의식


정순태 &#10218삼국유사&#10219에서는 의상의 귀국과 관련, 다음과 같은 기록이 있습니다. “본국의 승상 흠순과 양도가 당에 가서 갇히고, 당고종은 크게 군사를 일으켜 東征(동정)을 하려 하였다. 흠순 등이 은밀히 의상에게 사람을 보내 앞서 가도록 권유하므로 함형 원년(670)에 귀국하여 그 사정을 신라 조정에 알렸다.”


즉, 의상은 당의 신라 침공계획이라는 기밀을 탐지, 문무왕에게 급보한 것입니다. 그 때문인지 모르지만, 의상은 문무왕으로부터 지극한 존경을 받았습니다. 그러나 의상 스님의 귀국 동기 등에 대한 다른 견해도 있는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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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지견: &#10218宋高僧傳&#8231 송고승전&#10219에서는 의상의 귀국동기를 ‘傳法’(전법)이라고 기록하고 있습니다만, 그것은 중국사람(宋代의 학승)인 찬녕(贊寧)이 저술한 책이죠.


정순일: 의상의 귀국 동기가 당의 신라 침공계획을 알리는 데 있었다고 해서 승려로서 흠이 될 것은 하나도 없습니다. 백제&#8231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 당은 그 고토(故土)에 웅진도독부&#8231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신라까지 먹으려 해 一戰(일전)이 불가피했거든요. 조국이 위기에 처한 상황에서 강렬한 국가의식을 느꼈다고 하더라도 그것을 종교인의 체제 지향적 성격으로 규정할 수는 없습니다.



정순태: 의상은 귀국길에 산동반도의 항구도시 등주(登州)에 들렀으나 10여년간 그를 연모해 오던 꾸냥 선묘(善妙)를 만나지도 않고 귀국선을 타버립니다. 뒤늦게 소식을 들은 선묘가 부둣가로 달려나와 “큰 용이 되어 스님의 귀국선을 보호하겠다”고 서원(誓願)하고 바다로 뛰어드는 化龍(화룡)설화의 파급효과에 대해 잠깐 짚어 주시죠.



김지견: 선묘설화는 중국에선 &#10218宋高僧傳&#8231 송고승전&#10219에 기록되고, 일본에서는 &#10218송고승전&#10219의 의상&#8231 원효 관련 내용을 두루마리그림인 (華嚴緣起會圈&#8231 화엄연기회권)으로 그려 일본국보로 소장하고 있을 만큼 큰 영향을 주었습니다. 동양 3국 모두가 의상을 실천행자(實踐行者)의 모범으로 본 겁니다. 일본 불교학자들도 의상과 원효를 빼면 일본화엄사상사를 쓸 수 없다고 고백합디다. 두 천재가 當代(당대) 동아시아 사상계를 완전 장악한 거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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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태: 모두들 어렵다고 하는 &#10218화엄경&#10219은 어떤 내용입니까.


김지견 석가모니는 보리수 밑에서 크게 깨달은 다음, 약 한달 동안 禪定(선정)에 들어 깨달음의 내용을 관찰했습니다. 그리고는 “내가 깨달은 진리는 매우 깊어 어렵다”면서 처음엔 좀처럼 입을 열지 않으려고 했답니다. &#10218화엄경&#10219은 바로 석가모니가 깨달은 내용을, 인간의 지혜와는 차원이 다른 부처의 지혜로 쓴 경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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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태: 그렇다면 의상이 가르친 화엄철학의 본질은 무엇이라 해야 할까요.


정순일: 화엄은 개인과 사회 간 조화(調和)의 철학입니다. 중중무진(重重無盡)으로 얽혀 있는 화엄철학의 궁극은 존재하는 모든 생명이 본래 부여받은 부처의 광명을 각각 남김없이 발(發)할 수 있게 하는 거죠. 그러면, 아름다운 백합도, 보잘 것 없는 패랭이꽃도, 그리고 온 우주가 생명의 환희에 차게 됩니다. 이는 절대화해(絶對和解)라고 표현할 수 있죠. 오늘날 사회갈등의 해소, 남북통일의 이념으로서도 의상 스님이 가르친 이 절대화해의 윤리는 정말 필요하리라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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義相 사상은 정보화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



김지견: 화엄이란 자기가 자신을 아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를 아는 것입니다. 나아가 세계를 아는 것뿐만 아니라 세계가 세계를 아는 것입니다. 화엄의 세계는 공간적으로 大우주의 넓이를 감당하고 시간적으로는 無限(무한)을 포섭하고 있습니다.



정순태: 아테네의 델포이 신전(神殿)에는 “너 자신을 알라”라는 神託(신탁)이 걸려 있죠. 그것이 소크라테스의 심혼(心魂)을 움직였고, 그 후 西洋철학의 중심 테마가 되었지요. 특히 르네상스 이후의 근대철학에 있어서는 자기 스스로를 아는 일에 철학의 초점이 놓여져 왔다고 할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화엄의 세계는 자아(自我)가 모든 사유&#8228 행동의 기반이라는 서양인식론의 울타리를 훨씬 초극(超克)해버리는 것이군요.


김지견: 부처님의 깨달음은 자아관념의 입장을 초월한 세계입니다. 석존(釋尊)의 눈 뜬 세계는 석존이라는 개인을 뛰어넘고, 한없는 세계가 한없는 깊은 광명에 의해 비쳐지고, 또 구명되는 것입니다. 델포이 신탁에 비유해 말한다면 스스로를 아는 일이 무한히 확대되어 세계가 세계 자신을 인식하는 일이라 할 수 있겠죠. 화엄이란 동시에 大우주의 모든 먼지이며 티끌 그 자체이기도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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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태: 화엄의 스케일은 무한대인가 하면 또한 깊숙하고 오묘한 것이군요. 마치 꿈이나 환상 같아서 이해하기가 어렵겠습니다.


김지견: 그것을 컴펙트하게 정리한 것이 의상의 華嚴一乘法界圖(화엄일승법계도)입니다. 하나의 도면에다 화엄의 大사상을 210字(자)의 법성게로 압축시켜 놓은 것입니다. 그러니까 의상은 복잡하고 어려운 것을 간단하고 쉽게 압축하는 데 천재였지요. 웬만한 불자라면 법성게 210자는 암송하지요.


&lt&lt WIN 257쪽 사진---화엄일승법계도&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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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태: 의상은 바로 불세출(不世出)의 시인이었군요. 의상의 사상이 정보화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으로 떠오르고 있다고 하던데요.


정순일: 하나가 일체가 되고 일체가 하나가 된다는 의상의 화엄적 사고는 결코 평범한 셈본이 아닙니다. 이는 계몽시대 이후 이른바 과학적 사고와는 전혀 반대되는 논리인 것이죠. 그런데 아이러니컬하게도 오늘을 사는 우리가 하나는 하나인 것이 아니라 하나가 일체가 되는 高차원의 발상을 도입해야 할 지경에 이른 겁니다.



정순태: 오늘의 정보화사회가 바로 그러한 발상의 전환을 요구하고 있죠. 스필버그의 영화 &lt 주라기공원 &gt 한 편으로 자동차 150만대 수출과 맞먹는 이익을 창출했습니다. 정신계를 리드하는 자가 결국은 물질계도 지배하는 것입니다. 한자(漢字)문화권에서 의상의 정신계 장악도는 스필버그의 영상문화에 대한 장악도보다 훨씬 강력한 것 아닙니까?


정순일: 정보화시대에서는 한 사람이 모든 사람, 모든 사람은 한 사람을 대하게 됩니다. 하나가 일방적으로 다른 대상에게 정보를 전달하는 것이 아니고, 그것이 상호작용으로 중중무진(重重無盡)의 法界緣起(법계연기)의 場(장)을 형성합니다. 의상은 진작에 1300년 후의 미래까지 예견하고 우리에게 발상의 전환을 요구했던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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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의 거센 파도에 얼굴을 파묻고 懇求한 게송



정순태: 종교인으로서 의상의 올곧은 자세, 맑은 심성은 백화도량발원문(百花道場發願文)에서 잘 나타난다고 합디다. 언어의 절제미, 시적(詩的) 감수성이 대단하고요….


정순일: 백화도량발원문은 偈頌(게송)이죠. 게송이란 불교의 詩(시)이자 노래입니다. 이 발원문은 의상대사가 동해의 거센 파도에 얼굴을 묻고 대자대비(大慈大悲)의 관음보살 존전(尊前)에 구원의 손길이 내려지기를 간구하는 내용입니다.


“나의 전심전령(全心全靈)이 당신의 마음속에 살아 있고, 당신 또한 내 마음속에 항상 같이하여 있어서 떠날 줄 없게 하여 주소서.…이 몸이 가루가 되고 모진 업보(業報)가 이 몸으로 더불어 다하게 될 때 천수천안(千手千眼) 당신의 자비로운 손길이 이 몸을 건져내어 당신 곁으로 인도하여 주옵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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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순태: 기독교의 주기도문(主祈禱文)을 방불케 하는군요. 정말, 구구절절한 발원문입니다.


김지견: 의상이 그런 발원문을 읊은 곳이 바로 강원도 양양군의 낙산사 홍련암이죠. 그러니까 의상은 인도(印度)에서 발생한 보타낙가 신앙을 한반도에 옮겨 뿌리를 내리게 한 것입니다. 이렇듯 의상의 사상체계는 단순한 모방이 아니라 크리에이티브(창조적)한 것이죠.



정순태: 화엄이라면 의상 당시로는 한자(漢字)문화권 최고의 사상체계였죠. 그렇다면 의상은 東아시아 최선진 문명권의 정신계를 리드했다고 볼 수 있습니다. 선진국으로 진입하고 있는 오늘의 한국에서 再(재)음미해야 할 대목의 하나가 의상 철학입니다. 제 아무리 제품력이 있다고 해도 그 속에 철학이 배어있지 않으면 결코 일류가 될 수 없죠. 이제 의상의 출신 성분과 성장 과정을 정리해 주시죠.


정순일: 의상은 신라 진흥왕 35년(625) 계림부에서 金韓信(김한신)의 아들로 태어나 19세에 출가했습니다. 출가 이전의 행적에 관한 사료는 망실되었습니다. 다만 신라 상류사회의 청년들이 선망했던 양대(兩大) 진로가 화랑과 스님의 길이었던 것으로 미루어보아 의상은 신라김씨 진골(眞骨) 가문 출신인 것으로 추정됩니다.


김지견: 의상이 황복사(皇福寺)에서 출가했다는 점도 주목됩니다. 황복사는 조용히 공부하는 절이었습니다. 의상은 소시적부터 아카데믹한 품성인 듯해요.



정순태: 의상과 원효는 대조적이면서도 떼놓을 수 없는 관계이더군요. 원효는 俗姓(속성)이 신라 하급 귀족인 6두품에 속하는 薛(설)씨, 아명은 誓幢(서당)입니다. 兒名(아명) 등에서 짐작할 수 있듯이 청년기의 원효는 화랑도(花郞徒)에도 참여한 것 같습니다. 吏讀(이두)를 처음 만든 신라의 석학 薛聰(설총)은 원효의 아들입니다. 설총은 원효의 유해로 塑像(소상)을 만들어 분황사에 모셔두고 예배했다는데, 그 소상은 고려 말기까지 안치되어 있었다고 합디다.


정순일: 원효와 의상은 함께 고구려의 망명승 報德(보덕)으로부터 &#10218涅槃經&#8231 열반경&#10219과 &#10218유마경&#10219을 배웠습니다. 한국불교를 대표하는 두 스님이 同門修學(동문수학)했다는 것은 장엄한 &lt 운명 고향곡 &gt의 모티브를 듣는 것 같습니다.


뿐만 아닙니다. 의상은 나이 27세 때(651년), 7세 연상인 元曉(원효)와 함께 당나라 유학을 계획하고, 서라벌(경주)을 떠나 육로로 고구려 영토였던 요동까지 갔습니다. 그런데 거기서 두 스님은 고구려 국경수비대에게 간첩 용의자로 붙들렸다가 수십일 후에야 풀려나는 곤욕을 치렀습니다. 첫 도당(渡唐) 유학 시도가 실패했던 거죠.



김지견: 원효와 의상은 10년 후인 661년 재차 도당 유학길에 오릅니다. 두 분은 지금의 경기도 화성시 남양(南陽) 부근까지 동행합니다. 그런데 이곳에서 의상은 해외유학파, 원효는 국내파로 서로의 진로가 엇갈립니다.


정순태: 원효는 의상과 함께 당나라 가는 배를 타기 위해 黨項城(당항성 경기도 화성시 남양만)으로 향하던 중에 숙소를 구하지 못해 무덤들 사이 토굴에서 하룻밤을 지내게 되었는데, 잠결에 목이 말라 맛좋게 마신 물이 이튿날 날이 밝아 깨어보니 해골에 고인 물이었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이에 원효는 사물 자체에 깨긋함(靜)과 더러움(不淨)이 없다는 진리를 깨달았습니다. 一體唯心造(일체유심조), 쉽게 말해 “세상만사 마음 먹기 나름”이라는 겁니다. 그는 渡唐(도당) 유학을 포기하고, 그가 기거하던 분황사로 되돌아가 불교의 대중화에 힘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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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상과 선묘의 국제적 러브 스토리



정순일: 의상 스님은 초지일관(初志一貫)입니다. 마침 귀국하던 당나라 사신의 배에 편승, 산동반도의 등주(登州)에 상륙합니다. 거기서 의상은 아름다운 꾸냥 善妙(선묘)를 만납니다. 선묘는 미남자인 의상에게 사랑을 고백하죠. 그러나 의상이 어디 미인의 육탄공세에 허물어질 승려입니까.


정순태: 원래 남자란 미인에 약하죠. 또 애절한 프로포즈를 박정하게 거절할 경우 오뉴월 서릿발 같은 여자의 원한을 사게 마련인데, 의상은 어떻게 선묘 아가씨를 설득해 여난(女難)을 모면했을까요.


김지견 의상은 아마도 이렇게 설득했을 겁니다. 선묘 아가씨, 우리 둘이 육욕(肉慾)을 불태워 보았자 몇 십 년이나 가겠습니까! 불법에 귀의(歸依)해, 극락왕생하여 영겁을 삽시다― 대충 이런 요지가 아니었을까요? 드디어 선묘가 설득당합니다. “世世生生(세세생생) 스님에 귀의하여 大乘(대승)을 익히고, 대사를 성취하도록 돕겠습니다.”이렇게 맹세한 겁니다.



정순태: 선묘를 다독거린 의상은 곁눈질도 하지 않고 불교의 학림(學林)으로 유명했던 長安 남쪽 終南山(종남산)으로 직행합니다. 종남산 至相寺(지상사)에 이르러 스승 智儼(지엄)을 만나는 대목도 인상적이죠.


정순일: 중국 화엄종의 2祖였던 지엄은 의상이 이미 화엄의 妙旨(묘지)에 통하고 있음을 한눈에 알아봤죠. 지엄은 &#10218孔目章&#8231 공목장&#10219&#10218華嚴經搜玄記&#8231 화엄경수현기&#10219 등을 저술, 화엄학의 기초를 다진 고승이었습니다. 의상은 지엄 밑에서 7년 동안 공부한 뒤 졸업논문 격인 &lt 화엄일승법계도&gt를 지어 스승을 감탄케 합니다. 靑出於藍(청출어람)의 본보기죠.



정순태: 의상은 문무왕이 주려고 했던 논밭과 노비를 딱 부러지게 사양했습니다. 승복&#8228 물병&#8228 발우(공양그릇), 이 세 가지 외에는 아무것도 몸에 지니지 않았답니다. 큰 가람을 10개나 창건했다고 전해지는 의상에겐 재물이 상당히 필요했을 터인데요?


김지견: 불법에는 높낮이가 없다는 高下一味(고하일미)의 평등사상이 의상의 사회의식에서 핵심을 이룹니다. 이런 점에서 번잡해진 오늘의 한국불교도 義相(의상)으로 되돌아가야 합니다. 의상이 절을 10개 지었다는 기록이 전해지지만, 낙산사와 부석사 이외에는 의상 계열의 제자들이 그들 사찰의 위신을 높이기 위해 의상의 높은 이름을 빌린, 즉 假託(가탁)을 한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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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군과 고구려부흥군의 對唐 연합전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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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부흥군과 당군의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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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은 고구려부흥군의 반당(反唐) 군사활동을 저지하기 위해 670년 5월에 좌감문대장군 고간(高侃)을 東州道(동주도)행군총관으로 임명하고, 고구려 고토에서의 모든 작전을 총괄토록 했다. 동년 6월, 고구려부흥군은 평양의 안동도호부를 점령하고, 당의 관리와 부역배를 처단했다.


이어 이들은 고간&#8231 이근행이 이끄는 당군의 공격을 받고 평양성에서 퇴각했다. 문무대왕은 보장왕의 서자 고안승(高安勝)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들을 금마저(金馬渚: 전북 益山) 이주시켜 집단 거주하게 했다. 동년 8월1일, 문무대왕은 고안승을 고구려왕으로 책봉했다.


671년 9월,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安市城(안시성)이 高侃(고간)이 지휘한 당군의 공격을 받고 함락되었다. 그러나 동년 10월6일, 신라의 수군(水軍)은 서해안에 접근하던 당의 보급함대를 습격하여 선박 70여척을 노획했다. 이때의 전투현장을 놓고 학계에서는 재령강(載寧江) 혹은 예성강(禮成江)의 하구로 비정하고 있다.


황해도 재령강說(설)은 당시 당의 함대가 병량 등을 보급하려 했던 당 지상군의 남하 지역과 대체로 일치한다는 점에서 설득력을 지닌다. 황해도 중심부를 흐르는 재령강은 유량이 풍부해 하구로부터 거의 100리 상류인 상해포(上海浦)까지 300톤 급 선박의 소항(溯航)이 가능해 황해도 중부지방의 곡물&#8231 광산물 등의 물자 수송과 관개 용수 공급에 큰 역할을 한다. 진남포를 끼고 있는 광량만으로는 북쪽에서 대동강이, 남쪽에서는 재령강이 흘러들어 合水(합수)한다. 재령강은 길이 129km, 유역면적 3671㎢이다.


한편 예성강說은 &#10218삼국유사&#10219 奇異 제2 문무왕 법민 條에서 “이때(671년 10월로 추정됨) 정주사(廷州使)가 달려와서 ‘무수한 당나라 군사들이 우리 국경에 이르러 바닷가를 맴돌고 있습니다’라고 하니, 왕이 明朗(명랑) 법사를 불러…”라는 구절이 있는데, 당시의 廷州(정주)가 오늘날의 개풍군으로 비정되기 때문이다.


아무튼 671년 10월6일의 해전에서 물에 빠져 죽은 적병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신라 해군은 병선낭장(함대지휘관) 겸이대후(鉗耳大侯)와 내주자사 왕예본(王藝本), 열주자사 왕익(王益) 등을 포함한 당군 100여 명을 생포했다. 이로써 당은 해로(海路)를 통한 兵站線(병참선) 유지에 실패했다. 당의 지상군은 이후 약 10개월간 남하할 수 없었다. 문무왕으로서는 신라군을 재정비할 수 있는 절호의 시간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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웅진도독부가 백제 고토에서 소멸되다



당군의 주력(主力)이 고구려부흥군과 전투를 하고 있는 사이에 문무왕은 백제 고토를 지배하던 당의 직할 통치기관인 웅진도독부를 한반도에서 축출하는 작전을 다각도로 전개했다.



첫째, 670년 6월에 고구려 부흥군을 지금의 전북 익산지역에 대거 이주시켰던 것은 금강 이남으로 확대하려는 당의 세력을 그 길목에서 봉쇄하기 위한 조치였다.


둘째, 대아찬 김유돈(金儒敦)을 670년 7월 웅진도독부에 급파하여 화의를 요청하면서 짐짓 사태를 수습하려는 듯한 유화 제스처를 구사했다. 반면, 웅진도독부는 신라의 제의를 받지 않고, 백제유민 출신의 밀정을 대거 신라에 침투시켰다.


셋째, 문무왕은 신라군의 움직임을 탐지하려는 밀정을 대거 색출하여 감금하거나 이중간첩으로 활용했다. 밀정의 보고만 믿고 있던 웅진도독부의 당군은 오히려 역(逆)정보에 넘어가 후일 신라군의 급습을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넷째, 신라는 대규모 전면전에 대비해 교두보로 이용할 수 있는 거점들을 우선 백제 고토 내부에 확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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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은 670년 7월에 3개의 전역(戰域)으로 나눠, 당군을 동시다발적으로 기습&#8231 강타했다. 이와 같은 대규모 드라이브에는 신라의 국운이 걸린 만큼 문무대왕이 진두에서 작전 전반을 지휘했다.


제1전역에서 김품일(金品日)&#8231 김문충(金文忠) 군단은 대소 63개의 성곽을 점령하는 전과(戰果)를 올렸다. 반(反)신라적이었던 이 지역의 백제 유민들은 신라의 내륙 정착지로 옮기고, 철저하게 감시했다.


제2전역에서 김천존(金天存) 군단 등은 주요 성곽 7개를 점령하고 2천여 명의 저항세력을 제거했다.


제3전역에서 김문영(金文潁) 군단 등은 7천여 명의 저항세력을 제거하고, 그에 따른 군마 및 무기를 노획하면서 12개 성곽을 점령했다.


이로써 웅진도독부에 복무하던 거란병&#8231 말갈병 등을 포함한 9천여 명이 죽거나 다쳤다. 신라는 대소 82개 성곽과 다수의 군마(軍馬)&#8231 무기를 획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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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승세를 몰아 신라군은 웅진도독부의 치소(治所)인 웅진성과 옛 백제의 수도인 사비성 근교까지 진격하여, 부근 지역을 모조리 장악했다. 이로써 당의 세력이 잔류하고 있던 웅진도독부를 포위하는 형태를 취하게 되었다.


671년 1월, 신라군이 웅진도독부의 치소(治所)인 공주로 압박해 들어가다가 남쪽 근교에서 일대 접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는 당주(幢主: 부대장) 김부과(金夫果)가 전사한 신라군이 패배했다.


그 후 설구성(舌口城) 공방전에서는 신라군이 싸우지 않고 굳게 성을 지키며 말갈군을 지치게 했다. 수차례에 걸친 공성전에서 실패한 말갈군이 퇴각하자, 신라군은 말갈군의 후미를 강타해 300여 명을 살상하는 전과를 올렸다.


이어 문무왕 11년(671) 6월에는 웅진도독부의 식량난을 가중시키기 위해 신라 기병은 가림성(加林城: 부여군 임천면) 주위 들판에 수확을 앞둔 벼를 짓밟고 불을 질렀다. 이를 저지하려고 출동한 당군과 석성(石城: 부여와 논산 사이의 평야지대)에서 대규모 접전이 벌어졌다. 이 전투에서 신라군은 웅진도독부 군사 5300여 명을 살상하는 대승을 거두었다. 백제 장수 2명과 당군의 과의(果毅: 고급장교) 6명도 생포했다.


당군의 영향력이 크게 위축된 가운데 신라는 사비성을 중심으로 하는 옛 백제의 수도권 지역에 소부리주(所夫里州)를 설치하고, 아찬(신라관등 제6위) 김진왕(金眞王: 태종무열왕의 제3자)을 그 도독으로 임명했다. 백제의 옛 수도권이 신라의 행정구역에 편입되었던 것이다.


백제 고토로 신라군이 본격적으로 밀려오자, 신라에 대항하던 세력들은 신라의 보복이 두려웠던 것 같다. 그 때문인지, 671년 11월 웅진도독부 소속 당의 관원과 백제유민 등 2000여명이 선박 47척에 분승해 일본으로 탈출하는 사건이 벌어졌다. 신라의 공세에 의해 웅진도독부가 더 버티기 어렵다는 전망이 섰던 듯하다.


이들은 왜국과 군사동맹을 원했지만, 국내의 형편상 왜국은 나&#8231 당 어느 쪽을 지원할 형편이 아니었다. 이 점은 뒤에서 거론할 것이다.


문무왕 12년(672) 1월, 백제 고토에서 웅진도독부를 축출하기 위한 신라군의 포위&#8231 섬멸작전이 전개되었다. 신라군은 사비성 외곽의 고성성(古省城) 전투에서 당군에 승리했다. 이어 2월에는 사비성 외곽의 가림성(加林城)에 대한 공세도 강화했다. 그러나 가림성의 저항은 매우 완강해 신라군은 일단 퇴각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백제 고토는 거의 대부분 신라군에 점령되었다. 따라서 몇몇 지역에서 잔존하고 있던 소규모의 反신라세력들도 스스로 붕괴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당고종은 이때도 발끈했다.


문무왕은 672년 9월에 급찬(관등 제9위) 김원산(金原山)과 나마(관등 제11위) 김변산(金邊山) 등을 파견하여 당과의 화해를 시도했다. 즉, 그동안의 전투에서 포로가 된 내주자사 왕예본(來州刺史 王藝本), 열주자사 왕익(烈州刺史 王益), 웅진도독부 사마 예군, 증산사마 법총(法聰) 등 장병 170 명을 당으로 돌려보냈다.


신라가 당군에 의해 조종되는 反신라 백제유민 집단을 무력으로 완전 제압한 시기는 문무왕 12년(672) 하반기. 이로부터 신라는 백제 고토의 인적&#8228 물적 자원을, 고구려 고토로부터 당군을 축출하는 전쟁에 동원할 수 있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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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군이 대패한 672년 石門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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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의 전쟁터가 고구려 고토로 넘어가자, 당군도 결전의 의지를 노골화했다. 672년 4월, 토번(吐藩)의 평화사절이 長安(장안)에 도착하여 모종의 협상을 진행시켰다. 당&#8231 토번 화해 국면에서 당은 새로운 이니셔티브가 가능해졌다. 672년 7월, 東州道(동주도)행군총관 고간(高侃)이 한인(漢人) 기병 1만, 李謹行(이근행)이 말갈&#8231 거란병 3만을 이끌고 평양에 再(재)진입해 8개 지역에 주둔했다.


고간-이근행 軍은 약 1개월간의 再정비 기간을 거친 후 본격적인 공세에 나섰다. 이들은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평양 서남쪽 근교에 위치한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했다. 고구려부흥군은 끈질기게 저항했지만, 고립무원의 상황에서 두 성을 잃고 말았다.


672년 8월, 당군은 다시 남하하여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백수성(白水城 황해도 예성강 하구의 배천)을 포위 공격했다. 백수성의 고구려군은 사면 포위되어 위기에 빠졌다. 이때 신라군이 당군의 배후를 급습, 전황이 급반전되었다. 신라군과 고구려부흥군은 앞뒤에서 당군을 끼고 쳐서 수천 명의 죽이고 많은 전리품을 획득했다.


고간이 이끌었던 당군은 황해도 서흥(瑞興)으로 퇴각해 석문(石門) 들판에 진을 쳤는데, 신라군은 승세를 믿고 추격에 나섰다. 그러나 보기(步騎) 합동작전에 능숙한 당군의 유인작전에 빠진 신라군은 개전 이래 최대의 참패를 당했다. 신라군 중 2천여 명이 당군의 포위망을 빠져 나오지 못해 포로가 되었다. 전공을 서둘러 적을 가볍게 본 결과였다. 다음은 당시 패전상황을 기록한 &#10218삼국사기&#10219문무왕 12년(672) 가을 7월과 8월 조 기사의 전문(全文)이다.


&lt 가을 7월, 당나라 장수 고간(高侃)이 군사 1만, 이근행(李謹行)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동시에 평양에 와서 여덟 개의 군영을 짓고 주둔하다가, 8월에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그들은 군사를 진군시켜 백수성에서 5백 보 떨어진 곳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우리의 군사와 고구려 군사가 그들과 격전을 벌려, 수천 명의 목을 베었다. 고간 등이 퇴각하자, 이를 추격하여 석문(石門)에서 전투를 했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고, 대아찬 曉川(효천), 사찬 義文(의문), 사찬 山世(산세), 아찬 能申(능신),아찬 豆善(두선), 일길찬 安那含(안나함), 일길찬 良臣(양신) 등이 전투에서 전사했다. 한산주에 주장성(晝長城)을 쌓으니 둘레가 4360 步(보)였다.&gt



위의 기록만으로는 석문전투 패전의 전모를 이해하기 어렵다. &#10218삼국사기&#10219 43권 김유신傳(전)에서는 그때의 참담한 패전 과정을 다음과 같이 보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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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처음에 法敏王(법민왕: 문무왕)이 고구려 반군의 무리를 받아들이고, 또한 백제의 옛 땅을 차지하였다. 당고종은 크게 노하여 군사를 파견하여 그들을 치게 하였다. 당군이 石門 들판에 진을 치자 왕은 장군 義福(의복)&#8228 春長(춘장) 등을 보내 이를 방어하게 하여 帶方(대방: 황해도) 들판에 진을 쳤다. 이때 長槍幢(장창당)만은 별도로 진을 치고 있다가 당병 3천여 명과 싸워 그들을 잡아서 대장군의 진영에 보냈다. 이에 여러 幢(당: 부대)들이 함께 말하기를 “長槍營(장창영)은 홀로 있다가 공을 세웠으니 반드시 큰 상을 받을 것이다. 우리도 한데 모여서 헛되이 수고만 할 필요가 없다”라고 하면서 마침내 각자 군대를 분산해 진을 치려고 하였다. 당병이 말갈과 함께 우리 군사가 아직 진(陣)을 치지 못한 틈을 타서 공격하여 오자, 우리 군사가 대패하여 장군 효천(曉川)&#8228 의문(義文) 등이 여기서 죽었다. &gt



평지인 石門(석문)들판에서 전투를 벌린 것은 신라군 지휘부의 최대 실책이었다. 漢族(한족)과 말갈족으로 구성된 당군의 장기(長技)가 바로 평지전 및 기병전이었기 때문이다. 더욱이 일원화한 지휘계통을 유지하지 못하고, 장창당의 작은 전공을 시기해 각 부대가 뿔뿔이 흩어져 진영을 설치하다가 당군의 급습을 받고 대패했던 것이다. 서영교 교수는 석문전투의 실패의 원인을 다음과 같이 분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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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전투의 패배는 팀웍 이완이 부른 재앙이었으며, 전쟁을 주도한 신라 지배층에게 뼈아픈 교훈을 되었습니다. 그것이 바로 병력의 규모가 클수록, 군부대의 수가 많을수록 명령 전달체계와 규율이 제대로 지켜지지 않을 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는 점입니다. 일원적 명령체계 확립 없이는 향후 당과의 대결에서 신라국가의 존립을 보장받을 수 없다는 분위기가 전쟁을 주도했던 신라 지배층 사이에 형성되기 시작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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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8231 당7년전쟁 시기의 전법


경기병(輕騎兵)시대의 도래


군편제―全軍의 3분의 1이 기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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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먼저 “지피지기 백전백승(知彼知己 百戰百勝)”라는 &lt&lt孫子兵法&#8231 손자병법&gt&gt의 차원에서 신라군의 상대였던 당군의 陣法(진법)과 戰法(전법)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충격력 중시(重視)의 중기병(重騎兵)이 수(隋) 말기의 여러 전투에서 기동력 부족으로 파탄을 보임에 따라 唐 초기부터 중시된 것은 기동력이 뛰어난 輕騎兵(경기병)이었다.


수말당초(隋末唐初)의 천하대란에서 여러 경쟁자들을 물리치고‘中原(중원)의 사슴(패권)’을 잡은 당나라의 기마 전술은 충격력(衝擊力)보다도 광범위한 踏破(답파)능력을 살리는 우회전법 및 奇襲戰法(기습전법), 그리고 철저한 추격전이 강조되고 있었다. 이것은 重騎兵(중기병)의 장갑(裝甲) 방어력과 돌격력에 의한 결전주의(決戰主義)가 퇴락하고, 경기병(輕騎兵)의 스피드 있는 활약이 중요시된 것을 의미한다.


만당(晩唐)의 대학자 杜佑(두우)가 지은 &#10218通典&#8231 통전&#10219은 &#10218衛公李靖兵法&#8231 위공이정병법&#10219을 인용해, 당군의 편제 및 진법과 전투방법을 전해 준다. 이 병서는 東돌궐&#8231 토욕혼(吐谷渾) 등의 기마민족국가와 싸워, 화려한 전과(戰果)를 올린 당태종 때의 병법가인 이정(李靖)이 저술했다. 이 병서를 통해 경기병시대 당군의 진법(陳法)과 전법을 살필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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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군의 출정 시에는 1인의 大將(대장)에게 2만의 병사가 부여된다. 이 2만 병은 7개의 軍(군)으로 나눠진다. 이것은 사령부 부대인 중군(中軍)과 전&#8231 후&#8231 좌&#8228 우의 4개 군과 그리고 左虞候軍(좌우후군)과 우우후군(右虞候軍)의 2개 군이다. 이것을 총칭해서 7군(軍)이라 부른다. 7군의 간에는 행군 및 전투시의 배치와 역할이 명확하게 정해져 있었다.


대장 예하 병력 2만 명 중 전투병력은 1만4000 명. 그 중 기병은 4000기(騎)로서 전체 전투병력의 3분의 1 정도였다. 주목해야 할 점은 전체적으로 부대 구성이 경쾌성과 원거리 공격을 주안점(主眼点)으로 삼고 있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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陣法(진법)―기동력을 살리는 것이 기본


&#8226隊(대)의 전투대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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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병은 50 명으로 1대(隊)가 편제되어, 그것이 병력 운용상의 기본단위로 되었다. 1隊는 前後 20步(30m)의 지상에서 5열 횡대를 이룬다. 隊頭(대두)가 선두에 서서 부대를 이끌고, 그의 뒤에는 기수(旗手)가 위치한다. 기수 뒤에는 2명의 &#20628旗(겸기: 軍旗 보호병)이 따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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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2명의 겸기 뒤에는 좌우 균등하게 병(兵)을 5열로 늘어놓는다. 제1열 7명, 제2열 8명, 제3열 9명, 제4열 10명, 제5열 11명이다. 최후미에 대열로부터 이탈하는 병사를 막기 위해 隊副(대부: 副대장)가 큰칼을 들고 서서 병사를 감시했다. 이와 같은 V자형 대형을‘송곳 형(形) 진’이라고 불렀다


&lt&lt 전략사전 106쪽 표물---당군 출정시 大將 휘하 7軍 편성표 &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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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6각 군의 전투대형


&lt&lt전략사전 107쪽 표물--당군 전투대열의 한 사례 &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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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형(隊形)의 기본이 된 것은 3단계에 걸친 보병진이다. 최전열은 보병 3隊로서 1개의 대대(大隊)를 형성한다. 대대는 솥발(鼎足&#8228 정족)처럼 굳혀서 보다 큰 V자형의 陣形(진형)을 취한다. 중군(中軍)은 이 대대를 5개 만들어 제1선으로 삼았다. 대대의 선두에 위치하는 1隊를 특히 戰鋒隊(전봉대)라 부르고, 뒤의 2대(隊)는 戰隊(전대)라고 했다.


제2열에 각 대대 사이의 틈을 메우려고 橫(횡) 1열에 駐隊(주대) 11개를 배치했다. 각 대 모두 20보(步)의 正面(정면)을 갖고 있기 때문에 두께가 실질적으로는 보병 5개 열의 얇고 긴 횡대로 된다. 이 주대(駐隊)의 좌우에 기병(騎兵)을 10隊씩, 下馬(하마)한 상태로 배치한다. 최후미에 예비대로서 奇兵隊(기병대)가 10개 배치된다.


다른 6軍은 이것 보다 조금 소규모이지만, 같은 모량의 대형(隊形)을 취해, 각각의 전투정면에 전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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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전략사전 108쪽 표물---中軍 전투대형의 一例 &gt&gt


&#8226각 군에 의한 기본적인 전투패턴(戰法)


이상과 같이 포진한 군은 다음의 순서대로 전투를 했다.


우선, 적병이 150보(225m)의 위치에까지 도달하면, 弩手(노수)가 노를 쏘기 시작한다. 노수 1인당 50 발의 노를 준비하고 있었지만, 물론 1회의 시전(矢戰)에서 다 쏘아 소모하는 것은 아니다.


적이 60보(약 90m)의 전방(前方)까지 오면 궁수가 먼저 화살을 발사한다. 노수&#8228 궁수 모두 적이 20보(30m)의 위치에 까지 오면 사격을 중지하고 후방으로 물러난다. 궁수는 주로 주대(駐隊)의 열에 再배치되고, 노수는 노를 버리고 칼과 곤봉 등을 잡고 戰鋒隊(전봉대)의 後尾(후미)를 따르는 형태로서 白兵戰(백병전)에 참가한다.


그리고 나서 전봉대&#8228 戰隊(전대)의 전진(前進)에 따라 백병전이 개시된다. 이 제1열의 大隊(대대)가 피로해지면 주대(駐隊) 양쪽 옆구리 쪽의 기병(騎兵)과 대대 후방의 奇兵(기병)이 전진(前進)해 대대와 교체한다. 대대는 駐隊(주대)의 후방으로 빠져서 대오를 정비&#8228 휴식한다. 騎兵(기병)&#8228 奇兵(기병)에 피로가 보이면 다시 대대가 전진, 騎兵&#8228 奇兵에 대신해 전투를 속행(續行)한다.


주대(駐隊)는 정면의 전투에 弓矢(궁시)로서 지원하고, 제1선의 틈을 빠져나오는 적과 싸우지만, 전투 중 결코 그 자리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군의 陣列(진열)을 정해진 위치(位置)대로 유지하고, 손상당한 부대의 재편 및 휴식을 부여하는 장소를 확보하는 것이 그들의 임무이다. 적진을 향해 전진해 공격하는 경우는 50보(步) 마다 정지해서 陣形(진형)을 정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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석문전투 패전 후 신라 수뇌부의 대책



석문전투는 당군의 선진(先進) 전법 및 진법에 신라군이 당한 구체적 사례였다. 그렇다면 신라 수뇌부는 석문전투 패전 후 어떤 대책을 세웠던가? 다음은 &#10218삼국사기&#10219 권43 김유신傳(전)에 기록된 관련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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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대장군 등이 微行(미행)으로 入京(입경)했다. 대왕(문무왕)이 이 소식을 듣고, 김유신(金庾信: 태대각간)에게 물었다. “군사가 이렇게 패하였으니 어찌하리오?” 유신이 대답하였다. “당인(唐人)들의 모략을 예측할 수 없아오니, 장졸들로 하여금 제각기 요충을 지키게 해야 합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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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언급한 신라군의 대장군은 의복(義福)과 춘장(春長)일 것이다. 의복과 춘장은 신라김씨이고, 특히 춘장은 화랑집단의 최고 리더인 제25세 風月主(풍월주) 출신이다. &#10218화랑세기&#10219필사본에 따르면 역대 풍월주는 1세 풍월주 魏花郞(위화랑)으로부터 32세 信功(신공)까지 이어진다.


삼국통일전쟁과 나당전쟁에서 활약한 풍월주 출신은 15세 金庾信(김유신), 제18세 金春秋(김춘추), 제19세 金欽純(김흠순), 제22세 金良圖(김양도), 23세 金軍官(김군관), 제25세 金春長(김춘장), 제27세 金欽突 (김흠돌) 등이었다. 풍월주는 가야김씨인 유신과 흠돌을 제외하면 전부 신라김씨였다.


微行(미행)이라면 微服潛行(미복잠행), 즉 지위가 높은 사람이 남루한 옷차림으로 남몰래 돌아왔다는 말이다. 사료를 통해 석문전투에 동원된 신라의 병력수는 알 수 없지만, 당군 4만을 먼저 공격했다면 적어도 그것보다 많거나 비슷했을 것이다. 그런 대군을 잃고 서라벌로 돌아왔던 만큼 그 지휘관들은 면목이 없을 터이다.


김유신은 이때 78세의 노장(老將)으로 일선 전투에는 출전하지 않았다. 그러나 김유신이 제시한 석문전투 패전 후의 대책은 참으로 時宜適切(시의적절)했다. 요충(要衝)을 지키는 전수방어(專守防禦)의 전략을 문무왕에게 진언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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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에 따라 (1)임진강에서 서라벌에 이르는 要害(요해)에 대대적으로 산성(山城)을 축조&#8231 보강했다. (2)적의 해상(海上) 병참선을 차단하기 위해 전함 100척으로 구성된 함대를 배치해 서해안을 哨戒(초개)했다. (3)당나라에 대해 사죄사를 파견하는 등 시간벌기의 유화책을 구사했다. (4) 대규모 기동훈련과 당시 최선진 병법에 의한 육화진법(六花陣法) 훈련 등을 실시했다.



(1)의 專守防禦(전수방어) 전략을 위한 제1차 조치가 晝長城(주장성)의 축조였다. 한산주(漢山州: 지금의 경기도 廣州市)의 주장성은 주위 둘레 4360步(약 7km)로서 남한산성의 어미 성(城)이다. 당군이 임진강선을 돌파, 한강을 넘어오는 것을 대비해 한강 남쪽의 주요 방어기지 및 병참기지로 만든 것이다. 우선은 성문을 굳게 닫고 수비를 전념하는 지구전략을 전개하려 했던 것이다. 주장성의 군사적 의의는 뒤에서 거론할 것이다.


문무왕의 신라는 이후 한강 중&#8228 상류지역 등 사라벌에 이르는 요지에 대대적으로 성을 쌓았다. 즉, 673년 7월 사열산성(沙熱山城) 증축을 시작으로, 동년 9월에 국원성(國原城: 충주), 북형산성(北兄山城: 경주), 소문성(召文城: 의성), 이산성(耳山城: 고령), 주잠성(主岑城), 만흥사산성(萬興寺山城 거창), 骨爭峴城(골쟁현성: 양산군) 등을 축조하고, 주양성(走壤城: 춘천시 봉산)을 요새화해 방위력을 증강했다.


(2)바다와 강을 지키기 위해 673년 9월에 대아찬 김철천(金徹川) 등이 군선 100척의 함대를 거느리고, 서해안을 초계하면서 강으로 진입하려는 적을 소탕했다. 哨戒(초계)란 적의 습격에 대비해 엄중히 감시로 경계하는 것을 뜻한다. 다음은 &#10218삼국사기&#10219 문무왕 13년(673)의 관련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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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당나라 군사가 말갈&#8231 거란 병사와 함께 북쪽 변경을 침범하였는데, 아홉 번 전투에서 우리 군사가 승리하였고, 2천여 명의 머리를 베었다. 호로(瓠蘆: 임진강 중류)&#8228 왕봉(王逢: 한강 하류)의 두 강에 빠져 죽은 당나라 군사가 이루 셀 수 없었다.&gt



당시, 한반도와 중국을 잇는 3개 항로는 연안항해에 의존하는 전통적인 노철산수로(老鐵山水路), 중국 산동반도와 옹진반도(황해도)를 잇는 최단거리(280km)의 황해횡단항로(黃海橫斷航路), 중국 장강(長江) 하구 지역과 한반도 서남쪽을 잇는 동중국해사단항로(東中國海斜斷航路)였다.


나당전쟁 당시 당의 水軍은 항해능력이나 조선기술 때문에 연안을 따라 운항하는 노철산수로 주로 이용했고, 신라는 상대적으로 우수한 조선술&#8228 항해술에 의해 황해횡단항로에 익숙해 있었다. 예컨대 신라의 재상 김춘추(훗날의 태종무열왕)가 입당한 뒤 귀국할 때 고구려 순찰선의 해상 저지를 뚫고 이용한 항로가 황해횡단항로였다. 통일신라시대의 청해진 대사 張保皐(장보고)가 자주 사용한 항로는 동중국해사단항로였다.


1983년, 필자는 1983년 목포해양전문대학(목포해양대학교의 前身)의 3500톤급 실습선에 편승해 東중국해를 항해한 일이 있지만, 양자강에서 내려오는 강물과 바닷물이 부딪쳐 높은 물마루(水宗)를 이루는 해역으로 매우 거친 항로라는 사실을 경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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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나당전쟁이 끝난 후에도 해군을 증강했다. 백제와 고구려가 보유하고 있던 선박 건조 기술과 항해술 등을 효과적으로 흡수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상황에서 문무대왕은 678년 船府(선부)를 창설했다. 종래에 군사문제를 전담하던 兵部令(병부령) 휘하의 大監(대감)과 弟監(제감)이 맡아오던 해군&#8228 造船(조선) 부문을 독립시켜 새로 창설된 船府令(선부령)이 관장토록 했던 것이다.



9세기 중엽, 일본의 구법승 엔닌(圓仁)은 동중국해斜斷(사단)항로를 운항하는 일본의 견당선을 탔으나 황파(荒波)에 의해 난파선 상태로 양자강의 내항(內港)인 양주(揚州)에 겨우 입항했다. 엔닌은 입당 10년 후 귀국 시에는 위험을 피해 굳이 신라선에 승선했다.


657년, 신라와 왜국이 단교(斷交)한 것은 왜국이 그 유학승 등을 신라의 견당사가 타는 선박에 태우려다가 신라가 거절함으로써 비롯되었다.&#10218日本書紀&#8231 일본서기&#10219 사이메이(齊明) 3년(657) 조에는 “신라에 사신을 보내, ‘사문 지달(沙門 智達) 등을 그대 나라의 사신에 딸려서 대당(大唐)에 보내고 싶다’고 요청했지만, 신라가 듣지 않아, 사문(승려) 지달 등이 그냥 돌아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로부터 668년 9월에 이르기까지 11년간 신라와 왜국 사이에는 단교상태가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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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훼손의 현장



남한산성의 ‘어미 성’은 신라의 주장성 유적 훼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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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한산성 안에 통일신라시대 건물터가 발굴되던 10년 전부터 필자는 그 현장을 여러 차례 답사했지만, 그때마다 우리 민족사 형성의 결정적 현장을 이처럼 왜곡해서는 안 된다느꼈다. 주장성(晝長城)의 신라 건물 터는 지금 조선왕조의 행궁(行宮)에 더부살이를 하고 있는 모습이다.


주장성은 나&#8231 당 7년 전쟁 때 한강 방어 및 병참기지인 승리의 현장이고, 남한산성은 조선왕조의 인조(仁祖)가 병자호란 때 농성 45일만에 출성(出城)하여 가장 치욕적인 ‘城下(성하)의 盟(맹)을 감수해야 했던 패전의 현장이다.


인조는 지금의 잠실 롯데백화점 건너편 서호(西湖) 언덕인 三田渡(삼전도)에 나가 청(淸)태종에게 세 번 절하고, 아홉 번 머리를 땅바닥에 조아리는 퍼포먼스를 강요당했다. 서호 입구엔 청 태종의 뜻을 받든 碑文(비문)을 새긴 치욕의 ‘삼전도비’가 서 있다. 그 동안 삼전도비는 누군가에 의해 쓰러뜨려져 쳐박히는 등의 곡절을 거쳐 최근에 본디 자리로 돌아와 있다.


나당전쟁 시기에 축조한 신라의 건물지(建物址)가 처음 확인된 것은 남한산성 행궁(行宮)을 복원하기 위해 발굴조사를 하던 때였다. 초대형 기와가 사용된 신라 건물지 遺構(유구)가 확인되었던 것이다. 초대형 기와 한 개의 무게는 약 18kg. 우리가 경주 같은 데서 흔히 보는 일반기와가 4 kg임을 감안하면 4배가 넘는다.


건물지 또한 규모가 약 53m의 길이에 벽체의 두께가 2m에 달하며, 성곽 안에 또 하나의 성을 쌓는 방식으로 되어 있다. 중국 서안(西安)에서 발굴된 한(漢)나라 기와(길이 57cm )보다 크다. 이것은 남한산성의 모태(母胎)가 되는 신라 주장성과 관련된 유구들로서 신라의 당군 축출의 강한 의지를 확인할 수 있다.



신라 건물터 발굴을 맡았던 토지박물관 관장 조유전 교수는 “신라의 주장성은 조선시대 남한산성보다 더 큰 의미를 지니고 있으며, 앞으로 남한산성을 정비&#8228 복원함에 있어 신라 주장성의 규모를 밝혀야 함은 물론, 나아가 산성 내에 있을 것으로 보이는 백제&#8231 신라 유적을 찾는 노력을 배가해야 할 것이다”라고 밝힌 바 있다.


그런데도 현재 신라 주장성의 건물터는 복원된 남한산성 行宮(행궁)의 외행전 한쪽 구석에 축소&#8231 왜곡된 초라한 모습으로 처박혀 있다. 발굴조사 당시만 해도 외행전 마당의 대부분을 꽉 채우고 있는 장쾌한 모습이었다. 건물지의 규모는 (정면) 16칸&#10799(측면) 6칸= (면적) 963㎡로 밝혀졌다. 이런 중요 역사 건물터를 행궁을 복원한다고 모두 덮어버리고 아무 연고도 없는 구석에 모형물을 만들어 재현(再現)의 시늉만 해 놓은 것은 문화재 당국의 양식(良識)을 의심스럽게 한다.


行宮(행궁) 임금이 왕궁을 떠나 도성 밖으로 행차할 때 임시로 거처하는 곳을 말한다. 남한산성 행궁은 유사시 후방의 지원군이 도착할 때 임금의 피난처로 사용하기 위해 1626년에 건립되었다. 행궁 공사 때 지표(地表)에서 신라 기와가 많이 발견되었는데, 그 중요성을 깨닫지 못하고, 행궁 바닥면의 기초를 다지느라고 으깨어 땅속에 파묻기까지 했다.


어떻든 인조 14년(1636) 병자호란이 발발하자, 인조는 남한산성의 행궁에 들어가 45일간 농성했다. 청군(淸軍) 10여만 명에 포위된 남한산성 내에는 곧 양식이 바닥날 형편이었다. 성곽과 잇대어 펼쳐진 산지가 없어 도주로를 확보하기 어려웠다. 성 밖으로 나가기만 하면 바로 평지여서 기병전에 능한 청군에게 포착되어 맞아죽거나 포로가 되게 마련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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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금을 써서 역사 현장을 왜곡


“고구려 중심사관은 민족의 理想 실현에 역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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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 이후에는 숙종&#8231 영조&#8231 정조&#8231 철종&#8231 고종이 여주&#8231 이천에 陵幸(능행)을 할 때 머물기도 했던 곳이다. 능행이란 임금이 능에 거둥함을 의미한다. 외행전은 왕이 정무를 보던 장소인데, 평소엔 경기관찰사(정2품)를 겸임한 광주유수(廣州留守)의 집무처로도 사용되었다.



행궁에서는 해설사들이 하루 세 차례 쯤 관광객을 상대로 문화재를 해설하고 있었다. 필자가 2013년 가을에 신라 건물터를 찾아갔을 때이다. 정체불명의 개량 한복 차림을 한 문화재해설사는 &#46909금없이“신라가 삼국통일을 했기 때문에 서울 江南의 땅값이 마구 뛰고 있다”고 볼맨 목소리를 높였다. 신라의 삼국통일과 강남 땅값 폭등이 무슨 상관(相關)관계가 있나 하여 그의 언설을 들어보니 대충 이런 억지주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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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통일을 하는 바람에 국토가 좁아졌다. 만약 고구려가 통일했다면 평양이나 만주의 대평원에 定都(정도)를 했을 터이다. 그리 되었다면 서울의 땅값이나 전세값이 지금처럼 높을 리가 없다.



이런 엉터리 문화재 해설사가 물정 모르는 관광객이나 어린 학생을 상대로 왜곡된 역사 해설을 하도록 방치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는 신라를 증오했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역사관의 완전일치는 어렵다. 다만 민족사의 큰 흐름에 거스르면서 북한 정권의 역사왜곡을 그대로 믿고 선전하는 것은 그 자신이 의식 하든 못하든 반역 행위이다.


북한은 민족사의 정통을 고구려→발해→고려→조선→‘김일성의 나라’라는 엉터리 史觀(사관)을 강변하고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의 理想(이상)을 실현할 수 없는 함정 속으로 북한 주민과 남한 從北(종북)을 밀어넣으려는 짓이다. 한국사의 원로학자 이기백 선생은 별세 1개월 전에 자택으로 찾아간 필자를 이렇게 간곡하게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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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러 과정을 살펴볼 때 통일신라를 계기로 해서 그 이후 우리나라의 역사가 결국은 자유와 평등이라는 이 두 가지 목표를 향해서 성장해왔다고 할 수가 있습니다. 사회적 현상으로서는 역사와 정치에 참여하는 사회적 기반이 확대되었다고 표현합니다만, 이것을 사상적인 면에서 말하게 되면 자유와 평등을 희구하는 그런 방향으로 나아갔다고 요약할 수 있습니다.


한국사를 공부하는 것은 지금껏 한국사의 주인공인 한민족이 추구해온 바가 무엇인지를 밝혀내는 작업을 통해, 장차 한국 민족이 추구해야 할 理想(이상)이 무엇인지를 생각해보자는 것입니다. 지금 북한정권의 고구려 중심 사관은 민족의 理想 실현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 것이며, 북한의 정치&#8228 경제&#8228 사회&#8228 문화의 현실은 조선왕조 시대보다 크게 후퇴한 상황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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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 중에 건설한 주장성의 건물에 대해 ‘통일신라시대 건물’이라는 남한산성문화관광사업단의 표현도 옳지 않다. 나당전쟁에서 승리한 이후 통일신라가 출발했기 때문이다. 신라 건물터를 구석에 처박아 둔 外行殿(외행전) 마당에서 물러나오면서 외형전의 柱聯(주련)을 보니 기막힌 내용이 적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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聖代初面三古俗 임금의 聖代가 처음으로 三代의 풍속으로 돌아와


禁林長住萬年春 대궐 숲에 오래 머무니 만년의 봄이로다


春在聖人方寸裏 봄은 聖君(성군)의 마음 속에 있고 (생략)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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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행전의 주련은 남한산성의 축성과 병자호란의 전말을 기록한 &#10218南漢日記&#8231 남한일기&#10219등의 기록, 구한말에 서양 선교사 등이 촬영한 사진 자료 등을 근거로 복원된 것이다. 첫 구절부터 필자의 눈에 걸렸다. 중국의 神話的(신화적) 聖君인 堯(요)&#8231 舜(순)&#8231 禹(우)의 3代를 理想(이상)사회로 설정해 놓고, 그런 검증된 바 없는 假想(가상)의 세계를 그리워하도록 유도하는 구절 때문이었다.


조선왕조의 이데올로기인 朱子學(주자학)은 유학에 理(이)&#8231 氣(기)의 철학 등을 가미한 것이었다. 중국에서는 왕조의 名分用(명분용)이었던 朱子의 性理學(성리학)을 國是(국시)로 삼고, 속마음까지 바쳤던 유일한 나라가 조선왕조였다. 조선왕조의 사대부들은 주자학의 원리주의자였다.


조선왕조의 선비사회에서는 유학의 다른 갈래인 陽明學(양명학) 관련 서적 한 권만 갖고 있어도 斯門亂賊(사문난적)으로 몰렸다. 양명학은 知行合一(지행합일), 실천 중시의 논리체계였다. 조선왕조는 성리학원리주의 왕조였다. 성리학이 문제라기보다 다른 사상체계를 용납하지 않는 원리주의가 나쁜 것이다.


주장성의 건물터는 행궁의 외행전을 허물어서라도 복원되어야 한다. 그런 사대주의적 詩(시)가 쓰인 주련이 실재했다 하더라도 굳이 오늘에 복원해서까지 顯彰(현창)할 필요가 없다.


주장성이란 민족자존의 현장을 사대주의적 싯구로 오염시키는 것은 우리 민족의 理想(이상) 실현과는 無關(무관)한 바보짓이다. 주장성의 성벽 8km의 遺構(유구)와 원래 주인인 신라의 유물의 발굴도 당연히 계속되어야 할 것이다. 나랏돈을 들여 역사 현장을 왜곡하는 바보짓은 이제는 멈춰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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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의 화전(和戰) 양면전략



약소국이 강대국과 싸우는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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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2년 石門전투의 대패 후 신라가 취한 대책 중 또 하나는 謝罪使(사죄사) 파견이었다. 672년 9월, 문무왕은, 사신을 보내 당군을 공격하지 않을 수밖에 없었던 신라군의 입장을 정중히 해명했다. 이때 사신은 국서 전달과 함께 신라가 1년간 억류하고 있었던 兵船郎將 鉗耳大候(병선낭장 겸이대후), 萊州司馬 王藝本(내주사마 왕예본) 熱州長史 王益(열주장사 왕익), 웅진도독부사마 예군, 曾山司馬 法聰(증산사마 법총) 등 당 보급선의 수송 책임자들을 돌려주었다.


그리고 당의 관계 요로에 금&#8228 은&#8228 바늘&#8228 구리&#8228 우황&#8228 포목 등 막대한 예물도 진상했다. 672년 9월, 문무왕이 당고종에게 보낸 표문은 弱肉强食(약육강식)의 정글 속에서 나라를 지켜야만 하는 군주의 고뇌가 가슴 아프게 드러난다. 다음은 &#10218삼국사기&#10219 문무왕 12년(672) 9월 條(조)의 기록이다.



&lt 신모(臣某)는 죽을 죄를 짓고 삼가 말씀 드립니다. (중략) 철천지원수 백제(웅진도독부)는 우리의 변방을 핍박하고, 황제에게 청병(請兵)하여 우리를 멸망시키고, 원수를 갚으려 했습니다. 저는 파멸이 두려워 우리의 생존을 추구하려다가, 억울하게도 흉악한 역적의 취급을 받게 되었습니다….&gt



이와 같이 외교적이며 유화적인 조치를 취하면서도, 673년 9월을 전후해 전국에 걸쳐 전술적 요지를 선정, 그곳에 성곽을 신축하거나 증축하여 요새화함으로써 지역 단위의 방어력을 제고했음은 앞에서 썼다.


또한 당이 해상으로 보급품을 수송하거나 병력을 침투시키는 것을 저지하기 위해 대아찬(관등 제5위) 김철천(金徹川)이 군선 100척을 거느리고 서해안을 초계(哨戒)하도록 했다. 이 무렵, 당군은 말갈병과 거란병을 포함하는 혼성부대를 편성해 아홉 차례에 걸쳐 호로하(瓠瀘河: 임진강 중류)와 왕봉하(王逢河: 한강 하류) 일대에 주둔한 신라군을 공격했다.


신라군은 이들과 싸워 2000여 명의 목을 벴는데, 빠져 죽은 적군 병사는 이루 헤아릴 수가 없었다. 그러나 당군은 673년 겨울에 당군은 고구려부흥군이 지키던 우잠성(牛岑城: 황해도 금천)을 공격, 항복을 받았다. 이어 당군에 소속된 거란과 말갈 군사는 대양성(大陽城)과 동자성(童子城 김포반도 통진의 문수산성) 등을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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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3년 윤5월, 이근행이 거느린 말갈군은 임진강 북안에서 고구려부흥군에 대해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이로써 고구려부흥군은 사실상 소멸했다. 문무왕은 당나라에 반기를 들었다가 패전한 고구려부흥군을 대거 받아들이는 한편 백제 옛 땅을 점거하고 관리를 파견해 행정적 지배를 완료했다.


이번에도 당고종이 발끈했다. 674년 1월, 당고종은 문무왕의 관작을 취소하면서, 당에 체재하고 있던 문무왕의 아우 김인문(金仁問)을 신라 국왕으로 책봉하고, 유인궤(劉仁軌)를 鷄林道大摠管(계림도대총관), 위위경 이필(李弼)과 우령군대장군 이근행(李謹行)을 부대총관으로 삼았다.


이는 신라 조정 내부의 정치적 분열을 야기시켜 신라군을 약화시켜놓고 신라까지 먹으려는 당 수뇌부의 책략이었다 즉, 당이 후원하는 국왕을 세움으로써 문무왕 중심의 반당(反唐) 수뇌부를 제압하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술책을 구사한 것이었다.


이런 일촉즉발(一觸卽發)의 위기에 문무왕은 당에 사신을 파견해 공물을 바치고 사죄했다. 문무왕의 사죄사 파견이 주효했기 때문만은 아니겠지만, 어떻든 당고종은 출정 직후(674년 1월)의 신라 방면 원정군을 회군시키면서 문무왕의 관작도 회복시켜 주었다. 물론, 김인문도 귀국 중도에 長安으로 되돌아가 종전의 관직인 右驍衛員外大將軍 臨海郡公(우효위원외대장군 임해군공)으로 복귀했다.


왜 이런 반전사태가 갑자기 빚어졌던 것일까? 《나당전쟁사연구》의 저자 서영교 교수는 “天山지역의 전운(戰運)이 당의 對신라 전쟁에 영향을 주지 않을 수 없었다”고 지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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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번의 반격 가능성에 대해 당이 신경을 곤두세울 만한 충분한 이유가 있었다. 670년 토번에게 天山南路(편집자&#8212오아시스 北道와 南道)를 상실한 당은 그 代案(대안)으로 서쪽으로 통하는 또 다른 길을 이용했다. 그것은 타림분지(타크라마칸사막)을 경유하지 않은 천산산맥 북쪽의 루트로서 장안→玉門關→하미→우루무치→준가리아 분지와 발하시湖 부근의 일리(Ili) 계곡을 통과하는 길(스텝路: 초원의 길)이었다.


토번과 천산지역에서의 전쟁 발발은 당에게 토번의 위협을 피해 북으로 돌아가는 가늘게 연결된 길마저 상실할 수도 있다는 우려를 주었을 것이다. 弓月(궁월)과 인면은 천산산맥 북쪽 산록과 이식쿨湖 사이에 위치해 있었다. 토번에 동조한 두 부족은 당이 유지하고 있던 天山北路(천산북로: 초원의 길)를 사이에 두고 남북에 위치해 있었던 것이다. 토번의 개입과 두 부족의 협공은 천산북로의 단절을 의미하며, 이는 당에게 치명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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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3년, 토번은 궁월&#8231 인면과 연대했으며, 어떠한 형태로든 천산산맥 북쪽 스텝路(초원의 길)에 대한 군사개입하려 했다. 이 시기에 당군도 천산북로에 대한 수비를 강화했다. 이런 서역 전선의 상황에 따라 나당전쟁은 그 후 1년여간 소강상태에 들어갔다.


이러한 정세를 간파한 문무왕은 674년 하반기에 대규모 무력시위를 감행했다. 《삼국사기》문무왕 14년(674) 조에 따르면 그해 8월, 문무왕은 경주의 서형산 기슭에서 대규모 군사 기동훈련을 실시하여 신라의 군사력을 대내외에 과시했다.


그해 9월에도 문무왕의 임석 하에 영묘사(靈廟寺) 앞 광장에서 대대적인 열병식을 거행한 데 이어 아찬 설수진(薛秀眞)이 지휘하는 육진병법(六陣兵法)을 시범 실시하여 신라의 民軍에게 나당전쟁에서 승리할 수 있다는 자신감을 심어 주었다.


설수진의 육진병법이 어떤 내용인지에 관해서는 구체적인 기록이 없지만, 그 당시 신라에도 도입되었던 이정(李靖)의 육화진법(六花陣法)이라는 것이 학계의 다수설이다. 이기기 위해서라면 적의 전법도 즉각 배우는 것이 신라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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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 전략사전 108 도면--이정의 각종 진형도 &gt&gt


이정의 육화진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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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정(李靖: 571-649)은 당나라 초기의 명장이며 병법가였다. 청년기에 벌써 손자(孫子)&#8228 오자(吳子)의 병법을 깊이 연구, 외숙부인 수(隋)의 명장 한금호(韓擒虎)로부터“나와 손오병법(孫吳兵法)을 더불어 논할 수 있는 사람은 자네뿐”이라는 칭찬을 들었다.


수양제(隋煬帝)의 거듭된 고구려 원정 실패로 사회적 대혼란에 빠진 수말(隋末)에 이정은 40대 후반 나이로 돌궐 방어를 위한 제1선 기지였던 마읍(馬邑)의 부(副)사령관이라는 직책으로 밀려나 있었다.


이때 태원유수(太原留守) 이연(李淵: 후일의 당고조)의 거병을 눈치 채고 수양제에게 직보하려고 했지만, 장안(長安)에서 이연에 의해 체포되었다. 형리의 손에 넘어가 목이 달아나려는 순간에, 당시의 진왕 이세민(李世民:후일의 당태종)의 눈에 띄어 목숨을 건져 그의 幕下(막하)에 들어가게 되었다.


이후 진왕(秦王) 이세민의 오른 팔이 되어 洛陽(낙양)을 근거지로 삼은 왕세충(王世充) 등 수말당초의 군웅들을 토벌, 당왕조의 국내 통일에 진력했다. 진왕 이세민이 형인 황태자 이건성(李建成)과 동생인 제왕 이원길(李元吉)을 제거하고 즉위한 후 이정은 형부상서, 중서령 겸 병부상서를 중용되었다. 그는 군사 면에서뿐만 아니라 재상으로서도 당태종을 보좌했다.


당태종이 즉위 당초부터 당을 위협하던 돌궐 정벌을 결심하자, 이정은 총사령관이 되어 정예기병 3000기의 급습작전에 의해 초원의 최강자였던 東돌궐의 힐리가한(詰利可汗)을 생포했다. 또 토욕혼(土谷渾)의 침공 때는 고령과 숙환에도 불구하고 출정해 당고종의 기대에 부응했다. 이런 전공에 의해 그는 위국공(衛國公)에 봉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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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전략사전 108 쪽--각종 진형도(陣形圖)&gt&gt


&#8226 이정 진법(陣法)의 핵심―7軍에 의한 횡대(橫隊)


7군(병력 2만명)은 충분한 전장(戰場)의 확보가 가능하면 횡대를 취하는데, 그 전ㅐ정면(戰鬪正面)만 1700보(약 2600m)에 달한다. 사방 10리의 평야지대가 그리 흔하지 않는 한반도의 실전에서는 다소의 수정 또는 변형이 필요했을 것으로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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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226 李靖의“六花陣”


이정 진법에 의하면 “평원 및 광택(廣澤: 호수 지역)에서 적과 조우해 방어에 적합한 지형이 아닌 경우, 방영(方營)을 만들거나, 중군(中軍)이 중앙에 위치하고 6군이 사방을 굳혀. 여섯 잎의 꽃 형상을 만들어낸다고 했다. 이것은 이정 진법의 제1의 특징인 육화진(六花陣)이다. 이 6화진에는 육화방진(六花方陣)&#8228 육화원진(六花圓陣)&#8228 안행진(雁行陣: 曲陣) 등의 변형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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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덕여왕과 무열왕 즉위의 제1공신 김유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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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을 성공시킨 신라 3金의 리더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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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통일에 있어 金春秋(김춘추: 태종무열왕)&#8231 金庾信(김유신: 흥무대왕으로 추존됨)&#8231 金法敏(김법민: 문무대왕)은 세계역사상 그 어떤 지도부보다 탁월한 팀파워를 발휘했다. 김춘추는 시대적 흐름을 꿰뚫어본 동맹외교에 의해 一統三韓(일통삼한)의 틀을 짰다. 김유신은 자기희생과 戰必勝(전필승)의 신념으로 국가 존망의 위기를 타개했다. 문무대왕은 계산된 자존심과 용기, 그리고 지혜로 분열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고 한민족 사상 최초의 통일과 흥륭기를 창출했다.


西洋근세사에서 신라 3金과 비견될 만한 존재는 독일 통일을 이룩한 프로이센 국왕 빌헤름 1세, 수상 비스마르크, 참모총장 몰트게의 협력체제였다.


독일 통일을 위해 프로이센이 對오스트리아 전쟁과 對프랑스 전쟁을 차례로 감행할 때 빌헤름 1세와 비스마르크는 전선에서 전개되는 작전에 관한 한 일체의 간섭을 하지 않고 몰트게에게 일임했다. 몰트게는 프로이센 참모본부의 기능과 지휘관의 능력을 정예화하고, 철도수송에 의한 兵力集中(병력집중)으로 근대적 속도전을 감행해 압도적인 전승을 기록했다.


비스마르크는 오스트리아와 開戰(개전)할 때는 프랑스 황제 나폴레옹 3세(나폴레옹 1세의 조카)의 허영심을 만족시켜줌으로써 프랑스의 개입을 막았고, 1870년 對프랑스전쟁(普佛전쟁) 직전에는 나폴레옹 3세가 自國(자국)의 승전을 자신하고, 먼저 프로이센에게 선전포고를 발하게 유도함으로써 독일인들을 분발시키는 동시에 주변 열강의 好意的(호의적) 中立을 확보했다. 그는 절묘한 외교력을 구사해, 交戰(교전) 상대국을 항상 1개국으로 한정시켰던 것이다.


19세기 후반 유럽에서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제국의 지배하에 있던 東유럽 지역을 제외하면 이미 수백 년에 걸쳐 국민국가(Nation State)의 형성이 거의 완료되어 있었다. 西유럽 여러 나라들이 해외 식민지 획득에 박차를 가하고 있을 때, 독일과 이탈리아는 뒤늦게 민족통일과 국민국가 형성에 애쓰고 있었다.


독일어 使用圈(사용권)의 경우, 지역이 비교적 광대할 뿐만 아니라 역내에 잡다한 소수민족들이 뒤엉켜 있었다. 中유럽에서 힘의 공백상태를 깨고 강력한 통일국가가 등장하는 것은 주변 열강들이 바라는 바가 아니었다. 이런 난관을 극복하기 위한 빌헤름 1세의 국가경영과 인재 기용은 탁발한 것이었다.


다만, 야성적인 鐵血宰相(철혈재상) 비스마르크와 조용한 학자형 군인이었던 몰트게는 서로의 능력을 인정했지만, 인간적으로는 서로 경원했다. 이런 지도부 간 不信이 후일의 참화를 부르는 단초가 된다. 즉, 빌헤름 1세를 후계한 빌헤름 2세는 자신의 능력을 과신한 나머지 비스마르크를 은퇴시킨 뒤 제1차 세계대전에 돌입했다가 독일제국의 패망을 자초했던 것이다.


반면 김춘추와 김유신은 結婚同盟(결혼동맹)에 의해 운명공동체가 되었고, 김법민과 김유신은 私的(사적)으로 생질과 외삼촌의 관계였지만, 水魚之交(수어지교)로 표현될 만큼 모범적인 君臣(군신) 관계를 이루었다. 君主의 최고 德目(덕목)은 인재 기용과 臣下(신하)에 대한 믿음이다.


7세기 東아시아 세계를 뒤흔든 역사의 격동 속에서 최대의 수혜자는 신라였다. 이것을 추동한 힘은 신라 3金의 인간적 신뢰를 바탕한 팀파워였다. 인류사에서 가장 뛰어난 3인의 협력이 韓民族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특히, 야성과 지혜의 君主 문무대왕이 나당 7년전쟁을 지도했다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김유신의 유언, “대왕께서는 小人을 멀리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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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13년(673년) 7월1일, 김유신이 79세를 일기로 별세했다. 임종 며칠 전에 문무왕이 외삼촌이기도 한 김유신을 병문안을 하러 그의 집을 방문했다. 이때 문무왕에게 당부한 김유신의 유언에서는 늙은 신하의 충정이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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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라옵건대 대왕께서는 공을 이루는 것이 쉽지 않음을 아시고, 수성(守成)하는 것 또한 어렵다고 생각하시어, 소인배를 멀리하며, 군자를 가까이 하시어 위로는 조정이 화목하고, 아래로는 백성과 만물이 편안하여 화란이 일어나지 않고, 나라의 기틀이 무궁하게 된다면 臣(신)은 죽어도 여한이 없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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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은 김유신의 부음을 듣고 매우 애통해 하며 채색 비단 2천 필과 벼 2천 섬을 부의로 보내 상사(喪事)에 쓰게 하고, 군악대 100 명을 보내 장례를 엄숙히 거행하도록 했다. 김유신의 시신은 금산원(金山原)에 묻혔으며, 왕명으로 비를 세워 그의 공적을 기록하고, 민호(民戶)를 정하여 그이 무덤을 지키게 했다.


금산원은 경주 고속버스터미널에서 서천교(西川橋)를 건너 서천의 동쪽 포장도로로 1km 쯤 가면 만나는 야산이다. 바로 이곳에 가장 화려하고 정교한 십이지상의 호석(護石)으로 감싸인 김유신의 무덤이 있다.


김유신의 부인은 태종무열왕의 3녀인 지소(智昭)이다. 김유신-지소부인 사이에 5남4녀를 두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장남은 숙위(宿衛: 황제경호원)로서 대당 외교의 일선에서 활약했고, 평양 공격전에서 전공을 세워, 후일 이찬(관등 제2위)의 지위에 오른 삼광(三光)이다. 차남은 소판(관등 제3위)의 지위까지 오른 원술(元述)이다.


원술은 672년 석문전투 때 임전무퇴(臨戰無退)를 실천하지 못한 자신의 행동 때문에 생전의 김유신에게 용납되지 못하고 벽지에 숨어 지내다가 김유신이 죽은 후에야 어머니를 만나려고 했다.


그러나 지소부인은 “원술은 선군(先君: 김유신)에게 자식 노릇을 못하였으니, 내가 어찌 그의 어미 노릇을 하겠느냐”라고 말하며 끝내 자식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원술은 통곡을 하며 태백산으로 들어가 그로부터 세상을 등졌다. 단 한 번, 나&#8231 당 지상전의 결전인 買肖城(매소성) 전투에 스스로 참전해 큰 공을 세운 후 다시 자취를 감춰 세상과 절연했다. 지상전의 결전 매소성 전투는 뒤에서 거론할 것이다.


김유신은 신라에게 멸망당한 금관가야 仇衡王(구형왕)의 증손자이다. 그런 그가 어떻게 진덕여왕과 태종무열왕을 옹립한 킹메이커로 등장할 수 있었을까? 그 배경에 대해선 필자가 쓴 &lt&lt김유신―시대와 영웅&gt&gt에서 詳論(상론)했다.


신라가 外憂內患(외우내환)에 휩싸였던 선덕여왕의 재위 마지막 해인 647년 서라벌에서 반란이 일어났다. 주모자는 舊귀족세력을 대표하는 상대등 毗曇(비담)과 대아찬 廉宗(염종)이었다. 반란의 명분은 女主不能善理(여주불능선리), 즉 “여왕은 정치를 잘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반란의 와중에서 선덕여왕이 병사했다.


김유신은 비담의 반란군을 격멸하고, 선덕여왕의 사촌인 진덕여왕을 옹립했다. 이런 진덕여왕도 후사가 없이 654년에 병사하자, 알천공&#8228 임종공&#8228 술종공&#8228 호림공&#8228 염장공&#8228 유신공 등 6인의 실력자들이 후계자 선정을 위해 南山 오지암에 모였다. 이 회의에서 참석자 4인이 처음엔 “수석의 위치에 있던 알천공을 추대했으나 庾信公(유신공)의 위엄에 눌렸다”고 사서에 기록되어 있다.


그러니까 신라의 최고 귀족들은 맨손으로 호랑이를 때려잡은 괴력의 김알천보다 김유신의 존재를 더 두려워했던 것이다. 상대등 김알천은 이미 새 시대를 개막시키는 힘의 진원지가 김춘추-김유신 동맹임을 깨닫고 자신의 태도를 명확히 했다.


“나는 이미 늙었고, 이렇다 할 만한 德行(덕행)도 없소. 지금 덕망이 높기로는 춘추공 만한 이가 없으니, 실로 濟世(제세)의 영웅이라 할 수 있습니다.”


춘추공이 바로 신라 29대 임금인 태종무열왕이고, 그의 장남 김법민이 나당전쟁에서 승리해 삼국통일을 완수한 신라 제30대 임금인 문무대왕이다.



김유신의 복잡한 가족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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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서에는 김유신과 무녀(巫女)인 천관녀(天官女)와의 로맨스에 관한 기록은 있지만, 김유신의 결혼생활에 관한 기록은 거의 없다. 지소부인(智炤夫人)과의 결혼이 두 사람의 연령 등과 관련해 보면 아무래도 김유신의 初婚(초혼)인 것 같지는 않다. 지소부인은 김유신보다 8세 연하인 김춘추(태종무열왕)의 제3녀이다.


이런 상황으로 미뤄보면 지소부인의 나이는 김유신이 향년 79세로 사망했던 당시에 마흔 안팎이었을 보인다. 그렇다면 지소는 김유신의 둘째 여동생으로 무열왕 김춘추의 비(妃)인 문희(文姬)의 소생이라고 보기 어렵다.


문희는 김춘추의 장남인 문무대왕의 생모이다. 필사본 &#10218화랑세기&#10219의 기록 등으로 유추해보면 지소부인은 아마도 김춘추의 死別(사별)한 첫 부인인 보라궁주(寶羅宮主)의 딸인 것 같다.


그렇다면 지소부인은 삼광과 원술 등의 생모로 보기 어렵다. 김유신이 죽은 후에 그녀가 왜 비구니가 되었는지, 그 이유에 관한 기록은 남아있지 않다. 신라에서는 법흥왕과 진흥왕이 가사(袈裟)를 입고 승려로 자처한 이래 불법에 귀의한 왕족&#8228 귀족들이 적지 않았던 만큼 지소부인의 출가는 염세 때문인 것으로 볼 수 없다.


어쩌면 지소부인은 당시 신라 왕족&#8231 귀족 사회의 관습처럼 되어버린 중혼(重婚)을 피하기 위해 비구니가 되었을지 모른다. 신라사회에서는 후궁은 물론 왕비까지도 왕의 사망 후 다른 남자와 재혼 혹은 밀통했던 사례가 수두룩하다. 이런 것이 바로 기마민족의 풍습이다.


예컨대 진지왕의 왕비는 그녀의 장조카인 진평왕과 상간(相姦)했고, 진흥왕의 모후는 정부(情夫)들과의 사이에 많은 자녀를 두었다. 이런 풍조는 성의 문란이란 차원에서 볼 것이 아니라 지배계급의 인적자원을 양산해야 한다는 패권전쟁 시대의 국가 목적에 부응한 것으로 풀이된다. 어떻든 마흔 전후에 과부가 된 지소부인이 지아비 김유신의 명복을 빌기 위해 비구니가 되었다는 것은 하나의 순애보(純愛譜)라고 할 수 있다.


생전의 김유신은 재부(財富)를 쌓는 일에도 남달랐던 것 같다. 필사본&#10218화랑세기&#1021917세 풍월주 염장(廉長) 條에는 세인들이 등극 전의 “김춘추와 김유신의 집을 가리켜 수망택(水望宅)이라 했다. 이는 “그 집으로 금화가 들어가는 것이 마치 홍수처럼 보였음을 이르는 말이다”라고 쓰여 있다.


&#10218삼국유사&#10219에도 김유신의 집이 신라 35개 금입택(金入宅) 중의 하나로 기록되어 있다. 수망택이나 금입택이나 김유신家의 엄청난 재부를 전해주는 표현이다. 그러면 김유신의 재부는 어떻게 축적된 것일까. 필사본 &#10218화랑세기&#10219에는 다음과 같은 기록이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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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유신공이 은밀히 선덕공주를 도와서 오랜 환란을 평정한 공으로 인해 발탁되었다. 선덕공주는 제왕의 자리에 오르자, 유신공과 춘추공에게 많은 곡물을 주었다. 그리고 (두 사람은) 사사로이 재물을 취하기도 했는데….&gt



삼국을 주도하던 귀족층의 전투행위 자체가 전쟁을 통한 재부(財富)의 확대를 추구하는 것이었다. 전쟁을 통해 획득하는 포로와 토지가 귀족들에게 분배되고, 그것이 귀족층의 물적 토대가 되었다. 무인사회에서 세력 기반 확대의 전제조건은 사병(私兵)의 확보였다.


김유신은 백제부흥군이 평정된 663년 겨울 11월에 전(田) 500결(結)을 받았다. 1결의 생산량은 대체로 20석이었으므로 연간 1만 석의 소출을 거둘 수 있는 농지였다. 그 전해인 문무왕2년(662), 그는 적진을 뚫고 평양을 공략 중인 당군에게 군량을 수송했던 공로로 본피궁(本彼宮)에 딸린 전장(田庄)의 절반을 상으로 받았었다. 본피궁은 본래 석(昔)씨 왕들의 궁전이었는데, 거기에 딸린 농토의 전체 규모는 알 수 없다.


668년 평양성 함락 후 그는 또다시 식읍 500호를 받았다. 그리고 &#10218삼국사기&#10219문무왕 9년(669) 조에 의하면 김유신은 말을 기르는 목장을 여섯 개나 소유했다. 신라 최대의 사병(私兵) 집단을 거느렸던 김유신에게는 많은 전마(戰馬)가 필요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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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하로서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인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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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유신 장군의 무덤은 경주 도심 서쪽에 있는 서천교를 지나 우회전하면, 1km 남짓한 거리에 위치해 있다. 서천변을 끼고 북상하는 길은 흥무로(興武路)라고 명명되었는데, 길 양쪽의 가로수가 우거져 터널처럼 하늘을 가리고 있다. 김유신의 추존명이 興武大王(흥무대왕)이다.


경주시 충효동 송화산 동쪽 중턱에 자리잡은 사적 제21호 김유신 장군의 무덤은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매우 아름답다. 묘의 지름은 30m 정도이며, 주위에 호석(護石)과 돌난간을 두른 원형분이다.


김유신은 흥덕왕(興德王: 재위 826-836) 때 흥무대왕(興武大王)으로 추존되었다. 가야김씨인 그가 대왕으로 추존된 것은 매우 이례적이다. 대왕으로 추존되면서 김유신의 묘가 대대적으로 개수된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면 그의 성장 배경은 어떠했는지, 조금 짚어볼 필요가 잇을 것 같다.


김유신은 595년 신라의 북방 국경지대였던 만노군(萬弩郡: 충북 진천군)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532년 신라에게 멸망당한 금관가야의 마지막 왕 구형(仇衡)의 손자인 서현(舒玄), 어머니는 진평왕의 여동생인 만명부인(萬明夫人)이다.


서현과 만명은 신분의 차이 때문에 骨品制(골품제)가 지배하는 신라사회에서 정상적인 방법으로는 혼인이 불가능했다. 두 남녀는 신라의 변경지역으로 사랑의 도피행각을 감행했다. 서현으로서는 신분상승을 위한 승부수였는지는 모르지만, 왕가에서 귀하게 성장한 만명으로서는 도피생활이 대단한 시련이었을 것이다. 드디어 진평왕이 만명의 처지를 딱하게 여겨 서현을 만노군 태수로 임명했다. 이로써 둘의 혼인이 기정사실화 했다.


김유신은 만노군에서 소년기를 보냈다. 야합(野合)과 약탈혼(掠奪婚)을 저지른 서현-만명 부부에 대한 신라 귀족사회의 평판이 나빠 왕경(王京)으로 쉽게 돌아갈 형편은 아니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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異人으로부터 전수받은 兵法



시골소년 김유신에게 기회가 왔다. 진평왕의 어머니인 만호태후(萬呼太后)가 김유신의 비범함을 누군가에게 전해 듣고, 그를 서라벌로 불러올렸다. 김유신을 만나본 만호태후는 대번에 “진실로 내 손자”라고 기뻐했다. 이는 망국의 후예 김유신의 신분이 모계(母系)의 혈통에 따라 진골(眞骨)로의 격상(格上)을 의미한다.


만호태후로부터 손자로 인정받은 김유신은 곧 신라 청년들의 엘리트 코스인 화랑 조직의 상급 리더로 도약했다. 그때 그의 나이 열다섯이었다.


김유신은 不敗(불패)의 신화를 남긴 대장군이었다. 그렇다면 그는 어떤 수련과정을 거친 인물일까? 그는 일일곱 되던 해 고구려와 백제가 잇달아 신라를 침범하는 것에 비분강개하여, 무술을 닦아 적들을 토벌할 뜻을 품고, 홀로 중악(中嶽)의 석굴로 들어가 심신을 닦으면서 하늘에 서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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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적국이 무도하여 승냥이나 범처럼 우리나라를 침범하여 평안한 날이 없습니다. 저는 한갓 보잘 것 없는 신하로서 재주와 용력이 없사오나, 재앙과 난리를 없앨 뜻을 갖고 있사오니, 오직 이를 살피시어 저에게 힘을 주소서. &gt



나흘째 되던 날, 김유신은 한 이인(異人)을 만났다. 난승(難勝)이란 이름의 이인은 김유신에게 병법서를 주었다.


김유신의 기도처인 중악은 경주시 건천읍에 있는 단석산(斷石山: 827m)으로 추정되고 있다. 신라의 5악(五嶽) 중 하나인 중악의 위치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의 견해가 엇갈리고 있지만, ‘중악= 단석산’이 다수설이다.


2km 남짓한 단석산의 등산로는 상당히 가파르다. 단석산에는 화랑바위, 하늘받침돌 등 화랑 관련 유적과 거기에 얽힌 전설이 많다. 정상에 오르면, 언양의 가지산, 청도의 운문산 등 ‘영남 알프스’라 불리는 연봉들이 눈앞에 전개된다. 이곳은 신라가 낙동강 서안(西岸)으로 진출하는 데 교두보로 삼은 주요 교통로 에 위치해 있다. 이런 지형이라면 당연히 화랑도(花郞徒)의 순례지가 되었을 것이다.


석굴은 단석산 정상 서남쪽 바로 아래에 위치해 있다. 석굴 내 남쪽 벽면에는 약 30행(매 행 19字)의 명문이 새겨져 있다. 그 중 약 200자가 판독되고 있다. 절 이름이 신선사(神仙寺)이고, 주실에 봉안된 불상이 미륵삼존임이 밝혀졌다. 당시, 김유신과 그를 따르던 낭도들은 용화향도(龍華香徒)라 불렸다. 용화라면 바로 미륵이다. 이런 점에서 단석산 석굴은 화랑도, 특히 김유신과 연관 지을 수 있다.


김유신은 중악 석굴에서 수도한 이듬해에도 홀로 보검을 차고, 열박산(咽薄山)으로 들어가 병서(兵書)를 읽고 무예를 단련했다. 열박산은 지금의 경북-경남 도계(道界)에 위치한 ‘영남 알프스’ 연봉 중 하나일 것으로 추정된다.


&#10218삼국사기&#10219에는 열박산 수련 직후에 김유신이 화랑도의 최고 지위인 국선(國仙)에 오른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국선은 풍월주(風月主)인데, 김유신은 제15세 풍월주에 올랐던 것이다. 역대(1世∼32世) 풍월주를 보면 1세 위화랑(魏花郞), 5세 사다함(斯多含), 13세 김용춘(金龍春: 김춘추의 아버지), 제18세 김춘추(金春秋: 태종무열왕), 19세 김흠순(金欽純: 김유신의 동생), 22세 김양도(金良圖), 32세 신공(信功) 등이다.


김부식(金富軾)은 &#10218삼국사기&#10219에다 “소에게 꼴을 먹이는 아이들도 김유신을 안다”고 썼다. 그의 삶과 업적에 대해서는 저자의 前作인 &#10218김유신―시대와 영웅&#10219(까치글방&#8228 2000년)에 상술했다. 그는 태종무열왕 김춘추와 문무대왕 김법민(金法敏)과 더불어 한민족(韓民族)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주역 3인 중 1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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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에 심나의 아들 소나 있음을 모르느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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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은 한민족(韓民族)을 지켜낸 방파제였다. 문무왕 15년(675) 2월, 당의 계림도대총관 유인궤(劉仁軌)는 임진강을 건너 칠중성(七重城: 파주시 적성면 중성산)을 공격했다. 신라군이 수비하고 있던 칠중성은 해발 149m의 고지에 들어선 소규모 성곽이지만, 임진강 중류를 감제(瞰制)하는 요충이었다. 감제란 상대적으로 높은 지점으로부터 관측 혹은 사격에 의한 통제를 말한다.


칠중성은 인근 임진강 남안의 육계토성(六溪土城)과 임진강 북안의 절벽 위에 위치한 호로고루(瓠蘆古壘)와 더불어 임진강 중류 방어에 긴요한 삼각(三角)의 前哨基地(전초기지)였다. 또 그 남쪽으로는 파주&#8228 연천 일대에서 가장 높은 고지인 감악산(紺嶽山&#8231 675m)과 파평산(坡平山&#8231 496m) 과도 연계되어 임진강유역 방어의 요새를 이루었다.


&lt&lt닷컴 7년전쟁下 사진--칠중성에서 바라본 임진강 중류. 이곳은 한반도 중부를 지키는 전략적 요충이었다&gt&gt


한반도 중부에서 서남쪽으로 흐르는 임진강의 남안을 따라 발달된 도로가 칠중성을 통과하고 있고, 이곳은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 유역의 전곡(全谷)&#8231 연천(漣川) 일대와도 연결된다. 즉, 한반도 중부의 교통 분기점인 동시에 남하(南下) 통로의 합류점이 되어 한강 하류 지역으로 연결되는 전략적 요지인 것이다. 칠중성이 신라 북쪽 국경의 중요 군사거점으로 되었던 까닭이다.


신라는 이 칠중성-감악산 일대에 정예군을 배치하여 당군의 남진을 저지하려 했다. 劉仁軌(유인궤)가 이끄는 당군도 칠중성의 전략적 가치에 주목해 압도적인 병력으로 칠중성의 외곽지역을 점령, 칠중성 등 임진강 남안의 신라군을 고립시켰다. 칠중성 등의 신라군은 농성에 들어갔고, 유인궤의 당군은 攻城(공성)에 집착하지 않고 요소요소에 병력을 배치해 소강상태가 지속되었다.


그러나 문무왕 15년(675) 봄이 되자 성민들은 파종(播種)을 위해 성 밖 농지로 나가야 했다. 신라 백성들이 영농을 위해 성문을 출입하고 있다는 사실은 탐지한 말갈군은 성문이 열리는 틈을 타서 아달성(阿達城)을 급공했다. 다음은 아달성 용사 소나(素那)의 활약에 관한 &#10218삼국사기&#10219 열전 권47의 기록이다.



&lt 백성들이 모두 성에서 나와 밭에 있는데, 말갈이 몰래 군사를 거느리고 갑자기 성으로 들어가서 성 전체를 노략질하니 늙은이 어린이 할 것 없이 모두 낭패하여 어쩔 줄 몰랐다. 이때 소나가 칼을 휘두르며 적진을 향해 크게 외쳤다. “너희들은 신라에 심나(沈那)의 아들 소나 있음을 모르느냐!”라며 적진으로 돌진했다. 적들이 감히 접근하지 못하고, 다만 그를 향해 활을 쏠 뿐이었다. 소나도 활을 쏘았지만, 날아오는 화살이 벌떼처럼 많았다. 진시(오전 7∼9시)로부터 싸워 유시(오후 5∼7시)에 이르자, 소나의 온몸에는 고슴도치의 털처럼 화살이 박혀 마침내 쓰러져 죽었다.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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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나의 아버지 심나도 일찍이 백제와의 전투에서 장렬하게 전사한 용사였다. 문무대왕은 눈물을 흘려 옷깃을 적시며 변경의 군인에 불과한 소나에게 파격적으로 잡찬(&#36810&#28236)을 추증했다. 잡찬이라면 신라 17관등 중 제3위로 원래 진골만 오를 수 있는 높은 지위이다. 당시 아달성의 태수는 관등 제9위 급찬이었다. &#10218삼국사기&#10219 열전은 이렇게 나라를 위해 목숨을 초개처럼 바친 신라 용사들의 무용담으로 가득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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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세사람들에게 형제간의 우의를 가르친 김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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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인궤(劉仁軌)가 이끄는 당의 육군은 675년 2월 임진강 남안의 칠중성(七重城)에서 신라군을 격파한 직후에 유인궤는 당고종의 명령으로 서역의 靑海로 달려가고, 유인궤를 대신하여 이근행(李謹行)이 새로 안동진무대사(安東鎭撫大使)로 임명되었다. 이 무렵의 상황을 &#10218삼국사기&#10219 문무왕 15년(675) 2월 조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lt(문무)왕이 당나라에 사신을 보내 조공하고, 또 사죄하니 황제가 이를 용서하고, 왕의 관작을 회복시켜 주었다. 귀국하던 김인문(金仁問)이 당 나라로 돌아가자, 그를 임해군공(臨海郡公)으로 바꾸어 봉하였다. 그러나 신라는 백제의 땅을 많이 빼앗아 국경이 고구려 남쪽 지방에 이르렀고, 그곳을 주(州)와 군(郡)으로 만들었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과 말갈 군사와 함께 침범한다는 소문을 듣고, (문무왕은) 9군(軍)을 출동시켜 이에 대비했다.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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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기록을 보면 당고종은 문무왕의 동생 김인문을 신라국왕으로 책봉해 신라의 국론을 분열시키려고 했지만, 그 음모가 실패했음을 自認(자인)하고 취소했다.


문무대왕의 세 살 아래 동생인 김인문은 고구려 평정 때 야전군의 지휘를 맡아 대각간의 지위에 올랐으며, 전후 7차례에 걸쳐 20여 년간 숙위(宿衛: 황제경호원)를 지낸 만큼 당 조정에서 절대적으로 선호했던 인물이었다. 숙위라면 황제로부터 책봉을 받은 나라에서 파견한 황제의 경호원으로서, 사실상의 외교관이었다.


김인문을 당고종이 골육상쟁의 제물로 삼으려 했지만, 그는 그런 정도의 독수(毒手)에 휘둘릴 위인이 아니었다. 그는 형의 왕위를 끝내 넘보지 않았다. 그 인물 됨에 대해 &#10218삼국사기&#10219 그의 열전에는 “유가&#8231 莊子(장자) &#8231 불교 서적을 섭렵하고, 활쏘기&#8231 말타기에 능숙하면서 식견과 도량이 넓어 사람들의 추앙을 받았다”고 적혀 있다. 최고의 지식인으로서 兄王(형왕)처럼 문무를 兼全(겸전)했던 것이다.


사후(死後)에 김인문의 시신은 신라로 옮겨져 부왕(父王) 태종무열왕의 능묘 밑자리에 묻혔다. 그 무덤이 지금까지 전해져오는데, 이것은 후세 사람들에게 형제간의 우의가 어떠해야 하는가를 가르친 공덕 때문이 아닌가 생각된다.


오늘날 태종무열왕의 능비는 비신(碑身)이 망실된 채 이수(용머리돌)과 귀부(거북 모양의 받침돌)만 남아 있다. 이수에 쓰여진 ‘太宗武烈大王之碑“(태종무열대왕지비)라는 전서체(篆書體)의 여덟 글자는 김인문의 글씨이다. 대단한 명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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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해군강국이었다



설인귀의 보급함대를 임진강 하구에서 봉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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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3년 12월, 토번의 배후 조종을 받은 天山北路(천산북로: 草原의 길)의 여러 부족이 反唐(반당)의 움직임을 보이자 당은 한반도 전선에서 전투하던 장수들까지 서역전선으로 이동시켜 대대적 군사작전을 감행했다. 이에 따라 674년 한 해 동안 나당전쟁은 사실상의 휴전상태를 이루었다. 이와 같은 휴전상태는 토번의 평화사절이 長安(장안)에 도착한 675년 1월까지 약 1년2개월간 지속되었다.


하지만 토번과 당의 화해가 성립한 1개월 후인 675년 2월에 유인궤(劉仁軌)가 칠중성(파주시 임진강 중류의 南岸)을 공격하는 것을 시작으로 당의 한반도 작전이 재개된다. 그러던 유인궤는 칠중성을 함락시킨 후에 그의 예하 부대를 이끌고 갑자기 본국으로 철수했다. 이어 말갈족 출신 이근행이 안동진무대사로서 對신라 작전의 지휘권을 승계했다.


《삼국사기》문무왕 15년(675) 2월조에 의하면 이때 신라는 9軍을 출동시켜 당군에 맞섰지만, 그해 초반에는 고전을 면치 못했다. 《新唐書&#8231 신당서》 권220 신라傳에 따르면 신라군은 이근행이 주둔한 매소성(買肖城)을 3차에 걸쳐 공격했으나 모두 패퇴했다. 문무왕은 또다시 사신을 보내 당고종에게 사죄했는데, “공물의 짐바리가 줄을 이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그해(675년) 후반기부터 상황은 급전했다. 10월에 임진강 하구로 접근하려던 당의 보급함대가 신라 해군에 포착되어 격파되었다. 신라 해군은 임진강 하구 左岸의 오두산성(鰲頭山城) 아래 恭陵川(공릉천) 하구 일대에 포진하고 있었다. 이곳은 2개 강(한강과 임진강)의 강물이 만난다는 뜻에서 交河(교하)라는 지명을 지니고 있었는데, 현재의 지번은 경기도 坡州市 炭縣面(파주시 탄현면)으로 되어 있다.


유인궤에 이어 한반도 전선의 총사령관이 된 이근행(李謹行)은 거란-말갈병 20만을 이끌고 임진강 계선으로 남하해 임진강 지류 한탄강변에 위치한 매소성(買肖城)에 주둔하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의 보급함대가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와 당의 육군에게 군량 등의 보급품을 공급한다면, 신라군은 위기에 처할 수밖에 없었다. 당군 최대의 약점인 병참선(兵站線)이 유지&#8228 보강되기 때문이었다.


군인은 먹지 않고 싸울 수 없지만, 자신의 무기와 식량을 휴대하고 기동하기는 어렵다. 말(馬)로 군량을 수송할 수야 있겠지만, 말 한 마리가 먹는 식량은 1인 병사 식량의 무려 12배이다. 따라서 웬만한 물량은 수송 도중에 우마(牛馬)의 먹이로 소진되게 마련이었다.


문무왕 15년(675) 10월, 당의 장수 설인귀(薛仁貴)가 거느린 함대가 서해의 해로를 통해 임진강 하구에 접근했다. 적의 보급함대를 임진강 어귀에서 틀어막느냐의 여부에 신라의 운명이 결정될 판이었다,


설인귀는 바다로부터 육전대를 상륙시켜 임진강 하구를 감시&#8231 방어하는 천성(泉城)을 포위&#8231 공격했다. 천성은 지금의 오두산 평화전망대 일대로 비정된다. 그러나 신라 장군 김문훈(金文訓)은 수륙 양면에서 적을 타격하여 적의 병선 40 척을 노획하고, 적병 1400 명의 목을 벴다. 설인귀의 함대는 지상에 군마 1000 마리를 내버려둔 채 포위망을 빠져 도주했다.


문무왕 15년(675) 10월29일, 신라의 9군(軍)은 임진강의 지류(支流)인 한탄강(漢灘江) 남안 매소성(買肖城) 일대에서 이근행이 거느린 말갈병 20만을 공격했다. 막 겨울에 접어든 시점이었다. 병력의 규모가 거대할수록 병참에 대한 의존도가 높게 마련이었다.


그러나 설인귀 함대로부터 보급을 받지 못해 굶주렸던 이근행의 말갈군단은 버틸 수가 없었다. 그들은 戰馬(전마) 3만380 필과 많은 병기를 버리고 황급히 도주했다. 나당전쟁에 있어 지상전의 결전인 매소성 전투는 보급에 실패한 당군의 허무한 패배로 끝났다. 따지고 보면, 이렇게 임진강 하구의 오두산성은 韓民族(한민족)을 지켜낸 前哨基地(전초기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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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요충&#8212오두산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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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한국지리 68쪽 지도--임진강 하구 천성전투의 현장인 오두산성 일대의 지형&gt&gt


한강 하구에 이르는 8차선 도로인 자유로를 따라 행주산성→이산포(梨山浦)→일산(一山)→파주(坡州) 출판단지→한강 하류 재두루미 도래지를 거쳐 공릉천(恭陵川) 하구 위에 걸린 송촌대교를 건너면 곧 성동(城洞) IC이다. 성동 IC를 빠져나와 한강변의 진입로 따라 800m 쯤 西進하면 오두산 통일전망대이다.


현재의 지번은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필승로 369번지. 통일전망대 건물 바로 밑 진입로변에 승용차를 세우고 하차했다.


바로 그곳이 현재 복원공사 중인 오두산성 입구이다. 여기서 북향(北向)하면 한강 하류로 合水(합수)되는 임진강의 河口(하구)가 그림 그린 듯 일목요연(一目瞭然)하게 펼쳐져 있다. 앗! 누가 봐도 이곳은 군사적 요충이다.


해발 118m의 오두산은 ‘큰 자라 鰲(오) 머리 頭(두)’라는 이름처럼 커다란 자라가 바다 쪽을 향해 머리를 쑥 내밀고 있는 형국이다. 임진강 하구(河口) 건너 북쪽은 6.25전쟁 때 적에게 빼앗긴 개풍군의 관산반도. 북한은 황해도를 남&#8231 북의 둘로 나눠, 예성강 동쪽의 개풍군(분단 전엔 경기도)을 황해북도에, 예성강 서쪽인 연백군(延白郡)은 황해남도에 편입시켜 놓고 있다.


오두산은 한강과 임진강의 합류 지역이다. 이 일대의 옛 이름 자체가 두 강이 서로 만난다는 뜻의 교하(交河)이다. 교하는 1914년의 행정구역 개편 때 파주군(坡州郡)에 병합되었고, 파주군은 1996년 파주시로 승격되었다.



오두산 바로 북쪽에서 임진강물을 받아들인 한강은 90도로 꺾여 김포(金浦)반도의 북쪽으로 서진(西進)하다가 강화도 양사면(兩寺面) 북쪽에 이르러 개풍군과 연백군 사이로 남류(南流)하는 예성강물까지 더 받아들인 다음에 교동도(喬桐島)의 북쪽과 연백군 해성면(海城面) 사이의 한강 하구를 통해 서해로 흘러든다. 김포반도∼강화도 북단으로 한국사에서 가장 예민한 3개의 강이 합수(合水)해 서해로 흘러드는 것이다.


최근, 오두산에서는 성곽 터와 백제 토기가 발견되어 문화재(사적 351호)로 지정되었다. 이곳을 백제와 고구려가 쟁탈전을 벌였던 관미성(關彌城)으로 비정(比定)하는 학자들이 많다. 관미성 전투와 관련한&#10218삼국사기&#10219 광개토왕(廣開土王) 즉위년(391) 겨울 10월의 기사는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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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겨울 10월, 백제의 관미성(關彌城)을 공격하여 점령하였다. 그 성은 4면이 절벽이고, 바다로 감싸여 있다. 왕이 일곱 방면으로 군사를 나누어 공격한 지 20일 만에 점령하였다.&gt



오두산 일대 임진강 하구의 모습은 &#10218삼국사기&#10219의 표현과 거의 비슷하다. 그러나 이곳이 민족사의 관점에서 관미성 전투보다 훨씬 중요한 역사의 현장이라는 사실은 그리 잘 알려져 있지 않다. 羅唐(나당) 7년전쟁의 승패는 실로 이 임진강 하구에서 결정되었다. 임진강 중류와 임진강 지류 한탄강 유역에 주(主)전선이 형성되어 있었는데, 신라의 함대가 임진강 하구를 틀어막아 당군의 병참선(兵站線)을 차단했던 것이다, 제아무리 용맹한 병사라도 밥을 굶으며 전투를 할 수 없다. 당군은 병참에 실패해 패전했다.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승리함으로써 삼국통일이 완성되었고, 이로써 한민족(韓民族)이 하나의 민족으로 형성되었던 것이다. 그때 신라가 패망했다면, 아마도 우리 민족은 중국의 소수민족으로 전락했을지도 모른다.


지금 한반도에는 고구려&#8228 백제의 유민(遺民)을 자처하는 사람은 없다. 백제의 지배계층을 이루던 眞(진)&#8231 해(解) 백(&#33513)씨 등 이른바‘백제 8성(姓)’은 물론 사택(沙宅)&#8231 흑치(黑齒) 등 백제 귀족의 후예는 지금 우리나라에 남아있지 않다.


한반도 북쪽을 강점해온 김일성-김정일-김정은의 3대(代)도 신라김씨의 支流(지류)인 전주김씨(全州金氏)이다. 전주김씨의 시조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김은열(金殷說)의 9세 손(孫)인 김태서(金台瑞)”라고 일컬어진다.


또한, 현재 북한 주민의 절대다수도 신라에서 기원한 성씨를 지니고 있다. 이것이야 말로 그들의 엉터리 주장과는 달리, 한민족(韓民族)의 정통성이 신라에서 발원되고 있음을 나타내는 가장 명확한 증거이다. 북한의 이데올로그들이 고구려→발해 정통론을 주장하는 것은 참으로 “절 모르고 시주하는 꼴”이다.


서기 675년, 한반도에 투입된 당군의 작전지역은 임진강을 중심으로 한 예성강과 한강 사이의 지역이었다. 다음은 &#10218삼국사기&#10219문무왕 15년(675) 조의 관련 기록이다.



&lt 가을 9월, 설인귀(薛仁貴)가 숙위(宿衛)학생 풍훈(風訓)의 아버지 김진주(金眞珠)가 본국에서 사형당했다고 하여, 풍훈을 향도로 삼아 천성(泉城)을 공격하였다. 우리 장군 문훈(文訓) 등이 그들과 싸워 이기고, 1400 명의 머리를 베었으며, 병선 40 척을 빼앗았다. 설인귀가 포위를 풀고 퇴각하매 우리는 말 1000 필을 얻었다.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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설인귀는 668년 고구려 멸망 후 평양에 설치된 고구려&#8228 백제의 고토(故土)와 신라까지 관할하에 두는 안동도호부의 도호(都護)였다. 앞에서 거론하겠지만, 그는 645년 당태종의 고구려 침략 때 사졸로 참전한 이래 대장군&#8231 대총관의 반열에 올랐고, 668년 평양성 공파(攻破) 후에는 안동도호부의 도호로 출세한 입지전적(立志傳的) 인물이다.


신라의 중앙군단인 대당총관(大幢摠管) 김진주는 남천주 총관 진흠(眞欽)과 함께 문무왕 2년(662)“거짓으로 병을 핑계되고 방탕하여 국사(國事)를 돌보지 않는다”는 죄목으로 참수당했는데, 그 일족도 처형되었다. 이는 일부 친당파(親唐派) 귀족들을 그냥 놔두고는 대당(對唐)전쟁을 수행할 수 없다는 문무대왕의 결단으로 풀이된다. 그러나 당군에게 붙은 風訓(풍훈)도, 그를 격파한 文訓(문훈)도 신라김씨 訓(훈) 자 돌림이다. 친당파들인 김眞주와 김眞흠은 신라김씨 訓자 돌림(항렬)보다 1세대 앞선 眞자 돌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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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泉城)의 위치를 둘러싼 학계의 논란



그렇다면 천성(泉城)은 어디일까. 이병도(고인) 박사는 천성을 예성강 하류로 보았으며, 북한학자 김기웅은 예성강 유역인 황해남도 배천(白川)으로 추정했다. 일본학자 이케우치(池內宏)은 천강(泉岡), 즉 지금의 인천(仁川)으로 추측했다.


그러나 도수희&#8228 노태돈&#8231 서영교 교수 등은 나당전쟁 지상전의 결전이 벌어졌던 675년의 주(主)전장이 임진강 유역이었다는 점과 오두산성이 위치한 교하(交河)의 옛 이름이 천정구(泉井口)였던 점 등과 관련하여 임진강 하구의 오두산성을 천성으로 비정하고 있다.&#10218나당전쟁사연구&#10219의 저자 서영교 교수는 필자와 만나 다음과 같이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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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성의 위치는 675년 당군의 주력 부대가 내륙 어디에 포진하고 있었지를 보면 미루어 짐작할 수 있습니다. 앞서도 말했지만, 보급선과 내륙 주둔 부대의 연동(連動)관계를 생각할 때, 그 당시 신라군과 당군의 주(主)전쟁터 위치가 천성의 위치와 관련한 의문을 풀어주는 단서인 것입니다. 지상전의 결전이 벌어졌던 해인 675년 당시 나&#8231 당 전쟁의 주(主) 전선은 임진강 유역에 형성되어 있었습니다.


&#10218신당서&#10219의 신라傳을 보면 上元 2년(675) 2월에 유인궤가 칠중성을 함락시키고, 신라군에 심한 타격을 가함과 동시에 임진강 지류인 한탄강변의 매소성을 공략하던 신라군을 3번이나 격퇴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후 당군은 임진강 남안의 칠중성을 점령해 주요 거점으로 삼고, 한탄강 남안의 매소성을 장악했습니다. 그렇다면 675년 9월 설인귀의 함대가 예성강 유역 어느 지역을 공격했다고 보기가 어렵습니다.”



泉城(천성)= 오두산성. 필자도 오두산은 신라의 對唐(대당) 전쟁 승리의 결정적 현장이라고 판단한다. 밀물 때는 바닷물을 임진강 중류의 고랑포까지 쑥 밀어 올린다. 신라 해군과 육군이 천성을 지켜 임진강의 흐름을 이용하려던 당의 병참선(兵站線)을 틀어막았던 것이다.



더욱이 오두산성 남쪽 2km 지점에 위치한 공릉천(恭陵川)의 하구는 신라의 함대가 전투에 대비해 포진해 있었기에 요격에 매우 유리한 곳이었다. 둑이 축조되기 이전의 공릉천 하구는 지금보다 훨씬 넓었다고 한다. 어떻든 천성을 이용한 신라 해군에 의해 병참에 실패한 당의 지상군은 배가 고파 더 이상의 남하(南下)가 불가능해졌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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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두산 전망대 3층에 오르면 북한의 개풍군 관산반도가 눈앞에 전개된다. 오두산에서 관산반도의 정곶리(丁串里)까지의 거리는 불과 2100m. 북한 측 철책선과 초소 뒤로 논&#8231 밭이 펼쳐져 있는데, 옥수수 등의 밭농사가 대부분이다. 비료의 부족 탓인지 작물의 발육상태는 좋아 보이지 않았다.


그 너머에 세워진 김일성사적관 건물만은 턱없이 번듯하다. 그 옆으로는 2∼5층짜리 농촌문화주택들이 보이는데, 그 중 10여 채는 지붕도 올리지 못한 흉한 모습이다. 아마도 자재난 때문인 듯하다. 주거지역 동쪽 끝에는 붉은 지붕과 하얀 벽의 인민문화회관 건물, 그리고 소학교 교사가 세워져 있다. 북쪽엔 포장도로도 없고, 차량도 보이지 않으며, 가끔 자전거가 다닌다.


정곶리 마을 뒤편으로는 여니산(如尼山)&#8231 군장산(軍藏山)등이 겹쳐져 있고, 맨 북쪽으로는 개성의 鎭山(진산)인 송악산(488m)이 솟아 있다. 오두산에서 3∼4km 쯤 북상하면 임진강의 강폭은 460m로 줄어든다.


강가에는 갈대밭이 무성하다. 만조 때 수심은 5m 정도이지만, 갈수기의 간조 때는 그리 깊지 않다. 바지를 동동 걷어올리고 걸어서 건너가는 데 15분이면 충분하다고 한다.


그런데도 북측 사람들은 배가 고파 허덕이다 굶어 죽기까지 하고, 남측 사람들은 살 빼는 다이어트로 고심하고 있다. 이것이 도대체 무슨 귀신의 조화인가? 더구나 6.25 남침전쟁 전에 개풍&#8231 개성&#8231 연백&#8231 옹진 등은 38도선 이남지역으로서, 남한 땅이었다. 지금 그곳에 거주하는 북한 주민의 고통―이것이야말로 운명의 장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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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공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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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상전의 최후 결전― 매소성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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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 최후의 지상전투는 매소성의 싸움이다. &#10218삼국사기&#10219 문무왕 15년(675) 9월29일 조의 관련 기록은 다음과 같다.


&lt 29일, 이근행(李謹行)이 군사 20만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주둔하자, 우리 군사가 그들을 격퇴시켰으며, 이 과정에서 戰馬(전마) 3만380필과 그 정도의 병기를 얻었다.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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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도 언급했지만, 이근행이 이끌었던 병력 20만은 거란&#8231 말갈병이었다. 이런 규모의 대군이 이렇다 할 전사자도 남기지 않고 말 3만여 필과 다량의 군수품을 버리고 도주했던 이유는 무엇일까?


아무래도 매소성 전투 직전에 전개된 임진강 하구의 천성 전투를 주목하지 않을 수 없다. 천성전투에서 신라의 해군은 설인귀의 함대를 패퇴시키고 그 중 40척을 노획했다. 이로 인해 임진강 지류인 한탄강 남안(南岸) 매소성에 주둔했던 이근행의 말갈군은 굶주렸던 것 같다.



서울에서 3번 국도를 타고 북상해 의정부→동두천을 지나 경원선 한탄강역 직전의 학담동 3거리에서 우회전, 372번 지방도로로 진입해, 대전교(大田橋)를 건너 대전리(大田里)에 들어서면 한탄강변에 표고 130m 안팎의 ‘대전리산성’이 펼쳐져 있다. 현재, 그 7∼8부 능선에는 우리 국군의 예비진지가 축조되어 있다.


지도상에 ‘대전리산성’으로 표기된 이곳이 바로 나당전쟁 시기에 최후의 지상전이 벌어진 매소성(買肖城)이다. 매소성에 올라 앞을 바라보면 한탄강 너머로 전곡읍(全谷邑)의 시가지와 全谷 구석기 유적지, 그리고 한탄강 관광지가 펼쳐져 있다. 전곡읍은 임진강과 그 지류인 한탄강으로 둘러싸이고 그 사이로 차탄천이 흐르는 군사적 요충이다.


&lt&lt한국지리 82쪽 지도--매소성 일대의 지형&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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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소성에서 들어오던 길로 되돌아 나왔다. 3번 국도에 올라 한탄대교를 건너면 석조(石造)의 대형 아치가 도로의 지붕처럼 세워져 있다. 아치의 좌우엔 선사(先史)시대의 사람 &#8231 공룡&#8231 코끼리 등의 인조석상(人造石像)으로 장식되어 있다.


아치의 한복판엔‘구석기의 나라―연천’이라고 쓰여 있다. 전곡은‘한반도의 중심’연천군에 속한다. 3번 국도 변엔 ‘38선’이란 표석이 세워져 있다. 연천군의 거의 전부는 북위 38도선 이북에 위치하는데, 6.25전쟁 때 수복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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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탄강의 골짜기를 따라서는 현무암의 용암대지가 형성되어 있다. 아득한 옛날, 그 용암은 철원지방에서 한탄강 골짜기를 따라 흘러내려 전곡에 깊이 10여m의 협곡을 파 놓았다. 주민들 사이에 ‘백리장성’이라고도 불리는 협곡의 수직 절벽은 군사적 요충을 형성한다.


용암대지는 오늘날 대부분 논으로 이용되고 있으며, 양수기로 퍼올리는 강물이 관개용수로 사용된다. 용암대지를 덮고 있는 흙은 현무암의 풍화토가 아니라 유수(流水)에 의한 충적토로 되어 있다.


이 충적토는 벽돌의 원료로 적합해, 전곡읍에는 유달리 벽돌공장이 많다. 전곡읍의 현무암대지에서는 1979년 구석기가 다량 발견되어 세계적인 관심을 모으기도 했다. 이 구석기 유적지 옆 구릉에는 전곡先史(선사)박물관이 세워져 있다.


경원선 한탄강역 앞에서 좌회전해 한탄대교 아래 강변으로 내려와 한탄강을 따라 500∼600m 쯤 북진하면 한탄강 너머의 매소성과 마주설 수 있다. 전곡읍 쪽 강변에는 고층 아파트까지 들어서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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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소성 전투에서 패전한 말갈군의 약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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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근행이 지휘한 당의 말갈군단은 매소성(買肖城) 공방전에서 패전한 후 진로를 바꿔 칠중성(七重城: 파주시 적성면) 등의 신라군을 공격했다. 문무왕 15년(675) 2월, 당장 유인궤에게 攻破(공파)당한 칠중성은 유인궤의 귀국 수개월 후 신라군에게 탈환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다음은 &#10218삼국사기&#10219 문무왕 15년 조의 관련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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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말갈이 아달성(阿達城)에 들어와 약탈을 시작하자, 성주 소나(素那)가 그들과 싸우다가 전사했다. 당나라 군사가 거란&#8231 말갈 군사와 함께 칠중성(七重城)을 포위하였으나 이기지 못하였고, 소수(小守: 신라의 지방관직) 유동(儒冬)이 전사했다.


말갈이 또 적목성(赤木城:강원도 회양)을 포위 공격하자, 현령 탈기(脫起)가 백성들을 이끌고 대항하다가 힘이 다하여 백성들과 함께 전사했다. 당나라 군사가 또한 석현성(石峴城: 황해도 곡산)을 포위하고 이를 점령하려 하자, 현령 선백(仙伯)과 실모(悉毛) 등이 전력을 기울여 싸우다가 전사했다.


우리 군사가 당나라 군사와 크고 작은 열여덟 번의 전투에서 모두 승리하여 6047 명의 머리를 베고, 200 필의 전마를 얻었다. &gt



위의 기사를 보면 이근행의 말갈군단은 군사적 거점 확보보다 매소성에서 후퇴 중에 식량 확보를 위한 약탈을 자행했던 것임을 느낄 수 있다. 원래 굶주린 군대는 마적 떼와 조금도 다를 바 없다. 少守(소수)는 지방고을에 두었던 관직의 하나로서 制守(제수)라고도 한다. 정원은 85명으로서 위계는 대나마(관등 제10위)까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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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은 한민족을 지켜낸 방파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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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은 한민족을 지켜낸 방파제였다. 임진강 하구 박 항행이 금지된 중립지대이다. 임진강 중류의 남안에 칠중성이 있다. 좌안이라면 강 발원지를 등지고 바라볼 때 왼쪽 강변이다.


칠중성에 가려면 1번 국도로 타고 북상해 문산읍 여우고개 4거리에서 우회전해 37번 국도로 진입해 임진강변을 따라 동북진하면 파주시 적성면(積城面) 가월리 로터리에 이르게 된다. 가월 4거리에서 임진강 위에 걸린 비룡대교를 통해 371번 지방도로를 북진하면 연천군 백학면이고, 남진하면 파주시 적성면이다. 지금은 적성면이지만, 1917년의 행정구역개편 전에는 적성군이었다.


가월4거리에서 371번 지방도로를 1.5km 쯤 남하하면 길 서쪽으로 적성향교가 보인다. 이곳 구읍리(舊邑里)가 적성군 시대의 중심가이다. 구읍리 적성향교 바로 뒷산이 중성산(重城山)이다. 중성산이 바로 나당전쟁 시기에 쟁탈의 요충으로 주인이 여러 번 바뀐 칠중성(七重城)이다.



&#10218삼국사기&#10219문무왕 15년(675) 2월 조에는“유인궤(劉仁軌)가 우리 군사를 칠중성에서 격파했다”고 되어 있고, 같은 해 9월 조에는 “당병(唐兵)이 거란&#8231 말갈 군사와 함께 칠중성을 포위했으나 이기지 못했다고”기록되어 있다. 이것은 유인궤가 본국으로 철수하자, 칠중성의 주인이 곧 신라군으로 바뀌었음을 의미한다.


승용차를 적성향교 앞에 세워놓고 밭 사이로 난 길을 따라 좀 걷다가 중성산 기슭에 붙으면 45도의 오르막길을 5분쯤 올라가야 한다. 중성산 위에는 현재 우리 국군의 예비진지가 들어서 있다.


중성산의 높이는 해발 149m 에 불과하지만, 이곳에 오르면 나당전쟁 시기에 피아 모두가 왜 칠중성을 중시했는지 느낄 수 있다. 전방의 임진강과 후방의 감악산(紺嶽山)을 모두 관측할 수 있는 지점인 것이다.


문무왕 15년(675) 9월 초에 설인귀의 보급함대가 임진강 하구인 천성(泉城)에서 신라 수군에게 격파당했음은 앞에서 썼다. 만약 설인귀의 함대가 깨지지 않았다면 밀물 때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와서 칠중성을 중계지로 삼아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 유역의 매소성에 군량을 보급할 수 있었을 것이다.


&lt&lt 월간조선 2007년 8월호 지도 ***정순태가 글자 약간 고쳐야함--천성&#8231 매소성&#8231 칠중성 전투상황(675년 9월) &gt&gt



임진강은 북방세(北方勢)가 한반도의 핵심인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통과해야 할 전략적 요충이다. 칠중성 위에서 굽어보면 임진강 중류의 물길이 크게 만곡(彎曲)을 이뤄 마치 호리병(瓠蘆&#8228 호로: 표주박) 2개를 나란히 진열해 놓은 듯한 모습이다. 이런 모습 때문에 임진강 중류의 옛 이름이 호로하(瓠蘆河)였던 듯하다.


칠중성의 규모는 그리 크지 않지만, 바로 이웃에 위치한 육계토성(六溪土城)과 연계해 임진강을 도하하는 적군을 쉽게 관측&#8231 저지할 수 있는 지형이다. 칠중성과 육계토성은 임진강 북안의 호로고루(瓠蘆古壘)와 마주 보고 있다. 중성산에서 적성면의 중심지 마지리까지는 야산 하나를 돌아가면 된다. 마지리에서 설마천(雪馬川)을 따라 북상해 임진강에 걸린 장남교를 건너가면 연천군 장남면(長南面). 장남면에서 367지방도로를 1.5km 쯤 서진하면 임진강 북안에 호로고루성의 폐허가 보인다. 호로고루성은 임진강으로 유입되는 지류가 흐르면서 형성된 현무암 절벽 위에 축조된 고구려의 평지성(平地城)인데, 서쪽 성벽의 높이가 약 10m이다.


&lt&lt월간조선 2007년 8월호 322쪽 사진---고랑포대대 작전참모 김소령(오른쪽)과 필자가 호루고루의 폐허 위에 올랐다. &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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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루고루에서 임진강 하류방면으로 조금 서진(西進)하면 고랑포(高浪浦)이다. 고랑포는 철책선(GOP: 남방한계선)에 인접한 지역이어서 지금은 낚시꾼이나 가끔 찾는 쓸쓸한 곳이지만, 해방 전까지만 해도 임진강 하구에서 수백톤급 상선이 거슬러 올라와 기항했던 시끌뻑적한 선착장이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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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의 역사적 명언― “무고한 백성들을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나로선 차마 할 수 없다”



고랑포 바로 북쪽에는 신라의 마지막 임금 경순왕(敬順王)의 무덤이 있다. 경순왕은 935년 11월에 나라를 들어 고려 태조 왕건(王建)에게 항복했다. 경순왕의 태자는“어찌 천년 역사의 사직을 하루 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주겠습니까”라며 항복에 반대했다. 다음은 &#10218삼국사기&#10219경순왕 9년(935) 조가 전하는 경순왕의 답변이다.



“고립되고 위태로운 상황이 이와 같아서는 나라를 보전할 수 없다. 강하지도 않으면서, 무고한 백성들이 참혹하게 죽도록 하는 것은, 나로서 차마 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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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순왕릉의 봉분 앞 비석에는 총알자국이 많다. 6.25 전쟁 때의 상처일 것이다. 필자는 비석의 상처를 손바닥으로 쓰다듬으면서 역사를 생각했다. 경순왕릉이 고랑포에 있다는 사실이 알려진 것은 이 지역을 지키던 미 제2사단이 후방으로 빠지고 난 이후의 일이다.


전쟁 후 수십년 동안 무성한 풀숲으로 덮혀 있었는데, 고랑포대대의 병사들이 풀베기를 하다가 유연히 발견했던 왕릉이다. 요즘은 신라 김씨들이 春祭(춘제)&#8228 秋祭(추제) 등을 지내려고 찾아오는 순례지가 되었다.


경순왕이 개경으로 올라와 항복한 시기는 고려 태조 18년(935) 음력 11월이었다. 고려 태조는 경순왕을 정승공(政丞公)으로 봉해 태자보다 높은 지위에 두었으며, 녹봉 1000 석뿐만 아니라 경주를 식읍(食邑)으로 주었다. 또 왕궁 동쪽의 좋은 구역에 살도록 했고, 그의 장녀 낙랑공주(樂浪公主)를 아내로 삼게 했다.


필자가 주목한 것은 경순왕에 대한 고려의 후한 대접보다는 신라의 학자&#8231 장수들이 대부분 고려에 등용되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오늘날 신라 김(金)씨가 한국 대성(大姓) 중 하나를 이루고 있다는 점에서 경순왕의 선택은 오히려 현명했다. 세상에 망하지 않는 왕조가 없고, 신라 역시 멸망했지만, 신라김씨와 가야김씨는 번성했다. 현재 우리나라의 5대 姓인 金&#8231 李&#8231 朴&#8231 崔&#8231 鄭은 모두 경주를 본관(김해김씨 제외)으로 둔 성씨이다.


지금 북한 땅을 강점해 온 金哥(김가) 3대도 경순왕의 자손을 시조로 받드는 全州김씨이다. 현재 북한의 젊은 독재자는 “무고한 백성들을 참혹하게 죽게 하는 것은 차마 할 수 없다”는 경순왕의 말을 역사적 교훈으로 깊이 새겨야 할 것이다. 한반도의 북쪽은 300만 명을 굶겨 죽인 김가 3대를 전지전능(全知全能)의 신(神)처럼 받들어야 하는 참혹한 사교(邪敎)집단의 점령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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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에서 가장 예민한 고랑포 GOP에서 1박



고랑포 동쪽에는 임진강을 걸어서 건널 수 있는 도섭(渡涉) 지점이 있다. 1968년 1월 박정희(朴正熙) 대통령을 암살하기 위해 미 제2사단 경계지역의 철책선을 뚫은 북한 124군 소속 게릴라 31 명(김신조 일당)도 고랑포에서 걸어서 임진강을 도하, 청와대 외곽까지 침투했다. 고랑포 대안(對岸)인 적성면 장좌리(長佐里)는 탱크전(戰)이 벌어질 만한 널찍한 강안(江岸)이다.


2006년 10월, 필자는 고랑포 대대 OP(관측소)로 올라가 대대장을 만났다. 필자는, 1968년 고랑포 대대의 캘리바 30 및 50 기관총 소대장으로서 사미천(砂尾川) 지역 철책선(GOP: 남방한계선) 400여m의 경계를 맡았다. 그때 북한군의 대남 스피커방송은 밤이면 밤마다“공화국 북반부의 인민들은 이밥에 고깃국을 먹고, 기와집에서 산다”고 자랑하면서 “소대장 여러분, 의거 입북하면 모스크바대학에 유학시켜 주겠다”고 끈질기게 유혹했다.



그로부터 40여년 후, 필자는 철책선에서 야간 경계중인 병사들과 망루에서 잠시 만나 함께 자판기 커피를 함께 마기도 하면서 제1선의 밤을 살핀 뒤에 사미천 지역의 중대 막사로 돌아와 1박을 했고, 다음 날엔 임진강 중류 일대를 답사했다. 국방부 대변인실을 통해 사전에 ‘GOP 막사에서의 1박’을 허락받았다. 필자는 10년 후인 2016년 4월에도 휴전선 248km를 답사하면서 고랑포 GOP 지대를 둘러보았다.


칠중성→임진강→고랑포→사미천을 있는 통로는 문무왕 2년(662) 1월 김유신(金庾信)이, 평양성 공격 중에 군량이 떨어져 전멸의 위기에 빠진 소정방(蘇定方)의 당군을 구원하기 위해 치중대를 데리고 북상했던 길이다.


고랑포에서 평양까지는 170km. 김유신은 김인문(金仁問)&#8228 김양도(金良圖) 등 여덟 장수와 함께 군량미 적재 수레 2000여 채의 수송부대를 이끌고 사미천변을 따라 북상하다가 상류의 백치진(白峙鎭)을 지키는 고구려 부대를 돌파했다. 이어 토산→신계→수안을 거쳐 대동강 남안 중화(中和)에서 소정방 군과의 연결에 성공했다.


소정방의 당군은 김유신 부대로부터 쌀 4천 섬과 벼 2만2천 섬을 공급받음으로써 아사(餓死)를 모면하고 귀국할 수 있었다. 귀로에 오른 김유신의 부대도 남하해 임진강을 건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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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때 고구려 군사가 추격해오자, 김유신은 군사를 다시 임진강을 再도하해 고랑포에서 반격, 고구려 군사 1만여 명의 머리를 베고, 소형(小兄―고구려 관등 제3위) 아달혜(阿達兮) 등을 사로잡고, 병기도 다수 노획했다.


고랑포는 1300년 후인 6.25 동란 때도 역사의 무대에 다시 등장한다. 1950년 10월의 북진 때 국군 제1사단과 미 제1기병사단은 평양 1번 입성을 놓고 치열한 경쟁을 벌였다. 10월12일, 백선엽 준장이 이끄는 국군 제1사단은 임진강을 건너 고랑포에 집결한 다음에 시변리→수안 가도로 통해 평양로 진발했는데, 이 북진로는 김유신의 662년 1월 기동로와 거의 일치한다. 한편 미 제1기병사단은 국군 제1사단보다 이틀 빠른 10월 10일 금천→사리원 가도로 평양을 향해 진발했다. 평양 1번 入城(입성) 경쟁에서 국군 제1사단이 이겨 우리 국군의 체면을 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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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상의 결전 기벌포 해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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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에서 지상전의 결전은 675년 9월의 매소성전투였고, 해상의 결전은 기벌포(충남 서천군 長項邑) 앞바다 전투였다. 문무왕 16년(676) 11월, 薛仁貴(설인귀)가 이끄는 당나라 수군은 서해안을 우회하여 백강(금강) 하구로 진입하려고 시도했다.


사찬(신라 관등 제8위) 김시득(金施得)이 지휘한 신라 수군은 설인귀이 이끈 당의 수군을 백강 하구에서 포착했다. 신라 수군은 첫 전투에서 패배했으나, 이어서 전개된 22회의 대소 전투에서 전승을 거두고, 당 수군 4000여 명의 목을 벴다.


기벌포 해전의 승리는 신라가 해군 작전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22회의 해상 전투는 그것이 해상기동전이었음을 의미한다. 종래의 해전은 접현전(接舷戰) 위주로 전개되었다. 접현전은 피아의 함선이 약간의 거리를 두고 서로 노(弩)와 화살을 날리다가 끝에는 갈고리로 서로 상대 함선을 찍어 뱃전을 마주댄 다음, 상대의 뱃전에 뛰어올라 칼과 창으로 육박전을 벌여 결판을 내는 방식이었다.


이와 같은 전투 방식은 대개 한두 차례의 접전(接戰)으로 승패가 판가름나게 마련이었다. 특히, 속력이 빠른 불배(火船&#8228 화선)를 충돌시켜 상대 함대를 불태우는 화공(火攻)은 &lt&lt三國志&#8231 삼국지&gt&gt에 등장하는 적벽대전(赤壁大戰) 이래 중국 수군의 전통적 장기(長技)였다.



기벌포 해전 당시, 신라 수군은 천보노(千步弩) 등 비교우위(比較優位)의 공격용 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신라의 노(弩)는 근거리 전투용의 단병무기(短兵武器)가 아니라 장병무기(長兵武器)로서 일정한 거리를 두고 상대와 싸울 때 가장 큰 위력을 발휘할 수 있었다. 신라의 천보노는 나&#8231당 전쟁 개전 전에 이미 당고종이 부러워했을 만큼 뛰어난 무기였다.


&#10218삼국사기&#10219 문무왕 9년(659) 겨울 조에 따르면 당고종은 신라 노의 기술자인 구진천(仇珍川)에게 조서(詔書)로 불러들여 노 제조의 노하우를 알아내려고 했지만, 구진천은 끝내 비법을 누설하지 않았다.


&#10218삼국사기&#10219에 따르면 구진천이 당에서 만든 노를 시험발사를 했지만 30보(45m) 밖에 나가지 않았다. 이에 당고종은 “너희 나라의 노는 1000보를 나간다고 들었는데, 지금 만든 것은 겨우 30보밖에 나가지 않는데,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캐물었다. 당시의 1보(步)는 약 1.5m. 1000보라면 1500m이다.


구진천은 “(당나라의) 목재가 좋지 않기 때문”이라고 대답했다. 당고종이 신라에 사신을 보내 노의 자재를 요구해, 나마(신라 관등 제10위)인 복한(福漢)이 신라의 목재를 갖고 당에 들어갔다. 그러나 신라의 나무로 노를 만들었지만, 시험발사에서 60보밖에 나지 않았다. 당고종은 구진천이 고의로 그렇게 만든 것이 아닌가 의심해 중죄에 처하겠다고 위협해 보았으나, 그는 끝까지 그의 재능을 모두 발휘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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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벌포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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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8년 1월23일 오전 8시, 하룻밤을 묵은 전북 군산시 성산면의 금강하구둑 부근에 위치한 용궁모텔을 출발해 눈발이 휘날리는 가운데 기벌포 전투현장 등 금강 답사에 나섰다. 금강은 백제 때 중요한 對內外(대내외) 교통로였다. 660년 7월, 소정방이 이끈 대함대가 기항해 수륙병진작전을 개시한 곳도 기벌포, 지금의 충남 서천군(舒川郡) 장항읍이다.


고려 때 들어와서 금강은 조운(漕運)에 의해 수납된 세곡(稅穀)을 운반하는 데 이용되었으며, 말기엔 왜구가 내륙으로 침범하는 통로가 되었다. 조선왕조 때는 여산창(礪山倉: 익산시 여산면), 군산창(群山倉), 성당창(聖塘倉: 전북 익산시 성당면)의 세미(稅米)를 서울로 운반하는 데 이용된 뱃길이었다.


조수간만의 영향은 옛 백제의 수도인 부여까지 미치며, 풍향은 서풍 계통이 탁월하여 군산→강경 간의 소선(遡船) 시간이 크게 단축된다. 겨울철 결빙기간도 비교적 짧아 내륙수로로서의 입지조건은 한강보다 오히려 유리하다.


금강하구둑의 어도(魚道) 앞에 잠시 차를 세웠다. 동행한 한밭대학교 유병로 교수가 “水門(수문)을 열면 둑에 설치된 가파른 魚道를 타고 물고기가 상류로 뛰어올라가는 장관이 펼쳐지는 곳”이라고 했지만, 마침 물때가 맞지 않아 그런 광경을 목격하지 못했다. 장항읍에 진입해 ‘기벌포 문화마당’을 운영하는 유승광(劉承光) 박사를 만났다.


―유 박사, 신라의 수군과 당의 수군이 기벌포에서 23차례에 걸쳐 접전을 했다는데, 그 전장(戰場)을 어디로 보고 계십니까.“장항읍 앞바다로부터 비인만(庇仁灣: 서천군 西面)까지 25km에 이르는 해역이 싸움터였을 것으로 추정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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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 따르면 문무왕 16년(676) 11월에 설인귀(薛仁貴)가 지휘하는 당의 함대가 금강 하구로 침입하려고 하자, 김시득(金施得)이 지휘한 신라 함대가 맞받아쳤다. 신라 해군은 첫 교전에서는 패했으나, 즉각 전열을 가다듬고 이후 22차례에 걸친 파상공격으로 당 함대에 치명적인 타격을 가했다. 이것이 나당 7년 전쟁의 최후 결전인 기벌포 전투였다.


―장항읍은 기벌포 대첩의 현장인데, 기념탑이라도 세워져 있습니까.


“아직 없습니다. 기벌포 전투의 역사적 의미는 크지만, 이곳은 백제 정서가 워낙 강한 곳이라…”



장항은 676년 기벌포 전투의 현장일 뿐만 아니라, 660년 7월 당나라 장수 소정방이 병력 13만을 태운 당의 대함대가 기항한 곳이고 여기서부터 당군은 백제의 王都(왕도) 사비성(부여)을 향해 금강과 금강 연안을 따라 수륙 양면으로 진격했다.


따라서‘백제 정서’로는 기벌포가 잊고 싶은 지명(地名)일 수도 있다. 하지만 지금의 백제 故土(고토)는 백제의 왕족인 夫餘(부여)씨와 백제의 8大姓에 속하는 眞(진)&#8231 海(해) &#8231 沙(사)&#8231 燕(연)&#8231 &#33513(백)씨 등이 거주하는 곳이 아니다.


기벌포 전투의 승리는 우리 민족사 최초의 통일국가로 가는 결정적 순간의 하나였다. 만약 기벌포 전투에서 신라가 패전했다면 우리 민족사의 성립조차 미지수이다. 중국은 주변 50여개의 민족들을 그의 판도에 집어넣은 먹성 좋은 나라이다. 중국과 접경해 살아온 민족들 가운데 오늘날 자존(自尊)의 민족사를 성립시킨 나라는 한국과 베트남 정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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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항읍의 전망산(前望山)에는 아직도 옛 장항제련소의 굴뚝이 우뚝 솟아 있어 금강 하구 일대의 랜드 마크가 되고 있다. 당시 국내 유일의 장항제련소는 1980년대 초반에 울산광역시의 溫山(온산)비철금속단지로 이전했고, 이 자리에는 銅가공공장이 들어서는 바람에 이제 높은 굴뚝에는 연기가 나지 않게 되었다.


―제가 초등학교 4학년 때 ‘장항제련소’장항선’(대전∼장항 간 철도) 하며 달달 외웠는데, 여기에 오니 참으로 감개가 무량합니다.


“1936년 정항제련소가 건설되고, 1938년 읍으로 승격한 장항은 금속공업 이외에 비료&#8231 造船(조선) 공업이 발달했습니다만, 장항제련소의 이전 이후에는 이곳 경제가 어려워지고 있습니다.”


장항읍에서 29번 국도를 타고 한산면‘한산모시타운’을 앞을 지났다. 이곳에는 한산 세모시의 제작과정을 알 수 있도록 하는 전수교육관, 토속관 등이 있다. 한산모시타운 바로 북쪽에 백제 후기에 축조된 건지산성(乾芝山城)이 위치해 있다. 서천군의 한산면 호암리와 죽촌리에 걸쳐 있는 산성이다.


이병도 박사는 건지산성을 백제가 멸망한 후 전개된 유민들의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인 주류성(周留城)으로 비정했으나, 대군이 주둔하기에는 그 규모가 너무 작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新增東國輿地勝覽&#8228 신증동국여지승람》의 기록이다.



&lt 건지산성은 흙으로 쌓여 있다. 그 안에 일곱 개의 우물과 1개의 못이 있으며, 군창(軍倉)도 있었는데, 지금은 못 쓰게 되었다.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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건지산성은 백제 수도(사비성)의 외곽을 방어하기 위해 쌓았던 것으로 추정되며, 단층면을 보아 흙과 돌을 섞어 축성한 것으로 보인다. 군창지로 보이는 곳에서 炭化米(탄화미)가 출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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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백제부흥운동의 중심지인 주류성을 홍성군 장곡면 산성으로 비정한 향토사학자 박성흥(故人)옹의 說을 지지하는 현장 답사기를 중앙일보사 발간 시사월간지 WIN 1996년 11월호(문무왕과 夫餘豊의 행적을 따라)에 실었는데, 이 글의 일부는 國防軍史硏究所(국방군사연구소)가 발간한 《나당전쟁사》(1999년)에 인용되었다.



필자 일행은 한산초등학교 앞에서 613번 지방도로를 타고 150리쯤 내려가 금강변에 바짝 붙으면 금강의 명물‘신성리 갈대밭’이 펼쳐진다. 우리는 여기서 금강변을 따라 扶餘郡 世道面(부여군 세도면)의 黃山大橋(황산대교)를 건너 전국 최대의 새우젓 장으로 유명한 江景邑(강경읍)과 부여&#8231 공주 등 백제수도권의 水路(수로)를 대충 살펴보았다.



‘해군 강국 신라’의 역사적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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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은 전통적으로 육군의 나라였지, 해군국은 아니었다. 장강(長江: 양자강) 등에서 가끔 수전(水戰)을 벌이기는 했지만, 해전(海戰)의 경험은 거의 없었다. 반면 신라는 해전 경험이 풍부했다. &#10218삼국사기&#10219에 따르면 해전의 상대는 주로 왜(倭)였다.


《삼국사기》 유례이사금 6년(289) 여름 5월 조에는 “왜병이 온다는 정보를 듣고 선박과 병기를 수리하였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또 조분이사금 3년(232) 가을 7월에는 “이찬(신라 관등 제2위) 우로(于老)가 왜인과 사도(沙島)에서 싸우는데, 바람을 이용해 불을 질러 왜선을 불태우니 적들이 물에 빠져 모두 죽었다”는 기사도 보인다. 이사금(尼師今)은 당시 신라의 왕호(王號)였다.


&#10218삼국사기&#10219에 따르면 신라는 이후에도 292년, 297년, 346년, 364년, 394년, 405년, 407년, 500년에 바다를 통해 침입한 왜군과 싸웠다. 이렇게 뻔질난 왜군의 신라 수도권을 침범사건들도, 실은 가야 여러 나라들의 후원 밑에 감행된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당시 가야 계통 이주민들 중심으로 구성되었던 왜국 수군&#8228 육군의 무기&#8228 무장은 한반도 삼국에 비해 후진적이었고, 대형 선박도 아직 등장하지 않았던 시대였던 만큼 군량 등의 군수물자와 병력을 대량 수송하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따라서 가야 여러 나라들이 작전거점을 제공하고, 무기&#8228 병량, 그리고 선박의 제조 및 수리를 지원하는 조건에서만 왜의 對한반도 군사행동이 가능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가야와 왜는 어떤 관계였던가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가야김씨의 시조인 김수로(金首露)와 일본 시조(始祖)인 니니기(天津彦火瓊瓊오尊)의 천손강림신화(天孫降臨神話)는 거의 똑같다. 두 시조가 모두 ‘천손(天孫)’으로서, 김수로는 구지봉(龜旨峰)으로 내려왔고, 니니기는 구지봉의 일본어인 쿠지후루(久士布流)로 내려왔다.


쿠지후루 바로 북쪽인 가고시마縣(현)과 미아자키縣의 경계에 ‘가라구니다케’라는 높이 1700m의 준봉이 솟아 있는데, 일본인들은 이곳을 한자로는 韓國岳(한국악)이라고 표기하고 가라구니다케라고 읽는다.


또한 김수로왕과 許황후 사이엔 10명의 아들이 있었는데, 장자인 태자(훗날의 居登王&#8228 거등왕)와 許왕후의 성을 취해 許씨가 된 아들 둘 등 3인을 제외한 일곱 왕자가‘구름’을 타고 사라졌다고 &#10218삼국유사&#10219에 기록되어 있는데, 南규슈 가고시마縣(현)의 서남단 노마(野間)반도의 가사사(笠沙)해안에는 가야의 일곱 왕자가 상륙했다는 표석(標石)이 지금도 나붙어 있다. &lt&lt사진- 월간조선 2008년 5월호 필자의 답사기사 참조&gt&gt


이런 설화들은 가야 김씨와 일본 황실의 특수 관계를 암시하고 있다. 어떻든 일본 학자 에가미 나미오(江上波夫)의 騎馬民族 日本列島征服說(기마민족 일본열도정복설)은 이제 일본 학계의 다수설이다. 그렇다면 일본열도로 건너간 기마민족의 고향 또는 출발지는 한반도, 그 중에서도 바닷길이 가장 가까운 金海(김해: 금관가야)&#8231 鎭東(진동 아라가야)&#8231 河東(하동: 대가야)의 항구였을 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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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代의 이웃 나라끼리는 밥 먹듯 싸우게 마련이다. 가야軍은 건국 초기인 1세기 중엽에 황산강(양산-김해 부근의 낙동강 하류)을 넘나들면서 신라군과 싸웠다. 이것은 함선을 이용한 도하작전이 전개되었다는 사실을 말해 준다. 따라서 왜의 잦은 신라 침입은 가야, 특히 가야 군의 지원 아래 진행된 것으로 보는 것이 합리적이다.


왜는 백제의 전성기를 이끈 근초고왕(近肖古王: 재위 346∼375) 이래 백제의 강한 영향력 아래에 들어갔다. 가야 여러 나라들은 중앙집권적 통치체제를 세우지 못하고, 매우 느슨한 연합 세력으로 남아 있었다. 신라가 가야 제국(諸國)을 무력으로 하나 둘씩 잠식해 들어가자, 규슈(九州) 지역에 산재해 있던 왜의 가야 계통 소국(小國)들이 적대감을 가지고 신라를 공격했던 것으로 보인다.


당연히 신라는 일찍부터 생존을 위해 해군을 창설&#8228 육성하지 않을 수 없었다. 신라는 소지왕 15년(493) 임해진(臨海鎭)과 장령진(長嶺鎭)을 설치, 해군기지를 보강했다. 신라의 선박 건조 기술을 매우 선진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경주 고분에서 발굴된 구조선(構造船) 모양의 5∼6세기 토기가 이런 추정을 가능하게 한다.


신라의 함선은 바다에서 풍파를 만나도 안전하게 항해할 수 있도록 뱃머리(이물)와 꼬리(고물)를 비교적 높인 구조선(構造船)이었다. 이물은 파도를 헤치는 데 알맞게 예리하다. 오른쪽 끝에 있는 돌출부는 전투 시 적선에 기어오르기 위한 사다리로 보인다. 유럽 선박 발달사를 보더라도 신라 함선과 유사한 형태의 선박은 14세기에 이르러서야 등장한다.


신라는 그동안 크게 주목받지 않았지만, 의외로 해군 강국이었다. 500년 3월 장령진에 침입했다가 섬멸적인 타격을 받은 후 160여 년간 왜군은 한반도 해역에 얼씬거리지도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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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의 승패에 직결된 兵站線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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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0∼676년의 나당 전쟁에서 신라의 수군은 당의 수군을 계속 압도했다. &#10218삼국유사&#10219권2 기이(奇異) 문무왕 法敏(법민) 조에는 670년과 671년에 당나라 수군이 두 차례나 정주(廷州) 앞바다에 침입했다가 두 번 모두 풍랑을 만나 전멸당한 일이 있다는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정주(廷州)라면 예성강 하구에 위치한 개풍군(開豊郡)이다. 개풍군의 벽란도(碧蘭渡)는 고려시대엔 수도 개경(開京)의 외항으로서 국제교역의 중심지였다.


같은 장소에서 두 차례나 풍랑에 의해 전멸당했다는 &#10218삼국유사&#10219의 관련 기록을 그대로 믿기는 어렵다. 더욱이 개풍군 앞바다는 예성강의 양안(兩岸)과 강화도&#8228 교동도 등의 섬들로 둘러싸여 풍랑을 만나면 비교적 안전하게 대피 혹은 상륙할 수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정주 부근은 백주(白州) 등 고구려 때부터 건설된 수군기지가 있었으며, 강화도&#8228 교동도 등지에는 신라의 수군 함대들이 배치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따라서 당나라 함대가 전멸한 것은 ‘풍랑’에 의한 피해도 없지 않았겠지만, 사실은 신라 수군의 공격에 의한 것으로 보아야 할 것 같다. “풍랑”운운한 것은 당 조정으로부터의 패전 책임 추궁을 모면하려는 현지 수군 지휘관의 허위보고로 생긴 역사 기록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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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의 主전장은 예성강&#8231 임진강&#8231 한강의 하류였다. 예성강과 임진강의 강물은 한강 하류로 흘러든다. 한강과 임진강 하구가 만나는 교하(交河 )지역은 당군이 해상을 통해 그들의 본국으로부터 보급을 받기에 용이한 지점이었다. 당의 지상군은 재보급을 받기 위해 해안이나 水路(수로)에서 멀리 벗어나기 어려웠다. 당군으로서는 수륙병진작전이 불가피했던 것이다.


한편 신라 수군은 671년 이후 서해 연안에서 당의 보급선대를 끈질기게 추적하고 있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삼국사기》문무왕 11년(671) 9월 조와 10월 조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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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9월, 당나라 장군 고간(高侃) 등이 藩兵(번병: 말갈족과 거란족 병력) 4만을 거느리고 평양에 도착하여, 도랑을 깊이 파고 보루를 높이 쌓으며 대방(帶方: 황해도)을 침입하였다.


&lt 겨울 10월6일, 당나라 수송선 70여 척을 공격하여 낭장 鎌耳大侯(겸이대후)와 군사 100여명을 사로잡았다. 물에 빠져 죽은 자(적병)는 이루 셀 수 없었다. 이 싸움에서 급찬(관등 제9위) 當千(당천)의 공로가 제일이었으므로 사찬의 직위(관등 제8위)를 주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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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간의 지휘로 황해도 사리원까지 침투한 4만의 당 지상군은 겸이대후의 수송함대가 신라 수군에 의해 격파됨으로써 더 이상의 南下를 하지 못하고 철수했다. 이때 고간 軍의 남하 코스는 평양→중화→흑교→사리원이었다.


이런 당 육군의 南下 코스에 맞춰 보급을 추진하려 했던 겸이대후의 보급선단은 황해도의 중심부를 흐르는 재령강의 水運을 이용했을 가능성도 있다. 어떻든 문무왕 11년(671) 10월6일 신라수군이 당군의 병참선(兵站線)을 끊어버림으로써 사리원까지 남하한 당 지상군은 겨울작전이 어려워 철수할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672년 8월 대방지구의 石門전투에서 신라의 주력군이 고간이 지휘했던 당군에 대패함으로써 한반도 중부의 전세가 역전되었다. 다음은 이와 관련한 《삼국사기》문무왕 12년 7월과 8월 條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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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가을 7월, 당나라 장수 고간이 군사 1만, 이근행이 군사 3만을 거느리고 평양에 와서 8개의 군영을 짓고 주둔하다가, 8월에 한시성(韓始城)과 마읍성(馬邑城)을 공격하여 승리하였다. 그들은 군대를 진군시켜 백수성(白水城)으로부터 500보 떨어진 곳에 군영을 설치하였다. 우리(신라) 군사와 고구려 군사(부흥군)가 그들과 격전을 벌여 수천 명의 머리를 베었다. 고간 등이 퇴각하자, 이를 추격하여 石門에서 전투를 벌였는데, 우리 군사가 패배하고, 대아찬(관등 제5위) 曉川(효천), 사찬(관등 제8위) 義文(의문)&#8231 山世(산세), 아찬(관등 제6위) 能申&#8231 豆善, 일길찬(관등 제7위) 安那含(안나함)&#8231 梁臣 등이 이 전투에서 전사하였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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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백수성 전투에서 거둔 승리에 고무되어 추격에 나섰다가 석문에서 진을 치고 전열을 가다듬고 있던 당군과 격전을 벌여 효천 등 신라 중앙군의 장수 9명이 전사하는 치명적 패배를 당했다. 석문전투에서 대승을 거둔 당군은 再보급을 위해 예성강 지역에 교두보를 확보했을 가능성이 높다. 왜냐하면 672년 12월에 고간의 당군이 동계작전을 감행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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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舊唐書&#8231 구당서》함형 3년(672) 12월 조에 따르면 고간은 橫水(횡수)에서 신라군을 격파했다. 이때의 전투현장에 대해 《資治通鑑&#8231 자치통감》함형 3년(672) 12월 조에는 白水山으로 기록되어 있다. 따라서 횡수는 예성강, 백수산은 예성강 하구의 배천(白川)으로 비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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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 13년(673), 당의 지상군은 임진강 계선까지 밀고 내려왔다. 이런 상황에서 당의 수군과 지상군이 합세한다면 신라에게는 위기가 倍加(배가)된다. 신라는 서해에서 임진강&#8228 한강으로 진입하려는 당나라 함대를 틀어막기 위해 673년 가을 9월, 대아찬 김철천(金徹川)이 이끄는 전함 100척으로 편성된 함대를 서해안을 哨戒(초계&#8228 Patrol)하도록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문무왕 13년(673) 겨울, 당군은 고구려부흥군에 대한 공세를 가해 예성강 중하류 지역인 우잠성(牛岑城: 금천)을 공파한 데 이어 대양성(大楊城)&#8231 동자성(童子城: 김포시 通津) 등 한강 하구 평야지대 성곽들도 거란-말갈군의 공격을 받아 함락되었다. 이로써 673년 겨울의 전선은 김포반도 통진의 동자성(童子城), 한강 하류의 일산(一山), 임진강 중류의 칠중성(七重城) 등 서해안에 가까운 지역에 형성되어 있었다.


그러나 문무왕 14년(674) 1월, 천산북로(초원의 길)에 대한 토번의 공세가 개시되자, 계림도총관으로서 한반도 중부에서 작전 중이던 劉仁軌(유인궤) 등 당나라 장수들은 잇달아 서역 전선 등으로 이동했다. 이로써 그 후 1년여 동안 한반도 전선은 소강상태를 이루었다.


문무왕 15년(675) 1월에 당과 토번 간 평화협상이 진전되자, 그해 2월부터 당의 한반도 침략이 재개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당의 보급선단이 675년 임진강 하구의 泉城(천성)전투, 676년 11월 기벌포(伎伐浦) 해전에서 신라함대에게 격파당했음은 앞에서 거론했다.


특히 676년의 기벌포 해전에서 신라군이 승리함으로써 당군의 수륙병진작전을 무력하게 만들었다. 병참선(兵站線) 유지가 어려운 조건에서 對신라 침략 전쟁은 당으로서도 더 이상 강행하기 어려웠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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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戰線과 西域(서역)전선을 오간 역사인물들















































15. 당의 재침을 우려했던 기벌포 전투 후의 3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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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벌포 해전 패배 후 당군은 더 이상 한반도에 침입하지 못했다. 그렇다고 평화가 온 것은 아니었다. 對 토번 전쟁이 호전되면 언제든 한반도를 다시 침략하겠다는 것이 무측천의 의지였다.


무측천은 병약한 남편 고종 李治(이치)를 로봇化해 놓고 당나라의 국정을 완전 장악했고, 683년 당고종의 사후(死後)에는 자기 소생의 두 아들을 황제로 올렸다가 차례로 퇴위시킨 다음, 690년 당조(唐朝)를 찬탈하여 주(周)를 창업해 중국역사상 전무후무(前無後無)한 女황제가 되었다. 신라로서는 한시도 마음을 놓을 수 없는 긴장의 시대가 이 이후에도 지속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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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6년, 당은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요동성에서 북쪽으로 더 후퇴시켜 신성(新城: 심양의 북쪽 무순 부근)으로 옮겼다. 677년 2월에는 고구려의 마지막왕인 보장왕 고장(高藏)을 요동도독으로 임명한 뒤에 조선왕으로 책봉했다. 중국의 오지로 사민(徙民)되었던 고구려 유민 2만8천여 호(戶)도 요동지방으로 재(再)이주시켰다.


또 백제 옛땅에서 철수한 웅진도독부를 요동반도의 건안성(建安城: 지금의 요녕성 營口市)에 설치하고, 당의 司農卿(사농경)으로 있던 夫餘隆(백제 마지막 임금 의자왕의 아들)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하고, 이어 대방왕(帶方王)으로 책봉했다. 중국의 전통적인 이이제이(以夷制夷)정책이었다. 요동도독 고장이나 웅진도독 부여융은 모두 안동도호(安東都護)의 절제(節制)를 받아야 하는 괴뢰였다.



그러나 고장은 말갈족과 짜고 反唐(반당) 투쟁을 기도하다가 발각되어 공주(&#37019州 지금의 사천성)로 유배되었다. 요동에 再이주되었던 고구려 유민 2만8000 호도 또다시 감숙성과 하북성의 오지로 분산 이주당했다. 대방왕 부여융은 문무대왕이 겁나, 감히 백제 고토로 들어오지도 못했다.


문무왕 18년(678), 신라는 선부(船府)를 설치해 종래 兵部(병부)의 대감(大監)과 제감(弟監) 등이 관장하던 水軍 업무를 전담시켰다. 대감은 나마(관등 제11위)로부터 아찬(관등 제6위)까지가 맡은 직책이었다.


선부의 장관인 선부령(船府令)은 수군&#8228 해운&#8228 조선(造船)을 총괄하는 직책이었다. 선부의 설치는 신라의 수군 발전을 위한 획기적 조치였다. 신라가 삼국통일로 이전보다 3배나 되는 영토를 장악하게 되고, 국토의 3면에 바다로 둘러싸인 해양국이 되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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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bsp16.&nbsp나당전쟁의 장군들: 설인귀
&#8212 安東都護는 당의 極東方面軍 최고사령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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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간 극동에서 싸운 적장 설인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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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 초기에는 지상군을, 막바지에는 당 수군을 총지휘했던 설인귀(薛仁貴)는 끝내 당 육군과 수군의 연계작전에 실패하고 進退兩難(진퇴양난)의 처지에서 한반도의 서해안을 떠돌다 회군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설인귀(薛仁貴)는 중국의 민간에서는‘정동(征東)의 영웅’으로 대접받고 있다.


&lt&lt사진&#8212길림성 臨江市 압록강변에 세워진 설인귀 塑像(소상)&gt&gt


吉林省 臨江市(길림성 임강시)의 압록강 北岸(북안)에는 등 뒤로 칼을 움켜쥐고 한반도를 노려보고 있는 설인귀의 소상(塑像)이 세워져 있다. 臨江(린장)이라면 한반도에서 가장 춥다는 압록강 남안 中江鎭(중강진)의 對岸(대안)이다.


중국내 설인귀 유적은 무려 65개소가 현존하고, 설인귀 관련 소설&#8231 평전 32개, 설인귀 관련 희곡이 20여개나 전해오고 있다.


조선 성종대에 발간된&#10218東國輿地勝覽&#8231 동국여지승람&#10219에는, 설인귀를 신라 때부터 임진강 유역의 名山인 감악산(紺岳山)의 귀신으로 조정(坐定)시켜놓고 이 지역의 평안을 지켜주는 魂魄(혼백&#8228 넋)으로 받들게 했다고 적혀 있다. 감악산의 정상에 있는 감악사의 돌계단은 높이가 3길(丈), 그 단 위에 산비(山碑)가 있는데, 오랜 세월의 풍우로 글자가 마멸되어 있다. 그 곁에 설인귀의 사당이라는 淫祠(음사)가 있는데, 그 신이 능히 요사스런 조화를 일으키고, 화복(禍福)을 내린다고 하여 사람들에게 공양을 받아왔다.


우리나라의 전통적 토속신들은 최영(崔瑩) 장군, 남이(南怡) 장군, 단종비(端宗妃) 宋씨, 임경업(林慶業) 장군 등 모두 억울하게 죽어 백성들의 동정이나 공감대 속에서 永生(영생)해 온 넋들이다. 우리 땅에서 설인귀가 억울한 귀신으로 끼어들어 제삿밥을 얻어먹는 까닭이 도대체 무엇일까?


당태종 침략 이후 중공군의 6.25 남침전쟁의 개입에 이르기까지 한반도 침략의 전초기지였던 압록강 북방 100리에 위치한 마을인 설유참(薛劉站)의 입구에는‘薛&#31036站’(설례참)이란 돌비석 하나가 세워져 있다. 설인귀의 본명이 바로 薛&#31036(설례)이다.


설례의 字(자)가 바로 仁貴이다. 예컨대 한국인도 누군인지 잘 아는 曹操(조조)의 자는 孟德(맹덕), 劉備(유비)의 字는 玄德(현덕), 關羽(관우)의 자는 雲長(운장)인 것에 알 수 있듯이 薛仁貴는 薛&#31036를 높인 호칭이다. 字는 대체로 어른이 되면 붙여주는 이름이다.


우리나라를 침략한 장수에게 존칭을 붙이는 것은 사리에 맞지 않다. 그렇다면 백제를 멸망시킨 장수도 蘇定方(소정방)이 아니라 蘇烈(소열)로 불러야 한다. 소정방의 본명은 소열이며, 정방은 소열의 字이다.


그러나 입에 익은 고유명사를 갑자기 바꾸면 혼란이 일어난다. 관행은 좀처럼 고치기 어렵다. 따라서 우리 교과서에서부터 소정방&#8228 설인귀가 아니라 소열&#8228 설례로 고쳐 써야 할 것이다.


위에서 나온 薛&#31036站(설례참)은 “설인귀가 주둔했던 역참”이라는 뜻이다. 6.25 때도 중공군 대부대들이 도하를 위해 압록강의 결빙(結氷)을 기다리며 설례참에서 주둔했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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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가 미상의 우리나라 고대소설 &#10218설인귀전&#10219도 국립도서관에 보존되어 있다. 나당전쟁 중의 결전인 천성(泉城) 전투와 기벌포 전투의 패장인 그가 왜 이렇게 한&#8231 중 양국에서 회자되고 있는 것일까?


사서에 따르면 설인귀(613-682)는 강주 용문(龍門: 지금의 산서성 河津)의 문벌 없는 가난한 집에서 태어났다. 앞에서 밝힌 것처럼 본명은 설례(薛&#31036), 仁貴는 그의 자(字)이다. 그는 밭을 갈면서도 병서를 읽고, 무예도 닦았다.


그의 아내 柳씨가 “지금 天子(천자: 당태종)가 동정(東征)을 위해 명장을 구하는데, 왜 가지 않느냐”고 재촉해 그는 장군 장사귀(張士貴)의 軍門에 자원 응모해 사졸이 되었다. 낭장 유군공(劉君&#37019)이 반란군에 포위되어 위기에 처했을 때 설인귀는 匹馬單騎(필마단기)로 적장(賊將)을 베어 그 首級(수급)을 안장에 달고 돌아와 그 용맹이 알려졌다.


645년 4월, 당태종의 고구려 원정에 32세의 나이로 종군했다. 당태종의 병력이 안시성(安市城)을 포위하고 있 상황에서 고구려 장수 고연수(高延壽)&#8231 고혜진(高惠眞)이 15만의 구원군을 이끌고 달려왔을 때 설인귀는 스스로 백색 갑옷을 입고, 창을 휘두르며 좌충우돌하여 당태종의 눈길을 끌었다. 전투 후 당태종은 설인귀를 불러 유격장군으로 발탁하고, 금과 비단을 부상(副賞)으로 내렸다.


654년, 만년궁(萬年宮)에서 복무하다가 대홍수를 만나 위기에 처한 당고종와 측천무후를 구한 것도 설인귀였다. 이때 다른 숙위(宿衛: 경호원)들은 모두 제 살길을 찾아 흩어졌는데, 설인귀만은 침전 가까이로 달려가 고종을 깨워 피난하게 했다. 그 공로로 그에게 어마(御馬)가 하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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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설인귀의 공과(功過)가 교차했음에도 벼슬길이 대체로 순탄했던 것은 이때 당고종을 수몰 위기에서 구한 공로가 고려되었음이 물론이지만, 그가 최고의 권력자인 무측천(武則天)과 동향인 河東道(하동도: 지금의 山西省)이라는 점에 힘입은 바 컸던 것 같다. 무측천은 당나라 창업의 핵심 세력인 관롱(關&#38580: 섬서성과 감숙성 출신)집단을 배격하고, 동관(潼關: 장안 동쪽의 요새) 이동(以東) 출신을 일컫는 이른바 山東인맥을 양성했다.


655월 3월, 정명진(程明振)&#8231 소정방(蘇定方)이 고구려 서북변경 침공할 때 설인귀는 부장으로 출전했다. 657년 소정방이 西돌궐을 정복할 때도 부장(副將)으로 출전했고, 658년에는 정명진 휘하의 우령군 중랑장으로서 고구려의 적봉진(赤烽鎭: 현재의 요녕성 적봉시) 등을 함락시켰다.


659년에는 고구려에 침입, 횡산(橫山)에서 고구려 장군 온사문(溫沙門)에게 패해 철군했다.


661년 중국 대륙 서북지역에서 철륵(鐵勒: 투르크족)의 일파인 회흘(回紇: 위구르)이 당군의 동방을 원정하는 틈을 타 대규모 침공을 감행한 위기 상황이 발생했다. 이에 당은 좌무위대장군 정인태(鄭仁泰)와 설인귀 등을 지휘관으로 하는 토벌군을 형성해 급파했다. 이때 당군은 위구르의 10만 대군에 대승을 거두었다.


그러나 잔적을 추격하여 적진 깊숙이 진격한 설인귀의 부대 1만4000 명은 열악한 지형과 악화된 기상에 견디지 못해 자멸하고, 겨우 800 명만 살아서 돌아오는 타격을 받았다. 이와 같은 사태가 발생하자, 당은 부득이 고구려 침공부대에서 병력 일부를 차출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결과, 대(對) 고구려 전선의 병력이 감소되어 옥저도총관 방효태(龐孝泰)의 부대가 연개소문의 고구려군과 사수(蛇水)에서 접전하여 대패했고, 이 싸움에서 방효태의 아들 13명이 모두 전사했다.


또 패강도행군총관 임아상(任雅相)은 진중에서 병사(662년 2월)해 평양성 공략작전은 실패했다. 3로군 중 소정방軍만 버티고 있었지만, 혹한 속에 보급이 끊어져 붕괴 직전에 대동강 연안까지 진격한 김유신의 군량지원을 받고, 662년 3월 겨우 회군했다.


667년, 이적(李勣)이 이끄는 당의 육군이 신성(新城: 무순)을 함락시키자 그 주변 16성이 모두 항복했다. 이때 설인귀 부대는 助攻(조공)이 되어 남소성(南蘇城)&#8231 목저성(木&#27664城)&#8231 창암성(蒼巖城)을 빼앗았다.


668년 2월, 이적(李勣) 휘하의 장수로서 金山을 공파하고 부여성을 함락시키자, 그 주변 40여 성이 항복했다. 사서에 따르면 이때 설인귀의 위엄이 요해(遼海)에 떨쳤다고 한다. 연남건(淵南建)이 군사 5만을 급파, 부여성을 구하려 했으나 설하수(薛賀水)에서 패하여 3만여 명이 전사했고, 이적의 당군은 大行城(대행성)을 점령했다.


이윽고 668년 9월, 평양성이 함락됨으로써 고구려는 멸망했다. 설인귀는 우위위대장군 평양군공 安東都護(안동도호)로 출세했다. 설인귀의 직책인 安東都護는 시쳇말로 하면 極東方面軍(극동방면군) 최고사령관인 셈이다.


669년, 토번이 군사 일으켜 白州(백주) 등 18개 州를 점령하자 안동도호 설인귀로 나파도(羅婆道)행군대총관이 전보되어 670년 4월 청해(靑海)전선에 도착했음은 앞에서 썼다. 그리고 동년 7월, 대비천(大非川) 전투에서 토번군에게 대패해, 무측천은 그를 서인(庶人)으로 강등시켰다. 대비천전투의 현장답사는 뒤에서 기술할 것이다.


그러나 무측천은 곧(671년) 그를 계림도(鷄林道)행군총관으로 再기용했다. 그 직후 설인귀가 문무왕에게 보낸 항의서한과 문무왕의 답서는 나당전쟁의 원인을 규명하는 데 귀중한 사료가 되었다. 설인귀는 上元 연간(674-675)에 상주(象州)로 유배를 갔지만 곧 풀려났다.


675년 9월, 설인귀의 보급함대는 숙위 김풍훈(金風訓)을 길잡이로 임진강 전선으로 침입하려다가 임진강 하구 천성(泉城)에서 신라 김문훈(金文訓)의 수군에 포착되어 패퇴했음은 앞에서 썼다.


이때 설인귀의 수군은 1400여 명이 전사했고, 전선 40여척과 전마 1000 필을 신라군에게 빼앗겼다. 설인귀의 함대는 交河(교하)의 천성에서 신라 수군에게 패해 임진강으로 거슬러 올라갈 수 없었다.


신라 유학생 김풍운(金豊訓)의 부친이며 신라의 병부령(국방장관)과 대당총관(大幢摠管: 중앙군단의 장)을 역임던 김진주(金眞珠)는 문무왕2년(662) 8월에 백제부흥군 토벌전을 태만히 한 죄로 처형되었다. 김진주는 친당파였던 것으로 보인다.


문무왕 16년(676) 11월, 설인귀의 함대는, 서해안을 우회하여 금강하구로 진입하려고 기도했다. 백제 고토에서 제2 전선을 구축하려 했던 것 같다. 그러나 사찬 김시득(金施得)이 지휘한 신라 수군에게 백강(금강) 하구 기벌포에서 포착되어 패배했음은 앞에서 기술했다. 이 무렵, 설인귀는 다시 서인(庶人)으로 강등당했다.


그러나 설인귀는 681년 고종에게 불려가 우령군위장군 대주(代州)도독으로 부활했다. 682년엔 운주(云州)를 침범한 돌궐군을 맞받아쳐서 대승을 거두었다. 그는 다음해(683년)에 안문관(雁門關)에서 70세의 나이로 병사했다. 좌효위대장군 유주(幽州: 지금의 북경)도독이 추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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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 말갈 출신 대장군 이근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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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5년 매소성 전투 직후 李謹行(이근행)의 말갈군은 임진강 전선을 떠나 서역 전선으로 급히 이동했다. 그는 나당전쟁 기간에 신라군과 가장 많이 싸운 적장이다. &#10218舊唐書&#10219 말갈전에는 이근행을 다음과 같이 평가하고 있다.



&lt 근행은 외모가 빼어나고 무력이 남달랐다. 인덕 연간(664-666)에 영주도독(營州都督)으로 부임했는데, 그 부락의 집이 수천이고 재력으로써 변방의 영웅이 되니 이인(夷人: 동쪽오랑)들이 그를 꺼려했다. 우령군대장군에 올라 적석도경략대사(積石道經略大使)에 임명되었다. 토번의 논흠릉(論欽陵)이 무리 10만을 거느리고 황중(皇中)에 처들어오자, 이근행은 병사들에게 나무를 하게 하는 등 전혀 걱정하지 않는 체했다. 적이 도착한 것을 듣고, 그제야 기(旗)를 세우고 북을 치며 진문(陣門)을 열고, 그들을 기다렸다. 토번군이 복병이 있을까 두려워 감히 진군하지 못했다. 上元 3년(676), 또 靑海에서 토번을 무찌르니 황제(당고종)가 새서(璽書: 옥새를 찍은 글)를 내려 그 노고를 격려하여 주었다. &gt



이근행이 부임한 적석도는 지금의 靑海省(청해성)에 인접한 감숙성 임하현(臨夏縣) 방면인데, 대사(大使)는 그 방면의 총사령관을 말한다. 토번군이 침입한 황중(湟中)은 지금의 청해성 성도인 서녕(西寧: 시닝) 남쪽 교외로서 당시 당-토번 국경지대의 군사적 요충이었다. 토번은 7세기 후반부터 당과 실크로드의 패권을 다툰 나라로서, 전성기에는 서장(티베트)뿐만 아니라 지금의 청해성, 감숙성, 신강위구르자치구 등지를 판도에 넣고, 한때 장안(長安)까지 점령한 강국이었다. 논흠릉은 토번 전성기의 총사령관 겸 재상이었다.



그러면 이근행의 출신배경은 무엇일까? &lt&lt舊唐書&#8228 구당서&gt&gt 말갈 傳에 따르면 이근행의 아버지 돌지계(突地稽)는 粟末靺鞨(속말말갈)에 속한 한 부족의 추장으로서 590년경 고구려에 대한 말갈의 저항을 주도했던 최후의 맹주였다.


고구려에 패한 그는 부족민 1000여 명을 거느리고 수양제(隋煬帝)에게 귀부(歸附)했다. 수양제는 그를 영주(營州: 지금의 요녕성 朝陽)에 거주시키고, 금자광록대부 요서태수(遼西太守)로 임명했다.


아직도 천하의 주인이 결정되지 않았던 수말당초의 大혼란기에 돌지계는 이번에는 당고조 이연(李淵)에게 密使(밀사)를 파견해 조공을 바쳤다. 당고조는 연주(燕州)를 설치하고, 돌지계를 그 摠管(총관)으로 삼았다. 中原(중원)의 사슴(패권)을 다투던 군웅 중 1인인 유흑달(劉黑達)의 반란 때 돌지계가 그의 부족을 이끌고 정주(定州)에 와서 당태종에게 사자를 보내 節度(절도) 벼슬을 청했다.


당태종은 전공의 보답으로 그를 기國公(기국공)에 봉했다. 貞觀(정관) 초, 당태종은 돌지계에게 右衛將軍(우위장군)을 제수하고, 국성 李씨를 내렸다. 얼마 후 돌지계가 죽고 이근행이 그 뒤를 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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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당 전쟁 시기에 이근행이 도독을 지낸 營州(영주)는 당의 동방정책을 추진하던 최전선 군사기지로서 지금의 요녕성 조양(朝陽)이다. 영주라면 고구려 멸망 후 그 유민들의 일부가 집단 거주했던 곳이다. 그로부터 30년 후(698년)의 일이지만, 고구려 유민 대조영(大祚榮)는 말갈 추장 걸사비우(乞四比羽)와 함께 영주로부터 탈출, 震國(진국: 훗날 발해로 개명)을 세웠다.


이근행이 토번과 전투를 했던 황중(湟中)은 현재 청해성의 省都(상도)인 서녕(西寧&#8228 시닝)의 속현(屬縣)이다. 필자는 2010년 6월 티베트 불교의 발상지이기도 한 황중을 답사했다. 서녕에서 26km 남서쪽에 위치한 황중으로 가는 국도 옆 산봉우리에는 봉수대(烽燧臺) 수십 개가 눈에 띈다.


기록에 따르면 백제부흥군 출신 당나라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서녕 일대에 70여개의 봉수대를 설치했다. 실은 서녕도 흑치상치가 개척했던 關防都市(관방도시: 군사도시)였다. 이에 대해서는 뒤에서 상세하게 밝힐 것이다. 황중에는 티베트 불교 중 게루派(파)의 본산인 타얼스(塔爾寺&#8228 탑이사)가 자리잡고 있다.


탑이사는 티베트 불교 최고의 학승이었던 쫑가파(宗喀巴)가 태어난 곳이다. 쫑가파가 창시한 게루파(派)의 승려들은 노란색 모자를 쓰기 때문에 황모파(黃帽派)라고 불린다. 현재 인도(印度) 서북부 달람살라에서 티베트 망명정부를 이끌고 있는 제14대 달라이 라마는 붉은 모자를 써 홍모파(紅帽派)라고 불린다. 한반도 중부 한탄강변 매소성에서 패전하고 퇴각한 이근행은 1만5000리를 행군해 청해 전선에 투입되었다. 이근행은 황중에서 토번을 막았으나, 승전 후 1년도 못돼 진중에서 병사했다.


677년 후반에서 678년으로 넘어가는 시기에 티베트 고원에서 토번의 병권을 장악한 갈이(&#22134爾)씨 가문과 羊同(양동) 사이의 전쟁이 일어났다. 이런 시기에도 당고종과 무측천은 신라 공략에 집착하고 있었다. 다음은 &#10218자치통감&#10219의봉 3년(678) 9월 조의 관련 기사이다.



&lt 9월,…고종이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토벌하고자 했다. 병으로 집에 있던 시중 장문관(張文瓘)이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했다. “지금 토번이 침구(侵寇)하니, 바야흐로 군사를 일으켜 서쪽을 토벌해야 합니다. 신라는 비록 자주 불순하지만, 일찍이 변방을 침범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또 신라를 친다면, 臣(신)은 그 폐해가 공사간에 심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에 고종은 (신라 정벌 작전을) 중지했다. 계해(癸亥)에 시중 장문관이 죽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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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석에서 죽을 날을 기다리던 늙은 신하의 충언은 당고종을 움직였다. 당고종은 신라 원정을 중지하고, 토번과의 결전을 결심했다. 이에 따라 진중(陣中)에서 병사한 이근행을 대신해 靑海 지역을 지키는 하원(河源) 방면 대총관이 된 인물이 중서령 이경현(李敬玄)이었다. 그러나 679년 9월, 이경현 휘하 당군 18만 명은 토번의 명장 논흠릉(論欽陵)과의 전투에서 참패했다. 그렇다면 이경현의 패전 원인은 무엇일까?


이경현은 재상급 문사인 자신을 청해 戰線에 투입한 당고종과 무측천(武則天)의 인사에 불만을 품은 끝에 처음부터 전투에 소극적이었다. &#10218禮論&#8231 예론&#10219 등의 저서를 남긴 학자관료였던 그는 휘하의 좌위대장군 유심례(劉審禮)에게 부대 지휘를 맡겼는데, 유심례는 졸전 끝에 토번군의 포로가 되었다.


이경현의 패전도 당군이 언제 다시 침입해 올지 몰라 군비 증강에 박차를 가하던 문무왕에게 약간의 여유를 주었다. 이때 이경현 휘하의 백제 출신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가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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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 토번의 공세를 7년간 막아낸 백제부흥군 출신 흑치상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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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출신 장수 흑치상지(630-689)는 서역 전선에서 토번의 공세를 7년 동안 막아냈다. 여기서 흑치상지의 파란만장했던 삶을 살펴볼 필요가 있다. 그는 백제 패망 당시 관등 제2위인 달솔(達率)이었으며, 풍달군장(風達郡將)이란 직책에 있었다. 백제 멸망 후 맨 처음 백제 부흥의 깃발을 들었던 그는 임존성(任存城: 충남 홍성군 대흥)을 거점으로 복신(福信)&#8231 도침(道琛) 등과 함께 백제부흥군을 이끌었다.


그러던 그가 663년 9월의 백촌강 전투를 전후하여 당나라 장수 유인궤(劉仁軌)에게 항복한 후 스스로 당군을 이끌고, 백제부흥군의 마지막 거점 임존성(任存城)을 제 손으로 함락시켰다.


그렇다면 그가 왜 당에 투항했을까? 이는 백제부흥운동을 주도하던 지도층 간의 내분과 무관하지 않은 것 같다. 복신에 의해 도침이 살해되고, 복신은 왜국이 책봉한 괴뢰 왕 부여풍(扶餘豊)에 의해 피살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복신과 가까웠던 흑치상지는 위기의식을 느꼈던 것 같다.


당의 부도(副都)인 낙양 북망산(北邙山)에서 발견된 흑치상지의 묘비명(墓碑銘)에 따르면, 당고종이 사신을 보내 흑치상지를 회유하자 흑치상지는 부장인 사타상여(沙&#21522相如)와 함께 당장 유인궤(劉仁軌)에게 투항해 664년부터 8년간 웅진도독 부여융을 보좌했다.


웅진도독부가 신라군의 공세에 의해 한반도에서 쫓겨남에 따라 672년 당에 들어간 흑치상지는 양주자사(洋州刺史) 등으로 복무하다가, 678년 하원도(河源道)대총관 이경현(李敬玄)과 공부상서로서 수군대사(水軍大使)였던 유심례(劉審禮)를 따라 토번 공략에 참여했다. 이때 유심례의 선봉부대가 패전해 토번군의 포로가 되자, 이경현의 본대는 전의(戰意)를 상실하고 궤멸의 위기에 빠졌다.


이런 혼란 속에 흑치상지는 활로를 찾기 위해 밤중에 500 명 규모의 결사대를 이끌고, 토번 진영을 급습했다. 불의의 급습을 받은 토번군은 추장 발지설(跋地設)이 놀라 자기 부대를 버리고 도주하는 등의 혼란을 빚었다.


이런 틈을 타, 이경현의 잔존 부대는 가까스로 선주(&#37167州: 지금의 청해성 樂都縣)로 퇴각할 수 있었다. 당고종은 흑치상지의 전공을 높이 평가해, 그를 좌무위장군으로 발탁하고, 금 500량과 비단 500필을 상으로 내렸다.



이듬해(679년), 토번군이 또 청해지역을 침입했다. 이경현은 황하(黃河)의 지류인 황천(湟川: 지금의 황수)에 진을 치고 있는 토번군 3만과 싸웠으나 또 패전했다.


그러나 흑치상지는 정예 기병 3천기를 이끌고 토번 진영에 대한 득의(得意)의 야습을 감행해 2천 명을 베고, 수만 마리의 양과 말을 노획했다. 전세를 호전(好轉)시킨 흑치상지는 이경현을 대신하여 하원도경략대사가 되었으며, 베 400필의 은상을 받았다. 당대(唐代)의 하원(河源)은 지금의 청해성 성도(省都)인 서녕(西寧)이다. 하원도경략대사는 청해 방면 총사령관인 셈이다.


흑치상지는 서녕(西寧)의 건설자였다. 토번군을 막으려면 병력을 증강시켜야 했고, 병력을 증강시키려면 병참로의 안전이 긴요했다. 흑치상지가 서녕 일대에 봉수대 70여개소를 축조했던 까닭이다. 또 서녕을 꿰뚫고 흐르는 황수(湟水) 유역에 둔전(屯田) 방식으로 5000 경(頃)의 농토를 개간하여, 해마다 1백만 곡(斛)의 곡물을 거두어들였다. 1경은 100무, 1무는 100보 (1보=1.5m) 평방이다. 1곡은 10말(斗)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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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1년, 토번의 찬파(贊婆)가 다시 침입해 청해에 진영을 설치했다. 흑치상지는 기병 1만기를 거느리고 급습, 토번군 진영을 파괴했다. 양곡 창고를 불태우고, 양과 말 등을 무수히 노획했다. 흑치상지는 서녕 일대를 요새화 했다.


684년, 그는 좌응양위대장군 연연도부대총관에 임명되어 청해를 떠났다. 연연도(燕然道)는 지금의 外몽골 방면이다. 그가 청해를 지키고 있던 7년 동안, 토번은 그를 두려워해 감히 청해 지역을 약탈하는 일이 없었다. 같은 해(684), 다시 승진해 좌무위대장군과 검교좌우림군이 되었다. 좌우림군은 장안 주둔 북아금군(北衙禁軍)을 다스리는 요직이었다. 이는 684년 이경업(李敬業)의 모반을 평정한 데 대한 공로를 인정받았기 때문이다.









19. 손자 때문에 무덤이 훼손당한 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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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83년 12월, 당고종이 병사하고, 중종(中宗)이 즉위했으나 곧 여릉왕으로 강등되고, 이어 즉위한 예종은 모든 정사를 어머니인 무측천에 맡기고 뒷전에 물러나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이적(李勣&#8228 당시 사망)의 손자 이경업(李慶業)이 모반했다. 그는 무측천에 의해 유주사마(柳州司馬)로 좌천되자, 長江 하류 양주(揚州)에서 거병했다.


당의 실질적 통치자 무측천에 의해 강등되거나 관직에서 쫓겨난 사람들이 이 반란대열에 가담했다. 무측천은 이경업으로부터 국성(國姓)인 李씨를 박탈해 이후 그는 본래의 성인 서(徐)씨로 되돌아가 이후 서경업이라 불리게 되었다.


서경업의 조부인 이적(李勣)의 본디 이름은 서세적(徐世勣)이었다. 그는 열일곱살 때 이미 군도(群盜)의 두목인 적양(翟襄)의 부장이 되었다. 그런데 명문 출신 이밀(李密)이 양현감(楊玄感: 隋나라의 고구려 침략시 병참사령관)의 반란에 가담했다가 양현감이 패사(敗死)하자, 쫓기는 처지에서 적양에게 투신했다.


이밀은 수&#8231 당의 황실처럼 서위(西魏) 이래 최고의 武人귀족인 8주국(八柱國) 가문 출신이며, 양현감은 수나라의 개국 1등공신 양소(楊素)의 아들이다. 양현감은 수양제의 고구려 2차 원정 때(613년 6월) 후방에서 병참을 총괄하다가 반란을 일으켜 수군(隋軍)의 회군을 불가피하게 만든 인물이었다. 양현감의 반란은 그 이후 중국 각지에서 잇달아 일어난 대반란의 신호탄이 되었다.


명문 출신 이밀은 곧 세리(稅吏) 출신인 적양을 제2인자로 밀어내고 자신이 군도(群盜) 집단의 주인이 되었고, 나이 20세의 서세적을 휘하의 우무후대장군으로 승진시켰다. 이밀은 정국(鄭國) 황제를 자칭하던 군벌 왕세충(王世充)이 웅거하던 낙양(洛陽) 공략에 집착했다가 패해, 당시 막 長安을 점거했던 당고조 이연(李淵)에게 몸을 의탁했다.


이때 이밀은 부장인 서세적을 하북(河北)의 여양(黎陽)에 남겨놓아 후일을 도모하려 했다. 그러나 서세적은 이밀을 따라 당에 투항했던 위징(魏徵: 580-642)의 권유로 당에 귀순했다. 당태종 李世民(이세민)은 서세적에게 국성인 李씨를 내리고, 이세적(李世勣)은 당태종 李世敏(이세민)의 이름자‘世’를 기휘(忌諱)해 이적이라 칭했다.


이적은 당태종 때(630년) 이정(李靖)과 함께 당시 草原(초원)의 최강국인 東돌궐을 쳐서 힐리가한(詰利可汗)을 사로잡는 엄청난 전공(戰功)을 세웠다. 東동궐이라면 617년 太原留守 李淵(태원유수 이연: 후일의 당고조)이 太原(태원)에서 거병했을 때 騎兵(기병) 3000기를 지원했던 유목기마민족의 나라다. 626년 8월, 당태종 이세민은 아버지인 당고조를 퇴위시키고 즉위하자말자 東돌궐의 침략을 받았다. 이때 당태종은 長安의 府庫(부고)를 털어 東돌궐의 힐리가한에게 조공을 바쳤다.


이적은 645년 당태종의 1차 고구려 원정에 참전했다. 당태종 이세민은 649년 죽기 전에 이적을 첩주(疊州)도독으로 좌천시키면서, 후계자인 당고종 李治(이치)에게 다음과 같이 당부했다.


“이적는 才智(재지)가 남아도는 남자다. 그러나 너는 아직 그에게 은혜를 베푼 적이 한 번도 없다. 나는 이적을 첩주도독으로 날려버릴 것이다. 만약 이적이 꾸물대며 부임을 주저하면 그것을 이유로 죽여버려! 그러나 그가 첩주에 부임하면 내가 죽고 나서 즉시 불러올려 복야(僕射: 재상)에 앉혀라!”


사령을 받은 이적은 눈치 빠르게 즉각 첩주로 내려갔다. 첩주는 당시 토번과의 접경지대인 궁벽한 시골로서 지금의 사천성 서부의 질부(迭部) 부근이다. 당고종이 즉위한 649년에 이적은 즉각 長安으로 불려가 재상의 지위에 올랐다.


652년, 당태종의 後宮(후궁: 才人)이었던 무조(武照)가 궁중에 다시 들어가 당고종의 소의(昭儀)가 되었다. 그때 무조의 나이 28세, 고종 李治보다 5세나 많은 ‘年上의 여인’이었다. 당고종은 3년 후인 655년 名門 출신 왕(王)황후를 폐하고, 무(武)소의를 황후로 삼으려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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탁고지신(託孤之臣)들인 장손무기(長孫無忌)와 저수량(&#35098遂良)이 이를 반대해 당고종은 궁지에 몰렸다. 이때 이적이“이것은 폐하의 가정문제”라고 아부해, 당고종과 무측천의 신임을 얻었다.


무측천의 시대에 이적은 조정에 들면 재상, 조정을 나서면 대총관(大摠管)이었다. 그는 당군의 주장(主將)으로서 668년 9월 평양성을 함락시켜 보장왕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냈다. 그런 그도 사후(死後)에 그의 손자 때문에 그의 무덤이 무측천에 의해 파헤쳐졌다. 그러나 부관참시(剖棺斬屍: 관을 쪼개어 송장의 목을 뱀)를 당했는지의 여부에 대한 기록은 없다.


서경업의 반란은 무측천의 찬탈에 의해 당조(唐朝)의 멸망이 예견되는 시기에 발생해, 관직에서 쫓겨나거나 강등당한 사람들의 결집해 일으킨 거병이었다. 서경업 진영에 가담한 詩人(시인)인 낙빈왕(駱賓王)은 측천무후를 격렬하게 규탄하는 유명한 격문을 역사에 남겼다. 즉,“한줌의 흙이 마르지 않았는데, 6척의 고아는 어디에다 맡기랴!”라는 구절은 무측천도 읽고 신음했다는 명(名)문구로 회자되었다.


여기서‘한 줌의 흙’이란 무측천의 남편인 고종의 능묘의 흙이고,‘6척의 고아’란 무측천에 의해 폐위된 중종(中宗)을 가리킨다. 무측천은 낙빈왕을 중앙 근무로부터 지방 말직으로 강등시킨 고관들에 대해 인재를 알아보는 안목이 없다고 매우 꾸짖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낙빈왕은 낙빈의 왕이 아니라, 성(姓)이 낙빈이요, 이름이 왕(王)이다.


그러나 서경업의 전략은 조부를 담지 못해 매우 졸렬했다. 곧바로 북진하여 洛陽(낙양)이나 장안을 공략하지 않고, 오히려 뒷걸음을 쳐 옛 남조(南朝) 정권의 수도였던 강남의 南京(남경)으로 들어가 근거지를 지키려는 모습을 보였다. 무측천은 이효일(李孝逸)을 주장(主將)으로 대군을 파견해 반란을 진압했는데, 이때 흑치상지는 강남도행군대총관으로서 그 진압작전에 참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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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 부흥 돌궐의 대두 그리고 흑치상지의 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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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돌궐은 당태종 때인 630년 이정(李靖)과 이적에게 멸망당하고, 西돌궐은 당고종 때인 657년 소정방(蘇定方)에게 본거지인 스이아브(碎葉&#8231 쇄엽)가 함락되어 망했다. 그로부터 20여년의 세월이 흘러 돌궐 부흥의 움직임이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쿠쿨룩(骨&#21636祿: 재위 682∼691)은 중국 북부의 연주(燕州: 섬서성 扶豊縣)을 습격하여 3만 마리의 말과 양 등을 약탈했다. 그 이후, 흩어져 살던 돌궐족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는데, 쿠쿨룩은 바이칼湖(호) 남서쪽에 위치한 유목민족의 성지(聖地) 외튀겐 지역을 장악하고, 스스로 가한(可汗)임을 선언했다.


유목기마민족은 한번 일어섰다고 하면 무서운 에너지를 발산하는 특징을 지니고 있다. 부흥돌궐은 682년부터 687년까지 중국을 무려 46차례나 공격했다. 그 영토는 서쪽으로는 알타이 산맥, 동쪽으로는 만주의 대흥안령산맥에 이르게 되었다.



연연도대총관이던 687년, 흑치상지의 부대는 황하퇴(黃河堆: 산서성 山陽縣 동북)에서 쿠쿨룩이 이끈 부흥 돌궐과의 전투에서 승리해 적을 40리나 추격했다. 이때의 전공으로 그는 무측천으로부터 연국공(燕國公)이라는 작위와 식읍(食邑) 3천호를 받았다.


흑치상지는 58세 때인 687년, 회원군경략대사가 되었다. 이때 좌감문위중랑장 찬보벽(&#29224寶壁)과 함께 돌궐 토벌에 나섰다. 그러나 찬보벽이 전공(戰功)을 탐내 자기 부대 단독으로 무리한 진격을 감행하다가 全軍이 궤멸했다.


그에 따라 찬보벽은 참수당했고, 흑치상지도 문죄(問罪)되었다. 이럴 무렵에 우응양장군 조회절(趙懷節)의 모반사건이 발생했는데, 혹리(酷吏)로 악명 높은 주흥(周興)은 흑치상지를 그 모반사건에 연루시켜 사죄(死罪)로 얽었다. 이에 흑치상지는 옥중에서 목을 매 자결했다. 혹은 교형(絞刑)에 처해졌다고도 한다.


조희절의 모반사건은 아직도 진상을 알려지지 않은 미스터리다. 이런 사건이 벌어진 배경에는 686년에 공포된 고밀(告密)이라고 불리던 밀고제도 때문이었다. 이 제도는 사실의 여부와는 관계없이 투서에 의한 밀고를 장려하는 것이었다.


서경업의 반란 후 무측천은 새로운 반란을 사전에 포착&#8231 진압할 목적으로 비밀경찰을 깔아 공포정치를 강행했다. 여기에 일단 걸려들면 당사자와 가족은 물론 친척&#8231 친우들까지 잔혹한 고문을 가해 옥사시키기 일쑤였다. 흑치상지의 억울한 죽음은 그의 장남인 흑치준(黑齒準)의 호소에 의한 再조사로 698년 무고함이 밝혀져 좌옥금위대장군으로 추증되었다.


하지만, 억울하게 죽은 사람의 목숨은 되돌릴 수 없는 것이었다. 자기 고국을 멸망시킨 나라에서 출세했던 그의 최후가 너무도 비극적인 것이다. 흑치상지가 건설한 청해성의 성도(省都)인 西寧을 답사하면서 필자는 짙은 페이소스를 느끼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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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김씨의 출발점을 찾는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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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련산맥을 넘어 河西走廊을 달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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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에게는, 청해성에서 기련산맥(祁連山脈)을 넘어 감숙성(甘肅省)의 하서주랑(河西走廊)를 달려야 할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그 하나는, 대비천 전투에서 설인귀(薛仁貴)의 당군을 대파한 토번군이 기련산맥을 넘어 실크로드의 핵심구간인 하서4진(河西四鎭: 감숙성 소재)을 위협함으로써 당군의 동정(東征)을 사실상 틀어막았기 때문이다. 나당전쟁 前後 河西4진과 安西4진은 당&#8231 토번 간에 쟁탈의 요충이었지만, 안록산(安祿山)의 반란(755년) 발발 이후에는 모두 토번의 영토가 되었다.


또 하나는,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김씨(新羅金氏)가 흉노 휴저왕(休屠王)의 태자인 김일제(金日&#30974)의 후손이라는 주장이 학계에서 제기된 지 이미 오래 되었고, 휴저왕의 본거지가 하서주랑(河西走廊)의 제1번 도시인 무위(武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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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11일 오전 8시30분, 필자 일행 5명은 대형 지프를 타고 청해성의 성도(省都)인 서녕(西寧)을 출발해, 황수(湟水)의 발원지인 청해호 북방 대통(大通)산맥의 협곡을 뚫고, 기련산맥(祈連山脈)을 넘어 실크로드와 연결되는 하서4진(河西四鎭)과 흉노 휴저왕의 본거지를 찾는 답사에 나섰다.


흉노 등 기마민족의 핵심거점이었던 폭 300km, 길이 800km의 기련산맥. 그것은 청해성과 감숙성(甘肅省)의 분수령, 또는 서역으로 연결되는 ‘하서주랑(河西走廊)의 등뼈’ 등으로 불린다. 청해호의 서쪽에 위치한 차이담 분지를 거쳐서도 실크로드와 연결되기는 하지만, 그 길의 높낮이가 구간에 따라 매우 격렬하고, 기후변화도 극심해 통행하기 어렵다.


기련산맥의 최고봉 기련산은 표고 5547m. 서녕∼장액(張掖) 간을 연결하는 국도 227호 구간에는 표고 4000 m 안팎의 고개가 많다. 청해성의 아보진(峨堡鎭)과 감숙성의 민락(民樂) 구간 74km 가 가장 험한 코스였다. 그 중도의 아박진(峨博鎭)에서 점심을 해결하려고 길가 식당 몇 곳의 문을 두드렸지만, 모두 문을 잠궈놓고 음식을 팔지 않았다. 우리는 건빵&#8231 과일 등 비상식량을 지니고 있었기 때문에 굶을 염려는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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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필자 사진(조갑제 닷컴에 기고)---눈보라가 휘날리는 해발 4000m의 고갯길은 대낮인데도 10m 전방이 보이지 않고, 전복 사고로 대형 화물 트럭이 길가에 널부러져 있다.&gt&gt


기련산맥의 산간 마을 왕도반(王道班)과 남풍(南豊)을 잇는 구간의 고갯길에서 심한 눈보라를 만났다. 눈보라가 휘날리는 해발 4000m 전후의 고갯길은 대낮인데도 10m 전방이 보이지 않았다. 곳곳에 대형 트럭이 사고를 일으켜 길가에 널부러져 있었다. 우리를 실은 지프 운전사는 전조등(前照燈)을 켜고, 도로의 노란색 중앙선을 따라 거북이 걸음으로 조심조심 운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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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 닷컴--감숙성 민락현의 목장&gt&gt


민락(民樂)에 다가갈 무렵에야 눈발이 약해지고, 시계(視界)도 훨씬 밝아졌다. 오후 3시가 넘어서야 민락현의 십리도향촌(什里稻香村)에 들러 점심을 해결했다. 민락현 주변에는 대마영(大馬營)&#8231 군마팔대(軍馬八隊) 등 말과 관련된 지명(地名)이 많다. 흉노 지배 시절부터 청조(淸朝)에 이르기까지 이곳에는 대규모 군마(軍馬) 목장이 있었다.


마침 민락현 출신인 지프 운전사는 “나도 얼마 전까지 이곳 목장에서 일했지만, 지금 목장엔 말이 없고, 양(羊)과 야크만 있다”고 말했다. 자동차와 탱크의 등장으로 이제 말의 쓰임새가 옛날보다 훨씬 줄어들었는 데다, 말의 성격이 워낙 까다로워 사육하기가 쉽지 않기 때문이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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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사진 닷컴---눈 속의 마제사 천불동&gt&gt


우리 일행은 민락에서 국도를 버리고 지방도로를 타고 가다가 청남현(靑南縣)의 마제사(馬蹄寺)를 들렀다. 함박눈이 내리는 마제사 입구는 절경이었다. 굳이 이곳을 찾은 것은 기련산맥의 눈 녹은 물이 이 근처에서 흑하(黑河)란 강물을 이룬 후 오아시스 도시인 장액(張掖)으로 흘러가기 때문이다.


장액을 감싸고 도는 흑하는 다시 서북진하다가 사막을 뚫고 내몽골에 이르러 거연택(居延澤)이라는 거대한 호수를 이룬다. 거연택은 마르코 폴로의 &#10218東方見聞錄&#8231 동방견문록&#10219에도 소개되는 유목민의 젖줄이었다.


흑하의 흐름과 동행하여 밤늦게 장액에 도착했다. 우리 일행을 실은 지프가 이날 하루 달린 거리는 600km 에 달했다. 하차하기 전, 난코스를 무난하게 돌파한 중국인 운전사의 노고에 감사하는 큰 박수를 보냈다.


장액의 옛 이름은 감주(甘州)이다. 감숙성이란 이름은 감주와 숙주(肅州: 지금의 酒泉)의 첫 글자에서 따왔다. 장액은 연간 강우량 300mm 정도의 오아시스도시다. 간밤에 내린 눈비를 제외하면, 지난 3개월간 강우량은 제로(0)였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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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서주랑(河西走廊)은 정복 또는 구도(求道)의 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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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0년 4월12일은 쾌청. 오전 8시30분, 우리는 지프를 타고 장액에서 G30 고속도로에 올라 만리장성의 서쪽 끝 가욕관(嘉&#23786關)을 향해 달렸다. 기련산맥의 봉우리들은 간밤에 내린 눈으로 온통 하얗고, 황사의 진원지인 북쪽 대사막의 하늘은 쪽빛처럼 새파랗다. 모래가 풀풀 흩날리고, 온 천지가 누렇다는 하서주랑(河西走廊)을 천리마를 탄 기분으로 산뜻하게 달릴 수 있다는 것은 뜻밖의 행운이었다.


&lt&lt사진 탓컴 필자사진---기련산맥 &gt&gt


하서주랑은 실크로드의 개척자 장건(張騫), 감숙성의 정복자 곽거병(&#38669去病), 서역 72개국을 제압한 고구려 유민 출신 안서도호 고선지(高仙芝), 서하국(西夏國)의 건설자 이원호(李元昊), 몽골 제국의 시조 칭기즈칸이 말을 달린 야망(野望)의 길이었는가 하면, &#10218대당서역기&#8231 大唐西域記)&#10219를 저술한 당태종 때의 고승 현장(玄&#22872)과 &#10218왕오천축국전&#8231 往五天竺國傳&#10219이란 정확무비의 명저를 남긴 신라 성덕왕 때의 승려 혜초(慧超)가 신심(信心)의 발자국을 찍은 구도(求道)의 길이었다.


가욕관은 명대(明代) 장성의 서쪽 끝이다. 가욕관 문루에 올라 바라본 대사막과 기련산맥의 조합은 환상(幻想)의 콘트라스트(對比&#8231 대비)였다. 670년 대비천 전투 후에 토번이 일시 함락시킨 하서주로의 맨 동쪽에 위치한 돈황(敦煌)은 2004년 6월에 필자가 서역의 타클라마칸 사막 주변의 안서4진(安西四鎭)을 둘러본 후, 트루판에서 기차를 타고 東進해서 답사했던 곳이다. 돈황에 관한 견문은 뒤의 본문에서 다시 거론할 것이다.


필자 일행은 가욕관에서 되돌아서서 동쪽 21km에 위치한 주천(酒泉)으로 이동했다. 옛 이름이 안서4진의 하나인 숙주(肅州)이다. 기련산맥의 눈 녹은 물이 흐르는 강과 복류수(伏流水: 모래사막 밑을 흐르는 물)을 이용해 관개농업(灌漑農業)과 목축을 한다.


주천의 특산품으로는 “포도의 미주(美酒), 아광(夜光)의 杯(배)…”라는 성당(盛唐)의 시인 왕한(王翰)의 싯구로 회자되는 술잔이다. 기련산의 옥(玉)으로 만든 공예품으로서 색깔은 짙은 녹색, 테두리는 희미하지만 투명하다. 밤에 등불을 비추면 아련한 형광을 발한다.


주천을 촉촉하게 적시는 북대하(北大河)와 장액을 휘감아 도는 흑수는 주천 외곽에서 합류해 북북서로 흘러간다. 이것이 약수(弱水)로서 사막을 지나 內몽골에 이르러 거연택(居延澤)을 이룬다.



주천은 하서(河西: 감숙성)를 전한(前漢)의 영토로 만든 ‘소년장군’ 곽거병(藿去病)의 영웅담으로 채색되어 있는 오아시스 도시이다. BC 121년 여름, 약관(20세)의 곽거병은 정예 기병 3만기를 거느리고 북지(北地: 섬서성 環縣 남방)을 출발하여 황하의 大彎曲部(대만곡부) 서북단을 도하한 후 內몽골의 텡케르(騰格里)사막과 보딘지린(巴丹吉林)사막을 질풍같이 횡단하여 녹복(祿福)이라는 곳에 이르러 전승 자축연을 벌였다.


&lt&lt 닷컴 지도---BC121년 봄과 여름에 전개된 곽거병의 河西 공략도 &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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곽거병은 출정 전 한무제(漢武帝)로부터 하사받은 술 한 병을 갖고 있었다. 물론, 이 술 한 병으로는 수만 병사들에게 한 잔씩 돌릴 수가 없었다. 그는 이 한 병의 술을 물이 펑펑 솟아오르는 샘에다 부어 병사들에게 한 잔씩 떠서 마시도록 했다. 이후 이곳의 地名(지명)이 술 솟는 샘이라 하여 酒泉(주천)으로 바뀌었다.


한껏 사기가 오른 곽거병의 기마부대는 흉노의 핵심 거점인 기련산을 공격해 탈취했다. BC 121년 여름 원정을 통해 곽거병은 참수 3만여급, 흉노의 왕장(王將) 5명을 포획하는 큰 전과(戰果)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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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6년에 발견된 문무대왕의 능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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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8228 고구려의 멸망에 이어진 나당 7년 전쟁에서 승리한 민족사의 영웅 문무대왕 김법민(金法敏)의 능비문에는 그가 흉노 휴저왕(休屠王)의 태자인 투후(&#31226侯) 김일제(金日&#30974)의 후손으로 쓰여져 있다. 문무왕의 능비는 조선 정조(正祖) 때인 1796년에 경주 사람에 의해 발견되었고, 그 탁본(拓本) 네 장이 청(淸)의 문인 유희해(柳喜海)의 손에 들어가 &#10218해동금석원&#8231 海東金石苑&#10219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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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의 능비는 그 후 행방이 묘연했는데, 두 동강 난 비 조각이 1961년과 2009년 경주에서 차례로 다시 발견되어, 현재 경주국립박물관에 보존되어 있다. 비 자체에 파실(破失)된 부분이 많아 완전 해독은 어렵지만, 대체로 앞면에는 신라김씨의 내력과 태종무열왕과 문무대왕의 공적이, 뒷면에는 문무대왕의 유언, 장례 사실 등이 새겨져 있다. 다음은 신라김씨의 내력 관한 비문의 기술을 우리말로 고친 것이다.



&lt 투후(&#31226侯)의 제천지윤(祭天之胤: 하늘에 제사지내는 큰아들)이 7대(代)를 전하여 …하였다. 15대 조(祖) 성한왕(星漢王)은 그 바탕이 하늘에서 내리고, 그 영(靈)이 선악(仙岳)에서 나와 OO을 개창하여…&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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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인용문에서‘투후(&#31226侯)’는 한무제(漢武帝)의 탁고지신(託孤之臣)인 김일제(金日&#30974: BC 134∼86)이다. 탁고지신은 임종(臨終)을 앞둔 군주(君主)로부터 어린 후계 군주의 보좌를 부탁받은 신하를 뜻한다. 한무제는 71세 나이로 죽으면서 곽광(&#38669光: 곽거병의 친동생)&#8231 김일제&#8231 상관걸(上官桀) 등 3인의 신하에게 어린 후계자 소제(昭帝)를 보필하라고 유언했다.


김일제는 흉노 휴저왕의 태자였으나 열네살 때인 BC 121년 봄에 한나라의 표기장군 곽거병에게 포로가 되었다. 처음엔 말을 사육하는 노예로 전락했지만, 양마(養馬)의 능력이 워낙 뛰어나 말(馬) 마니아인 한무제의 마음을 사로잡아 대번에 마감(馬監)이 되었다. 그 후 시중, 駙馬都尉(부마도위) 등으로 승진했고, 副재상인 망하라(莽何羅)가 한무제를 암살하려고 비수를 품고 침소에 뛰어들려 했을 때 “망하라 모반!”이라 외치며 몸으로 막아서 한무제의 생명을 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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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무제는 임종시에 김일제를 제후로 봉하도록 유언했다. 김일제는 한소제(漢昭帝) 등극 1년 후에 병사했는데, 임종 직전에 漢昭帝로부터 &#31226侯(투후)의 작위를 받았다. 투후는 &#31226國(투국: 지금의 산동성 투현)을 식읍(食邑)으로 받은 제후라는 뜻이다.



위의 비문 중 ‘제천지윤 전칠엽(祭天之胤 傳七葉)’은 김일제의 아버지인 휴저왕이 금인(金人)을 만들어 하늘에 제사 지냈다는 사실을 알고, 한무제가 일제에게 김(金)씨 성(姓)을 내렸는데, 김일제의 후손 7代가 투후를 계승했다는 의미이다.


또 위에서 언급한‘성한왕(成漢王)’은 김씨로서 신라에 처음 등장한 알지(閼智)로 보는 견해, 알지의 아들인 세한(勢漢)으로 보는 견해, 김씨로서 최초로 신라 왕위에 오른 미추이사금(味鄒尼師今)으로 보는 견해 등이 엇갈리고 있다. 그렇다면 김일제의 후손들이 한반도의 동남부 신라까지 흘러들어온 까닭은 무엇일까?


유방(劉邦)이 세운 漢(한)왕조는 200여년 만에 외척인 왕망(王莽)에게 찬탈되어 서기 8년에 일단 멸망한다. 왕망이 세운 신(新)은 존속기간 15년(서기 8∼23년)의 단명왕조(短命王朝)로 끝나고, 光武帝 劉秀(광무제 유수)가 서기 25년 漢을 부흥시킨다. 역사에서는 왕망의 단명왕조 新(신)을 사이에 놓고 전한(前漢)과 후한(後漢)이라 구분한다.



이런 왕조 교체기에 김일제의 후손들은 역사의 줄을 잘못 섰다. 김일제의 증손자인 당(當)의 어머니 남대부인(南大夫人)의 언니가 바로 왕망의 부인이었다. 當에게 왕망은 이모부이다. 왕망의 재위 시기에 김일제의 후손(김씨)들이 상당히 득세했던 것 같다.


그러나 왕망이 멸망하자, 김씨들은 필사의 탈출을 감행할 수밖에 없었다. 오늘날, 중국의 요서(遼西)와 요동(遼東), 한반도의 서북지방과 김해(金海), 바다 건너 제주도와 일본 규슈&#8231 오키나와에 왕망시대의 화폐가 출토되고 있는 것은 김일제 후손의 해외 망명과 무관하지 않은 것으로 보여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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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적석목곽분, 그리고 금관과 뿔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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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릉의 비문(碑文)만으로 신라김씨의 출자(出自)를 단정하는 것은 매우 위험하다. 그러나 신라김씨가 유목기마민족과 친연성(親緣性)이 깊다는 증거는 적지 않다. 경주 대릉원(大陵園)의 적석목곽분(積石木槨墳: 돌무지덧널무덤)은 북방 유목기마민족의 묘제(墓制)와 동일하다. 또 거기서 나온 수목형 금관(樹木形 金冠) 역시 유목기마민족의 신앙과 사상에서 만들어진 것들이다.


적석목곽분이란 시신을 木槨(목곽) 안에 넣고, 그 위를 냇돌로 덮은 다음에 封土(봉토), 즉흙을 높이 쌓아 올린 무덤이다. 나중에 목곽이 &#50026어 무너지면 냇돌이 무덤을 메워 도굴을 방지해 준다.


이 적석목곽분의 형식은 유라시아 북방 초원지대의 覇者(패자)였던 흉노의 무덤과 같다. 1973∼74년에 발굴된 천마총, 황남대총이 전형적인 적석목곽분이다. 장례식과 墓制(묘제)는 어느 민족이든지 잘 변하지 않으므로 민족의 계통을 연구하는 데 가장 중요한 단서이다.



경주의 적석목곽분은 4세기 초에 갑자기 나타났다. 이런 묘제를 가진 종족이 외부에서 침입했거나, 혁명적으로 得勢(득세)했다는 얘기다. 그 무덤 속에서 금관, 금허리띠, 금팔찌, 금목걸이 등 많은 금세공품들이 쏟어져 나왔다. 그 디자인도 북방 유목기마민족의 특징을 띠고 있다.


경주 천마총 안에 들어가 보면 무덤의 주인공이 금관, 금팔찌, 금귀고리, 금허리띠, 금신발 등 온통 금장식품를 온몸에 뒤집어쓴 것 같은 인상을 받는다. 여기 누워 있는 사람이 과연 누구인가, 의아할 정도다.



한민족(韓民族)이 단일민족이란 것은 허구(虛構)이다. 陸接(육접)한 대륙에서 내려온 북방계와 배를 타고 바다를 건너온 남방계가 섞여 있다. 또 북방계라고 해서 모두 같은 계통이 아니다. 고구려와 백제의 왕가는 동북아시아의 명문 扶餘(부여)에서 갈라져 나온 것은 사서에 잘 기록되어 있다. 부여는 반목반농(半牧半農)의 나라였다.


&lt&lt사진---국보 제91호 도제 기마인물상 &gt&gt


그러나 신라(경주)김씨와 가야(김해)김씨는 부여계(夫餘系)가 아니다. 그들이 순수 유목기마민족이라는 사실은 그들이 남긴 유물을 통해서도 확인할 수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樹木形(수목형) 금관, 그리고 짐승 뿔로 만든 각배(角杯)이다. 각배는 기마민족의 휴대용 뿔잔이다.


우리 국보 제91호로 지정된 경주 출토의 도제(陶製) 기마인물상도 주목된다. 말을 탄 무사는 위풍당당하게 전방을 응시하고 있는데, 그의 앞&#8231 뒷머리는 편두(偏頭)이다. 편두라는 것은 투구를 쓰기에 좋도록 어릴 적에 돌로 이마 뒤통수를 눌러 납작해진 머리를 말한다. 군대 갔다 온 남자라면 체험했겠지만, 앞이마나 뒤통수가 튀어나온 병사가 철모를 쓰면 곧잘 벗겨진다.


국보 제91호의 기마무사가 탄 말의 뒷 잔등에는 동복(銅&#37713)이 실려 있다. 동복이란 이동이 잦은 유목기마민족의 휴대용 청동제(靑銅製) 솥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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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국보 제275호로 지정된 가야(김해 출토)의 기마인물형 토기는 말에까지 갑옷을 입힌 무사가 오른손에는 창을, 왼손에는 방패를 들고 있는데, 말 잔등에 두 개의 대형 각배(角杯), 즉 휴대용 뿔잔을 세워둔 모습이다.


&lt&lt사진--국보 제275호 기마인물형 토기&gt&gt



어떤 사람들은, 문무대왕의 능비에서 투후의 자손 운운한 것이 사대주의의 발로라고 꼬집는다. 이건 어림도 없는 소리이다. 백제&#8231 고구려의 멸망 후 문무왕은 전후(戰後) 처리문제를 놓고 당시의 세계제국 당과 사생결단의 7년 전쟁을 감행해 승리한 자주정신의 화신(化身)이다.


문무왕이 중국을 향한 사대주의자였다면, 굳이 그의 선조를 흉노 출신인 투후(&#31226侯)라고 밝히지도 않았을 터이다. 흉노(匈奴)라는 글자부터 흉측하다. 漢字(한자) 그대로 풀이하면 떠들썩할 흉(匈), 종놈 노(奴)이다.


중국 사람은 자기 주변 민족들을 모두 오랑캐로 경멸했지만, 특히 흉노에게는 유별나게 원한의 이빨[齒]를 갈았던 것 같다. 다만, 흉노족에게는 자기의 고유문자가 없었고, 기록도 남기지 않아, 한족(漢族)이 남긴 사서(史書)에 의해 이토록 일방적으로 민족적 수모를 받았던 것이다.


흉노족은 아버지나 형제가 죽으면 그 계모나 형수 또는 제수를 처로 삼는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사마천(司馬遷)이 지은 &lt&lt史記&#8231 사기&gt&gt의 흉노 傳에는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lt부자, 형제가 죽으면 그 아내를 데려다가 처로 삼는 것은 종성(種姓)을 잃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흉노는 비록 문란하기는 하나 반드시 동종(同宗)의 종족(種族)을 세운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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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풍(婚風)에 관한 한 흉노와 신라김씨는 매우 유사하다. 다음은 &lt&lt삼국사기&gt&gt 奈勿尼師今(내물이사금) 원년 (356)의 기록된 저자 金富軾(김부식)의 말이다.



&lt 신라는 同姓(동성)뿐만 아니라 조카나 고종&#8231 이종 누이도 맞아들여 아내로 삼았다. 비록 외국의 풍속이 각기 다르다 하나 중국의 예법으로써 책한다면 크게 어긋난 일이다. 흉노가 어미와 상간(相姦)하고 자식과도 상간함과 같은 것은 이보다 더 심한 것이라 하겠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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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학자 관료다운 논평이긴 하지만, 김부식은 몇 가지 간과한 대목이 있다. 그것은 신라김씨가 흉노족의 왕자 김일제와 친연성(親緣性)이 매우 깊다는 점, 그리고 비록 흉노족이라 할지라도 생모(生母)와 친누이는 취(娶)하지 않았다는 점이다.


또 한 가지 유의할 점이 있다.


생존조건이 농경사회보다 열악한 북방 스텝(Steppe&#8231 초원) 지대에서 지아비를 잃어 의지할 데가 없는 계모나 형제의 처를 娶하는 것이 오히려 인도적(人道的)이라는 점이다. 스텝지역에는 법이 갖추어져 있지 않았고, 이동 생활 중 어느 때건 약자를 습격하는 악한과 조우할 가능성이 높았기 때문이다. 婚風(혼풍)은 사회경제적 조건에 따라 변화하게 마련인 것이다.



신라김씨와 親緣性 깊은 흉노는 누구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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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국 왕의 두개골을 술잔으로 애용한 흉노 선우



사실, 흉노는 몽골 고원(高原)을 처음으로 통일한 데 이어 아시아 최강의 大제국을 이룬 유목기마민족이다. 흉노제국을 건설한 대선우 모돈(冒頓)은 태자 시절에 아버지 두만(頭曼) 선우를 射殺(사살)하고, 선우의 지위를 탈취했다. 이 살부(殺父)의 배경과 유목제국의 건설과정을 보면 살벌&#8231 흉맹한 흉노인의 모습을 느낄 수 있다. 다음은 사마천(司馬遷)의 &#10218史記&#8231 사기&#10219에 나오는 일화들이다.


두만은 젊은 후처(後妻)가 낳은 어린 아들을 태자로 삼으려고, 甘肅省(감숙겅) 일대의 유목 강국 월지국(月氏國)에 태자 모돈을 인질로 보내놓고, 느닷없이 월지국에 대해 공격을 가했다. 이는 자신의 태자 모돈을 월지 王의 힘을 빌려 죽이려는 흉계(凶計)였다.


위기일발! 그러나 모돈은 월지국의 준마(駿馬)를 훔쳐 타고 탈출하여 흉노로 되돌아왔다. 두만은 그의 노림수가 빗나갔지만, 자기 아들 모돈의 용맹을 인정해 1만기를 거느리는 왕장(王將)으로 임명했다.


왕장이 된 모돈은 부하들에게 맹렬히 기사(騎射) 훈련을 시켰다. 그러던 어는 날, 직속 부하들에게 이렇게 명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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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두 잘 들엇! 내가 명적(鳴鏑: 우는 소리를 내며 날아가는 신호용 화살)을 쏘면 너희들은 명적이 날아가는 곳을 향해 일제히 화살을 날려라. 따르지 않는 자는 목을 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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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명령을 내리고 사냥에 나선 날, 모돈은 자기 애마(愛馬)를 향해 명적을 날렸다. 그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던 부하들도 있었다. 모돈은 그들의 목을 용서 없이 벴다. 다음 사냥에서는 자신의 애첩, 그 다음 사냥에선 두만 선우의 애마(愛馬)에 명적을 쏘았고, 머뭇거리는 부하들의 목은 모두 달아났다.


이런 냉혹한 훈련을 거듭하던 어느 날, 모돈은 자기 아버지 두만 선우를 따라 사냥에 나섰다. 모돈은 사냥 중에 갑자기 아버지 두만 선우를 겨냥해 명적을 날렸다. 과연, 부하들은 명적이 나는 방향을 향해 모두 화살을 쏘아 두만 선우를 사살했다. 이어 모돈은 계모와 이복동생, 그리고 복종하지 않는 중신(重臣)들을 모조리 참살하고 스스로 선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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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돈의 쿠데타에 대한 &#10218史記&#8228 사기&#10219의 기록은 설화적인 粉飾(분식)이 더러 느껴지기는 하지만, 흉노가 선우 계승 문제로 너무나 자주 골육상쟁(骨肉相爭)을 벌인 것은 확실하다. 다음 일화는 더욱 흥미 있는 &#10218史記&#10219의 기록이다.



모돈의 찬탈 관련 정보는 즉각 동호왕(東胡王)에게 전해졌다. 동호라면 대흥안령산맥 동쪽 에 웅거한 유목강국이었다. 동호왕은 모돈 선우를 얕보고 모돈의 애마(愛馬), 그 다음엔 애첩(愛妾)을 달라고 잇달아 요구했다. 모돈은 요구한대로 모두 바쳤다.


잔득 교만해진 동호왕은 어느 날 모돈 선우에게 영토 할양을 요구했다. 영토라지만 국경지대에 버려진 황무지였다. 모돈 선우의 부하들 중 몇몇은 “그까짓 황무지라면 동호왕에게 넘겨주어도 큰 지장은 없다”라는 견해를 밝혔다. 이에 발끈한 모돈은 영토할양을 건의한 부하들의 목을 치고 기습 공격으로 일거에 동호를 멸망시켰다.


승세를 탄 모돈 선우는 이번에는 기련산맥 일대에 웅거한 월지국(月氏國)을 정복하고, 그 왕의 두개골을 술잔으로 사용했다. 2대 강국을 제압한 모돈은 남쪽 오르도스에서 유목하던 누번(樓煩)과 백양(白羊) 등의 부족을 병합하고, 정령(丁零)&#8228 견곤(堅昆) 등의 천산산맥 북쪽 부족을 복속시켜 초원(草原)의 최강자가 되었다.



흉노 선우 모돈에게 성희롱을 당한 漢高祖 劉邦의 황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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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침, 중국에서는 한왕(漢王) 유방(劉邦)이 초패왕 항우(項羽)와의 패권전에서 승리해 중국 을 통일했다. 그 위세가 하늘을 찌르던 모돈과 유방―. 초원&#8228 농경 지대가 각각 배출한 두 영걸이 전장에서 만나 누가 센지 겨루는 것은 극히 자연스런 귀결이었다.


40만 대군을 거느린 漢高祖(한고조) 유방은 선두부대 10만을 이끌고, 먼저 평성(平城: 지금의 산서성 大同)으로 북상했다. 이때 모돈 선우도 정병 40만을 이끌고 남하해, 두 영웅은 지금의 대동(大同) 벌판에서 일전을 벌였다. 북방 초원(草原)의 최강자와 남방 농업지대의 최강자 사이에 전개된 결승전이었다.



흉노의 전법은 참으로 교묘했다. 모돈 선우는 짐짓 약세(弱勢)를 보이며 슬슬 물러나, 한군(漢軍)을 홈그라운드인 북방 초원으로 유인하는 작전을 구사했다. 정예를 후방에 감춰 두고, 허약한 병사와 비루먹은 말들을 앞에 내세웠던 것이다. 평성(平城)으로 북상한 한고조가 걸려들었다.


&lt&lt필자의 조갑제닷컴 사진--한고조가 포위된 대동의 백등산&gt&gt



추격을 너무 서둔 나머지 漢軍(한군)의 대열이 길게 늘어져 후속 부대 30만은 훨씬 후방에 처져 있었다. 모돈 선우는 이것을 노려 정예 기병 40만을 몰아 한고조가 이끈 선두부대 10만을 평성 동북쪽 백등산(白登山)에 몰아넣고 포위했다. 한고조는 7일간 후방의 本隊(본대)와 차단된 채 전멸의 위기상황에 처했다.


漢고조는 아무리 포위망에 뚫으려 해도 뚫을 수가 없었다. 더욱이 추운 겨울이어서 한나라 병사 중 20%가 동상(凍傷)에 걸려 손가락 마디가 떨어져나가는 고통을 겪었다. 반면 흉노의 기병은 추위에 익숙해 이렇다 할 피해가 없었다.


궁지에 몰린 한고조는 謀士 진평(陳平)의 계교를 구사하기로 했다. 진중(陣中)의 종군화공들에게 미인화를 그리게 하고, 그 미인화들과 후한 뇌물을 지닌 밀사(密使)를 모돈 선우의 알씨(閼氏: 선우의 처)에게 가만히 보냈다.


흉노의 관습이지만, 선우의 알씨는 정치&#8231 군사에 상당한 영향력을 행사했다. 전쟁에 종군하다가 선우 유고시(有故時)에는 직접 부대를 지휘하기도 했다. 이런 기마 민족의 우먼 파워는 후대에도 그대로 계승되었다. 예컨대, 나당전쟁 당시에 임진강 계선까지 남하했던 말갈 출신 당군 장수 이근행(李謹行)의 처 유(劉)씨는 때때로 이근행을 대신해 실병(實兵)을 지휘했다.


어떻든 이 때 漢의 사자가 알씨에게 “지금 漢나라 황제는 곤경에 처하여, 이 미인도(美人圖)의 미인들을 모두 선우께 바치고 화해(和解)를 청하고자 하십니다”라고 속삭였다. 알씨는 이런 미인도의 여인들이 등장하면 대번에 선우의 총애를 빼앗길까 두려웠다.


효과는 즉각 나타났다. 알씨는 모돈 선우에게 진언하기를, “설령 이 싸움에 이겨 漢나라의 땅을 손에 넣는다고 해도 거기서 살지는 못할 것입니다 ”라고 하면서 “두 임금이 다 하늘의 가호를 받고 있는데, 굳이 서로가 괴롭힐 필요까지야 없는 것 아닙니까?”라고 철군을 설득했다. 사실, 순수 유목기마민족인 흉노는 원래부터 농경지역에 대한 영토적 관심은 없었고, 약탈과 진상품 수탈이 군사활동의 제1 목표였다.


마침, 이때 모돈 선우는 그에게 항복&#8231 합류하기로 되어 있던 한왕 신(韓王 信: 초한전쟁 당시 漢軍의 총대장 韓信과는 다른 인물로서 유방의 사위임)의 휘하 장수 왕황(王黃)과 조리(趙利)가 기일이 지나도 나타나지 않자, 혹시 그들이 詐降計(사항계: 거짓 항복 책략)를 구사하는 것 아닌가 하고 의심했다. 그래서 알씨의 건의를 받아들여 포위의 일각을 풀었다.


한고조는 재빨리 탈출하여 후방의 대군과 합류했다.


이에 모돈 선우는 병력을 이끌고 북으로 회군했고, 한고조도 長安(장안)으로 돌아왔다. 한고조는 당초 약속대로 사자 유경(劉敬)을 모돈 선우에게 파견하여 황실의 공주(公主)와 비단&#8231 곡물&#8231 누룩 등 막대한 진상품을 바치고 흉노와 휴전협정을 맺었다(BC 198년). 이후 약 70년간 東아시아의 패권국은 한(漢)이 아니라 흉노 선우국이었다.


한고조가 죽은 후 漢의 실질적 통치자가 된 여태후(呂太后)는 모돈 선우에게 심한 성(性)희롱을 당했다. 그때 모돈 선우가 呂태후에게 보낸 편지의 골자는 다음과 같다.



&lt …고독에 번민하고 있는 나 모돈 선우는 늪지[子宮?]에서 태어나 초원에서 자랐다. 이따금 국경을 넘어 중화(中華)의 땅에서 노닐기를 원하노라. 지금 폐하(呂태후)는 홀몸, 나 또한 홀몸이라, 우리 두 임금 모두가 쓸쓸하다. 원컨대 내가 가진 것으로 폐하의 빈 곳을 채움이 어떠하리.&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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원래, 흉노는 준마(駿馬)에 올라 초원을 달리는 것과 미녀의 몸 위에 올라 펌핑(pumping)하는 것을 남자의 양대(兩大) 즐거움으로 삼는 야성적인 종족이었다. 그러나 이때 呂태후는 나이 칠순, 이미 여성으로서의 용색(容色)을 잃고 있었다. 그런 만큼 모돈 선우의 편지는 연서(戀書)가 아니라 능멸의 편지였다. 이에 발끈한 呂태후는 흉노를 토벌하려고 여러 장수들을 모아 개전(開戰) 여부를 물었다. 상장군 번쾌(樊&#22130)가 먼저 나서 말했다.



“원컨대 신(臣)이 10만의 군사를 얻어 흉노 땅을 휩쓸고 오겠습니다!”


여러 장수들은 呂태후가 무서워 감히 반대 의견을 밝히지도 못하고 머뭇거릴 뿐이었다. 이때, 낭중(郎中)으로 있던 계포(季布)가 앞으로 나와 직언을 했다.


계포라면 초패왕 항우 휘하의 맹장이었으나 항우의 패사(敗死) 후에 도주해 이름을 감추고, 남의 집에서 종살이를 했는데, 그의 인품을 평가한 한고조 유방에게 특별사면을 받고, 한나라의 신하가 된 인물이었다. 季布一諾(개포일락)이라는 四字成語(4자성어)가 있는데, 개포가 한번 승락을 하면 하늘이 두 쪽 나도 지킨다는 뜻이다. 그런 계포가 말했다.



“일찍이 고조께서 40만 대군을 거느리고 가서도 백등산에서 곤욕을 당하셨습니다. 그때 번쾌는 상장군. 그런데 지금 번쾌가 10만의 군사로 흉노를 휩쓸 수 있겠습니까? 전쟁의 상처가 아직 아물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번쾌가 망녕된 말로 아첨하여 천하를 요동시키려 합니다. 번쾌의 머리를 베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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번쾌라면 呂태후에게는 친정 여동생의 남편이다. 그러나 냉정히 판단할 때 아직 흉노와 싸울 시기는 아니었다. 여태후도 이 점을 깨닫고, 더 이상 흉노 정벌을 거론하지 않고, 계속 화친을 추진하면서 다음 내용의 답서를 모돈 선우에게 보냈다.



“소첩(小妾)의 나이 이미 칠순, 병이 들어 大선우를 모실 수 없어 송구하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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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의 조상 김일제의 고향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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흉노 혼야왕의 본거지 언지산(焉支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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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조갑제닷컴에 정순태의 컬러 사진&gt&gt)


필자가 하서주랑(河西走廊) 답사를 마치고 감숙성(甘肅省)을 떠난 지 2주 후의 일이지만, 2007년 4월26일의 감숙성에서는 ‘史上 최악의 황사’ 때문에 사망자가 3명이나 발생했다는 토픽 뉴스가 전해졌다. 그러나 2010년 4월12일의 하서주랑의 하늘은 무슨 동화(童話)의 세계처럼 먼지 한 점 없는 블루였다.


해발 4000∼5000m의 준봉들이 이어지는 기련산맥은 간밤에 내린 눈에 덮혀 온통 은(銀)세계를 이루었고, 새하얀 구름은 높은 봉우리를 넘을 수 없어 산허리에 걸려 있었다. 하서주랑은 해발 3000m가 넘는 구간의 연속이다. 구름은 우리의 발 아래에서 뭉게뭉게 피어났다. 일행 중 누군가가 “구름 위에서 노는 우리야말로 진짜 운상인(雲上人), 바로 신선(神仙)들이 아냐!”라고 중얼거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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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 국보기행 월간 2002년 4월호 328쪽 사진--국보 제207호 천마도 말다래(障泥). 자작나무 껍질로 만든 말다래에 하늘을 나는 백마가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다.&gt&gt


그 순간, 경주 대능원(大陵園)의 155호 고분(天馬&#20898&#8231 천마총)에서 출토된 천마도(天馬圖)는 상상화가 아니라 사실화라고 느꼈다. 천마총의 껴묻거리(副葬品&#8231 부장품)로서 국보 제207호인 천마도 말다래[障泥&#8231 장니]―즉 자작나무의 껍질로 만든 말다래에는 구름을 밟고 달리는 백마가 역동적으로 그려져 있다. 말다래는 말이 질주할 때 튀어오르게 마련인 진흙 같은 것이 말의 배나 허벅지에 묻지 않도록 차단하는 말갖춤새(馬具&#8231 마구)이다.



하늘은 파랗다 못해 투명에 가까운 블루였다. 동서로 연결된 하서주랑(河西走廊)의 왼쪽은 기련산맥. 그 규모는 길이 800km, 폭 300km. 그 오른쪽은 폭이 좁은 초원, 초원 너머로는 大사막이다. 그 사이를 뚫고 하서주랑은 달린다. 이날 우리는 장액→가욕관의 260km를 가슴을 벌렁거리며 달렸다.


기원전(BC) 121년 봄, 소년장수 곽거병(&#38669去病: 衛황후와 대장군 衛靑의 생질)은 농서(&#38580西: 감숙성 남부의 임조)에서 정예 기병을 이끌고 1000리를 질주하여 흉노 혼야왕(渾邪王)의 본거지인 언지산(焉支山)을 강타했다.


이때 곽거병은 혼야왕과 연합하기 위해 언지산에 와 있던 흉노 휴저왕(休屠王: 김일제의 아버지)의 제천금인(祭天金人)을 전리품으로 노획하여 유별나게 호기심 강한 漢무제에게 바쳤다. 屠는 죽인다는 뜻일 경우에‘도’로 읽지만, 고유명사일 경우 ‘저’로 읽는다. 제천금인은 흉노의 휴저족이 하늘에 제사를 지낼 때 모시는 금제(金製)의 신인상(神人像)이다. 이때 곽거병 군단은 흉노의 折蘭王(절란왕), 노후왕을 죽이고, 혼야왕의 왕자를 사로잡고, 8960명의 목을 벴다.


BC 121년 여름, 곽거병(藿去病)은 北地郡에서 흉노병보다 더 빠른 정예기병을 이끌고 출발해 텡케르(騰格里)사막과 바딘지린(巴丹吉林)사막을 뚫고 居延澤(거연택)에서 잠시 휴식한 후 弱水(약수)를 따라 남하하여 祿福(녹복: 후일의 酒泉)을 거쳐 흉노의 집결지인 기련산을 강타했다. 이때 곽거병은 참수 3만여 급, 5인의 흉노王將 포획 등의 전과를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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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C 121년, 이 한 해에 곽거병은 무려 세 번이나 출정했다. 이 해 봄&#8231 여름의 출정은 앞에서 썼다. 세 번째 출정은 늦가을인 음력 9월에 전개되었다.


흉노의 이치사(伊稚斜) 선우는 그의 휘하 왕장(王將)들인 혼야왕(渾耶王)과 휴저왕(休屠王)이 거듭 패전하여 수만의 병력을 잃은 것에 격노해 두 왕장을 선우정(單于庭: 초원의 텐트式 선우 궁전)으로 소환했다. 출두하면 패전의 책임을 지고 목이 달아난다―이렇게 생각한 혼야왕은 휴저왕에게 함께 漢나라에 항복하자고 설득하는 한편으로 한(漢)의 국경 수비대에 급사(急使)를 날려 항복의 뜻을 통고했다.


이것 혹시 흉노의 사항계(詐降計)가 아닐까? 헷갈렸던 국경수비대장은 한무제에게 비마(飛馬)를 날렸다.


한무제는 즉각 곽거병이 지휘하는 최정예 기병부대를 급파했다. 막상, 곽거병의 기병부대가 닥아오자, 휴저왕은 후회했다. 혼야왕이 주저하던 휴저왕을 살해했다. 이에 휴저왕의 부하들은 동요했다. 이때, 곽거병 부대가 언지산에 뛰어들어 반항하는 흉노병 8000 명을 베고, 4만여 명으로부터 항복을 받아내 長安으로 호송했다.


장액 톨게이트를 통해 G-312 고속도로로 진입해 66km를 동진하다가 산단(山丹)로 빠져나와 좁은 지방도로 접어들었다. 목표는 언지산(焉支山). 언지산은 흉노 혼야왕의 본거지인 동시에 문무왕의 조상 휴저왕이 살해당한 곳이다.


산단에서 좁은 강줄기를 따라가다 보면 삼거리. 삼거리에서 왼쪽 길로 접어들면 대마영(大馬營)이란 목장 마을이 나온다. 대마영에서 10여km 동진하면 ‘焉支山’(언지산)라고 쓴 간판을 단 큰 대문이 길을 막고 있다. 중국 오지에서는 입장료를 내야 이런 사설(私設) 대문을 열어주는 곳이 더러 있다.


사설 대문을 통과, 계속 산길을 달려 산 하나를 넘어가니 큰 저수지가 나오고, 그 너머로 넓은 초원이 펼쳐져 있다. 누가 보아도 유목의 적지(適地)이다. 그곳에서 다시 산길을 돌아 좀 올라가니 정상이 편평하고 사방을 경계하기 좋은 瞰制高地(감제고지)다. 지형으로 미루어보아 현재 도교(道敎)사원이 들어서 있는 곳에 혼야왕의 사령부가 위치했던 듯하다.


이곳에서 생포된 흉노족 중에는 휴저왕의 閼氏(알씨: 부인), 휴저왕의 태자 일제(日&#30974), 일제의 동생 륜(侖) 등 세 모자(母子)가 섞여 있었다. 언지산을 답사한 다음에 다시 50여 km의 지방도로를 되돌아나와 다시 산단 톨게이트에 진입해 다시 하서주랑을 東進(동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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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威 제1의 역사인물은 ‘신라김씨의 조상’ 김일제(金日&#30974)



산단IC를 통과한 후 200여 km를 달려 하서주랑의 맨 동쪽 오아시스 도시이며, 휴저왕의 본거지였던 무위(武威)에 도착했다. 난주(蘭州)대학교 발간의 &#10218西部 明珠―凉州&#10219에 의하면 수나라 때 凉州(양주)의 인구는 이미 2만여 호에 달했다. 수-당 시기의 凉州(양주) 지금의 武威다.


중심가 로터리에는 무위市 뇌대(雷臺)에서 발굴된 동분마(銅奔馬)를 크게 확대한 조형물이 높이 세워져 있다. &lt&lt필자의 닷컴 사진&#8212무위 중심가 로터리에 세워진 천마의 조형물&gt&gt 이 동분마는 현재 中國관광의 심벌 마크가 되어 있다.


중국인들은 동분마의 모습을 마답비연(馬踏飛燕)이라고 표현한다. 달리는 천마(天馬)의 속도가 얼마나 빠른지, 하늘을 나는 제비의 등을 밟고 달린다는 것이다. 제비의 평균 시속은 200km, 바로 고속열차의 속력이다. 천마는 그보다 더 빠르다는 것이다.


하서주랑의 제1번 오아시스의 밤은 길손의 마음을 설레게 한다. 재래시장 안 노천식당에서 羊고기에 백주(白酒)를 곁들인 저녁을 먹으면서 추파를 던지는 주모(酒母)와 회롱거리느라고 아차! 찾아가야 할 곳을 놓치는 실수할 뻔했다.


서둘러 문 닫기 직전의 서점에 들러 &#10218武威歷史人物&#8228 무위역사인물&#10219 등 책 몇 권을 사들고 숙소인 천마빈관(天馬賓館)으로 돌아왔다. 우선, 이틀만에 샤워를 하면서 사막의 모래를 씻어냈다. 이어 &#10218무위역사인물&#10219을 펼쳐보았는데, 그 첫 장(章)에 등장하는 인물이 김일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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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재의 무위시 인구는 187만 명, 면적 3만3250㎢이며, 1區(구)와 3縣(현)을 관할 하에 두고 있다. 중국사회과학원 발간 &#10218중국역사지도집&#10219에 의하면 전한(前漢) 시기 凉州刺史府(양주자사부)를 보면 지금의 무위시 관할 민근현(民勤縣) 지역에는 休屠城(휴저성)&#8231 休屠澤(휴저택) 등 휴저왕과 관련한 지역이 기록되어 있다. 武威(무위)라는 지명은 곽거병이 휴저왕의 본거지를 정복한 후 그의 무공을 찬양하는 차원에서 명명되었다고 한다. 武威의 본디 뜻은 란 “무력의 위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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古지도에 기록된 휴저성(休屠城)과 休屠澤(휴저택)을


찾아 모래바람 속을 헤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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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 닷컴사진--古지도에 표시된 무위 &gt&gt


4월14일, 오전 8시, 우리는 지프를 타고 무위시 중심가로부터 석양대하(石羊大河)를 따라 古지도에 표시된 휴저성(休屠城)&#8231 휴저택(休屠澤)을 찾아나섰다. 100여리 쯤 북상하여 물새가 나르는 홍애산수고(紅厓山水庫)에 이르렀다. 수고(水庫)는 대형 저수지의 중국식 표현이다. 여기서 다시 100리 쯤 북상하여 모래바람이 거세게 부는 민근현 중심가 음식점에서 점심을 해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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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 닷컴의 필자 사진--휴저성의 폐허 &gt&gt


민근현 중심가에서 대서하(大西河)를 따라 30리 쯤 북상하다가 좌회전, 샛길로 접어들어 20여분쯤 달려 사패진 삼차촌(四&#22761鎭 三&#23700村)에 이르렀다. 넓은 옥수수밭과 밀밭 곳곳에 토성(土城)의 폐허가 남아 있다.


이곳 촌로는 이 마을에 휴저왕과 김일제에 더하여 한무제와 &#10218三國志演義&#10219의 최고 명장 관우(關羽)까지 한 자리에 모신 사당이 있었는데, 문화혁명 때 홍위병(紅衛兵)에 의해 파괴되었다고 말했다.


그는 옛 사당 자리 건너편에 자라고 있는 높이 20m 안팎의 백양(白楊)나무들을 가리키며 “여기선 이 나무를 휴저목(休屠木)이 부른다”고 했다. 백양나무는 오아시스에서 제일 많은 수종(樹種)이다.


우리 일행 넷 가운데 셋이 金씨다. 오지여행가들인 김석규&#8228 김세환&#8228 김정석씨 등 3金이 휴저성의 폐허 앞에 소주와 꼬추장&#8231 김치 등으로 이뤄진 간소한 제상(祭床)을 차려놓고 넙죽 엎드려 큰절을 올렸다. 조선족 통역도 金씨여서, 큰 절을 올린 사람은 4金으로 늘어났다. KIST의 이종호 박사는 “내 마누라도 金씨”라며 큰절 대열에 합류했다.


4金1李는 차례로 큰 절을 올리고, 폐허 주위에 제사 술을 뿌린 후 제상(祭床)의 음식을 조금 떼내 ‘고수레!’라고 외치며 사방으로 던졌다. 고수레는 필자의 집안에서도 성묘 때 거르지 않는 관습이다. 기록에 의하면 샤마니즘을 신봉한 흉노족도 우리와 마찬가지로 고수레를 했다. ‘제사’ 후 음복(飮福)을 할 때는 필자도 제례의 참관자로서 술 한 잔을 받았다.


우리는 삼차촌에서 다시 內몽골로 연결되는 대로로 되돌아 나와 휴저택을 찾기 위해 북상했다. 휴저택은 지금은 황사(黃砂)로 묻혀, 古지도상에만 표시되어 있는 호수이다.


지구의 사막화 현상은 매우 심각하다. 이번 답사여행을 떠나기 직전, 중앙아시아의 큰 호수 아랄海(해)의 위성사진이 언론에 보도되었는데, 이것도 과거의 5분의 1 규모에 불과한 초승달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사막에서 모래바람을 만나면 무섭다. 민근현 일대에도 모래바람이 얼굴을 따갑게 후려쳤다. 민근현은 보딘지린 사막과 텡케르 사막 사이에 낀 지역. 특별한 대책이 없는 한 머지않아 모래로 뒤덮힐 것으로 보인다. 석양하에서 갈라진 대서하를 따라 다시 100리즘 북상했지만, 사방이 모두 모래로 덮힌 땅이었다. 대동하(大東河) 쪽으로 횡단하다가 제법 큰 호수를 만났지만, 휴저택은 아니었다.


古지도를 보면 휴저택 바로 남쪽에 武威(무위)가 위치했고, 지금 武威市(무위시)의 도심 지역에는 姑臧(고장)이라고 표기되어 있다. 이는 사막화에 의해 무위의 중심부가 자꾸 남하해 왔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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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월간조선 2002년 3월호 341∼361페이지 다음 제목으로 전재하세요&gt&gt(좌담기사)


지구 반대편 정보까지도 알고 있었던


신라인의 국제감각이 삼국통일의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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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00년 전 신라김씨는 시베리아 자작나무 모양의 독창적 금관을 쓰고, 트라키아王이 선물한 黃金 칼을 찾으며, 西域産(서역산) 하얀 천마로 달리며, 하늘을 나는 새들을 숭배했다. 地中海 연안에서 제작된 예술적 유리병(오이노코에)에 담긴 포도주를 마시면서 페르시아 음악에 심취하기도 했던 그들. 東아시아 세계에서 유일하게 로마세계와 깊게 교류, 지구 반대편 문물과 思惟體系(사유체계)를 받아들인 신라인은 어떤 사상적 고향을 가진 종족인가? 우리 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할 수 있었던 노하우의 비밀을 추적한다.


좌담 참석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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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월간조선&gt 2002년 4월호 336∼344페이지 다음 제목으로 전재하세요(컬러 화보 있음)


智證 마립간―그의 무덤 천마총에 가면 한국고대사의 암호가 풀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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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마총은 陰莖(음경)의 길이가 30cm에 달했다는 신라 智證麻立干(지증마립간)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여기서는 세계적 문화재인 신라금관 중에서도 가장 화려한 4단짜리 금관을 비롯하여 1만5000여 점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출토유물을 보면 금관을 쓴 신라왕족은 金製 허리띠를 두르고 하얀 天馬를 탔으며, 페르시아 음악이 연주되는 가운데 로만 글라스에 담긴 포도주를 마셨다. 천마총에 가면 신라의 왕족은 유별나게 金을 사랑했던 북방기마민족의 후예로서 스텝로드(Steppe Road&#8231 草原의 길)를 통해 로마문화권과 깊은 교류관계를 가졌던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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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의 통일 완수에 이르는 東아시아정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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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공행상用 땅과 재물이 필요해 고구려 침략



그러면 이제는 나당전쟁에 이르기 전의 東아시아의 정세를 대충 짚어볼 차례이다. 617년, 태원유수(太原留守) 이연(李淵)이 거병하여 수(隋)의 국도 장안(長安)을 점령했다. 이때 수양제(隋煬帝)는 장안을 비우고 풍광 좋은 강도(江都: 지금의 강소성 揚州)로 남행해 주색잡기(酒色雜技)에 골몰하고 있었다. 611년 이후 3번이나 감행된 고구려 원정의 실패로 인한 민심 불안과 경제 파탄으로 전국 곳곳에 반란이 일어나자, 수양제는 통치에 자신감을 상실했던 것이다.


그러면 여기서 수나라가 왜 고구려 침략에 그렇게 집착했는지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589년, 수의 창업자인 문제 양견(文帝 楊堅)은 長江(장강) 남쪽의 진(陳)을 멸하고, 북남통일을 완수했다. 당연히 개국&#8231 통일 공신들에게 논공행상(論功行賞)을 해야 했지만, 江南의 땅을 전리품으로 공신들에게 나눠주면 350년만에 모처럼 이룬 통일을 해칠 우려가 있었다.


방법을 궁리한 끝에 그들 나름의 답이 나왔다. 동방에서 번영하고 있는 이민족의 나라 고구려를 정벌하면 논공행상에 필요한 토지와 금은보화를 확보할 수 있었다. 이것이 고구려 정벌의 제1 목적이었다.


이런 수나라 조정의 움직임을 간파한 고구려의 영양왕은 598년 말갈병 1만 명을 동원, 수나라의 군사거점인 요서(遼西)지방의 營州(영주: 지금의 요녕성 朝陽)에 일격을 가했다. 고구려군은 영주 총관 韋&#20914(위충)이 반격에 나서자 결전을 회피하고 퇴각했다. 고구려로서는 적의 전력을 탐색하는 威力偵察(위력정찰)을 감행했던 셈이다. 이에 수문제가 발끈했다.




598년 6월, 수문제는 30만 대군을 보내 고구려 침공을 개시했다. 그러나 다음 달인 7월, 수의 원정군은 요하(遼河)에서 대홍수를 만난 끝에 기아와 질병으로 큰 타격을 받고 퇴각했다.


뭔가 순조롭지 않을 때 고집 피우지 않고 물러날 줄 아는 것도 국가지도자의 큰 덕목(德目)이다. 수문제는 비록 공처가(恐妻家)이며 음험하고 인색하기도 했지만, 그의 치세(治世)는 부국(富國)의 성취로 높이 평가된다.


북남통일 후의 과제는 오랜 동란(動亂)에 의해 피폐해진 국력을 회복해 민심을 안정시키는 것이었다. 수문제는 새로운 율령(律令)을 정하고 관제(官制)를 개혁해 백성의 요역(&#24493役)과 조세를 경감시켰다. 또 스스로 근검의 모범을 보여 국가의 창고마다 곡식과 재보(財寶)가 흘러넘쳤다.


이리하여 수문제의 즉위 당초 400만 호도 되지 않았던 수나라의 호수(戶數)가 20여년 후에는 800만 호를 넘어서게 되었다. 그런 文帝 楊堅(문제 양견)이 604년 7월에 급사한 후 양제(煬帝)의 시대로 접어들자 수나라는 급속히 패망의 길로 접어든다.


수양제는 즉위 전 형을 모함해 태자의 자리를 빼앗았으며, 병상의 아버지 文帝를 살해하고 즉위한 그날 밤 아버지의 애첩인 진(陳)부인을 품었던 폭군이었다. 그는 그 성격이 대단히 사치스러워 수문제가 축적해 놓은 財富(재부)를 배경으로 대운하&#8228 長城(장성) 개축 등의 토목공사를 잇달아 일으켜 백성들을 혹사했다.


서역 여러 나라의 국왕과 사신을 불러들여 진수성찬의 향락을 공짜로 베풀어 국위(國威)를 과시했다. 그러나 611년, 613년, 614년의 3회에 걸쳐 수백만 대군을 일으켜 고구려를 공격하다가 패전해 천하가 다시 시끄럽게 되었다.


618년 3월, 수양제는 친위대장 우문화급(宇文化及)의 쿠데타에 의해 강도(江都: 양주)의 행궁(行宮)에서 살해당했다. 이때 長安을 점거하고 있던 唐國公 李淵(당국공 이연)은 그가 옹립한 허수아비 황제 공제(恭帝: 양제의 孫子)를 죽이고, 당(唐)왕조를 열었다. 그가 唐고조이다.


당고조와 수양제는 이종사촌 간이다. 수양제의 어머니는 鮮卑族(선비족)의 명문인 독고신(獨孤信)의 제7녀였는데, 당고조 李淵(이연)의 어머니 역시 독고신의 제4녀였다. 독고신은 양견&#8231 이연처럼 선비족 왕조들인 서위(西魏)-북주(北周) 이래 대장군과 재상을 배출해 온 팔주국(八柱國) 가문 출신이다.


중국의 사서에서는 수와 당을 한족(漢族)왕조인 것처럼 얼버무리고 있지만, 이건 역사 왜곡이다. 수문제가 되는 양견은 선비족 왕조인 북주(北周)를 찬탈했다. 양견의 아버지 양충(楊忠)은 원래 선비족의 3자 복성(複姓)인 보륙여(普六茹)씨였다.


이연의 先代도 선비족 왕조인 西魏(서위)의 8주국(八柱國) 가문 중 하나로서 오르도스 북방 음산산맥(陰山山脈)의 요충지 무천진(武川鎭)의 군벌이었으며, 그들의 姓도 선비족의 복성인 대야(大野)씨였다.


선비족은 원래 흉노의 모돈 선우에게 멸망당한 동호(東胡)의 후예이다. 흉노가 전한(前漢) 말에 南흉노&#8231 北흉노로 분열하여 세력을 잃자, 선비족은 南&#8231 北 흉노 사이에 파고들어, 그 세력권이 동쪽으로 흥안령산맥(大興安嶺山脈), 서쪽으로는 지금의 감숙성(甘肅省)&#8231 청해성에 이르게 되었다. 그 선비족의 일파인 척발(拓跋)씨가 北중국에 기마민족 정복국가인 북위(北魏)를 세웠다.


南흉노는 전한(前漢) 말에 장성(長城) 안으로 이주해 후한(後漢) 및 삼국시대의 위(魏) 그리고 서진(西晉) 시대에 용병(傭兵)이 되었다. 4세기에 전개된 오호십육국(五胡十六國) 시대에는 5호(五胡)의 하나로서 전조(前趙) 등 여러 나라를 건설했다.


한편 몽골 고원(高原)에 남아 있던 北흉노는 後漢 그리고 후발(後發) 유목기마민족인 정령(丁零)과 선비족의 공격을 받고 멀리 유럽으로 이동했다. 이 흉노가 4세기에 이르러 로마 帝國을 공포의 도가니로 몰아넣으면서, 게르만族의 대이동을 촉발시킨 아틸라왕(王)의 훈族이라는 것은 거의 정설화되었다. 그렇다면 그 시절의 극동 정세는 어떠했을까?


고구려 남침 막기 위한 120년간의 나제 군사동맹



472년, 백제 개로왕(蓋鹵王)은 북위(北魏)의 효문제(孝文帝)에게 表文(표문)을 올려 고구려를 쳐달라고 호소했다. 그때 표문(表文)의 내용을 보면 매우 흥미롭다. 다음은 &#10218삼국사기&#10219개로왕 18년(472) 겨울 條의 기사 중 관련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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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저와 고구려는 조상이 모두 부여(扶餘) 출신이므로 先祖代(선조대)에는 고구려가 옛 정을 굳건히 존중하였는데, 그의 조상 쇠(釗: 고국원왕)가 경솔하게 우호 관계를 깨뜨리고, 직접 군사를 거느려 우리 국경을 침범하여 왔습니다. 우리 조상 수(須: 近仇首王)가 번개같이 달려가 기회를 타서 공격, 잠시 싸우다가 쇠(고국원왕)의 머리를 베어 효시하였습니다. 이로부터 감히 남쪽을 돌아보지 못하다가 풍(馮: 後燕의 왕)씨의 운수가 다하자, 그의 잔적들이 고구려로 도망해 온 이후로 추악한 무리(고구려)가 차츰 세력을 쌓아갔던 것입니다.


그리하여 그들은 결국 우리를 무시하고, 침략을 하고 있습니다. 원한을 맺고 전화(戰禍)가 이어진 지 30여년이 되었으니, 재정은 탕진되고, 힘은 고갈되어 나라(백제)가 점점 쇠약해 졌습니다. 만일 폐하의 인자한 생각이 먼 곳까지 빠짐없이 미친다면, 속히 장수를 보내 우리나라를 구해 주소서…. &gt



위에서 말한 쇠(釗)는 고구려 고국원왕(故國原王)이다. 수(須)는 백제 전성기를 열었던 근초고왕(近肖古王)의 아들 근구수왕(近仇首王)이다. 근초고왕은 재위 26년(371) 겨울에, 태자 須(수)와 함께 정예군 3만을 이끌고 고구려의 평양성을 공격했다. 이때 고구려 고국원왕이 필사적으로 항전하다가 백제군의 화살을 맞아 죽었다.


고국원왕의 손자인 광개토왕은 복수전을 전개했다. 즉위 이듬해(392년) 7월, 광개토왕은 병력 4만을 이끌고 백제를 공격해 북쪽 영토 10개 성을 빼앗았고, 동년 10월에는 백제의 요새 관미성(關彌城)을 공격, 20일 만에 함락시켰다. 관미성이라면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파주시 交河邑(교하읍) 오두산성 일대를 말한다.


또 위의 인용문에서 풍(馮)씨라 표현된 인물은 北중국의 최강국인 후위(後魏)에게 패망한 후 군사와 백성을 거느리고 고구려에 망명한 후연(後燕)의 황제 풍홍(馮弘)이다. 그러나 고구려의 장수왕은 풍홍을 박대했다. 이에 풍흥은 南朝의 宋(남조의 송)에게 의탁하려고 망명을 요청했고, 남조 宋의 사자가 풍홍을 맞이하러 고구려에 오자, 장수왕은 풍홍과 그 일족 10여 명을 처형했다.


당시, 백제를 위협하고 있던 고구려의 왕은 長壽王 高璉(장수왕 고련)이었다. 고구려가 장수왕 15년(427)에 국도를 압록강 북안의 국내성(國內城)으로부터 대동강변의 평양으로 옮기자, 백제와 신라는 잔뜩 긴장했다.


서수남진(西守南進), 즉 강국인 後魏(후위)와는 평화를 유지하면서, 백제와 신라를 먹기 위해 남진 정책을 추진하겠다는 것이었다. 이에 신라 눌지왕(訥祗王)과 백제 비유왕(毘有王)은 443년 고구려를 가상적국으로 하는 군사동맹을 체결했다. 이 나제동맹은 553년까지 120년간이나 지속되었다.


475년, 고구려 장수왕은 병력 3만을 이끌고 백제의 한성(漢城: 서울 송파구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함락시키고, 도주하는 백제 개로왕을 성 밖 송파에서 붙들어 지금의 워커힐 호텔 뒤에 위치한 아차산성 본진으로 끌고 가서 목을 베었다.


신라는 백제와의 군사동맹에 따라 구원병력 1만을 급파했지만, 고구려군은 이미 전승을 거두고 철수한 뒤였다. 개로왕의 동생이 웅진(熊津: 지금의 공주)으로 내려가 즉위했으니, 그가 백제 제22대 임금 文周王(문주왕: 재위 475∼477)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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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전투―참수당한 백제 성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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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기 554년의 관산성(管山城: 충남 옥천군) 전투는 삼국통일을 향한 신라의 스타트라인이었다. 이후 신라는 낙동강&#8231 한강 유역과 금강 상류 유역의 경제력을 얻었고, 중국과의 통로인 南陽灣(남양만: 경기도 화성시)의 당항성(黨項城)도 장악했다. 이제, 관산성 전투에 이르게 되는 과정을 조금 짚어볼 필요가 있다.


551년 1월, 백제 성왕(聖王)과 신라 진흥왕(眞興王)은 연합군을 편성해 고구려로부터 한강 유역을 탈취했다. 전후(戰後)처리에서 신라는 한강 상류(남한강)의 10개 군(郡)을 차지했고, 백제는 왕조 발상지인 한강 하류 6개 郡을 탈환해 개로왕의 敗死(패사: 475년) 이래 처음으로 고구려에 설욕했다.


그러면 백제와 신라의 한강 유역 회복과 진출은 어떻게 가능했을까? 그것은 고구려의 내우외환(內憂外患)을 효과적으로 활용한 결과였다. 고구려는 돌궐의 침입에 대비, 한강 이남의 병력을 만주의 신성(新城: 요녕성 무순) 방면으로 대거 이동&#8231 배치했다.


실제로 고구려군은 551년 만주의 백암성에서 돌궐의 침략군을 물리쳤다. 뿐만 아니라 양원왕(陽原王: 545-559) 시대의 고구려는 왕위 계승 문제 등과 관련하여 지배층 내부에 심각한 내분까지 빚어지고 있었다.


어떠한 군사강국도 국내 정정이 불안한 가운데 2정면(正面) 혹은 3정면 작전은 무리이다. 이때의 고구려도 돌궐의 남침 압력을 받는 상황에서 나-제 연합군의 협공을 받고, 이렇다 할 방어전 한번 제대로 치르지 못하고, 장수왕 이래 장악해온 한반도 중부 지역에 대한 패권을 상실하고 만다.


고구려가 북쪽으로 물러난 뒤 한강 상류지역은 신라, 그 하류 지역은 백제의 영토가 되었다. 그러나 강 하나의 유역을 사이좋게 나누어가진다는 것은 신라&#8231 백제라는 두 고대국가가 지닌 속성과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개념이었다. 더구나 백제가 탈환한 한강 하류 유역은 신라가 탈취한 한강 상류 지역보다 전략적&#8231 경제적 가치가 월등했다.


원래 고대국가는, 처음에는 사방 수십 리도 되지 않는 작은 성읍국가(城邑國家)에서 출발하여, 주변의 고만고만한 라이벌을 하나하나 제압 &#8231 흡수하여 영토를 넓혀가는 정복국가였다. 고구려&#8231 백제&#8231 신라의 발전과정이 모두 그러했다.


따라서 한강 유역의 헤게머니를 둘러싼 백제&#8231 신라의 결승전은 예정된 수순이었다. 백제 聖王(성왕)은 왜국에 불교를 전하는 등 외교적 노력으로 백제-왜 동맹을 굳히고 있었다.


서기 433년 이래 120년간 지속되어오던 신라-백제 동맹 관계를 먼저 결정적으로 깬 것은 신라였다. 그 무렵, 백제 성왕은 수세(守勢)에 몰린 고구려에 결정타를 가할 심산(心算)으로 북진을 신라 측에 제의하고 있었다. 그러나 진흥왕의 생각은 달랐다. 다음은 &#10218삼국유사&#10219의 관련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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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백제는 신라와 연합하여 고구려 정벌을 도모하였다. 그러나 진흥왕이 말하기를, “국가의 존망은 하늘에 달려 있다. 하늘이 고구려를 미워하지 않는다면, 우리가 어찌 그것을 바랄 수 있겠는가”라고 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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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진흥왕의 발언은 매우 정략적 레토릭이었다. 즉, 고려 변경의 실속 없는 땅 얼마를 더 탈취하기 보다는 백제가 고구려로부터 탈환한 한강 하류 유역이 목구멍에서 손이 나올 만큼 먹고 싶다는 말이었다.


진흥왕의 속셈이야 어떻든 위기에 몰린 고구려로서는 감지덕지(感之德之)할 수밖에 없었다. &#10218삼국유사&#10219에는 “고구려 사람들이 진흥왕의 말을 전해 듣고 감동해 (신라와) 화친을 맺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신라는 한강 하류 유역을 먹으려면 백제와의 전쟁이 불가피하다고 보고, 미리 고구려로부터 최소한 호의적(好意的) 중립을 확보해 놓았던 셈이다.


이런 상황에서 진흥왕 14년(553) 가을 7월, 신라군은 백제로부터 한강 하류 6개 군을 빼앗아 신주(新州)를 설치했다. 신주의 군주(軍主)에는 김무력(金武力)이 기용되었다. 軍主는 지방장관을 겸한 방면군사령관이었다.


여기서 역사 무대에 처음 등장하는 金武力(김무력)은 532년 신라에 병합된 금관가야(金官伽倻: 경남 김해시)의 마지막 왕 구형(仇衡)의 아들이며, 삼국통일의 원훈 김유신(金庾信)의 조부이다. 망국의 왕자 출신이면서도 전략적으로 매우 예민한 새 점령지의 군사 및 행정 지휘권을 장악했다는 점에 미루어 김무력은 한강 하류 유역의 공취(攻取)에 상당한 전공을 세운 것으로 짐작된다.


자기 왕국의 발상지를 고구려로부터 탈환했다가 신라에게 다시 횡탈당한 백제의 분노는 대단했을 것이다. 그런데도 성왕(聖王)은 그해 10월 왕자 여창(餘昌)을 장수로 삼아 신라가 아니라 고구려를 공격했다. 이때 전투 규모는 크지 않았지만, 결과는 무승부였다.


성왕이 신라에 즉각 응징하지 않은 이유는 확실치 않다. 다만, 경계심을 늦추지 않고 있는 적에 대한 공격은 하지하책(下之下策)이다. 어떻든 진흥왕 시대의 신라는 백제 단독으로는 이기기 어려운 전력을 보유했던 것 같다.


그로부터 3년 후인 556년의 일이지만, 진흥왕은 신라군을 이끌고 북진, 동해 연안의 안변(安邊)에 비열홀주(比列忽州)를 설치했다. 지금의 함흥평야를 차지하면서 마운령과 황초령에 순수비(巡狩碑)를 세웠던 것이다.



백제 성왕의 책략도 녹록치 않았다. &#10218삼국사기&#10219 성왕 31년(553) 겨울 10월 조를 보면 백제는 고구려 공격과 거의 동시에 자신의 딸을 진흥왕의 소비(小妃)로 시집 보내고 있다. 이와 같은 정략 결혼은 비수(匕首)를 등 뒤에 감춘 성왕의 위장 평화공세였다.


그동안 백제를 지원하기 위한 왜국의 원병과 전쟁 물자가 속속 내도했다. 신라에게 합병의 압력을 받고 있던 대가야(大伽倻: 경북 고령) 중심의 후기 가야연맹 국가들도 백제 진영에 가담했다. 백제-가야-왜 연합군이 결성되자, 왕자 餘昌(여창)을 장수로 삼아 회심의 신라 정벌에 나섰다.


그러나 백제로서는 불운했다. 원정군의 전선사령관인 여창(餘昌)이 陣中(진중)에서 갑자기 병을 얻었다. 백제의 불행은 여기서 그치지 않았다. 아들 여창의 급작스런 병을 걱정한 성왕이 步騎(보기) 50기만 거느리고 전선사령부가 설치된 관산성(管山城 충북 옥천)으로 달려가던 중 식장산(食藏山: 대전 동부) 기슭에서 신라의 복병에 걸려 포로가 된 후 참수되는 비극적 사태가 벌어지고 말았다. 식장산은 금산∼옥천 간 37번 국도를 달리다 옥천군 군서면 월전리(月田里) 서쪽의 높이 598m의 험산이다. 백제 중흥의 영주로서는 너무도 허망한 죽음이었다.


성왕의 목을 벤 인물은 신라의 삼년산성(三年山城: 충북 보은군)의 고간(高干: 신라 지방관등 제3위)인 도도(都刀)였다. 도도는 바로 新州(신주)의 軍主(군주)인 김무력 휘하의 비장이었다. 삼년산성은 3년에 걸쳐 축조했다고 해서 명명된 신라 서부 국경지대의 요충이었다. 이때의 상황에 대한 &#10218日本書紀&#8231 일본서기&#10219 欽明 15년(554) 12월 조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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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얼마 후 도도가 명왕(明王: 성왕)을 사로잡았다. 두 번 절하고 왕의 머리를 베려하니 명왕이 꾸짖어 가로되 “종놈이 감히 왕의 목을 베려 하느냐!”고 했다. 도도가 말하기를, “우리나라의 법은 맹세를 위배하면 왕이라도 종놈의 손에 죽습니다”라고 했다. 명왕이 탄식하여 가로되 “과인은 매양 너희 나라의 배신이 골수에 사무쳐왔다”하고 마침내 참(斬)을 당하였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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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벌어진 관산성 전투에서 보여준 김무력의 전공은 발군(拔群)이었다. 신라의 중앙군이 모두 패퇴한 상황에서 김무력 휘하 新州(신주)의 주병(州兵)은 좌평(佐平 백제 관등 제1위) 4인을 포함한 백제-가야-왜 연합군 2만9600명을 참살했다. 이때 백제군 전선사령관 여창은 한 가닥 혈로(血路)를 뚫고 겨우 전장에서 이탈할 수 있었다. 다음은 이어지는 &#10218일본서기&#10219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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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여창이 포위를 당하여 탈출할 도리가 없었다. 축자국조(筑紫國造)가 활을 쏘아 신라 기병 중 최강자를 떨어뜨리고, 이어 비 듯 연사(連射)하여, 포위군을 물리쳤으매, 여창과 장수들이 샛길로 도망쳐 나왔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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축자국조(筑紫國造)는 일본 규슈(九州) 쓰쿠시 지방의 구미노미얏고(國造), 즉 지금의 후쿠오카 지방의 호족이다. 이렇게 백제 성왕의 죽음에 관한 한 &#10218일본서기&#10219의 기록이 &#10218삼국사기&#10219보다 훨씬 소상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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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산성 전투에서 죽을 목숨을 건진 왕자 여창이 전사한 성왕을 승계하니, 그가 백제 25대 위덕왕(威德王)이다. 여기서 승세를 탄 신라군은 남진(南進)하여 지금의 금산&#8231 무주, 그리고 전주 東部까지 공취(攻取)하여 완산주(完山州)를 설치했다. 진흥왕 23년(562)에 이르러, 드디어 신라는 대가야를 멸하고, 가야연맹의 全 영토를 병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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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고구려&#8231 백제&#8231 왜국에게 왕따 당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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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진흥왕 시대의 잇단 전승으로 신라의 국력은 일단 비약적으로 커졌다. 신라는 한강 유역과 낙동강 유역(가야 故土)의 비옥한 토지를 판도에 넣어 경제력이 급성장했을 뿐만 아니라 당시 先進(선진) 문화의 중심부였던 중국 대륙과 직접 연결하는 황해직선항로의 요충인 당항성(黨項城: 경기도 화성시 남양만)을 확보했다. 이것이 바로 신라가 삼국통일로 가는 도약대가 되었다.


그러나 그로 인해 신라국가가 치러야 했던 대가도 국가의 존립이 위협받을 만큼 혹독했다. 그 후 100여 년간 신라는 고구려&#8231 백제&#8231 왜국 공동의 숙적이 되어 끊임없이 협공을 받아 수세(守勢)에 몰리고 만다. 낙동강&#8231 한강 유역의 확보로 인해 왜국&#8231 백제&#8231 고구려와 이해관계가 서로 충돌해 전선(戰線)이 확대되었고, 따라서 고구려&#8231 백제&#8231 왜에 대한 3정면(正面) 작전이 불가피해진 것이었다.


신라의 전통적 외교&#8228 안보 정책은 2대 1 전략이었다. 백제가 공세적일 때는 고구려의 지원을 받아 백제에 대항했고, 고구려의 남진세(南進勢)가 강력할 때는 백제와 동맹관계를 견지하면서, 죽령(竹嶺)과 조령(鳥嶺)의 국경을 굳게 지켰다. 이렇게 삼국간에 있어 힘의 균형은 오히려 후발국인 신라의 이니셔티브 아래 움직였던 것이다. 바로 이런 점에서 신라의 외교는 국력에 비해 탁월했다.


그러나 신라의 한강 하류 진출 이래 고구려와 백제는 신라를 ‘오드 맨 아웃’( Odd man out: 셋 중 하나를 따돌림) 게임의 술래 혹은 왕따의 대상물로 삼았다. 삼국간의 전선이 개이빨[犬牙]처럼 맞물린 상황 아래 신라가 1대 2 대결 또는 2정면 전쟁을 장기적으로 감당할 만한 국력에 이르지 못했음은 물론이다. 이런 판에 왜국은 자기 조상들의 연고지(緣故地)라고 믿었던 가야 여러 나라들을 하나하나 정복한 신라에 敵意(적의)를 갖고 신라의 뒤통수를 노렸다.


고구려&#8231 백제&#8231 왜국 간 3국 동맹은 고구려의 주도로 추진되었다. 중국대륙에 강력한 통일국가 수(隋)제국이 들어서자 그것과 국경을 맞댄 고구려로서는 만주 영토에 대한 압력의 해소가 시급했던 것이다. 598년, 고구려가 말갈병 1만 명을 이끌고 중국 동방정책의 최전선인 요서(遼西)지방의 영주(營州)를 침공했다.


국가의 생존을 위해 수와 동맹을 추구하는 신라를 고립시키려는 고구려의 이니셔티브에 백제는 처음엔 시큰둥했다. 백제로서는 신라&#8231 고구려 모두가 적국들이었고, 국가이익을 위해서는 상황에 따라 양다리를 걸치는 양단책(兩端策)을 구사하려는 등 백제 나름의 독자노선을 취하고 있었다.


598년, 백제는 수가 고구려를 침공한다는 정보를 입수하고, 수문제(隋文帝)에게 국서를 보내 고구려를 정벌하면 향도(嚮導)가 되겠다고 제의했다. 이에 발끈한 고구려가 백제를 공격하는 사태까지 빚어졌다. 반면 신라를 고립시키려는 고구려의 구상에 왜국은 적극 동참할 의지를 표명했던 것으로 보인다. 신라가 가야 여러 나라를 병합한 데 대한 왜국의 적개심이 아직 풀리지 않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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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국의 실권자 聖德太子의 정치&#8231외교 코치는 고구려 승려 慧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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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왜국과의 친선에 매우 적극적이었다. 595년 고구려 승려 혜자(慧慈)가 일본에 건너가 20여 년간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스승이 되었다. 왜국이 혜자를 성덕태자의 정치고문으로 받아들인 것은 그의 종교적&#8228 학문적 지식뿐만 아나라 국제정치에 관한 그의 안목이 탁월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성덕태자라면 ‘고대(古代) 일본의 영웅’이라고 일컬어진다. 약관(弱冠) 20세에 여왕 스이코(推古: 추고)의 섭정(攝政)이 된 성덕태자는 왕권 강화와 중앙집권국가 건설을 위해 유력 호족인 소가노우마코(蘇我馬子&#8228 소아마자)를 견제하면서 12관등의 관위(官位)와 헌법 17조 제정 등의 국정개혁을 추진했다.


대외적으로는 왜국과 관계가 깊은 가야 여러 나라를 정복한 신라에 대한 원정을 기도했고, 중국의 선진문물을 배우기 위해 제1&#8228 제2회 견수사(遣隋使) 파견을 주도했다.


제2회 견수사인 오노노이모코(小野妹子&#8228 소야매자)는 수양제(隋煬帝)에게 “해 뜨는 곳의 天子, 해지는 곳의 天子에게 글을 바친다. 별일 없으신가?”라고 시작되는 서한을 증정했다. 이런 서한의 작성에는 성덕태자의 스승으로서 왜국의 대외정책에 막강한 영향력을 행사했던 고구려 승려 혜자의 그림자가 어른거려 매우 흥미롭다.


수와 왜를 동격(同格)으로 표현한 이 서한에 수양제는 격노하면서도 귀국하는 오노노이모코에게 답사(答使)로서 배세청(裵世淸)을 딸려 보냈다. 그럴 만한 이유가 있었다. 수양제로서는 고구려 정벌을 앞두고 주변국들의 협조를 구하려는 개전(開戰)외교를 전개했던 것이다.


그런데 &#10218일본서기&#10219 스이코 16년(608) 6월 조에 따르면 왜왕에게 보내는 수양제의 국서가 중도에서 백제 관헌에게 강탈당하는 국제적 사건이 발생했다. 이 사건은 당시 東아시아의 국제관계와 관련해 시사하는 바가 큰 만큼 그 배경을 한번 짚어볼 필요가 있다. 다음은 《삼국사기》 백제본기 무왕 3년(602) 조의 기록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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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3년 가을 8월, 왕(백제 무왕)이 군사를 출동시켜 신라의 아막산성(阿莫山城: 운봉)을 포위하였다. 신라왕 진평(眞平)이 정예 기병 수천 명을 보내 항전하자, 우리 군사가 불리하여 돌아왔다. 신라가 소타(小&#38465)&#8231 외석(畏石)&#8231 천산(泉山)&#8231 옹잠(甕岑) 등 네 성을 쌓고, 우리 변경에 침범하였다. 왕이 노하여 좌평(백제 제1관등) 해수(解&#35726)에게 명하여 보병과 기병 4만 명을 거느리고, 그 네 성을 공격케 하였다. 신라 장군 건품(乾品)&#8231 무은(武殷)이 군사를 거느리고 마주 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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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스승이 臨戰無退 라고 가르쳤다



해수가 불리해지자 군사를 이끌고 천산 서쪽의 소택지(沼澤地)로 퇴각하여, 복병을 숨겨놓고 기다렸다. 무은이 승세를 타 甲兵(갑병: 갑옷 입은 병사) 1천 을 거느리고 소택지까지 추격해 왔을 때, 복병이 달려들어 갑자기 공격하였다. 무은은 말에서 떨어지고, 군사들은 놀라고 당황하여 어찌할 줄을 몰랐다. 무은의 아들인 귀산(貴山)이 큰 소리로 말했다.


“내 일찍이 스승에게 들으니 ‘군사는 적을 만나서는 물러서지 말라’고 하셨는데, 어찌 감히 도망하여, 스승의 가르침을 저버리겠느냐!”


그는 전마(戰馬)를 아버지(무은)에게 주고, 즉시 小將 추항(&#31634項)과 함께 창을 휘두르며 힘껏 싸우다 죽었다. 나머지 군사들이 이를 보고 더욱 분발하여 우리(백제) 군사가 패배하고, 해수는 겨우 위기를 모면하여 단신으로 돌아왔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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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귀산 傳(전)에 따르면 이때 백제군은 “쓰러진 시체가 들판을 메우고 말 한 필, 수레 한 채도 돌아간 것이 없었다”고 할 정도의 참패를 당했다는 것이다. 친구 사이인 귀산과 추항은 일찍이 가실사(加悉寺)를 찾아가 원광(圓光) 법사에게 ‘종신의 계(戒)’를 청해 신라 화랑이 지켜야 할 세속오계(世俗五戒)의 가르침을 직접 받는 청년들이었다.


그렇다면 백제가 이런 참패를 당했던 때 동맹국인 왜국과 고구려는 어떤 상황에 처해 있었던 것일까? 다음은 &#10218일본서기&#10219스이코 10년(602)의 관련 기사이다. 이때의 스이코(推古)는 천황이 아니고 왜국의 여왕이었다.



&lt 10년(602) 봄 2월1일, 내목황자(來目皇子: 실은 왕자)를 신라를 칠 장군으로 삼았다. 여러 신부(神部: 중앙관서) 및 國造&#8231 伴造(국조&#8231 반조: 지방의 호족)들을 합해서 군사 2만5천을 주었다. 여름 4월1일, 장군 내목왕자가 축자(筑紫&#8231 후쿠오카)에 도착했다. 다시 나아가 島郡(도군)에 주둔하여 선박을 모으고 군량을 날랐다. 6월3일, 대반연설(大伴連&#22227)&#8231 판본신강수(坂本臣糠手)가 함께 백제에서 돌아왔다. 이때 내목왕자는 와병으로 정벌에 나갈 수 없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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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정벌군을 출동시켰다가 중도에서 회군시킨 왜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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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 정벌을 위한 고구려&#8228 백제&#8228 왜국의 3국 동맹 추진에 가장 적극적이었던 것은 왜국이었다. &#10218일본서기&#10219에는 왜국이 스이코 9년(601) 3월5일에 대반연설을 고구려에 보내고, 판본신강수를 백제에 보내어“속히 임나(任那)를 도우라’하였다”라는 구절이 있다.


여기서 말하는 임나 즉, 가야는 이미 신라에게 합병당했던 만큼 ‘속히 임나를 도우라’는 것은 가야 고토(故土)의 회복을 재촉한 것으로 풀이된다. 대반연설은 遣高句麗使(견고구려사)로서 평양에 갔다가 귀로에 백제에 들러 고구려 영양왕(&#23344陽王)의 뜻을 백제 무왕에게 전달하고 遣百濟使(견백제사)인 판본신강수와 함께 귀국했던 것이다.


내목왕자는 당시 왜국의 집권자 성덕태자(聖德太子)의 아우이다. 이런 야단법석을 떨었으면서도 왜군은 끝내 신라 원정을 하지 못했고, 그러는 사이에 백제는 아막산성 전투에서 신라에 참패했다. 다음은 그것을 변명하는 &#10218일본서기&#10219 스이코 11년(603)의 관련 기사이다.



&lt 11년 봄 2월4일, 내목황자(실은 왕자)가 츠쿠시(筑玆: 후쿠오카)에서 薨(훙: 사망)했다. …이에 천황(실은 스이코女王)은 듣고서 크게 놀라 태자(성덕태자) 및 소아대신(蘇我大臣: 소가노우마코)을 불러 “…대사에 임하여 후속할 수 없어 매우 슬프다”고 하였다. ….


여름 4월1일, 다시 내목황자의 형 당마(當摩)황자: 둘 모두 황자가 아니라 성덕태자의 동생들임)를 신라를 칠 장군으로 삼았다.


가을 7월3일, 당마황자가 나니와(難波: 오사카)에서 발선(發船)하였다. 6일, 당마황자가 하리마(播磨: 지금의 兵庫縣)에 도착하였다. 따라왔던 처 舍人姬(사인희)가 赤石(적석)에서 병사했다.… 그리고 당마황자는 돌아왔다. 결국 원정을 하지 못하였다.&gt



타국을 정벌한다고 기세등등 출전한 원정군령관이 배를 타고 겨우 200리쯤 갔다가 데리고 갔던 아내가 죽었다고 원위치 했다는 기술은 농담도 지나치다. 播磨(파마&#8228 하리마)는 지금의 일본 제1의 항만 고베港 바로 이웃인 兵庫縣 加古郡 하리마町이다. 아마도 왜국은 해외에 파병할 만한 국력이 부족했던 데다, 수(隋)나라의 대국주의(大國主義)가 위력을 발휘해 가는 시점에서 수의 우방국인 신라와의 개전은 국가이익에 부합되지 않는다고 판단했던 것 같다.


이런 배경에서 볼 때 608년 백제의 관리가 수나라로부터 귀국하는 왜국의 사신으로부터 수양제의 답서를 탈취했던 사건은 동맹국 왜에 대한 백제의 분노라 하는 차원에서 납득되는 일이었다. 수양제의 답서 탈취사건은 뒤에서 재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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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와 왜국의 밀월관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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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떻든 백제더러 함께 신라를 치자고 꼬드겼던 왜국이 결정적인 순간에 파병을 연기하는 바람에 백제 혼자서 신라를 치다가 아막산성(남원시 운봉) 전투에서 병력 4만 명이 전멸당하는 대패를 당했던 것이다. 이것은 왜국의 백제에 대한 배신행위였다.


그러나 고구려와 왜국의 관계는 이후 갈수록 깊어진다. 영양왕 27년(605), 고구려는 왜국에 불상 조영용(造營用) 황금 300냥을 보냈다. 그 전 해인 604년에 왜국은 왕실 사찰의 불상을 그리기 위한 黃文畵師(황문화사)를 설치했는데, 黃文씨는 고구려系 화공집단으로 이미 고구려가 화공을 일본에 파견했음을 알 수 있다.


610년에도 고구려는 승려 담징(曇徵)과 법정(法定)을 보내, 채색&#8231 지묵(紙墨)&#8231 맷돌의 제조법을 전수했다. 연민수 박사는 “이와 같은 교류를 통해 왜 왕권의 對고구려 관계는 백제에 버금가는 우호적으로 전개되어 갔다”고 평가했다(연민수의 논문―7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왜국의 對韓 정책)


왜국이 규슈에서 신라원정군을 해산시킨 지 1개월 후인 603년 8월에 고구려는 뒤늦은 대응이었지만, 신라의 북한산성(北漢山城)을 공격했다. 다음은 &#10218삼국사기&#10219 고구려 영양왕과 신라 진평왕의 603년 조 기사들이다.


&lt (영양왕) 14년(603) 가을 8월, 왕은 장군 고승(高勝)을 보내 신라의 북한산성을 공격했다. 신라왕(진평왕)이 군사를 거느리고 한수(漢水)를 건너오니, 성 안에서 (신라군이) 북 고 소리 지르며 서로 호응하였다. 고승은 저들의 수가 많고 우리는 적으므로, 이기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여 물러났다. &gt


&lt (진평왕) 25년(603) 가을 8월,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침공하니, 왕이 친히 병력 1만을 이끌고 가서 그것을 막았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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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평왕이 친히 병력 1만을 한강 북쪽까지 이끌고 갔다는 것은 배후에 위치한 왜국의 군사적 압력이 이미 해소되었음을 의미한다. 위의 사료 등을 보면 왜군의 규슈에서의 철병과 신라 구원군의 북상은 1개월 차이다. 고구려의 북한산성 공격 시점은 백제의 아막산성 공격보다 만 1년 뒤늦었다. 이는 고구려가 대내외 사정 때문에 신라에 대한 대규모 원정이 어려웠음을 의미한다. 그때 제1차 여-수(麗-隋)전쟁을 개전했던 전후의 상황은 다음과 같다.



?년 2월, 고구려가 말갈병 1만을 이끌고 요서(遼西) 지방의 영주(營州: 요녕성 조양)를 침공했고, 수문제(隋文帝)는 그 보복으로 고구려 원정군 편성을 명했다.


&#8226동년 6월, 수의 원정군이 탁군(&#28095郡: 지금의 북경)에 집결을 완료하고, 수문제의 아들 양량(楊諒)과 왕세적(王世積) 등이 30만 대군을 이끌고 고구려 침공을 개시했다.


&#8226동년 7월, 수의 원정군이 요하(遼河)에서 기아와 질병으로 타격을 입고 퇴각했다.


?년 10월, 수문제는 의성공주(義成公主)를 東돌궐의 계민가한(啓民可汗)에게 출가시켰다. 이와 같은 결혼동맹에 과거 東돌궐의 우호국이었던 고구려가 긴장할 수밖에 없었다.


&#8226특히, 602년부터 시작된 달두가한(達頭可汗)의 西돌궐이 내부로부터 붕괴하기 시작한 것은 고구려에게는 매우 불리했다. 東돌궐의 계민가한(啓民可汗)이 이미 수의 속국을 자처했다.



따라서 수의 배후에서 수의 고구려 원정을 견제할 수 있는 세력이 사라진 셈이었다. 이런 형편에서 고구려가 602년 백제의 아막산성 공격을 즉각 지원하기 어려웠던 것으로 보인다.


한편 왜국의 對신라 원정군이 침략의 기지인 北규슈에서 철수한 지 불과 1개월 만에 신라 진평왕이 군사 1만을 거느리고 漢江(한강) 전선으로 북상한 것은 신라가 왜국 등 적국의 정보를 매우 빠르게 입수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를 뒷받침하는 사료가 &#10218일본서기&#10219 스이코 9년(601) 가을 9월 조에 보인다.



&lt 신라 간첩 가마다(迦摩多)가 대마도에 도착하였으므로 잡아서 바쳤다. 그래서 가마다를 상야(上野&#8231 우에노)에 유배하였다.&gt



어떻든 왜국이 고구려와 백제에 사신을 파견하여 신라에 대한 협격을 제안하고, 백제가 아막산성을 공격하고, 고구려가 북한산성을 치는 일련의 사태에 신라로서는 국가생존의 위협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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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국의 遣隋使가 지닌 수양제의 答書를 백제가 탈취한 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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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08년 백제 해안을 지나던 왜국의 견수사(遣隋使)의 배를 세워 견수사가 지니고 있던 수 양제의 답서(答書)를 빼앗은 사건은 백제&#8231 왜국 간에 빚어진 불협화음의 표출이었다. 왜왕에게 보내는 수양제의 답서를 백제 연안 경비병을 동원해 탈취할 수 있는 권력자는 백제 무왕뿐이었다. 그러나 왜국은 602년 아막성 전투에 즈음하여 백제에게 약속을 어긴 사실이 있었던 만큼 드러내놓고 문제로 삼지는 않았던 것 같다.


신라로서는 기회였다. 진평왕 32년(610) 왜국에 대한 신라의 사신 파견에는 백제&#8231 왜국 간 사이를 벌려놓으려는 신라의 책략이 깔려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왜국은 백제에게 여보란 듯 신라 사신을 환대했다. 서영교 교수는 그의 논문 &lt 백제의 倭使(왜사) 국서 탈취 사건 &gt에서 신라가 처한 입장과 對왜국 관계개선 시도를 다음과 같이 정리했다.



&lt 610년은 신라의 입장에서도 왜와의 관계개선이 어느 때보다 필요한 시점이었다. 고구려는 수와의 전쟁을 염두에 두고 남쪽에 위치한 신라의 기를 꺾으려 들었다. 608년 2월에 신라북쪽 변방을 공격하여 8천 명을 사로잡아 돌아갔고, 4월에 신라 우명산성을 함락시켰다. 611년, 진평왕은 수양제에게 청사표(請師表)를 올렸고, 수양제가 이를 수락했다.


그해 8월, 신라 사신이 왜를 다시 방문했다. 두 달 후인 10월, 백제가 북진로로 예상되는 신라의 측면을 공격했다. 전략적 요충인 무주 지역의 가잠성이 백제의 수중에 떨어졌다. 그곳은 백제군이 무주→성주→대구를 거쳐 신라의 왕경으로 갈 수 있는 최단거리 코스에 위치한 요새였다.


그럼에도 진평왕은 북쪽의 영토 회복을 위해 612년 수나라와 전쟁상태인 고구려를 공격해야 했다. 고구려&#8231 백제와 만성적인 전쟁상태에 있었던 신라는 그 배후의 왜와 관계강화가 더욱 필요했다. 왜와의 관계개선이 신라의 北進西防(북진서방)을 가능하게 하는 조건인 것이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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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2차 여수전쟁의 경과



그러면 제2차 고구려-수 전쟁의 경과를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년 12월, 수양제는 전국에 고구려 원정을 위한 총동원령을 하달했다.


?년 2월, 수양제는 탁군(&#28095郡: 지금의 북경)으로 거처를 옮겨 전쟁준비 상황을 직접 감독했다.


?년 10월, 백제가 신라의 가잠성(假岑城)을 점령했다. 이것은 고구려 남쪽 국경에 출병했던 신라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것이었다.


?년 1월: 수의 원정군(113만3800명), 탁군에 집결 완료함.


수의 水路軍 7개 부대, 산동반도의 東萊로 이동함.


西돌궐이 내분으로 분열됨.


?년 3월 중순: 隋軍 선두부대, 요하 西岸인 회원진(懷遠鎭)에서 고구려군과 대치함.


?년 4월 중순: 고구려군, 요하 방어선에서 패퇴. 수군(隋軍), 요하를 도하함.


?년 4월 하순: 수군, 요동성을 동&#8228 서&#8228 남의 3면으로 포위함.


?년 7월 초순: 수군 별동부대(30만), 우문술&#8228 우중문의 지휘下에 평양 향해 남하함.


?년 7월 하순 : 고구려군, 수의 수로군(水路軍)을 평양 근교에서 대파함.


?년 7월 하순: 隋軍(수군) 별동부대, 평양에서 철수해 살수(청천강)에서 乙支文德의 고 구려군에게 대파당함.


?년 8월25일: 수양제, 全軍에 철군을 명함.


?년 9월: 수양제, 주요 장수들의 관직을 삭탈함. 우문술은 서인(庶人)으로 강등되고, 유 사룡 등은 처형당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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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게 고구려는 중국세력의 東進(동진)을 틀어막는 역사적 방파제 역할을 훌륭하게 수행했다. 短命(단명)왕조 隋(수)의 천하를 대신한 당나라의 태종도 고구려 원정을 거듭했으나 그의 在位(재위) 중에는 모두 실패했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가 나당전쟁에서 이겨 삼국 통일을 완수할 수 있었던 것은 위기 극복을 위한 내부적 단결과 급변하는 주변 정세를 능동적으로 활용한 외교력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 시기, 중국 대륙에서는 350년간에 걸친 大분열의 시대에 마침표를 찍고 통일제국 수와 당의 시대가 차례로 전개되었던 것이다.


중국의 통일 왕조들이 구사하는 전통적 대외정책은 팽창 전략이었다. 신라가 수-당의 대외 정책을 어떻게 자기 국가이익에 활용했는지에 관해서는 뒤에서 거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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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세기 말 이래 7세기 중엽에 이르는 시기는 우리 역사상으로도 가장 치열했던 大동란기였다. 먹거나 먹히는 판이었던 만큼 외교적 줄타기만으로 살아남을 수 있던 시대는 결코 아니었다. 이때 신라의 지도부는 전쟁을 겁내지 않았고, 국가 위기를 되레 기회로 삼았다.


신라는 한번 공격을 당하면 반드시 보복 공격을 감행하여, 실지(失地)를 되찾았다. 이런 국가적 결심을 뒷받침했던 3傑(걸)이 태종무열왕&#8231 김유신(金庾信) 장군&#8231 문무대왕이었다. 그들은 후세 사람을 감동시키는 치열한 노력의 흔적을 삼국통일과 나당전쟁 곳곳에 남기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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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와 고구려의 멸망의 전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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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의자왕의 드라이브



한강 유역을 독식(獨食)한 신라는 백제-고구려 공동의 적이 되었다. 2정면 작전에 따른 신라 국가의 피로도(疲勞度)는 가중되고 있었다. 백제 의자왕(義慈王)은 즉위 초부터 외정(外征)을 감행한 ‘준비된 군주’였다.


백제 의자왕 2년(642) 가을 7월, 왕은 직접 군사를 이끌고 신라를 침공해, 미후(&#29564&#29492: 충남 금산군 진산면) 등 40여 성을 함락시켰다. 한 달 후인 8월, 의자왕은 장군 윤충(允忠)에게 군사 1만을 주어 신라의 대야성(大耶城 경남 함천)을 공격했다. 대야성이 떨어지면, 서라벌도 위험하다, 대야성 전투의 상보는 &#10218삼국사기&#10219 죽죽(竹竹) 전(傳)을 통해 살펴볼 수 있는 만큼 여기선 생략한다.


대야성의 패전은 성주(城主)의 부도덕함으로 빚어진 결과였다. 왜냐하면 성주인 이찬(관등 제2위) 김품석(金品釋)에게 미모의 아내를 뺏긴 부하가 이미 백제군에 투항해 있던 옛 동료와 짜고 백제군의 공격에 호응하여 대야성의 군량창고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오늘날 합천은 행정구역상으로는 PK이지만, 생활권으로는 TK에 속한다. 예컨대 합천 사람은 대구에서 전파를 발사하는 방송을 청취하고, 대구에서 장을 본다. 대야성에 오르면 달구벌(達句伐: 대구)를 내려다보면서 공격할 수 있다. 달구벌을 지나 慶山(경산)→ 永川(영천)을 거치면 바로 서라벌이다. 대야성이 백제군의 수중에 들어간 이후 신라 수뇌부는 결코 두 다리를 뻗고 잠들 수 없었을 것이다.


대야성 함락 후 신라에서는 대번에 두 가지 중요한 흐름이 나타났다. 그 하나는 이찬(관등 제2위) 김춘추(金春秋: 후일의 태종무열왕)가 주변 외교에 신명(身命)을 걸었다는 점이고, 그 둘은 김유신이 대야성을 점령한 백제군으로부터 신라의 수도권을 방어하는 압량주(押梁州: 경북 경산)의 군주(軍主)로 떠올랐다는 점이다.


도덕적 해이 때문에 대야성을 잃은 이찬(관등 제2위) 품석은 김춘추의 사위였다. 품석이 백제의 회유에 넘어가 항복하기 위해 성문 밖에 내보냈던 성병(城兵)들이 백제군의 복병에게 걸려 도륙을 당하자, 성안에 있던 품석은 먼저 처자를 죽인 다음에 자신의 목을 찔러 자결했다.


대야성 성주 품석의 아내 고타소(古陀炤)는 김춘추와 그의 병사한 전처 보라궁주(寶羅宮主) 사이의 딸이었다. &#10218삼국사기&#10219선덕여왕 11년(642) 조에선 고타소의 죽음을 전해들은 김춘추의 분노를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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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춘추가 이 소식을 듣자 기둥에 온종일 기대서서 눈도 깜박이지 않은 채 사람이나 물건이 앞을 지나쳐도 이를 알아보지 못하였다. 얼마 후에, “아아! 대장부가 어찌 백제를 꺾을 수 없으랴!” 하고는 왕(선덕여왕)께 나아가 “명을 내려주신다면 제가 고구려에 가서 군사를 청하여 백제에 대한 원한 갚기를 원하나이다”고 말하니, 왕이 이를 허락하였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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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는 자기 사위의 잘못에 의해 대야성을 잃은 데 대한 정치적 부담을 느낄 수밖에 없었다. 고구려로 떠나기 전, 김춘추와 김유신은 둘의 혈맹(血盟)을 다짐했다.


신라조정의 實勢(실세) 김춘추는 “내가 60일이면 돌아올 것이올 것이지만, 만일 기한이 지나도록 돌아오지 않는다면 다시 만날 기약이 없을 것이오!”라고 말했다. 김유신은 “공이 만약 (고구려에 가서) 돌아오지 못한다면 나의 말발굽이 반드시 고구려&#8228 백제의 궁정을 짓밟을 것이오!”라고 다짐했다.


연개소문의 對신라 강경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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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센 체할 때가 亡兆(망조)의 시작이다. 이것은 역사의 經驗則(경험칙)이다


선덕여왕 11년(642), 김춘추가 평양성에 들어가서 백제 정벌을 위한 고구려의 원병을 요청했다. 보장왕(寶藏王)은 김춘추로서는 응답이 어려운 다음 조건을 내걸었다. “죽령(竹嶺)은 본래 우리 땅인데, 죽령 서북의 땅을 돌려준다면 군사를 돌려 줄 수 있다”는 것이었다. 이에 김춘추는 이렇게 답변했다.



“제가 임금의 명령을 받들어 군사를 빌리러 왔으나 대왕께서는 이웃의 환난을 구원하여 이웃과 잘 지낼 뜻은 없고, 다만 남의 나라 使臣(사신)을 위협하여 땅을 돌려주기를 요구하니, 저에게는 죽음이 있을 뿐, 다른 것은 모르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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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장왕은 김춘추의 말이 공손치 않는 데 분노하여 그를 별관에 가두었다. 김춘추가 고구려에 입국한 시점은 연개소문(淵蓋蘇文)의 쿠데타 한 달 후인 642년 겨울 11월. 당시 고구려의 절대 권력자는 연개소문이었다. 따라서 김춘추의 청병(請兵)에 대해 죽령 이북의 한강 유역을 먼저 반환하라고 요구한 고구려의 강경 정책은 연개소문의 뜻이었다고 해도 좋다.



김춘추는 고구려에 억류되어 돌아갈 기약이 없었다. 이때 그는 미리 준비해 간 푸른 베 300步(450m)를 보장왕의 총신 선도해(先道解)에게 뇌물로 먹였다. 선도해는 김춘추에게 탈신(脫身)의 묘계(妙計)를 귀띔했다. 그 묘계는 오늘날에는 국어 교과서에도 나올 만큼 유명해진 ‘토끼와 거북’의 우화(寓話)였다. 이에 김춘추는 곧 보장왕에게 다음 내용의 글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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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마목현과 죽령은 본디 大國(대국: 고구려)의 땅입니다. 신이 귀국하여 우리 왕에게 이를 돌려보내도록 말씀 드리겠습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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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춘추의 제안은 거북에게 육지로 도로 데려다주기만 하면 나무에 걸어둔 자신의 간(肝)을 갖고 와서 용왕에게 바치겠다는 토끼의 속임수와 다름없었다. 한편 미리 약정한 60일이 지나도록 김춘추가 귀국하지 않자, 김유신은 결사대 1만을 이끌고, 고구려 남쪽 변경에 이르렀다. 이럴 즈음에 김춘추가 앞의 묘계를 구사해 석방되어 귀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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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lt고사기&gt&gt와 &lt&lt일본서기&gt&gt는 일본에 망명한 백제 지식인의 작품



선덕여왕 16년(647) 봄 1월, 신라에서 ‘비담(毗曇)의 난’이 일어났다. 주모자 비담은 귀족회의 의장인 上大等(상대등)으로서, 구(舊)귀족 세력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 반란의 명분은 여주불능선리(女主不能善理), 즉 여왕은 정치를 잘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비담의 난보다 4년 전인 643년, 당 태종도 신라가 보낸 청병사(請兵使)에게 “그대 나라는 여자를 왕으로 받들고 있으니, 이웃나라가 가벼히 여기고 모독하는 것인데, 우리 황족 한 사람을 보내 그대 나라의 왕으로 삼는 것이 어떠냐?”라면서 노골적인 탐욕을 드러낸 바 있었다.


비담 등은 이런 對內外(대내외) 정황을 교묘히 이용하여 여왕 체제에 반기를 들었지만, 사실은 신흥 세력 김춘추-김유신 系의 대두에 대한 舊귀족 세력의 반발이었다. 반란군은 明活城(명활성)을 점거해 근거지로 삼았다. 명활성은 지금의 경주 보문관광단지 바로 남쪽 산에 축조해 놓았던 왕성의 外城(외성)이었다. 왕궁과의 거리는 불과 10여리. 김유신이 이끄는 관군은 왕성인 반월성(半月城)에 진을 쳤다.


김유신은 대치 10여일 만에 총공격을 가해 패주하는 비담 등의 목을 베고, 그 9족을 멸했다. 반란 진압 과정에서 선덕여왕이 죽고, 4촌 동생인 진덕여왕(眞德女王)이 즉위했다. 이로써 김춘추-김유신 동맹이 세를 얻었고, 7년 후 김춘추의 즉위를 향한 징검다리가 되었다.



이 무렵, 김춘추의 역할은 &#10218삼국사기&#10219 등 우리나라 사서에는 보이지 않는다. 《日本書紀&#8231 일본서기》에 따르면 김춘추는 정확한 시기는 알 수 없지만, 647년의 어느 날에 왜국을 방문했다. 다음은 &#10218日本書紀&#10219 孝德 3년 조의 관련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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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상신(上臣) 대아찬 김춘추 등을 사(使)로 파견하여, 박사 小德 다카무쿠(高向黑麻呂), 小山中(왜국의 관등) 나카도미(中臣連押熊)를 (신라 사신의 배편으로) 보내오고, 공작 한 쌍, 앵무 한 쌍을 바쳤다. 춘추를 인질로 하였다. 춘추는 용모가 아름답고 담소를 잘 했다(美姿顔 善談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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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인용문에서 ‘대아찬’ 김춘추는 ‘이찬’으로 수정해야 한다. 대아찬은 신라 17 관등 중 제5위이고, 이찬은 제2위이다.


“춘추를 인질로 하였다”는 대목도 납득하기 어렵다. 왜냐하면 김춘추는 다음해인 648년 진덕여왕의 명을 받고 당나라로 건너갔기 때문이다. 김춘추는 당태종과 만나 고구려&#8231 백제 정복 후의 영토분할협정을 맺었다. 다카무쿠와 나카도미 등의 귀국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당시 일본의 유학생들은 견고한 신라 배를 타고 당나라에 가서 유학하고 귀국할 때도 신라 배를 타는 경우가 많았다.


657년, 신라와 왜의 국교 단절도, 왜의 유학생을 신라의 사신이 타는 배에 편승시켜서 당나라에 보내 달라는 그들의 요청을 신라가 거부했는데, 그것이 표면상의 빌미가 되었다. 다음은 &#10218일본서기&#10219사이메이(齊明) 3년 가을 7월 조의 관련 부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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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이 해, 신라에 사신을 보내, “沙門 智達(사문 지달), 間人連御廐(간인연어기), 依網連稚子(의망연치자) 등을, 그대 나라의 사신에 딸려서 , 大唐(대당)에 보내려 한다”고 알렸다. 신라가 듣지 않았다. 그래서 沙門 智達 등은 돌아왔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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밑도 끝도 없는 위의 기록이 관련 부분의 전부다. 沙門 智達이라면 智達(지달)이라는 法名을 가진 승려이다. 문자를 아는 승려 중에는 당시 스파이가 많았다. 이 시기에, 나&#8231 당 간에는 연합군 형성에 관한 협의가 이뤄지고 있었을 것인데, 이런 국가 1급 비밀을 다루는 신라 사신단의 배에 편승하겠다는 것은 눈치 없는 바보가 아니라면 참으로 당돌한 짓이었다.



720년에 편찬된 &#10218일본서기&#10219는 신라를 폄하하는 데 혈안이 된 사서로서, 일본의 정사(正史)라고 지칭하기에는 부끄러운 책이다. 漢字(한자) 문화권의 다른 사서에는 다 있는 서문(序文)도 발문(跋文)도 없다. 舍人親王(사인친왕)이 편수자로 되어 있지만, 친왕(사실은 왕자)인 그가 혹시 실무 필진을 지휘했을지는 몰라도 실제로 사초(史草)를 읽고 역사서술을 위해 붓을 놀린 사람은 아니었을 것이다.


&#10218일본서기&#10219는, 나&#8231 당연합군에 의해 멸망해 왜국으로 망명한 百濟系(백제계) 지식인 출신 태안만려(太安萬侶) 등이 새 정착지 왜국에 아부하고, 신라를 저주하기 위해 지은 책으로 지목되어 왔다. &#10218일본서기&#10219보다 8년 앞서(712년) 편찬된 &#10218古事記(고사기)&#10219의 서문에는 그 저자가 태안만려로 명기(明記)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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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도 창업 초기에는 東돌궐에 조공(朝貢) 바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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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비족(鮮卑族)과 한족(漢族)의 혼혈 왕조인 당은 창업 초기엔 통일왕조가 아니었다. 선비족 등의 塞外(새외)민족도 세월이 흐르면서 어느덧 漢族이 되었다.


隋(수)의 말기, 낙양(洛陽)에는 西域(서역)의 이민족 출신으로 鄭(정)나라의 황제를 자칭한 왕세충(王世充), 河北(하북)에는 群盜(군도) 출신인 두건덕(竇建德) 등 여러 군벌이 난립해 ‘중원(中原)의 사슴’(중국의 패권)을 다투었다. 唐朝(당조)가 군웅들을 평정하고 통일정권을 이룩한 것은 건국 8년 후인 624년의 일이었다.



이어 후계자 문제를 놓고 골육상쟁이 벌어졌다. 626년 6월, 당고조의 차남 이세민(李世民)이 쿠데타를 일으켜 동복형인 태자 이건성(李建成)과 동복동생인 제왕 이원길(李元吉)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이것이 역사에서는 현무문(玄武門)의 변(變)이라고 한다.


이세민은 형과 동생의 가족도 몰살하여 후환을 끊었다. 다만 동생 원길의 아내만은 살려 자기의 측실로 두었고. 후일 그녀를 황후로 올리려고 했지만, 신하들의 반대로 실패했다. 당고조 이연은 626년 6월 상황(上皇)으로 물러앉고, 이세민이 즉위했다. 그가 당태종이다.


당시 아시아대륙의 패권국은 오르도스 북방에 위치한 東돌궐이었다. 이연이 太原(태원)에서 거병할 때 東돌궐로부터 기병 3000 騎(기)의 지원을 받았다. 이후 당은 東돌궐에 조공을 바쳤다.


당태종 이세민이 즉위한 626년에 東돌궐의 힐리가한(詰利可汗)은 10만 기를 이끌고 장안 70리 밖인 위수(渭水) 다리까지 쳐내려왔다. 당태종이 감행한 쿠데타의 죄를 물은 것이다. 가한(可汗)은 돌궐제국 군주(君主)의 칭호이다.


중국의 사서에서는 당태종이 위수 南岸(남안)으로 달려가 힐리가한을 꾸짖어 철병시킨 것으로 되어 있지만, 이것 또한 역사 왜곡이다. 이때 당태종은 長安의 부고(府庫: 정부창고)를 모조리 털어 힐리가한에게 막대한 금품을 헌상함으로서 멸망의 위기를 모면했다.


흉노처럼 순수 유목기마민족인 돌궐은 半유목&#8228 半농경 민족인 선비족이 중국 內地(내지)를 탐하는 것과 달리 농경지대에 대한 욕심이 없었다. 돌궐의 최대 관심사는 금품을 약탈하거나 금과 비단 등을 상납 받는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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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태종이 고구려 정벌에 집착했던 까닭



당태종은 돌궐에 대한 복수의 칼을 갈았다. 630년, 병법가인 이정(李靖)과 소정방(蘇定方)내분 중인 돌궐의 가한의 천막궁전(王廷)을 정예기병 3000기로 급습, 힐리가한을 생포하는 기승(奇勝)을 올렸다. 이때 당태종 이세민은 초원의 君主들로부터 天可汗(천가한)이라 는 尊號(존호)를 받았다. 농경세계뿐만 아니라 초원의 최고 지배자가 되었다는 뜻이다.


우리에게 소정방이라면 660년에 일흔 살의 노장으로 사비성을 함락시킨 장수 정도로 알려져 있다. 蘇定方(소정방)의 본명은 蘇烈(소열), 정방은 소열의 字이다. &#10218舊唐書&#8231 구당서&#10219에 소열은 驍悍多力(효한다력) 膽氣絶倫(담기절륜)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즉 “날래고 사납고 힘세고, 담력 또한 뛰어났다”는 뜻이다.


열 살 때부터 그는 아버지를 따라 전쟁터에 나가 싸움이 뭔지를 알았고, 그 후 군도(群盜) 출신의 유력 群雄(군웅)으로서 하북(河北)을 장악해 ‘中原의 사슴(패권)’을 노린 두건덕(竇建德)의 부장으로서 이름을 날렸다. 두건덕의 패망 후 진왕(秦王) 시절의 당태종에게 투항한 후 서역(西域) 전선에서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그는“싸움을 위해 세상에 태어난 남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힐리가한을 사로잡은 당태종의 사전공작은 매우 치밀했다. 혹한에 의한 가축의 떼죽음으로 힐리가한은 경제력을 상실했는 데다 당의 막후 개입으로 발생한 草原(초원)세계의 내분으로 인해 전투력을 보존하기 어려운 처지에 빠져 있었다. 이때 鴻蘆卿(홍로경: 주변국과의 외교를 담당하는 장관)을 돌궐에 파견해 힐리가한을 안심시켜 당군에 대한 경계심을 늦추어 놓고 급습을 가했던 것이다. 항복한 돌궐족 10여만 명은 중국 內地(내지)로 옮겨져 그 후 변경 수비와 外征(외정)을 담당했다.


쿠데타를 일으켜 형과 아우를 죽인 다음, 아버지를 퇴위시키고 즉위한 당태종으로서는 어떻든 뭔가를 굉장한 것을 신료들과 백성들에게 보여주어야 했다. 고구려 정벌은 수나라 이래 중국인의 소원이었다. 그러나 당태종은 끝내 고구려을 정복하지 못했고, 4년 전의 안시성전투(645년 9월)에서 눈에 화살을 맞아 혼줄이 난 때문인지 임종의 자리에서 당고종에게 고구려와 전쟁하지 말라는 유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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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의 적수는 중국 제1의 우먼파워 무측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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父子의 품속에 차례로 안겼던 후궁 출신



20여년 전(1995년 6월), 필자는 신라의 삼국통일 시기에 당제국의 실질적 통치자였던 측천무후(則天武后)와 그녀의 남편인 당고종 이치(唐高宗 李治)가 합장된 건릉(乾陵)을 답사했다. 건릉은 서안(西安&#8231 시안) 서북쪽 200에 위치해 있다.


당고종이라면 그의 재위(在位) 기간에 나당연합군을 결성해 백제와 고구려를 차례로 멸망시킨 당의 제3대 황제이다. 그러나 당고종은 매우 병약한 인물로, 그의 정사는 측천무후(則天武后)로 일컬어지는 무조(武照)에 의해 좌지우지되었다.


당고종의 재위 34년 중 30년간의 최고 권력자는 측천무후였고, 당고종이 죽은 지 6년 후인 690년에는 주(周)나라를 세워 중국 역사상 유일무이한 여제(女帝)로서 15년간 군림했다. 반세기에 걸친 측천무후의 행적을 꿰뚫어보지 않으면 신라의 대당(對唐) 7년전쟁도 이해할 수 없다.


측천무후의 아버지는 무사확(武士&#24416), 그는 지금의 산서성(山西省)의 성도(省都)인 태원시 문수현 (太原市 文水縣) 출신이다. 무사확은 원래 목재 상인이었는데, 이연(李淵)의 태원(太原) 거병에 가담해 그 공으로 당(唐)의 건국 후에 형주(邢州)도독로 발탁되었다.


624년생인 武照는 미인으로 소문나 열넷의 나이로 唐太宗(당태종)의 후궁에 들어가 才人(재인)이 되었다. 재인은 황후를 포함한 정원 121人의 후궁 중 랭킹 31∼40위에 속한다.


당태종을 병간호하던 중에 그녀는 황태자 이치(李治: 후일의 당고종)와 눈이 맞았다. 649년 5월 당 태종이 죽자, 재인 무조(武照)는 감업사(感業寺)로 보내져 여승이 되어 당태종의 명복을 빌게 되었다.


그러나 그녀는 3년 후(652)에 다시 궁중에 불려가 당고종의 품에 안기게 되었다. 그것은 황후 왕(王)씨의 얕은 꾀가 부른 결과였다. 당시, 당고종의 총애를 독점하고 있던 여인은 후궁 랭킹 제3위였던 소숙비(蕭淑妃)였다.


王황후는 그런 소숙비를 미워하던 끝에 황태자 시절의 당고종과 야릇한 관계였던 무조의 머리를 기르게 해 소숙비의 견제용으로 궁중으로 끌여들였던 것이다. 무조는 당태종의 후궁에서는 정5품 재인이었지만, 당 고종은 그녀를 대번에 후궁의 랭킹 제6위인 정2품 昭儀(소의)로 높였다.


이것은 무조가 당태종 이세민 취향의 여자가 아니라 당고종 李治(이치)가 좋아하는 스타일이었다는 사실을 말하고 있다. 낙양(洛陽) 교외 용문석굴(龍門石窟) 중에서 가장 유명한 봉선사(奉先寺)의 본존(本尊)은 그녀의 모습을 모델로 한 것이라고 한다. 그것은 실로 늠름하면서도 아름다운 얼굴이다. 남성적인 당태종은 여성스러운 여자를 좋아했고, 무조와 같이 뚜렷한 얼굴 선(線)의 여성에게는 큰 흥미를 느끼지 못한 것 같다. 이와 반대로 기질이 약한 당고종은 무조의 늠름함에 심혼을 빼았겼던 것으로 생각된다.


&lt&lt사진--낙양 용문석굴의 봉선사 본존 앞에 선 필자 &gt&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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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조는 소의(昭儀) 정도로 만족할 여자가 아니었다. 655년 6월, 고종은 王황후와 소숙비를 폐하고, 무조를 황후(則天武后&#8231 측천무후)로 책봉했다. 그녀는 후환을 우려해, 연적들인 王황후와 소숙비를 술독 안에 집어넣어 술 냄새로 찌든 시체로 만들어버렸다. 그녀의 황후 등극에 반대했던 당태종의 탁고지신(託孤之臣)들인 장손무기(長孫無忌)&#8231 저수량(楮遂良) 등도 모두 제거했다. 660년, 고종과 측천무후는 동격(同格)의 2성(聖)이라고 칭해져, 이른바 2聖정치(二聖政治)가 시작되었다.


당고종 재위 시절에 이미 통치권을 장악한 측천무후는 그녀의 친아들 둘을 차례로 황태자로 올렸다가 죽이고, 당고종 사후(死後)에는 친아들 둘을 황제(중종&#8228 예종)로 즉위시켰다가 폐위시켰다. 690년에는 스스로가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女황제로 등극, 15년간 周(주)나라를 통치한 파워우먼이었다.


당고종과 측천무후를 합장한 건릉의 진입로에 들어서면 좌우에 수십 구의 문&#8228 무관 석상(石像)이 도열해 있다. 500m 는 됨직한 진입로가 끝나는 지점에 당고종과 측천무후가 합장되었음을 알리는 비석이 세워져 있다. 그 좌우에는 각국의 사절, 중국식 표현으로는 배신(陪臣)들의 석상 50여구가 세워져 있다.


그러나 이 지점에서 건릉까지는 아직도 700∼800m의 비탈길을 땡볕 속에서 올라가야만 했다. 마침 말을 빌려주는 관광업소가 있어 필자는 경마잡이까지 고용해, 말을 타고 거대한 건릉을 구석구석 답파했다.


건릉은 도굴 방지를 위해서인지 큰 바위덩이가 봉분 위로 드러나도록 줄지어 묻어놓고 있다. 영악했던 측천무후는 초패왕 항우(項羽)가 진(秦)나라를 멸망시킨 뒤 진시황(秦始皇)의 여산릉(廬山陵)을 도굴했던 역사적 폭거를 상기했을 터이다.


측천무후는 한국사에도 엄청난 충격을 가한 인물인 만큼 그녀가 어떤 캐릭터이며, 어떤 통치술을 구사했는지 살필 필요가 있다. 사실상 그녀가 파견한 당군이 신라군과 연합해 백제&#8228 고구려를 멸망시켰고, 그 후에는 신라까지 먹으려 했다가 실패했기 때문이다.



“그것은 폐하의 집안일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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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종은 드디어 무조를 昭儀(소의)로부터 황후로 세우려 했을 때의 조정의 기류는 대체로 부정적이었다. 우선, 4인의 중신과 상의했다. 先帝(선제)의 遺詔(유조)를 받은 長孫無忌(장손무기)와 &#35098遂良(저수량)은 반대했고, 于志寧(우지녕)은 침묵을 지켰고, 李勣(이적)은 그 어전회의에 아프다는 핑계로 결석했다.


제 아무리 황제라 할지라도 신하들이 모두 반대하면 결행하기 어렵다. 1인의 찬성자라도 없으면 결행은 거의 불가능했다. 당고종이 희망을 걸었던 것은 稱病(칭병)으로 결석했던 이적이었다. 수일 후에 불려나온 이적의 답변은 유명하다.



“이것은 폐하의 집안 일입니다. 그것을 바깥사람들에게 물어 무얼 합니까? ”


이것은 가정문제이기 때문에 가족이 아닌 신하에게 가부를 물을 필요가 없다고 했던 것이었다. 이 답변에 힘을 얻은 당고종은 드디어 무조(武照)를 황후로 세웠다. 이적은 이때의 무책임한 답변에 의해 후세 史家(사가)들로부터 비난을 받고 있다. 비록 짧았지만(15년간), 당제국이 무측천에 의해 찬탈됐는데, 그게 이적 탓이라는 것이다.


그렇지만 이적으로서도 자기 몸을 보존해야 했다. 열일곱 살 때 군도(群盜) 집단에 투신했던 蠻勇(만용) 시절의 그가 아니었다. 황제의 외삼촌인 장손무기(長孫無忌)나 진왕(秦王) 시절 이세민의 인너그룹(inner-group)이었던 18학사(學士) 중 1인(저량&#8231 楮亮)의 아들인 저수량(楮遂良)과는 그의 입장이 달랐다. 당태종 말기에 李治(이치)를 태자로 세우는 데 가장 적극적이었던 사람은 다름 아닌 장손무기였다. 장손무기는 현모양처로 이름났던 당태종 이세민의 선비족 황후인 長孫황후의 친오빠이다.


무조(武照), 즉 측천무후가 황후로 책봉된 것은 655년의 일이었다. 당고종은 아버지 당태종보다 3년 장수해 향년 56세였다. 하지만 매우 병약해 정무를 처리할 수 없는 건강상태가 오래 계속되어 660년 이후 당제국의 실질적 통치자는 측천무후였다. 그녀는 당고종 재위기간 34년(649-683) 중 30년, 고종의 사후 20년간을 합쳐 거의 50년간 정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측천무후는 반대자를 용서하지 않는 무서운 여자였다. 그녀의 권력이 너무 강해지자 당고종도 겁에 질렸던 것 같다. 664년 12월, 당고종은 재상 上官儀(상관의)와 짜고 측천무후를 폐하는 계획을 진행시켰지만, 상관의가 작성한 폐위(廢位) 조서가 발표 전에 측천무후에게 발각되었다. 상관의가 모든 책임을 지고 처형되었고, 그후 측천무후는 수렴(垂簾)의 통치를 개시했다.


당고종은 모든 것을 上官儀의 탓으로 돌려 자신의 몸을 지키려 했던 공처가였다. 그 무렵(664년)부터 신하들은 황제와 황후를 ‘2聖(성)’이라 부르도록 사실상 강요되었다. 중신회의에서 무조를 황후로 세우는 것에 반대도 찬성도 하지 않고 침묵을 지켰던 于志寧(우지녕)도 좌천되었다.


무측천은 밀고를 장려해, 그 밀고가 진실이 아닌 것으로 판명되어도 밀고자는 처벌받지 않는다는 규칙까지 만들어 놓았다. 그 결과, 온갖 비밀이 그녀의 귀에 들어갔던 것이다. 그녀야말로 시쳇말로 “찌라시 생산의 원조”였다. 반대의견이 용납되지 않는 무서운 시대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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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부와 곡필의 명수&#8212許敬宗



측천무후 지지파는 實錄(실록)의 편수를 맡으면서 당태종의 치적을 과대 포장한 ‘아부와 역사 왜곡의 명수’ 許敬宗(허경종)이 筆頭(필두)였다. 이와 같이 절조 없는 인물도 측천무후에게 붙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재를 얻지 못하면 정치를 잘할 수 없다는 사실도 측천무후는 깨닫고 있었다. 그래서 이때까지의 인재 공급원과는 다른 곳으로부터 인재를 발굴하는 것에 노력했다.


秦王(진왕) 때의 당태종은 文學館 學士(문학관 학사)들을 신변에 두고, 그의 책사 또는 정치고문으로 삼았다. 18學士(학사)라 불렸지만, 두여회(杜如晦)&#8231 방현령(房玄齡) 같은 당태종 시대의 재상이 그 속에서 나왔다. 저수량의 아버지 &#35098亮(저량)도 그 1인이고, 무조를 황후로 책봉하는 데 침묵했던 우지녕 및 曲筆(곡필)의 허경종도 그 맴버였다. 하기야 곡필도 능력이 없으면 보통사람의 눈도 속일 수 없다.



측천무후도 이 방식을 배워서 文人들을 신변에 모았다. 그 명목은 양서(良書)를 편집하는 것으로서, 정식 국가기관은 아니었지만, 이 일에 종사하는 문인들은 황궁의 北門인 玄武門(현무문)을 출입하도록 허용되었다. 세상 사람들은 그들을 北門의 學士(북문의 학사)라고 불렀다.


측천무무 지지파는 실록의 편수를 맡으면서 당태종의 치적을 과대 포장한 ‘아부와 역사왜곡의 명수’ 許敬宗(허경종)이 필두였다. 이와 같이 절조 없는 인물도 측천무후에게 붙었던 것이다. 그러나 인재를 얻지 못하면 정치를 잘할 수 없다는 사실도 측천무후 꿰뚫고 있었다. 그래서 이때까지의 인재 공급원과는 다른 곳으로부터 인재를 발굴하는 것에 노력했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그것을 측천무후의 공포정치에 의한 것이라는 견해도 있다. 그녀를 황후로 세우는 데 반대했던 장손무기와 저수량의 운명은 비참했다. 저수량은 계주(현재의 桂林) 도독으로 밀려났고, 이어 모반을 꾀했다는 의심을 받아 다시 愛州(애주) 자사로 좌천되었다. 애주는 현재 베트남의 수도 하노이 보다 더 남쪽인 탄호아(淸化) 지방에 해당한다.


당대(唐代)를 대표하는 명필인 저수량은 탄호아에서 풍토병에 걸려 곧 병사했다. 당고종의 외삼촌으로서 그의 즉위에 결정적인 공헌을 했던 장손무기는 黔州(검주)로 유배되어 있다가 모반의 이유로 사약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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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새로운 세력의 대두였다. 당왕조에 새로운 피가 수혈되었음을 의미한다. 중국에서는 당고조∼당태종 정권의 핵심세력을 關朧(관롱: 섬서성과 감숙성) 집단으로 부르고, 측천무후 집권기의 주체세력을 華山(화산: 섬서성의 동쪽 끝에 위치한 요새 潼關 부근의 명산)보다 동쪽 지방을 의미하는 산동(山東) 출신의 관료들로 본다. 이적이 武씨의 황후 책립에 찬성한 것은 같은 山東의 寒族(한족: 지체가 낮은 가문)이었기 때문이라는 풀이도 있다.


측천무후가 권력을 장악함으로써 이른바 ‘관롱집단의 시대’는 일단 종말을 고했다. 관롱집단은 그들과 다른 출신이 권력의 중추에 진입하는 것을 막고 있었다. 이제 그녀는 ‘北門의 학사’를 이용해 관롱집단을 마구 눌렀다.


측천무후는 관롱집단을 물리치고, 인재풀(pool)의 범위를 화산 以東으로 넓혔다. 즉, 수문제 때 처음 시행된 과거시험의 합격자를 대폭 확대해 그녀에게 충성하는 새로운 관료층을 형성했다.


동시에 그녀는 불교를 진흥시켰다. 그때까지 당의 모든 의식(Ritual)에서는, 국성(國姓)이 도교(道敎)의 원조인 老子 李聃(노자 이담)의 성(姓)과 같다고 하여, 先道後佛(선도후불)의 원칙을 지켰지만, 측천무후는 그것을 선불후도(先佛後道)로 바꾸었다. 정치의 중심무대도 장안(長安)에서 낙양(洛陽)으로 이전시키고 神都(신도)라고 명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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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 자식들인 태자 둘 죽이고 황제 둘을 폐위시킨 측천무후



唐의 가정사정은 매우 복잡했다. 아니, 이것은 측천무후의 가정사정이라고 해야 옳은 것 같다. 그때까지 출신이 미천한 궁인 劉(유)씨가 낳은 李忠(이충)이 황태자였지만, 곧 쫓겨나고, 측천무후가 낳은 弘(홍)이 대신 황태자가 되었다.


그러나 이홍은 어느덧 성장해 ‘상남자’가 되었다. 바르다고 믿는 것은 무서운 어머니의 뜻에 거슬러서라도 직언을 했다. 측천무후는 자신의 이런 아들을 거북하게 생각한 것 같다.


황후가 된 지 10년이 흐른 674년의 일이지만, 측천무후는 황제&#8231 황후의 명칭을 고쳐 天皇(천황)&#8231 天后(천후)로 바꾸었다. 측천무후는 개명(改名) 마니아였다. 665년의 일이지만, 고구려가 제 말을 잘 안 듣는다고 해서 이웃나라의 국호를 제멋대로 ‘小句麗’(소구려)라고 개명하기도 했다.


664년 이후 통용된 ‘2聖(성)’의 표현에도 알 수 있지만, 그녀는 남녀관계의 對等(대등)을 추구했다. 당시 服喪(복상)의 제도에서는 아버지가 죽으면 3년, 어머니가 죽으면 1년 동안 상복을 입도록 정해져 있었다. 측천무후는 어머니의 죽음에도 3년의 복상을 하도록 고쳤다. 남녀평등의 선각자라고 해야 할 것 같다,


이 존호 개칭 다음해(675년), 황태자 이홍은 궁중에 유폐되어 있던 義陽(의양)공주와 宣城(선성)공주가 이미 30세를 넘은 노처녀이니 시급히 결혼시켜야 할 것이라고 당고종에게 상주했다. 이 두 공주는 측천무후에게 살해된 蕭淑妃(소숙비)의 소생으로서, 당고종에게는 친딸들이었다. 당고종은 황태자의 건의를 기쁜 마음으로 허락했다.


이것이 측천무후의 逆鱗(역린)을 건드린 셈이었다. 그 직후에 황태자 弘(홍)은 合壁宮(합벽궁)에서 急死(급사)했다. &#10218新唐書&#8231 신당서&#10219본기에는 “乙亥(을해: 675년), 天后(천후), 황태자를 죽이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측천무후는 타고난 정략가이며, 어머니이기 이전에 독재자였다. 이홍의 죽음에 의해 雍王 李玄(옹왕 이현)이 새로 황태자가 되었다. 이현은 고종의 제6자, 측천무후로서는 죽은 이홍 다음에 낳은 아들이었다.


측천무후가 황후가 된 후 그녀의 일족도 물론 활짝 피었다. 특히 일찍이 과부가 된 그녀의 언니 한국부인(韓國夫人)도 황궁에 자주 출입했다. 그러던 중에 당고종과 눈이 맞아 낳은 아들이 李玄(이현)이라는 소문도 나돌았다.


李玄은 학식이 있는 인물로서 그의 주위에 모인 학자 그룹과 함께 &#10218後漢書&#8231 후한서&#10219의 注(주)를 만들었다. 이것이 章懷太子(장회태자: 李玄)의 注로서 후세 연구자에게 큰 도움을 베푼 勞作(노작)이라 평가된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출생에 관한 비밀’을 어디선가 들었는지, 점차로 이상한 행동이 눈에 띄게 되었다. 실은 측천무후에 의해 “황태자의 자리에서 쫓겨날 것이다”라는 소문을 듣고 불안을 느꼈는지도 모른다. 아무튼 이현은 모반의 혐의를 받았다.


그의 마구간으로부터 수백 벌의 갑옷이 발견된 것이 증거물로 제시되어 황태자의 지위에서 쫓겨나 파주로 유배되었다. 거기서 그는 자살했다. 이후 측천무후의 궤적은 뒤에서 거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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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은 신라까지 지배하려다가 실크로드의 헤게머니를 잃었다


토번의 안서4진 공격으로 패망 위기에서 벗어난 신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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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의 지붕’ 파미르高原에 올라 한국사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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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하라 사막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타클라마칸 사막을 한 바퀴 돌고 ‘세계의 지붕’인 파미르 高原(고원)에 오르는 한국인은 짙은 감동에 휩싸일 수밖에 없다. 이곳에 가면 韓國史(한국사)의 결정적 순간을 느낄 수 있다.


세계제국 唐이 고구려와 백제의 故土(고토)를 독식(獨食)하고 신라까지 먹으려는 했을 때 서역(西域)의 신흥강국 토번(吐藩)이 실크로드의 핵심구간을 방어하는 唐의 안서4진(安西4鎭)을 공격했다. 이로써 당은 한반도와 서역에서의 2正面 전쟁을 강요당한 끝에 두 곳 모두에서 패전을 당해 세계제국의 지위를 상실하고 말았다. 당태종 때(630년), 명장 李靖(이정)이 東돌궐의 군주 힐리가한(詰利可汗)을 생포한 지 꼭 40년 만의 추락이었다.


또한 그곳은 한국역사상 최초의 세계인으로 손꼽히는 혜초(慧超)와 고선지(高仙芝)가 세계사적 족적(足跡)을 찍은 길이다. 필자는 혜초와 고선지의 족적을 답사하면서, 나&#8231 당 전쟁 시기에 한반도 전황과 맞물려 돌아갔던 安西都護府(안서도호부) 및 그 예하의 안서4진(安西四鎭) 등 실크로드 헤세머니 쟁탈전의 현장을 살펴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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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의 西域 진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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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은 唐朝(당조)의 실크로드 경략 과정을 잠시 살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당은 太宗(태종) 때부터 실크로드 교역상의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西域(서역)으로의 진출을 개시했다. 그때까지 서역 여러 나라들을 지배하고 있던 突厥(돌궐)을 대신하려 했던 것이다.


우선, 630년에 당은 東돌궐을 공파하고, 그 지배하에 있던 하미(哈密&#8231 합밀)의 소구드人 수령 石萬年(석만년)이 7개 城을 들어 항복해 온 것을 계기로 하미에 西伊州(632년에 伊州로 개칭)를 설치했다.


貞觀(정관) 9년(635)에는 李靖(이정)을 대장으로 하는 당군이 土谷渾(토욕혼)의 수도 伏俟城(복사성)을 함락시켰다. 토욕혼의 국왕 伏允(복윤)은 당군의 추격을 받고 도주 중에 병사했고, 그의 아들 伏順(복순)이 당에 항복해, 당의 괴뢰가 되었다.


이어 640년, 麴(국)씨의 高昌國(고창국)인 투르판(吐魯番)을 복속시켜 西州로 삼고, 그리고 天山산맥 북쪽 西돌궐의 거점 중 하나인 可汗浮圖城(가한부도성)을 공략해 庭州(정주)라 개칭하고, 하미에 伊州를 설치, 이들 直轄(직할) 3州를 서역 경영의 기초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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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어 648년에는 쿠차(龜玆)를 공략하고, 天山 북쪽에 파병해 스이아브(碎葉&#8231 쇄엽)城을 획득했다. 이때 카슈(疎勒)와 호탄(和田)의 왕이 항복함에 따라 쿠차&#8231 카슈&#8231 호탄&#8231 스이아브에 4都督府(도독부)를 설치하고, 쿠차에 설치된 安西都護府(안서도호부)가 관할토록 했다. 또한 이곳에 주둔 병력을 파견&#8231 진수시켜 서역 경영의 핵심으로 삼았다. 원래 안서도호부는 640년에 투르판에 처음 설치되었고, 658년 쿠차로 옮겼다. 이로써 당은 타림 盆地(분지)로부터 西트루키스탄까지의 서역을 지배하게 되었다.


당태종의 죽음을 기회로 보고 반기(叛旗)를 든 西돌궐의 아사나가로(阿史那賀魯)의 봉기(651∼657)로 서역 경영은 후퇴했지만, 657년 西돌궐을 멸망시켜 그 全영역을 차지한 당고종은 쿠차&#8231 카슈&#8231 호탄&#8231 카라샤르의 4鎭(진)을 다시 설치했다.


토번의 西域 경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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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의 서역 경영에 있어 최대의 적수는 吐藩(토번)이었다. 당군의 主力(주력)이 한반도 전선으로 향했던 정세 속에 토번은 662년부터 西돌궐의 일족인 弓月(궁월)과 손을 잡고 서역 진출을 꾀했다. 이어 663년에는 靑海(청해) 지역의 土谷渾(토욕혼)도 멸망시켰다.


토욕혼은 靑海로부터 차이담 盆地(분지)를 통해 西域南道(서역남도: 오아시스南道)로 연결되는 동서 交易(교역) 루트를 국가의 생명선으로 삼고 있었다. 다만 차이담의 루트는 標高(표고)가 높고 起伏(기복)이 심하며, 기후도 한랭해 겨울의 통행이 어려웠다.


또 이 루트의 중간 중간을 잇는 디딤돌 역할의 취락 등의 체제도 정비되어 있지 않았다. 따라서 메인 루트인 감숙성의 河西走廊(하서주랑)에 비해 조건이 훨씬 열악했다. 그러나 중국 측이 본격적으로 서역 경영에 나설 경우 청해는 하서주랑을 위협하는 지리적 위치를 점하고 있었다.


어떻든 당군이 한반도 전선에 몰입하던 시기에 토번은 본격적으로 서역 진출을 시작, 궁월&#8231 카슈와 연합해 호탄을 공격했다. 특히 나당전쟁의 개전 직전인 670년에 토번은 쿠차&#8231 카슈&#8231 호탄&#8231 카라샤르 등 唐의 안서4진을 함락시켰다. 이로써 당의 안서도호부는 西州(지금의 감숙성 돈황)으로 크게 물러났다.


서역의 정치지도는 자꾸 어지럽게 바뀌었다. 675년, 唐朝는 이들 安西4鎭을 탈환했지만, 토번은 西돌궐의 阿史那都支(아사나도지) 등과 연합해 또다시 안서도호부와 안서4진을 함락시켰다.


679년, 당은 長安에 망명해 있던 사산朝 페르시아의 王子 페로스(사실은 그의 아들인 나르세스)를 고국으로 돌려보낸다고 사칭하며 출병, 西돌궐의 阿史那都支(아사나도지) 등을 생포했다. 이때 스이아브(碎葉)을 포함한 安西4鎭(안서4진)이 회복되어, 스이아브에 중국식 성곽을 축조했다. 687년에는 토번이 서역을 제압했지만, 당군이 곧 스이아브를 포함한 4鎭을 탈환하기도 했다.


7세기 후반은 당과 토번의 서역 쟁탈전이 되풀이되던 시기였다. 이어 8세기 前半은 당현종의 전성기로서 서역에서도 당이 일단 주도권을 회복했다.


당시, 토번과 西돌궐의 일파인 튀르기쉬(突騎施)는 당의 패권을 인정하지 않았다. 때마침 서쪽으로부터 이슬람 세력이 진출해 왔다. 717년, 토번은 튀르기쉬&#8231 이슬람 세력과 함께 안서4진을 공격했다. 그러나 당의 優位(우위)는 유지되었다.


그런데 8세기의 중엽, 安史의 亂(난)을 경계로 당의 세력은 급격히 몰락하고, 일거에 토번이 서역을 지배하고, 실크로드의 상업적 이익을 누렸다. 이어 토번은 몽골 高原으로부터 서쪽으로 세력을 뻗어온 위구르와 충돌, 790년에는 천산산맥 북쪽 스텝로드(초원의 길)까지 잠시 지배했지만, 곧 반격을 받아 이후에는 天山南路(천산남도: 오아시스路의 북도와 남도)만 지배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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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인 혜초와 고선지의 발자국



통일신라의 구법승(求法僧) 혜초(慧超: 704-787)는 세계 문명교류의 선구자였다. 그에 앞서 아시아 대륙의 중심부를 海路(해로)→陸路(육로)로 통해 일주한 사람은 아무도 없었으며, 더욱이 중앙아시아의 서쪽 끝까지 다녀와서 여행기를 남긴 인물도 없었다. 그의 여행기 &#10218往五天竺國傳&#8231 왕오천축국전》은 8세기 인도(印度)와 중앙아시아에 관한 가장 정확한 명저로 평가되고 있다.


현재 프랑스 파리 국립도서관이 소장하고 있는 &#10218왕오천축국전&#10219은 현존하는 우리나라 最古(최고)의 서적이기도 하다. 往五天竺國傳이란 문자 그대로의 뜻은 “다섯 천축국(印度대륙 안에 있던 다섯 나라)을 다녀온 이야기”라는 뜻이다.


그는 인도의 5개 국 이외에도 중앙아시아 여러 나라를 여행했다. 여행기는 그가 거쳐간 방문국 단위로 서술되어 있고, 출발한 나라에서 목적한 나라로 가는 방향과 소요시간, 王城(왕성)의 위치와 규모, 통치상황, 대외관계, 기후와 지형, 특산물, 음식과 옷 등도 간결하지만, 생생하게 묘사되어 있다.


이 책에서 혜초는 최초로 아랍을‘大食(대식)’이라 명명(命名)했는데, 漢字(한자)문화권에서 처음으로 아랍국가에서의 견문도 후세에 전했다. 또 당시로서는 드물게 地名(지명)을 意譯(의역)하지 않고, 音譯(음역)했다는 점에서 언어학적 가치도 높다.


당의 판도를 최대로 넓힌 안서도호(安西都護) 고선지(702-756)는 고구려 유민 高舍鷄(고사계)의 아들이다. 안서도호라면 서역에 있는 4개 도독부를 통괄 지휘하는 최고사령관이다. 副도호 시절인 747년, 그는 파미르 고원을 넘어 중앙아시아 72개국을 복속시켰다.


그러나 시대 상황은 고선지에게 절대 불리했다. 양귀비(楊貴妃)에 홀려 국사를 소홀히 했던 당현종의 재위 후반기인 天寶연간(742-755)은 당나라의 국력이 급전직하(急轉直下)로 떨어졌던 반면 서(西)아시아의 이슬람勢(세)는 융성기를 맞고 있었다.


두 문명권이 격돌한 서기 751년의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는 동맹국 카르룩(葛邏祿)의 적전(敵前) 배신으로 배후가 찔려 뜻밖의 패전을 당하고 말았다. 적전 배신과 관련한 책임은 당나라 조정에 있었다.


바로 한해 전인 750년 원정 때 고선지는 쿠차로부터 타쉬겐트(石國)로 진입해 그 나라 왕을 포획해 이미 포로가 되어 있던 突騎施(돌기시)의 可汗(가한) 등과 함께 唐조정으로 호송했다. 그런데 욕심만 많고 국제정세에 어두웠던 당의 朝臣(조신)들은 포로로 잡은 타쉬겐트 王을 덜컹 참수(斬首)해 버렸다.


이에 분개한 타쉬겐트의 王子는 토번 등 서역 여러 나라와 이슬람 세계의 압바스朝을 끌어들여 당에 복수전을 감행했던 것이다. 탈라스 湖畔(호반)의 패전으로 당나라는 실크로드의 지배권을 완전히 상실했다.


그야 어떻든 탈라스 전투에서 고선지 휘하의 중국의 제지(製紙) 기술자들이 포획되어 이슬람 세계에 비장(秘藏)의 제지법을 처음으로 전수했다. 이런 기연(奇緣)에 의해 고선지는 세계문명사에서 결코 지워질 수 없는 이름 석 자를 남기게 되었다.


종이가 처음 만들어진 것은 서력(西曆)으로 1세기인 後漢 명제(明帝) 때였다. 중국의 3대 발명품 중 하나인 제지법(製紙法)은 중국의 국가비밀로 엄수되어, 그때까지 바깥세계에 알려지지 않았다. 이슬람 세계나 기독교 세계는 그들의 복음서를 값비싼 양피지(羊皮紙) 등에 기록하던 형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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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과 동행한 실크로드 쟁탈전의 현장 답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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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크로드의 핵심구간 오아시스路 일주



필자는 불교학 전공 동국대 교수&#8231 학생 등 28명으로 이뤄진 실크로드 답사단(12박 13일)에 참가했다. 필자로선 나당전쟁 시기에 전개되어 신라의 승전에 결정적으로 기여한 토번과 당의 실크로드 헤게머니 쟁탈전의 현장을 살피고 싶었다.


2004년 6월17일, 우리 일행은 북경에서 중국 민항기 편으로 신강(新疆)위구르자치구의 省都(성도)인 우루무치(烏魯木齊)에 내려 천산산맥 북쪽 기슭의 시가지를 둘러보았다.


이어 다른 여객기에 탑승해 만년설(萬年雪)로 뒤덮힌 천산산맥과 태양광선으로 이글거리는 타클라마칸 사막을 넘어 崑崙山脈(곤륜산맥) 북쪽 기슭에 위치한 호탄(和田)에 닿았다. 이후 호탄→야르칸드(莎車)→카슈(喀什)→파미르高原(고원)→아쿠스(阿克蘇)→쿠차(庫車)→쿠얼러(庫爾勒)湖→하미(哈密)→敦煌(돈황)으로 이어지는 실크로드의 오아시스路(로) 구간을 버스 혹은 기차를 타고 일주했다.



역사상의 서역(西域)은 현재 중국의 영토가 되어 신강위구르自治區라 불린다. 自治區(자치구)라면 얼핏 작다고 오해할 수 있지만, 신강자치구는 중국 영토 중 6분의 1에 달하는 면적이다. 그 절반인 신강의 남부는 북쪽으로 천산산맥, 남쪽으로는 곤륜산맥, 서쪽으로는 파미르 高原으로 폭 둘러싸인 거대한 분지이다. 럭비공 모습의 이 거대한 타림 盆地(분지) 내에는 사하라 사막에 이어 세계에서 두 번째로 넓은 타클라마칸 사막이 펼쳐져 있다.



타클라마칸 사막의 둘레에는 천산산맥과 崑崙(곤륜)산맥의 눈 녹은 물이 흘러내려 형성된 오아시스들이 흩어져 있다. 이런 오아시스와 오아시스를 이어주는 길이 오아시스路(로) 혹은 天山南路(천산남로)라 불린다. 오아시스路는 실크로드 중에서도 가장 번영한 東西(동서)교역로의 핵심 구간이었다. 이 길을 통해 중국제 비단&#8231 도자기&#8231 茶(차) 등이 멀리 유럽까지 수출되었고, 서방세계의 유리제품&#8231 금속제품 등이 동방세계로 수입되었다.



여기서 잠간, 唐과 西域(서역)의 관계를 살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당나라가 건국을 했던 서기 618년 무렵, 아시아 세계의 최강자는 알타이 산맥 부근 초원(草原)에서 유목을 하던 기마민족 突厥(돌궐)이었다. 突厥은 투르크의 중국식 音譯(음역)이다. 제철 기술에 뛰어난 돌궐은 초원의 최강자였던 柔然(유연)을 격파하고, 東으로는 內몽골, 西로는 南시베리아에 이르는 대제국을 건설했다.


돌궐의 可汗(가한)은 隋(수)제국의 건국 전에 北중국을 兩分(양분)하고 있던 東魏(동위)&#8231 西魏(서위)의 두 황제를 “나의 두 아들”이라 부르며, 거액의 세폐(歲幣)를 징수했다. 당나라도 건국 초기에 돌궐 기병 3천기의 지원으로 군웅들을 물리치고, 중국을 통일할 수 있었다. 이 때문에 당은 고조(高祖) 시기는 물론 貞觀(정관: 당태종의 연호) 초기까지 돌궐에 조공을 바쳐야만 했다.


그렇게 강성했던 돌궐도 내란으로 약화되기 시작했다. 내란이나 내분이야말로 국가의 망조(亡兆)이다. 630년, 당태종은 대장군 李靖(이정)을 파견해 東돌궐의 힐리가한(詰利可汗)을 사로잡았다. 같은 해(貞觀 4년) 대장군 李靖(이정)은 하미 바로 북쪽인 이오(伊吾)를 점령했다. 10년 후(640) 당태종은 侯君集(후군집)을 보내 高昌國(고창군: 지금의 투르판)을 멸했다. 고창국의 멸망은 고구려의 비상한 관심사였다. 다음은 &#10218삼국사기&#10219 고구려 영류왕 24년(641)의 관련 기사이다.



&lt 진대덕(陳大德: 당나라 정보기관인 職方의 책임자)은 사신으로 온 기회에 우리나라(고구려)의 國力을 살폈으나, 우리는 이를 알지 못했다. 大德이 본국으로 돌아가 보고하니 황제(당태종)가 기뻐하였다. 대덕은 황제에게 “고구려는 고창(高昌)이 멸망했다는 소문을 듣고 크게 두려워하여, 우리 사신의 숙소 접대 범절이 보통이 아니었습니다”라고 보고했다.&gt


고구려가 왜 고창국의 멸망을 두려워했는지는 후술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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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구르인은 사각모자를 벗지 않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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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4년 6월17일 저녁, 우리 답사팀은 호탄 공항에 도착했다. 호탄은 당나라 시절 안서도호부(安西都護府) 산하 안서4진 중 하나로서 고구려 유민 출신 고선지가 이곳 진수사(도독)로서 재임하던 당시엔 于&#38352(우전)이라고 불렸다. 호탄 빈관(賓館: 호텔)으로 직행해 짐을 풀고 호텔 옆 목노 주점에서 길동무들과 이 지방에서 생산되는 삐주(맥주)를 마시며 위구르동네 진입의 첫날밤을 자축했다.



北京시각으로 오전 1시 무렵이었다. 대학생 風(풍)의 위구르인 청년 7∼8 명이 기분 좋게 취한 모습으로 노래를 부르며 목로주점 앞을 지나갔다. 北京 시각으로는 새벽 1시였지만, 위구르인 생활리듬으로는 아직 일몰시각 전인 오후 11시였다. 나중에야 안 사실이지만, 위구르인은 베이징(北京)시각이야 어떻든 그들의 시계를 2시간 앞당겨 놓고 생활한다.


실제로 이곳 시가지 시계탑의 시각도 위구르 시간으로 돌아가고 있다. 위구르語로 소리 높여 부르는 위구르 노래. 앞으로 이런 젊음의 열정이 어디를 향해 분출할지, 그것이 궁금했다. 필자의 눈에는 이것이 위구르 독립운동의 전주곡처럼 들렸다.


위구르의 젊은 부인들은 얇은 천으로 머리와 얼굴을 가리고 외출하지만, 대부분의 남녀노소는 형형색색 문양의 사각모를 쓰고 있다. 이 사각모자야말로 위구르인의 아이덴티티(正體性)를 지키려는 몸짓인 것처럼 보인다. 위구르 모자를 쓰고 관청에 출입하면 수위나 경비병이 방문 목적 등을 꼬치꼬치 캐묻는 등 귀찮게 군다지만, 위구르人들은 그들의 사각모자를 결단코 벗으려 하지 않는다.


지금 호탄 지역은 새로운 꿈에 부풀어 있다. 최근, 근교의 타클라마칸 사막에서 대규모 油田(유전)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지난 1000년 동안 잃어버렸던 실크로드의 영광을 오일로드로 재현(再現)시킬는지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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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월18일, 아침부터 길을 떠나 메리어트 불교유적지와 호탄의 젖줄인 白玉河(백옥하)를 답사했다. 노새가 끄는 마차를 타고 좁은 길로 찾아간 메리어트 유적지는 황량한 모래땅에 흙으로 만든 불탑 하나만 퇴락한 채로 달랑 남아 있다. 그 아래 쪽으로 흐르는 백옥하로 내려가 손을 담궜더니 뜻밖에 “앗! 차가워”였다. 사막을 거치는 동안 물빛은 부옇게 변했지만, 그래도 崑崙山(곤륜산)에서 흘러내리는 얼음 녹은 물인 것이다.


호탄은 玉 특산지로 유명하다. 백옥하에서도 곤륜산으로부터 강물에 떠밀려 내려온 玉이 채집된다고 한다. 金을 좋아하는 기마민족과 달리 漢族(한족)은 玉(옥)을 매우 좋아한다. 옥을 좋아하다가 중국 천하를 잃은 사례까지 있다.


초패왕 項羽(항우)는 長安 근교 鴻門(홍문)에서 연회를 열고, 그 자리에서 劉邦(유방: 후일의 漢고조)을 제거하려 했으나 유방이 바친 玉구슬 한 쌍을 받고 마음이 누그러져 유방을 살려 보내는 실책을 범했다. 후일, 항우는 垓河(해하)의 싸움에서 유방의 漢軍(한군)에게 패해 전사했다.


6월19일 오전 9시, 버스를 타고 카슈가르를 향해 출발했다. 곤륜산맥 북쪽 기슭을 따라 이어지는 오아시스路의 南道(남도)구간 중 570km이다. ‘세계의 지붕’파미르 高原(고원)의 들머리에 위치한 카슈가르의 바자르(민속시장)는 오아시스路上의 명물로 이름 높다.


파미로 高原 동쪽에 펼쳐진 이 오아시스 도시의 정식 지명은 카스(喀什)이다. 그래도 주민들은 카슈가르라고 부른다. 카슈가르는‘오색 찬란하다’는 뜻의 카스(Kash)와 ‘집(家)’을 의미하는 가르(Gar)의 합성어라고 한다.


‘카슈가르’란 지명에 관한 최고의 기록은 8세기 초 신라의 승려 혜초의 여행기 &#10218往五天竺國傳&#8231 왕오천축국전&#10219에 보이는 伽師祗離(가사지리)이다. 당시 唐(당)의 서역 통치기구인 안서도호부의 예하 4鎭(진) 중 맨 서쪽에 위치한 鎭이었고, 당나라 군대가 주둔하여 현지의 小乘系(소승계) 절들과는 별도로 중국 승려가 주지였던 大雲寺(대운사)라는 절도 있었다는 사실도 &#10218왕오천축국전&#10219이 전하고 있다.


카슈가르에서 西進하면 이란&#8231 지중해로 가고, 南進하면 파키스탄&#8231 아프카니스탄&#8231 印度로 가는 실크로드이다. 747년 고선지의 부대는 안서도호부 소재 쿠차를 출발하여 카슈가르에 도착해 부대를 再정비하고 파미르 고원을 넘어 小勃律國(소발율국)에 이르는 원정을 감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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高仙芝의 탈라스 패전으로 실크로드 지배권 상실



6월20일 오전 9시, 우리는 대절버스를 타고 고선지의 원정로를 따라 파기스탄과 접경지역에 위치한 카라쿠리湖(호)를 향해 출발했다. 파미르 고원을 넘는 하이웨이는 무스타그峰 기슭을 통과한다. 무스타그峰은 萬年雪(만년설)을 이고 있다. 계곡에는 만년설이 녹아내려 오아시스에 물줄기를 보내고 있다. 옛 실크로드 옆으로는 천길 낭떠러지. 운전자가 졸기만 하면 추락사하는 위험구간이다.


붉은 산이 유별나게 많다. 중국의 문화혁명 때 홍위병들은 이곳의 붉은 흙을 파내 페인트 代用(대용)으로 급진좌파의 각종 구호를 아무데나 마구 썼다고 한다. 毛澤東(모택동)이 부추긴 紅衛兵(홍위병)이란 철부지들은 專(전: 나라의 발전) 보다 紅(홍: 공산주의 이데올로기)을 좋아해 중국사회를 30년 후퇴시켰다.


카슈에서 네 시간을 달려 카라쿠리 湖畔(호반)에 도착했다. 표고 3600m. 호반에서 중국돈 20위안을 지불하고 관광용 낙타와 말을 30분씩 번갈아 탔다. 기분이 좋아 호반 음식점의 계단을 깡총 뛰어오르는 순간 갑자기 가슴이 답답해졌다. 산소 부족에 의한 高山증세였다. 움직이지 않고 2∼3분쯤 가만히 주저앉아 있었더니 금세 편안해졌다.


6월21일, 이제부터 우리는 오아시스路의 北道(북도)를 따라 중국 內地(내지) 쪽으로 東進하게 된다. 카슈가르에서 대절버스로 470km를 무려 9시간이나 달려 아쿠스(阿克蘇)에 도착했다. 657년, 당고종은 蘇定方(소정방)을 파견하여 西돌궐의 아사나가로를 격파했고 659년에는 키르기스로 진출, 스이아브에 碎葉城(쇄엽성)을 쌓고, 이곳을 안서4진의 하나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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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트루크族 및 토번軍의 공격에 의해 당의 서역 지배는 차츰 동요하지만, 그래도 8세기 중엽까지는 당의 서쪽 판도가 쿠차→아쿠스(阿克蘇)로부터 천산산맥을 넘어 쇄엽성에 이르고, 여기로부터 서쪽 탈라스江 유역을 거쳐 타쉬겐트에 이르는 교역로는 당의 느슨한 지배하에 있었다. 그러나 751년 고선지가 탈라스 전투에서 아랍軍(군)에 패전한 이후 당은 서역에서 전면 퇴각했다.


6월23일 오전 9시, 쿠차를 출발, 쿠얼로로 출발해게 되어 있었다. 쿠차까지 와서 안서도호 고선지가 주둔했던 안서도호부의 유적지를 둘러보지 않을 수 없었다. 오전 7시, 쿠차빈관에서 ‘20년 길동무’인 권태균(故人) 교수와 함께 택시를 불러 타고 안서도호부 治所(치소)가 있다는 성벽을 찾아 나섰다. 택시로 15분 거리였다. 토성의 성벽은 1300년의 세월을 견디며 아직 300∼400m 쯤 남아 있었다.


기록에 따르면 이곳에 안서도호부 병력 3만 명이 주둔했다. 고선지는 쿠차에서 성장해서 고구려 유민인 아버지 고사계를 뒤이어 安西軍(안서군)에 입대했다. 고선지는 용모가 아름답고 말타기와 활쏘기에 능숙해 약관(20세)에 유격장군이 되었다.


안서도호부 취재를 마치고 호텔로 돌아와 답사단을 쿠알러(庫爾勒)로 이동시킬 전세버스에 올랐다. 큐얼러라면 고선지가 일찍이 호탄에 이어 鎭守使(진수사)로 복무했던 안서4鎭 중 하나인 焉耆(언기: 카라사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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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대지―투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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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기의 보스팅湖畔(호반)에서 1박한 우리는 다시 버스로 380km를 달려‘불타는 大地(대지)’로 이름난 투르판(吐魯番)을 향해 달렸다. 투르판의 여름철 온도는 썹시 45도를 웃돈다. 1년 강수량은 고작 40mm. 오전 9시에 버스를 타고 출발한 우리는 험준한 천산산맥의 협곡 2개를 통과하는 銀山路(은산로)를 넘고 넘어 오후 4시경에 점심을 먹기 위해 아이스케키로 이름난 고장 토크선(托克遜)에 들렀다.


미지근한 생수에 질린 끝에 아이스케키를 한 입 베어 무니 오장육부가 시원했다. 우선 수박과 하미果(참외와 비슷함)로 허기(虛飢)를 달랬다. 오후 5시경에야 허름한 식당의 노천 식탁에 앉아 볶음국수 한 사발 씩의 점심을 먹을 수 있었다. 은산로는 唐代(당대)에 병력과 군량을 수송하는 군사도로로 개설되었다고 한다.


오후 6시경, 투르판 분지에 진입해 高昌國(고창국)의 옛터 交河故城(교하고성)에 이르렀다. 교하고성은 야르호트(야트는 위구르語의 낭떠러지)라 불리는 높이 30m 정도의 절벽 위에 건설된 도시의 유적이다. 교하고성의 폐허와 마주하는 순간, 고창국왕 菊文泰(국문태)가 문득 필자의 머리에 떠올랐다.


고창국은 좀 이상한 나라였다. 서역에 있는 나라이지만, 그 국왕은 漢族(한족)이었다. 현재는 위구르人이 많지만, 당나라 초기에는 이란계(系) 주민이 많았다. 그렇지만, 트루판 盆地(분지)는 중국 본토와 비교적 가까워 한무제(漢武帝) 때 군부대의 屯田(둔전)이 시행된 탓인지 주민 중 한족(漢族)도 적지 않았다.


고창성의 유적은 지금도 남아 있다. 그때의 미이라도 전시되고 있었다. 궁전 및 사원의 건물이 모두 햇볕에 말린 흙벽돌로 만들어져 있고, 종교시설은 불교사찰뿐만 아니라 景敎(경교)라고 불리는 네스토리우스派(파)의 크리스트교, 이란 국교로서 拜火敎(배화교)라 불리는 조로아스터敎(교), 마니敎 사원도 있었다.


당태종의 즉위연도인 626년 구법을 위해 印度로 가던 명승 玄&#22872(현장)이 이곳에 들렀는데, 당시 고창국왕이 바로 麴文泰(국문태)였다. 그는 先代 왕 菊伯阿(국백아)의 王子로서, 수양제 시절에 入朝(입조)해 고구려 원정에도 종군했다. 이때 국백아가 隋(수)의 선비족 귀족인 宇文(우문)씨의 여성을 처로 삼아 장안과 낙양에 잠시 체재했다. 그녀는 華容公主(화용공주)라 불렸다.


수나라에서 당나라의 시대가 되어서도 고창국은 당에 진귀한 물품 바쳤고, 당나라도 화용공주에게 머리 장식 등을 선물하는 등 우호적인 관계를 지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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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창왕 국문태는 정관4년(630)에도 장안에서 체재하면서 수에 비해 당의 국력이 훨씬 약하다고 경시(輕視)했다가 정관 14년(640)에 나라를 망치고 말았다. 국문태가 귀국한 후 10년 동안 당의 국력이 급성장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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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이 세계제국으로 도약할 수 있었던 것은 서역의 오아시스 국가들에 대한 종주권과 동서교역로의 길목을 장악하고 있던 돌궐의 세력을 꺾음으로써 가능했다. 당은 태종 연간에 이미 투르판과 쿠차를 정복했다.


당은 고종 연간에도 또다시 원정군을 보내 西돌궐에 대해 결정타를 가했다. 이때 당은 카라샤르(焉耆&#8231 언기)에 있던 안서도호부를 쿠차로 전진시키고, 천산산맥 북쪽 기슭의 쇄엽성(碎葉城)에 도독부를 신설했다. 서기 658년의 일이다.


西돌궐 세력이 무너진 직후, 초원(草原)의 강자로 급부상한 것은 튀르기스(突騎施&#8231 돌기시) 부족이었다. 튀르기스의 출현에 의해 당의 서역 경영은 일시 守勢(수세)에 몰려 쇄엽성에 있던 도독부를 카라샤르로 후퇴시키기도 했다.


그러나 開元 27년(739)에 당현종은 튀르기스에 대한 대대적인 정벌전을 벌였다. 이후 서역에 있어 당의 지배권이 한동안 확립되었다. 그러나 당제국의 중흥과 시기를 같이하여 서방에서는 사라센 제국이 이슬람의 열정을 품고 불길 같이 일어나고 있었다.


사라센 제국은 팽창을 거듭하여 서쪽으로는 地中海(지중해) 세계를 석권하고, 동쪽으로는 시리아&#8231 페르시아&#8231 호라산 평야를 장악하고, 여기를 발판으로 삼아 파미르 高原 동쪽의 중국까지 제압하려 했다.


일단, 당은 토번과 사라센 제국의 연결을 차단하려 했다. 당시 토번은 당의 서역 진출을 끊임없이 견제해 온 티베트 高原의 강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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티베트 문서와 唐蕃會盟碑(당번회맹비)



탐험가 스타인과 페리오 등에 의해 타림분지 및 돈황의 막고굴(莫高窟) 등으로부터 약탈된 티베트 문서(文書) 중에는 불교 경전&#8228 서적 등이 많지만, 토번이 하서(河西: 감숙성)와 안서(安西: 신강) 점령 중의 행정 및 사원제도에 관한 서적과 문서도 적지 않다. 안록산의 난 후, 당의 군사력이 급격히 떨어지자, 토번은 지금의 서장자치구(西藏自治區: 티베트)&#8228 청해성&#8228 감숙성&#8228 신강위구르자치구의 전역, 그리고 영하(寧夏)회족자치구&#8228 사천성&#8228 섬서성 일부를 영유했다.


당시 토번의 수도였던 랏사의 조캉 寺院(사원) 앞에는 당과 토번이 821년과 822년 長安과 랏사에서 체결한 평화협상의 내용을 새긴 唐蕃會盟碑(당번회맹비)가 세워져 있다. 양국은 安史의 난 이후 오랫동안 전쟁상태에 있었으나 토번이 실효(實效) 지배를 해 온 하서(河西)와 농우(&#38580右)의 점령을 인정한다는 것 등이 이 비문의 골자이다.


중국 측 자료에 따르면 전성기(820년대) 토번의 서쪽 영토는 카슈가르와 파미르 高原을 넘어 호하(滸河)를 사이에 두고 이슬람의 최강국인 대식(大食)과 국경을 맞대고, 남쪽으로는 지금의 부탄&#8228 네팔에 이르고, 북쪽으로는 지금의 우루무치(烏魯木齊)∼거연택(居延澤) 선에서 內&#8228外몽골 지역의 강국인 회골(回&#40379: 위구르)과 국경을 맞대었다. 쉽게 말하면 토번의 영토가 당의 영토보다 훨씬 더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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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은 唐-倭의 동맹을 겁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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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촌강 전투 이후 왜국의 한반도 정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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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촌강(白村江) 전투 패전 직후 나당 연합국의 일본열도 정벌을 두려워한 왜국은 신라와 당에 납작 엎드린 모습이었다. 이런 시기에 당은 신라를 고립시키려는 책략으로 웅진도독부를 통한 對왜국 외교를 재개했다.


664년 5월, 백제 故土(고토)의 주둔군 사령관(웅진도독)이었던 劉仁願(유인원)은 조산대부 郭務悰(곽무종)을 파견하여 표함(表函)과 물품을 전했다. 표함 속에는,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왜국을 회유하는 외교문서가 담겨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665년 9월에는 당 조정에서 직접 조산대부 흔주사마 劉德高(유덕고)를 수석으로 하는 254 명의 맴머드 사절단을 왜국에 파견했다. 이렇듯 당은 동맹국 신라와 함께 對고구려전을 전개하면서도 정복지의 獨食(독식)을 위해 對왜국 외교를 전개했던 것이다.


이것은 신라 재상 金春秋(김춘추)와 당태종 李世民(이세민) 간에 합의한 648년 비밀협정을 위반한 배신행위였다. 그때 당태종은 백제 고지와 평양 이남의 땅은 신라가 차지하지 하는 데 합의했었다.


당의 이런 對왜국 접근에 위기를 느낀 신라가 對왜국 외교에 나선 것은 평양성 함락 직전이었던 668년 9월12일이었다. 신라에서 파견한 사절은 급찬(관등 제9위) 金東嚴(김동엄)이었다. 신라로선 고구려 정복 후 전후(戰後) 처리에서 예견되는 당의 배신과 독식 행위를 더 이상 묵과할 수는 없었던 것이다.


이 시기, 왜국의 대외정책은 위기감에 휩싸여 극히 불안정했다. 막대한 전비를 투입한 白村江(백촌강) 전투 등의 백제부흥군 지원 전쟁에서 패배함으로써 당시 왕위에 아직 오르지 않았지만 칭제(稱制)라는 이름으로 정권을 장악해 있던 왕자 나카노오에(中大兄&#8231 중대형)는 예상되는 일본열도 방위전 준비에 골몰했다.


664년, 나당연합군의 예상 침공로 上의 대마도(對馬島&#8231 쓰시마)&#8231 일기도(壹岐島&#8231 이키시마)&#8231 北규슈에 방인(防人)과 봉수(烽燧)를 배치하고, 大宰府(대재부 규슈의 통치기구 및 대외창구)를 방어하기 위해 수성(水城) 등을 축조했던 것이다.


665년에는 시모노세키의 간몬(關門: 관문)해협에 長門城(장문성&#8231 나카도죠), 大宰府(대재부&#8231 다이자이후) 주위에 大野城(대야성)과 椽城(연성&#8228 키죠)을 쌓고, 667년에는 왕도의 배후지에 高安城(고안성&#8231 다카야죠), 시고쿠(四國)의 사누키(讚岐)에 屋島城(옥도성:야시마죠), 대마도에 金田城(금전성&#8231 카네다죠)을 축조했다.


이렇게 대마도→이키島→北규슈→세토內海→수도권으로 이어지는 국방상의 요지에 방어용 군사시설을 설치, 경계태세를 강화했다. 백제 멸망과 백촌강 패전으로부터 불과 수년 사이에 국가적 총력을 기울인 토목공사로 인해 나카노오에(中大兄) 정권의 군사적 긴장도와 재정적 피로도는 가중되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왜국의 입장은 극적으로 호전되었다. 왜국은 당과 신라의 사절을 잇달아 받아들이는 양면(兩面)외교를 즐기면서 국가이익을 저울질했다. 한꺼번에 한 여자가 두 남자로부터 연애편지를 받은 셈이었다. 우여곡절을 겪긴 했지만, 결론은 신라를 우호국으로 선택하는 것이었다.


신라사 김동엄 일행에 대한 왜국 측의 대응은 이례적일 정도로 우호적이었다. 나카노오에 정권의 제2인자 나카도미노 가마다리(中臣鎌足)는 문무왕과 김유신에게 각기 선박 1척을 증정하고, 문무왕에게는 별도로 비단 50필, 솜 500근, 가죽 100매를 보내고, 김동엄 등 사절들에게도 선물을 따로 주었다.


아울러 귀국하는 신라 사절 편에 소산하 道守臣麻呂(도수신마려) 등 견신라사(遣新羅使)를 딸려 보냈다. 갑작스런 친(親)신라정책에의 전환에 대해 왜국 내부의 반발이 없지 않았지만, 가마다리는 단호하게 반대 의견을 일축했다.


일본의 親신라 외교노선은 당제국의 팽창정책을 깨닫고 脣亡齒寒(순망치한), 즉 신라가 망하면 일본도 춥다고 느낀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당은 웅진도독부를 거점으로 백제 故土(고토)에 대한 지배권을 강화하고, 왜국과 우호적이던 고구려를 멸한 다음엔 신라까지 관할 하에 두려는 안동도호부를 설치했다.


더욱이 동맹국이었던 신라를 견제하기 위해 왜국과의 교섭을 벌이는 당나라의 몰염치한 외교전략은 주변국에 신뢰감을 줄 수 없었던 것이다. 백제와 고구려에 이어 신라까지 먹으면, 다음 차례는 왜국 정벌이 될 것임은 자기중심적 中華主義(중화주의)를 살핀다면 뻔한 수순(手順)이었다.



백촌강전투에서의 패전은 왜국에게 대단한 트라우마였다. 이런 상황에서 신라 사신 김동업은 신라의 對唐 항전 의지를 전하고, 왜국의 협력을 구하려 했을 것이다. 신라는 669년에 사찬(신라관등 제8위) 督儒(독유), 671년에 사찬 金萬物(김만물)을 일본에 파견했다. 김만물을 통해 일본측은 문무왕에게 깁(絹: 명주실로 바탕을 좀 거칠게 짠 비단) 50필, 시(비단의 종류) 50필, (錦&#8231 금: 비단의 종류) 1000필, 가죽 100매를 보냈다.



한편 당은 671년 1월에 웅진도독부의 李守眞(이수진)을 보냈지만, 외교적 성과는 없었던 듯하다. 이에 따라 동년 11월에는 당 조정이 곽무종 등 웅진도독부에 파견되어 있던 당의 관리, 그리고 백제유민 등 2000여 명을 47척의 선박에 분승시켜 갑자기 일본에 보냈다.


이때의 2000여 명을 웃도는 사절단의 목적이 무엇인지는 명확치 않다. 당시 당의 당면과제가 對왜국 군사외교인 점을 감안한다면, 백제부흥전쟁이 참가한 왜인 포로를 송환함으로써 왜국과의 관계개선을 이뤄 신라를 南北에서 협공하려는 것이 당의 속셈이었던 것 같다.



이에 대해 왜국 조정은 곽무종 일행에게 갑주(甲&#20881)와 궁시(弓矢)를 비롯, 비단 1673필, 피륙 2852단, 솜 666근을 주었다. 이것은 양국의 군사적 협력 체제의 구축으로 보기 보다는 오히려 일본인 포로의 송환에 대한 답례 차원이었던 것으로 판단된다.


어떻든 이후 견당사(遣唐使)가 부활되는 701년까지 30년간 일본과 당은 외교적 공백(空白)상태를 지속한다. 더욱이 671년 12월, 일본에서는 사상 초유의 내란이 벌어져 대외적(對外的) 이니셔티브가 불가능한 상태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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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사 최대의 내전으로 성립된 天武정권


―30년간 신라로부터 律令제도 배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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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서 숙부와 조카가 격돌한 古代 일본 최대의 내란인‘임신(壬申)의 난’을 짚어볼 필요가 있다. 그것은 親신라 정권의 성립이라 할 수 다.


대화개신(大化改新)을 주도해 독재 권력을 잡았지만,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나당 연합군에게 참패한 후 국내 개혁을 진행시켜 온 왜왕 덴치(天智: 나카노오에)는 자기의 후계자로 유력했던 동모제(同母弟)인 오아마(大海人) 왕자가 아닌 친아들인 오토모(大友) 왕자를 지명했다. 오토모는 친아들이기는 하지만, 첩복(妾腹)인 관계로 왕위계승 서열상으로는 오아마의 아래였다.


오아마 왕자는, 兄王(형왕) 덴치로부터 오토모의 즉위에 협력하라는 요청을 받았지만, 거절하고 출가(出家)하여, 산악지대인 요시노(吉野)에 은거하며, 때를 기다렸다. 671년 12월3일, 왜왕 덴가 죽자, 그 동안의 철권통치에 대한 불만이 터져나오기 시작했다.


요시노에 잠복해 있던 오아마 왕자는 이 기회를 이용해 672년 6월에 거병, 미노(美濃)로 들어가 병사를 동원해 전투준비를 갖추었다. 그래서 반란군을 3隊로 나눠 近江大津宮(근강대진궁&#8231 오미오쓰미야)으로 進攻(진공)했다.


오토모는 조정군을 동원해 맞받아쳤지만, 大和(야마토) 지방의 호족들을 포섭한 오아마의 반란군은 각 지역에서 조정군을 압도했다. 東일본에서 대규모 모병을 했던 것이 오아마의 승인(勝因)이었다.


패배한 오토모는 오쓰宮으로 돌아가 자결했다(672년 7월23일). 패인은 東일본에서의 모병에서 오아마에게 선수를 빼앗겼을 뿐만 아니라, 규슈에서도 현지 호족을 설득하는 데 실패했던 것이다.


오아마는 673년 7월23일 왜왕으로 즉위했다. 그가 곧 왜왕 천무(天武&#8228 덴무)이다. 天武는 일본역사상 최초로 天皇(천황: 덴노)를 자칭했지만, 중국과의 외교문서 등에서는 공식화할 수 없었다.


이런 천무왜왕과 그의 처로서 뒤를 이은 지통(持統)여왕, 그리고 천무왜왕의 손자 文武왜왕 의 시대에 천왕을 정점으로 하는 율령(律令)제도가 완성되었다. 律令(율령) 이란 형벌에 관한 법인 律(율)과 국가제도에 관한 법인 영(令)을 합친 말이다.


율령을 확립했다고 하는 것은 그 전까지 지역에 따라 다르게 내려오던 관습이나 규칙, 임금과 신하와의 관계, 국가조직 등을 확정했다는 것이다, 율령의 반포로 국가는 여러 부족의 연합체의 차원에서, 국왕 중심의 사회로 조직화되었다.


율령제도는 원래 당나라에서 확립된 통치제도이지만, 일본에서의 확립기인 天武∼持統 시기에 일본은 견당사(遣唐使)를 파견한 일이 없다. 669년에 제6회 견당사 파견 후, 일본이 제7회 견당사를 파견한 것은 대보율령(大保律令)의 제정 다음 해인 702년의 일이었다. 이 사이 33년간 일본은 신라로부터 율령(律令)제도 등을 배웠다.


신라나 일본은 당의 律令을 모방했지만, 각각 그 나라의 형편에 맞추어 다소의 수정을 가했다. 예컨대 당의 律令에서는 기본적으로 신분이 어떠하더라도 科擧(과거)를 통해서 학식이 인정되면 관료로서 채용되었다. 그러나 신라와 일본은 엄격한 과거제도를 설치하지 않았다. 신라에서는 骨品(골품)에 따라 관료 승진의 上限(상한)이 결정되었고, 일본에서는 유력자의 제자를 無시험으로 채용했다.


어떻든 702년 일본의 견당사는 율령국가로서의 확립을 배경으로 하고 있었는데, 이 사절은 당에 가서 처음으로 스스로를 ‘日本의 使者’라고 칭했다. &#10218舊唐書&#8231 구당서&#10219에 의하면 당 측은 이것을 수상하게 생각해 질문해보았지만, 그 대답은 요령이 없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즉, 日本이 이때까지의 倭(왜)를 멸하고 세워진 새로운 왕조인가, 아니면 단순히 이름만 바꾼 것인가를 명확히 밝히지 못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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측천무후의 唐朝 찬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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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고종은 683년 12월에 죽었다. 병약했지만, 그는 그의 아버지 태종보다 오히려 세 살을 더 살아 향년 56세였다. 하지만 간질로 정무를 제대로 볼 수 없는 상태가 오래 계속되어 실제 나랏일을 처리한 것은 則天武后(측천무후)였다.


따라서 고종 死後(사후) 20년 동안만 측천무후의 시대가 아니었다. 그녀가 황후로 세워져 고종이 죽기까지 30년간도 측천무후의 시대로 간주된다. 이 우먼파워는 무려 반세기 동안 중국의 정권을 장악했던 것이다.


이런 장기 집권이 어떻게 가능했던 것일까? 그 첫째는 무측천의 공포정치였다. 그녀를 황후로 세우는 데 반대했던 장손무기(長孫無忌: 당고종의 외삼촌) 및 저수량(楮遂良) 등 대신들이 비참하게 제거되었음은 앞에서 썼다. 또 그녀는 밀고를 장려해 신하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했고, 밀고당한 인물의 혐의가 사실이 아니더라도 혹리(酷吏)가 고문을 가해 인간을 말살해버리기 일쑤였다.


남편인 당고종이 죽은 이후에 측천무후라 부르는 것은 좀 어색함으로 황태후 이후의 그녀를 이 글에서 武則天(무측천) 혹은 周則天(주측천)으로 호칭한다. 무측천은 어머니이기 이전에 혹독한 캐릭터의 정략가(政略家)였다. 그녀 所生(소생)의 황태자들인 이홍(李弘)과 이현(李賢)에 대한 피의 숙청은 앞에서 거론했다.



683년 12월, 당고종이 죽은 후, 황태자 이현(李顯: 죽임을 당한 李賢의 동생)이 즉위했다. 그가 중종(中宗)이다. 무측천은 황태후가 되었다. 그런데 中宗은 자기의 생모(生母)인 무측천이 어떤 사람인지, 확실하게는 몰랐던 듯하다. 어떻든 中宗은 그의 아버지 고종처럼 공처가여서, 처가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반대하지 못하는 성격이었다.


당중종의 황후 위(韋)씨는 그녀의 시어머니인 무측천을 지켜보면서 그녀를 롤 모델로 삼은 여성이었다. “황후라는 지위가 저처럼 막강한 것인가?” 라며 부러워했던 것 같다. 韋황후는 唐中宗을 들쑤셔 그녀의 아버지 위현정을 문하시중(門下侍中)이라는 재상의 반열에 올렸다.



무측천은 격노했다. 원래 人事(인사) 일체는 무측천, 그녀 자신이 장악해 온 일이었다. 이대로 두면 中宗 부처가 더욱 우쭐해질 것으로 판단한 무측천은 中宗을 폐위해 노릉왕으로 강등시켜버렸다. 이제 남은 무측천의 소생으로는 당고종의 제8자 이단(李旦)이 있었다. 이단이 즉위했는데, 그가 예종(睿宗)이다.


예종은, 즉위 54일 만에 황제 자리에서 굴러떨어진 형의 모습을 지켜보았던 만큼, 어머니 무측천이 무슨 짓을 하든 숨을 죽이고 못 본 척했다 그것이 보신(保身)을 위한 최선의 방법이었다.


무측천은 690년 唐왕조를 폐하고, 武씨의 왕조를 새로 세워 국호를 주(周)라 일컬었다. 지난 35년간에 걸친 집정(執政)의 경험으로 그녀는 국정을 요리할 자신이 있었던 것 같다.


武씨 왕조를 세우려 했던 만큼 그 준비를 위해 武씨가 요로(要路)를 장악해 있어야 했다. 우선, 친정조카인 무승사(武承嗣)를 재상으로 기용했다. 다음은 낙양(洛陽)을 신도(神都)로 개명해 이곳을 황도(皇都)로 삼았다.


그녀는 長安보다 洛陽(낙양)을 좋아했다. 長安의 궁궐에서 그녀가 죽인 王황후와 蕭淑妃(소숙비)의 저주를 겁냈기 때문이다. 소숙비는 죽기 전에 무측천에게“너는 내세(來世)에 쥐로 태어나라. 나는 고양이로 환생해 너의 목젖을 물어줄 테다!”라는 독설을 퍼부었다. 무측천은 이후 궁중에서 고양이 키우기를 금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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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척 고아(孤兒)는 어디에 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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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양으로 천도한 그 해(684)에 무측천에게 소외된 좌천(左遷)그룹이 장강 北岸(북안)의 당대 제1의 국제도시 양주(揚州)에서 거병했다. 반란의 주모자는 이경업(李敬業)이었다. 그는 무측천이 황후가 되는 데 제1공을 세운 李勣(이적 故人)의 손자였는데도 불구하고, 무측천의 시대에 종3품 미주자사(眉州刺史)로부터 종5품 유주사마(柳州司馬)로 좌천되었다.


현령(정6품)에서 면직된 그의 동생 이경유(李敬猷)도 가담했다. 엘리트 시인으로서 초당(初唐)의 4걸(傑) 중 1인으로 손꼽혔던 낙빈왕(駱賓王)도 이경업의 막료가 되어 무측천을 매도하는 격렬한 격문을 썼다.


낙빈왕은 왕위에 있던 인물이 아니라 姓이 낙빈, 이름이 외자인 王이다. 그는 장안현(長安縣)의 주부(主簿: 종7품)로부터 임해현승(臨海縣丞: 종8품)으로 좌천된 하급 관료였다. 당시 수도 長安은 장안현(長安縣)+ 만년현(萬年縣)으로 구성되어 있었다.



이경업의 가문은 원래 서(徐)씨다. 그의 조부는, 668년 9월에 평양성 공파(攻破) 고구려를 패망시킨 이적(李勣)이다. 이적의 본 이름은 서세적(徐世勣)이었다. 서세적은 수(隋) 말의 혼란기에 군웅 중 1인이었던 이밀(李密)의 부장이었다.


이밀을 따라 당에 투항한 서세적에게 당고조는 국성인 李씨를 내렸다. 이세적은 당태종 이세민(李世民)의 이름자 중‘世’자를 기휘(忌諱)해 이적이라 칭했다. 이적의 손자인 이경업이 모반하 무측천 國姓(국성)을 취소함으로써 그는 서경업이 되었다. 이미 故人이 된 이적의 묘가 파헤쳐져 시신까지 훼손되었다고 한다.


낙빈왕의 격문은 “거짓으로서 임조(臨朝)하고 있는 武씨는 인품이 온순하지 않고, 출신도 실로 한미(寒微)하다”라고 꼬집으면서, “한웅큼의 흙도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6척의 고아(孤兒)는 어디에 있느뇨?“라는 유명한 문구를 넣었다.


장안 교외 양산(梁山)에 당고종의 능이 완공된 것은 684년 8월의 일이었다. 그 흙이 아직 마르지 않았는데, 이미 成人이 된 고아(中宗)는 지금 어디가 있느냐 라는 뜻이었다. 중종은 황위에서 쫓겨났고, 그의 동생인 예종은 別宮(별궁)에 사실상 연금되어 있어 정치 관여가 허용되지 않았다.


어떻든 이 격문을 보고 무측천은“재상의 잘못이다! 이 같이 재능 있는 사람을 내쳐서는…”라고 한탄했다고 전해진다. 유능한 인물에게 적당한 관직을 주어 회유하지 않은 것은 재상의 과실이라는 것이다.


이경업은 전략이 나빴다. 낙양이나 장안으로 빨리 진군가면서 중도에서 세(勢)를 불리려 하지 않고, 江南의 南京(남경)으로 물러나 현상유지에 급급하다가 무측천이 파견한 이효일(李孝逸)의 30만 대군에게 간단히 진압되었다. 이때 백제 출신 장수 흑치상지(黑齒常之)도 강남도행군총관으로 반란 진압에 참전했다.


그 무렵, 낙양의 궁전에 설회의(薛悔義)라는 정체불명의 승려가 무측천의 사랑을 얻어 출입하고 있었다. 본명을 풍소보(馮小&#23453)라고 하는 藥(약) 행상 출신이었다. 당고종의 고모(당태종의 여동생)인 천금공주(千金公主)가 무측천에게 소개한 사내다. 풍채와 언변이 좋았다. 무측천의 잠자리 상대가 된 설회의는 낙양 백마사(白馬寺)의 사주(寺主)로 벼락 출세하여 무측천의 명에 의해 명당(明堂)을 건립했다.


明堂(명당)이란 上古시대 주(周)나라의 성천자(聖天子)가 정무를 보았다던 건물을 말한다. 명당의 모습에 대한 유자(儒者)들의 의견이 백출해 그 재현은 쉽지 않았다. 무측천은 말 많은 유자들의 의견을 무시한 채, 건원전(乾元殿)을 허물고, 수만의 인부를 동원해 놓고, 설회의를 공사의 총재로 삼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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周의 창업과 각개격파당한 당나라의 황족들



688년 4월, 明堂의 낙성식 날짜를 정해놓고, 여러 주(州)의 자사(刺史: 지방장관)로 재임 중인 족들에게 열흘 전까지 신도(神都: 낙양)에 집합하도록 하명했다. 의식이란 별게 아니라 낙수(洛水)의 신(神)에게 절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무측천의 조카 무승사가 심복에게“聖母臨人 永昌帝業(성모께서 재림해 제업을 번창시킨다)”라는 8字를 나무판자에 새겨 洛水(낙수)에 띄워놓게 한 후에 이것을 건져 올려 무측천에게 바쳤던 것이다.


무측천은 매우 기뻐하여, 그것을‘寶圖(보도)’라 부르고, 洛水(낙수)의 신과 하늘에 감사하는 의식을 올리려 했다. 새로운 왕조를 개창할 때 하늘은 으레 서기(瑞氣)를 보인다는 말이 믿어지던 시대였다.


성천자(聖天子)의 집무소인 明堂을 건설한 것도 즉위 준비에 다름 아니었다. 무측천은 자기의 왕조를 주(周)라 칭하기로 했다.


당왕조의 족인 李씨들의 분노는 당연했다. 조정의 요직은 이미 武씨 일족이 차지했고, 국성(國姓)이던 關籠李氏(관롱이씨)는 이미 찬밥 신세였다. 자사(刺史)로서 지방에 있던 李씨들을 낙양으로 갑자기 집결시키는 것은 일망타진(一網打盡)을 노린 흉계(凶計)였다. 상경(上京)하면 잡혀 죽고, 上京하지 않아도 명령 위반으로 처형될 판이었다.


당고종의 숙부인 韓王 李元嘉(한왕 이원가), 그의 아들 黃國公(황국공) 이찬, 고종의 바로 손위형인 월왕 이정(李貞), 그의 아들 낭야왕 이충(李沖) 등이 각지의 족을 규합해 反무측천의 기치를 높이 들었다. 이 거병도 무측천에 의해 금방 진압되었다. 무측천으로서는 오히려 그들의 거병이 바라는 바였을 것이다. 격살당하거나 자살하든가 해서 당의 실은 이 패전에 의해 거의 전멸하고 말았다.


패전의 요인은 팀워크의 혼란이었다. 일제히 거병했다면 무측천도 토벌 목표가 헷갈려 작전상 곤란했을 터였다. 그런데도 낭야왕 이충이 다른 왕족과 연락도 취하지 않고, 먼저 거병을 했다, 이에 그의 아버지 월왕 이정은 놀라 호응했지만, 다른 왕족은 주저해 일제 봉기에 실패했다. 무측천으로서는 각개격파(各個擊破)가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나 패인은 그뿐 아니었다. 이경업의 봉기 때와 마찬가지로 일반 백성들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았던 것이다. 역시 그것도 ‘唐 실의 가정문제’이지, 민중에게는 절실한 문제가 아니었다.


한편 총애를 믿고 거들먹거리던 가짜 승려 설회의에 대한 무측천의 총애는 대번에 식어버렸다. 그녀의 총애는 심(沈)이라는 어의(御醫)에게로 넘어갔다. 이에 발끈한 설회의는 명당에 불을 지르는 등 소동을 벌였지만, 무측천은 힘센 궁녀 하나를 보내 그의 목을 졸라 죽여 버렸다. 그 후 무측천의 노리개는 장역지(張易之), 장창종(張昌宗)이란 미소년 형제로 옮아갔다.


무승사(武承嗣)&#8231 무삼사(武三思) 등 武씨 일족 사이에도 세력다툼이 있었지만, 그런 것 모두가 백성들과는 무관한 별세계의 일이었다.


드디어, 여러 신하들의 거듭된 청원에 응하는 형식으로 무측천이 즉위해, 성신황제(聖神皇帝)로 칭하고, 국호도 주(周)로 고친 것은 690년 9월의 일이었다. 명목상 당의 황제였던 예종 李旦(이단)은, 周의 성신황제 무측천의 황사(皇嗣: 태자)가 되고, 武씨 姓(성)을 받아야만 했다.


그 후에 황사는 684년 황제에서 폐위되었던 중종 李顯(이현)으로 교체되었다. 황사문제는 극히 미묘했던 것으로 본래 무승사 및 무삼사가 후계 황제의 지위를 다투어 연로한 무측천도 동요했던 것 같다. 이때, 재상 적인걸(狄仁傑)이 조카가 고모의 후계자가 되어서 제사를 행하는 것은 古來(고래)로 들어본 바가 없다고 반대해, 결국 폐위당한 친아들을 다시 皇嗣(황사)로 정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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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太宗이란 묘호에 대한 무측천의 시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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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 신문왕 12년(692) 봄 조를 보면 이해하기 어려운 구절이 있다.


&lt 당중종(唐中宗)이 사신을 보내 구두로 다음과 같은 칙명을 전했다.


“우리 太宗 文皇帝(태종 문황제)는 신성한 공덕이 천고(千古)에 뛰어났으니, 붕어한 날 묘호(廟號)를 태종(太宗)이라 하였다. 그런데 당신 나라 선왕(先王) 김춘추에게도 동일한 묘호(廟號)를 쓴 것은 매우 참람된 일이다. 조속히 칭호를 고쳐야 한다.” &gt



신문왕(神文王)은 문무왕의 장남으로서 왕위를 승계한 신라 제31대 국왕으로, 692년은 그의 재위 12년이었다. 신문왕은 그해 가을 7월에 별세다. 좀 이상한 것은 ‘唐中宗’이란 부분이다. 이 해에 ‘唐中宗’이란 존재는 폐위당한 지 8년의 세월이 흐른 뒤였고, 당을 찬탈하여 주(周: 690-705)를 창업한 무측천의 在位 3년째였다.


따라서 太宗武烈王(태종무열왕) 김춘추의 廟號(묘호)를 고치라고 神文王(신문왕)에게 강요한 것은 당중종이 아니라 周의 女帝(여제) 무측천이라 해야 옳다. 아마도 儒學者(유학자) 인 &lt&lt삼국사기&gt&gt의 저자 金富軾(김부식)은 당을 15년간 찬탈한 女帝(여제)의 존재를 인정하고 싶지 않았던 듯하다.


684년에 폐위된 당중종 李顯(이현)은 692년 자기의 성(姓)까지 무(武)씨로 고쳐놓고 周의 태자로 되어 있던 형편이었다. 당태종 李世敏(이세민)은 폐위된 이현(李顯)에게는 조부, 무측천에게는 지아비이자 시아버지가 되는 야릇한 존재이다. 무측천의 압력을 받은 신문왕은 이렇게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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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나라 先王 김춘추(金春秋)의 시호가 우연히 성조(聖祖)의 묘호와 서로 같게 되었는데, 칙령으로 이를 고치라고 하니 감히 명령을 따르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생각컨대, 先王 김춘추도 자못 어진 덕이 있었으며, 더구나 생전에 어진 신하 김유신(金庾信)을 얻어 한 마음으로 정치를 하여 삼한(三韓)을 통일하였으니, 그의 공업(功業)이 크지 않다고 할 수 없습니다. 그가 별세하던 때에 온 나라의 신민들이 그를 추모하는 심정이 극진하여 추존한 묘호가 성조(聖祖)의 묘호에 저촉됨을 깨닫지 못하였습니다. 이제 교칙(敎勅)을 들으니 송구스러움을 다할 수 없습니다. 사신이 황제에게 복명하되, 이대로 보고해 주시기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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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록 언사는 부드러웠지만, 결국은 태종무열왕의 묘호를 바꿀 수 없다는 뜻을 피력했던 것이다. 이것을 바로 신라 외교의 能小能大(능소능대)함이다. 이후, 무측천은 태종무열왕의 묘호 문제를 다시는 거론하지 못했다. 이후 역대 중국 어느 왕조도 韓民族(한민족)의 왕조에서 太祖&#8228 太宗 등의 廟號(묘호)를 사용하는 데 시비를 걸지 못했다. 아무튼 신라와 당 사이의 긴장관계는 계속되었다.


바로 이 해(692)에 무측천은 서역(西域)에서 중대한 군사적 승리를 쟁취했다. 왕효걸(王孝傑)을 무위군(武威軍) 총관에 임명해 토번군을 先制(선제) 공격했다. 그 결과, 당고종 때 빼앗겼던 쿠차(龜玆)&#8228 호탄(和田)&#8228 카슈가르(疎勒)&#8228 스이아브(碎葉)의 4진(鎭)을 일시나마 수복하고, 安西都護府(안서도호부)를 쿠차에 다시 설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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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건국



그러나 무측천은 異民族(이민족) 정책에서 파탄을 일으키기 시작했다. 696년 5월, 거란족 추장 이진충(李盡忠)이 무상가한(無上可汗)이라 칭하고, 영주(營州: 지금의 요녕성 朝陽)에서 擧兵(거병)했다.


이때 영주에 집단거주하고 있던 고구려 유민은 두 패로 갈라졌다. 한 패는 무측천의 주군(周軍)에 협조하고, 다른 한 패는 대조영(大祚榮)의 지휘 하에 걸사비우(乞四比羽)의 말갈족과 함께 연주성(燕州城: 요녕성 의현)→여라수착(汝羅守捉: 칠리하 부근)을 경유, 요동지역으로 이동했다.


697년 6월, 대조영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은 추격하는 주군(周軍)을 천문령(天文嶺)에서 요격해 패퇴시켰다. 말갈족을 포함한 대조영 집단은 목단강(牧丹江) 유역의 서고성자(西古城子), 지금의 돈화현 동모산(東牟山)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세력화 했다. 무측천은 회유책으로 대조영의 아버지 걸걸중상(乞乞仲象)에게 진국공(震國公), 말갈추장 걸사비우에게 허국공(許國公)의 작위를 주었다.


698년, 대조영은 진국(震國)을 세웠다. 700년, 진국은 신라에 사신을 파견해 새 왕조의 건국을 공식 통보했다. 이때 신라 孝昭王(효소왕)은 진국의 高王(고왕) 대조영에게 대아찬(大阿&#28236)의 관위를 부여했다. 대아찬이라면 신라 17관등 중 제5위에 해당한다. 이웃나라의 임금을 관등 제5위로 평가한 것은 非우호적 처사였다.


713년, 당현종은 사신을 震(진)에 파견하여 대조영을 渤海群王 忽汗州都督(발해군왕 홀한주도독)으로 책봉했다. 이로부터 국호가 震에서 발해(渤海)로 바뀌었다.


무측천 시대에는 震國과 대체로 불화했다. 무측천은 698년 보장왕 고장의 아들 고덕무(高德武)를 安東都督(안동도독)으로 임명하여 대조영의 진국을 견제했다.


705년, 무측천이 쿠데타로 쫓겨나고, 中宗이 복위한 이후 당은 발해(진국)와의 관계를 개선해 갔다. 당이 대조영을 발해군왕 홀한주도독(渤海郡王 忽汗州都督으)로 임명한 것은 당현종의 開元 원년(713)이었다. 714년, 당과 거란이 전투를 벌일 때 발해는 中立을 지켰다. 737년, 발해는 무왕의 둘째 왕자인 大欽武(대흠무)의 즉위(文王)을 계기로 적극적인 對唐 외교를 추진, 당과의 관계를 크게 개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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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則天, 신라에 弔問사절 파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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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제정치는 생물(生物)이다. 震國(진국)이 건국한 이후 당은 신라와 관계개선을 도모한다. 다음은 그런 변화를 알리는 《삼국사기》 성덕왕 즉위년도(701년)의 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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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당(唐)의 측천무후가 효소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애도하기 위하여, 이틀간 조회를 하지 않았으며, 사신을 보내 조문하는 동시에 (성덕)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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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의 《삼국사기》 기록 중에서 ‘唐’은 ‘周’(주)로 표기되어야 맞다. 이에 대한 답례로 신라가 女帝 무측천의 周에 조공한 것은 성덕왕 2년(703)의 일이었다. 이후 성덕왕 때의 신라는 무측천이 폐위된 705년까지 周에 사신을 보내 토산물을 바쳤다.


성덕왕 12년(713), 신라가 사신을 보내 당에 조공하니 당현종이 문루에 나와 사신을 접견했다. 이때가 현종의 開元(개원) 원년이었다. 무측천 사후(死後)에 중종에 이어 唐황제로 복위한 예종이 712년 8월에 차남 이융기(李隆基)에게 양위(讓位)했는데, 이융기가, 재위 전반기에 당의 중흥기(開元의 治)를 열었던 현종(玄宗)이다.


당현종 이후 나-당 관계는 차츰 개선되어 갔다. 그래도 신라는 먹성 좋은 당을 경계한 나머지 오만방자해진 일본과의 관계를 인내하면서 지속했다.


그러나 정세는 변하기 시작했다. 726년, 唐은 발해의 배후에 흑수주(黑水州)를 설치했다. 고구려유민 10%와 말갈인 90%로 이뤄진 발해의 입장에서 당제국이 말갈의 흑수부(黑水部)를 직할지로 삼은 것은 발해에 대한 무서운 견제였다. 728년, 당은 흑수말갈 추장에게 당의 국성(國姓)인 李씨와 헌성(獻誠)이란 이름을 내리고, 운휘장군 흑수경략사(雲麾將軍 黑水經略使)를 제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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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발해는 팽창정책을 구사하던 제2대 대무예(大武藝) 왕의 시대였다. 대무예 왕의 동생 대문예(大文藝)가 이끄는 對唐 정벌군이 출발했다. 그러나 대문예는 국경에서 進軍(진군)을 멈추고, 대무예 왕에게 출정의 재고(再考)를 건의하는 상소를 올렸다. 이에 대무예 왕이 발끈하자, 대문예는 730년 당으로 망명했다.


당연히, 발해-당 간의 관계가 험악해졌다. 드디어 732년, 장문휴(張文休)가 지휘하는 발해의 수륙군이 山東반도의 요지인 등주(登州)에 상륙, 선제(先制)공격을 가했다. 이때 발해군은 등주(登州)자사 위준(韋俊)을 죽인 후 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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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자의 몸으로 황제가 되었는데,


어찌 남자 첩을 못 두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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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말머리를 周의 무측천 시대로 되돌려야 할 것 같다. 무측천은“여자의 몸으로 황제가 되었는데, 어찌하여 남자 첩을 두지 못하겠는가?”라고 말했던 남녀동등사상의 인물이었다. 무측천 만년(晩年)의 조정은, 미소년 張哥(장가) 형제의 천하였다.


황사(皇嗣)의 장남 이중윤(李重潤)은 아버지가 당고종의 황태자였을 때 태어나 황태손(皇太孫)으로 세워진 인물이었다. 19세의 중윤은 張형제가 거들먹거리고 있는 꼴을 보고 화가 났다.


이중윤의 여동생인 영태군주(永泰郡主)가 무승사의 장남인 무연기(武延基)에게 시집갔던 만큼 이중윤과 무연기는 처남매부 사이이다. 둘은 張哥(장가) 형제가 궁중에 출입하는 것은 좋지 않다고 비판했는데, 그것이 무측천의 귀에 들어갔다.


무측천은 이중윤과 무연기 부처를 죽여버렸다. 셋 모두 무측천과 피가 연결되는 젊은이들이다. 이중윤과 영태郡主는 그녀의 손자 &#8231 손녀이고, 무연기는 친정조카의 아들이다. 이 일은 무측천이 죽기 4년 전인 701년의 일이었다.


705년, 무측천이 폐위당하고 복위한 唐中宗(당중종)은 그들을 애처롭게 생각해 이중윤를 懿德太子(의덕태자), 永泰郡主(영태군주)를 영태公主로 추증했다. 이중윤은 조모에게 살해당했을 때 아직 독신이었다. 마침 국자감승 裵粹(배수)의 딸이 요절해 이중윤과 冥婚(명혼: 영혼결혼)을 시켜 합장했다.


의덕태자와 영태공주의 묘는 조부 당고종과 조모 무측천이 합장된 건릉의 배총(陪&#20898)으로 가까이에 있다. 이런 표독한 조모의 무덤 곁에 묻히는 것을 그들이 바랐을 리 만무하다. 다만 그들의 묘에는 빼어난 벽화가 그려져 있어 후세 사람들의 관심을 모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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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는, 무측천을 여제에서 끌어내린 장간지(張柬之)의 쿠데타에 대해 잠시 언급해야할 차례이다.


80세의 老재상 張柬之(장간지)는 황제 친위대의 지휘관들을 포섭해 거사에 착수했다. 황태자를 옹립해 영선궁(迎仙宮)의 장생전(長生殿)으로 돌진했다. 장생전의 복도에서 張형제를 베고, 무측천의 병실로 뛰어들어가, “張형제가 모반해 그들을 주살했다”고 告(고)했다. 형부소경인 桓彦範(항언범)이 나아가 무측천에게 퇴위를 강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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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옛날, 天皇(천황: 당고종)께서 애자(愛子)를 폐하(무측천)께 맡기셨습니다. 이제 태자께서 年齒(연치: 나이)가 장년인데, 오래 동궁(東宮)에 머물고 계셔서, 天意(천의)와 人心(인심)은 이제 李씨를 그리워합니다. 군신(群臣)은 태종과 천황의 덕을 잊지 않은 까닭에 태자를 받들어 적신(賊臣)을 주살했습니다. 원컨대 폐하, 제위(帝位)를 태자에게 전함으로써 하늘과 사람의 바램에 따르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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武則天(무측천)의 역사적 功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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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세기에 걸쳐 군림했던 여걸도 늙고 병들었다. 이제는 어쩔 수 없었다. 705년 1월, 병상의 무측천은 龍床(용상)에서 내려와 거처를 상양궁(上陽宮)으로 옮겨야 했다. 그 해 2월에는 정식으로 唐이라는 국호가 부활하고, 무측천의 周는 멸망했다.


張형제에게 아부했던 일당은 모두 주살되고, 무측천 시대에 공포정치의 집행자로서 밀고&#8231 고문&#8231 처형을 자행했던 혹리(酷吏)들인 周興(주흥)&#8231 來俊臣(내준신)&#8231 索元&#31036(색원래) 일당 중 살아 있는 자들은 처행되었고, 이미 죽은 자에 대해서는 그 죄가 유족에게 미쳤다.


무측천에게 살해된 王황후와 蕭숙비의 일족에게 붙여졌던 '770(망: 구렁이)과 梟(효: 올빼미) 등의 姓(성)도 취소되어 본래 姓으로 되돌아갔다.


705년 11월에 무측천이 죽었다. 항년은 77세 설(說)로부터 83세 說까지 있다. 그녀를 乾陵(건릉)에 고종과 합장하는 것에 대해 반대론이 강했다. 반대의 이유는, 건릉의 玄宮(현궁 임금의 무덤방)이 돌문으로 되어 있고, 쇠로 땜질해 봉한 것으로서, 현궁을 다시 여는 공사는 좋지 않다는 것 등이었다.


또 합장은 古制(고제)가 아니라 따를 수 없다는 반대도 있었다. 여러 가지 이유를 들고 있었지만, 결국은 당을 찬탈한 여성을 唐황제의 무덤에 함께 넣는 것에 대한 반감이었다. 그러나 찬탈자라 해도 그녀는 今上(금상) 황제의 친어머니였다. 당중종은 반대 의견을 물리치고, 합장을 단행했다.



건릉의 참도(參道)에는 석인(石人), 석수(石獸)가 열지어 서 있고. 무측천의 글인 고종의 현덕비(顯德碑)도 세워져 있다. 그리고 현덕비를 마주보는 곳에 석비(石碑) 하나가 세워져 있는데, 그 유명한 무측천의 몰자비(沒字碑)이다.


몰자비라는 것은 글자가 없는 석비라는 뜻이다. 생각해보면 건릉 조성이 시작된 것은 고종이 사망했던 20년 전으로, 무측천은 아직 건재했다. 고종의 덕을 찬양하는 말을 비에 새길 때, 당연 미래에 합장될 것인 무측천을 위해 참도(參道)를 사이에 둔 대칭의 석비를 세우게 했다. 생전에는 그 석비에 문자를 새길 수는 없었을 터이다.


몰자비에 대해서 이런 구전(口傳)도 있다. 무측천은 자기의 덕(德)과 공적이 언어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뛰어나 문자를 새기지 않았다는 것 등이다.


진상은, 무측천을 거기에 합장했던 후, 석비에 넣어야 할 말이 궁색해 비워두었던 것으로 보인다. 그러나 당을 찬탈해 周왕조를 세웠던 무측천의 행적을, 곧이곧대로 석비에 새길 수는 없었을 것이다. 唐代(당대) 이후 오랜 세월, 그 거대한 석비에는 글자를 새기지 못했다.



무측천에 대한 평판은 그다지 향기롭지 못하지만, 그를 변호하는 史家(사가)도 적지는 않다. 또 그녀를 엄중하게 비판해도, 일면의 장점을 잊지 않고 덧붙이는 史家도 있다.


반세기에 걸친 그녀의 집권기에 농민폭동이 발생하지는 않았다. 반란을 일으켰던 것은 좌천당한 그룹과 이씨 왕족들이었지만, 그들의 거병은 앞에서도 지적했지만, 백성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무측천의 시대에는 천재(天災)가 적지 않았지만, 그때마다 그녀는 적절한 구호정책을 시행했다. 그것은 실무관료가 직무에 충실하도록 그녀가 엄격히 관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자치통감》에는 무측천을 다음과 같이 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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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함부로 녹위(祿位)로써 천하의 人心을 손에 넣었지만, 그러나 직책에 맞지 않는 자는 찾아서 쫓아내고, 혹은 형주(刑誅)를 가했다. 형상(刑賞)의 힘을 끼고 천하를 제어해 정치가 자신으로부터 나오게 함으로써 당시의 영현(英賢)들이 다투어 그녀에게 기용되려 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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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녀는 인재 등용에 열심이었다. 용서 없이 해임 혹은 좌천(左遷), 때로는 처형까지 했다. 그녀에게는 사람을 보는 눈이 있었고, 또 유능한 인물은 일하는 보람을 느끼도록 환경을 조성했다. 업적이 있으면, 반드시 인정을 받았기 때문에 서로 경쟁적으로 일했던 것이다. 현재 대한국민과 같은 대통령단임제의 나라에서는 그런 업적을 내기 어렵다.


그녀의 공포(恐怖)정치는 잘 알려진 대로, 혹리(酷吏)를 기용해 唐朝(당조)의 왕족, 귀족, 중신들을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이 죽였지만, 그 후 그녀는 그것을 실행한 혹리도 거의 전부 죽여 버렸다. 살해의 원흉은 그녀 자신이 틀림없었지만, 혹리 3인방에게 천하의 원망(怨望)을 집중시켜 그들을 주살함으로써 천하 사람들로 하여금 쾌재를 부르게 했던 것이다.


무측천은 말(馬)를 제압하는 데 세 가지 물건이 있다고 말했다. 첫째는 쇠채찍(鐵鞭)이고, 둘째는 쇠몽둥이, 셋째는 비수라는 것이다. 쇠채찍으로 때려도 복종하지 않으면, 그 머리를 쇠몽둥이로 두들기고, 그래도 복종하지 않으면 비수로 숨통을 끊어버린다는 뜻이었다. 무측천은 말(馬)길들이는 방식으로 신하들을 휘어잡았다.


여기서 무측천의 퇴위 이후 당나라의 정계를 잠시 짚어볼 필요가 있다. 中宗이 복위했지만, 그도 그의 아버지 고종처럼 공처가(恐妻家)였다.


재상 장간지(張柬之)의 쿠데타에 의해 周나라는 소멸하고 唐이 부활했지만, 그것이 武(무)씨의 소멸을 의미하는 것은 아니었다, 반세기에 걸쳐 武씨는 궁정 안팎에 깊은 뿌리를 내리고 있었던 것이다. 찬탈자라 해도 무측천은 今上 황제의 친어머니이었던 만큼, 그 일족을 숙청하는 것은 그리 쉽지 않았다. 장간지는 武씨 일족을 일소하도록 건의했지만, 중종은 승낙하지 않았다.


그런 당중종은, 무측천처럼 女帝를 노린 그의 아내 韋(위)황후에게 독살되었다(710년). 위황후는 사돈관계인 무승사(무측천의 조카)와 불륜관계였지만, 당중종은 눈치를 채지 못한 것 같다. 위황후와 皇太女(황태녀)를 꿈꾸었던 그녀의 딸 太平公主는 예종의 차남 李隆基(이융기)의 쿠데타로 주살당했다. 독살당한 중종에 이어 예종이 복위했지만, 곧 그의 차남 이융기에게 양위했다. 712년 8월에 즉위한 이융기가 바로 당현종이다.


당현종은 당의 최장수 황제로 재위(45년간) 前期의 연호는 開元(개원:713 ∼741)이었고, 후기의 연호는 天寶(천보: 742∼756년)였다.


당의 부흥기인 현종(玄宗)의 재위 前期인 개원(開元) 시대에 재상으로 활약한 사람은 모두 무측천이 발굴한 인재들이었다. 누사덕(婁師德), 학처준, 요숭(姚崇), 송경(宋璟) 등이 그들이다. 현종도 자기 조모의 인물 보는 눈에 관해서만은 전폭적으로 신뢰했다고 해도 좋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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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을 겁낼 이유가 사라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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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현종은 발해의 침공에 보복하기 위해 신라 성덕왕에게 원군을 요청했다. 다음은 《삼국사기》 성덕왕 32년(733)의 관련기사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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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성덕왕) 32년 가을 7월, 발해에 소속된 말갈(靺鞨)이 바다를 건너 등주(登州)를 침범하므로, 당현종이 태복원외경 김사란(金思蘭)을 귀국시키면서 성덕왕에게 開府儀同三司 寧海軍使(개부의동삼사 영해군사)의 작위를 더하여 주고, 김사란에게 군사를 주어 말갈(발해를 말함)의 남부 지방을 공격하도록 하였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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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사란은 신라의 왕족. 그는 사신으로서 당의 조회에 참석했다가 당현종의 눈에 띄어 宿衛(숙위: 황제경호관)로 머물게 되었는데, 이 시기에 당의 對外 업무를 맡게 된 것이다. 그러나 이때 신라군과 발해軍의 전투는 불발로 끝났다. 마침 큰 눈이 내려 산길이 막혔고, 신라군의 사망자가 절반이 넘어, 아무런 전공을 세우지 못하고 회군했던 것이다.


이 시기에 신라와 당의 동맹관계를 63년 만에 완전히 복원되었다. 성덕왕 34년(735)에 당현종은 패강(浿江: 대동강) 이남의 땅이 신라의 영토임을 공식 인정하는 조칙을 내렸다.


당과의 관계가 좋아지면 이제 신라에게 일본은 더 이상 겁나는 존재가 아니었다. 734년에 일본에 파견된 신라사신은 신라를‘왕성국(王城國)’이라 표현하자 일본 측에 의해 귀국을 재촉당하는 등의 푸대접을 받았으며, 736년 신라에 파견된 일본 사신은 “신라가 상례(常禮)를 지키지 않는다”고 일본 조정에 보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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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일본 측은 신라의 태도에 발끈하여 신라 정벌 운운하며 허세를 부렸지만, 742년 경덕왕(景德王)은 신라에 온 일본 사신을 접견조차 하지 않았다. 743년에는 신라 사신이 일본국왕에게 증정하려고 지참한 물품을 토모(土毛)라 칭해 일본을 멸시하는 자세를 취했다고 트집을 잡으면서 신라 사신을 그냥 돌려보냈다.


신라를 번국(蕃國)으로 취급해 종주국(宗主國)으로 군림하려는 일본의 오만함이 결국 신라의 반발을 사고 말았던 것이다. 이에 일본은 759년부터 762년에 걸쳐서 신라정토계획을 세웠다. 당시 당은 安史의 난(755∼763)이 일어나 일본으로서도 당의 간섭을 배제할 수 있는 호기(好機)였다. 우선, 신라와 숙적 관계였던 발해와의 공동작전이 계획되어 군함 건조 등을 추진했다.


그러나 문왕 대흠무(文王 大欽武)의 즉위(737년) 이래 발해는 당과의 관계를 개선해 왔으며, 당현종도 대흠무를 발해郡王에서 발해國王으로 격상시키는 등 우호의 메시지를 보내고 있었다. 이런 정세 하에서 결국 일본은 신라 정벌 계획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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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와 발해의 병립시기를 남북국시대로 볼 수 없는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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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통일신라와 발해의 竝立期(병립기)를 우리 역사의 南北國(남북국)시대라 주장하는 역사학자들에게 다음의 질문을 하고 싶다. 그렇다면 唐 중기 이후와 北宋(북송)을 통일왕조로 볼 것인가, 아닌가?


흔히 중국 역사상 통일왕조로 간주하는 北宋 시대에는 지금의 동북3성과 內몽골자치구에는 거란족의 遼(요)→여진족(말갈족의 후예)의 金(금)나라가, 지금의 寧夏回族自治州(영하회족자치주)와 甘肅省(감숙성)에는 당항족의 西夏(서하), 지금의 靑海省(청해성)과 西藏(서장)자치주에는 吐藩諸國(토번제국), 지금의 新疆(신강)위구르自治區에는 回&#40379(회골), 그리고 지금의 운남성과 귀주성에는 大理國(대리국)이 병립해 있었다.


또, 문무대왕의 신라와 7년 전쟁을 했던 시기의 당제국은 이미 토번으로부터 실크로드의 이권을 탈취당하고 있었으며, 安史의 난(755∼763) 이후에는 토번이 黃河(황하)의 大彎曲部(대만곡부) 以西의 땅을, 回&#40379(회골)이 내몽골 이북의 땅을 각각 차지했고, 지금의 만주에는 발해가 웅거하고 있었다


그러나 중기 이후의 唐이나 北宋시대를 중국사에서 南北國 시대니 東西國시대라고 부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전성기 인구 100만 내외의 발해는 韓民族(한민족)의 역사에 넣는 것은 당연하다. 비록 발해의 인구구성에 있어 고구려유민이 10%, 말갈족이 90%를 점하고 있었다고는 하지만, 建國君主(건국군주)인 大祚榮(대조영)과 지배층이 고구려의 후예를 자처했기 때문이다. 지금도 永順 太氏(영순 태씨)는 그들의 족보에 大祚榮을 始祖(시조)로 올려놓고 있다.



그렇다고 해서 발해를 통일신라와 對等(대등)하게 보고, 그 竝立(병립)시기를 우리 민족사의 南北國時代(남북국시대)로 설정할 수는 없다. 발해는 고려 태조 9년(926) 거란족의 遼(요)나라에 멸망당했는데, 그 후 고려에 歸附(귀부)한 발해유민은 10만 명에 불과했다.


발해는 건국 초기엔 당연히 당과 불화했지만, 제3대 文王 이후 唐제국의 朝貢冊封體制(조공책봉체제) 하에 들어간 것 역시 역사적 사실이다. 한때 발해와 일본은 신라를 침공하려는 군사동맹을 맺었으나 발해의 소극적 태도로 불발에 그친 일도 있다.


남북국시대가 성립되기 위해서는 발해가 우리 민족사에 남긴 유산이 신라에 버금가는 정도가 되어야 할 것이다. 또 대조영의 出自(출자) 문제도 좀 더 명확하게 확정할 필요가 있다.


사서에 따르면 대조영의 아버지 이름은 乞乞仲象(걸걸중상)이다. 乞乞 등의 複姓(복성) 때문에 대조영의 出自(출자)를 말갈족으로 보는 연구자도 적지 않다.


말갈족의 후예인 여진족은 훗날 중국의 북반부를 차지한 金(금), 全중국을 차지한 淸(청)이라는 정복국가들을 세웠다. 그렇다면 여진족이 세운 金과 淸을 우리 역사에서 어떻게 취급해야 할 것인지에 대한 설명도 필요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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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북한의 경제력은 남한의 50분의 1이다. 남한의 좌파정권으로부터 막대한 원조를 받기 직전인 1990년대 중반엔 배고파 죽은 북한사람이 그 인구의 10분의 1을 웃돌았다. 2016년 7월, 국제연합은 북한 주민의 40%가 영양부족 상태라는 보고서를 내놓기도 했다. 이런 가운데 핵무기와 미사일 개발에 몰두하는 북한을 놓고 남북국 시대의 하나로 분류하는 것조차 염치없는 행위이다.


고구려가 멸망했을 때 고구려의 유민 중 20여만 명이 당나라에 끌려갔다. 중국땅에는 아직도 高麗堡(고려보)니 百濟鄕(백제향)이란 지명이 남아 있지만, 그곳의 고구려&#8231 백제유민의 후손들은 벌써 漢族(한족)이 되어버렸다.


전성기의 발해가 당으로부터 ‘海東盛國’(해동성국)이라는 평가를 받기도 했지만, 발해가 우리 민족사에 끼친 영향은 너무도 미미하다. 그러나 우리의 고등학교 검인정 교과서의 대부분은 별다른 설명도 없이‘남북국시대’를 설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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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직도 못 버린 中華主義的 사고방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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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드(高高度미사일방어체계)의 한국 배치 이후, 중국 외교는 한국에 대해 매우 거칠어졌다.中華主義的(중화주의적) 사고방식을 아직도 청산하지 못한 때문일 것이다. 중국의 공산당 기관지인 人民日報(인민일보)는 “미국과 중&#8231 러 간에 충돌이 발생할 경우 한국은 첫 번째 공격 대상이 될 것”이라는 협박까지 하고 있다. 중국의 언론, 심지어 지방신문까지 공산당 기관지인 만큼 그들의 論調(논조)는 중국정부의 주장이라고 보아야 한다.


이런 상황에서 김대중-노무현 대통령의 좌파정권 집권시절에 통일부장관 지낸 사람이 중국공산당 매체인 신화통신과의 인터뷰에서“사드 배치 결정은 박근혜 정부의 명백한 외교적 실패이며, 대북 강경정책을 계속하다가 미국의 함정에 빠졌다”고 주장했다.


중국 편에 서서 사드 배치를 반대하는 글을 중국공산당 기관지에 기고한 사람들은 노무현정권의 청와대 비서관, 박근혜 정권을 반대하는 현직 대학교수 등이다. 야당 국회의원 6명은 사드 문제를 중국 측과 논의한다면서 중국을 다녀왔다.


그러나 지금까지 이들의 입에서 북핵과 미사일을 어떻게 막을 것인지에 대해선 한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다. 좌파 논객 중에는 빨리 중국이 뭔가 보복조치 하기를 바라기라도 하는 듯이 말하는 사람들까지 있다.


한국의 現상황은 매우 어렵다. 미국 공화당 대통령 후보 트럼프는 한국 안보의 ‘無賃乘車論’(무임승차론)을 들먹이며 주한미군 철수를 주장했을 뿐만 아니라 “한&#8231 미 FTA(자유무역협정)는 미국의 재앙”라며 그의 눈에 만만하게 보인 한국부터 옥죄고 있다. 그런 그에게 누군가가 한국에 대한 미국의 貿易外收支(무역외수지) 등에 관한 설명만은 해 주어야 할 것 같다. .


2016년 연말의 미국 대통령 선거에서 누가 이기든 미국의 외교정책은 상당기간 新고립주의로 흐를 공산이 없지 않다. 예컨대 한국에서 남침전쟁이 재발한다 하더라도, 미국의 지상군 증원은 기대하기 어렵다. 6.25남침전쟁 때 한반도에서 발생한 미군 전사&#8231 병사&#8231 사고사를 합친 사망자의 수는 5만2000 명을 웃돌았지만, 이제 미국은 그런 희생을 감내하지는 않을 것이다. 한미동맹에 異常(이상)이 없다고 하더라도 해군과 공군의 지원에 그칠 것이다.


2016뇬 8월, 북한은 일본의 EEZ(배타적 경제수역)에다 노동미사일 한 발을 발사했다. 한반도 유사시 駐日美軍(주일미군)의 개입을 막기 위한 제1단계 공작이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위기상황이라면 문무대왕은 어떤 조치를 취했을 것인가? 국가의 命運(명운)이 걸린 시기인 만큼 우선 내부적 단합부터 기할 것 같다. 그 방법은 피의 숙청이었다. 자유민주국가인 오늘의 대한민국으로서 반역행위에 대한 피의 숙청이 사실상 어렵다면 그것에 대한 법의 엄격한 집행에 기대할 수밖에 없다.


조국을 매도하는 타국의 입장에 서서 그들의 선전&#8231 선동 매체의 論調(논조)에 영합하고, 정부의 결단에 반대하는 것은 국가 반역행위로 간주될 수밖에 없다. 코 흘리는 아이들도 매도하는 乙巳五賊(을사오적)의 필두 李完用(이완용) 같은 매국노가 우리 땅에 다시 등장해서는 아니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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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天皇’ 칭호는 한일관계사 왜곡의 출발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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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황’(天皇&#8231 덴노)이라는 칭호가 성립한 시기에 관해서는 여러 설이 있지만, ‘日本’이란 국호가 성립하는 7세기 말, 즉 왜왕 천무(天武)&#8231 지통(持統)의 집권 시기이다. 일본 사서에서 그때까지의 왜왕(倭王: 오키미)을 모두 天皇(천황&#8231 덴노)이라고 일컫고 있지만, 물론 부적절한 표현이다. 일본에서의‘천황’이라는 칭호는 중국 황제를 부러워해, 그것을 흉내 내려했던 의식의 발로였다.


천명(天命)을 받은 중화(中華) 황제가 세계의 중심에 군림하고, 주변 여러 나라의 수장(首長)이 이것에 조공(朝貢)하여 작위(爵位)를 받는다는 소위 中華 시스템은 당시 東아시아 세계의 국제질서였음은 부인할 수 없다. 예컨대 唐을 중심으로 하고, 신라&#8231 발해&#8231 왜국 등이 주변에 배치된다는 형태였다.


그러나 왜국은 중국의 침략을 배제할 수 있는 범선(帆船: 돛배)시대에 섬나라가 지닌 지리적(地理的) 이점을 활용해 그들도 中華帝國(중화제국)의 축소판을 지향하려 했다. 그것의 구체적 시도가 바로 ‘天皇’ 칭호였다.


천황, 즉 황제는 夷狄(이적)을 복속시켜 天下에 군림한다는 존재에 다름 아니며, 그런 존재라면 조공국(朝貢國)이 존재하지 않으면 안 된다. 일본열도 내의 ‘夷狄’(이적)인 하이(蝦夷&#8231 에미시)&#8231 준인(&#38588人&#8231 하야토) 등과 함께 한반도의 삼국도 ‘조공국’으로 제맘대로 평가절하되었다. 즉, 당은 인국(隣國: 이웃나라), 신라와 발해는 번국(蕃國)으로 설정했던 것이다. 현실과는 동떨어진 과대망상(誇大妄想)이었다.



그들이 천황을 칭하든 신국(神國)을 자처하든 그것이 그들만의 문제라면 우리가 알 바 아니다. 그러나 그것이 한반도를 복속시키는 것을 전제로 한 개념이라는 점에서‘천황’의 설정은 애시당초부터 역사왜곡이며, 특히 한일관계사에 관한 한 만악(萬惡)의 根源(근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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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와 같은 천황, 결국 한반도 복속을 필요불가결의 요소로 삼은 천황 칭호가 창출된 시기를 주목할 필요가 있다. 삼국시대의 패권을 다툰 백제&#8231 고구려&#8231 신라는 모두 자기 생존을 위해 배후의 왜국을 우호국으로 끌어들이려는 외교적 노력에 적극적이었던 만큼 삼국에 대한 왜국의 영향력이 컸음은 부인할 수 없다.


그러나 왜국은 白村江(백촌강) 전투의 패배와 신라의 삼국통일에 의해 한반도에 대한 영향력을 일거에 상실하게 되었다. 이러한 시기에 한반도의 복속을 전제로 한 ‘천황’ 칭호가 창설되었다는 점에서 그것은 처음부터 허구(虛構)를 수반하는, 원초적인 역사왜곡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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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냐하면 “조선의 3국이 천황의 덕을 그리워해 조공을 해왔다”는 설화를 조작해야 했던 것이다. 그로부터 일본에는 百濟王(백제왕)&#8231 高麗王(고려왕)이란 성씨를 가진 천황의 신하까지 등장했다. 그것은 그들에게 선진문화를 가르쳐준 스승의 은혜를 원수로 갚는 배신행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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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국을 흉내낸 일본의 퍼포먼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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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왕 天武(천무)는 율령(律令) 제정과 거의 동시에 역사서의 편찬을 명했는데, 그것이 720년에 &#10218日本書紀&#8228 일본서기&#10219로 완성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사서(史書)라기 보다는 천황 통치의 정통화(正統化)를 위한 이념서였다.


소위 신공황후(神功皇后)의 삼한(三韓) 정벌이나 임나일본부(任那日本府)의 설치 등은 단순한 허구(虛構)가 아니었다. 천황이 천황이기 위해서는 일본에 복속하는 한반도의 ‘조공국’이라는 역사 왜곡이 반드시 필요했던 것이다.


고구려&#8228 백제&#8228 신라&#8228 伽倻諸國(가야제국)과 왜국 사이에는 호오(好惡)간에 밀접한 교섭이 존재했고, 상황에 따라 왜가 優勢(우세) 또는 劣勢(열세)했던 상황 등이 전개되었다. 그러나 《일본서기》는 왜가 일관해서 삼국을 복속시켜 조공을 받았고, 임나(任那)에는 日本府(일본부)를 두고 직접 지배했다는 따위의 허구들을 만들어 열거했다. 이와 같이 ‘日本’ 창출에 관련해 조작한 이야기가 그 후 일본인의 대한관(對韓觀) 형성에 막대한 영향력을 행사하게 된다.



어떻든 책봉(冊封)관계의 구체적 사례로 들먹여지는 것이 백촌강 전투(663년)를 앞둔 시기의 일이다. 당시, 왜국의 실질적 집권자인 太子 나카노오에(中大兄)는 왜국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夫餘豊)에게 호위 군사 5000명을 딸려 귀국시킬 때 직관(織冠: 관등 제1위)을 부여해 왜국의 신하로 삼았다.


662년, 백제의 옛 땅으로 돌아온 부여풍은 백제왕 ‘즉위의 의식’을 거행했다. 왜왕의 신하인 인물이 백제부흥운동집단에서 백제왕으로 행세했던 만큼 백제왕은 왜왕에게 책봉을 받았다는 억지이다. 어쨌든 황제국을 흉내 낸 왜국의 퍼포먼스는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왜병 3만2000 명을 포함한 백제부흥군이 궤멸함으로써 실패로 끝났다.


그러나 미련이 계속되었다. 백촌강 전투 후 왜국에 망명한 부여풍의 동생 선광(善光)에게 ‘백제왕’(百濟王)이란 성(姓)을 부여해 왜의 왕경(王京)에 거주토록 했다. ‘천황’이 백제왕을 신하로 데리고 있다는 허구(虛構)를 유지하기 위한 술책이었던 것이다.


壬申의 亂(임신의 난&#8231 672년)의 결과로 백제부흥군을 지원했던 天智(덴치)系가 망하고. 天武(덴무)系 왕권이 성립했다. 唐과 전쟁을 벌이고 있던 신라로서는 일본과의 관계를 개선할 수 있는 절호의 기회로 판단했을 터이다.


《일본서기》에 따르면 673년 6월, 신라는 대아찬 김승원(金承元) 등 진골들로 이루어진 대규모 사절단을 왜국에 파견했다. 그 목적은 왜왕 天武의 등극을 축하하여, 왜국과의 관계를 개선하려는 데 있었을 것이다. 신라 사절단은 임진강 하구의 천성(泉城)전투와 매소성(買肖城)전투가 벌어졌던 675년에는 더욱 격(格)이 높아져 왕자 김충원(金忠元)이 파견되기도 했다.


일본은 당에 보내는 국서에 사용하지 못했던 ‘천황’의 칭호를 신라와 발해에 대해서는 사용했고, 중국 황제가 내리는 조서(詔書)와 같은 형식의 문서를 발급했다. ‘天皇敬問新羅王(천황경문신라왕)’이나 ‘天皇敬問渤海王’(천황경문발해왕)으로 시작되는 문서의 형식을 취했던 것이다.


敬問(경문)이란 用語(용어) 자체의 뜻이야 “공경하여 묻는다”는 것이겠지만, 그것은 황제가 제후에게 안부를 묻는다는 뜻의 관용구(慣用句)였다. 더욱이 일본은 신라 및 발해로부터 온 사자에 대해서는 ‘상표문(上表文)’의 지참을 요구했다.


당연한 일이었지만, 신라는 이를 거부해 양국 간에 외교적 마찰이 빚어지기도 했다. 그럼에도 신라가 일본과의 관계를 유지하려 애를 썼던 것은 당의 재침(再侵)에 일본이 거드는 사태를 두려워했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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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발로 끝난 당의 신라 재침 계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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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78년 9월, 실제로 당고종은 신라를 재침하려고 했다. 이때 죽음을 앞두고 투병 중이던 시중 장문관(張文瓘)이 토벌 정벌의 시급함을 들어 신라와의 전쟁을 확대시키지 말 것을 간언했다. 이로써 나당전쟁의 재발 위기를 일단 넘기기는 했지만, 언제 또 당고종이나 무측천의 마음이 변할지 예상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그 이듬해(679년), 서역에서는 당과 토번 사이에 화해의 기미가 나타났다. 그 해에 토번의 유력한 동맹인 西돌궐의 여러 부족들이 당군에게 격파되었고, 토번도 만손만첸 칸포가 죽은 676년 후 태후(太后) 로씨와 권신(權臣) 갈이씨(葛爾氏) 사이의 암투가 지속되는 등 내분상태에 있었다. 이럴 때 토번은 으레 당에 유화적인 외교정책을 구사했다.


679년, 文成公主(문성공주)의 노력으로 당과 토번의 평화협상이 재개했다. 이제 잘못하면 당나라의 창&#8228 칼이 신라로 향할 차례였다. 만약 唐의 희망대로 당-일본의 동맹이 체결되면 당군이 王京 서라벌의 지척인 동해안에 상륙하기 전에 일본으로부터 再보급을 받을 수 있게 된다. 그렇게 되면 신라는 절체절명의 위기다.


679년 10월부터 본격화된 일본에 대한 신라의 물량공세는 이런 신라의 위기를 반영한 것이었다. 신라는 왜왕 뿐만 아니라 太子 등에게도 귀금속과 보검 등을 증여했다. 왜왕 天武의 병이 깊어지자, 신라 사신은 약물 등을 가지고 도일(渡日)하기도 했다.


688년 9월 왜왕 天武가 사망했다. 699년 1월, 신라 사신은 3개의 불상을 갖고 장례식에 참석해 애도를 표시했다. 그해 2월, 지통여왕(天武의 아내)의 즉위식에도 신라 사신이 참석하고 많은 물품을 증여했다.


696년 거란족 李盡忠(이진충)이 봉기하여 無上可汗(무상가한)이라 일컫고, 당의 東方경략기지인 營州(영주: 지금의 요녕성 朝陽)을 공략했다. 이때 고구려유민 일부는 당군의 진압작전에 협조하고, 다른 일부는 乞乞仲象(걸걸중상)의 지휘하에 乞四比羽(걸사비우)의 靺鞨族(말갈족)과 함께 燕州城(연주성: 요녕성 의현)을 경유, 遼河(요하)를 건너 요동지역으로 이동했다.


걸걸중상의 아들인 大祚榮(대조영)이 이끄는 고구려 유민은 697년 6월 천문령에서 추격하는 당군을 요격하여 대파한 후 牧丹江(목단강) 유역의 東牟山(동모산) 일대를 근거지로 삼아 정착하기 시작했다. 무측천은 회유책으로 걸걸중상에게 震國公(진국공),걸사비우에게 許國公(허국공)의 작위를 내렸다.


698년 걸사비우의 死後(사후)에 그의 아들 대조영이 震國(진국)을 세웠다. 700년, 진국은 신라와 당에 사신을 파견, 새 왕조의 개창을 공식적으로 통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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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8212문무대왕의 역사적 功業과 교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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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기간 和平세계를 누리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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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 학자들의 견해는 어떠할까? 우선 신형식 교수가 발표한 논문 &lt&lt 7세기 동아시아 정세와 신라통일의 의미&gt&gt의 인용이다.


&lt 신라의 통일은 영토 축소와 외세 이용이라는 치명적 약점이 있다는 것을 부인할 수 없지만, 그것이 지니는 한국사 전개과정에서의 의미는 과소평가할 수 없다. 무엇보다도 하나의 주권 밑에 동일한 영토와 국민으로서의 일원화에 단초를 열었다는 사실이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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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면 신라 삼국통일의 민족사적 의의는 무엇일까? 이에 대한 신 교수의 견해이다.


&lt 신라의 삼국통일은 이제 21세기에 있어서 남북통일에 큰 시사점을 던져 주고 있다. 삼국문화는 불교&#8231 유교라는 공통의 틀을 지니고 있었으나, 현재 남북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라는 현실적 간격을 좁혀야 할 어려움이 있다. 중국&#8231 러시아&#8231 일본&#8231 중국과 같은 주변 외세를 어떻게 능동적으로 이용할 것이냐는 숙제는 신라의 외교에서 배워야 할 것이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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李基東(이기동) 교수는 그의 논문 &lt&lt 隋&#8231 唐의 帝國主義(제국주의)와 신라 외교의 要諦(요체)&gt&gt에서 시대의 조류를 국익에 연결시키는 신라인의 활달한 모습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lt 확실히, 김춘추(태종무열왕)-김법민(문무왕) 父子는 당시 東아시아세계의 도도한 흐름을 역류시킬 만한 힘은 없었다. 하지만, 그들이 시대의 潮流(조류)를 自國에게 유리하게 이용하여 분열된 민족의 힘을 신라의 깃발아래 결속시키고, 나아가 장기간 和平世界(화평세계)를 누리게 한 功業(공업)은 찬양할 만한 것임에 틀림없다고 믿는다.&gt



심지어 북한도 1960년 이전에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 긍정적이었다. 1956년 판 &lt&lt조선통사&gt&gt에서 림건상은 신라 삼국통일의 의의를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lt 신라의 삼국통일은 조선력사 발전에 획기적인 사변이었다. 조선 지역과 인민의 통일은 단일적인 조선 준민족(나로드스노치)의 급속한 형성과 그 발전에로 이끌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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준민족(準民族)이라고 번역된 나로드스노치는 민족의 형성 과정에 있던 사회집단을 말한다. 그야 어떻든 북한의 평가는 급변했다. 1960년 이후의 &lt&lt조선통사&gt&gt에서는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해 부정적이었고, 민족 형성은 그 전부터 이루어진 것으로 규정하였으며, 고려를 우리 민족의 첫 통일국가로 설정하였다. 다음은 북한의 사회과학원원 역사연구소가 발간한 &lt&lt조선통사&gt&gt는 삼국통일전쟁을 다음과 같이 비난했다.



&lt 세 나라 통치계급들이 저들의 착취적 목적을 추구하여 오래 동안 서로 전쟁을 계속한 것은 우리나라의 정치, 경제, 문화적 발전에 엄중한 후과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것은 무엇보다도 고구려, 백제, 신라 인민들이 단합하여 외적을 물리치지 못하게 하였다. 뿐만 아니라 고구려, 백제 왕조들이 멸망한 후 이전 고구려, 백제 지역 인민들이 신라 사람들과 연합하여 싸움으로써 끝내 당나라 침략자들을 몰아내기는 하였으나, 10년간의 가열찬 전쟁은 막대한 인적, 물적 손실을 가져왔다. 그것은 전적으로 저들의 계급적 이익만 추구한 신라 통치계급이 당나라 침략자를 끌어들인 죄악적인 행위의 후과였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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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외세에 의존한 것이 아니라 외세를 활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데 이어 나당전쟁에 승리해 삼국통일을 완수했고, 그것이 우리 민족 형성의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3국의 사람이 서로를 같은 민족이라고 생각하지도 않은 단계에서 “고구려&#8228 백제&#8228 신라 인민들이 단합하여 외적을 물리치지 못하게 하였다“ 운운은 非과학적이다. 신라 문무왕은 우리 민족사상 최초의 통일을 이룩했던 것이다.


고구려&#8231 백제&#8231 신라의 삼국 사람들은 알타이語 계통의 언어를 사용했으므로 서로 親緣性(친연성)이야 느꼈겠지만, 동족 의식은 아직 형성되어 있지 않았다. 민족이 형성되지 않았던 단계에서 “죄악적인 행위의 후과(後果)”운운은 신라에 대한 악의적인 비방이다.


고구려가 수&#8231 당의 침략에 대해 삼국의 최일선에서 防壁(방벽)의 역할을 했던 역사적 사실은 높이 평가해야 한다. 그러나 고구려는 독재자 淵蓋蘇文(연개소문)의 死後(사후)에 내부 분열로 인해 자멸의 길을 걸었다. 나당연합군에 의해 수도 평양이 함락되기 전에 이미 고구려는 만주 영토의 거의 전부를 상실했다.


고구려는 수&#8231 당에 의해 50여년에 걸친 장기 소모전을 강요당한 나머지 이미 국가의 생산기반이 황폐화했다. 따라서 “만약 고구려가 삼국통일을 했더라면…”이라는 발상은 당시의 국제상황과 고구려가 지닌 능력의 한계를 무시한 假想(가상) 시나리오이다.


그렇다면 백제와 고구려의 패망 후, 신라가 당과의 전쟁에서 패배했다면, 그 후 한반도의 역사는 어떤 궤적을 긋게 되었을까? 불행하게도 한반도에는 唐三郡(당3군)이 들었을 가능성이 높다. 安東都護(안동도호) 설인귀는 문무왕과 웅진도독 扶餘隆(부여융)을 휘하에 두는 당3군을 경영하려 했다. 안동도호부와 웅진도독부는 당의 괴뢰기관이었다.


예컨대 우리와 지정학적 유사성을 지닌 베트남 민족의 경우 漢武帝(한무제)의 침략 이래 1000 년간 중국의 직할 통치를 받았다. 그에 앞서 중국의 春秋時代(춘추시대)에 長江(장강) 이남에서 세력을 떨쳐 五覇(오패: 다섯 패권국)의 하나가 되었던 越族(월족)은 지금 베트남민족의 먼 조상이다.


중국의 연구자들은 지금의 베트남人들을 南越(남월)의 후예로 생각한다. 20세기의 베트남민족은 프랑스&#8228 미국과의 전쟁에서 이겼고, 수차례 “교훈을 주겠다”며 침략했던 중국군까지 혼을 내 오히려 교훈을 받게 했다.


민족의 흥망성쇠는 순환법칙이라도 있는 듯이 돌고 돈다. 로마제국은 세계사에서 빛나지만, 그 후예들의 역사는 실로 오랜 세월에 걸쳐 굴욕적이었다. 西로마제국이 475년 게르만족 傭兵(용병)대장에게 멸망당한 이후 이탈리아인들은 리소르지멘토에 의해 1861년 이탈리아 王國 성립 때까지 한 번도 민족의 再통일을 이룩하지 못하고, 外勢(외세)에 의해 이탈리아 반도의 운명이 좌지우지되었던 것이다. 리소르지멘토(Risorgimento)란 이탈리아語의 原義(원의)로는 復興(부흥)인데, 국가통일운동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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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의 餘震(여진)에 몸살을 앓으면서도…



나당전쟁 승리 이후에도 당의 재침을 우려한 신라 문무왕은 긴장감을 늦출 수 없었다. 다음은 徐榮敎(서영교) 교수의 &lt&lt나당전쟁사 연구―弱者(약자)가 선택한 전쟁&gt&gt의 인용이다.



&lt 676년 이후 25년간 지속된 당에 대한 군사적 긴장감은 신라에게 전쟁을 대비케 하였고, 앞서 戰時(전시)에 가동된 시스템을 戰後(전후)에 지속시키는 원동력이 되었다. 이러한 과정에서 中代王權(중대왕권)은 국왕 중심의 확충은 물론 대규모 군비확장을 지속하였고, 이러한 행정비용을 마련하기 위해 祿邑(녹읍)을 혁파하고 法幢(법당: 군단)을 통한 전국적 노동력 징발구조를 완성하여, 국가 주도의 물적&#8231 인적 자원의 受取(수취)제도를 마련하였던 것이다.&gt



서영교 교수는 ‘등 뒤의 칼’로 돌변할 수 있는 일본에도 전전긍긍했던 신라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lt 당은 676년 이후에도 건재해 있었으며, 어디까지나 세계 최강국 중 하나였다. 당과의 전쟁이 재발될지도 모르는 상황에서 어떠한 대가를 치르고서라도 ‘등 뒤에 칼’로 변신할 수 있는 일본과의 평화를 보장받아야 했다. 戰後(전후) 신라사회는 나당전쟁의 餘震(여진)에 몸살을 앓고 있었다.&gt



신라와 당의 관계는 나당전쟁 종전 25년 후부터 풀리기 시작한다. 다음은 &lt&lt삼국사기&gt&gt 성덕왕 즉위년(701)의 기사이다.


&lt 唐則天(무측천)이 孝昭王(효소왕)이 죽었다는 말을 듣고 애도하기 위하여, 2일간 조회를 하지 않았으며, 사신을 보내 조문하는 동시에 왕(聖德王&#8231 성덕왕)을 신라왕으로 책봉하고, 장군도독이라는 兄(효소왕)의 칭호를 이어받게 했다.&gt


위의 기사에서 ‘唐則天(당측천)’을 정확히 표현한다면 周則天(주측천)이다. 무측천은 서기 683년 그녀의 남편인 당고종의 死後에 즉위한 그녀의 소생인 中宗(중종)&#8231 睿宗(예종)을 잇달아 퇴위시킨 다음, 690년 국호를 周(주)로 바꿔 15년간 중국역사상 유일무이한 女帝(여제)로 군림했기 때문이다. 측천은 705년 재상 張柬之(장간지)의 쿠데타로 퇴위당하고, 唐中宗(당중종)이 복위함으로써 당의 법통이 다시 이어졌다.


신라와 당의 긴장관계는 서기 732년에 이르러서야 해소된다. 732년 가을 7월, 張文休(장문휴)가 지휘한 발해의 말갈부대가 산동반도의 登州(등주)에 상륙하여 등주자사 韋俊(위준)을 살해하자, 당현종이 신라 聖德王(성덕왕)에게 對발해 연합작전을 요청했다.


이에 호응하여 성덕왕은 발해의 남부 국경지대에 신라군을 진주시켰지만, 때마침 큰 눈이 한길 넘게 내려서 동사자만 내고 회군했다. 아무튼 군사 동원에 대한 보답으로 당현종은 735년 대동강 以南(이남)을 신라의 영토로 인정하는 문서를 신라 성덕왕에게 보냈다.


평양 이남의 땅은 나당전쟁의 승리 이후 신라가 實效支配(실효지배)해왔지만, 그것을 공식화했던 것이다. 나당전쟁(670∼676) 이후 양국의 관계정상화까지는 이렇게 60여년의 세월이 흘렀던 것이다.


신라가 당군을 한반도로부터 몰아낸 나당전쟁 이후 약 200년간 東아시아 세계는 다소의 파란이 없지야 않았지만, 대체로 長期(장기) 평화시대가 지속되었다.


300년간에 걸친 3국 각축의 시대를 治世(치세)로 바꾼 통일신라는 文武王∼興德王(흥덕왕)에 이르는 문화적 흥륭기를 누렸다. 唐도 玄宗의 재위 前半까지 중흥기(開元의 治)를 구가했다.


왜국에서는 反신라 정책을 추진해오던 왜왕 덴치(天智&#8231 천지)의 사후에 ‘壬申(임신)의 亂(난)’이란 내란이 일어나 왜왕 덴치의 아들이며 후계자인 오토모(大友 &#8231 대우)왕자를 타도한 덴지(天智)의 동생인 오아마(大海人&#8231 대해인)가 정권을 장악했다. 오아마(大海人)가 국호를 日本으로 고치고 日本 최초로 덴노(天皇&#8231 천황)를 일컬은 덴무(天武&#8231 천무)이다.


현재 일본에서는 古代의 임금들을 모두 推古天皇(스이코덴노&#8231 추고천황)&#8228 齊明天皇(사이메이덴노&#8231 제명천황) 등으로 일컫고 있지만, 실은 天武덴노 前까지는 모두 ‘오키미(大王)’라고 불렸다. 天皇은 일본이 처음 사용한 王號(왕호)가 아니다. 당고종이 한때 스스로를 天皇(천황)이라고 일컬었는데, 일본이 그것을 흉내 내 對內用(대내용)으로 사용했던 호칭이다. 오토모(大友)왕자는 메이지이신(明治維新&#8231 명치유신) 이후 코분덴노(弘文天皇)라는 廟號(묘호)가 추증되었다.


아무튼 天武 정권 성립 이후 일본은 약 30년간 譴唐使(견당사)를 파견하지 않고 오직 신라와만 교류했다. 이 시기인 701년 일본은 신라의 도움으로 大寶律令(대보율령)을 편찬했고, 그 후 718년 養老律令(양로율령) 편찬해 律令(율령)제도를 완성시켰다. 大寶律令(대보율령)을 발령한 文武天皇(몬무덴노: 재위 697∼707)은 신라 문무대왕을 롤 모델(Role model)로 삼아 그의 시호를 ‘文武’로 정했고, 임종 시에는 신라 문무대왕이 그랬던 것처럼 일본의 군주 최초로 자신의 시신을 화장하라는 유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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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의 삼국통일로 놀고먹는 사람의 숫자가 급감했다



그렇다면 나당전쟁의 승리로 이룩된 신라의 삼국통일에 대한 평가는 어떤가? 신라의 삼국통일은 민족의 판도가 축소된 데다 외세를 이용했다는 이유로 부정적으로 평가하는 이들도 적지 않다. 그러나 한국사의 전개과정에서 삼국통일에 의해 우리 民族(민족)이 형성되었다는 사실과 죽은 자의 해골이 산하를 덮었던 300년의 각축시대에 마침표를 찍었다는 것은 중대한 역사발전이 아닐 수 없다.


그렇다면 신라의 삼국통일로 백성들의 삶이 과연 나아졌느냐 하는 점이다. 그러하지 못했다면 삼국통일은 민족사 발전에 있어 의미가 반감될 것이다. 문무대왕은 681년 가을 7월1일 임종의 자리에서 다음과 같은 유언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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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 병기를 녹여 농기를 만들게 해서 백성들로 하여금 天壽(천수)를 다하도록 했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백성들은 제 집을 편안히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없어졌다.&gt



이와 같은 문무대왕의 자부는 단순한 레토릭이 아니다. 통일신라에서는 하층계급인 1∼3두품의 신분이 소멸되는 변화가 나타났다. 전쟁에 의한 포상, 전몰 등 각종 변동에 따라 하위 계급의 세분화는 새로운 변화를 추동하는 데 오히려 장애 요소가 되었기 때문이다.


원래 지배계급은 下戶(하호: 하층계급)에 대해 무기를 잡지 못하게 했다. 그러나 삼국간의 전쟁이나 나당전쟁은 대규모 병력을 동원한 총력전이었다. 이런 전쟁에서 하층계급도 동원되어 전공을 세웠기 때문에 국가로서는 이들에 대한 사회경제적 배려를 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분명한 것은 고구려와 백제의 멸망으로 坐食者(좌식자), 즉 놀고 먹는 계층이 대폭 도태되었다는 점이다. &lt&lt삼국사기&gt&gt에 따르면 고구려의 경우에 좌식자의 수가 인구의 3분의 1에 달했다.


또한 고구려&#8231 백제의 유민이라고 해서 신라의 백성보다 불평등한 대우를 받지 않았다. 고구려系와 백제계로서 통일신라의 관리로 등용된 사람도 적지 않았다. 다만 백제계는 고구려계보다 품계가 3계단 하향조정 되었다. 이것은 백제의 品階(품계) 인플레가 상대적으로 심했기 때문이다.


&lt&lt삼국사기&gt&gt 백제 의자왕 17년(657) 정월 가사에 따르면 의자왕은 그의 庶子(서자) 41명을 한꺼번에 품계 제1위인 佐平(좌평)으로 삼고, 각기 食邑(식읍)도 주었다. 반면 신라 재상 金春秋(후일의 태종무열왕)는 품계 제2위인 이찬으로서 당태종과 ‘648년 협약’을 맺었고, 태종무열왕의 태자 金法敏(김법민: 후일의 문무대왕)은 즉위 1년 전인 660년 병부령(국방장관)으로서 對백제 전쟁의 최전선에 나섰는데, 그때 그의 품계는 제4위인 파진찬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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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가 삼국통일을 이룩한 뒤에는 신라 중심의 天下觀(천하관)에 의거해 9州&#8228 5小京(소경),9誓幢(서당: 군단) 등 통치제도를 정비했다. 통일신라의 백성들은 삼국시대 백성들보다 진보한 사회경제적 입장을 갖게 되었다. 국가가 丁田(정전)을 지급하고, 각종 賦稅(부세)를 감소시켰던 사실은 삼국통일이 사회경제적 면에서 긍정적으로 기능했음을 뜻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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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증거물이 新羅村落文書(신라촌락문서)이다. 신라촌락문서는 현재 일본 나라(奈良) 東大寺(동대사)內 보물창고인 正倉院(정창원)에서 소장하고 있는 통일신라의 9세기경 帳籍文書(장적문서)이다. 촌락문서에는 西原京(서원경: 지금의 청주) 지방 4개 촌락 백성들이 소유한 논, 밭, 뽕나무, 소, 말 등의 재산 상태와 조세 수취기준 등이 정밀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문서의 작성 시기가 통일신라의 쇠퇴기인 下代(하대)였던 만큼 9등호(최하층 백성)의 경우 빈곤상이 일부 드러나 있기는 하지만, 그래도 오늘날의 영세민들은 부러워할 수준이다. 이는 당시의 律令政治(율령정치)가 질서정연했을 뿐만 아니라 농업의 발달에 따라 생산 주체로서의 일반민의 지위가 前 시기에 비해 크게 향상되었음을 입증하는 것이다.


삼국통일은 전쟁에 투입된 많은 인력을 농업개발, 문화사업 등에 쏟게 함으로써 국부를 증진시키고 새로운 문화를 창조할 수 있는 밑천이 되었다.


이런 차원에서 보면 통일신라시대는 그 후에 도래하는 고려시대에 비해 오히려 예술적 수준이 높았다. 그것은 통일신라시대의 세계적 유산인 토함산 석굴암과 고려시대에 크게만 만든 은진 미륵을 비교해 보면 대번에 느낄 수 있다.


예술은 돈을 먹고 자란다. 고려시대는 대륙에 거란족(요)→여진족(금)→몽골족(원) 등 기마민족의 전성시대로서 그들과의 전투에 시달려 富(부)를 축적할 겨를이 없었던 것이다. 고려 말기엔 왜구의 준동도 극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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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외진출로 번영을 길을 찾는 DNA 형성의 출발점



신라의 삼국통일에 부정적인 북한의 이데올로그들(理論陣)도 통일신라의 경제제도와 사회제도의 발전에 대해서는 인정하지 않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다음은 북한의 사회과학원 역사연구소 발간 &lt&lt조선통사&gt&gt의 관련 내용이다.



&lt 7세기 중엽에 국토의 남부를 통합하고 영토를 확장한 신라에서는 대체로 9세기 중엽까지 근 200년간 외적의 큰 침입을 받지 않았다. 이 기간에 인민들의 창조적 노동에 의하여 농업, 수공업 등이 일정하게 발전하고, 국내외 상업도 장성하였다.


이 시기 신라에서는 여러 가지 철제 농기구의 생산량이 더 많아지고, 그 질도 훨씬 개선되었다. 또 새로운 농경지들이 적지 않게 개간되고, 비교적 큰 규모의 저수지들도 늘어났다. &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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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시대에 축조된 저수지로는 경북 문경, 울산, 경기도 용인 등 전국 곳곳에서 계속 발굴되고 있다.


위에서 인용 북한의 &lt&lt조선통사&gt&gt는 신라의 삼국통일을 ‘국토의 남부 통합’이라고 平價切下(평가절하)하면서도 신라의 활발한 해상무역과 적극적인 해외진출을 평가하고 있다. 북한 이데올로그들도 나라가 발전하려면 개혁&#8228 개방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모르지는 않는 듯하다. 어떤 민족이나 세력도 북한처럼 자기 영역 속에 갇혀 살아서는 번영할 수 없는 것이다. 다음은 이어지는 &lt&lt조선통사&gt&gt의 서술이다.



&lt 8∼9세기에 당나라와의 해상무역이 특히 활발하였다. 이것은 조선(造船) 및 항해 기술의 급속한 발전을 토대로 한 신라 사람의 적극적인 해외진출의 결과였다. 신라 상인은 (심)지어 당나라의 상업 중심지들에 직접 거주하면서 상업 활동을 활발히 벌리었다.


이리하여 산동반도로부터 양자강에 이르는 바다가 여러 곳에 신라 상인들의 거류지까지 생겨나게 되었다. 이것을 신라방(新羅坊)이라고 하였다. 매 신라방에는 그곳을 통제하는 구당신라소(句當新羅所)라는 기관이 설치되였는데, 그 장관으로는 신라사람이 임명되었다.


한 외국사람의 기록에 의하면 신라방에 사는 사람들은 자기들의 절간과 무덤을 가지고 있었다 한다. 신라방의 상인들은 당나라와의 무역에만 종사한 것이 아니라 당나라의 국내상업에도 침투하고 있었다. 이러한 신라방의 존재는 당나라와의 활발한 해상무역과 신라사람들의 적극적인 해외진출을 잘 말하여 준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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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에서 말한‘한 외국사람의 기록’이란 일본의 고승 엔닌(圓仁)의 &lt&lt入唐求法巡禮行記&#8231 입당구법순례행기&gt&gt를 말한다. 엔닌은 張保皐(장보고) 휘하의 신라인들의 도움으로 10년간 당나라 곳곳의 사찰들을 찾아다니며 공부를 했고, 항해의 안전을 위해 신라 선박을 타고 일본으로 귀국해, 세계 3대 여행기 중의 하나로 손꼽는 앞의 책을 저술했다.


駐日미국대사를 지낸 하바드대학의 碩學(석학) 라이샤워 교수는 &lt&lt입당구법당순례행기&gt&gt를 英譯(영역)했는데. 여기서 그는 신라의 해양세력을 이끈 淸海鎭 大使(청해진 대사) 장보고를 “무역제국의 君主(군주&#8231 Prince)”로 평가하고, 新羅坊(신라방: 신라인 집단거주지)을 콜로니(Colony: 植民地 혹은 租界)라고 번역했다.


통일신라의 對중국 무역의 중심지는 청해진이 설치된 전남 완도, 한강&#8228 임진강 河口(하구)의 穴口鎭(혈구진), 남양만의 唐恩浦(당은포) 등이었다. 신라상인들은 신라&#8228 당&#8228 일본을 연결하는 三角貿易(삼각무역)으로 큰 이득을 창출했다.


장보고의 유적은 그의 해군&#8228 무역기지인 淸海鎭(청해진)이 설치되었던 전남 완도, 중국 산동성 榮成市(영성시)의 法華院(법화원), 대운하 주변 등지에 아직도 남아 있다. 청해진에는 1만 명의 군대와 수백 척의 군함과 상선들이 갖추어져 있었다. 장보고는 해상무역을 통해 東아시아의 무역을 독점했고, 우리 남해안의 방위를 책임졌을 뿐만 아니라, 신라∼당나라 간 항로에 출몰하던 해적을 일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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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의 理想을 실현할 수 있는 남북통일은


문무대왕의 지혜와 결단에서 배워야



이런 전통이 민족적 유전자(DNA)로 이어져 임진왜란 때 李舜臣(이순신) 장군의 수군이 명품 戰船(전선)인 板屋船(판옥선)과 돌격선인 거북선으로 倭寇(왜구) 전통의 일본 수군을 압도했던 것이다. 최근, 造船(조선)&#8228 海運(해운)경기의 同伴後退(동반후퇴)로 우리의 해양 관련 산업이 중대한 위기에 처한 것은 사실이지만, 그래도 대한민국은 1980년대 초반에 이미 船腹量(선복량) 세계 제6위의 해운국으로 도약했고, 1990년대 초반에는 선박 수주량 제1위를 차지한 造船大國(조선대국)이 되었다.


현재, 대한민국의 경제가 어렵기는 하지만, 그래도 공업생산력 세계 제5위, 무역규모 세계 제6위 등에 의해 종합 경제규모(GDP) 세계 제11위에 진입해 있다. 미래의 발전을 예고하는 바로미터인 혁신지수는 3년 연속 세계 1위를 기록했다. 이와 같은 경제발전 및 해외진출의 DNA는 통일신라에서 비롯되었다고 보아도 좋다.


문무대왕은 나당전쟁 승전 2년 후인 678년 신라의 造船&#8231(조선) 水軍(수군)&#8231 海運(해운)을 모두 관장하는 船府(선부)를 신설했다. 신라는 나당전쟁 중이던 문무왕 13년(673)년에 이미 전국 주요 지역에 성곽 신축 내지 증축했을 뿐만 아니라 대아찬 金徹川(김철천)이 100척의 함대를 거느리고 西海岸(서해안)을 常時警戒(상시경계: Patrol)하도록 하는 등 해상지배력 강화에 노력해 왔다.


요즘, 북한 당국의 언행은 우리말을 잘 모르는 외국인들도 깜짝 깜짝 놀랄 만큼 거칠어졌다. 지금, 한반도 북쪽은 배고픈 농민이 협동농장에서 쌀을 훔쳤다는 이유로 아이들까지 관중으로 동원된 장소에서 공개처형을 당하는 생지옥이다. 2016년 들어서는 바깥바람을 쐰 엘리트층의 脫北(탈북)도 급증하고 있다. 이런 현상이 바로 亡兆(망조)이다. 북한을 어떻게 관리하여 평화통일의 시대로 나아갈 것인가, 이것이 오늘 우리에게 부과된 역사적 책무이다.


결단의 군주 문무대왕이 통일전쟁과 나당 7년 전쟁을 지휘했다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만약 문무대왕의 용기와 지혜가 부족했다면 백제&#8228 고구려에 이어 신라까지 먹성 좋은 중국에게 먹혀버려 한반도에 唐3郡(당3군)이 들어설 뻔했다. 지금, 한반도를 둘러싼 주변 열강은 대한민국이 주도하는 남북통일보다 오히려 세력균형에 의한 현상유지를 즐기고 싶을 것이다.


민족사 최초의 통일국가를 이룩한 인물은 문무대왕이다. 민족적 理想(이상)을 실현할 수 있는 21세기의 남북통일은 시대적 상황과 주변국에 대해 能小能大(능소능대)하게 대처했던 문무대왕의 전략적 사고와 결단에서 배워야 할 것 같다. 그의 言辭(언사)는 부드러웠지만, 그의 행동은 원칙을 굽히지는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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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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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롤로그&#8212왜 문무대왕인가


동해의 대왕암에서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죽어서도 나라 지키는 海龍(해룡)이 되고 싶다/ 임진강을 우리 민족의 방파제로 활용한 대왕/ “신라는 자주 불순하지만 우리 변방을 침범하지는 않았다”/ 나당전쟁의 승패에 결정적 영향력 행사한 대비천 전투/ 신라김씨의 原籍(원적) /漢武帝의 匕首(한제의 비수)―곽거병의 무대/ 신라 승려 慧超(혜초)와 고구려유민의 아들 高仙芝(고선지)가 세계사적 족적 남긴 실크로드/ 통일신라를 정신적으로 뒷받침한 혜초와 중국 易經(역경)사업의 제1공로자 圓測(원측)/ 북한의 공격용 핵무기는 제거하지 못하면서 남한의 방어용 무기 반대하는 중국의 내정 간섭/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를 생각한다/ 문무대왕에게 배워야 할 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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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의 삼국통일을 깎아내리는 것은


식민사관에 물든 바보짓이다


봉길리 앞바다의 수중릉/ 한국사 최대의 역사발전/ 임종 때도 당-왜 연합을 경계한 대왕/ 감은사 쌍탑은 오후 3시에 더욱 빛난다/ 태종무열왕의 장남이자 태대각간 김유신의 생질/ 3면 공격 받은 신라―동맹을 찾아나선 김춘추―648 나당 비밀협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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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하대란 속 馬上에서 즉위한 문무왕/ 淵蓋蘇文 사후에 후계자 다툼으로 멸망한 고구려/ 사회적 약자 구제하기 위한 문무대왕의 교서/ 신라의 對唐戰 도운 토번의 역할/ 신라 내부의 골육상잔 유도한 당고종/


평화시대를 열겠다는 문무왕의 의지/ 掛陵(괘릉) 武人像의 모델은 西域의 외교관(?)/ 신라김씨의 조상은 흉노인가?/ 문무왕의 對唐 무력시위/ 安東都護(안동도호) 설인귀 군단의 청해 이동―大非川 전투에서 토번군에게 전멸당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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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신들의 피와 살은 신라의 것이다!”&#8212答薛仁貴書


문무왕에게 보낸 설인귀의 협박장/開戰文書(개전문서)의 白眉(백미)―나당의 648년 비밀협정 공개/ 答薛仁貴書의 골자/ 兵站線(병참선) 차단을 위한 해상요격작전/672년 석문전투 패배 후의 持久전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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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강은 한민족을 지켜낸 방파제였다


격전지 七重城/ 호로고루와 고랑포 / 지상전 최후의 결전장 매소성/ 약자가 선제 공격했다/ 웅진도독부의 패망/ 석문전투에서 대패한 신라 중앙군/ 문무왕의 적 兵站線(병참선) 차단 / 말갈군단으로부터 戰馬(전마) 3만여필 탈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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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는 토번과 함께 당을 東西에서 협격했다


말갈족 출신 적장 李謹行(이근행)/ 기벌포해전 완승의 비결/ 신라는 의외로 해군 강국이었다/ “신라는 비록 자주 불순하지만, 일찍이 변방을 침범하지 않았다”/ 토번의 영웅―論欽陵/ 東아시아 세계의 평화체제 완성/ 토번의 西域(서역) 경영



인터뷰: 티베트 망명정부의 首長―제14대 달라이 라마


“우리의 소원은 티베트에서 불교 공부할 수 있는 자유”/ 한국과 티베트의 세 가지 인연/ “한국 가면 선행과 화합에 관해 얘기하고 싶다/ 중국의 역경 사업을 주도한 신라 학승― 圓測(원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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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의 開戰 원인과 명분


수퍼파워에 대한 신라의 先制 공격은 불가피했던가/ 648년 협약 짓밟은 배신행위/ 사랑도 지위도 버리고 문무왕에 달려온 승려―義相/ 대왕의 결단― 봉황성 전투/ 동방정책에 몰두하다 실크로드 상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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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인 최초의 대비천 전투 현장답사


靑海를 가야 했던 까닭/ 西寧은 黑齒常之(흑치상지)가 건설한 군사도시/ 육체파 文成公主가 토번의 칸포[王]에게 시집갔던 길/ 청해호에 설치된 중국의 어뢰발사실험기지/ 사막화가 진행되는 대비천 전투 현장/ 설인귀가 먼저 협박장 보내/ 答설인귀書의 골자/ 문장으로 삼국통일에 기여한 강수/ 김유신&#8231 강수&#8231 우륵의 공통점은 가야 출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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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8231 삼국통일의 시대정신을 이끈 승려―義相


―신라에선 僧俗(승속)이 따로 놀지 않았다


終南山의 지상사와 교토의 고산사 답사/ 義相은 중국화엄의 제3祖/ 조국의 위기에서 발휘된 강렬한 민족의식―사랑도 명예도 버렸다/ 義相 사상은 정보화사회의 새로운 패러다임/ 동해의 거센 파도에 얼굴을 파묻고 간구한 偈頌(게송)/ 義相과 善妙의 국제적 러브 스토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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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군과 고구려부흥군의 연합작전


문무대왕―高安勝을 고구려왕으로 책봉/ 웅진도독부가 백제 故土에서 소멸되다/ 신라군의 참패―황해도 石門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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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 시기의 戰法(전법)


輕騎兵(경기병)시대의 도래/ 陣法―기동력 살리는 것이 기본/ 石門 패전 후 신라 수뇌부의 대책/持久戰略(지구전략)과 해군 증강/ 역사훼손의 현장/ 남한산성의 ‘어미 城’인 신라 주장성 유적 훼손 / 세금 투입해 신라 유적 감추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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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의 和戰 양면전략


약소국이 강대국과 싸우는 공식/ 李靖(이정)의 六花陣法/신라국왕을 두 번 옹립한 김유신 그리고 同시대인/문무왕에 대한 김유신의 유언, “대왕께서는 小人을 멀리 하소서”/ 김유신의 복잡한 가계/신하로서 흥무대왕으로 추존된 인물/ 異人으로부터 전수받은 兵法書/ “신라에 심나의 아들 소나 있음을 모르느뇨!”/ 후세사람들에게 형제간에 우위를 가르친 金仁問/



신라는 해군강국이었다


설인귀의 보급함대를 임진강 하구에서 봉쇄/ 한강과 임진강이 만나는 요충―오두산성/ 한민족 성씨의 대부분은 신라에서 유래/ 泉城(천성)의 위치를 둘러싼 논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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약자가 강자를 이기는 공식


지상전의 최후 결전―매소성전투/ 매소성 전투에서 패전한 말갈군의 行路/ 칠중성 위에서 임진강을 굽어보면/ 신라 敬順王(경순왕)의 역사적 名言, “무고한 백성들을 죽게 할 수 없다”/ 고랑포 GOP에서 1박/ 22회 이긴 해상기동전투/ 기벌포와 백제 수도권 답사/ 해군강국 신라의 역사적 배경/ 나당전쟁의 승패에 직결된 兵站線(병참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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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반도와 서역 전선을 오간 역사인물들


30년간 극동 작전에 복무한 설인귀/ 안동도호는 극동방면군 최고사령관/ 당의 재침을 걱정했던 기벌포 전투 후의 30년/ 말갈 출신 대장군 이근행, 승전 후의 病死(병사)/ 토번전에 동원돼 전공을 세운 흑치상지/ 孫子(손자)의 반란 때문에 무덤까지 훼손당한 李勣(이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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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김씨의 출발점을 찾는 답사


기련산맥을 넘어 河西走廊(하서주랑)을 달리다/ 정복과 求道의 길/ 1796년에 발견된 문무왕의 능비문/ 신라&#8231 가야의 금관과 뿔잔/ 신라김씨와의 親緣性(친연성)―흉노는 누구인가/ 흉노 선우에게 성희롱 당한 한고조 劉邦(유방)의 황후/ 흉노 혼야왕의 본거지 焉支山(언지산)/ 무위 제1의 역사인물은 ‘신라김씨의 조상’ 김일제/ 古지도에 기록된 休屠城(휴저성)과 休屠澤(휴저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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좌담/ 지구 반대편 정보까지 알고 있었던


신라인의 국제감각이 삼국통일의 에너지



신라에 대한 無知와 모략/ 平壤을 민족사의 중심에 두려는 억지 攻勢/ 신라 積石木槨墳은 스키타이 양식/ 신라 金문화의 한 뿌리는 헬레니즘/신라김씨는 흉노의 후예/ 金閼智= 금(Gold)+ 금(Gold)/ 신라 금관은 한국 고대사의 비밀을 밝혀주는 암호/ 클레오파트라의 금 귀고리/ 경주 鷄林路 고분에서 출토된 보검은 트라키아王의 선물/ “신라에서는 개&#8231 고양이에게도 금목걸이를 걸어 주었다”/ 신라와 가야 지역에서만 출토되는 角杯(각배)/ ‘폭탄주’는 유목민족의 飮酒(음주)문화/ 복잡한 辰韓(진한)-신라의 주민 형성/ 古신라는 中國문화에 기댈 필요가 없었다/ 東海岸(동해안) 루트와 연격된 草原(초원)의 길/ 넓은 세계를 알았던 신라인의 감각이 통일의 에너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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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淳台의 국보기행/ 경주 대릉원의 천마총에 가면


한국 고대사의 암호가 풀린다!



경주 적석목곽분은 스키타이와 흉노의 墓制/ 국보 제188호 천마총 금관의 위용/金細工의 압권―국보 제189호 천마총 金帽(금모)/ 국보 제190호 金製 허리띠 및 腰佩(요패)/ 국보 제207호 천마도 障泥(장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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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에 이르는 東아시아정세



수제국은 논공행상用 땅과 재물이 필요해 고구려 침략/ 고구려 남침 막기 위한 나제동맹 120년/ 관산성 전투에서 참수당한 백제 聖王(성왕)/ 역사무대에 처음 등장하는 金武力(김무력)의 파워/ 신라가 고구려&#8228 백제&#8228 왜국에 왕따 당한 까닭/ 왜국 聖德太子를 움직인 고구려 승려 慧慈(혜자)/ 신라 정벌을 위한 3국동맹의 와해/ 신라 眞平王(진평왕)의 각개격파/ 신라―위기극복 위한 내부단결과 주변 정세에 능동적 대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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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센 체할 때가 멸망의 전야


백제 의자왕의 드라이브/ 연개소문의 對신라 강경책/ &lt고사기&gt와 &lt일본서기&gt는 망명한 백제 지식인들의 작품/ 당도 창업 초기엔 동돌궐에 조공 바쳐/ 당태종이 고구려 정벌에 집착한 까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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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왕의 적수는 중국 唯一無二의 女帝 무측천


父子의 품속에 차례로 안겼던 후궁 출신/ “그것은 폐하의 집안일입니다”/아부와 곡필의 명수―許敬宗/ 제자식들인 태자 둘 죽이고 황제 둘 폐위시킨 우먼파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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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장답사: 당은 신라까지 먹으려다 실크로드의 헤게머니 뺐겼다


―토번의 安西4진 공격으로 위기 벗어난 신라


‘세계의 지붕’ 파미르 高原에 올라 한국사를 생각한다/ 당제국의 서역진출/ 토번의 서역 경영/ 세계인 慧超와 高仙芝의 발자국/ 실크로드의 핵심구간 오아시스路 일주/ 위구르인은 4각모자를 벗지 않는다/ 불타는 대지―투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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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무대왕은 당-왜 동맹을 겁냈다


일본사상 최대 규모의 반란으로 성립된 親신라 노선의 天武정권―신라로부터 律令制(율령제) 배워/측천무후의 당조 찬탈/ “6척의 고아는 어디에 있는가?”/ 周의 창업과 각개격파당한 당의 황실/ 태종무열왕의 廟號(묘호)에 대한 무측천의 시비/ 발해(진국)의 건국/ 발해와 북한이 민족사의 주류로 될 수 없는 이유/ ‘天皇’칭호는 한일관계 왜곡의 출발점/ 황제국을 흉내 낸 일본의 퍼포먼스/ 불발로 끝난 당의 신라 재침 계획/ 무측천, 신라에 조문사절 파견/ 일본을 겁낼 이유가 사라지다/ 미소년 형제를 섹스 노리개로 삼았던 女帝의 추락/ 무측천의 역사적 功過(공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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에필로그&#8212문무대왕의 역사적 功業과 교훈


장기간 화평세계를 누리게 했다/ 몸살 앓게 한 나당전쟁의 餘震(여진)/ 삼국통일로 놀고먹는 사람의 숫자가 급감했다/ 해외진출로 번영의 길 찾는 DNA 형성의 출발점/ 민족의 理想(이상) 실현할 수 있는 통일은 문무왕의 지혜와 결단에서 배워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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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께


1)사진(컬러화보 포함)과 캡션은 월간조선, 조갑제닷컴, 조선Pub, WIN 기사에 실려 있습니다. 월간조선엔 관련 컬러화보도 더러 있음. WIN 기사의 컬러 사진(의상 관련) 등은 필자가 제공할 수 있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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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이 원고 128쪽 부분에 월간조선 2003년 3월호 341∼361페이지 &lt---삼국통일의 원동력 중 하나는 그레코로만 문화--&gt와 월간조선 2002년 4월호 &lt 경주대릉원에 가면 한국고대사의 암호가 풀린다&gt &#8212- 이 두 꼭지를 넣어 주세세요. 컬러화보 있음. 그러면 이 원고 전체 매수는 200쪽 좀 넘을 듯합니다.


3)앞의 목차는 불완전한 것으로 교정&#8231 첨삭해야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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