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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연재(1): 文武大王이 간다!

鄭淳台(작가)   |   2016-08-29 | hit 9785

중국을 꺾고 민족사 최초의 통일을 이룩한


문무대왕에게 배울 때다.&nbsp文武大王의 삼국통일을 깎아내리는 것은


植民史觀이나 김일성주의에 물든 바보짓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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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고구려를 獨食(독식)한 唐(당)은 신라까지 병합하려 했다. 이런 민족사적 위기에 문무대왕이 唐의 침략군 장수에게 보낸 「答薛仁貴書&#8228 답설인귀서」는 왜 신라국가가 자신의 存亡(존망)을 걸고 當代(당대)의 수퍼파워와 싸워야 하는지를 국내외에 천명한 開戰(개전) 문서이다. 아직도 신라가 外勢(외세)에 기대어 삼국통일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答薛仁貴書」를 한번 제대로 읽어 보아야 한다.


7세기 東아시아 세계를 뒤흔든 역사의 격동 속에서 최대의 수혜자는 신라였다. 이것을 추동한 힘은 신라 3金 의 인간적 신뢰를 바탕한 팀 파워였다. 인류사에서 가장 뛰어난 3인의 협력이 한민족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야성과 결단의 君主 문무대왕이 통일전쟁과 나당 7년전쟁을 지휘했다는 것은 우리 민족에게는 대단한 행운이었다. 만약 문무왕의 용기와 지혜가 없었다면 백제&#8228 고구려에 이어 신라까지 먹성 좋은 중국에게 먹혀 한반도에 당3군이 설치될 뻔했다.



프롤로그&#8212왜 문무대왕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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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해의 대왕암에서 우리에게 전하는 메시지


7세기의 수퍼파워 唐帝國(당제국)을 꺾고 삼국통일을 이룩한 신라의 文武大王(문무대왕)은 작지만 강한 나라의 역사적 모델을 제시했다. 문무대왕이 增强(증강)시킨 신라 수군은 海路(해로)를 통한 唐의 兵站線(병참선)을 틀어막아 당 지상군의 南下(남하)를 저지했다.&nbsp西域(서역)에서 당시 세계 최대 교역로인 실크로드의&nbsp지배권을 놓고 전개된 吐藩(토번)의 對唐攻勢(대당공세)를 절묘한 타이밍에 활용해 한반도의 戰勢(전세)를 역전시켰다. 이때 대왕이 구사한 전략은 1만5000리 떨어진 중국대륙의 東&#8231 西端(동&#8231 서단)에서 同時(동시)에 唐帝國(당제국)을 끼고 치는 2對 1 전략이었다. 어떠한 강국도 혼자서는 2正面전쟁에서 이기기 어렵다.


왜 羅唐(나당) 7년 전쟁이 불가피했던 것일까? 신라와 연합해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당제국은 648년의 비밀협정을 어기고 그 故土(고토)를 獨食(독식)했을 뿐만 아니라&nbsp대왕을, 평양에 주둔한 당의&nbsp安東都護(안동도호)의 節制(절제)를 받는 鷄林州大都督(계림주대도독)으로 임명했다. 이것은 신라까지 먹으려 했던 당의&nbsp예비동작이었다. 이런 민족사적 위기에 당면한 문무대왕의 지혜와 용기, 그리고 결단은 21세기의 우리에게 남북통일을 위한 좋은 참고서가 될 것이다. 그때 대왕이 唐의 극동방면군사령관에게 보낸 “答薛仁貴書”(답설인귀서)는 弱者(약자)인 신라가 왜 자신의 存亡(존망)을 걸고 當代(당대) 최강과 싸워야 하는지를 국내외에 闡明(천명)한 감동적인 開戰文書(개전문서)였다.


아직도 신라가 外勢(외세)에 기대어 삼국통일을 했다고 주장하는 사람은 문무대왕의 이 개전문서를 제대로 읽어보아야 한다. 신라의 삼국통일을 한사코 깎아내리는 것은 단언컨대 日帝(일제)의 植民史觀(식민사관) 혹은 수준 미달의 김일성주의에 오염된 바보짓이다.


그렇다면 대왕과의 時空(시공)을 뛰어넘는 대화는 어디서 가능할 것인가? 역시,東海(동해)로 가서&nbsp문무대왕의 水中陵(수중릉)부터 답사해야 할 것 같다. 필자는 문무대왕의 수중릉이 마주 보이는 慶州市 陽北面 奉吉里(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해변에 서서 우리 민족의 결정적 순간을 생각했다. 나당 7년 전쟁이 끝난 후에도 대왕은 唐-倭(당-왜) 연합에 의한 침략의 가능성을 배제하기 위해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겉으로는 주변국에 화해의 몸짓을 계속 보내면서도 안으로는 침략전쟁에 철저하게 대비했던 문무대왕의 국가안보 전략. 이런 역사적 사실을 바탕에 깔고 대왕의 수중릉 앞에 서면 그것은 처절하리 만큼 장엄하다. 대왕릉 쪽 동해바다에서 200m 거리의 奉吉里(봉길리) 해안으로 끊임없이 밀려오는 물결의 대행렬…. 그것은 21세기의 우리들에게 나라 지키기에 身命(신명)을 걸라는 대왕의 至上命令(지상명령)이었다.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海龍이 되고 싶다”



봉길리 해안에서 육지 쪽으로 2km 거리인 感恩寺趾(감은사지)에 들러 한국 최대의 3층 쌍탑을 관찰했다. 문무대왕이 착공하고, 그의 장남인 神文王(신문왕)이 완공한 感恩寺(감은사)는 이제 그 遺構(유구)만 남아있지만, 감은사의 동&#8231 서 3층석탑(국보 제112호)은 1300여년의 風雨(풍우)에도 꿋꿋한 모습으로 버티고 서서, 지금은 품격 높은 신라예술을 대표한다.

감은사에 가면 죽어서도 나라를 지키는 海龍(해룡)이 되기를 맹세했던 문무대왕의 나라 사랑에 옷깃을 여미지 않을 수 없다. 실제로 대왕의 化身(화신)인 해룡이 감은사에 드나들 수 있게 바다와 연결된 通路(통로)가 20년 前 감은사 本堂(본당)의 遺構調査(유구조사)에서 확인되었는데, 필자도 그때 그것을 현장에서 확인했다. 현재, 그 유구는 다시 땅속에 파묻혀 있다. 신라 당시엔 감은사 山門(산문: 절의 바깥문) 바로 앞까지 바닷물이 들어왔다.



4번 국도를 타고 경주시내로 들어와 신라의 都城(도성)인 半月城(반월성) 기슭에 자리 잡은 경주국립박물관에 입장했다. 박물관의 현관에는 문무대왕의 陵碑(능비)가 전시되어 있다. 파손이 심한 陵碑文(능비문)이지만, 거기서 新羅金氏(신라김씨)가 어디서 경주로 흘러들어와 어떤 과정을 거쳐 신라국왕이 되었는지를 확인할 수 있다. 문무대왕 陵碑(능비) 곁에는 壬申誓記石(임신서기석)도 전시되어 있다. 높이 불과 34cm밖에 되지 않는 이 작은 냇돌에는 삼국통일의 주체세력인 신라 花郞(화랑)의 의식구조와 수련 내용이 알뜰하게 새겨져 있다. 신라 화랑이야말로 臨戰無退(임전무퇴)를 온몸으로 실천하며 삼국통일과 韓民族(한민족) 형성을 위한 祭壇(제단)에 피를 뿌린 용사들이었다.



&lt壬申年(임신년) 6월15일 두 사람이 함께 맹세한다. 지금으로부터 忠道(충도)를 몸소 실행하여 과실이 없기를 하늘에 맹세한다. (中略) 만약 나라가 불안하고 세상이 어지러워지면 출전해 충성할 것을 맹세한다. 또 1년 전 辛未年(신미년)에는 詩(시), 尙書(상서), 禮記(예기), 春秋傳(춘추전)을 3년 동안 습득하기로 맹세했다.&gt&nbsp&nbsp


오늘날 대한민국에서는 군대에 안 간 장관&#8231 국회의원이 수두룩한가 하면, 그런 주제에 대통령을 노리는 사람까지 등장했다. 국민으로서 의무를 다 하지 못한 사람은 입장료 1000 원인 경주국립박물관에 가서 임신서기석을 한번 우러러 보고 난 후에 그들의 向後(향후) 거취를 결정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우리 역사상 最長(최장) 기간의 亂世(난세)를 극복하고 韓民族(한민족)을 성립시킨 결단과 지혜의 인물이라면 바로 문무대왕이다. 문무왕 16년(676), 대왕은 唐軍을 한반도에서 몰아내고 민족사 최초의 통일국가를 건설했다. 나당전쟁 승리 후에도 大王은 민생의 안정을 위해 혼신의 힘을 기울였다. 다음은 그의 유언 중 한 대목이다.


&lt兵器(병기)를 녹여 농기구를 만들고, 백성들로 하여금 天壽(천수)를 다하도록 하였으며, 납세와 부역을 줄여 집집마다 넉넉하고 사람마다 풍족하여 백성들은 제 집을 편안히 여기고, 나라에는 근심이 없어졌다. 창고에는 산처럼 곡식이 쌓이고, 감옥에는 풀밭이 우거졌으니….&gt&nbsp&nbsp


위의 대목은 문무대왕의 自負心(자부심)의 발로라 해도 좋다. 그의 죽음 후에 정해진 文武大王이라는 廟號(묘호)도 그냥 그렇게 부여된 것이 아니다. 대왕은 馬上(마상)에서 세계제국 唐과의 전쟁을 지도해 삼국통일을 완수했기 때문에 ‘武’ 자를, 신라국가의 律令(율령)완성과 船府(선부) 신설 등 각종 제도 개혁에 탁월한 업적을 남겼기 때문에 ‘文’자를 받은 것이다.&nbsp&nbsp


임진강을 韓民族의 방파제로 활용한 대왕&nbsp


경주 답사 일정을 끝낸 필자는 밤을 도와 臨津江(임진강)으로 北上(북상)했다. 임진강은 韓民族(한민족)을 지켜낸 방파제였다. 임진강과 그 유역을 水陸(수륙) 양면의 요새로 활용한 君主(군주)가 문무대왕이었다. 漢江(한강) 하류를 끼고 自由路(자유로)를 달리다 恭陵川(공릉천)의 河口(하구)에 걸린 松村大橋(송촌대교)를 지나면 자라머리[鰲頭&#8231 오두]처럼 생겼다고 鰲頭山(오두산)이라 불리는 군사적 요충이 눈에 들어온다. 나당전쟁 당시엔 泉城(천성)이라고 불린 오두산의 부근에서 한강과 임진강이 만난다고 해서 예로부터 이곳을 交河(교하)라고 불렀다. 나당 전쟁 중 唐의 함대는 군량과 무기를 싣고 交河 바로 북쪽 임진강 河口(하구)로 진입하려 했다. 임진강 중류의 七重城(칠중성)과 임진강의 支流(지류)인 한탄강 연안의 買肖城(매소성) 등으로 南下한 唐 지상군과 兵站線(병참선) 연결을 거듭 시도했던 것이다. 나당전쟁 때 칠중성과 매소성은 양군 간 쟁탈의 요충이었다.


그러나 공릉천 河口에 포진해 있던 신라 함대는 唐 함대의 임진강 진입을 한사코 틀어막았다. 요즘엔 평화전망대가 세워져 있는 오두산은 군사용어로 말하면 瞰制高地(감제고지)이다. 감제(Command &amp Domination)란 상대적으로 높은 지점으로부터의 관측에 의한 통제를 말한다.


오두산성은 392년 10월 고구려의 광개토왕에게 攻破(공파)당한 백제의 關彌城(관미성)이었다. 그 터엔 3국 쟁탈전의 역사를 증명하려는 듯 백제, 고구려, 신라의 토기가 계속 발굴되고 있다. 현재, 오두산 정상엔 임진강 북쪽의 山河(산하)가 내려다보이는 통일전망대가 들어서 있다. 오늘날 남북 대치의 현장인 임진강 1300 여년 前에는 나당의 결전장이었다. 필자는 임진강 하구의 伴鷗亭(반구정)과 臨津閣(임진각), 중류의 高浪浦(고랑포), 沙尾川(사미천), 瓠蘆古壘(호로고루), 七重城(칠중성), 국군 필승사단의 태풍OP(Observation Post&#8231 관측소), 그리고 임진강 지류인 한탄강 南岸의 買肖城(매소성) 등지를 답사했다.


특히, 매소성은 나당전쟁 중 지상군의 決戰場(결전장)이었다.&nbsp태풍OP(264고지) 바로 북쪽인 임진강 상류에는 水攻(수공)이 가능한 북한의 황강댐이 축조되어 있어, 장마철만 되면 우리를 잔득 긴장시키고 있다.


675년 9월29일, 신라군은 靺鞨族(말갈족)을 主力으로 했던 당군 20만과 매소성에서 대치했다. 그러나 李謹行(이근행)이 지휘한 말갈군단은 설인귀 함대의 泉城(천성) 전투 패배로 軍糧(군량) 등을 보급받지 못해 전면 퇴각을 서두를 수밖에 없었다. 매소성 전투에서 이근행 군단은 戰馬(전마) 3만여 필과 많은 무기를 버리고 도주했다. 매소성 전투 직후 이근행의 군단은 한반도를 떠나 토번군과 싸우기 위해 1만3000리 서쪽의 靑海(청해) 전선으로 급히 이동했다.


이근행은 나당 7년 전쟁 기간에 신라군과 가장 많은 전투를 벌인 敵將이다. 왜 전마를 3만여 필이나 버리고 퇴각했을까? 말은 사람의 12배를 먹는다. 말갈족&#8231 거란족 등 기마민족 병사는 원정 때 1인당 3필 정도의 戰馬(전마)를 데리고 다닌다. 따라서 군량이 떨어진 이근행 군단에게 말(馬)은 큰 골칫거리였을 터이다. 매소성 전투가 지상전의 결전이라면 해전의 결전은 기벌포 전투였다. 문무왕 16년(676) 11월, 설인귀의 함대가 서해안을 우회하여 금강 하구로 진입하려다가 伎伐浦(기벌포: 지금은 충남 서천군 장항읍) 앞바다에 포진해 있던 신라 함대와 격돌했다. 사찬 金施得(김시득)이 지휘한 신라 함대는 첫 교전에서는 패배했으나, 이어 전개된 22회의 大小 해전에서 全勝(전승)했다.


필자는 기벌포 해전의 현장인 금강 하구 長項(장항) 앞바다를 답사한 다음 금강 북안을 따라 東進(동진)해 백제의 마지막 수도 부여, 백제 패망 후 웅진도독부가 설치되었던 공주, 백제부흥군의 근거지 周留城(주류성: 충남 홍성군 長谷面)과 任存城(임존성: 홍성군 大興面)을 답사했다.&nbsp&nbsp


“신라는 자주 불순하지만 일찍이 우리 변방을 침범하지는 않았다.”&nbsp



676년 기벌포 전투 이후 나당전쟁이 재발하지는 않았지만, 당은 틈만 나면 신라를 다시 공략하려고 시도했다. 예컨대 678년 西域(서역)에서 당&#8231 토번의 실크로드 쟁탈전이 잠시 소강상태를 이루자, 당고종은 신라를 재침하려고 했다. 이때 시중 張文瓘(장문관)은 중병을 앓고 있었으면서도&nbsp당고종에게 나아가 신라와의 전쟁을 확대시키지 말라고 건의했다. 다음은 &lt&lt資治通鑑&#8231 자치통감&gt&gt 의봉 3년(678) 9월 條의 기사이다.



&lt 고종이 장차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토벌하고자 했다. 병으로 집에 누워 있던 侍中(시중) 장문관이 입궐하여 고종에게 간했다.
“지금 토번이 侵寇(침구)하니 바야흐로 군대를 일으켜 서쪽을 토벌해야 합니다. 신라는 비록 자주 불순하지만, 일찍이 변방을 침범하지 않았습니다. 만일, 또 東征(동정)을 한다면 그 폐해가 공사간에 심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에 고종은 (對신라전을) 중지했다. &gt&nbsp


문무대왕은 토번의 서역 공격을 틈 타 수퍼파워 唐을 꺾었다. 위에서 말한 靑海(청해)는 ‘푸른 바다’가 아니라 제주도 면적 2.5배 크기의 內陸 鹽水湖(내륙 염수호)인 청해호가 있는 지금의 靑海省(청해성)을 말한다. 청해호는 太古(태고)의 지각변동에 의해 바다가 육지가 되면서 염수호가 되었다. 나당 7년 전쟁을 제대로 파악하려면 이것과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간 토번&#8231 당의 전쟁, 특히 청해의 大非川(대비천) 전투의 현장을 답사하지 않을 수 없다. 대비천이 위치한 청해성의 共和縣(공화현)은 티베트의 라사(拉薩)∼청해성의 省都 시닝(西寧)를 잇는 214번 국가간선도로가 지나고 있는데, 이 도로는 감숙성의 성도 蘭州(난주)를 거쳐 唐제국의 수도였던 長安(장안: 지금의 西安)으로 이어진다. 또 공화현에서는 감숙성의 허리인 기련산맥을 넘어 河西走廊(하서주랑)의 요충인 張掖(장액), 그리고 청해성 西部지역인 차이담 盆地(분지)를 거쳐 新疆(신강)의 오아시스路와 연결된다.



2010년 4월9일, 필자 일행 5명은 西寧(서녕&#8231 시닝)공항에 착륙했다. 청해성의 省都(성도)인 서녕은 원래 백제부흥군 출신 장수 黑齒常之(흑치상지)가 건설한 군사도시다. 湟水(황수)라는 강을 따라 형성된 서녕은 시가지도 누렇고, 하늘도 누렇고, 산도 누렇고, 강물도 누렇다. 거리엔 이곳의 옛 주인인 티베트族과 흰 사각모자를 쓴 위구르族이 눈에 많이 띄였다.&nbsp


나&#8231 당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 大非川 전투.


나당 전쟁의 승패에 결정적 영향력을 행사한 것은 靑海湖(청해호) 남쪽에서 당&#8231 토번 간에 전개된 670년 8월의 大非川(대비천) 전투였다. 대비천은 安東都護(안동도호: 극동방면군 총사령관)였던 설인귀가 10만 대군을 이끌고 1만3000여 리를 이동, 청해호 남쪽에서 토번군과 싸워 전멸당한 현장인 것이다. 설인귀는 대번에 斬首(참수)를 당할 만한 패장이었지만, 그가 일찍이 홍수의 위기에서 당고종과 측천무후의 생명을 구한 공이 있었다. 더욱이 설인귀와 同鄕(동향: 山西省)인 측천무후의 비호를 받았기 때문에 그가 계속 기용된 것으로 보인다.


669년, 신라 문무왕은 설인귀 군단이 평양을 떠나 靑海로 이동한다는 정보를 사전에 입수했던 듯하다. 670년 4월, 신라 사찬(관등 제8위) 薛烏儒(설오유)와 신라에 망명했던 고구려의 태대형(관등 제1위) 高延武(고연무)가 각각 병력 1만 명씩 모두 2만 명을 이끌고 압록강을 도하해 鳳凰城(지역)으로 진출, 말갈군을 공격해 대승했다. 이것이 나당 7년 전쟁의 緖戰(서전)이었다.


2010년 4월10일, 필자 일행은 청해호 남쪽의 대비천을 답사했다. 중국인에게는 치욕의 현장이었던 대비천은 이제 沙珠玉河(사주옥하)라는 예쁜 이름으로 바뀌어져 있다. 우리 일행은 청해호 연안의 서남단 黑馬河(흑마하)를 거쳐 상피산(4451m)을 넘어 靑海南山(청해남산)의 남쪽 기슭에 펼쳐진 대비천 전투 현장을 둘러보고 자정 무렵에야 서녕 호텔로 되돌아왔다.


신라김씨의 原籍(원적)을 찾는 답사


청해성까지 깊숙히 들어간 우리 일행이 당&#8231 토번 전쟁 중 쟁탈의 요지였던 甘肅省(감숙성)의 실크로드 구간인 河西走廊(하서주랑)과 문무대왕의 능비문에서 그의 先祖(선조)라고 밝힌 金日&#30974(김일제)의 고향인 武威(무위)를 답사하지 않을 수 없었다. 2010년 4월11일 오전 9시, 필자 일행은 지프를 타고 서녕을 출발, 청해성과 감숙성의 경계지대인 峨堡鎭(아보진)에 이르러 점심을 먹으려 했으나, 길가의 식당 모두가 영업을 하지 않았다. 폭설이 휘날려 모두 문을 닫았던 것이다. 폭설 視界(시계)가 매우 불량한 가운데 겁도 없이 해발 4000m의 祁連山脈(기련산맥)을 넘어 張掖(장액)에 도착했다. 장액의 唐代(당대) 이름은 甘州(감주)다. 장액과 223km 상거한 酒泉(주천)의 唐代 명칭이 肅州(숙주), 두 곳의 머리글자를 따서 甘肅省(감숙성)이라 불리게 된 것이다.


4월22일은 폭설이 내린 다음날이라서 그런지 쾌청이었다. 우리 일행은 지프를 타고 장액에서 酒泉을 거쳐 明代(명대) 만리장성의 서쪽 끝인 嘉&#23786關(가욕관)을 향해 河西走廊(하서주랑)을 신나게 달렸다. 왼편에는 눈부시게 하얀 눈을 봉우리에 이고 있는 기련산맥, 오른쪽으로는 바딘지린(巴丹吉林) 사막이 펼쳐져 있다. 구름은 기련산맥의 허리에 걸려 있었는데, 하서주랑은 그곳보다 高度(고도)가 오히려 높다. 말을 타고 이 하서주랑을 달리면 雲上人(운상인), 바로 ‘구름 위의 사람’이 된다. 신라 화랑들이 왜 雲上人을 그렇게 憧憬(동경)했는지, 그 까닭을 알 것만 같았다. 문무대왕의 능비문의 기록이 맞다면, 그 선조의 原籍(원적)은 감숙성인 것이다.


慶州(경주) 대릉원의 天馬&#20898(천마총)에서 발굴된 말다래(障泥: 국보 제207호)에도 구름 위를 달리는 天馬를 그려놓았다. 말다래는 말이 달릴 때 진흙이 말의 허벅지와 배에 튀는 것을 막는 馬具(마구)로서 천마총의 말다래는 북방의 한랭한 삼림지대에 自生(자생)하는 자작나무로 만들어진 것이다. 천마총의 주인은 우리 역사인물 陽物(양물)이 가장 컸다는 智證麻立干(지증마립간)으로 추정된다. &lt&lt삼국유사&gt&gt는 지증마립간의 陰莖(음경)의 길이가 1척5촌이라고 전하고, 그가 반려자(왕비)를 찾는 스토리를 인간 냄새 물씬하게 기술하고 있다. 당시의 1척은 약 20cm, 1척5촌이라면 30cm인 것이다.


麻立干(마립간)은 17대 奈勿王(내물왕: 재위356∼402))으로부터 21대 智證王 4년(503)까지 사용된 신라의 王號(왕호)이다. 大陵園(대릉원)은 마립간 시대의 왕, 왕비, 왕족 무덤이다. 그래서 천마총에 가면 우리 古代史(고대사)의 暗號(암호)가 풀린다. 경주 대릉원의 무덤은 積石木槨墳(적석목곽분&#8231 돌무지덧널무덤)이다. 적석목곽분은 스키타이族, 匈奴族(흉노족) 등 기마민족의 무덤양식이다. 스키타이族이라면 기원전 6세기∼기원전 3세기 黑海(흑해) 연안에서 번영했던 유목기마민족의 元祖(원조)이다. 흉노족은 기원전 3세기∼5세기 몽골 및 중국 북부, 중앙아시아 초원지대에서 활동한 유목기마민족으로서 전성기에는 아시아대륙의 패권국으로 군림했다.


감숙성의 서쪽 끝인 敦煌(돈황)은 동서교류의 보물창고인 莫古窟(막고굴)로 유명하지만, 필자가 2004년 타클라마칸 사막의 天山南路(천산남로: 실크로드의 오아시스路 구간)를 답사할 때 이미 들렀던 곳이어서 가욕관에서 오던 길로 뒤돌아서 河西走廊(하서주랑)을 東進(동진)하기로 했다. 가욕관 동쪽 21km에 酒泉(주천)이 있다. 주천은 스무 살의 소년장수 藿去病(곽거병)이 BC 121년 여름 흉노족을 쳐부수고 나서 이곳 호수가에서 戰勝(전승) 파티를 했다. 이때 곽거병이 가진 슬이라고는 漢武帝(한무제)로부터 하사받은 단 한 병뿐이었는데, 그것을 물이 솟아오르는 구멍에 부은 다음, 술+물을 섞은 ‘칵테일’한 잔씩을 병사들과 나눠 마셨다고 해서 이후 이곳이 酒泉(주천)이라 불리게 된 것이라 한다.


주천에서 장액까지는 223km. 장액에서 김일제의 고향인 武威(무위)까지는 212km. 필자 일행은 그 중도의 山丹(산단)에서 기련산맥 기슭 쪽으로 진입해 50여km 정도 길을 헤맨 끝에 김일제와 그의 어머니가 곽거병에게 사로잡히고, 그의 아버지 休屠王(휴저왕)이 피살된 焉支山(언지산)을 찾아갔다.


언지산은 흉노의 24 王將(왕장) 중 1人인 渾邪王(혼야왕)의 근거지였다. 혼야왕과 휴저왕은 漢軍(한군)에게 거듭 패전해 흉노의 大선우인 伊稚斯(이치사)가 그 책임을 묻기 위해 소환명령을 내리자 목이 달아날 것을 겁내, 가만히 漢武帝(한무제)에게 急使(급사)를 날려 항복을 청했다.


한무제는 BC 121년 늦가을, 혼야왕과 휴저왕의 항복을 접수하기 위해 곽거병을 급파했다. 곽거병의 기마군단이 언지산으로 시시각각 접근해오자, 휴저왕은 최종단계에서 항복을 망설였다. 이에 혼야왕은 휴저왕을 살해하고 그의 무리를 빼앗았다.


언지산에 들이닥친 곽거병의 기마군단은 그때까지도 항복을 거부하는 흉노병 8000 명을 참살하고, 귀순자 4만여 명을 데리고 長安(장안)으로 개선했다. 귀순자 4만 명 중에는 김일제와 그의 어머니와 동생도 포함되어 있었다.


필자 일행은 언지산에 이어 김일제의 고향인 감숙성 武威(무위)에서 휴저왕의 居城(거성)인 休屠城(휴저성)과 그 백성들이 유목하던 休屠澤(휴저택) 등지를 둘러보았다. 무위의 중심가에는 무위의 역사인물들의 略歷(약력)을 새긴 步板(보판)이 죽 깔려 있는데, 그 제1번의 인물이 金日&#30974(김일제)이다.


장안에 끌려온 김일제는 처음엔 養馬奴(양마노)로 전락했으나, 곧 말(馬) 마니아인 漢武帝에게 능력을 인정받아 馬監(마감)으로 출세했고, 副宰相(부재상) 망하라가 한무제를 암살하기 위해 비수를 들고 황제의 침실로 뛰어들려 하던 순간, “망하라 모반!”이라 외치며 몸으로 막아섰다. 이런 활약으로 그는 한무제 임종 때 어린 昭帝(소제)를 보필할 3인의 託孤之臣(탁고지신) 중 1인이 되었고, 그 후 &#31226侯(투후)라는 작위도 받았다.


그러나 투후의 후손들이 훗날 前漢(전한)을 찬탈한 王莽(왕망)의 新나라 창업에 협조했기 때문에 光武帝(광무제)의 後漢(후한)이 섰을 때 그 다수가 피의 숙청을 당했다. 살아남은 김일제의 후손들은 해외로 도주했는데, 그때 그들이 소지했던 왕망시대의 화폐가 한반도 남부, 제주도, 일본 규슈 등지에서 발굴되었다. 김일제 후손들의 망명과 연결시킬 수 있는 증거물이다. 문무대왕의 陵碑文(능비문)에서 신라김씨가 투후의 후손임을 明記(명기)해 놓았음은 뒤의 본문에서 재론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