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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흙수저' 트루먼과 '금수저' 맥아더의 갈등

鄭淳台(작가)   |   2016-08-31 | hit 14264



맥아더의 허영심이 재앙의 원인


'프리마돈나'의 著者(趙甲濟) 는&nbsp1951년 3월 서울을 수복한&nbsp리지웨이의 반격 작전 성공으로 가장 큰 타격을 받은 사람은 맥아더라고 지목했다. 워싱턴을 압박하던 맥아더의 비관론은 일순간에 부정되고 말았다는 것이다. 리지웨이는 1967년에 쓴 회고록에서 중공군 개입 정보를 무시한 맥아더의 무모한 북진을 집중적으로 비판했다. 그는 맥아더의 知的 능력, 설득력, 군사적 천재성, 상상력, 개인적인 용기를 극찬하면서도 문관우위(文官優位)의 원칙을 무시한 점, 포퓰리즘, 지나친 명예욕과 허영심을 비판했다. 즉, 인천상륙작전의 성공에 도취한 맥아더가 더 큰 허영을 좇아가다가 비극을 불렀다는 지적이었다. 리지웨이는 중공을 공격하자는 맥아더의 전략과 계산을 이렇게 비판했다.


&lt 맥아더도 여러 번 “제 정신이 있는 사람이면 중국 본토로 지상군을 보내자는 말은 하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그가 진지하게 그리고 끈질기게 주장했던 것은 우리의 거대한 해&#8231공군력으로 중국을 고립시키고, 몇 세대에 걸쳐 무력도발을 하지 못할 정도로 잠재력을 파괴하자는 것이었다. 트루먼과 맥아더는 아시아의 地上戰에 반대하는 데는 같았지만, 대통령은 중국의 파멸을 노리는 맥아더엔 동조할 수 없었다. 맥아더는 소련의 개입 여부에 관계없이 중국의 전쟁 수행능력을 파괴하려고 했다. 그 결과로 소련을 전쟁으로 불러들여 유럽을 유린하는 위험성을 외면했다. 맥아더는 “이미 우리는 중국과 전쟁상태이므로 중국 본토 공격은 합리화된다”고 생각했다. 그는 유럽은 이미 소련을 위한 산업적 뒷마당으로 전락, 잃어버린 것과 같으며, 세계의 미래는 아시아에서 결정될 것이라고 믿었다.&gt


맥아더와는 달리 당시 미 국방부는 아시아보다 유럽을 중시했다. 유럽을 잃으면 NATO는 해산되고 미국은 고립된다고 보았기 때문이었다. 저자에 따르면 리지웨이는 맥아더가 차고도 넘치는 중공군 개입 정보를 무시하고, 모든 군사적 계산을 외면하며, 무모한 북진을 감행한 것은 중국의 파괴라는 거대한 꿈에 매료된 때문이라 풀이했다.


&lt맥아더가 ‘승리’라고 말할&nbsp 때 이는 한국에서의 승리만 가리키는 것이 아니었다. 그는 공산주의를 세계적 차원에서 패배시키기를 꿈꾸었다. 공산주의에 회복 불가능한 타격을 가하여 붉은 사조(思潮)의 확산에 역사적 브레이크를 거는 것이었다. 그의 계획엔 압록강으로의 진격만 있는 게 아니었다. 만주의 공군기지와 산업단지를 파괴하고, 공산 중국의 해안을 봉쇄하며, 산업의 중심지를 부수고, 장개석의 본토 상륙작전을 전폭적으로 지원하며, 대만 군대를 한국전선으로 이동시키면 중국에 대한 공산당의 장악력이 무너질 것이라고 진지하게 믿었다.
&nbsp그는 중국 본토 사람들이 장개석 군대를 환영할 것이며, 소련은 개입하지 않을 것이라 판단했다. 만약 소련이 개입하면 그는 공격하도록 건의했을 것이다. 군사력을 동원한 세계 공산주의의 파괴가 그의 궁극적 목표였다.&gt


맥아더 해임과 유엔군 수뇌부의 교체


3월19일 애치슨 국무장관, 마셜 국방장관, 합참은 연석회의를 열고 대통령 성명으로 敵軍에 협상에 의한 한국 문제 해결을 제안하기로 결정해, 휴가 중인 대통령의 허락을&nbsp 받았다. 미 합참은 3월20일 맥아더에게 이런 내용을 미리 알려주었다. 21일, 맥아더는 자신의 지휘권에 추가적인 제한조치가 없었으면 한다는 답신을 보내왔다. 국무부는 한국전쟁 참전국 대표들에게 협상 제안 계획을 설명하고 동의를 받는 절차를 밟기 시작했다.

3월24일, 맥아더는 놀라운 발표를 한다. 워싱턴의 국가 지도부와 아무런 상의도 없이 일방적으로 적군 사령관에게 협상을 제의한 것이다. 그 내용도 국가 원수가 아니면 할 수 없는 말이었다.


&lt우리가 그동안 참아온 군사작전을 (중국의) 해안지역과 내륙으로 확대한다면 공산 중국이 파멸될 것임을 적군도 알았을 것이다. 따라서 한국 문제와 관련이 없는 대만이나 중국의 유엔 가입 문제를 떠나서 나는 한국에 대한 유엔의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는 문제를 놓고 적군 사령관과 논의할 준비가 되어 있다.&gt


트루먼은 맥아더의 추가적인 발언의 중지를 지시한 다음 “이제는 맥아더의 抗命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결심에 이르렀다. 추가 전력 증강과 중국 본토에 대한 폭격 등을 주장한 맥아더의&nbsp 대외 발표는 확전을 제한하려는 트루먼 미 대통령과 대립할 수밖에 없었다.

이로 인해 4월11일, 맥아더 원수는 해임되었다. 그는 미 의회에서 “노병은 결코 죽지 않는다. 다만 사라질 뿐이다”라는 연설을 끝으로 52년에 걸친 군 생활을 청산했다. 그의 후임으로는 당시 미 제8군사령관이었던 리지웨이 장군이, 미 제8군사령관에는 밴플리트 장군이 새로 임명되었다.

유엔군에 대한 반격의 찬스를 엿보던 중공군은 후퇴에 의한 병참선 단축으로 전투력 보충이 완료되자 4월과 5월, 두 차례에 걸쳐 대규모 공세를 개시했다. 可用병력을 총동원한 아군은 중공군의 공세를 저지하고, 다시 반격으로 전환하여 38도선 이북의 김화∼간성 일대까지 진출했다. 이때부터 전선은 지금까지와는 전혀 다른 일진일퇴(一進一退)의 교착전 양상을 띄게 되었다.&nbsp
&nbsp&nbsp
정정협정 조인―그러나 6·25 남침전쟁은 끝나지 않았다


6·25 전쟁 중 중공군은 군수지원의 어려움으로 인해 제2차 공세를 제외한 全 전투에서 공세 기간을 2주 이상 지속하지 못 했다. 이것이 6·25 전쟁에서 중공군의 치명적인 약점이었다. 결국, 양측은 제한전(制限戰)의 방법으로는 군사적 승리가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nbsp

이에 따라 “통일 없는 휴전은 절대 반대한다”는 한국정부의 입장이 무시된 채 미국이 주도하는 자유 진영은 휴전회담을 조속히 타결하여 전쟁의 확대를 막기 위한 협상을 계속 진행시켜 나갔다. 반면 공산 진영은 휴전회담을 하면서&nbsp진지 보강과 전력 증강에 박차를 가했다.

1951년 7월10일, 개성에서 첫 휴전회담이 시작되면서 6·25 전쟁은 새로운 국면으로 접어들었다. 휴전회담은 “피 흘리지 않고 싸우는 또 다른 전쟁”이었으며, 이 시기의 전투는 회담을 유리하게 이끌어 협상의 주도권을 장악하기 위한 수단으로써, 쌍방은 한 치의 땅이라도 더 차지하고자 치열한 고지 쟁탈전을 전개하였다.

휴전협상이 2년이나 걸린 이유는 포로송환 문제 때문이었다. 유엔군에 포로가 된 북한군 및 중공군 중 절반이 돌아가기보다는 자유세계에 남고 싶어 했다. 제네바 포로협정은 본인 의사와 관계없이 무조건 송환해야 한다고 규정되어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 때 독일군의 포로가 된 소련군인들 중 상당수가 남고 싶어 했으나 미국은 무조건 돌려보내는 정책을 채택했다. 이들은 돌아가자마자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

폴 니츠 등 국무부 간부들은 이 전례를 되풀이해선 안 된다고 생각했으나 국방부는 무조건 송환 쪽이었다. 국무부와 국방부가 아무리 회의를 해도 결론이 나지 않았다. 애치슨 국무장관이 트루먼의 최종 결재를 받고자 했다. 트루먼은 ‘자유의지 확인 이후의 송환 원칙’을 결단했다. 저자는 트루먼의 결단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공산군 측은 무조건 송환을 고집하여 휴전이 늦어졌고, 트루먼 재임기간 중 휴전에 이르지 못했으나 미국은 인권의 원칙을 관철시켰다. 미국은 1950년 12월 흥남에서 철수할 때 그 긴박한 상황에서도 10만 명의 피란민을 군함에 태우고 남한으로 왔다. 이 또한 세계전사에서 찾기 힘든 인류애의 발현이었다.”

휴전회담은 군사분계선과 비무장지대 설정, 포로송환 문제 등으로 장기간 지연되었으나, 결국 1953년 7월27일 정전협정(停戰協定)이 조인되어 현재의 군사분계선으로 분단된 채 오늘에 이르고 있다. 정전협정이란 평화적 해결이 될 때까지 일시적으로 상호 적대행위와 무장행동을 정지하는 것이다. 따라서 6·25 남침전쟁은 아직도 끝나지 않았다.


소련과 중국이 두려워했던 이승만


저자는 이승만 대통령의 동상을 세종로에 세워야 한다고 주장할 만큼 6·25 전쟁과 관련한 이승만에 대한 역사적 평가에 후한 언론인이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lt1951년 1월의 암울한 겨울, 부산 임시수도에서 한국의 운명이 한국인 몰래 결정되는 과정을 지켜본 이승만(李承晩)은 한국전을 마무리하는 단계에서 혜성처럼 국제무대에 등장한다. 1953년 6월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이 관리하던 포로수용소의 문을 일제히 열어 휴전 협상의 최대 쟁점이던 반공포로 2만7000명을 석방, 합의 직전에 있던 미국과 중국을 경악으로 몰고 갔다.

트루먼에 이어 1953년 미국 대통령에 취임한 아이젠하워는 ‘통일 없는 휴전에 반대’하는 이승만 대통령을 제거하는 공작까지 구상하기도 했다. 1950년 7월4일, 한국군의 작전통제권을 유엔군사령관에게 넘겨준 이후 전국(戰局)의 주도권을 잡지 못하고 소외되었던 이승만은 반공포로 석방이란 일생일대의 승부에 의해 미국의 멱살을 잡고 이후 한국의 안보를 담보하는 한미상호방위조약의 협상을 유리하게 끌고 갈 수 있었다.&gt&nbsp

반공포로 석방 직후인 7월3일 중국 정부는 베이징(北京) 주재 소련 대리대사에게 현 상황의 자료를 건네준다. 냉전이 끝난 후 공개된 이 자료를 통해 우리는 이승만에 대한 공산 측의 높은 평가를 엿볼 수 있다. 다음 인용문은 《소련 자료로 본 한국전쟁의 전말》에서 저자가 인용한 부분이다.

&lt이승만이 전쟁 포로를 석방하고 휴전 반대 운동을 확대한 지난 12일간, 조선전쟁에 묶여 있는 미국은 타협을 모색하고 있음. 그러나 이승만은 미국을 자신의 계획에 끌어들이려 하고 있음. 미국의 약점을 철저히 이해하고 있는 이승만이 타협하지 않을 것으로 예측됨. (중략) 중국 정부는 평화를 위하여 휴전협정에 동의하는 것이 필요하다고 생각함. 이러한 경우, 미국과 중국이 함께 이승만을 반대하는 입장에 서는 역설적인 상황에 직면하게 될 것이라고 오학겸(吳學謙:외교부장&#8231부총리&#8231정치국원 역임)이 농담조로 언급했음,&gt

&nbsp저자에 따르면 “미국의 약점을 철저히 이해하고 있는 이승만”이 미국을 끌고 들어가 휴전협상을 깨고 북진을 하려고 하는데, 그런 이승만의 기도를 막기 위해 “중국이 미국과 함께 이승만을 반대하는 상황에 직면하게 되었다”고 분석했던 것이다. 이는 중국이 미국과 손을 잡아야 할 만큼 이승만 다루기가 힘들었다는 공산 측의 고백이기도 했다.

이승만 대통령은 그 몇 달 뒤 방한한 닉슨 미국 부통령에게 “공산주의자들에게는 내가 무엇을 할지 모르는 사람이다. 미국 말도 듣지 않는 사람이라는 인상을 심어 주어야 미국의 협상력이 강해진다”고 훈수하기도 했다.

이승만이 이런 승부를 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한국군과 국민들이 李 대통령의 북진통일 의지를 전폭적으로 지지한 덕분이다. 당시 초등학교 3년생이던 평자도 “휴전 반대‘라 쓰인 완장을 차고 학우들과 함께 시골 역전 광장에 나가 ’휴전 반대!‘를 소리 높여 외쳤다.&nbsp
&nbsp
강력한 심장을 가진 트루먼&#8212 냉전 승리의 씨앗을 뿌렸다


트루먼 대통령은 참전 결정으로 한국을 구했지만, 擴戰을 거부하고, 맥아더를 해임함으로써 한때 통일을 막았다는 비판을 받았다. 저자에 따르면 요사이 학자들의 거의 일치된 견해는 트루먼의 확전 거부가 정당했다는 것이다. 맥아더는 “전쟁에선 승리를 대체할 것이 없다”고 했지만, 트루먼은 “전쟁에서 승리의 대체물이 있다. 그것은 평화이다”라고 말했다.

1953년 7월27일의 휴전은 후임 대통령 아이젠하워의 작품이었다. 이렇게 얻은 평화의 시기에 한국은 자유민주주의, 위대한 지도자, 한미동맹, 그리고 우수한 민족적 자질을 살려 북한정권을 압도하는 경제적&#8231 정치적 성장을 이룩했다. 한국은 의지만 있으면 자유통일을 할 수 있는 고지에 올라섰다. 트루먼의 참전 결단, 그리고 한국 포기 거부의 결단 덕분에 가능했던 번영이다.

6·25 전쟁에서 한국과 미국이 손잡고 국제공산주의의 확산을 저지함으로써 자유세계는 많은 것을 얻었다. 일본과 독일의 부흥과 再무장, 대만의 생존, 미국의 본격적인 군비증강, NATO의 강화 등에 의한 대소(對蘇) 포위망 완성 등이다. 냉전이 자유세계의 승리로 끝난 뒤 학자들은 6·25 전쟁의 의미와 트루먼의 역할을 높게 평가하게 되었다. 저자의 견해에 따르면 트루먼이 미국의 위대한 대통령 반열에 오르는 가장 큰 이유도 한국전쟁에 대한 지휘를 올바르게 했다는 점 덕분이다.

1953년 1월15일 트루먼은 퇴임 직전의 연설에서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나의 재임기간에 대해서 냉전(冷戰)이 우리의 일상생활에 그림자를 드리운 시기라고 기억할 것입니다. 하루도 이런 전면적 투쟁으로 영향을 받지 않고 지낸 날이 없었습니다.”

저자는 트루먼이 자신의 역사적 역할을 정확하게 예측했다고 평가했다. 자유세계의 승리로 끝나자 역사가들은 냉전 승리의 전략은 트루먼이 만든 것이란 점을 인정하게 되었다. 마셜 플랜에 의한 유럽 부흥, NATO(북대서양조약기구)에 의한 집단안보, ‘트루먼 독트린’에 의한 반공(反共)정책, 그리고 한국전 참전 결정은 냉전 승리의 씨앗이었다. 저자는 특히 “레이건이 성공적인 추수(秋收)를 함으로써 트루먼의 위상이 높아졌다”고 분석했다.

고졸 학력밖에 없는 트루먼은 ‘위대한 성격’으로서 미국 역사상 최고의 국무장관(딘 애치슨)과 국방장관(조지 마셜)을 부렸다. 애치슨은 트루먼을 ‘보스’ ‘강력한 심장을 가진 대장’이라고 불렀다. 마셜은 “트루먼의 용기 있는 결단보다도 그의 인간됨이 더 오래 기억될 것”이라고 평했다. 한국전쟁에 등장한 인물들에 대한 평가 퇴임 후 트루먼은 맥아더 원수를 극동군사령관직에서 해임한 데 대한 질문을 받고 이런 말을 했다.

“나는 맥아더가 대통령의 권위를 존중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임한 것이지, 그가 바보 같은 자식이라고 해서 그렇게 한 것이 아니다. 실은 맥아더는 그런 자였지만, 바보스럽다는 것을 가지고 장군들을 처벌할 수는 없다. 만약 그런 법이 있다면 절반에서 4분의 3 가량의 장군들은 감옥에 쳐 넣어야 할 것이다.”

&lt&lt프리마돈나의 추락&gt&gt에서 ‘프리마돈나’는 ‘흙수저’ 출신의 트루먼이 ‘금수저’를 물고 태어나 푸트 라이트를 받고 살아온 맥아더를 비하해 붙인 별명이다. 맥아더는 웨스트포인트 1등 출신이며 아버지처럼 육군참모총장을 역임했다. 1953년 미국대통령이 되었던 아이젠하워는 영관급 시절 2회에 걸쳐 무려 10년간 맥아더의 보좌관으로 근무했다. 트루먼은 고졸 출신으로 1차 대전 때 위관급 포병장교로 복무했고, 轉役 후에는 사업을 하다가 파산을 하기도 했던 인물이다.&nbsp

그렇다면 이 책의 정확한 이름은 《프리마돈나를 추락시킨 강력한 심장의 보스》이라 해야 더 잘 어울린다는 것이 평자의 생각이다. 그럴 만큼 저자는 ‘프리마돈나’의 액션보다 ‘강력한 심장을 가진 보스’의 지도노선이 옳은 것으로 보았다.

트루먼은 88세이던 12월26일에 죽었고, 이틀 뒤 고향(미주리州 인디펜던스) 기념도서관에 묻혔다. 인디펜던스의 기념도서관은 그가 짓고 회고록을 집필했던 곳이다. 그는 자신의 회고록 서문에서 대통령직의 본질을 이렇게 요약했다.

&lt대통령이 된다는 것은 호랑이 등에 오르는 일과 같다. 계속 달리지 않으면 잡혀 먹힌다. 대통령은 항상 사건의 머리 위에 있어야 한다. 조금이라도 머뭇거리면 사건이 그의 꼭대기에 앉게 된다. 한 순간이라도 안심해선 안 된다. 대통령이 되어 보지 않은 사람은 대통령의 무한(無限) 책임에 대해 이해할 수 없을 것이다. 대통령에게 돌아오지 않는 책임은 없다. 대통령은 한시라도 자신이 대통령이란 사실을 잊어선 안 된다. (中略) 나는 중요한 결정을 할 때 역사적 선례를 연구했다. 모든 문제는 과거에 그 뿌리가 있다. 나는 역사적 맥락 속에서 결정을 내리려 했다. 내가 왜 역사를 읽고, 또 읽었느냐 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gt

평자는 저자의 판단에 동의하면서도 역사적 인물 모두에게는 공과(功過)가 교차한다고 생각한다. 얘컨대 저자가 한국전쟁의 영웅으로 치켜세운 트루먼, 애치슨, 리지웨이에게도 명암(明暗)이 병존한다. 특히 한국인의 입장에서는 억울한 점도 많다.

트루먼은 공산진영의 침략에서 한국을 구원한 제1의 공로자인 것은 틀림없지만. 휴전을 서둔 나머지 공산 측의 주장대로 회담의 장소를 개성, 이어 판문점으로 양보한 실수를 범했다. 이로써 서울에서 50km 거리에 휴전선이 그어지게 되었고, 수도권의 천혜적 요소인 한강과 임진강의 하구가 반신불수의 상태가 되었으며, NLL(북방한계선)에 대한 북한의 도발이 거듭되고 있다.&nbsp

애치슨도 저자에 의해 미국 역사상 최고급의 국무장관이라고 평가되었지만, 중소(中蘇) 관계를 떼어놓기 위한 책략의 하나인 애치슨 선언이 김일성에게는 ‘남침 초대장’으로 악용되는 엄청난 부작용을 빚고 말았다. 리지웨이는 37도선까지 밀린 전선을 현재의 휴전선까지 끌어올린 전공이 탁월하지만, 그의 지시에 따라 밴플리트 8군사령관이 작성한&nbsp 북진계획을 워싱턴을 의식해 포기해버렸다. 그 북진 계획은 동해안의 통천 혹은 원산을 점령하려 했던 것이다. 동해안 지역은 제해권을 장악한 미군이 마음만 먹으면 쉽게 북상할 수 있었다. 만약 그 계획이 실시되었다면&nbsp 군사분계선이 원산∼마식령산맥∼예성강 하구로 이어져 지금 우리의 수도권 방어가 훨씬 용이해졌을 것이다.

絶頂高手의 장기판을 복기하는 느낌


《프리마돈나의 추락》은 수만리 밖의 유악(&#24119幄) 안에서 주군(主君)과 모신(謀臣)들이 무릎을 맞대고 천하대사와 전략을 논하는 비화(秘話)를 주제로 삼았다. 따라서 이 책의 내용을 장기판에 비긴다면 車(차)·包(포)·馬(마)·象(상)·卒(졸)의 진퇴(進退)보다는 이들을 움직이는 양 진영 절정고수(絶頂高手)들의 대전략을 추적한 것이다. 다음은 이 책에서 거론된 몇 가지 팩트와 평가이다.&nbsp&nbsp

냉혈(冷血)의 대전략가 스탈린이 김일성을 미끼로 삼아 미국을 함정에 빠뜨리기 위해 시작한 한국전쟁은 트루먼의 결단, 맥아더의 인천상륙작전에 힘입어 자유진영의 승리로 끝나는 듯했다.

그러나 맥아더가 중국 본토 공격의 명분 확보를 위해 중공군 개입을 방치, 한국은 지도상에 사라질 뻔했다. 이때 모택동의 오만과 오판, 그리고 리지웨이 장군의 용전으로 전선은 다시 38도선으로 회귀, 휴전을 맞았다.

이승만 대통령의 벼랑 끝 전술로 한미동맹이 구축되고, 반공자유민주주의 체제가 공고해졌다. 한국군을 만들어낸 국군 장교단이 군사혁명(혹은 쿠데타)으로 집권하여, 대외 지향적 경제발전에 성공, 민주주의의 물적 토대를 만듦으로써 체제 경쟁에서 북한을 압도하기 시작했다. 미국은 한국전에서 일단 무승부를 만들어 놓고, 평화로 시간을 번 다음, 본격적인 대소(對蘇) 포위망 건설에 나섰다.

한국전쟁에서 유엔군이 버틴 덕분에 대만이 살고, 일본이 군수물자 생산으로 특수(特需)경기를 누리면서 경제부흥에 성공하고, 서독은 재무장하여 유럽 방어의 중심이 되고, NATO는 군사동맹으로 강화되었으며, 미국은 국방비를 네 배로 늘려 소련을 상대로 한 군비경쟁을 시작한다.

40년 뒤 소련이 붕괴한 이유는 미국의 트루먼 행정부가 스탈린의 한국전 도발 음모에 숨은 함정을 간파, 한국전쟁에서 제한전쟁을 선택한 덕분이다. 공산체제를 평화적으로 무너뜨리는 거대한 우회전략이 성공한 것이다.

중공은 국력을 크게 소모함으로써 그만큼 경제 재건이 늦어졌다. 뿐만 아니라 한국전쟁에 참전한 탓으로 그 후 20년간 유엔에 가입할 수 없었다. 만약 6·25 전쟁에 참전하지 않았더라면 중공은 대만을 통합했을지 모른다. 한편 중공과 소련이 6·25 전쟁을 지원하는 과정에서 노출된 이견과 불신은 훗날 중&#8231소 분쟁으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나 모택동의 사후 실용노선의 등소평(鄧小平)이 시장경제를 채택함으로써 중국은 아시아에서뿐만 아니라 제3세계의 리더로 자리잡게 되었다. 특히 미&#8231중 수교 이후 중국은 성장을 거듭해 어느덧 G2의 하나로 국격이 급부상했다. 그러나 최근, 한국에 사드 배치가 진행되는 가운데 중국은 냉전시대로 후퇴하려는 작태를 드러내고 있다.

소련은 6·25 전쟁에서 얻은 것이 거의 없다. 소련은 오히려 6·25 남침전쟁의 배후 조종자로 지목되었다. 뿐만 아니라 소련은 적극적으로 북한을 돕지 않았다는 이유로 같은 공산권 내에서도 비난을 받았다. 중공을 미국과의 전쟁에 끌어들여 미·중 모두를 약화시키려는 책략을 구사했다는 의심에도 자유스럽지 못했다. 또한 북한에 대한 소련의 절대적인 영향력도 감소했으며, 중공과는 적대적 관계로 발전하는 계기가 되었다. 한국전쟁의 패자(敗者)는 스탈린, 김일성, 모택동이고, 승자는 트루먼, 이승만, 그리고 자유진영으로 결판이 난 것이다. 다만, 한국만은 북한이 핵무장에 성공, 한국전쟁의 최종 승패는 미결 상태이다.

조갑제 대표의 《프리마돈나의 추락》을 읽으면 고수(高手)들이 두었던 한판의 바둑을 수준 높은 해설을 들으며 복기(復碁)하는 듯한 느낌이 든다. 물론, 이 책에서 거론된 저자의 평가에 대한 호불호(好不好)는 독자의 몫이다. 그러나 오늘날의 대한민국은 6·25 전쟁에 의해 최빈국으로 전락했지만, 이제 경제규모에서 세계 제11위에 급상승해, ‘자유 진영의 쇼윈도’가 되었다. 따라서 한국전쟁과 관련한 팩트와 평가를 알기 쉽게 정리한 이 책은 대한민국의 오늘을 이해하는 데 좋은 길잡이가 될 것이다. ●&nbsp&nbsp&nbsp&nbsp





프리마돈나의 추락
한국인은 모르는 맥아더의 두 얼굴

趙甲濟

276페이지 | 150*225mm | 13,000원 | 2016년 7월28일 | 979-11-85701-39-4 03340

정치/사회&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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