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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통일의 실질적 지휘자 문무왕의 奮鬪

鄭淳台(작가)   |   2016-09-05 | hit 11775

3면&nbsp포위 공격받은 신라


진덕여왕이 당의 고종에게 바친&nbsp태평송을 음미하면 신라의 고뇌를 느낄 수 있다. 신라의 저자세 외교(外交)는 생존을 위한 몸부림이었기 때문이다. 신라는 고구려, 백제, 왜국이란 3面의 적에 대처해야 했다. 이런 국가존망의 위기 상황에 직면하게 된 원인에 대해 약간 짚어 볼 필요가 있다. 광개토왕 이래 신라는 고구려를 섬겨 백제, 가야, 왜국의 3面 포위공격에서 살아남았다. 427년 고구려의 장수왕이 압록강 北岸의 국내성에서 대동강변의 평양으로 수도를 옮겨놓고 남진정책을 감행하자, 신라는 백제와 공수동맹(攻守同盟)을 맺어 고구려의 침략에 맞섰다.


그러나 백제는 475년 고구려군의 침략을 받아 수도 漢城(한성)을 빼앗기고, 개로왕은 사로잡혀가 지금의 워커힐 뒷산(아차산)에서 참수(斬首)되었다. 신라는 이때 원병 1만 명을 파견했지만, 漢城(한성: 풍납토성+몽촌토성)이 이미 攻破(공파)당한 후였다. 이때 개로왕의 동생 文周(문주)는 지금의 공주로 남하해 웅진백제 시대를 열었다. 이후 백제와 신라의 동맹은 더욱 굳어진다.


드디어 551년 고구려에서 내분이 일어난 기회를 이용해 백제-신라 연합군은 고구려군을 한강유역에서 몰아냈다. 백제는 자신의 옛 수도권인 한강 하류지역의 6郡(군)을 탈환했고, 신라는 죽령과 조령을 넘어 주로 산악지대인 한강 상류(남한강) 지역의 10郡을 차지했다.


그러나 고대국가의 속성상 강 하나의 유역을 나눠 가지는 동맹체제가 지속될 리 만무했다. 553년 7월, 신라는 기습공격을 걸어 백제가 회복한 한강 하류지역까지 차지하고, 新州(신주)를 설치했다. 신주의 軍主에는 김유신의 조부인 金武力이 임명되었다.


백제는 신라의 배신에 보복해야 했다. 백제 聖王(성왕)은 3만 명의 백제-가야-왜 연합군을 결성해 신라 영토의 허리를 누르기 위해 管山城(관산성: 지금의 충북 옥천)에 진주시켰다. 554년 7월의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을 비롯한 3만 병이 전멸하고, 오직 왕자 餘昌(여창: 후일의 위덕왕)만이 필마단기(匹馬單騎)로 신라군의 포위망에서 빠져나와 수도 사비성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562년 1월, 신라는 가야연맹제국의 마지막 맹주 대가야까지 먹었다. 이제 신라는 한반도에서 가장 기름진 낙동강· 한강 유역을 차지해 농업생산력이 급증하고, 당시 東아시아 세계의 중심이었던 唐과 직통할 수 있는 南陽灣(남양만)의 黨項城(당항성: 경기도 화성시)을 보유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것이 오히려 신라국가에게는 미증유의 위기를 불러왔다. 신라는 백제· 고구려· 왜국에게 공동의 적이 되었다. 어떤 국가도 3面 공격에는 견딜 수 없다. 640년, 백제 무왕에 이어 의자왕이 즉위했다.


642년 7월, 의자왕은 신라 국경지역의 40여 성을 점령했다. 8월에는 고구려와 백제 연합군이 신라를 침공해 서해안의 당항성을 함락 직전까지 몰고 갔다. 특히 백제군 1만여 명은 신라 수도권의 요새 大耶城(대야성: 경남 합천)을 함락시켰다. 이때 대야성 城主이며 김춘추의 사위인 品釋(품석)과 고타소(김춘추의 딸) 부부가 자결했다.


642년 대외정세도 급박하게 돌아갔다. 642년 10월, 고구려의 동부대인 연개소문이 쿠데타를 일으켜 영류왕과 대신 100여명을 살해하고 보장왕을 즉위시켰다. 그 자신은 절대권력자인 대막리지가 되었다. 이보다 1개월 전인 9월, 당은 변경을 침입한 西돌궐에 결정적 타격을 가했다.



同盟을 찾아나선 金春秋&#8212 648년 羅·唐 비밀협약&nbsp


김춘추는 신라에 대한 3면 포위를 풀기 위해 자신의 신명을 걸었다. 642년 11월, 김춘추는 고구려로 들어가 對백제 군사동맹을 제의했다. 그러나 쿠데타로 막 집권한 淵蓋蘇文(연개소문)은 신라가 점령한 竹嶺(죽령) 이북의 땅을 반환할 것을 逆제의함으로써 회담은 결렬되었다. 이때 김춘추는 고구려에 억류되어 목숨까지 위험한 지경에 처하기도 했다.


이어 647년, 김춘추는 宿敵(숙적) 왜국으로 건너가 對백제 견제외교를 전개했다. &lt&lt日本書紀&#8231 일본서기&gt&gt에는 이때 김춘추의 모습에 대해 『용모가 출중하고 담소를 잘했다(美姿顔善談笑)』라고 기록되어 있다. 회담의 결과에 대한 기록은 없지만, 왜국은 그들 선조가 일본열도로 건너가기 전에 살았던 가야諸國(제국)을 병합했던 신라에 대해 우호적이지는 않았을 것이다.


신라는 동맹국이 필요했다. 648년, 김춘추는 唐에 건너가 唐태종을 만났다. 이때 唐태종은 김춘추에게 『내가 두 나라(고구려·백제)를 평정하면 평양 이남과 백제의 토지는 모두 신라에 주어 길이 편안토록 하려 한다』고 약속했다.


이것이 이른바 「648년 밀약」이다. 이후 東아시아 세계는 고구려-백제-왜국의 南北동맹과 신라-당의 東西동맹으로 니눠져 대립했다. 결과론이지만, 남북동맹은 동서동맹에 비해 느슨했다.


654년, 진덕여왕이 병사하고 후사가 없자 和白(화백) 회의는 처음엔 上大等(상대등: 귀족회의 의장) 金閼川(김알천)을 밀었지만, 백제·고구려의 공세를 자신의 실력으로 막아 온 김유신의 위엄에 눌려, 김춘추를 만장일치로 후계왕으로 추대했다. 김춘추-김유신 동맹의 승리였다.


김춘추의 등극 후 장남 金法敏(김법민)은 곧 태자가 되었고, 병부령(지금의 국방부 장관)을 겸임했다. 660년 7월, 당의 신구도행군총관 蘇定方(소정방)이 백제를 치기 위해 13만 대군을 이끌고, 남양만으로 들어오자 태자 김법민은 전함 100여 척을 이끌고 덕적도에서 당군을 접응(接應)했다. 7월13일, 羅唐연합군에 의해 사비성이 함락되자 태자 김법민은 의자왕의 왕자 扶餘隆(부여융)을 말 앞에 꿇어앉히고 얼굴에 침을 뱉으며 꾸짖어 말했다.


『예전에 네 아비가 내 누나(고타소)를 죽여 옥중에 파묻어, 나는 이 일로 20년 동안 가슴이 아팠는데, 오늘은 네 목숨이 내 손에 달렸구나!』


김법민으로서는 백제 왕가에 대한 해묵은 私怨(사원)을 통쾌하게 풀었던 순간이었다. 그러나 이와 같은 승자의 태도는 결코 전략적이지는 않았다. 7월18일, 熊津城(웅진성: 지금의 공주)으로 도주했다가 사비성으로 되돌아와 항복한 의자왕도 치욕적인 모욕을 당했다. 의자왕은 나당연합군의 전승축하연에 불려나가 勝將(승장)들의 술잔을 채워서 올려야 했다. 승자의 오만이 저지른 두 사건은 백제부흥군 봉기의 주요 원인 중 하나가 되었다.&nbsp&nbsp


천하대란의 馬上에서 즉위한 문무왕



661년 6월, 金馬郡(금마군 지금의 익산)에서 백제부흥군을 진압하던 태종무열왕 김춘추가 돌연 사망했다. &lt&lt삼국사기&gt&gt 태종무열왕 8년(661) 조에 따르면 “6월에 大官寺(대관사)의 우물물이 피가 되고,, 金馬郡(금마군)의 땅에서 피가 흘러 너비가 5보나 되었다. 왕이 돌아가시니…” 라고 되어 있다.


“우물물이 피가 되고 땅에서 피가 흘러…”라는 것이 정확히 무엇을 뜻하는 것인지에 대해서는 연구자들에 따라 견해가 분분하다. 혹자는 “태종무열왕이 백제무흥군과 싸우다 전사한 사실을 표현한 것”이라 하지만, 필자는 위인의 죽음을 예고하는 하나의 레토릭(修辭&#8231 수사)가 아닌가 생각한다.


아무튼 태종무열왕이 재위 8년 만에 죽고, 태자 김법민이 신라 30대 국왕으로 승계했지만, 문무대왕 김법민이 당면한 대내외 상황은 급박하게 돌아가고 있었다. 문무왕 원년(661) 6월, 당고종의 곁에서 宿衛(숙위)를 하던 문무대왕의 동생 金仁問(김인문)이 귀국해 대왕에게 다음과 같이 아뢰었다. ,


“당 황제가 이미 소정방을 보내어 35道의 수&#8228 육군을 거느리고 고구려를 치게 하고, 드디어 (문무)왕에게 명하여 군사를 거느리고 응원하라고 하니 비록 喪中(상중)이라 할지라도 황제의 勅命(칙명)을 어기기는 어렵습니다.”&nbsp


문무대왕은 그해(661) 가을 7월, 김유신을 대장군, 仁問 眞珠(진주) 欽突(흠돌)을 大幢將軍(대당장군)으로 삼고, 품일 충상 의복을 상주총관, 진흠 중신 자간을 하주총관으로 삼는(…… ) 등 북벌군을 일으켰다. 신라는 기로에 처하게 되었다. 내친 김에 신라까지 먹으려는 唐의 속셈이 이미 드러났고, 백제부흥군의 저항이 치열했으며, 고구려와 왜국의 움직임도 심상치 않았다.


662년 9월, 왜국에 체류하던 의자왕의 아들 扶餘豊(부여풍)이 백제부흥군의 지도자 福信(복신)의 요청에 의해 귀국하여 백제왕으로 추대되었다. 이때 왜왕 덴지(天智)는 장군 사이노 무라지(狹井連)와 에치노 다쿠쓰(朴市田內津)에게 병력 5000 명과 선박 170여 척을 주어 부여풍을 호위하도록 했다. 화살 10만 개 등 전쟁물자도 지원했다.


부여풍은 周留城(주류성: 충남 홍성군 대흥면 鶴城&#8231 학성)을 백제부흥군의 지휘본부로 삼고, 福信(복심)· 道琛(도침)과 왜장들을 이끌고 항전태세를 갖추었다. 백제부흥군은 한때 200 성을 탈환할 만큼 맹위를 떨쳤다. 웅진도독부가 공주-부여 일원만 겨우 장악하고 나머지 백제 고토가 모두 백제부흥군의 수중에 떨어졌던 것이다.


663년 왜군은2만7천은 3회에 걸쳐 규슈를 거쳐 한반도에 상륙했다. 이때 문무대왕은 김유신 등 28명의 장수를 거느리고 豆陵尹城(두릉윤성 청양군 定山面)과 백제부흥군의 지휘본부인 주류성을 攻破(공파)했다. 나당 연합군은 수륙으로 병진해 白村江(백촌강)에서 백제부흥군-왜 연합군&#51019 제압했다. 백촌강 전투에 대해 중국사서는 다음과 같이 기술하고 있다.


“우리 군은 왜와 4회 싸워 모두 이겼다. 전투에서 왜의 전선 400척을 불태웠다. 연기는 하늘을 덮고, 바닷물은 붉은 피로 물들었다.”


663년 9월의 白村江 전투로 백제부흥군이 패망하자, 당고종은 백제의 옛 영토를 지배하는 식민기관 웅진도독부를 설치하고, 문무왕에게 당의 괴뢰인 웅진도독 부여융과의 會盟(회맹)을 강요했다. 문무왕은 아직 對고구려전이 끝나지 않은 상황이었던 만큼 당 측의 무리한 요구에 응할 수밖에 없었다. 665년 8월, 문무왕은 웅진도독 부여융과 함께 금강&nbsp부근 就利山(취리산)에 제단을 쌓고, 당의 장수 劉仁軌(유인궤)가 작성한 서명문에 따라 양측의 화해를 서약했다.



연개소문 세 아들 간의 권력 다툼으로 멸망한 고구려&nbsp


666년 5월, 고구려의 대막리지 연개소문이 병사하고, 그의 맏아들 淵男生(연남생)이 막리지가 되어 아버지의 독재 권력을 승계했다. 그러나 남생은 두 아우인 男建(남건)&#8231 男産(남산)과 권력다툼 끝에 패해 당나라로 도망쳤다. 이 해 겨울, 당고종은 李勣(이적)과 薛仁貴(설인귀) 등을 보내 고구려 치게 했다. 고구려는 회복불능의 내분에 빠졌다. 문무왕 6년(666) 12월, 연개소문의 동생 淵淨土(연정토)가 심복부하 24 명, 12개 읍성의 소속민 등 3543 명을 거느리고 신라에 투항했다.


667년 겨울, 이적의 부대가 먼저 新城(신성)을 함락시키자, 압록강 북쪽의 고구려의 성 16곳도 잇달아 함락되었다. 이때 당에 망명했던 연남생이 그의 부하들을 이끌고 당군에 붙어, 오히려 조국을 쳐부수는 데 앞장섰다. 668년 봄, 唐將 이적의 부대가 扶餘城(부여성)을 함락시킨 뒤, 그 근처 40여 성으로부터 항복받고, 남건이 보낸 군사 5만 중 3만을 죽이고 대행성을 함락시켰다. 압록강 이북 지역의 戰力이 사실상 소멸되었다.


당장 이적은 다른 방면으로 고구려에 침입한 당군까지 이끌고 압록강을 건너 鴨綠柵(압록책: 의주에 설치했던 방어용 울타리)에서 고구려군을 쳐부수고, 잇따라 辱夷城(욕이성 청천강 북안)도 함락시켰다. 668년 6월27일, 문무대왕은 몸소 대군을 거느리고 평양으로 북상했다. 이때 고령의 김유신은 풍병을 앓아 출전하지 않고, 수도 서라벌을 지켰다. 당군의 南下와 신라군의 北上에 의해 그해 9월21일 나-당 양군은 고구려의 수도 평양을 포위했다.


나-당연합군이 평양을 포위한 지 한 달 남짓해서 보장왕은 男産(남산: 연개소문의 제3자)에게 수령 98 명과 함께 성 바깥으로 나가서, 이적에게 항복하게 했다. 그러나, 막리지 남건만은 항복하지 않고, 항쟁을 계속했지만, 번번이 패배했다.


이때, 남건으로부터 군사에 관한 일을 위임받은 信誠(신성)이라는 승려가 몰래 적군과 내통하여 성문을 열어주고, 급히 적군을 맞아들이자, 남건은 칼로 자결하려다 실패하고 당군에게 사로잡혔다. 668년 겨울, 당의 장수 이적은 항복한 보장왕을 비롯해서 남건&#8231 남산, 그리고 신료와 백성 등 20만 명을 데리고 당나라로 개선했다. 이로써 고구려는 28왕 700여년 만에 멸망했다. 당고종은 보장왕을 비롯해 고구려 유민들을 모두 사면했지만, 남건만은 워낙 미움을 샀기 때문에 黔州(검주: 사천성)라는 곳으로 유배당했다.


그리고 평양에는 안동도호부가 설치되어 안동도호 설인귀가 고구려 고토를 다스리게 하고, 그 밑에 새로이 편성된 9도독부, 42州, 100 縣(현)에서는 옛 고구려의 장수로서 당군에 협조한 적이 있는 자들이 중국인과 함께 백성을 다스리게 되었다.


668년 11월5일, 문무대왕은 사로잡힌 고구려 사람 7000 명을 데리고 서라벌로 돌아왔다. 다음해(669년) 2월, 문무대왕은 群臣(군신)을 모아놓고 다음과 같은 교서를 내렸다.&nbsp&nbsp


&lt지난날 신라는 두 나라에 가로막혀 북쪽(고구려)에서 치고, 서쪽(백제)에서 침범하여 잠시도 편한 세월이 없었다. 전사들의 白骨(백골)은 原野(원야)에서 쌓여 있고, 몸과 머리는 멀리 떨어져 있었다. (중략) 이제, 두 적국이 평정되고 사방이 편안하니 싸움에 공을 세운 자에게는 상을 주었고, 전사한 영혼들에게는 冥資(명자: 벼슬)을 추증하였다. &gt


이상까지는 당연한 論功行賞(논공행상)의 시행이라 할 수 있다. 이어지는 교서의 내용이 문무왕의 범상치 않은 통치력을 증명하고 있다. 사회적 약자를 위한 문무대왕의 지시는 명확했다.&nbsp


&lt다만, 저 감옥 속에는 이러한 은혜를 입지 못하고, 칼을 쓴 고통은 새 세상의 혜택을 받지 못했다. 이 일을 생각할 때 침식이 편치 않으니 국내의 죄수들을 특사하여 총장 2년(669) 2월21일 새벽 이전에 五逆(오역: 임금&#8231 부모&#8231 조부모를 죽인 죄)을 범한 자 이하로 현재 감옥에 갇혀 있는 자는 죄의 대소를 막론하고 모두 풀어주고, 이전의 대사령 이후에 죄를 범하여 관직을 삭탈당한 자도 모두 복직케 하라. 도적질한 자는 석방하되 배상할 재물이 없는 자는 한도액까지 배상하게 하지 말 것이며, 가난하여 남의 곡식을 빌려 먹은 자로서 작황이 좋지 않은 곳에 사는 자는 본곡과 이자를 갚지 않아도 되게 할 것이며, 만약 작황이 좋은 곳에 사는 자는 금년 추수기에 원금만 반환하게 하고 이자는 받지 말 것이다. 이러한 사항을 이 달 30일 안으로 해당 관청이 집행하라 하였다.&gt&nbsp&nbsp


21세기의 북한 정권은 집단농장에서 쌀을 훔친 농민들을 공개 처형했다. 탈북자들의 증언에 따르면 공개처형장에는 어린이들까지 강제동원해 사형 장면을 보여 준다고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