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료실

문무왕, 對唐결전을 준비하다!

鄭淳台(작가)   |   2016-09-06 | hit 11678

648년 협약’ 짓밟은 배신행위의 사례


668년 9월, 고구려 보장왕(寶藏王)이 연남산(淵男産)을 당군 진영에 보내 항복했다. 곧 평양에 안동도호부를 설치하고, 설인귀(薛仁貴)가 안동도호(安東都護)로 임명되었다. 당은 백제 멸망 후인 660년에 웅진도독부를 설치했고, 663년에는 신라 문무왕을 계림대도독으로 임명했었다.

도독부는 도호부의 통제를 받는 下位기관이다. 안동도호 설인귀가 계림대도독인 신라 문무왕과 웅진도독인 扶餘隆(부여융)을 부하로 두고 통제하겠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신라 재상 김춘추(金春秋: 태종무열왕)와 당태종 이세민(李世民) 사이에 성립된 648년 비밀협약을 당 측이 일방적으로 짓밟은 배신행위였다. 648년 비밀협약의 내용은 고구려․ 백제의 멸망 후에 백제 故土 전역과 평양 以南의 고구려 땅을 신라가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그런데도 당은 진작부터 신라를 포위하려는 외교 공작을 전개했다. 665년 7월, 당 조정은 공식사신과 백제 유민으로 구성된 250여 명의 대규모 사절단을 왜국에 특파해 사실상 국교를 재개했다. 당나라는 왜국과 국교를 재개하면서 신라에 사전양해를 구한 바 없었다. 신라는 657년 이래 왜와 단교(斷交)했던 상태였다.

전후(戰後) 처리문제를 둘러싼 당의 배신을 신라는 이미 꿰뚫어보고 있었다. 당은 664년 10월 부여융(扶餘隆)을 웅진도독으로 임명한 데 이어 665년 8월 錦江(금강) 북안 취리산(就利山)에 제단(祭壇)을 설치하고, 당의 장수 유인궤(劉仁軌)가 작성한 서약문에 따라 문무왕과 부여융 간의 회맹을 하도록 강요했다. 이는 戰勝國의 국왕과, 敗戰國의 왕자로서 이미 당의 괴뢰가 된 부여융을 동격(同格)에 놓고 화해를 서약하게 했던 것으로 문무왕에게는 매우 굴욕적이었다.

그럼에도 신라는 對 고구려 전쟁이 진행 중이었던 만큼 아직은 신중한 모습이었다. 그러나 고구려 멸망이 임박한 상황에서 당의 다음 공격목표가 신라라고 판단했던 문무대왕으로서는 대당(對唐) 개전에 대비한 주변외교를 전개하지 않을 수 없었다. 문무대왕이 고구려에 출정해 있던 668년 9월, 서라벌을 지키고 있던 대각간 김유신(金庾信)은 국왕을 대리해 왜국에 사신을 파견했다.

당시, 왜국의 입장은 어떠했을까? 왜국은 당과 신라의 일본 열도 보복 공격을 잔뜩 겁내고 있었다. 왜국은 백제부흥군을 지원하기 위해 한반도에 3만2000명의 왜병을 파병해 나‧ 당연합군에 맞섰기 때문이다. 한반도에 투입된 왜군은 663년 9월 백촌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궤멸당했는데, 신라‧ 당과는 아직 단교(斷交) 상태였다.

백촌강 패전에 쇼크를 받은 왜국의 최고 실력자(왕자로서 국왕대리인 나카노오에(中大兄: 후일의 왜왕 天智)는 한반도에서 일본열도로 건너가는 데 디딤돌이 되는 쓰시마(對馬島․ 대마도)와 이키(壹岐)섬, 왜국 조정의 규슈지방 대행(代行)기관인 다이자이후(大宰府: 대재부), 그리고, 수도권인 오사카만(灣)에 이르는 세토內海(내해) 주변 요지에 백제식(百濟式) 산성을 축조하고 방인(防人: 경계병)을 배치해 두고 있던 상황이었다.

왜국의 여왕 사이메이(齊明)가 병사(病死)했던 661년 7월부터 칭제(稱帝)라는 직위로 국왕을 대리했던 中大兄은 667년 琵琶湖(비파호) 서안의 近江大津(근강대진: 오미노오쓰)로 천도하고, 다음해인 668년에 즉위했다. 그가 텐치(天智) 왜왕(대왕‧ 오키미)이다. 일본의 史書 등에서는 천도의 이유에 대해 개혁에 반대하는 수구세력이 많은 아스카(飛鳥)를 버렸던 것이라 설명했다.

그러나 필자의 현지답사로는 나당연합군의 추격을 회피하기 위한 천도로 보였다. 새 도읍인 오쓰(大津)는 일본 제1의 호수인 비파호(琵琶湖) 연안에 위치해 설령 나당연합군이 거기까지 쳐들어오더라도 비파호를 이용해 사방으로 흩어져 도주하기에 매우 용이한 지형이다.

고구려 패망의 날이 다가오자, 왜국은 나당연합군의 일본열도 공격을 겁내고 있었다. 한편 신라는 당-왜국 동맹을 맺어 신라를 앞뒤에서 공격할지 모른다고 우려했다. 신라와 왜국은 서로가 상대를 겁내고 있었던 셈이다.

이런 가운데 신라의 개전(開戰)에 대비한 외교에 의해 왜국은 신라에 대한 의구심을 해소하고, 문무왕과 김유신에게 각각 선박 1척씩을 증정했다. 물론 빈 배를 주었을 리는 없다. 귀한 물자 등이 적재되어 있었다고 해도 좋다. 그 해(668년) 11월, 왜국은 신라에 답례 사절을 파견했다. 657년 이래 단절되었던 신라-왜국 간의 국교가 10여년 만에 회복되었던 것이다.



669년 4월에 이미 토번의 평화사절이 장안(長安)에 도착하여 당고종과 측천무후를 만나 모종의 협상을 진행시켰다. 토번은 청해 일대에 위치한 당의 우호국인 토욕혼(土谷渾)을 병합한 데 대한 당의 반격을 무마하기 위한 위장 평화공세였다.

이 해 5월, 당은 2만8000여 호의 고구려 유민을 자국 영토 내로 강제 이주시켰다. 669년 9월, 토번이 실크로드를 공격하자, 안동도호 설인귀(薛仁貴)가 병력을 이끌고 청해로 이동하고 있었다. 문무대왕의 신라는 물론 이런 정보를 손금을 보듯 파악하고 있었다. 신라는 백제 고토(故土)에 대한 공세를 전개하는 한편으로 김흠순(金欽純)과 김양도(金良圖)를 당 조정에 파견해 백제 고토를 잠식해 온 신라의 입장을 설명하려 했다. 그러나 당고종은 발끈하여 신라 사신 2인을 감금했다. 이듬해(671년) 1월에 김흠순은 석방되었으나, 김양도는 옥사했다. 김흠순은 당에서도 명성이 높은 김유신(金庾信)의 친동생으로서 신라의 대표화랑인 19세(世) 풍월주(風月主) 출신이며, 김양도는 중국말에 능통한 외교통으로 22世 풍월주를 지냈다.

국가 위기상황에서 신라의 승속(僧俗)은 따로 놀지 않았다.⟪삼국유사⟫에는 도당(渡唐) 유학승 의상(義相)의 귀국과 관련해 다음과 같은 사실을 전하고 있다.



< 본국의 승상 김흠순과 김양도 등이 당에 가서 옥에 갇혔고, 당고종은 장차 크게 군사를 일으켜 동정(東征)을 하려 하였다. 이에 흠순 등이 몰래 의상에게 사람을 보내 신라에 앞서 가도록 권유함으로써 咸亨(함형) 원년에 환국하여 조정에 그 사정을 알렸다. >



咸亨(함형)은 당고종 在位 시기(649년 5월∼683년 12월)에 사용된 무려 14개의 연호 중 일곱 번째로서 670∼673년에 걸쳐 사용된 연호이다. 함형 원년이라면 신라 문무왕 10년인 670년에 해당된다.

의상(義相)이라면 중국 화엄종(華嚴宗)의 3조(祖)에 오른 최고의 종교인‧ 교육자‧ 시인이었으며, 신라 호국불교(護國佛敎)의 상징적 존재였다. 그의 해동화엄(海東華嚴)사상은 오늘날에도 최첨단 정보사회를 열어가는 선진 패러다임으로 재인식되고 있다. 또한 그는 국제적 러브 스토리인 ‘善妙(선묘)설화’를 통해 진리 탐구자의 참된 모델로서, 한‧ 중‧ 일 3국에 회자될 뿐만 아니라, 난세의 중생 구제를 위한 한국 철학의 위대한 선구자로 숭앙되고 있다. 의상 철학에 관한 전공 학자들과 필자의 좌담은 뒤에 실을 것이다. 그는 조국의 위기를 구하기 위해 “사랑도 지위도 남김없이 버리고” 귀국해 문무대왕과 만나 당군의 침공계획을 직보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