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非常한 시대의 비상한 삶!

鄭淳台(작가)   |   2015-10-22 | hit 5275


‘광복 70주년 기념 현대사 체험수기’ 중 豫審(예심)을 통과한 22편을 一讀(일독)한 評者(평자)의 가슴에 도도한 물결처럼 다가온 것은 “그들 모두가 참으로 非常(비상)한 시대에 참으로 非常한 삶을 살아 왔구나!!” 라는 짙은 감동이었다.
&nbsp오늘을 사는 칠순·팔순·구순 연배의 한국인은 1945년의 8·15 광복의 감격, 1950∼1953년의 6·25 남침전쟁으로 인한 고통, 박정희 시대와 겹치는 1961∼1979 개발연대의 영광을 온몸으로 체험한 한국 현대사의 主役(주역)들이었다. 그들은 배고픔 속에서도 배움을 포기하지 않았고, 싸우면서 일해 ‘한강의 기적’을 이룩했다. 5000년 민족사에서 그들처럼 역동적인 삶을 영위한 세대는 일찍이 없었다. 그들의 인생 궤적은 현대 한국의 實錄(실록), 바로 그것이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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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풍토에 알맞은 벼 종자 개발로 배고픔 해결


우수작 &lt우리는 이렇게 배고픔의 설움을 탈피했다&gt는 우리나라 기후와 토질에 알맞은 다수확 벼 품종 개발에 분투했던 실무자들 중 한 분의 회고록이다. 그는 농촌진흥청의 水稻育種(수도육종)연구관을 지냈던 金種昊(김종호) 박사이다.
&nbsp1950년대 후반(1955∼1959년) 우리나라의 농가 10a 당 평균 쌀 수확량은 265kg,&nbsp 1960대 후반(1965∼1969년)의 평균 쌀 수확량도 304kg에 불과했다. 10년간의 노력에도 불구하고 약 15% 증산에 그쳤던 것이다.
&nbsp요즘 대한민국에서는 많은 남녀노소가 저마다 다이어트를 한다고 야단들이지만, 불과 40년 전까지만 해도 배고픈 한국인들은 배불뚝이를 선망의 대상인 ‘사장님의 필요조건’으로 생각했다. 1960년대, 최전방에서 복무하던 우리 장병들은 “공화국 북반부에서는 이밥과 고깃국에 기와집에서 산다”고 선전하는 북한군의 확성기 방송을 시나브로 들어야만 했다. 당시, 국군 병사에 대한 급식은 매우 열악했다.&nbsp&nbsp
&nbsp우리 정부는 1970년에 생산력이 우수한 수원 213-1호를 최종 선발하고, 1971년에 ‘통일벼’로 명명함과 동시에 장려품종으로 결정했다. 1971년 수행된 550개소의 대단위 집단재배단지의 10a당 쌀 수확량은 501kg였다. 비교 품종의 398kg에 비하면 무려 103kg이나 급증한 것이었다.
&nbsp그러나 통일벼는 재배과정 중 冷害(냉해)에 취약점을 보였던 데다 수확 후의 밥맛도 떨어졌다. 변화에 대한 농가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래도 정부는 다수확 품종의 보급에 적극적·강제적이었다. 당시의 일간 신문에는 통일벼의 보급을 위한 강력한 정부시책 때문에 일선 공무원들이 일반 벼를 심은 농가의 논에 불을 질렀다는 기사가 실리기도 했다.&nbsp
&nbsp그러나 통일벼의 밥맛을 개선한 ‘유신’의 육성 보급을 계기로 다수확 통일형 품종에 대한 농민들의 인식이 차츰 개선되었다. 1977년, 드디어 우리 민족의 오랜 숙원인 쌀 자급이 성취됐다. 이때 보급된 통일형 품종의 보급면적은 약 66만ha로 전국 논 면적의 54.6%에 달했다. 통일형 품종의 10a당 농가 평균 쌀 수확량은 553kg으로 나타났다. 완벽한 쌀의 자급기반을 구축한 쾌거였다.
&nbsp약 3000여 년의 긴 우리나라 벼 栽培史(재배사)를 통해 처음으로 印度(인도)의 다수확 통일형 품종이 성공적으로 재배되었던 것이다. 쌀 자급은 우리 산업 발전에 원동력이 되었다. 저온에 약한 통일형 벼 품종의 재배를 통해 개발된 저온 회피 재배기술은 밭작물 및 채소 원예작물 재배와 과수 재배에도 획기적인 발전을 가져왔다. 다음은 &lt우리는 이렇게 배고픔의 서러움을 탈피했다&gt의 주요부분을 발췌한 것이다.


&lt오른손 손가락 마디에 군살이 붙기 시작한 것은 1960년대 말, 印度型(인도형) 품종을 우리 풍토에 맞는 통일형 품종으로 개선·육성하면서 부터였다. 그 시절, 까락에 찔린 아픔을 견뎌가던 중 어느덧 손가락에 궂은살이 박혔던 것이다.&nbsp
&nbsp1975년부터는 통일벼의 대체 품종으로 밥맛과 품질이 월등히 개선된 통일형 품종이 농가에 급속히 보급되었다. 쌀 자급을 위해서였다. 이들 품종을 육성한 작물시험장 등 3개 시험장의 육종포장에는 1년 365일 내내 무휴의 날이 전통처럼 계속 이어졌다. 연중 단 1회의 휴가도 없었다.
&nbsp통일벼에는 하룻밤만 자고 나면 문제가 나타나고, 내일은 또 다른 문제로 벼 육종 및 재배기술 인력을 끊임없이 괴롭혔다. 관련 병충해 방제 인력도 빈발하는 문제의 대책을 찾기 위해 바쁜 나날을 보냈다.
&nbsp한편 농가에 대한 통일형 품종의 보급을 위해 일선 시· 군 지도요원들은 신바람 나게 농촌의 마을길과 논둑을 누비기도 했지만, 통일형 품종의 재배상 난점으로 농가의 원망을 밥 먹듯이 들어야 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저온에 취약했기 때문이었다.
&nbsp이들 품종의 저온반응은 다양하게 나타났다….&gt


그는 우리나라 작물시험장의 논이 아닌 필리핀의 논에서 벼 종자를 대량으로 생산, 우리나라로 직송해 농가에 바로 보급하는 직무를 수행했다. 우리나라는 ‘벼농사 1년 1작’ 체제로 아무리 빨리 서둘러도 그 해에 만들어진 품종은 다음 해에 종자를 생산하고, 그 다음 해인 2년차에 농가에 대한 종자 보급이 가능했다.&nbsp&nbsp&nbsp&nbsp


&lt나는 호남작물시험장에서 1974년 통일벼의 대체품종으로 ‘유신’을 선발·육성하고 이후 작물시험장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부터 1981년까지 거의 매년 봄철부터 가을철까지는 작물시험장 벼 육종포장에서 품종 선발을, 우리나라의 겨울철에는 필리핀에서 다수확성 양질 품종의 종자 생산 업무를 수행하면서 베틀의 북처럼 온대권과 열대권을 오갔다.
&nbsp내가 필리핀 마닐라 남방 약 60km지점의 국제미작연구소(IRRI)에 도착한 것은 1971년 11월8일이었다. (중략) 연구소 인근에 있는 농가의 논 20ha를 임대해 서광벼 등 5개 통일형 품종의 종자 생산을 위해 파종작업 준비를 서둘렀다.&gt


북위 10도의 마닐라 교외에서 종자를 생산해 우리나라로 직송하는 일은 그리 단순하지 않았다. 종자의 純度(순도) 유지와 混種(혼종) 방지를 위해 전 생산과정을 통해 철저한 조치가 필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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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1980년 3월 말, 수확 작업을 종료했던 오후 4시경의 남쪽 하늘에 갑자기 龍頭雲(용두운)이 치솟아 오르면서 비가 올 듯한 검은 구름으로 덮여 갔다. 논 6ha에서 자란 통일형 품종인 서광벼를 탈곡한 후 그 종자 37톤을, 비료포대 40개로 연결한 7×8m 크기의 벼 건조용 멍석 30개 위에 널어놓고 햇볕에 건조하던 중이었다. 그 외 4ha의 논에는 탈곡을 위하여 전날에 베어 눕혀놓은 서광벼가 깔려 있었다.
&nbsp먹구름의 날씨는 걱정스러웠지만, 이곳에서 태어나 벼농사를 해온 인부들 모두가 乾季(건계)의 잠시 지나가는 소나기일 것이라고 장담했다. 그렇지만, 혹시나 하는 불안감을 떨쳐버릴 수 없었다.&gt



필리핀의 종자생산현장에서 乾季(건계) 폭우와 死鬪(사투)&nbsp


필리핀은 오후 5시만 되면 어두워지는 곳이기에 만약에 대비한 조치를 하고 싶어도 방대한 작업량 때문에 손을 쓸 수 없었다. 숙소에 돌아온 그가 저녁밥을 먹는 중에 빗방울 소리가 세차게 들렸다. 乾季(건계)임에도 불구하고 거센 폭우로 변한 비가 밤새 그치지 않았다. 뜬눈으로 새벽이 되기를 기다렸다.
&nbsp서둘러 지프니(필리핀 특유의 합승택시) 한 대를 불러 현장으로 달려갔다. “건조 중의 탈곡된 종자가 아주 못쓰게 되는 것 아닐까, 베어 눕혀놓은 볏단은 어떻게 되었을까, 멍석 위의 종자는 엉망진창으로 되어 있을 터인데 멍석 위로는 물이 얼마나 차올라 있을까, 현장을 한시라도 빨리 보고 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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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지프니에서 내린 나는 “아이고, 이게…”라고 부르짖었다. 눈앞에 전개된 것은 회백색 물바다였다. 저 멀리 산 밑으로 야자수들만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10여 일 후면 우리나라에서 파종해야 할 벼 종자 약 60톤이 물속에 잠겨버린 것이다.
&nbsp이 참담한 광경에 나는 기가 막혀 그냥 주저앉았다. 그러나 그러고 있을 수만은 없었다. 다시 일어나 살펴보았다. 20ha의 논 안을 갈라놓은 구불구불한 논둑과 150여 개의 논다랑은 분간할 수 없었다.
&nbsp그러나 그 순간, 나를 미칠 지경으로 만든 폭우에 대한 반감과 오기가 생겼다. 마침, 農監(농감)인 Pasio도 걱정스러운 듯 일찍 현장에 달려와 내 곁에 섰다. Pasio에게 인부 100명의 긴급동원을 지시했다. 통상인건비에다 특별수당을 추가 지급한다는 조건이었다.&gt


평상시보다 1시간 일찍 출근한 인부들과 비를 맞으며 종자 회수작업에 돌입했다. 열대 고온 下의 물에 잠긴 종자의 發芽(발아)나 부패가 당면의 걱정거리였다.


&lt사태의 심각성 때문인지 누구 하나 입을 여는 사람이 없었다. 종자가 담긴 마대는 국제미작연구소의 화력 건조장으로 쉴 새 없이 운반되었다. 박천서 박사와 이영희 연구사는 연구소의 화력건조기 6기 모두를 풀가동했다. 연구소 트럭 등을 이용한 운반 작업은 철야로 이어졌다.
&nbsp문득, 金浦(김포)공항 화물 터미널에 8道의 농촌진흥원 요원들이 종자 인수를 위해 20여 대의 트럭을 대기시키고 있을 모습이 머릿속에 떠올랐다. 한국사람 특유의 철야작업을 강행했다. 필리핀 노무자들은 “난생 처음 철야작업을 한다”고 투덜거렸다.
&nbsp걱정거리가 생겼다. 날이 밝으면 지치고 배고픈 필리핀 노무자들이 뿔뿔이 흩어져 귀가할 것만 같았다. 그 순간, “산타쿠르즈에 가서 통닭튀김과 햄버거를 양껏 사 주겠다”고 소리쳐 약속했다. 30분의 휴식시간이 다가왔다.
&nbsp하늘이 두 쪽 나도 약속은 지켜야 한다. 철야작업조 30여 명을 트럭에 태우고 10여 km를 달려 산타쿠르즈의 철야 영업점에서 “더 이상 못 먹겠다”고 손사래를 칠 때까지 흡족하게 먹였다. 이들은 아침에 교대조가 나올 때까지 볏단을 옮기는 작업을 계속했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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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와 필리핀 노무자 150명은 연속 사흘간의 철야작업으로 땅속에 묻힐 뻔한 종자를 모두 무사히 건져서 살려냈다. “죽기 아니면 까무러치기”로 일하는 한국인의 열정이 열대에 사는 필리핀 노무자들에게 전염된 느낌이었다. 그 덕에 예정된 계획에 따라 화물 전세기 3편으로 우리나라에 104톤의 종자를 수송해 우리 농가의 4월 파종작업에 차질이 없게 했다.



영화 ‘국제시장’의 덕수처럼&#8212조국근대화에 젊음을 불태웠다는 자부심


우수작 &lt월남 전장과 독일 탄광을 누비다&gt는 영화 ‘국제시장’의 주인공 덕수처럼 월남의 정글과 서독의 탄광에서 싸우고 일한 이야기이다. 글쓴이는 1944년 경기도 김포의 가난한 농가 출신으로, 중학교 졸업 후에 서울 영등포 소재 국립농산물 검사소의 급사로 생활전선에 뛰어들었다. 취업 1년 만에 시험보조원으로 승급했지만, 1965년 징집되어 논산훈련소에 입대 훈련을 받았다. 그는 派越(파월)을 자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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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1966년 1월5일 밤, 베트콩과 첫 전투가 벌어졌다. (중략) 베트콩은 중대 전술진지 철조망을 침투하려고 했다. 기관총탄과 소총탄이 중대 진지 안으로 쏟아져 들어왔다. 비상나팔 소리와 함께 전 중대원이 즉각 진지에 투입되었다. 치열한 총격전이 벌어졌다. (중략) 이런 고비 고비를 넘기면서 어느덧 나도 용사가 되었다. &gt&nbsp


파월 사상 최대 규모인 ‘맹호 제5호 작전’에 재구대대가 주력으로 참가하려던 무렵인 1966년 3월23일, 주월한국군 총사령관 채명신 장군이 적 점령지역 한가운데로 헬기를 타고 와서 다음과 같이 격려했다.


“장병 여러분은 모두 애국자다. 지금, 여러 장병이 흘리는 땀과 피를 누가 알아주지 않는다 해도 누굴 원망하거나 섭섭해 하지 마라. (중략) 훗날, 우리의 후손들이 우리의 노고에 대한 보상을 받게 될 것이다. 또 장병 여러분이 받는 전투수당을 헛되이 쓰지 말고 본국으로 송금해라. 그 돈이 우리나라 빚을 갚고 나라 살림을 하는 데 보탬이 될 것이다. 1달러라도 아껴서 본국으로 보내라. 끝으로 국가와 국군의 명예를 지키는 용맹스런 맹호용사가 되자!”


&lt그 말씀을 듣는 순간 나는 가슴에 무언가 확 들어오는 느낌을 받았다. (중략) 나는 이런 사령관 휘하에서 싸우는 것이 자랑스러웠다. 내 목숨 값과 같은 하루 전투수당을 꼬박꼬박 모아 아버지께 보내드린 것이 우리 집에만 도움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나라 살림에도 도움이 된다니 자부심도 생기고 기뻤다.&gt


2년간의 파월 복무 후 귀국해 1967년 9월에 만기제대를 한 후 철도청 소속 무장 청원경찰으로 취업해 강원도 춘천 외곽인 江村(강촌) 구간의 철교를 경비하는 직책을 수행했다. 전투경험이 풍부했던 그는 대원 5명을 거느린 초소장이 되었다. 월급 6000원의 박봉이었다.
&nbsp그러던 어느 날, 파독 광부를 모집한다는 해외개발공사의 신문 광고를 보았다. 1970년 7월, 그는 36대 1의 경쟁을 뚫고 독일 행 비행기에 올랐다. 그는 스테어크라데 광산의 막장에서 3년간 목숨을 걸어놓고 석탄을 캤다. 그는 우리 시대의 진짜 일꾼이었다.


&lt어쩌다 가난한 나라, 가난한 집의 자식으로 태어나서 지옥 같은 막장에 오게 되다니, 이것이 내 운명인가보다 싶었다. (중략) 그래도 이를 악물고 하루하루 버티고 버텨냈다. 차츰 일하는 요령도 늘어가고 숙달되니 처음보다 조금씩 일하기가 수월해졌다. 첫 월급 700마르크를 고향 부모님의 농사자금으로 쓰시라고 송금했다. 독일은행에서 2000마르크를 융자해 출국 전 파독 경비로 빌린 돈도 갚았다. 눈시울이 뜨거워지며 절로 눈물이 흘러내렸다.&g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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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체 파독 광부 중 3년 동안 無결근·無병가 근무자는 그가 최초였다고 한다. 3년 계약이 끝나고 그는 자신의 앞날을 생각하기 시작했다. 그동안, 고국에 꽤 많은 송금을 했고, 부모님은 그 돈으로 밭을 사시고 동생들의 학비와 결혼비용으로 쓰셨다. 하지만 그의 수중에 남은 돈은 그가 자립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래서 이제부터는 그 자신을 위해 돈을 벌어야겠다고 결심했다.


&lt광업소 측은 나의 지난 3년간 근무성적표를 높이 평가해 대번에 3년 연장 근무를 승인했다. 이런 6년 연속근무도 첫 사례라고 한다. 파독 4년차 이후의 업무는 후배 광부에 대한 교육과 통역 등으로 점차 사무실 근무가 늘어났다. 그러던 1975년 10월 동료의 소개로 만난 파독 간호조무사와 결혼을 하고 예쁜 딸까지 얻었다.&gt


파독 6년차가 되자 살림 밑천이 어느 정도 모여 1977년 2월에 귀국했다. 점포가 달린 2층집을 샀고, 생맥주 치킨점을 경영해 목돈을 쥐기도 했다. 그러나 뜻하지 않게 아내가 췌장암을 앓아 6개월 시한부 인생을 살았다. 슬프고 원통했다. 그래도 온갖 일을 다 해 아이들을 대학에 보내 졸업시켰고, 재혼도 했다. 전처의 제삿날이 되면 가난한 가정의 아들과 딸로 태어나 용감하게 삶을 개척했던 우리들의 지난날을 회상하고 깊은 감회에 젖곤 한다.



“완장을 찬 4촌들이 내 친형의 두 둔을 꼬챙이로 찌른 뒤 생매장했다”


가작 &lt좌익들의 만행&#8212피 묻은 가족사&gt는 어설픈 이데올로기에 물든 자들이&nbsp敵 치하에서 완장을 차고 설치며 친척까지 처절하게 학살한 일을 증언한 수기이다. 글쓴이인 金炯佐(김형좌) 목사는 전북 김제군 봉남면 대송리에서 4남2녀 중 3남으로 1934년에 태어나, 기독교 교육을 받고 자라났다.
1945년 해방이 되니까 세상은 좌우로 兩分되었다. 그가 살던 마을 주민들도 공산주의와 민주주의, 그리고 찬탁과 반탁으로 갈라졌다.
&nbsp그 시절, 공산주의가 뭔지, 그 자신도 잘 모르는 어설픈 좌익들이 밤마다 모여 무슨 정치공작을 했다. 학교에 가면 교사들 대부분도 얼치기 主義者여서 “들어라, 붉은 깃발!” 따위의 혁명가를 가르쳤다. 그러던 1950년 6월25일, 소련의 독재자 스탈린의 사주를 받은 북한 괴뢰집단의 수괴 김일성이 남침전쟁을 도발했다.&nbsp&nbsp&nbsp


&lt독실한 기독교인으로서 우익단체인 대동청년단 간부였던 둘째 형님(김형배)은 6·25가 터진 후 남진하는 인민군을 피해 친구들과 부산으로 피난을 간다며 집을 떠났다. 좌익이 뭔지도 제대로 모르는 백부와 사촌들은 적 치하에서 붉은 완장을 찼다. 백부는 아버지에게 “동생, 동네 인민위원회에서 자네 식구를 모두 다 죽이라고 한다. 형배가 도망쳤으면 형좌라도 내놔라!”고 윽박질렀다.
&nbsp(중략) 그러던 중 둘째 형님(김형배)이 잡혀 김제로 끌려왔다. 형님은 친구들과 부산으로 피난가다 자동차 타이어가 펑크 나는 바람에 전주 고모집에 가서 숨어 지냈다. 그런데 교인 중 배신자 하나가 형님의 은신처를 알고 밀고를 했다. 형님은 두 눈을 꼬챙이에 찔리고 낭심이 터진 상태로 김제로 끌려왔다. 내 사촌들은 그런 나의 형님을 꽁꽁 묶어 산 채로 모래사장에 파묻어 죽였다.&gt


북한군이 쫓겨 간 후&nbsp敵 치하에서 완장을 찼던 백부의 가족은 몰락했다. 백부는 急死(급사)하고, 그 아들은 자살하고, 그 손자 하나는 산에서 일하다가 굴러온 돌에 치여 죽는 등의 벌을 받았다.
그래도 빨치산 잔당은 아직도 이 사회에서 ‘내로라’하며 설치고 있다. 누구를 믿고 그런지, 대한민국은 끊임없는 敵의 도발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좌익분자에 대해 너무 관대한 나라이다. 이런 나라는 세계역사상 前無後無(전무후무)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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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나의 이종사촌형 윤OO은 국군이 북진하자 산속으로 들어가 공비가 되었다. 이종사촌을 포함한 30여 명의 빨치산 부대가 경찰지서를 점령하고, 우리 경찰 토벌대와 전투를 벌였다. 내가 달려가 “OO형 자수하시오!”라고 했더니 “형좌야, 네가 우리에게 넘어오라!”고 되받습디다.
&nbsp몇 년 전, 무슨 山 빨치산 추모식에서 바로 그 이종형이 추도사를 했다는 소문이 자자해 인터넷으로 이리저리 검색했더니 과연 그런 몹쓸 짓을 했더군요. 그런 이종형을 집안 손자의 결혼식에서 우연히 만났습니다.
&nbsp“우리 형배 형님을 왜 그때 어떻게 그렇게 참혹하게 죽였소? 그런 짓을 하고도 대한민국 하늘 아래에서 그 따위 추도사를 하다니…그게 도대체 무슨 경우요?”고 따졌습니다. 이종형은 “시절이 그러해 나도 어쩔 수 없었다”고 발뺌을 하더군요. 좌익에 附和雷同(부화노동)했던 그도 담낭암을 앓다 얼마 전 세상을 떠났습니다.&gt



인민군 군의관이 싫어서 탈영, 미군 통역을 거쳐 영어 교사가 되다&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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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작 &lt인생의 갈림길에서 경주로 향하다&gt는 咸興醫大(함흥의대) 재학 중 인민군의 군의관이 되었으나 탈영했다가 국군의 북진 때 남하해 미군 통역관을 거쳐 영어교사가 된 분의 사연이다. 글쓴이 오윤근 선생(90세)의 고향은 함경북도 豆滿江(두만강) 남안의 국경마을 鍾城(종성)이다.&nbsp


&lt해방 직후 고향 마을에 소련군이 들오던 날, 방학 중의 나는 귀향해 방에서 낮잠을 자고 있었다. 그런 나를 여동생이 흔들어 깨웠다. “오빠, 빨리 일어나. ‘마우재’가 오고 있대. 빨리 큰길로 나가봐.”
&nbsp마우재는 소련군인을 가리키는 함경도 사투리로서, 그 어원은 “말이나 소같이 미욱하다”는 뜻의 馬牛者(마우자)에서 유래된 것이라는 說(설)이 있다.
&nbsp큰길로 나갔더니 소련병사 10여 명이 나타났다. 그들 중 하나가 내게 다가오더니 대뜸 시계를 찬 내 왼 팔목을 붙잡았다. 그 자가 몇 시인지 알려고 그런 줄 알고 시계를 그의 눈앞에 들이댔다. 그런데 그 자는 강도로 돌변했다. 그는 시계를 찬 내 팔목을 비틀어 시곗줄을 풀고 자기 손목에 나의 시계를 찼다. 그의 팔목에는 이미 세 개의 시계가 채워져 있었다. 소련군의 노략질은 갈수록 심해졌다.&gt


1946년 3월13일, 함흥에서 학생들이 소련군의 만행을 규탄하는 가두시위를 벌였다. 이것이 3
·13 함흥 反共(반공)학생사건으로, 1945년 11월23일의 신의주 反共학생사건 다음으로 규모가 컸던 反소련 데모였다.


&lt1950년에 들어서자 내가 보기에도 남침전쟁의 조짐이 곳곳에서 나타나고 있었다. 함흥에도 인민군 1개 사단이 주둔하고 있었는데, 6월로 접어들자 모두 38선 지역으로 전진 배치되어 함흥의 주둔지엔 1개 소대 병력만 남아 있었다.
&nbsp인민군의 남침이 시작되자 바로 ‘전쟁 승리를 위한 궐기대회’가 개최되었고, 결의문도 채택되었다. 그 결의문은 “인민군에 지원할 것을 만장일치로 결의한다”는 내용이었다. 강의실에 들어온 정치보위부 요원은 강의실 앞뒷문을 막고 입대지원서를 학생들에게 돌렸다.&gt


임상 경험이 없었던 그를 포함한 함흥의대 2학년생들 중 11명은 함흥시내 국·공립병원에 3개월간의 실습을 거친 후 신설 중이던 北靑(북청)의 예비사단으로 배치되었다. 함흥에서 200리 북쪽인 北靑으로 동문들과 트럭을 타고 함께 이동했다.


&lt인민학교의 교사를 징발해 막사로 사용하고 있었다. 운동장에서는 30∼40대의 장정들을 훈련시키고 있었다. 군복도 지급받지 못하고 학생복을 입고 장교식당에서 숙식을 하며 장정들의 훈련이 끝날 때까지 대기했다. 그런 지 1주일 되던 날, 평소 서로 속마음을 털어놓던 친구 범은이가 나에게 탈영을 제의했다.&gt


그의 고향은 북청에서 북쪽 100리 거리의 利原(이원). 둘은 걸어서 다음날인 10월8일 집 근처의 고갯마루에 이르렀다. 밤이 되기를 기다려 이웃사람 몰래 집에 들어갔다. 숨어 지낸 지 15일 만인 10월24일, 국군과 유엔군이 利原에 들어왔다. 마을은 온통 축제 분위기였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였다.&nbsp&nbsp&nbsp
&nbsp12월6일(1950년) 청천벽력 같은 소식에 그만 넋을 잃고 말았다. 중공군 개입으로 전세가 불리해진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탈영한 우리 둘은 공산 치하에서 남아 있을 수 없었다. ‘차호’라는 漁港(어항)으로 가서 배를 마련해야 했다. 이원에서 동남쪽 차호까지는 30리길.


&lt차호에 사는 범은이의 숙부가 고기잡이 범선의 船主(선주)였다. 승객 40여 명이 쌀 40가마를 모아 주기로 하고 선장과 선원 2명을 구했다. 그러나 선장이 갑자기 승선을 거부했다. 승선하지 않으려고 집에서 버티던 선장을 칼로 위협하여 억지로 승선시켰다.
&nbsp차호항을 떠난 지 20일이 지나 12월28일 점심 무렵에 九龍浦(구룡포)에 기항했다. 좁은 배 안에서 새우잠, 심한 멀미, 부실한 식사에 몸과 마음이 모두 지쳐 있었다. 범은이와 나는 구룡포에 기항한 김에 상륙해, 걸어서 부산으로 가기로 작심을 하고 일행에게 이별을 고했다. 선원들은 우리 둘에게 오징어 다섯 축을 주면서 가다가 팔아서 점심이나 한 끼 사 먹으라 했다.&gt


그날 저녁 무렵, 포항의 양포읍에 이르렀다. 파출소에 들어가 부산 가는 길을 물으니, “왜 하필이면 부산에 가려느냐”고 했다. 북한에서 의대를 다녔는데, 부산에 내려가 병원 조수로 일하다가 국군이 북진하면 뒤따라서 고향에 갈 생각이라고 답했다.
&nbsp“그렇다면 부산까지 갈 필요가 없다. 여기서 고개 하나만 넘으면 慶州(경주)인데, 경주에는 제15·제16·제18 육군병원이 주둔하고 있어 일자리 구하기 쉬울 터이니 경주로 가는 것이 낫겠다”라고 충고해 주었다. 우리는 경주로 발길을 돌렸다.
&nbsp
&lt이것이 내 인생의 갈림길이었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월남한 함흥의대 교수들이 부산에서 개업하거나 군병원에 근무했다. 그들의 보증만 있으면 함흥의대 재학생을 부산에 피난 중이던 서울의대에서 편입생으로 받아들였다. 그렇게 편입한 동기생이 20여 명으로 모두 의사가 되었다.&gt


1951년 1월1일, 경주의 시장거리에서 학교 친구 김신현을 만났다. 그는 함흥에서 미군부대 통역으로 근무하다가 미군을 따라 경주로 내려왔다고 한다. 김신현은 우리 둘에게 300원 자리 우동 두 그릇씩이나 사주고 호주머니 속의 양담배, 껌, 캔디, 돈을 모두 털어 우리에게 쥐어주며 다시 만나자고 했다.
&nbsp김신현의 주선으로 범은이와 나도 미군부대의 통역으로 근무하게 되었다. 1951년 10월 말, 부대가 인제군으로 이동했다. 이런 속도로 북진하면 귀향의 날도 머지않을 것이라고 흥분했다. 그러나 전황은 녹녹치 않았다. 1953년 7월27일 휴전이 되어 버렸다. 넉넉잡고 석 달이면 돌아갈 것이라고 믿었던 우리 피난민들의 소망이 점점 멀어져갔다.&nbsp
&nbsp1954년, 그는 미군부대 근무를 끝내고 홍천농고의 영어교사가 되었다. 이후 교직이 그의 천직이 되었다. 교육여건은 열악했다.
&nbsp
&lt이런 일도 있었다. 아침 학급 조회시간에 교실에 갔더니 한 학생이 벌건 얼굴로 앉아 있었다. 수상해서 불러냈더니 술 냄새가 났다.
&nbsp“너, 술 먹었어?”
&nbsp“술, 안 마셨습니다.”
&nbsp알고 보니 어머니가 이웃에서 얻어온 술지게미를 밥 대신으로 먹었다는 것이었다.&gt


그 시절은 참으로 먹고 살기조차 어려웠다. 교사의 처우도 말이 아니었다. 1954년 2월에 받은 첫 월급은 4300원. 무상으로 지급하는 쌀과 보리쌀 서 말씩, 학교 기성회에서 주는 수당 6000원이 전부였다. 당시 쌀 한 말 값이 4000원이었다.
&nbsp자유로의 여정은 험난했다. 그러나 그는 전쟁통에서도 살아남아 학생들을 가르칠 수 있다는 것을 큰 행운으로 생각했다.


&lt고향을 떠나온 지 어언 65년, 그 긴 세월 동안 어느 순간엔들 부모형제를 잊은 적이 있었던가. 피난 초기엔 ‘할머니 생전에 돌아가야 하는데’ 하고 조바심을 내며 기다렸으나 허사였다. 아무렴, 부모님 생전에야 돌아갈 수 있겠지…. 그러나 이런 바람마저도 허물어졌다. 마지막 남은 소망은 살아서 고향에 가서 부모님 산소에 술 한 잔 올리는 것이다. 어느덧 내 나이 구순이다.&gt



63세에 고졸 검정고시 합격, 74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한 인생의 역정
&nbsp&nbsp&nbsp&nbsp
우수작 &lt나는 일하면서 공부하고 살았다&gt는 빈곤과 중졸 학력에도 좌절하지 않고 열관리사· 공조냉동기계기사·소방설비기술사 등 10여 개의 국가기술자격을 취득한 成就(성취)의 개인사이다. 금년 75세인 吳尙煥(오상환) 박사는 63세(2003년)나이로 고졸 검정고시에 합격했고, 65세(2005)년에 獨學士(독학사) 학위 취득했고, 67세(2007년)에 방재공학 석사가 되었으며, 74세(2014년) 때 서울시립대학에서 재난과학 박사 학위를 취득했다.
&nbsp현직은 (주) 선 엔지니어링 종합건축사사무소 상무이사이다. 12년간의 군복무 끝에 육군 중사로 제대한 후 晝耕夜讀(주경야독)으로 각종 국가기술자격시험에 합격하고, IMF 사태시의 실직시기를 이용한 晩學(만학)으로 인생 역전에 성공했다.&nbsp&nbsp&nbsp&nbsp
&nbspIMF사태 초창기인 1997년 12월, 그는 12년 동안 기계설비팀장 등의 직책을 맡아 매일 밤 10∼12시에 퇴근하면서 열정적으로 일했던 직장(백화점)에서 쫓겨나고 말았다. 너무나 억울하고 분했던 그는 퇴임인사도 하지 않고 회사를 떠났다. 인생의 위기에서 그는 ‘소방설비기술사’ 자격을 취득하면 재기할 수 있으리라는 막연한 희망을 품었다. 이때가 1999년 초, 그의 나이 59세였다.


&lt소방설비기술사 국가기술자격시험의 登龍門(등용문)은 무척 좁고 험난했다. 합격률이 2∼3%에 불과했다. 응시자격은 대졸 이상의 학력 소지자 또는 국가기술자격 1급 기사 취득 후 해당 실무분야에서 4년 이상 실무를 경험한 자였다. 나는 중졸 학력이지만, 열관리기사를 취득하고 18년 실무 경력자여서 응시자격은 충족되었다.
&nbsp4년6개월 동안 하루 10시간씩 열심히 공부했다. 공휴일은 물론 설날과 추석, 나의 환갑날에도 시립도서관 또는 안양과학대학교 도서관에 다녔다. 드디어 2001년 가을에 총 4명이 합격한 1차 필기시험에 합격했다. 그러나 2차 면접시험에서 고배를 마셨다. 훗날에 알게 된 사실이지만, 면접관 2인 중 한 분이 나의 중학 학력을 이유로 불합격 조치했다. 다시 도서관에 나가 공부해 2002년의 소방설비기술사 시험에서 당당히 합격했다.&gt


소방설비기술사 자격을 취득한 그는 2002년 6월 G종합건축사무소의 이사로 취업했다. 그러나 그는 만족하지 않았다. 중졸 학력으로 살아오면서 그것 때문에 진절머리가 나도록 수모를 당해 왔던 것이다.
&nbsp드디어 그는 63세의 나이로 검정고시학원에 등록했다. 공부한 지 3개월 만에 경기도에서 시행하는 고졸학력검정고시를 통과했다. 그리고 다음 해인 2004년 3월에 서울산업대학교(현재의 서울과학기술대학교) 안전공학과에 04학번으로 입학했다. 이어 그는 防災工學(방재공학) 석사학위를 받고, 災難科學(재난과학) 박사학위에 도전했다.


&lt나는 ‘재난과학 박사’라는 명칭에 매력을 느꼈다. 이때까지 국내에는 단 한 명도 재난과학 박사도 나오지 않았다. 나는 인천의 송도글로벌대학 캠퍼스 신축공사현장과 청주시 북대동에 위치한 45층 아파트 신축공사장에서 소방감리원으로 근무하면서도 장거리 대학원 통학을 지속했고, 74세에 박사학위를 취득했다.&gt&nbsp&nbsp&nbsp&nbsp&nbsp


그는 1941년 일본 오사카에서 태어나 해방 직전 다섯 살 때 부모를 따라 귀국했다. 초등학교 2학년 때 6·25 남침전쟁을 겪었고, 大田(대전)에서 한밭중학교를 졸업한 뒤 가난 때문에 진학을 포기했다. 18세의 나이에 이등병으로 입대했고, 월남전 참전 등 12년의 군 복무를 거쳐 제대해, 그 후 30여 년 간을 일하면서 공부했다.&nbsp&nbsp&nbsp&nbsp&nbsp



격동기의 한국 남자로서 할 바를 다 한 사람&nbsp


가작 &lt고학으로 교사가 돼 자녀 넷을 기른 이야기&gt는 할 바를 다한 우리 시대 남자의 회고록이다. 글쓴이는 38년간 초등학교 평교사로서 근무하다가 62세에 퇴직했던 김지태(75세) 선생이다.&nbsp


&lt6·25 남침전쟁이 발발하자 우리 가족은 친척 집으로 피난을 갔으나, 상황이 여의치 않아 다시 영월군 酒村面(주촌면)의 집으로 되돌아왔다. 산과 강은 변하지 않았는데, 사람들은 변해 있었다. 따발총을 든 인민군들은 야수와 같은 눈빛으로 집집이 다니면서 인구조사를 했다. 소작인이나 머슴 그리고 젊은 여성 동맹원들이 어느 날 갑자기 붉은 완장을 차고 인민군의 앞잡이가 되어 날뛰었다.&gt


누구네 집은 형제가 몇 명, 재산은 얼마이고, 무슨 일을 하며, 논·밭·소·돼지·개·닭 등 그 집의 세세한 내력을 일러바치는 지방 빨갱이가 무섭게 설쳐댔다.&nbsp&nbsp&nbsp&nbsp


&lt아버지께서는 소위 ‘의용군’으로 끌려갈 연령의 큰형님을 주천강 건너 산 속에 토굴을 파고 숨겼다. 어린 아들 형제에게는 “누가 묻거든 안흥면 마른골 외갓집에 갔다고 하라”고 신신당부했다. 빨갱이들은 우리 집을 ‘반동분자의 집’이라고 떠들어댔다. 하루는 인민군 몇이 우리 집에 들이닥쳐 큰아들 대신에 아버지를 붙들어갔다. 55세의 아버지에게 쌀 서 말을 등에 지워 낙동강 전선으로 끌고 간다고 했다.&gt
&nbsp&nbsp&nbsp
당시 인민군은 남한사람 30만 명을 동원해 낙동강 전선까지의 군량· 탄약 등을 수송케 했다. 병량 수송에 동원되었던 그의 아버지는 인민군의 쌀을 지고 낙동강 전선으로 떠난 지 23일 만에 남몰래 돌아오셨다.&nbsp&nbsp


&lt꿈인지 생시인지 너무나 놀라고 반가웠다. 아버지는 미군기의 폭격 때문에 야간에만 남하해, 제천-단양-충주를 거쳐 이화령 쪽으로 가던 중 비행기 폭격의 혼란 속에서 대오를 벗어나 쌀짐을 내던지고 1주일을 걸어 집으로 돌아오셨다. 이후 아버지도 형님들과 함께 숨어 살아야 하셨다.&gt


당시 이화령 밑 계곡은 인민군의 병참기지였고, 인민군의 전선사령부는 이화령 동쪽 수안보에 설치되어 있었다.&nbsp
&nbsp敵 치하에서 김일성대학을 나왔다는 인민군 군관이 아이들을 모아놓고 “우리는 남조선을 해방시키려고 왔다. 이제 통일되었으니 우리의 지시를 따라야 한다”면서 ‘김일성 장군’ ‘혁명가’ 등의 노래를 가르쳤다. “장백산 줄기줄기 피어린 자국” “아침은 빛나라, 이 조선” “날아가는 까마귀야 시체 보고 울지 마라, 몸은 죽었으나 혁명정신 살아 있다” 따위의 가사였다.


&lt한번은 우리 반 친구 하나를 불러내어 노래를 시켰다. 그 아이는 뭣도 모르고 “동해물과 백두산이 마르고 닳도록 하느님이 보우하사 우리나라 만세”를 불렀다. 그 정치장교는 그 아이를 구둣발로 차면서 “이 반동 새끼의 아바이·오마니가 누구냐”며 죽도록 때렸다. 그 후 그 아이는 학교에서도 동네에서도 다시는 볼 수 없었다.&gt&nbsp


그러나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 낙동강전선에서 국군과 유엔군의 반격으로 전세는 3개월 만에 역전되었다. 주천면사무소와 주천지서에는 다시 태극기가 펄럭거렸다.


&lt3개월의 적 치하에서 완장을 차고 날뛰던 사람들이 경찰지서에 잡혀 가서 조사를 받았다. 우리 집에 매일 찾아와 형님들 숨겨놓은 곳을 대라고 윽박지르던 학교 교사 둘은 월북했다. 아버지도 지서에 가서 부역(쌀짐 운반)과 관련해 조사를 받았는데, 적 치하에서 도피 중이던 아들 둘 대신에 인민군의 쌀을 짊어지고 낙동강 전선으로 가다가 중도에서 미군기의 폭격을 받고 대오가 혼란해진 틈을 이용, 도주·은신해 왔다고 진술했더니, 조사관들이 ‘애국자 집안’이라고 칭송까지 했다고 한다.&gt
&nbsp&nbsp
그러나 다시 찾아온 평화도 잠시였다. 이번에는 중공군이 쳐내려온다고 했다. 1951년 1월은 너무 추웠다. 온가족이 피난길에 올라 충북 제천을 지나 충주 쪽으로 내려갔다.


&lt밤길을 가는데 길가에 눈덩이 같은 것이 서 있기에 손으로 툭 쳐 보니 힘없이 넘어진다. 깜짝 놀라 만져보니 피난길에 얼어 죽은 사람이었다. 무섭지도 않았다. 너무 배가 고프고 발이 얼어 어느 집에 들어갔다. 피난민이 방마다 꽉꽉 찼다. 부엌에도 마루에도 마당에도 사람으로 들끓었다. 우리 가족은 “두 살 먹은 아기(여동생)가 있다”며 방으로 밀고 들어가 하룻밤을 보낼 수 있었다.
&nbsp날이 밝았다. 우리 가족은 그 집에서 며칠 쉬어가기로 작정했다. 배가 고파도 먹을 것이 없었다. 열한 살이었던 그는 한 살 위의 형과 함께 옆 동네로 먹을 것을 구하러 갔다. 마침 그곳 큰 창고에서 국군이 피란민들에게 쌀을 배급하고 있었다.&nbsp&nbsp
&nbsp우리도 그곳으로 달려가 “국군 아저씨, 우리에게도 쌀 좀 주세요”라고 했다. 쌀 반 가마니쯤을 툭 던져주며 가져가라고 했다. 너무 좋았다. 형과 둘이서 그 쌀가마니를 나누어 매고 돌아오는데, 우연히 길에서 만난 국군 장교가 건빵 한 봉지씩을 쥐어주었다. 난생 처음 본 구수한 건빵을 황홀해 하며 씹어 먹었다.&gt


1951년 1월24일, 37도선(평택-안성-단양-삼척)까지 후퇴했던 국군과 유엔군이 再반격, 그해 4월 말부터는 38도선을 둘러싼 공방전이 계속되었다.


&lt그날이 1951년 음력 4월19일이었다. 우리 가족은 피난지에서 귀향 중이었다. 주천까지 8km 남은 공순원 고개에서 아버지는 고향 형편을 살피러 가족들은 대기시켜 놓은 채 혼자서 먼저 고개를 넘어갔다. 그러나 그 후 며칠을 기다려도 아버지는 돌아오지 않았다.
&nbsp아버지를 걱정하며 주천으로 돌아갔다. 주촌강이 보였다. 강에는 전에 없던 다리가 놓여 있고, 강변에는 군인 텐트, 그리고 무장한 국군과 미국들로 꽉 차 있었다. 집으로 달려갔다. ㄱ자 모양의 큰 집은 폭격으로 반쯤 무너졌고, 그 자리엔 철모와 피묻은 군복 등의 쓰레기가 나뒹굴고 있었다. 먹이던 돼지와 개는 사라져버렸다.
&nbsp어머니는 아버지가 돌아가셨으면 屍身이라도 찾아야 한다고 열세 살 형에게 삽과 종이를 넣은 가마니를 지게 하여 전투가 벌어졌다는 곳으로 돌아다니셨다. 아버지의 시체는 발견되지 않았다.&gt


1953년 4월 어느 날, 경찰관, 면사무소 직원, 이장이 흰 보자기에 네모나게 싼 것을 양손으로 들고 우리 집에 왔다. 큰형님의 유골함이었다. 큰 형님은 백마고지에서 중공군과 싸우다가 전사하셨다고 했다. 큰형님의 전사통지서와 유골은 군에 입대하는 작은 형님 모르게 몇 달 늦춰 보냈던 것이다.


&lt어머니와 나는 큰 망태기를 매고 주천의 논밭은 물론이고 무릉리·도천리 등지로 가서 보리이삭과 감자· 감자· 옥수수 등을 주워 먹었다. 산에 가서 칡을 캐 그 뿌리를 돌 위에 놓고 망치로 치면 흰 액체가 나온다. 그 액체를 그릇에 담아 햇볕에 말리면 흰 가루가 된다. 그 가루를 반죽해서 손바닥 같이 빚어 검은색 개떡을 만들어 먹었다. 배고플 때는 뽕나무 오디를 따먹거나 소나무 껍질을 벗겨 그 수액을 빨아 먹었다.&gt


그는 가난 때문에 학업을 중단한 지 4년 만인 열세 살 때 초등학교 4학년에 복학했다. 과거의 동급생은 중학교 1학년이 되어 있었다. 학교에서는 그를 4학년에서 6학년으로 월반시켰다. 중학교에 진학했다.


&lt하교하면 거름을 지고 밭에 가서 해가 질 때까지 밭을 매고, 밤이면 호롱불 밑에서 밤늦도록 공부했다. 언젠가 똥지게를 지고 좁은 논둑길을 가는데 멀리서 담임 선생님과 여학생이 마주 오고 있었다. 얼른 얼굴을 숙이고 논바닥으로 뛰어들어 몸을 숨겼다.
&nbsp나는 등·하교시에 영어단어장을 손에 들고 외우며 걸었다. 그런 노력 등으로 공부를 잘 했고 반장도 되었으며, 선생님의 사랑을 듬뿍 받았다.
&nbsp1959년 고등학교에 진학했지만, 살아갈 길이 막막했다. 서울 숭실대학교 장학생으로 추천되었으나 서울 갈 차비도 없었다. 직장을 얻으려고 방황하다가 영월군 상동면 녹전리에 있는 옥동광업소에서 일하게 되었다. 수십km의 막장에서 탄차를 몰고나오다 넘어져 팔과 허리를 다쳐 더 일하기 어려웠다. 14일 동안 일한 품삯으로 쌀 서 말과 돈 2500원을 받고 나왔다.
&nbsp&nbsp&nbsp&nbsp&nbsp&nbsp&nbsp


군복무 후 38년간의 교직생활


그런 그도 국방의 의무를 완수하기 위해 1963년 훈련소에 입대했다. 그는 최전방 근무를 자원하여 제1사단 15연대 제1대대 제1중대에 배치되었다. 그는 그의 큰형이 戰死한 백마고지를 바라보며 복무했다.&nbsp


&lt제대 후 취업하기가 어려웠다. 영월군 교육청에 나의 고교 성적과 군 복무시 수상 경력 등의 서류를 제출한 뒤 논술고사와 면접시험을 통과해 영월군 하동면 주문리 소재 모운초등학교 임시교사로 부임했다.&gt


당시 초등학교 교사의 학력은 3년제 사범학교 출신이 대부분이었고, 2년제 교육대학 출신은 최고 학벌이었다. 그는 일반 고등학교를 나와 심한 학벌 차별을 받았다.


&lt춘천교육대학에 임시 초등학교 교원 양성소가 설립되어 나도 4개월간 교육을 받고 삼척군 하장면의 벽지에 있는 미동국민학교로 발령받았다. 임시교사에서 준교사가 되고, 다시 정교사가 되었다. 이어 태백의 벽지학교에서 6학년 반을 2년간 담임하고 어머니가 계시는 고향의 주천초등학교로 전임되었다.&gt


대학을 나오지 못한 한을 풀고 싶었다. 한국방송통신대학이 생기자 초등교육과에 입학해 밤이면 라디오방송 수업을 들어 3년 만에 졸업했다. 호봉도 올랐다. 초등교육 학사 과정이 생겨 또 입학해 4년 과정을 마쳤다.&nbsp&nbsp&nbsp&nbsp
&nbsp
&lt자녀들이 커갔고, 시골에서는 자녀를 대학에 보내기 어려워 春川(춘천)으로 근무지(봉의초등학교)를 옮겼다. 초등학교 교사의 박봉에도 3녀1남을 모두 대학(강원대와 상지대)에 보내 졸업시켰다. 유아교육과를 나온 큰딸은 어린이집 원장이 되었고, 관광학과를 나온 둘째 딸은 신라호텔에 근무하다 결혼했다. 셋째 딸은 고용노동부에 근무하고, 아들은 농협중앙회에 재직하고 있다.&gt


이만하면 그는 남자로서 할 일을 다 했다. 38년간의 교직을 마치고 은퇴해 이제 조용히 살고&nbsp 있다. 그는 어른이 된 옛 제자들이 지금 어떻게 살아가는지, 그것이 궁금하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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趙甲濟의 讀後評

1. 대한민국 현대사를 체험한 다양한 직종의 국민들의 집단 증언으로서 '國民實錄'이라 할 만 하다.
2. 앞으로 이런 실록이 축적되어야 계급투쟁론적 민중사관에 의한 역사 조작을 막을 수 있다. 역사전쟁은 기억의 전쟁, 기록의 전쟁이기도 하다. 국민의 역사를 만들어야 한다. &nbsp
3.&nbsp체험手記는 한국 現代史가 생존투쟁의 역사였음을 말해준다. 국가는 체제를 지키기 위하여, 국민들은 가족과 생계를 지키기 위하여 싸우면서 일하고 일하면서 싸웠다. 벼랑에 몰린 존재는 생존투쟁의 의지를 잃지&nbsp않을 경우&nbsp초인적 힘을 발휘, 逆轉의 드라마를 만든다. 체험 수기의 필자는 거의가 역전극의 주인공들이었다.&nbsp
4. 고생 끝에 좋은 세상을&nbsp만난 경우가 많은 성공 스토리였다. 희생적 부모와 상관, 그리고 지도층, 무엇보다도 나라가 있었기에 가능하였다.&nbsp
5. 체험 수기의 필자들은 한국의&nbsp근대화가 만들어낸 새로운 주인공들이다. 봉건체제에선&nbsp천시를 받았거나 아예 존재할 수 없었던 職種의 인물들이 새 역사 창조의 主役이 되었음을 알 수 있다. 군인, 기업인, 상사맨,&nbsp과학자, 기술자, 여성, 그리고 해양인들이&nbsp현대사 70년이란 무대의&nbsp주연급으로 등장하였다.&nbsp
6. 필자들은 대체로 노력한 만큼 보상을 받았다. 法治와&nbsp경쟁 체제가 미흡하나마 작동하였고 나라가 전체적으로 발전하였으므로 順風을 만난 배처럼&nbsp 大勢를 따라 발전한 덕분이다. &nbsp&nbsp
7. 한국 현대사는 건국 호국 산업화 민주화의 과정을 거치면서 해양정신, 상무정신, 자주정신, 기업가 정신을 재발견하였다. 4大 성공요인으로서 자유민주주의 제도,&nbsp희생적인&nbsp지도층, 근면한 국민, 그리고&nbsp미국의 결정적 도움이&nbsp있었다.&nbsp지식인이 권력을 독점하던 시대가 가고 군인, 기업인, 과학기술자, 여성이 중심적 역할을 하는 새 시대를 만든 것이다.&nbsp
8. 전쟁과 군대가 한국인의 운명에 가장 큰 영향을 끼쳤음을 새삼 실감할 수 있었다.&nbsp모든 국민들의 삶과 의식&nbsp속에 남아 있는&nbsp한국전쟁의 영향은 통일이 되어야 정리될 것이다.&nbsp
9. 대한민국의 발전은 그러나 미완성 상태이다. 고칠 것이 많고 반성할 점도 많다. 물질적, 이념적 경쟁에 함몰된 탓에 문명의 기초인 개개인의 교양이 약해지고 있다. 한글專用은 韓國語를&nbsp반신불수로 만들어 교양의 기초를 허문다.&nbsp아직도 친일 타령으로 정치 투쟁이 벌어진다. 강대국 수준에 맞는 정신 수준을 갖추느냐가 문제이다. 오만하면 지금이 한국의 황금기이고 앞으론 쇠퇴할 위험도 있다. 亢龍有悔를 조심해야 한다. &nbsp
&nbsp&nbsp
10. 미래 세대의 영혼을 누가 잡느냐를 놓고 벌이는, 교과서를 매개로 한 역사전쟁에 현대사를 만들고 기록해간 건설의&nbsp주인공 세대가 참전하여야 대한민국 세력이 이길 것이다. 좌편향 교과서는, 한국 현대사를 이른바 민중(일하는&nbsp사람=노동자, 농민, 빈민, 학생, 투쟁가) 중심으로 기술, 운동권 보고서처럼 만들었다. 이것이 얼마나 편향되고 부정적인 시각인지는 이 교과서에서 무시된 군인, 기업인, 상사맨,&nbsp과학기술자, 그리고 해양인들이 이번&nbsp手記에 기록한&nbsp진짜 대한민국의 풍성하고 야성적이고&nbsp역동적 모습이&nbsp증명한다.
11.&nbsp자유민주주의와 시장경제, 생존투쟁을 매개로 한 민족에너지의 대폭발, 개방적 수출입국 전략에 의한 세계의 활동 무대화, 미국의 지원,&nbsp자녀 교육을 위한 부모 세대의 희생 등등 이런 것들이 상호 연결되어 善순환 구조를 이뤘던 지난 70년의 성공 비결이 앞으로로 통용될 것이라고 생각하면 誤算이다.&nbsp&nbsp'핵무장한 김정은&nbsp對 전체 韓民族'의 대결을 자유의 승리로 마무리할 수 있느냐가 관건이다. 장기적으로는, 또 궁극적으로는&nbsp국민교양의&nbsp質과 量이 우리의 삶의 모습을 규정할 것이다. &nbsp&nbsp&nbsp

자료: 1961년 朴正熙 소장이 군사혁명으로 정권을 잡고 경제개발에 착수하였을 때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93달러였다. 당시 경제통계 대상이었던 103개국 중 87위로 최하위권이었다.

1위는 2926달러의 미국, 이스라엘은 1587달러로 6위였다. 일본은 26위(559달러), 스페인은 29위(456달러), 싱가포르는 31위(453달러)였다. 아프리카 가봉은 40위(326달러), 수리남은 42위(303달러), 말레이시아는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보다 세 배가 많아 44위(281달러)였다.

지금 독재와 가난에 시달리는 짐바브웨도 당시엔 1인당 국민소득이 274달러로 한국의 약 3배나 잘 살았고 46위였다. 필리핀도 과거 한국인에겐 선망의 대상이었다. 한국보다 약 3배나 많은 268달러로서 49위였다. 南美의 과테말라도 250달러로 53위, 잠비아(60위, 191달러), 콩고(61위, 187달러), 파라과이(68위, 166달러)도 한국보다 훨씬 잘 살았다.
낫세르의 이집트도 152달러로서 70위였다. 박정희 소장 그룹의 일부는 이집트의 낫세르를 따라 배우려 했다. 아프가니스탄도 124달러로 75위, 카메룬은 116달러로 77위였다. 캄보디아도 116달러로 78위, 태국은 110달러로 80위였다. 차드 82위, 수단 83위, 한국 87위! 한국은 유신시대로 불리는 1972~1979년에 중화학공업 건설을 본격화하면서 1인당 국민소득 랭킹에서 도약한다.

1972년에 한국은 323달러로 75위, 말레이시아는 459달러로 64위였다. 1979년에 가면 한국은 1734달러로 59위로 오른다. 말레이시아는 63위로 1537달러였다. 말레이시아가 못해서가 아니고 한국이 잘하여 뒤로 밀린 것이다.

2012년 한국의 1인당 국민소득은 명목상 2만 2589달러로 세계 34위, 구매력 기준으론 3만 2800달러로 세계 30위이다. 삶의 질 순위로는 180여 개국 중 12등! 1961년에 한국보다 세 배나 잘 살았던 필리핀은 2611달러로 세계 124위, 이집트는 3112달러로 119위이다. 짐바브웨는 756달러로 158위. 필리핀의 1인당 국민소득은 지난 51년간 약 10배, 한국은 약 250배가 늘었다. 한국인은 필리핀인보다 25배나 빨리 달렸다.

한국은 美, 中, 日, 獨에 다음에 가는 5大 공업국, 7大 수출국, 8大 무역국, 12위의 경제大國(구매력 기준 GDP)이고, 12위의 삶의 질을 자랑한다. 재래식 군사력은 8위 정도. 울산은 세계 제1의 공업도시이다. 維新期(유신기)의 중화학공업 건설 덕분이다. 1960년대에 한국은 후진국을 벗어났고, 1970년대 말에 선진국으로 가는 막차를 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