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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25전쟁을 바로 알면, 한반도 통일이 보인다! - ②

鄭淳台   |   2016-06-11 | hit 11358

앞에도 임진강, 뒤로도 임진강이 굽이치는 태풍전망대


옥계리에서 三串里(삼곶리)를 거쳐 민간인 통제구역을 넘어 평야지대에 우뚝 솟은 태풍전망대(264m)에 도착했다. 태풍전망대에 오르면 전방에도 임진강, 후방에도 임진강이다.


이곳에서 임진강이 크게 S字를 굽이치며 흐르고 있는데 태풍전망대가 그 가운데 위치하기 때문이다. 전망대 前方의 임진강은 남한의 경기도와 북한의 황해도를 가르는 경계선이다. 태풍전망대에서 뒤돌아보면 남한에 속하는 임진강 中流이다.


태풍전망대에서 내려오다가 삼곶리 中面 사무소 한켠에 ‘북한군 고사기관총탄 낙탄지’가 보였다. 2014년 10월10일 15시55분 북한군이 우리 민간단체의 對北전단 살포를 빌미로 남쪽 방향으로 고사기관총탄 10여 발을 발사했던 것이다.


삼곶리에서 10km쯤 남하해 38선상에 위치한 全谷(전곡)의 한탄강역(경원선)에 잠시 들렀다. 임진강의 支流(지류)인 漢灘江(한탄강)을 사이에 둔 전곡과 靑山面(청산면)은 羅唐 7년전쟁 최후의 지상전인 買肖城(매소성) 전투의 현장이다. 매소성 전투는 서기 675년 가을에 신라군이 唐軍(당군) 20만 명을 격퇴한 결전의 현장이다. 이렇게 임진강은 우리 민족의 방파제였다.


금요일(4월8일) 저녁, 한탄강에서 일단 귀경했다. 공휴일인 토·일요일에 軍부대를 방문해 수고로움을 끼치지 않는다는 게 필자의 생각이다. 답사는 20대 국회의원 총선 다음날인 4월14일부터 계속하기로 했다.



병력 90%가 戰死 또는 포로가 되었음에도 이긴 설마리 전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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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4월14일, 서울 외곽순환고속국도를 달리다 의정부 IC에서 빠져나와 3번국도로 타고 양주를 거쳐 덕정 사거리에서 56번 지방도로를 10여 km를 달려 파주군 南面 신산리 소재 비룡사단(육군 25사단)의 감악산회관에 도착했다.


낮 12시, 감악산회관의 식당에서 지승호 중사 등과 만나 점심을 함께 했다. 池 중사가 모는 지프가 앞장서고 필자의 답사차량이 뒤따랐다. 坡州(파주) 일대의 제1봉인 감악산(675m) 계곡 사이에 뚫린 도로(371번 지방도로)변에 ‘영연방군전적비’(경기도 파주시 적성면 설마리)가 세워져 있다.


설마리 전투(1951년 4월22일∼4월25일)는 英聯邦(영연방) 제29여단이 중공군의 4월 공세 때 설마리 일대에서 중공군 3개 사단(제187·제188·제189사단)의 공격을 3일간이나 저지했던 대표적인 고립방어 전투이다.


특히 그 예하 글로스터 대대는, 감악산을 점령한 중공군에게 퇴로를 차단당한 가운데, 적성면 馬智里(마지리)와 南面 신산리를 잇는 도로변의 235고지(설마리)에서 중공군과 치열한 전투를 벌였다.


글로스터 대대는 탈출에 성공한 D중대를 제외한 全장병이 전사 또는 포로가 되었지만, 동두천을 진출하려던 중공군을 60시간 동안이나 저지해 차기 방어선인 델타線 구축에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델타線은 중공군의 4월공세(1951년) 때 서울 固守(고수)를 위한 방어선으로 城洞里(성동리: 오두산통일전망대)∼덕정∼포천∼가평으로 이어졌다.


4월 공세를 앞두고 彭德懷(팽덕회) 中朝연합군사령관은 “30만5000명(중공군 27만과 북한군 3만)의 대병력을 동원한 인해전술로 서울 북방에서 유엔군 主力을 격멸하고, 그 여세를 몰아 서울을 탈취해 毛澤東(모택동) 주석에게 노동절(May Day) 선물로 바칠 것”이라고 호언장담을 했었다.


서울에서 활동하면서 영국의 &lt더타임스&gt 등 여러 언론기관에 기사를 쓰는 엔드루 새먼 기자는 글로스터대대의 결사항전을 다룬 《마지막 한 발까지》라는 책을 썼다. 설마리 전투를 취재하면서 여러 생존 참전자들을 만났다. 처음, 그들은 戰亂(전란) 중 한국에 대한 끔직한 기억 때문에 “그런 나라는 생각하기도 싫다”, “우리의 희생은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을 다시 찾은 참전자들은 달라졌다. 다음은 趙甲濟 기자의 &lt月刊朝鮮&gt 2016년 6월호 기사 ‘완전히 달라진, 한국전에 대한 세계사적 인식’ 중의 한 대목이다.


&lt서울에서 활동하면서 영국의 &lt더타임스&gt 등 여러 언론기관에 기사를 쓰는 앤드루 새먼 기자는 영연방 글로스터大隊(대대)의 決死抗戰(결사항전)을 다룬 《마지막 한 발까지》라는 책을 썼다. 그는, 1951년 4월 하순 중공군의 대공세로 포위당한 영연방 軍의 영웅적 전투(설마리 전투)를 취재하며 여러 생존 참전자들을 만났다. 상당수는 전란 중의 한국에 대한 끔찍한 기억 때문에 “그런 나라는 생각하기도 싫다”는 반응을 보였다. “우리의 희생은 헛된 것”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었다. 그러나 한국을 다시 찾은 참전자들은 달라졌다.&gt

&nbsp&lt책의 한 대목이다.
&nbsp그들은 새롭고, 용감한 나라 한국을 발견한 것이다. 유엔군이 흘린 피값은 미국의 돈으로 보증되고 한국인의 땀으로 상환되었다. 미국으로부터 무역과 기술이전에 특혜를 받은 데다가 권위적 정부가 들어서고, 유일한 자원이자 발전의 지렛대인 사람에 투자함으로써 한국은 세계 13위의 경제대국이 되었다. 올림픽을 열기 전해엔 국민들이 들고일어나 민주화까지 이뤘다. 오늘의 한국이 누리는 생활수준과 개인의 자유는 유럽의 중급 정도가 된다.
&nbsp2001년 글로스터대대 전투 50주년을 맞아 한국을 방문한 참전자 일행은 전쟁기념관을 찾았다가 깜짝 놀랐다. 의장대가 그들을 기다리고 있었던 것이다. ‘부시 대통령 환영 행사에 잘못 온 게 아닌가’ 하는 착각을 했다고 한다…(중략)
&nbsp헨리 울프스라는 영국군 참전자는 이 책(《마지막 한 발까지》)에서 이렇게 말했다.
“남북한 생활수준의 차이를 본다면 자유가 공짜가 아니란 말이 맞다. 반세기가 흘러서 뒤돌아보니 ‘잊혀진 전쟁’은 정의로운 전쟁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존 프레스턴 벨 씨는 著者(저자)와의 인터뷰에서 오히려 한국인들에게 감사했다.
“주는 것(giving)과 사랑하는 것(loving)의 공통점이 뭘까요? 차이가 없습니다. 같은 거예요. 50년 전 나는 내 생명의 1년을 주었습니다. 하마터면 (생명을) 잃을 뻔했지요. 나는 한국인들이 내가 준 그 작은 것으로 무엇을 하였는지 모르고 지냈습니다. 내가 한국을 방문하였을 때 그들의 감사를 받고는, 그리고 그들이 만든 완전히 새롭고 멋진, 유쾌한, 평등하고, 야심만만하며, 번영하는 새 나라를 만든 그들에게 나는 이렇게 말하고 싶었습니다. ‘저한테 고맙다고 하지 마세요. 내 인생을 가치 있는 것으로 만들어 준 이는 당신들입니다. 나를 (가치 있는 인간으로) 키워 준 이는 바로 당신들입니다.’”
새먼 기자는 이 감동적인 문장으로 자신의 저서를 끝냈다.&gt


趙甲濟 기자의 이 기사에서 인용된 주요 발언자의 핵심 내용은 다음과 같다.


● “한국은 무승부가 아니고 이긴 전쟁이며, 특히 동서 냉전의 승리는 한국전쟁에서 비롯되었다.” (2013년 7월27일 한국전 60주년 행사에서 오바마 美 대통령)&nbsp&nbsp&nbsp
● “한국의 戰後 발전은 마셜플랜, 일본 근대화보다 더한 성공이다.” (핼버스탐 기자)
● “50년 전 한국의 능선을 지켜 낸 용감한 병사 덕분에 멋지고 행복한 젊은이들이 베를린 장벽 위에 올라가 공산권의 붕괴를 자축할 수 있었다” (클린턴 美 대통령)
● “한국전 덕분에 일본의 경제부흥, 독일의 再무장, NATO 강화, 한미동맹, 미군 배증 등으로 對蘇 (대소)포위망을 완성했다” (美 국방부)



키 155cm, 체중 40kg의 북한병사가 귀순 2년만에 165cm 56kg이 된 비결


비룡사단(육군 25사단) 주둔지 신산리에서 적성면사무소인 마지리까지는 20km. 마지리에서 설마천변을 따라 2km 북상하면 임진강 中流다. 임진강 위에 걸린 장남교를 건너, 연천군 장남면 원당리-전동리를 거쳐 판부리에 이르면, 임진강의 지류인 沙尾川(사미천)이 흐름이 보인다. 여기서 판부리 초소를 지나 전방으로 1km쯤 더 올라가면 GOP(남방한계선) 철책선이 눈에 들어온다.


1968년, 필자는 사미천 兩岸에 걸친 철책선 400여m를 지키는 소대장으로 복무했다. 48년 전에 비해 달라진 것은 철책선 1m 전방에 특수소재로 만든 感網(감망·철책에 물체가 닿으면 그걸 감지하는 망)이 하나 더 축조되어 있다.


지승호 중사에 따르면, 2012년 8월 북한군 병사 1명이 바로 이곳 사미천 지역의 철책선에 접근해 귀순을 요청했다. 그때 19세였던 귀순병사는 키 155cm, 몸무게 40kg으로 매우 왜소했다. 귀순 후 제빵회사에 취업해 있던 그가&nbsp 2014년 25사단을 방문했다. 머리칼을 노랗게 염색하고 아반테 승용차를 손수 몰고 온 그는 불과 2년 만에 키 165cm, 몸무게 56kg의 몸매로 변해 있었다고 한다.&nbsp&nbsp&nbsp


철책선 후방으로 이어지는 비포장 군사도로를 4km쯤 西進하면 보병 제72연대의 승전OP이다. 개성 서쪽 30km 지점이다. 10년 전, 필자가 이 OP를 방문했을 때의 이름은 보병 70연대의 고랑포OP였다. 승전OP에서 뒤돌아서면 임진강 너머로 동쪽엔 감악산, 서쪽엔 파평산이 솟아 있다.


그 사이로 흐르는 임진강 南岸의 七重城(칠중성·지금의 파주시 적성면 구읍리 중성산)과 北岸의&nbsp 瓠蘆古壘(호로고루)가 서로 대치하는 형국을 이루고 있다. 호로고루는 높이 20m의 임진강 赤璧(적벽) 위에 세워진 고구려 성곽이다. 신라의 북방 진출기지인 칠중성은 羅唐 7년전쟁(670∼676) 때 쟁탈의 요충이었다.


승전OP 바로 밑에 신라의 마지막 임금인 敬順王(경순왕)의 왕릉이 있다. 서기 935년 겨울, 경순왕은 나라를 고려 태조에게 항복하는 문제를 신하들과 상의하였는데, 신하들은 혹은 찬성, 혹은 반대였다. 이에 왕자가 나서 이렇게 반대했다.


“나라가 흥하고 망하는 것은 반드시 하늘에 달린 것이니 충신·義士들과 함께 민심을 수습하고, 우리의 일을 다 해야 합니다. 社稷(사직)을 어찌 하루아침에 경솔히 남에게 준 단 말입니까?”


이에 경순왕이 말했다.&nbsp


“이렇게 외롭고 위태로운 형세로는 도저히 나라를 더 보존하지 못한다. 이젠 더 강해지지… 못해서 아무 죄 없는 백성들만 무참하게 죽게 할 터이니 나로서는 차마 그렇게 할 수 없다.”


경순왕이 신하들을 거느리고 고려에 귀순할 때 고려 태조는 開京(개경) 교외까지 나와 경순왕을 맞이하고, 그의 장녀 樂浪公主(낙랑공주)를 아내로 삼게 했다. 경순왕은 자기의 伯父(백부) 김억렴의 딸을 태조에게 주어 왕후로 삼게 했다. 그는 개경에서 43년을 더 살다가 978년에 죽었다. 그렇다면 경순왕의 귀순 결정이 옳았던가, 아니면 훗날 麻衣太子(마의태자)로 일컬어지는 왕자의 반대가 옳은 것이었던가?

우선 우리 역사에서 후삼국시대라고 부르는 당시 상황을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경순왕 金傅(김부)는 927년 후백제왕 견훤이 서라벌을 급습해 경애왕을 살해한 후 견훤에 의해 옹립되어 즉위했다. 경순왕이 왕위에 오를 당시에는 한반도가 신라, 후백제, 고려로 분열되어 있었고, 특히 후백제의 잦은 침입과 지방 호족들의 할거로 신라의 판도가 서라벌 일원으로 오그라들고, 국가의 기능도 마비된 상태였다.


이에 民心도 신흥 고려로 기울어지자, 경순왕은 무고한 백성들이 더 이상 괴롭힘을 당해서는 안 된다고 해서 고려 왕건에게 평화적으로 나라를 넘겨준 것이다. 필자는 이런 경순왕의 판단이 정당했다고 생각한다. 경순왕의 결단은 21세기 한반도에서도 유효할 것이다. 백성을 먹이지도 못하는 독재정권은 존재의 이유가 없다.


후삼국 통일 후, 신라왕실의 피는 고려왕실에도 이어진다. 고려 제5대 景宗(경종)의 왕비는 경순왕의 딸이다. 경순왕의 백부 김억렴의 딸이 낳은 아들이 고려 제8대 顯宗(현종)의 아버지였다.


이보다 더욱 주목할 것은 경순왕은 고려에 귀순했지만, 이후 우리 역사의 主流(주류)는 옛 신라인이었다는 역사적 사실이다. 오늘날 우리나라 大姓(대성)의 다수는 경순왕의 경주김씨, 金庾信(김유신) 장군의 김해김씨, 그리고 慶州(경주)를 본관으로 하는 朴씨· 李씨·崔씨·鄭씨 등이다. 심지어, 북한의 김일성도 慶州김씨의 分派(분파)인 전주김씨의 후손이라고 한다. 경주김씨들은 매년 봄과 가을 고랑포의 경순왕릉에 와서 제사를 올린다.


1970년대까지 고랑포 일대는 美 제2사단이 주둔했다. 1968년 1월, 북한 124군부대의 김신조 일당 31명은 이곳의 美 제2사단 경계망을 뚫고 고랑포에서 임진강을 渡涉(도섭·걸어서 강을 건넘)한 후 파평산과 북한산을 넘어 청와대 부근까지 침투했다. 그때까지는 경순왕릉의 존재는 알려지지 않았다. 그 후 고랑포의 美軍이 후방으로 철수한 후 이곳을 인수한 국군 비룡사단의 장병들이 고랑포OP 남쪽 기슭에서 제초작업을 하다가 총알을 맞은 비석을 발견, 그 碑文(비문)을 통해 경순왕릉임을 확인했던 것이다.


고랑포는 남북 분단 전에는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온 상선들이 각종 화물을 부려&nbsp 번화한 시장이 열린 곳이라고 한다. 고랑포에서 軍用도로를 타고 16km쯤 남진한 후,&nbsp리비교(북진교)를 건너 임진강 左岸인 리비 사거리에서 이날 답사를 안내한 지승호 중사와 헤어졌다.



임진강은 우리 민족의 방파제


리비 사거리에서 37번 국도를 타고 10km 쯤 西進(서진)해 파평면 栗谷里(율곡리) 소재 임진강 나룻터 뒤편 언덕 위에 있는 花石亭(화석정)에 들렀다. 임진왜란 때 宣祖(선조)는 서울을 버리고 압록강 남안의 義州(의주)로 피난하면서 밤중에 임진강 나루에 이르렀다. 그때, 화석정에 불을 질러 야간의 뱃길을 밝혔다고 한다.


파주는 栗谷 李珥(율곡 이이)와 西人파벌의 영수인 成渾(성혼)이 世居(세거)하던 곳이다. 10만 養兵(양병)을 주장한 율곡은 임진왜란 10년 전에 이미 별세했으나, 율곡의 절친인 성혼은 선조임금의 파천 소식을 듣고도 화석정에 나와 뵙지도 않아 이후 선조의 미움을 잔득 받게 된다. 《練藜室記述(연려실기술)》은 임진강 도하 무렵 선조 일행의 모습을 다음과 같이 전하고 있다.


&lt어둠을 타고 임진강을 건너는데… 나룻배는 겨우 5, 6척인데, 이것으로 대소 인원들이 서로 건너기를 다투어 上下가 문란하고, 하인과 말을 잃어버려서 혹은 걷고 혹은 타고 해도 밤새도록 건너지 못하였다. 後宮(후궁) 閔嬪(민빈)은 가마 멀미로 파주에 있고, 임금은 배를 타고 기다리노라고 2경이 가깝도록 저녁밥을 먹지 못하여, 내시를 불러 술과 차를 드리라고 하였으나, 모두 가져 오지 않았다. 內醫院(내의원)의 龍雲(용운)이 상투 속에 끼워 두었던 사탕 반 덩어리를 내어 강물에 타서 드렸다. 밤중에 東坡館(동파관)에 도착하여 (임금은) 4경에 비로소 좁쌀밥을 먹었고, 世子[광해군] 이하는 모두 끼니를 굶었다. 柳成龍(류성룡)이 쌀 서 되를 올려 이튿날 아침에 밥을 지어 드렸다.&gt


문산읍에 들러 저녁을 먹고 自由路(자유로)를 따라 오두산 평화전망대 건너편 交河邑 松村里(교하읍 송촌리) 부근까지 남하해 한강 하류가 내려다 보이는 언덕 위의 임진강 모텔에서 1박을 했다. 交河(교하)는 한강과 임진강이 만난다는 뜻이다. 임진강의 강물이 交河 부근의 한강에서 合水하여 김포반도과 강화도의 북단 水路를 거쳐 서해로 흘러가는 것이다.&nbsp&nbsp&nbsp&nbsp&nbsp


답사 6일차의 아침, 자유로를 北上하여 임진각공원에 도착해 삶은 옥수수 1개와 자판기 커피 한 잔으로 아침식사를 대신했다. 소형차 1일 주차료 2000원. 아이들의 놀이터인 ‘평화랜드’도 있다.


임진각에서는 임진강 위에 걸린 자유의 다리, 임진강철교를 바라보기에 좋고, 6·25 전쟁 때의 유물 및 각종 전적기념물이 전시되어 있다. 임진강 철교는 6·25 남침전쟁의 발발 첫날, 국군 제1사단이 폭파에 실패한 경의선의 철도교이고, 자유의 다리는 남북의 포로교환 시 국군과 유엔군 포로의 귀환을 위해 축조한 다리다. 자유의 다리는 1998년 통일대교의 완공 이전, 임진강 하류 지역을 건너는 유일한 다리였다. 1953년 휴전협정이 체결된 후에 전쟁포로 1만3000여 명이 이 다리를 건너오면서 “자유 만세!”라고 외쳐 그 후 ‘자유의 다리’라고 불리게 된 것이다.&nbsp


이곳 DMZ매표소에서 안보관광시설 답사 티겟을 구입, 오전 10시에 출발하는 셔틀버스를 탑승했다. 북한의 남침용 제3땅굴 → DMZ(비무장지대)와 북한을 가까이 볼 수 있는 도라산전망대 → 경의선의 최북단역인 도라산역 → 국군 제1사단에서 전역한 부사관 40여 명이 정착한 거주지 등을 둘러보는 코스다.


자연생태계의 보물창고인 DMZ는 세계인의 문화유산이다. 지난 60여 년간 전쟁의 폐허에서 완전히 회복한 DMZ 안에는 포성에 놀라 달아났던 동물들도 다시금 삶의 둥지를 튼 지 오래되었다. 유별나게 꿩, 다람쥐 등이 자주 눈에 띈다. 사람의 손이 거의 닿지 않는 가운데 자연의 자생력을 입증해 보인 것이다.&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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셔틀버스 안은 人種(인종) 전시장이었다. 승객 30여 명의 국적은 미국, 중국, 일본, 브라질, 노르웨이, 독일 등 다양했다. 한국인은 필자 일행 2명뿐이었다. DMZ의 자연에 대한 외국인들의 찬탄이 쏟아졌다.


생명과 희망의 땅 DMZ는 살아 있었다! DMZ는 세계 최장의 분단과 시련을 겪은 우리에 대한 보상으로 내리는 신의 특별한 선물인지도 모르겠다. 필자 일행의 옆 좌석에 앉은 노르웨이人 커플은 봄바람에 휘날려 쏟아지는 벚꽃은 바라보며 몹시 황홀해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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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그룹 故 鄭周永(정주영) 명예회장이 소떼를 몰고 지나갔던, 통일대교를 건너 임진강 북안에 위치한 제3땅굴부터 답사했다. 서울에서 1시간 거리인 55km 지점에 위치한 제3땅굴은 1978년 10월에 발견되었다. 땅굴의 구조는 길이 1635m, 높이 2m, 폭 2.1m로서 남방한계선 이남 435m까지 넘어와 있고 지하 73m 지점에 뚫려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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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부용 셔틀 같은 無蓋車(무개차)를 타고 지하 75m까지 하강한 다음, 땅굴 속을 살피며 달렸다. 정주영 회장의 소떼가 지나가던 곳 바로 그 밑에서 金哥(김가) 독재정권은 남침용 땅굴을 팠던 것이다. 남한의 햇볕정책은 이처럼 북한정권에 의해 철저히 악용되었다.


都羅山(도라산) 전망대로부터는 북한의 헐벗은 山河(산하)와 비무장지대를 조망할 수 있다. 가까이로는 개성공단이 보이며, 조금 멀리로는 판문점과 개성시가 관측된다. 도라산역은 민간인 통제구역에 있는 최북단 경의선 역이다.&nbsp&nbsp


12시15분 임진각으로 돌아왔다. 자유로를 4km쯤 남하해 黃喜(황희) 정승의 유적지인 伴鷗亭(반구정)에 들러 점심부터 해결했다. 이 곳의 한 음식점은 이름과는 달리 아방궁처럼 호사스런 모습의 음식점이었다. 그래서 그런지 바가지를 쓴 듯한 밥값을 지불했다. 그러나, 임진강변 철책과 1m 거리의 객실에 앉아 밥 먹는 기분은 각별했다. 점심 후 반구정에 올라 우리 민족의 방파제인 임진강 河口(하구)의 절경을 조망하면서 황희라는 역사인물을 생각했다.&nbsp&nbsp


황희는 조선조 太宗(태종) 때 첫째 왕자인 讓寧大君(양녕대군)에 대한&nbsp廢世子(폐세자)와 셋째 왕자인 忠寧大君(충녕대군)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다가 庶人(서인)이 되고 귀양살이도 했으나, 충녕대군[世宗]의 즉위 후 여러 要職(요직)을 두루 거쳐 19년간이나 영의정을 지낸 인물이다. 은퇴 후 그는 임진강 河口에 정자를 세우고 ‘동무 伴(반)’, ‘갈매기 鷗(구)’라는 堂號(당호)를 지었다.


堂號에 걸맞게 飛翔(비상)할 듯한 모습의 정자에서 그는 기러기와 벗하는 여생을 보냈다. 황희가 ‘열린 귀를 가진 정치가’였음을 전하는 다음 일화는 유명하다.


&lt어느 날, 황희는 길을 가다가 길가에서 잠시 쉬면서 밭에서 일하는 검은 소와 누런 소를 잠시 바라보았다. 무심결에 황희는 소 주인인 농부에게 “검은 소가 일을 잘하오, 누런 소가 일을 잘 하오?”라고 물었다. 농부는 가만히 “쉿!” 하며 그의 人指(인지)를 입 앞에 세운 뒤 소들의 눈치부터 살폈다.
그리고는 잠시 후 황희의 귀에 대고 “일은 누런 소가 잘 하오만…”라고 속삭였다. 바로 이 대목에서 황희는 농부로부터 크게 배웠다. 그 후 황희는 남에 대한 공공연한 비방이나 인물비교를 삼갔다고 한다.&gt


이런 처세가 조선조에서 최장수 영의정을 누리면서 세종의 治世(치세)를 뒷받침할 수 있었던 그의 비결이었는지도 모른다. 하기야 新約聖經(신약성경)에도 “비방을 받지 않으려거든 비방을 하지 말라”는 구절이 있다.&nbsp


반구정에서 내려와 자유로를 10여 km 南下해 경기도 파주에 위치한 烏頭山(오두산)에 직행했다. 오두산은 그 생김새로 보아 흔히 사용하는 까마귀 烏(오)자보다 큰 자라 鰲(오)자가 적절하다는 것이 평소 필자의 생각이다. 꼭 거북 대가리 같은 모습이다.


오두산은 4∼6세기에 걸쳐 백제와 고구려가 임진강과 한강이 합류하는 交河지역의 패권을 놓고 격렬하게 싸웠던 현장이다. 오두산 정상부에 고구려 광개토왕의 백제 침공 때 關彌城(관미성)이라 불렸던 오두산성의 城郭跡(성곽적)과 백제의 토기가 발견되어 문화재(사적 351호)로 지정되었다.


오두산성에서 북향하면 임진강 河口가 그림처럼 다가온다. 오두산은 한강 하류과 임진강 하구를 감시하고 제압할 수 있는 감제고지인 것이다. 瞰制(감제)란 주변보다 상대적으로 높은 지점에서 관측하거나 사격에 의해 敵의 활동을 방해할 수 있는 능력을 말한다.&nbsp&nbsp&nbsp


교하지역은 서기 475년 고구려 장수왕이 한성백제의 도읍인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함락시킨 이후 약 80년간 고구려의 영토가 되었다. 이후 백제와 신라는 군사동맹을 맺고 고구려의 남진을 견제했다. 그러던 551년 백제-신라 연합군은 고구려의 內憂外患(내우외환)을 틈타 고구려軍을 임진강 이북으로 밀어냈다.


백제는 한강 하류를 탈환했고, 신라는 남한강 유역 신라가 차지했다. 그러나 신라·백제라는 두 古代 정복국가의 속성상 江 하나를 사이좋게 나눠가지는 것은 애시당초 바랄 수 없는 일이었다. 553년 관산성(충북 옥천)전투에서 신라군은 백제 聖王(성왕)을 敗死(패사)시키고 한강 하류까지 차지했다. 이후 100여 년간 신라는 백제군과 고구려군의 협공을 받으면서도 전략적 요충인 交河지역과 당시의 세계제국 당나라와 해로로 연결되는 당항성(경기도 화성시에 위치)를 굳세게 지켰다.&nbsp


羅唐 7년전쟁(670∼676) 때도 오두산성은 쟁탈의 요충이었다. 675년 당나라 장수 薛仁貴(설인귀)는 보급선단을 거느리고 임진강 하구에 접근했으나, 신라수군에게 교하지역에서&nbsp 대패하고 도주했다. 이로써 임진강의 支流(지류)인 한탄강까지 남진했던 李謹行(이근행)의 당군 20만이 兵站(병참)의 실패로 싸우지도 못하고 도주했다. 唐軍을 한반도에서 몰아냄으로써 삼국통일을 완수할 수 있었고, 그것이 우리 韓民族(한민족) 형성의 결정적 되었다. 그래서 임진강은 ‘우리 민족의 방패’인 것이다.&nbsp


오두산 평화전망대에 오르면 임진강 너머로 북한의 개풍군 丁串里(정곶리) 마을이 보인다. 북한의 철책선 뒤에 북한군 초소와 김일성 사적관, 그 오른쪽에 인민문화회관, 그리고 그 가운데에 농가들이 있는데, 그리 유족한 모습이 아니며, 인적도 드물다. 6·25전쟁 전에는 남한에 속했던 38선 이남 지역이며 그때 그 주민은 대한민국 국민이었다. 그런데 6·25전쟁에서 우리 땅을 지키지 못한 탓에 북한주민이&nbsp된 것이다. 이런 것을 두고 사람 팔자, 運數(운수) 소관이라고 하는 것일까?



강화 평화전망대에서 바라본 빼앗긴 땅과 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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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화도의 북단인 兩寺面(양사면) 일대엔 철곶돈대·북장곶 돈대·구등곶 돈대 등이 촘촘하게 모여 있다. 이들 墩臺(돈대)는 고려·조선 시대에 수도권 방어를 위해 설치된 해안 진지였다. 북장곶 돈대 바로 뒤의 강화 평화전망대에 오르면 북한의 논밭과 집들이 내려다 보인다.


3년 전, 필자는 한국관광대학 학생 300여 명과 함께 ‘강화 평화전망대’를 답사했다. 학생들을 데리고 이곳에 온 이 대학교의 金周永(김주영) 이사장은 예성강 河口(하구)의 右岸(우안)을 가리키며 “저기가 바로 내 고향집!”이라고 말했다. 예성강 하구의 左岸(좌안)은 開城(개성)이며, 右岸이 延安(연안)이다.&nbsp&nbsp


강화 평화전망대 마당에 최근 건립한 ‘연안대첩비’는 필자와도 무관하지 않다. 원래의 연안대첩비는 북녘 땅 연안읍성 내에 있다. 연안대첩은 임진왜란 때 초토사 李廷암(이정암·1541~1600)이 의병을 지휘한 연안읍성 방어전(1592년 8월28일∼9월2일)에서 倭將(왜장)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의 제3군(병력 1만1000명)에 대승을 거두었던 史實(사실)을 말한다.


연안 실향민들은 고향의 강산이 빤히 바라보이는 이곳에 그들의 자랑거리인 ‘연안대첩비’를 하나 새로 건립하면서 원래의 漢文碑文(한문비문)을 현대 국문으로 옮겨 달라고 필자에게 부탁했었다.&nbsp&nbsp&nbsp


6·25전쟁 발발 전까지 38선 以南인 개성∼연안∼옹진은 당연히 남한의 땅이었다. 6·25 남침 전쟁에서 옹진∼연안∼개성으로 이어지는 지역은 縱深防禦(종심방어)가 어려워 初戰(초전)에 적에게 피탈당하고 말았다. 종심방어란 적의 공격을 점진적으로 약화시키며, 모든 진지를 적이 최초에 관측할 수 없도록 방지함으로써 지휘관으로 하여금 예비대를 가동할 수 있도록 계획된 상호지원 방어진지의 배치를 말한다.


1951년 휴전회담 장소를 개성의 來鳳莊(내봉장) → 판문점으로 결정하는 데 동의한 유엔군 측의 失策(실책)에 의해 그 以西 지역의 탈환이 사실상 불가능해졌다. 당시, 제해권을 장악한 유엔군은 평양의 外港(외항)인 남포 앞바다의 석도·초도 등을 비롯해 38선 이북 서해의 섬들을 거의 다 점령하고 있었다.


1953년 7월27일 휴전 성립 직후, 유엔군은 38선 이북에 있는 서해상의 섬들을 모두 북한에게 양도하고, 옹진∼연안∼개성 남쪽 바다에 떠 있는 백령도·대청도·소청도·연평도·우도 등 우리 수도권 방어에 긴요한 ‘서해 5島’만을 계속 확보하고, ‘서해5도’와 북한 해안 사이의 중간선에 NLL(북방한계선)을 설정했던 것이다.


유엔군의 NLL 설정은 당시 해군이 거의 전멸 상태였던 북한에는 오히려 관대한 조치였다. 당연히, NLL 설정 이후 20년간 북한 정권도 아무런 이의를 제기하지 않았다. 그러던 북한이 NLL을 문제 삼은 것은 1973년 군사정전위원회 때부터였다. 그들은&nbsp서해5도 주변 바다는 북한의 영해이므로 이곳을 통과하는 선박은 사전 승인을 얻어야 한다는 등의 억지를 부렸다.&nbsp&nbsp


이후 북한은 NLL을 무력화하기 위해 지속적으로 NLL을 침범했으며, 그 결과로 제1연평해전, 제2연평해전, 천안함 피격사건, 연평도 포격 등의 도발을 감행했다. 참고로 노무현은 대통령 재직 시 ‘NLL은 법적 근거가 없다’, ‘NLL은 땅 따먹기’라는 등의 발언을 했었다.&nbsp&nbsp



6·25 전쟁 격전지는 國道로 답사해야&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필자는 급한 일이 없는 한 고속도로보다 國道(국도)로 다니기를 좋아한다. 국도에는 역사가 배어있기 때문이다. 6·25 전적지 답사도 국도를 달리면 거의 다 해결된다. 1번 국도는 서울 → 수원 → 대전 → 목포, 2번 국도는 목포 → 순천 → 하동 → 진주 → 마산 → 부산, 3번 국도는 철원 → 잠실(서울) → 충주 → 김천 → 진주 → 삼천포로 이어진다.


또 4번 국도는 장항 → 대전 → 대구 → 감포(경주), 7번 국도는 부산 → 포항 → 강릉 → 속초→ 고성으로 연결되어 있다. 대체로, 국도의 번호가 홀수면 남북으로 이어지는 길이며, 짝수면 동서로 이어지는 길이다.&nbsp&nbsp


예컨대 목포에서 목포 → 순천 → 하동 → 진주 → 鎭東(진동)으로 이어지는 2번 국도는 부산을 겨냥한 북한군 제6사단의 主공격로였다. 鎭東(진동) 주변 고지들은 피아의 결전장이었다. 鎭東 진입 직전의 2번 국도 변에 위치한 鳳岩里(봉암리)는 美軍들에게 ‘포병의 무덤’이라 불린 곳이며, 진동 서북쪽의 西北山(서북산·739m)은 고지의 주인이 19번이나 바뀐 격전장이었다.


포항공항과 포항제철 앞을 거쳐 형산강을 건너면 포항시의 중심가이다. 포항공항은 바로 6·25 때 美 제5공군의 발진기지였던 延日(연일)비행장이었다. 연일비행장을 死守(사수)하기 위해 국군 용사들은 형산강에 뛰어들어 水中(수중) 격투를 벌이기도 했다. 휴전 20년 후에 건설된 포항제철은, 20만 중량톤의 철광선이 바로 接岸(접안)할 수 있는 전용부두까지 보유한 세계 제1급 제철소이다.


포항 중심가에서 7번 국도를 타고 영덕 → 울진 → 삼척 → 강릉 → 주문진을 거쳐 북상하면 38선상의 동해안에 강원도 양양군 현북면 其士門里(기사문리)라는 漁港(어항)이 있다. 1950년 10월1일, 국군 3사단 제23연대는 아군에 대해 포격을 가하는 기사문리 서쪽 언덕의 북한군 포진지를 제압한다는 명분으로 38선을 돌파했다. 이것을 기념해 매년 10월1일을 국군의 날로 삼고 있다.


필자는 6·25 전쟁 당시, 피아의 主기동로인 1·2·3·4·5·6·7·19·25·31·44·46번 국도 등을 달리며 전적지를 답사했다. 답사거리는 4000km를 웃돌 것 같다. 답사 때의 메모를 보면서 이 글을 썼다.



아직도 부끄러움 모르는 從北들의 작태&nbsp


답사를 하면 할수록 가슴으로 느끼는 것이 적지 않다. 우리나라의 山河(산하)는 갈수록 더 푸르고, 봄꽃은 사람을 더욱 황홀하게 하고, 들에는 먹거리가 자라는 비닐하우스로 늘어나고, 길은 더 넓어지고 있다.


특히 암석 지대로 매우 황폐했던 포항 → 흥해 → 영덕에 이르는 7번 국도 주변 산들도 이제는 무성한 숲을 이루고 있다. 바닷가에 바람막이 담을 치고, 바위에는 구멍을 뚫어 뿌리 내리기에 성공한 ‘세계적 植木神話(식목신화)’의 현장인 것이다. 이곳은 지금 사방·녹화 사업을 배우려는 세계 여러 나라 전문가들의 순례지가 되어 있다.


지금 대한민국의 종합 국력은 국내외 조사기관에 따라 약간의 차이가 있지만, 대략 11∼13위를 기록하고 있다. 대한민국은 건국한 지 만 2년도 되지 않는 시점에서 공산주의 진영의 침략을 받았다. 패망의 문턱까지 몰렸던 한국이 우방국들의 도움으로 나라를 지켜냈고, 최하위 후진국에서 선진국 그룹으로 진입한 것은 역사의 기적일 수밖에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적지 않은 從北 좌파의 학자·교사·언론인·작가·예술인·정치인 등은 아직도 대한민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흠집을 내는 것을 무슨 역사적 사명으로 알고 있는 듯하다. 그들이 그 동안 쓴 글이나 언동대로라면 대한민국은 벌써 망해도 몇 번이나 망한 나라가 되었어야 했다.


그들은 이때까지 거짓말을 밥 먹듯 해왔지만, 아직도 부끄러움을 모른다. 세계 제1의 효율성을 자랑하는 경부고속도로 건설 때엔 ‘관광버스나 다니는 고속도로의 차량통행을 막기 위해 그 진입로에 들어눕겠다’는 극언까지 했고, 울산공업단지나 포항제철소의 건설 때도 ‘買辦資本(매판자본)과 짜고 나라를 팔아먹는 짓’이라며 借款亡國論(차관망국론)을 들먹였다.


그 시절, 사실 우리 사회엔 우리 자신을 폄하해 “선쩨[鮮製(선제)·한국에서 만든 물건]니까 그렇지!”, “엽쩐[葉錢(엽전)·한국인]은 할 수 없어!” 따위의 自虐(자학)의 소리가 넘치고 있었다.&nbsp&nbsp


자유민주주의 국가에 있어 역사관의 완전 일치는 불가능하다. 그러나 태극기 앞에서 경례를 하지 않고, 애국가를 부르지 않으며, “김일성 자신도 뭔지 몰랐다”는 김일성의 主體思想(주체사상)을 전파하는 무리는 우리와 사상과 신념체계가 다른 사람들이다. 특히, 현재 북한의 3대 세습 체제 아래 특권을 누리는 계층이나 그것을 옹호·추종하는 국내의 從北(종북)은 단언컨대 우리와 같은 韓民族(한민족)일 수 없다.&nbsp



核을 컨트롤 할 수 있어야 核 공격 막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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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도 서울로부터 50km 떨어진 곳에 敵軍 120만과 대치하는 것이 오늘날 우리의 현실이다. 이런 상황 속에서 오늘의 대한민국처럼 정치적 자유를 누리는 사례는 인류역사에 찾아보기 어렵다. 더욱이 적화통일을 부르짖는 북한은 시도 때도 없이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겠다” 면서 핵실험과 미사일 발사시험을 거듭하고 있다.


이것은 북한의 핵무기 개발을 방관·두둔한 우리 사회의 業報(업보)이다. 북한 노동당 비서로서 1996년, 한국에 망명한 故 황장엽 씨는 “북한이 파키스탄으로부터 농축기술을 사서 우라늄 핵폭탄의 제조기술을 이미 확보했다”고 폭로했지만, 우리 정부는 아무런 대책을 마련하지 못했다. 좌파정부는, 北核이 거의 實戰(실전)배치 된 후에도 그것은 미국과 북한 간의 문제라며 ‘남의 문제’로 미뤄버렸다.


심지어 노무현 대통령은 재임 시, ‘북핵은 방어용이며 공격용이 아니다’면서 ‘印度(인도)는 핵무기를 가져도 되고, 북한은 왜 가져서 안 되느냐’며 북한 정권을 비호했다. 盧 대통령은 재임 시 북핵이 남한에 대한 공격용이 아니라고 했지만, 북한의 김정일-김정은 父子(부자)는 천안함을 폭침시키고, 연평도에 무차별 포격을 가했다. 금강산에 관광하러 간 남한 여성을 북한의 초병이 조준 사격해 살인을 했는데도 그들은 아직 사과를 하지 않았다.


이런 도발은 바로 그들이 핵무기를 믿고 자행하는 만행이다. “핵단추를 누르는 데는 1∼2초면 족하다”는 핵위협은 우리가 컨트롤할 수 있는 핵으로만 막을 수 있는 것이다. 국가가 결심만 하면 방법은 많다. 자위적 핵무장, 전술핵 재배치 및 공동사용권 확보, 多層的(다층적) 방어방 등이 그것이다.


좌파정권 당시 남한이 북한에 바친 금품은 60억 달러에 달했다. 그렇다면 북핵 제조에 쓰인 돈을 남한이 제공한 셈이다. 북한은 남한에서 보낸 쌀을 동남아 시장에서 팔아 현금화하거나 전리품처럼 그들의 핵심계층에게만 배급했다. 수년 전, 남한의 민화협(민족화해협력범국민협의회)이 북한에 복합비료 100만 포대(당시 1포대 당 1만2000원) 보내기 모금운동을 벌였다. 민화협 측은 비료는 식량과 달라 轉用(전용)할 수 없을 것이라고 해명했지만, 비료의 원료인 질산염은 핵무기 등의 폭탄 제조에 전용될 수 있다는 게 전문가들의 견해다.


外信에 따르면 김정은은 2013년 한 해에만 약 6억 달러의 최고급 사치품을 해외에서 수입했다고 한다. 이 사치품은 체제 유지를 위한 ‘선물’로 뿌려졌다. 국제시장에서 옥수수 2억 달러 어치를 수입하면 북한에서 굶어 죽는 사람들은 사라졌을 것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한이 김정은 정권의 유지에 도움이 되는 돈·쌀·비료를 바칠 수는 없다.


그러나 핵무기를 가진 북한은 미국을 향해 핵을 탑재한 대륙간탄도미사일(ICBM)을 겨냥해 놓고 남한에 대해선 돈을 바치라고 계속 압박할 것이다. 이런 북한의 요구를 거부하면 북한의 대남 군사적 도발은 더욱 거칠어질 것으로 보인다. 북핵을 막으려면 우리도 핵으로 맞설 수밖에 없다.&nbsp&nbsp&nbsp


사실, 대한민국은 핵을 가지려 해도 그로 인해 잃을 것이 많을 것이다. 북한은 그들의 ‘헌법’에도 핵보유국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북한이 멸망하지 않는 한 북핵 해결은 어렵다. 그렇다면 한국의 핵무장은 생존을 위해 불가피한 自救策(자구책)일 것이다.



좌편향 교과서는 인류 양심에 대한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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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아직도 6·25 기습남침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고, 그것을 ‘북침’이라고 강변하는 從北(종북)의 무리가 적지 않다. 이런 종북의 공작에 우리 젊은이들이 오염되면 대한민국은 내부로부터 썩어어갈 것이다. 특히 온 세계가 惡(악)으로 규탄하는 북한 정권을 옹호하는 남한의 좌편향 역사 교과서는 인류 양심에 대한 도전이다. 필자가 《6·25전쟁의 현장》을 쓴 네 번째 이유이다.


역사에서 교훈을 찾지 못하는 민족은 불행해지게 마련이다. 한반도의 대전환이 예고되고 있는 지금, 우리는 국권 被奪(피탈) → 분단 → 남침전쟁이라는 불행의 역사를 ‘반성의 거울’로 삼아야 할 것이다.


그러나 오늘의 대한민국은 적지 않은 시행착오에도 불구하고 우리 民族史上(민족사상) 가장 빛나는 興隆期(흥륭기)를 열고 있다. 이제 우리는 가난과 自虐(자학)에서 탈출해 세계 제1류의 흐름과 동행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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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만, 민족사의 進展(진전)을 가로막는 종북 이데올로그의 발호를 뿌리 뽑지 않으면 우리가 먼저 위험해질 것이다. “NLL은 땅 따먹기”라느니 “北核 대변인 노릇” 운운하는 정치인이 또다시 得勢(득세)하는 국가적 재난도 막아야 한다.


자유민주주의 국가에서 思想(사상)과 신념 체계가 반드시 똑같을 수는 없다. 그러나 민족사의 큰 흐름에 거스르는 시대착오적 역사관으로 무장하고, 젊은이들을 誤導(오도)하는 종북의 무리는 결코 용서받을 수 없다.


6·25 전쟁의 양상과 성격은 중공군이 대거 개입했던 1950년 10월 하순 이후 크게 변화했다. 최근, 중국 학계에서도 ‘抗美援朝’(항미원조·미국의 침략에 대항해 북한을 도움)가 역사의 왜곡이며 ‘6·25 남침’임을 지적하는 논문이 발표되고 있다. 북한 땅에서 벌어진 전투현장은 현재로선 답사가 불가능하다. 최근의 정세를 보면 북한 지역 답사의 꿈도 허망한 것은 아닌 것 같다.



샤프 前 주한미군사령관, “北, 내부 불안으로 2∼3년 내 붕괴할 수 있다”


前 주한미군사령관 월터 샤프 장군이 “북한이 내부 불안으로 훨씬 빨리 붕괴할 수 있다”고 말했다고 美 국방부 기관지인 &lt스타 앤 스트라이프&gt紙가 2015년 6월25일 보도했다. 샤프 장군은 2008년부터 2011년까지 3년간 주한미군사령관을 지냈다.


샤프 장군은 이날 美 육군 지상전연구소 후원으로 하와이에서 개최된 심포지엄에서 “2016년 4월에 부임한 빈센트 브룩스 주한미군사령관 임기가 끝나기 전에 한반도에 ‘중대한 변화(major change)’가 일어날 수 있다고 했다. 주한미군사령관의 근무기간이 2∼3년인 것을 감안하면, 북한 급변사태가 2∼3년 내에 일어날 수 있다는 의미인 셈이다.


사프 前 사령관은, 북한 붕괴를 추정한 근거로 북한의 내부 불안정과 함께 “북한의 강력한 도발이 예상되며, 이것이 더 큰 충돌로 발전할 수 있다”는 점을 들었다. 핵무기를 가진 북한의 도발에 대해, 그는 북한의 최대 교역국인 중국이 대북제재에 동참한 사실을 지적하며 “북한경제는 주민들의 수요를 충족시키지 못하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김정은 체제가 무너지면 유엔이 北中 국경 통제 등과 관련한 역할을 할 것으로 본다”면서 “아마 중국군이 유엔군의 선봉에 설 것”이라고 예상했다.


그렇다면 한반도 통일은 1945년의 분단 이후 최상의 好機(호기)를 맞이하게 된다. 현재로선 G2, 즉 미국과 중국 모두가 적어도 표면적으로는 한반도의 평화적 통일에 대한 거부감이 없다.


통일로 가는 흐름은 우리 민족사의 大勢(대세)이다. 다만, 준비된 통일이 아니면 오히려 재앙이 될 수 있다. 통일은 민족의 理想(이상)을 실현하는 통일이어야 할 것이다. 다만, 핵무기를 보유한 ‘북한의 막바지 도발’을 어떻게 관리할 것인가? 우리 韓民族(한민족)의 進運(진운)이 걸린 死活的(사활적) 문제가 아닐 수 없다. 특히, 우리는 주변 4대국에 대해 통일한국이 세계평화에 기여할 뿐만 아니라 4대국 자신들의 국가이익에도 부합된다는 점을 납득시켜야 할 것이다. 그것이 어렵다면 한국은 ‘분단과 전쟁’이라는 고난의 역사를 되풀이할 우려가 크다.&nbsp&nbsp


6·25전쟁을 도발한 김일성의 목표는 한반도를 자기 지배 하에 두려는 것이었다. 배후 조종자 스탈린은 공산화된 한반도 전체를 소련의 위성국으로 만드는 데 있었다. 이를 위해 소련은 북한 정권에 T-34 탱크 등 미군과 맞서도 밀리지 않는 강력한 무기를 지원했다.


또한,&nbsp6·25전쟁 두 달 전인 1950년 4월, 스탈린은 군사지식이 빈약한 북한군 통수부에 ‘獨蘇(독소)전쟁의 영웅’으로 이름을 날리던 바실리예프 중장 등 10여 명의 작전 전문가를 파견했다. 이들은 남침을 위한 ‘작전명령’을 러시아語로 작성했으며, 신문기자·카메라맨 등으로 위장하여 전선에까지 따라다니며 전투를 감독·독려했다.


毛澤東(모택동)은 소련으로부터 무기와 2억 달러의 경제지원을 받기 위해 6·25 발발 전에 조선족 출신 중공군 4만 명을 압록강을 도하시켜 북한의 병력을 증강시켜 주었다. 개전 초, 전투 유경험자들인 그들은&nbsp중공군 편제를 그대로 유지한 채 군복만 북한 것으로 갈아입고 남침 대열의 선두에 섰다.&nbsp


1950년 10월, 戰勢(전세)가 역전되어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하자, 毛澤東은 ‘인민지원군’이라는 이름으로 중공의 정규군을 대거 한반도에 파견했다. 모택동은 53년 7월의 휴전 때까지 延 3백만 명의 병력을 한반도에 투입했다. 그 代價(대가)로 중국이 소련에 요구한 것은 핵무기 제조 기술이었다. 이를 소련이 불응함으로써 中蘇분쟁의 씨앗이 되었다.


그야 어떻든 國共內戰(국공내전)에서 승리한 중공군은 수백만 명의 국부군 투항자를 얻었고, 그 때문에 과다한 병력자원의 소비처가 필요했다. 그것이 중공군의 1차∼5차 공세에서 傳家(전가)의 寶刀(보도)처럼 구사되었던 人命輕視(인명경시)의 人海戰術(인해전술)로 나타났다.


2013년 7월27일 워싱턴의 한국전 기념물 앞에서 열린 휴전 60주년 기념사를 통해 오바마 대통령은 “한국전은 무승부가 아니고 이긴 전쟁이며, 특히 동서 냉전의 승리는 여기서 비롯되었다”고 말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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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전은 이긴 전쟁입이다. 가난과 압제 속의 북한과 극명한 대조를 이루면서, 5000만의 한국인들은 활력 있는 민주제도를 갖고, 세계에서 가장 역동적인 경제대국에서 자유롭게 살고 있으니 한국전은 이긴 것이고 우리의 자랑스러운 遺産(유산)입니다”


그러나 아직 6·25전쟁은 현재진행형이다. 이제 1129일간 전개된 6·25전쟁을 음미해 오늘의 교훈을 얻어야 할 차례이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