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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義兵 연구: 선비가 사무라이를 이긴 전쟁

鄭淳台   |   2014-07-06 | hit 9345


7. 義兵 연구/조선 선비가 일본 사무라이에 이긴 전쟁


선비와 사무라이의 對決

壬辰倭亂(임진왜란)으로 온 나라가 초토화되어, 사람이 사람을 잡아 먹는 地獄圖(지옥도)가 그려졌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7년간의 왜란은 분명히 조선의 승리로 끝난 전쟁이다. 왜냐하면 日本은 前後 30만 대군을 파병하고도 끝내 전쟁도발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日本의 최고권력자 도요토미 히데요시(豊臣秀吉)는 한반도를 먹고, 나아가 中國(중국)과 印度(인도)까지 지배하겠다는 病的(병적)인 야심으로 침략전쟁을 도발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개국 이래 꼭 200년간의 평화시대의 지속으로 文弱(문약)해졌던 조선이 이기고, 100여 년의 戰國시대를 거쳐 전투라면 이골이 난 「사무라이의 나라」 日本이 패배한 까닭은 무엇일까. 그것은 왜군이 전투에서는 유능했지만, 兵法(병법)을 몰라 兵站(병참)을 소홀히했기 때문이다.
임진왜란은 조선 선비와 일본 사무라이의 對決이었다. 임란 당시의 사무라이들은 칼질에는 능숙했지만, 대체로 글을 모르는 탓에 兵法書를 읽지 못해 전략적인 두뇌를 갖지 못했다. 이것이 왜군이 初戰 전투는 잘했지만, 전쟁에 진 까닭이다.
開戰 초기에 조선의 官軍, 특히 陸軍은 궤멸했다. 이런 戰力의 공백을 메워 戰勢(전세) 역전의 발판을 마련했던 것이 義兵(의병)이었고, 義兵의 중심이 郭再祐(곽재우) 등 在野 선비들이었다. 義兵 궐기의 배경을 파악하려면 우선 開戰 초기의 상황을 좀 짚어 볼 필요가 있다.

初戰에 궤멸당한 官軍

개전 초기, 왜군의 기세는 몹시 날카로웠다. 당시 세계에서 성능이 가장 우수했던 것으로 평가되는 鳥銃(조총)과 日本刀(일본도), 그리고 저돌적인 돌격전술이 왜군이 지닌 3大 강점이었다.
1592년 4월13일, 부산포에 상륙한 고니시 유키나와(小西行長)의 제1군(병력 1만8700명)은 14일 부산진성, 그 다음날은 동래성을 간단하게 함락시켰다. 경상좌수사(朴泓)·경상우수사(元均)·경상우병사(李珏)는 전투 한번 해보지도 않고 모두 도주했다.
왜군의 제1군은 일로북상하여 尙州의 북천변에서 진을 치고 있던 순변사 李鎰(이일)의 부대를 선견대의 돌격 한 번으로 궤멸시켰다. 이어 천혜의 험로 鳥嶺(조령:새재)을 아무런 저지도 받지 않은 채 넘은 고니시의 제1군은 忠州(충주)의 들머리에 있는 彈琴臺(탄금대) 벌판에 背水陣(배수진)을 치고 있던 조선 육군의 「제1의 勇將」 도순변사 申砬(신립)의 부대를 전멸시켰다. 휘하 병력 8000명을 잃은 신립은 진영의 뒤쪽 달래江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
당초, 신립은 步兵(보병)으로 구성된 고니시의 제1군을 얕잡아 보고 騎馬兵(기마병)의 돌격으로 단 한 번에 짓밟아 버릴 요량이었다. 그러나 1575년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의 보병 소총부대가 일본 최강이었던 다케다 가쓰요리(武田勝賴)의 기마군단을 간단하게 궤멸시킨 나카시노 전투 이래 왜군의 소총부대에 기마부대는 이미 「밥」이었다. 왜군 보병이 보유한 조총은 비록 단발의 화승총이긴 했지만, 3개 組로 편성된 소총수의 「3交代(교대) 사격」으로 연속사격의 효과를 발휘하고 있었던 것이다.

당시 조선 육군이 野戰(야전)에서 왜군을 이기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野戰이 어렵다면 적을 山城戰鬪(산성전투)로 유인하거나 非정규전으로 적의 허점을 치는 것이 得策(득책)이다. 그러나 왜군의 北上路에 위치한 고을의 수령·방백들은 거의 모두 왜군의 戰力에 겁을 집어먹고 任地(임지)를 이탈해 도피하기 일쑤였다.
신립 부대를 전멸시킨 고니시의 제1군과 경주-안동을 거쳐 北上한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의 제2군(병력 2만800명)은 충주에서 만나 공격로를 둘로 나눠 서울로 진격했다. 4월29일 저녁에 이 소식을 들은 宣祖(선조) 임금은 다음날 꼭두새벽에 서울을 버리고 개성-평양을 거쳐 의주까지 몽진했다.
「서울 1번 入城」 경쟁에서 승리자는 고니시의 제1군이었다. 고니시는 여주-양평을 거쳐 東大門을 통해 서울로 들어왔다. 가토의 제2군은 水原을 거쳐 한강을 도하해 한나절 늦게 南大門을 통해 서울에 들어왔다.
고니시 부대와 가토 부대는 임진강을 건너 개성을 함락시키고, 다시 갈라져 북상했다. 평안도로 진격한 고니시의 제1군은 부산포에 상륙한 지 2개월 만에 대동강을 건너 평양성을 함락시켰고, 함경도로 들어간 가토 부대는 조선의 두 왕자를 생포하면서 두만강가의 국경고을 鏡城(경성)까지 점령했다.

倭軍은 상상도 못 한 義兵의 봉기

그러나 평양에 입성한 고니시 부대는 더 이상 북상하지 않았고, 경성까지 올라간 가토 부대도 강원도 북부와 인접한 安邊(안변)으로 남하했다. 왜 그랬을까. 바로 兵站線(병참선) 유지가 불가능했기 때문이다. 이순신 함대가 南海의 制海權(제해권)을 장악해 왜군 수송선의 西海 진출을 봉쇄했고, 郭再祐가 낙동강 수송로의 핵심구간을 틀어 막았던 것이다. 그것이 어떻게 가능했는지 약간의 보충설명이 필요한 것 같다.
5월7일의 玉浦(옥포)해전에서 조선군 최초의 승리를 거둔 이래 9월1일의 부산포 해전에 이르기까지 이순신 함대는 10戰10勝을 기록해 제해권을 회복했다. 특히 7월8일에 전개된 한산도 해전에서 일본의 대표적 海將(해장)인 와키사카 야스하루(脇坂安治)의 함대가 완패하자 히데요시는 왜군 海將들에게 『다시는 이순신과 싸우지 말라』는 엄명을 내렸다. 이제 왜군은 海路에 의한 병참을 완전 포기하고 낙동강·남한강 등 內陸(내륙)수로를 이용해 군량과 무기를 前方으로 수송할 수밖에 없었다.
이런 상황에서 왜군으로서는 상상하지도 못했던 이변이 일어났다. 그것이 바로 郭再祐(1552~1617)가 불을 붙인 義兵의 봉기였다. 日本 역사에는 義兵이 없다. 대장이 항복하면 그 휘하의 장졸들은 물론 백성들도 점령군에 납작 엎드렸다. 1945년 8월15일 天皇 히로히토가 항복하자 일본 국민 모두가 점령군 사령관 맥아더에게 적극 협조했던 것이 좋은 보기이다.
4월22일 宜寧(의령)에서 일어난 郭再祐 부대는 낙동강을 오르내리면서 4월 말에는 의령·三嘉(삼가)·합천 등을 수복했다. 이를 계기로 이웃 고을인 합천·삼가 등지에서 鄭仁弘(정인홍)·朴惺(박성)·곽준·곽저·朴而章(박이장)·孫仁甲(손인갑)·金俊民(김준민)·權世春(권세춘)·朴思齊(박사제)·權濟(권제)·신방집·成天禧(성천희)·成安義(성안의)·曺悅(조열) 등이 의병을 일으켜 왜군에게 대항했다.

의병 활동으로 전라도 침입 견제

경상우도 의병의 主流(주류)는 德川(덕천:지금의 산청군 덕천면)의 大유학자 南冥 曺植(남명 조식)의 제자들로서 벼슬을 마다했던 선비(鄭仁弘의 경우) 또는 과거시험에 떨어졌거나(郭再祐의 경우), 文科 합격 후 벼슬살이를 하다가 갖가지 이유로 낙향해 있던 전직 文官(김면의 경우)들이었다.
8월에는 前 목사 김면이 의병을 끌고 관군과 연합해 知禮(지례)를 탈환했고, 9월에는 金垓(김해)가 禮安(예안)에서 일어나 경상우도 북부지방을 제압했다. 이와 같은 활동으로 의병은 왜군의 전라도 침입을 견제했다.
충청도에서는 趙憲(조헌)이 의병 1700여 명을 이끌고 申簡秀(신간수)·張德蓋(장덕개)의 의병 1600여 명, 승려 靈圭(영규)가 거느린 義僧兵(의승병) 500명과 합류해 淸州를 수복하고, 8월 錦山(금산)에서 왜군과 싸워 700여 명이 전사했다. 이때 이긴 왜군도 많은 인명피해로 전라도 침입을 포기했다.
전라도에서는 高敬明(고경명)·柳彭老(유팽로)·高從厚(고종후) 등이 담양에서 일어나 금산전투에 참가했고, 金千鎰(김천일)·양산주·任啓英(임계영)·金德齡(김덕령) 등이 南原(남원)에서 활약했다.
경기도·강원도·황해도·평안도·함경도에서 의병이 곳곳에서 일어났다. 황해도의 이정암은 延安城(연안성)을 사수했고, 함경도의 鄭文孚(정문부)는 鏡城(경성)에서 일어나 吉州城을 회복했다.
평안도에서는 西山大師(서산대사) 휴정이 전국 승려에게 궐기할 것을 호소했다. 이때 강원도에서 승의군을 일으켜 스승 西山大師의 휘하로 달려간 四溟堂惟政 (사명당 유정)의 戰功이 拔群(발군)이었다.
왜란 발발 첫해 9월까지 전국에서 궐기한 의병들은 官軍 이상의 역할을 감당했다. 이제는 의병을 맨 처음에 일으켰고, 戰功이 가장 컸던 忘憂堂(망우당) 郭再祐의 활동무대를 둘러볼 차례다.

鼎巖津 전투의 현장

수년 전 3월 필자는 남해고속도로의 郡北(군북) IC를 빠져나와 10여 리를 달린 뒤 승용차를 세워 두고 거름江 위에 걸린 舊정암교 앞에 섰다. 거름江 남쪽은 咸安郡 郡北面 月村里(함안군 군북면 월촌리), 다리를 건너면 의령 땅이다. 함안 쪽 강변에는 수박밭이 많다. 이제는 강변에 둑을 쌓아 수박밭과 비닐 하우스로 변해 있지만 임란 당시엔 이곳에도 남강물이 흘렀을 것이다.
1959년에 재건된 舊정암교는 그 폭이 좁아 두 차가 교차하지 못해 한쪽 차가 통과할 때까지 對岸의 차량은 기다려야만 했는데, 이제는 도괴 위험 때문에 차량통행이 아예 금지되어 있다. 그 대신에 차량들은 舊정암교 바로 서쪽에 새로 놓인 新정암교를 통해 의령으로 진입한다.
진주에서 흘러내리는 南江은 의령군 芝正面(지정면) 돈지마을 앞에서 낙동강과 합류한다. 두 강의 합수지점인 의령의 南江을 우리말로 「거름강」이라고 부르고, 한자로는 岐音江(기음강) 또는 岐江이라고 쓴다.

舊정암교에서 마주 보는 거름강 北岸은 절경이다. 기암절벽 위에 鼎巖樓(정암루)가 우뚝하다. 강물 위로는 「솥바위」라 불리는 높이 4m쯤 되는 섬이 오똑하다. 모양이 솥과 흡사하고, 물속으로는 솥발과 같이 세 개의 기둥바위가 박혀 있다고 그렇게 불리고 있다.
「솥바위를 중심으로 사방 30리 안에서 큰 부자가 날 것」이라는 전설은 아직도 이곳 사람들 사이에서 자주 들먹여지고 있다. 三星그룹의 창업주 李秉喆(이병철)이 의령군 정곡면에서, LG그룹의 창업주 具仁會(구인회)가 진양군 지수면에서, 효성그룹의 창업주 趙洪濟(조홍제)는 함안군 군북면에서 태어났다.

솥바위의 한자 표기가 鼎巖(정암)이다. 옛적엔 이곳에 나루가 있었는데, 한자로는 鼎巖津(정암진)이라고 표기했다. 여기가 바로 의병장 郭再祐의 대표적인 전승지이다. 정암루 밑에는 「忠翼公(충익공) 紅衣將軍 戰蹟(전적)기념비」가 세워져 있다.
임진왜란 당시 경상도 점령을 맡은 왜군 지휘관은 제7군 대장 모리 테루모토(毛利輝元)였다. 그는 지금의 히로시마에서 시모노세키에 이르는 大영지를 가진 藩主(번주)였다. 그의 石高(석고: 세키다카)는 120만 石으로 임란 때 동원한 휘하의 병력은 3만 명이었다. 9개 軍으로 편성된 왜군(총병력 15만8800명) 가운데 모리의 제7군은 최대병력을 보유한 부대였다.

임란 초기에 모리의 제7군은 낙동강 동쪽 지역인 경상좌도의 上京路(상경로)는 장악했지만, 낙동강 서쪽지역인 경상우도를 점령하지 못했다. 이때 왜군은 전라도를 점령하기 위해 제6군 병력(1만5700명)을 전라도 해안에 상륙시킬 예정이었지만, 옥포해전과 적진포해전에서 이순신 함대에게 패전해 수송로 확보에 실패했다.
제6군 대장은 고바야가와 다카가게(小早川隆景)였다. 다카가게는 고바야가와家에 양자로 들어가 姓(성)이 바뀌었지만, 실은 모리 테루모토의 친삼촌으로서 모리氏다. 고바야가와는 다음해 1월의 벽제역 전투에서 明軍 제독 李如松(이여송)의 부대를 격파해 武名을 떨치게 된다.

고바야가와는 당초의 海路수송 작전을 변경, 육로로 전라도에 진격하기 위해 경상우도의 함안-의령-단성-함양을 거쳐 육십령을 넘은 다음 전라도 땅 장계(지금의 장수군 장계면)를 거쳐 全州를 점령하려고 했다. 호남의 首府(수부) 전주를 향한 최단 코스이다.
5월 하순, 고바야가와의 副將 안고쿠지 에케이(安國寺惠瓊)는 함안을 점령하고 정암진을 渡河(도하)하려고 했다. 그는 원래 모리家의 外交僧(외교승)으로 히데요시와 모리 테루모토 간에 화의를 성립시켜 양쪽 모두로부터 두터운 신임을 얻었던 정략가였다. 그는 安國寺 주지를 겸했는데, 兵書를 읽어 武事에도 조예가 깊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郭再祐의 게릴라 戰法

정암진 전투의 상황은 실학자 李德懋(이덕무)의 「紅衣將軍傳」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왜장 안고쿠지가 전라도에 간다고 선전하면서 곧바로 정암진에 이르렀으나 진창 때문에 행군할 수 없었다. 이에 포로(조선인)들을 시켜 얕고 단단한 곳에 깃발을 세우고 다음날 아침에 渡河(도하)하려고 했다. 郭再祐는 이를 염탐해 알고 한밤중에 왜병의 깃발을 뽑아다가 진창 속에 꽂아 놓은 다음에 복병을 깔아 놓고 기다리니 과연 적이 진창 속에 빠졌다. 이때 복병을 일으켜 적을 궤멸시켰다.

이윽고 적의 후속부대가 많이 밀려오니 郭再祐는 수하의 병력이 적어 맞설 수 없음을 헤아리고, 힘세고 키 큰 사람 10여 명을 뽑았다. 그들은 모두 백마를 타고 붉은 전포를 입고는 「天降紅衣將軍」(천강홍의장군)이라고 쓴 깃발을 세운 다음에 나누어 산골 깊숙한 곳을 지키게 했다.
그러고 나서 郭再祐가 먼저 적진을 습격해 유인하니 적의 주력이 郭再祐를 추격했다. 적병의 조총탄이 비 오듯 쏟아졌지만, 끝내 미치지는 못했다. 郭再祐가 수목 사이 이곳저곳에서 나타나니 적이 놀라고 의심하던 차에 다시 본즉 붉은 전포를 입고 백마를 탄 사람이 높은 봉우리를 깎아지른 절벽 사이에서 나타나 빙 둘러서서 어지럽게 돌아가는데 그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 왜병은 더욱 놀라고 神將(신장)이라고 생각해 감히 가까이 오지 못했다. 진짜 郭再祐는 드디어 숲 속에서 나와 어지럽게 활을 쏘아 적을 전멸시켰다.>
忘憂堂(망우당) 郭再祐의 본관은 玄風(현풍: 지금의 달성군 현풍면)이며 南冥 曺植의 제자이다. 아버지는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定菴 郭越(정암 곽월)이며, 어머니는 晉陽姜氏(진양강씨)인데, 明宗 7년(1552) 8월28일 지금의 의령군 유곡면 世干里(세간리)에서 태어났다. 그가 세 살 되는 해에 어머니 姜씨가 별세했지만, 계모 許씨의 사랑을 받으며 성장했다.

출생과 성장 과정

8세부터 학업에 정진해 14세에 역사서 「春秋(춘추)」를 읽고 通(통)했다. 15세 때는 의령현 자굴산 보리암에 들어가 諸子百家(제자백가)의 글을 널리 읽었다. 16세에 만호(종4품 무관직) 金行의 차녀 商山金氏(상산김씨)와 결혼했는데, 그녀는 南冥의 외손녀이다. 金行의 맏딸은 南冥 문하의 대표적 학자였던 김우옹(이조참판 역임)의 부인이다.

郭再祐는 南冥의 학풍에 따라 19세부터 활쏘기와 말타기를 익혔으며 병법서를 두루 읽어 통달했다. 南冥은 이름 높은 山林處士(산림처사: 在野 유학자)이면서도 諸子百家, 특히 兵學에 정통했고, 평소 칼을 차고 제자들에게 강론을 할 만큼 무예를 중시했다. 南冥 문하에서 유별나게 많은 의병장이 배출된 배경이다.
宣祖(선조) 7년(1574), 義州목사에 임명된 아버지 郭越을 따라가 그로부터 3년간 義州에서 살았다. 국경수비대를 지휘하는 義州목사는 文官일지라도 武事(무사)에 밝지 않으면 맡기 어려운 자리다. 明宗 때 文科에 급제하여 사헌부·사간원·홍문관을 두루 거쳤던 곽월은 의주목사 담임 후에도 兵使를 지휘하는 황해도 관찰사 등을 역임했다.

郭再祐로서는 그런 아버지의 업무를 곁에서 견문할 수 있었을 것으로 보인다. 그런 그에게 국제적 시야를 넓힐 기회가 찾아왔다. 선조 11년(1578), 郭再祐는 正使가 된 아버지 곽월을 수행해 明의 수도 北京을 다녀왔다.
그의 나이 34세 때인 선조 18년(1585), 庭試(정시: 대궐에서 치르는 과거)에서 乙科로 뽑혔는데, 출시된 제목은 「唐太宗敎射殿廷論(당태종교사전정론)」이었다. 그런데 합격자를 발표한 지 불과 며칠 만에 임금의 지시로 합격을 취소하는 사단이 벌어졌다. 郭再祐의 답안 중에 선조 임금의 기분을 상하게 하는 문구가 있었기 때문이다. 「왕실의 곁가지」로 부터 왕위에 오른 宣祖는 글은 좀 읽었으나 帝王學(제왕학)을 닦지 못해 이렇게 속이 비좁았다.
선조 19년, 곽재우의 아버지 定菴公(정암공)이 별세했다. 아버지의 3년상을 마친 선조 22년, 의령현 동쪽 거름강변의 돈지에 江舍(강사)를 마련한 그는 낚시질로 소일했다.
그의 가문 배경은 文科에 오르지 못하면 변변한 사람으로 대접받기 어렵게 되어 있었다. 할아버지는 文科에 급제해 성균관 司成을 지냈고, 아버지·숙부(곽규)·종숙(곽간)이 모두 文科 출신이다. 3년 한 번, 그것도 전국에서 33명을 뽑는 文科에 이렇게 많은 합격자를 낸 집안은 극히 드물었다.
「幼學(유학)」이란 딱지를 떼지 못한 인간 郭再祐로서는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을 수밖에 없었다. 그의 윗동서 김우옹도 文科에 급제해 선망의 대상이었던 淸要職(청요직)을 두루 거치고 있었다. 그는 과거 응시를 아예 포기했다.
하지만 그것이 나라를 위해서는 참으로 다행했다. 만약 불같은 성격의 그가 文科에 급제해 벼슬길에 들어섰다면 정적의 타깃이 되어 정신적·육체적 데미지를 입고 일찌감치 꺾여 버렸을 가능성이 오히려 컸다.

「하늘이 내린 붉은 옷의 장군」이라 자부


임진왜란이 발발한 선조 25년(1592)은 郭再祐의 나이 41세가 되던 해였다. 4월13일, 부산포에 상륙한 왜군이 부산진과 동래성을 함락시키자 여러 고을의 수령들이 뿔뿔이 흩어져 달아났다.
그런데도 郭再祐는 남달랐다. 왜란 발발 9일째인 4월22일, 그는 왜적을 토멸하여 나라에 보답하겠다고 家廟(가묘)에 아뢰고, 집안의 全재산을 다 내어 壯士들을 모집했다. 理財에 밝았던 그는 낚시질을 하면서도 상당한 재산을 모아두고 있었다. 그가 난 세간리는 대지주 부호였던 外家의 소재지이기도 했다.
郭再祐는 그의 先親이 明나라에 사신으로 갔을 때 황제(神宗)로부터 선물받은 붉은 비단으로 紅衣의 戰袍(전포)를 지어 입고, 이불을 찢어 만든 깃발에 「天降紅衣將軍(천강홍의장군)」이라는 칭호를 써서 그의 자부심을 높이 내걸었다.

郭再祐의 필사적인 병력충원

그는 모병에 온 정성을 기울였다. 「鶴峰全集(학봉전집)」에는 郭再祐가 『자기 옷을 벗어 戰士를 입히고, 처자의 옷을 벗겨 전사의 처자에게 입혔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가동(머슴 및 소작인으로 보임) 10여 명으로 일어난 郭再祐의 병력 증원은 결코 쉽지 않은 일이었다. 「忘憂集(망우집)」의 기록을 보면 당시의 어려운 정황을 엿볼 수 있다.
<창의 초에 (郭再祐의) 매형 許彦深(허언심)은 수백 명의 가동이 있었다. 선생(郭再祐)이 말하되, 이들을 얻으면 軍伍(군오)를 가히 이룰 수 있을 것이라 하고, 가서 청하였으나 허언심은 이에 응하지 아니하였다. 선생이 노하여 말하기를, 『국난이 급하지 않다고 함은 臣民의 도리가 아니오』라 하고 力士에 명하여 언심의 외아들을 끌어내어 목을 베라고 하였다. 언심이 깜짝 놀라 잘못했다고 빌어서 그 가동들을 데리고 돌아갔다.>
郭再祐는 부인 商山(상산)김씨와 사별 후 許氏 부인을 재취로 맞았다. 매형 허언심은 가동 수백 명을 부릴 만한 부호였다. 郭再祐는 매형을 병참 담당 참모인 典軍餉(전군향)으로 삼았다. 어떻든 郭再祐의 병력 충원은 필사적이었다.
家? 10여 명으로 출발한 의병수가 늘어나 곧 수백 명에 이르게 되었다. 4월 하순, 郭再祐 부대는 거름강을 타고 올라오는 적선 30여 척을 강가에서 기습해 왜군의 경상우도 진출을 봉쇄했다. 게릴라 전술로 연전연승하는 郭再祐 의병부대에 장사들이 몰려들어 병력수가 2000명에 이르게 된다.
병력수가 2000명이 되면 무기와 군량 조달이 큰 문제였다. 郭再祐는 獨斷(독단)으로 낙동강변 新反(신반: 지금의 의령군 富林面 소재)의 官庫(관고)에서 곡식을 끌어 내고, 거름강의 稅米船(세미선)에 실려 있는 곡식도 운반해 와 휘하의 의병들을 먹였다. 이런 郭再祐에 대해 「미쳤다」거나 「도적질을 한다」고 비난하는 사람들도 있었다.

5월4일, 招諭使(초유사) 金誠一(김성일)이 함양군에 이르러 郭再祐의 의병 봉기에 감명을 받고, 편지를 보내 만날 것을 청했다. 그러나 郭再祐는 초유사 김성일이 敵前도주를 일삼은 경상감사 김수와 「한 곳에 모여 의논하고 있다」는 말을 듣고 면담을 거절하면서 다음 내용의 답장을 보냈다.
<…순찰사(감사)라는 사람은 곧 전일에 성을 쌓는 일로써 백성들의 원망을 산 김수입니다. 김수는 곧 우리나라의 죄인이므로, 사람마다 그를 베어 죽일 수가 있는데, 합하(김성일)께서는 어찌 김수의 죄를 세상에 밝히고 임금께 알리고, 목을 베어 높이 매단 다음에 의병을 일으키지 않고, 도리어 김수와 더불어 함께 계시는 것입니까.>
그 직후, 순찰사 김성일이 진주로 가기 위해 단성현(지금의 산청군 단성면)에 이르렀을 때 郭再祐는 戰服(전복) 차림으로 달려가 마중하고, 진주까지 동행했다. 김성일은 郭再祐와 더불어 얘기해 보고 마침내 死友(사우: 죽을 때까지 교분을 서로 저버리지 않는 친구)가 될 것을 허락했다.

의병장 郭再祐와 경상감사 김수의 敵前 분열

의병대장 郭再祐와 경상도 순찰사 김수의 관계가 더욱 악화된 것은 김수가 경기도 용인 광교산에서 크게 패하고 돌아온 뒤부터였다. 6월 중순경 김수는 그의 임시 감영인 山陰(산음: 지금의 산청군)에 도착했지만, 휘하에 병졸이 없었다. 그는 의병들로 휘하 병력을 충원하려고 했다.
文科 출신의 김수(1547~1615)는 일찍이 선조의 명으로 「十九史略(십구사략)」의 注(주)를 붙인 엘리트 관료였다. 그는 직제학·승지·평안도 관찰사·경상도 관찰사·대사헌·병조판서·형조판서를 역임했다. 조정에서는 왜란을 대비해 성지와 병력 보강에 능력을 발휘할 人材로 그를 지목해 재차 경상도 관찰사로 내려보냈다.
그는 무리한 축성작업 등으로 인심을 크게 잃었다. 왜란 발발 후에는 도망다니느라고 그가 보강했던 성지는 아무런 기능을 발휘하지 못했다. 郭再祐의 김수 성토는 당시 경상우도 선비들의 公論(공론)을 좀 과격하게 표현한 것이었다. 그렇다 하더라도 郭再祐가 8세 年上의 조정 名官의 목을 베겠다고 덤빈 것은 대단히 파격적이었다.
郭再祐가 의병들에게 김수를 만나기만 하면 목을 치라는 격문을 보내자 김수는 통분한 끝에 한때 자결을 기도했지만, 참모들의 만류로 미수에 그쳤다. 반격에 나선 김수는 官穀(관곡)을 털어 의병들을 먹인 郭再祐를 「陸賊(육적)」으로 모는 通文(통문)을 돌리는가 하면 義州로 피란 가 있던 宣祖에게 郭再祐가 「역적」이라고 상소했다. 이에 郭再祐도 義州 行在所(행재소: 임금의 임시 거처)에 自明疏(자명소)를 올려 그의 억울함을 호소했다.

郭再祐와 김수의 敵前 분열은 초유사 金誠一의 중재로 일단 수습되었다. 金誠一은 임진왜란 직전에 副使(부사)의 직책으로 正使 黃允吉(황윤길)과 함께 일본에 사신으로 가서 히데요시를 만나고 귀국해 『히데요시는 쥐새끼같이 생겨 감히 우리나라를 침략할 만한 인물이 못된다』고 보고한 바로 그 장본인이다. 그때 정사 황윤길과 서장관 許筬(허성)은 『히데요시가 반드시 侵寇(침구)할 것』이라고 보고했다.
사실 일본의 조선침략 의도는 이미 공개된 비밀이었다. 對馬島主 소오 요시토시(宗義智)도 임진왜란 직전 세 차례에 걸쳐 使行하면서 조선 조정에 일본의 침략 준비 상황과 히데요시의 야심을 귀띔해 주었다. 對馬島는 조선과 평화를 유지해야 무역도 하고 세견미도 얻어 번영할 수 있는 섬이었다.
따라서 金誠一의 상황판단 미스에만 임진왜란 때 初戰 패전의 책임을 돌리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 조선 조정에서도 이미 일본의 침략 의도를 눈치채고 나름대로 준비를 해왔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强骨(강골)의 선비 스타일인 김성일이 히데요시를 얕보고 使臣으로서 정세 판단을 그르친 책임은 결코 가볍지 않다.
전운이 급박해진 임란 직전에 김성일은 경상우병사로 부임했다. 왜란이 일어나자 대로한 宣祖는 김성일을 처벌하려고 서울로 붙들어 올리다가 柳成龍 등의 변호를 듣고 招諭使(초유사)로 삼아 前線에 되돌려보냈다. 김성일로서는 죽을 자리를 찾았던 셈이다. 임란 초기에 郭再祐·정인홍·김면 등 고집센 의병장들을 지도한 그의 공적은 과거의 과오를 덮을 만했다.

鼎巖津과 世干里 두 곳에 진영 설치

舊정암교를 건너 정암루에 올랐다. 거름강의 맑은 강물이 동쪽으로 흐르고, 이름 모를 물새들이 모래톱에 내려앉아 먹이를 찾고 있다. 郭再祐의 최대 전승지가 바로 이곳 정암진이다. 郭再祐는 휘하 부대를 둘로 나눠 정암진과 世干里(세간리)에 주둔시켰다.
世干里는 郭再祐의 生家(생가)가 있는 마을이다. 舊정암교를 도로 건너 거름강 북안에 세워 둔 승용차를 타고 67번 국도로 올라가 新정암교를 건너 들머리에 있는 「宜寧關門」을 통과했다.
의령관문에서 3km쯤 북진한 뒤 東洞네거리에서 길을 바꿔 20번 국도에 올랐다. 이 20번 국도를 따라 17km를 달리면 '郭再祐 생가'라는 안내판이 붙어 있다. 중도에 진등재 고갯길을 넘어가다 보면 남강과 낙동강의 합수지점이 그림처럼 펼쳐진다. 早春(조춘)의 산기슭에는 벌써 개나리와 매화가 開花(개화)해 있었다.
진등재를 넘으면 湖巖 李秉喆(호암 이병철)의 生家 마을인 정곡면 중교리다. 여기서 6km만 더 가면 유곡면 世干里다. 지정면을 지나면 유곡면, 세간천 위로 세간교(길이 140m)가 걸려 있다. 세간교를 건너 世干里 마을에 도착했다. 마을 들머리에 수령 550여 년의 느티나무 한 그루가 주위를 압도하고 있다. 의병대장 郭再祐가 이 느티나무에 매달아 놓은 북을 치면서 의병을 모으고 조련했다고 한다. 그래서 懸鼓樹(현고수: 북을 걸어 둔 나무)라고 불린다. 마을 안쪽에 郭再祐 장군의 生家가 복원되어 있다.

郭再祐와 휘하 17장령의 위패를 모신 忠翼祠

世干里 마을을 뒤로 하고 읍내 의령천변에 있는 郭再祐 장군의 사당 忠翼祠(충익사)를 향해 오던 길(20번 국도)을 되짚어 달렸다. 남강과 낙동강의 합수지점인 돈지마을 등의 낙동강변 답사는 다음날 오전 일정으로 돌렸다. 충익사 직원 姜信永(강신영)씨와의 오후 4시 약속시간에 맞추기 위해서였다.
읍내로 들어와 의령교를 건너면 바로 「의병탑」이 치솟아 있다. 1972년 의령군민의 성금으로 건립되었다. 양쪽에 기둥을 세워 놓고 그 사이에 둥근 고리 18개를 층층이 쌓은 모습이다. 두 기둥은 戰意衝天(전의충천)하는 의병의 횃불을, 백색고리 18개는 郭再祐 장군과 17명의 휘하 지휘관 및 참모를 상징한다고 한다. 충익사 관리실에 들러 강신영 선생을 만나 여러 자료들을 얻었다.
충익사의 충의문에 들어서면 화려한 다포식팔작 목조건물이 있다. 어느 한 곳에도 쇠못을 치지 않은 우리나라 전통 건축양식이다. 이 건물이 郭再祐 장군과 휘하 17장령의 贈職名(증직명)과 관향이 적힌 名板(명판)을 보관하는 있는 忠義閣(충의각)이다. 증직명을 보면 병조판서(郭再祐), 형조판서(朱蒙龍), 병조참판(尹鐸·沈紀一), 이조참의(朴思濟·安起宗), 병조참의(李雲長·裵孟伸), 좌승지(沈大承·姜彦龍·曺士男), 좌참찬(權鸞) 등 거의 모두가 고위직이다.
다시 발걸음을 옮겨 홍의문에 들어서면 郭再祐 장군과 휘하 장령들의 위패를 모신 忠翼祠堂(충익사당)이 있다. 매년 4월22일, 郭再祐 장군의 起義기념일에는 이곳에서 추모제향을 올린다.
忠翼祠의 서쪽 끝에 기념관이 있다. 이곳에는 郭再祐 장군의 장검·갓끈·말안장·돌벼루 등 유물과, 기마도·의병창의도·정암진승전도 등이 전시되어 있다. 기마도와 전투도는 서울大 미대교수 丁昌燮·權勳七 화백의 그림이다.

「왜군 兵站線」 차단의 현장

다음날 오전 8시, 남강과 낙동강의 합수지점인 돈지를 답사하기 위해 하룻밤을 묵은 의령읍내 모텔을 출발했다. 20번 국도를 타고 유곡면 世干里까지 달린 다음 1041번 지방도로를 10여km를 달린 다음 낙동강변을 따라 나있는 좁은 길을 거슬러 올라갔다. 기강서원을 지나니 비각 두 채가 낙동강을 바라보며 나란히 서 있다. 보덕각 안에는 郭再祐 장군의 전승을 기리는 비석이, 쌍절각 안에는 손인갑 형제의 공적비가 있다.
孫仁甲(?~1592)은 합천에서 거병한 鄭仁弘·김면·朴惺·곽준 등과 의병을 일으켜 무계의 왜군을 격파하는 등 전공을 세웠지만, 馬津에서 싸우다가 전사한 의병장이다. 死後에 郭再祐처럼 병조판서로 추증되었다.
필자는 부림면 赤布까지 북상하려고 성산리 마을에 이르러 자전거를 타고 가는 아주머니에게 길을 물었다.
『다부(도로) 돌아가시이소, 산에 막혀 길이 없어예』
필자가 굳이 의령의 동쪽 끝으로 흐르는 낙동강변을 헤맨 것은 이곳이 郭再祐 부대의 주요 작전지역이었기 때문이다. 郭再祐가 의령을 비롯해 인근 고을을 지키자 이곳에 침입했던 왜군은 낙동강을 건너 경상좌도로 도주했다. 왜군은 낙동강 병참수로의 요충인 좌도의 현풍·창녕·영산에 진지를 설치하고 있었다.
郭再祐는 휘하의 봉사 權鸞(권란)·前 목사 오운 등이 모집한 의병을 거느리고 좌도의 영산·창녕·현풍을 수복한 뒤 이들 요충과 강상의 방비를 담당했다. 필자는 1041번 지방도로를 되돌아나와 世干里에서 20번 국도를 북진해 의령군 부림면을 거쳐 합천군 赤中面 赤布橋에 이르러 낙동강 건너편 창녕군과 마주 섰다. 視界(시계)는 불량했지만, 봄비에 젖어 몽롱한 낙동강은 用武(용무)의 땅이 분명했다.
적포교를 건너 24번 국도를 따라 30여 리만 더 동진하면 창녕읍 火旺山城(화왕산성)이다. 얘기가 좀 앞질러 가지만, 화왕산성은 정유재란(1597) 때 경상우방어사 郭再祐가 왜군의 맹장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를 물리친 현장이다.
정유재란 발발 당시 郭再祐는 경상右방어사로서 현풍의 석문산성을 쌓고 있던 중 왜군이 재침해 오자 7월에 화왕산성에 들어가 守城(수성)태세를 강화했다. 왜군의 선봉대장 가토는 하루 낮밤을 郭再祐와 대치했지만 승산이 없음을 감지하고 스스로 물러났다. 이후 가토의 선봉부대는 함양의 황석산성을 함락시키고 전라도로 진입했다.
적포교를 뒤로 하고 필자는 다시 의령땅 부림면에 들어왔다. 20번 국도변 가까이에 있는 白山 安熙濟(백산 안희제·1885~1943)의 生家(부림면 입산리)가 있는데,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백산은 1907년 창남학교, 1908년 의신학교, 1909년에 東萊 구명학교와 대구 교남학교를 설립하고 新학문 보급에 힘썼다.
27세 때 만주에서 대동청년단을 조직하고, 소련으로 망명하여 「독립순보」를 간행했다. 30세에 부산에서 백산상회를 설립해 독립자금을 마련했으며, 1926년 「시대일보」를 인수했다. 1942년 조선어학회 사건으로 구금되었고, 1943년 만주 대종교단 사건으로 피검되었다가 출옥 4시간 만에 별세했다.

낙동강과 남강의 合水지점에 위치한 「돈지」

백산 生家를 돌아보던 중 진주에 사는 친지 5명이 『오후 1시 의령군청 앞에 있는 소고기국밥집 「중동식당」에서 만나자』는 휴대전화 연락이 왔다. 친지 중 하나는 건설회사 대표로 남강과 낙동강 합류지점 일대에 토목공사 현장이 있는 관계로 이곳 지리에 밝아 답사 중 휴대전화로 길 안내를 해준 사람이다.
백산 生家에서 19km를 달려 읍내 중동식당으로 직행해 친지들과 만나 소문난 국밥을 먹었다. 그때까지 필자는 돈지의 정확한 위치를 파악하지 못했다. 우리 일행은 돈지를 향해 출발했다. 정곡면 중교리 湖巖 李秉喆(호암 이병철: 1910~1987) 生家 앞 삼거리에서 1011번 지방도로로 접어들었다. 이어 산자락을 몇 번 돌아가니 도로 옆으로 남강이 흐른다. 좁은 길을 얼마 더 가니 낙동강과 남강이 만나는 돈지다. 오전에 필자 혼자 찾아왔지만, 멋모르고 그냥 지나쳤던 곳이다.
둑 아래 저지대엔 골재 채취장이 펼쳐져 있고, 그 바로 앞 강변에 단독주택 한 채가 있는데, 인기척은 없었다. 임진왜란 전에 郭再祐가 이 돈지 언저리 어딘가에 江舍를 지어 놓고 낚시로 소일했다. 그렇다면 郭再祐는 이곳 지형과 강의 흐름을 꿰뚫고 있었을 것이다. 그것이 그의 常勝 요인 중 하나가 되었을 것 같다.
돈지에서 되돌아나와 삼성그룹의 창업자 湖巖 李秉喆(호암 이병철)의 生家에 잠시 들렀다. 그가 일으킨 삼성그룹은 한국의 수출액의 약20%를 맡고 있다. 의령에 와서 들은 얘기지만, 湖巖은 6·25 전쟁 후 밥 먹기도 어려운 시절에 고향의 産母 모두에게 미역 한 축과 쌀 한 말씩을 선물했다고 한다.
또한 湖巖이 1950년대 초 부산에 한국 최초의 근대적 공장인 제일제당을 설립한 후 고향 젊은이들이 희망하면 그대로 취업시켰다고 한다. 최근에는 『호암의 生家에 가서 절을 하면 부자가 된다』는 소문이 나돌아 내방객이 끊이지 않는다.

船津倭城에 가면 생각나는 사람

우리 일행은 의령을 벗어나 남해고속도를 타고 西進해 사천IC를 빠져나와 사천灣 北岸에 임한 船津倭城(선진왜성)을 향해 달렸다. 선진왜성 아래 사천만이라면 1592년 5월29일 이순신 함대의 돌격선인 거북선이 최초로 출동해 전투했던 해역이며, 이 전투에서 이순신은 어깨에 관통상을 입으면서도 왜선 26척을 격침시키는 대승을 거두었다.
우리 일행이 해가 지고 난 후임에도 이곳에 온 것은 선진왜성을 다시 둘러보려 했던 것이 아니라 이곳 횟집에서 저녁을 먹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반주로 소주 한잔을 들고 보니 이 海戰에서 적탄을 맞은 이순신이 생각났다. 피가 흘러 갑옷 아래로 흐르는 상황에서도 그는 해가 저물 때까지 大將船에서 꼿꼿이 선 채 『중상에 이르지 않았다』(「亂中日記」의 표현)며 전투를 지휘했다.
이후 이순신은 이때의 창상이 잘 낫지 않아 갑옷 속의 환부에서 고름이 흘러내려 몹시 고생했다. 자리를 함께한 의과대학 교수는 창상에 의한 금속毒(독)은 나폴레옹 전쟁 당시(19세기 초) 암브로와즈 파레(Ambroise Paret)라는 프랑스 군의관이 페놀(석탄산)을 발견하기 전에는 근본적인 解毒(해독)이 불가능했다고 말했다.
선진왜성은 이순신과 악연이 깊은 곳이다. 정유재란 당시 이 성에는 사쓰마藩(지금의 가고시마)의 藩主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가 주둔했다. 明軍의 중로군 대장 董一元(동일원)의 부대는 선진왜성으로 진격했다가 시마즈 요시히로의 반격을 받아 전사자 1만 명의 시신을 남긴 채 삼가(지금의 협천군 삼가면)까지 도주했다.
바로 이 시마즈가 임진왜란 최후의 전투인 노량해전(1598년 11월19일)에서 이순신과 맞붙었던 왜군의 지휘관이었다. 시마즈는 왜선 500여 척을 이끌고 朝·明(조·명) 함대에 의해 퇴로를 봉쇄당한 고니시 유키나가를 구원하기 위해 순천 왜교성으로 향하자 朝·明 연합함대(380여 척)는 하동군 금남면과 남해도 사이의 노량해협으로 나아가 시마즈 함대를 요격했다.
이 전투에서 시마즈는 대패해 겨우 50여 척의 잔존 함선을 이끌고 부산 방면으로 도주했다. 이순신은 남해도의 막다른 골목 관음포로 밀려들어 간 왜선들을 섬멸하기 위해 근접전투를 벌이다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고니시 유키나가는 이순신과 시마즈가 격전을 벌이는 사이에 보유 함선을 이끌고 남해도를 우회하여 거제도로 도주했다.
임진왜란에서 왜군의 敗因(패인) 중 첫째가 병참의 실패였음은 앞에서 지적했다. 7년 전쟁에서 이순신은 거제도와 고성 사이의 해협 견내량 以西의 제해권을 확보했다.
임진왜란 개전 2개월 만에 왜군의 선봉 고니시 유키나가의 제1군은 평양성을 함락시켰지만, 그 이상의 북진은 무기·병량을 추진하는 해상수송로가 이순신 함대에 막혀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해로가 막힌 왜군은 낙동강 수로를 병참로로 삼으려 했지만, 이것도 郭再祐 부대의 게릴라戰에 의해 번번이 봉쇄당했다. 바로 이런 점에서 이순신과 郭再祐의 전공은 탁월했다.

제1차 晉州城 전투 현장

사천읍내에 있는 친지의 집에서 하룻밤을 묵고 일요일인 3월4일 오전 8시50분, 북문을 통해 진주성에 들어갔다. 오전 9시 전에는 입장료를 받지 않는다. 부슬비가 간간이 내리는 날인데도 아침운동을 하러 나온 진주시민들이 드문드문 눈에 띄었다.
진주성 싸움은 두 차례에 걸쳐 전개되어 조선군과 일본군은 각각 1승1패를 기록했다. 제1차 진주성 전투(1592년 10월5~10일)는 한산도 해전, 행주산성 전투와 더불어 임진왜란 중 3대첩 하나로 손꼽힌다. 북문에 들어서면 당시의 守城將 金時敏(김시민)의 像이 서 있다.
10월5일 일본군은 전라도로 진격하기 위해 3만 병을 동원했다. 일본군의 선봉부대는 진주성 동편 말티고개(馬峴)에 이르러 진주성의 형세를 살폈다. 진주목사 김시민은 여자들에게까지 남자옷을 입혀 군세를 왕성하게 보이게 했다. 왜군은 진주성에서 10리쯤 떨어진 임연대 등지에 진영을 쳤다.
10월6일, 왜군은 본격적인 공세를 걸었다. 대(竹)로 만든 飛樓(비루)를 끌고 성벽에 바짝 접근시킨 후 비루 위의 射手(사수)들이 성내를 향해 조총을 난사했다. 성내에서는 이에 대항해 화약을 장치한 大岐箭(대기전)을 쏘아 비루를 파괴했다.
왜군은 또 판자를 벌려 세우고 빈 섶에 흙을 담아 언덕을 만들고 성을 내려다보며 조총을 쏘았으며, 소나무 섶을 높게 쌓아 성벽을 넘어오려 했다. 성내에서는 화약을 싸서 성 밖으로 던져 소나무 섶을 불태웠으며,진천뢰·질려포 등으로 적의 攻城(공성)기구를 타격했다.
일본군은 10월10일 최후의 결전을 기약하며 성벽을 기어오르자 수성군은 끓는 물과 큰 돌을 낙하시키고 화살을 아끼기 위해 기왓장까지 던졌다. 전사자 1만 명을 낸 일본군은 攻城을 포기하고 물러갔다. 수성전을 지휘한 진주목사 김시민은 적탄을 맞아 중상을 입고, 전투가 끝난 지 며칠 후 사망했다. 忠武公(충무공)의 시호를 받은 김시민은 후일 영의정으로 추증되었다.
4000명의 병력으로 3만여 명의 일본군을 격퇴한 진주목사 김시민과 휘하 軍民들의 선방은 역사에 빛나지만, 성 밖에서 응원한 의병 부대의 공적도 결코 가볍지 않았다. 이때 의병장 郭再祐는 정암진을 굳게 지키고 있다가 진주성의 급보를 전해 듣자 선봉장 沈大承에 병력 200명을 주어 진주로 급파했다.
심대승 부대는 밤중에 진주향교 뒤 비봉산에 올라가 郭再祐 계책대로 나팔을 불고 병사마다 다섯 가지가 달린 횃불을 들고 성내 병사와 서로 호응하면서 『내일이면 홍의장군이 전라도 군사와 함께 대군을 거느리고 진주에 도착할 것』이라고 외쳤다.
마침 다음날, 전라도 의병대장 崔慶會가 병력 1000여 명을 거느리고 단성현(지금의 산청군 단성면)을 출발해 진주 외곽에 도착했다. 왜군은 홍의장군이 정말 출전한 것으로 알고 동요하기 시작했고, 성내 군민의 사기는 크게 진작되었다.
「김시민 장군상」 동쪽 낮은 언덕배기에 「진주성 壬辰大捷(임진대첩) 癸巳殉義壇(계사순의단)」이 차려져 있다. 여기서 북쪽을 보면 郭再祐 휘하 부대가 횃불을 들고 기만전술을 구사해 적을 위협한 비봉산이 정면으로 다가온다. 바로 남쪽엔 시인묵객들의 순례지 矗石樓(촉석루)가 서 있고 그 옆에는 義妓祀(의기사)가 붙어 있다. 촉석루에 오르기만 하면 제2차 진주성 전투가 생각나 悲愴(비창)해진다.

제2차 晉州城 전투의 비극

임진왜란이 일어난 다음 해인 계사년(1593) 6월, 일본군은 전년 10월 진주성 전투의 패배를 설욕하고 진행 중이던 明·日 간의 휴전회담에서 유리한 고지를 차지하기 위해 10만 대군을 진주에 집결시켰다. 더욱이 규슈의 나고야(名護屋)城에서 침략군을 독려하던 히데요시는 침략군 총지휘관 우키다 히데이에(宇喜多秀家)를 비롯해 가토 기요마사(加藤淸正), 고니시 유키나가(小西行長), 구로다 나가마사(黑田長政) 등 1급 왜장들 모두에게 출전을 다그쳤다.
진주성 전투 직전, 전라도 순찰사 권율은 행주산성대첩(1593년 2월)으로 인해 자신감을 가진 나머지 의령에서 남강을 건너 함안으로 진격해 진주성을 향해 이동하고 있는 일본군을 迎擊(영격)하려고 했다. 이때 郭再祐는 다음과 같은 이유로 반대했다.
『적의 세력은 지금 한창 강성한데, 아군은 오합지졸로서 전투를 감당할 만한 사람이 적을 뿐만 아니라 앞길에는 군량도 없으니 경솔하게 전진할 수 없다.』
그럼에도 권율은 남강을 건너 진군해 함안에 이르렀으나 텅 빈 성에 군량마저 없어서 굶은 병사들은 전의를 상실하고 흩어졌다. 적의 대군을 본 권율은 어쩔 수 없이 남강을 건너 정암진으로 되돌아왔다.
도원수 김명원, 전라도 순찰사 권율, 이빈 등 조선군 지휘관들은 수륙으로 몰려오는 적의 기세에 눌려 전라도로 물러났다. 明軍도 일본군과의 강화회담을 이유로 전투를 기피했다. 강화회담에서 일본 측을 대표하던 고니시는 明軍 측에 일본군의 결전 의지의 배경을 가만히 흘리면서 진주성을 양도하도록 귀띔했다.
그러나 전라도 의병장을 대표하던 倡義使 金天鎰(김천일)이 앞장서 진주성에 들어갔고, 경상우병사 崔慶會(최경회: 羅州 의병장 출신), 충청병사 黃進, 판관 成守璟(성수경), 의병복수장 高從厚(고종후: 금산전투에서 전사한 전라도 의병장 高敬命의 아들) 등이 뒤따라 入城했다.
明軍을 接應(접응)하기 위해 星州에 갔다가 뒤늦게 돌아온 진주목사 徐禮元(서예원)은 병법을 모른다 하여 김천일이 지휘권을 장악했지만, 명령계통이 확립되지 않았다. 전라도 의병을 주력으로 한 병력은 수천 명에 불과했고, 일반 백성이 6만여 명이 성내로 들어와 군기가 문란해졌다.
6월21일, 적은 선봉부대 약 5만 명으로 전주성을 포위 공격했다. 치열한 격전 끝에 의병장 金俊民·장윤·황진 등이 전사했다. 특히 용맹했던 충청병사 황진의 전사는 성내의 사기에 악영향을 주었다.
전투 8일째인 6월28일, 일본군은 龜甲車(귀갑차)를 앞세워 성벽을 깨고 무너진 성벽을 넘어 성내로 돌격해 왔다. 김천일·고종후·梁山鑄(양산주)·최경회 등 지휘부 수십 명은 남강에 몸을 던져 자결하고, 李宗仁(이종인·김해부사)·姜熙悅(강희열:의병장)·伊潛(이잠) 등은 적진에 최후돌격을 감행해 장렬한 최후를 마쳤다.

李舜臣·金德齡과 함께 거제도 長門浦 전투에 출전

제2차 진주성 싸움에 郭再祐는 참전하지 않았다. 전투 직전에 경상좌도 감사 韓孝純(한효순)은 郭再祐에게 진주성에 들어가 지킬 것을 명하자 郭再祐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오직 權謀(권모)가 있는 자는 用兵을 잘할 수 있고, 지혜가 있는 자는 적을 잘 헤아려 행동을 하는 것입니다. 지금 적병은 매우 왕성하여 천하무적이라 당할 수 없을 터인데, 3리의 孤城(고성)을 어찌하여 지킬 수 있단 말이오. 나는 차라리 밖에서 지원을 할지언정 성 안으로 들어갈 수는 없소.』
이 말을 들은 경상우도 감사 김륵은 명령에 불복종하는 郭再祐에게 군율로 다스리겠다고 위협했다. 그럼에도 郭再祐는 완강히 거부했다.
『이 몸이 죽는 것이야 아까울 것이 없으나 백전백승의 군졸을 어찌 차마 死地로 데리고 가겠소.』
郭再祐는 제2차 진주성 싸움을 앞두고 空城計(공성계)가 오히려 유리하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그때 만약 郭再祐의 계책에 따라 진주성을 비워 두었다면, 총력을 기울여 진주성을 공략하라고 다그쳤던 히데요시에게 상당한 심리적 타격을 주었을 것이다. 강한 적을 피해 전투력을 온존하는 「36計」도 당당한 병법이다.
郭再祐는 적의 약한 곳을 때리는 게릴라 전투의 명수이지 野戰의 지휘관이 아니었다. 더욱이 그는 남의 節制(절제)를 받지 않으려 했다. 이런 그도 조정의 命으로 도원수 권율, 통제사 이순신, 전라도 의병장 金德齡(김덕령)과 함께 水陸연합작전에 참전했다. 이것이 1595년 8월의 거제도 長門浦(장문포: 지금의 장목면) 전투였다. 좌의정 윤두수가 충청·전라·경상 3도 체찰사를 겸하자 의병장 金德齡의 절륜한 무용을 믿고 강행했던 작전이었다.
이때 왜군은 부산포를 방어하기 위해 거제도 북단과 웅포(진해)·김해 등 해안지대에 성을 쌓고 웅거해 있었다. 장문포의 왜성은 對馬島-부산포 간의 병참선을 유지하려는 왜수군의 최전선기지였다.
김덕령이 맨 먼저 의병부대를 이끌고 장문포에 敵前 상륙하여 왜성으로 진격했다. 왜군은 성문을 굳게 닫고 성 위에서 화포만 난사했다. 왜군이 쏜 포탄이 郭再祐가 탄 배를 뚫고 바다에 떨어지기도 했다. 두 차례에 걸친 장문포 왜성 공격은 아무런 戰果(전과)도 올리지 못하고 끝났다. 辛錫謙(신석겸)이 지은 「宣廟中興誌(선묘중흥지)」에는 다음과 같이 기록되어 있다.
<이로 말미암아 김덕령은 위세와 인망에 손상만 끼치고, 기회를 타서 모함하려는 사람만 더 많아졌다.>
1596년, 김덕령은 李夢學(이몽학)의 반란에 연루되어 원통한 죽음을 당했다. 그해 7월, 충청도 內浦지방에서 무능한 조선왕조에 반기를 든 이몽학은 세력과시를 위해 『김덕령이 거느린 군대가 조정을 뒤엎으러 서울로 직행한다』는 거짓 선전을 했다.
억울한 죄명을 뒤집어쓴 김덕령이 신문과정에서 고문을 이기지 못하고 죽은 것은 郭再祐에게는 더욱 충격적인 일이었다. 이몽학의 잔당은 고문을 받고 「郭再祐도 同謀者(동모자)」라고 불었다. 혐의는 사실이 아닌 것으로 밝혀지긴 했지만, 그는 불안할 수밖에 없었다.

郭再祐의 「My Way」

郭再祐는 미련 없이 벼슬(진주목사 겸 조방장)을 버리고 귀향했다.
사실, 진주성 전투 이후 4년간은 싸움다운 싸움도 없었다. 연이은 흉작과 전염병 창궐로 피아군 모두 전투를 벌일 군량과 병력이 부족했다. 왜군은 남해안 일대에 왜성을 쌓고 방어태세로 들어갔다. 明의 원군도 남의 나라 땅에서 피를 흘리고 싶지 않아 공세를 걸지 않고 만주로 철수했다.
郭再祐는 신선이 되겠다며 현풍의 비슬산에 들어가 송화가루와 솔잎만 먹고, 세속의 일을 잊으려 했다. 그러던 그도 정유재란이 일어나자 방어사가 되어 창녕의 화왕산성을 굳게 지켰음은 앞에서 썼다.
왜란이 끝난 후에도 郭再祐는 경상좌병사·경상우병사·3도수군통제사·오위도총부 부총관·한성좌윤·함경감사 등에 임명되었으나 부임하지 않거나 어쩔 수 없어 벼슬을 받더라도 時弊(시폐)를 논하는 등의 소를 올리고 곧 사임했다.
1608년 光海君(광해군) 즉위 후에는 南冥의 제자들이 主流를 이루는 北人이 집권파였다. 그와 同門이며 합천에서 의병장으로 활약했던 鄭仁弘은 北人의 영수가 되고 벼슬은 영의정에 올랐다. 그럼에도 郭再祐는 北人이 주도한 臨海君 처단의 잘못을 거론하고, 영창대군 伸寃疏(신원소)를 올리는 등 「나의 길」을 걸었다.
郭再祐는 1617년 4월10일 그가 낚시하던 돈지의 江舍에서 별세, 현풍현 구지산 선영에 묻혔다. 정인홍은 1623년 仁祖反正(인조반정) 때 쿠데타 주체세력(西人)에게 붙잡혀 참수되었다. 임란 극복의 名臣으로 후일 영의정을 지낸 李德馨(이덕형)은 郭再祐의 사람됨을 다음과 같이 평가했다.
<인물이 소박하고 꾸밈이 없으며 나무다리 같아서 의리와 정의를 바로 드러내고, 굳게 지니고 흔들리지 않아서 함께 일하는 사람이 간혹 싫어하기도 했다. 慶尙右道가 보전된 것은 모두 그의 힘이라 그를 섬기는 右道 사람이 많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