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鄭淳台의 6·25 南侵전쟁이야기(3)/ ‘오우삼 보고서’에 담긴 北의 기만적 요구

鄭淳台   |   2013-06-24 | hit 17449

의정부 방어의 요지 祝石嶺을 버리고 도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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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래도 동두천 정면의 국군 제1연대는 奮戰(분전)했다. 그들은 敵 전차가 돌진해 오면 山上(산상)에 올라 후속의 敵 보병부대 및 보급부대를 사격에 의해 저지, 敵 전차가 그들의 후방으로 돌진하는 것을 막았다. 전차만으로 지역을 점령할 수 없고, 공격과 지역 확보에도 보병의 助力(조력)이 필요했던 것이다.

그러나 포천 정면의 제9연대는 달랐다. 장병들은 처음 보는 敵 전차에 경악했다. 미군으로부터 제공받은 2.36인치 로켓砲(포)로는 상대가 되지 않는 것이 알려지자, 패닉을 일으켜 산속으로 숨어버렸다. 그들은 멀리 退溪院(퇴계원, 現 남양주군)까지 도주했다. 전방 부대의 패닉은 후속 부대에도 전염되고, 또 새로 투입되어 오는 부대에도 퍼져나갔다. 이리하여 25일 오전 11시 포천이 함락되었다.

육군본부는 25일 오전에 수도경비사령부의 제3연대(연대장 李尙根 중령)를 제7사단에 급파했지만, 제3연대의 장병들도 탱크의 공격을 받은 후엔 전차 공포증에 빠졌다. 祝石嶺으로 후퇴하여 수비하라는 명령을 받았지만, 전차 저지가 곤란하다고 판단하고 제멋대로 廣州山脈(광주산맥) 속으로 물러나고 말았다. 이리하여 서울 방어의 요충 祝石嶺은 공백지대가 되었다. 그러나 육군본부도 제7사단도 이 사실을 미처 알지 못했다.&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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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러한 가운데 북상의 명령을 받은 후방의 3개 사단이 25일 밤부터 축차 투입되고 있었다. 워낙 급했던 나머지 부대의 建制(건제)를 무시하고 도착한 대로 병력을 전선에 보내진 것이었다.

또 蔡 총장은 대전에 주둔하고 있던 제2사단이 곧 도착할 것으로 판단, 다음 날인 6월26일 아침을 기해 반격을 시도했다. 즉, 蔡 총장은 제7사단장 유재흥 준장에게 동두천 정면에서의, 제2사단장 李亨根(이형근) 준장에게 포천 정면에서의 반격을 명했다. 그러나 이때 제2사단에서 집결을 끝낸 부대는 제5연대 소속의 2개 대대 뿐이었다.&nbsp&nbsp

26일 오전 3시, 李亨根 사단장은 이날 아침의 반격을 위해 축석령에 제5연대의 2개 대대를 파견했다. 축석령에 있었던 제3연대는 이 지역을 방기하고 이미 후퇴해버렸음은 앞에서 썼다. 그런 사실을 몰랐던 제5연대의 2개 대대는 축석령을 향해 고개를 오르고 있었다.

바로 이때 축석령을 無血(무혈)점령한 敵 제3사단은 전차를 선두로 축석령의 고개를 내려오고 있었다. 이리하여 고개를 올라가던 국군과 고개를 내려오던 敵 전차부대가 야간에 불의의 遭遇戰(조우전)을 벌였다. 제5연대는 곧 패닉 상태가 되어 산속으로 흩어졌다.

오전 7시경, 李亨根 제2사단장은 이어 도착한 예하 제16연대를 의정부 동쪽 5km인 金五里(금오리)에 배치했지만, 북한군에 의해 분쇄되어 26일 오후 1시경 북한군은 의정부를 점령했다. 여기서 서울까지는 10여km에 불과하다.

평소 서로 사이가 나빴던 채병덕(군번 2번) 총장과 이형근(군번 1번) 제2사단장은 병력의 축차 투입문제로 敵前(적전)에서도 티격태격했다. 蔡 총장은 이형근 제2사단장을 보직 해임했다. 축석령 방면에 미리 소규모의 수색대를 파견하여 敵情(적정)을 탐색하지도 않은 채 제5연대를 투입하는 등의 실책을 범했기 때문이었다.&nbsp&nbsp

의정부가 함락되기 이전인 26일 동틀 무렵, 동두천 정면에서는 제7사단이 敵 제4사단에 대해 반격을 개시해 오전 10시경 일시 동두천을 탈환하고, 38선을 향해 北進하려 했다. 그런데 오후 2시경, 제7사단에 의정부 함락의 悲報(비보)가 날아들었다. 퇴로가 차단당해서는 견디기 어려웠다. 유재흥 사단장은 눈물을 머금고 휘하 병력에게 北漢山(북한산)으로 들어가 후퇴하도록 명했다.


43번 국도에서 느낀 以逸待勞의 수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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북한의 對南 위협이 날로 거칠어지던 2013년 3월8일, 필자는 6·25 남침 당시 敵의 主공격로를 향해 북상해보았다. 그 하루 전날, 북한의 풋내기 지도자 김정은은 “敵陣(적진)을 벌초해 버리라”는 막말을 퍼부었다. 북한의 軍部나 선전·선동기관은 연일 핵무기로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 것이라 등 馬賊(마적) 수준의 저질 용어를 남발하고 있었다.

6·25 남침 당시 敵의 主공격로는 敵 제4사단이 남하한 연천-동두천-의정부 街道[3번 국도]와 敵 3사단이 내려온 포천-축석령-의정부 가도(43번 국도)이다. 의정부에서 합류한 敵 제3·제4사단과 제105전차 여단은 倉洞(창동)-吉音橋(길음교)-미아리고개를 넘어 서울을 점령했다.

이렇게 6·25 때 완벽하게 기습을 당한 트라우마 때문인지, 박근혜 정부 초대 국방부 장관으로 내정되었던 金秉寬(김병관) 후보자의 국회 청문회에서는 예비역이었던 金 후보자가 북한군의 연평도 포격 도발 때 골프 친 사실까지 거론되었다. 그로 인해 ‘자격 미달 아니냐’는 비판이 제기되었다. 물론 그는 다른 사유로 국방부 장관 후보를 자진 사퇴했지만, 휴일에 골프치는 것까지 문제 삼는 것은 참으로 웃기는 일이다. 앞으로도 敵은 국지도발을 곁들여 끊임없이 거친 말에 의한 심리적 도발까지 시도할 것이다. 그것이 바로 《孫子兵法(손자병법)》에서 말하는 以逸待勞(이일대로), 즉 자기는 편안하게 쉬면서 상대는 지치게 하는 병법이다.&nbsp

이런 敵과 대치하는 판에 軍이 평시로부터 戰時(전시)편성 또는 非常待機(비상대기)를 해야 한다는 思考(사고)는 바보의 극치이다. 국가재정을 압박하고 장병들을 수고스롭게 만들기 때문이다. 國力에 맞게 상비군을 정예화하고, 一朝有事時(일조유사시)에는 즉각 動員(동원)을 거는 방식이 理想的(이상적)이다. 이런 의미에서 평시 병력 120여 만 명을 보유하는 북한은 세월이 가면 갈수록 가난해지고, 전사들의 신경은 갈수록 이완되며, 사기 또한 떨어질 수밖에 없다. 그것을 막으려는 최후의 발악이 거친 공격적 말투이다.&nbsp

호전적인 敵과의 오랜 대치상황에서 動員體制(동원체제)를 어떻게 효율적으로 갖추느냐 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당면한 매우 중대한 문제이다. 바이마르 공화국의 독일 國防軍(국방군)은 ‘베르사이유 조약’에 따라 그 병력이 10만 명으로 제한되었다. 전차 보유도 허락되지 않고, 전투기 또한 그러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1933년 히틀러 정권의 탄생 후 겨우 5년 만에 강대한 독일군이 되었다.

이것은 10만 명의 장병 한 사람 한 사람이 부하를 이끌 수 있는 상태에 도달했기 때문이었다. 북한식으로 말하면 바로 ‘全軍(전군)의 간부화’이다. 독일군의 우수성은 당시로선 첨단이었던 기갑부대의 육성에 일찍부터 着眼(착안)했던 하인츠 구데리안(Heinz Wilhelm Guderian, 1888~1954)이라는 우수한 장교의 존재를 빼놓고 논할 수는 없다. 敵이 따라오기 어려운 比較優位(비교우의)의 첨단무기로 무장한 군대의 육성&#8212 바로 이 점이야말로 우리 軍 수뇌부가 반드시 배워야 할 대목이다.


우리 사회의 從北문제부터 처리해야


제2의 한국전쟁이 벌어진다면 그때 북한의 최종무기는 무엇일 것이며, 그것을 대항·제압할 수 있는 우리의 무기는 무엇인가? 이것이 오늘 국군 수뇌부의 과제인 것이다. 2012년 2월에 발간된 졸저 《宋의 눈물》 서문에서 필자는 이렇게 썼다.

&lt핵무기를 보유한 적이 ‘청와대 불바다’라고 위협하면 결국 우리도 남의 것이 아닌‘우리의 핵무기로 맞설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이것은 민족과 국가의 생존을 위한 최소한의 自救策(자구책)입니다.&gt

6·25 남침 전에 국군의 수뇌부는 T34 전차로 증강되는 적을 주시해 미국 정부에 대해 전차의 원조를 요청했다. 그러나 산과 논이 많은 한국의 地形(지형)에서 전차는 無用之物(무용지물)이라는 이유로 간단히 거부했던 것이 바로 미국 정부였다. 그 때문에 6·25 初戰 당시 국군은 물론 美 제24사단조차 재편성이 불가피할 정도로 강타를 당했고 사단장 딘 少將은 美 육군사에서 유례가 없이 敵의 포로가 되었다.

지금 미국은 한국의 핵무기 개발을 원천 봉쇄하기 위해 원자력 산업 세계 제6~7위國 우리의 사용후핵연료 재처리까지 막고 있다. 왜 일본은 사용후핵연료 재처리가 가능하고, 한국은 안 되는 것인가? 朴槿惠(박근혜) 대통령은 동맹국 미국 정부의 솔직한 답변을 요구해야 한다.

북한이 핵탄두를 소형화하여 실전배치하면 한국에겐 치명적 위협이다. 북한은 이미 미국의 首都(수도) 워싱턴을 불바다 만들 것이라고 위협한 바 있다. 북한이 핵탄두 미사일로 미국을 겨냥해 놓은 다음에 서울을 불바다로 만들었을 경우에도 미국은 한국을 도울 수 있을 것인가. 설사 동맹국으로서 의무를 다해 미국이 보복하더라도 그것은 死後藥方文(사후약방문)이 아니겠는가.&nbsp

북한에 풋내기 후계자가 등장한 이후 시도 때도 없이 ‘전쟁의 북’을 치는 데 놀란 세계의 언론들이 한국에 몰려와 스포츠 중계式 보도를 했지만, 그들의 예상과는 달리 한국은 평온했다. 즉, “생수나 라면을 사재기 하는 모습은 없다”(AP통신)거나 “한국에서 북한의 전쟁도발 위협 뉴스는 연예인 스캔들 또는 류현진의 메이저리그 첫 승, 벚꽃 소식 등과 경쟁하고 있다”(&lt위싱턴포스트&gt)고 보도되었다.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전쟁·안보 불감증이 지나치다“는 자가비판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그렇다면 북한의 협박 때마다 벌벌 떨어야 되느냐”는 名答(명답)도 나왔다. 다만 이것이 100점 만점의 답변이 되기 위해서는 유사시 우리의 動員체제와 대항무기가 어느 수준에 이르러 있는지를 냉정하게 검토하고, 부족한 부문은 자꾸 보완해야 할 것 같다. 가장 시급한 것은 내부의 적인 從北(종북)세력의 처리일 것이다.


26개 교량 중 1개도 끊지 못해 적 탱크 쾌속 진격&nbsp&nbsp&nbsp&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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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정부의 동북쪽으로 뻗은 43번 국도로 따라 북상하면 6·25 남침 때 포병학교 제2교도대대가 적 T34탱크와 맞섰던 금오리이다. 105mm 야포로 탱크의 전출을 막지 못한 제2교도대대장 김풍익 소령은 제2포대장 장세풍 대위와 함께 6번포를 끌고 나와 43번 국도 상에 방열하고 대기했다.

6월26일 9시10분경, 敵의 선두 전차가 50m 전방까지 다가오자 金소령은 제1탄을 탱크의 무한궤도에 명중시켰다. 敵 전차는 비틀거리며 도로변으로 미끄러졌다. 이를 지켜본 砲班員(포반원)들이 제2탄을 장전하던 중 후속하던 敵 전차포의 사격에 의해 金 소령을 비롯한 포반원 전원이 전사했다.

금오동(6·25 당시는 금오리)에서 시원하게 뻗은 43번 고속화 국도를 10여km 북상하면 158고지인 축석령이다. 주위 건물에 가려서 그런지, 지도상에 표시된 축석령 검문소는 눈에 띄지도 않았다. 抱川川(포천천)은 축석령에서 北東 방향으로 곧바르게 흘러간다. 물도 맑다.&nbsp&nbsp

6월26일, T34탱크를 앞세운 敵 제3사단은 무방비 상태의 축석령을 그대로 넘은 다음에 국군의 제9·제3·제5·제16연대를 차례로 敗走(패주)시키고 의정부를 점령했다. 필자는 승용차를 타고 43번 도로로 북상하여 축석령에 이르렀다. 10여 년 전만 해도 길 한복판에 바리케이트를 쳐놓고 정차시킨 버스 안으로 헌병이 올라와 일일이 탑승객들을 체크했었다. 이제는 그런 긴장감 같은 것은 전혀 없다.

축석령을 넘어가면 시원하게 트인 포천 분지가 펼쳐진다. 포천천 상류에 위치한 이 분지는 해발고도 100~150m, 너비 7km, 길이 10km 의 타원형으로 형성되어 있다. 축석령에서 포천천을 따라 포천분지를 통과하는 4~6차선 고속화도로(43번 국도)는 護國路(호국로)라 불린다. 6·25 당시만 해도 폭 10m 정도의 2차선 非포장도로였다. 요즘 주말에는 포천-철원의 행락지로 떠나는 자동차의 행렬로 심한 정체현상이 벌어진다. 포천시의 들머리길에 접어들면 이탈리아·프랑스風의 地名(지명)을 낯간지럽게 차용한 간판의 호화 가구점들이 긴 행렬을 이루고 있고, 이런 ‘이국적인 가구거리’를 벗어나면 20층 전후의 고층 아파트 단지가 도로변에 즐비하다.

북위 37도57분에 위치한 萬歲橋(만세교) 부근 주유소에 들러 승용차에 휘발유를 가득 채웠다. 38선에 가까워지자 나도 모르게 비상사태에 대비했던 듯하다. 북한군의 전차포 사격에 의해 파괴된 국군의 만세교 對戰車壕(대전차호) 콘크리트 진지가 아직도 남아 있다.

6월25일 오전, 3門의 대전차포를 인솔해온 제9연대의 대전차포 중대장은 만세교 남쪽 20m의 도로변에 대전포를 放列했다. 대전차포 중대장은 敵 전차가 50m 전방까지 오도록 기다렸다가 제1탄을 발사하여 명중시켰다. 그러나 전차는 끄떡도 않았고, 오히려 대전차포 진지에 대해 전차포 사격을 가했다. 이에 병사들은 포의 照準鏡(조준경)만 빼들고 벌말(포천 북쪽 5km)로 급히 철수했다. 국군의 主저항선을 돌파한 敵 기계화부대는 오전 11시 포천을 점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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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세교에서 북상하여 38선이 지나가는 梁文里(양문리)에 이르렀다. 영평천은 광덕산과 운악산에서 발원하는 하천물을 합쳐 서쪽으로 흐르다가 43번 국도변의 양문리에서 포천천을 만난다. 포천천이 縱(종)으로 흐르고 영평천이 橫(횡)으로 흐르는 이곳에 38교가 걸려 있다. 이렇게 양문리에서 의정부까지 43번 국도에는 6·25 당시에도 무려 28개의 교량이 걸려 있었으나, 敵 전차를 막아야 할 국군은 그 중 하나도 절단하지 못했다. 다리 몇 개라도 파괴했더라면 敵 전차에 의한 의정부 함락은 다소간 늦출 수 있었을 것이다.


남침의 증거물: 夜味里에서 발송한 북한 정치장교의 보고서


38교를 넘어 38선 북쪽 5km 지점의 夜味里(야미리)에 닿았다. 포천군 永北面(영북면) 야미리라면 남침 사흘 전인 6월22일 북한군 제3사단 예하 自主砲(자주포)대대의 정치장교 오우삼이 ‘군무자들의 사상동향에 대해서’라는 이름의 문건을 작성하여 제3사단 문화副부장에게 보고했던 곳이다. ‘오우삼 보고서’는 美軍이 北進(북진) 시 평양에서 탈취한 북한의 문서 중 일부로 현재 미국 국립공문서관에서 보관되어 있다.
다음은 ‘군무자의 사상동향에 대하여’라는 제목을 붙인 ‘오우삼 보고서’의 일부이다. 괄호 안은 편집자注이다.


&lt보고
제395군부대(제3사단)
문화부부대장 앞
영북면 야미리에서
야영에 있어서 군무자들의 사상동향과 특별사고에 관한 보고
1950년 6월22일
제353부대(자주포대대) 문화부부대장
오우삼


군무자들의 사상동향에 대해서
행군시에 있어서 평화적 조국 통일에 대한 조국전선 제의가 성공되지 못하고 더욱이 조국전선 선언서(를) 전달키 위하여 파견되었던 연락원들까지 체포되었다는 뉴스를 들은 우리 부대 군무자들은 어느 때에 행동이 있을 것을 예측하였다. 언제든지 이동할 수 있는 준비는 하고 있었으나 상학(학습)을 계속함으로 그러케(그렇게) 급히 행동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못했다. 그러나 드듸여(드디어) 6.17일에 점심 때부터 자동차에 적재하고 행군준비를 식혓스나(시켰으나) 당황하는 동무는 없섯(었)다. 침착하게 그러나 분주하게 일절 소지품과 전투준비를 갖으(추)고… 비밀을 보수키(지키기) 위해서 일절 휴지 락(낙)서들을 소각시키는 것을 더욱 철저히 집행했습니다. 행군준비를 4-5시간 내에 완수하고 저녁식사까지 다 식히고(시키고) 6·7일 19:30분에 부대가 출발했다. 유명한 모로조부(프) 공장 마크를 단 신형 포차에 분승한 우리 부대 전원은 포탄까지 정량을 싯(싣)고 완전한 전투준비로 명령하며 군비(軍秘, 군사비밀)와 경각성 및 행군질서가 보장되어야 한다는 것이 군무자들의 얼굴에 확실히 나타나 있었다.&gt


미국의 국립공문서관에서 ‘오우삼 보고서’를 찾아낸 인물은 일본공산당 기관지 &lt아카하타(赤旗)&gt의 平壤특파원(1972~73)을 지낸 하기와라 료(荻原遼)씨이다. 하기와라 씨는 북한이 주장하는 ‘남한의 북침’에 의문을 품고 160만 페이지에 달하는 ‘美軍의 탈취문서’를 약 3년에 걸쳐 독파하고 ‘북침說’의 허구를 증명한 《조선전쟁(朝鮮戰爭, 2007년 文春文庫 刊)》을 저술했다. 위의 글은 《조선전쟁》에서 인용한 것이다.

보고서를 보면 자주포대대가 야영지인 新灘(신탄)에서 훈련 중일 때&nbsp ‘조국통일민주주의전선’의 평화통일제안(6월7일 발표)을 한국 측에 전달한 연락원 3인이 체포되었다는 ‘뉴스’가&nbsp 6월11일에 전해진다. 이 ‘평화통일제안’은 남침 기도를 숨기기 위한 연막전술이었으며, 남침을 앞두고 남한에 대한 적개심을 높이기 위해 시도된 술책이었다.

이 제안은, ‘조국의 평화통일’이라고 하는 기만적 요구를 내걸고는 있지만, 이승만 대통령 등 9인의 정치인을 ‘민족반역자’로 규정해 통일 협상에서 배제할 것을 요구하는 등 한국 측으로서는 받을 리 만무한 내용을 담고 있었다. 전달의 방법도 3인의 연락원을, 체포가 예상됨에 불구하고 일방적으로 38선을 넘게 하는 등 도발적인 것이었다. 예상대로 거부되자, 평화통일 협상에 응하지 않는 ‘이승만 도당’은 타도 분쇄할 수밖에 없다는 캠페인을 전개하여 북쪽 내부의 분노와 적개심을 북돋았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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