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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차에 걸친 거란의 침략 막은 軍事强國, 고려

鄭淳台   |   2011-09-09 | hit 11302

거란의 제2차 高麗 침입

‘전연의 盟’에 의해 後顧(후고)의 염려가 없어진 거란은 재차 고려를 침략했다. 顯宗 원년(1010) 11월, 거란 聖宗은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渡河(도하)했다. 穆宗(목종)을 시해하고 大良君(대량군: 顯宗)을 옹립한 ‘역적 康兆(강조)의 죄’를 묻는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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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고려 침략도



동성연애자로 나약한 품성의 목종은 母后인 천추태후에게 휘둘려 임금 노릇을 제대로 하지 못했다. 이에 西京도순검사 강조가 반란을 일으켜 목종을 죽이고 정권을 장악했다.

康兆는 스스로 行營都統使(행영도통사)라는 최고사령관이 되어 30만 대군을 이끌고 通州(통주: 평북 선천)에 나가 진을 쳤다. 싸움은 거란군의 도하지점인 興化津(흥화진: 의주)에서 시작되었다. 40만의 거란군이 흥화진을 포위하자 그곳 도순검사 楊規(양규)는 굳센 방어로 거란군의 날카로운 칼날을 피했다.

그러자 거란 聖宗은 병력을 2분하여 병력 20만을 인주 남쪽에 주둔시키고, 나머지 20만으로 강조가 주둔한 통주로 출동시켰다. 이에 강조는 휘하의 군사를 3分(분)하여 대응했다. 제1대는 강조의 지휘 아래 삼수의 요소에 배치하고, 제2대는 통주 근방 산에, 제3대는 통주성에 진을 쳤다.

거란은 몇 번에 걸쳐 강조가 지휘하는 삼수의 고려군을 공격했지만, 번번이 실패했다. 강조는 지형의 이점을 이용하여 거란군이 밀려오면 劒車(검차)를 앞세우고 적을 공격했다. 이에 교만해진 강조는 진중에서 部將과 바둑을 두고 있는데, 척후병이 거란군의 기습을 알렸다.

그러나 康兆는 “한꺼번에 많이 오면 그 때 나가 싸우겠다”며 두던 바둑을 계속 두었다. 얼마 후 척후병이 다시 달려왔다.
“이번에는 많은 적이 왔습니다.”

그제야 康兆는 천천히 일어나 무기를 찾았으나 이미 때가 늦었다. 본영을 급습당한 것이었다. 거란군이 몰려와 康兆는 꽁꽁 묶였다. 거란 진영에서 항복을 거부하는 康兆는 거란 聖宗에게 살을 에어 내는 참혹한 죽임을 당했다.

康兆는 죽었지만 남아 있는 장수 楊規·金訓(김훈)·智蔡文(지채문) 등은 곳곳에서 적을 무찔렀다. 특히 양규는 별동대 700명을 이끌고 흥화진을 출발, 통주에 흩어진 군사 1000명을 모아 곽주에 주둔하던 적병 6000명을 전멸시키고, 양민 7000여 명을 구해 통주로 후퇴했다. 이때 거란 聖宗이 이끄는 주력군 20만은 西京을 무너뜨리고, 開京으로 육박하고 있었다.&nbsp

현종은 姜邯贊(강감찬)의 진언에 따라 백관을 거느리고 계속 남하해 羅州(나주)까지 내려갔다.

해가 바뀐 현종 2년(1011) 1월, 현종은 거란과 화친을 맺기 위해 河拱辰(하공진)을 적진으로 보냈다. 거란은 하공진을 인질로 잡고 노략질만 하다가, 별다른 성과 없이 물러가던 도중 貴州 등지에서 楊規와 김숙흥의 추격으로 큰 타격을 받았다. 그러나 두 장수는 開京에서 회군하던 적의 주력과 사우다가 장렬하게 전사했다. 이로써 거란의 2차 침입은 일단락되고, 고려는 江東 6州를 회복했다. 훗날, 양규와 김숙흥은 둘 모두 三韓侯壁上功臣(삼한후벽상공신)으로 추증된다.


제3차 거란 침입: 龜州大捷으로 東北亞의 三國鼎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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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후 거란은 현종의 入朝와 江東 6州의 반환을 다시 요구해 왔으나 고려는 이를 거절했다. 이에 1014년 소적렬을 보내 통주를 침략했다가 흥화진 장군 정신용과 별장 주연에게 패하여 물러났다. 이듬해(1015) 정월, 압록강에 다리를 놓고 다리 양 옆에 침략을 위한 성을 쌓았다. 그리고 여진이 거란에 가담, 구두포에 침입했지만 격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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出行圖(출행도): &#20869蒙古(내몽고)의 克力代鄕 지역에서 발견된 거란 시대의 고분 벽화로, 6인의 노비가
주인의 出行을 위해 대기하고 있는 모습이다. 옷, 머리모양, 말[馬]의 사용 등 거란 시대의 생활상을
잘 보여주는 그림이다



이렇게 소모전을 강요하던 거란은 그해(1015) 4월에 다시 야율행평을 보내 강동6주의 반환을 요구했지만, 고려는 야율행평을 억류했다. 거란과의 전면전을 우선 거란의 후방 병력을 묶어놓기 위해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거란의 침략에 대비하라는 언질을 주었다. 물론&nbsp거란을 견제하려는 책략이었다. 양군의 소규모 충돌이 잇달아 벌어졌다.

드디어 현종 9년(1018)에 거란의 장수 蕭排押(소배압)이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3차 고려 침략을 개시했다. 소배압 역시&nbsp위구르족으로, 거란 皇族의 외척으로서 1차 침입 때 거란군의 총수였던 소손녕의 형이다.

이때 20만 대군을 이끈 上元帥(상원수) 강감찬과 부원수 姜民瞻(강민첨)은 興化鎭(흥화진: 지금의 義州)으로 나아가 소가죽을 꿰어 흥화진 동쪽으로 흐르는 내를 막았다. 그리고 거란군이 건너기를 기다렸다가 물을 터트리고, 복병을 풀어 흩어지는 거란군을 대파했다. 그런데도 소배압은 이듬해(1019) 정월, 주력부대를 이끌고 개경에서 100여리 떨어진 황해도 신은현(신계)까지 남하했다.&nbsp

이때 이미 강감찬은 병마판관 김종현에게 군사 1만을 주고 都城(도성)으로 돌아가 방어하도록 해둔 상황이었다. 현종은 도성 밖의 백성들을 모두 성 안으로 불러들이고, 들판의 작물과 가옥을 모두 철거하도록 명했다. 전형적인 堅壁淸野(견벽청야) 전술이었다.

이 때문에 막상 개경 밖에 도착한 소배압의 병력은 탈진한 상태에서 개경 공략을 포기하고 말머리를 돌려야만 했다. 거란군이 회군하려하자 강감찬은 곳곳에 매복하여 급습하도록 했다. 마침내 귀주에서 고려군과 거란군이 정면으로 충돌했다. 양군이 팽팽한 접전을 벌이던 중 개경에서 북상한 김종현의 부대가 고려군에 가세하자 거란군은 파탄을 보이기 시작했다. 풍향까지 바뀌어 비바람이 남쪽에서 북쪽으로 불기 시작하자 고려군의 기세는 더욱 높아졌다.&nbsp&nbsp&nbsp

소배압의 부대 병력 중 생환자는 겨우 수천 명에 지나지 않았다. 이것이 龜州大捷(귀주대첩)이다. 고려는 당시 그 어느 나라도 깔볼 수 없는 나라로 손꼽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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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관악산 아래 낙성대에 있는&nbsp강감찬 장군像



3차에 걸친 고려와 거란의 전쟁 끝에 현종 10년(1019) 양국 간에 강화가 성립되었다. 고려의 승리로 유지된 동북아의 국제관계는 高麗·宋·遼의 三國鼎立(삼국정립)이었다. 현종 17년(1026), 거란은 동부 여진을 치겠다며 길을 열어줄 것을 요구했지만, 고려는 허락지 않았다. 수난을 먹고 자란 군주 顯宗은 이처럼 굳세었고, 고려의 국력도 그만큼 강했다.&nbsp

이와 같은 국가위기를 계기로 고려는 방위체제를 크게 보강했다. 강감찬의 건의로 1010~1029년(현종 1~20년)에 걸쳐 개경 주위 60여리(24km)의 羅城(나성)을 쌓았다. 또한 12년간(1033~1044)에 걸쳐 압록강에서 도련포(永興)까지 千里長城(천리장성)을 축조했다.

당시 아시아의 패권국 키타이(遼) 帝國의 기세를 꺾은 강감찬은 지금의 서울 관악구 봉천동 228번지 落星臺(낙성대)에서 태어났다. &lt세종실록&gt에 따르면 “태어날 때 하늘에서 큰 별이 떨어진 집”이라 하여 낙성대라는 이름이 붙었다. 그의 출생지인 관악산 아래 낙성대에 가면 그의 騎馬像과 그를 모시는 사당 安國祠가 있다. 원래 그는 文科에 장원급제한 文臣이었다.

귀주대첩 때(1019년) 그의 나이 72세.&nbsp 1020년 고려가 거란과 和親하자 벼슬에서 물러났지만 10년 후인 1030년에 문화시중으로 복귀했고, 다음해인 1031년 84세로 별세했다.&nbsp&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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낙성대의 삼층석탑. 고려 백성들이 강감찬 장군의 공적을 찬양하여 태어난 집터에 탑을 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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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