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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능한 독재 군주의 위험성

鄭淳台   |   2011-09-16 | hit 9720


사치 財源 마련 위한 수단으로 惡用된 新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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徽宗이 그린 鸚鵡圖.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nbsp
휘종은 예술의 재능이 뛰어난 황제였다. 특히 繪畵(회화)에 관해서는 當代 제1이었고, 글씨도 瘦金&#20307(수금체: 瘦金은 徽宗의 호)라고 하는 독특한 書體(서체)를 만들어 냈다. 휘종이 26세 때 (1107년) 그린 鸚鵡圖(앵무도)는 어떤 경로인지 확실치 않지만, 日本으로 건너가 현재 일본의 국보로 지정되어 있다.



미국 보스턴미술관도 휘종이 그린 五色鸚鵡圖(오색앵무도)를 소장하고 있다. 瘦金&#20307(수금체)에 의한 跋文(발문)도 휘종의 筆(필)이다. 휘종은 詩文에도 뛰어나 御集(어집) 100권이 있다고 &lt宋史&gt에 기록되어 있다.

휘종은 어디까지나 예술가이지 황제가 될 만한 사람은 아니었다. 그 자신도 帝位에 오를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않았다. 황제나 정치가로는 완전 낙제생으로서 北宋은 사실상 그의 대에 멸망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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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종의 五色鸚鵡圖. 美 보스턴 미술관 소장



궁정의 여성들은 거의 新法을 싫어했지만, 휘종의 즉위에 의해 섭정이 된 尙 황태후는 新法에 열심이었던 神宗의 미망인이었기 때문에 신법·구법 양파의 융화에 노력했다. 구법당의 蘇軾(소식)이 海南島 귀양지로부터 돌아와 대륙의 땅을 밟을 수 있게 된 것도 섭정 尙씨의 배려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녀는 다음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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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종이 그린 양귀비 언니 國夫人(괵국부인)과 그 일행의 騎乘(기승)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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蘇東坡
親政(친정)을 시작한 휘종은 人事(인사)에 실패했다. 그가 등용한 인물들은 능력이 없는 무리였다. 書畵(서화)의 감정에 뛰어났다는 것으로 휘종의 신임을 얻은 채경은 北宋 ‘제1의 간신’이 된다.

蔡京(채경)은 복건성 仙游縣 출신으로서, 王安石의 사위였던 蔡下의 형이다. 젊어서 진사가 된 그는 神宗 때는 수도권의 지사(知開封府)가 되었다. 신종이 죽고 황태후 高씨가 섭정이 되어 구법파의 司馬光이 재상에 오르면 채경은 전력을 다해 免役法(면역법)을 단기간에 폐지했다. 그 때문에 司馬光의 칭찬을 받았다. 철종의 親政으로 신법파의 세상이 되면 戶部尙書(호부상서)로서 免役法(면역법)의 부활에 진력했다.

이처럼 그는 지조도 포부도 없는 인물이었다. 구법 시대가 되면 누구보다 먼저 면역법을 폐지하여 본래의 差役(차역)으로 돌아갔다. 다만, 이것은 행정수완이 없으면 가능한 일이 아니었다. 또 신법시대가 되면 재빨리 면역법의 再실시에 열정적이었다. 부하를 움직이는 통솔력만은 만만찮았던 듯하다.

휘종은 신법정치를 채택했지만, 그 실제 지휘자는 채경이었다. 채경은 신법에 대한 정신적인 공감이 없었다. 다만 황제가 신법을 선택했기 때문에 거기에 영합했던 것이다. 더욱이 그 황제가 사치를 위한 자금을 만들기 위해 신법을 채용했던 만큼 채경은 보다 많은 財貨(재화)를 백성들로부터 착취했다. 그가 유능했기 때문에 그것이 오히려 백성에게는 災難(재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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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종이 그린 聽琴圖. 중앙에서 琴을
뜯고 있는 것은 徽宗 자신, 오른쪽
인물은 蔡京. 畵面 上部의 문장은
蔡京의 筆이다
휘종의 즉위 무렵, 채경은 좌천되어 杭州(절강성)에 있었다. 미술애호가인 휘종은 황제가 되면 書畵(서화)와 奇巧(기교)의 명품을 수집하려고 작심했다. 그래서 서화에 안목이 있는 환관 童貫(동관)을 남방에 파견했다. 五代十國 시대의 南唐 및 吳越은 풍요한 땅이었다. 사실, 宋의 조정에 있는 서적 및 서화의 컬렉션은 거의 南唐으로부터 옮겨다 놓은 것이었다. 서화에 밝은 채경은 항주에서 동관과 만나 의기투합했다. 동관은 채경의 중앙 복귀운동을 벌였고, 채경은 재상으로 영전했다.

휘종은 채경·동관과 함께 있을 때가 즐거웠다. 서화 및 詩文에 관한 이야기 상대로서 둘보다 나은 大臣은 없었다. 게다가 이 2인의 정략적·당파적 수완도 수준 이상이었다. 휘종은 정치를 둘에게 맡기고, 자신은 우아한 예술생활을 즐기려고 했다. 휘종에게 신법은 그의 예술생활을 營爲(영위)하기 위한 재원 마련의 수단이었을 뿐이었다.


천하의 惡政&#8212公田法과 花石綱의 강행

항주에는 궁정용의 器具을 만드는 工藝局(공예국)이 설치되었다. 그 설치의 업무는 동관이 맡았다. 또 황족의 혼례 器具 제조를 위한 後苑作(후원작)이라는 관청이 설치되고, 그 장관도 환관이 맡았다. 이런 경비 조달을 위해 公田法이라는 악법을 만들어 냈다.

王安石의 新法 중에 方田均稅法이라는 것이 있었다. 이것은 대지주가 감추고 있는 농토를 찾아내 세금을 물리는 것이 목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실시되는 데는 이르지 못했지만, 토지의 實測(실측)에 의해 隱田(은전)이 상당히 검출되어 稅收(세수)가 크게 늘어났다.

휘종 때의 公田法은 그런 것이 아니었다. 숫제, 尺(척: 자)의 단위를 바꾸었던 것이다. 조정의 雅樂(아악)에 사용되었던 樂器를 재기 위해 보통의 尺보다 약간 짧은 독특한 자가 있었다. 이것을 樂尺(악척)이라고 한다. 이 樂尺을 사용해서 田地를 측량하는 것이다. 보통의 자로 측량해서 1畝(무) 로 되었던 田地는 1.0849畝가 된다. 여기서 대지주이든 영세지주이든 小數點 이하, 즉 약 8%의 토지를 公田으로 몰수당했다. 상대적으로 영세 지주의 쪽의 데미지가 훨씬 컸다.

또한 매매계약서를 再조사해서 소유권이 확실히 증명되지 않는 田地는 모두 몰수하여 公田으로 했다. 口頭約束(구두약속)만으로 소유권이 이전된 것은 영세농민 쪽에 많았던 것은 물론이다. 대지주는 토지를 소유하는 것이 사업이기 때문에 서류를 구비했던 것이다.

이 公田法은 매우 불합리한 것으로서 新法의 정신을 계승한 것이 아니었다. 휘종 시대에는 그런 것이 新法 속에 섞여들어 시행되었던 것이다. 新法 시행에 의해 얻은 財政의 여유를 不要不急(불요불급)한 용도로 낭비하고 帝室(제실) 사치의 비용으로 流用(유용)했기 때문에 표면적인 번영에 반해 宋의 경제는 위기에 빠지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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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封의 北宋 궁궐터를 장식하고 있는 太湖石



채경의 추천에 의해 蘇州의 朱&#21204(주면)이라는 庭園師(정원사)가 휘종을 위해 江南에서 진귀한 것을 모아 開封으로 운반하는 일을 주도했다. 이것을 花石綱(화석강)이라고 불렀다. 綱이라는 것은 대량화물 또는 輸送船團(수송선단)을 의미한다. 휘종은 황하권인 開封을 그가 憧憬(동경)하는 江南의 景觀(경관)으로 만든다고 하는 매우 거창한 꿈을 지니고 있었다. 그가 눈독을 들인 것은 名木, 名花, 奇岩, 珍石 등 북방에 없는 것들이었다. 특히 그는 太湖(태호)의 물속으로부터 건져내는 이른바 太湖石을 애호했다.

물속에서 奇岩珍石(기암진석)을 찾아 끄집어 올리는 것은 많은 백성의 노동력을 동원해야 했다. 그것도 강제동원이었다. 名木, 名花는 그냥 野生하는 것은 아니었다. 누군가의 집 정원에 소중하게 키워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것을 강탈하는 것이었다. 화석강을 江南으로부터 開封까지 운반하면서 운반에 방해되는 가옥 같은 것은 강제 철거했다. 백성들의 원한이 사무쳤다.

특히 1123년, 높이 4丈의 太湖石을 운반할 때는 대형선을 특별히 만들고, 수천 명을 수개월에 걸쳐 동원하여 개봉까지 날랐다. 朱&#21204은 배를 부려 올라가면서 水門을 자르고, 교량을 부셨으며, 성벽을 파내기까지 했다. 휘종은 바로 이 돌을 ‘神運昭功石’이라고 명명했다. 주면도 그 공으로 磐固侯(반고후)로 봉해졌고, 벼슬도 올라갔다. 화석강을 통해 휘종의 신임을 얻음으로써 주면은 市井雜輩(시정잡배)에서 일약 封疆大使(봉강대사: 제후)가 된 것이었다.

더욱이 채경은 外征(외정)의 공을 탐해 환관 童貫(동관)을 기용, 거란을 정벌해서 개국 이래의 숙원을 달성하려고 했다. 遠交近攻策(원교근공책)을 구사, 滿洲(만주)에서 새롭게 흥기한 여진족과 동맹하여 거란을 挾擊(협격)하려 했다. 그러나 그것이 여우를 피하려다 호랑이 만나는 일이 될 줄이야 그 자신도 눈치 채지 못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