野性을 잃은 거란 貴族
鄭淳台 | 2011-09-20 | hit 11332
키타이(거란) 제국은 만주로부터 몽골 전역에 걸쳐 광대한 영토를 보유하고, 남쪽 宋朝와 무역을 하는 이외에도 中央아시아의 투르크계 諸國과도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長城 이남에 중국식 성곽을 갖추고, 중국식 정부를 설치하여, 王公의 생활이 사치에 흐르게 되면 거란의 官·私 경제는 점차 궁핍해졌다. 광대한 영토에도 불구하고 자원이 빈약했기 때문이다.
이를 보충하기 위해 거란은 북만주 松花江 유역에 산출되는 砂金에 눈독을 들였지만, 이것은 오지에 사는 여진인의 민족적 자각을 자극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즉, 거란의 관리는 여진의 조공품인 名鷹(명응), 즉 海東靑(해동청)이라 불리는 매를&nbsp징수한다는 명목으로 여진 부족의 주거지에 들어가 사금 헌납을 강제했기 때문에 여진족은 단결하여 거란의 지배에 반항하게 되었다.
국제정세는 실로 宋에게 유리했다. 그러나 바로 그 유리함 때문에 北宋이 멸망당하는 비운을 맞게 된다. 宋의 숙적은 거란이었다. 거란에 빼앗긴 燕雲 16州의 회복은 宋 건국 이래 비원이었다. 悲願(비원) 실현의 好機(호기)가 도래했던 것이다. 그때 宋의 황제가 휘종이 아니고 좀 英明한 군주였다면 그 호기를 옳게 이용할 수 있었을 터이다.
이때까지 거란에 착취당했던 만주의 女眞族이 두드러지게 대두했음은 앞에서 썼다. 1101년, 거란에서는 道宗이 병사했다. 도종은 47년간 재위했지만, 그의 治世에는 파벌사움이 치열했다. 같은 시기에 宋에서는 신법·구법의 싸움이 있었던 것처럼 거란에서는 國粹派(국수파)와 漢化派(한화파)의 당쟁이 끊임없이 전개되었다.
宋으로부터 취득하고 있던 歲幣(세폐)는 거란을 타락시키는 역할을 하는 一面(일면)도 없지 않았다. 초원에서 유목하던 尙武(상무)의 거란족이 비단 옷을 입고 차를 마심으로써 점차로 野性(야성)을 잃고 있었던 것이다. 燕雲 16州는 漢族의 거주구이지만, 자국의 영토 내에 漢文化圈(한문화권)을 껴안고 있는 것으로서 그 문화적 영향을 방지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이었다.
道宗의 황태손인 耶律延禧(야율연희)가 즉위했는데, 그가 곧 天祚帝(천조제)이다. 천조제는 유흥에 골몰했으며, 특히 수렵을 좋아했다. 정치는 간신들에게 맡긴 것도 휘종과 비슷했다.
반면, 신흥 여진은 野性(야성)을 잃지 않았다. 그들의 용맹성은 일찍부터 “여진사람 1만 이면 누구도 對敵할 수 없다”는 속담으로 잘 알려져 있었다. 그들이 부락 단위의 생활을 한다면 컨트럴이 가능하나 단결하면 자못 위협적 세력이 될 것이라는 점은 거란도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城塞(성새)를 설치하는 등의 대비책과 동시에 여진족의 수장을 절도사로 임명하는 등의 회유책도 구사했다.
女眞文字와 金의 초대 황제 阿骨打 |
그러나 阿骨打(아골타)가 등장하여 부족을 단결시키면 여진은 대번에 强盛(강성)하게 되었다. 1114년, 아골타는 여진족을 규합·거병하여 현재 吉林의 拉林河(납림하)에서 거란軍을 격파했다. 거병 익년(1115년) 1월, 아골타는 金의 초대 황제로 즉위했다. 국호를 金이라 했다.
국호를 金(금)이라 한 것은 여진의 按出虎水(안출호수)에서 砂金(사금)이 채취되어 그것이 부족의 유력한 자금원이 되었기 때문이라고도 하고, 그들이 新羅金 씨 函普(함보)의 후손이었기 때문이라고도 한다. 필자는 두 가지 뜻을 다 포함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아골타는 고려에 대해 형제지국을 맺자고 제의했으나 고려는 이를 거절했다. 이런 金의 역사를 한국사의 外史에라도 포함시키지 못한 것은 그 후 고려·조선의 국력이 약했기 때문이었다.
거란의 천조제는 70만 대군을 동원하여 친정했다. 그러나 금의 太祖 아골타는 이것을 混同江(혼동강)에서 迎擊(영격)하여 패퇴시켰다. 遼陽府(요양부)에서 黃龍府(황룡부)에 이르는 遼東(요동)의 땅은 모두 金의 판도가 되고, 거란에 멸망당했던 渤海國(발해국)의 유민들도 대거 金의 깃발 아래 모여들었다.
고려를 부모의 나라로 섬긴 女眞&#8212그 急성장 과정
漢字와 비슷한 女眞文字 |
&lt金史&gt 世紀. 卷一의 冒頭부분 |
하지만 고려 조정은 敗將 임간을 탄핵하고, 尹瓘(윤관)을 東北面 行營兵馬都統으로 임명하여 다시 여진과 대적하게 했다. 그러나 윤관 역시 여진군과 싸워 많은 병력을 잃고 그들과 和議조약을 맺는 것으로 일단 전운을 잠재웠다. 윤관은 歸朝(귀조)하여 숙종에게 아뢰었다.
“臣이 지난번 여진에게 패한 것은 그들이 모두 말을 탄 騎兵이고, 우리는 步兵이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곧 別武班(별무반)이라는 제도를 신설했다. 無보직 관리로서 말을 가진 사람, 심지어 노예라도 말을 가진 사람은 神騎軍(신기군)이 되고, 말이 없는 사람은 步兵에 편입되었다. 또한 승려를 선발하여 降魔軍(항마군)이라는 별도 부대로 편성했다.
숙종 10년(1105) 9월 왕은 병사했다. 숙종은 눈을 감으면서 태자 &#20417(우)에게 여진 정벌을 기어이 이룩하라는 유언을 남겼다.
왕위에 오른 睿宗(예종)은 父王의 유언에 따라 여진 정벌을 첫째 목표로 삼았다. 예종은 뛰어난 족장 아골타의 영도 아래 여진의 성장이 가속화하고, 반대로 遼제국의 힘이 약해지자 그 틈을 이용하여 서쪽으로는 遼에 내주었던 압록강변의 두 성을 되찾고, 동쪽으로는 두만강으로 진출하려고 기도했다. 이러한 영토 확장 계획은 2년 뒤의 북벌을 통해 구체화된다.
高麗, 여진에게 9城을 반환
여진 정벌과 동북 9성 개척 |
拓境立碑圖(척경입비도), 윤관이 9성 개척 후 비석을 세우는 장면을 조선 후기에 그린 것이다(고려대 박물 관 소장) |
武川(무천)의 초원 지역 |
수년 전 필자는 음산산맥 중의 요새인 武川鎭(무천진)을 답사했다. 무천진은 隋·唐 황실의 발상지이다. 隋의 국성인 楊씨는 원래 鮮卑族(선비족)의 3字 複姓(복성)인 普六茹(보륙여)씨, 唐의 國姓인 李씨는 선비족의 복성인 大野씨로 자처했으며, 둘 다 선비족 국가 西魏-北周의 최고 귀족인 八柱國(팔주국) 가문 출신이었다.
수 양제와 당 고조 李淵(이연)은 이종사촌간이다. 隋 왕조의 창시자 문제 楊堅의 처 獨孤씨는 北周의 重臣(중신)이며 선비족의 명문인 獨孤信(독고신)의 제4녀이다. 唐 왕조의 창시자 고조 李淵(이연)의 어머니는 獨孤信의 제9녀이다.
당초 약속에서 金은 長城線을 넘지 않기로 했지만, 宋 측에서 먼저 大同 공격을 金 측에 요청했다. 金은 장성을 넘어서 대번에 大同(현재의 山西省 북부)을 점령했다. 燕雲 16州는 대부분 金軍에 의해 점령되었다.
燕京(연경: 거란의 南京)은 燕雲 16州 가운데 가장 중요한 땅이었다. 宋軍의 공격목표는 물론 燕京이었다. 여기서 燕雲 16州의 민심을 주목할 필요가 있을 것 같다. 宋은 이곳을 失地로 생각했지만, 燕雲 지방에 사는 漢族은 이미 200년 가까이 遼의 지배 下에 있으면서 遼의 통치에 익숙해 있었다. 앞에서도 거론했지만, 遼는 유목민에 대한 北面官制(북면관제)와 농민에 대한 南面官制라는 二元的 정치제제를 시행했다.
더욱이 遼의 지배층은 문화적으로 漢化되어 그 정책도 漢族에 대해 반드시 가혹한 것은 아니었다. 오히려 유목민 쪽에 불리했다. 왜냐하면 遼는 농업 진흥에 힘써 농경지를 확대함으로써 유목민의 牧地(목지)가 좁아지고 생활도 어려워졌다. 帝國의 根幹(근간)민족인 거란족의 궁핍화는 遼 멸망의 一因이 되었다.
천조제의 도주를 알게 된 燕京의 주민들은 그 땅에 있던 遼의 황족 1인을 황제로 세웠는데, 그가 天錫황제이다. 그를 옹립했던 인물은 漢族인 李處溫(이처온)이었다.
이와 같은 국제정세 속에서도 휘종의 지도력은 대단히 부족했다. 開封에서는 강남의 奇岩珍石(기암진석)을 여기저기에 박아넣는 人工의 萬歲山(만세산)이 만들어져 艮嶽(간악)이라고 불렀다. 이와 같은 낭비를 하지 않으면 花石綱의 필요도 없고, 公田法에 의한 착취도 없어 ‘方臘의 난’ 등 반란이 일어나지 않았을 것이다.
이런 결정적 시기에 휘종이 황제였다는 것이 宋왕조의 불행이었다. 특히 그의 人事는 가장 실패작이었다. 예컨대 《수호전》에서 대표적 ‘奸臣’으로 점 찍힌 高&#20421(고구)는 蹴鞠(축국: 폴로)의 재주가 端王(단왕) 시절 휘종의 눈에 띄어 출세하게 된 인간이었다.
&lt宋史&gt에 의하면 아첨꾼인 고구는 휘종이 즉위한 뒤 계속 측근에서 시종하면서 禁軍에 입대했는데, 20년도 못돼 절도사를 거쳐 太尉(태위: 國防相)에 올랐다(1117년 10월). 그가 北宋 멸망 6개월 전에 病死했는데, 휘종은 그에게 開府儀同三司 簡國公(개부의동삼사 간국공)에 封하면서 喪服(상복)을 입고 애도하는 한심한 작태를 보였다. 이에 靖康 원년(1126), 훗날 ‘北宋의 유일한 忠臣’이 된 李若水가 다음과 같이 상소했다.
“고구는 幸臣(행신)으로 顯位(현위)에 올라, 軍政을 무너뜨리고, 金人의 침입을 초래하였으니, 그 죄가 童貫(동관)과 같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