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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족은 思想·信念체계와 歷史觀을 함께 해야

鄭淳台   |   2011-09-21 | hit 7698

燕京에서 성립된 거란의 망명 정권에서는 天錫帝(천석제)가 죽고 그의 처 蕭(소) 씨가 태후를 칭하고 있었다. 天錫帝를 옹립했던 李處溫은 살해되었다. 내홍이 일어나 발해인 및 漢族 등이 ‘常勝軍’을 조직, 발해인 郭藥師(곽약사)가 그 수령이 되었다. 곽약사는 8000의 상승군을 이끌고 宋軍에 항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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金의 南征



燕京의 망명정부는 宋에 대해서 120년간의 맹약을 강조하고 함께 연합하여 金에 대항하자고 제의했다. 동관은 그것을 거부했다. 동관은 이렇게 동요하고 있던 燕京의 망명정부와 싸워서도 패전했다. 패전의 책임을 논죄하면 처형될 수도 있었다. 그것이 두려웠던 동관은 가만히 金의 太祖 아골타에게 援軍(원군)을 요청했다.

金은 宋과의 약속을 지키고 있었다. 長城 以南의 大同을 공격한 것도 宋의 요청에 의한 것이었다. 한 번의 공세로도 가능했던 燕京의 점령을 당초 약속대로 宋에게 맡기고 있었다. 그러나 동관으로부터 요청을 받으면 金軍은 怒濤(노도)와 같이 남하해서 즉각 燕京을 함락시켰다.

宋은 金에 대해 燕京을 반환하라고 요구했다. 이것은 매우 염치가 없는 짓이었다. 金의 장군들은 반환할 필요가 없다고 주장했다. 燕京 주민들도 金에 속하는 것을 희망해, 宋에 城을 인도하는 것을 반대했다. 이것은 宋으로선 깊은 상처가 남는 國辱(국욕)이었다.

燕京의 주민은 漢族이라고 하지만, 200년간 中原의 지배에 벗어나 있었다. 이후 宋의 지배를 받는다면 ‘新附(신부)의 백성’으로 차별을 받을 우려가 있었다. 더욱이 宋의 公田法 및 화석강 등의 酷政(혹정)이 燕京에도 소문나 있었다. 그런 착취를 당하지 않겠다는 계산은 漢族이라는 민족의식보다 앞섰다. 또한 건국 초기의 金은 여러 제도를 정비함에 있어 漢族을 重用할 가능성도 높았다.

민족이란 것은 결코 先天的으로 주어지는 것이 아니다. 다시 말하면 혈통에 의해 자연히 정해지는 것이 아니라 보다 큰 역사적 환경에 의해 결정되어지는 것이다. 민족의 결정에는 물론 혈통도 중요 요소의 하나가 되지만, 그것 외에도 정치 혹은 문화, 그 가운데서도 언어· 종교·풍습 등이 큰 발언권을 갖고 있다.&nbsp 민족이라는 것은 의학적으로 均一한 골격·체질을 가지고 있다는 것보다도 오히려 사상·신념에 있어서 통일된 역사적 민족을 의미한다. 따라서 燕京의 주민은 宋의 漢族과 사상·신념을 함께 하는 민족이 아니었다.

이런 점에서 민족이란 말은 아무렇게나 남발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지금 우리 사회 일각에서는 ‘우리 민족끼리’라는 말을 무슨 呪術(주술)처럼 남용하는 무리가 있다. 이는 매우 工作的이다. 현재 북한의 김일성-김정일 체제 아래에서 특권을 누리는 계층은 우리와 사상·신념, 거기에서 형성되는 歷史觀도 다르므로 결코 우리와 같은 韓民族일 수 없다. 그들은 자신들의 주장대로 ‘김일성 민족’이며, 그들의 행태는 馬賊的(마적적)이다.

예컨대 대한민국 법정에서 ‘김정일 장군님 만세’를 외치거나 그의 방 안에 김일성·김정일 父子의 사진을 모셔놓고 참배하는 따위의 인간은 이미 敎化(교화)가 아니라 除去(제거)의 대상이다. 事實的(사실적) 증거가 명백한 6·25 남침, 88서울올림픽을 방해하기 위한 KAL기 폭파, 천안함 폭침 등을 적을 이롭게 할 목적으로 否定(부정)하는 선동가라면 설사 그가 주민등록증을 가지고 있다할지라도 대한민국의 국민이 아니다.&nbsp&nbsp

어떻든 阿骨打는 정통성 경쟁에서 휘종 趙佶(조길)을 압도했다. 그래도 金의 太祖는 宋과의 맹약을 지키지 않으면 안 된다고 생각했다. 그 대신에 空城(공성)을 인도했다. 성내 일체의 財貨(재화)와 주민을 모두 북방으로 옮겼다. 그리고 燕京 공략의 戰費로서 錢 100만 緡(민)과 군량 20만 石을 宋에 요구했다.

空城이라고는 하지만, 燕京과 그 주변 6州가 수복되었다. 開封에서는 大축제가 벌어지고, 童貫은 廣陽郡王(광양군왕)에 봉해졌다. 환관으로서 왕에 봉해진 것은 전례가 없는 일이었다.


女眞族 중 完顔部의 出自

여기서 여진족의 出自(출자)에 대해 잠시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여진족은 유목민과는 달리 삼림지대에 살고, 퉁구스계의 언어를 사용하는 수렵·농경·어로의 民이었다. 그러면서도 騎馬에 의한 생활·군사 활동에도 익숙했다. 우리 삼국시대엔 그 일부가 고구려에 복속되었고, 고구려 멸망 후에는 그 일부가 唐에 붙어 新羅를 자주 침략했다.&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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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lt金史&gt 世紀에 의한 完顔씨의 系譜


혈통으로 보면 거란의 태조 耶律阿保機(야율아보기)에 의해 멸망당한 渤海(발해), 당시에 존재하고 있었던 나라라면 高麗와 가장 가까웠다.

&lt金史&gt世紀는 金國(금국)을 세운 아골타에 이르기까지 完顔部의 역대 족장 10인의 事績을 중심으로 여러 가지 傳承·일화를 소개하고 있다. 世紀의 시작 부분에 따르면 北魏 때의 勿吉, 隋代의 말갈이 여진의 근본이다. 그 말갈로부터 黑水靺鞨(흑수말갈)과 粟末靺鞨(속말말갈)으로 갈라지고, 미통합 상태의 前者는 발해에 복속했다. 黑水라는 것은 黑龍江(흑룡강), 粟末水라는 것은 松花江을 가리킨다. 속말말갈이 주민의 다수를 차지했던 발해국이 멸망하면 흑수말갈 등은 거란(키타이)에 臣屬하고, 거란의 호적에 들어간 南半을 熟女眞, 호적에 등재되지 않은 北半은 生女眞이라 구별하고, 후자가 完顔部가 되었다.

이어서 아골타의 조상 10인의 행적이 기록되어 있다. 초대인 金函普는 60여 세에 高麗로부터 하얼빈 부근까지 북상해서 그곳의 셔먼인 듯한 老女와 부부가 된 것이 完顔 황실의 발단이었던 것으로 &lt金史&gt 등에 기술되어 있다. 김함보는 원래 新羅 유민으로 그의 동생 둘과 함께 만주로 망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완안부는 원래 평범한 여진의 한 부족에 불과하였으나 羅末麗初에 신라로부터 흘러들어간 한 유민 김함보의 자손이 번창하여 점차 여진의 여러 부족 중에서 두각을 나타내기 시작했다.

김함보는 지략이 뛰어난 사람으로 여진인이 종족 간에 투쟁을 일삼고 있음을 보고 그것을 居中調整(거중조정)했다. 女眞의 賢女(현녀)와의 결혼에 의해 함보는 완안부의 추장으로 추대될 수 있었다.&nbsp
아골타의 아버지인 제7대 劾里鉢(핵리발)은 돌출한 영웅으로서 행적이 자세히 기록되어 있다. 다시 그의 동생들이 뒤를 이어 제9대 盈歌(영가)에 이르러 아골타의 창업의 기초가 구축된다. 고려를 침략하여 尹瓘(윤관)과 싸운 烏雅束(오아속)은 아골타의 형인데, 그 후 아골타 정권과 미묘한 관계가 엿보이나 그 이상은 알 수 없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