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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에게 宋史에 대한 음미가 필요한 이유

鄭淳台   |   2011-09-23 | hit 9023

北宋의 배신외교에 격노한 金國


거란의 天祚帝(천조제)는 陰山(음산)에 숨어 西夏에 의지하려 했다. 宋도 천조제와 연락하여 거란군과 동맹해서 金으로부터 大同을 탈환하려고 기도했다. 그러나 1125년, 천조제는 金軍에게 붙잡혔다. 그때 宋 조정이 천조제에게 보낸 密書(밀서)도 발견되었다. 밀서의 내용은 송·거란, 두 나라가 동맹하여 金을 치자는 내용이었다. 그 배신 행위에 金은 격노했다.

金의 太宗은 ‘海上의 盟’에 충실했던 太祖 아골타와는 달랐다. 대군을 일으켜 宋의 징벌에 나섰다. 燕京을 지키고 있던 곽약사의 상승군은 즉각 金에 즉각 항복했다. 발해 유민인 곽약사는 거란으로부터 宋에 항복하고, 다시 宋으로부터 金에 항복한 것이었다. 金에 항복한 후에는 金軍의 嚮導(향도)가 되어 開封을 공격했다.

휘종은 大驚失色(대경실색)했다. 자신에게 죄가 있다는 詔(조)를 내면서 退位(퇴위)하고, 장남인 趙桓(조환)을 즉위시켰다. 그가 欽宗(흠종)이다.

靖康 원년(1126) 정월, 금군은 황하를 건너 開封을 포위했다. 上皇이 된 휘종은 미리 毫州(호주)로 도주했다가 다시 長江 남안의 鎭江(진강: 지금의 강소성 鎭江市)으로 달아났다. 蔡京(채경)과 童貫(동관) 등 수뇌부를 비롯해 백관들도 모습을 감췄다. 無책임 시대, 바로 그것이었다.

金軍에게 포위된 開封 성내에서는 주전파와 강화파가 甲論乙駁(갑론을박)을 벌이기만 하여 정책의 결정이 지연되었다. 금군의 공격은 점점 격렬해져 落城(낙성)은 모면할 수 없는 형세였다. 宋으로서는 강화 교섭은 불가피해졌다. 그러나 강화협상이 진행되던 상황에서도 일부 주전파에 의한 공격이 감행되어 宋의 입장은 더욱 궁지에 몰리고 말았다.

金이 제시한 강화조건은 다음과 같았다. 主戰派(주전파)인 李綱(이강)을 파면할 것, 金 500만 량, 銀 5000만 량, 牛馬 1만 마리, 비단 100만 필을 바칠 것, 宋의 황제는 금의 황제를 伯父(백부)로 받들 것, 燕雲 16州의 주민으로서 中原에 이주한 자는 귀환할 것, 中山·太原·河間(하간)의 3鎭 20州를 할양할 것, 재상과 親王을 인질로 보낼 것 등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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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흠종으로서는 갑자기 천문학적인 배상금을 끌어 모을 수가 없었다. 金軍은 宋의 배상금 지불 완료를 기다리지 않고 開封의 포위를 33일만에 풀고 북상했다. 익숙하지 않은 지역에서 장기 포위를 하기보다 할양받기로 한 3鎭을 먼저 확보하는 것이 實利的(실리적)이라고 판단했던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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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위가 풀리면 開封에서는 또다시 主戰論이 대두했다. 이번에는 학생운동이었다. 太學(태학: 국립대학) 학생&nbsp 陳同(진동)을 비롯한 수만 명의 都民이 벌 떼같이 上書, 주전파 李綱(이강)의 복직과 채경·동관 등의 처벌을 요구했다. 채경은 80세의 노구로 귀양을 가다가 병사했고, 동관은 廣東으로 귀양 가던 도중에 살해당했다.

宋의 조정은 金과의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 3鎭(진)을 할양하기로 되어 있었는데도, 3鎭의 수비군에게 引渡(인도)를 거부하고 저항하도록 명했던 것이다. 이런 대책 없는 運動圈的(운동권적) 행위는 국가의 自殺(자살) 행위와 마찬가지였다.

당연히, 金은 분노하여 宋을 멸할 것을 결심했다. 한편 흠종은 江南으로 도망간 아버지 휘종을 돌아오게 했다. 江南에서 새로 왕조를 열고 復位(복위)할 것이라는 소문이 나돌았던 것이다.&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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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13세기 초엽의 東部 아시아



靖康 원년(1126) 11월, 金軍은 다시 南下했다. 한 해에 두 번 황하를 渡河(도하)했던 것이다. 金軍의 격렬한 공격이 시작되자 開封城은 籠城(농성) 40일 만에 함락되었다. 재화를 약탈당하고, 부녀들은 끌려가 욕을 당했다.&nbsp세계에서 가장 번영했던 도시가 대번에 폐허로 변하고 말았다.

金軍에 복무했던 燕京의 漢人들이 약탈의 안내역이었다. 역대 황제, 특히 徽宗의 콜렉션이었던 書畵·골동품 등은 인기 있는 약탈물이었다. 燕京의 漢人들은 蘇軾(소식)과 黃庭堅(황정견)의 글씨에 눈독을 들였다.


國格이 없는 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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휘종과 흠종 父子는 스스로 金의 軍營(군영)에 가서 포로가 되었다. 황족, 고급관료, 金國이 필요로 하는 기술자·예술가 등 수천 명이 북쪽으로 끌려갔다. 이것을 중국사에서는 靖康의 變(정강의 변)이라 부른다. 이렇게 宋왕조는 개국 167년 만에 멸망했다. 이 왕조를 중국史에서는 北宋이라고 한다. 그것은 철없는 황제 휘종이 빚어낸 民怨(민원)에 의한 당연한 終着驛(종착역)이었다.&nbsp&nbsp

欽宗(흠종)의 동생인 趙構(조구)가 江南으로 도망해서 만든 왕조는 南宋이라 부른다. 南宋은 金의 臣下가 되어 중국 本部의 절반, 즉 淮河(회하) 이남만을 영유하다가 150년 후인 1276년 몽골족에게 정복된다.

휘종은 一世의 風流天子(풍류천자)였지만, 滿洲(만주)의 벽지(지금의 하얼빈 북방 五國城으로 끌려가 연금생활을 하다 失明했다. 8년 후 오국성에서 均州(균주)라는 곳으로 이주당하는 도중에 병사했다(1135년). 54년의 생애였다. 흠종은 1156년 5월까지 만주의 동토에서 연금당하다 죽었다. &lt十八史略&#8231 십팔사략&gt에 보이는 그때의 에피소드 한 토막.

&lt흠종이 靑城(청성: 오국성)에 구류되어 天子의 御衣(어의)를 벗도록 강요되었을 때다. 옆에 모시고 있던 신하들 중 오직 한 사람 李若水(이약수)만이 큰소리로 금나라 사람을 꾸짖었다. 이약수는 그 후에도 금의 處事(처사)를 항의해 마지않았다. 그래서 드디어 턱이 찢기고, 혀가 뽑혀서 살해당했다. 후에 금나라 사람들은 이런 얘기를 주고받았다.
“거란이 망했을 때 義(의)에 殉(순)한 자가 10여인 있었는데, 宋의 경우는 李若水 혼자뿐이야.”&gt

그 후 금과 남송 간에는 和議(화의)가 성립했지만, 南宋의 高宗은 형 欽宗의 귀환을 위해 단 한번도 金 측에 교섭하지 않았다. 欽宗이 귀국하면 南宋의 高宗은 자신의 帝位(제위)가 흔들릴지 모른다고 우려했던 것이다. 帝王으로선 당당하지 못한 匹夫(필부)의 처신이었다.

그래서 南宋은 正統性(정통성)의 不足이라는 트라우마(trauma)로 허덕이게 된다. 이런 나라는 제아무리 경제적으로 번영해도 國格(국격)이 없다. 南宋은 그 수도인 臨安(임안: 지금의 절강성 杭州市)은 단지 行在, 즉 임금이 잠시 머무는 곳으로 스스로 平價切下(평가절하)했다. 마르코 폴로의 &lt東方見聞錄·동방견문록&gt은 臨安을 ‘킨자이’로 표기 했는데, 이는 行在의 浙江 지역 사투리 發音에 다름 아니다.

宋은 以夷制夷(이이제이)니 遠交近攻(원교근공)이니 하는 술책을 구사하여 국가이익을 탐했지만, 국가로서의 信義는 바닥이 드러내고 말았다. 宋은 金과 짜고 거란을 멸망시켰으나 金에 의해 자신도 먹혔고, 훗날 江南 피난 정권인 南宋 역시 몽골과 짜고 金을 멸망시켰으나 몽골에 의해 자신도 먹혀버렸다. ‘300년 漢族 왕조’ 宋의 이미지는 草原의 약탈자에게 매번 돈을 갖다 바치고 끝내는 살해당한 道袍(도포)짜리와 마찬가지였다.&nbsp&nbsp&nbsp&nbsp

역사상 이런 宋의 도포짜리와 가장 닮은 꼴은 中國의 왕조에서가 아니라 조선왕조의 性理學 원리주의자 집단이었으며, 그 末流(말류)가 김일성-김정일 唯一思想(유일사상) 집단이다. 오늘 우리에게 宋史에 대한 吟味(음미)가 필요한 것은 바로 이 때문이다. ● (끝)&nbsp