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新疆·티베트·內몽골에서 일어나고 있는 독립운동의 原籍

鄭淳台   |   2011-09-01 | hit 8285

&nbsp宋代의 東아시아는 여러 민족이 저마다 독립 국가를 형성한 理想的(이상적)인 모습이었다. 北宋의 영토는 전통적인 중국 本部였다. 新疆위구르, 티베트, 滿洲, 內몽골, 오르도스는 물론 지금의 靑海省(청해성)·甘肅省(감숙성)·貴州省(귀주성)·雲南省(운남성)에도 각각 소수민족국가가 세워져 있었다. 民族自決이 당연한 理致라면 지금처럼 55개 소수민족 위에 군림하고 있는 ‘큰 中國’은 부자연스럽다. 중국 정부가 漢族에게 정착금 지급 등 온갖 메리트를 부여하여, 邊境(변경)지역의 인구분포를 漢族의 數的 우위로 造作하는 기만정책도 21세기의 時代精神(시대정신)에 어긋나는 꼼수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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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세기 경의 東部아시아



중국의 혁명가 孫文은 일찍이 民族·民權·民生의 세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三民主義(삼민주의)를 제창했다. 여기서 제일 먼저 꼽은 民族主義는 외국의 압박을 벗어나 中國 민족의 自由를 회복하는 것이 主眼(주안)이었지만, 다만 그것은 진정한 의미의 民族自決主義(민족자결주의)와는 취지를 달리했다.&nbsp

孫文의 주장은 좀 해괴하다. 中國에는 漢族 이외에 몽골족·위구르족(투르크족)·티베트족 등 소수민족들이 많지만, 그들은 문화의 발달도 늦고 자주 독립의 정부를 만드는 것이 어려우므로 漢族과 함께 세운 공화국 內의 自治區(자치구)가 되어&nbsp指導(지도)를 받지 않으면 안 된다는 것이다.&nbsp

이건 분명히 괴변이다. 필자가 開封·鄭州·洛陽 등 中原을 답사하고 있던&nbsp2011년 7월, 때마침 新疆(신강) 위구르 자치구에서는 위구르 민족의 독립운동이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8년 전 타클라마칸 사막 주위의 南·北 ‘오아시스의 길’을 일주하면서 호탄(和田)·카슈(喀什) 등지를 들렀을 때 이미 필자는 위구르 민족의 치열한 독립정신을 목격했다. 그 날 오후 11시30경(이 시각에도 西域에선 해가 지지 않는다) 호탄 거리의 한 목로주점에서 맥주로 더위를 식히다가 10여 명의 위구르 청년이 떼를 지어가며 위구르語로 떼唱(창)을 하는 모습을 목격했다. 그것은 마치 독립운동의 前奏曲(전주곡)처럼 들렸다.&nbsp

東투르키스탄(新疆)이 중국의 영토로 강제 편입된 것은 아주 오랜 옛날도 아니고 淸代의 擁正帝(옹정제) 때이다. 그 넓이는 한반도의 6배를 넘는다. 그 한복판에 있는 타클라마칸 사막에서는 최근 석유가 산출되고 있다. 필자는 그 油田에 접근하려다가 사막의 온 천지를 視界 제로(0)로 만드는 폭풍을 만나 1시간 정도 차를 세우고 그 속에 갇힌 경험이 있다. 옛날 낙타를 타고 가던 隊商(대상)이 사막의 폭풍을 만날 때는 어떠했을까? 아마, 낙타를 눕히고 그 腹部(복부) 가까이에 그의 머리를 처박았을 것 같다. 어떻든 중국은 그들과 다른 문화의 민족이 사는 이른바 ‘自治區’를 民族自決主義의 정신에서 독립시켜야 할 것 같다.&nbsp

이번 여행에서 필자를 안내한 젊은 가이드는 “중국은 朝鮮戰爭(조선전쟁) 때 抗美援朝(항미원조)를 위해 참전한 것”이며 “사회주의 국가는 침략전쟁을 안 한다”라고 주장했다. ‘항미원조’란 사회주의 형제국인 조선에 침략한 미국에 대항하여 조선을 돕는다는 의미이다. 이에 필자는 다음과 같이 일깨워 주었다.

“6·25 동란은 北韓의 김일성이 毛澤東의 중국 대륙 공산화에 자극을 받고, 소련의 스탈린으로부터 허락을 받아 소련의 무기를 믿고 일으킨 南侵(남침) 전쟁이라는 것은 &lt후르시초프 회고록&gt 등에 의해 명확하게 밝혀진 역사적 眞實(진실)이다. 6.25 동란 발발 당시 북한군의 병력은 약 10만이었는데, 그 가운데 3만~4만은 중국의 인민해방군 군복을 입고 있다가 급하게 조선인민군의 군복으로 갈아입은 자들이다. 그들은 원래 중공군에 복무하던 조선족들이었다. 그렇다면 中國은 항미원조가 아니라 미군이 참전하기 前에 북한의 무력을 증강시켜 기습적인 南侵을 도운 것이다. 다시는 항미원조 운운해서는 안 된다. 중국이 연 100만의 대군을 투입해 한반도의 통일을 막은 결과가 현재 북한 주민의 饑餓(기아) 상태 아니냐.”

그가 무안해 하더니만, 가이드답게 싹싹하게 사과했다.
“학교에서 배운 대로 말한 것인데, 앞으로는 항미원조 같은 것은 말하지 않겠다.”&nbsp&nbsp&nbsp&nbsp&nbsp


開封 城內로 들어온 大運河의 뱃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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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封(개봉·카이펑)은 중국 역사상 경제적으로 가장 번영했던 北宋의 國都(국도)였다. 開封은 戰國(전국)시대엔 魏(위)의 국도로서 大粱(대량)이라 불렸다. 四書의 하나인 《孟子》를 보면 孟子도 遊說(유세)를 위해 大梁을 방문하고 있다. 물론 실패였다. 亂世(난세)에 仁이나 德을 부르짖는 儒學(유학)은 도대체 實用性(실용성)이 없었던 것이다.

기원전 3세기, ‘戰國7雄’의 하나인 魏가 秦(진)에 패망한 후 開封은 한 동안 역사의 중심 무대에 오르지 못했다. 그러나 隋(수)·唐(당) 시대에 이르러 대운하가 건설되고 江南 개발이 크게 진척되자 開封은 物流(물류)의 中心으로 急浮上(급부상)했다.

서기 907년 唐나라가 망한 이후 54년간 中原에서는 다섯 왕조가 흥망을 거듭하는데, 교통의 중심인 開封은 그 중 네 왕조인 後粱(후량)·後晋·後漢·後周의 國都가 되었다. 北宋은 後周 近衛軍(근위군)의 총사령관(都點檢)이었던 趙匡胤(조광윤)의 쿠데타에 의해 성립된 漢族의 왕조이다. 北宋 당시 開封의 정식명칭은 東京開封府(동경개봉부)였다.

太祖 조광윤은 國都를 중국인에게 친숙하고, 그 자신의 출생지이기도 한 洛陽(낙양&#8231 뤄양)을 버리고 신흥 開封을 선택했다. 대운하로 인해 각지의 産物(산물)이 모이는 경제의 중심 開封&#8212그곳이 나라의 中心으로 결정된 것이었다.&nbsp&nbsp&nbsp&nbsp&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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唐(당) 長安城(장안성)
開封의 全盛(전성)시대를 오늘에 전하는 사료가 ‘東京夢華錄’(동경몽화록)과 ‘淸明上河圖’(청명상하도)이다. ‘東京夢華錄’은 女眞族(여진족)의 정복국가 金(금)에 의해 멸망당한 北宋의 國都를 그리워하는 사람이 회상하여 쓴 기록으로서 저자는 孟元老(맹원로)이다. ‘동경몽화록’에는 開封의 酒肆(주사: 술집)와 瓦市(와시: 번화가)가 年中 철야로 흥청거렸다고 기술되어 있다. 이것은 唐代의 국도 長安에선 상상조차 할 수 없었던 대변화였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開封과 長安은 같은 국도라 해도 바로 이런 점에서 달랐다. 흔히 ‘꽃피는 長安’이라 해서 그 번영의 모습은 詩文으로 찬양되었다. 그러나 長安은 110개의 坊(방)으로 나눠져 있고, 일몰의 시각에는 북소리와 함께 110개 坊의 문들이 일제히 닫혔다. 밤이 되면 사람들은 110개의 작은 블록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坊은 높은 土墻(토장: 흙담)으로 둘러싸인 성벽 속의 성벽이었다. 음력 정월 15일인 原宵節(원소절: 대보름날)을 제외하고 長安에서는 야간 통행이 금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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開封府城의 복원도
唐의 長安에서는 東&#8228 西의 兩市에서만 상품 판매가 허가되었다. 넓은 市場에 상점은 즐비했지만, 영업은 日沒(일몰) 이전으로 제한되었다. 鼓樓(고루)에서 일몰을 알리는 북을 치면 사람들은 귀가를 서둘렀고 곧 兩市의 문이 닫혀버렸다.&nbsp&nbsp

반면, 北宋의 開封에서는 성내 어디에 점포를 열든 자유였다. 영업시간도 제한이 없어 시가는 온종일 활기에 찼다. 瓦市(와시) 혹은 瓦子(와자)라 불리던 번화가에 있는 50여 개소의 연극 공연장인 句欄(구란)들도 저마다 관객들을 끌어 모았다.

句欄 중 큰 것은 수천 명을 수용할 수 있었다고 한다. 당시는 모두 立席(입석)이었다. 관객들은 난간에 기대에 공연을 관람했다. 입장료가 없는 대신에 결정적인 순간 전후에 냄비 같은 것을 든 배우가 장내를 돌며 모금을 했다.


‘近代’를 표현한 두루마리 그림 淸明上河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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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는 開封에 도착하자마자 제일 먼저 기념품 상점에 들러 ‘淸明上河圖’(청명상하도)의 복제품을 중국돈 250위안(韓貨로 약 5만원)에 구입했다. 진품은 중국의 國寶(국보)로서 北京 故宮博物館(고궁박물관)에 수장되어 있다. ‘청명상하도’는 봄날(春分 후 15일째인 淸明)의 開封을 묘사한 두루마리 그림(圖圈)이다. 北宋의 文人畵家(문인화가)로서 翰林學士(한림학사)란 고위직을 역임했던 張擇端(장택단)의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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필자가 구입한&nbsp‘淸明上河圖’(청명상하도)의 복제품



唐代 이전의 회화로서 현존하는 것은 극히 적다. 기껏해야&nbsp무덤의 벽화에 나타난 귀족사회의 모습 정도이다. 그러나 ‘청명상하도’에는 開封이란 同시대 세계 최대의 도시에 사는 서민의 모습이 생생하게 그려져 있다.&nbsp이런 의미에서도 중국의 ‘近代’는 北宋으로부터 시작되는 것이다.&nbsp&nbsp

‘청명상하도’를 펼쳐보면 먼저 開封의 동남쪽 郊外(교외)가 잠시 펼쳐진 다음, 대운하의 뱃길로 이용되던 &#27764河(변하)가 묘사되어 있다. 開封은 대운하 때문에 번영을 구가했던 도시였다. 開封의 城內 통과하는 &#27764河, 즉 대운하의 뱃길에는 商船들로 붐비고 강변에는 창고 등 물류 관련 건물이 즐비하다. &#27764河에 걸린 虹橋(홍교: 무지개다리) 위로는 많은 사람들이 오고 간다. 그 너머 장터도 사람들로 붐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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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明上河圖의 虹橋 부분



開封城은 外城&#8228 內城&#8228 宮城의 3중 성벽으로 방어되고 있었다(開封府城의 復元圖 참조). &#27764河는 동남쪽 揚州門(양주문) 옆 물길을 통해 성내로 흘러들어 성내를 횡단한 후 다시 성 밖으로 빠져나가 黃河(황하)와 만난다. 황하가 범람하면 대량의 土砂(토사)가 밀려들어 宋代의 地表는 현재보다 20여m 아래에 형성되었다고 한다.

中原의 황하는 주위의 평야보다 河床(하상)이 높은 天井川(천정천). 1640년, 즉 淸代 이래 네 번이나 둑이 터지는 큰 물난리가 나서 開封·鄭州(정주) 등 中原 핵심지역의 地形을 바꾸어 놓았던 것이다.&nbsp

‘청명상하도’에는, 성문을 통해 開封의 內城에 들어가면 2층 酒樓(주루)가 성업 중인 모습도 담겨 있다. 開封에는 北宋식 룸살롱인 이런 酒樓가 불야성을 이루었고, 플레이보이 황제 徽宗(휘종)은 밤만 되면 微服(미복)을 하고 寵臣(총신)들과 함께 홍등가의 주루를 순례했다. 당시 휘종의 애인은 李師師(이사사)라는 이름의 룸살롱의 가수이자 호스티스였다. 李師師는 황제를 후원자로 둔 것이다. 휘종은 정치에는 관심이 없고 대부분의 국정은 재상 蔡京(채경)에게 맡겨버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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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상하도 중 北宋式 룸살롱인 2층 酒樓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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淸明上河圖 중 趙太丞家 부분
2층 酒樓(주루)의 귀퉁이에는 ‘孫羊店’이란 간판의 양고기 꼬치집도 영업하고 있다. 룸살롱과 잔술집의 共存&#8212이것이 開封의 매력이었을 것이다. 酒樓 앞 대로에는 낙타를 끌고 가는 턱수염 기른 서역인 隊商(대상)의 모습도 보인다.&nbsp


‘청명상하도’ 중 최고의 名장면은 ‘趙太丞家’(조태승가)라는 간판이 붙은 藥局(약국)의 모습이다. 약국 현관의 의자에 ‘쩍벌’의 자세로 착석한 여성의 모습이 당당하다. 중국에 있어 椅子文化(의자문화)는 宋代에 정착되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