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평화 시에도 전쟁을 생각하지 않으면 나라가 위태롭다”
鄭淳台 | 2011-09-02 | hit 9025
開封은 城內에 운하가 통하는 ‘物流의 中心’
開封의 포공사(上), 포공사에 모신 포청천像(下)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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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공사에 진열된 3종의 작두 |
포청천은 특권층의 호화 정자 등 불법 건조물들을 모조리 철거하고, 부정에 관련된 공직자들의 머리를 작두로 삭둑 잘라버렸다. 包公祠에서는 세 종류의 작두를 전시하고 있다. 포청천이 “작두를 대령하라”고 외치면 死刑(사형)에 처해야 할 범법자 중 皇族(황족)에겐 龍머리 작두, 士大夫에겐 虎머리 작두, 서민에겐 개(犬) 작두가 준비되었다.
開封은 물의 도시이다. 당시 성내로는 &#27764河&#8231 蔡河뿐만 아니라 金水河&#8231 五丈河도 흘러들었다. 현재 開封의 물길은 北宋시대와 크게 다르다. 채하가 흐르던 자리는 이제 큰 호수가 되어 있다. 이름은 포청천의 姓을 따서 ‘包公湖(포공호)’라 한다.
開封의 內城 중심가에 위치한 大相國寺를 찾아갔다. 대상국사는 《水滸傳(수호전)》에서 가장 인기 있는 호걸 魯智深(노지심)과 인연이 깊은 사찰이다. 현재 대상국사의 앞뜰에는 老松을 뿌리째 뽑아내는 巨漢 노지심의 像을 세워놓고 있다. 노지심은 不義를 보면 참지 못하고 덤비는 ‘오지랖 넓은’ 캐릭터이다.
大相國寺 마당에 새워져 있는 노지심 像 |
林沖과 徐寧(출처: 水湖圖贊). 梁山泊 두령이 된 2인은 원래 禁軍의 장교였다 |
《수호전》 속 호걸들의 대부분은 禮敎(예교) 따위에 속박되지 않고, 그들의 本性대로 마구 날뛴다. 속박 받을 일이 많은 서민들은 이들 호걸들에게 마음으로부터 박수를 보내게 마련이었다. 특히 林沖은 휴머니즘이 넘치는 사나이로 묘사되고 있다. 권력자(국방상)의 아들이 林沖의 아내에 반해 林沖에게 ‘모반죄’를 씌워&nbsp그를 귀양보낸다. 살아 돌아올 기약이 없는 林沖은 귀양지로 가기 직전 아내에게 休書(휴서)를 써 준다. 휴서는 고무신을 거꾸로 신어도 좋다는 남편의 의사 표시이다. 바로 이 대목에서 독자들은 눈시울을 붉히는 것이다. &nbsp
大相國寺는 戰國(전국)시대 魏(위)나라의 재상 信陵君(신릉군)의 私邸(사저) 자리에 세워진 사찰이다. 北齊시대엔 建國寺(건국사)라는 불교사원이 되었다가 唐나라 시대는 武測天(무측천)에 의해 재건되어 얼마 후 大相國寺라는 편액이 하사되었다. 宋나라 때는 황실의 願刹(원찰)이 되어 융성했다. 대상국사의 後苑(후원)에 위치한 八角殿(팔각전) 내에 모신 千手千眼(천수천안)의 觀音像(관음상)은 중국 佛像(불상) 최고의 名品으로 손꼽힌다.
開封의 宋都御街 |
필자는 섭씨 40도에 가까운 폭염 속에서 開封의 宋都御街(송도어가)를 걸었다. 大路 양쪽은 전통적인 붉은 색&nbsp건물로 통일시켜 北宋의 번화가를 재현하고 있다. 북한 의사 8명이 1963년 송도어가에 세운 高麗醫鋪(고려의포)도 보인다.
高麗醫鋪 |
中國史 최고의 名場面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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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都御街를 지나 龍亭(용정)공원을 둘러보았다. 용정은 宋의 궁궐이 있던 자리이다. 용정 내부에는 당시 宮廷(궁정)의 모습이 밀랍인형 등으로 재현되어 있다. 龍亭을 거닐면 宋 太祖 趙匡胤(조광윤)의 네이션 빌딩(nation-building, 국가건설)이 생각난다. 다음의 일화는 중국사 최고의 名場面(명장면)이라 할 만하다.
龍亭과 필자. 용정은 北宋의 궁궐터이다 |
宋 太祖 조광윤은 즉위 후 밤잠도 이루지 못하고 매일 밤 주요 보직을 맡은 將帥(장수)들의 동정을 살피려고 몸소 미행을 했다. 함박눈이 오는 어느 날 밤, 불시에 심복 대신 趙普(조보)의 집에 찾아가 그에게 국가의 百年大計를 물었다. 唐의 멸망 후부터 宋의 개국 전까지 54년간 다섯 왕조가 흥망을 거듭했던 만큼 太祖 조광윤에게는 쿠데타 방지에 의한 정권 안보가 가장 火急한 문제였다.
조보는 다음과 같이 답변했다.&nbsp&nbsp&nbsp&nbsp
“唐末부터 五代에 걸쳐 帝王이 빈번하게 교체된 것은 節度使(절도사)의 권력이 강대하고, 임금이 약한 逆立(역립)의 현상이 일어났기 때문입니다. 앞으로는 서서히 節度使(절도사)의 권력을 약화시키지 않으면 안 됩니다. 이를 위해서는 절도사의 재량으로 처리되는 금전과 米穀(미곡)을 제한하고, 그들이 장악하고 있는 軍權을 중앙정부에서 몰수해야 합니다. 그렇게 하면 天下는 저절로 태평하게 될 것입니다”&nbsp&nbsp&nbsp
이어지는 趙普의 말.
“近衛軍의 將官 石守信(석수신) 등은 부하를 통제할 그릇이 아닙니다. 다른 직책으로 옮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太祖는 깊이 느끼는 바 있어서 곧 守信 등 開國功臣(개국공신)들을 불러 酒宴(주연)을 베풀었다. 연회가 무르익을 무렵 太祖는 주위의 侍臣(시신)을 물리치고 守信 등 武將들에게 말했다.
“나는 그대들의 도움이 없었다면 天子가 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天子가 된 지금은 한시도 마음이 편할 때가 없고, 베개를 높이 하고 잠을 자지 못하는 형편이다. 누구든 기회만 있으면 天子가 되려고 하기 때문이지…….”
守信 등이 납작 엎드려 말했다.
“이상한 말씀을 하십니다. 이미 天命(천명)이 정해졌고, 감히 폐하의 목숨을 노리는 자는 없을 것입니다”
太祖가 말했다.
“당연, 그대들에겐 그런 異心이 있으리라고는 생각지 않아. 그러나 配下(배하)의 자들이 富貴를 탐하면 어떻게 될까. 그대들은 帝位를 욕심내지 않는다고 해도 한번 天子의 黃袍(황포)가 부하들에 의해 입혀진다면 어쩔 수 없잖은가”
《宋史》에 따르면 조광윤 자신도 부하가 황포를 입혀주는 바람에 回軍하여 그가 섬기던 後周의 일곱 살짜리 황제[恭帝]를 퇴위시키고, 그 자신이 황제가 되어 宋을 創業(창업)했다. 그 상세한 과정은 뒤에서 거론할 것이다. 그야 어떻든 守信 등은 눈물을 흘리고 말했다.
“바보처럼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습니다. 아무쪼록 臣들의 不憫(불민)이라고 생각하시고, 저희들이 가야 할 바를 가르쳐 주소서.”
“인생은 문틈으로부터 白馬가 달려가는 모습을 보는 것처럼 잠깐에 지나지 않는다. 이와 같은 인생에 있어 富貴를 구하는 것은 금전을 축적해서 스스로도 여생을 즐기고 자손에게도 물려주기 위해서다. 어떤가, 그대들도 苦勞(고로)가 많은 장군의 직책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가 좋은 땅을 골라 저택을 짓고, 자손의 번영을 꾀한다면……. 저택 안에 가수와 舞姬(무희)를 불러 매일 술과 함께 가까이 하고 안락하게 사는 것&#8212이러한 여생이 좋지 않겠는가.”
일동은 모두 拜伏(배복)하고 “臣들의 몸을 이렇게까지 생각해 주셔서 고맙습니다”를 연발했다. 다음날 일동은 모두 身病(신병)을 이유로 사직서를 냈다.&nbsp
漢 고조 劉邦(유방), 明 태조 朱元璋(주원장) 등 창업의 황제들은 모두 개국공신에 대해 무자비한 피의 숙청을 감행하여 왕조의 안정을 꾀했다. 狡兎死走狗烹(교토사주구팽), 즉 사냥철이 지나면 토끼를 쫓던 사냥개가 푹 삶겨 보신탕이 된다고 했던 韓信의 말은 개국의 通過儀禮(통과의례)처럼 들릴 정도였다. 이런 의미에서 宋 태조 조광윤의 온정주의는 역사의 淸凉劑(청량제)가 아닐 수 없다.&nbsp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