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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代 들어 庶民도 인간다운 삶이 가능해졌다

鄭淳台   |   2011-09-05 | hit 7319

흔적도 없이 사라진 萬歲山과 太湖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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北宋의 皇宮 동북쪽에는 萬歲山(만세산) 혹은 艮岳(간악: 북동쪽 산)이라 불리는 人工山이 조성되었다. 이 인공산을 만들기 위해 太湖石(태호석)이라는 奇岩怪石(기암괴석)을 운반해 오는 이른바 花石綱(화석강)이 대대적으로 전개되었다. ‘綱’이란 글자는 대량화물 또는 그것을 운반하는 大船團(대선단)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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萬歲山이 있었던 자리



화석강이라고 하면 《수호전》 마니아들은 얼굴에 푸른 점이 있는 ‘터프가이’라 해서 靑面獸(청면수)라는 별호로 불린 楊志(양지)를 생각해 낸다. 원래 楊志는 휘종에게 헌상하는 太湖石의 운반 담당이었다. 그러나 선박의 顚覆(전복)으로 太湖石이 수중에 가라앉는 바람에 처벌을 두려워해 도망자 생활을 했다. 우여곡절을 거쳐 楊志도 梁山泊에 入黨(입당)한다.

중국인이 왜 太湖石(태호석)을 좋아하는지, 도대체 그 속내를 알 수 없어 필자는 江蘇省(강소성)의 太湖(태호) 주변을 도는 김에 太湖石을 살핀 적이 있다. 石質(석질)이 단단하고 우아한 ‘돌의 나라’ 한국에서 온 필자에게 중국의 돌은 마치 빛바랜 骸骨(해골)을 만지는 듯한&nbsp느낌이었다.

蘇州의 拙政園(졸정원)·留園(유원) 등 유명한 人工 정원을 장식하고 있는 太湖石이 아름답다고 느껴질 때는 빗물을 머금고 있을 무렵뿐이었다. 그때 비로소 太湖石은 生氣를 되찾는다. 위의 두 정원과 더불어 중국의 4大 庭園으로 이름 높은 北京의 &#38948和園(이화원), 承德의 避暑山莊(피서산장)을 장식하는 기암괴석들도 모두 그러하다.&nbsp&nbsp

천년만년 갈 것 같았던 萬歲山은 지금 도대체 어디에 있는 것일까? 집채만 한 太湖石과 琪花瑤草(기화요초)로 장식된 萬歲山은, 지금 그 흔적조차 사라졌다. 黃河의 범람에 의해 開封의 지형은 靑田碧海(청전벽해)가 되고 말았던 것이다.

萬歲山 자리에서 동북쪽을 바라보면 北宋 시기에 쌓은 鐵塔(철탑)이 랜드 마크(Land-mark)인양 우뚝 솟아 있다. 송의 仁宗 때(1049년) 건립된 13층 팔각형 탑이다. 탑의 표면은 멀리서 보면 쇠가 녹슨 듯한 갈홍색이다. 그래서 鐵塔이라 부르는 모양이다. 정식 명칭은 開&#23453寺塔(개보사탑)이다. 지금 開&#23453寺는 땅 속에 파묻혀&nbsp흔적도 없다.

섭씨 40도의 무더위를 참으며 입구에서 1km 쯤 걸어 철탑에 접근했다. 철탑은 실제론 철탑이 아니라 유리벽돌 탑이다. 높이 55.58m. 탑 내부에는 계단이 있어 꼭대기까지 오를 수 있다. 꼭대기에 오르면 開封市의 모습을 둘러볼 수 있다 한다.&nbsp 그러나 올라가는 도중에 무더위로 쓰러질 것만 같아 ‘등반’을 포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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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代의 鐵塔. 開封의 랜드마크가 되었다



開&#23453寺塔은 원래 언덕 위에 세워진 탑이다. 北宋 시기의 개보사는 황하의 범람에 의한 토사의 퇴적으로 땅 속에 파묻히고 말았지만, 이 탑은 높은 지대에 축조된 탓에 지금도 제 모습을 완벽하게 유지하고 있다.

桑田碧海(상전벽해). 1000년 세월은 철탑의 동북쪽을 호수로 변화해 놓았다. 그 이름은 鐵塔湖(철탑호). 필자는 철탑호변에서 작은 動力(동력) 유선을 빌려 타고 호수를 일주했다, 석양 무렵의 호수에서 바라본 철탑은 絶景(절경)이었다. 철탑호 바깥쪽으로는 開封의 外城이 복원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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호수에서 바라본 석양의 철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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外城의 陳橋門(진교문)이 있을 만한 곳에서 잠시 배를 정박시키고 趙匡胤의 宋왕조 창업을 생각했다. 960년 1월3일, 조광윤은 南侵(남침)하는 거란군을 迎擊(영격)하기 위해 대군을 거느리고 陳橋門(진교문)을 통해 출성, 1일 行程의 陳橋驛(진교역)까지 진군한 뒤 野營(야영)을 했다. 그때 술에 취해 잠들었다가 부하들의 권유로 일어나 부하들에 의해 황제만 입는 黃袍(황포)를 걸치게 되었다. 그리고 回軍하여 陳橋門을 통해 開封에 入城하여 새 왕조의 주인이 되었다.&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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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명상하도의 무지개다리(上)를 實物로&nbsp재현해 놓았
다(下). 위 그림은 청명상하원 入口에도 새겨져 있었
다. &nbsp
저녁 무렵, ‘역사문화 테마파크’ 淸明上河園(청명상하원)에 입장했다. 청명상하원은 北宋 시대의 文人畵家인&nbsp 張擇端(장택단)의 두루마리 그림 ‘淸明上河圖’를 實物(실물)로 재현한 곳이다.

‘청명상하도’는 北宋시대의 옷차림·運河·선박·수레·장터·가옥·극장·호화술집·약국·橋梁(교량)·거리·城門 등의 모습을 寫實的(사실적)으로 그려져 있는 만큼 史料 가치가 매우 높다. 글로 쓴 기록은 당시로선 너무 상식적이거나 일반적인 것은 생략하게 마련이지만, 記錄畵(기록화)의 경우 그런 부분까지 세세하게 그려 넣기 때문이다.&nbsp

그런 그림 ‘청명상하도’를 實物로 재현한 곳을 걷는다는 것은 매우 신나는 일이다. 다만 최근에 조성한 것으로 세월의 이끼가 좀 필요한 듯했다. 입장료는 미화 40달러.&nbsp&nbsp


北宋 궁궐이 불타면서 처음 밝혀진 趙匡胤의 石刻遺訓 내용
宋代 들어 庶民도 인간다운 삶이 가능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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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夢華쇼의 매표소
밤에는 實景(실경) 무대에서 펼쳐지는 ‘東京夢華(동경몽화)쇼’를 관람했다. 관람요금은 미화 50달러. 開封의 전성시대를 그린 《東京夢華錄》이란 책의 이름에서 따온 것이다. 北宋시대&nbsp 일반 서민들의 장터 닭싸움, 폭죽놀이, 高麗·거란·일본 사신의 행렬, 여진족의 정복국가 金과의 전쟁 장면 등이 초대형 地上·水上 무대에서 1시간 동안 펼쳐졌다.

지상무대에서는 騎馬武士(기마무사)가 달리고, 水上무대에서는 2층 선박이 등장하며, 출연 인원이 700명이나 된다. 중국을 대표하는 영화감독 장이머우(張藝謨) 씨가 감독했다고 한다. 5년 전 필자는 廣西장족자치구의 省都(성도)인 桂林(계림)의 &#28435江(리강)과 그 강변의 實景무대에서도 소수민족 1000여 명이 출연하는 장이머우 감독의 ‘쇼’를 구경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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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경몽화쇼의 무대



두 개의 實景 쇼에서 필자가 받은 느낌은, 장이머우 감독은 국가적 지원 아래 中國에서 대량 동원이 용이한 사람들과 사회주의적 야간 조명을 능숙하게 활용하고 있다는 점이었다. 사회주의 조명기술은 아직도 모스크바와 상해의 밤을 화려하게 장식하고 있는데, 장이머우는 그것을 自然에까지 확대한 것이다. 그러나 그의 이런 ‘實景쇼’는 1988년에 그가 감독한 영화 ‘붉은 수수밭’의 예술적 수준에 훨씬 못 미치는 것임엔 틀림없다.

이런 장이머우의 實景쇼를 모방해 경주관광개발공사가 보문호에 세운 水上(수상)공연장은 민자 유치의 실패로 실현되지도 못하고 있다. 최근에는 전남 영암군이 430억 원을 들여 월출산 사자저수지의 수상무대에서 ‘山水 뮤지컬’을 기획하고 있어 ‘過慾’(과욕)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다.&nbsp&nbsp&nbsp&nbsp&nbsp&nbs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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東京夢華쇼의 최후 장면은 開封이 金軍에게 함락되어 궁궐이 불타는 장면이다. 이것도 야간조명을 이용하여 그럴듯하게 표현되었다. 바로 이 순간, 필자의 머리엔 宋 太祖의 石碑遺訓(석비유훈)이 떠올랐다.&nbsp&nbsp

靖康 원년(1126), 金軍이 開封을 유린했을 때 궁전도 파괴되어 石刻遺訓(석각유훈)이란 것이 세상에 처음 밝혀지게 되었다. 그것은 太祖 조광윤이 자손들을 위해 그의 遺訓(유훈)을 돌에 새겨 두었던 것이다. 高麗 태조 王建의 訓要十條(훈요십조)와 같은 것이었다. 宋나라 때는 황제가 즉위하면 궁중의 깊숙한 곳의 석비유훈 앞에서 일종의 秘儀(비의)를 행했다.&nbsp 宰相(재상)이라도 석각유훈의 내용은 알 수 없었다. 그렇다면 그 내용은 무엇이었을까?

그 遺訓의 내용은 後周 황실의 후예인 施씨를 끝까지 돌보아 줄 것, 그리고 士大夫를 言論(언론)을 이유로 죽여서는 안 된다는 것 등이었다.

宋 太祖는 그에게 江山(강산=天下)을 넘긴 北周의 恭帝 施宗訓(시종훈)을 鄭王(정왕)으로 封(봉)하고 두텁게 대우했다. 宋은 金에 쫓겨 淮河(회하) 이남으로 南遷(남천)한 후에도 施 씨의 자손을 세워 제사가 끊어지지 않도록 배려했다. 이것이야말로 역사를 생각하는 사람의 마음을 맑게 해주는 美談(미담)이 아닐 수 없다.&nbsp

北宋 당시 ‘石刻 유훈’의 존재에 대해서는 황제 이외엔 누구도 몰랐지만, 言論 때문에 사대부를 죽이지 말라는 유훈은 일반에게도 알려진 것 같다. 이로 인해 宋代엔 言論戰(언론전)이 유별나게 뜨거웠고, 많은 論客(논객)도 나왔다. 물론 많은 制約이 있었지만,&nbsp 宋 이후 王朝, 심지어 현대 中國과 비교해도 宋代는 언론의 자유가 있었다. 또한 宋代 이전 貴族社會(귀족사회)에서는 벌레 취급을 받았던 서민도 宋代에 들어 비로소 인간다운 생활이 가능하게 되었다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렇다면 北宋은 어떻게 성립하고 또 소멸되었는지를 짚어볼 필요가 있을 것 같다.&nbsp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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