趙匡胤 쿠데타의 眞相
鄭淳台 | 2011-09-06 | hit 11250
술에 취해 잠자다가(?)…
宋의 太祖 趙匡胤(조광윤)은 洛陽(낙양)의 甲馬營(갑마영)이라고 하는 兵營(병영) 안에서 태어났다. 아버지 弘銀(홍은)은 낙양의 近衛(근위) 장교였다. 그의 아들 광윤은 後周의 世宗 밑에서 6년간 軍政을 담당하며 後周의 군부 내에서 풍부한 인맥을 갖게 되었다. 豪酒家(호주가)인데다 성격이 대범해 부하들이 잘 따랐고, 반란군 토벌 등 여러 차례에 걸쳐 戰功(전공)도 세웠다.&nbsp&nbsp&nbsp
개봉 外城의 陳橋門 자리 |
이 시대의 군대는 황제가 임명한 節度使(절도사)를 보이콧한다든지, 절도사를 아예 자기들이 옹립한다든지 했다. 절도사는 軍事와 民政을 함께 관장했기 때문에 小황제로 불렸다. 五代 시대의 황제는 거의 절도사 출신이었다.
後周의 世宗 施榮(시영)은 폭군이 난무한 五代에선 보기 드문 名君이었다. 그는 절도사의 힘을 깎는 한편 近衛軍(근위군: 중앙군)을 강화했다. 이처럼 황제 직속의 중앙군을 강화하고 절도사 휘하의 지방군을 약화시키는 정책을 强幹弱枝(강간약지)라고 불렀다.&nbsp
後周의 世宗은 남부 중국의 최강인 南唐을 굴복시켜 淮南江北(양자강 이북―회하 이남)의 땅을 할양받는 등 통일대업에 박차를 가했다. 그러나 그는 나이 불과 39세로 急死(급사)하고, 그의 아들 崇訓(숭훈)이 겨우 7세의 나이로 후계자가 되었다. 北周의 軍心은 어린 황제에 대해 불안을 느끼고 있었다.&nbsp
그러던 960년 정초, 거란과 北漢(북한)의 연합군이 국경을 침범했다. 後周의 近衛軍(근위군)에 동원령이 발령되었다. 국경을 향하는 近衛軍은 국도 開封을 차례로 출발했다. 조광윤은 殿前都點檢(전전도점검)이었다. 殿前都點檢이란 皇帝 앞에 포진하는 近衛軍(근위군)의 총사령관을 말한다.&nbsp
董卓(동탁)이 洛陽(낙양)에 방화하고 있다 |
北宋 시대의 步兵과 騎兵(출처:中國전통병기圖鑑)&gt |
태조는 문관 優位(우위)의 체제 확립에 진력했다. 그 이유는 무엇일까. 唐末(당말)로부터 五代에 걸쳐서 節度使(절도사: 藩鎭)가 각 지방에 할거하여 독립왕국을 세웠기 때문이다. 태조가 즉위했던 그 해(960년)에도 昭義(소의)의 절도사 李筠(이균)과 淮南(회남)의 절도사 李重鎭(이중진)가 잇달아 반란을 일으켰다. 태조는 이를 토벌하고 정권 안정화에 착수, 절도사로부터 民政·軍事·財政(재정)의 3權을 빼앗아 그것을 有名無實(유명무실)한 존재로 만들었다. 태조·태종 兩代에 걸친 노력으로 중앙집권적 군주독재제가 확립되었다.&nbsp
宋 태조는 중앙집권체제의 확립에 필요한 文官들을 그가 직접 主宰(주재)하는 과거의 최종관문인 殿試(전시)를 통해 배출된 進士들로 충원했다. 宋代의 士大夫는 고급관료(정치가)와 知的 엘리트, 이 두 가지 측면을 함께 보유했다. 그들은 天子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왕성한 의기와 理想을 가지고 정치에 임했다.
그러나 宋은 문관 優位의 체제를 취한 것이 하나의 주요 原因이 되어 군사력의 약체화를 초래하게 되었다.&nbsp후일 거란·西夏·金(금) 등 북방세력의 침공에 고통을 받게 되는 것도 바로 그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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太宗 즉위의 미스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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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제 太祖 조광윤의 죽음과 그의 동생 趙匡義(조광의)의 황제 즉위를 둘러싼 미스터리에 대해 살펴볼 차례이다. 太祖의 병이 깊어지자 황후 宋씨는 환관 王繼恩(왕계은)에게 太祖의 차남 德芳(덕방)을 불러오도록 했다. 그런데 王繼恩은 德芳을 불러오지 않고, 곧바로 晋王을 불러왔다. 晋王은 太祖의 바로 아래 동생인 趙匡義이며, 그는 일찍이 陳橋의 回軍(회군)을 주도했다.&nbsp
北宋 초기의 전투 장면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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宋의 태조(上)와 태종(下) |
燕雲(연운) 16州의 지도 |
연운 16주 내에는 雁門(안문)·居庸(거용)·松亭(송정)·古北(고북)·紫荊(자형) 등 5關이 있어서 北方 방어의 요충을 이룬다. 따라서 연운 16주의 수복은 五代 이래 中原에 건국한 나라들의 숙원이었다.&nbsp&nbsp
宋의 태종은 패전을 설욕하기 위해 대내적으로는 軍伍(군오)를 정비하고, 대외적으로는 고려·安定國 등과 연합하여 &#25486角之勢(기각지세)를 이루려 했다. 드디어 986년 3월, 宋 태종은 제2차 거란 정벌을 감행했다. 고려는 이에 응해 군사를 일으켰다. 고려군이 비록 거란 領內에까지 진공하지는 않았지만, 국경에 진격하여 거란에 대한 심리적 타격을 가한 것만은 사실이다.&nbsp
그러나 이번에도 송군은 岐溝關(기구관)에서 야율휴가에게 대패했다. 이 두 번의 패전 이후 宋은 사기가 저하되어 그 후 거란과 싸울 엄두도 내지 못하게 된다.
步兵 위주의 宋은 騎馬民族국가 거란에 足脫不及
이것은 건국 이후 文官을 중시하고 무관을 천시하며 禁軍 이외의 지방군의 약화시키는 바람에 宋軍의 전투력이 약해졌기 때문이었다. 특히 송군은 步兵(보병) 위주였는데, 거란군은 기동력이 뛰어난 騎兵(기병)이 主力이었다.&nbsp&nbsp&nbsp
宋의 문제는 戰馬(전마)의 확보였다. 말(馬)이 근대 이전의 국가경영에 얼마나 중요했던지 ‘國之强弱在馬(국지강약재마)’라고 할 정도였다. 馬匹(마필)은 생산·교통·교역·전쟁에 사용되어 국가간에는 그 확보 경쟁이 치열했다. 宋의 영토엔 草原지대가 거의 없어 말의 생산에 절대 불리했다.&nbsp
태종은 즉위년(976년)에 諸軍(제군)의 戰備(전비)를 검열한 결과 戰馬가 태부족이었다. 이 부족한 마필을 보충하기 위해 有敢藏匿者殺(유감장익자살), 즉 “감히 보유한 말을 숨기는 자는 죽인다”는 강압적 방식으로 吏民(이민)의 말 17만 필을 강제 매입했다. 그러나 量은 물론 質도 만족한 것이 되지 못했다. 이런 말에 騎乘(기승)한 宋의 기병이 유아 때부터 말을 탄 유목기마민족의 戰士(전사)에게 이길 수 없었던 것이었다.&nbsp&nbsp
거란의 본거지 內몽골 초원지역과 더불어 東아시아의 名馬산지로 유명한 곳은 여진이었다. 여진의 땅은 부여·고구려·발해의 옛 땅으로 역사적으로는 고구려의 果下馬(과하마)와 발해의 率濱馬(솔빈마)가 유명했다.&nbsp&nbsp&nbsp&nbsp
사료의 결핍으로 단언할 수 없지만, 고려는 건국 초부터 여진과&nbsp馬 무역을 했던 것으로 짐작된다. 특히 태조 19년(936), 후백제와의 최후 결전인 一利川(일리천: 경북 김천) 전투 때 고려군에는 黑水靺鞨(흑수말갈)의 勁騎(경기) 9500騎가 참여했다. 9500騎라면 고려군의 全기병 중 5분의 1에 해당하는 숫자였다.&nbsp
고려는 後三國 통일과정에서 이미 상당한 수량의 戰馬가 필요했기 때문에 여진의 말을 대량으로 수입한 것 같다. 定宗 때에도 거란 침입을 대비하여 光軍(광군)을 조직하면서 여진의 말을 수입한 사실이 기록되어 있다.&nbsp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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