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敵이 겁나 遷都(천도)를 주장한 奸臣들

鄭淳台   |   2011-09-08 | hit 9285

982년, 遼(요)는 또다시 국명을 거란이라 바꾸었다. 國粹派(국수파)가 집권하면 거란, 漢化派(한화파)가 집권하면 遼라고 불렀던 것이다. 西洋의 사학자들은 거란족의 나라를 키타이 帝國이라고 부른다. 러시아에서는 키타이가 바로 中國을 의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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키타이(거란) 帝國의 5京과 皇帝陵



고려 成宗 13년(994), 고려는 거란(키타이 帝國)의 年號(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다. 당시 키타이 帝國은 東아시아의 패권국이었다. 이 해에 徐熙가 거란의 묵인 하에 여진인을 격파하고 江東 6州를 회복함으로써 영토가 압록강 이남까지 북상했다.

또 고려는 사신 元郁(원욱)을 宋에 보내어 짐짓 援兵(원병)을 요청하였으나 宋은 거란이 두려워 거절했다. 이에 고려는 宋과 모양 좋게 단교했다. 995년, 徐熙는 安義(안의: 安州)와 興化(흥화: 義州)에 성채를 쌓았다. 장차 있을지 모를 거란의 침입에 대비한 것이었다.

宋 太宗은 燕雲(연운)지방 회복을 시도해 제2차 북벌을 감행했지만, 거란軍에 잇달아 패전하여, 숙원을 이룩할 수 없게 되었다.

뒤늦게 내셔널리즘에 눈뜬 宋은 漢族 거주지 이외에 영토를 보유하지 못했다. 이것은 당시 전쟁에 가장 필요했던 軍馬(군마)의 공급을 매우 어렵게 했다. 宋군이 거란군과 싸워 패배한 것도 이 약점 때문이었다.&nbsp

宋은 여진의 전마 도입에 적극적이었다. 여진족의 戰馬는 작은 체구에 비해 지구력이 강해 전투에 뛰어나다는 평가를 받고 있었다.

거란은 여진의 말이 宋으로 유입되는 것을 막으려 했다. 예컨대 거란 聖宗 統和 13년(995년)에는 豪州刺史 耶律唐古(호주자사 야율당고)가 科條를 엄하게 하여 ‘奸民’(간민)들이 宋과 西夏에 말을 팔지 못하도록 단속했던 일이 있었다. 종래, 여진의 對宋 말(馬)수송로는 압록강을 지나 渡海(도해)하여 沙門島를 거쳐 山東반도의 登州(등주)에 상륙시키는 것이었다. 거란은 이 길을 막기 위해 압록강 하구에 威冠(위관)·振化·來遠의 3柵(책)을 쌓고 군사 3000 명을 두어 지키도록 했다.

金渭顯(김위현) 교수의 논문 &lt女眞의 馬貿易考&gt에 따르면&nbsp 宋은 고려에 請(청)하여 고려 영내 통로(淸川江―分水嶺―禿魯江―滿浦津)를 통해 戰馬를 제공받았다고 한다. 다만, 이것은 거란의 감시를 피하는 일이었기 때문에 말 거래의 규모 등에 대한 구체적 자료는 누락된 것 같다. 이렇게 고려는 국교 단절 이후에도&nbsp‘문화 선진국’ 宋의 군사력 증강을 측면에서 지원했다.

무력에 自信이 없는 宋왕조는 대외적 지위를 개선하기 위해 그 경제자원을 이용하려 했다. 宋은 국내의 중요 물품인 소금·茶·白礬(백반) 등에 대해 엄중한 전매제도를 시행, 그 이익금으로 황제에 직속하는 禁軍(금군)을 양성하여, 禁軍의 힘에 의해 국내의 질서를 유지하고, 국경도 경비했다. 어린 시절 손톱에 봉숭아물을 들일 때나 쓰였던 백반은, 실은 媒染料(매염료)나 止血劑(지혈제)로 사용되는 생필품이었다. 또 무역을 국가통제 하에 두고, 특히 거란에 대해서는 자주 국경 폐쇄와 통상 거절의 조치를 취해 부진한 외교를 측면에서 돕도록 했던 것이다.

당시, 생활 정도를 겨우 좀 향상시키고 있던 거란에 있어 宋과의 통상 두절은 경제적으로 참기 어려운 고통이었다. 宋군의 2회 침입에 대해 大타격을 가해 격퇴시키기는 했지만, 그때마다 영내의 漢族이 동요할 우려가 있어 바짝 긴장했다.


敵이 겁나 遷都를 주장한 奸臣들

드디어 거란의 대공세가 개시되었다. 1004년, 거란의 聖宗은 그의 어머니 蕭 씨와 함께 20만 대군을 거느리고 割地(할지)를 요구하면서 宋을 굴복시키려 했다.&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nbsp

이리하여 宋왕조는, 개국 이래 최대의 위기를 맞게 되었다. 그때가 太宗의 아들 眞宗(997-1022)이 즉위한 지 3년째였다. 副재상 陳堯&#21471(진요수)는 자기 고향인 蜀(촉)으로 피난 가자고 진언했다. 같은 副재상 王欽若(왕흠약)은 자기의 고향인 江南으로 피난하자는 의견을 내놓았다. 眞宗은 재상 寇俊(구준)을 불러 遷都(천도)에 대한 견해를 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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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인한 협상 조건을 관철한 항전파 재상 寇準
寇準은 단호하게 말했다.
“천도의 의견을 낸 자들의 허리를 잘라 血祭(혈제)를 올리고, 그런 후 北伐의 兵을 출진시켜야 합니다.”&nbsp&nbsp

‘硬骨(경골)의 재상’ 寇準의 주장에 움직인 眞宗은 출진을 결심했다. 開封을 뒤로 한 眞宗은 드디어 衛南(위남)까지 북진했다.

거란의 대군은 황하 北岸에 위치한 전州에 쇄도해 세 방면으로 포위하고 격렬하게 공격해 왔다. 宋軍의 대장군 李繼隆(이계륭) 등이 出城하여 적을 迎擊(영격)했다. 이 싸움에서 거란의 대장 撻覽(달람)이 弩(노)에 맞아 戰死했다. 이 때문에 거란은 戰意(전의)를 잃고 再공세를 취하지 못했다.

寇準은, 황하를 건너 戰線에 진출하도록 眞宗에게 강청했다. 근위군 사령관 高瓊(고경)도 극력 도하할 것을 진언했다. 그러나 진종은 주저하여 끝내 결단하지 못했다. 고경이 호위의 병사들을 지휘하여 眞宗의 車를 전진시켰다. 이것을 목격한 측근 文官 梁適(양적)이 고경의 무례를 꾸짖었다.

이에 고경은 격노하여 梁適에게 호통을 쳤다.
“그대들은 이러한 때에도 사람의 無禮(무례)를 나무랄 여유가 있는가. 그러한 틈이 있다면 得意(득의)의 詩라도 지어서 거란兵을 퇴각시키면 어떨까.”


&#28598淵(전연)의 體制 성립

거란은 대군을 몰고 내려왔지만, 戰局(전국)이 유리하게 전개되지 않았다. 그래서 聖宗은 사자를 보내 和議(화의)를 청했다. 眞宗은 曺利用을 사자로 세워 수락의 회답을 보냈다. 양국 모두가 決戰을 회피하려 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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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北宋 침공도



曺利用은 거란의 사자와 함께 歸陣(귀진)했다. 거란의 사자는 강화의 조건으로서, 後周의 世宗 때 거란으로부터 탈취한 關南의 舊영토를 반환할 것을 요구했다. 이에 眞宗은 “땅은 절대로 안 된다. 그 대신에 金帛(금백: 금과 비단)을 주라”고 했다.

‘關南의 舊영토’란 五代시대 後晋의 태조 石敬&#29805(석경당)이 거란의 軍援(군원)을 얻어 後唐을 패망시켰을 때, 그 사례로 거란에게 바친 幽州(유주: 현재의 北京) 등 16州의 땅을 말한다. 그 후 後周의 世宗은 거란을 쳐서 瓦橋關(와교관)·益津關(익진관) 이남의 3州를 탈환했다. 그래서 거란 측은 關南의 舊영토 운운한 것이었다. 다음은 협상 과정에서의 에피소드 한 토막.

출발을 앞두고 曺利用은 매년 거란에 증정해야 할 金帛의 수량에 대한 가이드라인을 물었다. 氣가 약한 眞宗은 “최악의 경우, 100만이라도 하는 수 없지”라고 답했다. 그런데 재상 寇準은 曺利用을 따로 불러 “만약 30만이 넘게 협상을 하고 내 앞에 나타나면 즉각 목을 베어버리겠다”고 으름장을 놓았다.&nbsp

결국, 화의는 성립되고 거란군은 철군했다. 이것이 중국 역사상 유명한 전연의 盟이다. 전연은 &#28598州에 있는 호수의 이름이다. 그 내용은 다음과 같다.
&nbsp
1. 국경은 변경하지 않는다. 즉 關 이남은 宋, 關 이북은 거란의 것이다.
2. 宋은 兄, 거란은 弟의 禮(예)로써 교제한다.
3. 宋은 매년 銀 10만 냥, 비단 20만 필을 거란에 증정한다.

이후 宋·거란은 對等(대등)의 수교국이 되어 매년 정기적으로 사신을 보내어 音信(음신)을 통하게 되었다. 양국의 和約은 그 후 다소의 변경을 거칠 뿐으로서 약 120년에 걸쳐 준수되어 遼 멸망 직전까지 계속했다. 이것은 중국 역사상 일찍이 볼 수 없었던 현상이다. 이와 같이 하여 東아시아 세계는 거의 자주적 민족국가가 竝存(병존)하는 상태로 되었다. 이것을 전연의 체제라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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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使朝聘圖. 거란의 사절단이 開封의 궁정에 온
장면을 묘사하고 있다
&#28598淵으로부터 귀환한 眞宗은 이전보다 정중한 태도로 寇準을 대우했다. 이를 질시한 王欽若(왕흠약) 등은 “전연의 盟은 城下의 盟”이며 “전연의 役 때 寇準은 폐하를 밑천으로 삼아 큰 도박을 했던 것”이라고 주장했다. 城下의 盟은 首都의 城下까지 공격당해 맺는 강화조약으로 가장 수치스런 패전으로 간주되었다.

왕흠약은 거란이 남침하자 싸워보지도 않고 江南으로 遷都(천도)하자고 진언했던 비겁한 인물이다. 그런 그가 국가위기를 극복한 재상을 중상·모략한 것은 참으로 간사한 짓이었다. 그 후 眞宗은 서서히 寇準을 輕視(경시)하다가 드디어 재상 직으로부터 해임했다.&nbsp

‘전연의 맹’으로 뒤늦게 자존심이 심히 상한 眞宗이 고민에 빠지자 그 허점을 파고 든 사람이 간신 王欽若이었다. 그는 夷敵(이적)에게 國威(국위)를 과시해야 한다고 주장하고, 일부러 가짜 天書(천서: 예언서)까지 조작하여 천하를 평안케 한 天子(천자)가 泰山(태산)에서 제사를 지내는 이른바 ‘封禪(봉선)의 의식’을 거행하도록 했다.

또 전국 각지에 天慶觀(천경관)이라든가 聖祖殿(성조전) 등 도교의 시설을 만들어서 성대한 제사를 올렸다. 물론 眞宗의 기분을 좋게 하기 위한 일들이었지만, 나라의 재정을 이런 데 낭비함으로써 백성의 부담만 늘게 했다.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