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文革 4인방은 이렇게 제거되었다

鄭淳台   |   2011-12-22 | hit 11192

*출처: 월간조선


毛澤東의 비호 아래 4인방의 세력이 신장되는 가운데 국무원 총리 周恩來는 文革기간 중 파괴된 黨·政 조직의 재건과 피폐한 경제를 부흥시키고 사회질서를 잡는 일에 全力을 기울이고 있었다. 毛澤東이 여전히 제1인자의 지위를 지키고 있었지만, 경제발전을 꾀하는 행정기구는 점차 周恩來 중심으로 결집되고 있었다.

4인방이 주도한 「批林批孔」 운동에서의 孔子는 周恩來를 의미했다. 4인방은 劉少奇·林彪의 몰락으로부터 제2인자의 위상을 절대로 용납하지 않는 毛澤東의 唯我獨尊(유아독존)을 간파했던 것이다.

그러나 4인방은 급속한 세력신장에도 불구하고 당내에서 소수집단이었고, 지지세력은 소수 극좌파의 적극분자·청년·대학생 등이었으므로 중국 사회에서 깊은 조직과 기반을 갖고 있지 못했다. 江靑 등은 권력을 장악한 후에 각지의 당조직, 청년단, 총공회(노동조합) 등의 조직에 추종세력들 박아 세력을 확장했다. 특히 취약한 軍 기반에 대한 대책으로 도시민병을 조직하여 軍에 대항하려 했다. 중국공산당의 내부 문서는 이렇게 묘사하였다.

<1975년 周恩來 동지가 중병을 앓자 鄧小平 동지가 毛澤東 동지의 지지를 받아 중앙의 일상활동을 주재하였다. 鄧小平 동지가 군사위원확대회의나 공업·농업·교통·과학기술 등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한 일련의 중요한 회의를 열어 많은 분야의 사업을 정돈한 결과, 정세는 눈에 띄게 호전되었다. 그러나 毛澤東 동지는 鄧小平 동지가 「문화대혁명」의 오류를 체계적으로 시정하는 것을 용인하지 못하고, 또다시 「鄧小平을 비판하고 우경부활풍조를 반격하는 운동」(批鄧反擊右傾飜案風)을 일으킴으로써 전국이 다시 혼란에 빠졌다>

암을 앓았던 周恩來는 鄧小平이 자신의 뒤를 이어 총리직을 맡게 하려고 움직였다. 文革에서 타도의 목표가 되었지만, 鄧小平은 劉少奇처럼 버려지기에는 너무도 유능하고 정력적이었으며, 특히 軍과도 관계가 깊은 고참이었다. 1975년 1월 제4차 전국인민대표자대회가 열리기 직전 鄧小平은 黨의 부주석이 되었으며 권력의 핵심인 정치국 상무위원회 위원이 되었다. 이 全人大에서 그는 국무원 부총리와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 선출되어 毛澤東과 周恩來에 이어 서열 3위에 올랐다. 周恩來는 이 대회에서 자신의 마지막 공식활동의 하나인 농업, 공업, 국방, 과학기술의 「4개 현대화의 요구」를 제시했다.

<1976년 1월 周恩來 동지가 서거하였다. 周恩來 동지는 당과 인민에게 끝없이 충성하였으며 나라를 위하여 온몸을 다 바쳤다. …그의 서거는 全黨과 인민을 끝없는 슬픔에 빠지게 하였다>

周恩來가 사망하자 4인방은 어떤 조문도 허용하지 않았다. 그러나 4월5일 淸明節이 되자 사람들은 죽은 총리에 대한 존경을 표하기 위해 천안문 광장에 모여들어 인민영웅기념비에 화환을 봉헌했다.

<그해 4월에는, 天安門사건으로 대표되는 周恩來 총리를 추도하고 4인방에 반대하는 강력한 항의운동이 전국적으로 일어났다. …당시 중앙정치국과 毛澤東 동지는 천안문사건의 성격에 잘못된 판단을 내려 鄧小平 동지가 黨 안팍에서 가진 모든 직책을 박탈하는 오류를 범하였다>

4인방의 지시를 받은 北京市 공안국은 시민들이 바친 조화를 치워 버렸다. 분노한 군중들은 자발적으로 격렬한 시위를 벌이면서 공안기관의 기물과 차량을 파괴했다.

천안문사건이 발생하자 4인방은 鄧小平 제거의 기회로 판단하여 이를 「反혁명적」이라고 규정하면서 鄧小平이 뒤에서 조정 선동하고 있다고 당시 병상에 있던 毛澤東에 보고했다. 鄧小平은 毛澤東의 지시에 의해 당적만 유지한 채 권좌에서 쫓겨나 행동까지 감시당했다.


華國鋒의 벼락 출세

毛澤東은 文革 온건파에 속하는 華國鋒(화국봉)을 周恩來의 후임으로 국무원총리(代行) 겸 黨 제1부주석으로 임명했다. 華國鋒은 毛澤東의 고향 湖南省(호남성) 湘潭縣(상담현) 黨서기 출신으로 외모도 毛澤東과 비슷하다. 그는 상담현 黨서기 시절부터 대약진운동과 인민공사의 실패에 대한 책임으로 비판받고 있던 毛澤東을 적극 옹호함으로써 일약 호남성 黨서기로 발탁되었다. 이어 黨중앙위원으로 선출되었고, 林彪사건이 발발하자 조사위원이 되어 林彪의 「反黨罪」를 밝혀 毛澤東의 두터운 신임을 얻었다. 1974년에는 국무원 공안부장을 맡아 권력의 핵심부에 접근했다.

한편 천안문사태를 통해 폭발한 民意가 자신들에게 불리하다는 사실을 간파한 4인방은 華國鋒의 국무원 총리대행 취임을 환영하고 그들의 권력장악에 있어 장기적으로 유리할 것으로 판단했다. 이후 4인방은 신문·잡지·방송 등 대중매체를 통해 실무파에 대한 비난과 공격을 강화하면서 각종 캠페인을 전개했다.

1976년 7월, 北京 동쪽 공업도시 唐山市에서 强度 7.8의 지진이 발생하여 사망자 65만 명이라는 대참변이 빚어졌다. 4인방에 대한 민심은 더욱 흉흉해져 天災와 人災 사이에 긴밀한 연관이 있는 것으로 믿었다(믿고 싶어했다). 엄청난 재난 이후 毛澤東이 할 수 있는 죽는 일밖에 없었다.


毛澤東 死後의 4人幇 숙청

<1976년 9월, 毛澤東 동지가 서거하자 江靑 반혁명집단은 당과 국가의 최고 영도권을 탈취하려는 음모활동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해 10월 상순, 黨중앙정치국은 당과 인민의 뜻에 따라 江靑 반혁명집단을 단호히 분쇄하고 「문화대혁명」이라는 재난에 終止符를 찍었다. …江靑 반혁명집단을 분쇄하는 투쟁에서는 華國鋒, 葉劍英, 李先念 등의 동지가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毛澤東의 사망으로 권력투쟁은 새 국면을 맞았다. 華國鋒은 4인방의 극좌노선이 인민들에게 지지를 얻지 못하고 있고, 毛澤東의 후원 외에는 권력투쟁에 필요한 조직기반이나 武力的 배경이 허약하고 가진 것이라고는 「펜과 큰 목소리뿐」이라는 약점을 간파했다. 華國鋒은 葉劍英·李先念 등 軍·黨 원로들의 지지 속에 毛澤東의 경호를 맡아 오던 汪東興(왕동흥)을 포섭했다. 4인방은 왕동흥 휘하의 중앙경호부대(8341부대)에 의해 저항 한번 해보지도 못한 채 체포되었다.

4인방 체포 이후 당 안팎에선 鄧小平의 복권, 4인방의 파벌에 대한 철저한 분쇄, 천안문사건을 포함해 잘못 처리된 사건의 시정을 요구하는 소리가 높았다. 毛澤東에 의해 후계자로 지명된 華國鋒으로선 모두 간단하게 처리할 수 있는 문제가 아니었다.

《당시 당의 중앙업무를 주관하던 華國鋒은 「毛주석의 기치를 높이 들자」는 구실로 毛澤東에 대한 개인숭배를 지속하였으며 동시에 자신에 대한 개인숭배를 조작하고 받아들였다. 처음에는 「鄧小平 비판 계속」을 요구하다가 후에는 천안문사건이 反혁명사건임을 다시 한 번 밝혔으며, 독소가 매우 강한 4인방의 반동적인 글과 「문화대혁명」의 잘못된 이론·구호에 대하여 층층이 禁區(금구)를 설치하여 비판을 못 하게 하였다. 그리하여 적발과 비판과 조사운동이 깊숙이 전개되지 못하였으며, 반란을 진압하고 회복하는 작업도 순조롭게 진행되지 못하였다》


『두 가지 무릇은 안 된다』

1977년 3월 중앙사업회의에서 華國鋒은 「두 가지 무릇(兩個凡是)」이라는 관점을 밝혔다. 「두 가지 무릇」이란 『무릇 毛주석이 내린 결정은 우리 모두가 굳건히 유지해야 하고, 무릇 毛주석의 지시는 모두가 줄곧 어기지 말고 지켜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鄧小平은 黨중앙에 서한을 보내 「두 가지 무릇」에 대해 반대했다. 1977년 7월에 개최된 제10기 3中全會에서는 4인방을 黨籍(당적)에서 영구제명했으며, 華國鋒의 黨주석 취임을 정식으로 추인했다. 그러나 이보다 더 의미심장했던 것은 이 회의에서 鄧小平이 黨부주석, 정무원부총리, 인민해방군 총참모장으로 화려하게 복귀했다는 사실이다. 그만큼 당 안팎에서 鄧小平의 복귀와 천안문사태에 대한 再평가의 요구가 높았기 때문이었다.

華國鋒은 그의 정권 수립과 함께 1980년까지 식량 3억5000만t을 생산하고, 1985년까지 탄광·유전·가스전·발전소·철도·항만의 개발과 건설 등 120개의 대형 프로젝트를 추진, 중국 경제를 세계 선두그룹에 진입시킨다는 야심찬 계획을 제시했다. 그러나 1978년 이후의 「제2차 대약진」 계획은 중공업에 치중했기 때문에 농업분야에서부터 파탄이 일어났다.

이같은 華國鋒의 경제실책은 그에 대한 비판과 함께 권력투쟁으로 번졌다. 복잡하게 얽힌 권력투쟁의 최후 승자는 鄧小平이었다. 毛澤東에 의해 키워진 華國鋒은 권력기반이 취약하여 黨軍에 추종세력이 강한 鄧小平에게 대항할 수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