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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의 6000년》-서울을 사랑하고 서울을 자랑하게 만드는 책!

鄭淳台(조갑제닷컴)   |   2018-08-24 | hit 1747

서울에는 만만한 땅이 없습니다. 서울의 선사(先史)시대는 지금부터 6000년 전 한강 본류 유역에서 전개되었습니다. 그 중심은 강동구 암사동 선사 주거지이며, 그것은 국내 최대의 신석기 유적입니다. 암사동과 그 주변의 여러 선사 유적지는 인간의 원초적(原初的) 생존에 있어 한강 본류 유역의 비교우위를 증명해 주는 확실한 증거입니다. 훗날의 한성백제도 이런 경제적·문화적 바탕 위에서 건설된 고대국가입니다.

사서를 종합하면 고구려의 시조 주몽(朱蒙)의 아들인 온조(溫祖)는 후계 경쟁에서 밀려나자, 그의 생모이며 주몽의 후처인 소서노와 함께 압록강 북안에서 무리를 이끌고 한강 본류 유역으로 남하, 이곳 재지세력(在地勢力)의 협력을 얻어 기원전 18년에 한성백제를 세웠습니다.

한성백제(漢城百濟)는 송파구의 풍납토성과 몽촌토성을 중심으로 500년 동안 존속하면서 해양·문화대국으로 번영했습니다. 학계의 다수설에 따르면 풍납토성은 한성백제 왕도인 하남위례성의 북성(北城), 몽촌토성은 그 남성(南城)입니다.

한성백제는 고구려 고국원왕(331~371)을 평양성 전투에서 패사(敗死)시킨 근초고왕(346〜375) 대에 이르러 전성기를 구가했습니다. 그 판도는 북쪽으로는 지금의 대동강 남안의 황해도, 남쪽으로는 지금 전라남도의 남해안에 이르렀고, 백제향(百濟鄕)과 담로 등의 해외 거점도 건설했습니다.

고려시대의 서울지역은 남경(南京)으로 불리는 부도(副都)로서 수륙(水陸) 교통의 중심이었습니다. 서울의 북악산 밑은 고려시대에 이미 풍수지리의 견지에서 도읍을 하기에 가장 이상적인 형국으로 간주되었고, 실제 수차례에 걸쳐 천도가 시도되기도 했습니다.

조선왕조 500년의 서울, 즉 한성은 내사산(內四山)이라 불리는 북악산·인왕산·남산·낙산이 형성한 아늑한 분지를 중심으로 펼쳐졌습니다. 한성의 도성(都城)은 내사산의 능선을 따라 축조되었는데, 이 도성 안이 온갖 역사의 파노라마가 켜켜이 쌓인 지금의 종로구와 중구입니다. 조선왕조의 한성은 도성 안과 도성 바깥인 ‘성저십리(城底十里)’로 이뤄졌습니다. ‘성저십리’란 북쪽이 북한산, 동쪽이 우이천과 중랑천, 남쪽이 한강, 서쪽이 모래내에 이르는 지역을 가리킵니다.

오늘의 서울은 1948년 8월15일 정부수립 이래 대한민국의 수도로서 6·25전쟁에 의한 폐허를 극복하고 ‘한강의 기적’을 이룬 우리 현대사의 중심무대입니다. 서울의 면적은 계속 확대되어 서울의 남쪽 외곽으로 흐르던 한강이 이제는 서울의 중앙부를 관류(貫流)하게 되었고, 이른바 외사산(外四山) 안의 땅이 거의 모두 서울시역으로 들어와 있습니다. 외사산이란 오늘날 서울의 주산(主山)인 북한산(837m), 고려 최고의 명장 강감찬의 탄생지인 낙성대를 품은 관악산(629m), 백제·고구려·신라가 피터지게 싸운 아차산系의 용마산(348m), 임진왜란 때의 3대 전승지 중 하나인 행주산성 인근의 덕양산(125m)을 말합니다. 이로써 서울의 면적은 한강 양안(兩岸)에 걸쳐 605km2로 늘어났습니다.

현재 서울의 면적은 전 국토의 0.6%이지만, 서울의 인구는 우리나라 인구의 20%에 달하는 1000만입니다. 나아가 서울경제권의 인구는 2000만이고, 서울에다 인천시·경기도를 더한 수도권의 인구는 2500만으로 대한민국 전체 인구의 거의 절반에 달하고 있습니다.

서울의 자연환경은 시가지 바로 곁에 산들이 다가와 있는 데다 그 중심부를 한강이 관통하고 있어 외국인들도 부러워할 만큼 매우 아름답습니다. 외국인의 눈에는 산(山)이 아니라 언덕(hill)으로 비치는 표고 300m 안팎의 남산·북악산·인왕산에만 올라도 서울의 도심부와 한강 본류가 환히 내려다보이며, 그보다 조금 높은 북한산(837m)은 국립공원으로 지정될 정도로 화강암의 산세가 수려합니다. 북한산뿐만 아니라 북쪽의 도봉산(717m)과 그 동쪽의 수락산(638m)·불암산(508m) 등도 화강암의 산들이고, 한강 남쪽의 관악산(629m)과 청계산(582m)도 역시 그러합니다. 서울시가지를 둘러싼 석산(石山)은 세계적 성공사례인 6·25 이후의 녹화사업으로 어느덧 경치가 빼어난 숲을 이루고 있는 데다 높이도 고만고만하여 휴일에는 내·외국인 등산객들로 붐비고 있습니다.

조선시대의 한성이나 오늘날의 서울에게 한강은 핏줄과 같은 존재입니다. 한강의 원류(源流)인 남한강과 한강의 제1지류인 북한강은 경기도 양평군 양서면 양수리[두물머리]에서 만나 여기서부터 한강 본류를 이룹니다. 한강은 한국의 하천 중에서 유역이 가장 넓고 유량이 압도적으로 많은데, 과거에는 농업용수원과 수로(水路)로서 중요했고, 오늘날에는 식수원과 산업용수원으로서 절대적 존재입니다.

한강본류에 의해 광주산맥이 잠간 끊어져 형성된 폭 500여m의 팔당협곡에는 용수 확보를 위해 1974년 팔당댐이 건설되었습니다. 그리고 팔당댐의 한강물은 이제 수도권광역상수도의 건설로 인천·시흥·안산 등 서해안지역은 물론 수원·평택 등의 안성천 유역 등지로도 공급되고 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경제권 시민에게 한강은 접근성의 미비로 ‘너무나 먼 당신’이 되어 있는 상황입니다.

한강의 중요성이 서울에 국한된 시대는 벌써 지나가 버렸습니다. 서울은 3차 산업혁명 시기에 ‘한강의 기적’을 이룩한 중심무대였습니다. 이런 한강의 본류 유역인 서울은 앞으로 도래할 4차 산업혁명 시대에도 ‘국민의 먹거리’를 장만해야 할 숙제를 지니고 있습니다. 우리나라의 각종 연구기관과 첨단산업의 본사가 집중되어 있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원래 서울은 흘러들어온 사람들이 이룩한 도시라고 합니다. 서울의 역사현장을 따라가다 보면 토박이가 아닌 사람도 어느덧 진짜 서울사람이 되어 서울을 사랑하게 됩니다,
필자는 <월간조선>의 2001년 3월호에 ‘2000년 민족사의 심장-서울’이란 제목의 특집 기사를 실었습니다. ‘정도(定都) 600년’ 수준의 글이 발표되던 당시로는 야심적인 특집부록이었습니다. 그 이래로 필자는 ‘한성백제 500년의 도읍지 송파-강동구’, 그리고 ‘국보는 우리가 누구인지를 가르쳐 준다’는 캐치프레이즈 아래 수년간 연재된 ‘국보 기행’을 통해 서울 일대의 국보도 다수 소개했습니다.

5~6년 전부터, 조갑제 대표는 필자에게 우리 곁에 살아있는 역사의 맥박과 숨결을 느낄 수 있게 서울의 역사현장을 한 권의 책으로 엮을 것을 권유했습니다. 이 간단치 않은 작업을 도와준 조갑제닷컴의 편집자 이지영 씨, 월간조선 미술부의 김현숙 씨와 김성숙 씨, 디자인54의 조의환 대표와 오숙이 씨에게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鄭淳台(조갑제닷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