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혜를 원수로 갚은 일본
鄭淳台 | 2019-11-27 | hit 13709
‘백제系 到來人’이 저술한 『日本書紀』의 害毒
 
‘日本’이란 국명과 ‘天皇’이라는 칭호가 확정된 시기는 여러 說이 있지만 대체로 서기 700년 전후의 시기로 보는 것이 通說이다. 따라서 그 이전의 ‘일본’은 ‘왜국’, ‘천황’은 ‘왜왕’이라 표기하는 것이 옳다. 중국은 漢 武帝 이래 東아시아 세계에 朝貢冊封 체제를 깔았다. 따라서 그 이후, 陸接해 있던 나라들은 皇帝号를 사용하기가 사실상 어려웠다. 다만 바다로 뚝 떨어져 있던 일본은 슬그머니 自國內에서만 天皇(덴노)를 일컬었다.
天皇, 즉 일본판 황제라는 것은 夷狄을 복속시켜 천하에 군림하는 존재이며, 천황이란 칭호도 당시 당 고종이 일시 ‘天皇’을 자칭했는데, ‘天武天皇’은 그것을 본뜬 것이었다. 아무튼 천황인 이상은 朝貢國이 존재하지 않으면 아니 되었다. 일본 열도 내의 夷狄으로는 東北지방의 蝦夷(에미시)와 九州(규슈) 남부의 隼人(하야토) 뿐이었다. 그래서 韓半島의 여러 국가를 朝貢國이라고 조작했던 것이다.
특히 일본의 ‘天皇’은 對중국 외교에 대비해 異稱을 준비해 두었다. 예컨대 천황을 정점으로 하는 律令國家를 완성했다는 왜왕 天武의 이칭(별명)은 天渟中原瀛眞人尊(아마노누나하라오키노마히도노미코도)라고 했다.
 중국 측은 일본 사신에게 “日本이란 종전의 倭를 멸망시킨 나라인가, 아닌가?” “…‘미코토’란 칭호의 뜻은 뭔가?” 라는 질문을 던졌다고 한다. 그런데 그때 일본 사신의 답변은 “요령이 없었다”라고 史書에 기록되어 있습니다. 일본 측은 중국의 간섭이 어려운 地政學的 위치를 이용하여 국내적으로는 ‘天皇’이란 칭호를 사용했지만, 문화선진국인 중국과의 교류를 위해 별명(異稱)을 만들어 두었던 것이다.
 결국, 天皇이란 칭호는 한반도 국가의 服屬을 不可缺의 要素로 하는 것이었지만, 그것이 제정된 것은 일본의 왕권이 미치는 범위가 백제부흥군의 패망으로 일본열도 內에 한정되었던 시기였다. 사실, 백촌강의 싸움에서 패함으로써 倭는 한반도에서의 활동여지가 완전히 사라지고 말았다. 이러한 시기에 아이러니하게도 한반도 諸國의 服屬을 不可缺의 요소로 한 ‘天皇’ 號가 창설되었던 것이다. 따라서 그것은 처음부터 虛構를 수반하는 행위였다.
 701년(文武 원년), ‘덴노’를 정점으로 하는 일본 최초의 大寶律令이 완성되었다. 令의 규정에서는 당을 ‘隣國’, 즉 對等한 국가로 삼는 한편 신라는 ‘蕃國’으로 설정했다. 천황이라는 것은 그 근본 개념이 신라를 복속시키는 존재이고, 한반도의 국가를 복종시키지 않는 천황은 있을 수 없는 존재였다.
 왜국은 신라의 지도에 의한 律令 제정에 이어 일본 역사서의 편찬을 명했는데, 그것이 망명 백제인의 후손인 太安萬侶가 지은 『日本書紀』(720년·元正 4년 발간)이다. 『일본서기』는 ‘神功皇后의 三韓정벌’ 이나 ‘任那日本府’ 등 架空의 사건을 포함시키는 등 소설적 요소가 강해 그 인용은 매우 조심스러운 것이다, 예컨대 부여풍의 位相에 대한 『일본서기』의 기록은 매우 정략적이다.
―(661년) 9월, 왜국의 태자 中大兄이 왜국에 있던 의자왕의 아들 부여풍에게 織官(왜국의 제1官等)을 수여하고, 백제왕으로 책봉했다.
―(662년) 5월, 왜병 5000명 대동하고 백제 故地로 돌아온 부여풍은 백제부흥군 지도자들에 의해 왕으로 추대되었다.
 왜왕의 신하인 부여풍이 백제왕을 일컬었으니 왜왕은 백제왕을 거느린 황제라는 궤변이다. 아무튼 백제부흥전쟁 관련 기록에 관한 한 『日本書紀』가 한·중·일 3국의 사서 중 가장 상세하다. 일본인에겐 백제부흥전쟁이 매우 중요했다는 사실의 반증이다.
 
 『日本書紀』의 맹신자 요시다 쇼인과 그의 제자들
 백제의 왕을 책봉하는 황제에의 志向이야말로 백제부흥전쟁 때 前後 3만 2000명의 대군을 파견한 근본적 이유라고 생각되지만, 그것은 백촌강 전투의 패배와 뒤이은 주류성의 함락에 의해 실패하고 말았던 것이다. 倭王代理(稱制)였던 中大兄은 망명해 온 부여풍의 동생 善光에게 아예 ‘百濟王’이란 姓을 부여했다. “日本天皇이 백제의 왕을 신하로 복종시켰다”는 虛構를 만들기 위한 꼼수였다. 그 흔적으로 규슈 남부에 ‘百濟鄕’ 이란 이름의 마을이 아직도 남아 있다.
 일본에 백제는 千字文으로부터 각종 儒學 서적, 그리고 불교와 선진 문물을 가르쳐 준 문화선진국이었다. 일본말에 “구다라 나이”라는 숙어가 있다. 直譯하면 “백제가 아니다”이지만, 그 뜻은 “(백제의 것이 아니므로) 가치가 없다, 시시하다”는 뜻이다. 그런 백제를 朝貢國으로 둔갑시켰다는 것은 은혜를 원수로 갚은 것에 다름 아니다.
 『日本書紀』의 害毒은 참으로 지독했다. 일본에서 ‘幕末의 선생님’으로 일컬어지는 요시다 쇼인(吉田松陰)은 『日本書紀』의 맹신자였다. 조슈藩의 下級 무사 출신인 그는 “歐美열강과의 불평등 조약은 지키되 거기서 발생한 경제적 손실은 取하기 쉬운 朝鮮 및 滿洲에의 영토 확장으로 보상받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또한 일본의 조선 침략을 ‘名分과 條理에 맞는 일’이라고 强辯했다.
 明治維新으로 王政復古(1868년)가 실현된 후 일제의 관료들은 “天皇보다 2계급 낮은 (德川幕府의) 쇼군(將軍)과 對等한 외교를 했던 조선국왕은 천황의 신하가 되어야 한다”는 따위의 생떼를 부리기도 했다.
  
요시다 쇼인의 征韓論은 그의 제자들인 木戶孝允(기도 다카요시: 훗날의 維新3傑 중 1人으로 征韓論者), 伊藤博文(이토 히로부미: 일본의 초대 수상 등 네 번에 걸쳐 수상을 역임했으며 안중근 의사에게 피살됨), 山縣有朋(야마가다 아리토모: ‘明治군부의 敎皇’이라 일컬어짐) 등에게 傳授되었다. 이들은 일본 제국주의에 始動을 걸어 1910년의 한국 강제 병합을 주도한 ‘죠슈閥의 원흉들’이다. (끝)
*위의 글은 2019년 10월17일 오후 2시 內浦지방 고대문화연구원 주최, 충청남도 주관으로 충남도의회 의회동 112호에서 열린 <백제부흥전쟁사―주류성과 백촌강 전투 학술세미나>에서의 주제발표문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