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이 사람의 성공 人生] 길병원 50주년 맞은 李吉女 가천의과학대 총장

『나는 아직도 할 일이 많다』

글 정순태 기자  2008-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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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천의과대학과 吉병원 설립자이며 경원대학교 총장인 李吉女(이길여) 박사는 인터뷰 시간 5분 전에 약속장소로 들어왔다. 악수하면서 받은 느낌이지만, 산부인과 의사 특유의 까칠까칠하면서도 따뜻한 촉감이 필자의 손바닥에 전해졌다.

올해는 길병원의 50돌이 되는 해다. 그녀는 1958년 인천시 중구 용동에서 산부인과를 개업했다. 1987년 1000개의 병상을 갖춘 종합병원(인천 구월동 길병원)으로 키웠고, 1997년엔 가천의과학대학교를 세웠으며, 1998년 경원대학교를 인수해 현재 총장으로 재직 중이다.

이길여 총장의 성취는 경이적이다. 길병원은 의사 600여 명이 年 96만 명의 환자를 진료하는 의료기관이며 가천문화재단 산하 경원대학교는 학생 1만3000명, 가천의과학대학교는 학생이 4500명에 달한다. 가천박물관은 국보 1점(국보 제276호 초조본유가사지론)과 보물 13점을 비롯해 의료·생활 관련 유물·古書 등 3만여 점의 유물자료를 소장하고 있다.

최근, 건강보험공단이 「건강보험급여로 본 국내 병원 순위」(2006년 기준)를 발표했다. 길병원은 서울아산병원, 세브란스병원, 삼성서울병원, 서울대병원 등에 이어 8위를 기록했다.

―병원 랭킹 8위, 길병원 대단하군요.

『1993년까지는 길병원이 3위였어요. 대기업들이 의료계에 진출한 이래 5~6위로 밀려나더니 다시 8위로 떨어진 것입니다. 길병원이 5~6위 할 때만 해도 「신화를 이룬 사람」이라고 해 「진짜로 내가 그런가」 했는데 이제 그런 데 연연하지 않기로 했죠』

―총장·회장·이사장 등 여러 직함을 가지고 계신데 어떤 호칭을 사용하면 좋을지 고민입니다.

『여러분이 「총장」이 좋겠다고 하데요. 「대학 총장은 아무나 못하는 것 아니냐」면서(웃음)』

―하루에 4시간도 안 자고 일만 한다면서요 .

『몇년 전부터는 오전 7시까지 푹 잡니다. 나이가 들어서…』

李吉女 총장의 웃음소리는 크고 밝으며 목젖이 보일 만큼 시원하다.

『내 이름 뒤에 「괄호 열고, 몇 살, 괄호 닫는」 식의 기사가 신문에 나오면 깜짝 놀랍니다. 아직도 내가 나이 먹었다고 생각하지 않아요. 남편이 있으면 늙어 가는 그의 얼굴을 보고 나도 저렇게 늙었거니 생각할 것인데 그런 상대가 없잖아요. 또 학교에 가도 젊은 학생들과 어울리니까요』


雅號 「嘉泉」의 의미

―「嘉泉(가천)」이라는 雅號(아호)를 학교·의료·문화재단 이름의 맨 앞에 붙이고 있는데,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까.

『1991년에 문화재단을 설립했어요. 그때만 해도 號(호)를 짓는다는 건 나이 먹은 사람이 하는 것이라 생각하고 있었는데, 문화재단 하려면 號가 있어야 한대요. 원로 동양철학자로서 성균관大 학장을 거쳐 정신문화연구원장에 재직하던 류승국 박사님이 號를 지어 주셨어요』

―부잣집에서 태어났습니까.

『큰부자는 아니었지만 중농 이상은 됐죠, 논이 우리 동네에서는 많았죠. 『네 마지기가 한 필지이거든요. 수십 필지 있었죠. 우리 할머니의 목표는 「우리 동네에서 반경 10리 안으로는 내 자식이 남의 땅을 밟지 않게 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의사가 될래요』
인형을 안고 어머니와 포즈를 취하고 있는 어린 시절의 이길여 총장.

―李총장께서는 동물애호가라고 들었습니다.

『어릴 적 얘기입니다만, 다리를 다쳐 절룩거리는 개나 고양이에게 돌멩이를 던지는 동네 개구쟁이들을 막아서 다투기도 했어요. 그리고는 다친 개나 고양이를 우리 집으로 데려가 치료해 주었습니다』

―타고난 의사네요.

『나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지금도 회진하면 환자가 불쌍해 그냥 지나칠 수 없거든요. 나도 모르게 환자의 손을 잡고, 맥을 짚고 얼굴을 쓰다듬어 줍니다. 의사의 손이 닿는다는 것은 환자를 기쁘게 합니다』

―남성 환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나요.

『남녀노소 구별 없이 다 만져요. 우리 길병원 의사들에게 환자의 손을 꼭 잡고 얘기하라고 가르칩니다. 손을 맞잡으면 환자와 의사 사이에 서로의 「혈맥」을 이어 줍니다.

옛날, 우리나라 산부인과 입원실은 온돌방이었습니다. 환자를 볼 때 저는 신발을 벗고 온돌방에 들어가 무릎 꿇고 환자를 안아 일으켜 앉혔어요. 산부인과 입원환자는 아기를 낳거나 수술을 했거나 둘 중 하나여서 혼자 일어나기 어렵거든요』

―지나간 여고시절은 어떠했습니까.

『로맨틱했죠. 여고시절, 친구와 둘이서 이불을 뒤집어쓰고 뻐끔 담배를 피워 보기도 했어요. 질식할 뻔했죠』

―어디서요.

『친구 집이 이리 보생병원이었는데, 안쪽 별채에서 1년간 기숙하면서 친구와 함께 공부했거든요. 박지홍이라고 문학적 호기심이 많았던 친구였습니다. 우리 둘은 이리여중(당시는 중·고교 통합 6년제) 2학년을 마치고 성적우수자로 4학년에 越班(월반)했었죠. 박지홍이 진짜 만석꾼의 딸이었죠. 열두대문을 지나야 그 집안에 들어갈 수 있었거든요. 그 친구, 나를 엄청 부러워했어요』


서울大 의대 합격

―왜요.

『제가 서울大 의대에 합격했거든요. 그러던 박지홍도 서른네 살에 서울大 의대에 기어이 합격했습니다. 그때 저는 미국 유학 중이어서 몰랐는데, 국내 언론에 「서울大 의대 사상 최고령자 합격」이라고 보도되어 유명해졌습니다. 박지홍은 그후 우리 길병원의 산부인과를 맡아 오랫동안 저와 함께 일하다 3년 전에 별세했어요』

―1951년 서울大 의대에 합격했는데, 시험이 어렵지 않습디까.

『당시 이리여고에서 성적이 좋으면 전남의대로 진학했는데, 제가 서울의대에 응시하겠다니까 선생님들이 말려요. 내가 얼마나 고집이 세다고요. 당시 선생님들은 서울의 명문학교에 재직하다 피란 내려와 이리여고에서 가르치고 있었고, 경기·이화여고에 다니던 학생들도 우리 학교에서 공부했죠』

―전쟁 중 대학에 입학했는데, 어디서 공부했습니까.

『예과 1년 때는 全州에 있던 전시연합대학에서 수업을 받았는데, 예과 2학년이 되니까 전국의 의대와 예과 학생은 부산에 모이라고 해요. 부산은 제게 추억이 많은 곳입니다. 두 평짜리 방에서 친구 네 명과 자취하며 학교에 다녔습니다. 본과 1학년 해부학 시간에는 저만치 낙동강이 흘러가는 河端洞(하단동) 산골짜기 천막교실에서 장갑도 없이 맨손으로 시체를 만졌어요』

―학창시절 남학생에게 인기짱이었겠습니다.

『친구로 생각했으니까 아무 감정이 없었습니다. 근데 우리 클래스에서 3쌍이나 결혼했어요. 그래서 「웃기는 것들이야」라며 흉보는 척하기도 했죠(웃음). 우리가 발로 툭 차면 남학생들은 「니들이 여자냐?」라고 했어요. 남학생들이 우리는 쳐다보지 않고, 빨간 립스틱을 칠한 여자대학 학생을 좋아해서 그 학교 교정에 얼찐얼찐거렸어요. 빨간 립스틱의 여대생과 데이트하는 남학생이 그때는 사람같이 보이지 않았죠』

―결혼을 시도한 적 있습니까.

『절실하게 생각하지는 않았어요』

―어머니에 대한 효도 차원에서라도….

『어머니께서 가끔 「결혼하라」고 하셔도 습관적으로 그냥 해보는 말씀이라 여겼죠』


仁川에서 동기생과 同業
중학교 시절 단짝친구들과 함께(오른쪽).

―1958년 개업 시절로 돌아갑시다. 왜 하필이면 인천에서 개업했습니까.

『인턴을 마쳤지만 미국 유학 준비도 안 되고, 유학 자금도 없었어요. 서울적십자병원에서 월급으로 3000환을 받았는데, 그 돈으로 겨우 양복 한 벌 맞춰 입었어요.

인천에서 「자성의원」을 개업하고 있던 대학시절의 단짝을 찾아가 「나 미국 유학 가려면 우리 집 농토를 다 팔아야 하는데, 그렇게 하면 어머니는 어떻게 사니」 라고 했어요. 그 친구가 「나랑 같이 환자 보면서 비행기값 벌어라」고 해요』

―좋은 친구 두셨네요.

『그 친구 집이 서울 연건동 서울의대 가까운 효제동에 있었는데, 내가 재학 중에 그 집에서 숙식했거든요. 학교 수업 마치고 함께 하교하면서 원남동 모퉁이를 지나면 국화빵 장수가 있었어요.

도시락을 싸가지고 가도 배고픈 시절이었거든요. 요즘처럼 햄버거가 있나, 뭐가 있나. 국화빵 사 먹는 게 우리 둘의 낙이었어요. 그런데 친구가 대구 출신 의사와 결혼한다고 「자성의원」을 내게 넘겼어요』

―아무리 친구 간이지만, 병원 인수자금이 필요했을 것 아닙니까.

『친구가 시집 갔으니 내 병원이 된 거죠. 그때는 뭐 변변한 약품이나 비싼 기자재 같은 것은 없었어요. X레이는 전문병원에서 찍게 하고, 아무튼 청진기 하나만 있으면 되는 시절이었습니다(웃음).

진료비나 입원비는 주면 받고 안 주면 안 받고, 그랬습니다. 미국 가는 항공요금과 약간의 체재비만 벌면 된다고 생각했으니까 돈에 대한 욕심이 별로 없었죠』

―미국 유학 가는 항공료는 벌었습니까.

『환자가 엄청나게 몰려와 한동안 미국 갈 생각조차 못했죠. 미국 유학을 가려면 ECFMG(미국의사자격시험)에 패스해야 하는데, 공부할 틈이 없었어요. 다시 시험준비를 했지만, 환자가 시도때도 없이 찾아와 잠도 자지 않고 공부하느라 참 어려웠어요.

1964년 정초에 난방도 되지 않은 고시장에서 벌벌 떨면서 ECFMG 시험을 쳤어요. 그런데 몇 달이 지나도 통지가 오지 않는 거예요. 그러던 어느 날, 간호사가 봉투 하나를 들고 2층 수술실로 숨 넘어가듯 뛰어올라 왔어요. 마침 수술 중이라 봉투를 뜯어보지 못하고 그냥 「얇으냐, 두껍냐?」고 물었어요. 얇으면 불합격, 두꺼우면 합격이었어요. 수술을 마치고 보니 봉투가 두꺼웠습니다』


뉴욕에서 낭만적인 첫 데이트

―미국 유학은 몇 년 하셨습니까.

『메리 이머큘레이트 병원(Mary Immaculate Hospital)에서 1년의 인턴과정, 퀸스 종합병원(Queens Hospital Center)에서 3년의 레지던트 과정을 수료하고 1968년 10월에 귀국했어요. 서른셋에 유학가서 서른일곱까지 4년 동안 공부한 겁니다』

―뉴욕에 4년이나 계시면서 로맨스는 없었습니까.

『뉴욕에서 만난 사업가와 꿈같은 연애를 했지만, 그의 청혼은 거절했습니다. 나는 환자와 결혼한 사람이거든요』

―그가 누굽니까.

『중학교 때 이민을 간 在美동포였는데, 레지던트 동료들의 입방아에 오를 만큼 훤칠했어요』

―미국에서 귀국한 뒤 다시 개업의를 하셨죠.

『후배에게 맡겼던 병원을 되찾았어요. 나는 그 터에 지하 1층, 지상 9층의 병원을 신축했습니다. 공사를 독려해 첫삽을 뜬 지 10개월 만에 36병상을 갖춘 병원이 완공되었습니다. 개인병원으론 인천에서 제일 컸어요. 미국 유학 시절에 체험했던 선진 시스템을 도입하려 했죠. 당시엔 생소했던 초음파 의료기기와 자궁경부경을 사들였습니다.

산모들을 위해 호텔이 아니면 구경하기 어렵던 엘리베이터도 설치했습니다. 지역주민들이 신기한 듯 엘리베이터를 구경하기 위해 몰려들기도 했습니다』

―하루 환자를 몇 명 정도 보셨습니까.

『다른 산부인과의 환자가 30명 정도였는데, 저는 하루에 150명의 환자를 진료했습니다. 「미국 유학을 한 여의사가 진료하는 친절한 병원」이라는 소문에 몰려드는 환자들로 門前成市(문전성시)를 이뤘어요』


「보증금 없는 병원」
전시연합대학 시절 친구들과 함께한 이길여 총장(오른쪽).

―이길여 산부인과는 「보증금 없는 병원」으로 유명했는데요.

『어느 날, 자궁외 임신을 한 환자가 다 죽어 가는 모습으로 병원에 왔다가 「돈이 없어요」라며 그냥 돌아가려는 겁니다. 그래서 제가 「보증금 필요 없으니 염려하지 말고 수술부터 받으세요」라고 했어요.

그렇게 해놓고 수술 준비를 하는데, 그 환자가 「돈을 내야 하는데…」라며 옷가지를 주섬주섬 챙기는 거예요. 「돈 없으면 나중에 벌어서 갚으면 되잖아요」라고 말렸어요. 그 환자는 수술받은 지 4~5일 뒤에 건강한 몸으로 퇴원했습니다. 그후 우리 병원 안팎에 「보증금 없는 병원」이라고 써서 붙여 놓았습니다』

―1960~1970년대 가난 때문에 제대로 된 치료 한번 받지 못하고 사망하는 경우가 많았지요.

『의료보험제도가 시행되기 전이라 서민들에게는 병원비가 큰 부담이었죠. 그래서 이길여 산부인과에서는 입원할 때나 수술할 때 받던 보증금을 없애 버렸어요. 또 가난한 환자에겐 아예 치료비를 받지 않거나 깎아 줬어요』

―이길여 산부인과가 유명해진 배경엔 그런 사연들이 있었군요. 나중에 입원비·수술비를 갚아 주는 사람이 있습니까.

『무료 진료를 해주거나 환자의 형편대로 진료비를 받으면 그냥 지나치는 법이 없더군요. 송도에서 온 환자는 망둥이 등의 생선을, 간석동 주민은 쌀을, 구월동에 사는 보호자분은 채소를, 덕적도 환자는 옥수수를, 소래포구 아줌마는 멍게를 가지고 옵니다.

병원 마당이 늘 시장바닥 같았어요. 그걸 반찬으로 쓰고, 입원환자들에게 밤참이나 선물로 주기도 했습니다』

―길병원이 「박애」와 「봉사」란 이념을 그냥 내건 것이 아니군요.

『돈 없는 사람일수록 중환자가 되어 옵니다. 그런 분들은 「이제 병원에서 가서 주사 한 대만 맞고 죽으면 원이 없겠다」고 했어요. 당시는 그런 시대였습니다. 그런 사람을 살렸을 때의 기쁨은 말로 표현할 수 없죠』

―李총장께서는 니혼대학에서 의학박사를 받으셨더군요.

『1975년에 마흔세 살 때 1년간 일본에 유학해 일본 병리학 분야의 권위자인 다케우치 다다시 교수님의 지도를 받고 학위논문을 썼습니다』


의료취약 지역에서 종합병원 개원

―일본 유학을 마치고 의료법인을 설립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인천의 응급환자가 서울의 큰 병원으로 이송되다가 숨을 거두는 일은 없어야 한다고 생각했습니다. 산부인과만으로는 환자에 대한 의무를 다할 수 없었어요. 그들을 모두 치료할 수 있는 시스템을 갖추려면 종합병원을 세워야 했습니다.

1973년 의료법 개정으로 「(병원급 이상) 의료기관 개설은 의료법인이 그 주체가 되어야 한다」는 조항이 신설되었습니다. 의료법인 설립은 곧 개인 재산을 사회와 국가에 헌납한다는 의미이기도 합니다. 저는 1978년 全재산을 출연해 인천시 중구 인현동에 150병상 규모의 「의료법인 仁川길병원」을 출범시켰습니다』

―양평·철원·백령도 등 의료취약 지역에 병원을 개원한 이유는 무엇입니까.

『1970~1980년대 우리 정부는 의료취약지구 해소를 위해 OECF(해외경제협력기금) 자금을 지원해 전국 50개 지역에 민간병원을 세웠습니다. 당시 양평병원도 OECF 자금을 지원받아 건립이 추진됐지만, 財源(재원) 부족으로 어려움을 겪고 있었죠.

1982년 어느 날 대학 후배인 이성우 보사부 의정국장이 「양평병원이 도산 후 2년 동안 방치되어 있으니 선배님이 맡아 달라」고 해요. 병원 현장을 둘러보니 폐허, 그대로였어요. 현장에서 만난 동네 할머니들이 「주사 한 번 맞아 보고 죽는 것이 소원」이라고 합니다. 어쩝니까, 인수해야죠. 80병상 규모의 양평길병원은 이렇게 탄생했습니다.

의사들이 양평길병원 근무를 기피해 인천길병원 의사에게 교대로 근무하게 했습니다. 接敵(접적) 지역에 위치한 철원길병원도 주민들이 석 달간 찾아와 건립을 집요하게 요청해 개원한 것입니다』

―외딴섬에서 의료봉사를 하셨지요.

『낙도에는 의사는커녕 약국도 없었습니다. 우리 길병원은 매년 낙도 순회 무료 진료를 해왔습니다. 그러다 백령길병원을 6년6개월간 운영하게 되었습니다』


해결사
서울大 재학 시절의 이길여 총장(가운데)과 동기생들.

―백령도와 어떤 인연이 있습니까.

『1970년대 한 임신 여성이 자연유산으로 출혈이 멎지 않자 거의 다 죽어서 나를 찾아왔어요. 백령도에서 30시간이나 배를 타고 도착한 환자였습니다.

백령도길병원은 1960년 미국인 신부가 세운 성안드레병원이 모체였는데, 그후 대한적십자사가 인수해 운영하다 누적적자를 견디지 못하고 철수해 버렸거든요. 제가 1995년 2월, 적자를 각오하고 인수해 11억4000만원을 들여 현대적 장비를 갖추고 다시 문을 열었습니다.

백령길병원은 연간 4억~5억원의 적자를 보다가 2001년 운영권을 인천시로 넘겼습니다』

―베트남 의료봉사에도 열심이라는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베트남과 수교하기 전에 베트남길병원의 의료진 10명이 베트남에 무료 진료를 하러 갔는데, 거기서 심장병에 걸린 베트남 어린이 100여 명을 우리 병원으로 데려와 치료해 주었습니다. 그 다음해인 1992년 한국과 베트남이 수교를 했습니다』

―베트남에서 한센병 환자 치료 활동을 벌이고 있고, 李총장이 한센후원회 회장직을 맡고 있다고 하는데 무슨 이유 때문에 그런 일을 시작하게 됐습니까.

『광복 이후 우리나라 한센병 환자들은 외국의 원조로 치료를 받았거든요. 한센병은 치료약만 제대로 먹으면 100% 낫는 겁니다.

우리 정부에서는 땅을 값싸게 불하하거나 한센병 환자들의 양계장에서 나오는 달걀을 사주거나 하는 방법으로 생계를 도왔습니다. 그동안 땅값이 올라 그분들도 이제 먹고살 만합니다.

그분들이 「우리가 외국의 원조로 잘 살게 되었으니 앞으로 가난한 나라의 한센병 환자를 돕자」며 한센회를 조직하고 제게 「꼭 회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어요. 취지가 너무 좋아 회장을 맡았습니다. 그래서 베트남에 갔던 것입니다』

―베트남에 가보니 어떻습디까.

『파월국군의 격전지인 「백마고지」 아래에 빈딘省이 있습니다. 그곳의 한센병 환자들이 열악한 수용소에 들어가지 않으려고 모두 산으로 도망쳤는데, 그 가족들의 생활이 몹시 어려워요. 그들이 직업훈련소를 만들어 주면 재봉틀이나 컴퓨터를 배워 취업하겠다고 해서 우리 한센회에서 지원했습니다. 가천길재단에서 매년 300만원 정도의 운영비를 보조하고 있습니다』


『나는 키우는 데 재미 느끼는 사람』
퀘이커 의료봉사단의 닥터 골든과 함께.

1987년 3월 현재의 「가천의과학대학교 길병원」인 「중앙길병원」이 인천시 남동구 구월동에서 문을 열었다. 개원 6개월 만에 500병상이 모두 차서 1000병상으로 늘렸으나 1년 뒤엔 이마저 환자들로 꽉 채워졌다. 당시, 1000병상 규모의 병원은 중앙길병원을 비롯해 전국에 3개밖에 없었다.

『1990년대 저의 목표는 병원 특성화였습니다. 어려운 사업이었지만 골똘히 생각하니 문제의 답이 나옵디다. 답은 질환별로 치료·예방 시스템을 갖춘 전문센터의 설치였죠. 여성전문센터, 심장센터, 眼(안)이비인후과센터, 응급의료센터 등을 잇달아 개원했죠』

1997년, 그녀는 인천시 강화군 길상면 선두리에 가천의과대학을 설립했다. 가천의과대학은 개교 전부터 화제를 모았다. 입학생 전원에게 6년간 입학금 및 등록금 전액 면제의 장학 혜택을 주고, 기숙사 무료 제공과 함께 입학성적 우수자 10%에게 길장학금과 봉사장학금을 따로 지급했기 때문이었다.

『첫 신입생 모집에서 40대 1의 경쟁률을 보였습니다. 응시 학생들의 수능성적이 전국 41개 의대 중 상위 5위권에 들었어요』

―수지가 맞는 일입니까.

『나는 키우는 데 재미를 느끼는 사람입니다. 묘목을 크게 키우는 것, 우리 길재단의 규모를 키우는 것, 고졸 입학생을 대졸로 키우는 것, 이 모두에 희열을 느낍니다』

이길여 회장은 1998년 경영난에 처해 있던 경원대학교를 인수하고, 경원학원이사장에 취임했다.


「머리」로 먹고살아야 한다
美 퀸스 종합병원 수련의 시절(왼쪽에서 두 번째가 이길여 총장).

―총장께서는 매 10년마다 목표를 세우고 강렬한 의지로 목표를 달성했다고 들었습니다. 2000년대의 목표는 무엇입니까.

『자원이 없는 우리가 21세기에는 무엇을 해야 먹고살 수 있을 것인지 고민했습니다. 특성화 연구소, 이것이 결국 삶의 질을 높이고 國富(국부)를 이루는 길이라고 판단했습니다. 비즈니스는 투입된 자금이 회수되지만, 연구소에서 나오는 것은 논문뿐입니다. 그래도 우리가 앞서 가려면 다른 방법이 없습니다. 사람이 재산이고 희망입니다.

21세기는 브레인의 시대입니다. 과거에 밖으로 나간 한국인들 중 괜찮은 브레인이 많고, 그중에는 노벨상에 접근한 학자들도 있습니다. 그런 브레인을 다시 불러들이고, 젊은이들은 되도록 많이 밖으로 내보내야 합니다.

이렇게 국내외로 돌리면 굉장한 맨파워를 구축할 수 있을 것이라 믿습니다. 뇌과학연구소, 바이오나노연구원, 암·당뇨연구소 등 3대 연구소를 지렛대로 삼아 「동북아 허브 길병원」으로 발전시킬 것입니다』

경원大는 바이오나노를 특성화 분야로 선정해 2007년 「가천 바이오나노연구원」을 개설했다. 1997년 노벨물리학상 수상자인 스티븐 추 박사(미국 UC버클리大 교수)를 명예원장으로 영입하고, 교수 16명을 스카우트했다. 2010년까지 2개 학과를 세계 최고 수준으로, 3개 학과를 국내 최고 수준으로 끌어올린다는 목표이다.

가천길의과학대학은 「바이오 醫工學(의공학)」 분야를 특성화하기 위해 집중 투자하고 있다. 글로벌 네트워크를 강화하기 위해 독일 훔볼트대학, 미국 제퍼슨 대학 등과 국제교류협정을 맺고 학생들에게 매년 해외실습 기회를 제공하고 있다.

산하기관으로 2006년 문을 연 뇌과학연구소는 세계적 석학 조장희 박사를 초빙해 독일 지멘스와 기술협정을 체결하고 연구를 진행하고 있다. 지난 5월9일 개원한 암·당뇨연구소는 김성진 박사를 필두로 22명의 석학들이 모여들었다.

『예나 지금이나 경제가 학업성적을 좌지우지합니다. 어떻게 하면 가난한 학생도 돈 적게 들이고 국제화할 수 있느냐. 결론은 중국으로 보내는 겁니다. 중국의 시대가 다가오는데, 그 사람들을 이기려면 우선 그들을 잘 알아야 할 것 아닙니까.

경원大는 1년에 100명씩 장학금을 주어 중국 山東大에 보냅니다. 山東大는 우리 학생 때문에 클래스 하나를 따로 만들었습니다. 저도 매년 한 번씩 山東大에 가서 우리 학생들을 지도합니다. 또 山東理工大라고 중국의 공직자 자제들이 많이 다니는 대학이 있습니다. 거기에 경원大 분교를 설립해 매년 220명씩 입학시키고 있습니다.

재작년에 시작했는데, 중국에서 1, 2학년을 과정을 마치고 이번에 귀국해 경원大 3학년이 되었습니다. 국내에서 2년만 더 배우면 경원大·산동이공대 공동 학사 학위를 취득하게 됩니다. 중국을 아는 人材가 배출되는 것입니다』


바느질과 디자인은 타고난 재주
베트남 빈딩省에 건립한 직업훈련원 개소식에서.

―개인 재산은 얼마나 됩니까.

『전에는 저에게 「부자」라고 하면 듣기 싫었어요. 개인 재산이라고는 집과 자동차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것 하나도 없어요. 요즘은 누가 「부자」라고 하면 속으로 「내가 왜 부자지?」라고 생각하면서도 은근히 기분 좋아요』

―재작년 정초에 「소외된 어린 생명을 위한 한국의사회 100주년 기념 패션 쇼」에 모델로 나서 큰 호응을 얻었다고 들었습니다.

『그냥 기성복을 사 입어도 몸에 잘 맞습니다. 비싼 명품은 입지 않습니다. 그래도 「명품」이라고 오해를 받아요.

어머니의 내림인지 내가 바느질을 잘해요. 여고시절에 수예는 1등이었고요. 얼마 전까지만 해도 동대문시장에서 옷감을 떠다가 내 손으로 옷을 만들어 입기도 했죠』

―건강 비결은 무엇입니까.

『초등학교 때부터 지금까지 그냥 걷습니다. 요즘도 하루 한 시간 걷기 운동을 하죠』

―경원大가 큰 공사를 하고 있습디다.

『국내 최대의 지하 캠퍼스를 갖춘 지상 11층의 「비전타워」를 2010년 완공 예정으로 건립 중입니다. 「비전타워」 뒤편에 자리할 선큰플라자는 햇빛이 드는 땅속 광장으로, 경원大 지하철역과 바로 이어집니다. 제가 교수 등 관계자들과 함께 미국·유럽·일본에 가서 벤치마킹했습니다. 건축 디자인을 해보고 싶어요』

―혼자서 이것저것 다하면 다른 사람이 주눅들지 않겠어요.

『저에게는 부족한 게 많아요. 우선, 남편도 자식도 없잖아요』


『밤새도록 고민하니까 答이 나옵디다』

―요즘 왜 성형외과 의사는 서로 하려 하고, 산부인과 의사는 폐업하려 합니까.

『언젠가 대통령 아들의 부인이 아기를 출산하려고 입원했는데, 의사들이 달라붙어 밤을 꼬박 새웠답니다. 산모가 초산이라 진통 시작부터 분만까지 16시간 걸렸대요. 대통령 아들이 「이렇게 고생하는데 분만 비용은 얼마나 됩니까」라고 물었대요. 간호사가 이렇게 대답했답니다.

「소새끼 낳는 데는 20만원과 따로 팁을 받고요, 개새끼는 10만원과 팁, 사람은 분만비 3만원을 받는데 팁을 받으면 감옥 갑니다」

그후 분만비가 너무 적다 해서 1만원 올려 4만원을 받게 했습니다. 산부인과나 외과 등은 3D 업종이 되어버렸습니다. 앞으로 길거리에서 아기를 낳거나 맹장수술을 못해 죽는 사람이 나올 가능성이 있습니다』

―세상에는 낙담 끝에 슬피 우는 사람도 많습니다. 그들을 위해 용기를 북돋아 주는 말씀을 해주시죠.

『세상만사 생각하기 나름 아닙니까. 우선 긍정적으로 생각하고, 어려우면 어려운 대로 밤을 새워 곰곰이 생각하면서 간절히 기도하니까 답이 나오데요. 제가 의과대학 시작하려 할 때 복지부·의사회 등 모두가 반대해서 한참 동안 어려움이 많았습니다.

구월동 길병원 건립 때는 계약금을 떼이고 공사가 지연되어 자금난을 겪는 등 굽이굽이를 넘어왔습니다. 모든 어려움을 벼랑 끝에서 손을 놓는 용기, 개인 재산을 던지는 용기로 극복할 수 있었습니다』

―앞으로 뭘 하실 계획인가요.

『나의 일을 계속해야죠. 나를 필요로 한다면 쓰러질 때까지 할 겁니다』

2시간45분간의 인터뷰로는 그녀의 인생궤적을 더듬기에는 턱없이 부족했다. 그녀는 「現代신화」를 이룩한 鄭周永(정주영) 先代(선대)회장과 「釜山의 슈바이처」로 이름 높은 장기려 박사의 요소가 섞인, 다시 말하면 야망과 봉사의 삶을 조화시키면서 뚜렷한 업적을 우리 사회에 제시했다.

웃을 때는 목젖이 보일 만큼 화끈했으며, 사진기자에게 포즈를 취할 때는 『너무 잘 찍으면 얼굴 주름이 나타난다』며 농담을 던지는 보통 여자이기도 했다.●

사진 : 조준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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