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鄭淳台의 역사산책 - 애증의 韓中 관계

티베트와 신라가 동시에 唐을 공격해 삼국통일이 가능했다

글 정순태 기자  2008-0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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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이징(北京)올림픽 「聖火 奉送(성화봉송)」 이벤트가 벌어지던 지난 4월, 서울 시내 한복판에서 수만 명의 중국 청년들이 紅衛兵(홍위병)처럼 집단 난동을 부렸다. 이런 중국인들의 난동을 지켜보면서 필자는 吐蕃(토번)과 袁世凱(원세개)를 생각했다.

吐蕃은 한반도에서 羅唐(나당) 7년전쟁(서기 670~676년)이 벌어졌던 시기에 西域(서역)에서 실크로드의 헤게모니를 놓고 唐과 전쟁을 벌였다. 토번이 바로 티베트다. 티베트는 1949년 중공군에게 강점되어 지금은 中國의 1개 省級의 自治區(자치구)로 전락해 있다. 袁世凱는 조선왕조 말기에 淸國(청국)의 「駐札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주찰조선총리교섭통상사의)」라는 긴 직명을 달고 서울에 들어와 마치 총독처럼 발호했다.

세계의 양심들은 티베트를 강점하고 티베트人들의 인권을 짓밟는 중국이 과연 세계평화 祭典(제전)인 올림픽을 개최할 자격이 있는지 의심해 왔다. 당연히 베이징올림픽의 「성화」는 세계 여러 도시에서 저항을 만났다. 중국이 티베트를 강점·지배할 역사적 근거나 현실적 명분이 없기 때문이다.

특히, 한국인은 티베트人의 불행에 무심할 수 없는 역사적 정서를 갖고 있다. 韓國史의 전개에 있어 吐藩의 역할은 짧지만 결정적이었기 때문이다.

만약 羅唐의 7년전쟁 시기에 토번이 西域에서 제2戰線(전선)을 형성하지 않았다면 신라의 승리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물론 서로 1만5000리나 떨어진 신라와 토번이 군사동맹을 맺은 것은 아니었지만 한반도 戰線(전선)과 西域 전선의 전황은 톱니바퀴처럼 맞물려 돌아갔다.


토번의 正體
구한말 조선에 들어와 전횡을 일삼았던 袁世凱.

어떤 강대국도 2正面 전쟁에서 승리하기 어렵다. 당시의 唐제국은 세계 최강이었지만 신라와 토번에 모두 패했다. 그 결과 신라는 우리 역사상 최초의 민족통일국가를 이룩했고, 토번은 東西교역로인 「실크로드(비단길)」의 지배권을 장악했다. 그렇다면 唐과 피 터지게 싸운 토번의 정체에 대해 약간의 설명이 필요할 것 같다.

티베트族이 건설한 토번은 지구상 최대·최고의 고원인 티베트 高原(고원)을 대부분 차지하고 있던 산악국가였다. 티베트고원은 표고 4000m를 넘는 고지대로 파미르고원과 더불어 「세계의 지붕」이라 불린다. 특히 히말라야 산맥은 전장 2400km이며 평균고도 6000m, 에베레스트山을 비롯해 7000m가 넘는 봉우리만 40개가 있다.

티베트族은 漢代(한대) 이후 중국의 섬서·감숙·사천지방에 이주해 유목생활을 했다. 뒤이어 중국의 삼국시대(3세기)에는 용병으로 활약했다. 蜀(촉)의 승상 諸葛亮(제갈량)이 5회에 걸쳐 북벌을 감행했지만, 인구 수·경제력 등 국력면에서 적국 魏(위)에 비해 대략 6분의 1 수준이었기 때문에 강인한 羌族(강족)을 용병으로 활용했음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이후 5胡16國 시대에 들어 티베트族의 일파인 ?(저)·羌(강)이 중국 북부에 정복국가를 건설했다. 예컨대 4세기 말에 중국 대륙을 거의 통일할 뻔한 前秦(전진)의 황제 符堅(부견)은 저족이었다.

그러면 토번의 건국은 어떻게 이뤄졌을까. 6세기 후반. 「하늘에서 밧줄을 타고 내려왔다」는 「天孫(천손)」 네치첸 감포(王)가 발흥해 토번을 창업했다. 그의 자손인 손첸 감포는 모든 티베트族을 정복하여 통일왕국을 건설했다. 손첸 감포는 唐태종에게 황녀를 아내로 삼고 싶다고 요구했다. 唐태종은 처음엔 거절했으나 서쪽 국경지대를 자주 공격하는 손첸 감포의 환심을 사기 위해 文成公主(문성공주)를 641년 그에게 시집보냈다.
티베트를 통일한 손첸 감포.

손첸 감포가 사망한 후 토번은 靑海(지금의 靑海省) 지역 吐谷渾(토욕혼)의 귀속 문제를 둘러싸고 당과 싸우고, 점차 전쟁 규모를 확대시켰다. 662년, 토번은 西돌궐 계열의 弓月(궁월)과 연합해 토욕혼을 멸망시키고, 본격적으로 타림분지 방향으로 西進해 호탄(和田), 쿠처, 카라샤르, 카슈가르 등 唐의 安西四鎭(안서 4진)을 모두 함락시켰다. 이에 의해 唐의 安西都護府(안서도호부)는 지금의 「투루판」인 西州로 크게 물러났다.

당시의 한반도 정세를 음미해 볼 필요가 있다. 삼국통일은 660년 백제의 패망과 668년 고구려 패망으로 이루어진 것이 아니다. 唐은 백제의 옛땅 公州에 熊津都督府(웅진도독부), 고구려의 故土 평양에 安東都護府(안동도호부)를 설치한 뒤, 동맹국인 신라마저 직할 식민지로 삼으려 했다. 이것은 신라의 재상 金春秋(김춘추)와 唐태종 李世民(이세민) 사이에 체결된 「648년 협정」을 일방적으로 파기하는 행위였다. 신라로선 對唐 개전이 불가피해졌다.

669년 9월, 토번이 또다시 天山南路(천산남로)를 급습하자 對신라戰을 준비하던 薛仁貴(설인귀) 휘하 唐軍의 主力이 西域 전선으로 대거 이동했다. 이런 찬스를 놓칠 신라가 아니었다. 670년 3월, 신라군 1만과 고구려 부흥군 1만이 연합, 압록강을 도하해 요동까지 북진했다. 羅麗연합군은 말갈군이 대항하자 일단 결전을 피하고 압록강을 건너 남하했다. 唐軍에 대한 위력 정찰의 의미가 짙었던 군사 작전이었다.

이후 신라와 토번은 東西의 양 전장에서 번갈아가며 唐軍을 공격했고, 정세가 불리해지면 和平을 구하는 방식을 구사했다. 唐軍의 주력은 1만 리가 넘는 두 전장 사이를 왔다 갔다 했다. 신라와 토번은 비록 동맹을 맺은 바는 없지만, 동맹국보다 더욱 효과적인 挾擊(협격)체제를 구사했던 것이다.


신라의 위기를 구원한 토번의 大非川 전투

670년 이후 한동안 신라에 유리한 국제정세는 계속됐다. 670년 7월, 靑海 지역의 大非川(대비천) 전투에서 薛仁貴가 이끄는 唐軍이 토번군에게 전멸하자 신라는 즉각 웅진도독부가 장악하고 있던 백제 故土를 전부 차지했다.

671년 7월, 大非川 전투의 패장이었음에도 安東都護로 복귀한 설인귀는 文武王에게 唐軍의 압도적 軍勢(군세)를 들먹이며 항복을 촉구하는 서한을 보냈다. 이에 문무왕은 즉각 答書(답서)를 보내 唐의 과욕을 비판하고 신라의 정당성을 천하에 천명했다. 바로 역사적 문건인 「答설인귀書」로서 사실상의 對唐 開戰(개전) 선언이었다.

그러나 신라에 불리한 정세가 도래했다. 672년 4월 토번의 사절이 長安에 들어가 唐高宗(당고종)과 武后(무후)를 만나 모종의 협의를 진행하고 있었다. 당과 토번이 화해하면 신라가 위험해진다. 바로 그해 8월, 高侃(고간)이 이끄는 唐의 정예기병은 石門(석문: 황해도 서흥) 전투에서 신라의 주력군을 거의 전멸시켰다.

같은 해 12월 唐軍은 고구려 부흥군이 웅거하던 白水城(백수성: 황해도 연백군)을 攻取(공취)하고, 이를 구원하러 달려온 신라군까지 격파했다.

이때가 신라 최대의 위기였다. 石門전투로 主力군단을 상실한 신라는 守勢(수세)로 몰릴 수밖에 없었다. 전세가 급박해지자 文武王은 重臣회의를 열고 대책을 협의했다. 이때 金庾信(김유신)은 遲久(지구)전략으로 唐軍의 예봉을 피할 것을 주청했다. 金庾信의 주청에 따라 신라는 漢山州(한산주: 경기도 廣州)의 晝長城(주장성: 지금의 남한산성)을 축조해 江北의 北漢山城(북한산성)과 함께 漢江(한강) 계선의 중요 방어기지로 삼았다.

이같은 방어진지를 증강하는 한편으로 文武王은 石門전투 패전 직후 唐고종에게 『某(모)는 머리를 조아려 죽을 죄를 청합니다』로 끝을 맺는 表文(표문)을 올렸다. 和戰兩面策(화전양면책)의 구사는 신라의 장기였다. 이에 대해 「굴욕외교」라느니 「앙큼한 미봉책」이라는 지적이 없는 것은 아니지만, 신라 국가의 생존을 위해서는 불가피한 일이었다. 신라는 唐조정에 엄청난 진상품을 올리고, 유력자들에게도 고루 뇌물을 뿌렸다.

673년 윤5월, 고간과 이근행이 이끄는 唐軍은 호로하(임진강 중류) 북안의 고구려 부흥군이 지키던 호루고루城을 함락시키고 임진강 계선을 돌파하려 했다, 그해 7월1일에는 出將入相(출장입상)의 太大角干(태대각간) 金庾信이 79세를 일기로 병사했다. 신라의 위기는 고조되었다. 당군의 공세는 673년 연말까지 계속되었다.

그러나 西域의 정세가 급변했다. 673년 12월, 토번이 弓月(궁월) 등 천산산맥 일대에 산재한 西돌궐의 여러 부족과 연합해 天山北路(천산북로: 초원의 길)를 봉쇄하려 했다. 이로써 羅唐전쟁은 673년 12월부터 675년 2월까지 14개월간 사실상 휴전상태에 들어갔다. 이 기간에 신라는 전투력을 재정비하는 好機(호기)를 잡았다. 신라는 王京 서라벌에 이르는 접근로변에 대대적인 축성 또는 성곽 개축을 단행했다.


세계의 主교통로-실크로드

여기서 당시의 東西교역로에 관해 간단하게 정리해 놓을 필요가 있을 것 같다. 천산산맥 북쪽 초원지대에 형성된 교역로는 천산북로 혹은 「草原(초원)의 길」이라 불린다. 주로 유목 기마민족이 사용했던 길인데, 훗날 칭기즈칸의 몽골軍이 유럽 침입 때 사용했던 길이 바로 「초원의 길」이었다. 한랭한 기후 때문에 초원의 길은 유목 기마민족이 아니면 이용하기 어려웠다.

천산산맥 남쪽과 곤륜산맥 북쪽 사이의 사막지대(타림분지)에 형성된 교역로는 천산남로 혹은 「오아시스의 길」이라고 불린다. 천산산맥 남쪽 기슭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오아시스 北道」, 곤륜산맥 북쪽 기슭을 따라 이어지는 길은 「오아시스 南道」라고 불린다. 사막의 높은 기온 때문에 운반수단은 주로 낙타였다.

이밖에 연안 항해를 통해 동서 간을 잇는 「바다의 길」이 있었다. 독일의 역사학자 「비트 포겔」이 초원의 길, 오아시스의 길, 바다의 길을 합쳐 「실크로드(비단의 길)」라고 명명해 세계적으로 통용되고 있다. 당시 세계의 메인 트렁크(主 간선도로)는 오아시스의 길이었다.

670년 大非川전투 이후 오아시스의 길을 장악한 나라는 토번이었다. 오아시스의 길을 토번에게 뺏긴 唐은 천산산맥 북쪽으로 우회하는 「초원의 길」을 개척했다. 그러나 673년 말에 이르러 「초원의 길」마저 토번에게 위협당하자 한반도 전선에 再투입했던 당군의 주력을 서역 전선으로 669년에 이어 또다시 이동시켰던 것이다.


羅唐 7년전쟁의 중심무대 임진강 계선

675년 1월, 토번의 사절이 또다시 長安으로 들어가 평화회담을 재개하자 나당전쟁의 소강국면은 唐의 대공세에 의해 깨지고 말았다. 이때 신라를 침공한 唐軍 지휘부는 다음과 같이 편성되었다.

총사령관 鷄林道大摠管 劉仁軌

부사령관 衛威卿 李弼
右領軍大將軍 李謹行

675년 2월, 劉仁軌(유인궤)가 이끄는 唐軍은 임진강 남안까지 진출하여 七重城(칠중성: 경기도 파주시 적성면)을 함락시키고, 말갈족 용병대장 이근행을 보내 買肖城(매소성: 경기도 연천군 곡면 대전리 한탄강 남안)을 점령했다. 칠중성은 戰船(전선)이 임진강을 거슬러 올라갈 수 있는 한계 지점으로 兵站(병참)의 요지이며, 한탄강 남안의 매소성은 한반도 중부로 남진하는 길목으로 전략적 요충이다.

그러나, 칠중성과 매소성을 장악한 바로 그달(2월)에 유인궤는 본국으로 소환됐다. 對토번전에 대비한 포석이었다. 유인궤의 귀국 후에는 부사령관인 이근행이 安東진무대사로서 지휘권을 행사했다.

唐은 수륙양면으로 신라를 공격했다. 이해 9월, 설인귀가 金風訓(김풍훈)을 길잡이로 삼아 帶方(대방: 황해도) 해안에 위치한 白水城(백수성: 연백군 白川)을 공격했다. 설인귀는 670년 靑海의 大非川 전투에서 티베트에게 참패한 唐軍의 총사령관이었으며, 金風訓은 신라의 병부령(국방부 장관)이었음에도 親唐的이어서 文武王에게 피의 숙청을 당한 당시의 병부령 金眞珠의 아들로서 당시 長安에 파견된 宿衛學生(숙위학생)이었다. 신라의 김문훈은 예성강 어귀에서 설인귀 부대를 요격해 당군 1400명의 목을 베고, 병선 40척을 빼앗았다. 설인귀가 포위망을 헤치고 달아났으므로 전마 1000필을 노획했다.


買肖城 전투에서 말갈군이 후퇴한 배경
唐나라 기병.

그해 9월 하순, 말갈의 용병대장 이근행은 매소성을 중심으로 부근 일대에 20만 대군을 집결시켰다. 신라군은 치열한 공격으로 말갈군의 외곽부대를 약화시킨 후 매소성의 말갈군 주력부대와 격돌한 것 같다.

「三國史記」 문무왕 15년(675) 9월29일 조에는 『말갈이 군사 20만 명을 거느리고 매소성에 주둔하므로 우리 군사가 쳐서 쫓아버리고 戰馬(전마) 3만380필을 얻고, 그밖의 노획 병기도 相等(상등)하였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근행이 거느린 말갈병의 패전은 설인귀의 함대가 임진강 어귀에서 패배, 신라군에게 수송선 40척을 노획당했기 때문이었던 것으로 보인다. 임진강 어귀에서 설인귀 선단의 패퇴 소식이 임진강의 지류인 한탄강변 매소성에 전해지자 말갈군의 사기가 급격히 떨어졌다. 이근행의 말갈군은 매소성 전투에서 패전한 후 진로를 바꾸어 칠중성의 신라군을 공격했다. 칠중성은 8개월 전 유인궤의 唐軍에 의해 함락되었지만, 유인궤의 귀국 후 신라군이 탈환한 것으로 보인다.

제2차 칠중성 공방전에서 신라군은 出城(출성)공격을 자제하고 배고픈 말갈군에 농성작전으로 대항했다. 이 공방전에서 신라의 守城將인 金儒冬(김유동)이 전사했으나 적군은 이기지 못하고 물러났다. 말갈군은 북상·후퇴하면서도 赤木城(적목성: 강원도 회양)을 포위 함락시켰다. 이때 현령 脫起(탈기)와 성민들은 모두 전사했다. 石峴城(석현성: 황해도 곡산군)에서도 현령인 仙伯(선백)·悉毛(실모) 등이 말갈군의 공격을 받고 싸우다 전사했다. 이 이후 675년 말까지 신라군은 唐軍과 치열한 전투를 계속했다. 그때의 전황을 「삼국사기」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우리 군사가 唐의 군사와 大小 18戰을 겨뤄 모두 승리해 6047명의 목을 베고 전마 200필을 노획했다>

「삼국사기」 등 역사의 기록을 보면 唐軍의 675년 공세 중 신라군은 매소성 결전에서 전마 3만여 필을 노획하는 등 대승을 거두었으나 말갈군의 主力을 섬멸하지 못했다. 말갈군은 배는 고팠으나 전투력을 보존하면서 물러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후퇴하던 말갈군이 칠중성·적목성·석현성을 공격한 것은 군사적 거점 확보보다는 식량 확보를 위한 약탈전의 성격이 짙다.

그렇다면 왜 唐軍이 결정적인 패배도 하지 않은 상황에서 후퇴했을까. 이때 唐고종은 내분 중인 토번에 대한 총공격을 기도하고 있었다. 한반도 전선에 투입되었던 이근행의 말갈군단이 유인궤에 이어 서역으로 이동했던 것이다. 이는 676년의 西域 전선에서 유인궤가 조하郡 鎭守로서, 이근행이 積石道經略大使로 참전했던 사실로 입증된다.

676년 2월, 唐은 평양에 있던 안동도호부를 요동으로, 웅진도독부를 建安으로 후퇴시켰다. 그러나 신라로서는 언제 또 唐軍이 침략을 감행할지 예상할 수 없었던 만큼 백제 유민들로 白衿誓幢(백금서당)을 편성하는 등 군사력을 계속 증강했다.


吐蕃의 명장 논흠릉의 大결단
唐代의 해전도.

676년 윤4월, 토번이 ?州(선주)·廓州(곽주)·河州(하주)·芳州(방주) 등 서역을 선제 공격했다. 唐이 대대적인 토벌군을 출동시킨 무렵, 토번의 英主 만첸 감포가 죽고, 토번 내부에서 왕위쟁탈전이 벌어졌다. 다음은 「冊府元龜(책부원귀)」 등에 기록된 토번 내부의 상황이다.

<儀鳳 원년(676) 만첸 감포가 죽었다. 그때 만첸 감포의 嫡子(적자) 치토슨은 여덟 살로 大臣 麴薩若(국살약)과 함께 (티베트 高原에 위치한 속령) 羊同에 병마를 징발하러 갔다가 父王의 부음을 들었다. 국살약은 즉시 羊同의 군사를 거느리고 급거 王都 라싸(拉薩)로 돌아와 그의 외손자인 치토슨을 감포(王)로 추대했다.

이때 10만의 대군을 거느리고 라싸로부터 1900여 km 떨어진 靑海에서 유인궤·이근행의 唐軍과 대치하고 있던 토번의 명장 論欽陵(논흠릉)은 진중에 데리고 있던 치토슨의 동생(여섯 살)을 감포로 옹립하려고 했다. 欽陵(흠릉)과 薩若(살약)은 날카롭게 대립했다.

그러나 적전 분열은 실크로드의 이권을 잃을 뿐만 아니라 토번의 멸망을 불러올 위험이 있었다. 이에 힘의 우위에 있던 흠릉은 중대한 정치적 양보를 했다. 흠릉은 치토슨을 감포로 받들기로 하는 한편 兵權은 계속 장악해 對唐戰에 대처하기로 했다. 대타협이었다>

토번과의 휴전으로 한숨을 돌린 唐은 창끝을 한반도로 되돌렸다. 676년 對신라戰을 앞두고 당은 과거의 전략을 수정했다. 唐軍이 한반도에서 패전을 거듭했던 것은 兵站(병참)의 실패 때문인 것으로 판단했던 같다. 676년 11월, 唐은 설인귀가 지휘하는 大함대를 한반도 전선에 투입했다. 그들로선 제해권 장악에 의한 병참선 확보가 중요했기 때문이었다.

하루에 병사 1명에 대해 1kg의 보급이 필요한 만큼(베트남 전쟁 당시 미군 1인에 대한 보급량은 5kg) 10만 병력에 대해서는 하루에 100톤의 물자를 공급하지 않으면 안 된다. 만약 10만 병력이 30일 걸리는 원정이라면 보급량은 3000톤에 달한다. 한반도 전장과 중국 본토의 보급기지 사이의 거리가 멀어 1회의 원정기간이 적어도 6개월은 소요된다. 이 경우 보급량은 1만8000톤으로 급증한다.


승전의 조건-兵站線 확보
창: 7~8세기,
길이 60.5cm

전쟁에서 병참은 불가결한 요소이다. 밥만 먹이는 최저 수준의 병참이라 할지라도 1인당 보급량은 0.5kg이다. 만약 이를 육로로 수송한다면 대번에 문제가 발생할 수밖에 없다. 10만의 병력을 먹이는 데만 하루 50톤의 식량이 필요하다. 500kg을 적재할 수 있는 마차 100대 분이다. 대운하 북단에 위치한 唐의 병참사령부로부터 한반도 임진강 전선까지 도착하는 데 육로로 100일이 걸린다면 마차 1만대 분이다. 당시 遼西(요서)·遼東(요동)의 도로사정이 매우 나빴던 만큼 수송 소요시간은 늘어날 수밖에 없었다.

수송을 담당하는 사람도 말도 식량을 먹으며 보급로로 나아간다. 그 보급로의 안전을 확보하기 위해서는 중도에 부대가 주둔해야 하며, 거기에도 물자를 보급하지 않으면 안된다.

하나의 보급부대는 마차 100~120대로 편성되는데, 이것으론 10만 大軍의 하루 식량에 불과하다. 牛車를 사용할 경우 적재력은 크지만 걸음이 느려 마차보다 수송일이 훨씬 더 걸린다.

따라서 大軍의 병참선 유지를 위해서는 해상수송로의 확보는 필수적인 조건이다. 중국의 山東반도와 황해도 장산곶까지의 해로는 불과 198km이다. 중국의 山東반도와 한반도를 연결하는 최단거리의 항로인 것이다.

羅唐전쟁의 主무대는 수로와 인접한 예성강·임진강·한강 하류였다. 해상을 통해 唐軍이 본국으로부터 보급을 받기 유리한 지점이었다. 수로 운송수단인 선박은 식량을 먹지 않을 뿐만 아니라 운송능력도 월등하다. 따라서 唐軍은 再보급을 받기 위해 해안이나 수로에서 멀리 벗어날 수 없었다.

개전 이후 신라의 수군은 唐軍의 병참수송선을 계속 집요하게 격파했다. 병참선 유지에 실패한 唐軍은 대체로 굶주렸다. 羅·唐 양국은 대체로 임진강 계선을 사이에 두고 일진일퇴의 공방전을 되풀이했다. 唐軍이 漢江 계선을 돌파해 신라의 王道 서라벌로 진격할 수 없었던 것은 병참선을 확보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중국은 전통적인 陸軍國(육군국)이지 海軍國(해군국)이 아니었다. 반면 개국 이래 가야·倭(왜) 등과 바다에서 싸워온 신라의 水軍은 강력했다.

676년 11월, 설인귀가 거느린 唐의 함대는 서해안을 따라 남하하여 금강 어귀로 진입하려고 했다. 사찬(신라 관등 제8위) 金施得(김시득)이 지휘하는 신라 함대는 금강 하구 기벌포(충남 서천군 장항읍)에서 설인귀의 함대를 포착했다.

新羅 수군은 첫 전투에서 패했으나 이어 전개된 22회의 大小 전투에서 全勝을 거두고 唐兵 4000여 명을 살상했다. 해전에서는 육상전과는 달리 전사자의 시체가 쉽게 수습되지 않는 만큼 실제 唐軍의 병력 손실은 훨씬 많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기벌포 해전의 승리는 해군 작전의 새로운 경지를 개척한 것으로 평가된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신라 수군의 탁월한 해상기동 능력

22회의 해전은 그것이 해상기동전이었음을 의미한다. 왜냐하면 종래의 해전이나 수전은 근거리에서 서로 화살 등을 쏘다가 戰船의 뱃머리를 마주대고 서로의 뱃전에 뛰어올라 칼과 창으로 승부를 결하는 소위 「登船(등선)육박전」이었던 만큼 대개 한두 차례의 접전으로 승패가 갈라졌기 때문이다.

해상기동전을 전개할 경우 戰船의 속력과 强度, 그리고 조함술과 사정거리가 긴 무기의 질적 수준이 승패를 결정한다. 설인귀의 함대는 처음 2~3회의 근접전에서 패배한 후 도주하다가 신라 함대의 추격을 받아 궤멸한 것 같다. 신라와 唐의 함대가 해전을 벌였던 곳은 서천군 장항읍(금강 하구)으로부터 西面(비인만)에 이르는 남북 25km에 이르는 해역인 것으로 보인다.

기벌포 해전 당시 신라는 千步弩(천보노)라는 신예 공격무기를 보유하고 있었다. 당시의 1步는 약 1.8m. 즉, 최대 사거리가 약 1.8km에 달하는 강력한 長兵武器(장병무기)였다. 唐고종은 羅唐전쟁 開戰 1년 전인 669년, 신라 천보노의 제조 기술자인 사찬(관등 제8위) 仇珍川(구진천)을 조서로 불러들여 제조 기술을 획득하려 했다. 그러나 구진천은 자신의 목숨을 걸고 제조기술을 공개하지 않았다.

기벌포 해전은 羅唐 7년전쟁의 최후 결전이었다. 그러나 이는 어디까지나 세월이 지난 후의 결과일 따름이었다. 신라의 지도부는 기벌포 해전 이후에도 약 30년간 평화를 확신하지 못하고 전전긍긍했다. 당시 세계 최강국인 唐 지도부 의지에 따라서는 언제든 전쟁이 재발할 가능성이 있었던 것이다.

677년, 唐고종은 옛 고구려의 보장왕 高藏(고장)을 요동도독 겸 朝鮮王(조선왕)으로 책봉하고, 옛 백제 의자왕의 아들 扶餘隆(부여융)을 웅진도독에 임명하고, 이어 帶方王(대방왕)으로 책봉했다. 이는 신라 再정벌을 위한 사전 포석이라고 해도 좋다. 그러나 고장과 부여융은 한반도로 들어오지는 못했다.

신라에는 다행하게도 唐과 토번의 전쟁이 계속됐다. 677년 扶州(부주)의 臨河鎭(임하진)이 토번군의 공격을 받았다. 이해 9월, 좌위대장 劉審禮(유심례) 등의 반격도 실패해 唐은 큰 위협을 받았다. 그러나 677년으로부터 678년으로 넘어가는 시점에 티베트 고원에서 토번과 양동 사이에 전쟁이 벌어졌다. 이런 가운데에도 唐고종은 신라에 대한 再征(재정)을 포기하지 않았다. 다음은 「자치통감」의 의봉 3년(678) 9월조의 기사다.

<9월, 高宗이 장차 군대를 일으켜 신라를 토벌하고자 했다. 병으로 집에 있던 시중 張文瓘(장문관)이 입궐해 高宗에게 간했다.

『지금은 토번이 侵寇(침구)하니 바야흐로 군사를 일으켜 서쪽을 토벌해야 합니다. 신라는 비록 자주 不順(불순)하지만, 일찍이 변방을 침범하지는 않았습니다. 만일 신라를 친다면, 臣은 그 폐가 공사간에 심하지 않을까 두렵습니다』

이에 唐고종은 (신라 토벌계획을) 중지하였다>

唐고종은 신라 정벌에 집착했다. 그러나 죽음을 눈앞에 둔 장문관이 唐고종에게 정벌의 우선순위를 서쪽 변경을 침략하고 실크로드의 이익을 장악한 토번에 둘 것을 강력하게 진언했다. 이에 唐고종은 일단 토번과의 결전을 결심했다. 그러나 결과는 참패였다.

678년 9월, 唐軍은 左衛대장군 劉審禮(유심례)가 토번의 포로가 될 만큼 패전했다. 토번은 계속 「오아시스의 길」과 연결되는 靑海 지역의 요새를 증강했다. 680년, 토번은 四川 서북부 지역의 전략적 요충 安戎(안융)을 점령했다.


文武王의 고뇌와 유언
成山頭에 세워진 3人像. 가운데 秦始皇, 왼쪽은 재상 李斯, 오른쪽은 불사약을 구하러 成山頭에서 출항한 徐福.

이런 정세에도 文武王은 안심하지 못했다. 678년, 신라의 王京에 羅唐전쟁의 정신적 귀의처인 四天王寺(사천왕사)가 완공됐다. 부처의 힘을 빌려 국난을 극복하겠다는 간절한 소망이 담은 일이었다. 또한 680년 3월, 문무왕은 그의 질녀를 고구려 보장왕의 서자이며 報德國王인 高安勝(고안승)에게 시집보냈다. 고구려 유민에 대한 회유책이었다.

680년 7월1일, 羅唐 7년전쟁에서 승리해 삼국통일을 완수한 文武王이 향년 56세로 병몰했다. 문무왕의 遺詔(유조)는 참으로 감동적이다.

<吳王(오왕: 손권)의 北山 무덤에도 채색의 金鳧(금부: 금으로 만든 물오리)를 볼 수 없고 魏主(위주: 曹操)의 西陵(서릉)도 오직 銅雀(동작)의 이름만 들을 뿐이다. 옛날 萬機(만기)를 총람하던 영웅도 마침내 한덩이의 흙이 되어 그 무덤 위에 꼴 먹이는 아이들이 올라가 노래하며 여우와 토끼는 그 곁에 구멍을 뚫었으니, 한갓 資財(자재)를 헛되이하고 人力만 수고롭게 할 뿐 유혼을 머물게 할 수는 없는 것이다.

고요히 생각하면 마음의 아픔을 금할 수 없으니, 이와 같은 것들은 즐겨할 것이 아니므로 죽은 뒤 10일이 되면 창고문 바깥 뜰에서 불교식에 의하여 불에 태워 장사 지내고 服(복)의 경중은 규정이 있지만, 喪(상)의 제도는 검약해야 할 것이며, 邊城(변성)의 鎭守(진수)와 州ㆍ縣의 課稅(과세)도 필요한 것이 아니면 마땅이 헤아려서 폐하고, 律令(율령)과 格式(격식)도 불편함이 있으면 곧 개선하라. 멀고 가까운 곳에 포고하여 이 뜻을 알게 할 것이니 소속 관원은 그대로 시행하라>

신하들은 大王의 유언에 따라 불교식으로 화장한 그의 유골로 東海口(동해구)에 있는 바위 위에서 장사를 지냈다. 경주시 양북면 봉길리 해안에서 약 200m 떨어진 바다에 큰 바위 4개가 봉긋 솟아 있다. 文武王의 水中陵(수중릉)이다.

중국 山東반도의 동쪽 끝에 솟은 바위 절벽인 成山頭(성산두)에는 높이 10m에 달하는 秦始皇(진시황)의 立像(입상)이 세워져 있다. 진시황의 좌우에는 秦(진)의 재상인 李斯(이사)와 술사인 徐福(서복)의 立像도 배치돼 있다. 그런데 그들의 눈과 손은 한반도를 향하고 있다. 최근의 작품이다. 최근 東北工程(동북공정)이라는 이름으로 고구려와 발해를 중국의 지방정권이라 강변하며 中國史에 편입시키는 그들의 작태를 생각하면 가슴이 서늘해진다.


중국에 강력한 통일왕조 등장하면 주변은 不幸

알다시피 徐福은 진시황의 명을 받고 不死藥(불사약)을 구하기 위해 성산두에서 출항했다가 행방불명된 인물이다. 동국大 尹明喆(윤명철) 교수는 成山頭를 함께 답사하면서 필자에게 『진시황이 徐福을 해외에 파견한 진짜 목적은 불사약을 구하기가 아니라 秦제국의 東方정책을 위한 정찰이 아닌가 추측한다』면서 『北韓에서 급변 사태가 나면 中國이 어떻게 나설지 우려된다』고 말했다. 秦은 중국 최초의 통일제국이다. 그러나 秦제국의 존속기간은 15년에 불과했다.

역사를 되짚어보면 중국대륙에 강력한 통일제국이 등장하면 한반도는 늘 고통을 받았다.

漢의 무제는 기원전 109년 베트남을 정복한 다음해인 기원전 108년 古朝鮮(고조선)을 침략해 漢4郡을 설치했다.

400년의 대분열기를 거쳐 등장한 隋(수)제국은 고구려 원정의 실패로 멸망했다. 隋의 천하를 대신한 대신한 唐은 신라와 7년전쟁을 벌였다. 唐末五代의 혼란기를 거쳐 성립한 宋은 거란족의 遼國(요국), 여진족의 金國(금국)에 비단과 돈을 바친 약소국이었다. 요와 금은 차례로 중국 北部에 「기마민족 정복국가」를 세웠다. 金은 宋의 수도 開封을 함락시키고 宋의 上皇 徽宗(휘종)과 황제 欽宗(흠종)을 포로로 잡아 北으로 압송해 갔다.

휘종의 아들 하나가 양자강을 건너 杭州(항주)를 도읍으로 삼는 망명정권을 세웠다. 이것이 南宋이다.

南宋은 칭기즈칸의 손자 쿠빌라이 칸의 침략을 받고 멸망했다. 쿠빌라이 칸은 중국 대륙에 중국식 왕조인 元제국을 창업했다. 元은 강화도로 들어가 30년간 저항하던 고려를 복속시키고, 약 100년간 고려를 착취했다. 특히 몽골군(元軍)은 고려군과 연합해 2회에 걸쳐 일본을 정벌했지만, 두 번 모두 태풍으로 함대가 궤멸했다.

14세기 중엽, 紅巾敵(홍건적) 출신의 朱元璋(주원장)이 일어나 몽골족을 북쪽으로 몰아내고, 실로 오랜만에 漢族제국 明을 창업했다.

1392년 李成桂(이성계)의 쿠데타에 의해 성립한 조선왕조는 국초부터 퇴영적인 「事大主義」와 「유교국가」를 國是(국시)로 삼아 한민족의 진취적 기상을 꺾고 말았다. 조선왕조가 범한 최대의 실책은 事大主義에 의한 국가안보의 무임승차였다.


조선조 최대의 실책은 事大主義에 젖은 국가안보의 無賃乘車

그러나 明은 宦官(환관)정치의 폐해로 국력이 급속히 쇠약해졌다. 壬辰倭亂에 참전한 明軍은 전투력도 약했고 조선의 관리나 백성들에게 혹독했다. 明은 明대로 임진왜란 때의 과도한 戰費(전비)로 국가재정이 파탄나고 말았다. 때마침 만주에서 여진족의 누르하치가 발흥해 後金을 창업했다. 누르하치는 임진왜란 당시 물자가 흘렀던 兵站路(병참로)인 요동지역에 웅거해 왕조 창업의 자금을 마련할 수 있었다. 후금군은 만주 무순 인근에 위치한 사르후에서 明의 원정軍을 대파했다. 이때 조선은 明軍을 지원하기 위해 원군을 파견했다.

누르하치를 후계한 홍타이지(淸太宗)는 종족의 명칭을 滿洲族(만주족)으로, 국호를 淸으로 바꾸었다. 淸은 조선왕조가 明을 지원하지 말 것을 요구했으나 仁祖 조정을 움직이던 西人派(서인파)는 「임란 때의 再造之恩(재조지은)」 운운하며 實利外交를 외면하고 朱子學的 명분론에 따라 청국의 요구를 거부했다. 1636년 淸太宗 홍타이지는 10만 대군을 거느리고 남침해(丙子胡亂) 南漢山城에서 농성하던 仁祖(인조)를 出城(출성)시켜 항복을 받았다.

淸朝는 康熙(강희)·擁正(옹정)·乾隆(건륭)의 治世를 지난 후 쇠망의 길로 들어섰다. 1640년 아편전쟁에서 영국에 패배해 불평등조약을 체결하고, 太平天國의 난은 湘勇(상용)·淮勇(회용) 등 漢族 관료가 이끈 民兵隊의 힘에 의해 10년 만에 겨우 진압됐다.

淸朝는 열강에게 불평등조약을 강요당하는 등 온갖 수모를 겪으면서도 유독 조선왕조에 대해서만은 「宗主國」 행세를 톡톡히 했다. 청군은 1882년 壬午軍亂 때 출병해 閔妃 측의 요청을 받고 대원군을 淸國으로 납치해 갔으며, 1884년 갑신정변 때는 2000여 명의 淸軍이 창덕궁을 공격해 金玉均 중심의 개화파 정권을 집권 3일 만에 타도했다.


袁世凱의 시대착오적 발호
서울 명동의 중국대사관. 원세개의 진영이 있던 곳이다.

당시 청국과 일본은 조선왕조의 지배권을 놓고 치열하게 다투었다. 이 시기의 10여 년 동안 이 땅에서 가장 발호한 인물이 李鴻章(이홍장)의 심복 袁世凱(원세개)였다. 袁世凱는 「駐札朝鮮總理交涉通商事宜」라는 직함을 달고 서울에 들어와 대원군 납치, 개화당 정권 무력 진압 등을 진두에서 지휘했으며, 조선의 人事·외교·재정·대외무역 등 온갖 國事에 간섭했다. 그는 시도때도 없이 고종에게 알현을 요구하고 증거를 남겨야 한다는 이유로 筆談(필담)을 강요하기도 했다.

袁世凱가 수행한 청국의 간섭 가운데 국제적으로 평판이 가장 나빴던 것은 조선이 朴定陽(박정양)을 駐美公使로 파견할 때 다음과 같은 지침을 강요한 것이었다.

(1)조선의 외교관이 외국에 나가면 우선 청국 대사관에 보고하며, 청국의 공사와 함께 그 나라의 외무부로 갈 것.

(2)신임장을 제출하면 즉시 귀국시킬 것.

(3)중요한 문제가 있을 때 조선의 외교관은 청국 공사에게 상담할 것.

박정양은 1887년 11월 워싱턴에 도착했지만, 청국 공사관에 찾아가 보고하지 않았다. 신임장 제출 후 물론 즉시 귀국하지 않았다. 조선의 자주 독립을 세계에 알리기 위해 하루라도 더 워싱턴에 체류하는 것이 박정양의 임무였다. 제3항은 중요한 용건이 없었다고 함으로써 넘어갈 수 있었다.

박정양은 만 1년 만인 1888년 11월, 워싱턴을 떠났다. 원세개는 박정양의 귀국이 늦다고 분노했다. 박정양은 원세개의 분노를 피해 귀국 도중 일본에 4개월을 머물렀다. 조선정부는 박정양이 잘하고 있다고 평가하고 외무독판(외무부장관)으로 내정했다. 박정양은 1889년 3월 서울에 돌아왔다.

원세개는 박정양을 문책할 것을 조선 정부에 요구했다, 그러나 이홍장이 파견한 외국인 고문 데니 등이 오히려 청국에 대항하는 조선을 지원하며 조언을 해주고 있었다. 이런저런 궁리 끝에 高宗은 박정양에게 부제학 겸 도승지를 제수했다. 원세개가 길길이 뛰면서 高宗에게 거칠게 항의했음을 물론이다.

당시 서울에 주재하던 각국 공사는 원세개의 발호를 비난했다. 그럼에도 이홍장의 눈에는 그것이 「원세개의 애국심」이라고 비쳤다. 이홍장의 추천으로 원세개의 신분은 辦事大臣(판사대신)에서 欽差大臣(흠차대신)으로 승격했다. 판사대신이란 정부로부터 소임받은 임무만 수행하지만, 흠차대신은 스스로 판단하고 행동할 수 있는 「特命全權(특명전권)」인 셈이다. 이런 행태는 국제적 스탠더드에 미달한 청국조정의 수준을 드러내는 것이었다

이밖에도 원세개는 조선정부가 재정 파탄을 모면하기 위해 제3국에 차관을 하려 하면 중간에서 방해공작을 일삼았다. 趙大妃(조대비)의 喪(상)에는 조선정부의 간곡한 사양에도 불구하고 北京으로부터 100여 명의 수행원을 동반하는 조문 勅使(칙사)를 파견케 했다. 그 영접 비용이 조선의 재정 파탄을 더 심화시켰다.

이것은 각국 외교관에게 조선의 종주국이 청국임을 선전하기 위한 원세개의 장난이었다. 중국 청년들의 서울 시가지 점거 난동 직후, 우리 외무부의 초치를 받은 주한중국대사가 만면에 웃음을 띠고 외무부로 들어가는 모습, 그 직후 중국 외무부 대변인이 중국 청년의 난동에 유감을 표시하면서도 「정의감」 운운했을 때 필자의 뇌리에선 문득 「원세개의 망령」이 떠올랐다.

당시 원세개의 청사는 현재의 서울 주재 중국대사관 자리에 위치했다. 서울의 官民들은 명동·소공동 일대를 「袁大人 陣前(원대인 진전)」이라고 부르며 감히 접근하지 못했다. 「袁大人 陣前」에서 淸國 병사들의 조선 官民을 폭행하는 행패가 자주 발생했기 때문이다. 이런 행패는 몽골 간섭 시기의 고려왕조 이래 全無한 일이었다.

조선에서 10여 년 동안 無所不爲(무소불위)의 횡포를 일삼던 「袁大人」은 1894년 淸日전쟁이 터지자 야반도주하듯 서울을 빠져나와 본국으로 돌아갔다. 청일전쟁에서 일본은 일방적으로 승리했다. 이로써 조선에서 청국은 전면 퇴각하고 조선은 전승국인 일본의 식민지로 가는 수순을 밟게 된다.

이홍장 사후에 北洋군벌을 장악한 원세개는 1911년 辛亥革命(신해 혁명) 시기에 淸朝에 의해 난국수습을 위한 총리에 임명되었다. 하지만 그는 혁명의 지도자 孫文으로부터 中華民國 초대 총통을 양보받는다는 조건으로 淸朝를 배신하고, 마지막 황제 宣統帝(선통제)를 퇴위시켰다. 중화민국 초대 총통에 취임한 원세개는 곧 의회를 해산시키고 마침내 황제로 즉위했으나 온 세상의 비난 여론에 견디지 못해 결국 퇴위하고 제 나름의 울분에 쌓인 채 병사했다.


같은 이념 추구해야 友邦, 역사관 共有해야 같은 民族

제2차 세계대전의 종전 직후부터 중국 대륙에서는 치열한 國共內戰이 전개됐다. 최후의 승자는 마오쩌둥(毛澤東)이 이끄는 中共이었다. 1949년 北京 天安門 광장에서 毛澤東은 中華人民共和國(중화인민공화국) 건국을 선언했다. 바로 그해 티베트는 중공군에 의해 점령당했다. 건국 이듬해인 1950년 中共은 6·25동란에 100만 大軍을 투입해 한국의 통일을 방해했다.

1968년, 경제정책의 실패로 國政의 제1선에서 물러나 있던 毛澤東은 劉少奇(유소기)·鄧小平(등소평) 등 實用 노선의 실권파를 타도하기 위해 대학생 등 청년들을 선동해 소위 문화대혁명을 일으켰다. 10여 년 동안 중국을 광란의 회오리 속으로 몰아넣은 文革으로 毛澤東은 實權을 되찾았지만, 중국의 경제는 30년 후퇴한 것으로 평가됐다. 毛澤東 死後에 鄧小平이 정권을 장악, 광란의 극좌 노선을 청산하고 경제 발전의 궤도를 깔았다.

1992년 대한민국은 중화인민공화국과 수교했다. 중공군이 6·25동란 개입해 한국의 통일을 방해한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문제 제기 없이 넘어갔다. 이제 한국에게 중국은 최대교역국이 되었지만 아직도 중국은 여전히 지구상에서 가장 열악한 북한 金日成-金正日 독재체제의 강력한 후원국이다. 우방은 이념이 비슷해야 하며, 민족은 역사관을 共有해야 한다는 점에서 대한민국은 고민이 깊어지고 있는 나라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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