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르포] 일본 건국신화의 현장을 가다 - 일본을 정복한 수로왕의 후손을 찾아서

글 정순태 기자  2008-07-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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南(남)규슈에 상륙한 수로왕의 후손이 포항에서 이즈모로 건너간 연오랑의 후예를 물리치고 일본열도의 패권을 차지해 야마토(大和) 정권을 수립했다. 야마토의 ‘金 씨 왕조’는 신라 ‘昔(석) 씨 왕조’의 마지막 임금인 訖解王(흘해왕)의 후예에게 ‘壬申(임신)의 난’(672년) 때 빼앗긴 왕권을 80여 년 만에 되찾아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연오랑과 그 후예의 행방

국보급 언어역사학자

올해 80세의 在野(재야) 언어역사학자 朴炳植(박병식) 선생이 수년 전 가을에 갑자기 신병으로 쓰러졌을 때 병상으로 달려온 고고학계의 원로 손보기 연세대 석좌교수는 “우리 국보가 오래 사셔야 한다”고 애를 태웠다. 박 선생은 고대 한일관계사의 쟁점 및 야마토(大和) 언어의 뿌리 등에 관한 연구서 27권을 저술하여 일본에서 출판했다.

그는 일본학자들 모두가 무슨 뜻인지 몰랐던 <古事記>(고사기)와 <日本書紀>(일본서기), <萬葉集>(만엽집)의 난해한 부분을 고대 한국어로 해독하여 일본 학계를 놀라게 했다. 그는 고대 야마토語(어)는 한국의 古語(고어), 특히 경상도 사투리임을 갈파했다.

譯官(역관) 집안에서 태어난 박 선생은 10개 국어를 구사한다. 해방 직후 함경북도 성진(지금의 김책시)시에 소재한 성진의전 재학 당시 독일어로 리포트를 제출할 만큼 어학에 특출했다. 1949년 단신 월남한 그는 파란만장한 인생행로를 걸어 왔다.

1970년대 중반, 그가 창업한 석락산업은 사우디아라비아에서 1300만 달러짜리 항만준설공사를 수주·완공해 우리나라의 ‘중동 진출 제1호’를 기록했다. 그러나 그 후 사우디의 1억 달러 항만건설공사 수주에 실패한 후 권력이 개입된 商戰(상전)에 회의를 느끼고 삶의 방향을 바꾸었다.

1979년 7월에 미국으로 건너가 언어의 기원과 한일관계사 연구에 몰두했다. 미국 체류 중 그는 <지금 가야족은 슬프다>, <야마토언어의 기원과 고대 조선어>, <卑彌呼(히미코)는 말한다> 등 일본어 저서를 발표했다. 특히 <일본어의 비극>은 일본에서 20만 권 이상 팔린 베스트셀러였다.

이후 박 선생은 일본 시마네대학 등의 초빙강사로 5년간 일본에 머물며 저술과 강연을 하다 2000년에 귀국했다. 그는 일산에 우거하면서 소리변화의 법칙에 관한 학술서 <말은 어떻게 태어났나>(조선일보사 발행) 등 한국어 저술 3권을 썼다. 박 선생은 다음과 같이 말한다.

“소리변화 법칙을 세계 최초로 밝혀낸 <그림의 법칙>은 a, b, g 세 계열의 어휘 부분이지만, 내가 연구해 낸 것은 a부터 z까지 모두예요. 내가 사라진 후에라도 나의 법칙을 계속 연구·보완하는 사람이 나오면 좋겠어요.”

지난 4월 중순, 필자가 박 선생의 일산 자택을 방문했을 때 선생은 실내에서도 가죽장갑을 끼고 있었다. 병세는 호전됐지만, 보행이 불편한 상태였다. 선생은 뉴욕에 사는 막내딸의 간청으로 미국으로 가기 위해 일산 집을 팔았다고 했다. 출국 예정일은 6월 1일이었다. ‘알아주는 사람도 없는 조국’을 떠나 미국에서 만년을 보낼 계획이었다.


이즈모의 이나사 해변

인천 국제공항을 떠난 여객기는 75분 만에 요나고(米子) 국제공항에 착륙했다. 박 선생에 따르면 ‘요나고’를 풀이하면 ‘쌀이 나오는 곳’이다. 일행이 요나고 국제공항에 내린 것은 목적지인 시마네현 이즈모(出雲)市(시)에 가장 빨리 접근할 수 있는 국제공항이었기 때문이다. 이즈모는 <古事記>(고사기ㆍ서기 712년 편찬)와 <日本書紀>(일본서기ㆍ서기 720년 편찬)에 기록된 일본 최초의 고대 王都(왕도)다.

박병식 선생에 따르면 이즈모에 일본 최초의 왕도를 건설한 스사노오노미코토(素?鳴尊·이하 ‘스사노오’라 표기)는 경북 연일만에서 건너간 연오랑과 동일 인물이라고 한다. 이에 대해서는 박 선생의 연재기사에서 상세하게 설명할 것이다. 스사노오노미코토는 고대 한국어로 풀이하면 ‘썩 빨리 (건너)온 오씨 姓(성)의 남자’라는 뜻이다. 연오랑은 경북 연일에 살던 ‘오’라는 성을 가진 남자를 의미한다.

<삼국유사>에 따르면 연오랑은 신라 아달라왕 4년(157)에 일본으로 가서 소국의 왕이 됐다. 그렇다면 연오랑의 도착 지점은 어디일까. 답사단은 이즈모의 이나사노하마에 도착했다. 이나사의 해변은 포항 앞바다에 투기한 빈 깡통 등이 해류를 타고 흘러드는 곳이다. 연오랑도 해류를 타고 이나사 해변에 도착했다고 보면 자연스럽다.
‘오로치 退治’ 신화의 再現극.

여기서 記紀(기기: <古事記>와 <日本書紀>)에 기록된 스사노오의 이동경로를 간략하게 살펴본다.

<스사노오는 하늘나라에서 난행을 일삼다 쫓겨나 신라의 ‘소시머리’라는 곳에 갔으나 신라에서 살기 싫다고 말하고 배를 만들어 타고 동쪽으로 건너가 이즈모國(국)의 히가와 상류에 있는 ‘도리가미노다케(鳥上峯)에 다다랐다.>

‘소시머리’는 ‘시’가 소유격 조사 ‘의’이므로 소(牛)의 머리(頭)란 뜻이다. 현재 남한에는 ‘牛頭山(우두산)’이란 지명이 4~5개나 남아 있다. 당시의 신라는 북쪽과 서쪽이 가야 여러 나라들에 둘러싸인 작은 성읍국가였다. 따라서 스사노오가 ‘소시머리’로 가기 전에 살았던 하늘나라는 가야라는 추론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이즈모로 건너간 연오랑(즉 스사노오)은 어떻게 이즈모의 왕이 될 수 있었을까. 다음의 ‘오로치 퇴치’ 신화는 그와 관련한 ‘記紀(기기)’의 기록이다.

<도리가미노다케(鳥上峯)에서 스사노오는 묘령의 처녀를 가운데 앉혀놓고 슬피 우는 늙은 부부를 만나 그 까닭을 물었다. 노부부는 그들에게 딸이 여덟 있었는데, 머리가 여덟 개이고 꼬리도 여덟 개인 ‘야마다의 오로치’(大蛇)가 매년 이맘때가 되면 고시(越)국에서 이 마을로 오는데, 그 놈은 올 때마다 우리 딸 하나씩을 잡아먹는다고 했다. 그 말을 들은 스사노오는 노부부에게 독한 술을 담가서 큰 술독 여덟 개에 가득 채우고 기다리라고 일렀다.>

다음은 ‘오로치’에 대한 박병식 선생의 풀이다.
이즈모市의 이나사 해변.

“‘오로’는 ‘오로족’을 뜻하며, ‘치’는 요즘도 사용하는 우리말 ‘이 치=이 사람’, 저 치=저사람)’의 ‘치’입니다. 따라서 ‘야마다의 오로치’는 ‘수많은 오로족 사람’을 의미합니다(‘야’는 ‘많다’라는 뜻임). 고시(越)국, 즉 지금의 노토(能登)반도를 근거지로 삼고 있던 오로치들은 ‘오로→오리→고리(高麗)→고시’로 소리 바꿈을 했어요.”

오로치는 원래 한반도 동해안에 살던 ?婁族(읍루족)을 의미한다. 읍루는 숙신→말갈→여진→만주족으로 이름이 바뀌어 온 족속이다. 그렇다면 ‘오로치’는 매년 같은 시기에 왜 이 마을에 왔던가. 박 선생의 해석이다.

“첫째, 오로치가 히가와 江(강) 상류까지 남하하여 사철을 채취하여 철을 생산하고 있었으며, 둘째는 이 강 중·하류에서 이즈모 사람들이 수확하는 쌀을 탐내 매년 수확기에 마을로 내려와 ‘딸’처럼 애지중지 길러온 곡식을 빼앗아 갔다는 얘기입니다.”

이어지는 오로치 퇴치 신화는 다음과 같다.

<며칠 안 되어 오로치(大蛇)가 어김없이 노부부의 집을 찾아왔다. 무척 좋아하는 술이 준비되어 있어 오로치는 머리 여덟 개를 여덟 술독에 처박고 그 독한 술을 다 마셨다. 오로치가 대취하여 곯아떨어진 것을 숨어서 지켜본 스사노오는 칼을 휘둘러 오로치를 토막내 죽였다.>

농경민족인 가야족이 강철제 무기를 가진 오로족을 지략으로 쳐부순 ‘오로치 퇴치 신화’는 記紀(기기)의 앞부분에 서술되어 있다. 박병식 선생은 “이 같은 신화를 자랑거리로 생각해 <기기>에 기재하도록 지시한 천황家(가)는 가야족이 아니고 누구이겠느냐”고 말했다.

<토막난 오로치의 꼬리 부분에서 한 자루의 칼이 나타났다. 스사노오가 그것을 집어 들어보니, 그것과 부딪친 자기의 칼날이 무뎌졌는데도 불구하고 오로치의 몸 속에서 나온 칼은 날이 시퍼렇게 서 있었다. 스사노오는 오로치의 ‘모조리 벨 수 있는 칼’을 아마테라스(天照大神 : 일본신화에 나오는 최고의 神으로 스사노오의 누나)에게 바쳤다.>

이것이 바로 일본 천황이 즉위할 때 전해 받는다는 3種(종)의 神器(신기) 중 하나인 구사나기노쓰루기(草?劒·초치검)이다. 가야족인 스사노오가 휘둘렀던 칼이 오로치가 찼던 칼과 부딪쳐 날이 상했다는 것은 북방계인 오로족이 일본열도에 처음 금속제련 기술을 전달했다는 사실을 암시하는 사료다. 북방계 오로족은 그들의 선조 때 이미 북방의 한랭한 기후조건을 극복하기 위해 불(火)을 잘 다루어 고열을 가해야 하는 강철 생산에 능숙한 상태에서 일본으로 건너갔던 것으로 보인다.


고대 일본은 한국인의 이민국

이즈모는 포항과 거의 같은 위도에 위치해 있다. 이나사 해변에 작은 바위산 하나가 바짝 붙어 있다. 바위산에는 스사노오를 모시는 작은 神社(신사)가 달라붙어 있다. 이나사 해변을 둘러본 답사팀은 일본 최대 규모의 신사인 이즈모다이샤(出雲大社)로 이동했다. 이즈모다이샤는 스사노오의 6대손(혹은 5대손)인 오쿠니누시노미코토(大國主命)를 祭神(제신)으로 모시고 있다. 오쿠니누시노미코토는 문자 그대로 ‘큰(大·오) 나라(國·쿠니)의 주인(主·누시)이신 귀한 사람(命·미코토)’이란 뜻이다.

오쿠니누시가 다스린 이즈모國(국)은 후일 긴키(近畿)지방에 근거지를 둔 야마토(大和) 정권과 패권을 다퉜다. 처음 야마토의 군사는 추고쿠(中國)산맥을 넘어 이즈모국을 공격했지만, 험한 지형 때문에 번번이 실패했다. 이에 야마토軍(군)은 세토內海(내해)의 해적들을 포섭, 함대로 시모노세키 해협을 돌아 이즈모국의 이나사 해변에 상륙했다고 한다.

해로를 통한 기습 상륙작전에 허를 찔린 이즈모 국왕 오쿠니누시는 야마토군과 협상에 나섰다. 협상 결과는 오쿠니누시가 나라를 양보하는 대신 야마토 정권이 오쿠니누시에게 일본 제1의 왕궁을 신축해 주겠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바로 이즈모다이샤의 건설 신화다. 이때 오쿠니누시의 장남은 망국의 슬픔을 이기지 못해 신지湖(호)에 몸을 던져 자결했다고 한다. 필자가 석양 무렵에 신지호를 찾은 것은 망국의 왕자를 조문한다는 뜻도 없지 않았다. 이곳에서 잡은 물고기 회가 일품이라는 소문이 나 있었지만, 왕자의 투신자살이 생각나 왠지 찝찝했다.

이즈모다이샤는 일본 최대의 사찰 도다이지(東大寺)의 大佛殿(대불전ㆍ높이 45m)보다 높다. 절의 앞에 장식된 금줄(새끼줄)이 어른의 한 아름보다 더 굵다. 참배객들은 손을 모아 박수를 두 번 친 뒤 합장하고 무엇인가 간절히 기도했다. 그런가 하면 어른이나 아이나 할 것 없이 동전을 던져 새끼줄에 꽂는 놀이에 몰입하기도 했다.

일본은 神道(신토)의 성전인 神社(신사)가 많은 나라이며 ‘구지(籤)의 나라’이기도 하다. 일본의 신토는 샤머니즘에서 유래한 종교다. 신사의 마당에 있는 나무의 줄기와 가지마다 참배객의 소망이 적힌 흰색 구지가 벌떼처럼 붙어 있다.

신사에서 판매하는 구지의 가격은 소망의 종류에 따라 다르다. 예컨대 ‘입시 합격 기원 구지’는 100엔, ‘사랑의 구지’는 200엔, ‘사업번창의 구지’는 5000엔이다. 신토는 메이지유신(明治維新) 이후 일본의 國敎(국교)로 정해졌지만, 1945년 패망 이후 폐지됐다. 필자는 신토의 예배가 어떻게 진행되는지 궁금해 신사의 집회에 슬쩍 들어가 보았다. 神女(신녀)가 강단에 올라 춤을 추며 나뭇가지 같은 것을 흔드는데, ‘휘이익’ 소리가 난다. 신녀의 뒤편에 앉은 북채잡이 남자 神官(신관)이 북을 치고, 다른 신관은 피리를 분다. 설교 같은 것은 없었지만 기묘한 3중주다. 참석자들은 모두 엄숙한 표정이다.

그런 모습을 메모지에 적고 있는데, 진홍색 치마, 흰 저고리 차림의 신녀가 강단에서 내려와 필자에게 뭐라고 소곤거리는데, 말귀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나가라”라는 말로 이해하고 물러났다.

섬나라는 원래 문화의 종착지인 동시에, 그것을 가장 오랫동안 보존하는 특성을 지니고 있다. 얼핏 우리 고대의 샤머니즘도 이런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이어 신사의 결혼예식장인 婚儀殿(혼의전)에 들어가려 했지만, 입구에서 다른 신녀에게 저지당했다. 생각해보니 필자의 복장이 예식 참석자들에 비해 약간 야했다. 본전 입구의 안내판에는 “실례가 되지 않는 복장으로 拜見(배견)해 주십시오”라는 안내문이 나붙어 있었다.


신라를 낮추고 백제 높이는 정서
일본 최대의 전방후원분인 닌도쿠릉.

답사팀은 ‘이나바(稻場)의 시라우사기(白兎·하얀 토끼)’ 신화의 현장으로 갔다. ‘하얀 토끼 신화’의 현장은 시마네현과 접경한 돗토리현의 해안이다. 여기서 ‘하얀 토끼’ 신화를 살펴볼 필요가 있다. 오아나무치(大己貴神)에게는 이복 형이 많이 있었는데도 불구하고 막내인 그가 이즈모의 국왕이 된 사연을 ‘記紀’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이들 형제들은 모두 이나바(稻場)에 사는 야가미히메(八上比賣)를 아내로 맞이하려고 했다. 그래서 모두 함께 청혼하기 위해 이나바로 갔는데, 오아나무치에게 하인처럼 모든 짐을 지고 뒤따라오게 했다. 앞서 간 형들이 돗토리현 게다(氣多)군 해안에 이르렀을 때 온몸에 털이 하나도 남지 않은 상처투성이의 토끼가 쓰러져 신음하고 있는 모습을 보았다. 여러 형제가 토끼에게 이르기를 ‘바닷물로 몸을 씻고 바람이 잘 부는 언덕에 누워 있으면 낫는다’고 말했다. 그 말을 믿고 시키는 대로 했더니, 짠 바닷물이 상처에 스며들고, 부는 바람에 피부가 갈라져 더욱 고통스러워진 토끼는 울고 있었다.>

박 선생은 시라(우사)기는 ‘하얀 토끼’가 아니라 ‘신라 것(사람)들’을 뜻한다고 풀이한다. ‘記紀’를 저술한 일본의 史官(사관)들은 백제를 ‘구다라(큰 나라)’라고 높이고, 신라를 ‘시라기’라고 낮추었다. 그 이유는 사관들이 글 잘 아는 백제 유민 출신이었기 때문이다. 다음은 이어지는 ‘하얀 토끼 신화’의 줄거리다.

<하얀 토끼는 오키노시마(隱崎島)로부터 이나사 해변으로 건너오면서 악어에게 피부가 벗겨지는 고초를 당했다. 하얀 토끼로부터 자초지종을 들은 오아나무치는 이렇게 일렀다. “지금 바로 냇물이 바다로 흘러드는 하구로 가서 민물로 몸을 깨끗이 씻고, 그 근처에 있는 부들의 꽃가루를 땅에 흠뻑 뿌리고, 그 위에 뒹굴도록 하라.” 토끼가 그 말대로 하니 과연 몸이 나았다.>

여기서 주목할 것은 오키노시마라는 섬이다. 울산이나 포항에서 일본 혼슈(本州)로 해류를 따라 항해할 경우 오키노시마는 중간기착지다. 다음은 오아나무치가 ‘신라에서 출발한 移民(이민ㆍ시라우사기)’의 도움을 받는 신화의 줄거리다.

<이때 그 토끼가 오아나무치에게 말하기를, ‘당신의 여러 형들은 야가미히메의 마음을 얻지 못하고, 착한 당신만이 그 아가씨를 얻게 될 것’이라고 했다. 토끼의 예언대로 야가미히메는 오아나무치에게 시집오겠다고 했다.>

記紀에 따르면 이에 화가 난 형들은 오아나무치를 두 번이나 죽였으나 오아나무치의 어머니가 하늘나라로 올라가 호소한 덕분에 부활할 수 있었다. 형들이 또다시 오아나무치를 죽이려 하자 어머니는 아들을 키노구니(木國)의 神(신)에게 부탁해 스사노오가 사는 네노구니(根國)로 피신시켰다.

<오아나무치가 스사노오의 궁전으로 갔더니 그의 딸인 스세리비메(須勢理毘賣)가 은근히 눈짓했다. 둘은 정을 통하고 부부가 됐다. 이에 화가 난 스사노오는 뱀, 지네가 득실거리는 방에 오아나무치를 집어넣는 방법 등으로 그를 죽이려 했지만, 아내가 된 스세리비메의 도움으로 번번이 위기에서 벗어났다.>

이번 답사에서는 박 선생의 부인 김연화 여사가 박 선생의 간호원 역할을 했지만, 김 여사는 마쓰에(松江)에 4년여 거주했던 경험이 있어 큰 도움이 됐다. 김 여사는 “일본에는 기후가 습해 뱀이 많이 서식하고 있다”면서 다음과 같은 일화를 털어놓았다.

“마쓰에에 살 때 이웃 여자들과 함께 고사리와 고비를 뜯으러 산에 자주 다녔죠. 일본 여자들은 뱀을 보고도 나만큼 겁내지 않았어요. 한번은 이웃 아주머니가 산에서 소변을 보다가 뱀에 그곳을 물려 사망했습니다.”

<드디어 오아나무치는 장인 스사노오의 활, 칼, 神琴(신금)을 훔쳐 아내를 등에 업고 멀리 도주했다. 뒤늦게 이승과 저승의 경계까지 쫓아온 스사노오는 더 이상 추격이 불가능함을 알고, 오아나무치를 소리쳐 불러 말했다.

“네가 가지고 간 칼과 활로 너의 이복 형들을 죽이고, 네놈이 오쿠니누시(大國主命)가 되어라. 그리고 동시에 ‘우쓰시쿠니다마노가미(宇都志國玉神)가 되어 내 딸 스세리비메를 본처로 삼아 잘 살도록 하라, 이놈!”>

이런 과정을 거쳐 오아나무치는 그 칼과 활로 여러 이복 형들을 죽이고 나라를 세웠다. 여기서 ‘여러 이복형제’라고 일컬어진 사람들은 오아나무치를 온갖 수법을 동원하여 죽이려 했던 先住民(선주민)을 의미한다. 일본 신화를 보면 항상 착한 동생이 나쁜 형을 죽이는 식이다. 이 설화를 통해 우리는 일본이 고대 한국인의 이민국이었던 사실에 대한 일본인의 원초적인 열등감을 느낄 수 있다.

다음은 이나바(稻場)라는 지명에 대한 박 선생의 풀이다.

“이나바는 벼를 많이 생산하는 고장을 의미합니다. ‘이나’는 우리말 ‘리→니→이(米)’+‘나=생산·출산·낳다’→‘이나=입쌀을 생산하는 것(稻)’이고 ‘바’는 ‘곳=처’인데, 리바나→니바나→이바나로 소리바꿈한 것으로 봅니다.”

‘시라우사기 신화’에 나타난 이런 지명 등으로 볼 때 벼농사 기술이 가야족에 의해 고대 이즈모 지역에 전달됐음을 유추할 수 있다.

위에서 스사노오가 오아나무치에게 왕권을 물려줌과 동시에 우쓰시쿠니다마노가미(宇都志國玉神)가 되라고 한 말에 대해 박 선생은 다음과 같이 풀이했다.

“이것은 ‘우쓰시=아름다운’+‘쿠니다마=國玉(국옥)’=‘나라가 생산·관리하는 아름다운 옥’이라는 뜻입니다. 따라서 위의 기록은 스사노오가 오아나무치에게 ‘다마(玉)’를 생산하는 집단을 통솔하는 권한도 물려주었음을 암시합니다.”


박병식 선생의 ‘마지막 열정’

전날 답사팀은 요나고 공항에서 마쓰에로 가는 도중 고대로부터 玉(옥) 생산지로 유명한 다마쓰쿠리(玉造) 마을을 찾아 이곳 ‘傳承館(전승관)’에 들렀더니 각종 옥 제품이 진열되어 있었다. 최근 NHK가 방영한 대형 드라마 ‘쇼토쿠(聖德)태자’의 장식품으로 사용된 曲玉(곡옥) 등 각종 구슬 제작을 이 ‘전승관’에서 담당했다고 한다. 곡옥은 자손 번성을 기원하는 ‘神物(신물)’이며, 劒(검)· 銅鏡(동경)과 함께 일본 천황가가 자랑하는 ‘3종의 神器(신기)’ 중 하나다.

당초 답사팀은 박 선생 부처를 마쓰에市에 남기고, 오사카로 떠날 예정이었다. 보행이 불편하여 휠체어를 타고 다녀야 하는 선생의 건강을 위한 배려였다. 그러나 박 선생은 마음을 바꾸어 긴키(近畿)지방의 오사카(大阪)→나라(奈良)→교토(京都)→오쓰(大津) 답사에 동행하겠다고 했다. 그는 “이번이 마지막 일본 여행이 될 것 같다”며 의욕을 보였다.


▣ 야마토 왕조와 ‘壬申의 난’ 현장

일본 최대의 전방후원분-닌도쿠陵

호텔을 출발하여 40분 후 오사카府(부) 사카이(堺)市 다이센(大仙)町(정)에 위치한 일본 최대의 무덤인 ‘닌도쿠(仁德)陵(릉)’에 도착했다. ‘닌도쿠릉’이라 했지만, 무덤의 주인공이 확실치가 않다.

묘지 길이가 486m에 이르는 前方後圓墳(전방후원분ㆍ원형의 분구에 직사각형 또는 사각형 분구를 붙여놓은 무덤으로 둥근 무덤의 상단부에 죽은 사람을 묻고, 거기에다 장방형의 단상부를 부설한 형식)으로서 이집트의 피라미드보다 크다. 무덤 주위를 3중의 垓字(해자)가 에워싸고 있다. 해자를 포함하면 동서 660m, 남북 840m로, 항공사진을 보면 거대한 열쇠 모습이다.

이곳에서 금동제 갑옷, 도검 파편 20점, 약간의 유리그릇과 원통형 하니와(埴輪 : 진흙인형) 2만 개가 출토됐는데, 경주의 天馬塚(천마총)이나 155호 고분 등에서 출토된 부장품에 비하면 질적으로 훨씬 낮은 수준이다.

닌도쿠는 일본 역사상 최고의 聖君(성군)으로 손꼽힌다. 記紀에는 재위기간 313~399년이라 기록되어 있지만 확실하지 않다. 무려 87년간 재위한 것으로 되어 있지만, 즉위연도를 내려 재위시기를 줄여야 할 것 같다. 그는 오사카의 다카쓰미야(古津宮)에서 나라를 다스렸다. 記紀는 다음과 같이 닌도쿠의 爲民(위민)정치를 기록하고 있다.

<어느 날, 높은 산에 올라가 사방을 바라보고 나서 “밥 짓는 연기가 오르지 않는 것은 백성이 가난하기 때문”이라면서 3년간 課役(과역)을 면제했다. 그 후 궁전이 낡아도 수리하지 않아 비가 샐 정도였다. 3년 후에 민가를 내려다 보니 연기가 가득 차 있었다. 이미 서민들이 풍족해져, 이제 과역이 고통스럽지 않게 됐다.>

이 때문에 이 닌도쿠의 재위시기는 ‘聖帝(성제)의 시기’라 불린다. 그러나 ‘聖帝’라는 평을 듣는 닌도쿠가 살아 생전에 이렇게 거대한 자기 분묘를 건설했다는 것은 논리적 모순이다. 해자 바로 바깥에서 1000명이 분묘의 흙을 운반한다 해도 4년이 걸린다는 계산이 나오기 때문이다.

닌도쿠 이후 다섯 명의 倭王(왜왕)이 중국 南朝(남조)의 宋(송)과 梁(양)에 조공했다. 조공을 바친 왕의 이름은 중국 사서에 ‘讚(찬)·珍(진)·濟(제)·興(흥)·武(무)’라고 기록되어 있지만, 일본의 <고사기>와 <일본서기>에는 이와 관련한 단 한 줄의 기사도 없다. 다만 ‘왜 5왕’을 그들의 재위연도에 대충 맞춰 仁德(닌토쿠)으로부터 雄略(유랴쿠)까지로 추측할 따름이다.

왜의 5왕은 宋(송)·梁(양)으로부터 여러 位階(위계)의 將軍號(장군호)를 받았는데, 같은 시기의 백제보다는 1~3단계, 고구려보다는 4~5단계 낮은 위계였다. 당시 신라는 남조의 나라들과 국교를 맺지 않았다.

만주 集安(집안)에 서 있는 고구려 광개토왕비의 비문에 따르면, 왜군이 391년(辛卯年)과 400년, 가야·백제 등과 연합해 신라를 쳐들어와 신라를 구원한 고구려군과 싸워 패전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 시기의 왜군이 야마토 정권이 파견한 병력인지, 왜에서 모병한 용병인지 확실하지 않다.


야마토 정권의 초대 군주는 應神

닌도쿠릉을 둘러본 후 하비키노(羽曳野)시에 있는 오진(應神)릉을 찾아갔다. 墳口(분구)의 길이가 418m로 일본에서 두 번째로 큰 전방후원분이다. 記紀에 오진은 닌도쿠의 아버지로 되어 있지만, 둘의 부자 관계는 확실치 않다.

일본 학계에 따르면 오진(재위 270~310년 : 이 연도는 120년 정도 내려야 한다)은 ‘실재한 最古(최고)의 대왕’이다. 일본의 天皇號(천황호)는 서기 680년 전후에 제정됐던 만큼 오진의 칭호는 ‘천황’일 수 없다. 오진은 야마토(大和)왕조의 초대 군주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 사서에서는 그가 주아이(仲哀)천황과 진쿠(神功)황후 사이의 아들로 기록되어 있지만, 주아이나 진쿠는 가공인물이다. 712년에 편찬된 <고사기>에는 진쿠황후의 삼한 정벌 등의 기사가 기록되어 있지 않다. 8년 뒤인 720년에 편찬된 국수주의적 사서인 <일본서기>에만 그 같은 허구가 기록됐을 뿐이다. 따라서 그 시절에 왜가 한반도에 설치했다는 ‘임나일본부’도 픽션이다. 그 내용은 산달이 임박한 진쿠황후가 음부를 돌로 틀어막고 출정하여 신라왕을 항복시켜 노비로 삼고, 개선하여 오진을 낳았다는 허무맹랑한 픽션이다.

일본 학계의 다수설도 오진의 부모는 모른다는 것이다. 다만 오진릉이 오사카府(부) 하비키노市(시) 오아자호무다(大宇譽田)에 위치하고 있는 점으로 미루어 오진을 ‘가와치(河內 : 오사카 지방)왕조’의 초대 왕으로 보는 것이 유력설이다.

따라서 이때 야마토의 왕조가 오진朝(조)로 교체됐다고 본다. 필자는 오진이 규슈 남단에 상륙한 수로왕 아들들의 후손이라고 판단하는데, 이 글의 뒤에서 재론할 것이다. 오진朝에서는, 수많은 ‘도래인’(한반도에서 건너간 사람)이 왜국에 문화를 전달했고, 농경의 진전도 현저했다.

오진릉을 둘러본 답사단은 오사카로 돌아와 재일동포들의 재래시장인 쓰루하시(鶴橋) 시장으로 직행했다. 오사카는 재일동포가 제일 많이 사는 지역이며, 쓰루하시는 오사카의 재일동포 밀집지역이다. 따지고 보면 일본은 한반도에서 건너간 이민이 세운 나라다. 25년 전 필자가 이곳을 답사했을 때는 김치, 젓갈, 고추장 등의 식품이 단지에 수북수북 진열되어 ‘한국 냄새’가 물씬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요즘에도 시장 주변에 고층건물이 들어서고 시장 규모도 몇 배로 커져 있지만, 한국 냄새는 여전하다.


백제의 하드웨어와 신라의 소프트웨어가 결합된 東大寺

오사카를 출발한 답사팀은 나라(奈良)현의 북단 야마토고오리(大和郡)에 위치한 도다이지(東大寺)에 도착했다. ‘야마토고오리’는 야마토의 고을이란 뜻이다. 도다이지 안팎에는 사슴들이 놀다가 참배객들에게 먹을 것을 달라고 들러붙는다. 필자에게도 다가왔는데 먹을 것을 주지 않자 손에 쥐고 있던 취재수첩을 물어뜯었다. 이곳의 사슴들은 관광객들에게 너무 많은 음식을 얻어먹어 대부분 ‘몸꽝’이 됐고, 몸 냄새도 좀 심한 편이다.

‘大華嚴宗刹’(대화엄종찰)이라고 쓰여 있는 山門(산문)과 사천왕문을 지나면 바로 금당이다. 대불전(금당)에는 엄청난 크기의 銅製(동제) 비로자나불이 좌정해 있다. 도다이지의 大佛(대불)은 쇼무텐노(聖武天皇 : 재위 724~749년) 때 ‘나라를 뒤덮은 불길한 암운을 걷어내기 위해’ 국력을 기울여 지은 것이다. 공사는 743년부터 749년까지 6년이 걸렸다.

대불 건립공사의 책임자는 백제계인 구니나카 기미마로(國中公麻呂)였다. 그의 조부 代(대)에 일본으로 망명한 불상 제조 기술자였다. 그러나 이처럼 거대한 銅製(동제) 불상을 제조한 경험이 없었기 때문에 새로운 공법을 생각해내야 했다.

우선 대불과 같은 모습의 모형을 만들고, 거기에 점토 섞인 모래를 발라 원형을 만들어갔는데, 이 작업에만 1년 이상이 걸렸다. 이어 불상의 빈 몸 속에 구리를 흘려넣는 방식을 사용했다. 엄청난 크기의 대불을 먼저 만들어 놓고 그의 집인 대불전을 건립하는 것도 대단한 작업이었다. 목재는 여러 산에서 벌채하여 오토가와(大戶川) 등 4개 강을 통해 기즈(木津)로 운반되고, 여기서 도다이지까지 6km를 우마차로 실어 날랐다.

도다이지는 천하태평, 萬民豊樂(만민풍락)을 기원하는 도량이었지만, 동시에 불교교리 연구의 學僧(학승)을 양성하는 역할을 해왔다. 신라화엄의 開祖(개조)인 義相(의상)의 孫(손)제자 審祥(심상 : ?~740)이 이곳에서 화엄경을 강의하여 일본의 화엄종을 개창했다. 그렇다면 도다이지의 하드웨어는 백제계 匠人(장인)이 만들었고, 소프트웨어는 신라의 화엄승이 깔았던 셈이다.

인상적이었던 것은 대불전 안에 기념품 판매대가 설치되어 북적거리는 모습이었다. 이슬람교도 상거래를 중시하여 사원 경내에 상점을 설치하고는 있지만, 본당 안에서는 상거래를 하지 않는다.

도다이지의 금당 내부는 엄숙하다기보다는 명랑한 분위기다. 사슴뿔을 흉내 낸 모자를 쓴 젊은 아가씨들이 차례로 대불전 내부 기둥에 뚫린 구멍 속을 낮은 포복자세로 통과하면서 까르르 웃기도 했다.


고구려가 담징을 일본에 파견한 이유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된 法隆寺.

도다이지 경내에 있는 일본 천황가의 보물창고인 正倉院(정창원)을 둘러본 후 답사팀은 나라현 이쿠노(生駒)군 이카루가(斑鳩)에 위치한 호류지(法隆寺)로 이동했다. 호류지는 고구려의 담징(579~631)이 그린 금당벽화로 유명했으나 1948년 화재로 불타 버렸다.

담징은 五經(오경)과 彩畵(채화)에 능숙한 승려였다. 영양왕 21년(610) 일본에 가서 종이·먹·칠·맷돌을 만드는 방법을 가르쳤다. 그의 호류지 금당벽화는 중국의 운강석불, 경주의 석굴암과 함께 동양의 3대 미술품 중 하나로 평가됐다.

호류지는 현대 일본인에게 가장 사랑받는 쇼토쿠(聖德) 태자가 불교 흥륭을 위해 건립한 願刹(원찰)이다. 쇼토쿠 태자는 스이코(椎古)천황의 조카로서 섭정이 되어 왜국의 대외관계를 총괄했다. 스이코는 소가(蘇我) 씨가 옹립한 ‘일본 최초의 女帝(여제 : 사실은 여왕)다. ‘소가’ 씨는 신라 昔(석) 씨 왕조의 최후 임금인 訖解王(흘해왕)의 후손이다.

스이코 8년(600)과 15년(607), 쇼토쿠 태자는 오노노이모코(小野妹子)를 遣隋使(견수사)로 파견했다. 이모코가 휴대한 國書(국서)에는 “해 뜨는 곳의 天子(천자)가 해 지는 곳의 천자에게 글을 보냅니다. 안녕하십니까…”라는 문언이 포함되어 있었다. 왜국의 국서를 접한 隋煬帝(수양제)는 홍로경(외무부장관)에게 “이 따위 무례한 오랑캐의 국서는 앞으로 받지 말라”고 지시했다.

이 같은 사실을 놓고 현대 일본에서는 “세계의 대국 수나라를 상대로 대등외교를 전개한 쇼토쿠 태자의 기개가 크며, 그것을 허락한 스이코 여제의 도량이 넓다”고 평하고 있다. 수양제는 이모코의 귀국길에 裴世淸(배세청)이란 신하를 왜국에 파견했다. 그 이유는 쉽게 짐작할 수 있다. 당시 수양제는 고구려 원정을 기도하고 있었던 만큼 고구려 배후에 위치한 왜국의 동향을 정탐하고 싶었을 것이다. 고구려 또한 수나라와의 전쟁에 대비해 다재다능한 승려 담징을 쇼토쿠 태자의 스승으로 파견하는 등 주변외교를 전개했다.

필자는 담징의 벽화가 그려졌던 호류지의 금당 주위를 한 바퀴 돌았다. 초등학교 시절, “호류지의 벽화에 그려진 老松(노송)이 너무 잘 그려져 새들이 그림 속의 소나무 가지에 앉으려고 날아들었다가 벽에 부딪혀 추락했다”는 에피소드를 배웠기 때문이다.

“꽈악, 꽈악, 찌르륵, 찌르륵….”

새 우는 소리는 요란한데, 담징의 벽화는 남아 있지 않았다.

답사팀은 호류지로부터 후지와라(藤原)궁터로 내려왔다. 후지와라京(경)은 지토(持統)여제가 당나라의 수도 장안을 모방하여 재위 8년(694)부터 6년간에 걸쳐 건설한 일본 최고의 계획도시다. 지토는 남편인 덴무(天武)천황의 유지에 따라 율령체제를 완성하고, 호적을 정비했으며, 새 시대에 어울리는 수도를 건설한 것이다.

후지와라궁의 태극전(正殿) 遺構(유구)가 발견된 둔덕 위에 올라가 내려다보니 당시의 관청 건물지에서 발굴작업이 진행되고 있었다. 발굴 현장에서 경북대에 유학했던 ‘나라 국립문화재연구소’ 관계자를 만났다. 필자의 질문에 그는 한국어로 “아직 건물의 유구가 발견되지 않았고, 출토 유물도 그저 그렇다”고 답했다.

답사팀은 아스카(飛鳥) 역사공원에 도착했다. 여기서 산길을 1km쯤 올라 ‘다카마쓰즈카(高松塚 : 고송총) 고분’에 이르렀다. 마침 내ㆍ외부를 수리 중이어서 가까이에 있는 전시관에 들러 女官(여관)들을 그린 벽화(일본 국보)와 四神圖(사신도)의 사진 등을 관람했다. 1972년 발견 당시, 전문가들은 당나라 또는 고구려 계통의 기법이라고 평했다.

답사팀은 교토(京都)로 이동했다. ‘교토 御所(어소)’는 1868년 메이지(明治)천황이 도쿄(東京)에 있는 옛 도쿠가와(德川) 막부 쇼군(將軍)의 居城(거성)으로 이사하기 전까지 500여 년간 거주했던 궁궐이다. 일본 궁내청 서능부 관계자는 답사팀에게 한 시간 동안 관람을 허가했다.

어소의 정전인 紫宸殿(자신전)은 경복궁이나 창덕궁보다 규모가 작고 소박했다. 어소에는 천황이 일상생활을 하던 세이리덴(淸凉殿)과 황자들이 공부했던 가쿠몬조(學問所), 女官(여관)들이 거주하는 건물 등이 있었지만, 조선왕조의 궁궐에 비하면 빈약했다. 그것은 천황이 오랜 세월 동안 왕권을 갖지 못했던 역사적 정황을 반영하는 것이다.

중세 이후 메이지유신이 일어났던 1868년까지 왕권을 행사한 집권자는 막부의 쇼군(將軍)이었고 덴노(天皇)의 지위는 제사장에 불과했다. 잡초가 무성하게 돋아나도 보수할 능력이 없었다. 심지어 천황의 즉위도 막부 쇼군의 허락을 받아야 할 정도였다.

답사팀은 히에이山(산)의 엔라쿠지(延曆寺)로 갔다. 엔라쿠지는 일본 천태종의 총본산이다.

엔라쿠지는 원래 785년 당나라 천태산에서 유학하고 돌아온 사이초(最澄)가 학승을 양성하던 초당이었다. 전국시대에 엔라쿠지는 莊園(장원) 수입으로 승병을 양성하여 세속적인 파워까지 휘둘렀다. 전국시대의 최강자로 떠오른 오다 노부나가(織田信長)는 1571년 일본 통일의 방해세력인 엔라쿠지를 불지르고, 승려 수천 명을 죽였다. 僧俗(승속)의 대결에서 종교계가 KO패를 당한 셈이다.


코무덤
교토국립박물관 앞에 위치한 코무덤 ‘미미쓰카’.

엔라쿠지를 둘러보고 히에이산 정상에 올라 일본에서 제일 큰 비와(琵琶)호를 관찰했다. 흐린 날씨, 물안개 때문에 호수의 모습이 흐릿했지만 바다를 방불케 했다. 히에이산에서 내려와 교토국립박물관 앞에 있는 ‘코무덤’을 찾아갔다. 거대한 ‘코무덤’은 임진왜란 때 히데요시(秀吉)의 명령으로 왜병들이 베어간 조선 사람의 코를 묻어놓은 무덤이다. 일본 사람들은 좀 미안한 생각이 들었던지, 코무덤을 ‘귀무덤(耳塚·미미쓰카)’이라고 부른다.

답사팀은 코무덤 건너편의 풍국신사로 넘어갔다. 풍국신사는 히데요시를 祭神(제신)으로 삼고 있다. 히데요시의 성은 처음엔 기노시타(木下)였다. 오다 노부나가의 신발 당번병에서 승진을 거듭하여 무장으로 출세하면서 성을 ‘하시바(羽柴)’로 바꾸었다.

1582년 히데요시가 다카마쓰(高松)성을 공격하고 있을 때 ‘혼노지(本能寺)의 변’이 돌발했다. 노부나가가 교토의 혼노지에 숙박하는 틈을 이용, 그 휘하의 무장 아케치 미쓰히데(明智光秀)가 급습하여 노부나가를 암살한 반란사건이다. 히데요시는 다카마쓰성에서 회군하여 미쓰히데의 반란군을 격파했다. 워낙 한미한 집안 출신이었던 그는 천황에게 막대한 재물을 헌상하여 ‘도요토미(豊臣)’란 성을 하사받고, 1583년 시고쿠(四國)를 정벌하고 간파쿠(關白)가 됐다.

일본을 통일한 히데요시는 이듬해 간파쿠의 지위를 양자 히데쓰구(秀次)에게 물려주고 조선 침략을 준비했다. 그는 1592년 임진왜란을 도발했으나 1598년 철병하라는 유언을 남기고 병사했다. 그의 사후 도요토미 집안을 받드는 서군과 도쿠가와 이에야스의 동군이 세키가하라(關ゲ原)에서 일본 사상 최대의 전투를 벌여 서군이 참패하고, 1603년 에도(江戶 : 지금의 도쿄)에 도쿠가와 막부가 성립된다. 이에야쓰는 1615년 도요토미家(가)의 거성인 오사카성을 함락시켰다. 이때 히데요시의 외아들 히데요리(秀賴)와 그의 생모 요도도노(淀殿)가 불타는 성 안에서 자결함으로써 도요토미家는 멸망했다.


김 씨 왕조를 석 씨 왕조로 바꾼 ‘壬申의 난’

자동차 전용도로를 통해 시가(滋賀)현 오쓰(大津)시로 진입했다. 오쓰는 덴치(天智)천왕의 都城(도성)이었다. 덴치는 그의 어머니 사이메이(齊明)여왕이 661년 병사한 후 6년간 稱制(칭제 : 즉위하지 않고 執政함)한 나카노오에(中大兄) 왕자인데, 667년 오쓰로 천도한 후 즉위했다. 일본사에서 덴치는 ‘중앙집권화를 추진한 전제군주’로 평가되는 인물이다.

그는 왕자 시절 천왕의 자리를 넘본 소가(蘇我) 씨의 종가를 멸망시킨 645년의 ‘이쓰시(乙巳)의 변’과 다이카(大化)개신을 주도함으로써 국가체제를 호족과의 연합체제로부터 천왕(대왕)체제로 전환시켰다.

특히 덴치는 삼국통일기의 한반도에 적극 개입했다. 동맹국인 백제가 660년 멸망하자 전후 3차례에 걸쳐 3만2000명의 왜병을 한반도에 파견하여 백제부흥군과 연합군을 형성했다. 왜병은 663년 백촌강 전투에서 나당연합군에게 참패했다.

백촌강의 참패 후 나카노오에는 나당연합군의 추격전에 대비해 백제계 장군들에게 쓰시마, 기타큐슈, 세토내해 연안에 백제식 산성을 쌓게 했다. 그럼에도 불안했던 나카노오에는 오미(近江)로 천도했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오쓰(大津)다. 덴치천왕은 백제 유민들을 대거 오쓰로 이주시켜 정권의 방패로 삼았다.

668년 즉위한 그는 5년의 재위 후 46세로 병몰했다. 죽음 직전, 덴치천왕은 야심적인 異父同腹(이부동복) 형인 오아마(大海人)를 제거하려 했지만, 마음이 약해진 끝에 오아마의 삭발 出家(출가)를 허락하고 그의 아들 오토모(大友)를 태자로 세우는 것으로 후계작업을 일단락지었다. 이때 오미의 관인들은 “호랑이에 날개를 달아 들에 풀어놓은 것과 같다”고 우려했다.

671년 12월 3일, 덴치천왕이 죽고 이틀 후에 오토모가 즉위했지만, 덴치천왕의 강권정치에 대한 불만이 분출되기 시작했다. 오아마는 이 기회를 잡고 672년 7월 거병한 후 대군을 3개 부대로 나눠 오미오쓰미야(近江大津宮)로 진공했다. 이것이 천왕위를 둘러싼 고대일본 최대의 내란인 ‘壬申(임신)의 난’이다. 승리한 오아마는 아스카(飛鳥)의 기요미하라노미야(淨御原宮)에서 ‘제40대’ 天武(덴무)천왕으로 즉위했다.

박 선생은 “덴치계를 김 씨 왕조, 천무계를 석 씨 왕조”라고 주장한다. ‘임신의 난’ 이후 천무계는 10대 82년간에 걸쳐 천황위를 차지하지만, ‘제50대’ 桓武(간무)천황 때부터 천황위는 김 씨에게 되돌아간다.

석 씨 왕조가 망하고 난 후의 일이지만, 장차 천황위에 오를 사람을 ‘기미가네’라고 불렀다. 박 선생은 “일본의 국가 ‘기미가요(君が代)’는 원래 ‘천황의 시대’가 아니라, ‘김 씨의 시대’라는 뜻”이라고 말했다. 현재 일본 천황가는 8명의 천무계 천황에 대한 제사를 올리지 않는다. 천무계가 석 씨이기 때문이다.


신라명신당과 신라삼랑의 묘
일본국보 新羅善神堂.

오쓰 경찰청 뒤편 산기슭에는 ‘新羅善神堂(신라선신당)’이 있다. 중세 일본 신사 건축을 대표하는 것으로 일본 국보로 지정되어 있으며, 이곳에 모신 ‘新羅明神坐像(신라명신좌상)’도 일본 국보다. 신라선신당의 본존은 눈을 무섭게 부릅뜬 모습인데, 김문경 교수는 “일본 천태종의 開祖(개조)인 사이초(最澄)가 당나라에서 유학할 때 목숨을 건져 준 신라의 해상왕 장보고의 像(상)’이라고 추정한 바 있다.

신라선신당의 문은 잠겨 있었다. 신라선신당을 뒤로하고 산길을 내려오는데, ‘신라사부로(新羅三郞) 묘 ↑’라 쓰인 작은 팻말이 눈에 들어왔다. 마침, 산 아래 오쓰경찰청 훈련장에서 경찰관들이 데모 진압 훈련을 하고 있었는데, 그들이 내지르는 고함소리가 정적을 깨뜨리고 있었다. 걸음을 되돌려 다시 산길을 올라갔다.

‘신라사부로(新羅三郞)’는 신라계 도래인으로 일본 사무라이의 元祖(원조)다. 신라사부로는 가마쿠라 막부를 세운 미나모토 요리토모(源賴朝)와 일본 전국시대 최강의 기마군단을 보유했던 다케다 신겐의 선조다(月刊朝鮮 2004년 4월호에 보도된 졸고 ‘신라의 화랑도와 일본의 무사도’ 참조). 신라사부로의 무덤 위에는 큰 나무 하나가 뿌리를 박고 돋아 있었다. 잘 돌보지 않는 것으로 느껴졌다.
일본 사무라이의 元祖인 新羅三郞의 무덤.

오쓰港(항)을 잠시 둘러보다가 제정러시아의 니콜라이 황태자가 일본의 순사 쓰다 산조(津田三藏)가 휘두른 칼에 맞아 부상당한 1891년의 ‘오쓰사건’이 생각났다. 오쓰 역 동쪽 주택가의 구석에 사건 현장을 알리는 표석 하나가 세워져 있는데 그와 관련한 편리한 역사의 해석이 재미있다.

<…당시 러시아는 강대국으로서, 일본은 근대국가로서 막 발족한 약소국이었기 때문에 국민을 불안의 바닥에 헤매게 했다. 대국 러시아를 두려워했던 松方(마쓰가다) 내각은 황실에 대한 대역죄를 적용하여 사형을 획책. 그러나 오쓰 지방재판소에서 열린 대심원 법정에서는 모살미수죄를 적용, 무기도형의 판결을 내려 ‘사법권의 독립’을 관철했다.>

일본을 친선 방문한 러시아 황태자의 피습 부상 사실을 들은 메이지(明治)천황은 이곳까지 달려와 니콜라이 황태자를 문병했다. 부상당한 러시아 황태자가 후일 황제가 된 니콜라이 2세다. 니콜라이 2세의 러시아와 메이지의 일본은 1904년부터 2년간 러일전쟁을 치렀다. 러일전쟁에서 패전한 니콜라이 2세는 러시아혁명으로 퇴위했고 이름도 없는 시골에서 처형됐다.


메이지유신 성공의 첫 단추 후시미 전투의 현장

교토 근교 후시미(伏見)에 도착했다. 1867년 12월,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주도한 교토의 어전회의에서 막부의 쇼군 도쿠가와 요시히로(德川慶喜)의 내대신 사퇴와 所領(소령)의 반납이 결정됐다. 일본사에서는 이를 ‘왕정복고의 大號令(대호령)’이라고 한다.

1868년 1월, 어전회의 내용에 격분한 막부군이 교토 근교의 도바(鳥羽)·후시미(伏見)에서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연합군과 교전, ‘戊辰(무진)전쟁’이 개시됐다. 이때 병력은 막부군이 압도적이었고, 총포는 영국의 지원을 받은 사쓰마번과 조슈번이 우세했다. 초전은 막부군에게 유리하게 전개됐다.

그러나 후시미에서 막부군을 지휘하던 ‘쇼군’ 요시히로는 갑자기 휘하 병력을 후퇴시켰다. 사쓰마·조슈 군이 천황의 군대를 상징하는 ‘錦(금)의 御旗(어기)’를 들고 나왔기 때문이었다. 이것은 가짜였다. 어떻든 이 깃발에 총을 쏘면 반역군이 되는 것이었다.

오사카로 후퇴한 요시히로의 막부군은 군함을 타고 에도(江戶)로 회군했다. 이것이 260년간 군림했던 도쿠가와 막부의 몰락을 예고하는 대사건이었다. 시대의 흐름은 ‘막부 타도’였다.

1868년 4월, 신정부군의 에도 총공격을 앞두고 신정부의 실력자 사이고 다카모리(西鄕隆盛)와 막부의 육군봉행 가쓰 가이슈(勝海舟)가 에도의 사쓰마 藩邸(번저)에서 회담했다. 회담 결과는 쇼군의 미토(水戶) 칩거와 에도 성의 無血開城(무혈개성)이었다.

1868년 5월, 신정부군이 에도 성에 입성했다. 일부 막신들은 우에노(上野)에 진을 치고 치열하게 저항했지만 결국 패전했다. 7월, 에도는 도쿄로 이름이 바뀌었고 1868년 9월, 연호를 메이지(明治)로 고쳤다. 1869년 3월, 수도를 교토에서 도쿄로 옮겼다. 메이지는 쇼군의 거성을 皇居(황거)로 삼았다.

필자는 戊辰(무진)전쟁과 메이지유신을 생각하며 후시미 가도를 잠시 걷다가 길가에 있는 절에 들렀더니 경내에 후시미의 전적비가 세워져 있다. ‘내각총리대신 사토 에이사쿠(佐藤榮作)’ 명의의 전적비문에는 후시미 전투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의미를 부여했다.

<명치유신의 대업은 이 일전으로 결정됐다. 즉, 우리나라가 근대국가로 나아갈 것인가, 나아가지 못할 것인가는 이 일전에 달려 있었다….>

후시미의 모모야마(桃山)에 있는 메이지릉 앞을 지나갔다. 그 옆에는 메이지의 사망 다음날 殉死(순사)한 육군대장 노기 마레스케(乃木希典 : 1849~1912)의 신사가 있다. 러일전쟁 때의 여순 공방전에서 무모한 공격으로 수만의 병력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노기의 참담한 마음을 읽은 메이지는 자신보다 나이가 많은 노기에게 ‘朕(짐)보다 일찍 죽어서는 안 된다’고 엄명했다. 메이지 사망 다음날 노기는 할복자살했다.


▣ 수로왕의 왕자 일곱 명이 상륙한 해안과 거주지

가라쿠니다케에 올라간 天孫 니니기의 탄성

답사팀은 규슈 남부의 가고시마 공항에 도착, 미니버스를 타고 기리시마(霧島)에서 가장 높은 가라쿠니다케(韓國岳ㆍ1700m)로 갔다. 왜 일본사람들은 ‘韓國岳’이라고 써놓고 ‘간코구다케’라고 읽지 않고 ‘가라쿠니다케’라고 읽는 것일까?

‘記紀(기기)’에는 일본 천황의 조상인 니니기노미코토(이하 ‘니니기’라고 표기)는 가라쿠니다케의 6km 동남쪽 다카치호의 구지후루(1574m)에서 天降(천강)했다고 되어 있다. 일본의 천손강림 설화는 가락국의 수로왕 설화와 비슷하다.

첫째, ‘니니기’도 수로왕처럼 하늘에서 내려왔다. 둘째, 수로왕은 붉은 천에 싸여서 내려왔고, 니니기는 이불에 싸여서 내려왔다. 셋째 수로왕은 구지봉으로 내려왔고, 니니기는 다카치호의 ‘구지후루’로 내려왔다. 구지봉이나 구지후루는 똑같은 말이다.

김해 김 씨 세보에 의하면, “거등왕 원년(199)에 왕자 仙(선)이 세상이 쇠하는 것을 보고 神女(신녀)와 함께 구름을 타고 떠나 버렸다”고 한다. 記紀에는 아마테라스오미카미(天照大神)가 손자 니니기를 지상으로 내려보낼 때 딸 셋도 내려보내 길잡이를 시켰다는 대목이 있다. 가락국의 신화에는 수로왕의 왕자 거칠군이 ‘厭世上乘(염세상승)’했다느니, 왕자 선이 塵世(진세)가 쇠하는 것을 보고 ‘乘雲離去(승운이거)’했다는 구절이 있다. 가락국의 신앙이 태양 숭배에서 곰 숭배로 바뀌는 것을 비관했던 것으로 보인다.

일제 때의 일이지만, 조선총독부는 1915년 김해 김씨의 世譜(세보)에 대해 ‘발행금지’ 처분을 내렸다. 일제가 ‘불온서적’도 아닌 김해 김 씨의 족보를 금지한 이유는 밝혀지지 않았지만, 김해 지역 주민이 일본 열도에 건너가 야마토 정권을 세웠다는 사실을 감추려 했던 것으로 추측된다.

그렇다면 수로왕의 일곱 아들은 왜 가락국을 떠났으며, 그들의 도착지는 어디였을까? 다음은 박병식 선생의 이론이다.

“가야국의 수로왕은 스스로 하늘에서 내려왔다고 표방한 만큼 태양 숭배족이다. 그러나 가락국 사람들이 벼농사 때문에 곰 숭배족으로 변해 갔다. 벼농사에는 비가 필요하다. 비가 내리기 전의 하늘은 시커멓다. ‘검→곰(熊)→김(金)’은 모두 ‘검다’에서 기원한 말이다. 흔히 ‘김수로왕’이라고 하지만, 그것은 후대의 호칭이고, ‘수로왕’이라고 해야 옳다.”

김해 김 씨의 세보에 따르면 “수로왕과 허왕후 사이에 10남을 두었는데, 큰아들은 태자(후일의 거등왕)요, 두 아들은 왕후의 성을 따라 허 씨가 됐고, 나머지 일곱 아들은 厭世上界(염세상계)했다”고 한다.

<고사기>에는 ‘천손’ 니니기가 기리시마의 최고봉인 가라쿠니다케에 올라가 “아침 햇살이 바로 내려 비치고, 가라쿠니(가야국)가 보이는 이곳이 아주 좋다”고 탄성을 올렸다고 기록되어 있다.

답사팀은 한 시간 만에 가라쿠니다케 아래에 있는 不動池(부동지)에 하차했다. 산기슭은 산불이 난 듯 보였지만, 실은 땅 밑에 유황온천 물이 부글부글 끓어 초목이 자라지 않는다고 한다. 바위투성이의 산기슭 곳곳에서 땅 속 온천물의 하얀 수증기가 지표 위로 피어 오르고 있었다.

부동지는 둘레 700m, 수심 9.3m의 작은 호수이지만, 물빛이 코발트 블루에서 오후 4시쯤 진초록색으로 변한다는데, 마침 그 시간대에 부동지의 조화를 구경할 수 있었다.


수로왕의 일곱아들이 도착한 가사사 해안
不動池에서 바라본 韓國岳(1700m).

기리시마 호텔에서 사쓰마 반도의 남단 가사사(笠沙)해안을 향해 출발했다. 노마반도의 돌출지역에 이르렀지만, 현지 주민들도 가사사 해변의 정확한 지점을 대지 못했다. 허탕을 치고 미니버스를 돌리게 했는데, 그 순간 ‘瓊瓊杵尊(경경저존)…’이라고 쓰인 작은 표석을 발견했다.

경경저존이라면 ‘니니기노미코토’의 한문 표기다. 급히 미니버스를 정차시키고 내려가 표석을 가린 나뭇가지를 헤치고 표석의 글을 읽었더니 ‘니니기노미코토의 상륙지점’이라고 쓰여 있었다.

‘記紀(기기)’에는 니니기가 다케치호의 구지후루에 天降(천강)했다고 했는데, 니니기 일행이 배를 타고 가사사 해안에 도착했다는 또 다른 설화를 어떻게 해석해야 할까. 필자는 수로왕의 아들 일곱이 ‘승운이거’했다는 김해 김 씨의 세보를 떠올렸다.

그렇다면 왜 수로왕의 아들들은 배를 타고 남규슈의 끝 가사사 해안까지 내려왔을까. 당시 북규슈에는 한반도에서 건너온 선주민들이 이미 소국을 형성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제 수수께끼에 싸인 나나쿠마노사토(七熊の里), 즉 ‘일곱 곰의 마을’만 찾으면 수로왕의 아들들이 어떤 행로를 걸어 긴키(近畿)지방에서 야마토(大和)정권을 세우게 되는지 ‘잃어버린 링크’를 찾게 되는 것이다.

답사팀은 坊津(보쓰)정을 지나면서 ‘간진莊(장)’이라는 간판을 단 갯가 음식점에 식사를 하러 들어갔다. 음식점 안에 무슨 행사의 개최를 알리는 포스터가 부착되어 있었는데, ‘간진’이 한자로 ‘鑒眞(감진)’이라 표기되어 있었다.

감진은 당나라의 고승으로서 일본 유학승의 초청을 받고, 네 번이나 渡日(도일)을 기도했지만, 모두 난파를 당해 죽을 고비를 넘겼다. 그를 초청한 일본의 유학승도 병사한 다음에야 감진은 약속을 지켰다. 실명 상태에도 불구하고 다섯 번째 도일을 기도해 성공한 것이다. 감진 화상은 당시의 천황 등에게 授戒(수계)했는데, 그의 모습을 조각한 ‘감진 대화상像(상)’은 일본 국보로 보존되고 있다.

‘간진장’의 젊은 주인 가미토모(上塘熙哉) 씨는 “바로 이 아래 포구인 아키메(秋目)에 감진 화상이 도착했는데, 해마다 이곳에선 감진의 업적을 기리는 행사가 열린다”고 말했다. 아키메 포구 윗길에는 감진의 기념관도 건립되어 있다. 감진 화상도 수로왕의 아들처럼 해류를 타고 항해해 이곳에 표착했을 것이다. 그렇다면 가사사 해안에 표착한 수로왕의 일곱 아들은 어디로 갔던 것일까?


김해 구지봉 신화의 재판인 高天穗의 구지후루

하야토塚(총)을 둘러보고 ‘하야토 사적관’에 들러 자료를 사면서 후지나미(藤浪三千尋) 씨를 만난 것은 행운이었다. 후지나미 씨는 올 3월 ‘문화재관리국’에서 정년퇴임한 분으로, 필자가 구입한 <하야토町(정)의 역사>의 저자다. 후지나미 씨에게 古記(고기)와 전승에 나오는 ‘나나구마노사토(일곱 곰의 마을)’이 어디에 있는지를 묻자 “그것은 하나의 마을이 아니라 고쿠후(國分)시에 산재한 7개의 마을인데, 지금은 이름이 모두 바뀌었다”고 설명했다.

그는 지도 위에 ‘일곱 곰의 마을’ 7개의 위치를 점찍으면서 종이에다 마을의 옛이름도 적고, 발음까지 달아 주었다. 그것은 다음과 같다. 에미노구마(笑熊), 도미노구마(富熊), 시시노구마(獅子熊), 호시노구마(星熊), 히라구마(平熊), 고이노구마(戀熊), 구마사키(熊崎).

이번 답사의 최대 목적은 ‘일곱 곰의 마을’을 찾는 데 있었다. 그래야 ‘잃어버린 역사의 연결고리’를 찾을 수 있기 때문이다.

필자는 일본 답사 전, 在(재)서울 사쓰마(가고시마) 향우회장 구로다 가쓰히로(黑田勝弘) 산케이신문 서울지국장과 가고시마 현청이 서울에 파견한 공무원 등에게 ‘나나구마노사토’를 물었지만 누구도 위치나 역사적 존재 사실을 몰랐다.

후지나미 씨는 시시노구마(獅子熊)로 답사팀을 안내했다. 시시노구마가 있던 야산은 운동장이 들어서 있다. 이곳에 ‘시시노구마’가 위치했다는 표석 하나가 서 있었다. 답사팀이 ‘일곱 곰의 마을’의 실체를 확인한 순간이었다.

후지나미 씨는 답사팀을 니니기를 祭神(제신)으로 모시는 가고시마(鹿兒島) 신사로 안내했다. 박 선생은 ‘일곱 곰’의 리더인 니니기노미코토의 뜻에 대해 “‘니’는 우리 古語(고어)의 처음, 또 하나의 ‘니’는 ‘처음’의 강조어법, ‘기’는 남자, 즉 “맨 처음에 태어난 남자, ‘노’는 소유격 조사 ‘의’, 미코토는 神(신)”이라고 설명했다.

답사팀은 하야토 마을에서 기리시마 호텔로 돌아오는 길에 사카모토 료마 부부의 ‘일본 최초 신혼여행’ 기념비를 보았다. 료마는 1866년 막부의 암살단인 신센구미(新選組)의 습격을 받아 구사일생의 위기를 넘긴 ‘데라다야(寺田屋)사건’ 직후 사쓰마번의 실력자 사이고 다카모리의 초청으로 데라다야 여종업원 오와카(龍)와 함께 기리시마에서 피신 겸 밀월을 했던 것이다.

도사(土佐)번의 하급 사무라이 출신인 료마는 1866년 1월 서로 적대관계였던 사쓰마번과 조슈번의 對(대)막부 비밀 군사동맹을 주선했던 메이지유신의 최고 공로자 중 한 사람이었다. 료마는 이듬해(1867) 신센구미의 습격을 받고 살해됐다.


남규슈 야마토 정권의 첫 근거지
‘일곱 곰의 마을’ 중 하나인 ‘시시노쿠마’가 위치했다고 전하는 표석(고쿠후市 하야토 초).

미야자키현 휴가(日向)시의 西都原(서도원)에는 300기 이상의 고분군이 있다. 이 가운데 메키호즈카(女狹穗塚)는 전장 180m로서, 긴키(近畿=아마토)지방의 거대한 전방후원분과 같은 규모로 축조되어 양자의 親緣(친연)관계를 말해 준다.

西都原(서도원) 고분군은 야마토 고분군, 시마네현의 야마시로(山代)-오바(大庭) 고분군과 더불어 일본 주요 고분군으로 일컬어진다. 그렇다면 일본열도의 남단을 왜 ‘서도원’이라고 명명한 것일까?

이런 의문을 품고 미야자키로 향하던 중 교통표지판에 쓰여있는 ‘미야코노조(都城)’라는 지명이 눈에 뜨였다. 일본사를 훑어보아도 미야자키(宮崎)가 도성, 즉 수도가 됐다는 기록은 보이지 않는다.

필자 나름으로는 가락국 수로왕의 아들 7형제가 규슈 남단 가사사 해안에 상륙한 다음에 그 후손들이 ‘일곱 곰의 마을(나나구마노사토)’→가라쿠니다케(韓國岳) 기슭의 다카바루(高原)→미야사키로 이동하면서 세력을 키워 히무카(日向)에서 출항하여 ‘동정’에 오른 것이라고 추측하고 있다.

記紀(기기)에는 니니기의 3대손인 神武(진무)천황이 히무카→북규슈→세토내해→긴키로 진출해서 야마토(大和)정권을 수립한 것으로 되어 있다. 물론 니니기나 天武(덴무)천황은 신화적 인물이지 실존인물은 아니다. 그러나 신화도 실재한 사실을 미화·과장하는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무시할 수는 없다.
수로왕의 일곱 아들이 상륙했다고 전해지는 가사사 해안.

記紀(기기)에는 ‘천손’ 니니기는 천강하여 고노하나사쿠야히메(木花佐久夜姬)와 결혼하여 우미사치히코(海幸彦)·야마사치히코(山幸彦)라는 이름의 아들을 낳았다(‘고노하나’는 지방호족의 딸임). 다음은 이 신화의 줄거리.

<형 海幸彦(해행언)은 靑島(청도) 주변 바다에서 고기를 잡았고, 동생 山幸彦(산행언)은 와니쓰카(鰐塚)산에서 토끼 사냥을 했다. (중략) 동생은 바다를 나가 서성거리다 노인을 만났다. 노인은 “와다쓰미오가미(錦津見大臣·海神)의 궁에 가보라”고 일러주었다. 해신의 궁으로 찾아간 동생 산행언은 해신의 딸 도요타마히메(豊玉姬)와 결혼하고, 허니문을 즐겼다.

바다의 궁에서 낚싯바늘을 찾은 산행언에게 도요타마히메가 “이제 출산해야 하니 절대로 안을 들여다보지 말라”고 신신당부했다. 산행언은 급히 해변의 동굴에 산실을 지었지만, 궁금증에 못 이겨 끝내 산실 안을 훔쳐보고 말았다. 산실에는 큰 악어의 모습이 보였다. 바다의 일족은 아이를 낳을 때 본래의 모습으로 돌아가지 않으면 안 된다. 부끄러움을 느낀 도요타마히메는 아이를 낳자마자 아이를 남기고 떠나 버렸다….>


南규슈 출신 야마토 정권이 이즈모 小國을 병합

산행언과 도요타마히메 사이의 아들이 우가야후키아헤즈인데, 그의 아들이 일본의 ‘초대천황’ 神武(진무)라는 것이다. 記紀(기기)에 따르면 어린 시절, 지금의 다카바루(高原)정에서 살던 진무는 성장하여 미야자키로 옮겨 살다 일본 통일을 위해 형 이쓰세노미코토(五瀨命) 등과 동정에 나섰다. 그러나 일본 역사학계에서도 초대 천황 진무로부터 14대 천황 仲哀(추아이)까지는 ‘架空(가공)의 천황’이라고 보고 있다.

<일본서기>에 따른다면 진무가 기원전 711년에 태어나 기원전 660년에 즉위했고, 76년간 재위하다 기원전 585년 127세의 나이로 죽었다. 이 시기는 일본의 야요이(彌生)시대의 초기에 해당하는 만큼 야마토(大和) 왕권이라고 부를 만한 왕권은 당연히 성립할 수 없다.

연륙교를 건너 청도 신사를 둘러보았다. 신사에는 일본 프로야구단 ‘요미우리 자이언츠’ 선수단의 사진과 이름이 적힌 부적이 붙어 있었다. 물론, 이승엽 등 ‘외국인 선수’의 사진과 이름도 보였다. 청도 앞 야구장은 시즌 개막 전이면 ‘요미우리 자이언츠’의 베이스 캠프로 활용된다.

일본의 건국신화를 크게 보면 포항에서 이즈모(出雲)로 건너간 연오랑이 고구려계의 오로치族(족)을 물리치고 나라를 세우는 설화와 남규슈의 가사사 해변에 상륙한 수로왕의 후예들이 여러 대에 걸쳐 세력을 키운 후 東征(동정)에 나서 긴키지방에 야마토(大和) 정권을 수립하고, 이즈모 정권을 병합했다는 설화다. 답사팀은 9박10일간 그 경로를 거칠게나마 추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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