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간조선 기사

삼국지 4大 결전의 현장을 가다 - 中國의 역사를 바꾼 적벽대전

단 한번의 火攻으로 조조의 야망 불사르다

글 정순태 기자  2009-01-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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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자 주>중국 삼국시대의 4대 결전은 官渡(관도)의 싸움, 赤壁(적벽)의 싸움, 夷陵(이릉)의 싸움, 五丈原(오장원)의 싸움이 지목된다. 관도의 싸움은 서기 200년 曹操(조조)와 袁紹(원소)가 중원의 패권을 놓고 벌인 전투였다. 적벽의 싸움은 208년 중국통일을 노린 조조가 孫權(손권) 휘하의 대장 周瑜(주유)에게 패전한 전투였다.

이릉의 싸움(221~222)은 關羽(관우)의 원수를 갚고 형주를 되찾으려 했던 劉備(유비)가 東吳(동오)의 대장 陸遜(육손)에게 참패한 전투다. 오장원의 싸움은 제5차 北伐(북벌)에 나선 諸葛亮(제갈량)이 魏(위)의 대장 司馬懿(사마의)의 지구전에 막힌 끝에 陣中(진중)에서 病死(병사)한 전투다.

이상의 4대 결전은 羅貫中(나관중)이 지은 <三國志演義>(삼국지연의)를 통해 우리나라 독자들에게 널리 읽히고 있지만, 史實(사실)을 과장하거나 왜곡한 부분이 적지 않다. 중국에서는 사실과 허구가 뒤섞인 ‘삼국지의 세계’가 존재하고 있다. 이 글에서는 陳壽(진수)가 저술한 正史(정사) <삼국지>와 裵松之(배송지)의 注(주), 그리고 현장답사를 통해 4대 결전의 實相(실상)을 기술하고자 한다.


서기 208년 12월의 어느 날 야반, 長江(장강) 북안의 烏林(오림: 지금의 후베이성·湖北省 훙후시·洪湖市). 때마침 불어오는 동남풍을 등지고 일단의 군선이 조조의 水營(수영)을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 東吳(동오)의 숙장 黃蓋(황개)가 이끄는 10여 척의 전함이었다.

황개는 이미 조조에게 투항의 密書(밀서)를 보내 놓고 있었다. 뱃머리에는 사전 통보한 대로 ‘先鋒 黃蓋’(선봉 황개)라 쓰인 깃발이 펄럭였다. 선체는 붉은 천막으로 덮여 있었다. 이것은 火攻(화공)을 노린 위장이었다. 천막 밑에는 기름을 잔뜩 부은 장작과 마른 풀이 가득 쌓여 있었다.

황개의 부하들은 船上(선상)에서 횃불을 들고 조조의 수영을 향해 크게 ‘항복’을 외쳤다. 조조와 그의 부하들은 방심했다. 조조의 수영에 800m쯤 접근하자 황개와 그 부하들은 자기가 타고 온 배에 불을 붙여놓고 탈출했다. 불덩이가 된 火船(화선)들은 강한 동남풍을 타고 조조의 수영에 돌입했다.

조조의 대형 樓船(누선)들은 쇠사슬로 서로 묶여 있었다. 화선과 충돌한 조조의 함대는 금세 불바다가 됐다. 불에 타 죽은 병사, 강물에 뛰어들어 익사한 병사가 不知其數(부지기수)였다. 수영의 화재는 바람을 타고 육상 兵營(병영)으로 번졌다.

對岸(대안) 赤壁山(적벽산)에서 조조의 영채가 불타는 모습을 본 동오의 대장 주유는 휘하의 全軍(전군)에 총공격을 명했다. 동오군의 정예는 수륙 양면으로 조조 진영을 향해 돌격했다. 혼란에 빠진 조조의 대군은 제대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궤멸했다. 조조 자신도 친위대의 호위를 받으며 死地(사지)를 탈출해 육로로 江陵(강릉)을 향해 도주했다. 강릉에는 조조의 4촌 동생들인 曹仁(조인)과 夏候淵(하후연)이 진을 치고 있었다. 강릉은 춘추전국시대의 강국 楚(초)의 도읍이었으며, 이후 장강 중류의 通商港(통상항)으로 번영했던 지금의 후베이성 징저우(荊州·형주)시다.

적벽대전은 결전의 현장이 오림이었던 만큼 烏林大戰(오림대전)이라고도 한다. <삼국지연의>(이하 <연의>로 표기)는 이때의 조조 군을 80만명이라고 했지만, 정사 <삼국지> 등의 기록에 따르면 적벽대전에 동원된 조조 군의 총병력은 20여 만명으로 추산된다.


적벽대전의 영웅 주유
적벽대전의 현장. 적벽~오림 간의 장강을 운항하는 카페리.

주유의 사령부는 후베이성 츠비시(赤壁市) 츠비진에 위치해 있었다. 필자는 아침 일찍 후베이성 우한시(武漢市)의 상업 중심지 한커우(漢口)를 출발했다. 한커우의 적벽대전 당시 지명은 夏口(하구)로서, 손권 군과 유비 군이 처음 합류해 연합전선을 형성했던 곳이다.

장강 최대의 지류인 漢水(한수) 위로 걸린 다리를 건너 漢陽(한양)으로 갔다. 한양은 辛亥革命(신해혁명: 1911년) 당시 청나라의 군수공장이 있었던 곳으로 지금도 우한시의 공업 중심지다. 적벽대전 당시 유비 휘하의 張飛(장비)와 趙雲(조운)이 각각 병력 4000명을 데리고 포진했던 곳이다.

한양에서 장강에 걸린 우한장강대교로 건너면 우한의 행정·교육 중심지인 우창(武昌)이다. 강변에는 중국 역대 시인들의 메카였던 황허뤼(黃鶴樓)가 우뚝한데, 적벽대전 당시 이 누각 자리엔 장강의 水路(수로)를 감시하던 망대가 서 있었다고 한다.
적벽대전 때 주유의 화공으로 조조군이 궤멸한 오림.

淸朝(청조) 시기의 우창은 후베이성과 후난성을 통괄 지휘하는 후광(湖廣) 총독의 治所(치소)로서 만주족의 청조를 타도하기 위한 혁명군의 봉기(신해혁명)가 맨 처음 성공해 ‘首義(수의)의 고을’이라 불린다. 오늘날 중국은 우창 봉기일인 10월 10일을 국경일(雙十節·쌍십절)로 삼고 있다. 장강과 한수를 끼고 있는 우창, 한커우, 한양은 흔히 ‘武漢三鎭(무한3진)’으로 불리는데, 우한시로 통합되어 후베이성의 省都(성도)가 됐다.

전세버스를 타고 두 시간을 달려 츠비시에 도착했다. 시가지에는 ‘赤壁’이라는 이름에 걸맞게 붉은 벽돌집이 즐비하다. 츠비시에서 다시 한 시간쯤 더 달려 츠비진에 도착했다. 적벽 유적지는 연이은 3개의 야트막한 야산에 펼쳐져 있다. 조조를 만나 連環計(연환계: 전함들을 서로 묶게 했던 계책)를 권유했다는 龐統(방통)의 은거지 펑추암(鳳雛庵) 등이 들어선 진롼산(金鸞山)과 제갈량이 동남풍을 불렀다는 바이펑타이(拜風臺)가 위치한 난빙산(南幷山)을 넘어가면 츠비산에 이르게 된다.

츠비산 정상에는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동오의 대장 주유(175~210)의 石像(석상)이 우뚝 서 있다. 정상에서 장강 쪽으로 내려가면 깎아지른 절벽에 ‘赤壁’이라는 두 글자가 새겨져 있다.


화합의 인물, 주유
츠비산 정상에 우뚝 선 동오군 대장 주유의 석상.

<연의>에서는 적벽대전을 승리로 이끈 최대 공로자가 諸葛亮(제갈량)이며 주유는 제갈량에게 열등의식을 품은 속 좁은 武將(무장)으로 그려져 있지만, 이는 제갈량을 신격화하기 위한 근거 없는 픽션이다. 주유는 천재가 범하기 쉬운 獨善(독선)과는 거리가 먼 화합의 인물이었다. 그는 도량도 넓고 활달해 동오 가신단의 단결에 노력했다. 인재 발굴에도 애써 孫策(손책: 손권의 형)에게 張紹(장소), 張紘(장굉), 魯肅(노숙) 등 유능한 신하들을 천거했다.

미남이었던 주유는 음악에도 조예가 깊은 멋쟁이로서 ‘周郞’(주랑)이란 애칭으로 불렸다. 악사가 음악을 연주할 때 “주랑이 뒤돌아본다”고 하면 “박자나 음정이 틀렸다”는 뜻이었다. 적벽대전을 음미하면 주유는 심포니를 연주하듯 대군을 지휘했다.

‘조조 군 80만’에 간담이 서늘해진 吳(오)의 중신들은 대부분 항복론에 기울어 있었다. 이때 주유는 결전에 대비해 중국 최대의 담수호인 보양후(陽湖)에서 수군 훈련에 전념하고 있었다. 吳主(오주) 손권은 주유를 동오의 본진 柴桑(시상)으로 호출했다. 시상은 보양후 북안에 위치한 지금의 장시성(江西省) 주장시(九江市)다.

시상의 작전회의에서 항복론이 대세였으나 주유는 혼신의 열변으로 주전론을 전개, 항복론을 물리쳤다. 그는 손권에게 다음과 같이 말했다.

“조조는 關西(관서)의 馬超(마초)와 韓遂(한수)가 걱정거리입니다. 그런 데다 수상전은 中原(중원) 사람들이 잘하지 못합니다. 더욱이 남방의 풍토에 익숙하지 않아 疫病(역병)이 만연할 것입니다. 이러한 점들은 모두 兵家(병가)에서 꺼리는 바입니다만, 조조는 말(馬)을 버리고 배를 타고 있습니다. 장군(손권)께서 조조를 잡는 것은 금명간의 일입니다. 원컨대 我輩(아배)에게 병 3만만 주신다면 조조를 격파해 보이겠습니다.”

손권은 이런 주유의 상황 분석에 동의하면서도 여전히 조조의 대군에 대해 우려의 빛을 감추지 못했다. 주유는 다시 조조의 병력에 대해 이렇게 설명했다.

“조조가 보낸 편지에 ‘수군과 보병 80만’ 운운하는 것만 보고 두려워합니다. 그것이 거짓인지 사실인지 생각해 보지도 않고 항복론을 부르짖고 있습니다. 지금 조조가 이끄는 중원의 병사는 15만, 16만에 지나지 않습니다. 더욱이 그들은 오랜 행군으로 피로에 절어 있습니다. 형주에서 새로 얻은 병력은 많이 잡아도 6만, 7만에 지나지 않고, 또한 그들은 아직 조조에게 심복하지도 않습니다. 병력 수가 많다고 해서 두려울 바 없습니다.”


유비의 ‘비육지탄’

조조가 형주의 유표를 토벌하려고 남진했던 것은 건안 13년(208) 음력 7월이었다. 바로 전해인 207년 조조는 袁紹(원소)의 세력권이었던 冀州(기주)를 평정한 데 이어 遼西(요서)의 烏桓族(오환족)을 정벌하고, 요동태수 公孫康(공손강)을 굴복시켜 그가 비호하던 원소의 아들 袁尙(원상)과 袁熙(원희)의 목을 베어 바치게 했다. 이로써 조조는 기주, 幷州(병주), 幽州(유주) 등 華北(화북)을 지배하에 두었다.

208년 ?城(업성: 현재의 허베이성 가오이·高邑 동쪽)으로 귀환한 조조는 ?水(장수)를 끌어들여 인공 호수 玄武池(현무지)를 축조, 여기서 수군 훈련에 착수했다. 이해 6월에는 승상에 올라 後漢(후한)의 황실까지 지배하는 실권을 장악했다. 조조가 형주를 공격한 목적은 ‘중국의 배꼽’, 즉 지리적 중앙부를 장악하려는 것이었다. 형주는 黃巾亂(황건란) 이후의 군벌 간 패권전쟁 시기에도 평온을 유지해 농업생산량도 풍부했다.

후한 말, 형주는 인구가 전국 17개의 주 가운데 2위인 650만명에 달했으며, 그 영역은 지금의 후베이성과 후난성에다 허난성(河南省) 남부 일부까지 아우르고 있었다.

조조로서는 형주를 장악하면 益州(익주)의 劉璋(유장)뿐만 아니라 東吳(동오)의 손권까지 굴복시킬 수 있었다. 형주는 천하통일의 디딤돌이었다. 조조의 형주 공략은 208년 2월 손권이 형주 소속 江夏(강하) 태수 黃祖(황조)를 토벌한 사건이 계기가 됐다. 손권에게 형주 병합은 오랜 숙원이었으며, 더욱이 황조는 그 부친 孫堅(손견)을 번성(현재의 후베이성 샹판시·襄樊市 판청어우·樊城區) 전투에서 전사시킨 원수다.

손권의 의도를 주목한 조조는 형주 공략을 서둘렀다. 오와의 국경지대인 廣陵(광릉), 歷陽(역양), 盧江(노강) 등지에 병력을 증강 배치하여 손권의 西進(서진)을 견제했다. 이런 위기에도 荊州牧(형주목) 유표는 무능하여 장남(전처의 아들)인 劉琦(유기)를 宿敵(숙적) 동오와 경계지역인 강하의 태수로 내려 보내고, 후처의 아들 劉琮(유종)을 후계자로 삼았다.

이때 유비는 유표의 客將(객장)으로서 형주의 북단 新野(신야: 지금의 허난성 신예시)에 주둔하고 있었다. 그는 7년 전 조조에게 패전해 유표에게 의탁하고 있었던 것이다. 유비는 유표에게 조조가 北征(북정)을 하고 있는 틈을 노려 조조의 본거지 許都(허도: 허난성 許昌)를 공격하라고 진언했지만, 유표의 우유부단함 때문에 절호의 기회를 놓치고 말았다.


성역화된 고융중

유표에게 더부살이를 하던 시절에 유비의 한탄에서 비롯된 ‘?肉之嘆’(비육지탄)은 오늘날 우리 사회에서도 회자되는 四字成語(사자성어)다. 이 말은 어느 날 유표가 형주의 治所(치소) 襄陽城(양양성)에서 베푼 연회에 참석한 유비가 잠시 측간에 갔다가 되돌아와서 눈물을 흘렸는데, 유표가 놀라 그 까닭을 묻자 유비는 “너무 오랫동안 말을 타지 않아서 허벅지에 살이 쪘다”며 무사안일한 생활을 한탄했다는 데서 유래됐다.

유비의 이런 태도 때문에 유비는 형주의 호족으로서 유표의 처남인 蔡瑁(채모) 등의 미움을 받아 생명의 위협을 받게 된다. 그렇다고 이때 유비가 놀고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당시 47세의 유비는 三顧草廬(삼고초려)의 禮(예)를 갖추어 隆中(융중)에서 은거하며 독서하던 27세의 젊은 제갈량을 軍師(군사)로 영입했다. 융중은 양양성 서쪽 8km 지점에 위치해 있다. 이때 제갈량은 유비에게 天下三分之計(천하삼분지계)를 진언했다.

제갈량이 형주의 주인인 유표가 아닌 客將(객장) 유비에게 갔다는 것은 예삿일이 아니었다. 그는 형주의 지식인 그룹 ‘司馬徽(사마휘) 살롱’의 최고 유망주일 뿐만 아니라 그의 장인이 유표의 손위 동서이기 때문이다. 양양의 호족 蔡諷(채풍)은 1남2녀를 두었는데 장녀는 黃承彦(황승언: 후일 제갈량의 장인이 됨)에게 시집을 가고, 차녀는 유표의 후처로 들어갔으며, 아들 채모는 형주의 병권을 잡았다.

유표는 소싯적에 이미 손꼽히는 학자였다. 그런 유표가 널리 儒者(유자)를 구하고 학교를 개설했기 때문에 중원으로부터 형주로 찾아오는 명사가 많았고, 형주는 일대 학술의 중심지로 떠올랐다. 그러나 형주의 명사들은 결단력 없는 유표에게 실망했다. 陳壽(진수)도 유표를 “모략은 좋아하나 결단력이 없고, 재능 있는 사람을 쓰지 않으며, 善言(선언)을 듣지 않았다”고 낮게 평가했다.

형주인들은 새로운 명망가 유비에게 기대를 걸었다. 龐統(방통), 向朗(향랑), 向寵(향총), 蔣琓(장완), 伊籍(이적), 馬良(마량), 馬謖(마속), 陳震(진진) 등 훗날 蜀(촉) 정권의 주력이 되는 형주 인맥은 그때 형성됐다. 그런데도 유표가 유비의 인재 스카우트에 무심했던 것은 그의 무능 때문이라고 할 수밖에 없다.

유표는 208년 들어 조조와 손권의 협격을 받는 위기에 처하게 됐다. 조조가 남하를 개시한 그해 8월, 유비는 형주의 치소 襄陽(양양) 서북쪽 번성으로 후퇴해 방어태세에 돌입했다. 이런 위기 속에서 형주목 유표가 병사하고, 유종이 형주목이 됐다.

양양성과 번성은 훗날 南宋(남송) 말기에 몽고의 쿠빌라이 칸의 공격을 6년간(1268~1274)이나 버틴 철옹성으로 유명하다. 쿠빌라이는 한수를 사이에 둔 양양성과 번성 주위에 土壘(토루)를 둘러싸 외부와 차단했다. 남송은 范文虎(범문호)를 主將(주장)으로 약 10만의 구원부대를 파견했지만, 양양 하류의 鹿門山(녹문산)에서 격파돼 양양성은 고립 상태에 빠졌다.


쟁탈의 요충 강릉
한수를 사이에 둔 양양성과 번성은 콤비를 이뤄 완벽한 망어망을 형성했으나 지금은 도시화에 의해 번성의 흔적은 사라졌다.

양양의 守將(수장) 呂文煥(여문환)은 2년 이상 선전했지만, 군량이 떨어진 데다 몽고군이 투입한 新(신)병기 만자니크(페르시아식 초대형 투석기)의 무차별 공격에 의해 관민의 희생이 늘어나자 성문을 열었다. 양양성을 함락시킨 몽고군은 이후 거의 저항을 받지 않고 동진해 남송의 수도 臨安(임안: 지금의 저장성·浙江省 항저우·杭州)을 점령했다.

지금은 한수 동쪽의 양양과 한수 서쪽의 번성이 통합돼 후베이성 제2의 도시 샹판시(襄樊市)가 됐다. 양양성과 번성 사이를 흐르는 한수는 강폭은 넓으나 현재 수량이 많지는 않다. 양양성의 성벽은 비교적 잘 보존돼 있지만, 양양성과 콤비를 이뤄 완벽한 방어망을 형성했던 번성은 급격한 도시화로 그 흔적도 찾을 수 없었다.

제갈량이 유비에게 스카우트되기 전에 晝耕夜讀(주경야독)을 하며 살았다는 隆中(융중)은 현재 ‘구룽중(古隆中)’이란 거대한 聖地(성지)로 변해 있다. 룽중산(해발 306m) 기슭 12만㎡에 달하는 경내에는 武候祠(무후사), 三顧堂(삼고당), 草廬碑(초려비), 躬耕田(궁경전), 六角井(육각정), 梁父岩(양부암) 등이 보존 또는 정비돼 있다. 아무튼 중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역사인물로는 關羽(관우)와 제갈량이 1, 2등을 다툰다.

조조의 대군이 남하해 오자 유종은 번성을 지키던 유비에게 사전 협의나 통보도 없이 조조에게 降書(항서)를 보냈다. 후방이 무너진 유비는 번성을 버리고 도주하면서 양양성 밖에서 유종에게 면담을 요청했지만 반응이 없었다. 제갈량은 유비에게 양양성을 점거할 것을 진언했다.

그러나 유비는 은인(유표)의 기업을 빼앗을 수 없다고 거부했다. 설령 혼란의 와중에 양양성을 일시 점거할 수 있을지는 모르지만, 성내의 관민을 포섭해 조조의 대군을 방어하기에는 시간이 촉박하다고 판단했을 것이다. 유비는 우선 관우에게 병력 1만과 선박 수백 척을 주어 한수를 따라 하구로 후퇴하도록 했다. 핵심 전력의 보존을 위한 조처였다. 하구에는 유비에게 우호적인 유기(유표의 장남)가 병력 1만을 거느리고 있었다.

유비는 그를 따르는 백성들까지 데리고 江陵(강릉: 현재의 후베이성 징저우시)을 목표로 남하했다. 장강 북안에 위치한 강릉에는 형주의 군수물자가 비축돼 있었다. 양양성에 입성한 조조는 유기를 靑州(청주)자사로 임명하고, 형주의 重臣(중신) 15인에게 작위를 내리는 등 두텁게 대우했다. <연의>에서는 임지로 부임하는 유종이 조조의 밀명을 받은 于禁(우금)의 습격을 받고 살해된 것으로 꾸며져 있지만, 이는 조조의 ‘奸惡(간악)’을 강조하려는 픽션이다. 조조는 이때 형주 수군의 전함 1000척을 확보했다.


유비가 참패한 당양 장판파
고융중 입구의 패루.

이어 조조는 경기병 5000기를 거느리고 유비를 맹추격했다. 조조로서도 강릉의 비축물자가 긴요했다. 조조는 하루 밤낮에 130km를 달려 양양과 강릉 사이에 위치한 當陽(당양)에서 유비 군을 포착했다.

유비 군은 兵家(병가)의 금기인 피란민을 대동하고 후퇴했기 때문에 전력을 유지할 수 없었다. 여자와 아이 등 비전투원과 그들의 가재도구까지 뒤섞여 극심한 혼란을 겪었다. 유비는 강릉을 포기하고 장비에게 20기를 주어 뒤를 끊게 한 뒤 제갈량, 趙雲(조운) 등을 데리고 한수의 나루 漢津(한진: 지금의 중샹시·種祥市) 방면으로 동진했다.

<연의>에서는 이때 장비와 조운의 활약이 눈부시게 묘사돼 있다. 우선, 조운은 단기로 조조의 추격군 사이로 종횡무진 달려 유비의 아들 兒斗(아두: 후일의 後主 劉禪)을 구출하고, 장비는 장판교에 버티고 있다가 대갈일성으로 조조 군의 추격 의지를 꺾어 유비의 도주를 도왔다.

현재 후베이성 당양시(當陽市) 중심가에 위치한 작은 언덕 장판파에는 조운이 아두를 갑옷의 품속에 넣고 적군을 무찌르는 모습의 조각 등이 장식돼 있다. 장비가 萬夫不當之勇(만부부당지용)을 과시한 장판교 자리엔 현재 제2당양교가 놓여 있다.


손권-유비 동맹 체결 주도한 노숙
고융중의 제갈량 청동상.

절체절명의 위기에 몰린 유비에게 기사회생의 활로를 열어준 것은 당양에 나타난 오의 魯肅(노숙)이었다. 노숙은 유표의 사망 소식을 듣고 형주의 정세를 탐지하기 위해 손권에게 조문사절을 자청하고 양양으로 향해 북상하다가 당양에서 유비와 조우했던 것이다. 노숙은 유비에게 향후 대책을 물었다. 유비는 “交州(교주)의 蒼梧(창오: 지금의 광시성 우쉬안·梧縣) 태수 吳巨(오거)에게 의탁할 생각”이라고 답했다. 오의 주전파인 노숙은 유비를 설득했다.

“오거는 凡人(범인)으로서 의지할 만한 인물이 아닙니다. 吳主(오주)는 총명하여 仁者(인자)를 존경하고 勇者(용자)를 거느려 이미 강동 6郡(군)을 영역으로 삼고 있으며, 병력은 精强(정강)하고 양식은 풍부합니다. 유 장군께서 심복의 부하를 오주에게 파견해 동맹을 맺고 함께 大事(대사)를 도모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유비로서는 내심 솔깃한 얘기였다. 유비는 노숙의 요청을 받아들여 제갈량을 손권이 위치해 있던 柴桑(시상)으로 파견했다. 그때 노숙의 동맹론은 아직 손권의 허락을 받지 않은 獨斷專行(독단전행)이었다.

조조의 開戰(개전)외교도 발 빨랐다. 조조는 익주목 劉璋(유장)을 회유하기 위해 그를 振威將軍(진위장군)으로 임명했다. 유장도 조조에게 약간의 병력과 식량을 지원했다. 시상에 들어간 제갈량은 손권을 알현했다. 이때 제갈량은 유비가 패전의 궁지로 몰리고 있는데도 조금도 위축되지 않고 對等(대등)외교를 구사했다. 제갈량은 탁월한 외교관이었다.

“지금 장군(손권)은 江東(강동)의 땅을 차지하고 있고, 저의 主君(주군: 유비)은 한수의 남쪽에서 조조와 천하를 다투고 있습니다. 조조는 이미 중원을 평정하고, 다시 형주를 복종시켜 그 세력은 머물 바를 모릅니다. 이 때문에 저의 주군은 逼塞(핍색)을 면치 못하고 있습니다. 손 장군께서는 스스로의 역량을 自問(자문)해 보십시오. 吳越(오월)의 군을 가지고 조조에게 대적할 수 있다면 즉각 그와의 관계를 끊으십시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조조에게 신하의 예를 취하는 것이 좋겠지요. 장군은 지금 밖으로는 복종의 자세를 취하면서도 내심 주저하고 있습니다. 사태는 豫斷(예단)을 不許(불허)합니다. 하루라도 빨리 결단을 내리지 않으면 반드시 재앙이 도래할 것입니다.”
아두를 품에 안고 조조 군의 포위를 돌파하는 조운의 모습을 형상화한 당양 장판파의 조각.

손권의 자존심을 자극하는 화술이었다. 이때 손권의 나이 27세, 제갈량의 나이 28세였다. 손권이 되받았다.

“그렇다면 유비는 왜 조조에게 굴복하지 않소.”

이에 대한 제갈량의 답변.

“옛날 齊(제)의 田橫(전횡)은 일개 壯士(장사)에 불과했지만, 漢高祖(한고조)가 불러도 가지 않고 義(의)를 지켜 욕됨을 거부했습니다. 저의 주군은 漢(한) 황실의 후예로서 설령 뜻이 이루어지지 않더라도 그것은 天命(천명)이니, 어찌 조조 따위에게 굴복할 수 있겠습니까.”

손권이 발끈했다.

“나에겐 오월의 땅과 10만의 병력이 있소. 어찌 조조 따위의 節制(절제)를 받을 것인가!”

이에 제갈량은 당면의 정세를 다음과 같이 설명했다.

1. 유비 군은 비록 初戰(초전)에서 패했지만, 유기의 병력을 합해 2만의 정예를 보유하고 있다.

2. 조조의 대군은 장기 이동으로 피폐해 있다. 강한 활로 발사한 화살도 최후에는 얇은 비단도 뚫을 수 없는 것처럼 조조 군은 이미 攻勢終末点(공세종말점)에 이르러 더 이상의 전투에 견디기 어렵다.

3. 거기에 더하여 북쪽 군사는 水戰(수전)에 미숙하다.

4. 형주의 士民(사민)은 조조의 군사력을 겁내 복종하는 체하지만, 심복하고 있지는 않다.

위와 같은 조조 군의 상황을 분석한 제갈량은 최후의 결론을 도출했다.

“손 장군께서 휘하의 용장에게 수만의 병력을 내려 유비 군과 힘을 합친다면 반드시 조조를 깰 수 있을 것입니다. 이럴 경우 荊吳(형오: 유비+손권)의 힘이 강대해져 三者鼎立(삼자정립)을 이룰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의 중신회의에서는 張紹(장소), 顧雍(고옹) 등의 항복론이 여전이 우세했다. 그 논거는 조조가 형주의 수군을 획득했기 때문에 수륙 양면의 공격이 가능해져 동오만이 장강의 험한 지형을 독점할 수 없는 데다 심각한 병력 차를 극복하기 어렵다는 것이었다.


손권의 전략

회의에서 소수의견으로 몰린 노숙은 측간에 가는 손권을 가만히 뒤따라가 그의 친구 주유를 불러올릴 것을 건의했다. 당시 주유는 파양호에서 수군 조련에 전념하고 있었다. 손권의 본진으로 당도한 주유는, 조조는 한의 국권을 농단하는 도적이고 조조 군은 수전에 미숙하다는 약점을 갈파했다. 주유의 주전론으로 분위기는 급전했다. 손권은 보검을 내려쳐 그의 앞에 놓인 탁자를 두 동강 내며 다음과 같이 호령했다.

“앞으로 諸將(제장) 중에 항복을 거론하는 자는 반드시 이 탁자와 같을 것이다.”

이로써 손권-유비의 동맹이 성립됐다. 즉각 동오군의 대오가 결정됐다. 주유가 좌도독(총사령관), 程普(정보)가 우도독(부사령관), 노숙이 贊軍校尉(찬군교위: 참모장)에 임명돼 3만의 수군을 이끌고 장강을 西上(서상)해 하구에서 조조 군을 맞아 싸우게 하고, 손권 자신은 후방의 諸軍(제군)을 통솔하며 일선의 변화에 策應(책응)하기로 했다.

손권은 병력 10만을 보유하고 있다고 호언했으면서도 왜 주유에게 병력 3만명만을 주었을까. 여기엔 상당한 이유가 있었다. 손권은 시상을 본진으로 삼고 있었지만, 수도 京口(경구: 난징 동쪽 70km에 위치한 현재의 전장시·鎭江市)를 방위하기 위해 광릉(수장 고옹), 역양(수장 장소), 노강(수장 제갈근) 등지에도 수비군을 배치해야 했기 때문이다.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당시 조조의 병력 배치는 다음과 같았다.

1) 조조는 주력 수륙군을 친솔, 강릉을 출발하여 장강을 따라 陸口(육구: 지금의 우창 남방 30km)에서 상륙, 손권의 본진인 시상으로 진격한다.

2) 일부 수륙군은 한수를 따라 하구로 전진한다.

3) 후군도독 曹仁(조인)과 군량독운사 夏候淵(하후연)은 강릉을 鎭守(진수)한다.

4) 勵軍(여군)도독 曹洪(조홍)은 양양을 진수한다.

5) 한의 시중상서령 荀彧(순욱)과 한의 前(전)장군 하후돈은 허도를 留守(유수)한다.

6) 威虜(위로)장군 臧覇(장패)는 광릉 방면, 平東(평동)장군 陳登(진등)은 東城(동성) 방면, 破虜(파로)장군 李典(이전)은 合肥(합비) 방면, 征南(정남)장군 李通(이통)은 信陽(신양) 방면에 배치한다.

이처럼 적벽의 싸움은 장강의 중류-하류 유역에 걸친 총력전이었다. 강릉을 병참본부로 삼은 조조의 주력군은 강릉에서 장강을 타고 東進(동진)했고, 별동대는 한수를 타고 南進(남진)했다.

본대는 적벽 동쪽의 육구에 상륙하여 포기~羊頭山(양두산: 지금의 후베이성 퉁산쉬안·通山縣)을 통과해 동오군의 본영 시상을 점령하려 했다. 별동대는 하구를 점령한 후 시상 공략에 가세하기로 돼 있었다.


주유, 전략요충지 육구 선점해 기선 제압

육구는 수륙의 교통로를 제어할 수 있는 전략요충지였다. 육구를 점령하면 수륙병진으로 시상을 공격할 계획이었다. 정예 육군을 보유하고 있는 조조 군에게 유리한 상황이 전개될 수밖에 없었다. 주유는 일찍이 손책을 따라 유표 휘하의 강하태수 황조와 싸운 경험이 있었던 만큼 육구의 중요성을 잘 알고 있었다. 따라서 육구에 누가 먼저 도착할 것인가가 전투의 초점이 됐다.

지금은 논밭으로 변해 있지만 당시 장강 중류 일대는 底(저)습지대로서 육로의 진군은 쉽지 않았다. 장강의 강물이 넘쳐흘러 곳곳에 크고 작은 호수와 늪을 형성하고, 그 주위에는 갈대가 무성했다. 고지에도 수목이 울창해 육로를 통한 병력과 물자 수송에 매우 제한적이었다.

이런 관계로 조조의 수군은 강릉에서 장강을 타고 육구를 향해 내려갔다. 그러나 짙은 안개 속에 진군하던 조조의 수군은 항로를 잘못 잡아 洞庭湖(동정호)에 진입해 이틀간 미로를 헤매는 결정적 실책을 범하고 말았다. 현재 동정호 북안에 있는 岳陽樓(악양루: 후난성 웨양시·岳陽市 소재)에 올라가 동정호를 바라보면 장강의 흐름과 호수를 구분하기 어려울 만큼 착잡한 지형이다. 동정호 북쪽은 후베이성, 남쪽은 후난성이다. 동정호는 파양호에 이어 중국 제2의 담수호다.

조조가 동정호에서 시간을 허비하는 바람에 주유는 하구에서 장강을 거슬러 올라와 육구를 먼저 점령했다. 이로써 初動(초동) 단계에서 주유는 기선을 제압했다.

조조의 수군은 적벽의 江上(강상)에 이르러 주유의 함대와 조우, 소규모 접전을 벌였는데, 전세가 이롭지 못하자 대안의 오림으로 물러나 집결했다. 조조는 겨울을 넘기고 봄 공세를 위한 전열을 가다듬고 있었다. 주유는 조조의 수군에 도발했지만, 조조는 응전하지 않았다. 전선의 교착상태에서 주유는 조조의 수영을 가만히 정찰했다. 조조의 수군은 누선과 누선을 쇠사슬로 묶은 다음, 뱃전을 대나무 다리로 연결해 놓고 操船(조선)과 사격 훈련에 열중하고 있었다.
적벽에 재현한 주유의 영채.

<연의>에서는 조조가 龐統(방통: 후일 유비의 군사가 됨)의 연환계에 속아 누선과 누선 사이를 엮어 놓았다고 썼지만, 이와 같은 전술은 큰 강을 사이에 두고 대치하는 당시 수군의 상용수법이었다. 따라서 방통이 조조를 만나 연환계를 가르쳐 주었다는 것은 픽션이다.

수상전에서 공격 시 배다리(舟橋)를 이용해 대안의 적진으로 병사를 상륙시키고, 횡대로 이어진 누선들이 적의 수영에 육박한다. 이때 횡대로 연결된 누선의 무리는 움직이는 성을 방불케 한다. 당시 대형 누선 한 척은 최고 1000명을 수송할 수 있었다. 장거리 이동 간에는 선수와 선미를 쇠사슬로 엮어 종대를 형성했는데, 요즘도 장강과 대운하에서는 선박 20척 정도를 묶어 종대로 운항하는 모습을 자주 목격할 수 있다.

조조는 겨울 작전을 회피하고 따뜻한 봄을 기다리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동오의 宿將(숙장) 黃蓋(황개)가 주유에게 진언했다.


史實과 픽션
제갈량이 기묘한 계책으로 조조군으로부터 화살 10만개를 얻는 것을 묘사한 明代 〈삼국지연의〉의 삽화. 제갈량과 노숙이 선실에서 술을 마시고 있다.

“우리 군은 병력이 적어 지구전에는 견디기 어렵습니다. 적의 수군을 관찰하건대 선수와 선미가 쇠사슬로 엮여 있어 火攻(화공)하면 반드시 조조를 패주시킬 수 있습니다.”

주유는 황개의 계책을 실행에 옮기기로 결심했다. 황개는 적의 水寨(수채)에 접근하기 위한 사전 공작으로 조조에게 투항하겠다는 밀서를 보냈다. 물론 거짓 항복이었다.

“저는 손씨 3代(대)에 걸쳐 은혜를 입었지만, 지금의 정세에서는 오가 승상(조조)의 대적 상대가 되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유, 노숙 등 어리석은 무리가 귀순을 거부하고 있습니다. 시기를 보아 제가 선봉으로 자원하여, 승상에게 귀순하고자 합니다.”

조조는 밀사가 전한 이 편지를 보고 황개에게 작위와 은상을 내리겠다고 약속했다.

<연의>에서는 주유와 황개의 불화를 가장하기 위해 일생일대 연극을 연출한다. 작전회의 석상에서 황개가 주유에게 “이번 달 안에 적을 타파하지 못한다면 일찌감치 항복하는 것이 낫다”고 대들었다. 격노한 주유는 황개에게 곤장 50대를 쳐서 그의 살이 찢어지고 뼈가 드러났다. 황개는 혼절했다. 이것이 이른바 苦肉之計(고육지계)이다. 이런 정황을 오군의 진중에 있던 조조의 스파이 蔡和(채화)와 蔡仲(채중)이 조조에게 통보했다. 황개가 조조에게 보낸 항복 밀서에 대한 신빙성을 높이기 위한 속임수였다.

그러나 <연의>에 등장하는 苦肉之計(고육지계)는 연환계처럼 픽션이다. 문제는 화공을 성공시킬 수 있는 동남풍이었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이 칠성단을 쌓고 그 위에 올라가 奇門遁甲術(기문둔갑설)로 동남풍을 부른 것으로 돼 있지만 이것 역시 <연의>의 픽션이다.

<연의>는 적벽대전 승리의 공을 제갈량에게 돌리기 위해 이 밖에도 적지 않은 픽션을 구사했다. 그 대표적 사례가 이른바 ‘十萬借箭’(십만차전: 화살 10만개를 빌림)이다. 그 스토리는 대충 다음과 같다.

주유의 군중에는 화살이 부족했다. 주유는 공명을 불러 닷새 안에 화살 10만개를 조달할 수 있겠느냐고 물었다. 이에 제갈량은 사흘 안에 화살 10만개를 틀림없이 조달하겠다고 장담했다. 주유는 군중에서 거짓말이 용납될 수 없다며 제갈량에게 목숨을 담보로 하는 軍令狀(군령장)을 쓰게 했다.

그 후 사흘째 되던 야밤에 장강은 짙은 안개에 휩싸였다. 이때 제갈량은 노숙과 함께 동오의 군선 10여 척을 나눠 타고 나가 조조의 수채에 바짝 접근했다. 동오의 전선 10여 척은 횡대로 늘어서 북을 울리며 돌격의 몸짓을 보였다. 조조 군은 기상 상태 때문에 감히 迎擊(영격)하지 못하고 빗발처럼 화살만을 날렸다. 화살은 오군의 선체를 덮어 놓은 짚단과 멍석 위에 무수하게 꽂혔다. 이런 기만전술로 제갈량은 화살 10여 만개를 얻은 다음 유유히 뱃머리를 돌렸다.

노숙이 “사흘 전에 어찌 짙은 안개가 낄지 알았느냐”고 묻자 “장수 된 자가 어찌 이 정도 천문지리를 모르겠느냐”고 응수했다. 그러나 正史(정사)에 따르면 ‘십만차전’과 비슷한 작전은 훗날(212년) 濡須口(유수구)의 싸움에서 손권이 조조에게 구사한 수법이다.

필자는 이번 답사에서 적벽 나루에서 차량과 승객을 싣는 페리선을 타고 대안의 오림으로 건너갔다. 입동 후 15일이 지난 한낮이었지만, 강폭이 넓은 데다 극심한 일교차로 형성된 안개가 자욱해 視界(시계)가 불량했다. 적벽→오림 간의 항해시간은 30분이었다. 오림→적벽 간의 항해시간은 그 절반인 15분이 걸린다고 한다. 왜냐하면 오림이 적벽보다 약간 상류에 위치하고 있기 때문이다.

<연의>에서는 제갈량을 동남풍을 부르는 道術師(도술사)처럼 표현하고 있지만, 이것도 근거 없는 픽션이다. 겨울철에는 통상 북서풍이 불지만, 장강 중류에는 계절풍인 동남풍이 부는 날도 드물지 않다. 필자의 답사 때도 한낮의 장강 일대엔 점퍼를 벗어야 할 만큼 기온이 올라갔는데, 때마침 동남풍이 불고 있었다.

이런 기상 변화는 장강에서의 작전 경험이 풍부한 주유가 그 누구보다 잘 알고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주유는 동남풍이 부는 날을 대비해 출격을 위한 준비를 완료했던 것이다.


관우와 조조의 관계
적벽~오림 간을 운항하는 카페리에서 바라본 장강.

결전의 날이 도래했다. 이날 아침 강에 안개가 자욱하게 끼었고, 오후 들어 차츰 쾌청해지더니 무더울 정도가 됐다. 그 때문에 밤이 되면 평소와 달리 남쪽에서 북쪽으로 바람이 세차게 불었다. 이런 바람이라면 渡江(도강)이 한결 쉬워진다. 주유는 이런 기상변화를 이용해 조조의 수영에 화공을 가했던 것이다.

그렇다면 당대 최고의 병법가로서 <손자병법>의 주석서까지 저술한 조조가 왜 이렇게 어이없이 화공에 당하고 만 것일까. 장강 중류에서는 겨울철에도 간혹 동남풍이 분다는 특이한 기상정보를 파악하지 못했기 때문일 것이다. 즉, 누선을 묶어 놓더라도 화공을 받을 염려가 없다고 판단했던 것이다..

조조의 수군은 일격에 궤멸했다. 간신히 육지로 대피한 조조는 호위부대를 대동하고 후방기지 강릉으로 도주했다. 당시 오림~강릉 간에는 호수와 늪지대가 많았다. <연의>에 의하면 조조는 도주로 주변에서 대나무와 갈대 등을 잘라 통로를 만들어 갔지만, 굶주림과 피로에 지쳐 쓰러지는 병사가 속출했다.

정사 <삼국지>에는 언급이 없지만, 이때 육로로 조조 군을 추격한 것은 助攻(조공)을 담당했던 유비 군이었던 것 같다. 왜냐하면 이때 장비와 조운이 각각 병력 4000명을 데리고 조조의 도주로와 가장 가까이(한양 동쪽)에 배치돼 있었기 때문이다. <연의>에는 조조가 조운과 장비로부터 잇달아 매복공격을 받고 기진맥진한 상황에서 또다시 강릉 서쪽 근교에 위치한 華容道(화용도)에서 관우의 공격을 받아 목숨을 구걸하는 상황이 묘사돼 있다.

일찍이 관우는 조조에게 항복한 바 있는데, 이때 조조는 관우를 후대했다. 그런데도 유비의 소식을 들은 관우는 五關六將(5관6장)을 베고 舊主(구주) 유비를 찾아갔지만, 조조는 관우의 의리를 칭찬하면서 추격하지 않았다. 이렇게 관우가 조조에게 인간적 빚을 진 것은 사실이다.
春秋左氏傳을 읽고 있는 관우의 석상. 의창市 호정城 소장.

그러나 정사 <삼국지>에는 화용도에서 관우가 조조를 조우했다는 내용이 없다. 따라서 관우가 조조를 그냥 놓아 주었다는 <연의>의 기술은 픽션이다. 지금 화용도 주변에는 복병을 배치할 골짜기도 없고, 목화밭 등이 넓게 분포돼 있는 평야다.

정사에서는 오림에서 도주한 조조가 화용도를 거쳐 나흘 만에 강릉에 입성한 것으로 돼 있다. 조조의 퇴각로는 그가 오림에 진출했을 때 그의 아들 曹丕(조비)가 미리 도로보수공사를 일부 해놓은 상태여서 <연의>의 표현처럼 그렇게 험하지는 않았다.

적벽대전의 패전은 조조에게 상당한 인적·물적 피해를 준 것은 사실이지만, 결정적인 데미지는 아니었다. 왜냐하면 궤멸당한 것은 형주 출신 수군이었고, 조조의 육군에는 큰 피해가 없었다. 조조는 여전히 靑州兵(청주병), 烏桓突騎(오환돌기) 등 최강의 군단을 보유하고 있었다. 어떻든 손권·유비로서는 추격전의 실패가 뼈아픈 일이었다.

필자는 오림~화용도~강릉에 이르는 조조의 도주로를 답사했다. 도주로 주변 곳곳에는 아직도 대나무와 갈대 등이 밀생하고 있었다. 그러나 병력을 매복시킬 만한 산골짜기 등의 지형은 없고, 대부분 논밭과 저수지가 들어선 광활한 평야지대였다.

한편 주유는 조인과 하후연이 진수하던 보급기지 강릉을 공격하면서 동시에 부장 甘寧(감녕)을 파견하여 상류 100여km 지점에 위치한 전략요충지 夷陵(이릉)을 함락시켰다. 이릉은 현재 후베이성 이창시(宜昌市)의 1개 區(구)가 돼 있다. 이릉이 떨어지자 조인은 급히 대군을 보내 감녕의 부대를 포위했지만, 감녕은 오의 원군이 도착할 때까지 성을 지켜냈다. 이릉은 후일 유비가 동오의 대장 陸遜(육손)에게 참패한 현장이기도 하다.

이릉으로부터 50km 정도 서쪽으로 올라가면 서릉협(西陵峽)에 이르게 된다. 서릉협에는 현재 중국이 자랑하는 싼샤(三峽)댐과 1만t급 선박도 통행이 가능한 5단계 閘門(갑문)이 건설돼 있다. 서릉협은 그 상류의 巫峽(무협), 瞿塘峽(구당협)과 함께 싼샤라 불린다. 싼샤는 후베이성과 쓰촨성의 경계다.

이제 강릉성의 조조군은 서쪽 퇴로를 봉쇄당하고 오직 북쪽 퇴로만 유지했다. 고립된 조인은 북상하여 번성을 수비했다. 주유는 강릉을 점령하고 남군태수를 자칭했다. 유비는 강릉 대안의 油口(유구)에 사령부를 두고 ‘公安(공안)’이라 개칭했다. 당시의 강릉과 공안은 현재의 징저우시 산하의 강룽쉬안(江陵縣)과 궁안쉬안(公安縣)으로 돼 있다. 현재의 징조우구청(荊州古城)은 삼국시대의 성을 토대로 明代(명대)에 축성된 것이다. 그러니까 형주의 治所(치소)는 적벽대전 이전에는 후베이성 북부의 샹냥(襄陽), 적벽대전 이후에는 지금의 징조우시에 위치했다.

적벽의 싸움은 손권-유비 연합군의 승리로 종결됐다. 그러나 이것은 새로운 시작이었다. 유비는 주유가 번성의 조인과 대치하는 사이에 유표의 아들 유기를 형주목으로 옹립, 공안에 주둔하며 현재 후난성의 우룽쥔(武陵郡), 창사쥔(長沙郡), 닝룽쥔(寧陵郡), 구이량쥔(桂陽郡) 등 4개 군을 점령하여 판도를 넓혔다. 적벽대전의 최대 수혜자는 근거지 없이 유랑해 오던 유비라고 할 수 있다.


적벽대전 최고 수혜자는 유비
조조의 도주로였던 화용도 표석.

새로 점령한 호남 4개 군 가운데 무릉군을 제외한 3개 군의 행정에 제갈량이 능력을 발휘했다. 제갈량은 軍師中郞將(군사중랑장)에 임명돼 그 신분으로서 호남 3개 군의 賦稅(부세)를 담당했던 것이다. 제갈량은 私呑(사탄: 부정착복)을 엄중히 단속하는 한편 減稅(감세) 정책을 시행해 백성들의 지지를 받았다.

<연의>에는 적벽대전 당시의 제갈량이 연장자이며 무훈이 혁혁했던 관우와 장비 등을 수하처럼 부리고 있지만, 사실과는 다르다. 제갈량의 계급인 중랑장은 지금의 中將(중장)에 상당한다. 그의 상위계급인 장군은 현재의 대장이다. 漢制(한제)에 의하면 같은 장군이라도 大將軍(대장군), 車騎將軍(거기장군), 驃騎將軍(표기장군), 衛將軍(위장군)은 재상급인 三公(삼공)과 동격이다. 그리고 전, 후, 좌, 우장군은 각료급인 九卿(구경: 장관급)에 해당된다. 이밖에 雜號將軍(잡호장군)이 있는데, 임시로 명명되는 非(비)상설 官(관)이다. 예컨대 조조 진영의 조인은 정남장군, 樂進(악진)이 折衝將軍(절충장군)이었다. 잡호장군은 구경보다 약간 격이 낮다.

구경급은 월봉 180石(석)인데, 실제 연봉은 2000석 이상이다. 공명의 계급 중랑장은 월봉이 100석, 연봉 1200석 정도다. 공명이 중랑장에 임명됐을 때 관우는 2000석의 양양태수, 장비는 宜都(의도)태수, 조운은 계양태수로 임명됐다. 다만 이때 제갈량은 28세였던 만큼 이례적인 발탁이었다고 할 수 있다.
형주성 위에서 바라본 형주시가.

주유는 손권에게 유비를 제거할 것을 건의했지만, 손권은 조조의 위협이 상존하는 동안은 손-유 동맹이 최상의 선택이라는 판단에서 주유의 건의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적벽대전 이후 방어정면이 크게 확대됐는데, 병력은 부족하고 소수민족 山越(산월)의 반란에 직면한 손권은 그의 여동생을 유비와 결혼시켜 손-유 동맹을 심화시키려고 했다.

적벽대전 다음 해인 209년, 손권은 그의 여동생을 공안의 유비에게 시집 보냈다. 그때 유비는 甘(감)부인과 사별한 마흔아홉의 홀아비였고, 손권의 여동생은 20세 안팎이었다. 문자 그대로 정략결혼이었다. 정사 <삼국지>에 따르면 손부인은 재원이기는 했지만, 몸집이 크고 氣性(기성)도 매우 강인했다. 그녀는 시집올 때 무장한 시녀 100명을 데리고 왔는데, 시녀들은 손부인의 신방에 창과 칼을 들고 경호해 유비는 항상 암살 위협을 느꼈다.

결혼 다음해인 210년 유비는 손부인과 함께 손권의 도성 京口(경구: 지금의 장쑤성·江蘇省 전장시·鎭江市)로 新行(신행)을 갔다. 이때 주유는 손권에게 미인계를 건의했다. 즉, 가난한 집안 출신인 유비에게 호사스런 저택과 많은 미인을 제공해 경구에 오래 붙들어 놓으면 자연히 관우, 장비와의 관계도 소원해져 도모하기 수월해진다는 것이 주유의 복안이었다. 그러나 손권은 처남이 된 유비에게 미인계를 구사하지 않았다.


36세에 요절한 주유
삼국시대 孫權의 수도였던 南京의 石頭城.

경구 체류 중 유비는 손권에게 “도읍지로서는 경구보다 ?陵(말릉: 현재의 난징·南京)이 좋다”며 천도를 권했다. 유비는 장강을 따라 진강에 왔던 만큼 중도에서 남경의 탁월한 지형을 살필 수 있었던 것 같다. 진강은 남경 동쪽 70km에 위치해 있다.

유비의 권유뿐만 아니라 동오의 중신 張紘(장굉)도 이미 손권에게 말릉에 본거지를 건설하라고 진언한 바 있었다. 손권은 212년 이곳에 石頭城(석두성)을 쌓고, 본거지를 옮긴 후 말릉이라는 이름을 建業(건업)으로 고쳤다. 業(업)을 세운다는 뜻인 만큼 상당히 야심적인 명명이었다. 수년 전 필자는 석두성을 답사했는데, 사방 수미터짜리 바윗돌이 성벽에 박혀 있는 웅장한 규모였다.

이 시기에 주유는 새로운 전략을 구상하고 있었다. 그것은 형주를 발판으로 익주(蜀)를 점령해 漢中(한중)의 張魯(장로)를 공격하고, 西凉(서량)의 馬超(마초)와 동맹해 조조와 전면 대결한다는 그랜드 디자인이었다. 제갈량의 ‘천하삼분지계’에 필적할 만한 장쾌한 구도였다.

그러나 210년, 주유는 손권으로부터 익주 토벌 허가를 받고 강릉으로 귀임하던 중 동정호 북안의 巴口(파구: 후난성 岳陽市)에서 병을 얻어 36세의 젊은 나이로 요절했다. 임종의 자리에서 주유는 노숙을 후임으로 천거했다. 주유의 죽음을 들은 손권은 상복을 입고 哀哭(애곡)하면서 蕪湖(무호)까지 나가 주유의 관을 맞이했다.

주유의 후임 노숙은 주유와는 달리 유비에 대해 우호적이었다. 노숙은 그의 주둔지를 육구로 옮겨 유비가 강릉을 차지하게 됐다. 유비는 강릉성을 보완해 형주성으로 명명했다. 후일 유비가 蜀(촉: 지금의 쓰촨성)을 얻은 후 관우가 이곳을 맡아 진수하게 된다.

주유의 죽음으로 孫吳(손오) 정권에서는 적극적인 대외 팽창정책을 삼갔다. 이에 따라 제갈량의 천하삼분의 계책이 비로소 실현 가능한 것으로 다가오게 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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